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학술문2019. 12. 23. 15:49

처용의 얼굴[<<악학궤범>>]

 

 

                                                                                                                              조규익

 

 

하나. 간음(姦淫) 혹은 관음(觀淫)

 

결혼한 남녀가 배우자 이외의 다른 사람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간음 혹은 불륜이라 하며, 요즘은 정서적인 관계로까지 폭을 넓히기도 한다. 육체적 간음과 함께 음욕을 품는 것조차 간음이라 한 성서[마태복음 5장 27~29절]의 규정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라 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 계모 빌하와 간음한 르우벤, 며느리 다말과 간음한 유다, 요셉을 유혹한 보디발의 아내 등 많은 사례들이 예로부터 있었으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실제 기록되지 아니한 옛날의 사례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일부다처 혹은 일처다부의 집단혼을 거쳐 중세 이후 일부일처가 정착되면서 간음은 법과 제도의 징치(懲治)를 받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 민법에서 부정행위로 간주하는 간음은 ‘배우자가 살아있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알리지 않고 배우자의 의사에 반하여 배우자 이외의 자와 간통 등의 성적 행위나 친밀관계를 맺는 일’을 말하며, 얼마 전까지 형사상의 처벌을 받아왔으나, 현재는 민사상 손해배상의 책임만 지는 것으로 바뀌었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간음이 있다고 할 만큼 간음은 끊임없이 저질러져 왔고, 법에 의해 처벌되기도 하지만, 유야무야 되는 경우도 흔했다. 불문(不文)의 도덕률이 삼엄하던 전통시대에도 간음이 자행되었고, 그런 사회의 양반 사대부들은 물론 평민들의 세계에서도 간음 사건은 늘 있었다.

 

우리 고전시가사에서 노래에 반영된 간음의 역사는 매우 길다. 대부분 민요들이어서 기록으로 남은 노래들이 거의 없을 뿐 실제로는 매우 많았으리라 본다. 간음의 당사자들이나 목격자들이 부른 노래들은 조선조 후기의 기록으로 남아 있는 ‘만횡청류(蔓橫淸類)’를 제외하곤 거의 없다. 신라시대의 <처용가>와 조선조 후기의 기록[<<진본 청구영언>>, No. 576]에 남아있는 <간부가(姦婦歌)>[*필자 명명]가 눈에 띄는데, 정확히 말하면 이것들은 ‘간음 고발의 노래들’이다. 두 노래들 가운데 <간부가>는 이론의 여지없이 ‘간음 고발의 노래’이다. 고발은 목격(目擊)을 전제로 하며, 목격은 의도치 않게 관음자(觀淫者)의 시선이나 행위를 내포한다. 사실 간음을 저지르는 자들이나 그 현장을 훔쳐보는 자들은 양심의 가책보다는 떨리는 희열을 맛보는 데 집중했을 것이다. 그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노래들 대부분이 불륜의 긴장된 환희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용가>를 ‘간음 고발의 노래’로 말하기 위해서는 <처용가>에 대한 기존의 견해들을 넘어서는 통찰이 필요하다. <처용가>와 후대의 <간부가>를 연결하여 거론하는 이 자리에서 <처용가>를 좀 더 길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처용가>에 대한 기존 인식의 틀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천여 년의 시차를 두고 모습을 드러낸 <처용가>와 <간부가>. 그 같고 다른 점을 살펴보자.

 

 

둘. 처용과 <처용가> 제대로 읽기

 

‘처용은 동해용의 아들로서 헌강왕을 따라 서울로 돌아온 뒤 임금으로부터 벼슬을 받고 미모의 여인을 아내로 삼게 되었다. 어느 날 밤늦도록 밖에서 놀다가 귀가하여 침실로 들어가니 아내는 누군가와 동침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처용이 노래 부르고 춤추며 물러나오자 역신은 사람의 모습을 한 채 처용 앞에 무릎 꿇고 잘못을 빌며 용서를 구했다. 처용의 형상이 문에 붙어 있기만 해도 그 집에 들어가지 않겠노라 맹세도 했다. 그로부터 백성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벽사진경하게 되었다’는 것이 <처용가>의 배경설화이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처용설화와 <처용가>의 표층이다. 따라서 이 설화와 노래는 상징이나 은유의 수사학적 외피를 둘러쓴 당대의 실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헌강왕대 신라의 상황을 어떻게 보든, 역사적 상상에 많이 기댈 수밖에 없는 현재로서는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그 발상의 전환에 성공한 학자가 박일용[「역신의 상징적 의미와 <처용가>의 감동 기제」, <<고전문학연구>> 49, 한국고전문학회, 2016]이다. 처용은 자신과 처를 부부로 맺어준 헌강왕이 처를 범간하는 현장에서 <처용가>를 부르며 춤을 추고 물러났다는 것, 자기의 처를 ‘처의 다리’라는 제유적 대상으로 환원시켜 헌강왕과 처의 간통장면을 그려냄으로써 헌강왕으로 하여금 자기가 저지른 죄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되돌아보게 하는 자기 성찰적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 헌강왕의 패륜을 역신의 행위로 상징했다는 것 등이 그의 설명이다. 그의 논리 전부를 수용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역신=헌강왕’으로 규정한 그의 생각을 반박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처용가>는 후대의 <간부가>와 함께 ‘간음 고발의 노래’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처용설화의 등장인물은 ‘처용-처용아내-헌강왕’이고, <처용가>의 등장인물은 ‘처용-처용아내-역신’이다. ‘헌강왕조’의 기록인 만큼 설화의 핵심인물은 헌강왕이고, 노래 속의 핵심인물은 목격자[혹은 관음자]로서의 처용이다. 노래와 설화가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지는 것은 향가 일반의 속성이고, <처용가>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해석의 키를 쥐고 있는 헌강왕은 어떤 인물인가. 49대 헌강왕(재위 875~886년)은 48대 경문왕(재위 861∼875)의 맏아들 정(晸)이고, 제50대 정강왕, 제51대 진성여왕은 그의 동생들이다. 정비 의명부인과의 사이에서 제53대 신덕왕(재위 912~917)의 비인 의성왕후 김씨와 제56대 경순왕(재위 927~935)의 모후 계아태후(桂娥太后) 김씨 등이 나왔고, 김씨 여인과의 사이에서 나온 서자 김요(金嶢)는 제52대 효공왕이다. 따라서 마지막 왕인 경순왕까지 형제들 혹은 친손・외손 등 헌강왕의 혈통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헌강왕은 여성편력이 화려한 임금이었다. 정비 의명왕후 외에 후비(後妃) 권씨, 서자 김요[뒷날의 효공왕]를 낳은 김씨 등이 기록에 등장한다. 특히 김씨는 헌강왕이 사냥을 나갔다가 미모에 반해 막사에서 관계한 여인이었다. 말하자면 정식 혼인 절차를 밟지 않은 일종의 야합(野合)이었다. 김씨와 야합으로 나온 김요는 나중에 헌강왕의 동생인 진성여왕에 의해 태자로 봉해지고, 결국 효공왕에 오르게 된다. 말하자면 ‘사냥 나갔다가 미모의 여인을 발견하여 현장에서 야합하여 아들을 낳고, 그가 왕위에 올랐다’는 헌강왕의 사연은 당시 왕족이나 귀족들의 남녀관계가 문란하다고 할 정도로 자유스러웠음을 암시한다. 특히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많은 이야기들에 신라 당대 성적 일탈의 사실들이 적지 않게 반영되어 있다.

 

두 가지 사례만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미실의 경우. 풍월주 미진부는 법흥대왕의 외손으로 궁중에서 후궁인 묘도부인과 사통하다가 눈치를 챈 태후의 허락으로 결혼하여 미실과 미생을 낳았고, 미실은 성장 후 왕족 및 귀족 출신 남성들의 복잡한 정분 관계를 통해 권력을 독점해가며 사회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그녀는 진흥왕의 이복동생 세종의 여인이 되었다가 궁에서 축출된 후 5대 풍월주 사다함을 만났고, 세종과 재결합했다. 그 후 진흥왕의 후궁이 되었다가 진흥왕 사후 즉위한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이어 즉위한 진평왕과도 관계를 맺었다.

 

다음은 진지왕과 도화녀의 관계.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서 자신의 형인 동륜 태자가 일찍 죽자 즉위한 사람이 진지왕이다. 그러나 그는 왕이 된지 4년 만에 ‘정치가 어지럽고 황음하다’는 이유로 왕좌에서 축출되어 비참하게 죽었다. 진지왕의 비극을 가져온 결정적 사건은 도화녀와의 만남이다. 사량부 여자 도화녀가 아름답다는 말을 들은 왕이 어느 날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 관계를 맺으려 했다.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하는 그녀는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는 왕의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해 왕은 폐위되어 죽었고, 그녀의 남편도 3년 뒤에 죽었다. 남편 사망 열흘 뒤 밤중에 왕이 찾아와 여자를 만났다. 왕이 7일 동안 머물다 사라진 뒤 그녀에게 태기가 있어 한 남자아이를 낳았고,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불렀다. 말하자면 ‘왕의 귀신과 통정한 도화녀’가 비범한 아이 비형을 낳은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 이야기를 도화녀와 비형랑이 신앙의 대상으로 좌정한 이야기로 해석하기도 하고, 진지왕의 후손들과 진지왕을 폐위시킨 진평왕 후손들 간의 왕권을 둘러싼 갈등이 반영된 이야기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비형이 바로 김용춘으로서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과 결혼해 김춘추를 낳았으며, 김춘추는 무열왕이 된다. <<화랑세기>>의 기술에는 천명이 원래 용춘의 형 용수와 결혼했으나, 처음부터 용춘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고 했다. 결혼 뒤 용춘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용수가 양보함으로써 용춘은 결국 천명과 맺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적으로 자유로운 수준을 넘어 문란한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 <<화랑세기>>를 비롯한 몇몇 기록들에 나타나는 이 시대 왕족, 귀족, 화랑들의 실상이었다.

 

‘귀신이 된 진지왕’이 평소에 사모하던 도화녀를 찾아와 동침한 이야기를 바로 앞에서 성적으로 문란하던 당대 실상의 예로 들었다. 그렇다면 다시 처용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처용 처와 역신의 동침’은 ‘도화녀와 귀신(진지왕)의 동침’과 어떤 구조적 유사성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까. <<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처용랑 망해사」의 기록은 ‘처용설화’와 ‘헌강왕 설화’ 등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자는 <처용가>의 출현과 처용이 문신(門神)으로 좌정하게 된 연유를 적은 부분이고, 후자는 헌강왕의 신이한 행적들을 적은 부분이다. ‘헌강왕은 귀신이거나 귀신과 통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헌강왕은 춤을 좋아했고, 잘 추었다’는 것이 이 설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핵심내용들이다.

 

그렇다면 <처용가>의 처용은 어떤가. 그는 아내와 동침하고 있는 역신을 보았고, 춤과 노래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여 그에게 전하고자 했다. 역신에 대한 메시지를 신들의 언어인 노래와 춤으로 표출하여 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역신은 누구였을까. 헌강왕의 은유적 존재가 바로 역신임은 자명하다. 처용의 아내는 헌강왕이 직접 내려준 미모의 여인이었다. 현재 헌강왕의 여인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 존재들만 셋이다. 정비 의명왕후, 후비 권씨, 사냥 나갔다가 미모에 반해 야합한 김 씨 등이 그들이다. 그러니 기록에 오르지 않은 여인들도 매우 많았을 것이다. 춤을 잘 추었으니 노래도 잘 불렀을 것이고, 지존(至尊)으로서 가무에도 능했으니, 흠모하는 여인들은 얼마나 많았으랴. 툭하면 나서던 지방 순시 행차는 ‘민정시찰’의 명분보다는 탐승(探勝)과 탐화(探花)의 욕망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탐락(耽樂)에 빠진 왕, 그로 인한 국정의 문란을 ‘태평시절’의 징표로 오인한 백성들의 무분별이 결국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비판과 교훈을 말미에 달아놓게 된 것이다.

 

추정하자면, 헌강왕으로서는 ‘동해 용왕’으로 은유된 지방 호족의 협조와 도움이 필요하여 그의 아들 하나를 데리고 돌아왔을 것이다.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벼슬도 내리고,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미희(美姬)들 가운데 하나를 처용에게 ‘하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처용이 가무와 유락에 탐닉하면서 그녀를 소외시키는 사이 왕은 ‘잊지 못할’ 그녀를 찾아온 것으로 보인다. 처용이 바로 그 간음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아내가 저지르는 불륜의 상대가 왕이기에 감히 어쩌지 못한 채, 체념의 상태에서 역신을 은유의 보조관념으로 끌어와 노래 부르고 춤추며 그 자리를 물러나온 것이다. 그런 난처한 상황을 마주한 헌강왕은 왕 이전에 한 남자로서 처용에게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 노래와 함께 노래에 맞추어 윤색된 배경적 사건이 사람들에게 퍼지다가 기록에까지 오르게 되었고, ‘역신 퇴치’ 모티프는 액면 그대로 민간에 수용, 결국 속신(俗信)으로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이 보다 합당한 추론이다. 그 노래를 현대어로 풀면 다음과 같다.

 

서울 밝은 달 아래

밤늦도록 노니다가

들어와 잠자리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었다만

빼앗는 걸 어찌 하리오.

 

처용설화는 <처용가>의 콘텍스트로서, 서사적 맥락이 정연하다. 주역(主役)은 처용이지만, 인과(因果)의 측면에서 조역으로 등장하는 헌강왕과 역신의 비중은 주역을 능가한다. ‘① 놀기 좋아하는 헌강왕의 개운포 나들이/② 헌강왕과 줄을 대려는 동해용의 작간/③ 동해용을 위해 절을 지으라는 헌강왕의 명령/④ 동해용과 헌강왕의 만남-헌강왕과 처용의 만남/⑤ 헌강왕이 처용의 뜻을 사로잡기 위해 벼슬을 내리고 미녀를 아내로 삼게 함/⑥ 아내의 미모를 흠모한 역신과 아내의 간음/⑦ 역신과 아내의 동침 현장을 발견한 처용이 노래 부르고 춤추며 물러남/⑧ 사람의 형상으로 모습을 드러낸 역신이 처용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며 처용의 형상 있는 곳엔 들어가지 않기로 맹세함/⑨ 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모습을 문에 붙여 벽사진경하고자 함’ 등이 그 줄거리이다.

 

이 개별 사건들은 <처용가>의 출현과 <처용가>가 지닌 ‘벽사진경의 주능(呪能)’을 설명하기 위해 비교적 치밀하게 짜여 있다. 물론 사건과 사건 사이, 혹은 사건 내부에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요인들이 잠재되어 있고, 그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 작업이 지금까지 이루어져 온 <처용가> 연구의 핵심 작업들인 것은 사실이다. 현실적이거나 합리적인 사고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이 설화의 표층이다. 따라서 이 설화는 상징이나 은유의 수사학적 외피를 둘러쓴 실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헌강왕대 신라의 상황을 어떻게 보든, 역사적 상상에 많이 기댈 수밖에 없는 현재로서는 발상의 전환이 절실하다.

 

‘역신의 탈을 쓴 헌강왕과 처용 처의 동침’ 사건은 ‘귀신의 탈을 쓴 진지왕과 도화녀의 동침’ 사건과 구조적으로 일치한다. 아무리 남편의 입장이라 해도 자신의 아내와 간음을 저지르는 현장에서 왕을 공격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사실 그대로 고발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처용가>는 사실을 은유적으로 고발하는 노래의 전형적인 사례다.

 

사실을 함축하면서도 범행의 엄연한 당사자를 은폐하려는 의도가 농후한 점에서 완전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저지르는 왕을 징치할 만한 수단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아내와 간음하는 외간남자를 보고 처용이 그냥 물러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외간남자가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압도적인 힘이란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처용을 압도할만한 힘의 소유자는 왕을 빼고 생각할 수 없다. 당연히 노래에서 왕을 ‘불륜남’으로 지칭할 수는 없었으니, 당대인들이 무서워하던 역질(疫疾)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 위력을 구사하던 역신(疫神)을 왕의 가면[mask]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왕이나 왕족을 포함한 상류층에 간음이 공공연하게 자행되던 당대의 실상은 <<화랑세기>>에서 쉽사리 확인하게 되는데, 처용의 집에서 일어난 간음의 상간남 또한 그 범주에 속하던 남성으로서 헌강왕을 가장 유력한 혐의자로 볼 수 있다. 신화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상징과 은유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 원시의 신화들이고, 그것들로부터 파생되었거나 변질된 것들이 고대의 설화들이다. 고대의 설화들에도 여전히 상징과 은유가 큰 비중으로 들어 있고, 그것들의 원관념은 현실 속의 인간이나 인간의 행동들이다. 그러니 ‘간음’은 당시 흔히 볼 수 있던 인간들의 현실적 행위이었고, 역신은 ‘위력을 지닌 존재’를 상징하거나 은유하던 보조관념이었다. ‘위력을 지닌 존재’로서 왕 이외에 누구를 상정할 수 있겠으며, 그 시대의 ‘(역신과 같은) 위력을 지닌 존재’로서 헌강왕 이외에 또 누구를 상정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자신의 아내와 간통하던 헌강왕을 ‘역신’으로 바꾸어 노래한 것은 처용이 택할 수 있던 유일한 고발 방법이었다.

 

‘도화녀와 통정한 진지왕’이나 ‘처용 처와 통정한 헌강왕’은 신라 시대 성적 일탈의 일부 사례들이며, 그것을 귀신[진지왕]이나 역신[헌강왕]으로 은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불평등한 왕조시대의 불가피한 표현법이었다. 그리고 헌강왕의 존재를 역신으로 처리한 처용의 지혜는 ‘역신 퇴치의 주술’로 오래도록 살아남아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모두에게 애호되어 온 것이다. 이런 인식의 전환을 통해 <처용가>가 발휘한 장수의 비결이 해명될 수 있다고 본다.

 

셋. <간부가>와 <처용가>

 

일러나 보자 일러나 보자

내 아니 이르리 네 남편한테.

거짓으로 물 긷는 척

물통은 내려 우물전에 놓고

또아리는 벗어 통조지에 걸고

건넌 집 작은 김 서방을 불러내

두 손목 마주 덥석 쥐고

수군수군 말하다가

삼밭으로 들어가서 무슨 일 하는지

잔삼은 쓰러지고 굵은 삼대 끝만 남아

우줄우줄 하더라고

내 꼭 이를 거야, 네 남편한테.

저 아이, 입이 부드러워

거짓말 말아라.

우리는 마을 지어미라

실삼 조금 캤더니라.

-[<간부가>/<<진본 청구영언>>, No. 576]

 

 

이 노래는 목격자와 간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부인 ‘일러나 보자 일러나 보자~내 꼭 이를 거야, 네 남편한테’가 목격자의 말, 후반부인 ‘저 아이, 입이 부드러워~실삼 조금 캤더니라’가 간부의 말이다. 당연히 목격자의 말 속에 간통의 실상이 묘사되어 있다. 그 상황은 시간에 따라 세 장면으로 이루어진다. ‘물 길러 온 척 우물에 나와 내려놓은 물통에 또아리를 벗어 거는 행위→건넌 집 작은 김 서방을 불러내 수군수군 대화를 나누는 행위→함께 삼밭으로 들어가 벌이는 행위’ 등이 그것들로서, 전통사회에서 만들어졌음직한 전형적인 간음 서사이다. ‘잔삼은 쓰러지고 굵은 삼대 끝만 남아/우줄우줄 하더라고’는 ‘삼밭 속의 성행위’를 거칠게 고발한 노래임에도 표현만은 절묘하다. 이처럼 밀회 현장을 목격한 아이와 간부 사이의 긴장 넘치는 대화를 통해 ‘간음 고발’의 의도를 강하게 피력한 것이 이 노래인데, 대부분의 표현이 남녀의 만남과 성행위를 직∙간접적으로 묘사하는 것들이다. 간부의 변명으로 끝맺음되고 있긴 하나, 그것은 고발에 대한 합리적 변명이라기보다는 전편에 넘치는 긴장감을 뒷받침해주는 ‘작은 언술’일 뿐이다.

 

간음이 이루어지던 당시의 상황을 다시 떠올려 보자. 노래의 무대는 전통시대 성추문의 현장으로 등장하곤 하던 동네 우물가 삼밭이다. 간부가 간통의 상대인 ‘건넌 집 작은 김 서방’을 불러내 삼밭으로 들어갔고, 삼밭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잔 삼은 쓰러지고 굵은 삼대 끝만 남아 우줄우줄 하더라’고 했다. ‘잔 삼이 쓰러지고 굵은 삼대 끝만 남아 우줄우줄한다’는 것은 동네 아낙이 젊은 남자를 만나 삼밭에서 섹스하는 상황의 간접적인 표현임은 물론이다. 박일용이 “처용은 자기의 처를 ‘처의 다리’라는 제유적 대상으로 환원시켜 헌강왕과 처의 간통 장면을 그려냈다”고 했는데, <간부가>에서 고발자인 아이는 ‘잔 삼은 쓰러지고 굵은 삼대 끝만 남아 우줄우줄 하더라’는 간접적 사물의 묘사로 간통 사실을 그려내 사람들의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전통사회 추문(醜聞)의 현장으로 등장하던 ‘동네 우물가 삼밭’은 오늘날의 러브호텔에 맞먹는 공간으로, 그 공간의 ‘쓰러지는 잔 삼과 끝만 남아 우쭐거리는 굵은 삼’은 두 사람의 행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보조도구들이다. 이거야 말로 ‘다리가 넷인데, 둘은 내 것이나 다른 둘은 누구 것인가’라는 처용의 물음과 상통하는 고발성 언술(言述) 아닌가.

 

이 추문이 간부 남편의 귀에 들어갈 경우 엄청난 일이 벌어질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간부는 목격자에게 ‘자신은 다만 마을 지어미로서 가는 삼을 조금 캤을 뿐’이라고 변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명에는 고려 간음 노래 <쌍화점>의 한 부분[“두레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우물의 용이 내 손목을 잡으시네요/이 말이 이 우물 밖에 나고 들면/조그마한 두레박아 네 말이라 하리라”]에서 느껴지는 ‘궁색한 변명의 모티프’가 그대로 살아 움직인다. 간음의 고발에 대하여 변명으로 대응한 간부의 태도는 그녀가 간음 사실 자체를 도덕적 결손으로 인정하였음을 보여주는 점이다.

 

사실 <<진본 청구영언>>을 편찬한 김천택도 이런 유의 노래들을 실어 놓는 데 겁을 먹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김천택은 「만횡청류 서」에서 “만횡청류는 노랫말이 음탕하고 지취가 보잘 것 없어 족히 본받을 만하지 못하나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되어 한꺼번에 폐기할 수 없는 까닭에 아래에 들어둔다”고 했다. 이 말만으로도 <간부가>의 뼈대를 이루는 ‘간통의 서사’가 얼마나 광범위하고도 오랫동안 우리의 공동체에서 유전(流傳)되어 내려왔는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간부가>가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걸 알기 위해서는 전통사회 여성들의 억눌린 삶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절대적인 남성 우위의 사회 구조 속에서 조혼의 풍습은 인간의 본능을 억압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삶은 여성들의 내면에 한(恨)을 맺히게 했으며, 그런 한을 풀지 못하면 현세의 삶이 괴로울 뿐 아니라 죽어서도 편치 못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런 노래들을 단순한 ‘의사진술(擬似陳述)’로 볼 수도 있지만, 얼마간은 실제 상황에서 나온 것들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사실 답답한 유교 이데올로기의 ‘열 윤리(㤠倫理)’, 그 이면에서 수많은 여성들은 본능과의 치열한 갈등을 벌여 왔으리라.

 

‘처용 처와 간통한 헌강왕’을 역신으로 은유하여 고발한 것이 불평등한 왕조시대의 불가피한 표현법이었다면, 그 다른 쪽의 평민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방식의 ‘간음 고발’이 노래로 통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처용가>는 제왕이 저지른 불륜을 고발하고 질타한 노래이고, <간부가>는 목격자가 간통하는 남녀들의 성행위 실황을 ‘삼대[잔 삼/굵은 삼]의 움직임’을 통하여 고발한 노래이다. <처용가>가 지존의 간음을 고발한 노래인 반면, <간부가>는 평민 남녀의 간음을 고발한 점에서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요동치는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내면은 사회적 지위에 관계없이 똑같다는 점을 두 노래는 보여준 셈이다. 따라서 ‘두 다리는 내 것이나, 다른 두 다리는 누구 것인고?’라고 ‘내 다리/남의 다리’로 성행위를 묘사한 <처용가>와 ‘잔 삼은 쓰러지고 굵은 삼대 끝만 남아 우줄우줄 하더라’는 언술로 성행위를 묘사한 <간부가>의 거리는 사실상 없는 셈이다.

 

<처용가>는 신라 하대에 생겨난 노래로서 고려시대에 기록되었고, <간부가>는 언제부터 불렸는지 모르되 조선조 후기에 기록된 노래이다. 시대는 달라도 노래 속에 들어 있는 인정의 기미(幾微)는 같다는 점에서 양자는 같은 부류의 노래들이다. 두 노래가 대략 천년 넘는 세월을 격했으면서도 유사한 정서적 기반을 갖고 있는 것은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본능 충족에 대한 인간의 욕망만은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점이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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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9. 12. 7. 22:43

어딘가에 내 모습도 있을 것 같은데...

                                                                                                                                                                                                                             백규

 

    1968년도에 초등학교[그 때는 ‘국민학교’]를 졸업했으니, 끔찍하도록 긴 세월 '반세기'가 지났다. 국가적으로는 무장공비들이 떼거지로 내려와 준동했고, 내 고향의 경우 서해바다를 통해 들어온 간첩들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가던 시절이었다. 이런 경험들로 막바지 베이비부머 세대에 속하는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공산주의 혐오증’이 확실히 자리 잡게 되었다. 북괴[그 때는 북한을 이렇게 불렀다]가 살포한 ‘삐라들’을 다발로 주워 학교에 제출하는 것도 등하교 길에 우리가 수행하던 일과들 중 하나였다. 매우 흉흉하던 시절이었다.

 

    그 춥고 암울한 나날들을 보내다가 열네살에 고향을 떠나 48년째 타향살이를 하는 중이다. 그간 먹고 사는 최소한의 문제는 해결했으나, 여전히 ‘행복한 국민’은 아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토착 좌익들이 정치인이나 사회운동가의 탈을 쓰고 백주 대낮에 활보하고 있으니’, 불안하긴 반세기 전보다 오히려 더하다. 그간 매일 사는 것이 ‘살얼음판’이었고, 불판 위의 콩 튀듯 늘 바빴다. 흡사 ‘오늘 이것을 못 끝내면 내일이 없다’는 듯, 바쁜 학구의 세월을 살아왔지만, 지금 생각하면 회한만 가득할 뿐 잡히는 게 없다.

 

    그러다가 서너 해 전부터 초등학교 동무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나처럼 코를 찔찔 흘리며 핏기 없는 얼굴에 오들오들 떨며 용케도 유년기의 여울을 건넌 그들이었다. 중간에라도 만났더라면,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그들의 ‘청・장년 시절’을 볼 수 있었을 테지만, 다 늙어 만난 우리 모두의 얼굴에서는 이미 기름기가 빠진 지 오래였다. 그들은 내 거울이니, 나 또한 그들의 거울이리라.

    그래도 좋기만 하다. 지금의 모습에서 옛날 그들의 모습을 찾아내는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더욱 좋은 것은 우리 모두 그다지 ‘옛날의 어두운 추억들’을 말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옛날의 추위와 배고픔은 옷이 부실했고 먹거리가 충분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누군들 풍족하게 지냈으랴만, 내 고향은 상대적으로 더했다. 내겐 그런 체험들이 ‘유년기의 상흔’으로 남아 있고, 아마 내 친구들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서로 그런 상처들을 들추어 내지 않고 보듬어 주려는 ‘고운 심성들’을 지니고 있다.

 

***

 

    한 달 전부터 송년회 연락이 전해져 왔다. 인천이라? 가야지! 반복해서 SNS에 뜨는 집행부의 공지와 유혹의 문구들이 내 메마른 가슴을 따스하게 했다. 그러나 날짜가 닥치면서 정말로 부득이한 사정이 생겼다. 전날 밤 잠을 설치며 고민하다가 이른 아침 ‘몸 대신 마음만’ 가기로 했다. SNS에 불참의 댓글을 다는 내 손이 한없이 느려지기만 했다.

    친구들이 보낸 유혹의 글들 가운데 ‘우리의 만남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있을 수 있을까?’라는 협박조의 호소가 유난히 내 마음에 와 닿았다. 나이가 이쯤 되고 보면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식들 가운데 ‘부음’이 많은데, 그 친구는 그걸 떠올렸으리라. 그렇다. 40대까지만 해도 죽음은 나와 거리가 먼 일인 줄로만 알았다. 50대에 들어서자 주변에서 날아오는 부음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50대를 졸업하면서는 부쩍 잦아졌다. 그러는 사이 나도 고향친구들의 얼굴이 몹시 보고싶어졌다. 내 얼굴이 비치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면서 깔깔 웃다보면 마음속의 찌꺼기가 모두 씻겨 내려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품을 떠나고 하나씩 둘씩 가진 것들을 내려놓기 시작하는 나이 대가 바로 ‘6학년’이다. 6학년에 들어서면 재산도 명성도 학벌도 몸만 무겁게 할 뿐, 더 이상 필요 없게 되는 것이다. 대자연을 찾아 그간 몸과 마음에 낀 녹을 벗겨내고 1년에 한 번씩이라도 어릴 적 고향의 친구들을 만나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그들의 얼굴에 비치는 내 모습을 확인하는 것. 그보다 더 귀하고 즐거운 일이 어디에 있으랴. 올해 친구들과의 해후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니, 지루한 1년을 또 다시 어떻게 기다린단 말인가.

 

    친구들, 1년 동안 부디 건강히들 지내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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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큰아버지, 안녕하세요!
    잠시 큰아버지의 블로그에 방문할 여유를 찾았습니다. 건강하시지요?
    학술대회를 앞두고 논문을 정리하던 중, 문득 처음 대학원에 진학할 적에 큰아버지께서 해주셨던 조언이 생각났습니다. 감사한 마음은 여전한데, 오랜 시간 찾아뵙지 못했네요. 죄송합니다.
    저는 지난 해에 한국전자통신연구원으로 이직을 해서 대전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가끔 원정이와는 안부연락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술 한 잔 나누자는 약속을 해놓고서 몇 년 째 지키지 못하고 있네요. 서울에 가게되면 큰아버지, 큰어머니께 감사인사도 드리고, 원정이도 보고 싶습니다.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요. 올 한 해 계획하신 일 모두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 대전에서 조수현 올림

    2019.12.13 18:04 [ ADDR : EDIT/ DEL : REPLY ]
  2. 수현, 대전에서의 생활을 멋지게 해나가고 있겠지? 지금까지처럼 늘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건강관리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말고....

    2019.12.14 11:4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카테고리 없음2019. 12. 3. 10:56

바퀴벌레-네이버 지식사전

 

                                                                                                                                                                                                                                                                                                백규

 

   어릴 적, 내가 자라던 초가집은 안방과 건넌방, 대청, 대청건넌방, 작업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작업실은 주로 밤 시간에 부모님과 내가 짚으로 가마니를 짜던 작은 방이었다. 하루 밤에 가마니 두세 장씩 만들면 5일장 날에 맞추어 10~20장씩 내다 팔 수 있었고, 나머지는 곡물 보관용 등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병원에 가시고, 한동안 작업을 쉬게 되었다. 자연히 그 방에 출입할 이유도 없었다. 한참 만에 무언가를 찾으러 어두컴컴한 그 방엘 들어갔다. 작은 플래시로 구석의 메꾸리 근처를 비추자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다. 나중에 그것들이 바퀴벌레와 쥐며느리인 줄 알았지만, 손톱만한 벌레들이 ‘나 살려라!’ 하면서 사방으로 기어 나와 달아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메꾸리를 들추고 그 안에 불을 비췄다. 아, 그곳엔 상당히 오래 전에 죽은 채 썩어가고 있는 쥐 한 마리가 있었다. 음습한 그 곳에서 썩은 쥐 고기를 맛있게 파먹던 바퀴벌레들이 난데없는 불빛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그렇다. 끔찍한 바퀴벌레들이었다. ‘절지동물 문>곤충류>바퀴목’으로 분류되며 전 세계 4천여 종이 있다는 그 놈들. 우리나라에도 10종[독일바퀴, 산바퀴, 줄바퀴, 경도바퀴, 일본바퀴, 미국바퀴, 호주바퀴, 먹바퀴, 갑옷바퀴, 가시바퀴]이나 서식하고 있다 한다. 그 생식력 또한 엄청나서 죽으면서까지 몸에 싣고 있던 알들을 퍼뜨린다고 하지 않는가.

 

***

 

  요즘 난데없이 서울 도심에 바퀴벌레들이 준동하고 있다는 언론들의 보도가 요란하다. 대명천지 21세기에 바퀴벌레들을 떼거지로 목격하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긴 하지만, 생김새나 생태적 습성으로 보아 내가 어릴 적 보던 그 바퀴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그 바퀴들이 기어 나온 근원을 파보면, 분명 내 어릴 적 그 메꾸리를 들어 올렸을 때처럼 ‘썩어가는 쥐 한 마리’가 들어 있을 것이다.

   바퀴벌레가 더 모여들어 번식하기 전에 그 ‘썩어가는 쥐 한 마리’를 바짝 태워 버리고, 그곳에 효과 좋은 소독약을 뿜어야 하리라. 그래야 온갖 해충들도 전염병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완성되어가고 있는 가마니-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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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없음2019. 11. 24. 00:33

 

                                                                                                                                                                                                                                       백규

 

  최근 들어 귀촌준비에 ‘올인’하다시피 해온 지난 몇 년간이 자꾸만 떠오르고, 부질없는 질문들만 꼬리를 잇는다. ‘조율만 하다가 연주다운 연주는 해보지도 못하는’ 피아니스트처럼, 준비에만 내 인생의 진액을 모두 소진해가고 있는 건 아닌가. 길게 느껴지기만 하던 시간의 여울들을 넘다 보니 어느 새 내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던져야 할 타이밍에 도달하면서 자꾸 주춤거려지는 것은 왜인가. 몸에서 기름기가 빠져나가는 것과 정비례로 마음에서도 자신감이 빠지고 있는 것일까. 늙어갈수록 생활에 편리한 대도시가 좋을 거라는 선배들의 조언을 귓전으로 흘려 들었는데, 그 말들이 고장 난 레코드판 다시 돌아가듯 지금서야 새록새록 마음에 되살아나는 것은 왜인가.

 

  얼마 전 시청으로부터 건축허가를 받았고, ‘대지 분할・경계 측량’을 끝냈으며, 오늘 집터와 주변 땅의 지번(地番)을 받았다. 지난 몇 달 간 토목사무소를 통해 토목측량을 했고, 건축설계사무소를 들락거리며 건축설계를 마쳤으며, 그 설계를 구현하기 위한 기초 작업까지 비로소 마무리한 것이다. 초보 농부의 서툰 농법으로 잡초에 휩싸여 신음하다가 올 한 해 가색(稼穡)의 장인(匠人)들로부터 ‘땅 대접’을 제대로 받은 내 아름다운 땅에 붉은 고추 대신 집을 심게 된 것이다! 바로 내년 봄에.

 

  그동안 집 짓는 일은 아예 시작도 하지 말라는 충고들을 선배들로부터 무수히 들었다. 닳고 닳은 건축 시공업자들을 상대하다 보면 마음대로 되지도 않을 것이며, 돈은 돈대로 들고 집도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집 한 채 짓고 나면 ‘폭삭’ 늙고 만다는 것이다. 그동안 살던 아파트에서 그냥 눌러 살든지, 굳이 시골에 가려거든 누가 살다 내 놓은 집을 얻어 잠시 살아본 뒤 결정하는 게 백 번 현명한 일이라는 것이 그들의 중론이었다. 사실 집 한 채를 짓는 데 드는 돈이나 정력을 생각하면 은근슬쩍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그냥 그런 말들을 수용하여 도시 한 구석의 내 후줄근한 공간이나 시골 어느 골짜기 누군가 살다가 버려두고 떠난 공간에서 내 삶을 마치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다. 나는 어린 시절 초가집에서 살았다. 농부로 자수성가하신 부모님이 나무와 흙으로 지으신 집에서 10대 중반까지 살다가 집을 떠났다. 그로부터 몇 십 년 세월, 하숙집・자취집・아파트 등을 전전하며 이 날까지 살고 있다. 부모님의 집과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만 빼면, 모두 ‘남의 집’에서 살아온 것이다. 부모님의 집도 내 집은 아니고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도 남이 지어놓은 ‘끔찍하게 획일적인 공간’일 뿐, 아직도 내 집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덧없이 살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인생, 잠시라도 내 손으로 지은 집에서 살다 가는 것을 사치라 타박할 수 있는가. 나는 내 뜻에 따라 지은 내 집, 그것도 주변의 자연과 조화를 이룬 집에서 살고 싶을 뿐이다.

 

  2년 반 후에 찾아올 정년. 내겐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자연과의 대화와 사색을 통해 내 공부와 인생을 마무리해 가리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14년 전 유럽 여행 중 하이델베르크 대학 건너편 언덕에서 만난 ‘철학자의 길’이 아직도 내 눈에 선하다. 네카 강이 흐르고 하이델베르크 고성과 대학촌이 손에 잡힐 듯이 건네다 보이던 그 언덕길. 그 때 나는 그 길을 걸으며 그 옛날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교수들을 떠올려 보았다. 칼 야스퍼스, 칼 만하임, 헤겔, 가다머 등등. 쟁쟁한 철학자들이 그 길을 걸으며 생각을 다졌을 것이다. 내가 집을 지으려는 곳에 그렇게 예쁜 대학촌은 없다. 눈을 들면 폐교된 옛 초등학교와 띄엄띄엄 무리지어 서 있는 민가들이 전부다. 그러나 그것들을 품어 안고 있는 산세는 하이델베르크 못지않게 아름답고 보암직하다. 그 경치만 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맑은 생각의 샘물이 퐁퐁 솟아남을 느낀다. 그래서 그곳에 내 작은 와옥(蝸屋)을 앉히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찾아 세계를 여행하고 집에 돌아와 그것을 발견한다.”고 아일랜드의 문인 조지 무어(George Moore)는 말했다. 그간 나는 내가 필요로 하고 세상이 필요로 한다고 믿는 것들을 찾아 세상을 두루 돌아다녔으나, 어쩌면 그것들은 환상이나 신기루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 조지 무어의 말처럼 그것들 모두는 앞으로 내가 지을 집 안에 오롯이 들어앉아 있음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 집을 짓는다. 아니, 지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그간 환상을 찾아 헤매 온 내 영혼을 포근히 안식하게 하는 길일 수 있다.

 

에코팜은 밤 천지다

                                          

이 배추를 누가 다 먹을꼬

 

 

일을 마치고 동네 분들과 가볍게 한 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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