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9. 11. 17. 05:51

, 성오 선생님!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비보입니까?

엊그제까지도 청청하시던 선생님께서 이렇게 홀홀히 떠나시다니요!!!

2019년 11월 8일의 이 비보는 부모님 소천 이후 최대의 충격으로 저를 후려쳤습니다.

 

인사동에서 선생님을 뵌 지난 6월 6일을 잊지 못합니다.

청년처럼 당당하신 모습으로 인사동 한 복판에서 저희 부부를 기다리시던 선생님을 잊지 못합니다. 반년만 지나면 ‘미수(米壽)’라고 말씀하시며 쓸쓸하게 웃으시던 선생님의 표정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569516350122180&id=100011914603684&sfnsn=mo

 

이제 저는 논문을 써서, 책을 써서, 누구에게 보여드려야 하나요?

제 일거수일투족을 응시하시리라 믿어온 선생님이 안 계신 이곳.

다시 저는 누구를 표준으로 스스로를 다잡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정신적으로 의지해온 선생님을 보내 드릴 수밖에 없는 지금.

저는 적지 않은 나이 육십 대를 질주하고 있습니다.

이제 날짜만 헤아릴 뿐 제게는 저를 지탱할 힘도 거친 바다를 항해해 나갈 등대도 없습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2019년 11월 11일, 선생님의 발인 날 아침

중국 절강대학 빈관의 객실에서

크게 울며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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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학술문2019. 9. 2. 16:36

*고전과의 대화: 계간 <<정형시학>> 24(2019 가을호)

 

 

죽어 이별의 노래 <가시리>

 

 

 

 

 

 

                                                                                                             조규익(숭실대 교수)

 

 

 

하나/「가시리 평설」 정전화(正典化)의 문제

 

“소박미와 함축미, 그 절절한 애원, 그 면면한 정한(情恨), 아울러 그 구법(句法) 그 장법(章法)을 따를만한 노래가 어디 있느뇨. 후인(後人)은 부질없이 다변(多辯)과 기교와 췌사(贅辭)와 기어(綺語)로써 혹은 수천어(數千語) 혹은 기백행(幾百行)을 늘어놓아 각(各)히 자기의 일편(一片)의 정한을 서(叙)하려 하되, 하나도 이 일편(一篇)의 의취(意趣)에서 더함이 없고 오히려 이 수행(數行)의 충곡(衷曲)을 못 미침이 많으니, 본가(本歌)야말로 동서문학(東西文學)의 별장(別章)의 압권(壓卷)이 아니랴.”<「가시리 평설」, <<여요전주(麗謠箋注)>>, 을유문화사, 1947, 424쪽>

 

이 언술은 고려속가(高麗俗歌) <가시리>에 대한 양주동 선생의 명쾌하면서도 자못 도발적이기까지 한 평가인데, 오늘날까지 후학들은 ‘그 평가의 무오류성’을 변함없이 신봉해 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그 평가의 합리성을 입증하고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고전시가 연구의 열기가 식어가고 있는 시대 조류의 와중에서 반대논리나 통합적 극복의 논리는 등장하지 못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 평가 내용의 핵심적 정서는 ‘사랑하는 남녀 가운데 남겨진 자가 떠나는 자에게 건네는 원망과 재회의 소망’, 말하자면 ‘살아 이별을 당하는 자의 지극한 심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

필자는 어린 시절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이 글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무엇보다 현란한 문체와 수사가 인상적이었고, 그 후 대학원 과정 이수 중 <<여요전주(麗謠箋注)>>(1947년 판)에 실린 그 글을 정독하면서 그 분의 생각에 좀 더 깊이 매몰되고 말았다. 「가시리 평설」이 <가시리> 해석의 정전으로 굳어지면서 지금까지 누구도 쉽사리 그 정의나 평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려 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필자의 이 글은 학술 논문이 아니고, 최소한 학술토론의 문건으로 제공될 가능성도 없는 소품이니, 이 글을 통해 <가시리>에 대한 기존 논의와 평가를 반박하거나 나만의 새롭고 참신한 견해를 제시하기에는 적잖이 조심스럽다. 최근 들어 필자는 우리 옛 노래(혹은 노래문학)들 가운데 상당수가 ‘살아 이별’ 특히 ‘사랑하는 당사자들의 헤어짐’보다는 ‘죽어 이별’의 넋두리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공무도하가>[혹은 <공후인>]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는 아내의 넋두리임이 분명하고, 현대문학 초기 김소월의 <진달래꽃>도 그 맥을 이은 ‘죽어 이별’의 노래임을 말한 바 있다. 그 맥락에서 <가시리>야말로 ‘살아 이별’의 노래가 아니라, 오히려 ‘죽어 이별’의 현장에서 내뱉던 넋두리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그런 넋두리가 아름다운 곡조에 실려 궁중악의 무대에까지 오르면서 뒷사람들에게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 노래’로 오해되었거나 살짝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지만, 그 원천 텍스트를 넋두리로 본다고 무조건 지나치다 탓할 필요는 없다. 비록 인상비평에 머물고 말지라도, 시조 창작의 다양한 담론들의 장(場)인 <<정형시학>>에 이 문제를 공론화 하려는 것은 현 시점에서 우리 전통 정서의 본질에 대한 탐색이나 그런 정서가 근・현대에 들어와 어떤 양상으로 예술화되었는지에 대한 모색이 절실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 이별의 콘텍스트

 

<가시리>를 ‘살아 이별’로 보는 양주동 선생의 생각은 다음의 글에 결정적으로 나타난다.

 

“처음 가신단 말씀을 들었을 때엔 그것이 오히려 농담(弄談)인 양 혹시 나를 울려 보려는 짐짓으로만 생각하였더니, 급기야 그것이 참인 줄을 알자, 또 얼마나 임께 기나긴 말씀을 하소연하였던고. 그러나 그것도 지금엔 모두 다 쓸데없는 말, 정작 임이 떠나시는 마당에 다시 무슨 경황으로 어젯 날의 기나긴 사연을 되풀이할꼬. 일체의 장황한 사설(辭說)은 지금엔 모두 췌사(贅辭)가 아니랴! 급박한 감정과 얼크러진 심서(心緖)는, 그러매로 일체의 군소리와 일체의 잔 생각을 거부하고, 다짜고짜로 원사(怨辭)로 돌진할 밖에 없는 것이다.”<「가시리 평설」, 424~425쪽>

 

양주동 선생이 <가시리>를 ‘살아 이별’, 그것도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로 단정하고 평설을 썼다는 점은 이 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쩌면 선생이 평설을 쓸 당시에 <가시리>가 ‘살아 이별’이냐 ‘죽어 이별’이냐의 문제로 살짝 갈등하셨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상상으로 예측해 보건대, 잠시 동안 갈등하신 뒤 예의 그 유쾌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쾌재를 부르시면서 즉각 당신의 생각을 내놓으셨으리라.

 

“‘살아 이별’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일시 나로부터 멀리 떠나가긴 하나, 가는 자의 마음이 바뀌면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지. <가시리>의 뒷부분[“붙잡아 두고 싶지마는/서운하면 아니 올세라/서러운 임 보내드리니/가시는 것처럼 돌아오소서”]좀 보게나. 이 사람아, ‘죽어 영이별’하는 상황에 ‘가는 것처럼 돌아오라’고 말할 수 있겠나?”

 

이렇게 그 분은 희희낙락 큰 소리 치셨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자. 사람이 죽었을 때 요즘은 의사가 맥을 짚어보거나 검안한 뒤 사망 선고를 내린다. 그런 다음 염을 하고 빈소로 옮긴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향촌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내 어린 시절의 경험에 비추어 말해 보자. 그 시절 사람이 죽고 나면 즉시 초혼제(招魂祭)를 지냈다. 그러나 초혼제를 지내기까지 거쳐야 할 절차가 있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마을 어른 한 분이 사자(死者)의 코앞에 솜털을 드리워 통기(通氣) 여부를 가늠하며 사망 여부를 판단했다. 설사 솜털이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즉각 ‘사망’이라 단정하지 않았다. 다음 절차는 사자의 옷가지를 들고 지붕으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휘두르며 큰 소리로 “고(皐) 아무개 복(復)! 복(復)! 복(復)!” 하면서 육신으로부터 빠져나간 혼을 길게 부르는, 슬프고 장엄한 의식을 행했다. 전통적으로 우리에게는 사람이 죽으면 콧구멍으로 영혼이 빠져나가 시신을 맴돌다가 북쪽 하늘로 날아간다는 믿음이 있었다. 왜 북쪽이었을까. 아마 사람이 죽은 뒤 묻힌다는 ‘북망산’에서 따온 방위개념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육신은 북망산으로, 영혼은 북쪽 하늘로’ 라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육신을 빠져나간 혼이 되돌아오면, 육신은 다시 전처럼 살아나게 된다고 믿었다. 그것이 환혼(還魂)이다. 그렇게 육신을 빠져나가 하늘나라로 가는 혼을 되돌리기 위해 부르는 행위가 초혼이다. 그래서 초혼과 환혼은 우리 전통사회에서 가장 슬프면서도 장엄한 의식이었고, 사자의 지친(至親)들은 그 순간 가장 크고 서럽게 울어야 했다. 그 때의 울음소리가 클수록 떠나가던 혼이 쉽게 듣고 돌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전통사회의 곡비(哭婢)도 실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무작정 울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했다. 떠나는 혼이 알아듣고 발길을 돌릴 만큼 간절하고 슬퍼야 했다. 그 순간의 말이 바로 넋두리다. 넋두리는 ‘넋[혼(魂)]+두리[환(還)]’, 즉 ‘떠나가는 혼을 되돌리는 말’이다. 남편이 죽는 순간 쪽진 머리를 풀어헤친 아낙네가 남편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자신의 가슴을 치며 “나 혼자 어찌 살라고 떠나십니까? 못 가십니다, 정녕 못 가십니다!”라고 울부짖는 그 말들이 바로 넋두리다.

<공무도하가>는 전형적인 ‘넋두리 문학’이고, 김소월의 <초혼>은 그야말로 초혼 행사를 시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김소월의 <초혼>과 긴밀하게 연관되는 노래가 <진달래꽃>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학자들은 <진달래꽃>이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시라 한다. 그 때의 이별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살아 이별’을 말하는 것임은 양주동 선생이 <가시리>를 ‘살아 이별’의 노래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 관점이다. 한국문학 연구가 한 세기 가까이 진행되고 있지만, 지금껏 그런 고정관념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다.

분명히 김소월의 <초혼>과 <진달래꽃>은 ‘죽어 이별’을 노래한 자매편들이고, <가시리>와 <진달래꽃>은 시대를 격하여 ‘죽어 이별’의 정서로 연결되는 노래 혹은 시문학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공무도하가>와 <초혼> 사이에 위치한 것이 <가시리>이고, <가시리>와 상통하는 ‘죽어 이별’의 노래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다.[*<진달래꽃>에 관해서는 다음 고에서 시조와 결부시켜 상론할 예정임.]

그런데 ‘넋두리 문학’의 화자는 예외 없이 여성이다. 전통적으로 넋두리는 여성 화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상이 났을 때 초혼은 남성이 주관하나 넋두리는 여성 전담이었다. 지붕에 올라가 사자의 옷을 흔들며 구만리장천을 향해 외치는 ‘초혼’은 굵은 목청을 지닌 남성만이 행할 수 있었다. 남성화자가 등장하는 김소월의 <초혼>을 읽어보시라. 그러면 우리 전통사회의 초혼 행사를 역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셋/<가시리>의 텍스트와 넋두리의 미학적 의미

 

자, 이제 <가시리>가 ‘죽어 이별’의 노래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 본문을 들어보기로 한다.

 

가시리 가시리잇고(①)

버리고 가시리잇고(②)

날러는 어찌 살라하고(③)

버리고 가시리잇고(④)

붙잡아 두고 싶지마는(⑤)

서운하면 아니 올세라(⑥)

서러운 임 보내드리니(⑦)

가시는 것처럼 돌아오소서(⑧)

 

<가시리>는 <<악장가사>>∙<<시용향악보>>∙<<악학편고>> 등 조선조 관찬(官撰) 악서(樂書)들에 실려 있다. 매 연 끝에는 “위 증즐가 태평성대”라는 후렴구가 붙어 있는데, 반복되는 그 부분을 제외하고 인용한 것이 바로 이 글의 텍스트이다. 내용상 이 후렴구는 <가시리>가 궁중악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위’는 감탄사, ‘증즐가’는 현악기를 긁어내는 소리, ‘태평성대’는 ‘임금이 통치하는 지금의 시대가 태평하다’는 의례적 찬사로서 이 노래가 궁중정재(宮中呈才)에서 불리던 노래임을 보여주는 단서들이다. 고려조와 조선조 궁중에서는 왕을 비롯 지배층을 위한 가・무・악(歌舞樂) 융합의 궁중무대예술이 공연되었고, <가시리>는 무대예술인 속악정재(俗樂呈才)들 가운데 하나에서 불린 노래였다.

노래의 ①~④는 넋두리의 전형으로서 <공무도하가>의 그것과 일치한다. ⑤~⑧은 넋두리에 덧붙어 그 미학적 완성도를 높여주는 부가적 부분이다. 만약 ①~④가 전부라면, 이 노래는 단순한 넋두리를 넘어설 수 없다. 그럴 경우 이 노래는 시적 자아의 실존적 좌절이나 운명의 장벽에 대한 한탄으로 그치기 때문이다. 단순한 넋두리를 넘어 서고자 하는 시적 언술을 통해 상황을 합리화 하거나 죽음에 대한 자아의 초극의지를 피력하기 위해 덧붙인 것이 후반(⑤~⑧)이다. ‘죽어 떠나는 임’과 이별하며 맞이한 실존적 상황을 아름다운 노래로 승화시킨 힘은 창작 및 가창계층의 철학이나 미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①~④의 단순 비극미는 ⑤~⑧의 부가적 미학으로 승화되었다.

넋두리 자체인 ①~④와 연결시키지 않을 경우, ⑤~⑧은 단순히 ‘살아 이별’의 현장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당부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넋두리인 ①~④를 복합 심리적으로 세련화 시킨 것이 ⑤~⑧임을 즉시 알아차릴 수 있게 한 것도 ‘죽어 이별’을 ‘살아 이별’인 듯 위장함으로써 죽음의 절대성을 비켜 가고자 한 미학적 장치의 힘이었다.

⑤~⑧의 ‘붙잡아 두고 싶다’는 것은 보내는 사람 뿐 아니라 떠나는 사람도 갖고 있었을 현실적 삶에 대한 집착을 암시한다. 그러나 한 번 떠나면 그만인 죽음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화자로서는 그 절망감으로부터 자아를 지켜야 했고, 그 구체적 방어기제의 작용으로 나타난 표현이 바로 ‘서운하면 아니 올지 모른다’는 언술이다. 사실 이 경우의 ‘서운함’이란 ‘죽어 떠나는 자’가 갖고 있을 마음 상태다. 화자로서는 ‘죽어 떠나는 임’이 자신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떠나길 바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렇게 표현한 것은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임이기에 그가 돌아오지 못할 명분 정도는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당치 않은 이유이겠지만, ‘죽어 떠나는 임’이 자신에게 서운함을 가지는 것처럼 그려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신’이 ‘죽어 떠나는 임’에게 전혀 마음의 짐을 느낄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이 노래의 화자는 ‘죽어 이별한’ 사람을 ‘나를 싫어해서 떠난’ 사람으로 치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바꿔치기’란 ‘죽어 떠나는 자’에 대하여 ‘살아남은 자’가 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일 수 있으며, ‘죽어 떠나는 자’에 대한 ‘살아남은 자’의 심리적 부채의식을 줄일 수 있는 최고의 방책이기도 했다. 상대가 ‘서러운 임’이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실 ‘살아남은 자’와 ‘죽어 떠나는 자’ 가운데 누가 이 말의 주체가 되느냐에 따라 서러움의 의미는 달라진다. 전자가 주체일 경우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죽음의 절대성 때문에 서러움을 느낀 것이고, 후자가 주체일 경우 이승의 삶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단절되는 데서 서러움을 느낀 것이다. 그러한 내재적 의미의 모호성이나 분열적 자아는 ⑧에서 매끄럽게 통합된다.

‘가시는 것처럼 돌아오라’는 말 속에서 서로 다르게 표현된 두 주체[남겨진 나/떠나는 임]의 감정은 하나로 합쳐지고 그 이전 단계의 애매성 또한 사라진다. 그래서 ⑧ 또한 넋두리[환혼]이자 초혼이 되는 것이다. ‘이승의 미련을 훌훌 털고 떠나신 것처럼 나를 힘들게 하지 말고 다시 돌아오라’는 당부야말로 전통 시대 초혼의 모티프와 하등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넷/<가시리>는 ‘죽어 이별’의 노래다

 

<가시리>는 궁중의 속악정재에서 불린 노래, 즉 속악가사였다. 사실 궁중 무대예술인 정재는 임금을 대상으로 하던 예술이었다. 그런 만큼 여악(女樂)들은 춤과 노래로 임금을 송축하고, 예술적 한계 안에서 ‘연모의 정’을 암시하기도 했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상호텍스트의 측면에서 면밀히 관찰하지 않을 경우, <가시리>가 ‘살아 이별’의 노래인지 ‘죽어 이별’의 노래인지 알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노래에서 화자가 의도한 궁극적 결과는 ‘죽음의 초극’이다. 전통 넋두리 노래를 전반에 제시하면서 죽음의 비극성을 바탕에 깔았고, 후반의 분열적 언술을 통해 죽음을 초극하고자 한 것이다. 전반의 넋두리는 사랑의 종말이라는 비극을 초래했으나, 후반의 언술을 통해 죽음이 초극되면서, 그것은 사랑으로 전환되었고, 결국 그 사랑은 극대화 되었다. 따라서 사랑과 죽음은 모순적 관계이자 화합의 관계이고, 궁극적 화합의 불가피성을 내포하면서 다시 분열의 미로로 빠져들기도 하는 관계이다.

무대 위의 여악(女樂)들이 임금에게 수(壽)와 복(福)을 바치는 서왕모 등 신선의 퍼스나를 갖추는 것은 당시 당악(唐樂) 정재들에 흔한 장치였고, 당악정재와 상호 텍스트의 관계를 맺고 있던 속악정재들의 경우도 임금에 대한 송도(頌禱)나 축수(祝壽)는 공통된 모티프였다. 그러니 무대 위에 등장한 여악들은 임금에게 최고의 사랑을 바쳐야 했다. 평범하지 않은, 아니 오히려 극적인 사랑을 요구했다면, ‘죽음으로 패러프레이즈된 사랑’도 가능한 것이고, 넋두리의 외피(外皮)를 쓴 사랑담론 또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가시리>는 단순히 ‘살아 이별’의 노래가 아니라, ‘죽어 이별’의 노래,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죽음을 노래하는 넋두리를 바탕으로 죽음을 극복해낸’ 노래이다.

텍스트의 외면 만으로는 ‘살아 이별’인지 ‘죽어 이별’인지 애매모호하다. 이면까지 뒤집어 봐야 양자는 대립적이면서도 궁극적으로 통합되는 주제들임을 알 수 있다. 죽음을 노래한 이면에 궁극적인 사랑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노래를 ‘죽어 이별’의 노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해석처럼 이것을 ‘살아 이별’의 노래로 본다면, 그 속에 들어 있는 죽음과 죽음에 대한 초극의지를 간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시리>를 좀 더 복합적으로 살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가시리>의 이면을 들여다 볼 만큼 우리의 해석적 안목은 충분히 확장・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조규익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아너 펠로우 교수(Honor Soongsil Fellowship Professor). 인문대 학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소장. 도남국문학상・성산학술상・한국시조학술상 등을 수상. LG 연암재단 해외연구교수로 UCLA에서 ‘재미한인 이민문학’을, 풀브라이트 학자(Fulbright Scholar)로 OSU에서 ‘해외한인문학과 비교문학’을 연구. <<조선조 악장 연구>>・󰡔북<<문학사와 고전시가>>・<<동동: 궁중 융합무대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 외 다수의 저・편・역서와 논문들을 발표했음.

홈페이지(http://kicho.pe.kr) 및 블로그(http://kicho.tistory.com) 참조.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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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학술문2019. 7. 20. 08:33

 

 *이 글은 <<동동動動: 궁중 융합무대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민속원/<<한국문학과 예술>> 30집 게재)에 대한 서평으로, 필자의 허락을 받고 퍼왔습니다.

 

 

궁중 융합무대예술 ‘동동(動動)’의 본질에 대한 모색과 결실-<<동동動動: 궁중 융합무대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민속원)을 읽고-

 

 

                                                                                                     하경숙(선문대 교양학부 계약제 교수)

 

 

이 책은 고려조와 조선조의 궁중 연향에서 공연되던 가무악 융합 무대예술 ‘동동’에 관한 공동저술(저자: 조규익·문숙희·손선숙·성영애)이다. ‘동동’은 고려 속악정재들 가운데 하나로서 아박(牙拍)이란 이름으로 조선조에서도 연행되던 가무악(歌舞樂) 융합의 궁중무대예술이다. 최근까지 <동동>은 ‘문자 텍스트로서의 동동’일 뿐이었고, 그것은 ‘고려속요·고려가요·여요·려가’등의 명칭으로 부르던 시문학 텍스트일 뿐이었다. 초창기 연구자들이 명칭에 대하여 갖고 있던 편견과 그로부터 확립된 문제들을 타개(打開)하고자 문학·음악·무용을 연구하는 저자들이 ‘동동’ 정재(呈才)의 융합예술적 성격을 분석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했다. 중세왕조의 임금이나 고귀한 존재를 대상으로 토로한 불멸의 사랑과 불변의 서정이 융합 무대예술로 응집되었다는 것이 ‘동동’ 논의의 출발점이다. 특히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시간이 흘러도 계절이 바뀌어도 바치는 자의 사랑은 변함없음을 가·무·악으로 표현”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가무악 융합의 미학적 본질을 점검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결국 ‘동동’은 전통무대예술의 진수로 꽃피어났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저자(조규익·문숙희·손선숙·성영애)들은 <<대악후보>> ‘동동’의 리듬을 해석하여 선율을 찾고, 그 선율에 <<악학궤범(樂學軌範)>> 소재 <동동>의 노랫말을 구체적으로 붙여, 그 노래와 무용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속악정재 ‘동동’이 지닌 가무악 융합의 본질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각 장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저자들의 의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책은 전체 7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총서」, 2부는 「<동동>- 텍스트의 정체」, 3부는 「<동동>의 장르적 속성과 원형 모색」, 4부는 「조선전기 ‘동동’의 가무악 융합 양상」, 5부는 「조선전기 아박무 복원연구」, 6부는 「총결」, 7부는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노랫말 원문과 현대어 역, 복원음악 악보가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문헌과 재현 아박무(牙拍舞)를 비교·검토하여 상이점을 찾고, 조선전기 ‘동동’ 중기의 무용구조와 복원에 필요한 내용을 상세히 살피고 있다.

 

1부에서는 속악정재 ‘동동’의 성격을 살펴 그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또한 장르적 속성이나 명칭 등과 함께 학계에서 미해결된 속가의 문화·예술적 측면을 면밀히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동동’이 그동안 하나의 공연물로 연구되지 못한 원인은 악보와 무보 해석의 불완전성에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동동’의 음악을 찾아야 하고, 그 음악에 노랫말을 융합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노래와 무용을 융합함으로써 가무악 융합의 속악정재 ‘동동’을 온전히 복원”(21쪽)하는 과정을 통해 기존의 담론을 뛰어넘어, 정재의 악곡과 노랫말 모두가 ‘동동’이라는 구체적인 융합예술작품으로 구현되는 핵심임을 밝히고 있다.

 

2부 「<동동>-텍스트의 정체」(조규익)에서는 ‘동동 텍스트가 지닌 문화·예술적 본질과 지향성’을 찾고 ‘송도지사(頌禱之詞)와 선어(仙語)’의 관계, ‘놀이와 선어의 상관성’등을 규명했다. 저자(조규익)가 “‘동동’은 생산 시점 이후 현재까지 노랫말과 음악·무용의 인접분야들이 하나로 융합된 텍스트로 존재해왔고, 그 예술·문화적 콘텍스트 양상 또한 적어도 근대 이전까지는 유지”(62쪽)되었다고 밝혀, 텍스트 하나만을 적출하여 해석하는 작업의 위험성을 강조한다. 이는 원천적 오류를 초래하는 일로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콘텍스트(context) 의 현실을 살피는 작업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동동’에 송도의 말이 많고, 그것들은 ‘신선의 말’을 본뜬 것이라 한 <<고려사 악지>>의 언급이야말로 속악정재 ‘동동’이 당시의 당악정재들과 상호텍스트적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한다는 것이 저자(조규익)의 주장이다. 즉 당대 궁중악 중 당악과 속악은 ‘임금의 수와 복’을 송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행되던 예술장르였고, 그 범주에서 공연되던 정재들은 송도적 모티프의 구현을 지향하던 공연예술의 형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동놀이[動動之戱]’라 지칭한 <<고려사 악지>> 속악조에 따르면 동동이 지닌 놀이적 성격이 상세히 나타나고 있으며, 동시에 융합예술체로서의 놀이적 면모를 보여준다. 놀이에 상정된 대상은 임금이며 원시 제천행사들에서 공연되던 놀이들이 후대의 정재들에 이르러 그것들의 의례화·질서화를 통하여 완성된 예술의 모습으로 구현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당악정재의 창작원리나 동기·구조 등과, ‘동동’을 비롯한 속악정재들이 상호텍스트적 연관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 등을 상세히 보여준다. 이는 속악정재 ‘동동’이 당악정재의 악장들을 본뜬 송도를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패러프레이즈함으로써 속악정재 나름의 독자성을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화론적 측면으로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제 3부 「동동의 장르적 속성과 원형 모색」(성영애)에서는 <동동>의 장르적 속성 및 그간 문제가 되어온 <동동>과 <장생포>와의 관련성 등을 살폈고, <동동>의 원형 모색과 함께 그동안 미해결된 문제들의 방향을 찾고자 했다. 저자(성영애)는 “<동동>은 궁중에서 공연된 국가음악으로 정재의 악곡과 노랫말 모두 <동동>이란 명칭 아래 역사서나 악서(樂書)에 존재해왔고 존재하고 있다”(77쪽)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장르 명칭을 ‘고려속악가사’로 부르고, 그 줄임말로 ‘고려속가’를 사용하는 것이 <동동>의 장르적 속성을 나타내는 정확한 용어임을 밝히고 있다. 저자(성영애)는 그간 논란이 많았던 <동동>과 장생포와의 관계를 다양한 문헌의 비교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고려사>> 악지와 열전의 기록을 중심으로 곡명과 창작자, 왜구 출몰지역으로 살펴본 내용을 통해 <동동>은 관찬서와 일반 문집에 기록된 <장생포>와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동국문헌비고>>를 수보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상세히 밝혔다. 또한 <동동>은 궁중연례악으로서 회례연(會禮宴)·사신연使臣宴)·나례연(儺禮宴)에서 송축이나 송도의 의도로 연행되었으며, 특히 나례연 중 ‘처용지희(處容之戱)’ 안에서 ‘동동지희’가 연행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동동’은 악·가·무를 통해서 임금에게 송도의 뜻을 바치는 종합예술작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문해(文解) 위주로만 연구해온 상황이 그간 <동동>의 원형을 밝히는데 어려움을 주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제 4부 「조선전기 ‘동동’의 가무악 융합 양상」(문숙희)은 ‘동동’의 선율을 찾고, 그 선율에 노랫말을 융합하여 ‘동동’ 노래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노래와 무용을 융합하여 가·무·악으로 합쳐진 융합적 존재로서의 ‘동동’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저자(문숙희)는 “‘동동’은 장구점 단위가 소절에 해당되고 악보에 가사도 없고 음 또한 퍼져 있어서, 악보에서 기본박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113쪽)고 밝히면서 연구가 쉽지 않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기본박 찾기를 통한 방법’으로 해석된 리듬을 찾고, 그 중 ‘동동’과 같은 장단의 악곡을 통해 ‘동동’의 리듬과 정간시가를 찾는 노력을 기울여 결과를 도출하고 이에 ‘동동’의 특질을 찾아 보여주었다.

 

                                               

동동 복원공연 실황

 

“‘동동’은 정읍을 편곡하여 만든 노래로 보고 있다. 정읍과 같은 이름을 공유하기도 하고 또 많은 선율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두 악곡에는 가사가 다르듯이 다른 부분도 있다.”(138쪽)고 설명하면서 두 악보를 비교한 결과를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동동’ 선율은 ‘정읍’의 선율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대악후보>> ‘동동’ 악보는 현악기 악보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동동’ 악보에 ‘강’이란 용어가 직접 사용되지 않았지만, 음악적인 내용으로 볼 때 ‘동동’은 진작류 형식에 해당한다고 밝히며 ‘동동’에서 강이란 가사의 구를 싣고 있는 선율, 하나의 악구에 해당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동동’의 정간시가는 일정한 길이로 되어있지 않고, 5정간과 3정간이 각각 같은 길이의 3분박 한 박으로 해석되며 노랫말 텍스트 <동동>은 선율이 가사에 비해 매우 길 뿐만 아니라, 가사를 천천히 진행하면서 음을 길게 늘여 부르는 노래라고 설명했다.

 

제 5부 「조선전기 아박무 복원연구」(손선숙)는 문헌 고증을 통해 전기 아박무를 복원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아박무는 고려시대에 ‘동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조선전기에 명칭이 아박으로 바뀐 뒤 조선후기를 거쳐 현재까지 이른다. 이에 <<악학궤범>>에 기록된 조선전기 아박무를 검토, 기존의 재현 아박무를 점검하고 문헌과 재현 아박무를 비교 검토하여 복원 관점으로 기록구조와 진행구조를 살펴 복원에 필요한 실제 수용범위와 근거에 대해 살피고 있다.

 

저자(손선숙)는 “기존에 재현된 아박무는 기존의 선행연구자들이 해석한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여 매월 가사에 따라 춤에 변화를 주는 등 다양한 춤사위를 구성하여 추었는데, 2월사부터 8월사까지만 새로운 춤을 추고, 10월사부터 12월사까지는 <<악학궤범>>에 기록된 ‘북향-대무-배무’를 추었다.”(155쪽)고 밝혔다. 이는 재현 때 수용한 변무의 원칙에 위배되고, 문헌 기록대로 재현하였다는 원칙에도 위배되어, 결국 재현 아박무는 그 어느 원칙에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저자가 <<악학궤범>>의 변무가 새로운 춤이 아니라 ‘북향-대무-배무’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북향·대무·배무’할 때 박을 치는 횟수와 무용 진행구조 관점으로 분석했기 때문임을 밝혔다. 또한 ‘기존 재현 아박무’는 가사 및 춤 진행에 따른 무구 사용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고, 유절형식에 따른 ‘변무’의 원칙성에 위배되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아박무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구성인 대형 이동 위치와 방향, 춤사위가 필요한데, <<악학궤범>>에는 춤사위와 무용수들이 선 위치를 제외한 나머지 내용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166쪽)고 밝혔다. 특히 이 책에서는 아박무 복원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내용들과 보충되어야 함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 <<악학궤범>>에 기록된 ‘동동’ 중기의 아박무는 ‘무진-북향무-대무-북향-배무-환북향-무퇴’로 추어야 하고, 이와 같은 춤을 무려 11회 반복하며 추는 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악학궤범>>과 같은 고무보를 바탕으로 아박무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문헌 고증이 선행되어야 하고, 궁중정재의 재현 및 복원을 위해 춤의 기록이 문헌으로 전해지는 <<악학궤범>>의 내용을 단순히 이론상으로 이해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관점으로 접근하여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궁중왕실문예시스템’ 마련과 궁중 정재복원전문가의 배출을 위해서도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 6부 「총결」에서는 가무악 융합 예술체 ‘동동’의 본질을 분석하고 원래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고려조 궁중에서 시작된 속악정재 ‘동동’이 조선조에 들어와 ‘아박’으로 개명되면서 변화를 모색했고, 새롭게 추구된 변화가 그 뒷시대로 이어지면서 다양한 미학적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설명도 그래서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미학적 측면은 지속과 변이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는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음악과 무용의 텍스트를 온전하게 복원하고자 하는 목표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노랫말 텍스트 ‘동동’을 정확히 구현하기 위해서는 인접분야인 음악 텍스트와 무용 텍스트를 이해해야 하고, 이들이 하나로 융합된 텍스트 전체를 이해·분석하기 위해서는 콘텍스트로서 당대의 예술적 상황을 이해해야 하는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융합 텍스트로서의 ‘동동’을 이해하기 위해 근대 이전까지 조선 왕조에서 공연된 재현 정재들을 통해 가무악 융합의 예술적·문화적 분위기를 이해·분석·수용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동동’이 단순히 문자 텍스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무악 융합 무대예술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동동’은 여성의 예술이다. 단순히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왕조의 임금이나 고귀한 존재를 대상으로 토로한 불멸의 사랑과 정서가 결합된 총체적인 종합예술임을 규명해낸 것이다. 저자(조규익·문숙희·손선숙·성영애)들은 동동의 예술미학을 구현하기 위해 그동안 기울여온 노력과, 그에 따른 다양한 결과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노랫말 텍스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콘텍스트로서의 악곡과 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동안 연구자들은 간과해왔다. 고전시가가 어떤 양상으로 실연(實演)되어 왔는지에 대한 통합적 시각이나 시야를 충분히 갖출 필요가 있음을 저자들은 강조한다. 그것들 가운데 상당수 작품들의 생산이나 향유계층이 민중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함으로써, 그것들이 궁중에서 임금을 비롯한 지배계층의 연향에 쓰였다는 사실을 그동안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음악학계 및 무용학계와 협업의 필요성과 절실함을 느낀 저자들이 착수한 작업들의 결실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런 모색과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진 이 책이야말로 ‘고려속요 동동’에서 ‘속악정재 동동’으로 인식을 전환함으로써 그 원형과 위상을 새롭게 찾아낸 구체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저자들은 ‘텍스트 지평의 전환’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텍스트의 본질을 외면한 채 무조건 답습해 오던 기존의 오류들과 다양한 문제들에 주목하고, 텍스트의 ‘분리에서 융합’으로 전환한 다음 지속적인 모색과 반성을 통해 만들어낸 연구 결과들 덕에 우리는 ‘동동’의 융합예술적 본질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동동’은 단순한 그리움과 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융합적인 궁중무대예술작품이다. 그 본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차원 높은 예술적 경지를 경험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동동 저서

 

동동 해석(조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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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9. 7. 20. 07:37

 

 

                                                <<넓고 깊게 지식을 나누다>>-박이정 30년사

 

 

‘책 허기’를 채워 준 은인

 

                                                                                                                        조규익(숭실대 교수)

 

음식과 책에 굶주리며 자랐다는 내 말을 요즘 젊은 세대들은 믿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이 땅의 베이비부머 세대는 어린 시절부터 음식과 책에 대한 굶주림의 트라우마를 공유한다. 사실 친구들 가운데 나는 유독 더했다. 너덜너덜한 교과서를 제외하면, 글자들이 인쇄된 비료 부대나 장에 가셨던 아버지가 간간이 들고 오시던 ‘농민의 벗’이 유일한 ‘읽을거리’였다. 책에 관한한 끔찍스런 암흑의 세월이었다. 간신히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책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긴 어려웠다. 근근이 아르바이트로 번 돈에서 하숙비를 제외하고 남는 돈은 전공 자료집의 할부대금으로 깨끗이 소진되곤 했다. 먹고, 입고, 잠자는 것을 수도승처럼 하면서도 책을 사 모으며 ‘골병 깊어지는’ 청춘을 보냈다. 그런 가난 속에서 해군사관학교와 경남대학교 교수를 거쳐 숭실대학교에 부임한 2년쯤 뒤부터 연구실로 찾아온 서광문화사의 박찬익 사장을 만나기 시작했고, 비로소 팔자로 생각되던 ‘책 허기’에서 약간 벗어날 수 있었다.

 

박 사장은 새로운 영인 자료집들이 나올 때마다 그것들의 묶음을 두 손에 무겁게 든 채로 내 방을 찾아왔다. 그는 내 표정에서 책 욕심, 자료 욕심을 어떻게 읽어냈을까. 만날 때마다 그는 나의 빈 곳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갓 우려낸 녹차처럼 따뜻하고 담담했다. 서울 유수의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박 사장은 유명한 은사들을 언급하며 자신의 전공에 자부심을 보여주곤 했다. 시골에서 간신히 학업을 마친 ‘촌놈’으로서는 그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는 게 고작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대부분 갖고 있던 ‘사제 간의 추억들’을 나는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득의 달인’으로 생각되던 그로부터 배우는 게 많았다. 박 사장의 방문 횟수가 늘어날수록 자료들은 내 빈 연구실을 차곡차곡 채우기 시작했다. 내 호주머니가 빈 듯싶으면, ‘사정 되는 대로 주시면 된다’고 안심시키는 그의 따뜻한 말들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단색 양장의 영인본들은 대부분 선학들의 논문 속에서나 구경하던 자료들이었다. 그런 자료들을 갖고 논문을 쓰면서 비로소 내 콤플렉스는 한 낱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실 선학들이 신활자로 옮겨놓은 옛 자료들을 대하며 늘 ‘암죽’을 떠올리던 나였다. 곡식의 가루를 밥물에 타서 끓인 유아용 죽이 암죽이다. 내 어릴 적 시골에서는 모유가 나오지 않거나 갓 젖 뗀 아가에게 엄마가 우물우물 씹어 죽처럼 만들어 먹여주시던 ‘그것’을 암죽이라 했다. 당시에 간간이 선학들이 신활자로 바꾸어 출판하던 자료집들은 내게 일종의 암죽이었다. 빨리 암죽의 단계를 뛰어 건너 딱딱하고 거친 곡물 그 자체를 내 ‘이빨’로 씹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박 사장을 의지하게 된 것도 당시 내가 ‘학문적 이유기(離乳期)’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제야 고백하건대, 박 사장이 놓고 간 자료들을 어루만지며 한 나절을 상념에 빠진 적도 있었다!

 

교수 생활 몇 십 년 해오면서 만용이라도 생겼던 것일까. 겁 없이 여러 권의 책들을 냈는데, 그 가운데 박이정이 만들어 주신 두 책은 잊을 수 없다. 󰡔만횡청류의 미학󰡕(1996년 초판/2009년 제2차 수정증보판)과 󰡔17세기 국문 사행록 죽천행록󰡕(2002년)은 나름의 학문적 도정을 보여주는, 내 분신들이다. 고전시가를 공부하면서 갖게 된 모색과 돌파구를 함께 제시한 것이 전자이고, 사행록(使行錄)에 관심을 갖게 된 후 발굴한 새 자료를 야심차게^^ 학계에 제시한 것이 후자이다.

이른바 ‘시조’와 악장을 통해 학계에 진출한 입장이지만, 국문학계의 의식과 담론들에서 명목과 실질이 잘 들어맞지 않음을 느끼는 건 지금도 여전하다. 초창기 어른들이 잘못 끼우신 ‘첫 단추’의 관성 때문이리라. 학계에서는 굳건하게 ‘사설시조’로 호칭하지만, 󰡔진본 청구영언󰡕 편찬자 김천택의 원래 의도가 ‘사설시조’ 아닌 ‘만횡청류’에 담겨 있다는 점을 필두로 그에 관한 모든 것을 그 한 권의 책에서 다루고자 했다. 지금도 누군가들은 음습한 곳에서 이 책의 내용을 무더기로 도용하면서도 그들의 참고문헌에는 이 책을 올리지 않는다. 깨끗지 못한 학계의 풍토 속에 ‘사설시조’ 아닌 ‘만횡청류’의 문예미학을 제시하여 고전시가의 이름을 바로잡겠노라는 나의 패기를 알아준 곳은 박이정 뿐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고서(古書)를 찾아다니는 습관이 생긴 것도 책에 대한 굶주림의 트라우마로부터 나온 것임은 물론이다. 탐서(探書)의 여정에서 만난 최고의 고서 수집가 이현조 박사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죽천행록󰡕을 입수했으며, 그것을 연구・분석한 것이 후자이다. 비록 ‘건・곤’ 두 편 중 곤 편만을 입수했으나, 자료를 어루만지며 며칠 간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생애 최고의 흥분을 경험했다. 그 덕이었을까. 국어국문학회에서의 논문 발표와 기고, 책 출간까지 나로서는 최단시간에 해치운(?) 작업이었다. 박이정 박 사장의 적극적인 호응과 도움이 결정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최근 국립해양박물관에서 발견한 건 편을 김윤아 박사의 해제로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의 학술지 󰡔한국문학과 예술󰡕 28집에 실을 수 있었으니, 그 소중한 인연 덕분이리라.

 

***

 

학문적 도정을 마무리하고 있는 요즈음. 보잘 것 없는 나를 이룬 모든 것들을 가끔씩 떠올려 본다. 오늘의 나를 만든 9할은 선조들이 남겨주신 작품들과 선학들의 연구들, 그리고 그것들을 모으고 가공하여 눈앞에 디밀어 준 학술출판 사업자들의 덕이다. 그 중심에 박이정과 박찬익 사장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이날까지 나는 학자로 그는 출판문화 사업자로 동행해 왔음을 오늘 비로소 깨닫는다. 그 세월이 30년이다! 앞으로 30년도 우리는 함께 청청한 모습으로 그 길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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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9. 5. 12. 14:21

 

, 소재영 선생님!

 

 

 

                                                                                                               조규익

 

 

 

책 표지

 

 

소재영 선생님께서 새로 내신 책(<<성오수록(省吾隨錄)>>)을 보내 오셨다. 성오(省吾)는 선생님의 아호(雅號)로서 <<논어>> 「학이」편의 “일일삼성오신(一日三省吾身/나는 하루에 세 번씩 내 몸을 반성한다)”에서 따오신 호칭이다. 선생님의 설명(“내년이면 미수를 맞는다. 그간 내가 지나온 삶을 어떤 형식으로든 한번 정리하고 뒤돌아보아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글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 출간하는 <<성오수록(省吾隨錄)>>은 일단 내 삶의 모습들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편집된 것이며, 여기에 그간 써온 글들을 모아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에 따르면, 이 책은 선생님의 일생을 조감한 책이다. 즉 ‘만남과 체험’을 중심으로 일생을 서술하신 셈이니, 자서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소재영 선생님

 

 

나는 책 앞에서 30분 정도 묵상을 했다. 선생님과 함께 한 숭실에서의 10년 세월, 그 후 현재까지 마음으로 교유해온 20여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선생님은 1999년 정년퇴임하셨으니, 학교를 떠나신지 올해로 21년째. 내년에 미수(米壽)를 맞으신다. 갑자기 가슴 속으로 자책과 회한이 밀려들었다. 그동안 늘 곁에 계신 것으로 착각한 채 무심히 지나버린 세월이었다. 그 사이 사모님을 사별하셨고, 혼자 지내오시다가 새로운 친구를 만나시어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신다는 소식까지 들었는데, 그 분마저 사별하셨음을 지금서야 알게 되었다. 지금 느끼는 회한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돌아가실 때의 감정과는 또 다른 그것이었다. 제자는 아니지만 스승으로 존경하며 사숙(私淑)해온 지난 세월. 행복했고 철없었다. 그 세월이 영속되리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허무하다. 그동안 나는 쓸데없는 일들에 매여 살아왔다는 증거일까.

 

추억 속 선생님의 모습은 ‘반듯함과 따뜻함’으로 요약된다. 가깝고 먼 사람을 불문하고 늘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그러면서도 지켜야할 거리는 늘 지키셨다. 선생님의 곁에 끊이지 않고 사람들이 모이는,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무엇보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지키고자 하신 철학은 선생님의 최대 장점이셨다. 세대의 차이를 넘어 일본과 중국의 대단한 학자들은 대부분 선생님의 팬들이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만나는 학자들은 모두 선생님의 안부를 여쭙고, 선생님과의 인연을 자랑한다.

 

사실 외국 학자들과의 인연을 지속시키기가 어려운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는 나다. 성격이나 취향의 종족적 차이가 현격하고, 각자가 속한 문화의 차이가 두드러지며, 각자의 학문적 지향 또한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차이들을 갈아 없앨 만큼 자주 만날 수도 없지 않은가. 학문적 실력은 물론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의 투자에 큰 인내와 끈기 또한 겸해야 해외 학자들과 만날 수 있고, 설혹 그런 것들을 갖추고 있다 해도 온유한 마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그들을 친구로 만드는 일이다. 해외의 유수 학자들을 보시는 눈이 범상치 않고, 한 번 연을 맺은 사람들과는 끝까지 좋은 관계로 지내시는 온유함과 끈기를 갖추셨기에 유수 해외 학자들이 선생님을 지기(知己)로 생각하고 따르는 것이리라. 술을 입에 대지도 못하시면서 중국의 학자들과 그런 관계를 유지해 오신 것은 대단한 일이다.

 

숭실에 오면서 나는 선생님의 학문적 자세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대학, 대학원 시절 누구로부터도 배우지 못한 학자적 자세를 선생님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선 근학(勤學)의 자세다. 선생님은 늘 자료를 모으시고, 논문을 쓰셨으며, 학회 활동에 열중하셨다. 그 때까지 나는 논문 한 편 간신히 쓰거나 발표해놓곤 ‘이제 한동안 쉬어도 된다’고 드러눕기 일쑤였다. 그런데, 선생님을 엿보면서 나는 깜짝 놀라 기준을 바꾸게 되었다. 논문은 쉼 없이 쓰는 것, 논문 쓰기 위해서는 자료를 열심히 모으고 읽어야 한다는 것, 남의 글과 말을 열심히 읽고 들어야 한다는 것 등등, 나름대로의 수칙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선생님을 추월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유일한 방안이 ‘논문 쓰는 작업장을 두 군데로 늘이는 일’이었다. 연구실과 집에서 각각 다른 논문들을 동시에 진행해보자는 것이었다. 아이디어는 적지 않게 있으니, 작업을 두 곳에서 진행하면 생산성이 훨씬 높아지리라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실행해보았으나, 내 스스로 지쳐서 결국 선생님을 따르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겸허한 마음으로 선생님의 발걸음 흉내나 내보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이젠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나보나 훌륭한 사람을 따라가거나 추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그게 안 되면, 무조건 존경하라!”고.

 

***

 

선생님의 의연하신 학자적 자세와 후학에 대한 사랑 덕분에 나는 이때까지 나를 다잡아 올 수 있었다. 학문을 어떻게 해야 하며, 학자의 행동거지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생님으로부터 ‘확실히’ 배웠는데, 감사의 말씀을 드릴 기회가 없었다. 고백의 타이밍을 놓친 다음 복잡한 세상사에 휘말려 여기까지 밀려오게 되었다.

 

‘무엇이 소중헌디?’라고 묻는다면, 나는 정말로 대답이 궁해진다. 그 때는 ‘중하다’고, ‘내 자존심을 손상시킬 수 없다’고 강변하며 고집을 세웠지만,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될 뿐이다. 학자로서의 걸음마와 옹알이를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셈인데, 그 은혜를 깡그리 잊고 지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내 인생도 석양으로 접어들고 있지 않은가.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성오수록>>이 매서운 회초리로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선생님을 본받아 나도 <<백규수록(白圭隨錄)>>을 쓸 수 있을까. 얼얼한 종아리를 매만지며, 새삼 부끄러운 내 지나간 시간대를 반추해본다.

 

성오 선생님,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ㅠㅠ

 

2019. 5. 12.

 

선생님을 사숙(私淑)해온 후학

 

조규익 절하고 올림

 

 

추기(追記)

 

선생님의 글귀 가운데 눈물을 훔치며 읽은 부분을 아래에 적어본다.

 

“언젠가 전도서에서 보았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한 세상이 지나고 다른 세상이 오도다.’ 사랑하는 내 아내 김숙희, 다시 사랑했던 김미혜자 약사, 부디 천국에서 평안하고 행복한 삶 누리기 바랍니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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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2019. 4. 30. 13:32

 

                                                                                                                     조규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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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동動動: 궁중 융합무대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을 내며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에서 올해의 첫 책인 <<동동動動: 궁중 융합무대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민속원)이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학술총서 58’로 나왔다. 고려조와 조선조의 궁중 연향에서 공연되던 가∙무∙악 융합 무대예술 ‘동동’에 관한 공동저술(저자: 조규익∙문숙희∙손선숙∙성영애)이다. 이미 2015년에도 우리(조규익∙문숙희∙손선숙)는 궁중 예술 역사상 최고봉으로 인정받고 있는 ‘봉래의鳳來儀’를 유사한 관점과 방법론으로 연구한 저서(<<세종대왕의 봉래의, 그 복원과 해석>>, 민속원/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47)를 낸 바 있다. 양자 모두 각 분야의 연구자들이 들러붙어 분석한 결과를 바탕으로 무대공연을 갖고, 그 결과를 엮어 낸 것들이다. 전자와 마찬가지로 이 책도 규모는 비록 작으나, 학계에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턱 없이’ 크다. 사실 기존의 학문적 관습이나 섹트의식에 매몰되어있는 동학들이 개권(開卷)할 가능성은 희박하고, 설사 슬그머니 열어본다 해도 가납(嘉納)될 확률은 더더욱 희박함에도 할 말이 많은 우리였다.

 

최근까지 <동동>은 국어국문학과 은사님들로부터 배운 ‘문자 텍스트로서의 동동’일 뿐이었고, 그것은 고려속요∙고려가요∙여요∙려가’ 등의 명칭으로 부르던 시문학 텍스트일 뿐이었다. 초창기 연구자들이 명칭에 대하여 갖고 있는 편견과 그로부터 확립된 논리구조가 별 수정 없이 대물림되어 내려오고 있는 형편이다. 본 연구소에서는 그런 문제를 타개하고자 문학∙음악∙무용을 연구하는 4인이 머리를 맞대고 ‘동동’ 정재의 융합적 성격을 분석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했고, 작년 12월 초에 그 중간 결과를 무대로 올렸으며, 그 결과를 보충하고 다듬어 지금의 책으로 묶어내게 된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이나 방향을 점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머리말을 첨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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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지난 해 12월, 우리는 그동안 공부해온 ‘동동’을 무대(“동동,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사랑의 염원이여!”/국가지정무형문화재전수회관 풍류극장/2018년12월 1일)에 올렸다. 고려와 조선조 궁중연향에서 속악으로 연행되던 ‘동동’을 가․무․악의 융합예술 그대로 재현해 본 것이다. ‘동동’이 고려사 악지(「악 2/속악」 ‘동동’)와 악학궤범(권 3 「고려사 악지 속악정재」 ‘동동’/권 5 「성종조 향악정재도의」 ‘아박’)에 그 존재를 드러낸 것은 수백 년 전의 일. 그러나 그 맥박과 온기는 아직도 살아 있었다.

 

"마음속의 뜻을 말로 나타내면 시가 되나, 말만으로 부족하니 탄식하고, 탄식만으로 부족하니 길게 노래하고, 길게 노래하는 것만으로 부족하니 알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흔들어 춤추고 발을 움직여 뛰게 된다."

 

그 옛날 <<모시毛詩>> 「대서大序」의 이 단언斷言이야말로 훗날 ‘동동’의 예술성 해명을 위해 예비한 것이나 아니었을까? ‘말(시), 노래, 춤’ 등 메시지 전달의 수단들은 대체재代替財나 독립재獨立財 아닌 상호 보완재補完財들이다. 개별적으로보다 함께 쓰면 전달의 효율성과 예술성이 훨씬 높아지기 때문이다. ‘동동’의 융합예술미 대신 “고려속요 <동동> 운운”하며 조각난 텍스트만을 공부해오던 지난날들. 고전시가의 콘텍스트에 대한 무지가 불러 온 무명無明의 시간대였다.

 

‘동동’은 여성의 예술이다. 임에게 바치고픈 자신의 존재와 마음을 설명하기엔 ‘사랑’이란 개념어가 지극히 제한적이고 추상적이었으리라. 그래서 노래로 음악으로 춤으로 들려주고 보여주려 한 것이나 아닐까? 중세왕조의 임금이나 고귀한 존재를 대상으로 토로한 불멸의 사랑과 불변의 서정이 융합 무대예술 ‘동동’의 핵심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간이 흘러도 계절이 바뀌어도 바치는 자의 사랑은 변함없음을 가․무․악으로 표현하려 애쓴 점이 참으로 놀랍지 아니한가.

 

문학, 음악, 무용 세 분야의 행복한 융합을 꿈꾸며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를 출범시켰고, 우리 역사상 최고․최대의 궁중악무 ‘봉래의’를 무대(“세종의 꿈, 봉황의 춤사위를 타고 하늘로 오르다!”/국립국악원/2013년 11월 21일)에 올리기도 했다. 그 감동과 추억을 떠올리며 감행해본 지난 해 겨울의 그 무대는 실연實演과 연구발표를 통해 ‘동동’의 예술미학을 구현하기 위한 실험적 자리였다. 그리고 오늘, 그 결과를 이렇게 엮어낸다. ‘고려속요 동동’에서 ‘속악정재 동동’으로, ‘분리에서 융합’으로! 단언컨대, ‘텍스트 지평의 전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귀한 고악보 및 사진자료들의 사용을 허락해주신 국립국악원․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국립중앙박물관, 꿈과 땀의 결실을 아름다운 책으로 엮어주신 민속원 홍종화 사장님과 신나래 선생님 등께 감사드리며, 강호제현의 가르침을 고대한다.

 

2019. 4. 1.

 

지은이들을 대표하여

 

조규익

 

민속원, 2019. 4. 20. 25,000원

 

 

 

 

 

 

 

<부기(附記)>

 

고전시가를 연구해오면서 깨닫는 바가 없지 않았던 나는 2005년에 한국전통문예연구소를 개설했다. 그 뒤 한국문예연구소로 개명했고, 몇 년 뒤 다시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전시가들 가운데 고려속가들과 조선조 궁중악장이 원래는 정재(呈才)라는 무대예술의 한 부분인 노랫말들이었음을, 문학도라고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고, 결국 이 연구소의 개설로 이끌었던 것이다. 정재의 한 부분인 노랫말 텍스트가 흡사 전부인양 착각한 채 그 텍스트만을 공부한다는 것이 잘못임을 학계의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노랫말 텍스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콘텍스트로서의 악곡과 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문학연구자 누구도 알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고전시가가 어떤 양상으로 실연(實演)되어 왔는지에 대한 통합적 시각이나 시야를 충분히 갖추고 있는 선학들이 드물었다. 그것들 가운데 상당수 작품들의 생산이나 향유계층이 민중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함으로써, 그것들이 궁중에서 임금을 비롯한 지배계층의 연향에 쓰였다는 사실은 더더욱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음악학계 및 무용학계와의 협업이 절실함을 느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 연유로 탁월한 한국음악 연구자 문숙희 박사, 앞서 가던 한국무용 연구 및 실연자(實演者) 손선숙 박사가 연구소 창립 초기부터 가세하여 활발한 활동을 통해 연구소의 발전을 견인하게 된 것이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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