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0. 7. 7. 15:23

 

                                                                                                                                                                                                                                                                                         조규익

나는 대부분 연구실에서 점심을 혼자 빵으로 때운다. 요즘 시중에는 맛난 빵들을 구워 파는 집들이 제법 많아졌다. 누구네 빵집이 맛있다고 매스컴에라도 뜰라치면 빵집 주인들은 달려가 냉큼 배워온다고 한다. 그 뿐 아닐 것이다. 젊은이들 중에는 제빵의 달인이 되고자 세계 ‘빵의 나라들’에 유학을 하며 배워오는 모양이다. 10여 년 전 프랑스를 여행할 때 그곳 제빵 학원에 유학 나온 한 젊은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고생하면서도 빵의 달인이 되려는 의지로 충만한 그가 참으로 경이롭고 존경스러웠다. 그런 경우 ‘비싼 밥 먹고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처잘 것이지, 그 비싼 돈 들이며 빵 배우러 프랑스에 간단 말이여~?’ 라고 일언지하에 꾸중을 듣던 시대에 태어나 자란 나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만남이었다. 그런 젊은이들이 나이가 들고 자리를 잡으면서 우리네 빵 산업도 세계와 어깨를 겨룰 정도가 된 것 아닐까. 후배 세대가 만드는 그런 빵의 덕을 나는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빵은 두 쪽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여기에 따라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버터, 치즈, 잼, 커피 등이 대중적인 것들이고, 내 점심상에는 ‘꿀에 잰 마늘’과 ‘매실조림’이 더 오른다. 그리고 즉석에서 쪄낸 계란 한 알로 모자라는 단백질을 보충하곤 한다. 다 먹은 뒤 아무래도 서운하여 나만의 레시피로 제조한 디저트를 꺼낸다. 얇게 썬 완숙 토마토에 올리고당과 매실청을 부어 밀봉한 다음 냉장고에 넣고 1주일간 숙성시킨 음식이다. 점심식사 후 그 중 일부를 덜어 직접 만든 요플레와 아몬드 몇 개를 섞으면 어디 내 놓아도 꿀릴 것 없는 최고의 디저트가 된다.

 

내가 지금 점심을 호화판(?)으로 먹고 지내노라는 자랑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적는 건 결코 아니다. 핵심은 설거지에 있다. 원래 띄엄띄엄 먹던 ‘연구실 혼밥’이 코로나가 창궐하면서는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다양한 음식 용기들을 수용하려면, 가뜩이나 좁은 책상이나 응접탁자가 터질 지경이다. 설거지 거리들이 많은 것도 ‘당근’이다. 밥상이 작든 크든 먹고 나면 설거지는 피할 수 없는 고역이다. 사람들이 내 말을 믿을지 의문이긴 하나, 나는 처음부터 설거지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설거지를 즐긴 지가 꽤 오래 되었다.

사실 혼자 점심을 먹다 보면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이 떠오른다. 주로 당장 해야 할 일들, 누군가가 나에게 감행한 공격이나 실수, 근래 봉착한 난관 등등. 많은 것들이 음식과 함께 씹혀서 내 안으로 들어온다. 식사가 끝날 무렵이면 이것들이 뒤엉켜 모색해야 할 방향은 오리무중이 되고 만다. 그 상태에서 주섬주섬 그릇들을 챙겨들고, 각 연구실의 조교나 근로학생들이 설거지하러 오기 전에 잽싸게 탕비실로 달려가 설거지에 몰입한다. 내가 경험한 설거지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맛난 음식에서 이렇게 지저분한 찌꺼기가 나온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만남이나 모임의 끝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둘째, 지저분한 찌꺼기와 때가 시원하게 씻겨나가는 모습을 보면, 식사 도중 떠올랐던 복잡한 상념들이 한꺼번에 정리되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셋째, 궁극적으로 남들에 대하여 가졌던 서운한 감정이 대부분 물과 함께 씻겨 나가고 그 원인이 나 스스로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설거지를 하고 나서 몸과 마음이 가뿐해지는 이유를 요 근래 ‘가만히’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다가 최근 깨달은 것이 바로 앞에 제시한 세 가지 이유들이다. 물론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이 생각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이 세 가지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러한 깨달음에 이른 것일까. ‘그릇을 닦는다’는 행위와 ‘마음을 닦는다[수신(修身)]’는 행위 간에는 긴밀한 유사성이 있다.  원래 마음은 객관화될 수  없기 때문에 은유로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고, 그 경우 '마음을 닦는다'는 취의(趣意)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릇을 닦는 것’을 유의(喩意)로 끌어왔을 뿐이다. '그릇을 닦는 것'은 행주로 그릇의 때를 빼는 행위이지만,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좋은 말이나 글 혹은 깨달음을 통해 마음 속의 사악함을 정화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둘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의미의 탐색작용과 결합작용을 통해 인간은 ‘그릇을 닦는다’는 것과 ‘마음을 닦는다’는 것 사이에 이중적 상상을 통한 은유 관계가 성립됨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유산을 물려받은 나도 그릇을 닦으며 ‘내 마음의 때를 닦아내고 있다’는 ‘수신(修身)’의 본질을 결국 떠올리게 된 것이나 아닐까.

 

어쨌든 ‘혼밥 점심’을 통해 영양소를 섭취하고 세상사를 사색할 뿐 아니라, 그 설거지를 통해 ‘수신’이라는 망외(望外)의 소득까지 올리고 있는 나로서는 이 두 행위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혼밥 점심시간’이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한다.  ‘접시 닦이 알바’를 하던 초창기 미국 유학생들[혹은 그 부인들]이 혹시 이런 생각을 하며 그 고역을 견딘 건 아니었을까 하는 객쩍은 생각까지 하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어쨌든 나는 ‘혼밥 점심과 설거지’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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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20. 7. 5. 23:01

백규서옥의 옥호

 

 

                                                                                                                     조규익

2020. 6. 30. 무성산 끝자락 조용한 곳에 그동안 내 환상 속에만 존재해 오던 백규서옥을 드디어 실물로 완공했다. 만 5개월 동안의 큰 역사(役事)였다.^^ 50여 년 전 대여섯 살 무렵, 당시 젊은 부모님께서 나무와 흙으로 지으시던 고향집의 추억이 아련히 남아 있는데, 마음속의 그 그림 위에 '내 집'을 덧 지은 것이다.

 

무성산의 용맥(龍脈)이 흘러내려 혈(穴)을 맺은 곳. 그 안온한 곳을 내 최후의 은거처(隱居處)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간 제법 많은 곳들을 떠돌아다녔고, 정처 없이 그려온 노마드(nomad)의 궤적 속에 내 알량한 내면은 무거운 피로감으로 절어 온 게 사실이다. 마무리해야 할 공부들은 아직도 수두룩한데 세상은 내 뜻처럼 움직여 주지 않고, 내 사고방식이나 삶의 양식은 더 이상 세상의 추이(推移)와 맞지도 않음을 절감한다. 그럴 경우 굴원(屈原)이 그려낸 <어부사(漁父辭)> 속의 어부처럼 방향을 틀어 세상에 맞추거나 조화를 가장한 아부라도 떨어야 마땅한 일이나, 그렇게 하고서야 내 성격에 어찌 단하루인들 맘 편히 살 수 있겠는가. 내가 핍박했고 나를 핍박해온 사회에서 내 불만과 불행의 원인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안으로 돌이켜 나를 반성하는 데서 내 자아와 본래 면목을 찾으려는 것이니, 저 석문(釋門)의 이른바 ‘회광반조(廻光返照)’ 정신과 다를 게 그 무어란 말인가. 내 자아를 다시 찾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허둥대지 않고, 이미 어긋난 세상과 나를 일치시키기 위해 궤변과 아부를 농하고자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애당초의 출발점으로 돌아가려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 생각으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올해 비로소 그 거사에 착수한 것은 마지막 연구년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에 착수한지 몇 발짝 만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강타했다.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집을 짓는 일’이 참으로 난감했지만, 내친걸음을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은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일’은 대안 없는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가족들을 태운 채 달리던 내 차의 핸들을 급히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고, 어려운 시기 잠시라도 내게 와서 자신의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나선 장인(匠人)들의 모습이 너무 안타깝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참으로 성실하고 실력 출중하며 성격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담건축사사무소 남궁 담 대표, 임전수 감리사, 김병호 대목장(大木匠), 천명선・이종식・양승만・김수남・김창례 목장(木匠), 이재필 전기장(電氣匠), 고현용 조적장(組積匠), 상량문을 써 주신 서예가 우공(愚工) 이일권 선생, 나를 대신하여 모든 관리업무를 총괄해주신 유수근 사장 등 각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들과, 레미콘・타일・벽돌・기와・철근・창호・각종 장식 돌・각종 건재・중장비・미장・설비・용접・난방・목공・페인트 등을 제공한 거래처와 도움을 아끼지 않으신 전문가들의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단계마다 노역을 제공해주신 분들의 이름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그 뿐인가.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전봇대를 세우고 전선을 이어주신 전력회사 직원들과 엔지니어들, 인력들의 맛있는 점심을 늘 시간에 맞춰 제공함으로써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해주신 부흥식당 정연희 사장도 잊을 수 없다.

 

백규서옥의 기념 동판

 

백규서옥을 지으며, ‘집을 짓는 일’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영혼을 일깨우는 종합예술임을 알게 되었다. 건축주와 장인들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재료들에 숨결을 불어넣고, 그 숨결이 음표로 바뀌어 생명을 노래하고 춤추는 마술임을 알게 되었다. ‘집을 짓는다’는 건 자기만의 세계와 자아의 존립근거를 마련하는 일이다. 집이 없으면 정주(定住)할 수 없고, 정주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과 공존할 수 없고, 자신의 변함없는 존재를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동안 백규서옥은 내 환상 속에만 존재해 왔다. 은사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선생님께서 내리신 이 옥호(屋號)의 이면에는 이상을 품고 노력하여 그것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보라는 지엄한 명령이 들어있다. 시류(時流)에 영합하여 세상 사람들과 이해를 다투지 말고, 자신의 흠결을 갈아내기 위해 수양할 것이며, 항상 근원을 추탐(推探)하여 내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보라는 것이 그 명령의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조용한 곳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통해 자아의 본래면목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세상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건축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것이 ‘무성산 백규서옥 건축’의 정신적 바탕이다. 이제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

 

백규서옥 측면 전경

 

백규서옥 문앞에서 백규

 

 

백규서옥 기념동판 앞에서 포즈를 취한 장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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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20. 5. 24. 13:59

 

 

제이슨 가족 사진[왼쪽부터 제이슨, 그레이슨, 놀만, 제이콥, 에벌린]
밝은 표정으로 놀고 있는 그레이슨과 에벌린

 

  노마드(nomadism), 노마디즘(nomadism)이란 말이 유행이다. 각각 유목민(遊牧民), 유목(민)주의[遊牧(民)主義 혹은 유목민 정신]로 번역되겠지만, 그 내포는 간단치 않다. 우리 같은 농경 정착민으로서는 쉽지 않은 생활양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유목민이다. 풀이 우거진 곳을 찾아 천막을 세우고 소떼나 양떼를 기르는 사람들. 그러다가 동물들이 얼추 풀을 뜯어먹었다 싶으면 냉큼 천막을 말아 수레나 말 등에 싣고 또 다른 풀밭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 그들은 한 곳에서 진득하게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누구인가.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영토화와 나의 발견에 바탕을 둔 탈주의 철학을 고안했지만, 그 근원적 사고가 노마드 혹은 노마디즘에 있음은 명백하다. 특정한 가치나 삶의 방식이란 굴레일 수 있으니, 그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 가고자 하는 것. 그것이 노마디즘이다. 대학 재직 40년 동안 많은 적지 않은 구미인(歐美人)들을 만났고, 두 번에 걸친 미국 체류 기간에도 그들을 만나며 그들의 내면에 남아있는 노마디즘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이 그들 정체성의 큰 부분이었다.

 

   2013년 풀브라이트 학자(Fulbright Scholar)로 미국의 OSU(오클라호마 주립대학)에 체류하고 있던 나는 여러 명의 패컬티 멤버들과 교유했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 뛰어난 영어 교육자 제이슨 컬프(Jason Culp)였다. 이미 이 블로그에 그에 관한 글과 사진들을 남긴 바 있는데, 그 글에서 나는 그의 영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그와 만나는 과정에서 그가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외국어 사용자들을 위한 영어 교육]을 전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의 영어가 매우 명료하면서도 정확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라고 모두 표준 한국말을 ‘명료하고 정확하게’ 구사하지는 못하듯, 미국 사람들이라고 모두 표준 영어를 구사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영어만으로 분류할 경우 미국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대충 네 부류로 나뉘었다. 짤막하면서도 느릿느릿한 영어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는 어른들, 진한 사투리 억양으로 상대방을 갸웃거리게 만드는 사람들, 입에 오토바이 엔진을 단 듯 숨넘어가게 지껄여대는 학생들과 젊은이들, 제이슨처럼 교과서적인 영어로 호감을 주는 소수의 지식인들. 가끔 방송에서 목격하는 오바마 대통령, 전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 현 백악관 대변인과 미 국무성 대변인 등의 대중 스피치를 통해 미국 지도자들이나 상류층의 덕목 가운데 ‘언어의 명료성과 모범성’이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제이슨에게서 그런 스피치의 전형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이 글을 내 여행기[<<인디언과 바람의 고향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에 다시 실었지만, 그것으로 그[그의 가족]와의 관계가 끝나지 않은 것은 잊을만하면 도란도란 전해지는 그의 말이 귀를 간질이는 초원의 산들바람처럼 나를 기분 좋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넓은 초원의 한 귀퉁이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데, 이곳을 찾아와 잠시 양떼에게 풀을 먹이며 쉬다가 안녕!’을 고하고 떠난 그가 몇 년 후 늘어난 가족들과 양떼들을 몰고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이곳을 지나다가 내게 또 안녕!’을 고하는 것 같지 않은가. 내가 귀국하고 한 해 뒤에 그는 내게 연락을 해왔다. 한국의 대학에서 잠시 일할 만한 자리가 없겠느냐는 부탁이었다. 통탄할 만큼 좁은 나의 교제범위 때문일까. 시원한 대답을 못해주었다. 미안한 마음을 문면에 담아 이메일을 보냈으나,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6개월쯤 후에 독일로부터 이메일이 날아왔다. 몇 년간 그곳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지내게 되었노라는 메시지와 독일에서 낳은 예쁜 딸 에벌린(Everlyn)도 함께 한 가족사진을 첨부하여. 나는 반색을 하며 반가움의 답신을 보내면서 두어 차례 이메일들이 오가다가 다시 한동안 끊기고 말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덮치면서 초강대국 미국도 힘을 쓰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NYU의 교수로 있는 큰 아이[조경현]와 제이슨의 아이들이 걱정이었다. 그런 내 생각이 전해진 것일까. 엊그제 그의 이메일이 거짓말처럼도착했다. 독일에서 임기를 마치고 작년 8월 미국에 귀환 후 잘 지내고 있다는 것, 이번 여름에 이스라엘에 일자리를 잡아놓고 비자를 기다린다는 것, 정년 후 살 집을 사진으로라도 보고 싶다는 것 등을 적은 다음, 새로 태어난 아들 제이콥(Jacob)이 포함된 가족사진을 첨부하여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내왔다. 우리말로 번역한 그 이메일은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조 박사님!

 

나는 당신과 임미숙 씨가 요즘 같은 어려운 시절에 잘 지내시기를 희망합니다. 2020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일어나게 될지 상상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금년 여름 언제쯤 이스라엘로 이사하기 위해 한 번 더 짐들을 꾸리고 있는 우리는 당신에게 이메일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스틸워터를 떠난 후 우리에게 매우 친절하게 보내 준 당신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레이슨은 한국에서 출판된 책에 실린 우리 가족사진을 보며 대단히 감격해 했습니다. 그는 이제 우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퍼진 후에도 당신의 건강이 좋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흘러간 시간과 거리가 우리를 떼어 놓았어도, 당신과 임미숙 씨는 여전히 우리의 친애하는 친구들입니다. 당신을 방문하여 당신의 고향을 보기 위해 한국을 여행하는 것은 아직도 내 꿈입니다. 정년 후 살 집을 완성하셨어요? 낙원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갖고 있는 사진 좀 한 장 보내 주세요.

 

우리 가족사진 두어 장 첨부합니다. 우리는 2019년 8월 이래 오클라호마에 돌아와 있어요. 우리는 아마도 2020년 6월에 이스라엘로 이사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아직 정부로부터 여권들을 받지 못했어요. 그들은 지금 국제 여행을 제한하기 위한 여권의 갱신을 진행하고 있지는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다시 이동할 수 있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삶은  "보류 중"입니다. 그러나 신에게 감사하게도, 우리는 잘 지내고 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갖고 있지요.

 

당신의 친구 제이슨 드림

 

 

 

   아, 그는 아직도 노마드의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양떼에게 뜯길 풀만 있다면, 세상 어디에 가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상이 바로 노마드 아닌가. 우리는 어찌하여 특정한 아니 알량한 이념이나 가치 혹은 삶의 방식에 구애 받으며 이 비좁은 한반도 한 구석에 박아놓은 뿌리를 뽑아내지 못하는가. 끊임없이 낯선 곳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사람들을 이웃으로 만나고 새로운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가.

 

   수백 년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을 시멘트 철근 집을 아름다운 에코팜에 뚜드려 지으면서걸림 없는 노마드 친구의 이메일을 곱씹어 보노라니, 노마디즘을 찬양하고 노마드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그 반대방향으로 치달아가는 내 몰골이 영 마뜩치 않다. 어디선가 맛나고 멋진 풀들이 자라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나는 어떻게 천막을 말아 짊어진 채 내 소떼를 몰고 그곳으로 달려갈 것인가. 걱정 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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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2020. 5. 9. 15:43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를 중심으로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는 7명의 학자들이 선조조~인조조의 탁월한  경세가(經世家) 최현(崔晛)의 연행록 <<조천일록(朝天日錄)>>을 역주・분석하여 최근 다음과 같은 자매편 저술들을 발간했다.

 

1. <<역주 조천일록>>[조규익・성영애・윤세형・정영문・양훈식・김지현・김성훈 공역/학고방, 2020. 5.])

2. <<최현의 <<조천일록>> 세밀히 읽기>>[조규익・성영애・윤세형・정영문・양훈식・김지현・김성훈 공저/학고방, 2020. 5.]

 

**<<역주 조천일록>>의 목차

 

화보

머리말

역자의 말/조규익

권1 인재선생속집-<<조천일록 1>>

권2 인재선생속집-<<조천일록 2>>

권3 인재선생속집-<<조천일록 3>>

권4 인재선생속집-<<조천록 4>>

권5 인재선생속집-<<조천록 5>>

권5 인재선생속집-<인재선생속집 서문>

찾아보기

 

 

**<<역주 조천일록>>의 머리말

 

광주 이현조 박사의 후의로 인재 최현의 <<조천일록>>을 손에 넣은 것은
2006년 무렵이었다.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고, 훑어보니 내용
또한 여러 면에서 매력적이었다. 즉시 숭실의 학인들과 강독을 시작했다.
반쯤 진행되던 중 뜻하지 않게 새로운 프로젝트에 매달리게 되어, 강독은
기약 없이 미뤄졌다. 그간 이 텍스트에 관한 논문은 두세 편 발표했으나,
번역을 마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나 미적거리는 사이 세월은 마구
흘렀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 겨우 작년(2019) 중반
쯤이었다. 서너 명씩 두 팀으로 나누어 초벌 번역과 주석 작업을 마쳤고,
최종적으로 마무리 강독을 통해 번역작업은 완성되었다.


문헌학도인 나는 늘 번역문제로 시달린다. 논문 한 편을 쓰려 해도
맞닥뜨리는 원전들이 많기 때문이다. 논문 쓸 때는 정확하게 번역했다고
자부하지만, 논문이 나온 후에 오역들이 발견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래
서 좋은 번역서가 늘 반갑고 고맙다. 좋은 번역서들은 연구에 들어가는
품을 많이 덜어준다. 그러나 아직도 번역을 기다리는 원전들은 수두룩하다.


인재 공의 <<조천일록>>은 예사로운 사행록이 아니다. 사행을 출발하는
날부터 돌아와 복명한 뒤 우여곡절을 겪다가 하향(下鄕)하는 날까지 단
하루 빠뜨리지 않고 기록한 점도 놀랍다. 무엇보다 원리주의자에 가까운
성리학자들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면서도 실용주의적 경세가의 면모를 보
여주었다는 점에서 인재 공은 특이한 존재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 참
전했고,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대열의 선봉에 서기도 한 그였다. 그 뿐
아니다. 분명한 메시지가 담긴 가사와 소설작품을 남겼고, 각종 소차(疏
箚)들을 통해 민생과 안보․ 경제 등 현실 정치에 관한 건의들을 임금에게
부단히 올리기도 했다. 공리공담 아닌 실용 정신에 입각하여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뜻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역사에 보기 드문 실천
적 애국 지식인이었다. <<조천일록>>의 표층은 ‘중국에서의 문견사건(聞見
事件)들’이나 심층은 ‘나라걱정’인 것도 그런 점에서 당연하다.


공역자들 각자가 발표한 논문들을 모은 <<최현의 조천일록 세밀히 읽
기>>를 이 번역서의 자매편으로 함께 세상에 내어 놓는다. 뜻 맞는 학인들
과 함께 공부한 결과를 세상에 내어 놓는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
까. 그러나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다음 작업들을 위해 지금 너무 많이
웃지는 말아야 하리라.


맨 처음 텍스트를 제공해주신 이현조 박사와 성균관대 존경각, 텍스트
의 원본 이미지들을 제공해주신 서울대 규장각, 거친 원고들을 보암직한
책으로 엮어주신 학고방의 하운근 사장님과 조연순 팀장을 비롯한 직원
여러분께 고마움을 전하며, 강호 제현의 일독과 질정(叱正)을 고대한다.


경자년 새봄
백규서옥에서
조 규 익

 

두 책의 화보

 

**<<최현의 <<조천일록>> 세밀히 읽기>>의 목차

 

화보

머리말

최현과 <<조천일록>>을 보는 관점/조규익

<<조천일록>>과 현실인식/정영문

<<조천일록>>과 의례/성영애

<<조천일록>>과 누정문학/양훈식

<<조천일록>>과 유산기/김지현

<<조천일록>>과 요동정세/윤세형

<<조천일록>>과 글쓰기 관습/조규익

최현 문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

Abstract: A Detailed Analysis of Choi, Hyeon's Jocheonilrok

참고문헌

찾아보기

 

 

 

**<<최현의 조천일록 세밀히 읽기>>의 머리말

 

인재(訒齋) 최현(崔晛) 공의 6세손인 광벽(光璧)으로부터 <<조천일록>>
의 서문을 청탁받은 당시의 탁월한 학자 이헌경(李獻慶). 다음과 같은
말로 글을 시작한다.


“조천록이 이 세상에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사대부들이
연경에 갔다가 돌아오며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은 이가 없었으나 선생처
럼 상세하지 않았다. 이를 갖고 연경에 가서 살펴 따라가면 비록 처음
가는 나그네라도 익숙한 길처럼 생각될 것이다. 군대를 이끄는 자가 이를
얻으면 견고함과 빈틈, 험지와 평지의 소재를 알 수 있고, 풍속을 살피는
자가 이를 보면 풍속의 교화와 다스림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를 알
수 있다.(…)당시에는 경계할 줄 몰랐고 오히려 뒷사람에게 밝은 본보기
를 남겨주었으니, 조천록이 세상에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연경은 세상을 향한 창문이었고,
중국은 자신들을 지탱해주던 중세 질서의 근원이었다. 인재 공 또한 중국
의 실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문제적 현실을 고쳐보려는 꿈을 갖고 있었지
만, 이미 기득권 세력의 아성으로 굳어버린 조선에서 어찌 그 꿈의 실현
이 가당키나 했겠는가. 150여년 후에야 겨우 문집의 한 부분으로 엮이어
나온 인재 공의 기록. 그 시기에라도 지식사회가 인재 공의 경계(警戒)를
받아들였더라면, 왕조는 더욱 탄탄해질 수 있었을 텐데... 후손들을 위한
그런 꿈을 기록으로나마 제대로 남겨 놓은 인물이 바로 인재 공이었다!

 

나는 십 수 년 전 인재 공의 <<조천일록>>을 발견했고, 최근 숭실의 학인
들과 함께 역주(譯註) 작업을 마친 바 있다. 그 사이에 발표한 몇 편의
논문들 가운데 두 편을 고르고 학인들의 논문을 덧붙여 묶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근래 인재 공의 정치적 활약이나 저술들에 관한 연구가 활발
해진 것은 사실이나 <<조천일록>>에 관한 논의는 아직 없는 점으로 미루
어, 그간 이 기록이 강호 학자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국의 충심으로 점철된 인재 공의 진면목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으면
어쩌나? 서둘러 <<조천일록>>의 역주서와 연구서를 자매편으로 엮어내는
이유도 이 점에 있다.


맨처음 텍스트를 제공해주신 이현조 박사, 텍스트의 원본 이미지들을
제공해주신 서울대 규장각과 성균관대 존경각, 거친 원고들을 보암직한
책으로 엮어주신 학고방의 하운근 사장님과 조연순 팀장을 비롯한 직원
여러분께 고마움을 전하며, 강호 제현의 일독과 질정(叱正)을 고대한다.


2020. 4.

 

백규서옥에서

조규익

 

*****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인재(訒齋) 최현[崔晛, 1563(명종 18)~1640(인조18)]은 고응척[高應陟, 1531∼1605]・김성일[金誠一, 1538∼1593]・권문해[權文海, 1534∼1591]・장현광[張顯光, 1554∼1637]・정구[鄭逑, 1543년∼1620년] 등 명현들에게 일생 배움을 받았고, 44세 되던 해 관직에 오른 이후 수많은 요직들을 거치면서 임・병 양란에 참전하는 등 국가적 위기들의 해결에 부심한 애국적 지식인이었다. 46세[1608년] 8월에는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상사(上使) 신설(申渫)・부사(副使) 윤양(尹暘) 등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고, 78세 되던 인조 18년(1640) 고종(考終)한 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인재선생문집(訒齋先生文集)>>은 원집(原集) 13권, 별집(別集) 2권, 습유(拾遺)・연보(年譜)・부록(附錄) 등 다양한 문체의 방대한 글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 온 기록인 <<조천일록(朝天日錄)>>은 <<인재선생속집(訒齋先生續集)>>에 실려 있다. 그 외에 가사 <용사음(龍蛇吟)>・<명월음(明月吟)>, 소설 「금생이문록(琴生異聞錄)」, 선산읍지인 <<일선지(一善志)>> 등이 남아 있다.

 

그의 생애나 관직・저술 등을 통괄할 때 ‘의병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한 점,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 온 점, 임금에게 여러 번 소(疏)와 차자(箚子)들을 통해 시무책(時務策)을 올린 점’ 등은 그의 <<조천일록>>과 관련하여 두드러진 행적들이다. ‘공이 사람들의 착함을 말하기 좋아하고 사람들이 잘못과 악함을 입에 올려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해(利害)에 임하고 사변(事變)을 만나면 의연하여 뺏을 수 없는 게 있었고, 마음의 공평함을 잡아 같고 다름을 따져 논하지 않았으므로 좌우의 사람들도 감히 헐뜯지 않았다는 점/일찍이 스승의 문하를 찾아 정인(正人)과 군자(君子)의 논의를 들었고, 일찍이 한강(寒岡)과 여헌(旅軒) 두 선생을 따라 놀며 학문을 연마하여 온축에 근본이 있으니, 그 수립한 바가 근본 없이 그러할 수 없었다는 점/공은 귀가 밝고 기억을 잘하여 천문・지리・병법・산수를 통해 알지 못함이 없었으므로 문장을 함에 매이거나 꾸밈을 일삼지 않았고, 산이 맥을 타고 흐르듯 끝없이 이어지고 비가 억수로 쏟아지듯 기세가 왕성하여 이치의 통달로 주를 삼았다는 점’ 등을 지적한 권두인[權斗寅, 1643∼1719]의 평[「관찰사인재선생최공묘갈명(觀察使訒齋先生崔公墓碣銘)」]에도 성리학으로 배움을 시작했으되 실용학문으로 입신한 그의 철학과 학문적 성향은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당대 여타의 유자(儒者)들과 달리 의병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함으로써 충성심이나 애국심을 몸으로 실천했고, 그런 차원에서 그가 올린 각종 소차(疏箚)들의 진정성이나 실용성은 <<조천일록>>의 방향성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찍이 그는 임진왜란 참전의 경험을 가사 <용사음>으로, 임금에 대한 근심을 가사 <명월음>으로 각각 술회한 바 있었다. 그리고 각종 시무책에 관한 소차들을 여러 번 올린 점 등은 <<조천일록>> 텍스트의 방향이나 이면적 의미의 형성에 결정적인 단서나 바탕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이 그것들이다. 첫째, 그가 임진왜란에 참전했다는 것은 애국심의 진정성과 함께 당시 일반적인 유자들과 달리 투철하고 합리적인 국방(國防)의 방책이나 안보의식으로 무장하고 있었음을 입증한다. 따라서 <<조천일록>>에 반영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애국심이나 안보의식의 양상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인재선생문집>>에 실려 있는 15편의 소(疏)와 9편의 차자(箚子)들 대부분은 시무책에 관한 것들이다. 그것들에서 개진한 내용을 통해 시국이나 정치현실에 대한 최현의 생각을 알 수 있고, 그 내용의 요목들은 <<조천일록>>의 내용적 골자를 판별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천일록>>은 기록자 최현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나 중세 보편적 질서의 본산인 중국을 밟아보고 그곳에서의 견문을 바탕으로 자기 개혁의 처방을 만들어내고자 한 경세(經世/警世)의 기록이다.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의 사행록들[「무술조천록 상・하(戊戌朝天錄 上・下)」/「갑진조천록 상・하(甲辰朝天錄 上・下)」/「병진조천록(丙辰朝天錄)」/「경신조천록 상・하(庚申朝天錄 上・下」], 죽천(竹泉) 이덕형[李德泂, 1566~1645]의 <<죽천조천록(竹泉朝天錄)>>,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의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담헌연기(湛軒燕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 학수(鶴叟) 서유문[徐有聞, 1762~1822]의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여행(汝行) 김경선[金景善, 1788~1853]의 <<연원직지(燕轅直指)>> 등 16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조선조 여행문학 혹은 외교문학의 맥을 형성하던 사행록의 계보에서 인재의 <<조천일록>>은 앞자리를 차지하지만, 연행록 전성기의 막내격인 김경선 조차 ‘노가재・담헌・연암’ 3인의 사행록을 꼽았을 뿐 인재의 사행록은 거론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조천일록>>이 인재의 6대손 최광벽[崔光璧, 1728~1791]에 의해 비로소 편집・간행되었다는 것, 즉 원작은 16세기 후반에 이루어졌으되 공간(公刊)된 것은 19세기의 일인 셈이니, 사람들에게 쉽사리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재의 <<조천일록>>이 단순한 보고용으로 사용된 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행록의 일반적인 패턴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을 때의 기록이었다는 사실도 그 가능성을 설명해주는 점이다.

 

최현은 당대 성리학의 학풍에 매몰되지 않고, 민생과 안보 등 국가의 현실문제들에 대하여 실용적인 가치를 추구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성리학으로 입문했음에도 성리학에 대한 저술을 남기지 않았고, 많은 소차(疏箚)들을 통해 인재등용・민생・국방 등 정치의 요체를 임금에게 간언해왔으며, 무엇보다 임진・병자 두 전쟁에 참전한 점은 그가 공리공담에 매몰되어 있던 당대 유자들의 범주로부터 훨씬 벗어나 있던 존재임을 입증한다.

 

사행기간 내내 매일매일 문견사건(聞見事件)들을 기록하고 사일기(私日記)를 부대함으로써 자신의 견해와 철학을 담고자 했는데, 그것들 모두는 ‘중국에 대한 정보’이자 조선의 국내 상황이나 외교 정책의 수립에 큰 도움이 되는 자료들이었다. 제도・정책・사회풍조・민생 등의 문제, 오랑캐와의 갈등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안보 문제, 관리들의 탐풍(貪風)이나 예법의 문란을 중심으로 하는 이데올로기적 기강 해이의 문제, 학자나 무장(武將)을 중심으로 하는 인물 등용의 문제, 문화・역사에 대한 평가와 해석의 문제 등 중국에서 만나는 각종 물상들에 대한 기록은 조선의 왕과 지배층이 유념하기를 바라던 최현의 소망이 담긴 글들이었다. 그가 주력해오던 경세문들의 골자를 이루는 철학이나 시국관으로부터 그의 비평안이 나왔고, 그런 안목으로 중국의 문제적 현실에 대한 관찰을 기록한 결과가 <<조천일록>>이었는데, 그 점은 그가 글쓰기에서 평생 일관성 있게 견지해온 실용주의의 소산이었다.

 

예컨대 「신수노하기(新修路河記)」나 「제본(題本)」 등 중국의 관리들이 쓴 글을 비평 없이 인용한 것도 그런 글들에 제시된 정치・사회・안보・문화・인물・역사 등의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견해가 조선의 현실에도 매우 긴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중국에 들어서는 시점부터 업무를 마친 뒤 귀로에 압록강을 건너기 전까지 사행을 괴롭힌 탐풍(貪風)의 문제나 중국 체류 중 목격하게 된 비례(非禮)의 모습들은 조선의 경우도 현재 진행 중이거나 미구에 도래할 문제적 현실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상세히 기록하고자 한 듯하다. 그것들을 시시콜콜 나열한 것은 중세 보편주의의 근원인 명나라가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역으로 조선에도 그런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실적이고 실천적인 학문으로서의 유학이나 유교를 가까이 하는 대신 기복(祈福)신앙으로 빗나간 비례(非禮)의 현장을 통해 유교의 순정성이 훼손되는 모습은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로 인식한 경우였다. 유자이되 실용주의적 사고를 겸한 합리주의적 경세가로서의 최현이 보기에도 중국인들의 신앙은 궤도를 상당히 이탈해 있었던 것이다. 탐풍으로 인한 이도(吏道)의 붕괴, 인간적 도리나 예의를 망각한 백성들, 정책의 실패로 인한 민생의 파탄과 그로 인한 오랑캐의 침탈 등 명말 비정(秕政)의 근저에 비례(非禮)가 있었고, 그것들은 공고하게 구축되어 있던 중세적 질서를 허무는 요인들이었다. 최현은 권력의 힘으로 백성이나 타국 빈객들의 재물을 탈취하거나 오랑캐들이 침범하여 안보를 해치는 현실 등을 현장에서 목격하며 그것들이 예를 바탕으로 형성된 중세적 통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요인들로서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망국의 근원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조선 역시 지방관들의 탐학으로 민생이 어려워졌고, 안보를 소홀히 함으로써 임진왜란의 외침을 겪었으며, 그로 인해 중세질서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음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던 최현의 입장에서 그런 말기적 현상들이 중세질서의 본산인 명나라의 경우가 훨씬 더 심각하다는 점을 발견한 것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최현이 명나라 비정(秕政)의 원인으로 비례(非禮)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함으로써 유사한 상황에 빠져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조선 지배층을 경각시키고자 한 데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처럼 인재에게 중국 사행길은 단순한 여행길이 아니었고, 당연히 <<조천일록>>은 단순한 ‘사행 보고서’나 중국 여행기가 아니었다. 조선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할 현실적 방책이나 처방을 찾아보려는 ‘모색의 길’이자, 자신이 임금에게 올렸던 많은 소차(疏箚)들처럼 정치의 방향을 바로 잡도록 진언(進言)하는, 일종의 경세적(經世的/警世的] 기록이었다.

 

 

 

조규익・성영애・윤세형・정영문・양훈식・김지현・김성훈 공역, <<역주 조천일록>>, 학고방, 2020. 5./ 31,000원.

조규익・성영애・윤세형・정영문・양훈식・김지현・김성훈 공저. <<최현의 <<조천일록>> 세밀히 읽기>>, 학고방, 2020. 5./28,000원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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