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8. 3. 31. 17:00

 

그간 북한에 대하여 어렴풋하나마 갖고 있던 내 나름의 감(感)을 논리화시킬 만한 지식도 정보도 없어 애만 태워오던 중이었다.  오늘 비로소 가슴이 뻥 뚫리는 설명을 접했다. 현 집권세력이 '몽상가들임'은 상식처럼 되어 있는 사실이지만, 그 이유를 이처럼 명쾌하게 짚어준 논객이 없었다. 제대로 된 전문가를 비로소 만난 기쁨,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30/2018033001775.html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3. 20. 08:17

어리석은 대한민국 외교부

 

 

 

강대국들 사이에 끼여 굴욕을 당해 온 역사가 참으로 길다.

21세기 초반에 들어와서도 상황이 호전되기는커녕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이른바 정치를 한다는 자들의 전략 없음, 소신 없음, 센스 없음때문이다.

대통령이란 자가 뻘짓을 하다가 쫓겨나 국가를 누란(累卵)의 위기에 몰아넣은 지 몇 달.

그 공백을 장관과 관료들이라도 메워가며 급한 불은 꺼야 할 것 아닌가.

 

최근 미국의 국무장관이 다녀갔다.

한탄스러운 일이지만, 미국과 중국만큼 우리 생사문제의 키를 쥐고 있는 강대국이 있는가.

그리고 미 국무부 만큼 우리 이해관계의 키를 쥐고 있는 부서가 있는가.

 

그 장관이 와서 우리의 정부 요인들과 첫 대면을 했는데, 공식적인 회담만 하고 만찬을 하지 않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의 장관이 거절했다하고, 그 쪽에서는 한국에서 제의조차 없었다고 밝힌 점이다. 둘 다 맞기도 하고, 둘 다 틀리기도 할 것이다. 아마 우리 쪽에서는 슬쩍 지나가는 말로 저녁 한 번 하실래요?”라는 제의 겸 인사치레의 말을 건넸을 것이고, 그것을 만찬 제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 쪽에서는 그것을 공식 의전절차 아닌 가벼운 인사치레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참으로 우려스런 일이 이어서 벌어졌다. 엊그제 미 국무장관은 일본은 가장 중요한 동맹국이고, 한국은 중요한 파트너라고 말했다 한다. 미국과 유럽인들이 일본을 중시하고 좋아한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 나 같은 민초도 느껴서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그들 장관의 입으로 이런 말을 내뱉게 해야 하는가? 그들 마음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든 나로서는 알 수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그런 내심이 공식적인 멘트로 나온 원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보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북한의 핵 장난이 우리로서는 초미(焦眉)의 급한 불 아닌가.

 

일본에서 잘 대접 받았으나, 한국에서는 제의조차 없었다는 그 저녁 한 끼 때문에, 틸러슨 장관의 그 말이 나왔으리라 믿고 싶진 않다. 그러나 세상사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모든 일은 사람의 기분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그동안의 내 경험이다. 저녁 한 끼 대접하는 것이 무에 그리 어렵더란 말이냐? 상대방이 예의상 사양한다 하여 그럼, 잘 됐네. 돈 굳었네!’라고 쾌재를 부르며 물러섰더란 말이냐? 운동장만큼 큰 회담 테이블에서 핑퐁처럼 주고받는 말들은 그야말로 외교적 언사들일 뿐이다. ‘진짜 협상은 밥상머리에서 이루어진다는 상식 만 외교부 당국자들이 알고 있었어도 이런 바보 같은 짓은 저지르지 않았으리라. 그들은 대통령이 없다고 자신들의 일을 그렇게 대충대충 해치운 것일까.

 

외교부 당국자들이여! 1950110일 미 국무 장관 애치슨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있는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이 알래스카-일본-오키나와-필리핀 선임을 대외적으로 천명해버린 것이다. 이른바 애치슨 라인’. 북한이 오판하여 625를 일으킨 결정적 계기였다. 한국이 미국의 태평양 방위권에서 제외되었으니, 안심하고 침공한 것이다.

 

그 애치슨과 지금의 틸러슨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똑 같은 미국 국무장관이고 똑 같이 일본을 좋아하되, 한국에 대해서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저 밥 한 그릇 함께 먹는 것이 세계사를 논하는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반문하려는가? 지금의 한국이 가장 중요한 동맹아닌 중요한 파트너란 말을 잘 해석해 보라. 만약 그들이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버릴 수 있는 대상으로 추락할 수도 있다는 속뜻이 숨어 있음을 모른다면, 외교부 당국자들은 당장 옷을 벗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찔리는 바는 있었는지, 외교부에서는 의미 부여할 내용 아냐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한다. 가관이다.

 

큰 불은 작은 불씨에서 시작되고, 제방의 붕괴는 실낱같은 누수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미국 새 행정부의 국무장관이 중요한 사명을 갖고 동북아를 순방하는데, 우리 국익을 지키기 위한 밥상머리 협상조차 성사시키지 못한 외교부 장관은 당장 물러나야 한다. 그러지 않아도 쫓겨난 대통령의 가장 큰 오점이 인사의 난맥이었는데, 외교부에서 그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제발, 정신들 좀 바짝 차려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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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6. 8. 7. 22:04

중국에 가려는 여섯 명의 야당 초선의원들에게

 

 

 

시경소아(小雅)편의 상체(常棣)라는 시가 있다.

4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兄弟䦧于牆   형제가 담장 안에서는 싸우지만

外禦其侮      밖으로는 (힘을 합하여)남의 업신여김을 막는다네

每有良朋      매양 좋은 벗이 있으나

烝也無戎      돕는 바가 없도다

 

지금 이 시를 읽는 마음이 곤혹스럽다. 어쩜 이렇게 우리나라의 형편을 잘 꼬집었을까.

우리는 같은 편임에도 늘 싸워왔다. 오히려 강한 외국에 붙어 제 민족을 못살게 굴어온 예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역사상 우리가 저질러온 편싸움(당파싸움)을 거론해 왔고, 당파싸움으로 기울어지는 나라(한국역사교육연구회, 한국가우스)라는 책도 이왕 나왔으니, 이 자리에서까지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 싸드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정부가 싸드 배치 계획을 발표하고 나서 지역주민들은 반발하고 있으며, 이때다 싶은 일부 인사들이 주민들을 부추기며 불난 곳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 급기야 누구의 표현대로 철없는야당의 초선의원 여섯 명이 중국에 가겠다고 나섰다. 이미 중국은 싸드라는 것을 빌미로 우리를 길들이려는 속내를 드러냈다. 북한의 핵을 막아 달라 간청해왔건만, 그간 손 놓고 있었거나 암암리에 방조하고 있다가 우리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마저 뺏으려 드는 중국이다. 동맹체제의 바탕 위에 배치하고자 하는 싸드는 한미 양국의 합치된 현실분석의 소산이다. 힘으로 당할 수 없는 미국에는 한 마디 못하면서 대한민국에는 완력으로 나오는 중국의 행태를 전형적인 깡패행위로 보는 입장은 이미 지난 글에서 밝힌 바 있다. 덩치는 말할 수 없이 크되, 대의(大義)나 명분(名分)은 아예 찾아볼 수 없는 그들의 지금 모습이 개탄스럽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 그 글의 핵심이었다.

 

북한이 핵을 만들어 날이면 날마다 위협을 가하고 있는 이상 비록 완전치 못하지만 싸드라도 배치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필자 같은 장삼이사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싸드를 안고 살아가게 될 지역 주민들이 반발하

는 것은 혹 그럴 수 있다 해도, 국정의 한 축을 담당한 야당들이나 일부 시민단체, 이른바 학자라는 사람들이 대안도 없이 나서서 무조건 정부를 성토하는 일은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 일들이야말로 지금껏 이어져 내려온 편싸움의 반복이거나, 어떤 사람들의 주장대로 여적(與敵) 혹은 이적(利敵)’ 행위로 이해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언필칭 외교적으로 해결하라는 주문을 남발하지만, 그간 우리가 해온 일이 외교 아닌경우가 있었던가. 그간 벌여온 외교로 되지 않아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는 우리가 이제 할 수 있는 일이란, 최소한의 방패라도 마련해야 곧 날아올 깡패의 주먹을 일부라도 막아낼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런 방비마저 하지 말라는 것은 북한의 위협에 굴복하여 나라를 내주거나 처참한 파괴를 감수하라는 말과 같으니, 과연 그들을 우리 편으로 볼 수 있겠는가.

 

대안도 없이 이런 기회를 정권쟁탈의 호기로 잡아, 무모한 공격이나 가하고 있는 거라면, 그 역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사악하긴 마찬가지다.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다면, 최소한 나라를 구하는 문제에서만큼은 힘을 합쳐 대응하는 것이 옳다. 성주를 찾아가 격앙된 주민들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이고, 공산당의 명령 하에 한 목소리를 내는 중국에 찾아가 싸드 배치를 반대하겠다는 국회의원들은 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이란 말인가. 중국이 언제 우리를 도와 북한을 꿇어앉힌 적이 있으며, 앞으로 그렇게 할 거라는 조짐이라도 내 비친 적이 있는 나라인가. 앞의 글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그들의 이른바 중국몽(中國夢)’은 한반도까지 자신들의 품에 넣어 중화제국을 재현하겠다는 포부에 지나지 않는다. 한반도를 품에 넣으면 일본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고, 일본을 꼼짝 못하게 하면 미국도 힘을 못 쓰게 되는 상황을 계산에 넣고 있다는 점이야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 이미 대미(對美) 병참기지로 굳어진 북한과, 경제로 옭아놓은 남한까지 집어 삼키면, 중국은 G2 중의 하나가 아니라 곧바로 G1에 등극하여 이 지역을 쥐고 흔들며 타고난 '깡패성'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게 되는 것이다

 

***

 

정책의 같고 다름이나 장단점을 놓고 나라 안에서는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사실 치열한 논쟁과 다툼을 통해 최선의 길을 찾는 게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도 좋다. 그러나 깡패가 문 앞에 서서 협박을 하는 지금. 서로 패거리의 소리(小利)를 탐하여 싸워야 옳은가. 작은 몽둥이라도 함께 만들어 밀려와 있는 적을 상대해야 될 것 아닌가. 형제끼리 담장 안에서는 얼마든지 싸울 수 있다. 그러나 밖에서 우리를 업신여길 때, 최소한 그들의 편을 들어 동족을 적으로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함께 뜻을 합해 바깥의 적과 싸워, 우선 내 집을 지키는 게 인간으로서의 도리다. 국회의원이란 막중한 자리를 차고앉은 여섯 명의 초선들이 당장 내일 중국으로 달려간다는데, 두고 볼 일이다. 그들이 과연 강한 외국에 빌붙어 우리 조상들이 저질러온 수치스런 패싸움의 과거를 반복할지, 아니면 밤중에라도 자신들의 경솔함을 뉘우치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올지. 두 눈 크게 뜨고 지켜 볼 일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7. 26. 17:45

싸드(THAAD)와 중국의 커밍아웃

 

 

 

 

근자 싸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우리 사회의 이슈로 떠오르면서 우리 모두 그간 잊고 있던 중국의 정체와 본질을 아프게 깨닫는 중이다. 유사 이래 우리는 단 하루도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무슨 논리로 합리화하려해도, 중국과의 관계는 항상 침략과 굴종/지배와 피지배의 식민주의적 패러다임에 갇힌 채 지속되어 왔다. 그들이 자신들의 족속을 우리의 왕으로 세운 적도, 우리 땅을 봉토(封土)로 활용한 적도 없건만, ‘사대(事大)’라는 중세적 외교의 명분 아래 그들은 식민주의자들 이상의 폭압과 전횡을 부려 온 것이 사실이다.

 

혹자는 그들로부터 한자와 한문을 들여왔고, 유교불교도교 및 제자백가 등 사상이나 사유체계를 도입했으니, ‘가르침과 배움이란 선한 관계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역시 크게 보아 지배와 억압을 정당화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어 왔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 굴종의 역사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전혀 바뀌지 않고, 오히려 진화하는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625 때 마오쩌뚱이 김일성을 도와 한반도의 통일을 결정적으로 막은 항미원조(抗美援朝)’의 타산적 명분이야말로 지금까지 이 지역의 정치적이념적 지형을 주도해온 굴종적 역사의 또다른 구도라 할 수 있다.  

 

항미란 무엇인가. 자신들의 눈앞에서 통일 한반도를 재현시킬만한 힘을 지닌 미국에게 대항하겠다는 것이다. ‘원조가 말만으로는 자신들의 괴뢰인 북한을 돕겠다는 것인데, 처음부터 그 말의 이면에는 북한을 살려서 미국에 대항하는 주구(走狗)로 삼겠다는 뜻이 들어 있었고, 그 해석은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말하자면 이미 마오쩌뚱 당시부터 북한의 효용가치는 미국에 대한 견제 카드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대규모 원군(援軍)을 출병시켜 망하기 일보직전의 김일성을 구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한반도 전체를 김일성 치하에 놓이도록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좀 더 확실한 대미 병참기지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625에 참전한 마오쩌뚱의 원대한(?)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 지금까지 중국은 시종일관 북한의 후원자 혹은 후견인 노릇을 하면서 독점적으로 열매를 따왔다. 그런 그들의 행태는 개혁 개방 이후라고 달라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물건 팔고 돈 벌어오는 새 시장 남한과 거래를 시작했으니, 그들로서는 이제 한반도에 관한한 알 먹고 꿩도 먹는단계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 냉전시대에는 냉전시대대로, 탈냉전시대에는 탈냉전시대대로 한반도는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일 뿐이다.

 

그로부터 몇 발 더 내디딘 지점에서 주목해야 할 사항이 바로 시진핑의 행보와 2006년부터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대국굴기(大國崛起)’의 결합이다. 최근 중국은 '샤오캉(小康)'에서 '화평(和平)굴기'를 거쳐 비로소 '대국굴기'의 본심을 단계적으로 만방에 드러내 왔다. 그것이 시진핑 체제의 등장과 함께 떠오른 '중국몽(中國夢)'과 직결되는 말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Chinese Dream! 일견 멋진 듯하지만, 주변의 소국들을 아연 긴장시킬 만큼 고약한 것이 바로 그 말이다. 만주벌판도, 한반도도, 일본도, 동남아도 모두 손아귀에 쥐고 호령했던 그 옛날 '천자의 나라' 즉 중화제국을 복원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지금 중국의 전권을 거머쥔 채 실질적으로 황제 행세를 하고 있는 시진핑의 꿈이자 중국 지배계층의 꿈이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의 집권세력도 '한국 따위'는 애당초 안중에 두고 있지 않다. 늘 중원의 정치적 향배를 예의주시하며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싸워온 게 조선이었고 한국 아니던가. 모처럼 실용외교를 추구하던 광해군을 당당하게(?) 제거하고 인조를 옹립한 서인 반정세력이 향한 곳은 망해가는 명나라였다. 서슬 퍼렇게 중원을 먹어가던 누르하치를 애써 외면하며 한사코 망해가던 명나라에 빌붙고자 한 반정세력의 눈에는 오직 작은 한반도 안에서의 보잘 것 없는 권력만이 관심사였을 뿐 민족이나 국가, 백성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백성들이야 그들의 말발굽에 짓밟혀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식의 어이없는 패거리들, 힘을 가진 어느 누가 중원의 지배자가 되어 우리에게 압박을 가해오든 그에게 빌붙어 자신들의 목숨과 권력만 부지하면 그만인 '망종(亡種)'들이었다. 그들과 단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군상이 바로 지금의 이른바 '정치인들'이다. 아무런 식견도 밸도 없으면서 알량한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뒤집어 쓴 채 권력과 돈만 탐한다는 점에서 17세기의 그들과 정확히 부합하는 한심한 '불량배'들이다. 국민들을 편 갈라 싸움질시키는 행태를 보면, 오히려 당시의 그들보다 훨씬 더 사악하고 음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니, 중국은 중국대로, 일본은 일본대로, 북한은 북한대로 우리를 얕보고 덤비는 것 아닌가.

 

2005년 탈북자들에 대한 부당한 횡포를 항의하기 위해 중국 본토에서 기자회견을 하던 김문수 전 의원이 무도한 중국 공안들에 의해 폭행을 당한 사건을 기억들 하시는지? 나는 1624년 혹독한 겨울 명나라의 관원들에게 수모를 당하던 주청사행의 정사(正使) 죽천 이덕형(李德泂)의 사건을 김문수 의원의 사건과 비교하며 민족의 자존심이란 제목의 글을 조선일보(2005. 1. 17.)에 기고한 바 있고, 중국 당국에 감금되었다가 풀려난 김영환 씨의 사건을 통해 김문수 의원 사건이후 전혀 바뀌지 않은 중국의 태도를 간파하고 중국은 무도(無道)'깡패국가', 세계 평화의 최대 걸림돌이다!”라는 제목의 글을 이 블로그(2012. 8. 1.)에 올린 바 있다. 통탄스럽게도, '1624년2005년2012년'을 거쳐 드디어 2016년의 싸드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한국이 제 나라 제 국민을 지키겠다고 싸드를 배치하려는데, 못하도록 위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중국이다. 그들의 눈에 한국은 자기네 나라의 한 성()에 불과할 뿐, '독립된 국가'가 아닌 것일까. 그간 핵을 개발하겠다고 광분하는 북한을 제재하겠노라고 선언한 것은 그야말로 제스처였고, 어떻게든 북한을 살려서 미국에게 달려드는 사냥개로 만들겠다는 것이 진정한 속내였던 것이다. 뼈다귀 몇 개 던져 놓으면 저희들끼리 물고 뜯는 싸움질로 날들을 지새울 게 뻔한 남한 쯤 굴복시키는 일이야 '식은 죽 먹기'라는 판단도 저들 내부적으로는 이미 서 있으리라.

 

***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를 선언한 미국이 일본, 한국과 손을 잡으면서 가장 큰 타격을 받게 된 것은 시진핑의 이른바 '중국몽'이다. 바야흐로 자신들의 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 한국. 이미 품에 안겨있는 북한과 남한을 동시에 집어 삼키면, 일본쯤이야 큰 문제 아니라는 계산이 서 있었으리라. 이처럼 중국몽의 실현을 통해 세계의 중심 즉 '중화대국(中華大國)'으로 굴기해야겠는데, 일이 하나로 뭉치면 그 꿈은 자칫 '백일몽(白日夢)'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어려운 현실과 마주친 것이다. 제재를 이행하는 척 적당히 세계의 눈을 속이며 북한으로 하여금 핵을 개발하여 미국에 맞서게 하려는 중국으로서는 그런 꼼수까지 간파되고 말았으니,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 당황함과 분노를 누구에게 옮길까. <<논어(論語)>>옹야편(雍也篇)'불천노(不遷怒: 이쪽에게 성낼 것을 저쪽에게 옮기지 말라)'는 남한을 향해 수백기의 미사일을 배치해 놓았다는 산동성 노나라 출신의 공자께서 하신 말씀이다. 땅덩어리만 크다고 대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먹만 세다고 리더가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유교의 핵심은 도()와 덕()이다. 무도(無道)하고 부덕(不)한 개인은 깡패나 강도일 수밖에 없고, 그런 나라는 깡패국가나 강도국가일 수밖에 없다. 중국이 중국몽을 실현하려면 우선 깡패국가의 굴레를 벗고 주변 국가들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존경 받을 만한 도와 덕도 없으면서 아무리 미사일을 많이 만들고 항공모함이나 전투기를 많이 만든들, 종당에는 고철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는 진리. 지금 당장 시진핑 주석과 중국의 지도층은 그 간단한 진리를 역사로부터 배우기 바란다.

Posted by kicho
출간소식2015. 7. 3. 11:59

 

 

 

 

 

 

 

 

지난 몇 년 간 악장문학과 해외 한인문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틈틈이 북한에서 나온 문학사들을 읽어 왔습니다. 그리고 간간이 그에 관한 제 생각들을 정리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고전시가들을 중심으로 몇 편의 논문들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책에서 강조한 것처럼 북한사람들 특히 학자들의 생각이 너무나 경직되어 가뭄에 실개천 마르듯문학작품의 분석이나 해석에서는 금방 바닥을 드러낸다는 점이 안타까웠습니다. 이른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나 주체적 사실주의만으로 무궁무진한 문학작품의 이면적 의미를 퍼 올리기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들 사유(思惟)의 정형성은 침대에 키를 맞추어 발을 잘라내던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몇 종 되지도 않지만, 그들의 문학사를 다 읽고 더 많은 글을 쓰다가는 수많은 동어반복(同語反覆)’의 함정에 빠질지 모르겠다는 우려 때문에, 당분간 쉬어가기로 했습니다. 제 사유의 또 다른 틀이 생성되어 이전에 보이지 않던 그들 문학사의 이면적 의미들이 보일 때쯤 다시 쟁기를 들고 나설 생각입니다.

 

여기에 이 책의 머리말을 이곳에 옮겨 놓습니다.

 

 

머리말

 

남북한은 말과 글자, 그리고 역사를 공유한다. 그래서 이 땅의 단일민족은 역사공동체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단과 이질화의 세월이 길어지면서 역사 또한 양분되고 말았다. 민족에게 남겨진 역사적 사실들은 하나이되, 그에 대한 해석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런 남북한 역사 이질화의 근원은 이념이다. 처음에 통치이념으로 사회주의를 받아들인 북한은 한 발 더 나아가 주체사상을 만들었고, 그로 인해 역사의 이질화는 더욱 심화되었다.

 

북한에서 이른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나 주체적 사실주의의 잣대는 그런 것들이 없던 시기의 옛 문학이나 지금의 창작문학에 가리지 않고 적용되었다. 옛 문학에 대해서는 해석의 도구로, 지금의 문학에 대해서는 창작과 비평의 원리로! ‘김일성의 교시’, ‘김정일의 지적과 함께 제시된 것이 강령으로서의 사회주의 미학 혹은 주체미학이었다. 문학작품이든 문학사이든 획일화의 감옥에 가둬버린 것이다.

 

우리 고전시가를 통해 그 실상의 일부나마 확인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 이 글이고, 일부 학자들이 고창해 온 통일문학사의 서술이 허구라는 점도 이 공부를 통해 얻은 결론이다. 북한의 문학사()를 이 땅의 다수 문학사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해주면 될 일이지, 다양성을 추구해온 남한의 문학사들까지 굳이 주체미학의 형틀에 묶인 북한식 문학사로 획일화시킬 필요야 있겠는가.

 

문학사에도 시대의 소임이 주어진다. 시대정신이나 미학을 벗어나기 힘든 것이 문학사라는 뜻이다. 각자 자기 시대의 목소리로 해석한 문학사를 읽으려 하기 때문이다. 통일 후 문학사 아카이브에는 지금까지 쏟아져 나온 남한의 문학사들과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북한의 문학사()가 그들먹하게 들어차겠지만, ‘문학사 서술의 역사를 연구하는 극소수의 학자들이나 그것들을 찾게 될 것이다.

 

책을 멋지게 만들어주신 보고사 김흥국 사장님과 편집부 이순민 선생께 감사드린다. 아울러, 해외에서 학업을 마치고 패기 넘치는 교수로 뉴욕대학(New York University)에 입성한 큰 아이(경현)와 현대건설에서 훌륭한 기업인의 꿈을 키우고 있는 작은 아이(원정)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담아 이 책을 건넨다.

 

을미년 한여름

백규서옥 주인

조규익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문학사>>

 

 

 


북한에서 발간된 <<조선문학사>>

 

 

 


북한에서 발간된 고전 작품들

 

 

 


북한에서 발간된 고전 작품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0. 17. 22:01

[서평] 조규익, 조선조 악장 연구(새문사, 2014)

 

 

 

본질 탐구로 길어낸 악장 연구의 새로운 이정표

 

 

 

 

 

                                                                             박수밀(한양대 국문학과)

 

 

1.

조규익 교수의 조선조 악장 연구(2014)는 저자가 수십 년간 줄기차게 매달려온 악장 연구의 3부작 완결판이다. 악장은 고전시가에서 자립적인 위상을 지닌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연구하는 학자는 극히 적다. 연구 초기 장르상의 귀속이 애매했을 뿐더러 특정한 시기에만 나타났다 사라진 장르라는 점, 소수 계층의 욕망을 대변한 승리자의 노래라는 관점이 작용한 결과이다. 저자가 지적해 왔듯이 악장은 아부문학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진 결과 학자들의 외면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3권의 악장 연구서를 간행해 왔다. 첫 연구서인 선초악장 문학 연구1990년도에 간행되었으니 최소한 족히 삼십년 이상을 악장 연구에 매달려온 셈이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삼십 년 이상 지속적으로 꾸준한 성과를 보여주는 학자도 드물거니와 소외된 문학에 대해 지속적인 애정을 쏟는 일도 쉽지 않다. 기왕이면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영역에서 주목받는 글을 쓰고 싶은 것이 연구자들의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저자는 주위의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그다지 건질 것이 없어 보이는 악장 연구에 매달려왔다. 이 집념이 묘한 흥미를 끈다. 저자는 성산학술상, 도남국문학상, 한국시조학술상 등의 이력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고전시가에서 탁월한 연구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 학자가 아니던가. 저자는 이번 저술이 25년 악장 연구사에 대한 마무리라고 고백했다. 과연 오랫동안 악장 연구를 진행하면서 저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수십 년간 한 우물을 판 노고는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연구의 햇수와 연구의 질은 별개의 문제이므로 연구서가 얼마만큼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지, 저자의 문제의식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꼼꼼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2.

악장에 대한 본격적인 저자의 첫 연구서라 할 선초악장 문학 연구(1990)은 선초 악장의 형성 및 장르적 성격을 밝히고 악장의 국문학 장르상의 위상에 대해 논한 저술이다. 악장에 대한 학계의 인식이 부정적인 상황에서 악장의 위상을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선초 악장 연구서의 바이블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로부터 9년 뒤엔 조선조 악장의 문예미학(2005)을 간행하여 악장의 가치와 전개 양상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었다. 이 책에서는 조선조 악장의 현상과 미적 본질, 조선조 악장과 왕조의 현실, 개인의식과 집단이념의 조화, 조선조 악장의 흐름 등을 밝혔다. 저자는 종합예술이라는 관점에서 악장의 독자적 미학을 치밀하게 탐구, 악장에 대한 편견과 오류를 해소하고 악장을 경세의 문학으로 끌어올렸다.

이번에 펴낸 조선조 악장 연구는 악장 연구사를 마무리 짓는 세 번째 연구서이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기존 연구에 새로운 보완의 시각을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 그 동안의 악장 연구에 대한 저자의 성과를 종합하고 아악악장과 향당악악장에 해당하는 개별 악장들의 성격과 주제의식에 대해 분석함으로써 악장의 연구 폭을 크게 확장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악장연구를 통해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고전시가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을 제안하고 있다.

먼저는 연구서의 구성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었다. 5부가 총론에 해당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는 4부로 이루어진 셈이다. 1부에서는 조선조 악장의 성격을 밝혔는데, 저자는 조선조 악장이 지속과 변이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이 지속인가? 고려조 악장의 음악적 측면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무엇이 변이인가? 조선왕조라는 특정 집단의 이념을 강조한 새로운 내용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곧 조선조 악장은 고려조에서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아악이나 아악악장들과 함께 고려조에서 수용한 삼국 이래 속악의 악장들이 조선조에서 새롭게 제작된 노래들과 합쳐진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악장을 크게 아악악장과 향 당악 악장으로 나눈다. 각종 제향 악장이 전자라면 각종 연향 악장은 후자에 속한다. 2부와 3부는 아악 악장과 향 당악 악장의 성격을 다룬 것이다. 2부의 아악악장에 대해서는 악장의 중세적 문명론의 표준과 보편성의 확보라는 관점에서, 3부의 향, 당악 악장은 조선 왕조의 문화적 독자성과 정체성의 확보라는 관점에서 살폈다. 아악악장은 종묘제례, 문묘제례, 사직제례, 선농제례 등 제례에 쓰인 악장을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조선조는 문묘제례와 종묘제례를 통해 왕조의 정치적 이념적 정당성을 주장하고 왕조 존립의 보편적 가치와 당위성을 선양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시경>, <주역> 등에서 악장의 주요 문구나 모티프를 직접 차용해 악장으로 쓰거나 혹은 선행 악장들의 구절이나 모티프 등을 차용해 선초 악장에 사용해 왔다. 곧 아악악장을 통해 동아시아적 중세적 문명론의 표준과 보편성을 확보하려 했다는 것이다. <문선왕 악장>, <사직악장>, <선농악장> <선잠악장>, <풍운뇌우 악장>을 분석하여 이러한 주장에 대한 논거를 확보한다.

이에 비해 3장의 향 당악 악장에서는 조선조 악장의 독자성을 살핀다. <문소전 악장>, <석전음복연 악장>, <창수지곡 악장>, <경근지곡 악장>, <오륜가>, <봉래의 악장> 등을 다루었다. 당악 악장에서는 우리의 고유한 노래 장르를 악장으로 수용함으로써 우리만의 독자적이고 특수한 미의식을 담아냈다고 주장했다. 이들 노래에서 발견되는 텍스트의 구성이나 주제의식의 실험성은 아악악장과 구별되는 지점이며 악장이 고전시가사 전개에 큰 기여를 한 점이라고 보았다.

4부는 다른 각도에서 본 조선조 악장의 본질적 속성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정재 악장에 나타나는 송도 모티프와 선계 이미지의 연원을 밝힌 대목이 흥미롭다. 이 외에도 저자는 악장에 대한 북한문학사의 관점을 살펴본다. 북한의 연구자들은 악장을 아부문학이나 무조건적 송축문학으로 배척해온 남한 학자들과 입장을 같이 해오고 있는데 북한 역시 악장을 백성들의 문화생활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무가치하다고 폄하한다는 것이다. 경직된 이념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악장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연구서는 악장의 문학성을 다룬 것이 아니라 악장의 본질과 성격에 대한 탐구이다. 양식의 문학성을 파고든 것이 아니라 양식을 둘러싼 맥락에 주목했기에 문학 연구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저술의 가치는 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악장 연구를 둘러싼 저자의 궁극적인 문제의식, 주제에 접근하는 남다른 방식, 실사구시에 입각한 꼼꼼하고 치밀한 논증의 결과를 들여다보노라면 이 저술이 갖는 의미와 무게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어쩌면 이 연구서의 진정한 가치는 고전시가를 접근하는 시각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보여준데 있을지도 모른다.

 

 

3.

저자는, 텍스트와 콘텍스트 및 상호텍스트에 대한 면밀한 고찰 없이는 고전시가론이나 고전시가사 혹은 국문학사는 완벽을 기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연구서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텍스트 측면은 관찬문헌인 조선조의 악서들에 지금 고려속요로 불리는 고려의 악장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고 콘텍스트 측면은 악장은 조선과 고려의 궁중 무대예술이라는 점이다. 상호텍스트 측면은 악장은 당악을 비롯한 외래 음악이나 공연과의 연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악장은 이와 같은 외적 맥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그 본질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문학은 그 시대의 사회, 문화, 정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에서 나온 발언이라 본다. 지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지식은 순수하고 객관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 구조와 공동체 구성원에 따라 의미를 형성하고 바꾸어간다. 곧 지식은 맥락과 관계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을 둘러싼 맥락에 주목하는 저자의 관점은 충분히 설득력 있으며 답보 상태에 빠진 고전시가 연구 방법론에 새로운 활로를 뚫어줄 것으로 기대가 된다.

다만, 말했듯이 작품의 문학성 자체에 대한 탐구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받을 수 있겠는데, 가만히 반추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저자는 악장의 본질을 제대로 간파하고 악장 문학에 접근하는 가장 올바른 방향을 잡아낸 것이다.

조선조 악장은 국가의 공식 행사에서 사용되던 악사(창사)이다. 저자는 말하길, 악장은 정재라는 틀 안에서 음악과 춤이 결부될 때 비로소 그 생명성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다고 한다. ‘고려조에서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아악이나 아악악장들과 함께 고려조에서 수용한 삼국 이래 속악의 악장들이 조선조에서 새롭게 제작된 노래들고 합쳐진 것이 조선조의 음악이고 악장’(45)이라는 것이다. 악장이 가(), (), ()의 예술이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무대예술인 정재에서 가창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악장은 춤까지 관여되어 복잡한 내포를 지닌 언어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악장을 문학적으로만 재단해온 지금까지 연구는 악장의 본질을 왜곡시켰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악장이 상대적으로 문학성이 쳐진다는 평가를 받아왔다면 이는 악장을 악장답게 다루지 않은 데서 초래된 결과였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접근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악장에 대한 저자의 접근 방식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악장이란 장르를 문학성이라는 프레임으로 접근하는 것이, 저자에게는 오히려 왜곡의 위험성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악장의 본질은 텍스트를 둘러싼 외부 맥락과의 관련 아래 탐구해야 한다. 악장의 본질, 그것은 가무악이 어우러진 궁중의 정재이다. 노래로서의 악장이 실현되는 사회 문화적 맥락을 따져보아야만 악장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접근 방식이 얼마나 의미 있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의 관점이 정채를 발하는 장면은 정재 악장에서 확인되는 송도 모티프와 선계 이미지의 연원과 지속 양상을 밝힌 곳에 있다. 조선조 악장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왕에 대한 송축이나 송도를 통한 왕조 영속의 당위성 선양이다. 당악정재를 살펴보면 왕을 송축하기 위해서 신선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 당시 당악정재들에 등장하는 중심 배역은 선모나 신신들이었고 그들의 창사나 담화에는 송도 모티프가 담겨 있다. 신선으로 분장하여 왕에게 드리는 송도의 말이 바로 송도시자이자 선어였다는 것이다.

이 점을 논증하기 위해 저자는 동동정재를 살핀다. 고려사악지에는 동동에 대해 동동 놀이는 송도지사가 많은데 대개 선어(仙語)를 본떠 마든 것이다[動動之戱 多有頌禱之詞 盖效仙語而爲之]”라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송도와 선어(仙語)는 동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관건이 되는 까닭에 많은 학자들이 이 뜻을 밝히기 위해 다양한 주장을 펼쳐 왔다. 중국 전래의 도교 사상과 관련시키거나, 화랑, 풍류 등에 연원을 둔 무속과 같은 연장에서 이해하거나 팔관회 때 상연되는 백희가무에서 불린 노래로 보기도 했다. 신선 기녀와 연관 짓거나 무격(巫覡), 우인(優人)의 말로 보기도 했다. 그야말로 각자 입론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는데, 이에 대해 저자는 선학들이 동동을 둘러싸고 있는 콘텍스트로서의 속악정재나 속악정재의 표본으로 기능했을 당악 정재에 시선을 주지 못한 까닭에 송도지사와 선어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364) 노래의 주제적 측면을 지칭한 송도지사와 표현적 측면을 지칭한 선어 모두 동 시대의 당악정재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그런 표현법이나 주제의식은 당대 궁중에서 성대하게 공연되던 당악 정재의 창사를 본뜬 것들이다. 선어는 바로 이들 정재에서 서왕모 등 신선으로 분장하여 송도의 노래를 가창하던 여기(女妓)들의 창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곧 헌선도(獻仙桃), 수연장(壽延長), 오양선(五羊仙) 등 당시에 성행하던 당악정재들 속의 선모(仙母)를 비롯한 신선(神仙)들이 잔치 자리의 좌상객인 임금에게 바치던 '송도(頌禱)의 말'이 바로 선어’, 즉 신선의 말이라는 것이다.

악장의 본질을 간파하고 상호 텍스트적 상황에 의거하여 송도지사와 선어의 의미를 밝힌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선어에 대한 제 학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저자의 글을 읽었음에도 이 주장을 비판하지 못한 채, 각자의 입론을 만들어 제각기 주장을 펼치고 있다. 고려가요를 악장의 한 형태로 보려는 저자의 생각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저자의 주장을 극복할 수 있는 논거를 대거나 저자의 주장을 수용하거나 하는 엄정한 학문 태도가 필요하리라 본다.

 

 

 

 

 

 

 

 

4.

본 저술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집요하고도 치밀하게 악장의 본질과 성격을 탐구함으로써 별 문학성이 없어 보였던 양식을 의미 있는 양식으로 끌어올린데 머물지 않는다. 저자의 궁극적 시선은 고전시가사와 고전문학사를 재편하는 데로 향한다. 저자는 조선조 악장의 존재나 본질을 도외시할 경우 아무리 현란한 고전시가 장르론을 펴더라도 공허할 뿐이며, 국문학사 기술의 합리성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과연 이러한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고려의 노래들은 대중가요로서의 속요이기 이전에 궁중악으로서의 속악가사이다. 곧 고려 노래의 1차적 분류 범주는 악장이 된다. 그러므로 고려가요는 1차적으로는 악장론을 거쳐야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조선조 악장의 콘텍스트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고려가요의 텍스트를 고려의 시대적 속성에 맞추어 놓고 고려시대의 속요라는 이름으로 재단해본들 결과가 신통할 리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고려가요가 악장으로 수렴된다면 의당 고려가요는 악장이라는 틀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고려가요의 성격과 위치에 대한 재검토가 요청된다. 조선조의 시조와 악장을 다룬 시조와 궁중악장의 관계장을 읽노라면 악장과 시조 간의 새로운 관계 설정도 필요해 보인다.

또 악장의 본질이 문학이 아닌 정재로서의 성격에 있다면 악장과 관련되는 중세 고전시가 연구의 패러다임이 문화론이나 예술론 차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고전시가를 문학과의 연관 아래서만 기술하려는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음악 무용 등의 예술 및 당대 사회 문화와의 관련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고전시가의 문학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시가 연구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고 장르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문학을 고립적으로 가두지 않고 여타 분야와 폭넓게 소통하면서 통섭하려는 오늘날의 시대적 흐름과도 궤를 같이한다.

악장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치열한 노력과 성과가 기성과 관행을 타파하고 새로운 변화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준다는 점이 본 연구서의 진정한 미덕이자 가치라고 생각한다. 과연 저자의 바람대로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새롭게 추동될 수 있을 것인가? 본 연구서의 성과와 제안을 비판하든 극복하든 간에, 애써 외면하기보다는 저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주고 활발한 토론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저술에서 보여주는 꼼꼼한 논증과 묵직한 문제의식은 저자가 학계에서 보여준 성실함과 무게에 값한다고 본다. 삼십 여년에 걸쳐 남들이 관심두지 않은 길을 뚝심 있게 밀고나간 저자의 학식과 공력이 조선조 악장 연구에 오롯하게 담겨 있다.

 

  *이 글은 <<한국문학과 예술>> 14집(한국문예연구소, 2014)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