글 - 칼럼/단상2015. 3. 8. 05:47

 


백규서옥에서 

 

 

 

 

한국의 친구들에게

 

 

                                                                                              게리 영거

 

 

누구나 한국에 와 보고 갖게 되는 첫 인상들 가운데 하나는 서두른다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거나,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거나, 음식을 먹는 등 무엇을 하든 한국인은 항상 급하다. 한국인들은 항상 서둔다. 그러나 밖에서 친구들과 만날 땐 서두르지 않는다. 예컨대, 한국인 친구들과 저녁을 먹을 때 어떤 이는 먹고 이야기하느라 두 시간까지도 소비하지만, 반면에 점심시간으로 20분을 길다고 여긴다. 버스들은 한국인의 빨리빨리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사례들 가운데 하나다. 버스 운전사가 지그재그로 차를 몰아대고, 승객이 교통카드를 스캔하자마자 차를 출발시킬 땐 무섭다. 그리고 때로 모퉁이들을 휭하고 돌 때, 그들은 흡사 버스를 충돌시키려는 것 같다. 항상 서두르는 행동양식은 외국인들이 급히 서두는 한국인 누구에게서나 목격하는 첫 모습이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약간 느긋해지는 한국인들을 목격하기 시작한다.

 

그 다음의 역설은 외국인들의 눈에 뚜렷이 보인다(특히 서양 사람들에게). 한국인들은 친절하기도 하고, 접촉을 꺼리기도 한다. 어떤 이는 내 말을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에게 길을 가르쳐 줄 때, 헛갈리는 외국인 여행자들을 도와 줄 때 매우 친절하다. 그리고 그들이 음식을 주문할 때도 참을성이 있다. 그러나 이처럼 특수한 경우들 외에 한국인을 친구로 사귀는 일은 약간 어렵다. 백인으로서 나는 한국인들이 침범하려 하지 않는, 나를 두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과 함께 여행을 한다.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내 좌석엔 항상 나 혼자. 장을 보고, 관광을 하고, 혹은 캠퍼스에서 공부를 할 때, 한국인들은 우리들(외국인)로부터 의식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이것이 복잡한 군중 속에서 편히 돌아다닐 수 있게 하긴 하지만, 그것은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상호작용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 약간씩 짜증나는 일이기도 한데, 예컨대 엘리베이터를 탈 때 한국인들은 나를 보곤 그들 스스로 외국인인 나와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뒤로 물러선다. 최악의 경우 식당이나 상점에 들어갈 때 외국인들을 상대하게 되는 것을 피하려 달리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한국인들을 보게 된다. 이것이 아마 한국 여행에서 가장 좌절감을 주는 일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외국인들은 한국인으로부터 배우고, 한국문화를 경험하고, 한국 역사를 공부하고,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관찰할 목적으로 한국에 온다.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을 가까이 오게 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들을 하기는 어렵다.

 

그 다음은 절이나 역사 유적 근처에서 가장 잘 목격되는 일들이다. 한국은 갑자기 근대화 되고, 서구화 되고, 기술 대국이 되었지만,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한국이 겪어온 사건과 역사들을 떠올리게 하는, ‘고풍스런 나라이기도 하다. 예컨대, 한국을 여행할 때, 외국인들은 커피숍, 서양의 음악, 의상, 음식, 그리고 서양문화의 변종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한국인들은 당당하게 그들의 기술적 성취를 자부하고, 그들의 큰 기업들을 외국 관광객들에게 기꺼이 자랑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나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을 위해 박물관들을 짓기도 한다우리는 한국의 어느 곳에서나 많은 박물관들, 역사적 현장들, 고대의 건축물들, 그리고 문화유적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대의 유적들을 둘러보는 순간, 거대한 건물들, 서구식 레스토랑들, 유럽풍의 커피점들이 그 지역을 둘러싸고 있음을 깨닫곤 놀라게 된다. 관광산업으로부터 얼마간의 득을 볼 수는 있겠지만, 고층빌딩과 스타벅스 커피점들이 이런 아름다운 유적들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은 실망스런 일이다. 이런 것들이 한국 경험의 한 부분이고, 그 독특함이다일상생활 속에 역사와 모더니티가 융합되어 있고최신의 고층빌딩으로부터 걸어 나와 고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경우는 한국이 유일한 듯 하다. 

 

현대와 고대의 융합은 오늘날의 한국을 정의하는 측면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한국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은 박물관들과 고궁들에 접근할 때다. 거의 모든 박물관들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고, 고궁들의 경우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날들이 있다. 이것은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과 분명히 대비되는 점이다. 그 지역의 나라들에서 당신은 그 나라들의 과거를 배우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한다. 과거를 이해하고 대중들이 역사를 친숙하게 만들기 위해, 서구의 국가들은 한국의 방식을 제대로 모방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주의하지 않는다면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과거에 대한 지식이고, 과거의 보존이야말로 어떻게 현재에 대처해야할지를 알려주기에 중요하다. 그렇긴 하지만, 한국은 외국인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서양 국가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거품을 부수는 일은 한국인들이 국제적인 기업과 세계 공동체를 통합하기 위해 반드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 가운데 하나다. 외국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그들로 하여금 부담 없이 한국을 환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외국인에게 다가가고 버스에서 그들 곁에 앉으며 날씨에 관해 묻는 것만으로도 한국에 대한 외국인의 인지도를 높이는 일이 될 것이다. 내가 만난 많은 연구자들과 외국 학생들은 자신들 가운데 소수만이 한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만날 수 있었을 만큼 한국이 은자의 왕국[Hermit Kingdom]’이라는 점을 계속 강조했다. 이제 수년 동안 한국에 있어온 그들은 비즈니스 중심으로서의 한국에 대한 최신의 관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학생들마저 한국 사회의 거품 안에서 방황한다. 한국어와 영어로 기꺼이 묻고 대답하는 것은 한국의 이미지를 엄청나게 확장시킬 것이고, 그것은 한국의 낡은 이미지를 깨부수고 외국인들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주게 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몇몇 한국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리고 그들과 계속 접촉하면서, 다음 번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 만남이 다시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나는 조규익 교수님과 이완범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한국에 올 수 없었을 것이고 내 개인 연구에서 이만큼의 진전을 이룰 수도 없었을 것이다.

 

 

 

My Impression of Korea

 

Gary Younger

 

One of the first things that one notices in Korea is the speediness of everything. No matter what you are doing Korean are always in a hurry, whether drinking coffee, traveling on the bus, or eating food. Koreans are always in a hurry. However, Koreans also take their time when they are out with friends. For example, when having dinner with Korean friends one might spend up to two hours eating and talking, while Koreans consider a long lunch twenty minutes. The busses are one of the most dramatic demonstrations of the Korean balli balli. For the first month the buses are terrifying as the driver weaves in and out of traffic, takes off as soon as you scan your card, and at times seems as if they are going to crash the bus as they zoom around corners. This style of hurry up all the time is the first thing that foreigners notice about Korea everyone is in a hurry and as time passes you start to notice the people and groups that slow down a little when they are with friends.

 

The next paradox is apparent to foreigners(westerners especially). Koreans  are both friendly and closed off from contact.One mightwonderwhatImean. Koreans are very nice to foreigners, when it comes to giving directions, helping the confused foreigners travel around, and are patient when they order food. However, outside of these particular instances making Korean friends is a little difficult. As a Caucasian, I travel with an invisible boundary around me that Koreans will not cross. When taking the bus I always have a seat to myself, the same on the subway. When shopping, sightseeing, or working on campus Koreans maintain a conscious distance between us. While this makes traveling through a crowd easy, it does keep interactions to a minimum. It is also slightly annoying at times, for example when taking the elevator and Koreans step onto the elevator, see me, and step back off the elevator to avoid having to get closer to the foreigner. In the worst cases, one can see Koreans run and hide when you walk into a restaurant or store to avoid having to deal with the foreigners. This is probably one of the most frustrating things about traveling to Korea. Foreigners come to Korea to learn from Koreans, experience Korean culture, study Korean history, and observe the Korean mindset. This is difficult to do when Koreans will not allow you to approach.

 

The next point is noticeable mostly around the temples, and historical sites. Korea is at once a modern, western, technological powerhouse, and also an ancient country constantly reminding the people that visit of the events and history that Korea has lived through. For example, when traveling around Korea, one finds coffee shops, western music, clothing, food, and variations of western culture. Now, Koreans are justifiably proud of their technological accomplishments and love to show off their large firms to tourists. Some have even gone so far as to create museums dedicated to their history or their products. At the same time, one will find hundreds of museums, historical sites, ancient buildings, and cultural relics around every corner in Korea. However, when traveling around the ancient sites one will suddenly realize that tall buildings, western restaurants, and European style coffee shops surround the location. While in part this is to benefit from the tourist industry, it is disappointing that skyscrapers and Starbucks surround these beautiful areas. That said this is part of the experience and the uniqueness of Korea. Only in Korea is there such a fusion of history and modernity in everyday life, where one can walk out of a brand-new skyscraper into an ancient palace.

 

This fusion of modern and ancient is one of the defining aspects of modern Korea.  However, the best part of Korea is how accessible the museums, and ancient palaces are. Almost all of the museums are free and the palaces have days that one can enter for free. This is a stark contrast to America and the European countries where you have to pay to learn about the past of those countries. This desire to understand the past and to make history accessible to the populace is something that western countries would do well to copy from Korea. Knowledge of the past is something that can be easily lost when if you are not careful, and the preservation of said past is important as it shapes how one deals with the present. That said Korea could take a page from the western nations in dealing with foreigners.

 

Breaking the bubble is one of the first things that Koreans need to do to integrate into the international business and global community. Approach the foreigners, talk to them, and make them feel welcomed to the country. Just by approaching a foreigner, sitting by them on the bus asking about the weather will help to improve the foreigner’s perception of Korea. Many of the researchers and foreign students that I have meet continue to focus on Korea as the Hermit kingdom as few have found a group of Koreans that they can speak with or meet. Now those that have been in Korea for multiple years have a more up to date view of Korea as a business center, but even those students move about within a bubble in Korean society. A willingness to ask and answer questions in both Korean and English would benefit Korea’s image abroad tremendously as it would start to break down this old image of Korea and will also make the foreigners feel welcomed during their stay in Korea.

 

That said, I have made a few Korean friends and I hope to stay in touch with them and to meet them again when I return to Korea the next time. I would like to thank Dr. Cho, Ku Ick and Dr. Lee, Wan Bom as without their assistance I would have been unable to travel to Korea and progress so far in my own personal research.

 

 

 

 


게리와 함께 소주 한 잔!

 


 

 


올림픽 공원에서

 


 

 


함께 공부하던 외국인들과 야외파티를

 


 

 


외국인 동료들과

Posted by kicho
알림2015. 3. 6. 15:52

 

 

 

 

 

대학생들에게 한자와 한문을 가르칠 목적으로 <<21세기 교양인을 위한 한자와 한문>>이란 책을 새로 만들었습니다. '글자<단어<문장'으로의 단계별 교육내용을 담았고, 실습을 통해 매 단계의 배움을 체화(體化)시켜 나가려는 의도를 담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풍부한 부록[간지/병첩한자/24절기/연령 한자어/세시풍속/차례상 진설용어/궁궐/사대문/전국행정구역/숫자/영수증과 차용증서/대한민국 성씨/기후/신체부위 명칭/구용 구사/호칭에 관한 한자/한중일 한자(3500자) 훈음(訓音)]을 붙여 일반인들도 생활 속의 참고서로 활용할 수 있게 꾸며보았습니다. 학교의 교육현장이나 일상생활에서 많이 활용될 수 있길 바랍니다.

태학사, 2015. 2. 26. 값 13,000원 

 

 

 

 

참고로 아래쪽에 이 책의 의미를 압축하고 있는 머리말을 들어 놓겠습니다.

 

 

머리말

 

 

지식과 정보의 양이 매순간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그 소멸 속도 역시 따라잡기 어려운, 이른바 지식기반 정보화 사회의 한복판에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왜 우리는 구시대의 유물로 여겨지는 한자나 한문을 배워야 하는 것일까?

 

한자나 한문이 지닌 지식 생산과 저장의 기능은 놀랍다. 한자나 한문은 우리네 사유의 기반으로 수천 년간 지속되면서 지혜의 두께와 폭을 늘여왔다. 아무리 첨단의 지식과 정보가 넘쳐도 한자나 한문을 모르고서는 인간의 내면과 세상 변화의 이치를 깨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자와 한문은 우리 민족이 수천 년 동안 사용해온 표기체계다. 그러나 지배계층의 독점욕과 교육기회의 불평등으로 대다수 민중은 상당기간 한자와 한문으로부터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자와 한문이 조성한 사유체계로부터 한순간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식기반 정보화 사회의 선두에 서려면 한자와 한문이 지닌 지식 생산과 저장의 원리를 체득해야 한다. ‘중국의 한자나 한문을 배우고 가르치려는 게 아니다. 수천 년간 우리 민족이 써왔고, 동아시아인들이 써온 표기체계의 한 축을 익히려는 것이다. 그걸 가르치는 것은 지식정보의 고속도로를 달리는젊은 세대에게 고성능 엔진을 하나 더 달아주는 일이다.

 

다년간 강단에서 한자와 한문을 지도해온 젊은 학인들[정영문 박사서지원 박사김성훈 박사윤세형 선생양훈식 선생]이 함께 엮어서 더 의미가 크다. 가르치는 자의 욕심을 적절히 깎아내고 배우는 자의 고단함을 헤아려, 아담하게 만들어낸 책이 더욱 아름답다.

 

 

을미년 새봄

 

조규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3. 5. 17:19

 

 

정신 차립시다!-웬디 셔먼의 말을 듣고

 

 

#1 유럽 여행 중, 독일의 본(Bonn)에 들른 적이 있다. 여행 정보가 필요하여 시내의 관광안내소를 찾았다.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더니 대뜸 일본에서 오셨지요?”라고 물었다. 내가 아니오. 한국인이오!” 하고 대답했더니, 순간 표정과 응대가 사뭇 사무적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2 정확한 장소는 잊었지만, 유럽 또 다른 도시에서의 일이다. 민박을 하게 되었는데, 주인이 우리에게 야뽕이냐고 물었다. 우리를 일본 사람으로 확신하고 물었을 것이다. 내가 대뜸 아니오!” 라고 대답하자, ‘그럼 시이나인가?’ 라며 또 물었다. ‘일본 사람 아니면 중국 사람이겠지!’라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니오. 한국인이오!”라고 약간 목소리를 높여 대답하자 머쓱해하며 물러났다. 다음 날 아침 식당에서 주인이 서빙을 하다가 지도 한 장을 펴 보였다. 우리나라를 가리키며 여기서 당신네 나라를 찾았소. 그럼 남이냐 북이냐?’를 물었다. 그래서 나는 남쪽에 사는 한국인이오!” 라고 대답하자, 그 때서야 미소를 보였다. 그는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난 듯 했다.

 

#3 재작년 미국 오클라호마 주. 지역 박물관들 몇 군데를 도는 동안 625 참전용사를 만났고, 다른 곳에서는 이미 작고한 참전용사의 아들을 만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1950~53년 어름의 한국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말을 나누다 보니, 그들 마음속의 한국은 아직 ‘1950년대 초반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연민과 경이의 상반된 정서가 착종되어 있었다. 폐허 속에서 코를 찔찔 흘리며 초콜릿을 구걸하던 그 모습과, 그나마 외국여행이랍시고 나선 우리에게서 일종의 심각한 언밸런스를 발견했을 것이다.

 

#4 최근 다녀 본 미국과 유럽, 중앙아시아나 러시아 등의 도로들엔 일본차들이 부지기수로 달리고 있었으며, 새 차는 물론 중고차도 일본차들은 인기 만점이었다. 미국에서 차를 사려고 하니 대부분 이왕 사려면 일본차를 사야 한다는 충고를 해주었다. 품질도 믿을만하고 중고로 팔 때 제값을 다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한국인은 삼성 폰을 만지작거리던 미국사람에게 그게 어디서 만든 것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대뜸 일본 제품이라고 답하더라며 탄식을 했다. 그 정도로 서양에서 일본 브랜드의 위력은 대단했다.

 

#5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원어민 영어 교수와 가끔 만난다. 서로 간에 흉허물이 없어졌다싶을 즈음 싱거운 질문 하나를 던졌다. “왜 당신을 포함한 서양인들은 일본이나 일본인을 좋아하는가? 2차 세계대전에서 맞붙어 싸운 적국 아닌가?” ‘이 친구도 일본을 좋아하겠지?’라는 내 추정을 확신으로 깔고 던진 물음이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일본인을 좋아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분명히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만들어 온 물건들과 그들이 지속해온 문화와 깔끔한 성품 땜에 일본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과거에 전쟁을 일으켰고, 함부로 역사를 수정하려 하며, 약삭빠른 그들을 꼭 좋아해야 하는가?”고 다시 물었더니, “지난 일은 내가 알 바 아니고, 지금 좋으면 된다.”고 답했다.

 

과거사는 한··3국 모두가 책임이 있으니까 빨리 정리하고, 북핵 같은 당면 현안에 치중해야’/‘민족 감정은 악용될 수 있고, 정치인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해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등은 최근 웬디 셔먼(Wendy Sherman) 미 국무차관이 공식석상에서 했다는 말의 요지다. 일본 편을 들어 우리를 비난하고 있음은 불문가지다. 누구는 뭐 한갓 아녀자의 말이니 그냥 모른 척 하자고 하는 모양이지만, ‘세계의 조정자를 자처하는 미국의 외교 수뇌부가 공식석상에서 뱉은 말에 우리가 대범할 수는 없게 되었다.

미국인들을 몇 번 만나 보면 개인이든 공인이든 마음과 달리 외교적 언사가 매우 매끄럽고, 이른바 포커 페이스’(poker face)에 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구한말의 일본 놈 일어난다. 소련 놈에게 속지 말고, 미국 놈 믿지 말자는 항어(巷語)도 나왔으리라. 미국 고위관료의 말과 표정만 믿고 돌아와 걱정 말라고 큰소리치다가 된통 당하기만 하던 과거 우리나라 관료들의 순진함도 이런 외교적 언사와 포커 페이스에 당한 결과들이리라.

 

유럽이나 미국인들이 일본과 일본인들을 좋아하는 이유를 사실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없다. ‘625 때 자국의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주었으니, 당연히 우리 편을 들어주겠지’, ‘세계대전에서 악랄한 일본군으로부터 몹쓸 시련을 받았으니 당연히 우리 편을 들어주겠지등등. 우리는 너무 순진해서 탈이다. 미국에 가보면 주류사회에 많은 일본인들이 진출해 있고, 일본 여자와 결혼한 미국의 고급관료들이나 오피니언 리더들을 꽤 보게 된다. 그 뿐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린 시절엔 소니의 게임기에 빠져 살았고, 자라면서 워크맨이나 모바일, PC 등에 조종당하며, 토요타 등이 생산하는 일본차를 타고 일생을 보내던 사람들이 잘 나가는 미국인들이었다. 1998년 미국에서 만난 어떤 아이에게 나중에 자라면 어디를 젤로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일본이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이렇게 재밌는 게임기를 만들어낸 나라에 꼭 가보고 싶다는 대답이었다.

 

***

 

유럽과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일본 편일 수밖에 없다. 간혹 오바마 대통령이 짐짓 일본을 꾸중하는 듯한 표정을 짓기는 하지만, 경험칙으로 보아 포커 페이스임이 분명하다. 이쯤 우리는 집단적 착각에 빠져 있는 우리의 모습을 깨달아야 한다. 세계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언론들은 우리 전화기, 자동차, K-POP이 세계를 제패한 듯 떠들고, 흡사 세계인들이 모두 우리를 주목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망한다 해도 더이상 군대를 보내주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이나 생존의 문제를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일로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점을 이 순간 아프게 깨달아야 한다. 국제사회의 냉혹함에 언제까지 둔감할 것인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3. 3. 17:01

 


떠나기 전날 찾아온 게리와 함께 숭실교정에서

 

 

 


어느 여름날 찾아온 두 사람.
왼쪽부터 게리, 백규, 세바스티안(시조를 전공하는 독일인) 

 

 

 

게리(Gary Younger)를 보내며

 

 

 

작년 9월부터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차세대 한국학자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6개월을 보낸 게리(Gary Younger)가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간 한국말을 열심히 배운다고 했는데, 30여년 모어(母語)인 영어만 쓰다가 처음으로 한국어를 접해서인가. 귀국 인사차 연구실로 찾아온 그의 한국어 실력을 테스트하다가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참 외국어를 익히는 것이 이렇게도 어렵구나!’란 깨달음과 함께, 나이 들 만큼 든 지금도 영어 책을 놓지 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그에게 오버랩되는 건 어쩔 수 없다.

 

***

 

201391일부터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과에서 나는 한 학기 예정의 풀브라이트 방문학자(Fulbright Visiting Scholar)’ 생활을 시작했다. 맨 처음 공항으로 픽업 나왔던 중국인 두 교수(Du, Yongtao), 학과의 비서인 수잔(Susan Oliver)과 다이아나(Diana Fury) 등이 일상적으로 만나던 사람들이었고, 연구실로부터 가까운 우편함이나 복사실 혹은 간식이 준비되어 있던 휴게실에서 만나는 교수들이 주로 접하는 대학인들의 대부분이었다. 사실 두 교수도 강의실-연구실-복사실등을 통통거리며 굴러다니듯 바쁘게 지내는 바람에 대면할 틈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곳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쯤이나 되었을까. 두 교수가 메일과 전화로 강사 중 누군가가 나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연락을 보내 왔다. ‘한 공간에 살면서 그냥 찾아와 문을 두드리면 되지, 중간에 누구를 넣는 건 뭐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면서도 ‘Any time okay!’라는 답신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도 한 주일이나 되어서야 그는 조심스럽게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전형적인 코카서스 인종의 미국인이었다. 말을 들어보니, ‘예의 바르다고 할 수도, 낯을 가린다고 할 수도 있는 그의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역사교사로 있다가 사직한 뒤, 이곳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며 -미 외교사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젊은이였다.

 

그 때부터 우리는 간간이 만났다. 주로 내 연구실에서, 가끔은 학교 안팎의 식당들에서. 대화의 주제는 그와 내가 번갈아 정했다. 나는 한국의 정치 외교적 이슈들에 관해 주로 Korea Herald에 실리는 칼럼들을 소개했고, 그는 NYTWP 등에 실리는 미국의 정치 외교 관련 기사들을 준비해왔다. 내가 말하는 한국의 사정, 그가 말하는 미국의 사정은 수산시장의 새벽 경매에 나온 물고기들처럼 늘 싱싱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항상 종횡무진이었다. 그는 내게 최고의 미국 선생님, 나는 그에게 최고의 한국 선생님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가끔 호기를 부리며 여기서 나를 몇 달 동안 만나고 직접 한국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면, 머지않아 당신은 미국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되리라!”고 큰소리치며 그에게 용기를 불어 넣었다. 사실 그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했고, 그런 이유로, ‘돈 한 푼 안들이고’, 아니 오히려 약간의 돈이라도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한국에 체류하며 한국을 배우고 싶어 했다. 내 분야이든 정치 외교 분야이든 외국인의 한국 연수에 관한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하던 나로서 약간 켕기기는 했지만, ‘나중에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대책도 없이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러나 내 미국 체류 예정기간이 점점 줄어들면서 그도 내 눈치를 보는 듯 했고, 나 역시 뱉어놓은 말들때문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한국학중앙연구원, 동북아역사재단 등에 연락을 넣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답이 왔다. 게리에게 맞는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차세대 한국학자 프로그램으로, 외국의 젊은 학자 혹은 학자 지망생이 돈을 받으며 공부도 할 수 있는 기회였다. 목 말라오던 차에 발견한 오아시스가 바로 이런 것인가. 다음날 게리를 만나 상세한 정보를 넘겨준 다음, 두 주의 여유를 줄 테니 양식에 맞추어 작성한 프로포절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득달같이 프로포절을 작성하기 시작하여 지도교수의 확인을 거친 다음 약속날짜 이전에 건네주는 게 아닌가. ‘한국전쟁 이후 한-미 외교 현안들의 이념적 기조라는 제목의 글. 아마 그가 박사논문으로 쓰려고 준비하던 내용의 일부인 듯, 논리가 매우 치밀하고 온당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기대지평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라 판단했는데, 과연 그는 선정되어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

 

그는 처음 넉 달 동안 연구원 내에서 한국어를 열심히 수강했고, 나머지 두 달 동안은 국립중앙도서관을 오가며 자료수집에 몰두했다. 간혹 내게 찾아와 삼겹살에 소주를 즐기며 자신의 한국생활을 말하곤 했다. 작별의 인사를 하러 온 날. 그의 턱과 볼을 에워싼 멋진 수염을 보게 되었다. 객지에서 매일 수염 깎는 일이 귀찮아서였을 수도 있겠지만, 무언가 자신의 변화를 가시화 시키고자 하는 뜻이 들어 있었으리라.

 

많은 말들을 남긴 채, 또 멋진 수염을 통한 모종의 암시를 남긴 채, 그는 떠났다. 난생 처음 겪는다는 해외 체류이자 한국 체류 6개월. 그는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까. 내가 큰소리 친 것처럼, 머지않은 장래에 그는 미국 내 최고의 한국 전문가가 될 수 있을까.

 

 

 


    추석 지난 뒤 문현 선생의 작품 발표회에서. 왼쪽부터 세바스티안, 게리, 문현 박사, 백규, 
송지원 박사(국립국악원 연구실장), 케이트 교수(영국 런던대 음악과) 등과
숭실대 국문과 학생들(이수빈, 박문성, 리아, 최연, 권리나) 

 

 


2014년 추석날의 멋진 모임.
선무치료학의 대가 이선옥 박사 자택 뒷산의 '노래와 담소 모임'에 합류한 게리와 세바스티안.
왼쪽에서 두번째 인사가 이선옥 박사, 그 다음이 범패의 대가 범진 스님, 백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