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9. 12. 7. 22:43

어딘가에 내 모습도 있을 것 같은데...

                                                                                                                                                                                                                             백규

 

    1968년도에 초등학교[그 때는 ‘국민학교’]를 졸업했으니, 끔찍하도록 긴 세월 '반세기'가 지났다. 국가적으로는 무장공비들이 떼거지로 내려와 준동했고, 내 고향의 경우 서해바다를 통해 들어온 간첩들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가던 시절이었다. 이런 경험들로 막바지 베이비부머 세대에 속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공산주의 혐오증’이 확실히 자리 잡게 되었다. 북괴[그 때는 북한을 이렇게 불렀다]가 살포한 ‘삐라들’을 다발로 주워 학교에 제출하는 것도 등하교 길에 우리가 수행하던 일과들 중 하나였다. 매우 흉흉하던 시절이었다.

 

    그 춥고 암울한 나날들을 보내다가 열네살에 고향을 떠나 48년째 타향살이를 하는 중이다. 그간 먹고 사는 최소한의 문제는 해결했으나, 여전히 ‘행복한 국민’은 아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토착 좌익들이 정치인이나 사회운동가의 탈을 쓰고 백주 대낮에 활보하고 있으니’, 불안하긴 반세기 전보다 오히려 더하다. 그간 매일 사는 것이 ‘살얼음판’이었고, 불판 위의 콩 튀듯 늘 바빴다. 흡사 ‘오늘 이것을 못 끝내면 내일이 없다’는 듯, 바쁜 학구의 세월을 살아왔지만, 지금 생각하면 회한만 가득할 뿐 잡히는 게 없다.

 

    그러다가 서너 해 전부터 초등학교 동무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나처럼 코를 찔찔 흘리며 핏기 없는 얼굴에 오들오들 떨며 용케도 유년기의 여울을 건넌 그들이었다. 중간에라도 만났더라면,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그들의 ‘청・장년 시절’을 볼 수 있었을 테지만, 다 늙어 만난 우리 모두의 얼굴에서는 이미 기름기가 빠진 지 오래였다. 그들은 내 거울이니, 나 또한 그들의 거울이리라.

    그래도 좋기만 하다. 지금의 모습에서 옛날 그들의 모습을 찾아내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더욱 좋은 것은 우리 모두 그다지 ‘옛날의 어두운 추억들’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옛날의 추위와 배고픔은 옷이 부실했고 먹거리가 충분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누군들 풍족하게 지냈으랴만, 내 고향은 상대적으로 더했다. 내겐 그런 체험들이 ‘유년기의 상흔’으로 남아 있고, 아마 내 친구들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서로 그런 상처들을 들추어 내지 않고 보듬어 주려는 ‘고운 심성들’을 지니고 있다.

 

***

 

    한 달 전부터 송년회 연락이 전해져 왔다. 인천이라? 가야지! 반복해서 SNS에 뜨는 집행부의 공지와 유혹의 문구들이 내 메마른 가슴을 따스하게 했다. 그러나 날짜가 닥치면서 정말로 부득이한 사정이 생겼다. 전날 밤 잠을 설치며 고민하다가 이른 아침 ‘몸 대신 마음만’ 가기로 했다. SNS에 불참의 댓글을 다는 내 손이 한없이 느려지기만 했다.

    친구들이 보낸 유혹의 글들 가운데 ‘우리의 만남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있을 수 있을까?’라는 협박조의 호소가 유난히 내 마음에 와 닿았다. 나이가 이쯤 되고 보면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가운데 ‘부음’이 많은데, 그 친구는 그걸 떠올렸으리라. 그렇다. 40대까지만 해도 죽음은 나와 거리가 먼 일인 줄로만 알았다. 50대에 들어서자 주변에서 날아오는 부음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50대를 졸업하면서는 부쩍 잦아졌다. 그러는 사이 나도 고향친구들의 얼굴이 몹시 보고싶어졌다. 내 얼굴이 비치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면서 깔깔 웃다보면 마음속의 찌꺼기가 모두 씻어 내려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품을 떠나고 하나씩 둘씩 가진 것들을 내려놓기 시작하는 나이 대가 바로 ‘6학년’이다. 6학년에 들어서면 재산도 명성도 학벌도 몸만 무겁게 할 뿐,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대자연을 찾아 그간 몸과 마음에 낀 녹을 벗겨내고 1년에 한 번씩이라도 어릴 적 고향의 친구들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그들의 얼굴에 비치는 내 모습을 확인하는 것. 그보다 더 귀하고 즐거운 일이 어디에 있으랴. 올해 친구들과의 해후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니, 지루한 1년을 또 다시 어떻게 기다린단 말인가.

 

    친구들, 1년 동안 부디 건강히들 지내시게!!!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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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9. 12. 3. 10:56

바퀴벌레-네이버 지식사전

 

                                                                                                                                                                                                                                                                                                백규

 

   어릴 적, 내가 자라던 초가집은 안방과 건넌방, 대청, 대청건넌방, 작업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작업실은 주로 밤 시간에 부모님과 내가 짚으로 가마니를 짜던 작은 방이었다. 하루 밤에 가마니 두세 장씩 만들면 5일장 날에 맞추어 10~20장씩 내다 팔 수 있었고, 나머지는 곡물 보관용 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병원에 가시고, 한동안 작업을 쉬게 되었다. 자연히 그 방에 출입할 이유도 없었다. 한참 만에 무언가를 찾으러 어두컴컴한 그 방엘 들어갔다. 작은 플래시로 구석의 메꾸리 근처를 비추자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다. 나중에 그것들이 바퀴벌레와 쥐며느리인 줄 알았지만, 손톱만한 벌레들이 ‘나 살려라!’ 하면서 사방으로 기어 나와 달아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메꾸리를 들추고 그 안에 불을 비췄다. 아, 그곳엔 상당히 오래 전에 죽은 채 썩어가고 있는 쥐 한 마리가 있었다. 음습한 그 곳에서 썩은 쥐 고기를 맛있게 파먹던 바퀴벌레들이 난데없는 불빛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렇다. 끔찍한 바퀴벌레들이었다. ‘절지동물 문>곤충류>바퀴목’으로 분류되며 전 세계 4천여 종이 있다는 그 놈들. 우리나라에도 10종[독일바퀴, 산바퀴, 줄바퀴, 경도바퀴, 일본바퀴, 미국바퀴, 호주바퀴, 먹바퀴, 갑옷바퀴, 가시바퀴]이나 서식하고 있다 한다. 그 생식력 또한 엄청나서 죽으면서까지 몸에 싣고 있던 알들을 퍼뜨린다고 하지 않는가.

 

***

 

  요즘 난데없이 서울 도심에 바퀴벌레들이 준동하고 있다는 언론들의 보도가 요란하다. 대명천지 21세기에 바퀴벌레들을 떼거지로 목격하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긴 하지만, 생김새나 생태적 습성으로 보아 내가 어릴 적 보던 그 바퀴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그 바퀴들이 기어 나온 근원을 파보면, 분명 내 어릴 적 그 메꾸리를 들어 올렸을 때처럼 ‘썩어가는 쥐 한 마리’가 들어 있을 것이다.

   바퀴벌레가 더 모여들어 번식하기 전에 그 ‘썩어가는 쥐 한 마리’를 바짝 태워 버리고, 그곳에 효과 좋은 소독약을 뿜어야 하리라. 그래야 온갖 해충들도 전염병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완성되어가고 있는 가마니-네이버 이미지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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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9. 11. 24. 00:33

 

                                                                                                                                                                                                                                       백규

 

  최근 들어 귀촌준비에 ‘올인’하다시피 해온 지난 몇 년간이 자꾸만 떠오르고, 부질없는 질문들만 꼬리를 잇는다. ‘조율만 하다가 연주다운 연주는 해보지도 못하는’ 피아니스트처럼, 준비에만 내 인생의 진액을 모두 소진해가고 있는 건 아닌가. 길게 느껴지기만 하던 시간의 여울들을 넘다 보니 어느 새 내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던져야 할 타이밍에 도달하면서 자꾸 주춤거려지는 것은 왜인가. 몸에서 기름기가 빠져나가는 것과 정비례로 마음에서도 자신감이 빠지고 있는 것일까. 늙어갈수록 생활에 편리한 대도시가 좋을 거라는 선배들의 조언을 귓전으로 흘려 들었는데, 그 말들이 고장 난 레코드판 다시 돌아가듯 지금서야 새록새록 마음에 되살아나는 것은 왜인가.

 

  얼마 전 시청으로부터 건축허가를 받았고, ‘대지 분할・경계 측량’을 끝냈으며, 오늘 집터와 주변 땅의 지번(地番)을 받았다. 지난 몇 달 간 토목사무소를 통해 토목측량을 했고, 건축설계사무소를 들락거리며 건축설계를 마쳤으며, 그 설계를 구현하기 위한 기초 작업까지 비로소 마무리한 것이다. 초보 농부의 서툰 농법으로 잡초에 휩싸여 신음하다가 올 한 해 가색(稼穡)의 장인(匠人)들로부터 ‘땅 대접’을 제대로 받은 내 아름다운 땅에 붉은 고추 대신 집을 심게 된 것이다! 바로 내년 봄에.

 

  그동안 집 짓는 일은 아예 시작도 하지 말라는 충고들을 선배들로부터 무수히 들었다. 닳고 닳은 건축 시공업자들을 상대하다 보면 마음대로 되지도 않을 것이며, 돈은 돈대로 들고 집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집 한 채 짓고 나면 ‘폭삭’ 늙고 만다는 것이다. 그동안 살던 아파트에서 그냥 눌러 살든지, 굳이 시골에 가려거든 누가 살다 내 놓은 집을 얻어 잠시 살아본 뒤 결정하는 게 백 번 현명한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중론이었다. 사실 집 한 채를 짓는 데 드는 돈이나 정력을 생각하면 은근슬쩍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그냥 그런 말들을 수용하여 도시 한 구석의 내 후줄근한 공간이나 시골 어느 골짜기 누군가 살다가 버려두고 떠난 공간에서 내 삶을 마치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다. 나는 어린 시절 초가집에서 살았다. 농부로 자수성가하신 부모님이 나무와 흙으로 지으신 집에서 10대 중반까지 살다가 집을 떠났다. 그로부터 몇 십 년 세월, 하숙집・자취집・아파트 등을 전전하며 이 날까지 살고 있다. 부모님의 집과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만 빼면, 모두 ‘남의 집’에서 살아온 것이다. 부모님의 집도 내 집은 아니고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도 남이 지어놓은 ‘끔찍하게 획일적인 공간’일 뿐, 아직도 내 집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덧없이 살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인생, 잠시라도 내 손으로 지은 집에서 살다 가는 것을 사치라 타박할 수 있는가. 나는 내 뜻에 따라 지은 내 집, 그것도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룬 집에서 살고 싶을 뿐이다.

 

  2년 반 후에 찾아올 정년. 내겐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자연과의 대화와 사색을 통해 내 공부와 인생을 마무리해 가리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14년 전 유럽 여행 중 하이델베르크 대학 건너편 언덕에서 만난 ‘철학자의 길’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네카 강이 흐르고 하이델베르크 고성과 대학촌이 손에 잡힐 듯이 건네다 보이던 그 언덕길. 그 때 나는 그 길을 걸으며 그 옛날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들을 떠올려 보았다. 칼 야스퍼스, 칼 만하임, 헤겔, 가다머 등등. 쟁쟁한 철학자들이 그 길을 걸으며 생각을 다졌을 것이다. 내가 집을 지으려는 곳에 그렇게 예쁜 대학촌은 없다. 눈을 들면 폐교된 옛 초등학교와 띄엄띄엄 무리지어 서 있는 민가들이 전부다. 그러나 그것들을 품어 안고 있는 산세는 하이델베르크 못지않게 아름답고 보암직하다. 그 경치만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맑은 생각의 샘물이 퐁퐁 솟아남을 느낀다. 그래서 그곳에 내 작은 와옥(蝸屋)을 앉히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 세계를 여행하고 집에 돌아와 그것을 발견한다.”고 아일랜드의 문인 조지 무어(George Moore)는 말했다. 그간 나는 내가 필요로 하고 세상이 필요로 한다고 믿는 것들을 찾아 세상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어쩌면 그것들은 환상이나 신기루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조지 무어의 말처럼 그것들 모두는 앞으로 내가 지을 집 안에 오롯이 들어앉아 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 집을 짓는다. 아니, 지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그간 환상을 찾아 헤매 온 내 영혼을 포근히 안식하게 하는 길일 수 있다.

 

에코팜은 밤 천지다

                                          

이 배추를 누가 다 먹을꼬

 

 

일을 마치고 동네 분들과 가볍게 한 잔을...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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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9. 11. 17. 05:51

, 성오 선생님!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비보입니까?

엊그제까지도 청청하시던 선생님께서 이렇게 홀홀히 떠나시다니요!!!

2019년 11월 8일의 이 비보는 부모님 소천 이후 최대의 충격으로 저를 후려쳤습니다.

 

인사동에서 선생님을 뵌 지난 6월 6일을 잊지 못합니다.

청년처럼 당당하신 모습으로 인사동 한 복판에서 저희 부부를 기다리시던 선생님을 잊지 못합니다. 반년만 지나면 ‘미수(米壽)’라고 말씀하시며 쓸쓸하게 웃으시던 선생님의 표정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569516350122180&id=100011914603684&sfnsn=mo

 

이제 저는 논문을 써서, 책을 써서, 누구에게 보여드려야 하나요?

제 일거수일투족을 응시하시리라 믿어온 선생님이 안 계신 이곳.

다시 저는 누구를 표준으로 스스로를 다잡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정신적으로 의지해온 선생님을 보내 드릴 수밖에 없는 지금.

저는 적지 않은 나이 육십 대를 질주하고 있습니다.

이제 날짜만 헤아릴 뿐 제게는 저를 지탱할 힘도 거친 바다를 항해해 나갈 등대도 없습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2019년 11월 11일, 선생님의 발인 날 아침

중국 절강대학 빈관의 객실에서

크게 울며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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