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20. 5. 24. 13:59

 

 

제이슨 가족 사진[왼쪽부터 제이슨, 그레이슨, 놀만, 제이콥, 에벌린]
밝은 표정으로 놀고 있는 그레이슨과 에벌린

 

  노마드(nomadism), 노마디즘(nomadism)이란 말이 유행이다. 각각 유목민(遊牧民), 유목(민)주의[遊牧(民)主義 혹은 유목민 정신]로 번역되겠지만, 그 내포는 간단치 않다. 우리 같은 농경 정착민으로서는 쉽지 않은 생활양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유목민이다. 풀이 우거진 곳을 찾아 천막을 세우고 소떼나 양떼를 기르는 사람들. 그러다가 동물들이 얼추 풀을 뜯어먹었다 싶으면 냉큼 천막을 말아 수레나 말 등에 싣고 또 다른 풀밭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 그들은 한 곳에서 진득하게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누구인가.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영토화와 나의 발견에 바탕을 둔 탈주의 철학을 고안했지만, 그 근원적 사고가 노마드 혹은 노마디즘에 있음은 명백하다. 특정한 가치나 삶의 방식이란 굴레일 수 있으니, 그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 가고자 하는 것. 그것이 노마디즘이다. 대학 재직 40년 동안 많은 적지 않은 구미인(歐美人)들을 만났고, 두 번에 걸친 미국 체류 기간에도 그들을 만나며 그들의 내면에 남아있는 노마디즘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이 그들 정체성의 큰 부분이었다.

 

   2013년 풀브라이트 학자(Fulbright Scholar)로 미국의 OSU(오클라호마 주립대학)에 체류하고 있던 나는 여러 명의 패컬티 멤버들과 교유했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 뛰어난 영어 교육자 제이슨 컬프(Jason Culp)였다. 이미 이 블로그에 그에 관한 글과 사진들을 남긴 바 있는데, 그 글에서 나는 그의 영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그와 만나는 과정에서 그가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외국어 사용자들을 위한 영어 교육]을 전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의 영어가 매우 명료하면서도 정확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라고 모두 표준 한국말을 ‘명료하고 정확하게’ 구사하지는 못하듯, 미국 사람들이라고 모두 표준 영어를 구사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영어만으로 분류할 경우 미국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대충 네 부류로 나뉘었다. 짤막하면서도 느릿느릿한 영어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는 어른들, 진한 사투리 억양으로 상대방을 갸웃거리게 만드는 사람들, 입에 오토바이 엔진을 단 듯 숨넘어가게 지껄여대는 학생들과 젊은이들, 제이슨처럼 교과서적인 영어로 호감을 주는 소수의 지식인들. 가끔 방송에서 목격하는 오바마 대통령, 전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 현 백악관 대변인과 미 국무성 대변인 등의 대중 스피치를 통해 미국 지도자들이나 상류층의 덕목 가운데 ‘언어의 명료성과 모범성’이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제이슨에게서 그런 스피치의 전형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이 글을 내 여행기[<<인디언과 바람의 고향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에 다시 실었지만, 그것으로 그[그의 가족]와의 관계가 끝나지 않은 것은 잊을만하면 도란도란 전해지는 그의 말이 귀를 간질이는 초원의 산들바람처럼 나를 기분 좋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넓은 초원의 한 귀퉁이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데, 이곳을 찾아와 잠시 양떼에게 풀을 먹이며 쉬다가 안녕!’을 고하고 떠난 그가 몇 년 후 늘어난 가족들과 양떼들을 몰고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이곳을 지나다가 내게 또 안녕!’을 고하는 것 같지 않은가. 내가 귀국하고 한 해 뒤에 그는 내게 연락을 해왔다. 한국의 대학에서 잠시 일할 만한 자리가 없겠느냐는 부탁이었다. 통탄할 만큼 좁은 나의 교제범위 때문일까. 시원한 대답을 못해주었다. 미안한 마음을 문면에 담아 이메일을 보냈으나,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6개월쯤 후에 독일로부터 이메일이 날아왔다. 몇 년간 그곳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지내게 되었노라는 메시지와 독일에서 낳은 예쁜 딸 에벌린(Everlyn)도 함께 한 가족사진을 첨부하여. 나는 반색을 하며 반가움의 답신을 보내면서 두어 차례 이메일들이 오가다가 다시 한동안 끊기고 말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덮치면서 초강대국 미국도 힘을 쓰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NYU의 교수로 있는 큰 아이[조경현]와 제이슨의 아이들이 걱정이었다. 그런 내 생각이 전해진 것일까. 엊그제 그의 이메일이 거짓말처럼도착했다. 독일에서 임기를 마치고 작년 8월 미국에 귀환 후 잘 지내고 있다는 것, 이번 여름에 이스라엘에 일자리를 잡아놓고 비자를 기다린다는 것, 정년 후 살 집을 사진으로라도 보고 싶다는 것 등을 적은 다음, 새로 태어난 아들 제이콥(Jacob)이 포함된 가족사진을 첨부하여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내왔다. 우리말로 번역한 그 이메일은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조 박사님!

 

나는 당신과 임미숙 씨가 요즘 같은 어려운 시절에 잘 지내시기를 희망합니다. 2020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일어나게 될지 상상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금년 여름 언제쯤 이스라엘로 이사하기 위해 한 번 더 짐들을 꾸리고 있는 우리는 당신에게 이메일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스틸워터를 떠난 후 우리에게 매우 친절하게 보내 준 당신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레이슨은 한국에서 출판된 책에 실린 우리 가족사진을 보며 대단히 감격해 했습니다. 그는 이제 우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퍼진 후에도 당신의 건강이 좋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흘러간 시간과 거리가 우리를 떼어 놓았어도, 당신과 임미숙 씨는 여전히 우리의 친애하는 친구들입니다. 당신을 방문하여 당신의 고향을 보기 위해 한국을 여행하는 것은 아직도 내 꿈입니다. 정년 후 살 집을 완성하셨어요? 낙원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갖고 있는 사진 좀 한 장 보내 주세요.

 

우리 가족사진 두어 장 첨부합니다. 우리는 2019년 8월 이래 오클라호마에 돌아와 있어요. 우리는 아마도 2020년 6월에 이스라엘로 이사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아직 정부로부터 여권들을 받지 못했어요. 그들은 지금 국제 여행을 제한하기 위한 여권의 갱신을 진행하고 있지는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다시 이동할 수 있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삶은  "보류 중"입니다. 그러나 신에게 감사하게도, 우리는 잘 지내고 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갖고 있지요.

 

당신의 친구 제이슨 드림

 

 

 

   아, 그는 아직도 노마드의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양떼에게 뜯길 풀만 있다면, 세상 어디에 가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상이 바로 노마드 아닌가. 우리는 어찌하여 특정한 아니 알량한 이념이나 가치 혹은 삶의 방식에 구애 받으며 이 비좁은 한반도 한 구석에 박아놓은 뿌리를 뽑아내지 못하는가. 끊임없이 낯선 곳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사람들을 이웃으로 만나고 새로운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가.

 

   수백 년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을 시멘트 철근 집을 아름다운 에코팜에 뚜드려 지으면서걸림 없는 노마드 친구의 이메일을 곱씹어 보노라니, 노마디즘을 찬양하고 노마드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그 반대방향으로 치달아가는 내 몰골이 영 마뜩치 않다. 어디선가 맛나고 멋진 풀들이 자라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나는 어떻게 천막을 말아 짊어진 채 내 소떼를 몰고 그곳으로 달려갈 것인가. 걱정 또 걱정이다.

 

 

 

Posted by kicho
알림2014. 11. 5. 13:59

 

 

 

 

 

저는 2013년 2학기 풀브라이트 방문학자(Visiting Fulbright Scholar)로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학과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현지를 틈틈이 답사하고 체험한 기록들을 정리하여, 최근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푸른사상)라는 제목의 문화 답사기를 펴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토네이도의 본고장으로만 알려졌을 뿐인 오클라호마를 보물찾기라는 테마를 통해 새롭게 읽어내고자 했지요. 책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물 1: 스틸워터와 OSU, 그 안식과 탐구의 낙원

평온과 정밀(靜謐)의 오클라호마에 안착

역사학과를 찾아

학과 비서들과의 만남

카우보이 풍의 노신사, 학과장 로간 교수와의 만남

브렛 학장과의 만남

평원 속 지성의 오아시스, OSU에서

역사학과 학생들을 위한 특강을 마치고: 한국의 이미지를 새것으로!

카우보이들, 풋볼의 진수를 보여주다!

미국 대학의 졸업식과 감동: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

안식과 힐링의 낙원 스틸워터에서

 

보물 2: 인디언, 인디언 역사, 인디언 문화

오클라호마와 인디언 부족들

대초원에서 만난 오세이지 인디언들

체로키 후예의 집을 찾아 패러다임 전환의 증거를 찾다

오클라호마 동쪽에서 체로키 인디언들을 만나다!

체로키어오시요(Osiyo)’와 우리말‘ (어서) 오세요!’의 정서적 거리

스틸워터의 이웃동네에서 만난 판카 인디언들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아이오와 인디언 족

지혜로운 치카샤 족, 인디언 사회의 자존심

촉토 족의 뿌리와 투쟁, 그리고 예술

촉토 족의 탁월한 교육열, 풍부한 역사 자취

놀라운 세미놀 인디언들의 역사와 문화의식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 그리고 대평원의 서사시

카이오와 족의 삶과 예술

무서운 코만치에서 상식의 미국인으로!

크릭 족의 꿈과 현실을 찾아

오클라호마 밖의 인디언: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족

암굴 속에 서린 생존 의지‘,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와 푸에블로 족의 말 없는

외침

부드러운 어도비, 완강한타오 푸에블로인디언들

 

보물 3: 미국의 길, 66번 도로(Route 66)의 낭만

미국에서 길을 찾으며: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작은 일탈을 꿈꾸는 66번 도로, 그 낭만과 허구

엘크 시티와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

클린턴 시티와 ‘66번 도로 박물관

엘 르노 시티와 캐나디언 카운티 뮤지엄

66번 도로에 살아 있는 역사의 공간, 유콘 시티

누구 혹시 이 소녀를 아시나요?: 유콘에서 만난 우리들의 누이

한국전 참전용사의 아들 리차드 카치니와 유콘 참전용사 박물관

오클라호마의 숨은 별: 거쓰리 시티/ 66번 길의 경이로운 옛 건축물: 아카디아 라운드

 

 

 

 

 

 

보물 4: 박물관과 미국 역사

서부 개척시대 미국의 소리: 국립 카우보이와 서부유산 박물관

예술로서의 역사, 역사로서의 예술: 털사의 길크리스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인간의 악마성을 깨우쳐 준 공간: 오클라호마 시 메모리얼 뮤지엄
오클라호마 밖의 박물관: 예술과 역사의 도시 산타페와 박물관들

 

보물 5: 열정과 도전의 대학인들

미국의 중남부에서 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는 젊은 학자: 용타오 두 교수

학자와 목자의 삶: 한인 교수 장영배 박사

빛나는 한국학생 브라이언

한반도에 관심이 큰 소련 역사 전문가 림멜 교수

탁월한 젊은 영어 교육자 제이슨 컬프

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온 프레너 교수

 

보물 6: 아름다운 자연, 안식의 낙원

부머 호수에서 찾은 마음의 고요

리틀 사하라에서 되찾은 고향의 꿈

대초원에서 멋진울음 터를 발견하고

낙원 속의 산책로: OSU 크로스 컨트리 코스의 안식과 힐링

 

 

 

 

 

***

일반적으로 미국은 역사가 짧고, 넓은 땅에 비해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역사 문화유적의 답사라는 여행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공간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의 이주 후 200여년, 인디언으로부터 따지면 그보다 훨씬 더 긴 역사가 이어져 온 땅이고, 그에 따르는 문화유산들이 적지 않은 곳입니다. 더구나 경쟁력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 미국의 대학들이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문화를 생각하면, 미국은 유럽과 또 다른 차원의 매력을 지닌 지역입니다. 무엇보다 39개에 달하는 인디언 부족의 보호구역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오클라호마는 대초원(Tall Grass Prairie)과 대평원(The Great Plains)등 풍부한 목초지와 함께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원유 등으로 오랜 동안 풍요를 구가해온 지역이기도 합니다. 풀브라이트(Fulbright) 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곳의 대표적인 교육기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만. 이곳에 오자마자 연구 과제 외에 이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의미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가 관심을 가졌던 대상은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였습니다. 저는 사람, 자연, 도시, 제도, 역사, 문화 등 감고 있던 마음의 눈을 뜨게 한 모든 것들이 보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간 모르고 지내온 것들이 그의 편견을 바로잡아 주었기에 보배로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디언들과의 만남은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백인들에 의해 고통을 받아온 인디언이야말로 역사의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서부영화나 백인들에 의해 저술된 책들을 통해 제 마음에 뿌리 내린 왜곡된 인디언의 이미지가 비로소 바로잡혀지게 된 점을 가장 곰지게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배자들이 펼쳐 온 자기 합리화의 억설(臆說)에 의해 일그러진 인디언들의 실체를 삶의 현장에서 바로잡음으로써 내면에 고착된 편견을 해소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 입장에서 인디언에 대한 발견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을 통해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이 바로 미국의 경쟁력임을 깨닫게 된 점입니다. 대학의 역사와 현실을 통해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체력을 단련하며 단합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운영되는 미국 대학의 장점을 읽어낸 것은 제 글 내용의 핵심적인 축입니다.

인디언이나 대학의 힘에 대한 발견과 함께 오클라호마나 스틸워터의 깨끗한 자연으로부터 얻게 된 힐링의 감동은 이 책 내용의 또 다른 축입니다. 부머 호수, 리틀 사하라, 산책로로 쓰이고 있는 크로스 컨트리 코스 등 잘 보존된 자연이 인간의 내면적 평정이나 행복을 위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체험적으로 진술하고자 했습니다. 제 글의 에필로그 가운데 마무리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풀브라이트 학자로서의 가볍지 않은 사명을 짊어지고 오긴 했지만, 연구 외

에 이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달뜨게 했다. 오클라호마 사람들과의

만남, 인디언의 역사나 문화와의 만남, (특히 Route 66)과의 만남,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과의 만남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했던 스틸워터는 문만 닫으

면 절간처럼 조용해지는 공간이었다. 맑은 공기 속에 한 발만 나서면 온갖 새

와 나무들이 그들먹한 낙원이었다. 그래서 기대 이상의 힐링을 체험하며 마음

속의 온갖 찌꺼기들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이라고 어찌 사람들 사

이의 갈등과, 그로부터 일어나는 불행들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유목민들이

아름다운 꽃향기와 산토끼의 해맑은 눈빛, 그 지순(至純)한 추억으로 광풍 몰

아 치던 수많은 밤들의 괴로움을 지우듯,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걸러내는 능력

이야말로 지혜로운 인간의 전유물 아닌가. 사실 짧지 않은 6개월 동안 걸러내

야 할 단 하나의씁쓸함도 만나지 못한 나였다.

                                                          ***

스틸워터에서 화려한 행복보다는 작고 따스하며 담백한 즐거움 속에 거의

완벽한 힐링의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제 맛있고 영양가 풍부한 풀들이

많이 자라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옛 고향으로 노마드의 소떼를 몰고 재입사(

入社)하기로 한다.”

 

그곳에 가보지 않은 사람도 책을 펼치기만 하면 오클라호마와 스틸워터의 감동과 아름다움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지리라 생각합니다. 강호제현의 질정(叱正)을 고대합니다.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 푸른사상, 2014.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8. 26. 23:58

 


크로스 컨트리 경기장이 있는 캠퍼스 리크리에이션 노쓰 필드 표지판

 

 

 


누굴 응원하러 온 것일까. 행복한 가족의 모습

 

 

 


출전 팀이 단합을 도모하는 모습

 

 

 


출발의 포를 쏘기 위한 차량

 

 

 


막 출발선을 뛰어나가는 선수들

 

 

 


필드 위의 건강한 청춘들

 

 

 


눈 내린 산책길

 

 

 


산책길의 나무들

 

 

 

 

낙원 속의 산책로: OSU 크로스 컨트리 코스의 안식과 힐링

 

 

 

 

미국에 머문 지 한 달이나 되었을까. 어느 토요일 아침 늦잠으로 뒤척이고 있는데, 갑자기 문밖이 시끄러워졌다. 절간 같은 곳이라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후다닥 일어나서 문을 열어보니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뒤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호기심에 대충 아침을 챙겨먹은 우리도 덩달아 따라 나섰다. 날씨는 우중충하고 간간이 빗방울도 떨어졌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로를 따라 철조망이 쳐 있는 곳이라서 어느 개인 소유의 땅인가 보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는데, 알고 보니 그곳이 바로 OSU의 크로스 컨트리(cross country) 경기장이었다. 더구나 이곳이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크로스 컨트리 경기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경기하는 날만 제외하곤 언제나 공개되는 시민들의 산책로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전국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선수단은 물론 그 가족들, 스틸워터 시민들까지 몰려와 북적거리고 있었다. 경기를 앞두고 선수들이 몸을 풀거나 이마를 맞대고 파이팅을 외치는 열기에 가을비의 찬 기운도 잊을 만 했다. 숲속 잔디와 나무들 사이를 꽉 채우고 있던 깨끗한 정밀(靜謐)이 참으로 오랜만에 젊은 열기로 인해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숲을 뚫고 지나가는 이곳 경기 코스의 길이는 대략 5km 정도라 하는데, 느낌으로 7km는 족히 되어 보였다. 스타트 지점과 골인 지점이 같은 곳에 있는 점으로 미루어 마라톤과 비슷한 방식인 듯했다. 구경하기에는 크게 재미없는 게임이었지만, 특별히 뒤에 쳐지는 선수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열기가 대단했다. 게임 방식도 의미도 잘 모르는 우리로서는 이 코스가 바로 환상적인 산책로라는 점에만 관심을 갖기로 했다. 경기가 끝난 다음날 우리는 이 코스로 산책을 나갔다.

 

맑은 햇볕이 내려 쪼이는 잔디밭 길과 나무껍질을 두껍게 덮은 숲속 길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몇 번이나 열린 공간과 숲속을 들락거리며 작은 언덕들을 오르내리다가 갑자기 뻥 뚫린 목초지와 목장을 만났고, 멀리에 묵묵히 서 있는 말들도 보았다. 햇볕에 반사된 저 멀리의 지역 발전소가 은빛으로 반짝이고 숲속과 넓은 들판 길로 미니어처 같은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무리무리 온갖 새들은 신비스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관목과 교목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속에는 동물들의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시민들에게 개방된 산책로라 하나, 하루 산책 두 시간 남짓에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숲속의 적막을 깨는 것은 크고 작은 새소리 뿐. 간혹 마음이 평안한 날에는 나무들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듯 했다. 목초지를 빙 돌아 목책이 둘려 있고, 목책을 따라 나무껍질이나 부스러기들이 깔려 있는 길을 밟아 가노라면 염소오리사슴 등을 기르는 농가가 나무들 속에 숨듯이 앉아 있었다. 언젠가는 철망 너머로 어미 염소를 애타게 찾는 새끼염소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내가 염소 엄마의 소리를 내자, 그 녀석이 바로 내 앞으로 쫓아오는 것이었다. 배고픈 녀석이 보이지 않는 엄마를 찾아 헤매던 중이었을까. 젖떼기 전의 어린 자식이 엄마에게 매달려 사는 건 사람이나 짐승이나 일반임을 배우는 깨달음의 공간이기도 했다. 거기서 몇 발짝만 더 옮기면 캐나다 기러기들이 밤에 날아와 자고 가는 공간도 훔쳐 볼 수 있었다. 저녁 무렵 돌아 왔다가 해 뜨면 수백 마리가 함께 날아올라 부머 호수로 가는 모양이었다.

       ***

우리의 산책로는 그런 곳. 말없이 생명이 자라고 세대가 바뀌는 곳이었다. 각자 제 목소리와 모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흡사 누군가 휘두르는 지휘봉에 맞추기라도 하듯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는 곳이었다. 숲속 길을 빠져 나오면 비스듬히 올라가는 풀밭 언덕에 언제나 변함없이 한 그루 활엽수가 묵상하듯 서 있었다. 그 나무를 보는 순간이면 늘 지친 가슴에서 밀려나오던 가쁜 숨이 멎고, 거짓말처럼 마음이 고요해졌다. 마치 산책로를 빠져 나온 모든 사람들이 그러리라고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나무는 늘 빙그레 미소 지으며 서 있었다. 나도 그렇게 서 있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그 나무는 의연하고 평화로웠다. 다시는 만나기 어려울 듯한 10릿길 남짓의 크로스 컨트리 코스가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목초지에서 베어 말린 다음 말아놓은 건초더미들

 

 

 


세찬 바람에 비스듬히 누운 산책길의 풀밭

 

 

 


목초지에 둘러친 목책

 

 

 


뭔가를 맛있게 먹고 있는 산책길의 청설모

 

 

 


이곳에도 어김없이 캐나다 기러기들이 있었다!

 

 

 


누가 모아 놓았을까?

 

 

 


산책길의 풍경

 

 

 


고요, 평안, 그리고 힐링...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8. 26. 10:53

 


부머 호수 조성 기념비

 

 

 


모진 바람을 견뎌내는 부머의 서정

 

 

 

 


늦가을과 초겨울의 어름에서

 

 

 

 


부머의 새들은 어디로 날아가는가?

 

 

 

 


부머의 나무들은 물에서도 뿌리를 내리는구나

 

 

 

 

 

 

부머(Boomer) 호수에서 찾은 마음의 고요

 

 

잠시 머물다 떠나온 스틸워터는 말 그대로 낙원 같은 곳이었다. 앞의 글 어디에선가 스틸워터의 어원을 밝힌 바 있지만, 말 그대로 고요한 물그 자체였다. 맑은 공기, 녹색 풀과 나무, 알록달록한 꽃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갖가지 새들, 기분 좋은 촉감으로 끊임없이 스쳐가는 바람,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 차량 대수에 비해 아주 넓은 도로, 나지막하고 예쁜 집들... 집의 출입문을 닫으면 심심산골의 절간이요, 문을 열고나서면 한적한 시골 마을의 확대판이었다.

 

특히 우리를 매료시킨 두 가지가 이곳에 있었다. 첫째는 숙소를 나와 도보로 500m만 걸어가면 5km 남짓의 크로스 컨트리 코스(cross country course)가 있는데, OSU가 소유한 공인 경기장이자 주민들의 산책코스였다. 울창한 숲과 목초지, 목장을 뚫고 구불구불 이어진 낭만의 오솔길이었다. 둘째는 자동차로 10분 거리의 부머 호수. 스틸워터의 북쪽 면을 접한 아름다운 호수였다. 여러 나라에서 호수들을 구경했지만, 스위스 베른의 시가지에 거울같이 고여 있던 호수를 제외하곤 아직 부머 만한 곳을 기억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그것은 인공 호수였다!

 

그런데, 부머(Boomer)’일까. 오클라호마 사람들은 이주해 온 시기에 따라 수너(Sooners)’부머(Boomers)’로 불린다.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대통령이 1889인디언 세출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지금 오클라호마 지역인 ‘(인디언들에게)할당되지 않은 땅들[Unassigned Lands]’을 (백인)정착민들에게 개방하려 했는데, 대통령의 서명 직전 그 지역들에 들어가고자 시도한 미합중국 남부 정착민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부머들이었고, 그들보다 10년 정도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수너들이었다. 먼저 자리를 잡은 인디언들과 함께 그 두 종류의 백인들이 오클라호마 주민을 형성한 것이었다.

스틸워터에 인공 호수를 조성하고 부머 레이크라 호칭한 것은 그들이 아끼는 이 지역의 보물에 자신들의 역사성을 새겨 놓으려는 욕망 때문이었으리라. 어쨌든 스틸워터 사람들은 부머 호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틈나는 대로 호숫가를 걷거나 달리고 자전거 페달도 열심히 밟았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간을 낚는 태공들도 심심찮게 보이고, 물 위를 새까맣게 덮은 새떼를 관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OSU의 아름다운 연못 쎄타 폰드(Theta Pond)에는 캐나다 기러기들(Canadian Geese)과 오리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캐나다 기러기는 철새인데, 쎄타폰드의 녀석들은 계절이 바뀌어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낙원 같은 그곳을 떠날 생각들을 아예 접어버린 듯 했다. 오후쯤엔 가끔씩 휘익 날아올라 대열을 유지한 채 어디론가 날아가곤 했다. 그러나 다음날 쎄타폰드에 나가보면 그 녀석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여전히 풀밭을 뒤지고 있었다. 부머 호수에 가보고 나서야 우리는 녀석들이 어디를 다녀오는지 알게 되었다. 쎄타폰드에서 보던 녀석들을 부머 호수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머 호수는 녀석들의 임시 고향 혹은 새로운 정착지인 셈이었다. 유럽의 백인들이 밀고 들어와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이 땅에 정착했듯이. 그곳에는 호수 인근의 여러 지역에서 날아온 캐나다 기러기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몸집도 크고 생김새도 화려한데, 퍼런 색 똥은 문제였다. 아무데나 갈겨대는 까닭에 포장도로는 퍼렇게 도색되어 있었다. 하루 종일 각자의 영역에 나가 먹이활동을 한 다음, 저녁 무렵이면 부머 호수로 돌아와 가족 친지들과 대화를 나누고 밤을 지내는 모양이었다.

 

1925년에 완공된 부머 호수는 지역 발전소에 냉각수를 공급하기도 하고 시민들에게 오락과 휴식 공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표면적 251 에이커[307,224 ], 유역면적 8,954 에이커[10,959,696 ], 호숫가의 길이 8.6 마일[13.76 km], 평균 수심 9.7 피트[2.96 m]로 꽤 큰 규모였다. 부머 호수에 살고 있는 주된 어종은 큰 입 배스[largemouth bass]로서 현재 우리나라 내수면에서 토종물고기들을 멸종시키고 있는 몹쓸 존재들이다. 이외에도 얼룩메기, 넓적머리 메기, 크래피 등이 많이 살고 있었다.

 

***

 

물론 흐르는 물도 좋고, 필요하다. 그러나 거울처럼 잔잔하여 마음까지 비춰볼 만한 호수는 더 좋다.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새들을 바라보는 노인들, 땅으로 올라온 오리와 기러기들을 아장거리며 쫓아다니는 아가들, 수면에 비친 버드나무를 바라보며 고향을 떠올리는 나그네 백규, 희한하게 생긴 탈 것에 몸을 누인 채 호숫가를 질주하는 장애인 남성, 열심히 달리면서 살을 빼고 있는 젊은 여성들... 모두들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부머 호수에 안겨 있는 모습. 스틸워터가 낙원인 이유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차가운 겨울날 부머 호수에서

 

 

 


시린 물에서 피할 수 없는 일상을 즐기며

 

 

 


부머 호숫가에서 만난 이름 모를 열매들

 

 

 


부머 호숫가에서 만난 캐나다 기러기

 

 

 


부머 호숫가에서 만난 일군의 캐나다 기러기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8. 4. 20:08

 


무스코기 초입의 이정표

 

 


무스코기 초입에서 만난 인포메이션 센터

 

 


아미쉬 레스토랑의 표지판

 

 


아미쉬 레스토랑의 정갈하고 소박한 음식

 

 


아미쉬 레스토랑의 내부

 

 


아미쉬 버터 및 치즈 광고판

 

 


무스코기 네이션의 문장(紋章)

 

 


연합 인디언 네이션의 문장

 


무스코기 네이션의 국기 

 

 


삼강박물관(The Three Rivers Museum)에서 큐레이터들 및 보안관과 함께

 

 


보안관의 현란한 '권총 돌리기'

 

 


삼강박물관의 생활사 자료

 

 

 

 

크릭(Creek) 족의 꿈과 현실을 찾아

 

 

 

2014224일 아침 8시 오클라호마시티 윌 라저스 공항[Will Rogers World Airport]’ 발 유나이티드 아메리카 항공편으로 시카고 오헤어 공항으로 이동, 한국행 아시아나에 몸을 실으면 미국 생활은 끝이었다. 그래서 이 땅에 남은 미련을 남김없이 태우고자 21-22일 크릭 인디언들의 집거지를 거쳐 출발 전날 오클라호마 시티에 입성하기로 했다. 무스코기(Muscogee)와 오크멀기(Okmulgee)에 모여 산다는 크릭 인디언들을 만나기 위해 털사(Tulsa) 방향의 동쪽 우회로를 택하기로 한 것이다.

 

체류하는 동안 오클라호마에 거주하는 39개 인디언들 가운데 겨우 10여개 부족들을 접한 우리였다. 10여개 부족들 가운데는 이른바 문명화된 다섯 부족들[The Five Civilized Tribes: 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크릭(Creek/Muscogee), 세미놀(Seminole)]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클라호마 동쪽의 크릭은 마지막 코스로 남겨 두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 다섯 부족들을 ‘Civilized Tribes’로 부르고 있었으나, 그동안 우리는 그 말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civilized’문명화된으로 번역할 경우, 그동안 우리가 만난 여타의 인디언들은 뭐란 말인가. 우리가 보기에 그들 역시 이미 문명화된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훌륭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고 있는 OSU 역사과의 모제스(Dr. L. G. Moses) 교수에게 물었더니, 이 다섯 부족들이 식민시대나 초기 미 연방시대에 앵글로 색슨 계열 정착자들의 생활방식이나 관습을 수용, 그들과 선린관계를 맺어오면서 문명화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라고 했다. 내가 그 말을 미국화로 바꾸어 이해해도 무방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221. 겨울날씨치곤 쨍쨍하게 맑고 온화했다. 이 땅을 떠나기로 되어 있는 24일까지 만 3. 하룻밤은 인디언 구역에서, 나머지 이틀 밤은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보내기로 했다. 짐가방들을 트렁크에 때려 실은 우리는 렌터카를 몰고 학교를 한 바퀴 돈 뒤 177, 412, 44번 하이웨이 등을 번갈아 타면서 무스코기로 달렸다. 털사로부터 한 시간쯤이나 달렸을까. 무스코기 초입의 길가에 자그마한 관광안내소[Muskogee Tourist Information Center]가 나타났고, 그 건너편에 참한 식당 하나가 숨듯 서 있었다. 이곳에서 아미쉬 레스토랑[Amish Restaurant]’을 만나다니! 행운이었다. 전통 기독교 교회공동체 아미쉬. 메노파(Mennonite) 교회들과 비슷하지만 다른 집단이다. 그들은 스위스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재세례파(再洗禮派)’[16세기 종교개혁의 급진적 좌파 운동 집단으로서 유아세례를 부정, 죄와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성인세례를 받는 것만이 타당한 세례라고 보았음]와 근원을 공유한다. 단순한 생활, 검소한 복장, 문명과 기술의 이기(利器) 등을 기피하는 그들이었다. ‘목마른데 옹달샘 만난 격으로 여기서 그들이 운영하는 식당을 만나게 된 것. 앤틱 풍의 인테리어가 약간은 생소했으나, 벽면 가득 옛날 장식품들이 편안해 보였고 이들만의 풍미(風味) 또한 일품이었다.

 

다시 관광안내소로 돌아와 체구 좋은 중년 여성 자원봉사자의 친절한 설명을 들었다. 무스코기라 지칭하기도 하는 크릭 족은 오클라호마 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현재 이곳 외에 앨라배마조지아플로리다 등에도 분포되어 있었다. 우리가 이미 만나 본 세미놀 족 역시 이들처럼 무스코기 어[크릭 어]를 사용하는, 가까운 부족이었다. 원래 무스코기 족은 오늘날 테네시조지아앨라배마 주에 걸쳐 흐르는 테네시 강을 따라 건축물을 쌓았던 미시시피 문명의 후예로 추측된다. 미시시피 문명을 이룬 사람들 가운데 최대의 공동체는 카호키아 토성터[Cahokia Mounds]’로부터 나왔으리라 추정되는데, 이미 그 시대에 계급화된 사회나 상속이 이루어지던 종교적정치적 집단이 생겨나 미국의 중서부와 동부를 800년부터 8세기 가까이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무스코기 족이 바로 그 후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초기에 개척자로 등장한 스페인 사람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고, 그 가운데 탐험대를 이끌고 나타난 스페인 사람 데소토와 마빌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데소토의 탐험대가 퍼뜨린 전염병으로 많은 인디언들이 죽어 인구가 급격히 감소되었고, 결국 미시시피 문명도 붕괴되기에 이르렀으나, 살아남은 인디언들 가운데 무스코기 어를 쓰는 사람들이 무스코기 부족 혹은 무스코기 부족 연합으로 다시 뭉치게 된 것이다.

 

1866년 새 정부를 세운 크릭 족은 오크멀기를 수도로 정했고, 1867년에 세운 의사당을 1878년엔 더 크게 확장했다. 우리가 돌아본 크릭 네이션 의사당은 국가의 역사적 랜드마크로서 크릭 족 의사당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크릭 족은 번영기였던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학교교회공공건물 등을 지었는데, 이 시기 이 종족은 자치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연방정부로부터는 최소한의 간섭만 받고 있는 상태였다.

1898커티스 법[Curtis Act]’에 의해 부족 정부가 해체되었고, ‘도스 할당법[Dawes Allotment Act]’에 의해 부족의 임대 토지는 사라지게 되었다. 도스 위원회는 부족원들을 혈통에 의한 크릭 족자유민으로서의 크릭 족으로 나누어 등록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부족원들이 갖고 있는 크릭 혈통의 비율에 상관없이 아프리카 혈통만 인정되면 누구나 그 범주에 분류해 넣었던 것이다. 1906426, 미합중국 의회는 1907년에 오클라호마가 주의 자격을 인정받을 것으로 예상, ‘1906년 문명화된 다섯 부족 법안을 통과시키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크릭 족은 8,100의 땅을 비원주민 정착자들과 정부에 빼앗기고, 그 후에야 ‘1936년 오클라호마 인디언 복지법아래 일부 무스코기 족 도시들은 연방의 승인을 받게 된 것이다. 크릭 네이션은 1970년까지 재조직되거나 연방의 인정을 다시 얻지 못하다가 1979년에야 1866년의 헌법을 대체하는 새 헌법을 만들어 비준하게 되었다. 1976년 하르호(Harjo)와 클레피(Kleppe) 간의 법정 소송사건으로 미합중국의 가부장주의는 종식되고, 민족자결권이 고양되었다. 크릭 네이션은 후손들의 구성원 자격을 결정하기 위한 기초로 도스 법의 명단을 이용, 58,000명이 넘는 할당자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등록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현재 크릭 족의 인구는 69,162, 주요 거주지는 미국의 오클라호마 주이며, 종교생활은 기독교[특히 침례교와 감리교], 종교적정치적전통주의적 조직인 네 엄마들의 결사(結社)[Four Mothers Society]’를 중심으로 영위되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특히 크릭, 체로키, 촉토, 치카샤 등 네 종족이 주로 그들의 땅을 비원주민 이주자들에게 할양하도록 한 도스 법이나 미 의회의 법안 활동 등에 반발하여 결성한 복합적 조직이 바로 이것이었다.

인포메이션 센터의 직원으로부터 무스코기와 오크멀기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얻은 다음 본격적인 탐사에 나섰다. 먼저 언덕 위의 ‘Five Civilized Tribes Museum’에 들렀는데, 1850526일에 세워진 무스코기 네이션의 옛 건물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들어가 보니 소장품은 별스럽지 않았다. 1층에는 다섯 부족의 휘장[seal]들과 사진 몇 장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조차 찍지 못하게 했다. 1층에서 올려다보니 2층에도 식탁이나 의자 등 생활사 자료들이 몇 가지 진열되어 있을 뿐이어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다른 네 부족들을 찾아 그들 문화와 역사유물들의 진수를 맛보고 온 우리였다. 그러한 유물들의 일부를 복제하여 모아 놓고 ‘Five Civilized Tribes Museum’의 간판을 붙인 뜻은 좋았으나, ‘통합문화를 보여주기엔 턱 없이 모자라는 컬렉션이었다.

 

약간의 실망감을 안고 무스코기 시내로 달려 들어갔으나, 이곳 역시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경기가 안 좋아서인지 기름기가 빠져 있었다. 간판마저 흐릿하게 퇴색되고 있는 옛 건물들만 경기가 좋았던 그 시절의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을 뿐 널찍한 시내 도로들에는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우리는 옛날의 역사(驛舍)를 재활용하여 만든 삼강박물관[Three Rivers Museum]’을 방문했다. 잘 나가던 시절 카우보이들이 텍사스나 오클라호마의 중남부로부터 몰고 온 소떼들을 열차에 싣고 동부로 나아가던 오클라호마 주의 출구가 바로 이곳이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성 자원봉사자 한 분이 오랜만에 만나는 외국 손님에 당황했는지 허둥거리며 친절을 베풀었다. 큰 역사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만큼 세련되지는 않았으나, 오클라호마 주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장감이 이곳에서도 물씬 풍겨났다. 잠시 후 그 여성이 전화로 호출한 정식 큐레이터가 달려왔고, 그녀로부터 박물관을 꽉 채운 각종 생활사 자료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설명이 다 끝나갈 무렵 크릭 인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보안관이 들어왔다. 홀을 꽉 채울 듯 거대한 몸집의 그는 꽤나 붙임성이 좋았다. 대대로 이 도시에서 살아온다는 그는 보안관이라는 자신의 직책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 했다. 무엇보다 한국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가계와 이 도시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바빴다. 급기야는 우리를 환영하려는 의도였는지 자신의 권총을 빼내 현란한 손놀림을 보여주기도 했다. 밖에 놓인 열차 유물까지 둘러 본 다음, 친절한 사람들로부터 간신히 빠져 나온 우리는 즉시 차를 몰아 1시간 거리의 오크멀기에 도착, 1박을 하게 되었다.

토요일인 다음날 오크멀기의 탐사에 나섰다. 공공기관이나 박물관 등은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 하는 수 없이 도심 주요부분들을 걸어 다니며 느껴보기로 했다. 윤기가 빠진 점은 다른 도시들과 같았으나, 규모가 제법 컸다. 오클라호마 주 오크멀기 카운티의 도시이자 남북전쟁 이래 크릭 네이션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 명칭 ‘Okmulgee’는 영어로 끓는 물(boiling water)’를 뜻하는 크릭 단어 ‘oki mulgee’에서 나왔다는데, ‘졸졸 흐르는 시내[babbling brook]’ 혹은 증발악취[effluvium]’ 등으로도 번역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곳은 분명 노천온천 지역이었을 것이다. ‘악취 나는 끓는 물이라면 아마도 유황온천이었으리라. 인근의 체로키 네이션에서 발견한 그들의 환영사 ‘Osiyo[오시오]’를 내가 우리말 ‘(어서) 오시오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했듯이, ‘oki mulgee’ 아쿠 (뜨거운) !’로부터 나온 것이나 아닐까 상상해 보았으나, 근거를 대지 못하는 한 부질없는 생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내내 크릭 네이션의 수도였던 만큼 시내 곳곳에 고풍스런 자취가 많이 남아 있었다. 33.2의 넓은 땅에 2010년 기준 12,321명의 인구가 분산되어 살고 있으므로 한산할 수밖에 없지만, 전체적으로 기름기는 빠져 있었다. 우리가 찾으려 한 오크멀기 다문화 역사 박물관[Okmulgee Multicultural Historical Museum]’을 길가에서 발견하고 차를 멈추었으나, 이미 문을 닫은 채 이전했다는 메모만 문 앞에 걸려 있었다. 주변에 물었으나,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고, 찾아간들 토요일에 문을 열었을 리 없어, 하릴없이 무스코기 네이션 본부가 위치한 곳을 찾았다이미 130여년이나 지난 시기의 건물들이 넓은 땅에 여유롭게 늘어서 있었다. ‘무스코기 네이션 크릭 의사당[Muscogee Nation Creek Council House]’, ‘크릭 의회[Creek Capitol]’, ‘크릭 네이션 수도 청사[Creek Nation Capital]’ 등 단순 소박한 건물들이 주변의 상가들과 행복한 어울림을 이루고 있었다. 1867년 조직된 크릭 네이션의 수반 코우치먼[Ward Coachman] 시대에 오크멀기는 수도로 지정되었고, 1870년에는 오크멀기 헌법도 제정되었다. 수도 청사 의사당 건물 뒤편의 잔디밭에는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인디언 관련 유물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가운데 눈물의 행진[Trail of Tears]’ 표지가 버티고 서 있었다. 미국이 인디언 특히 크릭 족에 대하여 자행한 횡포를 고발하는 내용임은 물론이다. 어느 인디언 네이션에 가도 ‘Trail of Tears’ 표지가 서 있는 곳은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이다. 인디언들에게 가한 미국의 원죄는 인디언이 살아 있는 한 업보가 되어 그들을 괴롭힐 것임을 이 표지판은 말해주고 있었다.

 

 


삼강박물관의 생활사 자료[MKT 라인, 즉 '미주리-캔자스-텍사스' 간 철도 노선에서 사용되던 각종 물건들] 

 

 


삼강박물관에 소장된 인디언 관련 그림[승천하는 전사의 영혼?]

 

 


삼강박물관에 소장된 인디언 관련 그림[크릭 족 전사?]

 

 


삼강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기관차

 

 


박물관에 전시된 기차의 기관실


 


지금은 박물관과 음악 홀로 쓰이는 당시의 화물열차 역

 

 

 
무스코기 초입의 환영 표지판

 

 


오크멀기에서 저녁을 먹은 집[값싼 등심이 맛있는 집]

 

 


한산한 오크멀기 시가지

 

 


크릭 네이션 의사당

 

 


크릭 네이션 의사당

 

 


'눈물의 여정' 설명판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

 

 

의사당을 떠난 우리는 널찍널찍한 주택가를 배회하다가 크고 멋진 교회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는 미국에서 보기 드문 천주교 성당도 있었다. 이름은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St. Anthony of Padua Catholic Church]’. 천주교 신자인 아내의 말대로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성당 뒤편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작은 차 한 대가 또르르 달려왔고, 문이 열리면서 로만칼라 복장의 연세 지긋하신 신부 한 분이 의상을 손에 들고 급히 나와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미사가 있다고 공지되어 있는 것을 본 터라 우리도 부랴부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미사 예정 시각이 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당 안은 텅 비어 있는데, 아까 들어온 신부가 촛불을 붙이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물으니 오늘 특별 미사가 있는데, 아직 수녀가 당도하지 않아서 당신이 직접 미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라 하자 반색을 하며 우리를 위해 포즈를 취해 주었다. 휑하니 넓은 성전에는 우리 둘 만 앉아 있었고, 신부 혼자 미사 준비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참 겸연쩍었다. 최소한 한 시간 가까이 걸릴 미사에 우리 둘만, 그것도 천주교 신자로는 아내 한 사람만 참여하는 셈이니, ‘참으로 기이하고 멋쩍은 경험아닌가.

 

우린 갈 길이 바쁘니 어여 나갑시다!’ 신부가 옷을 입으러 들어간 틈에 나는 아내의 옆구리를 찔렀다. 나의 표정이 완강해 보였던지 아내도 마지못해 따라나선다. 밖으로 나오며 생각하니 참으로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특별미사에 신도는 하나도 없고, 그나마 찾아온 한국인 관광객 두 명마저 종적이 묘연하게 사라지고 말았으니, 미사복을 입고 나온 신부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7~8년 전 유럽 자동차 여행에 나섰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상당수의 성당이나 교회들은 주일날에도 문이 닫혀 있었다. 주일 예배에 참여하고자 하이델베르그의 한 교회에 갔더니 교회 문은 열려 있었으나 목사 한 분이 앉아서 무료하게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서구사회에서 교회가 망하고 있음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그래서인가. 이 성당 정면엔 미국정신과 함께 가톨릭 정신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며[Keeping Catholicism Alive With American Spirit]’라고 쓰인 걸개가 늘어져 있었다. 그에 비해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교회에 모여 활동을 벌이는 젊은이들은 미국 사회에 뿌리내린 신교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OSU 무스코기 캠퍼스를 거쳐 무스코기 참전용사 비’, ‘무스코기 크릭 네이션 지방법원등을 일별한 다음 마지막 행선지 오클라호마시티를 향해 40번 하이웨이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크릭 탐사는 끝이 났다.

 

***

 

크릭 족을 대면하기 위해 무스코기와 오크멀기를 찾았으나, 박물관의 유물이나 건축물로 남아 있는 삶의 흔적만 보았을 뿐, 그들의 종적은 없었다. 그렇다. 아직도 검붉은 얼굴에 검은 머릿결을 날리는 그들의 모습이 유지될 리는 없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도 아닐 것이다. 나와 다른 모습의 이웃들과 섞이고 사랑함으로써 나를 변모시키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었을 터. 그러나 신화 속에 살아 숨 쉬는 인디언들의 문화나 의식도 언젠간 새로운 시대 삶의 원리로 부활될 수 있으리라. 돌고 도는 것이 세상 이치라면, 지금 위세를 떨치는 서구문화의 끝판 어디쯤에서 그 옛날 인디언들이 영위하던 생활양식이나 정신이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린 채 새로운 삶의 원리로 사람들을 고양(高揚)시키게 되리라. 그 때를 기다리며 은인자중하며 살아가는 크릭 인들을 우리는 여기서 만난 것이다.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의 사제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 100주년[2008] 기념 표지

 

 


빠두아의 성 안토니 교회 내부

 

 


오크멀기 제일 장로교회

 

 


오크멀기 제일 장로교회 내부

 

 


오크멀기 연합 감리교회

 

 

 


무스코기 전몰용사 추모비[한국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병사들 포함]

 

 


오클라호마시티의 '윌 라저스 공항' 인근에서 만난 석유채굴기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4. 28. 18:08

 

 


연구실에서, 프레너 교수

 

 


연구실에서, 프레너 교수

 

 


최근에 발간된 그의 책들

 

 

 

 

 

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온 프레너 교수

 

 

올해 2월로 접어든 어느 날 오후. 미소가 멋진 중년 신사 한 분이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자신을 역사학과의 프레너 교수라고 소개했지만,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알고 본즉 그는 지난 해 연구년으로 학교를 비운 상태였고, 나는 작년 8월에서야 OSU에 입성했기에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풀브라이트 방문학자라는 내 연구실의 문패에 호기심을 가진 것 같았는데, 말을 나누는 도중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더욱 큰 흥미를 갖는 것이었다. 떠날 날에 임박해서야 만난 점에 대하여 그 또한 애석해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그에게 흥미를 느낀 것은 그의 전공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나름대로 생각해보니, 그의 전공은 크게 보아 에너지사()’, 좁히면 에너지 개발 및 이용사’, 더 좁히면 에너지 개발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 등 사회문제사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의 전공은 오클라호마주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비록 강제이주를 당한 처지였지만, 주로 인디언들이 차지하고 있는 대평원 오클라호마 주는 어딜 가나 원유와 천연가스가 생산되는 천혜의 땅이었다. 오클라호마 번영의 역사는 석유 등 천연자원 개발과 맥을 같이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문제들을 역사학의 관점에서 다루는 학자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나였다. 그저 한국사/동양사/서양사혹은 고대사/중세사/현대사쯤으로 나누어 연구하고 가르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해온 것이 한국의 역사학계나 내 의식 수준의 현주소였던 것이다. 물론 어느 분야든 역사가 있기 마련이고, 역사학으로 수렴되는 모든 부분들이 인문학의 범주일 것은 분명하지만, ‘에너지 개발의 역사가 어엿한 학문 테마로 정립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나였다. 그렇게 프레너 교수[Dr. Brian Frehner]OSU의 한켠에서 만나게 되었다.

 

프레너 교수와의 인터뷰

 

 

그의 학문적 관심을 정확히 짚어내어 나열하면, ‘1860~1945년 미국/미국의 서부/환경/기술/공공분야로 집약될 수 있다. 그는 UCLA에서 학부를, 라스베가스의 네바다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OSU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매력적인 박사학위 논문의 테마가 바로 크리칼러지(Creekology)[석유 탐사학’]에서 지질학(Geology)으로: 1860~1930년까지 남부 대평원에서의 석유 탐사와 보호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출발하여 애리조나를 거쳐 오클라호마에 정착을 본 그의 지적 탐구 여행이야말로 흡사 대평원에서 석유를 탐사하듯 진행되어 온 것이나 아닐까.

 

얼마나 많은 역사학의 테마들이 존재해왔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역사학의 새로운 테마들이 개발될 것인가. ‘역사란 본질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눈과 관점으로 보는데서 성립하며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닌 가치의 재평가에 있다는 크로체의 생각을 사건들의 해석이나 역사기술의 대전제로 삼은 E.H. Carr가 자신 있게 내세운 것처럼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면, 역사학이란 앞으로도 지식사회의 마를 수 없는 오아시스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프레너 교수는 흡사 살아있는 현장에서 꿈틀거리는 노다지를 잡은 사람처럼 보였다. 버팔로 떼가 밀고 지나가는 대초원의 한복판에서 석유채굴기가 끄덕거리며 기름을 퍼 올리는 오클라호마의 풍경을 보면서도 그에 관한 역사적 상상력을 펼치지 않을 역사학도나 인문학도는 없으리라. 그런 점에서 프레너 교수는 자부심 강한 행운아였다.

 

그는 최근 들어 <<석유의 발견: 1859-1920 석유 지질학의 본질>>, <<인디언과 에너지: 미국 남서부의 개발과 기회>>, <<라스 베가스에서 쥬스 짜기: 미국 소도시의 성장에 대한 소견들>> 등 주목할 만한 저서들과 많은 논문들을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주목을 받아온, 탁월한 학자였다. 그런 업적들을 바탕으로 여러 건의 학술상과 연구비 수혜를 받았으며, 많은 학생들이 그를 따라 면학의 열기를 분출하고 있었다.

 

프레너 교수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이제 우리도 화석처럼 굳어진 대학의 전공체계를 유연화시켜 시의적절하고 지역 친화적인 분야들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체제로 바꿀 필요가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20세기 중반에 구축한 패러다임을 21세기 한복판으로까지 지속시키려는 배짱을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학자들은 입만 열면 전공영역의 정체성[identity]’을 강조하지만, 그건 강한 울타리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에 불과하다는 점을 프레너 교수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다. 바야흐로 다원화되고 있는 우리네 삶을 어떻게 학문체계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가 된 것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