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9. 10. 27. 17:01

 

지금까지 대학으로부터 연구년을 받아 두 차례[1998. 1.~1999. 2./2014. 1.~2014. 8.] 미국에 체류했었다. 첫 연구년은 LG 연암재단 지원의 ‘해외 연구교수’로 UCLA에서, 두 번째는 풀브라이트 재단(Fulbright Foundation) 지원의 ‘풀브라이트 학자(Fulbright Scholar)’로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에서 각각 황금 같은 연구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

 

두 곳 모두에서 다수의 교수들과 교유했는데, 그들이 속한 트랙들[tenure track/non-tenure track]에 따라 그들의 심리상태는 두 갈래로 나뉜다는 점을 느꼈다. 말하자면 종신교수(tenured professor)로 승진할 수 있는 테뉴어 트랙 교수와 달리 난테뉴어 트랙 교수는 한시적인 계약 교수들이었다. 우리나라 대학들의 ‘정년직 교수’- ‘비정년직 교수’와 유사해 보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나라 대학들의 정년직 교수는 몇 차례의 심사를 거쳐 정년(65세)이 보장되는 반면 비정년직 교수는 몇 년 단위로 계약을 반복하면서 정년까지 가거나 그 전에 그만 두어야 하는 트랙이다.

 

아예 정년이 없는 미국의 종신교수는 말 그대로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다. 건강문제가 생기거나 필요 연금액이 충족되는 등 개인적인 여건에 따라 스스로가 물러날 때를 결정하는 만큼 죽을 때까지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듯하지만, ‘종신직’이란 말 자체가 매우 매력적으로 들리는 건 사실이다. 그러니 그 나라의 테뉴어 트랙은 우리나라의 ‘정년직’과는 분명 차원이 다르다. 물론 미국의 종신 트랙 교수라 할지라도 조교수의 경우는 매년 심사를 받아 6년째에 부교수로 승진하지 못할 경우 1~2년 뒤 학교를 떠나야 한다. 미국 주요 공립대학들의 경우 대략 49%의 교수가 종신교수이거나 종신직군 교수들이며, 사립대학들의 경우 대략 33% 만이 그런 사람들이라고 한다.

 

당시 내가 주로 만난 교수들은 조교수들이었는데, 한 눈 팔 사이 없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다. 늘 무엇엔가 쫓기듯 하는 그들이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큰 연구에 몰두하는 건 종신교수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상대적으로 그들은 느긋하여, 여행이나 취미활동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 같았다. ‘테뉴어를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로 자신에게 부여된 햇수를 헤아리며 초조해 하는 조교수 급 테뉴어 트랙 교수들은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그 어려움을 현지에서 직접 목격하면서 미국 교수들의 애환을 알게 되었다.

 

***

뉴욕대 컴퓨터과학과의 조교수로 있는 큰 아이[조경현]가 영주권과 테뉴어 심사를 동시에 받게 된다는 말을 올해 초에 누군가가 말해 주었으나, 귓전으로 흘려 들은 나였다. 2015년 9월 대학에 부임하면서 미국생활이 시작되었으니 영주권은 물론 테뉴어를 그렇게 일찍 줄 리 만무하다고 생각해온 터여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5월이 되자 영주권이 발급되었고, 대학으로부터는 9월 1일부터 부교수로서 종신교수직이 시작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말하자면 영주권은 미국 입국 3년 반 만에, 종신교수직은 뉴욕대 교수 취임 4년 만에 받게 된 것이었다. 뉴욕을 다녀 온 아내의 말에 의하면, ‘Outstanding Scholar’라는 말이 통지서에 쓰여 있었다고 하는데, 그것이 영주권과 종신교수직 조기 부여의 사유인 모양이었다. 아버지로서 자식 자랑인 것 같아 좀 뭣하지만, 큰 아이가 전공인 AI(인공지능)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연구 성과를 올리고 있는 만큼, 영주권과 종신교수직을 일찍 부여함으로써 녀석을 잡아두려는 미국 정부와 대학의 정책적 메커니즘이 작동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는 그 어렵게 생각되는 종신교수직을 매우 이른 나이에 받았다. 그의 나이 서른넷이니, 서른여덟에 겨우 정교수(정년보장)에 오른 내 경우를 생각하면 매우 빠른 것이 사실이다. 그로 인해 혹시 그가 나태하거나 자만에 빠질 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문득 들었으나, 종신교수가 되고나서도 연구와 발표에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그의 모습을 보며, 일단 안심하기로 한다. 서울대, 카이스트 등 국내 대학들에서 스카웃하려는 여러 제의들도 고사한 채 학문적 성취만을 바라보며 매진하는 그가 대견스럽다. 

 

https://m.youtube.com/watch?v=hJbXEd5gyMk&feature=youtu.be

 

오늘 포탈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녀석이 언급된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그가 현재 뉴욕대 종신교수와 페이스북의 연구원을 겸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연봉이 10억’이라는 언급은 오보임이 분명하다. 그 스스로 트위터에서 ‘Not at all’이라 답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 돈보다는 연구 과제들의 의미 있는 마무리와 발전만이 그의 유일한 관심사인 듯하다. 돈을 헤아리기 시작하면, 연구는 그 순간 정지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시니어 학자인 내 입장에서 미국 유수 대학의 종신교수가 된 그의 연구도정이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하길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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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9. 7. 20. 07:37

 

 

                                                <<넓고 깊게 지식을 나누다>>-박이정 30년사

 

 

‘책 허기’를 채워 준 은인

 

                                                                                                                        조규익(숭실대 교수)

 

음식과 책에 굶주리며 자랐다는 내 말을 요즘 젊은 세대들은 믿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이 땅의 베이비부머 세대는 어린 시절부터 음식과 책에 대한 굶주림의 트라우마를 공유한다. 사실 친구들 가운데 나는 유독 더했다. 너덜너덜한 교과서를 제외하면, 글자들이 인쇄된 비료 부대나 장에 가셨던 아버지가 간간이 들고 오시던 ‘농민의 벗’이 유일한 ‘읽을거리’였다. 책에 관한한 끔찍스런 암흑의 세월이었다. 간신히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책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긴 어려웠다. 근근이 아르바이트로 번 돈에서 하숙비를 제외하고 남는 돈은 전공 자료집의 할부대금으로 깨끗이 소진되곤 했다. 먹고, 입고, 잠자는 것을 수도승처럼 하면서도 책을 사 모으며 ‘골병 깊어지는’ 청춘을 보냈다. 그런 가난 속에서 해군사관학교와 경남대학교 교수를 거쳐 숭실대학교에 부임한 2년쯤 뒤부터 연구실로 찾아온 서광문화사의 박찬익 사장을 만나기 시작했고, 비로소 팔자로 생각되던 ‘책 허기’에서 약간 벗어날 수 있었다.

 

박 사장은 새로운 영인 자료집들이 나올 때마다 그것들의 묶음을 두 손에 무겁게 든 채로 내 방을 찾아왔다. 그는 내 표정에서 책 욕심, 자료 욕심을 어떻게 읽어냈을까. 만날 때마다 그는 나의 빈 곳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갓 우려낸 녹차처럼 따뜻하고 담담했다. 서울 유수의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박 사장은 유명한 은사들을 언급하며 자신의 전공에 자부심을 보여주곤 했다. 시골에서 간신히 학업을 마친 ‘촌놈’으로서는 그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는 게 고작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대부분 갖고 있던 ‘사제 간의 추억들’을 나는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득의 달인’으로 생각되던 그로부터 배우는 게 많았다. 박 사장의 방문 횟수가 늘어날수록 자료들은 내 빈 연구실을 차곡차곡 채우기 시작했다. 내 호주머니가 빈 듯싶으면, ‘사정 되는 대로 주시면 된다’고 안심시키는 그의 따뜻한 말들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단색 양장의 영인본들은 대부분 선학들의 논문 속에서나 구경하던 자료들이었다. 그런 자료들을 갖고 논문을 쓰면서 비로소 내 콤플렉스는 한 낱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실 선학들이 신활자로 옮겨놓은 옛 자료들을 대하며 늘 ‘암죽’을 떠올리던 나였다. 곡식의 가루를 밥물에 타서 끓인 유아용 죽이 암죽이다. 내 어릴 적 시골에서는 모유가 나오지 않거나 갓 젖 뗀 아가에게 엄마가 우물우물 씹어 죽처럼 만들어 먹여주시던 ‘그것’을 암죽이라 했다. 당시에 간간이 선학들이 신활자로 바꾸어 출판하던 자료집들은 내게 일종의 암죽이었다. 빨리 암죽의 단계를 뛰어 건너 딱딱하고 거친 곡물 그 자체를 내 ‘이빨’로 씹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박 사장을 의지하게 된 것도 당시 내가 ‘학문적 이유기(離乳期)’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제야 고백하건대, 박 사장이 놓고 간 자료들을 어루만지며 한 나절을 상념에 빠진 적도 있었다!

 

교수 생활 몇 십 년 해오면서 만용이라도 생겼던 것일까. 겁 없이 여러 권의 책들을 냈는데, 그 가운데 박이정이 만들어 주신 두 책은 잊을 수 없다. 󰡔만횡청류의 미학󰡕(1996년 초판/2009년 제2차 수정증보판)과 󰡔17세기 국문 사행록 죽천행록󰡕(2002년)은 나름의 학문적 도정을 보여주는, 내 분신들이다. 고전시가를 공부하면서 갖게 된 모색과 돌파구를 함께 제시한 것이 전자이고, 사행록(使行錄)에 관심을 갖게 된 후 발굴한 새 자료를 야심차게^^ 학계에 제시한 것이 후자이다.

이른바 ‘시조’와 악장을 통해 학계에 진출한 입장이지만, 국문학계의 의식과 담론들에서 명목과 실질이 잘 들어맞지 않음을 느끼는 건 지금도 여전하다. 초창기 어른들이 잘못 끼우신 ‘첫 단추’의 관성 때문이리라. 학계에서는 굳건하게 ‘사설시조’로 호칭하지만, 󰡔진본 청구영언󰡕 편찬자 김천택의 원래 의도가 ‘사설시조’ 아닌 ‘만횡청류’에 담겨 있다는 점을 필두로 그에 관한 모든 것을 그 한 권의 책에서 다루고자 했다. 지금도 누군가들은 음습한 곳에서 이 책의 내용을 무더기로 도용하면서도 그들의 참고문헌에는 이 책을 올리지 않는다. 깨끗지 못한 학계의 풍토 속에 ‘사설시조’ 아닌 ‘만횡청류’의 문예미학을 제시하여 고전시가의 이름을 바로잡겠노라는 나의 패기를 알아준 곳은 박이정 뿐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고서(古書)를 찾아다니는 습관이 생긴 것도 책에 대한 굶주림의 트라우마로부터 나온 것임은 물론이다. 탐서(探書)의 여정에서 만난 최고의 고서 수집가 이현조 박사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죽천행록󰡕을 입수했으며, 그것을 연구・분석한 것이 후자이다. 비록 ‘건・곤’ 두 편 중 곤 편만을 입수했으나, 자료를 어루만지며 며칠 간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생애 최고의 흥분을 경험했다. 그 덕이었을까. 국어국문학회에서의 논문 발표와 기고, 책 출간까지 나로서는 최단시간에 해치운(?) 작업이었다. 박이정 박 사장의 적극적인 호응과 도움이 결정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최근 국립해양박물관에서 발견한 건 편을 김윤아 박사의 해제로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의 학술지 󰡔한국문학과 예술󰡕 28집에 실을 수 있었으니, 그 소중한 인연 덕분이리라.

 

***

 

학문적 도정을 마무리하고 있는 요즈음. 보잘 것 없는 나를 이룬 모든 것들을 가끔씩 떠올려 본다. 오늘의 나를 만든 9할은 선조들이 남겨주신 작품들과 선학들의 연구들, 그리고 그것들을 모으고 가공하여 눈앞에 디밀어 준 학술출판 사업자들의 덕이다. 그 중심에 박이정과 박찬익 사장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이날까지 나는 학자로 그는 출판문화 사업자로 동행해 왔음을 오늘 비로소 깨닫는다. 그 세월이 30년이다! 앞으로 30년도 우리는 함께 청청한 모습으로 그 길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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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9. 6. 18. 12:53

내 공부를 어떻게 '땡처리'할 것인가

 

                                             

                                                                                조규익

 

 

연구실에 앉아 자료 해독 · 해석으로 부심(腐心)하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갓 20이나 되었을까. 앳된 여성의 목소리였다.

 

“혹시 ‘부녀자취업알선센터’인가요?”

 

약간 긴장한 탓일까. 가느다란 목소리는 더욱 기어들어가듯 가늘어지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전화 잘못 거셨어요!”라고 건조하게 응답한 뒤 끊었다.

한참동안 책장을 넘기는데, 문득 세 가지 의문들이 내 작업을 방해했다.

 

“전화를 잘 못 건 그녀는 누구일까?”

“그녀는 왜 ‘부녀자취업알선센터’에 전화를 걸었을까?”

“그런데 그녀의 음성은 어쩌면 그렇게 내 귀에 익숙할까?”

 

세 물음들이 오후 내내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내가 언제부터 잘못 걸려온 전화에 이렇게 민감하게 되었지?’ 라고 반문하며, 마음속으로는 부질없을지도 모르는 분석 작업을 계속했다.

오후 늦어서야 아래와 같은 추론하나를 완성하게 되었다.

 

「그녀는 전화기 자판을 잘못 눌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하필 내 전화번호였을까. 어쩌면 그녀의 잠재의식 속에 내 번호가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녀의 음성은 어쩌면 그렇게도 내 귀에 익숙할까. 흡사 학부 3학년이나 4학년 때 내가 지도교수로 있던 어떤 여학생의 음성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갓 졸업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부녀자취업알선센터’에 연락하고자 했다면, 지금까지 직장을 얻지 못한 상태란 말인가. 옷도 사야하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커피도 마셔야 하며, 화장품도 사야 할 텐데. 때마다 부모님께 손을 내밀기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돌아다니다 다니다 못해 이젠 (실제로 있는 기관인지는 모르나) ‘부녀자취업알선센터’의 문까지 두드린 건 아닐까.」

 

마음이 무거웠다. 호주머니에 돈이 없던 내 청춘시절이 떠오르면서 눈물도 찔끔 나오려 했다. 그래도 그 땐 ‘적빈(赤貧)’이었으나, ‘무일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길바닥에 나서는 순간부터 호주머니의 돈이 나가는 시대 아닌가. 이 시대에 ‘항산(恒産/살아갈 수 있는 일정한 재산이나 생업)’이 없다면, 아니 '능력은 있으나 일거리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 발짝인들 운신(運身)할 수 있단 말인가.

 

학기 초 어느 날. 이메일에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떴다. 열어보니 신입생이었다. 자퇴를 하려는 면담 신청이었다. 다음 날 오후 그 여학생은 연구실로 나를 찾아왔다. 사유를 물었다.

 

「나: 왜 자퇴하려고?

학생: 광고 카피라이터가 되는 게 제 꿈인데요. 한두 달 국문과 공부를 해보니, 그것과 거리가 멀어서요. 더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어려운 과목들뿐인데, 그런 걸 하다 보면 제 꿈과 더 멀어질 것 같아서 지금 단계에서 그만 두려고요.

나: 광고 카피라이터가 되려고 해도, 대학 시절 폭 넓은 공부를 해둬야 ‘더 멀리 더 높이’ 날 수 있지 않겠니? 카피 라이팅 기법만 배울 목적이라면, 굳이 대학 공부를 할 필요 없겠지? 기술만 배우려면, 학원이나 개인 교습을 받으면 몇 개월 만에도 가능하겠지. 부모님들께 말씀은 드려 보았니?

학생: 네. 부모님도 제 말씀에 동의하셨어요. 취업을 할 수 없는 공부라면 지금 당장 바꾸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셔요.

나: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나는 너와 생각이 다르지만, 너와 네 부모님께서 생각이 같다니, 내 생각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겠네.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하건 좀 폭 넓고 진중하며 끈기 있게 최선을 다해 주렴. 그리고 잠시라도 우리가 ‘국문인’으로 맺었던 인연을 잊지는 말아다오.」

 

1학년 초반에 자퇴하려는 학생은 처음 만나는 터여서, 내심 당황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무거워지려는 마음을 누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대는 바뀌고 톡톡 튀는 감성의 ‘새 세대’가 부모가 되고 사회의 중견그룹이 되어 있는데, 나는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새삼 책상 위에 무질서하게 쌓인 고전 텍스트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것들을 읽고 분석하여 글로 써내고 말로 풀어내는 것이 젊은 영혼들의 삶에 무슨 도움을 준단 말인가. 이들이 이런 어려운 말이나 들으려고 답답한 강의실에 고문 받듯 앉아서 내 말을 경청하고 있단 말인가. 이들에게 한 그릇의 밥도 마련해주지 못하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참, 국문과 고전분야의 ‘교수 질’이 어렵다는 걸 느끼기는 난생 처음이다. 첫 번 째 경우도 결국 그렇게 귀착되고, 두 번 째 학생은 더욱 그렇다. 국문학을 배워서, 아니 고전문학을 배워서 ‘밥 문제’가 해결되는가? 시대는 이제 이것만을 집요하게 묻는다.

 

내 공부를 과연 어떻게 '땡처리'할 것인가.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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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9. 5. 22. 11:41

 

 

학술답사 혹은 보물찾기

 

                                                                                                                              조규익

 

내 어린 시절 소풍날의 가장 가슴 뛰는 행사는 보물찾기였다. 파릇파릇 돋아난 나물더미 속이나, 하찮아 보이는 돌덩이 밑에 감쪽같이 숨겨진 쪽지를 찾아내곤 환호성을 지르던 친구들의 얼굴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쪽지 하나 찾아 봐야 연필 두어 자루, 공책 두어 권 주어지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 시절엔 보물을 찾아낸 아이들이 왜 그리도 부럽고 샘이 나던지. 쪽지 한 장 찾지 못한 채 소풍이 끝날 무렵이면, 늘 아쉽고 허전했다. 그 뒤부터 이날까지 내 삶은 대부분 실패한 보물찾기의 연속이다.

 

철이 들면서 국문학에 뜻을 두었고, 학부와 대학원 시절의 답사에서 얻는 설화나 민요, 귀한 자료들이 보물임을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촌로들로부터 약간 이색적인 설화 한 편이라도 얻어 듣는 날엔 가슴이 뛰었다. 비슷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천하에 없는 이본(異本)이라도 얻은 듯 흡족함을 느꼈으니, 그게 보물 아니고 무엇이랴. 그 뿐인가. 가끔 고서답사(古書踏査)’를 떠났다가 희귀본 소설 자료나 노래 자료라도 얻을라치면, 가슴이 설레어 여러 날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러니 그것들은 분명 보물이었다.

 

나이를 먹고 삶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현장에서 만나는 보물들은 보다 깊고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채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14년 전 기독교 확산과 중세문명의 자취를 확인하기 위해 6개월 간 유럽의 20개국 120개 도시들을 자동차로 여행한 적이 있었다.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이 모여 있으나 동유럽을 제외하곤 국경이 따로 없는 그 지역을 돌며, EU의 현존재가 갖는 역사적 필연성이 기독교로부터 나왔음을 덤으로 깨닫게 되었다. 전공 공부는 잠시 뒤로 미룬 채, 곰브리치의 <<세계사 이야기>>를 비롯한 각종 유럽 중심의 세계사 저술들을 샅샅이 뒤져 읽으며 보물찾기의 도구로 갖춘 것은 물론이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유럽에서 만난 보물들은 내 협소한 세계인식의 폭을 거의 무한대로 넓혀 주었다.

몇 년 전 미국의 오클라호마주립대학에 6개월 정도 머무를 때였다. 미국에 인디언들이 많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오클라호마 주에 39개의 인디언 부족과 그들의 보호구역이 있다는 사실은 그곳에 가서야 알게 되었고, 틈 날 때마다 그들을 찾아 다녔다. ‘인디언 종족역사문화 답사에 나섰던 것이다. 드넓은 대초원과 계곡 속에 숨은 듯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만나보면서 문득 옛날의 보물찾기가 떠올랐다. 현장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을 통해 미국 역사의 그늘을 발견했고, 세상살이의 한 단면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 답사여행이 대학시절 학술답사체험에서 길러진 내 습벽(習癖)의 발현이었음은 물론이다. ‘무언가를 추구하는삶 자체야말로 답사로부터 체득한 결과라 할 수 있으리라.

 

강의실이나 연구실은 삶의 현장을 최소화시킨 공간이고, 교과서나 참고서는 삶의 현장에 널린 자료들을 모아 가공하거나 조리한 음식 같은 것이다. 강의실과 연구실에서 잘 만들어진 텍스트를 보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공부에도 가끔은 야성(野性)이 필요하다. 엄마 젖을 뗀 뒤 얼마동안 이유식을 먹다가 이빨이 솟기 시작하면서 날 것 그대로를 씹어 먹고 싶어 하는 아가들을 보라. 학생들이 강의실 아닌 현장에서 거칠지만 날 것 그대로의 자료를 찾아 공부하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성장의 원리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전통 마을들을 찾아, 그 정신적 자료들을 수집하는 일은 잦을수록 좋다. 강의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표준화된 공부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를 찾아 현장에 나가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남들과 달리 쉽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 큰 공부다.

 

***

 

우리는 백제라는 이름으로 과거현재미래가 함께 숨 쉬는 카오스의 시공공주와 부여를 찾았다. 학생들로 하여금 그곳에 사는 백제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들의 언어와 문학, 역사를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분들의 어떤 것이 오늘날의 우리를 만들었는지 그들 스스로 느껴보았으면 하는 마음도 컸다.

부여에 도착하여 궁남지에서 서동(薯童)을 만나 건강한 생명력을, 부소산에 올라 백마강을 내려다보며 소름 끼치는 망국의 한을 확인했다. 그 뿐 아니다. 얼마 전까지 민중의 저항의식을 거침없이 시로 뱉어내던 신동엽(1930~1969)을 만났다. 지금도 그는 고즈넉한 부여의 한 모퉁이에 앉아 껍데기는 가라!’고 쉼 없이 외치는 중이었다. 옛날의 껍데기를 밀어내고 등장한 새로운 껍데기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현실을 젊은이들이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보물이었다. 어둘 녘 동학군의 피비린내가 아직 가시지 않은 우금치를 넘어 공주의 숙소에 도착했다. ‘웅진 백제사비 백제를 역으로 밟아온 것이다. 계룡산 산록에 자리 잡은 숙소, 그 앞엔 작은 호수가 거울처럼 앉아 흘러가는 시간과 역사를 정화시키는 중이었다. 신동엽의 금강이 거세게 흐르는 민중의 삶을 그려내려 했다면, 이곳 호수는 조용조용 껍데기들을 갈앉히는 중이었다.

 

시간을 거스르느라 피곤한 몸을 맑은 공기와 바람으로 정화시킨 다음 날, 공주대학교를 찾았다. 잘 만들어진 국제회의장에서 국어교육과 송재일 교수로부터 공주-부여의 문학과 역사특강을 들었다. 조근조근 짚어가며 공주와 부여의 역사를 깔고 그 위에 문학으로 수를 놓는 송 교수의 말씀. 소문대로 명 강의였다. 강의 전 학생들에게 송 교수를 소개하며 나는 울컥하고 말았다. 자리에 앉아있는 19학번 새내기들 사이에서 45년 전 74학번으로 초라하게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발그레한 19학번 새내기들과 당시의 내 모습이 오버랩되는 순간, ‘금강 물처럼 흘러간’ 45년 세월이 허무해서였을까. 갑자기 목이 메었던 것이다. 45년 전의 그곳은 논밭뿐이었고, 지금 이 학교의 한쪽 구석에 간신히 남아있는 돌 건물 한 채와 체육관, 연구동(지금은 박물관)이 전부였다. 지금은 종합대학이지만, 당시는 단설(單設) ‘공주사범대학이었다. 읍내의 자취방에서 진창길을 걸어와 강의실에 자리를 잡으면, 한숨이 새어나오곤 했다. 점심 걱정, 강의 뒤 금강 백사장에서의 막걸리 파티 걱정, 과제 걱정, 저녁 걱정 등등. 지금 같았으면 목가적이었을 당시, 작은 몸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그런 추억의 찌꺼기들이 한 번에 몰려들어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으리라.

 

특강 후 그곳 교수들(송재일, 권대광, 송홍규, 정형근)과 학생들이 함께 단체 촬영을 했다. 두 학교 학생교수의 멋진 만남의 자리였고, 공주대 국어교육과 교수들이 베풀어준 감동적인 호의의 현장이었다. 그곳 교수들과의 식사를 마친 뒤, 학생들은 분과별 답사의 현장으로 흩어졌다. 고전민속분과는 곰나루 전설의 현장과 박동진판소리전수관으로, 현대분과는 나태주문학관 및 공산성으로, 언어학분과는 방언채록을 위해 정안면 월산2리 마을회관으로... 저녁 무렵, 숙소에 돌아온 학생들은 가벼운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배운 뒤에 경험한 흡족함이 그들의 표정에 역연했다. 그 뿐 아니었다. 이구동성으로 가는 곳마다 만난 공주 사람들의 너그럽고 고운 심성에 놀랐다고 했다. 그래서 공주라는 지역에 정이 간다고 했다. 사실 그건 덤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선물이었다. 가슴 속에 보이지 않는 선물을 듬뿍 안고 숙소로 돌아온 학생들은 모닥불 타오르는 광장에서 끝없이 울려 퍼지는 풍물소리로 피로를 풀었다. 아마도 그들은 꿈속에서 낮 동안 마을회관에서 만났던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을 다시 만났을 것이다. 미진했던 대화를 다시 이어가며 그 분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다시 새겼을 것이다. 지워지지 않을 추억 속의 영상으로...

 

***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임을 갈파한 카아(E.H.Carr)처럼 부여와 공주에서 백제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들만의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 분주한 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학술답사를 통해 현재에 숨어있는 과거를 찾아내고,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복원하며, 미래를 창조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다시 강조하건대, 인생은 보물찾기의 역정이다. 그 보물들은 삶의 현장 구석구석에 과거라는 시간의 탈을 쓴 채 숨어있음을 그들은 깨달았으리라. 그래서 과거는 버려진 폐기물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창조하는 바탕 아니겠는가. 숭실동산에서 출발한 버스는 그들을 과거의 시공으로 이입시킨 타임머신이고, 그들은 과거현재미래를 통합하는 시간여행을 잘 마친 뒤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 시간 여행자들인 것이다.

 

멋진 젊음들에게 내 사랑을 보내며...

 

2019. 5. 22.

 

백규서옥에서 45년 전의 공주사범대학 새내기 백규 씀

 

 

궁남지로 향하는 숭실 국문인들

 

궁남지와 포룡정

 

포룡정의 현액(<서동요>)

 

백제역사에 대한 설명을 듣는 학생들

 

고란사 극락보전 앞에서 대학원생들과 교수들

 

고란사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

 

고란사에서(왼쪽부터 임채훈 교수, 백규, 이경재 교수)

 

신동엽 시인 생가

 

신동엽 시인

 

신동엽 시인 생가(시인의 방 앞 현판의 시-부인 인병선 작)

 

신동엽 시인의 방

 

신동엽 시인의 육필

 

신동엽 시인 앞에서

 

숙소 사계절펜션의 뜰(커플상)

 

숙소 앞 호수

 

숙소 앞 호수

 

공주대학교 송재일 교수 특강

 

특강이 끝나고 학생들과 교수들(앞줄 왼쪽 다섯번째부터 공주대 권대광 교수, 정형근 교수, 송홍규 교수, 임채훈 교수, 송재일 교수, 백규, 이경재 교수)

 

고마나루 곰사당

 

고마나루 숲을 걷다가 만난 노송

 

박동진판소리전수관의 김양숙 관장

 

<사랑가> 학습을 마치고

 

국립공주박물관

 

월산2구 마을회관에서 방언채록 중

 

방언채록을 마치고

 

무령왕 부부가 잠들어 있던 목관(재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신발

 

공주 송정리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

 

청양 본의리에서 출토된 백제 시대 사찰의 대좌

 

청춘의 열기마냥 타오르는 불꽃

 

그 옛날 학창시절의 강의동이자 본부건물이었던 돌건물. 50여년의 세월 속에 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궁남지에서 대학원생 이은란, 이다온

 

부여의 식당 앞에서 숭실 국문의 젊은 피(임선우, 이경재 교수,장현태, 이찬희, 라힘, 박일)

 

신동엽문학관의 김형수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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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9. 5. 12. 14:21

 

, 소재영 선생님!

 

 

 

                                                                                                               조규익

 

 

 

책 표지

 

 

소재영 선생님께서 새로 내신 책(<<성오수록(省吾隨錄)>>)을 보내 오셨다. 성오(省吾)는 선생님의 아호(雅號)로서 <<논어>> 「학이」편의 “일일삼성오신(一日三省吾身/나는 하루에 세 번씩 내 몸을 반성한다)”에서 따오신 호칭이다. 선생님의 설명(“내년이면 미수를 맞는다. 그간 내가 지나온 삶을 어떤 형식으로든 한번 정리하고 뒤돌아보아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글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 출간하는 <<성오수록(省吾隨錄)>>은 일단 내 삶의 모습들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편집된 것이며, 여기에 그간 써온 글들을 모아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에 따르면, 이 책은 선생님의 일생을 조감한 책이다. 즉 ‘만남과 체험’을 중심으로 일생을 서술하신 셈이니, 자서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소재영 선생님

 

 

나는 책 앞에서 30분 정도 묵상을 했다. 선생님과 함께 한 숭실에서의 10년 세월, 그 후 현재까지 마음으로 교유해온 20여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선생님은 1999년 정년퇴임하셨으니, 학교를 떠나신지 올해로 21년째. 내년에 미수(米壽)를 맞으신다. 갑자기 가슴 속으로 자책과 회한이 밀려들었다. 그동안 늘 곁에 계신 것으로 착각한 채 무심히 지나버린 세월이었다. 그 사이 사모님을 사별하셨고, 혼자 지내오시다가 새로운 친구를 만나시어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신다는 소식까지 들었는데, 그 분마저 사별하셨음을 지금서야 알게 되었다. 지금 느끼는 회한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돌아가실 때의 감정과는 또 다른 그것이었다. 제자는 아니지만 스승으로 존경하며 사숙(私淑)해온 지난 세월. 행복했고 철없었다. 그 세월이 영속되리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허무하다. 그동안 나는 쓸데없는 일들에 매여 살아왔다는 증거일까.

 

추억 속 선생님의 모습은 ‘반듯함과 따뜻함’으로 요약된다. 가깝고 먼 사람을 불문하고 늘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그러면서도 지켜야할 거리는 늘 지키셨다. 선생님의 곁에 끊이지 않고 사람들이 모이는,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무엇보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지키고자 하신 철학은 선생님의 최대 장점이셨다. 세대의 차이를 넘어 일본과 중국의 대단한 학자들은 대부분 선생님의 팬들이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만나는 학자들은 모두 선생님의 안부를 여쭙고, 선생님과의 인연을 자랑한다.

 

사실 외국 학자들과의 인연을 지속시키기가 어려운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는 나다. 성격이나 취향의 종족적 차이가 현격하고, 각자가 속한 문화의 차이가 두드러지며, 각자의 학문적 지향 또한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차이들을 갈아 없앨 만큼 자주 만날 수도 없지 않은가. 학문적 실력은 물론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의 투자에 큰 인내와 끈기 또한 겸해야 해외 학자들과 만날 수 있고, 설혹 그런 것들을 갖추고 있다 해도 온유한 마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그들을 친구로 만드는 일이다. 해외의 유수 학자들을 보시는 눈이 범상치 않고, 한 번 연을 맺은 사람들과는 끝까지 좋은 관계로 지내시는 온유함과 끈기를 갖추셨기에 유수 해외 학자들이 선생님을 지기(知己)로 생각하고 따르는 것이리라. 술을 입에 대지도 못하시면서 중국의 학자들과 그런 관계를 유지해 오신 것은 대단한 일이다.

 

숭실에 오면서 나는 선생님의 학문적 자세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대학, 대학원 시절 누구로부터도 배우지 못한 학자적 자세를 선생님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선 근학(勤學)의 자세다. 선생님은 늘 자료를 모으시고, 논문을 쓰셨으며, 학회 활동에 열중하셨다. 그 때까지 나는 논문 한 편 간신히 쓰거나 발표해놓곤 ‘이제 한동안 쉬어도 된다’고 드러눕기 일쑤였다. 그런데, 선생님을 엿보면서 나는 깜짝 놀라 기준을 바꾸게 되었다. 논문은 쉼 없이 쓰는 것, 논문 쓰기 위해서는 자료를 열심히 모으고 읽어야 한다는 것, 남의 글과 말을 열심히 읽고 들어야 한다는 것 등등, 나름대로의 수칙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선생님을 추월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유일한 방안이 ‘논문 쓰는 작업장을 두 군데로 늘이는 일’이었다. 연구실과 집에서 각각 다른 논문들을 동시에 진행해보자는 것이었다. 아이디어는 적지 않게 있으니, 작업을 두 곳에서 진행하면 생산성이 훨씬 높아지리라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실행해보았으나, 내 스스로 지쳐서 결국 선생님을 따르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겸허한 마음으로 선생님의 발걸음 흉내나 내보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이젠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나보나 훌륭한 사람을 따라가거나 추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그게 안 되면, 무조건 존경하라!”고.

 

***

 

선생님의 의연하신 학자적 자세와 후학에 대한 사랑 덕분에 나는 이때까지 나를 다잡아 올 수 있었다. 학문을 어떻게 해야 하며, 학자의 행동거지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생님으로부터 ‘확실히’ 배웠는데, 감사의 말씀을 드릴 기회가 없었다. 고백의 타이밍을 놓친 다음 복잡한 세상사에 휘말려 여기까지 밀려오게 되었다.

 

‘무엇이 소중헌디?’라고 묻는다면, 나는 정말로 대답이 궁해진다. 그 때는 ‘중하다’고, ‘내 자존심을 손상시킬 수 없다’고 강변하며 고집을 세웠지만,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될 뿐이다. 학자로서의 걸음마와 옹알이를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셈인데, 그 은혜를 깡그리 잊고 지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내 인생도 석양으로 접어들고 있지 않은가.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성오수록>>이 매서운 회초리로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선생님을 본받아 나도 <<백규수록(白圭隨錄)>>을 쓸 수 있을까. 얼얼한 종아리를 매만지며, 새삼 부끄러운 내 지나간 시간대를 반추해본다.

 

성오 선생님,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ㅠㅠ

 

2019. 5. 12.

 

선생님을 사숙(私淑)해온 후학

 

조규익 절하고 올림

 

 

추기(追記)

 

선생님의 글귀 가운데 눈물을 훔치며 읽은 부분을 아래에 적어본다.

 

“언젠가 전도서에서 보았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한 세상이 지나고 다른 세상이 오도다.’ 사랑하는 내 아내 김숙희, 다시 사랑했던 김미혜자 약사, 부디 천국에서 평안하고 행복한 삶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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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9. 3. 7. 08:49

 

 

                                                                                                           

 

책을 잘 버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조규익

 

책과 돈은 한 군데 고여 있으면 썩는다. 한 나라의 경제가 잘 되려면 돈이 재빨리 활발하게돌아야 하고, 한 나라의 학계가 잘 되려면 책이 많이 만들어져 왕성하게 유통되어야 한다. 내 서재에서 잠자고 있는 책들이 언젠간 후학 누구에겐가 전해져 새로운 지식의 원료로 쓰인다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겐가 증정한 내 책이 자취생의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이다가 애완견의 똥받이나 시골집 아궁이의 불쏘시개로 사라지는 것보다는 중고서점 진열대에라도 올라 새로운 수요자에게 선택받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다행한 일이리라.

 

그러나 시계추처럼 당위와 현실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며칠 전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책을 쓰지도 말고, 증정하지도 말라!’는 내 글이 바로 그런 경우다. 내가 누구에겐가 친필 헌사를 써서 증정한 책이 중고서점의 서가에 진열되어 있었고, 그 책들을 산 후배가 내게 전화를 걸어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 책들이 훌륭한 내 후배의 손에 들어갔으니,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났다는 사실에 일단 안도했고, ‘책들은 돌고 돈다아니 책들은 돌고 돌아야 한다는 당위를 확인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왜 나는 이리 섭섭하고 슬퍼질까.

 

후배로부터 그 책 사진들을 받아든 순간, 내 책을 받았을 그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섯 사람 모두 바로 눈앞에 앉아 있는 듯 생생했다. 서운한 순서로 말하면 제자, 대학 후배, 몇 년 전 정년퇴임한 교수(*그는 현재 목사로 활동 중이다!),  문학평론가로 활동중인 다른 대학 교수 등으로 나열된다. 갓 펴낸 전공 책에 박학다사(博學多思)’란 소망 섞인 헌사를 써서 제자에게 건넸으니, 당시 나는 그를 얼마나 아꼈던 것일까. 그 다음이 대학 후배. 1년 후배였으나, 학창 시절에는 사적인 만남이 거의 없었던 존재였다. 시내 모 대학에 재직하던 그는 언젠가부터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에서 박사 공부를 했고, 학위를 받은 후에는 가끔 강의를 나오기도 했다. 강의가 끝나면 종종 연구실로 찾아왔고, 함께 점심이나 저녁식사를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곧잘 나누던 사이였다. 시원치는 않으나 첫 수필집을 소람(笑覽)’이란 헌사를 써서 그에게 증정했다. 공부하는 입장에서 수필집을 낸 사실이 겸연쩍었던 것일까. ‘웃으면서 보아 달라는 주문을 담은 헌사였다. 그 다음이 내가 재직하고 있는 대학의 모 외국어문학과에 있다가 몇 년 전 퇴임하여 목회를 하고 있는 교수. 그에겐 내 단평집 <<어느 인문학도의 세상읽기>>를 건넸다. 그 다음은 전공 책 <<세종대왕의 봉래의, 그 복원과 해석>>에 신년인사를 헌사로 적어 증정한 모 언론사의 기자다. 아마 보도 좀 해달라는 속뜻도 담겨 있을 것이다. 마지막은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인 모 대학 교수다. 똑똑하고 실력 있는 현대문학 분야 전공자인데, 내가 무슨 연유로 이 책(<<로터스 버드와 홍길동 이야기>>)을 증정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처음 후배로부터 전화연락을 받을 당시에는 밀려드는 서운함과 후회를 누르기 어려웠다. 나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뒤 후배가 보내 준 그 책들에서 단 한 페이지를 넘겨 본 흔적이라도 발견했다면 덜 서운했을 것이다.(*페이스북에 그 글을 포스팅한 다음 날 후배는 퀵서비스로 그 책들을 내게 보내왔다.) 내게서 받은 그대로 어딘가 던져 놓았다가 쓰레기장에 내다 버렸음을 그 책들은 내게 속속들이 일러바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나로서는 금쪽같은' 그 책들을 정성스레 포장하여 증정했다는 사실이 땅을 칠 정도로 후회스러운 것이다.  늘 책 욕심에 찌들어 살아온 나인지라, 책을(더구나 증정 받은 책을) 버리는 행위는 일종의 죄악이었다. 누군가들로부터 받은 책들에는 그들의 얼굴과 정신이 박혀 있었고, 그것들은 늘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나를 다잡아 온 셈이다. 내가 남에게 책을 줄 때도 마찬가지 마음이다. 감사와 호의, 그리고 충고가 듬뿍 담긴 마음이다. 선배들에게는 감사의 뜻을 담는다. 힘들여 만든 책을 드릴 수 있는 선배가 계시기에 행복하다는 마음이 그것이다. 친구들에게는 우정의 뜻을 담는다. ‘너와 나는 친구, 앞으로도 변치 말고 살아가자는 뜻을 내 분신인 책에 담아 전하는 것이다. 선택된 제자들에게는 충고의 뜻을 담는다. ‘학해양양(學海洋洋)/마부위침(磨斧爲針)/박학다사(博學多思)’ 등을 포함, 대상에 따라 그 수와 내용은 헤아릴 수 없다.

 

그런 마음을 담아 건넸으므로, 가급적 그 책이 오래 간수되길 바라는 것이 내 소망이었다. 그러나 이번 해프닝을 통해 깨달았다. 책은 무언가를 끄적거린 종이뭉치일 뿐 삶의 공간이나 잡아먹는 물건이어서, 학자들이라 할지라도 책을 그리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세상은 좁고, 사람은 많은데, 무거운 책을 지고 다니며 소중한 삶을 방해받기 싫어한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것들은 그저 우연히 내 눈에까지 들어온 것들일 뿐, 내가 헌사를 써서 증정한 책들이 버려진 경우가 어찌 이것들뿐이랴. 분명 그들은 아파트 혹은 동네 어귀의 쓰레기통에 이 책들을 버렸으리라. 간혹 눈썰미 있는 쓰레기 처리업자나 폐지 수거자가 저울에 달아 종이 값으로 중간상에게 넘겼을 것이고, 그 단계에서 일부가 살아남아 중고서점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니, 그만 해도 얼마나 다행이냐? 노숙자들의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이다가 지나가는 껄렁패들의 발길질에 너덜거리며 굴러다니는 것이 내 눈에 띄었다면, 나는 아마 5분 정도는 족히 기절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내 증정본을 그나마 중고서점의 진열대에 오르도록 해준 이 분들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 싶은 것이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기에 중고서점의 점주 눈에 잘 띄는 쓰레기장에 버려 주었는지, 이 분들이 눈앞에 있다면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책을 제대로 버려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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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자 최선영 올림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교수님. 지금도 교수님께서 정성스럽게 써주신 헌사를 귀히 여기고, 책을 받던 당시의 감동을 기억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수님과 함께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사를 가면서 깜박 흘리고 갔거나 버렸는줄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그나저나 교수님께서 수필집도 쓰셨는지는 몰랐네요. 구해 읽고 싶습니다.^^교수님의 이다음 책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찾아뵙겠습니다.

    2019.03.07 23:02 [ ADDR : EDIT/ DEL : REPLY ]
  2. 고맙네, 선영. 상심하는 게 아니고, 내가 너무 페이스북에서 과민하게 받아들인 것을 반성하는 글이라네. 어제 오늘 지나면서 '책은 버릴 수밖에 없고, 버려야 필요한 사람들이 구해 볼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지. 내 글을 '상심'으로 이해했다면, 그거야말로 '오독(誤讀)이야.^^ 세상엔 신경 쓸 게 너무 많고, 맘 상하는 일도 너무 많은데. 이런 일은 양념에 해당하는 해프닝이지. 결코 내가 상심하고 있지 않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네.^^

    2019.03.07 23:28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3. 제자 최선영 올림

    넵. 맞습니다, 선생님. 아마도 제가 그런 마음이 들었나봐요. "양념이고 해프닝" 정말 적절한 표현입니다. 덕분에 배웠습니다.

    2019.03.07 23:34 [ ADDR : EDIT/ DEL : REPLY ]
  4. 이선애

    교수님,
    오랜만에 소식을 전합니다. 부산한 일상에 젖어 있던 제가 잠시 교수님의 블로그를 방문할 여유를 찾았습니다.건강하신지요? 제 책장에도 교수님께서 보내주신 귀한 책이 있습니다. 열심히 탐독하지 못하였습니다. 죄송한 마음이 솟구칩니다. 흑흑
    교수님, 저도 중고서점을 열심히 애용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구입한 중고책들 중 누군가의 헌사가 붙어 있는 것이 많습니다. 유명인도 있고요. 저는 그것을 읽으며 존경하는 누군가가 이 책의 한 귀퉁이에 남긴 메모도 소중하게 읽습니다. 책은 돌고 돌아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합니다. 그래서 책이 읽고 싶어하면 제가 가진 것을 얼른 보자기에 싸서 손에 쥐어 줍니다. 혹 잊고 졸업을 하더라도 한 명이라도 더 읽으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 최근에 박사 공부를 하다 잠시 휴학을 하였습니다. 무리한 탓에 몸이 좋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반성하였습니다. 어리석었습니다.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좋은 선생으로 정년까지 잘 퇴직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
    자주 방문하겠습니다.
    남쪽에 벚꽃이 피기 시작하였습니다. 행복한 새봄되십시오.
    강마을에서 이선애 드림

    2019.03.20 20:59 [ ADDR : EDIT/ DEL : REPLY ]
  5. 선애 선생, 공부하다가 잠시 쉬는 건 괜찮은 일이지만, 건강을 상할 정도였다면, 걱정스럽네. 주변에서 몸이 상할 정도로 공부에 매진하는 사람들을 더러 보네. 존경스럽긴 하지만, 결코 따라 하고 싶진 않네. 몇 년 전 고향 선배 한 분은 내게 '공부하다 죽어라!'는 휘호를 써서 보냈는데, 지금도 그걸 연구실 문에 붙여두고 수시로 보며 나태해지는 나를 다잡고 있다네. 그래도 '공부하다 죽으면', 쓰나? 부디 '건강 제일'을 모토로 삼기 바라네. 그리고 자네도 나도 이제부턴 '게으름의 철학'을 익히도록 하세. 가끔 소식 전해주게나.

    2019.03.20 22:13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