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20. 9. 4. 17:31

 

내일은 에코팜으로 이사 가는 날이다.

조금 전 서재를 정리하던 중 미색 봉투 하나가 눈앞에 툭 떨어졌다.

급히 내용물을 꺼내 펼쳤다.

, 깨알 같은 글씨의 정성을 다한 편지였다.

겨우 한 주 남짓 전 블로그에 소개한 제자 홍정현 박사가 학부 시절에 보내 준 편지. 읽다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따스한 행복감이 전신에 번졌다. 편지라기보다는 다정한 음성이 뚝뚝 떨어지는 녹음테이프같은 것이었다. 스승의 날을 며칠 앞두고 보낸, 정감 넘치는 편지였다.

 

2000년이면 그녀가 학부 3학년 때였으리라. 매사에 허점이 많은 내가 어찌 그녀의 편지를 이렇게 고이 간직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이 편지를 받고 고마운 마음에 무엇으로라도 그녀를 상찬(賞讚)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의 내 장기(長技)대로 깜빡 잊어버린 채 오늘날까지 밀려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은가. 825일에 나는 그녀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을 이메일로 받고, 감동의 마음을 블로그에 올린 바 있었다. 그로부터 겨우 열흘이 지난 오늘. 30여년이나 묵은 서재의 종이뭉치와 책 더미들을 간신히 정리하던 중이었는데, 흡사 교수님 저 여기 있어요!’하는 외침이라도 내뱉듯 생생하게 내 눈 앞에 현신한 그녀의 편지였다.

 

세월의 여울에 떠밀려 오는 동안, 편지를 받은 사실도 그 내용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시 읽어보니 그녀의 나직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가 오롯이 살아 있었다. 그동안 답답한 종이더미 속에서 용케도 살아 있었구나! 수많은 제자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내는 일을 반복하며 긴 시간을 살아온 나는 졸업축사를 하게 되는 경우 빼놓지 않는 말이 있다.

 

앞으로 10년 후 여러분은 이 사회의 어느 분야에선가 나름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치열한 10년을 보낸 후 나를 찾아와 여러분의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지금 나와 함께 ‘10년 후 재회의 약속을 합시다!”

 

그녀가 내게 보낸 편지를 20년 만에 다시 찾았고, 박사학위를 받은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은 18년 만이지만. 그게 무슨 문제이랴. 18년 만에 교육학박사가 된 그녀를 만났고, 20년 만에 학부 3학년의 그녀를 재회했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으랴. 내일 이사가 매우 순조로울 것이고 에코팜에서의 삶이 행복할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멋진 조짐'이 아니면, 그 무엇이란 말인가.^^

 

***

 

 

홍정현이 2000512일에 보내준 스승의 날축하 편지

 

 

조규익 교수님께

 

교수님! 안녕하셨어요?

저 홍정현입니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한동안은 시험 때문에 좀 바빴습니다.

교수님께선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몇 번인가 홈페이지에 들렀었는데, 글은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홈페이지 제작자가 아드님이더군요.

정말 놀랐어요.

아직 어린 학생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컴퓨터를 잘 다루는 모양이에요.

전 홈페이지 제작의 경지에 오르려면 아직~ 멀었는데 말이에요.

전에 편찮으시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완쾌하셨죠?

항상 건강하셔야 해요.

그러셔야지 지금과 같이 참 학자의 모습으로 연구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스승의 날을 맞아서, 교수님께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언제나 제게 아버지의 이미지가 되어 주시는 교수님의 배려에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요.

든든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교수님 가정에 평화와 사랑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2000512일 금요일

-제자 홍정현 올립니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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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정현

    교수님. 잠이 안 와서 교수님께서 올려주셨던 글을 다시 읽고 싶어 들어왔다가 왈칵 울어버렸습니다.
    지금도 가장 즐겨 쓰는 파란색 잉크가 담긴 만년필로 써진 걸 보니 저 글은 제 글이 분명한데....
    스물 두어살 즈음 교수님을 한 없이 동경하였던 젊은 날의 제가 종이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네요.

    교수님께 수도 없이 닿았을 제자들의 편지 중에
    보잘 것 없는 제 글도 간직해 주고 계셨다고 생각하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사실 오늘 좀 울적하고 마음이 헛헛해서 용기를 얻고 싶어서 백규서옥에 들어왔는데,
    교수님께서 적어주신 글이 제게 가슴 벅찬 큰 선물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12시가 지난 시간이니 오늘이 에코팜으로 이사가시는 날이네요.
    자유로운 몸이라면, 일손이라도 덜어드리러 가겠다고 호기롭게 말씀드리고 싶은데... 죄송해요.

    2020.09.05 01:04 [ ADDR : EDIT/ DEL : REPLY ]
  2. 정현, 댓글 고맙다. 당시에는 네 편지를 잘 간직하겠다는 마음으로 그곳에 넣어 두었을 텐데, 그 이후 깜빡 잊고 살았던 것 같다. 그래도 이렇게 타이밍맞춰 내 앞에 나타나는 걸 보며 '우연 이상의 어떤 힘'을 느끼게 되었지.^^ 덕분에 그간 소원했던 세월의 강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오늘 일단 이사를 하기로 했다. 다음 주 토요일에도 나머지 짐이 내려가야 완성되는 '이사 작업'(?)이다. 살면서 '언짢은 일들'은 늘 나타나기 마련이지. 내가 기억하는 너처럼 그런 일들 쯤은 잘 이겨나가리라 믿는다. 네 삶을 돌이켜 보면 '긍정의 힘'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부디 힘 내기 바란다.

    2020.09.05 06:06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글 - 칼럼/단상2020. 8. 25. 14:09

 

 

에코팜 농막의 마무리 작업, 풀과의 전쟁, 한없이 밀리고 있는 집필 작업 등으로 심신이 피로한 나날이다. 그것뿐인가. 코로나가 잦아들기는 고사하고 근래 들어 부쩍 치성(熾盛)해지는 양상을 보여주니, 안팎으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게으름 부릴 수는 없는 일.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신착 이메일을 검색하려니 낯익은 이름 하나가 뜨는 게 아닌가. 홍정현! 아, 오래 전에 졸업한 제자가 보내 온 소식이었다. 잽싸게 메일을 열고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옆에 있는 아내에게 큰 소리로 읽어주니, 그녀도 감동한 듯 울먹거린다.

 

98학번이라? 우리가 미국에 있던 해에 국어국문학과의 새내기로 들어온 그녀였다. 2002년도에 졸업, 올해로 벌써 18년 세월의 강이 흘러내린 것이다. 졸업 후 편입한 춘천교대를 졸업,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40 가까운 나이에 한국교원대에서 석사・박사과정을 마치고, 바로 어제 교육학박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내어머니교사로서의 현실적인 삶을 꾸려 나가며 절치부심 공부에 매진해온 그녀의 쉽지 않았을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내 눈앞에 펼쳐졌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공부하면서 ‘힘들고 외로웠다’는 말의 의미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리라. 아직도 이 땅의 젊은이들 대부분은 세상 사람들의 후진적 편견과 싸워야 한다. 프리미엄 없는 자들이 유형무형의 유산을 갖고 있는 자들과 적어도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고통스런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홍정현 박사. 이제 어엿한 국어교육학박사로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한 사람의 삶에서 매 순간은 늘 새로운 출발선’이라는 점. 그건 내 스스로 삶의 경험에서 깨달은 진리다. 다만 어떻게 출발할 것이며 다시 어떤 출발선에 서게 될 것인지는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인간승리의 모범적 사례를 내 제자에게서 확인한 오늘. 그간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졌으니, ‘제자만 못한 선생’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매어야 할 것이다. 홍 박사 만세!^^

 

*첨부: 홍정현이 보내온 메일

 

 

교수님,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인사 드립니다.

저 98학번 홍정현입니다.

너무 오래전이라 교수님께서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2002년에 졸업했으니 벌써 1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졸업 후에 제가 춘천교대로 편입하여 졸업하고,

춘천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세은이와 함께 찾아 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에 처음으로 연락을 드립니다.

뵙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면서도 그 흔한 전화 한 번을 못 드리고

백규서옥에서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그리워하기만 하며 지냈습니다.

 

잘 지내셨지요?

 

저는 춘천에서 3년을 근무하고,

천안에 직장이 있는 사람을 만나 결혼 하면서 천안으로 근무지와 주거지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연년생 남매를 낳아 키우다가

40이 가까운 나이에 청주에 있는 한국교원대학교에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8월 24일자로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하였습니다.

 

논문을 쓰는 인고의 과정 내내

논문이 완성되면 꼭 교수님께 논문 들고 찾아뵙고 싶다는 생각으로 힘든 시간을 버텼습니다.

비록 상황이 좋지 않아 당장 찾아뵙지는 못하겠지만, 졸업하는 날 교수님께 메일로라도 꼭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언젠가 제게,

공부란 할 수 있을 때 다부지게 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멋지게 해냈어야 했는데.... 다부지게 공부할 수 있는 시기를 모두 지나 보내고

부끄럽지만 아이들을 노모께 전적으로 부탁드리고 뒤늦은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어떤 분야를 공부했는지 말씀을 안 드렸네요.

비록 초등교사이지만 문법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교원대 사범대 국어교육학과에서 문법을 전공했습니다.

 

사범대에 속한 대학원이다보니 중등교사들이 많고,

초등교사라는 제 직업이 주는 편견의 굴레가 제게 늘 씌워져있어 서러움도 있었습니다.

저의 열등감인지는 모르겠으나

초등교사이니 국어의 제반 분야를 제대로 알지 못할 거라는 편견이

함께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에게도, 또 일부 교수님들께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시선들에 부딪혀 아플 때마다

"나는 숭실대 국문학과 출신이야."를 마음 속으로 새기며,

또 한편으로는 교수님께서 학문에 쏟으셨던 열정적인 모습과 학문을 대하시던 진지한 자세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교수님,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도록 저의 사표(師表)가 되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 뵙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힘든 시기가 좀 지나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전화를 먼저 드려야 하나 고민을 했는데,

연구실로 불쑥 전화를 드리기가 겸연쩍어 메일을 먼저 올립니다.

 

뵙는 날까지 부디 평안하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0년 8월 24일

 

제자 홍정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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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20. 7. 7. 15:23

 

                                                                                                                                                                                                                                                                                         조규익

나는 대부분 연구실에서 점심을 혼자 빵으로 때운다. 요즘 시중에는 맛난 빵들을 구워 파는 집들이 제법 많아졌다. 누구네 빵집이 맛있다고 매스미디어에라도 뜰라치면 빵집 주인들은 달려가 냉큼 배워온다고 한다. 그 뿐 아닐 것이다. 젊은이들 중에는 제빵의 달인이 되고자 세계 ‘빵의 나라들’에 유학을 하며 배워오는 모양이다. 10여 년 전 프랑스를 여행할 때 그곳 제빵 학원에 유학 나온 한 젊은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고생하면서도 빵의 달인이 되려는 의지로 충만한 그가 참으로 경이롭고 존경스러웠다.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처잘 것이지, 그 비싼 돈 들이며 빵 배우러 프랑스에 간단 말이여~?’ 라고 일언지하에 꾸중을 듣던 시대에 태어나 자란 나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만남이었다. 그런 젊은이들이 나이가 들고 자리를 잡으면서 우리네 빵 산업도 세계와 어깨를 겨룰 정도가 된 것 아닐까. 후배 세대가 만드는 그런 빵의 덕을 나는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빵은 두 쪽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여기에 따라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버터, 치즈, 잼, 커피 등이 대중적인 것들이지만, 내 점심상에는 ‘꿀에 잰 마늘’과 ‘매실조림’이 더 오른다. 그리고 즉석에서 쪄낸 계란 한 알로 모자라는 단백질을 보충하곤 한다. 다 먹은 뒤 아무래도 서운하여 나만의 레시피로 제조한 디저트를 꺼낸다. 얇게 썬 완숙 토마토에 올리고당과 매실청을 부어 밀봉한 다음 냉장고에 넣고 1주일간 숙성시킨 음식이다. 점심식사 후 그 중 일부를 덜어 직접 만든 요플레와 아몬드 몇 개를 섞으면 어디 내 놓아도 꿀릴 것 없는 최고의 디저트가 된다.

 

내가 지금 점심을 호화판(?)으로 먹고 지내노라는 자랑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적는 건 결코 아니다. 핵심은 설거지에 있다. 원래 띄엄띄엄 먹던 ‘연구실 혼밥’이 코로나가 창궐하면서는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다양한 음식 용기들을 수용하려면, 가뜩이나 좁은 책상이나 응접탁자가 터질 지경이다. 설거지 거리들이 많은 것도 ‘당근’이다. 밥상이 작든 크든 먹고 나면 설거지는 피할 수 없는 고역이다. 사람들이 내 말을 믿을지 의문이긴 하나, 나는 처음부터 설거지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설거지를 즐긴 지가 꽤 오래 되었다.

사실 혼자 점심을 먹다 보면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이 떠오른다. 주로 당장 해야 할 일들, 누군가가 나에게 던진 실언이나 의도치 않은 실수, 잘 나가던 논문이 봉착한 난관 등등. 많은 것들이 음식과 함께 씹혀 내 안으로 들어온다. 식사가 끝날 무렵 이것들이 뒤엉키면 모색해야 할 방향은 오리무중이 되고 만다. 그 상태에서 주섬주섬 그릇들을 챙겨들고, 각 연구실의 조교나 근로학생들이 설거지하러 오기 전 잽싸게 탕비실로 달려가 설거지에 몰입한다. 내가 경험한 설거지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맛난 음식들에서 이렇게 지저분한 찌꺼기가 나온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만남이나 모임의 끝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둘째, 지저분한 찌꺼기와 때가 시원하게 씻겨나가는 모습을 보면, 식사 도중 떠올랐던 복잡한 상념들이 한꺼번에 정리되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셋째, 궁극적으로 남들에 대하여 가졌던 서운한 감정이 대부분 물과 함께 씻겨 나가고 그 원인이 나 스스로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설거지를 하고 나서 몸과 마음이 가뿐해지는 이유를 요 근래 ‘가만히’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다가 최근 깨달은 것이 바로 앞에 제시한 세 가지 이유들이다. 물론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이 생각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이 세 가지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러한 깨달음에 이른 것일까. ‘그릇을 닦는다’는 행위와 ‘마음을 닦는다[수신(修身)]’는 행위 간에는 긴밀한 유사성이 있다.  원래 마음은 객관화될 수  없기 때문에 은유로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고, 그 경우 '마음을 닦는다'는 취의(趣意)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릇을 닦는 것’을 유의(喩意)로 끌어왔을 뿐이다. '그릇을 닦는 것'은 행주로 그릇의 때를 빼는 행위이지만,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좋은 말이나 글 혹은 깨달음을 통해 마음 속의 사악함을 정화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둘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의미의 탐색작용과 결합작용을 통해 인간은 ‘그릇을 닦는다’는 것과 ‘마음을 닦는다’는 것 사이에 이중적 상상을 통한 은유 관계가 성립됨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유산을 물려받은 나도 그릇을 닦으며 ‘내 마음의 때를 닦아내고 있다’는 ‘수신(修身)’의 본질을 결국 떠올리게 된 것이나 아닐까.

 

어쨌든 ‘혼밥 점심’을 통해 영양소를 섭취하고 세상사를 사색할 뿐 아니라, 그 설거지를 통해 ‘수신’이라는 망외(望外)의 소득까지 올리고 있는 나로서는 이 두 행위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혼밥 점심시간’이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한다.  ‘접시 닦이 알바’를 하던 초창기 미국 유학생들[혹은 그 부인들]이 혹시 이런 생각을 하며 그 고역을 견딘 건 아니었을까 하는 객쩍은 생각까지 하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어쨌든 나는 ‘혼밥 점심과 설거지’가 좋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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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20. 7. 5. 23:01

백규서옥의 옥호[은사 연민 이가원 선생님의 유작/연민체]

 

 

                                                                                                                     조규익

2020. 6. 30. 무성산 끝자락 조용한 곳에 그동안 내 환상 속에만 존재해 오던 백규서옥을 드디어 실물로 완공했다. 만 5개월 동안의 큰 역사(役事)였다.^^ 50여 년 전 대여섯 살 무렵, 당시 젊은 부모님께서 나무와 흙으로 지으시던 고향집의 추억이 아련히 남아 있는데, 마음속의 그 그림 위에 '내 집'을 덧 지은 것이다.

 

무성산의 용맥(龍脈)이 흘러내려 혈(穴)을 맺은 곳. 그 안온한 곳을 내 최후의 은거처(隱居處)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간 제법 많은 곳들을 떠돌아다녔고, 정처 없이 그려온 노마드(nomad)의 궤적 속에 내 알량한 내면은 무거운 피로감으로 절어 온 게 사실이다. 마무리해야 할 공부들은 아직도 수두룩한데 세상은 내 뜻처럼 움직여 주지 않고, 내 사고방식이나 삶의 양식은 더 이상 세상의 추이(推移)와 맞지도 않음을 절감한다. 그럴 경우 굴원(屈原)이 그려낸 <어부사(漁父辭)> 속의 어부처럼 방향을 틀어 세상에 맞추거나 조화를 가장한 아부라도 떨어야 마땅한 일이나, 그렇게 하고서야 내 성격에 어찌 단하루인들 맘 편히 살 수 있겠는가. 내가 핍박했고 나를 핍박해온 사회에서 내 불만과 불행의 원인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안으로 돌이켜 나를 반성하는 데서 내 자아와 본래 면목을 찾으려는 것이니, 저 석문(釋門)의 이른바 ‘회광반조(廻光返照)’ 정신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내 자아를 다시 찾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허둥대지 않고, 이미 어긋난 세상과 나를 일치시키기 위해 궤변과 아부를 농하려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애당초의 출발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 생각으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올해 그 거사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로부터 받은 마지막 연구년 덕이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한지 몇 발짝 만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강타했다.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집을 짓는 일’이 난감했고 남 보기에도 미안했지만, 내친걸음을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은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일’은 대안 없는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가족들을 태운 채 달리던 내 차의 핸들을 급히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고, 어려운 시기 잠시라도 내게 와서 자신의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나선 장인(匠人)들의 모습이 너무 안타깝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공사 기간 동안 참으로 성실하고 실력 출중하며 성격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담건축사사무소 남궁 담 대표, 임전수 감리사, 김병호 대목장(大木匠), 천명선・이종식・양승만・김수남・김창례 목장(木匠), 이재필 전기장(電氣匠), 고현용 조적장(組積匠), 상량문을 써 주신 서예가 우공(愚工) 이일권 선생, 나를 대신하여 모든 관리업무를 총괄해주신 유수근 사장 등 각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들과, 레미콘・타일・벽돌・기와・철근・창호・각종 장식 돌・각종 건재・중장비・미장・설비・용접・난방・목공・페인트 등을 제공한 거래처와 도움을 아끼지 않으신 전문가들의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단계마다 노역을 제공해주신 분들의 이름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그 뿐인가.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전봇대를 세우고 전선을 이어주신 전력회사 직원들과 엔지니어들, 인력들의 맛있는 점심을 늘 시간에 맞게 제공함으로써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해주신 부흥식당 정연희 사장도 잊을 수 없다.

 

백규서옥의 기념 동판

 

백규서옥을 지으며, ‘집을 짓는 일’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영혼을 일깨우는 종합예술임을 알게 되었다. 건축주와 장인들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재료들에 숨결을 불어넣고, 그 숨결이 음표로 바뀌어 생명을 노래하고 춤추는 마술임을 알게 되었다. ‘집을 짓는다’는 건 자기만의 세계와 자아의 존립근거를 마련하는 일이다. 집이 없으면 정주(定住)할 수 없고, 정주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과 공존할 수 없으며, 자신의 변함없는 존재를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동안 백규서옥은 내 환상 속에만 존재해 왔다. 은사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선생님께서 내려주신 이 옥호(屋號)의 이면에는 이상을 품고 노력하여 그것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보라는 지엄한 명령이 들어있다. 시류(時流)에 영합하여 세상 사람들과 이해를 다투지 말고, 자신의 흠결을 갈아내기 위해 수양할 것이며, 항상 근원을 추탐(推探)하여 내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보라는 것이 그 명령의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조용한 곳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통해 자아의 본래면목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세상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건축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것이 ‘무성산 백규서옥 건축’의 정신적 바탕이다. 바야흐로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

 

정면에서 바라본 백규서옥

 

백규서옥 문앞에서 백규

 

 

백규서옥 기념동판 앞에서 포즈를 취한 관계자들[왼쪽부터 임미숙・임효수・대목장 김병호・백규・총관리 유수근・목장 이종식・전기장 이재필・목장 김창례. 중앙에 유 사장의 상추도 함께 했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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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20. 5. 24. 13:59

 

 

제이슨 가족 사진[왼쪽부터 제이슨, 그레이슨, 놀만, 제이콥, 에벌린]
밝은 표정으로 놀고 있는 그레이슨과 에벌린

 

  노마드(nomadism), 노마디즘(nomadism)이란 말이 유행이다. 각각 유목민(遊牧民), 유목(민)주의[遊牧(民)主義 혹은 유목민 정신]로 번역되겠지만, 그 내포는 간단치 않다. 우리 같은 농경 정착민으로서는 쉽지 않은 생활양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유목민이다. 풀이 우거진 곳을 찾아 천막을 세우고 소떼나 양떼를 기르는 사람들. 그러다가 동물들이 얼추 풀을 뜯어먹었다 싶으면 냉큼 천막을 말아 수레나 말 등에 싣고 또 다른 풀밭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 그들은 한 곳에서 진득하게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누구인가.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영토화와 나의 발견에 바탕을 둔 탈주의 철학을 고안했지만, 그 근원적 사고가 노마드 혹은 노마디즘에 있음은 명백하다. 특정한 가치나 삶의 방식이란 굴레일 수 있으니, 그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 가고자 하는 것. 그것이 노마디즘이다. 대학 재직 40년 동안 많은 적지 않은 구미인(歐美人)들을 만났고, 두 번에 걸친 미국 체류 기간에도 그들을 만나며 그들의 내면에 남아있는 노마디즘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이 그들 정체성의 큰 부분이었다.

 

   2013년 풀브라이트 학자(Fulbright Scholar)로 미국의 OSU(오클라호마 주립대학)에 체류하고 있던 나는 여러 명의 패컬티 멤버들과 교유했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 뛰어난 영어 교육자 제이슨 컬프(Jason Culp)였다. 이미 이 블로그에 그에 관한 글과 사진들을 남긴 바 있는데, 그 글에서 나는 그의 영어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그와 만나는 과정에서 그가 TESOL[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외국어 사용자들을 위한 영어 교육]을 전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의 영어가 매우 명료하면서도 정확하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한국 사람들이라고 모두 표준 한국말을 ‘명료하고 정확하게’ 구사하지는 못하듯, 미국 사람들이라고 모두 표준 영어를 구사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영어만으로 분류할 경우 미국에서 만난 미국인들은 대충 네 부류로 나뉘었다. 짤막하면서도 느릿느릿한 영어로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는 어른들, 진한 사투리 억양으로 상대방을 갸웃거리게 만드는 사람들, 입에 오토바이 엔진을 단 듯 숨넘어가게 지껄여대는 학생들과 젊은이들, 제이슨처럼 교과서적인 영어로 호감을 주는 소수의 지식인들. 가끔 방송에서 목격하는 오바마 대통령, 전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 현 백악관 대변인과 미 국무성 대변인 등의 대중 스피치를 통해 미국 지도자들이나 상류층의 덕목 가운데 ‘언어의 명료성과 모범성’이 큰 자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제이슨에게서 그런 스피치의 전형을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이 글을 내 여행기[<<인디언과 바람의 고향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에 다시 실었지만, 그것으로 그[그의 가족]와의 관계가 끝나지 않은 것은 잊을만하면 도란도란 전해지는 그의 말이 귀를 간질이는 초원의 산들바람처럼 나를 기분 좋게 만들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넓은 초원의 한 귀퉁이에 오두막을 짓고 사는데, 이곳을 찾아와 잠시 양떼에게 풀을 먹이며 쉬다가 안녕!’을 고하고 떠난 그가 몇 년 후 늘어난 가족들과 양떼들을 몰고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이곳을 지나다가 내게 또 안녕!’을 고하는 것 같지 않은가. 내가 귀국하고 한 해 뒤에 그는 내게 연락을 해왔다. 한국의 대학에서 잠시 일할 만한 자리가 없겠느냐는 부탁이었다. 통탄할 만큼 좁은 나의 교제범위 때문일까. 시원한 대답을 못해주었다. 미안한 마음을 문면에 담아 이메일을 보냈으나,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 그러다가 6개월쯤 후에 독일로부터 이메일이 날아왔다. 몇 년간 그곳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지내게 되었노라는 메시지와 독일에서 낳은 예쁜 딸 에벌린(Everlyn)도 함께 한 가족사진을 첨부하여. 나는 반색을 하며 반가움의 답신을 보내면서 두어 차례 이메일들이 오가다가 다시 한동안 끊기고 말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덮치면서 초강대국 미국도 힘을 쓰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면서 NYU의 교수로 있는 큰 아이[조경현]와 제이슨의 아이들이 걱정이었다. 그런 내 생각이 전해진 것일까. 엊그제 그의 이메일이 거짓말처럼도착했다. 독일에서 임기를 마치고 작년 8월 미국에 귀환 후 잘 지내고 있다는 것, 이번 여름에 이스라엘에 일자리를 잡아놓고 비자를 기다린다는 것, 정년 후 살 집을 사진으로라도 보고 싶다는 것 등을 적은 다음, 새로 태어난 아들 제이콥(Jacob)이 포함된 가족사진을 첨부하여 다음과 같은 이메일을 보내왔다. 우리말로 번역한 그 이메일은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조 박사님!

 

나는 당신과 임미숙 씨가 요즘 같은 어려운 시절에 잘 지내시기를 희망합니다. 2020년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일어나게 될지 상상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금년 여름 언제쯤 이스라엘로 이사하기 위해 한 번 더 짐들을 꾸리고 있는 우리는 당신에게 이메일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스틸워터를 떠난 후 우리에게 매우 친절하게 보내 준 당신의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레이슨은 한국에서 출판된 책에 실린 우리 가족사진을 보며 대단히 감격해 했습니다. 그는 이제 우리가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퍼진 후에도 당신의 건강이 좋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흘러간 시간과 거리가 우리를 떼어 놓았어도, 당신과 임미숙 씨는 여전히 우리의 친애하는 친구들입니다. 당신을 방문하여 당신의 고향을 보기 위해 한국을 여행하는 것은 아직도 내 꿈입니다. 정년 후 살 집을 완성하셨어요? 낙원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갖고 있는 사진 좀 한 장 보내 주세요.

 

우리 가족사진 두어 장 첨부합니다. 우리는 2019년 8월 이래 오클라호마에 돌아와 있어요. 우리는 아마도 2020년 6월에 이스라엘로 이사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아직 정부로부터 여권들을 받지 못했어요. 그들은 지금 국제 여행을 제한하기 위한 여권의 갱신을 진행하고 있지는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다시 이동할 수 있을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삶은  "보류 중"입니다. 그러나 신에게 감사하게도, 우리는 잘 지내고 있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갖고 있지요.

 

당신의 친구 제이슨 드림

 

 

 

   아, 그는 아직도 노마드의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양떼에게 뜯길 풀만 있다면, 세상 어디에 가도 살아갈 수 있는 인간상이 바로 노마드 아닌가. 우리는 어찌하여 특정한 아니 알량한 이념이나 가치 혹은 삶의 방식에 구애 받으며 이 비좁은 한반도 한 구석에 박아놓은 뿌리를 뽑아내지 못하는가. 끊임없이 낯선 곳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사람들을 이웃으로 만나고 새로운 자아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가.

 

   수백 년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을 시멘트 철근 집을 아름다운 에코팜에 뚜드려 지으면서걸림 없는 노마드 친구의 이메일을 곱씹어 보노라니, 노마디즘을 찬양하고 노마드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그 반대방향으로 치달아가는 내 몰골이 영 마뜩치 않다. 어디선가 맛나고 멋진 풀들이 자라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나는 어떻게 천막을 말아 짊어진 채 내 소떼를 몰고 그곳으로 달려갈 것인가. 걱정 또 걱정이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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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20. 4. 16. 12:04

                                                                                                                                   

 

                                                                                                                                                                                                                                     조규익

 

난세에 정당을 이끌만한 아무런 식견도, 정치력도, 순발력도, 카리스마도 갖추지 못한 황교안!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언제 당을 만들어 세속의 권력을 탐하셨더냐? 군중들을 광장에 모아 불의의 권력에 대한 저항의지를 보여주었으면, 그 다음 일들은 정치인들에게 맡겨야지. 어찌 세속의 권력을 탐하여 정당까지 만들고 소란을 피운단 말이냐? 자초한 감옥살이가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희생이라도 된단 말이더냐? 전광훈!

 

탄핵당한 박근혜의 이름으로 완력을 자행하려 파당을 만든 조원진, 홍문종, 김문수 등 두서너 명의 냄새나는 정치인들! 지금도 그대들의 행위가 정녕 박근혜를 위한 일, 국민을 위한 일이라고 강변하는가? 박근혜를 팔아 그대들의 입신양명을 도모하려 함이 아니던가?

 

그동안 잘 닦아온 지역구에서 의원들을 빼내다가 엉뚱하게 다른 곳에 꽂아 넣거나 제법 잘 해온 의원들을 낙천시키고 휘하의 함량미달인사들을 공천한 것을 참신함으로 위장한 정치적 낭만주의자김형오! 지금이 그런 '멋 아닌 멋'을 부릴 태평성대인가?  ‘다리를 건널 땐 말을 바꿔타지 않는다는 평범한 금언을 잊었는가?

 

전략적으로 만든 비례전문 정당을 잠시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이게 웬 떡이냐?’ 쾌재를 부르며 꿀꺽 삼키려다 배탈이 난 멍청이 한선교와 공천위원장 공병호!

 

반문의 기치를 내세우고 지역구 의원들을 각개약진 식으로 통합당에 보내놓고 정작 자기는 오불관언(吾不關焉)’ 거리를 유지하면서 잊을만하면 정치적 선문답이나 날린 철부지 안철수! 지금도 그 방법 밖에 없었다고 변명하는가?

 

공천을 받지 못하자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 낙선함으로써 보수진영을 '확인사살한' 몇몇 저질 정치인들!

 

***

 

무능하고 부도덕한 좌파 권력이 던져 주는 몇 푼의 돈에 판단력을 매수된 일부 한국인들은 그들의 전략과 전술에 길들여져 남미의 민중으로 전락헸고, 정치인 아닌 정치꾼들은 온갖 사술(邪術)로 국민들을 오도(誤導)하고 있으며, 이들을 대신할 보수야권의 인재들마저 보이지 않는 이 현실!  이런 상태라면 앞으로 영원히 저들을 이길 수 없다.

바야흐로 무법천지의 난세가 펼쳐지고 있다. 어찌 할 것인가?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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