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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2.15 이정석 박사의 새 책 <<재일 조선인 문학의 존재양상>> 출간
- 2009.11.12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한국기독교 예술을 찾아서'(11.13) 1
- 2008.09.23 찰나와 영원의 경계, 그 깨달음의 미학-나옹화상의 깨달음과 시가
- 2008.06.16 '마음의 붓'이 그려낸 '성-속' 통합의 서정-<보현시원가>의 서원(誓願)과 미학
- 2008.03.07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 없는데, 너 홀로 내 앞에 있구나"-연행록의 교과서, 그 치밀한 해석적 시각 :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 2007.12.12 안민(安民)의 불국토 건설, 그 이상과 현실-<안민가(安民歌)의 내용미학-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19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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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한국기독교 예술을 찾아서'(11.13)
2009 년 11 월 10 일 화17:44:25 교수신문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소장 조규익)는 오는 13일 숭실대 한경직기념관에서 ‘한국 기독교 예술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2009년 전국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박선영 숭실대 교수는 「박목월 초기시의 공간은유를 주제로 발표하고 박슬기 서울대 교수가 토론에 나선다. 차봉준 숭실대 교수는 「백도기의 ‘본시오 빌라도의 수기’연구」를 선보이고 이형진 홍익대 교수가 토론한다. 박영정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은 「1920년대 초 주일학교 공연 레퍼토리 분석-아동가극 대본을 중심으로」를 발제한다. 이승희 성균관대 교수가 토론자다. 이어 3부에서는 공기태 계명대 교수가 「미주 한인교회의 역사와 성가대의 현황」을 발표하고 문숙희 한국문예연구소 연구원이 토론에 나선다. 화가 채창완 씨는 「한국현대기독교미술의 반성과 과제」를 발제할 예정이다. 이정구 성균관대 교수는 「한국 교회 건축의 실태」를 발표하며, 이상진 숭실대 교수가 토론에 참석한다. 종합토론은 박정신 숭실대 교수가 좌장으로 참여해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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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 소식] 《세계철학대회의 반성과 한국철학의 전망》외
조선일보 원문링크
■한국철학회(회장 황경식)는 14일 오전 10시 건국대 산학협동관 223호에서 《세계철학대회의 반성과 한국철학의 전망》이란 주제로 2009년 추계학술대회를 연다. 〈영미철학 전통에 대한 한국철학의 대응〉(김기현), 〈유럽철학 전통에 대한 한국철학의 대응〉(홍윤기) 등 6편의 논문이 발표된다. (02)450-3382
■한국문학연구학회(회장 김영민)는 연세대 국학연구원 HK사업단과 공동으로 14일 오전 10시 연세대 백양관 211호에서 《제도로서의 '독자'》란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 〈근대초기 독자층의 형성과 매체의 역할〉(전은경), 〈일제 말기 소설 독자층의 분화〉(천정환) 등이 발표된다. (02)2123-3501
■박종훈 단국대 도예학과 교수(강진 도예연구소 소장)의 〈박종훈 도예전〉이 11일부터 17일까지 서울 관훈동 가나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다. 청자에서 금·옻·도자까지 다양한 도예 작품이 전시된다. (02)734-1333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소장 조규익)는 13일 오후 1시 한경직기념관에서 《한국 기독교 예술을 찾아서》란 주제로 학술대회를 갖는다. 〈1920년대 초 주일학교 공연 레퍼토리 분석〉 〈한국 교회 건축의 실태〉 등이 발표된다. (02)820-0846
■박성원 등 한국의 공예작가 26명의 작품을 전시하는 제33회 필라델피아미술관 크라프트쇼가 11일부터 15일까지 미국 필라델피아 펜실베이니아 컨벤션센터에서 열린다. 필라델피아크라프트쇼는 미국 최대 공예작가 쇼로, 올해는 한국이 초대국가로 선정돼 한국 공예를 집중적으로 소개하게 된다. 문의 한국공예문화진흥원 (02)733-9040
찰나와 영원의 경계, 그 깨달음의 미학
-나옹화상의 시가와 구원의 메시지-
조규익
Ⅰ.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어찌 할 것인가
타인과의 관계를 전제로 자신을 인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하이데거(M. Heidegger)는 ‘세계에 던져진 현존재’로서 자신을 개인적 주체로 발견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고 했다. 이처럼 남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 인간이긴 하나, 남과 구별되는 개별자로서의 ‘나’는 분명 유일한 존재다. 말하자면 ‘본래의 자기’, 즉 실존적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고 보는 관점도 이런 입장에서 나왔을 것이다.
현세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고뇌란 무엇인가. 바로 생로병사의 짐이다. 태어나고 죽는 일, 그 가운데 죽음은 인간이 전존재를 투사하여 알아내고자 해도 결코 만만하게 해답이 손에 잡히지 않는 문제다. 태어나 살다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한 인간의 일생이라 한다면, 죽음은 액면 그대로 종말이다. 존재의 무화(無化)가 죽음이기 때문에, 실존의 범주로부터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에게 죽음이란 무시무시한 형벌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 죽음 이후의 단계에 대한 무지 등은 인간을 벗어나기 어려운 절망감으로 몰아넣는다.
허무감을 포함한 그 절망감은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더욱더 심화시킨다. 그 지점에서 인간은 종교를 만난다. 그러나 종교에 귀의한다고 하여 인간의 실존적 고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괴로움은 신앙의 강도(强度)에 단순히 반비례할 뿐이고, 깨달음의 단계에 이르러서야 인간은 어느 정도 실존적 고뇌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종교가 죽음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한다고 하지만, 그 구원의 정도는 깨달음의 진정성이나 강도에 달린 문제일 뿐이다. 그럴 경우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실존적 공간인 현실로부터 존재의 사라짐이 우주적 차원에서 그다지 엄청난 일은 아니라는 점, 존재의 사라짐이 종말이긴 하지만 어쩌면 액면 그대로의 종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 등을 흔들림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종교적 깨달음이다. 물론 그 깨달음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인간을 구제하는 기제(機制)로 작용한다.
‘인간은 고독이 두려워 사회를 만들었고, 죽음이 두려워 종교를 만들었다’는 스펜서(Herbert Spencer)의 말처럼 인간이 종교에 상정한 가장 직접적이고 강렬한 투쟁의 대상은 죽음이다. 죽음의 두려움을 해소할 수 있는 장치가 종교 속에 내재해 있다면, 그것은 ‘삶과 죽음의 하찮음’을 깨우치는 일 그 자체일 것이다. 말하자면 실존적 고뇌로부터의 초탈만이 깨달음의 대전제일 수 있다. 존재의 육신을 굴러다니는 돌이나 나무 조각 등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야 비로소 그 깨달음은 인간 실존으로 하여금 현실적 얽매임에서 초탈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범부들은 실존적 고뇌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탁월한 근기의 존재들만이 실존적 고뇌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맞서 싸운다고 모두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싸우는 자만이 어떤 형태로든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 깨달음이란 실존적 고뇌에 대한 처절한 투쟁과 성찰의 결과다.
『아함경』의 65(『관찰경(觀察經)』)는 ‘관찰’의 중요성을 설한 내용이다. ‘항상 방편을 써서 선정을 닦아 익혀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면 참답게 관찰할 수 있’는데, 제대로 관찰하지 못하므로 느낌을 즐겨 하고 집착한다고 했다. 집착을 인연하여 ‘존재’가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태어남이 있으며, 생을 인연하여 늙음과 앓음, 죽음과 걱정, 슬픔과 번민, 괴로움 등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 모두가 실존적 고뇌들이다. 비구가 선정에 들어 안으로 그 마음을 고요히 하면서 꾸준히 힘쓰고 방편을 쓰면 참답게 관찰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참다운 관찰’이란 깨달음의 전제조건이다. 실존적 고뇌에 대한 참다운 관찰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깨닫지 못한 무명(無明) 속의 대중을 이끌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을 통해 노래를 통해 대중을 구제하려 애쓴 나옹화상(懶翁和尙)이야말로 시대를 뛰어넘은 불교계의 진정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Ⅱ. 나옹, 진여자성(眞如自性)을 깨닫다
나옹화상의 깨달음 역시 실존적 고뇌로부터 출발했다. 채 피어나지도 않은 21살에 이웃 친구의 죽음을 보았고, 그 사건을 계기로 출가를 결행한 그였다. 사고(四苦)의 현장을 목격한 후 출가를 결행한 싯다르타와 같은 행적을 보여준 것이다. 출가하여 묘적암의 요연선사(了然禪師)로부터 게를 받고 여러 사찰을 순력하며 정진하다가 결국 원나라에 들어간 나옹화상은 지공화상(指空和尙)·평산처림(平山處林)·천암원장(千巖元長)·요당화상(了堂和尙)·박암화상(泊菴和尙) 등을 차례로 만나 도의 경지를 높였다. 그러나 그에게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스승은 지공화상과 평산처림이었는데, 훗날 회암사에 지공의 유골과 사리를 모신 것도 그 인연 때문이었다.
평산으로부터 임제선(臨濟禪)을 심수(心受)한 그가 주력한 것은 간화선(看話禪)이었다. 즉 옛 선사들의 공안(公案)을 참구(參究)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들어가는 참선법이 바로 그것이다. 임제종은 조계(曹溪)의 6조 혜능(慧能)으로부터 남악(南嶽)·마조(馬祖)·백장(百丈)·황벽(黃檗) 등을 거쳐 임제 의현(義玄)에 이르러 확립되었다. 원래 우리나라의 선풍은 임제종풍이었는데, 태고화상 보우(普愚)와 나옹 이후에 그것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렇다면 과연 나옹은 무엇을 깨달았으며, 대중들에게 무엇을 깨우치고자 했을까. 무엇보다 그가 갖고 있던 의문의 핵심은 ‘나란 무엇인가’에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친구의 죽음을 보며 실존적 고뇌를 느꼈을 것이고, 인간의 본질적인 면에 대한 탐구의 욕망 또한 갖게 되었을 것이다. 다음 시문은 깨치기 전의 나옹이 지은 게송이다.
선불장(選佛場) 안에 앉아
정신 차리고 자세히 보라
보고 듣는 것 다른 물건 아니요
원래 그것은 옛 주인이다
<김달진 역>
나옹이 스승 요연을 하직하고 여러 절들을 배회하다가 회암사에 와서 대중들에게 내렸다는 게송이 바로 이것이다. 출가한 후 보고 듣고 참구한 그것이 출가하기 이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 선방에 앉아 참되게 관찰한 결과 그 모든 것들이 나이며 내가 곧 내 주인이라는 사실 등을 강조한 내용이다. 나옹은 이 게송을 내린 뒤 4년을 부지런히 수도하다가 홀연히 도를 깨쳤고, 그 길로 중국에 가서 여러 스승들을 찾아 더 높은 도를 구했다.
그는 원나라에서 각처를 떠돌다가 스승 지공을 만났으며, 그에게서 임제선을 받았다. 그 스승에게 올린 깨달음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산과 물과 대지는 눈앞의 꽃이요
삼라만상도 또한 그러하도다
자성(自性)은 원래 청정한 줄 비로소 알았나니
티끌마다 세계마다가 다 법왕신(法王身)이네
<김달진 역>
비로소 그는 깨달음의 경지를 노래할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객관세계는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본래 주관적 의식 즉 자성으로 관조하니 온갖 삼라만상이 청정한 법신임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의 게송에서 강조되던 ‘나’는 대상을 만나면서 대상에 내재된 본래의 면목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깨달음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단계를 넘어서면서 깨닫기 이전과 깨달은 이후의 경지가 비로소 합일을 보게 된다는 내용이 지공에게 올린 다음의 게송에 나타난다.
모르면 산이나 강이 경계가 되고
깨치면 티끌마다 바로 온몸이네
모름과 깨침을 모두 다 쳐부쉈나니
닭은 아침마다 오경(五更)을 향해 우네
<김달진 역>
미(迷)와 오(悟)의 다름과 양자의 통합을 노래함으로써 ‘깨닫지 못함’ 뿐 아니라 ‘깨달음’ 자체도 뛰어넘는 경지로 나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이 노래의 내용적 핵심이다. 깨달으면 온 세상만물에 자아의 본래면목 혹은 본지풍광이 그대로 현출(現出)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친다면, ‘깨우치지 못함’과 ‘깨우침’은 분리된 채 모순의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양자는 ‘쳐부숨’을 통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뜻이 3행에 나타나 있고, 그러한 통합을 이루었다는 사실이 이 부분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닭이 아침마다 오경을 향해 우는’ 일이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이며, 피-아의 구분이 허물어진 합일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보여준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노래에 이어 ‘나도 아침마다 징소리를 듣는다’고 대답한 지공의 말은 피-아의 구분을 허문 경지, 아니 오히려 ‘피-아의 구분을 허문’ 일 자체도 뛰어넘는 경지를 노래한 것이나 아닐까.
그 뒤에도 나옹은 각지의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도력을 높이는데 진력함으로써 우리나라 선맥의 큰 봉우리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성도(成道)에만 주력할 수 없었던 것은 주변에 널린 불쌍한 중생들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나옹화상은 두 번의 깨달음을 얻은 셈인데, 진여자성(眞如自性)의 깨달음이 그 첫 번째이고, 자성의 깨달음을 얻지 못해 고뇌의 바다에서 헤매는 중생들의 실존에 대한 깨달음이 그 두 번째 것이다.
Ⅲ. 고해의 중생들을 노래로 인도하다
작자 문제로 학자들 간에 견해의 차이를 보이긴 하나, 나옹은 <서왕가>·<낙도가>·<승원가>·<참선곡> 등 네 편의 가사를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수도자의 신앙고백이자 무명에 갇혀있는 고해 중생들을 권면하여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선지식(善知識)의 호소라 할 수 있다.
일찍이 나옹은 방황과 수행, 참선을 통해 진여자성을 깨달았다. 그런데『법화문구4』에서는 ‘보리(菩提)의 도를 유익하게 하는 사람을 선지식’이라 했다. 보리를 추구하는 대중들에게 부처 말씀의 진리를 설하여 올바른 깨달음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 나옹의 뜻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근기가 높은 대상만이 터득할 수 있는 선문답보다 일상적인 말 문학으로서의 가사가 대중의 근기에 맞는다고 판단한 것이 나옹이었다. 그것은 고해 중생들에 대한 사랑의 발로였다.
그가 활약하던 당시의 고려는 내우외환으로 깊이 병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들이 수시로 침입하고, 안으로는 원나라 지배하의 권문세족들이 종교와 결탁하여 국가의 부와 권력을 독점함으로써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신흥 사대부 계층이 등장하여 불교 이념의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현실도 위기의식을 부채질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불교계의 선봉에 선 지도자 나옹은 사면초가에 빠진 불쌍한 백성들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예로부터 불교계에는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자족하는 인사들이 많았다. 이기적이고 소승적인 구도행각의 전형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자신보다 대중을 먼저 구제하는 것이 귀하다고 믿고 실천함으로써 깨달음을 완성시킨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나옹도 그런 범주에 속한다.
그는 중생들에게 ‘열심히 도를 닦아 서방정토로 가자’고 권면했다. 그 권유의 말이 가사형태로 결구되어 <서왕가>가 된 것이다. 내용 상 이 노래는 여섯 부분으로 나뉜다. ①‘나도 이럴망정~죽은 후에 속절없다’, ②‘저근 덧 생각하야~삼계바다 건네리라’, ③‘염불중생 실어두고~지옥은 갓갑도쇠’, ④‘이 보시소 어로신네~어느 날에 그칠손고’, ⑤‘저근 덧 생각하야~염불소래 요요하외’, ⑥‘어와 슬프다~나무아미타불’ 등이 그것이다.
①은 서사요, ⑥은 결사이며, ②~⑤는 본사다. ①은 죽음에 의해 허무해지는 인간 존재의 유한한 본질을 제시한 부분이다. 그러한 인생무상을 극복하기 위해 감행한 출가수행의 큰 뜻을 밝힌 것이 ②이며, 세속적 욕망과 그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지를 밝힌 것이 ③이다. ④에서는 염불공덕의 위대함을, ⑤에서는 염불공덕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극락세계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각각 노래했으며, 염불을 적극 권유한 것이 마지막 부분이다.
사실 <서왕가>는 인생의 허망함을 깨닫고 구도에 나선 나옹 자신의 일생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나옹은 어린 나이에 친구의 죽음을 보며 인생의 무상을 절감했다. 출가하여 공덕산 묘적암의 요연선사를 찾아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 내용이 바로 서사인 ①이다.
나도 이럴망정 세상에 인자(人子)러니
무상을 생각하니 다 거즛 것이로세
부모의 끼친 얼굴 죽은 후에 속절없다
나옹의 속명은 아원혜(牙元惠), 선관서령(善官署令)의 벼슬을 지낸 서구(瑞具)의 아들이었다. 부친의 벼슬이 현직은 아니었으나 세속적인 삶에 그다지 각박할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절친하던 친구의 죽음이 그로 하여금 인생의 무상을 절감하게 했다고 보아야 한다. 부모가 남겨 준 자신의 얼굴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는 ‘살아있는 것들’의 운명적 법칙을 깨달은 것이 바로 이 부분의 주된 내용이다.
<회암사.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 천보산 소재. 1328년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창건하여 조선 초기까지는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 옛 절터는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었음.>출가 후 나옹은 전국의 유명한 사찰들을 돌아다니며 수도에 전념하다가 1344년 양주의 회암사에서 크게 깨달았다. 그로부터 3년 뒤 원나라에 가서 지공을 만나 4년간 법을 배웠으며, 휴휴암(休休庵)에서 정진했고, 다시 자선사의 처림을 찾아 도를 닦았다. 그 후 육왕사에서 고목영(枯木榮)을 만나 불법을 논한 다음 복룡산의 천암장(千巖長)을 찾았다. 그 즈음 원나라 순제는 그를 연경 광제선사(廣濟禪寺)의 주지로 임명하고 금란가사를 보내주었다.
광제선사의 주지를 내놓은 그는 다시 지공을 찾았다가 1358년(공민왕 7)에 귀국하여, 오대산 상두암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 공민왕의 종용으로 신광사에 거주했고, 승과의 시관이 된 후 1361년부터 각지를 순력한 뒤 출가 후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은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왕사로 봉해진 뒤 송광사에 거주하다가 다시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고, 절을 중수했으며, 문수회(文殊會)를 통해 법명을 내외에 크게 떨쳤다.
대충 살펴본 그의 구도 행은 아무나 쉽게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종횡무진이었다. 특히 원나라에서 만난 지공과 처림은 그로 하여금 수행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그에게 임제선을 전수함으로써 우리나라 불교계의 선맥을 형성한 계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수도를 위한 그의 방황이나 순력은 <서왕가>의 둘째 부분에 그대로 나타난다.
적은 덧 생각하야 세사를 후리치고
부모께 하직하고 단표자 일납의로
청려장을 빗기 들고 명산을 차자들어
선지식을 친견하야 이 마음을 밝히리라
천경만론을 낫낫치 추심하야 육적을 잡으리라
허공마를 빗기 타고 마야검을 손에 들고
오온산 들어가니 제산은 첩첩하고
사상산이 더욱 높다 육근문두에 자취 없는 도적은
나며 들며 하는 중에 번뇌심을 베쳐놓고
지혜로 배를 무어 삼계바다 건너리라
‘선지식을 친견하여 마음을 밝히는 일’, ‘번뇌를 없애고 지혜로 배를 무어 삼계바다 건너는 일’ 등이 이 부분 내용의 골자이자 화자의 핵심적 의도다. 세속적 욕망에 비례하여 인생의 무상감도 늘어나기 때문에, 수도자들은 우선 그 욕망을 단진(斷盡)하고자 했다. 그러나 욕망의 단진이 말처럼 쉽지 않았으므로, 그 지혜를 찾아 많은 시간과 공력을 소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옹이 선지식을 친견하고자 우리나라와 원나라의 많은 사찰들을 순력했고, 법력이 높은 고승들을 찾아다닌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의 목표, 즉 ‘번뇌를 없애고 지혜로 배를 무어 삼계바다 건너는 일’은 수행자들 모두가 염원하는 바였다.
그렇다면 ‘삼계바다를 건넌다’는 것은 무엇인가. 욕심이 극성을 부리는 욕계(欲界)와 욕심이 없어진 색계(色界)를 건너 영적인 정신세계인 무색계(無色界)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나옹이 많은 선지식들을 만나며 경험한 깨달음의 순간들이야말로 ‘삼계바다’를 건너가는 순간들의 현현(顯現)이었던 것이다.
선지식들로부터 법을 배워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고 진여자성을 회복해야겠다는 결단을 중생들에게 말해주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 나옹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오욕칠정이나 세속적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가에 대하여 다시 역설할 필요가 있었다. 그 내용이 바로 <서왕가>의 세 번 째 부분에 나온다. 염불도 하지 않은 채 애욕에 잠겨 세월을 허송하고 사람마다 갖추고 있는 청정한 불성을 생각지도 못한 채 항하사같이 무수한 공덕을 내어 쓰지 못하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강조한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그래서 나옹은 ‘서왕’ 즉 극락세계가 멀어지고 지옥이 가깝다고 일갈한 것이다.
이렇게 어리석은 중생들을 꾸짖은 다음 염불공덕이 얼마나 크며, 그로 인해 도달하게 될 극락세계가 얼마나 장엄하고 아름다운지에 대하여 설명했다. <서왕가>의 네 번 째와 다섯 번째 부분에 나오는 것이 곧 그 내용이다.
백년 탐물은 하루아침 티끌이오
삼일 하온 염불은 백천만겁에 다함없는 보배로세
어와 이 보배 역천겁이불고하고
긍만세이 장금이리라
건곤이 넓다한들 이 마음에 미칠손가
일월이 밝다한들 이 마음에 미칠손가
삼세제불은 이 마음을 아르시고
육도중생은 이 마음을 저버릴새
삼계윤회를 어느 날에 그칠손가
⋮
화장바다 건네저어 극락세계 들어가니
칠보금지에 칠보망을 둘렀으니
구경하기 더욱 조해
구품연대에 염불소리 자자 있고
청학백학과 앵무공작과
금봉청봉은 하나니 염불일세
청풍이 건듯부니 염불소리 요요하외
‘하루살이 같은’ 인생 백년에 재물을 탐해 보아야 하루아침의 티끌만도 못하지만, 염불은 사흘 동안만 해도 백천만겁의 세월에 없어지지 않는 보배라고 했다. 또한 그 보배는 천겁을 지나도 낡지 않고 만세를 지나도 언제나 지금과 같다는 것이 화자의 확신이다. 세속의 욕심을 버리고 열심히 염불을 하면 극락에 들어갈 수 있는데, 삼세의 모든 부처들은 이 진리를 알고 있으나 육도의 중생들은 이 진리를 저버리니 안타깝다는 것이다.
중생들이 찾아가야 할 극락이란 어떤 곳인가. 칠보금지에 칠보망을 두른 곳, 아홉 종의 연꽃 대좌에 염불소리가 자자히 들리는 곳, 푸른 학·흰 학·앵무·공작새·금빛 봉황새·푸른 빛 봉황새가 염불 하는 곳이다. 불어오는 맑은 바람 속에 염불소리 아련하게 들려오는 곳이 극락이니, 세속의 욕망에 잠긴 중생들이 부지런히 염불하여 극락왕생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종결 부분에서 화자는 중생들에게 열심히 염불할 것을 강하게 권유하면서 노래의 끝을 맺는다. 따라서 이 노래는 나옹 스스로 경험한 구도와 깨달음의 과정을 바탕으로 들어놓은 신앙고백이자 대중 교화의 복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Ⅳ. 욕망의 짐을 벗고 가볍게 떠나라 하다
청산은 나더러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더러 티 없이 살라 하네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의 시문집인『나옹집』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이 시의 작자를 사람들은 나옹화상이라 한다. 누구는 당나라 시인 한산(寒山)의 작품이라 하기도 하고, 아예 작자 미상의 작품이라 하기도 한다. <청산송>이라 명명하고 싶은 이 시를 관통하는 주제나 정서는 ‘무욕의 가벼움’이다. 그런 점에서 작자를 나옹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나옹만이 가식에서 떠나 이런 노래를 지을 수 있으리라 보았을 것이다. 아니, 나옹이라면 종당엔 이런 노래를 지었어야 한다고 본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몇몇 가수들은 이 시를 다음과 같이 패러프레이즈하여 대중가요로 부른 것이나 아닐까.
사랑도 부질없어 미움도 부질없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버려 성냄도 벗어버려
하늘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사랑도 훨훨 미움도 훨훨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탐욕도 훨훨 성냄도 훨훨훨훨훨훨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사랑도 훨훨 미움도 훨훨
버려라 훨훨 벗어라 훨훨
탐욕도 훨훨 성냄도 훨훨훨훨훨훨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하덕규가 짓고 가수 양희은이 부른 <한계령>도 나옹의 <청산송>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양희은의 맑고 구성진 음색과 한계령의 초초함이 어울려 탈속의 분위기가 생생하게 살아나는 이 노래가 현대판 <청산송>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한계령 넘는 길>
저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산 저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산 저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어깨를 떠미네
물론 양자 모두 나옹의 시에 비해 부질없이 길어진 느낌의 노래들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애욕과 물욕에 찌든 현대인들의 고뇌를 훨훨 날려줄 것 같은 힘이 느껴지는 점도 사실이다. 애당초 간결·담백했던 나옹의 서정이 700여년 세월의 강을 건너며 매우 복잡해진 사람들의 내면을 담아내느라 이토록 장황해졌으리라.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벗어나기 위해 출가했고, 많은 선지식들을 찾아 문제해결에 몰두한 나옹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이 바로 ‘무욕의 가벼움’이었다. 그는 그것을 당대의 중생들 뿐 아니라 지금의 우리들에게도 사자후(獅子吼) 아닌 감미로운 발라드풍의 노래로 속삭이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사랑도 미움도 모두 벗어버리고’ ‘물처럼 바람처럼’ 살다가 가는 것.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야 극락세계가 어찌 멀리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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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행록의 교과서, 그 치밀한 해석적 시각 ;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
54세의 ‘타각’, 연행 길에 오르다
과거를 통해 벼슬길에 나아가 정적들과 머리 터지도록 싸우거나, 전야에 숨어 학문에 매진하거나. 17세기 조선의 지식인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둘 다 어려운 일이었지만,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음에도 포기한 채 후자를 택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쟁쟁한 노론 가문의 뛰어난 시인이자 화가이었던 노가재 김창업이 벼슬길을 버리고 세상일을 멀리한 것은 아버지 김수항이 당쟁의 와중에서 정적들에게 몰려 죽음을 당한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강하게 잡아끈 것은 학문이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욕이 벼슬길로부터의 유혹을 막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가 숙원이던 연행 길에 나선 것도, 방대하면서도 치밀한『연행일기』를 남긴 것도 그런 점을 입증한다. 그는 원래부터 중국의 산천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1712년 그의 형인 창집이 ‘사은 겸 삼절연공’ 사행의 정사로 떠나게 되었고, 결국 노가재는 ‘타각’의 자격으로 연행 길에 나설 수 있었다. 54세의 적지 않은 나이였다. 타각이란 사신 일행의 모든 물건을 감수(監守)하는 직책이었다. 그 자리가 하찮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명망 있는 노론 사대부가의 노가재가 맡을만한 직책은 아니었다. ‘조롱과 비난이 일시에 일어났고 친구들은 흔히 만류했다’는 노가재의 술회도 아마 그 때문에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노가재에게 연행 길은 ‘새로운 것’을 찾는 길이었고, 자기 가문이 오래도록 빠져 지내던 이념의 허와 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중국에 갈 수만 있으면 되었지 직책이 무슨 상관이랴!’는 것이 노가재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146일 간 북경을 다녀오면서 방대한『연행일기』와 137수의 기행 시 모음인 『연행훈지록』을 남긴 것도 중국 기행에 대한 절절한 욕구의 소산이었으리라. 19세기 중엽 동지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연경을 다녀와 『연원직지』를 남긴 김경선도 연행록을 남긴 선배들 가운데 노가재와 함께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등을 꼽았다. 노가재의 연행록이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이고, 후대 연행사들에게 교과서의 위치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사실이다.
노가재의 증조부는 서인 청서파의 영수이자 척화파의 거두인 청음 김상헌이고, 부친인 김수항은 노론의 영수였다. 가계로만 본다면 노가재는 청에 대한 복수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야 마땅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지니고 있던 화이관이나 소중화 의식이 한으로 맺힐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냉철하리만큼 객관적인 태도로 중원의 문물을 대하고 관찰한 그였다.
화이의 차별적 세계관을 바꾸어가다
노가재는 십삼산의 찰원에서 장기모(張奇謨)라는 호인(胡人) 어린이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너희들은 달자(㺚子)와 친교를 맺느냐?”
“이적의 사람이 어찌 우리들 중국과 어울려 친교를 맺겠습니까?”
“우리 고려 역시 동이(東夷)인데, 네가 우리들을 볼 때 역시 달자와 한 가지로 보느냐?”
“귀국은 상등인이요 달자는 하류인인데, 어찌 해서 한가지이겠습니까?”
“달자들도 머리를 깎으며 너희들도 머리를 깎는데, 무엇으로써 중국과 이적을 가리느냐?”
“우리들은 머리를 깎지만 예가 있고, 달자는 머리도 깎고 예도 없습니다.”
나는, “말이 이치에 맞는다. 네 나이 아직 어린데도 능히 이적과 중국의 구분을 하니, 귀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구나! 고려는 비록 동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의관문물이 모두 중국을 모방하기 때문에 ‘소중화’라는 칭호가 있다. 지금의 이 문답이 누설되면 좋지 않으니 비밀로 해야 된다.”고 했다.
노가재는 내심 청국 사람들을 지목하여 ‘달자’라고 한 것인데, 아이는 그것을 몽고로 오인하여 답변한 것이었다. 이렇게 처음에 노가재는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우월감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그러나 『연행일기』의 후반으로 갈수록 청국을 이적으로 보던 관점은 약간씩 변해 간다. 자기 존재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그런 변화는 생겨날 수 있었다. 연경에서 중국 사람들을 보며 그들과 대비되는 자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객관화 시키게 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몸집이 장대하며 모양이 우뚝한 자들이 많은데, 우리나라 사람들을 둘러보니 본래 스스로 작은데다 또 먼 길의 풍진에 시달린 뒤라 세 사신을 빼고는 모두가 다 꾀죄죄하고 착용한 의관도 또한 흔히 여기에 와서 돈을 주고서 빈 것이기 때문에, 도포는 길이가 맞지 않고 사모가 눈까지 내려와 보기에 사람 같지 않으니, 더욱 한탄할 일이다.
이 말은 당시 모습에 대한 사실적 묘사이겠으나, 사실 노가재의 의식 변화를 전제해야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내용이다. 이 점은 황궁 묘사에서도 확인된다. 태화전 앞 12향로에 침향을 태우던 관례를 없앤 데 대하여 “황제가 검소한 것을 숭상하고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인 것 같다” 거나 황궁에 대하여 “장려하고 정제함이 정말 황제의 거처다웠다” 는 등의 언급들이 그런 사례들이다.
청나라 지식인들과 교유함으로써 노가재의 의식변화는 빨라졌다. 예컨대 젊은 학자 이원영(李元英)과의 교제는 상당 기간 지속되는데, 그런 관계를 통해 양국 지식인들이 갖고 있던 문화의식의 동질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각종 물화의 풍부함이나 찬란함, 건축·의복·음식·기명 등과 각종 제도의 훌륭함, 도서편찬 같은 문화 사업들의 놀라움 등 그들의 실상을 접하면서 노가재는 자신의 인식을 바꾸게 되었던 것이다.
만남을 통해 깨달음을 얻다
그는 천산의 영안사(永安寺)에서 불승 숭혜(崇慧)를 만났다. 그와의 만남은 불교와의 만남이었고,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라는 평등의식과의 만남이었다. 헤어질 때 “사람에게 안팎은 있지만 불성은 한가집니다.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라고 던진 숭혜의 말은 노가재로 하여금 그간 굳게 지녀오던 차별의 편견을 깨고 새로운 안목을 갖게 해주었다. 그것은 용천사의 중 운생(雲生)에게 보낸 편지글 속의 “온전히 도력(道力)에 힘입어 영경(靈境)을 두루 밟았으니 구제받음의 기쁨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는 술회에서도 나타난다. 수행하던 젊은 승려 낭연(朗然)에게 준 시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 없는데/너 홀로 내 앞에 있구나/함께 용천사에서 잤으니/응당 전생의 인연 있음 알겠네”도 그런 깨달음의 기쁨을 드러낸다. 그런 깨달음의 실체야말로 인간의 본질과 참된 도리 그 자체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연행을 통해서 노가재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과 문물을 만났다. 달자들은 물론 시정인(市井人)들, 벼슬아치, 학자, 예술인 등 다양했다. 옥전현에 묵을 때는 선비 하나가 춘화도를 팔기 위해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 대목엔 춘화도에 미련과 흥미를 보이는 서장관의 모습도 나타나고, “유학을 공부하는 성문(聖門)의 제자로서 어떻게 춘화도를 품고 와서 남에게 보이시오?”라고 핀잔하는 노가재의 기개도 나타난다. 산해관을 지나면서는 반군 이자성에게 성문을 열어준 오삼계의 사실(史實)에 대한 노가재 자신의 사평(史評)을 개진했는데, 논리가 당당하고 정연하다. 오삼계가 어차피 깨질 산해관을 포기하고 황제의 원수를 갚았으니, ‘임시변통의 의리’는 지켰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명나라의 왕실을 세우지 못하여 천하 사람들의 소망을 저버렸고, 스스로 왕을 참칭하다가 끝내 패망했으니, 그는 이름을 망치고 절의도 잃었다고 비판했다. 이구동성으로 오삼계의 모든 행적을 비판하는 역사서들에 대한 노가재의 반론은 조선 선비의 균형 잡힌 혜안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걸출하다.
연경에 다녀오기까지 걸린 기간은 146일, 총 거리는 6천 28리인데, 연경에서 출입하거나 길에서 돌아다닌 것이 6백 75리이며, 시문(詩文) 402편을 얻었다고 노가재 스스로 『연행일기』의 말미에서 밝혔다. 그는 왜 그곳에 가려 했으며, 책의 말미에 돌아다닌 거리와 얻은 시문을 특별히 들어 놓았을까. 중국에 가기 전 노가재는 중국에 관한 서책들을 많이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오랑캐의 차지가 되긴 했지만, 중국은 세계 그 자체 혹은 세계를 만나는 창이었다. 어쩌면 그는 오랑캐도 사람임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나 아닐까. 증조부가 청나라에 적극 대항하던 김상헌이었고, 부친 역시 청국을 이적시하던 노론의 영수였다. 노가재는 분명 그런 가문의 이념으로부터 벗어나 세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게 지식인의 본령이니, 노가재는 그 본령에 충실하고자 했을 따름이었다.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노가재 스스로 변화의 기미를 준비하던 17세기 조선 지식사회의 대표로 자리매김 될 만한 단서가 바로 이 책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안민(安民)의 불국토 건설, 그 이상과 현실
-<안민가(安民歌)>의 내용미학-
조규익
Ⅰ. 정치, 백성, 그리고 질서와 무질서
국민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정치의 제1원칙이고, 국민이 편안하려면 국가의 질서가 잡혀야 한다. 무질서 속에 팽개쳐진 국민들이 부유할 수도, 편안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라 했다. 바르게 하는 것 즉 나라를 바로잡는 것은 왕의 책임이다. 왕이 솔선하여 바르다면 아무도 감히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노나라의 대부 계강자(季康子)에게 건네준 공자의 가르침이었다.
서양에서 정치(politics)란 용어는 원래 도시국가의 뜻을 지닌 폴리스(polis)의 파생어 폴리티쿠스(politikus)에서 나왔다. 폴리스의 전역에 걸쳐 살아가던 시민들은 민회, 평의회, 행정관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도시국가의 정치에 관여했다. 그런 시공에서 이루어지던 모든 정치행위는 공동체의 삶을 바르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중점이 놓여 있었다.
<<관정경(灌頂經)>>에서는 바르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정치라 했으니, 정치에 대한 불교의 관점도 유교나 서양과 다를 바 없다. 이보다 좀 더 나아간 것이 <<출요경(出曜經)>>‘척요품’의 관점이다. 즉 “견고한 것을 견고하다고 알고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교하지 않다고 알면 그는 곧 견고함을 구하는 것이니, ‘바른 다스림’으로 근본을 삼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정치란 바른 생각에 입각한 ‘바른 사유(思惟)’라는 것이다. 만약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 생각하고 견고한 것을 견고하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 견고한 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삿된 소견 때문’이라 했다.
그러니 사람으로 하여금 삿된 소견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치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면 당연히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삿된 소견을 갖지 않게 된다. 삿된 소견을 갖지 않아야 임금은 임금의 노릇을 신하는 신하의 노릇을 백성은 백성을 노릇을 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는 모든 질서가 바르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우리 역사상 어느 시기에나 있었던 정치적 안정과 혼란의 원인은 정파들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상충되거나 정치 행위 당사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직분을 망각한데서 찾을 수 있다. 그 결과 외세의 침탈을 불러오거나 모순의 극대화로 인해 내부 구조가 붕괴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상황에 처할 경우 대부분의 지배자는 통치기반의 강화를 위해 애쓰고자 하나, 대개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정치세력 간의 갈등이나 부침이 극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들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시대가 신라 경덕왕의 치세(742~765)였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시기와 달리 이 시기에 향가가 많이 등장했고, 그 가운데 ‘정치적 담론’으로 해석할만한 <안민가(安民歌)>가 제진(製進)되었다는 사실이다.
경덕왕대의 향가로 기록된 <도솔가(兜率歌)>,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안민가> 등은 하나같이 시대 배경이나 내용의 면에서 의미심장한 노래들이다. 왕을 중심으로 한 정파의 다툼과 그 해결을 상징적·제의적으로 드러낸 <도솔가>, 신라시대 관음신앙의 실체를 엿볼 수 있는 <도천수관음가>, 영웅적 인간상에 대한 찬양으로서 개인 서정의 실체를 보여주는 <찬기파랑가>, 정치의 요체와 국가적 지향점을 노래한 <안민가> 등이 그것들인데, 관점에 따라 노래들의 정신이나 주제는 달리 파악될 수 있겠지만, 당대의 사회상을 추측할 만한 단서들은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 이 글에서는 <안민가>가 드러내고 있는 이상과 현실의 경계 혹은 착종(錯綜)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안민가>에서 노래된 치도(治道)의 요체
<<삼국유사>> 권2 <기이> 제2(하)의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조에 다음과 같은 설화와 노래가 실려 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과 삼산의 신 등이 가끔 현신하여 대궐 뜰에 모셨다.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 누상에 앉아 좌우에게 물었다. “누가 능히 도중에서 영복승 한 사람을 얻어 오겠는가?” 마침 위의가 선명하고 조촐한 한 대덕이 바람을 쏘이며 거닐고 있었다. 좌우가 바라보고 데려왔다. 왕은 말했다. “내가 말한 영승이 아니로다.” 왕은 그를 물리쳤다. 또 한 중이 가사를 입고, 앵통을 지고, 남으로부터 왔다. 왕이 기뻐하며 누상으로 맞이하여 그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담겨 있을 뿐이었다. 왕은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중은 대답했다. “충담이라 하옵니다.” “그럼, 어디로부터 돌아오시는가.” 충담은 여쭈었다. “승려들은 늘 중삼·중구일을 중시하여 차를 달여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리는데, 오늘도 드리고 돌아오는 길이옵니다.” 왕은 말했다. “과인에게도 한 잔의 차를 마실 인연이 있을 수 있겠소?” 충담이 곧 차를 달여 드렸는데, 그 차의 기미(氣味)가 이상하고 다구 속에 이상한 향기가 강했다. 왕은 또 물었다. “짐이 일찍이 들으니 ‘선사가 지은 <찬기파랑가>가 그 뜻이 심히 높다’고 하니, 과연 그러하오?” 충담은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왕은 말했다. “그럼 짐을 위해 <안민가>를 지어 주시오.” 충담은 곧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아름답게 여겨 왕사로 봉했으나, 충담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 <안민가>는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비요
신하는 따스한 어미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신다면
백성이 사랑을 알 겁니다
꾸물꾸물 살아가는 중생들
이들을 먹여 살리소서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실진대
나라 보전할 길 아시리다
아으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시면
나라가 태평하리이다
이 노래는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금은~알 겁니다’, ‘꾸물꾸물~아시리다’, ‘아으~태평하리이다’ 등이 그것들이다. 1단은 대전제, 2단은 방법론, 3단은 1단을 좀 더 구체화시켜 도출해낸 주제단락이다. ‘백성을 사랑함’, ‘백성을 먹여살림/나라 보전함’, ‘나라가 태평함’ 등은 각 단의 내용적 핵심이다.
임금과 신하, 혹은 부자(父子)의 직분을 엄수하는 것이 이상 정치의 요체임은 <<논어>>에서도 설명된 바 있다. 제나라 경공(景公)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다우면 된다”고 답했다. 그러자 경공은 “맞습니다. 만약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면 비록 식량이 넉넉하다 한들 내 어찌 밥을 얻어먹고 살 수 있으리오?”라고 공자의 현답(賢答)에 맞장구를 쳤다.
이런 <<논어>>의 말 가운데 부자(父子)를 백성으로 대치한 것이 <안민가>의 담론이니, 선학들이 <안민가>의 배경사상을 유가(儒家)로 본 것도 응당 그럴 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임금이 임금노릇을, 신하가 신하노릇을, 백성이 백성노릇을 제대로 한다면 나라가 태평할 것’이라는 말이 어찌 유가만의 논리일 것이며, 사상(思想)의 차원으로까지 격을 높여 따질 내용이겠는가. ‘누구나 제 할 일만 제대로 하면 세상일은 저절로 잘 돌아갈 것’이라는 평범한 시정(市井)의 담론에 불과한 것을 세상의 학인들은 지나치게 고답적으로 따져왔을 뿐이다.
문제는 정치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현책(賢策)을 노래에 담아달라는 왕의 요청에 이와 같이 평범한 시정의 논리로 대꾸한 충담의 의도에 있을 것이다. 신라 중대에 속하는 경덕왕 대는 체제의 모순이 서서히 현실화 하던 시기였다. 지배세력 내부의 대립과 모순이 표면화 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정치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귀족세력이 부상하면서 위기를 느낀 경덕왕은 왕권의 강화를 위한 개혁조치들을 시행하지만, 그러한 개혁정책들이 쉽게 정착되지는 못했다. 왕 혼자의 힘으로 구조적인 모순을 혁파하고 귀족세력이 이미 권력의 축으로 대두된 현실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특히 왕 자신이 후사(後嗣)와 관련된 무리수를 범함으로써 추락된 왕권은 치명상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식으로 후사를 삼으려는 욕망’을 왕권강화책과 동일시한 것이 경덕왕이 범한 무리수였는데, 그 당연한 결과로서 후사인 혜공왕이 피살되고, 차후 신라의 정치는 혼란기에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경덕왕은 충담을 만났다. 그렇다고 왕이 충담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당대에 유행하던 <찬기파랑가>를 통해 그 작자인 충담을 왕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충담과의 대화에서 왕은 “짐이 일찍이 들으니 ‘선사가 지은 <찬기파랑사뇌가>가 그 뜻이 심히 높다’고 하니 과연 그러한가요?”라고 물었다. 그에 대해 충담사는 “그러하옵니다”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건넸다. 그렇다면 일말의 망설임이나 겸양의 의도도 없었던 충담사의 대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왕이 작자인 충담에게 확인하고자 한 것은 ‘심히 높다’는 노래의 뜻인데, 그 경우 뜻이란 작자의 의도나 그로부터 구현된 주제의식일 것이다.
그것은 ‘기파랑’이란 실존인물의 덕망이 왕을 비롯한 당대 권력층의 일반적인 성향과 현격하게 다르다는 점을 암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충담은 기파랑과 함께 권력에 발을 담그지 않으면서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던, 일종의 ‘재야 덕망가’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권력을 잡지는 않았으나, 대중으로부터 권력 못지않은 사랑과 신뢰를 받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왕이 충담에게 ‘이안민(理安民)’의 현책을 <찬기파랑가>와 같은 노래의 형태로 요청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감동한 왕이 노래를 받은 다음 충담에게 왕사(王師)의 자리를 주었으나 그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은 점도 충담의 정신이나 현실적인 위치를 암시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왕사의 자리를 사양했던 것일까. 애당초 자신이 정치에 뜻이 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정치 현실이 힘없는 재야 명망가가 나선다고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보지 않은 점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그런 생각의 실천을 뒷받침할만한 힘이 필요한 것이 정치의 현실이다. 실현시키지 못할 아이디어라면 꿈에 그칠 뿐이고, 그런 아이디어를 지닌 인물은 단순한 ‘이상가(理想家)’ 이상은 될 수 없음을 충담은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재야 명망가의 자리를 고수하고 임금에게 실천자적 역할의 짐을 떠넘겼을 가능성이 크다.
노래 속의 핵심은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에 있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제대로 ‘안하는’, 당대의 현실이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말하자면 당대에 귀족세력이 부상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있는 점을 충담은 적절하게 지적했고, 왕은 노래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셈이었다.
경덕왕이 왕권 강화에 나서서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들을 시행한 것도 <안민가>의 제진(製進)과 맥을 같이 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문박사와 누각박사(漏刻博士) 등을 두어 기후의 변화를 살피고 백성들의 삶을 배려하려 한 것은 위민정치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도 경덕왕의 개혁정치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사실 충담이 눈을 주었던 대상은 백성이었다. 그의 눈에 밟힌 것은 고통 받는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이 잘 살면 나라는 태평해지는 것이고,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야말로 모든 정치의 대본(大本)이라고 본 것이다. 백성들이 잘 먹고 살아야 ‘이상적인 불국토’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 것이 충담의 철학이었다. 백성들이 제대로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지배계층은 권력 싸움들을 그만 하고 제 할 일들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 충담의 정치철학이기도 했다.
이처럼 노래에 담긴 뜻은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일’, ‘모두 제 할 일들을 다 하는 일’ 등인데, 임금으로선 그 속뜻을 좀 더 다르게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라는 두 조항에서 전자를 ‘임금다운 권력의 회복’으로, 후자를 ‘권신(權臣)들을 다잡아 신하다운 종속의 위치로 내리는 일’로 각각 해석했을 것이다.
민심을 읽고 있던 충담으로서는 임금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민심을 얻는 지름길이며 궁극적으로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일임을 ‘넌지시’ 알려주려 했을 것이고, <안민가>는 그러한 정치적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경덕왕이 귀정문 누상에서 기다린 ‘영복승’이란 ‘민심의 향배를 읽을 줄 아는, 정치적 식견을 지닌 승려’였을 것이고, 그에게 요청한 ‘이안민의 노래’는 난국에 처한 임금이 당장 취해야 할 정치적 조치를 담은 담론이었던 것이다.
Ⅲ. <안민가>의 정신, 그 지속과 변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상하로 묶여 국가가 지속되는 한, <안민가>의 정신은 정치의 대전제로 살아남기 마련이다. 다만 노래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주제의식이 달라질 수 있을 뿐이다. 정치의식을 담은 노래는 조선조의 악장이나 관각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변계량의 다음과 같은 노래는 변질된 <안민가>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서로 찾고 서로 응할 제
밝은 시절 용호(龍虎)가 만나 스스로 기약함이 있도다
신하의 절개 솔과 대라 추워도 변하지 않고
성은(聖恩)은 천지와 같아 가이 없도다
크시도다, 건원(乾元) 4덕의 온전하심이여!
황상(黃裳)의 곤도(坤道)는 하늘을 믿고 받드나이다
신하를 예로써 부리시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옵나니
밝은 임금 어진 신하 서로 만나 태평시절 이루셨도다
부모와 신명(神明)처럼
사람하고 공경함을 혹시라도 바꾸지 말아야 하니
임금과 신하는 오직 한 몸일 뿐이로소이다.
변계량이 세종에게 지어올린 <<자전지곡(紫殿之曲)>> 가운데 <군신지의(君臣之義)>다. 임금과 신하 간의 의리에 대한 담론인데, 내용의 핵심은 ‘신하를 예로써 부리시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옵나니’에 있다. 전제 왕조시절 임금에 대한 신하의 충성은 절대 불변의 명제였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는 임금이 신하를 예로써 부려야 신하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긴다고 했다. 말하자면 이 노래에서는 임금과 신하를 계약관계의 두 당사자로 규정한 셈이다. 그런 계약관계가 성립되어야 ‘임금과 신하는 한 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호족세력의 힘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움으로써 왕권과 신권인 호족세력의 상호 협조체제를 확립했던 고려 태조 왕건이나 혁명을 주도하여 건국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한 공신세력과 왕권의 제휴관계를 맺게 된 조선왕조의 초기는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안민가>에서 언술된 군신관계와는 다른 모습이 이 노래에는 그려져 있다.
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먼저 요구하는 것이 전제 군주체제의 기본성격인데, 왕과 신하들 간의 상호 거래를 문면에 명시한 것은 <안민가> 정신의 크나큰 변질이라 할 만하다. 만약 이 노래의 주지를 산문으로 풀어 표현할 경우 ‘군신 간의 힘겨루기’라는 서사적 주제의식이 생성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만큼, 이 노래의 정치적 함의(含意)는 엄청나다. 이 노래의 주체가 변계량으로 대표되는 공신(功臣) 그룹이었다는 점은 이 노래를 <안민가>의 정신으로부터 이토록 현격하게 변질시킨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왕과 공신은 새로운 체제를 탄생·지속시키는 두 축이므로, <안민가>에 언급된 ‘군-신’과는 달리 이해(利害) 당사자일 뿐이었던 것이다.
<안민가>와 <군신지의>에 언급된 ‘군-신’의 논리가 그 성격을 달리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인 면에서 담론을 달리한다고 볼 수는 없다. 두 노래 모두 전제왕조라는 동일한 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질된 모습을 보이긴 하나 <안민가>의 모티프가 이 노래에도 지속된다고 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렇다면 <안민가>는 현대시인에게 어떤 모습으로 수용되고 있을까. 이향아의 <신곡조 향가- 안민가>를 들어보자.
하루 세끼,
끼니마다 거르지 않고 묵상하고 싶다
밥사발에 옹싯거리는 낱알의 변용
이것은 봄부터 가을
이것은 일년의 심판
일년의 울음과 고통
의심과 기다림에 내리는 응답
내가 감사하는 것은 세월이다
아랑곳없이 깊어지는 무심이다
끼니 때면 가끔 조상들을 생각한다
후덕한 임금님과
양순한 백성들을
끼니마다 나는 목숨을 의심한다
이름도 벼슬도 허울임을 생각한다
그러나 밥을 먹는 평화여, 이 안분이여
결국은 감사한다
감사한다
때때로의 분망과
때때로의 무료와
때때로의 모멸과
때때로의 노여움을
지나간 시절을 거슬러 씹으며 삭힌다
내 사지와 동체 핏줄과 뼈가
일년에 일년씩 앙금으로 보태어져
아, 그 누구에게도 죄가 되는
평안을 회복한다
미안해라, 미안해라
평안 속에 갇힌다
이향아의 <안민가>를 관통하는 모티프도 ‘먹는 문제’의 해결을 통한 평안의 확보에 있다. 충담의 <안민가>에서도 중심은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절박한 문제였다. 다른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조롱 속의 새’가 백성이 아닌가. 그래서 충담은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절규했다. 그렇게 갇혀 사는 백성들이 평안함을 느끼며 살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길’이라 했다.
이향아의 <안민가>도 세 개의 연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충담의 <안민가>와 같다. 첫 연의 핵심은 ‘밥에 대한 의심과 기다림’이고, 둘째 연의 핵심은 ‘감사’이며, 셋째 연의 핵심은 ‘평안’이다. ‘끼니마다 묵상하고 싶다’는 화자의 마음은 먹는 문제의 절박함을 절절하게 드러낸다.
‘양순한 백성들’에겐 ‘봄부터 가을까지’ 기다려서 얻게 되는 한 해의 수확이 ‘일 년의 심판’일 수밖에 없다. 초조하게 심판의 판정을 기다리듯 한 해 열심히 노력한 백성들은 ‘배고프지 않길’ 바라면서 수확의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후덕한 임금님’과 ‘양순한 백성’들을 싸잡아 ‘끼니 때면 가끔 생각하는’ 조상들이라 했다. 백성들의 배부름을 기원한 임금이나, 자신들의 배부름을 임금의 덕으로 생각한 백성들 모두 지금 끼니 때 굶지 않는 화자가 기꺼이 떠올리고 싶은 조상들인 것이다.
‘배불리 먹는’ 행복 앞에서 ‘이름이나 벼슬’은 허울일 뿐이라고 했다. 그만큼 시인은 먹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로 인식한 것이다. 둘째 연의 핵심은 감사다. ‘밥을 먹는 평화’, 아니 ‘밥을 먹음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와 그에 대한 감사를 노래한 부분이다. 밥을 먹고 평화를 얻어 감사하는 마음에 ‘분망, 무료, 모멸, 노여움’ 등은 모두 삭아 없어지는 감정의 찌꺼기들일 뿐이다.
누구나 충담의 <안민가>에서 ‘먹는 문제의 절박함’을 인식해낸다. 정치의 잘 되고 못 됨을 따지는데 다른 이론들이 있을 수 없다. 소박하고 양순한 백성들이 배를 곯지 않는 것만큼 ‘잘 되는 정치’가 어디 있겠는가. 백성들에게 밥 한 술 제대로 먹여주지 못하는, 형편없는 정치집단들이 지금도 세계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러니 그 옛날 경덕왕 시절의 ‘재야 명망가’ 충담으로서야 못 먹는 백성들을 둘러보며 그들을 먹여 살리는 것만이 ‘이안민(理安民)’의 첫 조건임을 뼈에 사무치게 느꼈을 것 아닌가. 그래서 왕이 물어왔을 때 임금이나 신하들이 제대로 자기들의 역할을 하라고 일갈했다. 그렇게 되어야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고, 궁극적으로 나라가 태평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충담의 그런 본심을 꿰뚫어 보았기에 오늘날의 시인 이향아는 자신만의 <안민가>를 읊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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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로 정치의 요체는 백성을 먹이고 편안케 하는 데 있다. 우리의 옛 노래들 가운데 충담의 <안민가>만큼 그 평범한 진리를 소박하면서도 진솔하게 읊어낸 노래가 없다. 오늘날에도 그의 노래가 빛을 발하는 건 아무리 해가 바뀌어도 사람들의 먹고 사는 일만큼 절박한 과제이기 때문이고, 정치인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