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1. 4. 8. 18:00

 

호암재단 발표내용

 

 아들의 장점을 말하려는 내게 누군가 '불출(不出)'이라 꾸중해도 어쩔 수 없다. 

 

며칠 전 학교에서 강의를 마친 뒤 집에 오려는데, 제자 한 사람이 방금 인터넷 신문에서 보았다며 경현의 ‘2021 삼성호암상’ 수상 소식이 보도된 기사 한 건을 문자로 보내주었다. 그 기사를 읽고 집까지 두 시간 넘는 거리를 운전하며, 내 마음 속에는 여러 가지 상념들이 명멸했다.

 

평소 삼성호암상은 아무나 받는 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온 나로서는 그 상 자체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국문학을 포함한 인문학자에게 주는 상도 아니고, 자연과학과 공학 등 실용적 보편학문과 예술분야, 사회봉사의 특출한 인물들이 받는 상이라는 점에서 그에 대하여 큰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 밤을 자고 일어나 여러 사람들로부터 축하 전화를 받으며 그 상의 무게를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기사를 검색해보니, 호암재단[이사장 김황식]이 발표한 2021년도 삼성호암상 수상자 및 심사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수상자

 

1. 과학상

1) 물리・수학부문: 허준이 교수[38세/스탠퍼드 대]

2) 화학・생명과학부문: 강봉균 교수[60세/서울대]

 

2. 공학상: 조경현 교수[36세/뉴욕대]

 

3. 의학상: 이대열 특훈교수[54세/존스홉킨스대]

 

4. 예술상: 봉준호 감독[52세/영화]

 

5. 사회봉사상: 이석로 원장[57/방글라데시 꼬람똘라병원]

 

심사

 

국내외 저명학자와 전문가 46명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와 해외석학 자문위원 49명의 업적 검토 등 4개월 동안의 엄격한 심사과정

 

삼성호암상은 삼성그룹 창업자인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의 ‘인재제일, 사회공익 정신’을 기려 1990년에 제정되었다 하니, 한국 내에서는 그 권위와 역사를 능가할 만한 상도 없을 것이다.  또한 대부분의 기사들에서 호암재단이 ‘허준이 교수, 조경현 교수 등 30대의 젊은 과학자 2명이 수상자로 선정된 것은 학계의 큰 소득’임을 밝혔다고 했는데, 나로서는 그 점이 더욱 감격스러웠다. 학문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완성도가 높아지는 인문학 종사자로서 솔직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그간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 그 방향이 절대로 맞는다고 생각한다. 인문학이라 해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비전의 성숙도가 높아지는 것은 맞지만, 그것을 학문적 결과로 실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삼성호암상이 시대적 조류를 과감히 받아들여 30대인 경현이를 역대 최연소 수상자로 선정한 것은 영광스러운 쾌거라 할 수 있지 않은가.

 

다음으로 감격스러운 것은 그의 학문분야와 성취도에 대한 평이다.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1. 공학상 조경현 교수는 문장 전후 맥락까지 파악하는 ‘신경망 기계번역 알고리즘’을 개발해 ‘인공지능[AI] 번역의 혁신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매일경제]

 

2. 공학상 조경현 교수는 인공지능[AI] 번역 전문가다. 문장의 전후 맥락까지 파악해 고품질의 번역을 할 수 있는 ‘신경망 기계번역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조 교수가 개발한 알고리즘은 현재 대다수 번역 엔진에 사용되고 있다는 게 재단 설명이다. [동아사이언스]

 

3. 인공지능[AI] 번역 기술의 대가로 꼽히는 조경현 미국 뉴욕대 교수는 공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조 교수는 문장 단위의 AI 번역을 뛰어넘어 사회・문화적 맥락과 작가 스타일을 살리는 ‘신경망 기계번역 알고리즘’[NMT]을 처음 선보였다. 그가 개발한 NMT는 현재 대다수 번역 엔진에 채택돼 AI 번역 및 관련 산업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중앙일보]

 

4. 조경현 교수는 문장 전후 맥락까지 파악하는 ‘신경망 기계 번역 알고리즘’을 개발해 인공지능 번역에 혁신을 가져왔다. [조선일보]

 

5. 특히 “올해는 물리・수학 부문 허준이 교수, 공학상 조경현 교수 등 30대 젊은 과학자 2명이 수상자로 선정됐다.”며 “세계 유수의 상들과 견줘 손색없는 수준을 인정받는 삼성호암상에 올해 30대의 젊은 수상자가 2명이나 선정된 것은 학계의 큰 소득으로 평가된다”고 덧붙였다. [아이뉴스 24]

 

1~4는 뉘앙스의 차이가 있을 뿐, 똑같은 내용이다. 그가 그 분야에서 손꼽히는 AI의 전문가라는 점, 그가 개발한 새로운 번역의 알고리즘이 매우 훌륭하여 대다수 번역 엔진에 사용되고 있으며 관련 산업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 등이 그 내용의 골자들이다. 5는 호암재단이 30대의 연구자를 수상자로 선정한 의미를 밝힌 내용이다. 나로서는 이 기사들의 내용이 그에 대한 최고의 감동적인 찬사라고 생각한다. 이 말들이 사실과 부합되는지, 혹은 36살의 젊은 그가 오륙십 대의 시니어 학자들과 함께 이 상을 함께 받을 자격이 있는지 등에 대하여 추호의 의심도 없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단순한 편들기가 아니라, 대학 졸업 이후 해외의 좋은 대학, 훌륭한 학자들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미래의 블루오션이라 믿은 AI를 연구하기로 결심한 그의 판단과 노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AI의 2세대가 시작도 되기 전, 더구나 어린 시절에 그 학문의 중요성과 의미를 간파하고 뛰어들었으니, 교수나 학자로서는 '약관'이라 할 수 있는 36의 나이에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학자가 자기 당대에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는 경우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게 ‘고리타분한’ 국문학이든, 첨단의 AI이든, 제대로 된 학자라면 늙어 꼬부라질 때까지 연구실에 틀어박혀 끊임없이 정진해야 하는 이유이다. 제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인간의 당대에 한 분야를 완성할 수 없도록 한 것은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신의 섭리’다. 간혹 ‘이 논문은 이 분야의 결정판이니, 아무도 더 손댈 수 없다’고 큰소리치는 인사들도 없지는 않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100% 허언(虛言)임이 판명된 것만으로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이제껏 빠져 지내는 잡기(雜技) 하나 없는 답답한 학자가 조경현이다.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무릎에 올려놓고 온갖 알고리즘의 세계를 유영(遊泳)하며 종으로 횡으로 자신의 가설을 논증하기에 바쁜 친구가 바로 조경현이다. 어느 틈에 오만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2018년 블룸버그 통신이 그를 ‘새해에 주목해야 할 각 분야 50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했을 때도, 2019년 뉴욕대학이 부임[2015년 9월] 4년만에 종신교수직을 주고 미국 정부가 입국[2015년 9월] 3년 반만에 그린카드를 부여했을 때도, 2020년도에 삼성이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삼성연구자상’을 주었을 때도, 변함없이 허름한 티셔츠 한 장 걸치고 아무데나 앉아 쉼 없이 컴퓨터를 두드리며 발표문을 작성하는 그였다. 드디어 올해 삼성호암상을 받게 되었으나, 그의 그런 자세엔 추호의 변함도 없으리라. 그래서 그는 내 아들이되, 나는 그를 내 선생으로 생각해야 마땅한 일이다. 아들을 훌륭한 선생으로 모시고 있으니, 나는 분명 하늘로부터 큰 축복을 받은 셈이다.

 

블룸버그에서 발표한 2018년 각계의 수상자들과 조경현

                                                      

<<시사인>> 570호 표지사진[2018. 8. 10.]

 

        삼성 첫 'AI연구자상' 시상 관련 기사[중앙일보 2020년 11월 2일자 경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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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21. 3. 28. 06:54

말없이 누워 시간을 증명하는 태안사구

 

세사(世事)가 번잡하다는 생각이 들면, 지체 없이 고향을 찾을 일이다. 고향을 찾는 일은 시간여행이다. 하기야 모든 여행이 시간여행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은 없다. 그러나 고향을 찾는 일은 다른 곳을 찾는 것과 다르다. 낡은 집 혹은 집터와 부모님의 산소가 있어 특별하다. 자연이 변했고 그 옛날의 사람들도 더는 살고 있지 않지만, 다북쑥으로 뒤덮인 집터나 산소는 의연히 그곳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수많은 발자국들이 찍혀 있고 그 발자국들에 묻어온 바깥세상의 티끌들이 켜켜이 쌓여 있으며 각종 잡초들이 자라나 엉켜 있는 곳. 그곳에 서리고 앉아 있는 스토리와 히스토리를 헝클어진 실타래 풀 듯 정리하려면 어쩔 수 없이 타임머신을 타야한다. 그래서 심사가 복잡할 때면 삽과 쟁기를 던져두고 달려가는 곳이 고향이다.

 

어릴 적 소에게 풀 뜯기러 다니던 백사장. 물소리와 물빛은 여전하고, 수평선에서 들려오는 뱃고동 소리도 그대로다. 겨우내 말라붙은 통보리사초가 바닷바람에 일렁이고, 그 사이에서 간신히 삶을 부지하고 있는 해당화 줄기들은 조심스레 눈을 틔워내고 있다. 해변에 빠끔빠끔 뚫려있는 작은 구멍들은 아마 부모 품에서 갓 떨어져 나온 달랑게 아가들의 새 집들일 것이다. 주변이 말끔한 어미 게의 집들과 달리, 녀석들의 집 주변은 온통 장난처럼 그어놓은 그림들로 어지럽다. 하하, 장난꾸러기 아가 달랑게들이여, 부디 행복하기를!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모래언덕을 힘겹게 지나 소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뚫고 들어갈 수 없을 만큼 빽빽한 곰솔들. 바람에 실려 번져 나가는 그들의 노래가 미세먼지로 더껑이 진 내 귀를 간질인다. 그래, 잘들 자랐구나. 손가락 굵기의 묘목을 새하얀 모래 언덕에 꽂아 넣던 수십 년 전 그 시절. 어찌 알았으랴? 순식간에 이토록 장대한 소나무 숲으로 자라날 줄을! 해신(海神)과 풍신(風神), 그리고 토신(土神)이 누천년 쉼 없이 불고 쓰다듬으며 만들었을 모래동산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신의 손길이 만든 사구(沙丘)들 대신 개미 같은 인간들이 그 곱고 이국적인 동산들을 눈 깜짝 할 사이에 집어 삼키지 않았는가. 해신과 풍신이 안간힘을 써가며 모래 알갱이들을 불어 올리고 있지만, 저 무성하게 태양을 향해 뻗어 올라가는 소나무 숲을 어찌 덮어버린단 말인가. 소를 풀밭에 풀어놓고 벌렁 누운 채 수평선을 바라보며 ‘따분한 고향’ 탈출을 꿈꾸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모래밭 한 가운데 화석으로 남아 있음을 비로소 발견한다. 수십 년 세월의 강을 건너며 모래밭에 남은 그 자국은 오히려 선명하게 내 눈앞으로 다가 서지 않는가. 자연은 바뀌어도 자연 속에 남겼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은 계절 따라 색깔만 바꾸어 갈 뿐, 사라지지 않음을 비로소 확인해주지 않는가.

 

내 옛집이 앉아있던 빈 터, 아직도 나를 쓰다듬어 주시는 조부모와 부모의 산소, 어린 시절 뒹굴며 찍어 놓은 모랫벌의 내 모습, 순식간에 모랫벌을 삼키고 하늘같이 자라난 소나무들,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않고 모래알을 불어 올리는 해신과 풍신 그리고 토신, 작은 구멍을 뚫고 구멍 앞에 현란한 그림들을 그려놓은 아가 달랑게들... 모두가 내 시간여행을 가능하도록 한 도우미들이었다. 시인 서정주는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라고 국화를 노래했지만, 젊은 시절 욕망과 꿈의 미로에서 헤매다가 고향 앞에 돌아와 끊임없이 밀려드는 바닷물과 이젠 한 줌 사구에 남은 그 옛날의 내 모습이나 찾아볼 뿐이다.

 

왜 고향을 찾는가. 내 모습을 찾기 위한 시간여행. 그것을 가능케 하는 타임머신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말없이 누워있는 사구

 

할 말이 많은 사구

 

사구와 풀들

 

사구 뒤편의 곰솔밭

 

 

 

건강한 곰솔

 

 

곰솔의 남성미

 

 

사구 앞의 등대

 

 

사구의 주인 갈매기들

 

사구 앞 해변

 

 

태안사구 아가 달랑게들의 집들과 그림

 

태안사구의 태양

 

부모님 산소

 

나무숲이 되어버린 고향집터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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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21. 3. 19. 16:54

‘읽는 책’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책’으로!!!

 

 

작년도 제 연구실에서는 네 사람의 연구자들[조규익・문숙희・손선숙・성영애]이 음악으로서의 보허자(步虛子) 악곡과 시가로서의 보허사(步虛詞)를 분석・정리하는 모임들을 가졌습니다. 이미 우리 팀은 세종대 궁중정재 ‘봉래의’와 고려시대 궁중 속악정재 ‘동동’을 복원하고 분석하여 책으로 엮어낸 경험들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작업 또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작년 11월 21일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복원 공연 및 학술발표회를 가졌습니다.

 

보허자步虛子: 허공을 즈려밟고 훨훨 나는 신선이여!

태평성세 유토피아 이루시는 제왕이여!

 

국가지정문화재 전수회관 풍류극장

2020. 11. 21.

 

그 자리에서 이루어진 학술발표들과 공연을 함께 묶은 책이 오늘 드디어 세상에 나왔습니다. 책 제목과 출판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허자步虛子

궁중 융합무대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

 

조규익・문숙희・손선숙・성영애

 

민속원, 2021. 3. 2.

 

이 책의 내용과 의미는 책의 서문과 목차에 잘 밝혀져 있으므로, 그것들을 여기에 붙이겠습니다.

 

 

◆ 머리말 ◆

 

신선의 음악과 춤,

노래 속에 즐거운 ‘시간여행’을...

 

 

보허자步虛子에 관한 멋진 설화 한 토막.

 

일설에 이르기를, 진사왕[조식]이 유산할 때 문득 허공에서 경을 외는 소리가 들리는데, 맑고 심원하며 굳세고 밝으므로 음을 아는 자가 본뜨고 그려내어 신선의 소리로 삼았으니, 도사가 이를 모방하여 보허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원異苑>> 권5

 

남북조 시대 최고의 산수시인山水詩人 사령운謝靈運이 “천하의 재능이 한 섬이라면, 그 중 8말을 조식이 차지하고, 내가 한 말을 가졌으며, 나머지 한 말을 세상 사람들이 나눠가졌다.”고 말할 정도로 조식曹植은 천재 시인이었다. 지금 보허성 혹은 보허자의 근원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시에 보허자가 얼마나 환상적이고 신비스러웠으면, 그들은 조식을 내세워 이런 스토리까지 만들었을까

 

우리는 몇 해 전부터 중세왕조들의 궁중예술을 연구해오는 중인데, 고려․조선의 궁중예술들은 악곡․노래[시가/악장]․춤이 융합된 무대예술[정재呈才]이었다. 음악만으로, 춤만으로, 시가만으로는 그 미학의 진수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융합예술체들이다. 그래서 각 부분을 연구한 뒤 하나로 합치는 과정을 거쳐 무대에 올려야 완성되는, 복잡하지만 즐거운 작업들을 해온 것이다. 그간의 연구 결과들은 아래와 같다.

 

무대들

 

고려 및 조선노래 복원 연주회: 노래박물관 특별전[600년의 소리향]

-국립국악원 우면당, 2011. 11. 10.

 

세종, 음악으로 다스리다

-한중연 소강당[학술발표], 대강당[축하공연], 2012. 11. 27.

 

봉래의鳳來儀:세종의 꿈, 봉황의 춤사위 타고 하늘로 오르다!

–국립국악원 우면당, 2013. 11. 21.

 

동동動動: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사랑의 염원이여!

–국가지정문화재 전수회관 풍류극장, 2018. 12. 1.

 

 

펴낸 책들

 

조규익문숙희손선숙,  <<세종대왕의 봉래의, 그 복원과 해석>>, 민속원, 2015.

 

조규익문숙희손선숙성영애,  <<동동動動:궁중 융합무대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 민속원, 2019.

 

 

동동에 빠져 지낸 뒤 보허자와 보허사를 만났고, 상당 기간의 연구를 거쳐 세 번째 복원공연 및 학술발표회를 가졌다.

 

보허자步虛子:허공을 즈려밟고 훨훨 나는 신선이여!/태평성세 유토피아 이루시는 제왕이여! –국가지정문화재 전수회관 풍류극장, 2020. 11. 21.

 

이제 그 결과를 책으로 엮어 세상에 내놓는다.

 

초창기 도교의 재초의례齋醮儀禮에 쓰이다가 문인들에게 수용되었고, 궁중으로까지 들어갔다는 것 외에 보허자의 본질과 확산 과정은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나마 문헌에 약간씩의 단서들이 남아 있어 추적은 가능했다. 보허자에 올려 불린 악장으로서의 <벽연롱효사碧烟籠曉詞> 덕에 보허사의 본질을 유추할 수 있었고, 보허사 범주 안의 시작품들을 많이 남겨준 중국 시인들과 조선의 시인들 덕에 시문학으로서의 보허사 수용양상을 살필 수 있었다. 15세기 여민락과 16세기 여민락의 관계 및 15세기 낙양춘의 선율을 바탕으로 16세기 보허자에서 15세기 보허자의 선율을 찾아낼 수 있었다. 또한 보허자 곡의 연주로 추었다는 <<악학궤범>>의 기록 덕에 학무鶴舞도 복원할 수 있었다.

 

 

우리는 1,500여 년 전의 보허자가 우리 곁에 오기까지의 과정을 이렇게 추적해왔다. 이 책으로 1차 보고의 의무를 마치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다시 ‘시간여행자’가 되어 또 다른 작품들과 씨름하다가 퍼뜩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신선의 음악과 노래, 춤 속에서 즐긴 ‘시간여행’은 매우 환상적이었고, 그래서 행복했다.

 

큰 도움 주신 한국연구재단과 힘들인 원고를 멋진 책으로 꾸며주신 민속원의 홍종화 사장님과 편집부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강호 제현의 애정 어린 비판을 고대한다.

 

2021. 3. 1.

 

지은이들을 대표하여

조규익

 

 

 

◆ 목차 ◆

 

제1부

총서 / 19

  조규익

 

 

제2부

악장으로서의 <보허사步虛詞>, 그 전변轉變에 따른 시대적 의미 / 27

  조규익

 

1. 머리말 28

2. 고려왕조의 보허자․보허사 수용과 1차적 의미 전변 32

3. 조선왕조의 보허자 계승과 콘텍스트의 복합성 44

4. 조선조 보허자 악장 텍스트의 실험과 2차적 의미 전변 51

5. 맺음말 68

 

 

제3부

조선조 문인文人들의 보허사步虛詞 수용양상 / 71

성영애

 

1. 머리말 72

2. 송대宋代 <<악부시집樂府詩集>>에 나타난 보허사步虛詞 개관 75

3. 문인文人들의 보허사步虛詞 수용양상 80

4. 맺음말 97

 

 

제4부

15세기 보허자 음악 복원 연구 / 99

문숙희

 

1. 머리말 100

2. 보허자 리듬 변천 과정과 15세기 보허자의 리듬 104

3. 15세기 보허자 음악 찾기 113

4. 맺음말 124

 

 

제5부

보허자 음악에 맞춘 성종대成宗代 학무 복원 연구 / 127

손선숙

 

1. 머리말 128

2. <<악학궤범>>의 <학무> 검토 132

3. <학무> 복원의 주요 키워드 11가지 135

4. <학무> 복원의 수용 범위와 근거 139

5. <학무>의 가무악歌舞樂 융합적 복원 안무보 198

6. 맺음말 200

 

 

제6부

총결 / 207

조규익

 

 

제7부

텍스트 / 223

 

1. 고려사 악지 오양선 기록 224

2. 악학궤범 학무 기록 225

3. 여민락 악보 226

4. 금합자보 악보 000

5. 대악후보 악보 000

 

 

Abstract 215

참고문헌 227

찾아보기 233

 

 

 

 

강호제현의 많은 조언과 편달,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21. 3. 19.

 

조규익 드림

 

 

 

 

 

 

 

췌언(贅言)

 

 

세상에 또 한 권의 책을 보태면서

 

 

책이란 무엇이며, 왜 만드는 것일까요? 많지는 않지만, 지금 제 서재에는 이름 모를 옛 선조들이 꼬박꼬박 적은 다음 묶어놓은 책 형태의 문적들과, 근대 이후 신활자로 출간한 선학들의 책들이 몇 권 꽂혀 있습니다. 글자를 아는 사람들도 많지 않고 변변한 종이도 없던 시절, 그 분들은 왜 그런 자취를 남긴 걸까요?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어도 들으려 하지 않고 글자로 써놓아도 읽어주는 사람이 없던 그 당시에 그 분들이 느낀 좌절은 어떠했을까요?

 

아마 ‘지금은 모르지만, 앞으로 백년 천년 뒤 누가 있어 이 글을 보면 내가 이 땅에 살다 갔음을 알아주겠지’라는 생각으로, 이런 문적을 남겼겠지요? 저는 그저 제가 하고 있는 공부에서 무언가를 발견하면 흐뭇하고 즐거워 이 날 이 때까지 아무도 읽어주지도 알아주지도 않는 글들을 반복적으로 쓰고 있습니다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가 아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가득 채운 미세먼지 한 톨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비로소 ‘남은 기간’과 ‘해야 할 것들’ 사이의 불균형이나 괴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대학원생 시절 저를 아껴 주시던 나손(羅孫) 김동욱(金東旭) 선생님은 저를 만나실 때마다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 물으셨고, 제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당신의 말씀을 툭툭 던지곤 하셨습니다. 나중에 선생님의 말씀들을 곱씹어 보며 그 말씀들 속에 담긴 아이디어가 얼마나 금쪽같은 것들이었는지를 깨닫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왜 그런 아이디어들을 속속 더 많은 논저들로 만들어 내지 않으실까?’ 물론 선생님은 당시 이미 등신대(等身大)의 논저들을 남겨 놓으셨으니, 거기에 새삼 무엇을 더 얹으실 수 없는 입장이셨지만, 어린 저로서는 의문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제 저도 그 때 그 분의 연치에 도달했습니다. 남들의 논저를 읽어갈 때마다 ‘이건 왜 이렇게 썼을까?’, ‘이 점을 놓친 것 같군’, ‘이런 견해를 표명한 글들이 이미 나왔는데, 미처 읽지 못했군’ 등등. 여러 생각들이 떠오르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후학을 만나 이야기하면, ‘그럼 당신이 한 번 써보구려!’라는 반박이 되돌아 올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생각을 논리화하는 작업에 착수한다는 것은 ‘열정과 힘’이라는 연료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이제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열정과 힘을 다른 말로 하면 ‘젊음’이겠지요. 신은 인간에게 아이디어를 풍성하게 주면서 열정과 힘까지 주지는 않습니다. 인생을 불태워 아이디어와 지혜를 얻었다면, 그 아이디어와 지혜는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닙니다. 그를 뒤따르는 누군가들에게 건네주어야 할 ‘대가 없는’ 선물일 뿐이지요.

 

이 책[보허자步虛子: 궁중융합무대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을 포함, 10권 정도를 시리즈로 내고자 한 것이 얼마 전까지 갖고 있던 제 내심의 계획이었습니다. 이제 겨우 3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평가결과도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런 ‘헛된 꿈’을 버리라고, 제 옆지기는 자꾸 다그치네요. 좀 과하고 헛된 꿈일까요?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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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21. 3. 8. 11:09

 

*인문단상*

 

 

 원 웨이 티켓(One-Way Ticket)

 

 

                                                                                                                 조규익[국문과 교수]

 

 

‘에코팜(Eco-Farm)’이라 스스로 이름 지은 전원에 ‘노마드 텐트’의 말뚝을 박았다. 마지막이라는 다짐 속에 완벽한 ‘정착’을 기원하며 치른 의례이지만, 저 창밖에 펼쳐지는 사계(四季)의 변화는 내 마음에 어떤 파문을 일으킬지 장담할 수 없다. 언제든 돌아갈 수 있고,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헛된 믿음으로 쉼 없이 달려온 길. 발길을 되돌릴 수 없는 그 길의 어디쯤에 나는 서 있을까. ‘지나간 일 소용 없음을 깨달았지만, 앞으로의 일도 따를 수 없음을 알고 있다’고 고백한 도연명(陶淵明)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작비금시[昨非今是/지난날은 잘못되었고 지금은 옳다!]’의 슬픈 각성을 남기지 않았던가.

 

20대 후반에 대학의 전임이 되면서 설익은 자의식을 바탕으로 ‘학자 혹은 교수로서의 정체성’을 주조(鑄造)하기 바빴고, 나름의 정체성을 확립한 이후에는 그 일관성을 유지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불 밝힌 연구실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아냈으나, 세상은 그것들에 큰 관심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책이나 논문들은 시간의 여울목에서 그때그때 추구했어야 하는 ‘소중한 것들’의 희생물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독서와 집필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연구실 문을 안으로 닫아 걸지 말고, 외로운 가족과 이웃들을 불러들여 다독이는 ‘큰 공부’를 왜 하지 못했을까. 잔인한 세월의 격랑 속에 자식들은 품을 떠나고 친구들은 저만치 흩어져 거리를 두고 있지 아니한가. 외로운 어부 산티아고 노인에겐 ‘청새치 뼈다귀’라도 남았지만, 내겐 무엇이 남아 있는가.

 

금쪽같은 연구년들에 유럽의 30여개 나라들과 미국의 대도시 및 인디언 보호구역들을 답사했고, 틈틈이 중국・일본・러시아・중앙아시아 국가들・이스라엘 등을 돌아보았다. 그 나라들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역사와 문화의 텍스트였다. 선학들의 눈과 마음을 거쳐 가공된 지식들보다 훨씬 생생한 기록들이 현장에는 널려 있었다. 일직선으로 뻗어온 시간은 엄청난 삶의 잔해들을 남겼고, 그 속엔 공동체의 사유와 행위들이 화석으로 남아 있었다. 몸체가 빠져나간 허물들은 훌륭한 타임머신이었다. 그걸 타고 시간여행을 즐기며 내면의 변화를 시도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나 결국 그 찌꺼기들은 오히려 내 본체를 가두는 새로운 껍데기로 환생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를 화석화시켜 간 것은 과거에 대한 집착과 변화에 대한 거부 때문이었을까. ‘그 때 그 자리’에서 나로 하여금 시간여행을 가능케 했던 그 껍데기들은 내 자의식을 더욱 굳힐 뿐, 잠시 동안의 만남들로 내 생각이나 삶의 굳은살은 쉽사리 유연해지지 않았다. 특별한 경험들의 충격으로도 내 생각은 크게 넓어지거나 깊어지지 않았음을 아프게 고백할 수밖에 없다.

 

***

 

그렇다. 지금 내 몸을 실은 열차는 쉼 없이 내달린다. 다음 간이역에서 내려 열 정거장 쯤 돌아가려고 차장에게 물었더니, ‘이 열차는 앞으로만 가는 열차이며 당신은 외길 여행객’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내리고 싶다면 내려드리겠지만, 그 역이 바로 ‘당신의 종착역’이라는 잔인한 말까지 덧붙이는 게 아닌가. 비명을 지르며 주머니를 뒤져 차표를 꺼내보니, ‘원 웨이 티켓’이란 글자들이 선명하게 쓰여 있지 아니한가.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외길 여행객’이라? 그동안 나는 내가 갖고 있는 티켓이 Round-Trip Ticket인 줄만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도 이웃도 친구도 미루어둔 채 ‘다음번에!’만 외쳐왔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책과 논문을 쓴답시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다음번에!’의 공수표만 남발해온 것이다. 나는 그간 내 지갑 속의 티켓에서 ‘유효기간이 없다’는 글자들만 보았을 뿐, ‘One-Way’라는 단서를 간과하고 있었다. 더구나 ‘유효기간이 없다’는 말이 바로 지금 종착역에 도달했으니 내려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음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철없고 찬란했던 교수시절은 저물고 있으나, 지나온 간이역들에 뿌려놓은 내 ‘헛된 약속’의 깃발들은 빛이 바랜 채 오늘도 ‘One-Way Ticket’을 지닌 ‘외길 여행객’ 백규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펄럭이고 있을 것이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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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21. 2. 6. 19:24

 

 

조규익

 

 

페이스북은 무성산의 은둔자 백규가 세상과 소통하는, 작지만 큰 창이다. 그 창을 열면 반가운 이들의 따스한 미소가 보이고 다정한 음성이 들린다. 내게 손짓하는 반가운 이들 가운데 두어 명의 시인들이 있다. 이른바 ‘페친’들. ‘페이스북의 친구’들이란 뜻일까. 그러나 그 시인들을 감히 ‘친구’라고 부를 수는 없다. 나는 그분들로부터 세상에서 지금까지 배우지 못한 것들을 배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페친’보다는 ‘페사’란 말이 옳으리라. ‘페이스북 사부(師傅)’란 뜻이다. 그 시인들은 세상의 창 페이스북을 통해 내가 만나는 ‘싸부님들’이다. 긴 세월 비싼 등록금 내고 학교를 다니며 시를 배웠으나 아직도 시가 무엇인지 모르고, 시를 통해 삶의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깨우치지 못했는데...그러나 지금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매일 페이스북의 문지방을 넘는다. ‘공짜 학생’ 백규는 오늘도 삶의 진실을 깨달을 수 있다는 설렘으로 페이스북에 자리를 펴고 앉아 있는 시인들을 만난다. 귀하고 얻기 어려운 게 진실임을 세상살이에서 깨달았다. 그것을 진부한 말과 이론으로 깨닫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걸 알았다. 장강대하처럼 흘러내리는 세상의 말들을 보라. 욕망과 거짓, 증오와 간계를 숨기기 위한 레토릭이 대부분 아닌가. 그 어느 갈피에 한 오리라도 진실이 숨어 있단 말인가. 힘을 탐하고 물질을 탐하며 남을 거꾸러뜨리기 위해 오도독 이를 갈며 거미줄을 치기에 분주한 세상의 말들에서 무슨 진실을 느낄 수 있단 말인가.

 

내 소중한 페사 중의 한 분이 바로 나동환 시백이다. 나 시백을 포함한 내 페사들은 내게 시로 말을 건다. 나는 시를 통해 인간세상의 진실을 배운다. 진실과 사실은 다르다. 사람들이 치고받으며 찾아내려 하고 또 찾아냈다고 억지 쓰는 ‘사실’, 어쩌면 ‘시장의 우상’ 숭배자들을 뛰어 넘어 사실 아닌 진실을 추구하는 존재들이 페이스북의 내 ‘싸부들’이다. 세상 사람들의 말이 모두 다르듯 두어 분의 ‘페사들’의 어조는 다르다. 그 어조의 다름을 좀 더 분명히 보여주려는 배려였을까. 나 시백이 시집 <<겨울바다 관찰자>>를 보내 오셨다. 페이스북의 라운지에서 ‘불경스럽게도’ 커피를 마시며 ‘눈팅’을 해온 그 어조가 활자로 변신하여 다시 한 번 내 감성과 이성의 촉수를 자극한다. 아, ‘페사’ 나 시백은 꾸준히도 존재의 근원을 성찰해 오셨구나! 시공에 한정시킨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라도 언제까지라도’ 확장되거나 공유될 수 있는 ‘존재의 진실’을 추구하셨구나!

 

표제시 <겨울바다 관찰자>를 보자.

 

 

시뻘건 아침 해가 동에서 서로 서서히 시간이동을 합니다.

 

스스로를 달구고 또 두들겨 판금처럼 만들고 해 질 무렵 휘어진 낫처럼 정형을 찾고 나서야 치지직 바닷물 속에 담가내오 뿌연 겨울 달 하나 차가운 밤하늘에 비스듬히 걸어놓습니다

 

물고기들은 까만 해수면에 비늘 겉옷을 벗어 던져 놓은 채 바닷물 속으로 깊이 잠들러 갑니다

 

잠의 깊이만큼이나 비늘 겉옷은 짙은 어둠속으로 분해되어 수많은 별들처럼 밤하늘에 박히고 잠든 물고기들의 알몸에는 뿌연 겨울 달빛이 비늘 겉옷처럼 어립니다.

 

까만 해수면 경계의 끝점에서는 생성과 소멸의 거룩한 신의 섭리가 별빛처럼 고요히 아른거립니다.

 

<

나는 어느덧 어슴푸레 겨울 바다 관찰자가 됩니다

 

겨울 바다는 내 존재의 가냘픈 가슴속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생성과 소멸의 파도를 몰고 옵니다

 

 

쉼 없이 들레이는 바다를 보며 시인은 순환의 고리를 건져 올린다. 시인이 보기에 생성과 소멸은 1회로 마무리되는 단순지속이 아니었다. 소멸은 또 다른 생성의 모태가 되고, 그 생성은 또 다른 소멸을 낳고, 그 소멸 또한 ‘또또다른’ 생성을 낳는다는 순환. 한 순간도 쉼 없는 순환의 연속이 바다에서 일어나고 있지 아니한가. 그 고리를 몸으로 현시하는 것이 바로 시간의 지속이고. 나같이 어리숙한 독자를 깨우치기 위함이었을까. 태양과 달, 별, 그리고 물고기 등을 출연시켜 그 감동적인 순환과 지속을 보여주고 있으니, 시인의 상상력은 우주적 스케일로 펼쳐진다. 그러나 바다에 펼쳐지는 순환과 지속이 아무리 우주적 스케일이라 해도 결국 ‘내 존재의 가냘픈 가슴속으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생성과 소멸의 파도를 몰고 올’ 뿐이라는 것이다. 이 순간에 시인은 자잘한 세상의 얽매임에서 놓여나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시뻘겋게 해 뜨는 아침부터 별빛 고요히 아른거리는 밤까지 바다를 관찰하고 분석한 시인의 결론은 무엇인가. 수많은 생성과 소멸의 순환이 반복되는 무한대의 공간을 아예 가슴 속에 품음으로써 자잘한 존재의 한계를 넘어야겠다는 깨달음 아닌가. 바다는 시인에게 모습을 드러낸 텍스트였고, 시인은 그 텍스트로부터 생성과 소멸의 순환법칙을 얻어 내게 보여주고 있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이 시는 아니 이 시집은 바다라는 성소(聖所)에서 시인 혼자 벌인 비의(秘儀)의 기록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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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21. 1. 19. 21:53

 

문숙희 발표-15세기 보허자 음악의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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