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8. 1. 17. 12:47

작비금시(昨非今是)의 깨달음

 

 

4년 전(2013. 9.~2014. 2.) 미국에 다녀와서 책(<<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 푸른사상, 2014. 11.)을 한 권 낸 바 있다.(백규서옥 블로그 No.119 참조) 당시 그 책을 교수들에게 증정하면서 나름대로의 소회를 적은 서한도 책갈피에 끼워 보냈는데, 책을 받았다는 반응은 10% 정도였고 그 서한에 대한 반응은 거의 zero에 가까웠다.

 

객쩍은 짓을 했나?’라고 자책하며 한동안 겸연쩍은 시간을 보냈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지난해 숭실 근속 30을 맞게 되었다. 나름대로 어떻게 기념을 할까 생각하다가 부랴부랴 새 책(<<<거창가> 제대로 읽기>>, 학고방, 2017. 10. 23.)을 내고, 교수들에게 돌렸다.(백규서옥 블로그 No.3 참조) 학자가 시간의 마디마디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수단으론 책을 능가할 게 없다는 것이 내 철학이기 때문이었다. 이번의 응답률은 대략 20%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표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휴지통에 버린 경우가 대부분이었겠지만, ‘당신과 같은 직장에서 한 솥밥을 먹으며 30년을 근속하고 있노라는 인사는 전해지지 않았을까. 스스로 위안을 삼으며 허전한 마음을 다독여야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논문을 쓰다가 책 한 권이 필요하여 책장을 뒤지던 중, 책들 속에 끼여 질식하기 직전의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를 발견했다. 책을 펼치자 이쁘게편집출력된 서한이 접힌 채로 툭 떨어졌다. , 바로 내가 정성스레 작성하여 교수들에게 보낸그 편지였다. 읽어보니, 숫자(3336/3033)만 바꾸면 현재의 내 상황을 정확히 드러낼 만한 내용이었다. 교수직이 얼마나 따분한생활인지, 이 글을 읽고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 편지를 버리기가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숫자만 바꿔 이곳에 올리고, 그 때 그 편지와, 그 글에서 숫자만 바꾼 숭실 근속 30년의 인사장을 늦었지만 이곳에 올린다.

 

                                                       ******

 

        님께

 

 

안녕하신지요?

인문대 국어국문학과에 재직하고 있는 조규익입니다.

 

엊그제 여름이었는데, 벌써 겨울의 한복판에 서 있습니다. 늘 그래 왔습니다만, 최근 들어 시간의 덧없음을 더욱 절감하게 됩니다. 저는 해군사관학교의 전임을 시작한 스물넷부터 36년째, 경남대학교의 전임을 시작한 스물일곱부터 33년째 상아탑을 지키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저보다 앞서 이 길을 걸어가신 선배님들을 뵈며 참으로 끈기 있게 한 길을 걸어오셨구나!’라고 경이로운 눈길을 보내곤 했는데, 저도 이미 그 반열에 들어서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간의 세월을 돌이켜 보면, 그저 잠시 졸다 깨어보니 한낮이 기울어 버린그런 느낌입니다. 이제 비로소 흘려보낸 시간의 덧없음과 함께 맞이하는 시간의 질과 양이 나날이 달라짐을 절감합니다. 명문 <귀거래사(歸去來辭)>를 통해 마음이 육신의 노예가 되어(心爲形役)’ 동분서주하던 과거의 시간대에서 전원으로 돌아온 뒤 어제가 그릇되었고 지금이 옳다(昨非而今是)’고 선언한 도연명(陶淵明)을 떠올립니다. 저도 무명(無明)의 어제에서 깨달음의 오늘로 돌아 왔다고 한다면, 좀 주제넘은 말일까요? 시간의 소중함을 이해하고 좀 더 본질에 충실한 생활로 돌아간() 것을 도연명이 말한 작비금시(昨非今是)’의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지요?

 

꽤 오래 전에 귀한 자료(<거창가>)를 입수한 뒤 책 한 권과 논문 여러 편을 낸 바 있으나, 다른 데 신경을 쓰다가 그 귀한 것을 그만 10년 넘게 망각의 늪에 빠뜨려 놓고 있었습니다. 최근 새로 쓴 글들을 하나로 엮고, 오독(誤讀)오역(誤譯)을 바로잡아 새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는 우리네 속담이 있던가요? 책이 나온 뒤 가족들과 지인들을 불러다가 소중한 약속을 나누다가, 오랜 세월 한솥밥을 먹어 온 벗님들을 문득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욕심은 후회를 남기고, 반성 없는 후회는 파멸을 부른다는 금언을 되새기며, 이 공동체에서 더 머물게 될 몇 년 간 좋은 추억들만쌓고 싶은 소망으로 파편화된 제 학문적 견해들이나마 엮어 올리오니, 부디 소납(笑納)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17. 12. 31.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조규익 드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3. 15. 09:40

 


영화의 포스터

 

 


글래스의 아들을 죽이는 피츠제랄드

 

 


글래스를 덮친 갈색곰

 

 

 

죽음을 초극하게 하는 것은 뭘까?

-영화 <레버넌트Revenant>를 보고-

 

 

스티브 잡스가 그랬던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 죽음이라고! 처음엔 그저 천재적인 괴짜의 무책임한 발언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나 몇몇 친구들의 죽음, 사랑하는 제자들의 죽음, 집안 어른들의 죽음, 친구 부모들의 죽음, 직장 선배들의 죽음, 사회 저명인사들의 죽음 등을 거쳐, 최근 저세상으로 어머니를 보내드리면서 나는 드디어 어렴풋하나마 나름의 사생관(死生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그 말이 허언(虛言)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죽음의 엄혹한 관문을 통과하신 어머니의 표정이 그토록 평화롭고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대답을 듣지 못할 줄 뻔히 아시면서도 어머니는 늘 아프지 않게 죽을 순 없을까?’라고 내게 묻곤 하셨다. 저승의 관문을 통과하신 어머니의 얼굴을 뵈며 스티브 잡스의 말을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다.

 

***

 

어머니 소천 며칠 후 영화 <레버넌트>를 보았다. 사실 이 영화는 어머니 소천 훨씬 전부터 우리 사회에 화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주연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오스카상 수상 소식이 매스미디어들을 도배하다시피하고 있는데,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기 어려웠다. 내 호기심을 자극하려고 그랬는가. 광고화면의 영화제목엔 죽음에서 돌아온 자라는 단어의 뜻까지 부기되어 있었다. 그래, 주인공 그는 어떤 표정으로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을까. 과연 그는 죽음을 초극했을까.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죽음은 어떤 표정으로 삶과 대치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휴 글래스의 가면을 쓴 디카프리오와 피츠 제랄드의 가면을 쓴 토머스 하디가 죽음을 놓고 벌이는 설원의 결투. 처절하게 아름답고 야만적인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서사시의 처음과 끝을, 인생의 의미를 찾다가 실마리를 잃어버린 이쯤에서 잘근잘근 씹어보고 싶었다.

 

19세기 개척시대 미국의 맥박이 은막 가득 출렁였다.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대자연은 갈피갈피 시퍼런 산소를 내뿜고, 그 속을 누비며 욕망의 껍질들을 벗겨내는 모피 사냥꾼들은 일렁이는 물풀 속의 송사리들처럼 가냘펐다. 사랑하는 인디언 여인은 글래스에게 혼혈의 아들을 남겨주었고, 그 세 사람을 엮는 접착제는 가슴 저릿한 사랑과 부성애였다. 더운 침을 질질 흘리며 덮어 누르는 갈색곰(grizzly bear)과의 사투에서 살아나오게 한 힘도 바로 그 부성애였을 것이고, 죽음보다 더 깊은 상처에서 벌떡 일어나게 한 복수심도 그 근원은 부성애였을 것이다. 현존하는 사랑을 삭제해버린 불구대천의 피츠 제랄드. 그를 죽여야 아들에 대한 사랑의 부채를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운 김을 눈 쌓인 대지에 불어내는 그의 야성(野性), 인디언들의 추적을 피해 칼날처럼 저미는 급류의 한기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는 초월적 강인함도 아들에 대한 사랑과 의무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으리라.

 

사랑과 복수. 무엇이 되었건 그 끝은 죽음이다. 레마르크 원작의 소설이자 영화인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서는 사랑에 대한 대립어로서의 죽음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죽음이 없다면 사랑의 찬란함을 부각시킬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수는 더 극적이고 원시적인 죽음의 근원이다. 복수는 더 큰 복수를 부르고, 그 악순환은 대개 죽음에 의해 마무리된다.

 

눈 쌓인 광야에 선혈을 뿌리며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두 사나이. 두 사람이 안고 뒹구는 모습에서 풍겨나는 분위기야 말로 그 갈색곰의 무자비한 폭력성과 등가적인 그 무엇이다. ‘사랑하는 내 아들을 죽였으니, 너는 반드시 내 손에 죽어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를 그는 몸으로 실천했을 뿐이다. 피츠 제랄드가 몇 마디 변명으로 응수해보지만, 이미 대자연의 한 부분으로 동화된 그들에게 무슨 꼼수나 변명이 필요할까. 피츠 제랄드를 죽이고 눈밭에 뻗어버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다 이루었다!’였으리라. 굳이 십자가에 매달려 수난을 받은 예수님의 말씀이었음을 확인할 필요까지도 없을 것이다. 악한 원수를 징치하여 (아들에 대한) 사랑을 이룬 행위와, ‘원수를 사랑하라시며 자신의 몸을 죽임으로써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이룬 행위는 분명 정반대이나,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지 않던가. 하늘을 찌르는 침엽수림을 드나들며 복수를 통한 사랑의 구현’,  그 서사를 완성해간 영화 속의 주연과 조연. 그들은 정녕 대자연의 존재원리를 완성시킨 두 마리의 짐승들이었다. 산 자도 죽은 자도 그 순간만큼은 죽음을 초극한 대자연의 소품들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 얼마간 세월이 흐른 뒤 한 번 더 보고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고들 하는 것이리라.

 

 


복수에 나선 글래스

 

 


눈밭에 누워 복수를 꿈꾸는 글래스

 

 


복수의 화신, 글래스

 

 


피츠 제랄드 역의 톰 하디

 

 


주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Posted by kicho
알림2014. 11. 5. 13:59

 

 

 

 

 

저는 2013년 2학기 풀브라이트 방문학자(Visiting Fulbright Scholar)로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학과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현지를 틈틈이 답사하고 체험한 기록들을 정리하여, 최근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푸른사상)라는 제목의 문화 답사기를 펴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토네이도의 본고장으로만 알려졌을 뿐인 오클라호마를 보물찾기라는 테마를 통해 새롭게 읽어내고자 했지요. 책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물 1: 스틸워터와 OSU, 그 안식과 탐구의 낙원

평온과 정밀(靜謐)의 오클라호마에 안착

역사학과를 찾아

학과 비서들과의 만남

카우보이 풍의 노신사, 학과장 로간 교수와의 만남

브렛 학장과의 만남

평원 속 지성의 오아시스, OSU에서

역사학과 학생들을 위한 특강을 마치고: 한국의 이미지를 새것으로!

카우보이들, 풋볼의 진수를 보여주다!

미국 대학의 졸업식과 감동: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

안식과 힐링의 낙원 스틸워터에서

 

보물 2: 인디언, 인디언 역사, 인디언 문화

오클라호마와 인디언 부족들

대초원에서 만난 오세이지 인디언들

체로키 후예의 집을 찾아 패러다임 전환의 증거를 찾다

오클라호마 동쪽에서 체로키 인디언들을 만나다!

체로키어오시요(Osiyo)’와 우리말‘ (어서) 오세요!’의 정서적 거리

스틸워터의 이웃동네에서 만난 판카 인디언들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아이오와 인디언 족

지혜로운 치카샤 족, 인디언 사회의 자존심

촉토 족의 뿌리와 투쟁, 그리고 예술

촉토 족의 탁월한 교육열, 풍부한 역사 자취

놀라운 세미놀 인디언들의 역사와 문화의식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 그리고 대평원의 서사시

카이오와 족의 삶과 예술

무서운 코만치에서 상식의 미국인으로!

크릭 족의 꿈과 현실을 찾아

오클라호마 밖의 인디언: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족

암굴 속에 서린 생존 의지‘,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와 푸에블로 족의 말 없는

외침

부드러운 어도비, 완강한타오 푸에블로인디언들

 

보물 3: 미국의 길, 66번 도로(Route 66)의 낭만

미국에서 길을 찾으며: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작은 일탈을 꿈꾸는 66번 도로, 그 낭만과 허구

엘크 시티와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

클린턴 시티와 ‘66번 도로 박물관

엘 르노 시티와 캐나디언 카운티 뮤지엄

66번 도로에 살아 있는 역사의 공간, 유콘 시티

누구 혹시 이 소녀를 아시나요?: 유콘에서 만난 우리들의 누이

한국전 참전용사의 아들 리차드 카치니와 유콘 참전용사 박물관

오클라호마의 숨은 별: 거쓰리 시티/ 66번 길의 경이로운 옛 건축물: 아카디아 라운드

 

 

 

 

 

 

보물 4: 박물관과 미국 역사

서부 개척시대 미국의 소리: 국립 카우보이와 서부유산 박물관

예술로서의 역사, 역사로서의 예술: 털사의 길크리스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인간의 악마성을 깨우쳐 준 공간: 오클라호마 시 메모리얼 뮤지엄
오클라호마 밖의 박물관: 예술과 역사의 도시 산타페와 박물관들

 

보물 5: 열정과 도전의 대학인들

미국의 중남부에서 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는 젊은 학자: 용타오 두 교수

학자와 목자의 삶: 한인 교수 장영배 박사

빛나는 한국학생 브라이언

한반도에 관심이 큰 소련 역사 전문가 림멜 교수

탁월한 젊은 영어 교육자 제이슨 컬프

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온 프레너 교수

 

보물 6: 아름다운 자연, 안식의 낙원

부머 호수에서 찾은 마음의 고요

리틀 사하라에서 되찾은 고향의 꿈

대초원에서 멋진울음 터를 발견하고

낙원 속의 산책로: OSU 크로스 컨트리 코스의 안식과 힐링

 

 

 

 

 

***

일반적으로 미국은 역사가 짧고, 넓은 땅에 비해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역사 문화유적의 답사라는 여행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공간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의 이주 후 200여년, 인디언으로부터 따지면 그보다 훨씬 더 긴 역사가 이어져 온 땅이고, 그에 따르는 문화유산들이 적지 않은 곳입니다. 더구나 경쟁력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 미국의 대학들이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문화를 생각하면, 미국은 유럽과 또 다른 차원의 매력을 지닌 지역입니다. 무엇보다 39개에 달하는 인디언 부족의 보호구역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오클라호마는 대초원(Tall Grass Prairie)과 대평원(The Great Plains)등 풍부한 목초지와 함께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원유 등으로 오랜 동안 풍요를 구가해온 지역이기도 합니다. 풀브라이트(Fulbright) 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곳의 대표적인 교육기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만. 이곳에 오자마자 연구 과제 외에 이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의미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가 관심을 가졌던 대상은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였습니다. 저는 사람, 자연, 도시, 제도, 역사, 문화 등 감고 있던 마음의 눈을 뜨게 한 모든 것들이 보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간 모르고 지내온 것들이 그의 편견을 바로잡아 주었기에 보배로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디언들과의 만남은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백인들에 의해 고통을 받아온 인디언이야말로 역사의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서부영화나 백인들에 의해 저술된 책들을 통해 제 마음에 뿌리 내린 왜곡된 인디언의 이미지가 비로소 바로잡혀지게 된 점을 가장 곰지게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배자들이 펼쳐 온 자기 합리화의 억설(臆說)에 의해 일그러진 인디언들의 실체를 삶의 현장에서 바로잡음으로써 내면에 고착된 편견을 해소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 입장에서 인디언에 대한 발견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을 통해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이 바로 미국의 경쟁력임을 깨닫게 된 점입니다. 대학의 역사와 현실을 통해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체력을 단련하며 단합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운영되는 미국 대학의 장점을 읽어낸 것은 제 글 내용의 핵심적인 축입니다.

인디언이나 대학의 힘에 대한 발견과 함께 오클라호마나 스틸워터의 깨끗한 자연으로부터 얻게 된 힐링의 감동은 이 책 내용의 또 다른 축입니다. 부머 호수, 리틀 사하라, 산책로로 쓰이고 있는 크로스 컨트리 코스 등 잘 보존된 자연이 인간의 내면적 평정이나 행복을 위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체험적으로 진술하고자 했습니다. 제 글의 에필로그 가운데 마무리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풀브라이트 학자로서의 가볍지 않은 사명을 짊어지고 오긴 했지만, 연구 외

에 이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달뜨게 했다. 오클라호마 사람들과의

만남, 인디언의 역사나 문화와의 만남, (특히 Route 66)과의 만남,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과의 만남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했던 스틸워터는 문만 닫으

면 절간처럼 조용해지는 공간이었다. 맑은 공기 속에 한 발만 나서면 온갖 새

와 나무들이 그들먹한 낙원이었다. 그래서 기대 이상의 힐링을 체험하며 마음

속의 온갖 찌꺼기들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이라고 어찌 사람들 사

이의 갈등과, 그로부터 일어나는 불행들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유목민들이

아름다운 꽃향기와 산토끼의 해맑은 눈빛, 그 지순(至純)한 추억으로 광풍 몰

아 치던 수많은 밤들의 괴로움을 지우듯,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걸러내는 능력

이야말로 지혜로운 인간의 전유물 아닌가. 사실 짧지 않은 6개월 동안 걸러내

야 할 단 하나의씁쓸함도 만나지 못한 나였다.

                                                          ***

스틸워터에서 화려한 행복보다는 작고 따스하며 담백한 즐거움 속에 거의

완벽한 힐링의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제 맛있고 영양가 풍부한 풀들이

많이 자라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옛 고향으로 노마드의 소떼를 몰고 재입사(

入社)하기로 한다.”

 

그곳에 가보지 않은 사람도 책을 펼치기만 하면 오클라호마와 스틸워터의 감동과 아름다움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지리라 생각합니다. 강호제현의 질정(叱正)을 고대합니다.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 푸른사상, 2014.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4. 28. 18:08

 

 


연구실에서, 프레너 교수

 

 


연구실에서, 프레너 교수

 

 


최근에 발간된 그의 책들

 

 

 

 

 

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온 프레너 교수

 

 

올해 2월로 접어든 어느 날 오후. 미소가 멋진 중년 신사 한 분이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자신을 역사학과의 프레너 교수라고 소개했지만,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알고 본즉 그는 지난 해 연구년으로 학교를 비운 상태였고, 나는 작년 8월에서야 OSU에 입성했기에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풀브라이트 방문학자라는 내 연구실의 문패에 호기심을 가진 것 같았는데, 말을 나누는 도중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더욱 큰 흥미를 갖는 것이었다. 떠날 날에 임박해서야 만난 점에 대하여 그 또한 애석해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그에게 흥미를 느낀 것은 그의 전공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서 나름대로 생각해보니, 그의 전공은 크게 보아 에너지사()’, 좁히면 에너지 개발 및 이용사’, 더 좁히면 에너지 개발과 그것을 둘러싼 환경 등 사회문제사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그의 전공은 오클라호마주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비록 강제이주를 당한 처지였지만, 주로 인디언들이 차지하고 있는 대평원 오클라호마 주는 어딜 가나 원유와 천연가스가 생산되는 천혜의 땅이었다. 오클라호마 번영의 역사는 석유 등 천연자원 개발과 맥을 같이 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문제들을 역사학의 관점에서 다루는 학자가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나였다. 그저 한국사/동양사/서양사혹은 고대사/중세사/현대사쯤으로 나누어 연구하고 가르치는 게 전부라고 생각해온 것이 한국의 역사학계나 내 의식 수준의 현주소였던 것이다. 물론 어느 분야든 역사가 있기 마련이고, 역사학으로 수렴되는 모든 부분들이 인문학의 범주일 것은 분명하지만, ‘에너지 개발의 역사가 어엿한 학문 테마로 정립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나였다. 그렇게 프레너 교수[Dr. Brian Frehner]OSU의 한켠에서 만나게 되었다.

 

프레너 교수와의 인터뷰

 

 

그의 학문적 관심을 정확히 짚어내어 나열하면, ‘1860~1945년 미국/미국의 서부/환경/기술/공공분야로 집약될 수 있다. 그는 UCLA에서 학부를, 라스베가스의 네바다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OSU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그 매력적인 박사학위 논문의 테마가 바로 크리칼러지(Creekology)[석유 탐사학’]에서 지질학(Geology)으로: 1860~1930년까지 남부 대평원에서의 석유 탐사와 보호였다. 캘리포니아에서 출발하여 애리조나를 거쳐 오클라호마에 정착을 본 그의 지적 탐구 여행이야말로 흡사 대평원에서 석유를 탐사하듯 진행되어 온 것이나 아닐까.

 

얼마나 많은 역사학의 테마들이 존재해왔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역사학의 새로운 테마들이 개발될 것인가. ‘역사란 본질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현재의 눈과 관점으로 보는데서 성립하며 역사가의 임무는 기록이 아닌 가치의 재평가에 있다는 크로체의 생각을 사건들의 해석이나 역사기술의 대전제로 삼은 E.H. Carr가 자신 있게 내세운 것처럼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의 상호작용의 부단한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한다면, 역사학이란 앞으로도 지식사회의 마를 수 없는 오아시스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프레너 교수는 흡사 살아있는 현장에서 꿈틀거리는 노다지를 잡은 사람처럼 보였다. 버팔로 떼가 밀고 지나가는 대초원의 한복판에서 석유채굴기가 끄덕거리며 기름을 퍼 올리는 오클라호마의 풍경을 보면서도 그에 관한 역사적 상상력을 펼치지 않을 역사학도나 인문학도는 없으리라. 그런 점에서 프레너 교수는 자부심 강한 행운아였다.

 

그는 최근 들어 <<석유의 발견: 1859-1920 석유 지질학의 본질>>, <<인디언과 에너지: 미국 남서부의 개발과 기회>>, <<라스 베가스에서 쥬스 짜기: 미국 소도시의 성장에 대한 소견들>> 등 주목할 만한 저서들과 많은 논문들을 발표함으로써 학계의 주목을 받아온, 탁월한 학자였다. 그런 업적들을 바탕으로 여러 건의 학술상과 연구비 수혜를 받았으며, 많은 학생들이 그를 따라 면학의 열기를 분출하고 있었다.

 

프레너 교수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이제 우리도 화석처럼 굳어진 대학의 전공체계를 유연화시켜 시의적절하고 지역 친화적인 분야들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체제로 바꿀 필요가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20세기 중반에 구축한 패러다임을 21세기 한복판으로까지 지속시키려는 배짱을 갖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학자들은 입만 열면 전공영역의 정체성[identity]’을 강조하지만, 그건 강한 울타리에 대한 집착이나 미련에 불과하다는 점을 프레너 교수를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다. 바야흐로 다원화되고 있는 우리네 삶을 어떻게 학문체계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가 된 것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9. 23:51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바실리카 대성당[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

 

 

 


산타페 광장에서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길

 

 

 

 

 


대성당 내부

 

 

 

 

 


대성당 안에서 만난 예수 수난상

 

 

 

 

 


대성당 앞뜰에서 만난 '물 위에서 춤 추는 프란체스코 성인'[Monika B. Kaden의 작품]

 

 

 

 

 


대성당 앞뜰에 서 있는 '가데리 데각위타[Kateri Tekakwitha, 1656-1680] 상'
미국 최초의 인디언 여성 성인으로 추존되었음. 

 

 

 

 

 

산타페의 가톨리시즘은 세속화된 미국을 정화시키는가? [산타페-2]

 

 

 

산타페의 구시가지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바실리카 대성당[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이었다. 사실 뉴멕시코의 어느 도시에서도 프란체스코 성인을 모신 성당들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성당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형성된 도시들도 적지 않았다. ‘산타페 로만 가톨릭 대 주교구[The Roman Catholic Archdiocese of Santa Fe]’의 모태 교회가 바로 이 성당인데, 이 성당의 뜰엔 눈길을 끄는 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여성 성인으로 추존된 인디언 출신의 가데리 데각위타(Kateri Tekakwitha, 1656~1680). 순결의 덕목과 육신의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짧은 생애에 많은 기적을 이룬 그녀였다. 결국 1980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諡福)되고, 2012년에는 교황 베네딕트 16세에 의해 시성(諡聖)된 스물넷의 아름다운 그녀가 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곳에 서 있었다.

 

프란체스코 대성당을 나온 후 지금은 홈리스들에 의해 점령된 산타페 광장으로부터 대성당 앞을 지나 잠시 걷자 스프링 모양의 계단으로 유명한 로레토 채플(Loretto Chapel)이 나왔다. 채플 입구에서 안내를 하던 린즐리(Richard M. Lindsley)씨는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한국어 안내문 한 장을 꺼내 주면서 북한의 참상에 대해서 진심으로 많은 걱정을 해주었다. 그 날짜 신문에 보도된 북한의 실상에 관해 궁금한 게 많았던지 이것저것 질문을 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겠노라고 약속도 했다. 고마운 사람이었다.

 

1852년 가을 로레토 수녀회가 수많은 고난을 겪으며 켄터키로부터 산타페에 도착하여 이 성당의 전신인 로레토 학원을 건립한 역사가 한글판 소개문에는 실려 있었다. 특히 강조된 내용은 원형계단의 건축학적 특징이었다. 수녀들이 도착한 몇 년 뒤 로레토 학원이 완성되었고, 그 후 몇 년 뒤에 고딕 양식의 예배당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예배당 안의 마루와 성가대석을 연결하는 통로를 낼 수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그 일이 성사되기를 염원하며 수녀들은 9일간의 기도를 드렸는데, 기도의 마지막 날 한 백발노인이 당나귀에 연장을 싣고 도착했다. 수녀원장을 만나 그 일을 해결해주겠노라고 말한 그는 톱 하나와 T, 망치하나만을 갖고 즉시 작업에 착수하여 단시일에 이 원형 계단을 완성했다. 중심 지주도 없이 33개의 디딤판만으로 360도 원형의 계단을 완성하는 기적을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 성 요셉에게 기도를 드린 수녀들은 이 불가사의한 일이 그 기도의 응답임을 믿었으며, 상당수는 그 늙은 목수를 성 요셉으로 믿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그것은 수녀들이 보여준 지극한 신앙의 증거물이었다. 내 느낌에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의 발타키노와 같은 컨셉으로 보이는 이 원형계단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로레토 성당[Loretto Chapel, Built in 1873]

 

 

 


로레토 성당 입구의 안내 표지와 전설에 등장하는 늙은 목수

 

 

 


채플 안에 있는 '기적의 계단'

 

 

 


로레타 채플 내부

 

 

 

 

그 다음으로 간 곳이 바로 최초의 어도비 건축 양식의 성당인 산 미구엘 미션[San Miguel Mission]’이었다. 스페인 식민시대 멕시코의 성당이었던 산 미구엘 미션1610~1620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교회로 꼽힌다고 한다. 이 성당은 1680년의 푸에블로 반란때 손상을 입었으나, 스페인 사람들이 이 지역을 재점령한 1710년에 재건축되어 스페인 병사들을 위한 예배당으로 사용된 곳이다. 그 후 수없이 보수가 이루어지고 재건축이 반복되면서 많이 가려지긴 했겠으나, 원래의 어도비 양식은 크게 손상되지 않은 채 노출되어 있었다. 내부 또한 아름다웠는데, 특히 제단 뒤쪽 나무로 만들어진 장식 벽[reredos]의 아름다움은 탁월했다. 더구나 그 장식들 속에 자리 한 미카엘 성인 상의 제작연대는 적어도 1709년까지 올라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합중국의 국가 역사 유적으로 지정된 이 성당은 산타페를 영적으로 충만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산 미구엘 성당[San Miguel Mission]

 

 

 


미구엘 성당 내부

 

 

 


미구엘 성당 제대 뒤의 장식벽[Reredos]. 아래쪽 중앙이 미카엘 성인 상

 

 

 


산 미구엘 성당의 종

 

 

 

 

그 다음에 방문한 곳이 바로 이 지역 종교적 성향의 핵심인 과달루페 성소[Santuario Guadalupe]’로서, 산타페 다운타운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로 꼽히는 곳이었다. 주 제단 뒤쪽의 벽장식은 모두 멕시코시티에서 가져온 것들이며, 내부 장식 모두는 멕시코 바로크 풍의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1531년 멕시코 아즈텍 종족 출신의 후안 데 디에고(Juan de Diego)에게 현신하여 성당을 지을 것을 명령한, 갈색 피부를 가진 원주민 형상의 성모가 바로 과달루페 성모.

 

이 사건을 계기로 테페야크 언덕을 비롯한 각지에 성당들이 건립되면서 멕시코는 급격히 가톨릭 국가로 변모했다. 성모 현신의 이야기는 토착신앙에 물들어 가톨릭의 전파가 어렵던 당시 가톨릭 교단의 노력을 보여주는 일종의 종교 설화로 보이는데, 그 덕에 지금은 미국의 땅이 된 산타페에서 그 성모와 성당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1775~1795년 프란체스코 선교사들에 의해 건립된 과달루페 성소3피트 정도의 두꺼운 벽을 가진 어도비 건축물이었고, 그 중심에 1783년 멕시코 거장 호세 데 알지바[Jose de Alzibar]의 과달루페 성모상이 있었다. 멕시코 전통 양식으로 조각채색된 예술품의 정수로서 리어다스(reredos)’라 불리는 제단 뒤쪽의 장식 벽, 19세기 진품 성구(聖具) 보관소, 각종 미술사적 자료들, 대주교 쟝 뱁티스트 레이미(Jean Baptiste Lamy)에게 봉헌된 도서 및 자료관, 성지에서 가지고 온 식물들을 심어놓은 정원 등, 이 성당을 이루는 핵심 부분들은 여전히 화려하면서도 경건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과달루페 성소[Santuario Guadalupe] 성모 상 

 

 

 

과달루페 성소의 내부 

 

 

 


과달루페 성소의 스테인드 글라스 

 

 

 

과달루페 성소 그림[Tom Mallon 작, Oil on Canvas 42"×22"]

 

 

 

산타페의 정신적 바탕은 이 도시의 수호성인 프란체스코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는 가톨릭이지만, ‘이곳의 문화와 전통에 융합된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유럽의 그것과 구별되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원주민 출신의 성인 가데리 데각위타나 과달루페 성모를 만난 후안 데 디에고 등 이 지역에 가톨릭을 정착시킨 결정적 존재들이 있었고, 로레토 성당산 미구엘 성당과달루페 성당 등 핵심적 성소들이 어도비 건축양식을 채용함으로써 지역 전통 친화적인 면모를 보여 주고자 한 점은 무엇보다 산타페만의 독보적인 모습이었다. 요소요소에 숨어서 빛을 발하는 가톨릭 교회들의 존재는 미국의 강한 세속성을 정화시켜 주고 있다는 점에서 산타페만의 매력일 수 있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29. 15:15

 

 

 


애코머 푸에블로 등 앨버커키 인근 도시들이 표시된 지도

 

 


스카이 시티 이정표

 

 


스카이 시티 가는 길

 

 


스카이 시티 입구의 돌기둥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

 

 


스카이 시티 문장(紋章)

 

 


컬츄럴 센터에서 스카이 시티로 출발하는 셔틀 버스들

 

 

 


밑에서 올려다 본 메사의 주택들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 인디언

 

 

내 나이 또래의 한국인으로서 푸에블로(Pueblo)’란 이름을 기억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참 오만했던 북한이 간첩들을 활발하게 남파하여 우리나라를 흔들다가 급기야 청와대 폭파와 요인 암살을 목적으로 김신조 등 무장공비들을 내려 보낸 것이 1968117. 그 바로 일주일 후인 1968123일엔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정보 수집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다. 필자 나이 당시 11. 간첩들이 내 고향 동네의 훌륭한 청장년 두 명을 밤에 죽이고 내뺀 사건으로 몸서리치고 있던 차, 김신조와 푸에블로 호 사건은 북괴에 대한 불신과 증오의 대못을 내 마음에 박고 말았다. 푸에블로란 명칭의 원조를 미국에 와서 만난 것이다.

 

그간 틈 날 때마다 인디언들을 찾아 다녔으나, 시간부족역부족을 느낄 뿐이었다. 미국 전역에 564, 오클라호마에만 39개 종족의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데, 나 혼자 어느 세월에 그들을 다 만난단 말인가. ‘문명화된 5개 종족[The 5 Civilized Tribes/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세미놀(Seminole), 크리크(Creek)]’을 포함 10개 정도의 인디언 종족들을 만나면서 힘과 의지의 소진(消盡)을 절감하게 되었고, 바깥으로 눈을 돌리던 중 뉴멕시코에 푸에블로 인디언이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다.

 

사실 오클라호마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은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을 의심할 정도로 미국화[Americanization]되었다는 것이 그간 내린 내 판단이다. 내 느낌으로 이 점은 이른바 문명화되었다는 5개 종족 뿐 아니라 여타 종족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영어를 사용하고 미국인들의 생활양식으로 살며 미국 정치체제 속의 일원으로서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의 실현을 추구하는 인디언들에게서 그들만의 종족적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인디언들을 만난다면서 박물관이나 찾아다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좌절을 느낀 것은 그런 깨달음의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물론 박물관은 한 종족이나 민족, 국가의 과거현재미래가 통합되어 숨 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라는 것이 내 지론이긴 하다. 그러나 분명 주변에 인디언들이 살아서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왜 나는 한사코 화석화된 것처럼보이는 박물관만 찾아다니는가. 그런 회의가 엄습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미국화 된 인디언들은 외모만 인디언의 모습을 띠고 있을 뿐, 문명사회나 주류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고자 하는 욕망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건 미국사회의 여타 마이너리티들인 유색인들이 그런 욕망을 갖고 노력하는 것과 똑 같다. 재미 한인들에게 미국화 되지 말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견지(堅持)하라는 정신 나간 주문을 할 수 없는 것은 인디언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인디언 문화와 역사의 탐사에 나선 내 행로가 암초를 만난 것은 분명하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을 필요가 절실할 때 홀연 나타난 것이 뉴멕시코의 푸에블로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을 만나러 앨버커키로 가는 하이웨이의 주변은 키 낮은 식물들과 크고 작은 돌들이 깔린 사막지대였다. 그리고 몇 마일씩 간격을 두고 다양한 이름의 푸에블로 인들이 살고 있는 구역이 우리의 시야를 거쳐 지나갔다.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종류가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뉴멕시코에 오기 전만 해도 푸에블로는 단일민족인 줄 알았던 내 무지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리는 현장이었다. 오밤중이나 되어서야 앨버커키에 도착, 호텔에 1박을 하면서 다음 날 가기로 한 스카이 시티의 기록들을 점검했다. 그 동안은 매혹적인 이름에 정신이 팔려 그곳이 애코머 푸에블로(Acoma pueblo)’ 인디언들만의 거주구역임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그곳에 가면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하나만 갖고 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차를 타고 오면서 많은 푸에블로 인디언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스카이 시티에 살고 있다는 애코머 푸에블로도 그들 중 하나일 뿐임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단 이 지역에서는 스카이 시티의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을 만나는 것에 초점을 두기로 한 것이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앨버커키에서 서쪽으로 60 마일쯤 떨어진 곳의 스카이 시티, 애코미터(Acomita), 맥카티스(McCartys) 등 세 마을에 살고 있었다. 원래 푸에블로가 점유해온 땅은 500만 에이커에 달하는데, 실제로 현재는 그 면적의 단 10%만 소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스카이 시티가 바로 올드 애코머(Old Acoma)’의 원래 거주지다. 미국정부의 2010년 통계에 따르면, 5000명 정도의 애코머 인들이 종족적 정체성을 갖춘 사람들로 확인되며, 그들이 이 지역을 800년 이상 계속 점유해온 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푸에블로애코머란 말들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앨버커키에 와서 들은 바에 의하면, ‘푸에블로마을[village]’이나 작은 도시[town]’를 가리키는 스페인 말이며, 미국 서남부의 사람들 혹은 그곳의 독특한 건축을 가리키는 뜻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애코머란 말도 스페인어에서 나왔는데, ‘항상 있었던 장소[the place that always was]’ 혹은 화이트 락의 주민들[People of the White Rock]’을 뜻한다고 한다. 뉴멕시코 샌 후안 카운티(San Juan County)의 나바호(Navajo) 인디언 정착지가 바로 화이트 락 캐년(White Rock Canyon)인데, 그렇다면 원래 그곳에 살던 애코마 푸에블로 인들이 나바호 인들을 피해 이곳으로 온 것인지 현재 필자의 짧은 지식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어쨌든 애코머 푸에블로 사람들은 건축물이나 농사짓는 양식, 혹은 도자기 등에 나타나는 예술성으로 미루어 아나사지(Anasazi), 모골론(Mogollon), 기타 다른 고대 부족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종족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메사(mesa)에서 내려다 본 경관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스카이시티와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들의 삶과 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메사의 주택가 골목에서 물건을 팔고 사는 모습

 

 


스카이 시티의 주택들

 

 


전통 어도비 양식의 주택들

 

 


메사에서 내려다 본 황야

 

 


스카이 시티의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과 앞 뜰의 공동묘지

 

 


 '성 이스테반 델 로이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의 내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도자기

 

 


마을 앞 좌판에 팔려고 늘어놓은 도자기들

 

 

아침 일찍 앨버커키의 숙소에서 나온 우리는 복잡한 산길 60마일을 달려 넓게 펼쳐진 분지 속의 스카이 시티에 산다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을 찾았다. ‘스카이 시티 컬츄럴 센터(Sky City Cultural Center)’에 당도하여 긴 시간을 기다리고 난 11시 반에야 가이드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살아온 메사(mesa) 꼭대기가 평평하고 주위가 벼랑인 돌 잔구는 높이가 365피트[111.3m]나 되는데, 길은 잘 나 있었지만, 관광객들이 개인적으로 그곳에 접근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셔틀버스로 이동하여 가이드의 안내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셔틀버스를 타고 센터로부터 돌덩어리들 사이를 10분 정도 달려 올라가니 오랜 옛날부터 있어 온 듯 메사 위엔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의 전통 주거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모든 집들이 어도비 양식으로 지어진 것은 물론이고, 대체로 33층으로 이루어진 아파트 양식의 건물들이었는데, 모두 남향이었다. 이 건물들을 보며 이른바 어도비 양식의 핵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즉 서까래, 풀 짚, 회반죽 등으로 덮은 지붕을 대들보가 가로질러 밖으로 삐죽삐죽 나오게 한 다음 어도비 벽돌로 벽면을 마무리하는 공법이었다. 1층 집의 지붕은 2층 집의 바닥이 되고, 2층 집의 지붕은 3층 집의 바닥이 되니, 실로 멋진 상호의존적 건축법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집들의 사이사이에 조성된 광장에서 각종 전통 행사들이 열렸으리라. 

 

2층이나 3층집을 오르내릴 땐 반드시 나무 사다리를 사용했다. 만약 위에서 사다리를 치워버리면 그 집에 올라갈 수 없으니, 그것은 일종의 외적에 대한 자위(自衛) 수단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기 전에는 평지에서 메사를 오르내리던 통로라 해야 기껏 돌 표면을 파서 만든 가파른 계단뿐이었을 것이니, 그곳만 막으면 외적들이 메사 위의 주택가로 올라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집들 앞에는 그들의 전통 빵을 굽는 흙 화덕이 만들어져 있고, 개중에는 최근에 빵을 구은 듯 그을음이 밖으로까지 번져 나온 경우도 보였다. 서남쪽 벼랑 위엔 엄청난 크기와 규모의 어도비 건축물 성 이스테반 성당[San Esteban Del Roy Mission]’이 있고, 그 앞마당엔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있었다. 사진은 성당의 겉면만 찍을 수 있었고, 그나마 공동묘지 근처에서는 카메라를 조작조차 못하게 막는 것으로 보아, 성당 내부나 공동묘지가 그들에겐 성역(聖域)임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종교나 신앙에 관한 궁금증은 전형적인 애코머 푸에블로 인디언인 가이드의 설명으로 대부분 해소되었다. 그는 애코머 인들의 전통 신앙은 인간의 삶과 자연 사이의 조화를 강조한다는 것, 태양은 창조주 신을 대리하는데, 공동체를 둘러 싼 산들과 그 위에 떠 있는 태양 그리고 그 아래의 땅이 균형을 이루어 애코머의 세계를 형성한다는 것, 전통 종교 의례는 충분한 강우를 비는 데 중심이 있었으므로 날씨에 많이 좌우된다는 것, 그런 제의에서 카치나(kachina) 댄서들이 춤을 춘다는 것, 푸에블로 거주지에는 종교 의례를 행하는 방 즉 카이바(kiva)들이 있다는 것, 각 푸에블로의 지도자는 공동체 종교의 지도자이거나 추장의 지위를 갖고 있는데, 추장은 태양을 관찰하여 종교의례의 스케줄을 짜는 지침으로 사용한다는 것, 많은 애코머 인들이 가톨릭 신도들이며 그들의 행사에 가톨릭 정신과 전통 종교가 혼합된 모습이 보인다는 것, 아직도 많은 제의들이 살아 있는데, 9월에는 그들의 수호신인 스테판 성인(Saint Stephen)을 기리는 축제가 있다는 것, 그날에는 메사가 대중들에게 개방되어 2천명 이상의 순례객들이 축제에 참여한다는 것등을 열심히 설명했다.

 

성당에 이르기 전 중앙 광장에는 세 개의 흰 색 통나무들을 엮고 위쪽에 가로막대를 댄 사다리 모양의 제구(祭具)’ 두 개가 가옥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는데, 가이드에게 용도를 물으니 일종의 기우제의(祈雨祭儀)’에 쓰이는 물건들이라고 했다. 즉 세 개의 통나무는 빗줄기, 위쪽에 댄 가로막대는 비구름을 상징한다는 것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늘 물이 모자라 고통을 받던 그들의 삶을 여실히 보여주는 제구였다. 말하자면 가톨릭과 전통 제의가 공존하던 신앙의 형태를 현장에서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의 가족 형태는 어떨까. 모계사회인 애코머 인들에게는 대략 20개의 클랜(Clan)들이 있었고, 오늘날에는 19개의 클랜들이 살아 있으며, 각각의 클랜에 따른 상징동물들이 있었다. 클랜의 상속에 대하여 물으니 서로 다른 클랜 출신의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경우 모계사회인 만큼 아이의 클랜은 어머니의 것을 따른다고 했다. 이들의 결혼은 모노가미(monogamy) 즉 일부일처제로서 이혼은 매우 드물며, 사람이 죽은 경우 4일 낮밤을 새운 뒤 매장한다고 했다.

가이드를 따라 이동하는 곳곳에 애코머 여인들이 좌판을 벌이고 앉아 있었다. 주로 그들이 직접 구은 도자기와 비드(bead) 및 수예 등 전통 수공예품들이었다. 아이들도 자신들이 만든 아기자기한 도자기들을 갖고 나와 파는 것을 보며, 공예기법이 부모로부터 자녀들에게 전수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요는 하지 않았으나, 이들 좌판에 연결되도록 가이드의 이동경로는 교묘하게 짜여 있었다. 카지노 등의 독점 사업으로 쉽게 돈을 버는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술을 바탕으로 자립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가 매우 바람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애코머 인들에게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냄새를 맡을 수는 없었다. 물론 현재 메사의 전통가옥에 사는 주민들은 극히 일부분이고 도시로 나가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가이드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 역시 미국인인 만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긴 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만큼은 어떻게든 붙잡고 있으려는 그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스페인이 지배하던 멕시코의 한 부분이었으므로 미국의 다른 지역과 달리 이 지역은 가톨릭이 지배적인 종교였다. 그들의 지배를 받아 가톨릭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전통 신앙을 버리지 않은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었다. 인근 부족들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메사의 고지대에 거주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다. 어도비라는 건축양식을 통해 주변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생활미학을 구현하고 뉴멕시코의 지역 미학으로 승화시킨 점은 무엇보다 먼저 강조되어야 할 그들의 공로였다. 그들은 아름다운 도자기와 각종 수공예품들을 직접 생산하여 지금도 외부인들에게 팔고 있었다. 또한 아직도 5천에 가까운 애코머 인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이 지역 혹은 그 인근에 살고 있으며, 외부와의 통로를 열어놓은 채 자신들의 미래를 가꾸고 있었다. 애코머 푸에블로 인들이 비록 이 사회 마이너리티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그들이 뿜어내는 삶의 의지와 미래지향적 성향을 확인하게 된, 소중한 경험이었다.

 

 


기우제의에 사용하던 도구[세 개의 기둥은 빗줄기를 가로막대는 구름을 상징함]

 

 


이 도시의 전형적인 어도비 양식 주택

 

 


메사에서 내려다 본 아래쪽 경관

 

 


메사의 주택가 좌판에 어린이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진열하고 있다.

 

 


컬츄럴 센터의 식당

 

 


식당에서 주문한 푸에블로 전통음식[멕시코 풍 음식이었음]

 

 


애코머 스카이 시티 가는 길 표지판

 

 


애코머 스카이 시티 건너편 언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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