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8.01.02 11:48

지나온 40, 또 다른 40

-새문사 40주년을 축하함

 

 

조규익(숭실대 교수)

 

 

사범대학 졸업 후 고등학교 국어교사가 되었고, 모 대학 교육대학원에 잠시 적을 두었었다. 어수선하기 짝이 없던 1978년의 일이다. 교육대학원 재학 중 그 대학 도서관에서 쉘리(P. B. Shelley)󰡔시의 옹호(A Defence of Poetry)󰡕를 우연히 만났다. 시론 강의를 들어볼 기회가 없었던 내게 이 책이 주는 충격은 컸다.

 

우선 제목이 흥미로웠다. ‘시의 옹호? ‘사람들의 비판으로부터 시를 변호하겠다는 뜻일 텐데, 그 말이 내 호기심을 도발했다. ‘를 경()으로까지 숭배해 온 동양에서야 시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일은 상상도 못할 일. 내가 알고 있는 시 혹은 시인에 대한 비판은 플라톤의 시인 추방론이 유일했고, 그의 논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발원한 서양 시론의 발판이었다. 그래서 그 책이 눈에 뜨였던 것일까.

 

다 읽고 나자, 새삼 번역자와 출판사가 눈에 들어왔다. 영문학자이자 비평가였던 윤종혁 선생은 당시 지식사회에 널리 알려져 있던 인사였으나, 신생 새문사의 출판사명은 아주 생소했다. ‘새롭다는 뜻일 것이고, 출판사인 이상 이란 을 뜻할 텐데, ‘신문(新文)’이라 하든지 차라리 새 글이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아니면 말 그대로 새 문(new gate)’의 뜻일까. 의아함과 호기심으로 새문사란 명칭이 마음에 콕 박힌 것은 그 때부터였다.

 

직장과 교육대학원을 접고,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모 대학에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다. ‘지적 홀로서기를 준비하던 내 대학원 시절은 영인본 출판의 전성기였고, 의미 있는 연구서들이 대량 출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때 맞춰 새문사에서도 내 전공분야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병욱, 김열규, 신동욱 등 당대를 풍미하던 선학들이 국문학의 키를 잡고 새문사를 한국 지식사회의 광장으로 몰고 나왔다.

 

새문사의 책이 나올 때마다 두려움과 부러움이 엄습했다. 이 분들을 능가하는 이론과 논리로 내 시대를 열어 볼 수 있을 것인가. 새문사에서 이 정도의 책들을 낼 기회가 내게도 주어질 것인가. 전자는 두려움, 후자는 부러움이었다. 새문사의 책이 나올 때마다 내 호주머니는 가벼워졌고, 두려움과 부러움의 무게는 커져만 갔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몇몇 출판사들에서 내 책들을 내기도 했지만, 새문사에는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두려움과 부러움이 오기로 변하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흘려보낸, 긴 세월이었다. 좋은 글의 생산자도, 읽어줄 소비자도 많아 한국문학이 잘 나가던 당시였다. 시장의 활황으로 좋은 출판사들의 목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는 사실을, 무지한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베이비 부머 세대의 한 복판에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책에 갈급(渴急)하며 살아왔다. 교과서 외에 읽을 거라곤 비료 부대에 인쇄된 글들뿐이었다. 책에 관한 내 유년기의 트라우마 때문일까. 더 이상 책을 놓아둘 공간이 없는 최근까지 지출의 1순위는 책이다. 그래서 좋은 책과 저자, 출판사는 내가 선망하는 불변의 대상들이다. 3, 40년 세월의 갈피 속에서 저자와 출판사가 함께 이룩한 학문적 결실의 양적인 증대나 의미 있는 발전은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우리 지식사회가 이제 학문의 르네상스를 넘어 완숙기에 접어 든 것이다.

 

당시 40대 초반이셨을 이규 사장님을 몇 해 전에 뵈었다. ‘처음으로 부탁을 받아새로운 세대의 󰡔한국문학개론󰡕을 여러 학자들과 함께 만들었고, 내친 김에 󰡔조선조 악장 연구󰡕도 낼 수 있었다. 학생에서 학자로 변신해온 지난 세월은 책에 대한 내 트라우마의 치유 기간이었고, 바야흐로 장년에 접어든 새문사의 성장기였으며, 우리나라 지식사회의 완숙기였다. 이제 누군가 또 다른 트라우마 보유자를 발굴하여 그와 함께 또 다시 40년을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불혹(不惑)’에 접어든 새문사가 계획하고 수행해야 할 당면 과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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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6.08.24 21:43

헬조선(토피아) 조선으로!

 

 

 

 

며칠 전, 작은 술자리에서의 일이다.

여러 세대가 골고루 섞인 자리. 젊은이들이 약간 많았다.

어쩌다 헬조선이란 말이 나왔고, 그에 대한 논전이 들을 만 했다.

젊은 세대의 대부분과 비판적인 중늙은이들은 대체로 우리나라를 헬조선으로 평가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그 말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따지고 든 소수의 온건한 젊은이들이 오히려 돋보이기도 했다. 물론 가스통 할배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헬조선이란 명칭의 부당성을 성토했다. 그 말이 생각보다 이념적 내포가 복잡하다는 것을 즉석에서 깨닫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누가 처음 이 말을 고안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말이 이 시대 우리 사회의 분열적 단면들을 뚜렷하게 함축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 말을 두고 우리 지식사회의 담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음을 잘 안다. 게으른 탓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나는 그들의 해석을 듣고 싶지 않다. 건방진 단정일지 모르지만, 보나마나 서구 이론가들을 들먹이며 자신의 생각을 현학적으로 분식하는 게 고작일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땅의 불행한 세대가 자조적으로 만들어낸 용어를 잘도 활용하여 논문으로, 저서로 찍어내는 그들이 부러울 때가 없지 않다. 그러나 십중팔구 특별한 결론은 없을 것이다. 서양 학자들의 담론을 끌어다가 우리 젊은이들의 자포자기적 심정을 분석하여 논리화 시켜본들 무엇이 후련하단 말인가. 지금도 갈 곳이 없고, 이른 아침 직장으로 출근하는 아버지와 마주치기 싫어 아침 식탁에도 못 나오는 자식들이 그득한 이 나라의 현실이 어떻게 나아질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학부 고학년의 강의를 맡고 싶지 않다. 생기 잃은 그들과 눈동자를 맞추는 일이 곤혹스럽다. 대학 강의에서는 눈빛만으로 할 말을 대신하는 경우가 제법 된다. 눈을 맞추지 못한다면, 내 마음을 전할 수 없고, 그들의 영혼과 만날 수도 없다. 대학을 나와도 휘파람을 불며 나갈 직장이 주어지지 않는 게 현실이다. 어쩌다 직장을 마련해도 출근하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일이 과중하고 직장의 분위기가 뭣 같은 경우도 있을 것이고, 보수가 쥐꼬리 만한 경우도 있을 것이고, 그나마 계약직인 경우도 있을 것이고, 상사들이 개차반같은 경우도 있을 것이고, 교통지옥에 파김치가 되어야 갈 수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같은 처지의 또래들끼리 만나면, 무슨 좋은 말들이 나올 수 있으랴. 대충 짐작되는 온갖 불평들이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그런 것들의 최대공약수로 뽑힌 말 하나가 바로 헬조선아닌가.

 

그렇다면, 그 헬조선의 화살은 어디로 향할까. 기성세대, 재벌, 정부여당 등 이른바 기득권세력, 그 중에서도 현실적인 힘을 가진 계층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괜히 딴죽 걸기 좋아하는 이 땅의 운동권 출신들이나 좌파들이 이들을 만나 어울리게 되면, 그 장소는 자연스럽게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성토장이 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의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헬조선의 책임을 몽땅 이들에게 뒤집어씌운다면, 그들이 참 억울하리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헬조선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이 대체로 젊은 세대나 좌파인사들임을 최근 확인한 자리가 바로 그 공간이었다.

 

가끔씩 배낭을 짊어지고 해외여행에 나서곤 하는 어떤 젊은이가 그 속에 있었다. ‘외국에 나가봐야 우리나라 좋은 줄 안다는 말.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무릎을 쳤다. 그래, 누구나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집이 지옥처럼 느껴질 것이다. 세상 어느 곳에도 유토피아는 없다. 나보다 못한 이웃들을 만나 봐야 비로소 내 집의 장점도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우리가 선망하는 세계 최강 미국에도 1~2%만 빼곤 모두 허덕대는 장삼이사들이다. 심지어 의료보험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한 곳이다. 몇 년 전 잠시 머물던 미국의 어느 도시에서 병원에 갈 일이 생겼었다. 예약이 필수라 하여 해당 진료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접수 아가씨가 대뜸 무슨 보험을 갖고 있느냐?’는 생소한 질문을 던졌다. 보험사 이름을 대니 자기네 병원과는 거래하지 않는 보험사란다. 세 번 째 전화를 걸고 나서야 비로소 예약을 할 수 있었다. 만약 내게 의료보험이 없었다면, 아예 병원을 갈 수 없는 곳이 미국이었다.

 

그 학교의 교수에게 물으니, 그의 말로는 미국인의 약 40%가 보험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과장이겠지만, 그런 곳이 미국이다. 요즘 나는 툭하면 몸 이곳저곳에 문제가 생겨 뻔질나게 병원을 드나든다. 그럴 때마다 이름과 주민번호만 내면 값싸게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하루 이틀 지나 몸이 좋아지면 미국 생각이 나곤 한다. 아무리 미국이면 무엇 하랴. 몸 아플 때 비싼 보험 없으면 아예 예약도 못하는 곳인 걸. 미국인들이 지방 어느 곳엘 가도 어느 병원엘 가도 의사로부터 친절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우리나라임을 알게 된다면, ‘헬조선이란 말을 이해하겠는가.

 

우연히 문화일보를 서핑하다가 유머코너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다. 공감이 가는 글이라 송두리째 옮겨본다.

 

두 직원이 자기네 회사가 교도소보다 안 좋은 이유를 들먹이면서 잡담을 하고 있었다.

직원 A : “교도소는 세끼 밥을 무료로 먹여 주는데, 회사는 내 돈 주고 사 먹어야 하잖아?”

직원 B : “그러게 말이야. 교도소에서는 가끔 TV를 볼 수 있는데 회사에서 TV보면 바로 잘리지.”

직원 A : “하루 종일 2평짜리 공간에 갇혀 있는 건 교도소와 다를 바 없다니까.”

그때 공교롭게도 이 말을 들은 사장이 두 사람을 불렀다.

사장 : “기쁜 소식이 있네. 자네들은 가석방되었어. 이제 자유의 몸이라구! 내일부터 안 나와도 된다네!”

 

절대적인 지옥이나 천당은 없다. 늘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내 장점을 살려나갈 생각을 해야 한다. ‘헬조선을 노래하면 진짜로 우리나라가 지옥으로 변한다. 왜 지옥인지, 남들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먼저 확인하고 자기 비하를 해도 늦지 않다. 케이팝(K-pop)에 취한 외국 젊은이들은 대한민국을 환상의 나라로 알고 있다한다.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에서 만난 젊은이들은 돈 벌러 한국에 가는 꿈을 꾸고 있었다. 미국의 대학에서 만난 젊은 학자를 도와 우리나라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1년간 공부할 수 있게 해줬더니, 코가 땅에 닿게 고마워했다. 몇 년 전 학술 답사 차 중국에 갔다가 불편해서 죽을 뻔했다. 비행기가 인천공항 상공에 이른 것을 보고 괜히 눈물이 나왔다. 이렇게 좋은 우리나라의 장점을 우리만 모른 채 살고 있다. 괜히 종북주의로 의심받을 대열에 섰다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북한으로 보내라!’는 욕을 얻어듣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는 한 친구가 있다. ‘헬조선의 주문(呪文)을 외우다 보면, 어느 덧 자신도 헬조선의 주민으로 고착되고 만다. 우리는 한 순간도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 ‘헬조선(토피아)조선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으니, 우리나라를 유토피아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세상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 어느 정치인의 거짓말이 아님을 외국에 나가서야 나는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우리나라 좋은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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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5.09.12 11:42

 


호산방의 박대헌 사장

 

 

 

고서점 호산방(壺山房).

그 호산방이 문 닫았다는 소식을

어제 날짜 신문에서 접했습니다.

바닷물에 모래성 무너지듯

수많은 점포들이 어제도 오늘도 사라지는 세상.

서점이 어디 일반 가게와 같은가?’라는

제 믿음도 이제 접을 때가 된 것일까요?

십 수 년 쯤 되었나요? 종로서적이 닫을 때

며칠 동안 마음이 허전했었는데,

그 때보다 더 한 허탈감입니다.

 

사실 책에 굶주려 지내던 대학원 재학시절엔 고서점들을 뻔질나게 찾았지요.

호주머니엔 구겨진 지전 몇 장과 동전 몇 낱이 전부였는데,

무슨 호기로 그런 책들을 탐내곤 했는지...

뒤통수에 꽂히는 주인장의 눈총을 느끼면서도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마냥 시간이나 끌기 일쑤였지요.

미련을 남겨 둔 채 서점 문을 나서는 마음은 왜 그리도 허전했을까요?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박대헌 사장님을 제 연구실에서 뵈었지요.

박 사장께서 ‘150만원 정가의 책을 저술출판하여

한국 지식사회를 경동(驚動)시킨 시점.

그 책을 앞에 두고

궁핍했던 시절 고서점들에서 입은 상처를 차마 거론할 순 없었지요.

 

그 후로 세월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고,

고서점들 또한 많은 시련과 변신을 시도했겠지요.

결국 그 험한 물결을 되돌리지 못한 채

호산방은 장렬히 문을 닫은 것 아니겠는지요?

지금 제 나이 또래의 우국지사(憂國之士)’라면

누군들 이 세월의 변화를 반길 수 있을까요?

얄팍한 매명(賣名)의 상술(商術)들을 보시나요?

인문학의 두겁을 뒤집어 쓴 채 세상을 호리는 사람들을 말이지요.

세상을 뒤덮은 인터넷의 그늘 아래

자리 깔고 펼치는 개그를 학문이라 착각하고 있는 세태를 말이지요.

 

일본,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

아직도 멋진 고서점들이 즐비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동네 도서관을 출입하고,

시장을 다녀오는 아주머니들의 장바구니 속에 도서관의 책이 한 두 권씩 들어 있는 모습.

그들의 멋진 건물이나 번쩍이는 거리의 모습보다 훨씬 부러운 광경이지요.

 

책을 찢어 벽지로 쓰고, 절구에 빻아 지공예의 재료로 쓰던 시절이 엊그젠데,

이삿짐센터의 제1 기피 대상이 책 박스라는 사실을 아시지요?

그래서 노마드의 임시 공동체인 우리네 아파트 쓰레기장,

그 공간의 단골손님이 멋진 장정의 책들이라는 사실도 잘 아시지요?

 

역사의 공간으로 사라진 호산방.

그 호산방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순 없을까요?

발효되는 고서의 향기 그득한 옛날의 서점으로,

힘들 때면 찾아가 고서들과 대화하며

위안을 받을 수 있는 휴식의 공간으로 말이지요.

 

우린 자손들에게 무얼 남겨야 할까요?

날카롭게 벼린 이데올로기?

번쩍이는 빌딩?

엄청난 파괴력의 ()무기?

국내외의 페이퍼 컴퍼니들에 숨겨둔 천문학적 재산?

 

동네마다

멋진 고서점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건사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문화나 전통, 역사란 말이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신다면

선진국의 멋진 고서점에 한 번 들러 보세요!

나이 먹은 책들의 숲에서 아이들과 함께

그 책들의 나지막한 음성을 들어보세요.

그 음성에 녹아있는 것이 바로 문화, 전통, 역사이지요.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미래에 대한 통찰이지요.

 

 

 


박대헌 사장의 저서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호산방, 1996)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의 내용

 

 

 


박대헌 사장의 헌사(<<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

 

 

 


일본 천리시내의 한 고서점

 

 

 


일본 천리시내의 고서점에서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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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5.09.08 07:32

 

 

 

역사의 고비들을 지나며 많은 차별을 겪어 온 것이 우리 민족이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일본, 서구세계 등이 차별을 자행했거나 하고 있고, 대내적으로는 왜곡된 권력의 지형에 의한 지역과 계층적 차별의 구도가 지속되고 있다. ‘식민 : 피 식민은 식민주의 시대의 도식화된 차별구도였고, 그로 인한 민족적 자존심의 끔찍한 손상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탈 식민의 조류가 거세게 소용돌이치고 있지만, 차별구조는 보다 예리하게 내면화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다. 일본인들에게서, 백인들에게서, 그토록 차별과 멸시를 받고 살아 왔으면서도 일자리를 찾아 온 동남아 사람들과 흑인들을 잔인하게 차별하는 우리 아닌가. 오랜 기간의 학습을 통한 만큼 내면에 들어앉은 차별구조의 똬리를 집어던질 법도 하건만, 우리는 차별구조의 예각화라는 폐습의 대물림을 반복하고 있다.

 

엊그제, 어떤 신문에 서울대생들의 인터넷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의 이야기가 보도되었다. 스누라이프란 15만여 명의 서울대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펴는 인터넷 사이트인데, 최근 다른 대학 학부 출신 서울대 대학원생들을 커뮤니티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주장이 이 사이트의 게시판에 빈번히 올라오고 있는 것이 문제의 핵심인 모양이다.

 

 


대학신문(大學新聞)(2010. 09. 05.) 기사에서

 

9만 평방킬로미터 남짓의 작은 나라에 올망졸망 200개가 넘는 4년제 대학들이 모여 서열화와 차별의 향연을 펼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그 중 서울대 사람들이 떠는 위세는 참으로 가관이다. 이른바 순혈주의로 미화되는 배제의 논리, 그 연원이야말로 지독하게도 식민주의적 차별의식으로부터 나온 것일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학자 하나, 사상가 하나, 정치인 하나, 기업인 하나 키워내지 못하면서, 이른바 최고 학문의 전당임을 자랑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천박성은 극명하게 확인된다. 가까스로 식민주의의 터널을 빠져나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우리의 자화상이 바로 이 대학이고, 휘청대는 한국 지식사회의 민낯 또한 이 대학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이 대학만 나무란다면, 너무 불공평한 일일 것이다.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정권과 교육정책 당국, 아니 무엇보다 이 대학에 대하여 무조건적 신뢰를 보내는 국민 전체의 맹목을 질타해야 함에도 대학만 나무라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망각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맹목이 이 대학을 망치고, 지식사회를 망치며, 궁극적으로 나라까지 망치게 될 거라는 전망이 그리 어렵지 않음에도, 우리는 날만 새면 줄 세우기와 차별의 무익한 수작으로 날밤을 지새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누라이프에 횡행한다는서울대생들의 언동은 새삼 근원을 찾아 뿌리를 뽑을 여유가 없을 정도로 다급한 발등의 불이다.

 

어찌 학생들만 나무랄 일인가.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고, 학생은 선생의 거울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선생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잘 하는가 못하는가를 알려면 자식이나 학생을 보면 안다. 순혈주의란 지금의 학생들이 만들어낸 문화가 아니다. 식민 시대부터 서울대에 온존해 있던 독점적 배타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대학 특히 서울대학의 교수자리는 으레 서울대 출신이 맡아야 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용되어온 그간의 세월이었다. 아무리 학문적으로 특출한 업적들을 갖고 있어도, ‘서울대학도 못 나온 주제에 서울대생들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느냐는 논리가 바탕에 깔려 있는 한, 순혈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대학 경쟁력으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미국의 대학들에 가보라. 자교 출신들은 아예 그 학교에 서류를 낼 엄두도 못 내도록 되어 있다. 기껏 5% 내외의 자교 출신 교수진을 갖고 있는 것이 세계 유수의 대학들이다. 어느 대학을 나왔든 해당 분야에서 이룩해온 업적이나 앞으로의 가능성이 인재를 뽑는 기준일 뿐, ‘서울대를 나온 사람만 서울대 교수가 될 수 있다는 서울대 식(혹은 한국식)의 배타적 기준은 그들 마음속에 아예 없다. 여기서 생겨나는 대학의 경쟁력은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서울대나 그 언저리 대학들이 형성하는 공고한 카르텔에 지체되는 것은 나라와 민족의 발전이다. 열린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포용하고 경쟁해야 할 새싹들이 배타적 순혈주의로 무장하게 된 것도 이들 폐쇄된 공간에서 대물림해온 못난 카르텔의 논리탓이다.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한 입시제도와 그 제도에 의한 순간적 간택(揀擇)’을 일생 지속되는 배타적 권리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것을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젊은이들의 행동지표로 삼게 해서도 안 된다. 학생들로 하여금 겸허한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업적을 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는 인물이 되도록 인도하는 것이 그나마 지금의 서울대가 국가와 민족에게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 생각만이 서울대 스스로의 경쟁력을 갖추게 하고, 지식사회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나라를 건전하게 바꾸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스누라이프 게시판 논란은 서울대 혹은 한국 대학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일 뿐이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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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담겨있는 댓글입니다.


    작성자님이 좀 편견에 사로잡혀있는거 같네요.
    스누라이프라는 사이트는 디씨인사이드나 오유같은 개방적 공개적 커뮤니티가 아니라 애초부터 그 구성원들이 배타적으로 이용할수 있게 만든 커뮤니티에요.
    저들이 주장하는 순혈주의는 서울대보다 이른바 서열이 낮은 대학교 출신이랑은 같이 안놀겠다, 우리만 엘리트다 뭐 이런 취지의 것이 아닙니다.

    사회에서는 서울대생이 자신의 학벌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면 재수없다고 몰매를 맞기 일쑤이고 당연히 남들도 다 비슷한 배경지식을 가지고있을거라고 판단하여 내뱉은 말이 똑똑한 척으로 오해받을 때도 많죠.
    스누라이프는 그런 서울대생들끼리 눈치 안보고 얘기할수 있는 공간입니다. 그리고 그 사이트의 운영취디는 그러한 자유의 보장이라고 보고요.
    순혈주의 논쟁이 나온것은 스랖의 게시물이 외부로 자주 유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타대생들의 폐쇄적 커뮤니티로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스랖에서는 서울대생들끼리 솔직하게 하는 얘기가 주로 올라오는데 그걸 타대 커뮤니티에 퍼나르고, 그걸보면서 역시 서울대새끼들은 이기적이라는 둥 재수없다는 둥 사회성 부족하다는 둥 뭐 이런 얘기를 들으니깐 타대학부출신은 스랖에서 배제시키자는 얘기가 나오는 겁니다.
    뭐 그 주장이 좀 부적절한 면이 있긴 합니다만 작성자님이 보는대로 서울대생들이 지만 잘났다고 비서울대생을 배제하려고 그러는게 아니라 자기들한테 돌아오는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거죠.
    작성자님은 서울대생이 서울대생이라는 것에 대하여 자부심을 느끼는 것마저 삐딱하게 보는거 같기도 한데, 최고 수준의 기업인? 최고 수준의 학자? 이런거 배출 못하면 자부심도 못 가져야하는지는 의문이네요ㅎㅎ
    여튼 서울대생은 국민이 투표로 뽑은것도 아니고 그냥 한국청년중 공부 꽤나 잘하는 애들로, 특별한 책임감을 가질 필요까지는 없다고 봅니다. 뭐 어차피 최고의 학문의 전당도 아니라면서요. 그니까 서울대 애들도 충분히 자기 이익을 주장할수 있는 것이지, 서울대씩이나 돼서 차별을 하면 되겠어? 떽!
    이런식의 태도는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2015.10.05 00:41 [ ADDR : EDIT/ DEL : REPLY ]
    • 백규

      lee 님!
      제 홈피를 방문해주시고, 좋은 댓글까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먼저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지 않고, 신문보도만을 근거로 제 설익은 생각을 펼쳐놓은 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 사회의 비판이 이번 일에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이번 일이 어쩌면 잠재되어 있던 우리 사회의'서울대 불신'을 터뜨린 뇌관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의 사건이나 사례를 일반화시켜 서울대인들을 폄하하는 것은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지요. 그러나 백보를 양보하여 님의 말씀이 맞다해도, '비밀자료'를 '서울대인들' 사이에서만 공유하기위해 그런 사이트를 만든 것도 사려깊은 일은 아닙니다. 수만 명의 회원들이 있을텐데 어떻게 인터넷 공간의 비밀을 유지하며 공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철통보안을 지향하는 원자력발전소나 군대의 비밀자료들도 수시로 탈취되는 세상인데요. 더구나 서울대인들끼리만 독점해야 할 비밀이 있겠어요?
      물론 남들의 사이트를 몰래 들어가서 그 사이트의 회원 행세를 한 것까지 옹호할 마음은 없습니다. 들어오지 말라는데 굳이 들어가서 가족행세를 한 것은 일종의 범죄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진짜로 비밀을 유지하고 싶었다면 다른 방법을 택했어야지요. 수만 혹은 수십만(?)의 서울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그런 목적의 사이트가 그렇게 허술해서야 쓰겠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해되지 않는 것은 여러분이 말씀하시는, '순수하지 못한 혈통의 서울대인'을 차별하는 일입니다. 예컨대, 다른 대학을 나온 뒤 서울대 대학원에 진학하여 '관악인으로서의 긍지'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왜 '학부때부터 서울대인'과 구별 혹은 차별되어야 하는지, 저같은 바보는 이해할 수 없네요. 진짜 서울대인이라면 이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포용하고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학부때부터 서울대인들'은 '대학원때부터 서울대인'들이 알아서는 안될 무슨 엄청난 비밀을 갖고 있다는 것인지요?
      이제 대한민국의 실상을 깨달아 주실 때가 되었어요. 면적으로, 미국 한 개 주의 반이나 칠팔분의 일 정도의 크기에 지나지 않는 우리나라입니다. 거기에 5천만이 바글바글 모여 살고 있지요. 이런 때 서로 몸 당겨 앉아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가며 단결해도 모자랄 판에 뭐 서로를 가르고 차별할 필요까지야 있겠어요? 그거야 말로 '자신 없음'의 표현으로 오해받기 딱 좋은 행태이지요. 그런 점을 지적한 것이지요. '서울대인들이 우리 사회에 기여한 것이 뭐가 있느냐?' 식의 비판이 핵심은 아닙니다.
      그러지 않아도 기득권층으로 오해받고 있는 서울대인들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좀 더 넓고 미래지향적인 금도를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온국민의 희망인데, 이번 사건은 그 반대였다는 점에서 실망스러웠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여러분의 '자유와 권리'를 내세우며 반발하기 이전에, 서울대에 대한 국민적 기대와 희망이 큰 데서 나온 일이었음을 인식하고 앞으로는 좀 더 넓은 가슴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진정한 리더의 자질이자 의무임도 부디 잊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댓글 달아주신 일에 거듭 감사드리고, 그에 대한 제 생각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15.10.14 05:32 [ ADDR : EDIT/ DEL ]
  2. 한국은

    헬조선.

    2015.10.05 18:47 [ ADDR : EDIT/ DEL : REPLY ]
  3. 백규

    아니올시다. 한국만큼 역동적인 나라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니 좀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노력해 보십시다.

    2015.11.09 21:59 [ ADDR : EDIT/ DEL : REPLY ]
  4. ㅇㅇ

    대부분의 대학들은 학내커뮤니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연세대에 경우 학부출신들만 이용가능하며, 이화여대에 경우 학부출신들만 이용가능한 것을 넘어서 특정 과정을 거친 사람들만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도 따로 존재합니다. 서울대 커뮤니티에서도 싸이트를 서울대학부출신들만 이용하자라기보다는 학부출신들만 이용할 수 있는 게시판을 만들자라는 의견에서 시작되었던 겁니다. 이화여대, 연세대는 괜찮지만 서울대는 이런 의견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기사화 되고 욕을 먹어야하는 건지 의문이 드네요.

    2015.12.07 12:03 [ ADDR : EDIT/ DEL : REPLY ]
  5. 작성자님, 뭔가 오해하고 계시는거 같은데 스누라이프는 우리만 자료를 공유하고자 만든 비밀공간이 아닙니다. 그런 의도보다는 오히려 윗분이 말씀하신대로 그저 같은 학교의 동문들끼리 추억이나 감정을 공유하는 의미가 크지요. 연세대, 고러대, 부산대 기타 등등 대부분의 대학들이 자신들만의 공간을 가지고있는데 왜 서울대생들은 그런 공간마저 보장받지 못해야합니까? 정보 공유의 비밀성이나 결집력 같은 면에서는 연세대 고려대 등 기타 상위권 대학들이 더 강한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서울대 커뮤니티는, 단점이라고도 할수있겠는게 그런 정보 공유가 강한 편이 아니에요. 개인이 잘하면 된다는 생각이 더 많기 때문이지요.. 서울대는 국립이라는 이유로 도서관 등에도 구성원 이외의 사람을 많이 받아주고있고, 그때문에 자교를 이용해야할 구성원들이 오히려 피해를 입는 경우도 있습니다.
    타대생 대학원생들을 내쫓자는 이야기는, 무작정 그들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들이 서울대 커뮤니티에서 서울대생들에 대해 비난하거나, 혹은 자료를 유출하는 등의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죠. "순혈주의"가 아니라 서울대생들의 커뮤니티에서 서울대생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 때문에 그런겁니다. 오히려 서울대 내에서 어려움을 토로하는 타대 대학원생들에게 따뜻한 호의로 받아주는 사람들도 많아요.

    2015.12.10 23:00 [ ADDR : EDIT/ DEL : REPLY ]
  6. 백규

    사실이 그렇다면, 저를 비롯한 일부 사회인들이 오해를 한 모양입니다. 처음 의도가 그렇지 않았다 해도,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다른 방향으로 오해될 수도 있는 것이 세상사인 듯 합니다. 혹시 본의 아니게 경솔한 판단을 내렸다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러나 이런 논의가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혹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부정적 행태에 대한 '노파심'으로 이해될 수 있다면, 이곳에서의 논란도 그리 무익하지는 않을 듯 합니다. 조만간 이 문제에 대한 제 견해를 좀 더 신중하게 이곳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2016.01.02 22:02 [ ADDR : EDIT/ DEL : REPLY ]
  7. ㅠㅠ

    솔찍히 우리사회가 서울대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사실이지요. 이런거 보면 서울대생들도 좀 불쌍해요.

    2016.01.05 07:09 [ ADDR : EDIT/ DEL : REPLY ]
  8. 백규

    엄격한 잣대를 서울대에게만 들이댔을 수도 있지만, '경쟁과 평가의 공정함'이나 '앞서 가는 자들의 여유있는 아량' 등의 관점에서 혹시 소홀한 점은 없었는지, 함께 반성해볼 필요는 있을 겁니다.

    2016.01.09 15:56 [ ADDR : EDIT/ DEL : REPLY ]
  9. 스누라이프가 애초에 서울대생 중에서 일부만 사용하는 사이트고, 그중에서도 극히 일부만 자주 이용하는 사이트인데 서울대생 전체를 싸잡아서 매도하는건 옳은 건가요? 남 욕하기 전에 본인의 모습을 먼저 돌아보셨으면 합니다.

    2016.03.24 20:50 [ ADDR : EDIT/ DEL : REPLY ]
    • 맞는 말씀이오. 싸잡아 매도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그렇게 읽혔다면 어설픈 글 솜씨 때문일 겁니다. 본의 아니게 미안하군요.

      2016.09.15 23:46 신고 [ ADDR : EDIT/ DEL ]
  10. visitor

    헤헤.. 서울대 14학번 재학생입니다.
    동기들 사이에서는 스누라이프에 대한 평이 매우 안좋아요.. 극단적으로는 서울대X베 라는 표현까지도 쓰이고.. 분명 이용하는 동기가 있는거 같지만 대놓고 사용한다라고는 못하는 분위기?
    그나마 스누라이프가 가끔 언급되는 것은 얼마전 서울대학교 강의평가 사이트가 파피루스라는 곳에 강제적으로 이동하면서, 거부감을 느낀 학생들이 스누라이프쪽으로 강의평가를 옮김에 따라서 강의평가 확인, 또는 강의실 족보 확인 용도로 스누라이프를 사용하는 학생들이 좀 있기는 하지만.. 스누라이프 커뮤니티를 이용하는 학생들은 서울대에서도 소수이고, 그마저도 마이너한 집단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2016.09.02 01:32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렇군요. 좋은 정보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디에나 그런 친구들은 있지요. 그들의 목소리가 담장 밖으로 나가면 가족들이 부끄러워지고요. 앞으론 좀 더 살펴보고 글을 써야겠네요. 거듭 고맙습니다.

      2016.09.15 23:47 신고 [ ADDR : EDIT/ DEL ]
  11. ㅇㅇㅇㅇ

    솔직히 우습다. 그래 "서울대생들"만 모여있다니깐 그걸 '배타적'인 집단으로 깎아내리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누라이프가 거대한 권력집단도 아니고 그저 재학생들끼리 모여서 자기 생각을 얘기하고 나누는 그런 커뮤니티이다. 그리고 그런 커뮤니티는 어느 대학이나 소유하고 있다. 즉 만들어진 목적 자체가 그 대학교 학생들끼리 자기들의 얘기를 나누는 곳으로 출발했다는 얘기다. 다른 대학들도 모두 소유하고 있을진데 왜 서울대생들만 이를 오픈해야 하는가? 그 안에서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거대한 음모가 공유되는 것도 아니건만... 그저 열등감일 뿐이다. 그 울타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특별한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건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서 이래저래 가십거리를 뽑아내고자 하는 관음증이며 열등감일 뿐이다.

    2016.09.17 17:07 [ ADDR : EDIT/ DEL : REPLY ]
  12. 말리부

    줄세우기에 따른 상대적 자리매김에 익숙한 대한민국 학생의 공통현상이라 생각함ㆍ학부출신 기준뿐 아니라 다시 입시전형유형별로 쪼개서 따지고 전공따지고. . .결국 배타적 동류를 세분화해서내가 얼마나 상대적으로 잘났는지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심리ㆍ
    고3년 동안 줄세우기 보상틀에 길들여진 휴유증이죠ㆍ고등학교 졸업했으면 이젠 그 유치한 강박관념 벗어나야겠죠?

    2016.10.08 21:45 [ ADDR : EDIT/ DEL : REPLY ]
  13. ㅇㅇ

    작성자님이야 말로 줄세우기 엘리트의식 등과 같은 문제에 매몰돼 있는게 아닌지? 정작 서울대 스누라이프는 그런 생각도 안 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혼자만의 착각이 아닌지? 개방된 커뮤니티가 돼 버리면 외부인들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비서울대인들이 커뮤니티 글들을 보고 스누라이프 내에 있는 글들을 제 입맛대로 해석할 여지가 있거든요. 서울대생인데 이런 생각을 하네? 서울대생인데 이런 의견을 내네? 제 3자가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제 3의 공간으로 퍼졌을 때 받는 피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굳이 커뮤니티가 아니어도 서울대생 이라는 타이틀로 행동에 제약을 받고 사는 서울대사람들일텐데, 커뮤니티에서만이라도 자유로운 생각과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보장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2017.09.03 12:51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14.07.10 12:13

교육부 장관 후보 청문회를 보며

 

 

 

몇 년 전의 일이다. 가까이에 있던 지인들 중의 하나가 연구비 부정 집행으로 검찰에 불려간 일이 있었다. 학생들에게 돌아가야 할 돈의 상당부분을 자신이 편취(騙取)’한 혐의였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새파랗게 젊은 검사에게 그건 자신이 주도한 일은 아니며, 그간 학계에서 관행적으로 해오던 일이라는 요지로 강변을 했다 한다. 평소 그에게 별 호감을 갖고 있지도 않았지만, 당시 그가 했다는 그 말을 듣고 나서 그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마저 접고 말았다. 자신의 범죄행위를 학계의 관행으로 눙치려고 한 그의 그 말만으로 판단하자면, 그는 인간도 아니었다. 

 

                                 청문회에서 진땀을 닦고 있는 교육부 장관 후보[사진은 중앙일보에서 가져 옴]

                    

 

요즘 또 다시 내 속을 긁는 인간이 하나 등장했다. 언론 매체들을 매일 매 시간 새로운 뉴스로 도배하고 있는 인물. 바로 교육부 장관 후보로 내정된 김명수 교수다. 처음에 그 이름을 접하곤 하도 듣보잡이라서, ‘박 대통령이 모처럼 의외의 인물을 하나 찾아냈구나!’ 하고 은근히 기대를 했었다. 나와 분야가 다르니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무조건 폄하할 일은 아니고, 무엇보다 똑똑한 인물로 차고 넘치는 대한민국에서 상아탑에 틀어박혀 조용히 학문을 연구해온 참 학자이려니!’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보 지명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그에 관한 온갖 추잡하고 저급한 소식들로 매스컴은 도배되기 시작했다. 논문 표절[*후보자의 사례는 '표절'과 '탈취'가 뒤섞인 경우다], 칼럼 대필, 사교육 업체 주식 투자 등등. 학자로서는 가장 추악하면서도 빠져나갈 수 없는 범죄행위들의 한복판에 그는 서 있었다. 급기야 그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은 그런 범죄의 과정들을 언론에 낱낱이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도 얼굴을 들고 청문회 자리에까지 나온 그는 참으로 후안무치했다. 더욱 고약한 건 청문회장에서 자신의 비행을 변호하기 위해 관행이란 말을 꺼내들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그런 행위들이 그 시대의 관행이었으니, 잘못이 없다는 뜻일 것이다. 그의 그 말 한 마디에 나는 조금 전에 먹은 음식을 토하고 말았다. 앞에 말한 연구비 부정 집행 교수가 사용한 관행이란 말을 김 교수 역시 청문회장에서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만 것이다.

 

 

관행이라? 학생들에게 돌아가야 할 연구비를 편취한 행위가 관행이라? ‘제자의 논문에 자신의 이름을 제1저자로 얹고, 그 논문으로 연구비를 받아 챙기고, 한국연구재단의 실적목록에는 아예 자신의 단독논문으로 올리고, 그런 논문들로 승진을 하고, 일간신문에 기고하던 칼럼을 학생들에게 대필시킨그런 행위들이 관행이라?

 

 

국가가 발주하는 모든 프로젝트의 경우 반드시 연구원들에게 돌아갈 인건비의 액수가 예산으로 정해져 있고, 연구비 집행 기관에서는 연구 책임자인 교수를 경유하지 않고 그들에게 직접 지급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연구 책임자가 연구원들이 지급받는 돈의 일부를 자신에게 보내도록 강요한다면, 어렵지 않게 그 돈을 편취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칼을 들고 행인들의 돈을 빼앗는 것만큼이나 극악한 범죄행위다. 자신이 책임자로 되어 있는 프로젝트에서 가난한 젊은 학자들이 일시적으로라도 생활비를 지급받게 되는 사실에 마음 편해 하고 안도하는 것이 대부분 교수들의 상정(常情)이다. 주변의 젊은 학자나 학자 지망생들이 생활고에 부대끼지 않고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자신이 만들어 주었다면,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논문 한 편을 써보면 안다. 글 쓰는 노동이야말로 등잔 속의 기름이 바작바작 말라가듯얼마나 삶의 진액을 소모하는 일인가를, 직접 써본 사람만 알 수 있다그런 논문을 빼앗는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 없는 범죄다.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제자의 논문을 자신의 것으로 빼앗았다니, 말문이 막힐 일 아닌가. 교직에 종사해온 그 긴 세월 동안 단독저서 한 권 내지 못했다는 사람이니, 단독 논문인들 제대로 낸 적이 있을까. 학문과는 거리가 먼 국회의원들이 표절의 의미에 대해서 물었으나 제대로 답변조차 못했다니, 다시 무슨 말을 덧붙이랴! 그런 사람을 교육부 장관으로 간택하고 국회에 통과시켜 줄 것을 요청한 대통령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이제 다시 찾을 일 없을 것처럼, 우물에 똥을  퍼붓고 간못된 인간들이다관행이란 편리한 말로 자신들이 몸담았던 대한민국의 지식사회를 잠재적 범죄 집단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다.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궁하다 해도 대다수 선량한 이웃들의 얼굴에 똥물을 끼얹어서는 안 된다. 물론 어느 공동체에도 범죄자는 있다. 그렇다 해도 그런 범죄행위를 관행 운운의 궤변으로 일반화시켜서는 안 된다. 똑똑하지만 가난한 제자들이나 주변의 배고픈 학자 지망생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길 바라는 대부분의 교수들에게, 지금도 연구실에 틀어박혀 한 편의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기력을 소진하고 있는 학자들에게 그 이상 더한 모욕이 어디에 있을까?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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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4.04.28 18:08

 

 


연구실에서, 프레너 교수

 

 


연구실에서, 프레너 교수

 

 


최근에 발간된 그의 책들

 

 

 

 

 

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온 프레너 교수

 

 

올해 2월로 접어든 어느 날 오후. 미소가 멋진 중년 신사 한 분이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자신을 역사학과의 프레너 교수라고 소개했지만,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알고 본즉 그는 지난 해 연구년으로 학교를 비운 상태였고, 나는 작년 8월에서야 OSU에 입성했기에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풀브라이트 방문학자라는 내 연구실의 문패에 호기심을 가진 것 같았는데, 말을 나누는 도중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더욱 큰 흥미를 갖는 것이었다. 떠날 날에 임박해서야 만난 점에 대하여 그 또한 애석해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그에게 흥미를 느낀 것은 그의 전공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나름대로 생각해보니, 그의 전공은 크게 보아 에너지사()’, 좁히면 에너지 개발 및 이용사’, 더 좁히면 에너지 개발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 등 사회문제사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의 전공은 오클라호마주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비록 강제이주를 당한 처지였지만, 주로 인디언들이 차지하고 있는 대평원 오클라호마 주는 어딜 가나 원유와 천연가스가 생산되는 천혜의 땅이었다. 오클라호마 번영의 역사는 석유 등 천연자원 개발과 맥을 같이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문제들을 역사학의 관점에서 다루는 학자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나였다. 그저 한국사/동양사/서양사혹은 고대사/중세사/현대사쯤으로 나누어 연구하고 가르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해온 것이 한국의 역사학계나 내 의식 수준의 현주소였던 것이다. 물론 어느 분야든 역사가 있기 마련이고, 역사학으로 수렴되는 모든 부분들이 인문학의 범주일 것은 분명하지만, ‘에너지 개발의 역사가 어엿한 학문 테마로 정립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나였다. 그렇게 프레너 교수[Dr. Brian Frehner]OSU의 한켠에서 만나게 되었다.

 

프레너 교수와의 인터뷰

 

 

그의 학문적 관심을 정확히 짚어내어 나열하면, ‘1860~1945년 미국/미국의 서부/환경/기술/공공분야로 집약될 수 있다. 그는 UCLA에서 학부를, 라스베가스의 네바다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OSU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매력적인 박사학위 논문의 테마가 바로 크리칼러지(Creekology)[석유 탐사학’]에서 지질학(Geology)으로: 1860~1930년까지 남부 대평원에서의 석유 탐사와 보호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출발하여 애리조나를 거쳐 오클라호마에 정착을 본 그의 지적 탐구 여행이야말로 흡사 대평원에서 석유를 탐사하듯 진행되어 온 것이나 아닐까.

 

얼마나 많은 역사학의 테마들이 존재해왔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역사학의 새로운 테마들이 개발될 것인가. ‘역사란 본질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눈과 관점으로 보는데서 성립하며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닌 가치의 재평가에 있다는 크로체의 생각을 사건들의 해석이나 역사기술의 대전제로 삼은 E.H. Carr가 자신 있게 내세운 것처럼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면, 역사학이란 앞으로도 지식사회의 마를 수 없는 오아시스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프레너 교수는 흡사 살아있는 현장에서 꿈틀거리는 노다지를 잡은 사람처럼 보였다. 버팔로 떼가 밀고 지나가는 대초원의 한복판에서 석유채굴기가 끄덕거리며 기름을 퍼 올리는 오클라호마의 풍경을 보면서도 그에 관한 역사적 상상력을 펼치지 않을 역사학도나 인문학도는 없으리라. 그런 점에서 프레너 교수는 자부심 강한 행운아였다.

 

그는 최근 들어 <<석유의 발견: 1859-1920 석유 지질학의 본질>>, <<인디언과 에너지: 미국 남서부의 개발과 기회>>, <<라스 베가스에서 쥬스 짜기: 미국 소도시의 성장에 대한 소견들>> 등 주목할 만한 저서들과 많은 논문들을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주목을 받아온, 탁월한 학자였다. 그런 업적들을 바탕으로 여러 건의 학술상과 연구비 수혜를 받았으며, 많은 학생들이 그를 따라 면학의 열기를 분출하고 있었다.

 

프레너 교수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이제 우리도 화석처럼 굳어진 대학의 전공체계를 유연화시켜 시의적절하고 지역 친화적인 분야들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체제로 바꿀 필요가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20세기 중반에 구축한 패러다임을 21세기 한복판으로까지 지속시키려는 배짱을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학자들은 입만 열면 전공영역의 정체성[identity]’을 강조하지만, 그건 강한 울타리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에 불과하다는 점을 프레너 교수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다. 바야흐로 다원화되고 있는 우리네 삶을 어떻게 학문체계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가 된 것이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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