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21. 11. 8. 21:25

딸과 함께 에코팜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시며

 

 

 

“그래, 이곳 정안이 그렇게도 좋던감?

돌아 다니다 다니다 이곳으로 들어오게?”

 

--빙모(聘母)님을 보내드리며--

 

 

 

“어머님의 맥박이 점점 느려지신대요.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요!”

 

큰 처남댁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라온병원'으로 달려가는 길. 안개 자욱한 도로 위, 핸들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착해서 2층으로 뛰어 올라가니, 방금 잠에 빠지신 듯 빙모님의 표정은 거짓말처럼 고요하고 평온하셨다. 아직 손에도 볼에도 가슴에도 온기는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뿐. 이미 받으신 선고를 되물릴 수는 없었다. 다시 기동을 하시면, 에코팜에 모셔와 멋진 파티라도 한 번 열어 드려야겠다는 야무진 꿈이 무색했다. 빙모님은 총총히 먼 길을 떠나셨고, 우리는 허탈했다.

 

어수선함 속에 도착한 공주시의료원 장례식장은 시골 장날 새벽녘인 듯 조용함 속에 붐비기 시작했다. 먼 길 보내드리는 의식이 번잡하기만 했다. 차라리 문상 온 지인들과 함께 빙모님의 얼굴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픈 충동이 일기도 했다. 함께 목청을 돋우어 “이제 일어나세요!”라고 외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실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빙모님의 다정하신 음성과 환한 미소는 벌써부터 저 멀리 공중에 맴돌고 계셨다. 남은 건 차가운 육신 뿐. 그래서 더욱 허탈했다.

 

그런 환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이틀을 보내고 난 사흘째. 우리는 빙모님을 모시고 느릿느릿 '나래원'으로 향했다. 시원한 녹색과 따스한 주황색이 섞인 계곡 한 가운데 불꽃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장모님의 육신은 단정한 상자 속 한 그릇의 재로 돌아와 우리의 가슴에 안겼다. 단 두 시간 만에! ㅠㅠ

 

그 상자를 안고 ‘대전공원묘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멀리 계룡산의 연봉이 건네다 보이는 산 중턱 양지바른 곳. 빙부(聘父)께서는 이미 그곳에 누워 계셨다. 그 옆자리에 빙모님의 유골함을 묻고 나니, 마음의 짐을 함께 내려 묻은 듯 약간 가벼워짐을 느꼈다. ‘금슬 좋으시던 두 분이 15년 만에 만나셨으니 얼마나 반가우실까’ 생각하며, 합장(合葬)의 취지가 ‘산 자들의 위안’에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다정하시던 두 분이 오랜만에 다시 만나시리라 우리는 굳게 믿고 있지 아니한가. 그렇게 빙모님은 이승을 하직하셨다.

 

1926년 11월 4일(음) 공주에서 태어나시고, 2021년 10월 1일(음) 공주에서 돌아가셨으니, 한 달 모자라는 향년 96세. 공주여자사범 부속학교 2회 졸업,  1938년-1943년 도립여자사범학교 에서 수학, 부모님의 고향인 평양의 여러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심. 

 

***

 

대학 시절의 은사 유당 림헌도 선생은 내 빙부이시고 최순보 님은 내 빙모이시다. 엄격하기만 하시던 빙부와 달리 빙모님은 자애로우셨다. 훤칠한 키에 시원한 미모와 따사한 미소가 어우러져 군계일학(群鷄一鶴)으로 돋보이는 분이셨다. 학창시절엔 공주시내에서 행사들이 더러 있었는데, 어쩌다 빙부・빙모님이 동반으로 참석하시는 경우가 있었다. 화사한 한복을 입고 착석하신 모습을 뵐 때마다 ‘참으로 멋진 분’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한 토막의 일화가 있다. 나이 듬뿍 든 딸[임미숙]이 어떤 촌놈에게 시집가겠노라 하니, 걱정에 싸인 엄마가 그 녀석의 고향집을 보러 먼 길을 나선 것. 버스도 들어가기 전이니, 고초가 오죽하셨을까. 태안읍에서 택시로 자갈길 100리를 달려 시골구석의 작은 초가집을 찾아가신 것이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개 한 마리와 닭 몇 마리가 손님을 맞았던 모양이다. 나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당장 돌아와 ‘딸년’을 꿇어앉히고 종아리를 쳤을 것이다. ‘정신 나간 것아! 그 놈 집에 가본 적이나 있니?’라고 소리소리 쳐댔을 것 아닌가. 그러나 빙모님은 ‘그런 곳에서 대처로 학교를 보낼 정도면, 사람 만나 보지 않아도 됨됨을 알 수 있다’고 오히려 딸을 안심시키셨던 모양이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내 변변찮음을 들며 혼사를 극구 말렸다는 사실을 그 후 알고 나서 나 스스로 크게 웃은 적이 있었다. 차라리 그 때 깨어졌더라면, 나야말로 더 멋진 짝을 만날 수 있었을 것 아닌가.^^

 

빙모님은 이른바 여장부 혹은 대인배(大人輩)이셨다. 늘 긍정적이고 낙천적이셨다. 걱정에 휩싸인 주변사람들에게 늘 위안과 자신감을 주시던 분이었다. 결혼식 전날 밤,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진해에서 예식장이 있던 서울로 올라온 나는 크게 걱정되어 빙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랬더니, “이 사람아, 걱정 말게. 하늘도 둘의 결혼을 축복하느라고 그러는 걸세!”라고 명랑하게 대답하시는 게 아닌가. 다음 날 하늘은 거짓말처럼 청명하게 개었고, 나는 빙모님의 담대하심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최근 기억력을 잃으시면서 한동안 말수도 크게 줄으셨다. 그렇게 말씀 나누시길 좋아하시던 빙모님이 안타까워 일부러 새로운 화제들로 대화를 이어나가곤 했다. 그러나 대화는 늘 다음과 같은 문답으로 똑 같이 마무리되곤 했다.

 

“그래, 이곳 정안이 그렇게도 좋던감? 돌아 다니다 다니다 이곳으로 들어오게?”

 

“그럼요. 돌아 다니다 다니다 보니 이곳이 최고였어요. 무엇보다 빙모님이 가까이 계시고, 형제들도 모두 근처에 살고 있잖아요? 외롭지 않아서 좋지요. 그러니 빙모님께서도 저희 집에서 오래 오래 머무시며 옛날의 건강을 회복하도록 하세요. 진지도 많이 드시고요.”

 

“놀고먹는 할매 밥 많이 먹어서 뭐하게?”

 

“진지 많이 드시고 걷기 운동도 많이 하셔서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셔야지요. 오래 사셔야 손주들이 자라서 제 앞가림 하는 것도 보시고, 좋은 세상 많이많이 즐기실 수 있지요.”

 

“그래. 말은 고맙네만. 늙은이 그저 걸치적거리기만 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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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빙모님의 영전에 명복을 빌어드립니다. 두 분이서 영원히 행복하게 영계(靈界)의 청복(淸福)을 많이많이 누리소서.

 

 

2021. 11. 7.

 

 

사위 규익 엎드려 절하고 올립니다

 

초코를 데리고 사위와 함께 에코팜을 산책하시는 빙모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21. 7. 19. 23:31

 

                                                 유영선(동양일보 상임이사)

 

 

http://www.d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37913 

 

 

 

“앞으로 우리 뇌가 가짜와 진짜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면서요?”

 

“가짜와 진짜를 구분할 필요가 없어지지요. 어차피 함께 살게 되니까요. 이미 시작되었잖아요.”

 

유튜브 녹화 차 회사를 방문한 박외진 AI 로봇전문가와 잠시 차 한 잔을 나누는 시간, 메타버스(metaverse) 얘기가 나왔다. 현실적 감각으로는 아직 이해가 어려운 가상의 세계와 AI에 대한 대화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서 흥미로웠다. 문득 최근 관심을 갖게 된 AI의 불균형에 대해 질문을 했다. 모교인 카이스트 전산학과에 1억 원의 장학금을 쾌척하면서 지원 대상을 여학생으로 한정했다는 뉴욕대 조경현 교수가 떠올라서였다.

 

“조경현 교수 알아요?”

 

“아, 조경현 교수요. 카이스트 후뱁니다. 조 교수가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여성들을 상대로 장학금을 지원한 것 정말 잘한 일이에요. 요즘 전세계 AI 연구자들의 최대 화두가 ‘다양성’과 ‘성별균형’이거든요. 그동안 AI에 들어간 데이터에는 ‘흑인’이 없어요. ‘소수집단’이나 ‘여성’도 없어요. ‘소외된 지역’도 없지요. 잘사는 나라, 백인, 남성의 데이터로 만들어지고 있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AI는 불균형일 수 밖에 없어요. AI의 활동이 불평등을 초래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요. 늦었지만 최근 들어서 ‘데이터 편향(bias of data)’ 문제를 바로잡자는 목소리들이 높아지고 있고 그것이 AI업계의 과제입니다.”

 

편향된 데이터로 알고리즘을 만든 AI는 인류의 대표성을 지닐 수 없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은 인공지능업계의 연구자 대부분이 남성들로, 그들 눈에는 이런 문제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이 없다는 이유로 여성이나 소수 집단이 데이터에서 배제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AI연구에서 ‘젠더 균형’이 중요한 이유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대놓고 드러내 여성전문가를 지원하고 있는 이가 조경현 교수이다. 조 교수는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핀란드와 캐나다를 거쳐 미국 뉴욕대의 종신교수로 세계 인공 지능 학계의 주목을 받으며 AI를 연구하는 천재 공학도. ‘인공 지능 번역’의 역사를 새로 썼다고 평가받는 자랑스런 30대 젊은 남성 공학자다.

 

그가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것은 뉴욕대 교수로 임용된 지 4년 만에 종신 교수가 됐고, 구글, 아마존 등 굴지의 글로벌 IT 기업이 그의 연구를 후원하는 등 뛰어난 연구업적과, 강연료나 상금을 받는 족족 탈탈 털어 전액을 기부, 그것도 여성공학도를 위한 장학금으로 쾌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성별불평등’을 줄이기 위해서다.

 

지난해 ‘삼성 AI 연구자상’으로 받은 상금은 전액을 포닥(포스트닥터)을 한 캐나다 몬트리올대에 기부했고, 네이버, SK텔레콤 등 국내 기업체 강의료도 받은 즉시 학생들에게 내놓았다. 올해 받은 호암상의 상금은 석·박사를 공부한 핀란드 알토대에 3만유로(약 4000만원)를 보냈고, KAIST에 1억원을 기부했다. 몬트리올대 알토대 카이스트는 모두 조 교수가 공부를 한 모교들이다. 그는 모교에 장학금을 보내면서 대상을 ‘컴퓨터과학을 전공하는 여학생’으로 한정했다.

 

카이스트 장학금도 마찬가지로 여학생 전공자를 대상으로 지정했다. 카이스트 장학금에는 자기 이름 대신 어머니 이름을 내걸어 ‘임미숙 장학금’이라 명칭을 붙였다. 어머니 이름을 내건 이유는 부모님이 대학동기로 똑같이 공부했지만, 어머니는 조 교수 형제를 기르느라 경력단절여성이 되어서, 그런 어머니의 희생에 감사드리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혹시 여자 후배들이 자신의 어머니처럼 출산과 육아 때문에 고민하게 된다면, 장학금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한 번 더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조 교수는 또 한국 고전 학술상 제정에도 1억원을 기부했다. 고전문학자인 아버지와 제자들이 지원도 없이 묵묵히 한 우물 파는 것을 보면서 인문학자들을 돕고 싶었단다.

 

균형 잡힌 생각과 물질에 매이지 않는 천재가 우리의 미래를 맡는 AI연구자라는 것이 마음이 놓인다. 그리고 우리사회 불평등, 그 가운데서도 젠더 평등을 위해 바른 사고를 갖고 있다는 것에 박수를 보낸다.♣

 

[동양일보 2021. 7. 15.]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21. 6. 3. 18:51

 

 

지난 4월 18일에 조경현[뉴욕대 교수]이 2021년 삼성호암공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보도를 접했고, 그로부터 2개월 반쯤 지난 시점[2021. 6. 1.]에 시상식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에코팜의 잡초들을 뽑고 있던 중 호암재단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5월 31일[월]에 상경, 다음 날 삼성호암상 대리수상자의 자격으로 시상식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경현이 직장[뉴욕대 컴퓨터과학과]에서 학기 중이고, 무엇보다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는 현 시점에서 귀국하려면 격리 등 시간적인 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재단은 부모인 우리 내외를 대리수상자로 부른 것이었다. 덕분에 평소 갈 이유도 기회도 없었던 신라호텔에서의 1박과, 그 안의 비싼 식당들에서 몇 끼의 식사와 잘 관리되는 수영장 사용 등 융숭한 대접의 호사를 누렸다.^^

 

6월 1일 오후 1시. 영빈관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다른 참석자들과 30분 정도 환담을 나눈 뒤 식장으로 옮겨 1시간 정도 리허설을 가졌다. ‘시상식에 무슨 리허설일까?’ 의아했으나, 코로나로 인해 극히 제한된 관계자들만 시상식에 참여했고, 6명의 수상자들[과학상 물리・수학 부문: 미 스탠퍼드 대 허준이(38) 교수/과학상 화학・생명과학 부문: 서울대 강봉균(60) 교수/공학상: 미 뉴욕대 조경현(36) 교수/의학상: 미 존스홉킨스대 이대열(54) 특훈 교수/예술상: 봉준호(52) 영화감독/사회봉사상: 방글라데시 꼬람똘라 병원 이석로(57) 원장] 가운데 조경현과 이대열 교수, 이석로 원장 등이 온라인으로 참여했으며, 행사 전체가 온라인으로 중계되는 까닭에 치밀한 시나리오와 리허설이 필수절차임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6명의 수상자들 가운데 직접 참석한 허준이 교수, 강봉균 교수, 봉준호 감독 등 3명과 김황식 이사장을 비롯한 이사들, 심사위원들, 그리고 다수의 보조요원들이 참석한 작지만 큰 규모의 행사였다. 특히 다수의 보조요원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빈틈없이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코로나가 생겨나기 전인 2019년의 행사 때는 전체 500여명의 인원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재단 사무국장의 사회로 시상식은 정각 3시에 시작되었다. 김황식 이사장의 인사말, 김기문 심사위원장[포스텍 교수]의 심사보고, 부문별 시상과 수상소감[수상자마다 공적에 대한 설명과 수상, 수상소감의 세 부분으로 진행], 바이올리니스트 신지아의 축하연주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행사의 전 과정이 온라인으로 생중계되었다. 수상자들의 수상소감 중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허준이: “수학은 나 자신의 편견과 한계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우리가 아직 풀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들은 이해의 통합을 통해 해결되리라 믿는다.”

 

강봉균: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의 영광은 실험실에서 함께 고생한 많은 학생들과 연구원들의 피땀어린 노력 덕분이다.”

 

조경현: “인공지능 연구의 궁극적 목표는 지능이란 무엇인지, 이성이란 무엇인지, 감히 과학으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먼 인공지능 분야에 격려과 응원의 의미가 담긴 상을 받아 감사하다.”

 

이대열: “뇌의 기능과 기능장애에 대해 알고 싶고 연구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뇌 과학 선배 과학자들과 새로운 지식과 통찰을 나눠 준 공동 연구자와 학생들에게 감사하다.”

 

봉준호: “창작의 불꽃이 꺼지지 않아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중에 한 편 정도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고전으로 오래 기억될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기쁠 것 같다.”

 

이석로: “한국보다 방글라데시가 나를 더 필요로 해 3년을 약속하고 왔지만 27년이 지나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봉사란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삶의 본질이다.”

 

***

 

수상자들의 말을 들으며 절감한 공통점 두 가지. 바로 ‘만남과 즐거움’이다. 그것들이 그들의 오늘을 만든 바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선배나 선생, 혹은 우연한 기회를 ‘만나’ ‘즐겁게’ 탐구해온 것이 대성(大成)의 비결이었음을 이번에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일을 ‘즐겁게’ 해왔다고 했다. 탐구 과정에 어찌 어려움이 없었을까. 그럼에도 그런 어려움을 퉁치고 남을만한 보람과 희열이 있었으니, 그걸 즐거움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특히 허준이와 조경현에게서 그런 점이 두드러졌다. 두 사람은 30대의 청년들이다. 나는 지금까지 학생들에게나 아들들에게 ‘노력만이 성공의 유일한 열쇠’임을 강조해왔다. 개성과 끼를 한사코 죽여 가며 정해진 틀에 가장 신속하고 정확히 적응하여 남보다 먼저 앞자리로 나아가는 것. 그것만이 베이비 부머 세대인 우리에게 허용된 ‘살 길’이었다. 규격화된 인재를 만들어 집단적 진보와 대량생산에 즉각 투입하는 일만이 국가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개인들도 그에 부응하여 공식을 열심히 외우고 ‘쓸데없는’ 잡생각들을 하지 말아야 했다. 개성은 망치로 쳐서 들여보내야 할 ‘돌출’로서 집단문화에 대한 일종의 반역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타나기 시작한 ‘반역자’들이 자신만의 세계를 가꾸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허준이나 조경현 같은 신인류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허준이는 시인이 되고 싶었단다. 기형도 같은 시인에게 한동안 빠져 있었다고. 그러니 학부시절 규격화된 평가체계 안의 학점도 ‘당근’ 안 좋았고, 방황도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를 강의실에서 만나 수학의 세계에 몰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경현도 마찬가지다. 사실 아버지인 나도 몰랐었다. 왜, 하고많은 선진 대국들을 놔두고 북유럽의 작은 나라 핀란드로 유학을 떠났을까. 그 점에 대하여 지금껏 의문을 갖고 있었지만, 그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수상자 소감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학과 사무실 앞에 놓여있던 핀란드 헬싱키 대학 석사과정 팸플릿을 선배로부터 받은 뒤 핀란드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 핀란드에 가서야 전혀 알지 못하던 인공지능을 접하게 되었고, 작은 학회에 참여했다가 아침식사 자리에서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의 요슈아 벤지오 교수를 만나게 되었으며, 그 인연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캐나다의 그 대학으로 박사후 과정을 가게 되었다는 것. 캐나다에 도착한 다음 날 벤지오 교수가 과제로 던져 준 ‘기계번역’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

그의 다이내믹한 역정들 모두가 ‘만남’의 연속이었고, 기회와 모험의 연속이었으며, 두근거림과 즐거움의 연속이었다는 말 아닌가.

 

조경현이 호암공학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서른여섯 밖에 안 된 녀석에게 무슨 호암상을 준단 말인가’라고 생각했다. 혹시 ‘호암상이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주는 상인가’라는 엉뚱한 생각까지 할 만큼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내 ‘시간적・문화적 지체(遲滯)’ 증상의 결과일 뿐임을 시상식에 가서야 깨닫게 되었다. 서른여덟의 허준이와 서른여섯의 조경현은 시대와 조류(潮流) 변화의 상징적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이제 즐겁고 다이내믹하게 무언가를 추구하면 삼십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수긍할만한 멋진 패러다임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시대가 변했음을 드디어 깨닫게 된 것이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만일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북적대는 하객들의 틈 속에서 이런 깨달음을 차분하게 얻지 못했을 것이다. 수상자들의 말을 새겨 들으며 순간적이나마 자아와 시대를 성찰할 수 있었던 것은 호암상 시상식으로부터 내가 얻은 망외(望外)의 소득이었다.

 

자식을 대리하여 상을 받는 자리. 묘한 감정이 교차하는 그 자리에서 예상 외로 깨달은 바가 컸다. 잘못 들어선 뒤 많이 나아가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올바른 길을 찾아 잘못 든 길을 되돌릴 수 있게 되어 무엇보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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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21. 3. 28. 06:54

말없이 누워 시간을 증명하는 태안사구

 

세사(世事)가 번잡하다는 생각이 들면, 지체 없이 고향을 찾을 일이다. 고향을 찾는 일은 시간여행이다. 하기야 모든 여행이 시간여행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고향을 찾는 일은 다른 곳을 찾는 것과 다르다. 낡은 집 혹은 집터와 부모님의 산소가 있어 특별하다. 자연이 변했고 그 옛날의 사람들도 더는 살고 있지 않지만, 다북쑥으로 뒤덮인 집터나 산소는 의연히 그곳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수많은 발자국들이 찍혀 있고 그 발자국들에 묻어온 바깥세상의 티끌들이 켜켜이 쌓여 있으며 각종 잡초들이 자라나 엉켜 있는 곳. 그곳에 서리고 앉아 있는 스토리와 히스토리를 헝클어진 실타래 풀 듯 정리하려면 어쩔 수 없이 타임머신을 타야한다. 그래서 심사가 복잡할 때면 삽과 쟁기를 던져두고 달려가는 곳이 고향이다.

 

어릴 적 소에게 풀 뜯기러 다니던 백사장. 물소리와 물빛은 여전하고, 수평선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도 그대로다. 겨우내 말라붙은 통보리사초가 바닷바람에 일렁이고, 그 사이에서 간신히 삶을 부지하고 있는 해당화 줄기들은 조심스레 눈을 틔워내고 있다. 해변에 빠끔빠끔 뚫려있는 작은 구멍들은 아마 부모 품에서 갓 떨어져 나온 달랑게 아가들의 새 집들일 것이다. 주변이 말끔한 어미 게의 집들과 달리, 녀석들의 집 주변은 온통 장난처럼 그어놓은 그림들로 어지럽다. 하하, 장난꾸러기 아가 달랑게들이여, 부디 행복하기를!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모래언덕을 힘겹게 지나 소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뚫고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빽빽한 곰솔들. 바람에 실려 번져 나가는 그들의 노래가 미세먼지로 더껑이 진 내 귀를 간질인다. 그래, 잘들 자랐구나. 손가락 굵기의 묘목을 새하얀 모래 언덕에 꽂아 넣던 수십 년 전 그 시절. 어찌 알았으랴? 순식간에 이토록 장대한 소나무 숲으로 자라날 줄을! 해신(海神)과 풍신(風神), 그리고 토신(土神)이 누천년 쉼 없이 불고 쓰다듬으며 만들었을 모래동산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신의 손길이 만든 사구(沙丘)들 대신 개미 같은 인간들이 그 곱고 이국적인 동산들을 눈 깜짝 할 사이에 집어 삼키지 않았는가. 해신과 풍신이 안간힘을 써가며 모래 알갱이들을 불어 올리고 있지만, 저 무성하게 태양을 향해 뻗어 올라가는 소나무 숲을 어찌 덮어버린단 말인가. 소를 풀밭에 풀어놓고 벌렁 누운 채 수평선을 바라보며 ‘따분한 고향’ 탈출을 꿈꾸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모래밭 한 가운데 화석으로 남아 있음을 비로소 발견한다. 수십 년 세월의 강을 건너며 모래밭에 남은 그 자국은 오히려 선명하게 내 눈앞으로 다가 서지 않는가. 자연은 바뀌어도 자연 속에 남겼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은 계절 따라 색깔만 바꾸어 갈 뿐, 사라지지 않음을 비로소 확인해주지 않는가.

 

내 옛집이 앉아있던 빈 터, 아직도 나를 쓰다듬어 주시는 조부모와 부모의 산소, 어린 시절 뒹굴며 찍어 놓은 모랫벌의 내 모습, 순식간에 모랫벌을 삼키고 하늘같이 자라난 소나무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않고 모래알을 불어 올리는 해신과 풍신 그리고 토신, 작은 구멍을 뚫고 구멍 앞에 현란한 그림들을 그려놓은 아가 달랑게들... 모두가 내 시간여행을 가능하도록 한 도우미들이었다. 시인 서정주는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국화를 노래했지만, 젊은 시절 욕망과 꿈의 미로에서 헤매다가 고향 앞에 돌아와 끊임없이 밀려드는 바닷물과 이젠 한 줌 사구에 남은 그 옛날의 내 모습이나 찾아볼 뿐이다.

 

왜 고향을 찾는가. 내 모습을 찾기 위한 시간여행. 그것을 가능케 하는 타임머신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말없이 누워있는 사구

 

할 말이 많은 사구

 

사구와 풀들

 

사구 뒤편의 곰솔밭

 

 

 

건강한 곰솔

 

 

곰솔의 남성미

 

 

사구 앞의 등대

 

 

사구의 주인 갈매기들

 

사구 앞 해변

 

 

태안사구 아가 달랑게들의 집들과 그림

 

태안사구의 태양

 

부모님 산소

 

나무숲이 되어버린 고향집터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21. 2. 6. 19:24

 

 

조규익

 

 

페이스북은 무성산의 은둔자 백규가 세상과 소통하는, 작지만 큰 창이다. 그 창을 열면 반가운 이들의 따스한 미소가 보이고 다정한 음성이 들린다. 내게 손짓하는 반가운 이들 가운데 두어 명의 시인들이 있다. 이른바 ‘페친’들. ‘페이스북의 친구’들이란 뜻일까. 그러나 그 시인들을 감히 ‘친구’라고 부를 수는 없다. 나는 그분들로부터 세상에서 지금까지 배우지 못한 것들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페친’보다는 ‘페사’란 말이 옳으리라. ‘페이스북 사부(師傅)’란 뜻이다. 그 시인들은 세상의 창 페이스북을 통해 내가 만나는 ‘싸부님들’이다. 긴 세월 비싼 등록금 내고 학교를 다니며 시를 배웠으나 아직도 시가 무엇인지 모르고, 시를 통해 삶의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깨우치지 못했는데...그러나 지금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매일 페이스북의 문지방을 넘는다. ‘공짜 학생’ 백규는 오늘도 삶의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는 설렘으로 페이스북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는 시인들을 만난다. 귀하고 얻기 어려운 게 진실임을 세상살이에서 깨달았다. 그것을 진부한 말과 이론으로 깨닫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걸 알았다. 장강대하처럼 흘러내리는 세상의 말들을 보라. 욕망과 거짓, 증오와 간계를 숨기기 위한 레토릭이 대부분 아닌가. 그 어느 갈피에 한 오리라도 진실이 숨어 있단 말인가. 힘을 탐하고 물질을 탐하며 남을 거꾸러뜨리기 위해 오도독 이를 갈며 거미줄을 치기에 분주한 세상의 말들에서 무슨 진실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내 소중한 페사 중의 한 분이 바로 나동환 시백이다. 나 시백을 포함한 내 페사들은 내게 시로 말을 건다. 나는 시를 통해 인간세상의 진실을 배운다.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 사람들이 치고받으며 찾아내려 하고 또 찾아냈다고 억지 쓰는 ‘사실’, 어쩌면 ‘시장의 우상’ 숭배자들을 뛰어 넘어 사실 아닌 진실을 추구하는 존재들이 페이스북의 내 ‘싸부들’이다. 세상 사람들의 말이 모두 다르듯 두어 분의 ‘페사들’의 어조는 다르다. 그 어조의 다름을 좀 더 분명히 보여주려는 배려였을까. 나 시백이 시집 <<겨울바다 관찰자>>를 보내 오셨다. 페이스북의 라운지에서 ‘불경스럽게도’ 커피를 마시며 ‘눈팅’을 해온 그 어조가 활자로 변신하여 다시 한 번 내 감성과 이성의 촉수를 자극한다. 아, ‘페사’ 나 시백은 꾸준히도 존재의 근원을 성찰해 오셨구나! 시공에 한정시킨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라도 언제까지라도’ 확장되거나 공유될 수 있는 ‘존재의 진실’을 추구하셨구나!

 

표제시 <겨울바다 관찰자>를 보자.

 

 

시뻘건 아침 해가 동에서 서로 서서히 시간이동을 합니다.

 

스스로를 달구고 또 두들겨 판금처럼 만들고 해 질 무렵 휘어진 낫처럼 정형을 찾고 나서야 치지직 바닷물 속에 담가내오 뿌연 겨울 달 하나 차가운 밤하늘에 비스듬히 걸어놓습니다

 

물고기들은 까만 해수면에 비늘 겉옷을 벗어 던져 놓은 채 바닷물 속으로 깊이 잠들러 갑니다

 

잠의 깊이만큼이나 비늘 겉옷은 짙은 어둠속으로 분해되어 수많은 별들처럼 밤하늘에 박히고 잠든 물고기들의 알몸에는 뿌연 겨울 달빛이 비늘 겉옷처럼 어립니다.

 

까만 해수면 경계의 끝점에서는 생성과 소멸의 거룩한 신의 섭리가 별빛처럼 고요히 아른거립니다.

 

<

나는 어느덧 어슴푸레 겨울 바다 관찰자가 됩니다

 

겨울 바다는 내 존재의 가냘픈 가슴속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생성과 소멸의 파도를 몰고 옵니다

 

 

쉼 없이 들레이는 바다를 보며 시인은 순환의 고리를 건져 올린다. 시인이 보기에 생성과 소멸은 1회로 마무리되는 단순지속이 아니었다. 소멸은 또 다른 생성의 모태가 되고, 그 생성은 또 다른 소멸을 낳고, 그 소멸 또한 ‘또또다른’ 생성을 낳는다는 순환. 한 순간도 쉼 없는 순환의 연속이 바다에서 일어나고 있지 아니한가. 그 고리를 몸으로 현시하는 것이 바로 시간의 지속이고. 나같이 어리숙한 독자를 깨우치기 위함이었을까. 태양과 달, 별, 그리고 물고기 등을 출연시켜 그 감동적인 순환과 지속을 보여주고 있으니, 시인의 상상력은 우주적 스케일로 펼쳐진다. 그러나 바다에 펼쳐지는 순환과 지속이 아무리 우주적 스케일이라 해도 결국 ‘내 존재의 가냘픈 가슴속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생성과 소멸의 파도를 몰고 올’ 뿐이라는 것이다. 이 순간에 시인은 자잘한 세상의 얽매임에서 놓여나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시뻘겋게 해 뜨는 아침부터 별빛 고요히 아른거리는 밤까지 바다를 관찰하고 분석한 시인의 결론은 무엇인가. 수많은 생성과 소멸의 순환이 반복되는 무한대의 공간을 아예 가슴 속에 품음으로써 자잘한 존재의 한계를 넘어야겠다는 깨달음 아닌가. 바다는 시인에게 모습을 드러낸 텍스트였고, 시인은 그 텍스트로부터 생성과 소멸의 순환법칙을 얻어 내게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이 시는 아니 이 시집은 바다라는 성소(聖所)에서 시인 혼자 벌인 비의(秘儀)의 기록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20. 12. 21. 17:45

 

 

  이제 더 이상 사람이 낫을 들고 벼 수확을 하는 시대가 아니지요. 콤바인을 몰고 다 익은 벼논에 들어가 곡물을 베고, 탈곡하고, 선별하고, 포대에 담는 등 여러 단계의 일들을 일관 작업으로 수행하는 시대이지요. 콤바인 작업이 끝나는 대로 거둔 벼를 트럭에 실어 건조장으로 보내면 일단 주인 손에서 떠납니다. 건조된 벼는 수매장으로 넘겨 정부의 비축미로 팔고, 남는 것 중 일부를 쌀로 찧어 가족들의 한 해 식량으로 삼는 겁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콤바인 작업을 하고난 논바닥에는 낟알 털린 볏짚들이 줄줄이 누워 있게 됩니다. 적당한 시간이 지나고 그 볏짚들을 모아 유산균을 섞은 다음 단단히 포장한 것이 바로 곤포 사일리지입니다. 그 속에서 맛있게 발효된 볏짚들은 다음 해 목초가 나올 때까지 소들의 먹이로 요긴하게 쓰이지요.

 

  이십여 년 전 미국 체류 중에,  십 수 년 전 유럽 여행 중에,  저는 곤포 사일리지들을 자주 목격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전원 혹은 농토 위에 구르는 하얀 색 곤포 사일리지들을, 농촌의 부를 상징하는 일종의 기호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것들은 몇 년 전부터 가을・겨울에 걸쳐 우리나라 농촌에서도 흔한 풍경으로 자리 잡은 것을 알게  되었지요. 이제 우리나라 농촌도 제가 그려온 ‘부농(富農)’의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곤포 사일리지를 볼 때마다 저는 타임머신을 타고 수 십 년 전의 어린 시절로 시간여행을 하곤 합니다. 제 어린 시절 농촌에서는 농지 다음으로 소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어느 집이나 소 한 마리씩은 데리고 살았지요. 소 없이 논밭 일을 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이른 봄부터 소와 함께 논밭에 나가 땅을 가는 것이 농민들의 주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소를 먹이는 것은 사람이 먹고 사는 것 다음으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늦은 봄부터 가을까지는 들판에 풀이 그득하니 그것들을 베어다 먹이거나 풀밭에 끌고 나가 매어놓기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겨울부터 봄철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소의 배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집집마다 약간씩 달랐지만, 우리 집의 경우를 말씀드리지요. 당시 방앗간에 가서 보리방아와 쌀 방아를 찧으면 겨가 나오지요. 아주 고운 보릿겨는 송두리째 지고 와야 할 만큼 가장 긴요한 물건이었지요. 벼의 경우 1차로 나오는 왕겨는 모두 방앗간에 버리고, 두 번째 나오는 속겨는 한 주먹도 버리지 않고 실어 와야 했습니다. 두 가지 모두 소 먹이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지요. 그리고 추석 4~5일 전쯤 소가 좋아하는 길고 부드러운 풀들을 중심으로 관리해오던 산판에서 ‘새 꼴’을 베었습니다. 왜 새 꼴이라 불렀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새 꼴’은 ‘새+꼴’로 만들어진 복합어인 것 같습니다. ‘새’와 ‘꼴’이란 말들을 네이버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아래와 같이 설명되어 있군요. 먼저 ‘새’.

 

“1. 볏과 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띠, 억새 따위가 있다.

  2. 볏과의 여러해살이풀. 높이는 30~120cm이며, 잎은 흔히 뿌리에서 나고 선 모양이다. 여   름에서 가을까지 연한 녹색의 작은 이삭으로 된 꽃이 원추(圓錐) 화서로 피고 목초로 쓰인다. 볕이 잘 드는 초원이나 황무지에서 자라는데, 한국・일본・중국 등지에 분포한다.”

 

그리고 ‘꼴’이란 말을 다음과 같이 풀어 놓았군요.

 

“말이나 소에게 먹이는 풀”

 

   아, 그 ‘새 꼴’이란 바로 억새 등의 볏과 식물과 기타 잡초 등 소가 잘 먹던 풀들을 통틀어 부르던 명칭이었던 것 같네요. 그러니 당시 우리 고향의 어른들은 매우 정확한 명칭을 사용하고 계셨던 겁니다. 어쨌든 일꾼들 4~5명이 들러붙어 하루 종일 낫으로 천여 평 가까운 풀을 베어 산 바닥에 깔아놓습니다. 추석이 지나고 한 일주 쯤 지날 때쯤 파란 풀들이 기분 좋은 풀 향기를 풍기며 대충 마르게 되고, 그 상태를 살펴서 괜찮다는 판단이 들 경우 걷어서 낟가리 모양으로 누려놓습니다. 그 다음 벼 타작이 끝나고 나오는 볏짚 또한 한 올도 버리지 않고 누려놓습니다. 그래서 추수가 끝나면 볏짚과 새 꼴 등 작은 동산 모양의 두 종류 낟가리가 집집마다 마당 한 구석에 올록볼록 솟아올라 있게 되는 것이지요.

   날씨가 추워져서 소를 외양간으로 옮겨 맨 다음부터는 볏짚과 새 꼴을 7:3으로 배합하여 작두로 썰어낸 여물이 주식으로 소에게 제공되는 것이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신 아버지는 부엌의 가마솥에 여물과 겨[쌀겨・보릿겨], 채소 이파리 등을 ‘조리 후에 나오는 영양분 섞인 구정물’로 버무려 ‘소죽’을 끓이셨습니다. 저는 그 구수한 소죽 냄새를 맡으며 잠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새벽 5시대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시고, 저는 6시 대에 일어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가마솥 소댕이 덜컹거리며 푹푹 김이 오르면 소죽이 익었다는 신호이고, 다 익은 소죽이 그득 담긴 양동이를 달랑달랑 들고 4~5차례 왕복하면서 외양간의 구유로 날라 주는 일은 제 담당이었지요. 쬐끄만 녀석이 달랑거리며 소죽 양동이를 들고 오는 모습을 큰 눈으로 바라보며 침을 흘리던 ‘뿔 찌그러진 암소’를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소죽을 다 먹고 나면 볏짚과 새 꼴을 섞어 썰어낸 여물을 구유 가득 채워 주는 것이지요. 소가 소죽을 다 먹지 않는 경우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 이유를 분석하곤 하셨습니다. 여물에 문제는 없었는지, 겨에 문제는 없었는지, 구정물에 문제는 없었는지 등등. 저는 두 분 사이에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가는 모습을 보며 자랐습니다.

 

   그렇게 세월은 마구 흘러갔습니다. 이제 돌아온 전원에는 볏짚이나 새 꼴 동산 대신 곤포 사일리지가 구르고 있네요.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동네 어른들을 잡고 물어도 새 꼴이나 소죽의 추억을 갖고 계신 분들은 안 계셔요. 콤바인으로 추수가 끝나면 농부들은 볏짚을 팔아버리지요. 저는 이곳 어른들에게 값을 물어보지는 않았어요. 추수 후 볏짚을 돈으로 계산할 수 없었던 내 고향의 추억 때문입니다. 가족 같은 소가 먹을 겨울 동안의 양식인데, ‘판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동네 어른들에게 그 값을 묻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의 농부들이 곤포 사일리지를 팔아서 주머니는 두둑해졌을지 몰라도, 그 볏짚과 새 꼴을 섞어 작두로 썰어내던 ‘여물’의 추억은 아마 누구의 마음속에도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제가 감히 ‘농경시대를 헛 살아오셨네요!’라고 그 분들을 조롱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 꼴과 볏짚을 섞어 썰어낸 여물의 추억’이 제겐 소중한 ‘빈티지 보물’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겐 ‘버리고 싶은 시간의 땟자국’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앞으로 언제쯤 ‘라떼’적 삶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젊은 영혼들을 유혹할 수 있을까요?ㅠㅠ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