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21. 6. 3. 18:51

 

 

지난 4월 18일에 조경현[뉴욕대 교수]이 2021년 삼성호암공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보도를 접했고, 그로부터 2개월 반쯤 지난 시점[2021. 6. 1.]에 시상식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에코팜의 잡초들을 뽑고 있던 중 호암재단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5월 31일[월]에 상경, 다음 날 삼성호암상 대리수상자의 자격으로 시상식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경현이 직장[뉴욕대 컴퓨터과학과]에서 학기 중이고, 무엇보다 코로나가 극성을 부리는 현 시점에서 귀국하려면 격리 등 시간적인 부담을 감당할 수 없었으므로 재단은 부모인 우리 내외를 대리수상자로 부른 것이었다. 덕분에 평소 갈 이유도 기회도 없었던 신라호텔에서의 1박과, 그 안의 비싼 식당들에서 몇 끼의 식사와 잘 관리되는 수영장 사용 등 융숭한 대접의 호사를 누렸다.^^

 

6월 1일 오후 1시. 영빈관으로 자리를 옮긴 우리는 다른 참석자들과 30분 정도 환담을 나눈 뒤 식장으로 옮겨 1시간 정도 리허설을 가졌다. ‘시상식에 무슨 리허설일까?’ 의아했으나, 코로나로 인해 극히 제한된 관계자들만 시상식에 참여했고, 6명의 수상자들[과학상 물리・수학 부문: 미 스탠퍼드 대 허준이(38) 교수/과학상 화학・생명과학 부문: 서울대 강봉균(60) 교수/공학상: 미 뉴욕대 조경현(36) 교수/의학상: 미 존스홉킨스대 이대열(54) 특훈 교수/예술상: 봉준호(52) 영화감독/사회봉사상: 방글라데시 꼬람똘라 병원 이석로(57) 원장] 가운데 조경현과 이대열 교수, 이석로 원장 등이 온라인으로 참여했으며, 행사 전체가 온라인으로 중계되는 까닭에 치밀한 시나리오와 리허설이 필수절차임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6명의 수상자들 가운데 직접 참석한 허준이 교수, 강봉균 교수, 봉준호 감독 등 3명과 김황식 이사장을 비롯한 이사들, 심사위원들, 그리고 다수의 보조요원들이 참석한 작지만 큰 규모의 행사였다. 특히 다수의 보조요원들이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빈틈없이 행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코로나가 생겨나기 전인 2019년의 행사 때는 전체 500여명의 인원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재단 사무국장의 사회로 시상식은 정각 3시에 시작되었다. 김황식 이사장의 인사말, 김기문 심사위원장[포스텍 교수]의 심사보고, 부문별 시상과 수상소감[수상자마다 공적에 대한 설명과 수상, 수상소감의 세 부분으로 진행], 바이올리니스트 신지아의 축하연주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행사의 전 과정이 온라인으로 생중계되었다. 수상자들의 수상소감 중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허준이: “수학은 나 자신의 편견과 한계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우리가 아직 풀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들은 이해의 통합을 통해 해결되리라 믿는다.”

 

강봉균: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의 영광은 실험실에서 함께 고생한 많은 학생들과 연구원들의 피땀어린 노력 덕분이다.”

 

조경현: “인공지능 연구의 궁극적 목표는 지능이란 무엇인지, 이성이란 무엇인지, 감히 과학으로는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아직 갈 길이 먼 인공지능 분야에 격려과 응원의 의미가 담긴 상을 받아 감사하다.”

 

이대열: “뇌의 기능과 기능장애에 대해 알고 싶고 연구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뇌 과학 선배 과학자들과 새로운 지식과 통찰을 나눠 준 공동 연구자와 학생들에게 감사하다.”

 

봉준호: “창작의 불꽃이 꺼지지 않아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중에 한 편 정도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고전으로 오래 기억될 수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기쁠 것 같다.”

 

이석로: “한국보다 방글라데시가 나를 더 필요로 해 3년을 약속하고 왔지만 27년이 지나도 이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봉사란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삶의 본질이다.”

 

***

 

수상자들의 말을 들으며 절감한 공통점 두 가지. 바로 ‘만남과 즐거움’이다. 그것들이 그들의 오늘을 만든 바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선배나 선생, 혹은 우연한 기회를 ‘만나’ ‘즐겁게’ 탐구해온 것이 대성(大成)의 비결이었음을 이번에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일을 ‘즐겁게’ 해왔다고 했다. 탐구 과정에 어찌 어려움이 없었을까. 그럼에도 그런 어려움을 퉁치고 남을만한 보람과 희열이 있었으니, 그걸 즐거움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특히 허준이와 조경현에게서 그런 점이 두드러졌다. 두 사람은 30대의 청년들이다. 나는 지금까지 학생들에게나 아들들에게 ‘노력만이 성공의 유일한 열쇠’임을 강조해왔다. 개성과 끼를 한사코 죽여 가며 정해진 틀에 가장 신속하고 정확히 적응하여 남보다 먼저 앞자리로 나아가는 것. 그것만이 베이비 부머 세대인 우리에게 허용된 ‘살 길’이었다. 규격화된 인재를 만들어 집단적 진보와 대량생산에 즉각 투입하는 일만이 국가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개인들도 그에 부응하여 공식을 열심히 외우고 ‘쓸데없는’ 잡생각들을 하지 말아야 했다. 개성은 망치로 쳐서 들여보내야 할 ‘돌출’로서 집단문화에 대한 일종의 반역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타나기 시작한 ‘반역자’들이 자신만의 세계를 가꾸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허준이나 조경현 같은 신인류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허준이는 시인이 되고 싶었단다. 기형도 같은 시인에게 한동안 빠져 있었다고. 그러니 학부시절 규격화된 평가체계 안의 학점도 ‘당근’ 안 좋았고, 방황도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수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를 강의실에서 만나 수학의 세계에 몰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경현도 마찬가지다. 사실 아버지인 나도 몰랐었다. 왜, 하고많은 선진 대국들을 놔두고 북유럽의 작은 나라 핀란드로 유학을 떠났을까. 그 점에 대하여 지금껏 의문을 갖고 있었지만, 그에게 물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수상자 소감에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학과 사무실 앞에 놓여있던 핀란드 헬싱키 대학 석사과정 팸플릿을 선배로부터 받은 뒤 핀란드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 핀란드에 가서야 전혀 알지 못하던 인공지능을 접하게 되었고, 작은 학회에 참여했다가 아침식사 자리에서 캐나다 몬트리올 대학의 요슈아 벤지오 교수를 만나게 되었으며, 그 인연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캐나다의 그 대학으로 박사후 과정을 가게 되었다는 것. 캐나다에 도착한 다음 날 벤지오 교수가 과제로 던져 준 ‘기계번역’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

그의 다이내믹한 역정들 모두가 ‘만남’의 연속이었고, 기회와 모험의 연속이었으며, 두근거림과 즐거움의 연속이었다는 말 아닌가.

 

조경현이 호암공학상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서른여섯 밖에 안 된 녀석에게 무슨 호암상을 준단 말인가’라고 생각했다. 혹시 ‘호암상이 미래의 가능성을 보고 주는 상인가’라는 엉뚱한 생각까지 할 만큼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내 ‘시간적・문화적 지체(遲滯)’ 증상의 결과일 뿐임을 시상식에 가서야 깨닫게 되었다. 서른여덟의 허준이와 서른여섯의 조경현은 시대와 조류(潮流) 변화의 상징적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이제 즐겁고 다이내믹하게 무언가를 추구하면 삼십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수긍할만한 멋진 패러다임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시대가 변했음을 드디어 깨닫게 된 것이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만일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북적대는 하객들의 틈 속에서 이런 깨달음을 차분하게 얻지 못했을 것이다. 수상자들의 말을 새겨 들으며 순간적이나마 자아와 시대를 성찰할 수 있었던 것은 호암상 시상식으로부터 내가 얻은 망외(望外)의 소득이었다.

 

자식을 대리하여 상을 받는 자리. 묘한 감정이 교차하는 그 자리에서 예상 외로 깨달은 바가 컸다. 잘못 들어선 뒤 많이 나아가긴 했지만, 지금이라도 올바른 길을 찾아 잘못 든 길을 되돌릴 수 있게 되어 무엇보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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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