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학술문2021. 11. 18. 21:22
                                                                                           

                                                시사IN 740호[2021. 11. 23.]

                                                전혜원 기자 woni@sisain.co.kr

 

인공지능 분야 최정상에 오른 조경현 교수는 인공지능의 편향과 사회적 영향에 목소리를 내고 다양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나쁜 면과 기술은 같이 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인공지능 분야 차세대 톱스타로 꼽히는 조경현 뉴욕 대학 컴퓨터과학과 교수.ⓒ시사IN 조남진

 

인공지능의 세계적 권위자들이 나란히 손에 꼽는 차세대 톱스타는 1985년생인 조경현 뉴욕 대학 컴퓨터과학과 교수다. 그는 요슈아 벤지오 몬트리올 대학 교수와 ‘신경망 기계번역’을 고안해 인공지능 번역의 혁신을 이끈 인물이다. 그가 만든 ‘어텐션(attention·집중)’ 메커니즘은 GPT-3를 비롯한 초거대 인공지능의 기반 기술이 되었다.

 

지난 6월 삼성 호암상 공학상을 수상한 그는 상금 3억원 중 1억원을 ‘컴퓨터 과학을 전공하는 여자 학생’을 위해 써달라며 모교인 카이스트에 기부했다. 출산과 육아 과정에서 교사 일을 그만둔 어머니의 이름을 딴 ‘임미숙 장학금’이다. 1억원은 인문학 연구를 위해 백규고전학술상에, 3만 유로(약 4000만원)는 비유럽 국가에서 온 컴퓨터과학 전공 여자 학생에게 써달라며 자신이 유학한 핀란드 알토 대학에 기부했다.

그가 여성 과학자 양성을 위해 상금을 기부하는 일은 이미 유명하다. 남성이 대부분인 이 분야에서, 그는 초등학교 1학년 여자 조카가 롤모델로 삼을 수 있는 여성 AI 과학자가 나오길 바란다고 했다. 호암상 수상 연설에서는 “제 공부 및 연구 경력에는 ‘우연’과 ‘운’이 많이 작용했다”라고 말했다. 카이스트에서 같이 강의를 듣던 선배가 핀란드 알토 대학 머신러닝(기계학습) 석사과정 팸플릿을 우연히 전달해줘서 인공지능을 공부했고, 역시 우연히 신경망 연구 그룹에 배정됐으며, 학회 아침식사에서 요슈아 벤지오 교수 옆자리에 앉은 인연으로 그와 함께 연구한 데다, 연구 주제로 생소했던 기계번역을 선택한 것 모두가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말이다.

궁금했다. 세계 레벨에서 최정상에 오른 그는 왜 자신의 커리어를 ‘운’이라 말하나. 인공지능 연구의 최전선에서 오히려 인공지능의 편향과 사회적 영향에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양성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친구들과 놀러 나가고 맥주 마시는 데서 즐거움을 얻으며, 최근에는 〈오징어 게임〉도 한번에 다 봤다는 조경현 교수를 화상 앱 ‘줌’으로 90분간 만났다.

 

조경현 교수와 함께 ‘신경망 기계번역’을 고안한 요슈아 벤지오 몬트리올 대학 교수.ⓒAP Photo

 

GPT-3의 등장을 어떻게 보셨나요?

 

사실 이렇게 대중적으로 크게 관심이 있을 줄은 예상 못했어요. 연구하는 사람 입장에서 기술은 굉장히 조금씩 발전해요. 하루아침에 뭐가 확 바뀌는 건 별로 없고요. GPT-3에서 쓰는 알고리즘 자체는 나온 지 꽤 오래됐어요. 다만 이걸 그동안 상상하지 못한 스케일과 엄청나게 많은 양의 데이터로 훈련시켰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GPT-3가 보여줬다고 할 수 있겠죠.

 

GPT-3는 ‘파라미터(parameter· 매개변수)’를 1750억 개 갖췄다고 합니다. 기존 GPT-2의 100배라는데, 이게 커졌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요?

 

너무 좋은 질문인데요. 단순하게 얘기하자면, 앱스토어 들어가서 앱을 설치할 때 용량이 나오잖아요. 어떻게 보면 용량과 파라미터 개수는 같은 거거든요. (딥러닝이 사용하는) 신경망이나 AI 시스템이 다 소프트웨어니까, 파라미터 개수는 프로그램의 사이즈와 같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다 보니 이게 크면 좀 더 뭘 많이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게 당연하겠죠. 물론 이렇게 단순하게 답했을 때의 문제점은 언제나 이게 틀린다는 건데요(웃음). 사실 파라미터의 개수를 세는 거 자체가 연구 주제입니다. 그걸 어떻게 정의하고, 세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정해져 있지가 않아서요.

 

무슨 뜻인가요?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기자 두 명이 썼는데 길이가 다르다고 해보죠. 그렇다면 과연 기사의 길이를 글자 수로 세는 게 맞는지, 아니면 실제 기사 안에 담긴 내용의 양을 세는 게 맞는지 생각해볼 수 있겠죠. 어떤 사람은 글을 간결하게 잘 써서 똑같은 내용을 전달하는 데도 짧게 쓰는 반면, 주저리주저리 늘려 쓰는 사람도 있잖아요. 신경망이나 소프트웨어도, 똑같은 걸 배우는 데 파라미터가 굉장히 많이 쓰일 수도 있고 적게 쓰일 수도 있어요. 용량이 큰데 아무것도 못하는 프로그램을 짜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요.

 

GPT-3가 교수님에 대해 “바둑 챔피언이었다가 구글 딥마인드의 머신러닝 연구자가 되었다”라고 틀린 주장을 한 게 떠오르네요.

 

네, 봤어요(웃음). 어떻게 보면 놀랍고, 다르게 보면 놀랍지 않은 일이에요. 사실 저를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꽤 ‘그럴싸한’ 답이었잖아요. 근데 문제를 푼다는 건 원래 그런 거거든요. 학습 중에 보지 않은 상황에 대해 답을 할 수 있어야 의미가 있으니까요. 그러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좀 지어내야 해요. 전에 봤던 걸 그럴듯하게 조합하는 거죠. 그럼 지금까지 없던 답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과연 이게 맞는 답인지 알기 힘들다는 게 문제입니다. 재밌는 게, 이 답을 생성한 신경망에게 물으면 당연히 맞는다고 할 거거든요. 그게 아니었다면 답을 안 했겠죠. 이렇다 보니 인공지능의 답을 어느 정도까지 신뢰할 수 있고 그러려면 뭐가 필요한지 질문이 생기고,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GPT-3가 이른바 ‘인공 일반지능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의 시초이거나 적어도 포문을 열었다는 평가도 있는데요.

 

그래요? 하하하. 제 생각에 그건 비약이 큰 것 같은데요. 대체 AGI가 뭔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거의 철학이나 종교에 가까워서, 그렇게 정의가 안 되어 있는 용어로는 무슨 얘길 할 수가 없습니다. 지능이란 것도 과연 어디에서 선을 그을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사람이 지능이 있냐, 없냐 하면 대부분 있다고 하겠죠. 유인원의 경우도 대부분 있다고 하고요. 아무래도 똑똑하잖아요. 사자나 호랑이, 개와 고양이는 지능이 있나 하면 또 있는 것 같죠. 조금 더 가서 벌을 생각해보면, 기억력이 좋아서 몇십㎞ 밖에 있는 꽃을 보고 돌아와서 다른 벌들을 다 데리고 가니 똑똑한 것 같고요. 그럼 지렁이는? 땅속에 있다가 비가 오고 습해진 걸 느끼면 올라가요. 이런 걸 보면 조금 똑똑한 거 같고. 만약 주위의 자극에 반응해 몸을 움직이는 게 지능의 일부라면, 사람은 호랑이·사자·개·고양이에 비해 떨어지죠. 벌이 수십㎞ 길을 외우는 것도 사람은 못하고요. 이렇게 보면 지능이란 ‘있다, 없다’라기보다는 스펙트럼에 가깝습니다. 다방면에 걸쳐 있죠.

 

6월24일 대전 카이스트에서 열린 조경현 교수 발전기금 감사패 전달식. 미국에 있는 조 교수를 대신해 어머니 임미숙씨(가운데)와 아버지 조규익씨(오른쪽)가 대신 참석했다.ⓒKAIST 제공
 

GPT-3는 어디쯤일까요?

 

짧게 질문했을 때 그 뒤를 어떻게 이어야 하는지 답하는 걸 보면, 확실히 언어 면에선 어떤 동물보다도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반면 이미지나 비디오를 보는 건 못하니, 이쪽은 어떤 동물보다도 못한 것 같고요. 롱 텀 메모리(장기 기억)도 없죠. 그렇다면 과연 GPT-3라는 게 (지능의 다방면 중에) 어디에 위치하는지, 나아가서 AGI가 대체 이 큰 면의 어디에 있는 건지 알아야 GPT-3가 AGI에 가까이 간 건지 멀리 떨어진 건지 알 수 있는데 그게 전혀 정의가 안 되어 있잖아요. 그렇게 보면 GPT-3가 AGI의 포문을 열었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네요. 답이 아닌 답이네요(웃음).

 

오픈 AI가 올해 1월 내놓은 DALL-E는 텍스트를 입력하면 이미지를 생성합니다. 인공지능이 어디쯤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인간 같은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은 맞지 않나요?

 

졸업 후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하는 제 박사과정 학생이 2015년에 쓴 논문이, 설명이 주어졌을 때 이미지를 생성하는 거였어요. ‘하늘에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다’ 하면 파란 바탕에 비행기 모양이 나오는. 물론 지금은 퀄리티가 굉장히 좋아졌죠. 그럼 여기서 질문은, 과연 이미지나 텍스트를 생성하는 퀄리티만 높이면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지능이라는 게 올라가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것도 해야 하는지인데, 그건 사실 알기 힘들죠.

 

한국에서는 ‘이루다’라는 이름의 AI 챗봇이 성소수자나 흑인을 혐오하는 발언을 하고, 이용자들이 챗봇을 상대로 성희롱을 했으며, 업체가 연인들의 카카오톡 대화를 설명 없이 수집해 20여 일 만에 서비스가 중단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회사에서 굉장히 실수한 거죠. 아무리 그래도 프라이버시에 대해 조심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고요. 얼마 전 뉴스를 보니 한국 법무부에서 내·외국인 출입국 얼굴 사진을 사기업에 넘겼다는데 기업 이름도 안 나오고… 제 것도 다 들어가 있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큰 이슈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사후관리가 거의 없는 것 같아서 안타깝네요. 그런데 이 분야가 좀 그렇습니다. 항공이나 조선 엔지니어링은 갑자기 비행기나 배를 만들어서 띄우기 어려운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링은 뭘 새로 만들기가 쉬워요. 그냥 랩톱에 앉아서 알고리즘을 짤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어떤 시스템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사용할 때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일단 만들고 반응을 보자’는 식이죠. 하지만 이렇게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세상에서는 네트워크 효과가 크니까, 시스템을 만들 때의 결과를 상상해보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합니다. ‘사용자들이 이렇게 쓰면 어떡하지’, ‘이런 질문이 들어오면 어떻게 답할까’ 몇 번 더 생각해봤어야 하는데 (이루다 운영사 스캐터랩이) 그러지 못한 게 아닐까 싶네요. 저도 교수이지만 이건 우리 교육하는 사람들의 실책이 아닌가 합니다.

 

인천공항 입국장(위). 지난해 법무부는 ‘인공지능 식별추적시스템 구축 사업’을 위해 내·외국인 출입국 얼굴 사진을 관련 업체에 넘겼다.ⓒ시사IN 이명익
 

인간이 차별이나 혐오를 하는 이상, 기술로 막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인간의 나쁜 면과 기술은 전혀 같이 갈 이유가 없습니다. AI라고 해서 뭔가 특이한 것 같지만 다 소프트웨어이고 알고리즘을 짜는 건데, 만약 사람이 만든 데이터에 나쁜 것들이 들어 있었고, 알고리즘은 구분을 못하니까 뭔가 나쁜 걸 내놓는다면, 그냥 그걸 안 써야 되는 것 아닌가요? 알고리즘이 그렇게 나쁜 것이라면요. 사회가 잘못된 건 잘못된 거지, 그걸 데이터로 입력해서 잘못된 편견을 더욱 재생산하는 기술을 만든다고요? 두 번째 것은 그냥 잘못된 거 같은데요.

 

기술이 사회를 반영할 뿐 아니라, 사회에 있는 편향을 증폭시킨다고 지적했습니다.

 

좀 완벽하지가 않습니다, 저희가 쓰는 알고리즘들이. 세상에는 명확한 답이 있지만 정보를 완벽하게 갖고 있지 못해서 답을 알 수 없는 문제가 있잖아요. 사람도 마찬가지인데, 이런 경우에도 우리는 보통 알고리즘에게 답을 달라고 하거든요. 이때 알고리즘은 A와 B 중에 조금이라도 A가 답일 것 같으면 A만을 답으로 내놓습니다. A와 B를 같이 주는 게 아니라요. 그러다 보면 잘못된 답이 갑자기 맞는 답처럼 보이기 시작하죠. 알고리즘이 답을 모르겠다거나, 정보가 부족하니 더 가져오라거나, 정확한 확률을 알려주어야 하는데 이 세 가지가 다 안 되니까요. 여기에 알고리즘을 배포하고 나면 사회에서 만드는 데이터들이 다시 알고리즘에 들어가고, 그걸 알고리즘이 학습하다 보니 좋지 않은 ‘되먹임 고리(feed back loop·원인과 결과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강화되는 것)’가 생길 수 있죠. 그래서 잘못된 답이 증폭되면 쉽게 해결하기가 어렵습니다.

 

한국에서는 공기업 등 채용에서 AI 면접이 쓰입니다. 이를 두고 “혹시 본인의 자녀가 어린 시절 잠깐 강남이 아닌 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바람에 AI 인터뷰에서 자동적으로 떨어진 건 아닐까요?”라고 블로그에 썼는데요.

 

보통 AI라고 하면 가벼운 예제를 생각해요. 프로야구에 대해 질문하면 답변해준다든지, 넷플릭스에서 다음에 볼 영화를 추천해준다든지. 실제로는 필수적인 절차에 AI가 쓰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채용 같은 경우 한번 잘못되면 사람들이 몇 년 고생한 게 날아갈 수도 있죠. 극단적으로는 드론처럼 전쟁에서 쓰이는 무기가 한번 실수하면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고요. 페이스북이나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이 정치적 견해를 양극화하는 게 아닌지 전 세계적으로 논쟁이 되고 있습니다. 간단해 보이는 알고리즘이 한번 쓰이고, 뭔가 잘못된 걸 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2019년 12월12일 서울 세종대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공공연구기관 기술이전 성과확산대전 2019’에서 구직자가 AI 면접을 체험하고 있다.ⓒ연합뉴스
 

예를 들면 채용 면접에 AI를 쓸 경우 사회적 합의나 안전장치가 많이 필요한가요?

 

그렇습니다. 사실 AI를 썼을 때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입니다. 이 시스템을 구현했을 때 얼마나 투명성이 있는지도 중요하고요. 이 두 가지에 대해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하고, 규제나 감리 등 많은 체계가 필요합니다. 기록을 어떤 방식으로 남겨놓을 것이며, 결정을 누가 언제 내릴 건지도 생각해야 하죠. 그냥 ‘여기 AI 알고리즘이 있네, 한번 써보자’ 하기엔 문제가 많습니다.

 

미국에서도 알고리즘이 얼굴 인식을 잘못해서 무고한 흑인이 체포된 일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문제가 그런 알고리즘들이 쓰이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쓰이고 있었던 점입니다. 대체 어떤 회사가 공급을 하는지도 한참 동안 몰랐고요. 회사를 찾아봤는데 어디 존재하는지도, 어떤 데이터를 썼는지도 알 수 없었죠. 그런 걸 법원이며 경찰이며 다 쓰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말 그대로 흑인이면 범인일 확률이 더 높게 나오는 식이었고요. 심지어 이런 걸 쓰지 못하게 누구한테 얘기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이게 어떤 소프트웨어이고 어디서 받을 수 있는지도 모르고, 결과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못하고, 규제도 감사도 할 수 없었어요. 이러면 사실 알고리즘을 쓸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인공지능의 편향과 사회적 영향에 관심이 많은데,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저도 별로 크게 생각을 안 했는데, 팀닛 게브루(구글 AI 윤리조직을 이끌다 지난해 말 대규모 언어모델을 비판한 논문을 계기로 해고되었다고 알려진 에티오피아계 미국인 여성 연구자)가 2015년인가 뉴립스 학회(인공지능 분야의 대표적 글로벌 학회)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어요. 그러면서 ‘여기에 2000~3000명이 왔는데 흑인 연구자가 3~4명밖에 없고, 여자 연구자도 거의 없다’고 썼더라고요. 저도 거기 있었거든요. 보는 순간에 ‘어 그러네, 이거 좀 이상하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카이스트 전산과 다닐 때 같은 학년에 전산과 선택한 친구들이 60여 명이었는데, 여학생이 한 3명 있었던 것 같아요. 핀란드에서 머신러닝 석사 할 때도 여학생들은 한 10~15%밖에 안 되었고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박사 후 연구원을 할 때도 40~50명 중에 여자는 4~5명 정도였거든요. 뭔가 이상하죠. 그럴 이유는 딱히 없는 거 같은데. 좀 이상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진화가 뭐 어떻게 되어서 여자는 컴퓨터 과학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데, 아니 컴퓨터가 생긴 지 60년밖에 안 되었는데 진화란 게 무슨 상관인지(웃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런 게 어딨어요.

 

인공지능 연구자나 개발자의 다양성이 왜 중요한가요?

 

어떤 분야든 다양성은 중요합니다. 특히 직접적으로 사회에 배포되어 쓰일 수 있는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든다면요. 어떤 알고리즘을 배포했을 때 이게 어떤 식으로 쓰일지, 어떤 그룹에겐 결과가 긍정적이고 다른 그룹에겐 부정적일지 많이 상상해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모두가 다 똑같은 학교를 나오고 똑같은 배경을 가졌다면 그런 상상을 하기가 힘들죠. 게다가 인공지능은 하나의 상품에 그치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쓰일 수 있는 알고리즘이다 보니 다양성이 정말 중요한데, 아직은 안타깝게도 많이 부족합니다. 제 연구실만 봐도 여자 학생은 거의 없고, 흑인 학생도 한 명도 없어요. 남미 출신이 한 명 있었는데 졸업했고요. 조금씩 바꿔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겠죠.

 

최근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상금을 기부하는 이유를 언급하며 “실제 능력 차이보다 아웃풋(결과) 차이가 작은 게 좋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단 이 사람의 능력이 저 사람보다 더 좋다, 안 좋다 얘기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보통, 능력이라는 게 사회적인 프록시(대용물)를 써서 재는 거잖아요. 대학 입학시험을 잘 봤는지, 어느 회사에 입사했는지, 연봉이 얼만지, 사는 데가 어딘지 애들이 어느 학교를 다니는지…. 이런 걸 써서 ‘저 사람은 능력이 좋은가 보다’ 하고 사람들이 생각하죠. 그러다 보면 실제로 능력이 있는데도 사회적인 영향 때문에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고, 능력이 없는데도 운이 좋아서, 혹은 태어나길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많죠. 그렇다면 사회의 역할은, 이런 노이즈(왜곡)를 최대한 막아주는 거라고 생각해요. 분명히 개개인의 능력 차이라는 게 그렇게 어마어마하지 않을 거거든요, 아무리 봐도.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웃음). 심지어는 능력을 완벽하게 측정할 수 있다고 해보죠. 능력 있는 사람은 더 잘살고 능력 없는 사람은 못살면 그게 그냥 정글이죠. 우리가 사회를 만든 목적은 태어날 때의 능력을 떠나서 모두가 더 잘될 수 있게 하는 것 아닌가요? 저희 통계에서 쓰는 말로 하면, 사회 전체적으로 배리언스(variance·분산, 어떤 대상의 흩어진 정도)는 줄이고 애버리지(average·평균)는 높여야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구글 AI 윤리조직을 이끌다 대규모 언어모델을 비판한 논문을 계기로 해고된 것으로 알려진 팀닛 게브루.ⓒThe New York Times
 

본인도 운이 좋았다고 표현했던데.

 

실제로 운이 좋았습니다. 해외에서 몇 년 살다 보니까 다양한 곳에서 온 사람들을 만나는데, 한국에서 태어난 것도 운이 아주 좋았고요. 서울에서 계속 커온 것도 운이 좋았어요. 학교도 좋은 학교를 다녔죠. 카이스트도 다니고, 고등학교는 일반고였지만 집에서 가깝고 선생님도 좋았습니다. 다 너무 운이 좋았던 것 같은데요(웃음).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대체한다는 공포가 뿌리 깊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지금껏 아무것도 못하다가 이제 조금 하기 시작했는데 뭐가 잘 되었는지 생각해보죠. 사진을 보여주면 대상이 뭔지 알려주긴 하지만 비디오는 잘 못해요. 음성인식은 요새 잘 되지만 좀 시끄러운 데선 잘 안 되고요. 기계번역도 예전보단 낫지만 전문적인 목적으로는 힘들죠. GPT-3의 질문과 답변은 중·고등학생 정도인데, 실제로 사람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아직 인공지능과는 차이가 크지 않나요? 짧은 기사야 GPT-3가 쓰겠지만 요새 〈월스트리트저널〉이 쓰는 페이스북 탐사보도는 절대 못 쓸 거거든요. 〈조선왕조실록〉을 기계번역으로 영어로 옮기는 것도, 파티장에서 잘 작동하는 바텐더 로봇을 만드는 것도 아직 어렵습니다. 일부 일자리가 대체되는 건 있겠지만 아직 그렇게 대규모로 대체되거나 하진 않을 거라 봅니다. 물론 5년 지났을 때 실제로 어떨지는 정확히 알기가 힘드네요.

 

인공지능이 불평등을 심화한다고 보나요?

 

아무 준비가 없는 상황에서 특정한 일자리가 대체된다면 그 대체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불평등한 상황에 처하게 되겠죠. 불평등이라는 건 인공지능이라서가 아니라 새로운 기술이 모두에게 동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이상 언제든 불거질 수 있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저는 아직은 모두가 일자리 대체를 걱정할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정책 입안자들은 미리 준비를 해야죠. 나중에 10년 후가 되었든 20년 후가 되었든 갑자기 기계가 일자리를 다 대체한다고 했을 때 잃어버린 소득을 보장해줄 건지, 해준다면 어느 수준으로 할지, 그 안에서 차등을 둘 건지 아닌지 얘기를 많이 해봐야겠죠. 앤드루 양이 ‘유니버설 베이직 인컴(보편적 기본소득)’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대로 보지 못해서요. 최근 저서 〈포워드〉에서 그 얘길 많이 했다는데 시간 내서 읽어봐야겠네요.

 

인문학에 대한 정부 지원을 강조한 것도 인상적이었어요.

 

과학은 우주에 있는 것들을 다뤄요. 컴퓨터과학이나 인공지능이 마치 뭔가 새로운 걸 만드는 것 같아도, 계산이라는 게 다 어쨌든 우주 안에 있는 걸 어떻게 붙여서 쓰느냐의 문제니까요. 그런데 인문학은 그야말로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한다고 할까요. 인간이 지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의 끝은 어디인지 계속 밀어붙여보는 일에 가깝죠. 그러다 보면 말도 안 되는 게 나올 수도 있는데, 이런 건 당장의 비즈니스엔 도움이 되기 어렵죠. 인공지능 연구야 기업들이 필요하다면 자기들 돈을 많이 쓰겠지만요. 그런 면에서 인문학을 사회적으로 좀 더 서포트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까 얘기랑 비슷한데, 학문 분야 간 차이도 줄여주는 게 결국은 사회의 역할 아닌가 싶네요.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20. 3. 8. 17:39

 

 

 

                                                                     조규익(숭실대 교수)

 

 

 

 

하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한 서정적 반작용으로서의 넋두리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의 명언[<<존재와 무>>]은 인간이 ‘던져진 존재’임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애당초 아무런 규제나 구속 없이 태어난 인간은 원초적으로 ‘자유인’일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 태어난 인간이기에 사회의 규범이나 도덕∙종교 등에 기댈 수밖에 없지만, 그런 범주를 벗어나는 경우 한갓 ‘고민에 싸인 자유인’일 뿐이다. 실존적 상황에서 인간은 자신의 판단으로 모든 것을 선택해야 하며, 종교나 관습은 실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넘기 어려운 죽음과 이별을 초극하기 위해 의지하는 작은 ‘언덕’에 불과하다. 아무리 기대는 종교가 있다 해도 실존적 존재 스스로 마지막에 넘어야 할 최악의 장애물은 죽음 혹은 이별이다.

 

키에르케고르(Kierkegaard, 1813~1855)는 그의 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모든 사람은 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있는데, 그 병은 바로 절망”이라고 했다. ‘절망의 종말은 죽음’이라는 것이 이 말의 뜻이겠지만, 사실은 ‘타인의 죽음을 보며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고, 그 절망의 나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그러니 죽음과 절망, 그 중 어떤 것이 선행하는 지는 쉽게 말하지 못한다. ‘남의 죽음’을 보면서 그 죽음이 조만간 자신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심한 아이러니다. 라틴어 경구(警句)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그대는)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기억하라!]’야말로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우주적 법칙을 흔히 망각하는 실존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던지는 냉혹한 명령이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우리 선조들도 죽음이나 이별의 두려움과 절대성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죽어서 떠난 자들을 지극 정성으로 받들어 온 것도 죽음의 두려움과 허무를 초극하려는 산 자들의 몸부림이었다. 부부 혹은 사랑하는 남녀를 떼어놓는 우주적 법칙은 죽음이었다. 그 가운데 여성은 남성보다 죽음에 대하여 더 민감했다. 남편은 가족을 부양하고, 가족은 아버지 혹은 남편에 의지해왔다. 자식들이 장성해 있다면, 비록 남편이 떠나도 아내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큰 걱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 없는 젊은 부부, 자식이 어린 젊은 부부, 자식 없는 노부부에게 닥친 ‘남편의 죽음’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충격 아니었겠는가. 굳이 부부가 아니라도, 지극히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찾아오는 죽음 또한 또 다른 의미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수천 년을 이어오며 ‘사랑과 죽음’을 노래했고, 그것들 가운데 후대의 문서에 요행히 살아남은 것들 덕에 오늘날 우리들은 그 맥을 짚어낼 수 있게 되었다. 노래와 노래 사이가 수백 년을 격해 있으면서도 우리 의식의 원형을 잘 유지해 왔고, 면면히 이어진 정서의 끈을 놓치지 않은 채 우리 민족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는 점은 신기한 일이다. 그 가운데 사랑하는 임이 죽어 떠나는 현장에서 터뜨리는 넋두리는 우리 민족 여인들의 집단심성에 각인되어 있다고 할 만큼 절절하다.

 

“무당이 죽은 사람의 넋을 대신하여 하는 말[북한사전: 무당이 굿할 때 중얼대듯 ‘도무지 이치에 맞지 않고 동이 닿지 않게 늘어 놓는 말’]/불평이나 불만을 늘어놓으며 하소연하는 말[북한사전: 원통하거나 억울한 일을 길게 늘어놓아 하소연하거나 마음속에 품었던 것을 불평스럽게 늘어놓는 말]” 등 우리나라와 북한의 넋두리에 대한 정의가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여인의 넋두리는 의식화(儀式化)된 무당의 넋두리보다 앞선다. 어원적으로 넋두리는 ‘넋[魂]’과 ‘두리’의 합성어다. ‘두리’는 동사 ‘두루다[還]’ 즉 ‘돌이키다’의 명사형이다. 따라서 ‘넋두리’는 ‘(떠나가는) 넋을 돌이킴’이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일원인 필자는 어려서부터 전통적 상례의 현장을 꽤 많이 접했다. ‘누구 집에 초상났다!’는 외침이 마을을 울리면, 그 집에 달려가 사자(死者)의 모습을 본 다음 사자를 붙잡고 넋두리하며 통곡하는 부인과 딸, 며느리 등 여성들의 모습을 보곤 했다. 죽음보다 넋두리에 싣던 여인들의 사연과, 애조(哀調)로 점철된 목청이 더 슬펐다. 그렇던 상례가 완벽하게 바뀐 것은 현재의 ‘장례 산업’이 우리 사회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병원 영안실에 상청이 마련되면서 우리나라 여성들은 ‘넋두리의 슬프고 아름다운 전통’을 상실하게 되었고, 새로운 세대에게 <공무도하가>를 비롯한 우리 고전의 ‘넋두리 문학’ 혹은 ‘만가(輓歌)’를 설명할 근거마저 잃어버렸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 부인은 그의 부재가 불러올 곤경들을 떠올리며 애조의 극치를 달리는 목청으로 통곡했다. 시신을 어루만지거나 자신의 가슴을 치며 큰 소리로 곡을 함으로써 육신을 빠져 나가 하늘로 올라가는 혼이 되돌아오는 기적을 간절히 소망한 것이다. 가능하면 큰 소리로, 아름다운 율조로 넋두리를 내뱉은 것은 시신이 굳기 전에 혼이 되돌아와 남편이 소생할 수도 있으리라는 가느다란 믿음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아내는 떠나가는 남편을 한사코 붙잡으려 했던 것일까. 그렇게 하는 게 예의로나 체면으로나 합당하다고 여겼던 것일까. 사실 긴 논의가 필요한 문제이긴 하나, 우리나라에서 여성들이 정치∙경제∙문화적으로 독자적 자아를 정립하게 된 것은 20세기 말부터였다. 사실 유교 이데올로기가 삶의 원리로 스며든 중세부터 예의나 체면이 중시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성의 자립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육체적∙정신적으로 유일하게 믿고 사랑을 나누던 사람이 남편이었고, 재화를 벌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존재 또한 그였다. 그래서 현실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전통사회의 여성에게 남편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남편의 주검 앞에서 내뱉는 아내의 넋두리가 남편의 소생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자를 위한 무의(巫儀)에서 무당이 중얼거리는 듯한 투로 엮어나가는 넋두리는 사자 주변 여성의 그것과 다른 차원의 작위적 연기(演技)일 따름이었다.

 

여성들의 이런 넋두리로부터 한 단계 더 나아간 곳에 ‘상여를 메고 나가며 부르는’ 만가(輓歌)가 있었다. 여성의 넋두리와 만가가 발화(發話)나 가창(歌唱)의 주체∙상황∙격식 등에서 다르긴 하나, 그것들 모두는 분명한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공무도하가>∙<가시리>∙<원부가>’ 등 우리 옛 노래들을 넋두리와 만가의 범주 안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둘. <공무도하가>와 <가시리>의 거리

 

 

 

여보 그 물 건너지 마시랬지요

당신은 기어이 건너시다가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당신을 어이하면 좋아요?

<공무도하가>

 

가시렵니까 가시렵니까?

버리고 가시렵니까?

날러는 어찌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렵니까?

붙잡아 두고 싶지마는

서운하면 아니 올까 두려워

서러운 임 보내 드리오니

가시는 것처럼 돌아오소서

<가시리>

 

 

하북성(河北省) 조선현(朝鮮縣)의 조선진(朝鮮津)에서 호리병을 낀 백수광부(白首狂夫)가 물을 건너려다 빠져 죽자, 말리던 그의 처가 공후를 타며 노래[<공무도하가>]를 부른 뒤 따라 죽었다. 이 광경을 진졸(津卒) 곽리자고가 목격했고, 그 이야기를 들은 곽리자고의 처 여옥이 이 노래를 다시 불렀으며, 이웃집 여인 여용에게 전해주어 널리 퍼지게 된 노래가 바로 <공무도하가>다. 사건은 매우 단순하고 소박하다. 학자들은 ‘백수광부(白首狂夫)가 호리병을 들었다’는 말에서 ‘미치광이 늙은이가 술병을 들었다’거나 백수광부를 주신(酒神)으로까지 과장 해석해 왔지만, 술병 아닌 강을 건너기 위한 도구를 들고 강에 뛰어들었다가 빠져 죽었다고 보는 일설도 있는 만큼 ‘술’에 너무 구애될 필요는 없다.

 

추정컨대, 애당초 이 노래는 중국 측 문인(文人)이나 악관(樂官)이 수집한 것을 진(晉)나라 최표(崔豹)가 상화가(相和歌)들을 모아놓은 <<고금주(古今注)>>에 실었고, 그 후 중국의 시인들에게 널리 수용되어 수많은 악부시로 재탄생된 슬프고 아름다운 노래다. 중국 측의 문헌에 실려 있고, 중국의 역대 시인들이 수용하여 새로운 작품으로 만들어냈으며, 중국의 금조(琴操) 구인(九引) 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어 있다 해도, 당시 고조선 강역 안의 우리 민족에 의해 만들어지고 전파된 노래임은 분명하다. 그 속에 다른 나라나 민족의 여성들에게서 찾을 수 없는 ‘넋두리 구조’가 핵심으로 들어 있음은 당연하다. ‘물 건너다 빠져 죽은’ 남편을 바라보고 늘어놓은 이 노래는 원래 넋두리이었을 뿐 노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넋두리는 하도 처절하고 아름다워 사람들의 입과 귀를 거치는 과정에서 노래로 바뀌었고, 윤색된 배경설화가 붙으면서 중국의 문인들과 예인들에게 광범하게 수용되었을 것이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그렇게 물에 빠져 떠나시면, (홀로 남은)나는 어떻게 살아요?’라는 여인의 절절한 감정이 노래의 핵심이다. 물에 빠져 죽어간 남편을 위해 한바탕 넋두리로 애도한 뒤 절망을 이기지 못한 그 여성도 물에 뛰어들어 남편을 따라간 것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서러운 넋두리로 남편에 대한 애도와 함께 자신에 대한 애도[즉 자만(自輓)]의 ‘의식(儀式)아닌 의식’까지 수행한 뒤 목숨을 끊은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가시리>를 이미 전고(前稿)[<<정형시학>> 24]에서 「‘죽어 이별’의 노래 <가시리>」란 제목으로 언급한 바 있다. <공무도하가>가 ‘넋두리’라면, <가시리>는 ‘만가(輓歌)’다. 만가는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노래나 가사이고, 상여꾼들의 상엿소리를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만가는 ‘의례화(儀禮化)된 넋두리’다. 위에 인용한 노랫말들에서 보듯이 <공무도하가> 전체는 <가시리>의 1~4구와 내용적∙형태적으로 부합하는 넋두리다. 말하자면 <가시리>도 전반은 넋두리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반에 들어가면서 달라진다. 제5구의 ‘붙잡아 두고 싶다’는 것은 생존에 대한 집착이다. 죽어 떠나는 임을 현실에 붙잡아 놓고 싶다는 화자의 집착과 욕망을 드러낸 부분이다. 그러나 ‘한 번 죽어 떠난 임이 살아날 리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화자 자신은 그 절망감으로부터 자아를 지켜야 했고, 그 구체적 자기방어(自己防禦)의 수단으로 제6구의 언술[서운하면 아니 올지 모른다]을 내놓는다. 화자로서 ‘죽어 떠나는’ 임이 자신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떠나길 바랄 리 없음에도 그렇게 표현한 것은 다시 돌아올 길 없는 길을 떠나는 임에게 ‘돌아오지 못할 명분’ 정도는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승에 살아남은 화자는 죽어 떠난 임에게 마음의 짐을 가질 이유가 없어질 것 아닌가. 노래의 화자는 관형어구 ‘죽어 이별한’을 ‘나를 싫어해서 떠난’으로 바꿔치기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제7구의 ‘서러운’은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화자가 주체일 경우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죽음의 절대성 때문에 서러운 것이고, 떠나는 임이 주체일 경우 이승의 삶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단절 때문에 서러운 것이다. 그런 모호성은 제8구[‘가시는 것처럼 돌아오라’]에서 해결되고 양자의 거리는 사라진다. 그래서 제8구는 넋두리[환혼(還魂)]일 수도, 초혼(招魂)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승의 미련을 훌훌 털고 떠나셨듯이 (나를 힘들게 하지 말고) 다시 돌아오라’는 당부. 전통 시대 초혼 의식(儀式)의 모티프가 바로 그것 아닌가.

 

<가시리>는 애당초 민간의 누군가가 애절하게 부른 ‘사별가’였다. 그 절제된 슬픔의 세련된 표현과 그로 인한 감동은 그 노래가 궁중으로 도입된 이유였다. 그런 노래가 궁중음악 전문가들에 의해 개작된 다음 임금을 위한 무대에서 속악으로 가창되었다는 것은 처음의 노랫말과 지금의 노랫말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넋두리 혹은 만가의 표지(標識)가 노출되지 않도록 개작 과정에서 엄청나게 신경 썼을 것이다. <가시리>의 주제를 단순한 ‘이별의 정한’으로 알고 있는 후대 수용자들의 착시현상도 여기서 생겨난 것이다. ‘이별의 정한’으로 못 박은 양주동 선생의 주장[「가시리 평설」]에서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오늘날의 ‘<가시리> 담론’도 바로 이 착시현상을 바로잡지 못한 데서 빚어진 결과이다.

 

 많은 사람들은 ‘산 자와의 이별’을 <가시리>의 ‘당연한 내용’으로 여긴다. 그러나 시적 진술의 심층이 표층과 같다고 보는 것은 매우 순진한 관점이다. 사실 이 노래의 표층 어디에도 ‘산 자와의 이별’이란 표지나 단서는 없다. ‘날 버리고 가지 말라’, ‘붙잡고 싶지만 서운하게 여겨 돌아오지 않을까봐 그냥 보내 드린다’, ‘떠나는 것처럼 돌아오라’ 등의 언급들로 보아 <가시리>가 ‘산 자와의 이별’을 노래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노래에 대한 모독이다. 시나 노랫말을 산문으로, 그것도 보고서나 계약서 같은 실용문 수준으로 받아들일 경우라면, <가시리>의 담론을 ‘산 자와의 이별’이라고 부를 만하다. 물론 ‘산 자와의 원치 않는 이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죽음과 맞먹는 괴로움일 수는 있다. 그러나 좀 더 자연스러운 상황이라면, <가시리>를 죽어 떠나는 연인에게 재회의 언약을 절절하게 강조하는 언술로 보는 것이 맞는 관점이며, 그럴 경우 심층에 잠재된 이 노래의 정체는 죽은 자를 애도하는 만가이면서 살아남은 화자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자만가(自輓歌)’일 수 있는 것이다.

 

<가시리>는 <공무도하가>의 넋두리에서 한 단계 더 의식화(儀式化)로 나아간 노래라 할 수 있다. 당시 고려 궁중의 무대에서 속악으로 부르며 임금에게 송도(頌禱)하던 노래이기 때문이다. 사실 무대 위의 여악(女樂)들은 임금을 위해 최고의 사랑을 바쳐야 했다. 그 때의 분위기가 극적인 사랑의 표현을 요구했다면, ‘죽음으로 패러프레이즈된 사랑’이나, 넋두리의 외피를 쓴 사랑의 표현 등 역설적 담론들 모두 가능했다. 그래서 <가시리>는 단순히 ‘살아 이별’의 노래가 아니라, ‘죽어 이별’의 노래, 더 구체적으로 ‘죽음을 원망하는 넋두리를 바탕으로 죽음을 극복해낸’ 사랑 노래일 수 있다.

 

넋두리를 통해 남편의 죽음과 자신의 죽음을 동시에 애도하고, 그 넋두리가 노래로 변신하여 남아있는 <공무도하가>. ‘죽어 이별’의 상황이나 감정을 통해 ‘죽음을 극복한’ 노래로 승화된 <가시리>. 이 둘은 각각 넋두리와 만가로서 얼마간의 거리를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하나로 뭉뚱그려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것도 사실이다.

 

 

셋. 만가풍(輓歌風) 서정노래로서의 <원부가(怨婦歌)>

 

 

16세기 장∙단가를 통틀어 우리 노랫말의 작자들을 대표하는 정철(1536~1593)이 남편 잃은 아낙의 입을 빌어 만가풍의 서정노래를 지었다.

 

 

남편 죽고 우는 눈물 두 젖에 내려 흘러

젖 맛이 짜다하고 자식은 보채거든

저놈아 어떤 마음으로 계집 되라 하느냐

<<<이선본 송강가사>> No.18>

 

 

이 노래의 화자는 남편을 사별한 아내다. 아내 아닌 제3자가 관찰자 겸 화자로 등장하여 정황을 전달하는 노래라 할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 먼저 떠난 남편에게 던지는 젊은 아내의 직설적이고 진솔한 어조를 보라. 젊은 아내와 어린 자식을 둔 채 세상을 뜬 남편을 원망하는 것이 이 노래의 표층이다. ‘당신은 이 나약한 마누라와 어린 자식을 버려둔 채 왜 그리 황망하게 떠나셨나요? 이렇게 일찍 가실 거면 왜 나를 계집으로 삼으셨나요? 당신 없는 세상에서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나요?’가 이 노래의 심층이다.

 

표층만으로 보면 거친 항의(抗議)성 투정이다. 그는 혼례식에서 ‘백년해로’를 약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아놓은 지 한 두 해만에 세상을 떴으니, 아낙으로서야 어찌 투정뿐이었겠는가.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 사라지고, 삶의 의욕이나 방도는 물론 든든한 버팀목마저 사라진 상태에서 칭얼대는 아이만 묵직한 짐으로 남아 있는 게 그녀의 절망적 현실이다. 아낙에겐 앞으로 살아갈 창창한 날들이 걱정일 것이다. 그러니 현실적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궁리하기 전에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왜 나를 계집으로 데려왔느냐’는 원망조의 넋두리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죽은 남편에 대한 애도’를 극적으로 고양시키기 위해 끌어온 소도구로서의 비유가 절묘하다. ‘남편의 죽음에 솟아나는 눈물이 흘러내려 두 젖을 적시니 아이는 젖 맛이 짜다고 보챈다’는 내용의 노랫말이 그것이다. 지극한 슬픔을 이렇게 절묘한 방식으로 에둘러 드러낸 것이다. ‘아내와 아이를 이토록 슬프게 만들어 놓고 당신은 무책임하게 떠날 수 있느냐’는 넋두리를 늘어놓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넋두리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절묘한 소재를 동원한 시문학이나, 그 속에는 죽은 남편을 향한 애도와 사랑의 넋두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앞 시대의 넋두리와 만가가 이 노래에서 비로소 비유를 통한 시문학적 세련미를 갖추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넋두리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공무도하가>와, 넋두리 부분이 포함된 만가의 모습을 보여준 <가시리>에 이어 <원부가>가 나타남으로써 만가풍 서정 노래는 일반화될 기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넷. 넋두리 혹은 만가, 혼효(混淆)된 에로스와 타나토스

 

 

<공무도하가>∙<가시리>∙<원부가> 모두 죽음의 절대성을 노래하지만, 그 죽음은 단순한 종말로 그려지지 않는다. 어딘가로 떠나는 것일 뿐 ‘존재의 사라짐’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르트르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 죽음도 끝난다”[<<존재와 무>>] 라고 말했지만, 그 때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사유’일 뿐이니, 산 자들의 ‘죽음에 대한 사유’가 남아 있는 한 ‘죽음=끝’이라 말할 수는 없다. 백수광부의 처는 왜 죽은 남편을 처절하게 불렀으며, ‘홀로 남은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할 여유도 없이 자신도 그 길을 따랐을까. <가시리>의 화자는 ‘죽어 떠난’ 임에게 ‘살아 떠난 자’가 그러하듯 돌아오라고 절규했을까. <가시리> 화자의 절규는 왜 죽음 이상의 처절함을 띠고 있을까. 어린 자식과 함께 세상에 남겨진 원부는 남편이 왜 자신에게 사랑을 심어주고 떠났느냐고 원망했을까. 세상에 홀로 남겨진 젊은 아낙의 고립무원은 왜 죽음 이상으로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죽음을 명시적으로 언급했든 암시에 그쳤든, 이 노래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죽음이다. 그리고 그 죽음이 당사자들에겐 ‘현실로서의 사라짐’이었지만, 화자들에겐 ‘죽음에 대한 인식과 사유’일 뿐이었다. 세 노래 모두 화자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죽음을 맞이한 존재는 ‘사랑하는 남편[혹은 임]들’이다. 그리고 그 죽음의 대척 지점에 사랑이 있다. 여성화자들은 왜 하나같이 남편이나 임의 죽음 앞에 절망하거나 따라 죽는가. 단순히 현실적인 삶 때문에? 상대에 대한 예의로? 아닐 것이다.

 

사실 그 근저에는 사랑의 소멸에 대한 극도의 불안감이 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곧 ’죽음의 욕동과 대립하는 삶의 욕동의 총체/삶의 욕동과 대립하는 죽음의 욕동의 총체‘[장 라플라슈∙장 베르트랑 퐁탈리스의 <<정신분석사전>>] 등이 그것들이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서로 대척의 위치에 있지만, 가장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기도 하고, 아예 서로 섞여 구분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백수광부의 처는 전형적인 넋두리를 쏟아놓은 뒤 남편을 따라 강물에 몸을 던졌다. 유교 이데올로기가 강조하는 순절(殉節)의 의리와는 거리가 멀다. 백수광부의 처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은 남편과의 사이에 생성된 원초적 에로스가 자기 파괴적 타나토스를 생성시켰거나 불러온 결과일 뿐이다. 사실 현실적으로 강을 건널 필요가 있었건 단순히 죽기 위해 강에 뛰어 들었건 백수광부의 죽음은 처에게는 헤어 나오기 어려운 ‘우주의 붕괴’였다. 에로스적 측면에서 하늘의 사라짐을 목격하는 순간, 사라진 하늘을 찾기 위해 실존적 존재로서의 자기를 파괴해야 한다는 절박감이 엄습했는데, 그것은 자기를 놓아둔 채 죽음의 관문을 통과한 남편의 존재를 파괴하는 일이기도 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혼돈상태는 감성과 이성이 미분화된 상황의 또 다른 양상이기 때문이다.

 

<가시리>의 화자는 백수광부의 처와 달리 매우 논리적이어서 상대의 내면을 분석하고 그 결과에 자신의 욕망을 합치시키려는 열망이 매우 강하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미분화 상태에서 미처 분석적 사고를 발동시킬 수 없었던 백수광부 처의 경우와 달리, <가시리>의 화자는 상대방의 내면을 분석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합리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가시는 듯 돌아오라’는 말이 비록 의사 진술[擬似陳述, pseudo statement]이긴 하지만, 이승에 설정한 자신의 좌표를 전제로 내뱉은 말임은 분명하다. 바로 여기에서 그대를 기다릴 것이니, ‘바삐 떠나간 것처럼 바삐 돌아오시라’는 간절한 소망이다. 만약 그 위치에 백수광부의 처가 놓였다면,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숨을 끊었을 것이다.

<가시리>의 화자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앞에서 어쩌면 그렇게 차분할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의례(儀禮) 혹은 의식(儀式)의 힘이다. 넋두리가 카오스(chaos)의 발화(發話)라면 만가는 코스모스(cosmos)의 표현이다.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혼효는 종잡을 수 없지만 무엇이든 만들어지고 현시(顯示)될 수 있는 혼돈이다. 이에 반해 다양한 관계성 안에 있는 질서를 불러 오고 모든 존재로 하여금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그 질서에 의존하도록 하는 것이 의례이다.

 

죽은 남편을 위한 사령굿을 설명하는 어떤 학자의 견해를 인용하며 캐서린 벨은 “배우자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세상에서 어떻게 홀로 살아갈지를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한국의 한 과부는 굿을 하게 되는데, 그 굿은 죽은 후에도 남편과의 관계가 계속된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고, 그녀의 상실감을 예전부터 지속되어온 가치에 종속시켜 완화해주며, 그녀의 한을 풀어 주어 그녀 스스로 자신의 삶을 제어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의례의 이해>>]고 했다. 남편의 죽음에 즈음하여 그것을 둘러싼 모든 것들은 카오스이나, 그를 위한 굿판은 그의 처로 하여금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넘어가게 하는 징검다리이며, 그 다리를 건넌 뒤에는 코스모스 세계의 평정을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사랑과 죽음 즉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서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 늘 서로 붙어 다니는 짝이다. 카오스의 상태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뒤섞이거나 서로 넘나든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으므로 그 사랑을 온전히 하기 위해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카오스의 상태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그의 행복을 위해 혹은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살아 가겠다’는 것은 코스모스의 상태이다. 백수광부 처의 카오스 상태를 <가시리> 화자의 코스모스 상태로 전환시킨 것이 바로 의례의 힘이다.

그러나 <원부가>의 화자는 카오스나 코스모스 중 어느 쪽인지 모호하다. 작자 정철은 남편을 보낸 어린 아낙의 가련한 처지에 감정이입(感情移入)된 자신을 이 노래의 화자로 내세웠을 것이다. 이 노래 화자의 발화가 단순한 넋두리는 아니고, 그렇다고 의례화된 넋두리도 아니다. 매우 특이한 개인의 정서적 장치를 통해 비극성의 고양에 성공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픈 눈물. 그녀는 그 눈물 섞인 젖이 짜다고 보채는 아이를 내세워 그녀가 갇힌 비극성을 절절하게 그려냈고, 결국 남편에 대한 원망으로 끝을 맺는다. 물론 이 때 그 원망은 남편에 대한 사랑의 반어적 수사(修辭)임은 물론이다.

 

남아 있는 기록으로만 따지면, 우리 고전시가의 한 축은 ‘단순 넋두리’로 시작하여 ‘의례화된 넋두리’를 거쳐 ‘서정적으로 승화된 넋두리’로 확장∙정착된 만가의 갈래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넋두리는 에로스와 타나투스의 양 끝이 혼돈으로 합쳐졌다가 나눠지는 과정을 반복하며, 사랑과 죽음의 원초적 문제를 씨줄과 날줄로 삼아 민족의 전통정서를 이끌어 나온 것이다.♣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19. 12. 23. 15:49

처용의 얼굴[<<악학궤범>>]

 

 

                                                                                                                              조규익

 

 

하나. 간음(姦淫) 혹은 관음(觀淫)

 

결혼한 남녀가 배우자 이외의 다른 사람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간음 혹은 불륜이라 하며, 요즘은 정서적인 관계로까지 폭을 넓히기도 한다. 육체적 간음과 함께 음욕을 품는 것조차 간음이라 한 성서[마태복음 5장 27~29절]의 규정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라 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 계모 빌하와 간음한 르우벤, 며느리 다말과 간음한 유다, 요셉을 유혹한 보디발의 아내 등 많은 사례들이 예로부터 있었으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실제 기록되지 아니한 옛날의 사례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일부다처 혹은 일처다부의 집단혼을 거쳐 중세 이후 일부일처가 정착되면서 간음은 법과 제도의 징치(懲治)를 받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 민법에서 부정행위로 간주하는 간음은 ‘배우자가 살아있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알리지 않고 배우자의 의사에 반하여 배우자 이외의 자와 간통 등의 성적 행위나 친밀관계를 맺는 일’을 말하며, 얼마 전까지 형사상의 처벌을 받아왔으나, 현재는 민사상 손해배상의 책임만 지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간음이 있다고 할 만큼 간음은 끊임없이 저질러져 왔고, 법에 의해 처벌되기도 하지만, 유야무야 되는 경우도 흔했다. 불문(不文)의 도덕률이 삼엄하던 전통시대에도 간음이 자행되었고, 그런 사회의 양반 사대부들은 물론 평민들의 세계에서도 간음 사건은 늘 있었다.

 

우리 고전시가사에서 노래에 반영된 간음의 역사는 매우 길다. 대부분 민요들이어서 기록으로 남은 노래들이 거의 없을 뿐 실제로는 매우 많았으리라 본다. 간음의 당사자들이나 목격자들이 부른 노래들은 조선조 후기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만횡청류(蔓橫淸類)’를 제외하곤 거의 없다. 신라시대의 <처용가>와 조선조 후기의 기록[<<진본 청구영언>>, No. 576]에 남아있는 <간부가(姦婦歌)>[*필자 명명]가 눈에 띄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것들은 ‘간음 고발의 노래들’이다. 두 노래들 가운데 <간부가>는 이론의 여지없이 ‘간음 고발의 노래’이다. 고발은 목격(目擊)을 전제로 하며, 목격은 의도치 않게 관음자(觀淫者)의 시선이나 행위를 내포한다. 사실 간음을 저지르는 자들이나 그 현장을 훔쳐보는 자들은 양심의 가책보다는 떨리는 희열을 맛보는 데 집중했을 것이다. 그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노래들 대부분이 불륜의 긴장된 환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용가>를 ‘간음 고발의 노래’로 말하기 위해서는 <처용가>에 대한 기존의 견해들을 넘어서는 통찰이 필요하다. <처용가>와 후대의 <간부가>를 연결하여 거론하는 이 자리에서 <처용가>를 좀 더 길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처용가>에 대한 기존 인식의 틀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천여 년의 시차를 두고 모습을 드러낸 <처용가>와 <간부가>. 그 같고 다른 점을 살펴보자.

 

 

둘. 처용과 <처용가> 제대로 읽기

 

‘처용은 동해용의 아들로서 헌강왕을 따라 서울로 돌아온 뒤 임금으로부터 벼슬을 받고 미모의 여인을 아내로 삼게 되었다. 어느 날 밤늦도록 밖에서 놀다가 귀가하여 침실로 들어가니 아내는 누군가와 동침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이 노래 부르고 춤추며 물러나오자 역신은 사람의 모습을 한 채 처용 앞에 무릎 꿇고 잘못을 빌며 용서를 구했다. 처용의 형상이 문에 붙어 있기만 해도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노라 맹세도 했다. 그로부터 백성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벽사진경하게 되었다’는 것이 <처용가>의 배경설화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처용설화와 <처용가>의 표층이다. 따라서 이 설화와 노래는 상징이나 은유의 수사학적 외피를 둘러쓴 당대의 실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헌강왕대 신라의 상황을 어떻게 보든, 역사적 상상에 많이 기댈 수밖에 없는 현재로서는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그 발상의 전환에 성공한 학자가 박일용[「역신의 상징적 의미와 <처용가>의 감동 기제」, <<고전문학연구>> 49, 한국고전문학회, 2016]이다. 처용은 자신과 처를 부부로 맺어준 헌강왕이 처를 범간하는 현장에서 <처용가>를 부르며 춤을 추고 물러났다는 것, 자기의 처를 ‘처의 다리’라는 제유적 대상으로 환원시켜 헌강왕과 처의 간통장면을 그려냄으로써 헌강왕으로 하여금 자기가 저지른 죄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되돌아보게 하는 자기 성찰적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 헌강왕의 패륜을 역신의 행위로 상징했다는 것 등이 그의 설명이다. 그의 논리 전부를 수용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역신=헌강왕’으로 규정한 그의 생각을 반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처용가>는 후대의 <간부가>와 함께 ‘간음 고발의 노래’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처용설화의 등장인물은 ‘처용-처용아내-헌강왕’이고, <처용가>의 등장인물은 ‘처용-처용아내-역신’이다. ‘헌강왕조’의 기록인 만큼 설화의 핵심인물은 헌강왕이고, 노래 속의 핵심인물은 목격자[혹은 관음자]로서의 처용이다. 노래와 설화가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지는 것은 향가 일반의 속성이고, <처용가>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해석의 키를 쥐고 있는 헌강왕은 어떤 인물인가. 49대 헌강왕(재위 875~886년)은 48대 경문왕(재위 861∼875)의 맏아들 정(晸)이고, 제50대 정강왕, 제51대 진성여왕은 그의 동생들이다. 정비 의명부인과의 사이에서 제53대 신덕왕(재위 912~917)의 비인 의성왕후 김씨와 제56대 경순왕(재위 927~935)의 모후 계아태후(桂娥太后) 김씨 등이 나왔고, 김씨 여인과의 사이에서 나온 서자 김요(金嶢)는 제52대 효공왕이다. 따라서 마지막 왕인 경순왕까지 형제들 혹은 친손・외손 등 헌강왕의 혈통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헌강왕은 여성편력이 화려한 임금이었다. 정비 의명왕후 외에 후비(後妃) 권씨, 서자 김요[뒷날의 효공왕]를 낳은 김씨 등이 기록에 등장한다. 특히 김씨는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미모에 반해 막사에서 관계한 여인이었다. 말하자면 정식 혼인 절차를 밟지 않은 일종의 야합(野合)이었다. 김씨와 야합으로 나온 김요는 나중에 헌강왕의 동생인 진성여왕에 의해 태자로 봉해지고, 결국 효공왕에 오르게 된다. 말하자면 ‘사냥 나갔다가 미모의 여인을 발견하여 현장에서 야합하여 아들을 낳고, 그가 왕위에 올랐다’는 헌강왕의 사연은 당시 왕족이나 귀족들의 남녀관계가 문란하다고 할 정도로 자유스러웠음을 암시한다. 특히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많은 이야기들에 신라 당대 성적 일탈의 사실들이 적지 않게 반영되어 있다.

 

두 가지 사례만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미실의 경우. 풍월주 미진부는 법흥대왕의 외손으로 궁중에서 후궁인 묘도부인과 사통하다가 눈치를 챈 태후의 허락으로 결혼하여 미실과 미생을 낳았고, 미실은 성장 후 왕족 및 귀족 출신 남성들의 복잡한 정분 관계를 통해 권력을 독점해가며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그녀는 진흥왕의 이복동생 세종의 여인이 되었다가 궁에서 축출된 후 5대 풍월주 사다함을 만났고, 세종과 재결합했다. 그 후 진흥왕의 후궁이 되었다가 진흥왕 사후 즉위한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이어 즉위한 진평왕과도 관계를 맺었다.

 

다음은 진지왕과 도화녀의 관계.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서 자신의 형인 동륜 태자가 일찍 죽자 즉위한 사람이 진지왕이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된지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럽고 황음하다’는 이유로 왕좌에서 축출되어 비참하게 죽었다. 진지왕의 비극을 가져온 결정적 사건은 도화녀와의 만남이다. 사량부 여자 도화녀가 아름답다는 말을 들은 왕이 어느 날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 관계를 맺으려 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는 그녀는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는 왕의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해 왕은 폐위되어 죽었고, 그녀의 남편도 3년 뒤에 죽었다. 남편 사망 열흘 뒤 밤중에 왕이 찾아와 여자를 만났다. 왕이 7일 동안 머물다 사라진 뒤 그녀에게 태기가 있어 한 남자아이를 낳았고,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불렀다. 말하자면 ‘왕의 귀신과 통정한 도화녀’가 비범한 아이 비형을 낳은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 이야기를 도화녀와 비형랑이 신앙의 대상으로 좌정한 이야기로 해석하기도 하고, 진지왕의 후손들과 진지왕을 폐위시킨 진평왕 후손들 간의 왕권을 둘러싼 갈등이 반영된 이야기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비형이 바로 김용춘으로서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과 결혼해 김춘추를 낳았으며, 김춘추는 무열왕이 된다. <<화랑세기>>의 기술에는 천명이 원래 용춘의 형 용수와 결혼했으나, 처음부터 용춘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했다. 결혼 뒤 용춘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용수가 양보함으로써 용춘은 결국 천명과 맺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적으로 자유로운 수준을 넘어 문란한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 <<화랑세기>>를 비롯한 몇몇 기록들에 나타나는 이 시대 왕족, 귀족, 화랑들의 실상이었다.

 

‘귀신이 된 진지왕’이 평소에 사모하던 도화녀를 찾아와 동침한 이야기를 바로 앞에서 성적으로 문란하던 당대 실상의 예로 들었다. 그렇다면 다시 처용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처용 처와 역신의 동침’은 ‘도화녀와 귀신(진지왕)의 동침’과 어떤 구조적 유사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까.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처용랑 망해사」의 기록은 ‘처용설화’와 ‘헌강왕 설화’ 등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자는 <처용가>의 출현과 처용이 문신(門神)으로 좌정하게 된 연유를 적은 부분이고, 후자는 헌강왕의 신이한 행적들을 적은 부분이다. ‘헌강왕은 귀신이거나 귀신과 통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헌강왕은 춤을 좋아했고, 잘 추었다’는 것이 이 설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핵심내용들이다.

 

그렇다면 <처용가>의 처용은 어떤가. 그는 아내와 동침하고 있는 역신을 보았고, 춤과 노래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여 그에게 전하고자 했다. 역신에 대한 메시지를 신들의 언어인 노래와 춤으로 표출하여 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역신은 누구였을까. 헌강왕의 은유적 존재가 바로 역신임은 자명하다. 처용의 아내는 헌강왕이 직접 내려준 미모의 여인이었다. 현재 헌강왕의 여인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 존재들만 셋이다. 정비 의명왕후, 후비 권씨, 사냥 나갔다가 미모에 반해 야합한 김 씨 등이 그들이다. 그러니 기록에 오르지 않은 여인들도 매우 많았을 것이다. 춤을 잘 추었으니 노래도 잘 불렀을 것이고, 지존(至尊)으로서 가무에도 능했으니, 흠모하는 여인들은 얼마나 많았으랴. 툭하면 나서던 지방 순시 행차는 ‘민정시찰’의 명분보다는 탐승(探勝)과 탐화(探花)의 욕망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탐락(耽樂)에 빠진 왕, 그로 인한 국정의 문란을 ‘태평시절’의 징표로 오인한 백성들의 무분별이 결국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비판과 교훈을 말미에 달아놓게 된 것이다.

 

추정하자면, 헌강왕으로서는 ‘동해 용왕’으로 은유된 지방 호족의 협조와 도움이 필요하여 그의 아들 하나를 데리고 돌아왔을 것이다.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벼슬도 내리고,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미희(美姬)들 가운데 하나를 처용에게 ‘하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처용이 가무와 유락에 탐닉하면서 그녀를 소외시키는 사이 왕은 ‘잊지 못할’ 그녀를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처용이 바로 그 간음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아내가 저지르는 불륜의 상대가 왕이기에 감히 어쩌지 못한 채, 체념의 상태에서 역신을 은유의 보조관념으로 끌어와 노래 부르고 춤추며 그 자리를 물러나온 것이다. 그런 난처한 상황을 마주한 헌강왕은 왕 이전에 한 남자로서 처용에게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 노래와 함께 노래에 맞추어 윤색된 배경적 사건이 사람들에게 퍼지다가 기록에까지 오르게 되었고, ‘역신 퇴치’ 모티프는 액면 그대로 민간에 수용, 결국 속신(俗信)으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 보다 합당한 추론이다. 그 노래를 현대어로 풀면 다음과 같다.

 

서울 밝은 달 아래

밤늦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었다만

빼앗는 걸 어찌 하리오.

 

처용설화는 <처용가>의 콘텍스트로서, 서사적 맥락이 정연하다. 주역(主役)은 처용이지만, 인과(因果)의 측면에서 조역으로 등장하는 헌강왕과 역신의 비중은 주역을 능가한다. ‘① 놀기 좋아하는 헌강왕의 개운포 나들이/② 헌강왕과 줄을 대려는 동해용의 작간/③ 동해용을 위해 절을 지으라는 헌강왕의 명령/④ 동해용과 헌강왕의 만남-헌강왕과 처용의 만남/⑤ 헌강왕이 처용의 뜻을 사로잡기 위해 벼슬을 내리고 미녀를 아내로 삼게 함/⑥ 아내의 미모를 흠모한 역신과 아내의 간음/⑦ 역신과 아내의 동침 현장을 발견한 처용이 노래 부르고 춤추며 물러남/⑧ 사람의 형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역신이 처용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며 처용의 형상 있는 곳엔 들어가지 않기로 맹세함/⑨ 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 벽사진경하고자 함’ 등이 그 줄거리이다.

 

이 개별 사건들은 <처용가>의 출현과 <처용가>가 지닌 ‘벽사진경의 주능(呪能)’을 설명하기 위해 비교적 치밀하게 짜여 있다. 물론 사건과 사건 사이, 혹은 사건 내부에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요인들이 잠재되어 있고, 그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 작업이 지금까지 이루어져 온 <처용가> 연구의 핵심 작업들인 것은 사실이다. 현실적이거나 합리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이 설화의 표층이다. 따라서 이 설화는 상징이나 은유의 수사학적 외피를 둘러쓴 실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헌강왕대 신라의 상황을 어떻게 보든, 역사적 상상에 많이 기댈 수밖에 없는 현재로서는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역신의 탈을 쓴 헌강왕과 처용 처의 동침’ 사건은 ‘귀신의 탈을 쓴 진지왕과 도화녀의 동침’ 사건과 구조적으로 일치한다. 아무리 남편의 입장이라 해도 자신의 아내와 간음을 저지르는 현장에서 왕을 공격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사실 그대로 고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처용가>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고발하는 노래의 전형적인 사례다.

 

사실을 함축하면서도 범행의 엄연한 당사자를 은폐하려는 의도가 농후한 점에서 완전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는 왕을 징치할 만한 수단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내와 간음하는 외간남자를 보고 처용이 그냥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외간남자가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힘이란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처용을 압도할만한 힘의 소유자는 왕을 빼고 생각할 수 없다. 당연히 노래에서 왕을 ‘불륜남’으로 지칭할 수는 없었으니, 당대인들이 무서워하던 역질(疫疾)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 위력을 구사하던 역신(疫神)을 왕의 가면[mask]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왕이나 왕족을 포함한 상류층에 간음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던 당대의 실상은 <<화랑세기>>에서 쉽사리 확인하게 되는데, 처용의 집에서 일어난 간음의 상간남 또한 그 범주에 속하던 남성으로서 헌강왕을 가장 유력한 혐의자로 볼 수 있다. 신화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상징과 은유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 원시의 신화들이고, 그것들로부터 파생되었거나 변질된 것들이 고대의 설화들이다. 고대의 설화들에도 여전히 상징과 은유가 큰 비중으로 들어 있고, 그것들의 원관념은 현실 속의 인간이나 인간의 행동들이다. 그러니 ‘간음’은 당시 흔히 볼 수 있던 인간들의 현실적 행위이었고, 역신은 ‘위력을 지닌 존재’를 상징하거나 은유하던 보조관념이었다. ‘위력을 지닌 존재’로서 왕 이외에 누구를 상정할 수 있겠으며, 그 시대의 ‘(역신과 같은) 위력을 지닌 존재’로서 헌강왕 이외에 또 누구를 상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자신의 아내와 간통하던 헌강왕을 ‘역신’으로 바꾸어 노래한 것은 처용이 택할 수 있던 유일한 고발 방법이었다.

 

‘도화녀와 통정한 진지왕’이나 ‘처용 처와 통정한 헌강왕’은 신라 시대 성적 일탈의 일부 사례들이며, 그것을 귀신[진지왕]이나 역신[헌강왕]으로 은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평등한 왕조시대의 불가피한 표현법이었다. 그리고 헌강왕의 존재를 역신으로 처리한 처용의 지혜는 ‘역신 퇴치의 주술’로 오래도록 살아남아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모두에게 애호되어 온 것이다. 이런 인식의 전환을 통해 <처용가>가 발휘한 장수의 비결이 해명될 수 있다고 본다.

 

셋. <간부가>와 <처용가>

 

일러나 보자 일러나 보자

내 아니 이르리 네 남편한테.

거짓으로 물 긷는 척

물통은 내려 우물전에 놓고

또아리는 벗어 통조지에 걸고

건넌 집 작은 김 서방을 불러내

두 손목 마주 덥석 쥐고

수군수군 말하다가

삼밭으로 들어가서 무슨 일 하는지

잔삼은 쓰러지고 굵은 삼대 끝만 남아

우줄우줄 하더라고

내 꼭 이를 거야, 네 남편한테.

저 아이, 입이 부드러워

거짓말 말아라.

우리는 마을 지어미라

실삼 조금 캤더니라.

-[<간부가>/<<진본 청구영언>>, No. 576]

 

 

이 노래는 목격자와 간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부인 ‘일러나 보자 일러나 보자~내 꼭 이를 거야, 네 남편한테’가 목격자의 말, 후반부인 ‘저 아이, 입이 부드러워~실삼 조금 캤더니라’가 간부의 말이다. 당연히 목격자의 말 속에 간통의 실상이 묘사되어 있다. 그 상황은 시간에 따라 세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물 길러 온 척 우물에 나와 내려놓은 물통에 또아리를 벗어 거는 행위→건넌 집 작은 김 서방을 불러내 수군수군 대화를 나누는 행위→함께 삼밭으로 들어가 벌이는 행위’ 등이 그것들로서, 전통사회에서 만들어졌음직한 전형적인 간음 서사이다. ‘잔삼은 쓰러지고 굵은 삼대 끝만 남아/우줄우줄 하더라고’는 ‘삼밭 속의 성행위’를 거칠게 고발한 노래임에도 표현만은 절묘하다. 이처럼 밀회 현장을 목격한 아이와 간부 사이의 긴장 넘치는 대화를 통해 ‘간음 고발’의 의도를 강하게 피력한 것이 이 노래인데, 대부분의 표현이 남녀의 만남과 성행위를 직∙간접적으로 묘사하는 것들이다. 간부의 변명으로 끝맺음되고 있긴 하나, 그것은 고발에 대한 합리적 변명이라기보다는 전편에 넘치는 긴장감을 뒷받침해주는 ‘작은 언술’일 뿐이다.

 

간음이 이루어지던 당시의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자. 노래의 무대는 전통시대 성추문의 현장으로 등장하곤 하던 동네 우물가 삼밭이다. 간부가 간통의 상대인 ‘건넌 집 작은 김 서방’을 불러내 삼밭으로 들어갔고, 삼밭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잔 삼은 쓰러지고 굵은 삼대 끝만 남아 우줄우줄 하더라’고 했다. ‘잔 삼이 쓰러지고 굵은 삼대 끝만 남아 우줄우줄한다’는 것은 동네 아낙이 젊은 남자를 만나 삼밭에서 섹스하는 상황의 간접적인 표현임은 물론이다. 박일용이 “처용은 자기의 처를 ‘처의 다리’라는 제유적 대상으로 환원시켜 헌강왕과 처의 간통 장면을 그려냈다”고 했는데, <간부가>에서 고발자인 아이는 ‘잔 삼은 쓰러지고 굵은 삼대 끝만 남아 우줄우줄 하더라’는 간접적 사물의 묘사로 간통 사실을 그려내 사람들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전통사회 추문(醜聞)의 현장으로 등장하던 ‘동네 우물가 삼밭’은 오늘날의 러브호텔에 맞먹는 공간으로, 그 공간의 ‘쓰러지는 잔 삼과 끝만 남아 우쭐거리는 굵은 삼’은 두 사람의 행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보조도구들이다. 이거야 말로 ‘다리가 넷인데, 둘은 내 것이나 다른 둘은 누구 것인가’라는 처용의 물음과 상통하는 고발성 언술(言述) 아닌가.

 

이 추문이 간부 남편의 귀에 들어갈 경우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간부는 목격자에게 ‘자신은 다만 마을 지어미로서 가는 삼을 조금 캤을 뿐’이라고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명에는 고려 간음 노래 <쌍화점>의 한 부분[“두레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우물의 용이 내 손목을 잡으시네요/이 말이 이 우물 밖에 나고 들면/조그마한 두레박아 네 말이라 하리라”]에서 느껴지는 ‘궁색한 변명의 모티프’가 그대로 살아 움직인다. 간음의 고발에 대하여 변명으로 대응한 간부의 태도는 그녀가 간음 사실 자체를 도덕적 결손으로 인정하였음을 보여주는 점이다.

 

사실 <<진본 청구영언>>을 편찬한 김천택도 이런 유의 노래들을 실어 놓는 데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김천택은 「만횡청류 서」에서 “만횡청류는 노랫말이 음탕하고 지취가 보잘 것 없어 족히 본받을 만하지 못하나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 한꺼번에 폐기할 수 없는 까닭에 아래에 들어둔다”고 했다. 이 말만으로도 <간부가>의 뼈대를 이루는 ‘간통의 서사’가 얼마나 광범위하고도 오랫동안 우리의 공동체에서 유전(流傳)되어 내려왔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간부가>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걸 알기 위해서는 전통사회 여성들의 억눌린 삶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절대적인 남성 우위의 사회 구조 속에서 조혼의 풍습은 인간의 본능을 억압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삶은 여성들의 내면에 한(恨)을 맺히게 했으며, 그런 한을 풀지 못하면 현세의 삶이 괴로울 뿐 아니라 죽어서도 편치 못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런 노래들을 단순한 ‘의사진술(擬似陳述)’로 볼 수도 있지만, 얼마간은 실제 상황에서 나온 것들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답답한 유교 이데올로기의 ‘열 윤리(㤠倫理)’, 그 이면에서 수많은 여성들은 본능과의 치열한 갈등을 벌여 왔으리라.

 

‘처용 처와 간통한 헌강왕’을 역신으로 은유하여 고발한 것이 불평등한 왕조시대의 불가피한 표현법이었다면, 그 다른 쪽의 평민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방식의 ‘간음 고발’이 노래로 통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처용가>는 제왕이 저지른 불륜을 고발하고 질타한 노래이고, <간부가>는 목격자가 간통하는 남녀들의 성행위 실황을 ‘삼대[잔 삼/굵은 삼]의 움직임’을 통하여 고발한 노래이다. <처용가>가 지존의 간음을 고발한 노래인 반면, <간부가>는 평민 남녀의 간음을 고발한 점에서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요동치는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내면은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똑같다는 점을 두 노래는 보여준 셈이다. 따라서 ‘두 다리는 내 것이나, 다른 두 다리는 누구 것인고?’라고 ‘내 다리/남의 다리’로 성행위를 묘사한 <처용가>와 ‘잔 삼은 쓰러지고 굵은 삼대 끝만 남아 우줄우줄 하더라’는 언술로 성행위를 묘사한 <간부가>의 거리는 사실상 없는 셈이다.

 

<처용가>는 신라 하대에 생겨난 노래로서 고려시대에 기록되었고, <간부가>는 언제부터 불렸는지 모르되 조선조 후기에 기록된 노래이다. 시대는 달라도 노래 속에 들어 있는 인정의 기미(幾微)는 같다는 점에서 양자는 같은 부류의 노래들이다. 두 노래가 대략 천년 넘는 세월을 격했으면서도 유사한 정서적 기반을 갖고 있는 것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본능 충족에 대한 인간의 욕망만은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점이다.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19. 9. 2. 16:36

*고전과의 대화: 계간 <<정형시학>> 24(2019 가을호)

 

 

죽어 이별의 노래 <가시리>

 

 

 

 

 

 

                                                                                                             조규익(숭실대 교수)

 

 

 

하나/「가시리 평설」 정전화(正典化)의 문제

 

“소박미와 함축미, 그 절절한 애원, 그 면면한 정한(情恨), 아울러 그 구법(句法) 그 장법(章法)을 따를만한 노래가 어디 있느뇨. 후인(後人)은 부질없이 다변(多辯)과 기교와 췌사(贅辭)와 기어(綺語)로써 혹은 수천어(數千語) 혹은 기백행(幾百行)을 늘어놓아 각(各)히 자기의 일편(一片)의 정한을 서(叙)하려 하되, 하나도 이 일편(一篇)의 의취(意趣)에서 더함이 없고 오히려 이 수행(數行)의 충곡(衷曲)을 못 미침이 많으니, 본가(本歌)야말로 동서문학(東西文學)의 별장(別章)의 압권(壓卷)이 아니랴.”<「가시리 평설」, <<여요전주(麗謠箋注)>>, 을유문화사, 1947, 424쪽>

 

이 언술은 고려속가(高麗俗歌) <가시리>에 대한 양주동 선생의 명쾌하면서도 자못 도발적이기까지 한 평가인데, 오늘날까지 후학들은 ‘그 평가의 무오류성’을 변함없이 신봉해 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그 평가의 합리성을 입증하고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고전시가 연구의 열기가 식어가고 있는 시대 조류의 와중에서 반대논리나 통합적 극복의 논리는 등장하지 못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 평가 내용의 핵심적 정서는 ‘사랑하는 남녀 가운데 남겨진 자가 떠나는 자에게 건네는 원망과 재회의 소망’, 말하자면 ‘살아 이별을 당하는 자의 지극한 심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

 

필자는 어린 시절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이 글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무엇보다 현란한 문체와 수사가 인상적이었고, 그 후 대학원 과정 이수 중 <<여요전주(麗謠箋注)>>[1947년 판]에 실린 그 글을 정독하면서 그 분의 생각에 좀 더 깊이 매몰되고 말았다. 「가시리 평설」이 <가시리> 해석의 정전으로 굳어지면서 지금까지 누구도 쉽사리 그 정의나 평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려 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필자의 이 글은 학술 논문이 아니고, 최소한 학술토론의 문건으로 제공될 가능성도 없는 소품이니, 이 글을 통해 <가시리>에 대한 기존 논의와 평가를 반박하거나 나만의 새롭고 참신한 견해를 제시하기에는 적잖이 조심스럽다. 최근 들어 필자는 우리 옛 노래[혹은 노래문학]들 가운데 상당수가 ‘살아 이별’ 특히 ‘사랑하는 당사자들의 헤어짐’보다는 ‘죽어 이별’의 넋두리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공무도하가>[혹은 <공후인>]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는 아내의 넋두리임이 분명하고, 현대문학 초기 김소월의 <진달래꽃>도 그 맥을 이은 ‘죽어 이별’의 노래임을 말한 바 있다. 그 맥락에서 <가시리>야말로 ‘살아 이별’의 노래가 아니라, 오히려 ‘죽어 이별’의 현장에서 내뱉던 넋두리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그런 넋두리가 아름다운 곡조에 실려 궁중악의 무대에까지 오르면서 뒷사람들에게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 노래’로 오해되었거나 살짝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지만, 그 원천 텍스트를 넋두리로 본다고 무조건 지나치다 탓할 필요는 없다. 비록 인상비평에 머물고 말지라도, 시조 창작의 다양한 담론들의 장(場)인 <<정형시학>>에 이 문제를 공론화 하려는 것은 현 시점에서 우리 전통 정서의 본질에 대한 탐색이나 그런 정서가 근・현대에 들어와 어떤 양상으로 예술화되었는지에 대한 모색이 절실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 이별의 콘텍스트

 

<가시리>를 ‘살아 이별’로 보는 양주동 선생의 생각은 다음의 글에 결정적으로 나타난다.

 

“처음 가신단 말씀을 들었을 때엔 그것이 오히려 농담(弄談)인 양 혹시 나를 울려 보려는 짐짓으로만 생각하였더니, 급기야 그것이 참인 줄을 알자, 또 얼마나 임께 기나긴 말씀을 하소연하였던고. 그러나 그것도 지금엔 모두 다 쓸데없는 말, 정작 임이 떠나시는 마당에 다시 무슨 경황으로 어젯 날의 기나긴 사연을 되풀이할꼬. 일체의 장황한 사설(辭說)은 지금엔 모두 췌사(贅辭)가 아니랴! 급박한 감정과 얼크러진 심서(心緖)는, 그러매로 일체의 군소리와 일체의 잔 생각을 거부하고, 다짜고짜로 원사(怨辭)로 돌진할 밖에 없는 것이다.”<「가시리 평설」, 424~425쪽>

 

양주동 선생이 <가시리>를 ‘살아 이별’, 그것도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로 단정하고 평설을 썼다는 점은 이 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쩌면 선생이 평설을 쓸 당시에 <가시리>가 ‘살아 이별’이냐 ‘죽어 이별’이냐의 문제로 살짝 갈등하셨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상상으로 예측해 보건대, 잠시 동안 갈등하신 뒤 예의 그 유쾌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쾌재를 부르시면서 즉각 당신의 생각을 내놓으셨으리라.

 

“‘살아 이별’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일시 나로부터 멀리 떠나가긴 하나, 가는 자의 마음이 바뀌면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지. <가시리>의 뒷부분[“붙잡아 두고 싶지마는/서운하면 아니 올세라/서러운 임 보내드리니/가시는 것처럼 돌아오소서”]좀 보게나. 이 사람아, ‘죽어 영이별’하는 상황에 ‘가는 것처럼 돌아오라’고 말할 수 있겠나?”

 

이렇게 그 분은 희희낙락 큰 소리 치셨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자. 사람이 죽었을 때 요즘은 의사가 맥을 짚어보거나 검안한 뒤 사망 선고를 내린다. 그런 다음 염을 하고 빈소로 옮긴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향촌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내 어린 시절의 경험에 비추어 말해 보자. 그 시절 사람이 죽고 나면 즉시 초혼제(招魂祭)를 지냈다. 그러나 초혼제를 지내기까지 거쳐야 할 절차가 있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마을 어른 한 분이 사자(死者)의 코앞에 솜털을 드리워 통기(通氣) 여부를 가늠하며 사망 여부를 판단했다. 설사 솜털이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즉각 ‘사망’이라 단정하지 않았다. 다음 절차는 사자의 옷가지를 들고 지붕으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휘두르며 큰 소리로 “고(皐) 아무개 복(復)! 복(復)! 복(復)!” 하면서 육신으로부터 빠져나간 혼을 길게 부르는, 슬프고 장엄한 의식을 행했다. 전통적으로 우리에게는 사람이 죽으면 콧구멍으로 영혼이 빠져나가 시신을 맴돌다가 북쪽 하늘로 날아간다는 믿음이 있었다. 왜 북쪽이었을까. 아마 사람이 죽은 뒤 묻힌다는 ‘북망산’에서 따온 방위개념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육신은 북망산으로, 영혼은 북쪽 하늘로’ 라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육신을 빠져나간 혼이 되돌아오면, 육신은 다시 전처럼 살아나게 된다고 믿었다. 그것이 환혼(還魂)이다. 그렇게 육신을 빠져나가 하늘나라로 가는 혼을 되돌리기 위해 부르는 행위가 초혼이다. 그래서 초혼과 환혼은 우리 전통사회에서 가장 슬프면서도 장엄한 의식이었고, 사자의 지친(至親)들은 그 순간 가장 크고 서럽게 울어야 했다. 그 때의 울음소리가 클수록 떠나가던 혼이 쉽게 듣고 돌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전통사회의 곡비(哭婢)도 실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무작정 울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했다. 떠나는 혼이 알아듣고 발길을 돌릴 만큼 간절하고 슬퍼야 했다. 그 순간의 말이 바로 넋두리다. 넋두리는 ‘넋[혼(魂)]+두리[환(還)]’, 즉 ‘떠나가는 혼을 되돌리는 말’이다. 남편이 죽는 순간 쪽진 머리를 풀어헤친 아낙네가 남편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자신의 가슴을 치며 “나 혼자 어찌 살라고 떠나십니까? 못 가십니다, 정녕 못 가십니다!”라고 울부짖는 그 말들이 바로 넋두리다.

 

<공무도하가>는 전형적인 ‘넋두리 문학’이고, 김소월의 <초혼>은 그야말로 초혼 행사를 시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김소월의 <초혼>과 긴밀하게 연관되는 노래가 <진달래꽃>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학자들은 <진달래꽃>이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시라 한다. 그 때의 이별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살아 이별’을 말하는 것임은 양주동 선생이 <가시리>를 ‘살아 이별’의 노래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 관점이다. 한국문학 연구가 한 세기 가까이 진행되고 있지만, 지금껏 그런 고정관념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다.

 

분명히 김소월의 <초혼>과 <진달래꽃>은 ‘죽어 이별’을 노래한 자매편들이고, <가시리>와 <진달래꽃>은 시대를 격하여 ‘죽어 이별’의 정서로 연결되는 노래 혹은 시문학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공무도하가>와 <초혼> 사이에 위치한 것이 <가시리>이고, <가시리>와 상통하는 ‘죽어 이별’의 노래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다.[*<진달래꽃>에 관해서는 다음 고에서 시조와 결부시켜 상론할 예정임.]

 

그런데 ‘넋두리 문학’의 화자는 예외 없이 여성이다. 전통적으로 넋두리는 여성 화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상이 났을 때 초혼은 남성이 주관하나 넋두리는 여성 전담이었다. 지붕에 올라가 사자의 옷을 흔들며 구만리장천을 향해 외치는 ‘초혼’은 굵은 목청을 지닌 남성만이 행할 수 있었다. 남성화자가 등장하는 김소월의 <초혼>을 읽어보시라. 그러면 우리 전통사회의 초혼 행사를 역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셋/<가시리>의 텍스트와 넋두리의 미학적 의미

 

자, 이제 <가시리>가 ‘죽어 이별’의 노래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 본문을 들어보기로 한다.

 

가시리 가시리잇고(①)

버리고 가시리잇고(②)

날러는 어찌 살라하고(③)

버리고 가시리잇고(④)

붙잡아 두고 싶지마는(⑤)

서운하면 아니 올세라(⑥)

서러운 임 보내드리니(⑦)

가시는 것처럼 돌아오소서(⑧)

 

<가시리>는 <<악장가사>>∙<<시용향악보>>∙<<악학편고>> 등 조선조 관찬(官撰) 악서(樂書)들에 실려 있다. 매 연 끝에는 “위 증즐가 태평성대”라는 후렴구가 붙어 있는데, 반복되는 그 부분을 제외하고 인용한 것이 바로 이 글의 텍스트이다. 내용상 이 후렴구는 <가시리>가 궁중악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위’는 감탄사, ‘증즐가’는 현악기를 긁어내는 소리, ‘태평성대’는 ‘임금이 통치하는 지금의 시대가 태평하다’는 의례적 찬사로서 이 노래가 궁중정재(宮中呈才)에서 불리던 노래임을 보여주는 단서들이다. 고려조와 조선조 궁중에서는 왕을 비롯 지배층을 위한 가・무・악(歌舞樂) 융합의 궁중무대예술이 공연되었고, <가시리>는 무대예술인 속악정재(俗樂呈才)들 가운데 하나에서 불린 노래였다.

 

노래의 ①~④는 넋두리의 전형으로서 <공무도하가>의 그것과 일치한다. ⑤~⑧은 넋두리에 덧붙어 그 미학적 완성도를 높여주는 부가적 부분이다. 만약 ①~④가 전부라면, 이 노래는 단순한 넋두리를 넘어설 수 없다. 그럴 경우 이 노래는 시적 자아의 실존적 좌절이나 운명의 장벽에 대한 한탄으로 그치기 때문이다. 단순한 넋두리를 넘어 서고자 하는 시적 언술을 통해 상황을 합리화 하거나 죽음에 대한 자아의 초극의지를 피력하기 위해 덧붙인 것이 후반(⑤~⑧)이다. ‘죽어 떠나는 임’과 이별하며 맞이한 실존적 상황을 아름다운 노래로 승화시킨 힘은 창작 및 가창계층의 철학이나 미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①~④의 단순 비극미는 ⑤~⑧의 부가적 미학으로 승화되었다.

 

넋두리 자체인 ①~④와 연결시키지 않을 경우, ⑤~⑧은 단순히 ‘살아 이별’의 현장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당부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넋두리인 ①~④를 복합 심리적으로 세련화 시킨 것이 ⑤~⑧임을 즉시 알아차릴 수 있게 한 것도 ‘죽어 이별’을 ‘살아 이별’인 듯 위장함으로써 죽음의 절대성을 비켜 가고자 한 미학적 장치의 힘이었다.

 

⑤~⑧의 ‘붙잡아 두고 싶다’는 것은 보내는 사람 뿐 아니라 떠나는 사람도 갖고 있었을 현실적 삶에 대한 집착을 암시한다. 그러나 한 번 떠나면 그만인 죽음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화자로서는 그 절망감으로부터 자아를 지켜야 했고, 그 구체적 방어기제의 작용으로 나타난 표현이 바로 ‘서운하면 아니 올지 모른다’는 언술이다. 사실 이 경우의 ‘서운함’이란 ‘죽어 떠나는 자’가 갖고 있을 마음 상태다. 화자로서는 ‘죽어 떠나는 임’이 자신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떠나길 바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렇게 표현한 것은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임이기에 그가 돌아오지 못할 명분 정도는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당치 않은 이유이겠지만, ‘죽어 떠나는 임’이 자신에게 서운함을 가지는 것처럼 그려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신’이 ‘죽어 떠나는 임’에게 전혀 마음의 짐을 느낄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이 노래의 화자는 ‘죽어 이별한’ 사람을 ‘나를 싫어해서 떠난’ 사람으로 치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바꿔치기’란 ‘죽어 떠나는 자’에 대하여 ‘살아남은 자’가 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일 수 있으며, ‘죽어 떠나는 자’에 대한 ‘살아남은 자’의 심리적 부채의식을 줄일 수 있는 최고의 방책이기도 했다. 상대가 ‘서러운 임’이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실 ‘살아남은 자’와 ‘죽어 떠나는 자’ 가운데 누가 이 말의 주체가 되느냐에 따라 서러움의 의미는 달라진다. 전자가 주체일 경우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죽음의 절대성 때문에 서러움을 느낀 것이고, 후자가 주체일 경우 이승의 삶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단절되는 데서 서러움을 느낀 것이다. 그러한 내재적 의미의 모호성이나 분열적 자아는 ⑧에서 매끄럽게 통합된다.

 

‘가시는 것처럼 돌아오라’는 말 속에서 서로 다르게 표현된 두 주체[남겨진 나/떠나는 임]의 감정은 하나로 합쳐지고 그 이전 단계의 애매성 또한 사라진다. 그래서 ⑧ 또한 넋두리[환혼]이자 초혼이 되는 것이다. ‘이승의 미련을 훌훌 털고 떠나신 것처럼 나를 힘들게 하지 말고 다시 돌아오라’는 당부야말로 전통 시대 초혼의 모티프와 하등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넷/<가시리>는 ‘죽어 이별’의 노래다

 

<가시리>는 궁중의 속악정재에서 불린 노래, 즉 속악가사였다. 사실 궁중 무대예술인 정재는 임금을 대상으로 하던 예술이었다. 그런 만큼 여악(女樂)들은 춤과 노래로 임금을 송축하고, 예술적 한계 안에서 ‘연모의 정’을 암시하기도 했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상호텍스트의 측면에서 면밀히 관찰하지 않을 경우, <가시리>가 ‘살아 이별’의 노래인지 ‘죽어 이별’의 노래인지 알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노래에서 화자가 의도한 궁극적 결과는 ‘죽음의 초극’이다. 전통 넋두리 노래를 전반에 제시하면서 죽음의 비극성을 바탕에 깔았고, 후반의 분열적 언술을 통해 죽음을 초극하고자 한 것이다. 전반의 넋두리는 사랑의 종말이라는 비극을 초래했으나, 후반의 언술을 통해 죽음이 초극되면서, 그것은 사랑으로 전환되었고, 결국 그 사랑은 극대화 되었다. 따라서 사랑과 죽음은 모순적 관계이자 화합의 관계이고, 궁극적 화합의 불가피성을 내포하면서 다시 분열의 미로로 빠져들기도 하는 관계이다.

 

무대 위의 여악(女樂)들이 임금에게 수(壽)와 복(福)을 바치는 서왕모 등 신선의 퍼스나를 갖추는 것은 당시 당악(唐樂) 정재들에 흔한 장치였고, 당악정재와 상호 텍스트의 관계를 맺고 있던 속악정재들의 경우도 임금에 대한 송도(頌禱)나 축수(祝壽)는 공통된 모티프였다. 그러니 무대 위에 등장한 여악들은 임금에게 최고의 사랑을 바쳐야 했다. 평범하지 않은, 아니 오히려 극적인 사랑을 요구했다면, ‘죽음으로 패러프레이즈된 사랑’도 가능한 것이고, 넋두리의 외피(外皮)를 쓴 사랑담론 또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가시리>는 단순히 ‘살아 이별’의 노래가 아니라, ‘죽어 이별’의 노래,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죽음을 노래하는 넋두리를 바탕으로 죽음을 극복해낸’ 노래이다.

 

텍스트의 외면 만으로는 ‘살아 이별’인지 ‘죽어 이별’인지 애매모호하다. 이면까지 뒤집어 봐야 양자는 대립적이면서도 궁극적으로 통합되는 주제들임을 알 수 있다. 죽음을 노래한 이면에 궁극적인 사랑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노래를 ‘죽어 이별’의 노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해석처럼 이것을 ‘살아 이별’의 노래로 본다면, 그 속에 들어 있는 죽음과 죽음에 대한 초극의지를 간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시리>를 좀 더 복합적으로 살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가시리>의 이면을 들여다 볼 만큼 우리의 해석적 안목은 충분히 확장・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조규익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아너 펠로우 교수(Honor Soongsil Fellowship Professor). 인문대 학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소장. 도남국문학상・성산학술상・한국시조학술상 등을 수상. LG 연암재단 해외연구교수로 UCLA에서 ‘재미한인 이민문학’을, 풀브라이트 학자(Fulbright Scholar)로 OSU에서 ‘해외한인문학과 비교문학’을 연구. <<조선조 악장 연구>>・<<북한문학사와 고전시가>>・<<동동: 궁중 융합무대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 외 다수의 저・편・역서와 논문들을 발표했음.

홈페이지(http://kicho.pe.kr) 및 블로그(http://kicho.tistory.com) 참조.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19. 7. 20. 08:33

 

 *이 글은 <<동동動動: 궁중 융합무대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민속원/<<한국문학과 예술>> 30집 게재)에 대한 서평으로, 필자의 허락을 받고 퍼왔습니다.

 

 

궁중 융합무대예술 ‘동동(動動)’의 본질에 대한 모색과 결실-<<동동動動: 궁중 융합무대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민속원)을 읽고-

 

 

                                                                                                     하경숙(선문대 교양학부 계약제 교수)

 

 

이 책은 고려조와 조선조의 궁중 연향에서 공연되던 가무악 융합 무대예술 ‘동동’에 관한 공동저술(저자: 조규익·문숙희·손선숙·성영애)이다. ‘동동’은 고려 속악정재들 가운데 하나로서 아박(牙拍)이란 이름으로 조선조에서도 연행되던 가무악(歌舞樂) 융합의 궁중무대예술이다. 최근까지 <동동>은 ‘문자 텍스트로서의 동동’일 뿐이었고, 그것은 ‘고려속요·고려가요·여요·려가’등의 명칭으로 부르던 시문학 텍스트일 뿐이었다. 초창기 연구자들이 명칭에 대하여 갖고 있던 편견과 그로부터 확립된 문제들을 타개(打開)하고자 문학·음악·무용을 연구하는 저자들이 ‘동동’ 정재(呈才)의 융합예술적 성격을 분석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했다. 중세왕조의 임금이나 고귀한 존재를 대상으로 토로한 불멸의 사랑과 불변의 서정이 융합 무대예술로 응집되었다는 것이 ‘동동’ 논의의 출발점이다. 특히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시간이 흘러도 계절이 바뀌어도 바치는 자의 사랑은 변함없음을 가·무·악으로 표현”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가무악 융합의 미학적 본질을 점검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결국 ‘동동’은 전통무대예술의 진수로 꽃피어났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저자(조규익·문숙희·손선숙·성영애)들은 <<대악후보>> ‘동동’의 리듬을 해석하여 선율을 찾고, 그 선율에 <<악학궤범(樂學軌範)>> 소재 <동동>의 노랫말을 구체적으로 붙여, 그 노래와 무용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속악정재 ‘동동’이 지닌 가무악 융합의 본질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각 장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저자들의 의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책은 전체 7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총서」, 2부는 「<동동>- 텍스트의 정체」, 3부는 「<동동>의 장르적 속성과 원형 모색」, 4부는 「조선전기 ‘동동’의 가무악 융합 양상」, 5부는 「조선전기 아박무 복원연구」, 6부는 「총결」, 7부는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노랫말 원문과 현대어 역, 복원음악 악보가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문헌과 재현 아박무(牙拍舞)를 비교·검토하여 상이점을 찾고, 조선전기 ‘동동’ 중기의 무용구조와 복원에 필요한 내용을 상세히 살피고 있다.

 

1부에서는 속악정재 ‘동동’의 성격을 살펴 그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또한 장르적 속성이나 명칭 등과 함께 학계에서 미해결된 속가의 문화·예술적 측면을 면밀히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동동’이 그동안 하나의 공연물로 연구되지 못한 원인은 악보와 무보 해석의 불완전성에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동동’의 음악을 찾아야 하고, 그 음악에 노랫말을 융합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노래와 무용을 융합함으로써 가무악 융합의 속악정재 ‘동동’을 온전히 복원”(21쪽)하는 과정을 통해 기존의 담론을 뛰어넘어, 정재의 악곡과 노랫말 모두가 ‘동동’이라는 구체적인 융합예술작품으로 구현되는 핵심임을 밝히고 있다.

 

2부 「<동동>-텍스트의 정체」(조규익)에서는 ‘동동 텍스트가 지닌 문화·예술적 본질과 지향성’을 찾고 ‘송도지사(頌禱之詞)와 선어(仙語)’의 관계, ‘놀이와 선어의 상관성’등을 규명했다. 저자(조규익)가 “‘동동’은 생산 시점 이후 현재까지 노랫말과 음악·무용의 인접분야들이 하나로 융합된 텍스트로 존재해왔고, 그 예술·문화적 콘텍스트 양상 또한 적어도 근대 이전까지는 유지”(62쪽)되었다고 밝혀, 텍스트 하나만을 적출하여 해석하는 작업의 위험성을 강조한다. 이는 원천적 오류를 초래하는 일로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콘텍스트(context) 의 현실을 살피는 작업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동동’에 송도의 말이 많고, 그것들은 ‘신선의 말’을 본뜬 것이라 한 <<고려사 악지>>의 언급이야말로 속악정재 ‘동동’이 당시의 당악정재들과 상호텍스트적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한다는 것이 저자(조규익)의 주장이다. 즉 당대 궁중악 중 당악과 속악은 ‘임금의 수와 복’을 송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행되던 예술장르였고, 그 범주에서 공연되던 정재들은 송도적 모티프의 구현을 지향하던 공연예술의 형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동놀이[動動之戱]’라 지칭한 <<고려사 악지>> 속악조에 따르면 동동이 지닌 놀이적 성격이 상세히 나타나고 있으며, 동시에 융합예술체로서의 놀이적 면모를 보여준다. 놀이에 상정된 대상은 임금이며 원시 제천행사들에서 공연되던 놀이들이 후대의 정재들에 이르러 그것들의 의례화·질서화를 통하여 완성된 예술의 모습으로 구현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당악정재의 창작원리나 동기·구조 등과, ‘동동’을 비롯한 속악정재들이 상호텍스트적 연관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 등을 상세히 보여준다. 이는 속악정재 ‘동동’이 당악정재의 악장들을 본뜬 송도를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패러프레이즈함으로써 속악정재 나름의 독자성을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화론적 측면으로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제 3부 「동동의 장르적 속성과 원형 모색」(성영애)에서는 <동동>의 장르적 속성 및 그간 문제가 되어온 <동동>과 <장생포>와의 관련성 등을 살폈고, <동동>의 원형 모색과 함께 그동안 미해결된 문제들의 방향을 찾고자 했다. 저자(성영애)는 “<동동>은 궁중에서 공연된 국가음악으로 정재의 악곡과 노랫말 모두 <동동>이란 명칭 아래 역사서나 악서(樂書)에 존재해왔고 존재하고 있다”(77쪽)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장르 명칭을 ‘고려속악가사’로 부르고, 그 줄임말로 ‘고려속가’를 사용하는 것이 <동동>의 장르적 속성을 나타내는 정확한 용어임을 밝히고 있다. 저자(성영애)는 그간 논란이 많았던 <동동>과 장생포와의 관계를 다양한 문헌의 비교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고려사>> 악지와 열전의 기록을 중심으로 곡명과 창작자, 왜구 출몰지역으로 살펴본 내용을 통해 <동동>은 관찬서와 일반 문집에 기록된 <장생포>와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동국문헌비고>>를 수보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상세히 밝혔다. 또한 <동동>은 궁중연례악으로서 회례연(會禮宴)·사신연使臣宴)·나례연(儺禮宴)에서 송축이나 송도의 의도로 연행되었으며, 특히 나례연 중 ‘처용지희(處容之戱)’ 안에서 ‘동동지희’가 연행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동동’은 악·가·무를 통해서 임금에게 송도의 뜻을 바치는 종합예술작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문해(文解) 위주로만 연구해온 상황이 그간 <동동>의 원형을 밝히는데 어려움을 주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제 4부 「조선전기 ‘동동’의 가무악 융합 양상」(문숙희)은 ‘동동’의 선율을 찾고, 그 선율에 노랫말을 융합하여 ‘동동’ 노래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노래와 무용을 융합하여 가·무·악으로 합쳐진 융합적 존재로서의 ‘동동’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저자(문숙희)는 “‘동동’은 장구점 단위가 소절에 해당되고 악보에 가사도 없고 음 또한 퍼져 있어서, 악보에서 기본박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113쪽)고 밝히면서 연구가 쉽지 않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기본박 찾기를 통한 방법’으로 해석된 리듬을 찾고, 그 중 ‘동동’과 같은 장단의 악곡을 통해 ‘동동’의 리듬과 정간시가를 찾는 노력을 기울여 결과를 도출하고 이에 ‘동동’의 특질을 찾아 보여주었다.

 

                                               

동동 복원공연 실황

 

“‘동동’은 정읍을 편곡하여 만든 노래로 보고 있다. 정읍과 같은 이름을 공유하기도 하고 또 많은 선율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두 악곡에는 가사가 다르듯이 다른 부분도 있다.”(138쪽)고 설명하면서 두 악보를 비교한 결과를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동동’ 선율은 ‘정읍’의 선율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대악후보>> ‘동동’ 악보는 현악기 악보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동동’ 악보에 ‘강’이란 용어가 직접 사용되지 않았지만, 음악적인 내용으로 볼 때 ‘동동’은 진작류 형식에 해당한다고 밝히며 ‘동동’에서 강이란 가사의 구를 싣고 있는 선율, 하나의 악구에 해당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동동’의 정간시가는 일정한 길이로 되어있지 않고, 5정간과 3정간이 각각 같은 길이의 3분박 한 박으로 해석되며 노랫말 텍스트 <동동>은 선율이 가사에 비해 매우 길 뿐만 아니라, 가사를 천천히 진행하면서 음을 길게 늘여 부르는 노래라고 설명했다.

 

제 5부 「조선전기 아박무 복원연구」(손선숙)는 문헌 고증을 통해 전기 아박무를 복원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아박무는 고려시대에 ‘동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조선전기에 명칭이 아박으로 바뀐 뒤 조선후기를 거쳐 현재까지 이른다. 이에 <<악학궤범>>에 기록된 조선전기 아박무를 검토, 기존의 재현 아박무를 점검하고 문헌과 재현 아박무를 비교 검토하여 복원 관점으로 기록구조와 진행구조를 살펴 복원에 필요한 실제 수용범위와 근거에 대해 살피고 있다.

 

저자(손선숙)는 “기존에 재현된 아박무는 기존의 선행연구자들이 해석한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여 매월 가사에 따라 춤에 변화를 주는 등 다양한 춤사위를 구성하여 추었는데, 2월사부터 8월사까지만 새로운 춤을 추고, 10월사부터 12월사까지는 <<악학궤범>>에 기록된 ‘북향-대무-배무’를 추었다.”(155쪽)고 밝혔다. 이는 재현 때 수용한 변무의 원칙에 위배되고, 문헌 기록대로 재현하였다는 원칙에도 위배되어, 결국 재현 아박무는 그 어느 원칙에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저자가 <<악학궤범>>의 변무가 새로운 춤이 아니라 ‘북향-대무-배무’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북향·대무·배무’할 때 박을 치는 횟수와 무용 진행구조 관점으로 분석했기 때문임을 밝혔다. 또한 ‘기존 재현 아박무’는 가사 및 춤 진행에 따른 무구 사용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고, 유절형식에 따른 ‘변무’의 원칙성에 위배되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아박무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구성인 대형 이동 위치와 방향, 춤사위가 필요한데, <<악학궤범>>에는 춤사위와 무용수들이 선 위치를 제외한 나머지 내용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166쪽)고 밝혔다. 특히 이 책에서는 아박무 복원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내용들과 보충되어야 함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 <<악학궤범>>에 기록된 ‘동동’ 중기의 아박무는 ‘무진-북향무-대무-북향-배무-환북향-무퇴’로 추어야 하고, 이와 같은 춤을 무려 11회 반복하며 추는 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악학궤범>>과 같은 고무보를 바탕으로 아박무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문헌 고증이 선행되어야 하고, 궁중정재의 재현 및 복원을 위해 춤의 기록이 문헌으로 전해지는 <<악학궤범>>의 내용을 단순히 이론상으로 이해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관점으로 접근하여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궁중왕실문예시스템’ 마련과 궁중 정재복원전문가의 배출을 위해서도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 6부 「총결」에서는 가무악 융합 예술체 ‘동동’의 본질을 분석하고 원래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고려조 궁중에서 시작된 속악정재 ‘동동’이 조선조에 들어와 ‘아박’으로 개명되면서 변화를 모색했고, 새롭게 추구된 변화가 그 뒷시대로 이어지면서 다양한 미학적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설명도 그래서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미학적 측면은 지속과 변이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는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음악과 무용의 텍스트를 온전하게 복원하고자 하는 목표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노랫말 텍스트 ‘동동’을 정확히 구현하기 위해서는 인접분야인 음악 텍스트와 무용 텍스트를 이해해야 하고, 이들이 하나로 융합된 텍스트 전체를 이해·분석하기 위해서는 콘텍스트로서 당대의 예술적 상황을 이해해야 하는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융합 텍스트로서의 ‘동동’을 이해하기 위해 근대 이전까지 조선 왕조에서 공연된 재현 정재들을 통해 가무악 융합의 예술적·문화적 분위기를 이해·분석·수용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동동’이 단순히 문자 텍스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무악 융합 무대예술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동동’은 여성의 예술이다. 단순히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왕조의 임금이나 고귀한 존재를 대상으로 토로한 불멸의 사랑과 정서가 결합된 총체적인 종합예술임을 규명해낸 것이다. 저자(조규익·문숙희·손선숙·성영애)들은 동동의 예술미학을 구현하기 위해 그동안 기울여온 노력과, 그에 따른 다양한 결과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노랫말 텍스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콘텍스트로서의 악곡과 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동안 연구자들은 간과해왔다. 고전시가가 어떤 양상으로 실연(實演)되어 왔는지에 대한 통합적 시각이나 시야를 충분히 갖출 필요가 있음을 저자들은 강조한다. 그것들 가운데 상당수 작품들의 생산이나 향유계층이 민중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함으로써, 그것들이 궁중에서 임금을 비롯한 지배계층의 연향에 쓰였다는 사실을 그동안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음악학계 및 무용학계와 협업의 필요성과 절실함을 느낀 저자들이 착수한 작업들의 결실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런 모색과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진 이 책이야말로 ‘고려속요 동동’에서 ‘속악정재 동동’으로 인식을 전환함으로써 그 원형과 위상을 새롭게 찾아낸 구체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저자들은 ‘텍스트 지평의 전환’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텍스트의 본질을 외면한 채 무조건 답습해 오던 기존의 오류들과 다양한 문제들에 주목하고, 텍스트의 ‘분리에서 융합’으로 전환한 다음 지속적인 모색과 반성을 통해 만들어낸 연구 결과들 덕에 우리는 ‘동동’의 융합예술적 본질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동동’은 단순한 그리움과 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융합적인 궁중무대예술작품이다. 그 본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차원 높은 예술적 경지를 경험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동동 저서

 

동동 해석(조규익)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19. 7. 5. 16:15

단원 김홍도의 춘화

 

 

고전과의 대화

 

「만횡청류」 성 담론의 정체

 

 

                                                                                                                           조 규 익

 

 

 

 

하나. 왜 성을 노래했나

 

 

김천택은 <<진본 청구영언>> 말미에 「만횡청류」 116수를 실어 놓았다. 학계에서는 ‘만횡청류’라는 명칭을 도외시하고 ‘사설시조’로 호칭하지만, 정확한 명칭은 아니다. 편찬자 김천택의 원래 의도는 ‘사설시조’란 출처불명의 명칭에 있지 않았고, ‘만횡청류’라는 명칭에 담겨 있다. 가곡에서 초장을 곧은 목의 삼삭대엽, 2장 이하는 흥청거리는 농조로 부르는 것이 만횡이고, 만횡과 농・락・편을 두루 포괄하는 노래들의 부류가 ‘만횡청류’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노래들의 상당수가 여성의 ‘성적 개방’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의 주도자가 남성이었던 유교 사회에서 화자인 여성들의 입으로 노래한 개방적인 성을 오늘날의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혹자는 남성들이 지은 것들도 있기 때문에 ‘여성의 성 담론’과 거리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남성 작자들의 작품을 짚어내기도 어렵거니와, 설사 남성이 지은 것이라 해도 여성화자로 설정되어 있는 이상,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보는 것이 맞다.

「만횡청류」의 여성들은 성을 노래하며 전혀 쭈뼛거리지 않는다. 여성 화자들이 당당하게 성을 노래한 것은 당시의 여성들이나 「만횡청류」의 담당자들이 성적 자기 결정권이나 성적 주체성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만횡청류」의 야한 노래들 때문에 문제가 생길까봐 걱정하던 김천택은 <<청구영언>>의 원고를 싸들고 당시 지식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던 마악노초를 찾아간다. 임해군(선조의 장남)의 후손인 마악노초는 시조 창작과 가창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소론 계통의 지식인이었다. 「만횡청류」를 <<청구영언>>에 실어 가요계에 노출시키려던 김천택으로서는 사회적 제재를 막아줄 안전판이 필요했고, 마악노초는 그에 적합한 인사였으리라.

작자들을 익명으로 처리한 점은 또 하나의 안전판이었다. 「만횡청류」를 제외한 상당수의 노래들에 분명한 작자명이나 적어도 작자를 추정할만한 단서들이 제시되었으나, 「만횡청류」에 대해서만은 작자 혹은 최소한 그것을 짐작할만한 단서 하나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 노래들이 원래부터 익명의 상태로 전승되거나 창작되고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김천택 스스로 작자를 추정할만한 단서를 일부러 밝히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악노초는 「만횡청류」에 대하여, ‘곡조는 비록 아름답고 세련되지 못하나 기뻐 즐기며 원망하고 탄식하고, 미쳐 날뛰며 거칠게 구는 모습과 태도는 모두 자연의 진기(眞機)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설명한 다음, 걱정할 필요 없다고 김천택을 안심시켰다.

여성화자들이 성적 주체성을 노래한 논리적 근거를 ‘자연’의 발로에서 찾은 마악노초의 생각은 매우 열려 있었다. 그가 말한 ‘자연’은 인간과 사물의 존립근거인 ‘스스로 그러함/저절로 그러함’이고, ‘진기‘란 ’현묘한 이치나 비결‘이다. 반복하건대, 앞에서 제시한 「만횡청류」의 특징(곡조는 비록 아름답고 세련되지 못하나 기뻐 즐기며 원망하고 탄식하고 미쳐 날뛰며 거칠게 구는 모습과 태도)이 ‘자연의 진기’에서 나온 것이라면, 과연 ‘스스로 그러함의 현묘한 이치나 비결’이란 무엇일까. 바로 ‘꾸밈없음, 걸림이 없음, 현실적 이해나 이념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있음’ 등으로 설명될 수 있고, 그것들은 ‘자유분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자유분방’은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이고, 그 가장 극적인 형태가 ‘여성의 성적 일탈’이었다. 「만횡청류」를 통하여 남성이 향유하던 성적 희열을 관념적으로나마 공유 혹은 향유하게 되었고, 그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을 ‘심리적 평등’으로 상쇄하는 효과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김천택의 그 말에서 생태여성주의 즉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의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남성 중심의 유교적 세계관이 자연을 억압하는 시대 분위기에서 여성들 스스로 ‘성의 자유’를 구가한 일이야말로 우리 문학사에서 드물게 보는 생태여성주의의 증거다. 「만횡청류」에서 성을 언급하는 노래들의 화자로 남성이 등장한다 해도 노래 밖으로 두드러지는 개방의 실질적인 주체는 여성이다. 따라서 이 노래들은 당시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꽤 도전적이다. 이처럼 조선조 이념사회의 차별 구조 속에 은폐되어 왔던 여성이 노래에 표현된 성적 사건의 분명한 당사자로 노출된 점은 큰 사건이었다. 남성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로 성을 노래하기도 쉽지 않았을 터인데, 여성의 목소리로 거리낌 없이 성을 노래하다니! 이 책이 나돌던 당시 조야(朝野)가 떠들썩하지 않았을까. 책을 만들어 배포한 김천택으로서는 무척 긴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만횡청류」로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풍류방을 중심으로 유락적 분위기가 만연되고 있던 당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단서일 것이다.

과연 「만횡청류」가 반역하려 한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남성 중심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열녀담론’임은 물론이다. 「만횡청류」 담당계층은 ‘숨김과 드러냄’이란 노랫말의 표현적 기교를 통해 열녀담론의 틀을 깨려 했고, 그런 기교를 통해 억눌렸던 리비도의 해소는 가능했으며, 리비도의 해소야말로 몸의 자연 상태를 회복하는 지름길이었다. 그것은 여성들의 ‘인간선언’이기도 했다.

 

 

 

둘. 어떻게 성을 노래했나

 

 

노래 세 편만 들어보자. 먼저 <샛서방 노래 1>.

 

본서방은 광주 싸리비 장사, 샛서방은 삭녕 짚 비 장사, 눈짓으로 맺어놓은 임은 뚝딱 두드려 방망치 장사, 또르르 감아 홍두깨 장사, 빙빙 돌아 물레 장사, 우물 전에 치달아 간당거리다가 워렁충창 풍 빠져 물 담뿍 떠내는 두레박 장사

어디 가서 이 얼굴 가지고 조리 장사를 못 얻을까?<만횡청류-565>

 

이 노래의 여성화자는 자신의 상대역으로 ‘본서방, 샛서방, 눈짓으로 맺어놓은 임’ 등 여러 종류의 남성들을 들었다. 본서방을 ‘광주 싸리비 장사’라 했고, 샛서방을 ‘삭녕의 짚 비 장사’라 했다. 그리고 ‘눈짓으로 맺어놓은 임’을 ‘방망치 장사⋅홍두깨 장사⋅물레 장사⋅두레박 장사’라 했으며, ‘뚝딱 두드려⋅도르르 감아⋅빙빙 돌아⋅우물 전에 치달아 간댕간댕하다가 워렁충창 풍 빠져’ 등으로 각각의 모습이나 행위를 묘사하여 덧붙였다. 싸리비・짚 비・방망이⋅홍두깨⋅두레박 등은 남성의 성기를 은유한 말들이다. 싸리비는 강하나 거칠고, 짚 비는 부드럽고 곱다. 화자는 빗자루를 들어 남편의 성기와 샛서방의 성기를 대조적으로 그려냈다. ‘눈짓으로 맺어놓은 임’은 좀 더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눈짓으로 맺어놓은 임’이란 아직 본격적인 관계는 갖지 않은 채 눈짓으로만 걸어둔 대상이다. 방망이⋅홍두깨⋅두레박 등에 덧붙은 ‘뚝딱 두드려⋅또르르 감아⋅빙빙 돌아⋅우물 전에 치달아 간당거리다가 워렁충창 풍 빠져’ 등은 성행위의 기교나 모습을 묘사한 은유적 표현들이다. 그리고 ‘우물 전’은 여성 화자 자신의 성기를 은유한 말이다.

화자 자신은 스치는 뭇 남자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으며, 사랑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는 여성이다! 그러기에 끝부분에서 ‘어디 가서 이 얼굴 가지고 조리 장사를 못 얻을까?’ 라고 큰소리 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하는 최상의 남성은 조리 장사이다. 조리란 곡식을 이는 데 쓰는 도구다. 화자는 ‘곡식을 이는 행위’와 성행위의 기교를 병치적으로 은유했다. 이 노래의 화자는 현실이든 가상이든 자신이 최상으로 생각하는 어떤 남성과도 만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여성이다. 이처럼 남성들 앞에서 쭈뼛거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대로 짝을 찾아 성적 쾌락을 즐기는 여성상을 「만횡청류」에서 찾기란 어렵지 않다. 성적 쾌락에 대한 욕구를 억누르고 은폐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으며, 스스로 그것을 찾아 나서는 일은 자연 혹은 자연스러움의 표준을 자신의 욕망에 맞추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분명 이 여성은 남성 중심의 유교 이데올로기 사회에서 성적 본능을 억압하고 살아온 ‘그녀’는 아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주장하고 그 즐거움을 향유하려는, ‘새로운 시대’의 여인이다.

 

다음은 <샛서방 노래 2>.

 

어쩔 거나 어쩔 거나, 시어머님.

샛서방의 밥을 담다 놋 주걱 자루를 부러뜨렸으니

이를 어찌하여요? 시어머님!

저 아기야, 너무 걱정 마라

우리도 젊었을 적에

많이 꺾어 보았노라.<만횡청류-478>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화자로 등장하여 대화를 나눈다. ‘며느리가 샛서방의 밥을 푸다가 놋 주걱 자루를 부러뜨렸다’는 사건이 노래의 핵심이다. 밥을 너무 꾹꾹 눌러 담다 보니 놋 주걱 자루가 부러졌다는 것이다. 며느리의 입장에서야 이보다 더 큰 낭패가 어디 있겠는가.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 밥그릇에 밥을 꾹꾹 눌러 담은 것은 그 밥그릇 임자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다만 그 사랑의 대상이 남편 아닌 샛서방인 점이 문제였다. 며느리는 죽음에 가까운 불벼락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벼락을 치는 대신 시어머니 자신도 그러한 과거가 있었다고 고백하는 게 아닌가. 그 덕에 숨 막히는 긴장은 극적으로 해소되었다. ‘놋 주걱 자루를 부러뜨린 사건’으로 ‘샛서방과의 사랑’을 절묘하게 노출시켰다. 기가 막히는 기지(機智)와 해학이다. 불륜이 자아내는 무겁고 탁한 분위기가 비교적 가벼운 느낌의 해학으로 바뀌는 반전의 메커니즘이야말로 탁월한 은유의 소산이었다.

노래 내용의 핵심은 불륜이다. ‘서방 있는 젊은 여인이 샛서방을 두고 있다’는 서사적 문맥이 이 노래에는 들어 있다. 그 문맥 속에는 다양한 상황이 내포되어 있다. 서방이 있음에도 샛서방을 갖게 된 이유가 바로 그 다양한 상황들의 출발점이다. 며느리의 본남편은 나이가 어리거나 반대로 아주 늙은 서방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젊지만 성적으로 무능력한 서방일 수도 있다. 어떤 유형의 서방이든 이 여성을 성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으리라. 그래서 며느리는 샛서방을 두게 되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샛서방에 대한 사랑은 ‘그의 밥을 꾹꾹 눌러 퍼 담는 행위’로 암시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시어머니도 젊은 시절 그런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이다. 물론 노래 속의 내용을 당시의 세태로까지 확대시킬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노래는 노래일 뿐이고, 노래는 노래하는 자의 상상에서 만들어진 언어적 구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당시 사람들은 음으로 양으로 이 노래를 부르며 자신들의 현실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 노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성 문제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거나 쥐고자 했다는 점이다. 이 노래의 작자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지배층이 만들어낸 열녀담론을 통해 여성들의 성적 결정권을 억압해온 남성 위주의 반 생태적 인습과 제도에 반역을 꾀함으로써 성에 관한 자연적 질서를 회복하고자 한 시도의 결과로 보는 것이 옳다.

 

다음은 <비파노래>.

 

비파야, 너는 어찌 가는 곳마다 앙알거리느냐?

홀쭉한 목을 둘러 안고 움파 같은 손으로 배를 잡아 뜯는데

앙알거리지 않을 소냐!

아마도

크고 작은 구슬이 옥 소반에 떨어지는 소리는 너뿐일 거야.<만횡청류-536>

 

비파는 아름다운 여성을 닮은 악기이다. 비파의 모습, 아름다운 소리, 연주할 때 비파를 잡는 모습 등이 노래의 중심 소재다. 두 명의 화자가 등장하여 대화를 주고받는다. 비파를 불러낸 화자가 ‘왜 가는 곳마다 앙알거리느냐?’고 묻자 상대 화자인 비파는 ‘홀쭉한 목을 둘러 안고 움파 같은 손으로 배를 잡아 뜯는데 앙알거리지 않을쏘냐?’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시 처음의 화자는 ‘아마도 크고 작은 구슬이 옥 소반에 떨어지는 소리는 너뿐일 것’이라고 감탄한다. 노래의 핵심은 ‘앙알거리는 비파의 소리, 가는 목을 둘러 당겨 안은 채 희고 가냘픈 손으로 배를 잡아 뜯는 듯한 연주 태도 등에 내용 파악의 열쇠가 있다. ‘가는 목을 안고 배를 잡아 뜯으니 앙알거리지 않을 수 없다’는 요지의 언술은 외견상 비파 연주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내용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적 의미는 다르다. 우선 비파를 생명체로 설정한 점, 목이나 배 등 인간의 육체를 끌어온 점, 그 육체에 손을 대니 소리를 내는 것으로 묘사한 점 등은 작자의 실제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지막 부분 ‘크고 작은 구슬이 옥 소반에 떨어지는 소리’의 크고 작은 구슬은 여성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노래의 주 화자는 남성, 상대 화자인 비파는 여성이다. 노래의 작자는 비파의 모습에서 여인을, 비파 연주 모습 혹은 그 소리를 통해 여인과 벌이는 사랑의 행위를 각각 떠올린 것이다. 비파와 비파 연주자는 사랑하는 남녀와 유사성을 가졌다고 보았음이 분명하다. 비파 연주자가 비파를 다루는 행위는 남자가 여자를 애무하는 행위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가. 비파를 연주할 때 울려 나오는 소리는 남자가 여자를 애무할 때 여자가 토해내는 기쁨의 소리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비유 구조의 바탕이다. 그러나 노래의 문면에는 남자와 여자, 혹은 남녀 간의 애정에 관한 말은 한 마디도 노출되고 있지 않다. 세련된 악기 이야기를 펼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심하게 하면서도 이면적으로는 도에 넘치는 외설적 이야기를 펼치는 범상치 않은 표현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사랑을 나눌 때 여성이 느끼는 쾌락의 실황을 내용으로 한다. 편의상 주 화자로 남성 화자를 등장시켰을 뿐, 노래의 실질적 주체는 여성이다. 이 시기에 쾌락 추구의 성 담론을 이처럼 과감하게 펼친 것은 사회의 이면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을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입장에서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남성주도의 이념사회에 대한 반역인 동시에 여성들의 ‘성적 주체성’에 대한 깨달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자는 왜 비파를 소도구로 사용했을까. 작자는 은유를 자기검열 혹은 자기보호의 효과적인 장치로 여겼음에 분명하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잠재된 꿈의 내용이 외현된 꿈의 내용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마음의 검열관’이 자리 잡고 있다 했다. 자기검열의 무의식적 결과를 도출하는 수단이 바로 은유다. 작자 자신 혹은 작자계층의 집단적 욕구[성욕과 쾌락의 자유로운 표출 및 향수를 통한 성적 주체성의 확인]를 드러내기 위해 끌어온 비파의 의미적 명징성에는 한계가 있다. 그 점에 작자의 의도가 숨어 있다. 수용자나 해석자의 능력에 맡겨둘 수밖에 없을 만큼 이 노래의 은유적 표현은 애매하다. 작자는 자기검열을 통해, 외설을 노래함으로써 당할 수 있는 사회적 제재로부터의 도피처를 마련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경우 은유가 훨씬 창조적이고 심층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건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한다. 사실 노래의 외설적 의도나 의미가 쉽게 간파될 수도 있었고, 단순한 ‘비파노래’로 이해되는 데 그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작자로서 손해 볼 이유가 없었던 것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남성중심의 사회가 자행하던 성적 억압에 맞서 그들 스스로 시도한 첫 단계의 반역이 바로 이런 노래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 성을 노래한 결과는 어떠했나

 

 

조선조의 열녀담론은 반자연적⋅반생태주의적 산물이었다. 그 속에서 여성들은 고작 한숨을 내쉬거나 측은한 신세타령으로 가슴 속의 응어리들을 삭이며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것으로 알고들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 생태적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 당시 여성들이었다. 노래를 통한 가슴 속 응어리의 해소가 바로 그 방법이었다. 남성중심의 성 담론이나 열녀담론에 대한 반역의 의지를 노랫말에 숨겨놓거나 과감히 드러냄으로써 억눌렸던 리비도의 해소는 가능했고, 몸도 얼마간 자연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다. 노래를 통해서이긴 하나, 남녀가 성적 쾌락을 공유하는 수준을 넘어 여성이 관념 차원의 주도권이나마 쥐게 된 점이야말로 여성이 비로소 성의 향유를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남녀가 함께 성행위를 하면서도 쾌락을 표현할 경우 가차 없이 ‘음탕한 여자’로 매도되던 것이 당대의 불평등 구조였다. 그런 억압을 극복하고 성적 쾌락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몸으로 지각하는 자연의 질서에 부합하는 일임을 깨닫게 되었으니, 「만횡청류」를 통해 에코페미니즘적 성 담론은 제대로 구현된 셈이다.

「만횡청류」 에코페미니즘의 가장 큰 부분은 ‘은유를 통한 여성의 존재확인,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통한 자연성의 회복, 여성의 성적 주체성과 자신감의 확립’ 등으로 구체화된다. 노래를 통해 반 생태주의적 열녀담론을 깨는 데서 남성중심 사회에 대한 반역은 시작된 셈이다. 사실 가장 높은 수준의 생태주의는 자연 혹은 자연스러움의 표준을 자신의 욕망에 맞춤으로써 스스로 성적 쾌락을 찾아 나서는 내용의 노래들이다. 남성 중심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순종하는 여성들과 달리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성적 쾌락을 탐닉하는 여성들의 노래는 반 생태주의적 억압에 대한 반항의 선언이다. 아울러 당당한 자신감의 표출이야말로 가장 수준 높은 에코페미니즘적 성 담론임을 「만횡청류」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억압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같은 일이라고 인식하는 데서 「만횡청류」식 에코페미니즘의 단서는 분명해진다. 자연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관점에 설 때 비로소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성적 쾌락을 느끼는 존재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사이에 균형과 조화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이런 노래들이야말로 생명 평등주의 성 담론의 구현일 수 있는 것이다.

 

신윤복의 <단오풍정>

 

조규익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아너 펠로우 교수(Honor Soongsil Fellowship Professor)’. 인문대 학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소장. 도남국문학상・성산학술상・한국시조학술상 등을 수상. LG 연암재단 해외연구교수로 UCLA에서 ‘재미한인 이민문학’을, 풀브라이트 학자(Fulbright Scholar)로 OSU에서 ‘해외한인문학과 비교문학’을 연구. <<조선조 악장 연구>>・<<북한문학사와 고전시가>>・<<고전시가의 변이와 지속>> 외 다수의 저・편・역서와 논문들을 발표했음.

 <<정형시학>> 23, 사단법인 열린시조학회, 2019. 6. 2019년 여름호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