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2. 1. 7. 20:28

길 잃은 교육부, 휘청대는 지식사회

 

                                                                                                                                                     조규익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우리나라에 피터 드러커가 말한 바와 같은 ‘지식사회’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식이 기술의 혁신이나 정책 결정의 기초가 되는 사회, 지식의 생산이나 응용에 종사하는 이른바 ‘지식노동자’가 힘을 갖고 있는 사회를 지식사회라 하는데, 그 경우의 지식사회는 건전한 양식과 합리성을 대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존재가 지식인들인가? 권력을 잡은 계층이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과연 그 ‘지식’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식이 무한경쟁과 무질서로 혼란한 세상을 살아가는 ‘도구’ 혹은 ‘약삭빠른 처세술’에 지나지 않는다면, 굳이 지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사실 ‘건전한 양식과 합리성’이란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데, 최소한 그것을 바탕으로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연마한 사람들의 집단이어야 지식사회일 수 있다. 그 경우에도 한 사회가 지식사회이려면, 그 지식은 ‘건전한 양식이나 합리성’과 연동(連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우리 사회가 지식사회냐 아니냐를 논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최근 우리의 자화상을 목격한 뒤 하도 어이가 없어 한 마디 하려다 보니 ‘지식사회’라는 단어가 튀어나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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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교육부는 98년부터 시작한 ‘학술지 등재’제도를 폐지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제도가 도입될 당시 다양한 학문분야에 많은 학회들이 있었는데, 누구의 발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학회들만 다잡아서 획일화 시키면 학문의 질이 저절로 올라갈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마도 관변에서 단물을 즐기던 일군의 학자들이 ‘통치적 발상’의 부림을 받아 그런 묘안을 만들어 올렸을 것이다. 사실 학문의 질을 높인다는 취지로 정부가 나서서 학술지의 등급을 매기는 나라는 지금 세상 어디에도 없고, 과거 어느 시대에도 없었을 것이다. 노벨상에 이 분야가 있었다면, 단연 우리나라의 교육부가 단독수상의 영예를 누렸으리라. 오죽 답답했으면 나라가 학문의 질을 높이겠다고 나섰을까 생각하면 지식사회의 한 구석을 차지한다고 착각하는 필자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었고, 지금도 그런 생각에 변함이 없다. 하물며 존경하는 선배 학자들이야 오죽했으랴! 머리 성성한 노학자들이 서류뭉치를 들고 학진의 사무원들 앞에 굽신거리며 ‘등재’의 재가를 받아오면서 희희낙락해온 것이 그동안의 희화(戱畵)였다. 모든 학회의 이름을 ‘○○학회’로 통일해야 한다면서 ‘연구회, 세미나, 포럼’ 등 모임의 다양한 명칭들을 없애버렸고, 참고문헌의 형태, 요약문의 길이, 주제어의 개수 등에까지 일일이 간섭하며 점수를 매기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백주에 벌어지는 것이 이 나라의 지식사회다. 단 몇 년 사이에 수백 수천 개의 학회들이 국군의 날 의장대 정열하듯 정연해졌고, 그 형식요건에 따라 점수가 매겨졌으며, 편의성을 좋아하는 대학들은 얼씨구나 하고 그걸로 업적평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키보드에 교수 이름만 쳐 넣으면 학진의 홈페이지에 연동되어 1년간 발표한 논문이 주르르 흘러나오니 행정적으로 얼마나 편한 일이며, 시비 또한 일어날 일이 없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학진의 규정만 잘 따르면 일반 학회는 등재후보 학회가 되고, 등재후보 학회는 등재학회가 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 규정이라는 것이 형식요건에 그치는 것이라서 사실 심사할 필요도 없는 것을 굳이 심사라는 절차를 만들어 학회 운영진을 애태우는 일들도 허다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어떤 사회인가. 온정으로 똘똘 뭉친 사회다. 서로 품앗이하듯 서로의 학회들을 웬만하면 올려주는 것이 우리네 미풍양속인 것을! 등재(후보) 학회가 되고자 신청한 학회들을 무슨 근거로 탈락시킬 것인가. 자연스레 기본 요건만 갖추면 모두 등재후보, 등재학회로 등극하게 된 것이 그간의 사정이었다. 등재(후보)학회의 경우 웬만하면 학술지 발간비에 학술회의 비용까지 지원해주고 있으니, 그간 한국의 학회들은 학진의 품속에서 꿀맛 같은 세월을 보낸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그 덕에 한국의 학계가 많은 논문을 얻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대학에 입성하려는 학인들 가운데 분야에 따라 한 해에 열편도 넘는 논문들을 발표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고 지금도 학진 등재논문으로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학자들이 많으니, 그 점만큼은 놀라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한국의 학자들 특히 젊은 학자들이 논문 쓰는 맛을 비로소 보기 시작했다고 힘주어 말하는 분이 있을 정도다. 분명 이 점은 등재 제도가 갖고 있는 기능들 가운데 긍정적인 측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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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그 제도의 문을 닫겠다고 한다. 별 뚜렷한 대안도 없이 13년 동안 한국의 지식사회를 순치(馴致)시켜 온 제도의 막을 아예 내려버리겠다는 것이다. 사실 심사를 엄격하게 하여 등재 학술지로 승격하는 학회의 수를 제한하겠다는 것이 교육부의 초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형식요건이 갖추어져 있는 이상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할 학회들도 없고, 형식요건에 맞는 것들을 내용상의 문제로 퇴짜를 놓을 강심장의 학자들도 없다. 그러니 너무 많은 학회들이 등재의 범주에 들어와 버렸고, 국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교육부와 학계의 일부는 그 탓을 이젠 학자들에게 돌린다. 제도를 만들고 제대로 엄정하게 관리하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은 덮어둔 채 일부 드러나는 문제들만 거론하며 학자들의 ‘양식 없음’ 만 탓한다. 바람직하지 못한 제도를 도입한 것이 원래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분명한 대안도 없이 송두리째 없애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가장 자유로워야 할 학자들의 학문적 생산과 평가, 혹은 학회라는 학문 공동체를 정부의 획일적인 잣대나 틀에 의해 재단하려 한 것은 상식 이하의 처사였다. 그렇다고 이제 겨우 13년 된 제도를 보완해볼 생각은 하지 않고 송두리째 없애겠다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자행되는 ‘아파트 재건축’만도 못한 하책(下策)이다.

정부에서 내 놓은 안은 올해 10개, 내년에 15개, 내후년에 20개 내외의 학회를 선정하여 매년 1억 5천만원씩 최장 5년간 지원해 ‘세계적인 학술지’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항상 ‘세계적인~’이란 관형어를 좋아 할까. 학회나 학술지들이 어찌 돈을 퍼붓는다고 단숨에 ‘세계적인 반열’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세계 수준의 대학’을 육성하겠다는 야심으로 천문학적 돈을 퍼부으면서도 거의 실패로 판명되고 있는 ‘WCU(World Class University ; 세계수준의 연구중심대학 육성사업 )’ 제도를 보면서도 다시 ‘세계적인~’이란 관형어를 사용하는 배짱은 과연 어디서 연유된 것인가. 우리 민족의 DNA 때문일까. 1억 5천만 원씩 5년간 특정 학회에 퍼붓는다고 ‘세계적인 학회’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은 과연 누구로부터 나왔을까. 따져 보자. 아무리 큰 학회라 할지라도 1년에 네 번 정도의 학술지를 간행할 것이다. 1회 간행비를 5백만 원으로 잡는다면 학술지 간행에 2천만 원이면 넉넉하고도 남는다. 학술회의를 두 번 한다고 쳐도[매번 국제학술회의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니 매년 한 번씩만 국제학술회의를 한다면] 2천만 원이면 넘칠 정도다. 그렇다면 남는 돈은 회원들의 연구비로 지급할 것인가? 아니면 학회 통장에 적립할 것인가?

10개나 15개의 학회를 선정하는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학문분야만 따져도 수십에 이를 것인데, 그 정도로 전 분야를 커버할 수 없을 것이다. 잘 나가는 분야가 독점하거나, 상당수의 분야는 한두 개를 배정받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예컨대 필자가 속해 있는 국어국문학[혹은 그것을 포함한 인문학 분야]에 수백의 학회가 있고, 대부분의 회원들은 몇 개의 학회들에 걸쳐 있는데, ‘어떻게 무슨 기준으로’ 한 두 개의 학회를 선정할 것인가. 여기서도 특정 부류의 소수 인사들에 의해 학문 외적인 ‘힘’이 구사될 것은 뻔한 일이다. 온정주의나 연고주의가 정치권 못지않게 판을 치는 곳이 학계인 줄 모르는 것도 아닐 것이고, 기존 정책들의 실패 또한 근원적으로 여기서 연유되었음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다시 그런 부조리와 말썽을 반복하겠다는 발상을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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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온당한 일일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어떤 제도이든 부작용 없이 안착시키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바람직하다. 학문의 본질이나 학자들의 자존심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의 ‘등재’ 제도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출범하여 10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부작용도 있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다. 부작용을 줄이면서 원래의 취지를 살려가는 쪽으로 보완해가는 것이 나라 전체를 위해 최선이다. 13년을 끌고 가다가 ‘이게 아닌가봐!’ 하고 내팽개칠 일이 아니란 것이다.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다면 보완해 써야 한다. 맘에 안 든다고 내팽개치는 것은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다. 지금 한국의 모든 대학들이 등재 제도에 기대 교수들의 업적을 평가해오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제도 자체를 버린다면 대학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여 또 미래의 결과가 불투명한 시험에 돌입해보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의 대학사회는 영원히 모르모트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고, 똑 같은 착오의 고리 또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2014년까지 등재심사를 유예하겠다고 했으니, 그 사이에 제도의 보완책을 마련하면 된다. 현 제도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논문의 질에 대한 평가가 소홀하다는 점일 것이다. 현재도 학회지 별로 개별 논문의 심사를 시행함으로써 질의 평가는 어느 정도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논문의 인용지수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니, 그 점을 추가하면 된다. 유예기간 4년 동안 학술지의 인용도를 조사하여 통계를 내보는 것이다. 인용도에 따른 순위나 점수를 학술지들에 적용하여 등재[후보] 학술지들을 다시 스크린할 경우 우열이 판명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학술지 전체를 ‘일반학술지-등재후보학술지-등재학술지-선도학술지[가칭]’의 4단계 시스템으로 재편성할 수 있으리라 본다. 선도학술지에 선정된 학회들에는 상당액의 지원금[1억 5천만 원까지 줄 필요는 없다!]을 지원함으로써 국제무대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게 해야 한다. 다만 각 단계마다 ‘진짜로 엄정한 기준’을 마련하여 쉽게 승급할 수 없도록 관리한다면 학회의 질서는 저절로 잡혀 갈 것이다. 이렇게 해야 지금의 제도를 부수지 않고도 보완할 수 있다. 물론 문제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인용도를 새로운 잣대로 채용한다지만, 한국적인 상황에서 그 인용도를 신뢰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젊은 학인들이 논문의 우열과 상관없이 자신의 지도교수나 선후배들의 논문만 인용하는 경우가 많고, 자신이 속한 학회의 학회지만을 인용하게 되는 폐단 또한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폐단은 우리 지식사회가 좀 더 성숙해지면 저절로 사라질 문제일 것이니,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계몽해 나가야 한다. 기득권을 쥐고 있는 메이저 대학 교수들의 의식 개혁이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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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성숙해지는 만큼 지식사회 또한 휘청대지 말아야 한다. 정권은 바뀔 수 있으나, 정책이나 제도는 쉽게 바뀌지 않아야 한다. 교육제도나 학문정책이 쉽게 바뀌어서는 안 되며, 바뀌더라도 구성원들이 그 변화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도 연구실에서 밤을 밝혀가며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들과 대학에 채용되기 위해 논문 집필에 매진하는 ‘교수 지망생들’이 있다. ‘진정한 학자라면 학술 평가제도가 어떻게 바뀌든 그게 무슨 문제냐?’라고 질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학자든 그렇지 않은 학자든 모두 ‘제도 속의 구성원들’임을 인정해야 한다. 제도에 의해 유불리(有不利)가 결정되는 생활인들이자 세속적 존재들이란 말이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이참에 제도를 한 번 확 바꿔버릴까?’라는 유혹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경우 떠올려야 할 덕목은 ‘신중함’과 ‘사려 깊음’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정권은 바뀌어도 정책이나 제도는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 지식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항심(恒心)을 갖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2012. 1. 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1. 5. 01:30

2011년 숭실⋅인하⋅중앙 대학원 연합심포지움 토론요지



연구부정에 무감각한 지식사회, 방황하는 학문후속세대



                                                                                                              조규익(숭실대)


몇 달 전 외국 유학 중인 20대 중반의 제자[이른바 ‘학문후속세대’라 할 수 있는]가 메일을 보내왔다. 공학 분야 어느 전공의 세계적인 학회 홈페이지에 ‘대한민국 교수 및 학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자행한 논문표절 사실들’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세계 지식인들의 웃음꺼리가 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메일에는 그들 가운데 한 교수가 얼마 전 그 표절논문들 가운데 하나로 한국의 국토해양부 장관으로부터 우수논문상까지 받았다는 사실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그 논문들이 외국 학자들의 논문에 들어 있는 아이디어를 ‘살짝 도용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송두리째 베낀 경우들이라 했다. 깜짝 놀라서 그 사이트를 방문한 결과 과연 그곳엔 복수의 대학 교수들을 포함한 한국학자들이 ‘여러 건의 논문들을 표절한 파렴치범들’로 낙인 찍혀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고, 우리나라의 신문기사를 검색하니 과연 그 교수는 장관상까지 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으며, 해당 교수의 대학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그 교수는 ‘우수교수’로 대학 홈페이지의 첫 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전공의 많은 학자들이 포진해 있는 해당 학계나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잠잠했다. 그 사실을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알고도 그러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언제까지 국제적인 수모를 견뎌내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 시점으로부터 무려 석 달이 지나서야 그 사실은 우리나라 언론에 보도되었고[조선일보, 2011. 10. 5.],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언론에서 몇 마디 떠들다가 모두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어제 그 대학의 사이트를 다시 방문해보니 그 교수는 아직도 해당학과의 ‘시니어 교수’로 당당하게 남아 있었다. ‘특정분야 극소수의 일’이라고 편한 마음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남의 지식을 훔쳐 재미 보는 일’을 아무런 죄의식이나 죄책감을 느낄 만한 사건으로 보지 않는 지식인이 존재한다면, 우리 지식사회엔 미래가 없다. 과연 우리나라 대학들은 이들을 교수로 인정해도 되는 것인가. 가능성과 실력을 갖춘 학문후속세대들이 존경과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의 교수집단이나 지식사회는 연구윤리의 정립자 혹은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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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을 비롯한 고위 공직에 발탁되는 교수들이 많아지면서, 청문회 등 검증의 기회가 정립되면서, 비로소 ‘연구부정’은 우리 지식사회의 치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상당수 고위 공직 후보자들이 연구부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지식사회에 대하여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었다. 언론이나 네티즌들은 고위 공직의 물망에 오르는 학계인사들의 논저들을 검증하기에 바쁘고, 야당은 그런 정보를 빌미로 후보자 본인은 물론 집권세력을 흠집 내기에만 전념한다. 문제의 후보자들은 으레 ‘당시에는 관행이었다/제자가 모르고 한 일이다/기억에 나지 않는다/확인해 보겠다’ 등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지만, 매우 떳떳하지 못하다. 초창기에는 그런 문제로 공직의 입구에서 낙마한 사고들도 더러 있었으나, 지금은 연구부정 문제로 낙마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 그만큼 짧은 기간 연구윤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문제의식이 무디어진 것이다. 처음 그런 문제들이 불거졌을 때 국회에서라도 연구부정의 문제를 논의해볼 법도 했건만, 그들이 연구나 연구윤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고 관심조차 없었으니 애당초 기대할 필요도 없었던 일이긴 하다. 사안의 심각성이 부각되면서 정부와 학계가 부랴부랴 ‘연구윤리 규정’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연구부정에 적극 대처한다고 해왔지만, 지금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연구부정의 사례들은 그런 노력들이 대체로 문제의 본질에 훨씬 못 미치는 ‘격화소양(隔靴搔癢)’격의 시늉에 불과했음을 입증할 뿐이다. 입만 열면 대학생들의 리포트부터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고 떠들어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리포트를 작성한다고 하면서 인터넷 사이트에서 긁어다가 짜기워 내거나 돈 몇 푼으로 구매하여 제출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현실이다. 전담 교수들까지 채용하여 대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지만, 어린 새싹들까지 연구부정의 고전적 수법에 능숙해져 가는 현실을 보면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글쓰기란 다만 ‘글의 겉을 꾸미는 기술’에 불과하지나 않은가 불안해지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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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윤리의 문제, 즉 서구에서 이미 개념 정립이 끝난 날조[fabrication]⋅변조[falsification]⋅표절[plagiarism] 등 연구부정의 행위들에 대한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 또한 화려하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경우도 지식사회의 폭이 넓어지고 지식이 재화 창출의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지적 소유권 문제나 연구윤리의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에 따라 이 분야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결과들도 많이 보고되었고, 비록 형식에 그치는 감이 없지 않지만, 학회들의 논문집 말미에는 ‘연구윤리규정’이라는 것도 실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부정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빈번해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학문적 아이디어를 얻고, 그것을 골격으로 저작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야말로 철저히 ‘양심’에 관련된 문제임에도, 우리가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는 일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부정의 사건이 일어날 경우 그냥 외면하거나, 기껏 ‘기술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실수’ 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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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글 쓰는 일의 윤리성’은 유치원 단계부터 교육하여 ‘심성(心性)으로 고착’시켜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너무 크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서 논할 수는 없고, 당면한 우리의 관심사는 3개 대학원[중앙⋅인하⋅숭실]의 학생[학문후속세대]들을 어떻게 제대로 교육시킬 것인가에 있다. 토론자로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우선 세 대학원만이라도 「정의롭게 사고하기와 연구윤리」(가칭)를 공통과목으로 개설했으면 한다. 인문계[예술계 포함], 경상계[사회계 포함], 이공계 등 대학원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전공에 해당하는 이 분야의 한 과목을 반드시 이수케 할 필요가 있다. 세 대학원이 ‘연구윤리 공동위원회’를 만들고, 그 위원회에서 매년 혹은 매 학기 세 대학의 교수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강의를 맡기고, 그 교수에게는 일정액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것이 좋다. 연구 윤리가 교수 개인의 전공분야는 아닐 것이며, 강의내용을 새롭게 개발하고 조직하는 일이 수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학기 동안 전문적으로 동⋅서양의 연구풍토나 윤리 등을 공부하면서 학생들 스스로 연구부정의 폐해를 깨닫게 하는 것은 물론, 지식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된 이후에는 그들 스스로 연구윤리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로서는 그 길만이 그나마 우리의 학문후속세대가 연구부정의 탁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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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가 ‘연구부정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담하다. 학문후속세대로 하여금 지적 생산 작업에서 갖추어야 할 정직한 자세야말로 국가 간의 경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최종 병기’ 그 자체다. 후속세대에게 아무리 현란한 이론과 학설을 가르친들 이런 병기를 갖추지 못한다면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하다. 어설픈 미봉책이나 시늉만으로 문제의 본질을 덮을 수 있을 만큼 지금의 우리 처지가 한가롭지 못하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2. 2. 17:03

세밑에 홀로 앉아

 

창밖의 나목(裸木)들에 모처럼 햇살 비치는 오늘, 섣달 그믐날이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홀로 창가에서 이 날을 지켰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넘어가는 시간의 질(質)에 변화가 없음을 느낀다. ‘그저께보다 나은 어제,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란 입에 발린 구호(口號)일 뿐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이제 발갛게 물들어오는 인생의 황혼을 향해 한 고비 넘고 있다는 뜻일까. 몸의 동력이 마음 같지 않은 나날이다. 당나라 때 천재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세모(歲暮)>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已任時命去 이미 시운에 맡겨 따라가는 몸

亦從歲月除 그저 세월 가는대로 따라갈 뿐

中心一調服 속마음을 하나로 고르게 가져

外累盡空虛 세상사 얽힘 모두 비워버리네

名宦意已矣 명예로운 벼슬자리에 뜻 이미 버렸으니

林泉計何如 자연으로 돌아갈 계책은 어떠한가

擬近東林寺 동림사 가까운 곳 어디쯤

溪邊結一廬 개울가에 한 채 오두막이나 지어볼까나

 

이제 50중반. 세상사 마음먹는 대로 흐르지 않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사람도 물결 속의 작은 입자(粒子)일 뿐 흐르는 물의 방향을 돌리는 키나 노가 아님을 이제 겸허한 마음으로 수긍한다. 흐르는 물결은 더 큰 물결에 합쳐지고, 합쳐진 물은 더 큰 물에 합쳐져 강을 이루거나 호수를 이룰 뿐, 입자가 마음먹는 대로 모습을 바꿀 수 없음을 아프게 깨닫는다. 애면글면 도모한다 하여 세상의 명리(名利)가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며, 간절히 바란다 하여 애욕(愛慾) 또한 성취할 수 없음을 터득하곤, 이제 옛 어른들이 말씀한 ‘작비금시(昨非今是)’의 탄식을 금치 못한다.

중병에 신음하다 북망산으로 실려 가는 이웃들을 보며, 탐욕의 끄나풀을 한사코 놓지 않으려다 정년(停年)으로 쫓겨 가며 앙앙불락(怏怏不樂)하는 주변의 존재들을 보며, 이제 하산(下山)의 신들메를 고쳐 맬 때임을 깨닫는다. 그렇다. 만각(晩覺), 아니 지각(遲覺)이다. 왜 나는 늘 남들보다 한 발 늦게 깨닫는 것일까. ‘깨달은 그 순간이 가장 이르다’는 억설(臆說)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지만, 그저 위안을 주려는 것일 뿐 사실은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 세상일진대, 세상의 가치관이란 대부분 개개인들을 비교하여 도출해내는 ‘상대적인 개념’ 아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주변의 왕따에 죽음으로 항변하는 후배를 보며, 대학이나 교수집단이라는 지식사회도 시궁창 그 자체임을 진저리치도록 절감한다. 그러니 남은 시간에 무얼 더 도모하고 바라겠는가. 백거이의 말처럼 물 좋고 산 좋은 곳을 골라 오척단구(五尺短軀) 누일만한 누옥(陋屋) 하나 얽어놓으면, 그것으로 만족한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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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후기의 천재 시인 신위(申緯)는 “佳人莫問郞年幾(아가씨, 이 사람의 나이 묻지 마오)/五十年前二十三(오십년전엔 스물셋이었다오)”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신위만한 그릇으로도 ‘칠십이 되어서야 마음먹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그러지지 않은’ 공자 나이에 이르러서야 겨우 나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신위의 그릇을 훔쳐 볼 수조차 없는 국량이면서도 그보다 이십여 년 앞서 나이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나는 망발지한(妄發之漢)쯤 된다고 할 수 있으리라.

어쨌든 매미 껍질 벗듯 차분한 마음으로 욕망의 허울을 벗어 던지고, 내일 아침 새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리라.

 

경인년 묵은 해를 보내며

고요한 숭실동산에서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0. 11. 8. 11:17

시간강사와 지식사회의 그늘


강의·연구로 학문분야 두축 이끌어… 이젠 국가·사회가 처우개선 나서야



자본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고 신자유주의가 삶의 원리로 자리 잡을수록 사회의 소외지대가 넓어지고 있는 것은 '비인간화'로 치닫는 우리 사회의 암울한 현실이다. 모든 분야에서 '만능의 열쇠'라도 되는 듯 경쟁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지만, 경쟁에서 도태되는 다수 구성원들을 철저히 외면하는 비정함 또한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다. 더구나 경쟁의 필수 전제조건이라 할 '공정함'의 결여에 대하여 애써 눈 감고 있는 의식의 원시성은 언필칭 '선진국 진입'을 외치는 우리 사회의 '아킬레스 건'일 수밖에 없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에도 최근에야 공론화되기 시작한 대학 시간강사 문제는 소외와 관련된 우리 시대의 약점들이 골고루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사회적 위기의 뇌관이라 할 수 있다. 매주 정해진 시간만 강의하고 일정액수의 시간당 강의료를 받는, 전임 교수 아닌 지식인들이 바로 시간강사다. 말하자면 그들은 노동 현장의 일용직 근로자들처럼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존재들이다. 일용직 근로자들이 새벽의 노동시장에서 선택되지 않으면 그날 하루 일당을 벌 수 없듯이, 강사들은 학기 초에 대학 혹은 학과로부터 선택되지 않으면 그 학기의 수입은 없다. 하루와 한 학기의 차이가 있을 뿐 일용직 근로자와 강사는 본질적으로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셈이다.

 

일용직 근로자들의 삶을 국가가 책임질 수 없듯이 학기 단위로 살림을 꾸려나갈 강사들의 삶 또한 국가가 책임질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형식 논리로 친다면야 그런 말도 나올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상 자체가 정책의 오류로부터 비롯되었거나, 적절한 방안만 강구하면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라면 국가나 사회가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 대학이나 지식사회 혹은 학자들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대략적인 방향은 국가의 학문정책에 포함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 정부가 그런 학문정책을 세우기 위해 선진국 대학들의 제도를 벤치마킹해 왔다면 그런 나라들이 강사들에 대하여 어떤 처우를 하고 있는지 정도는 파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강사를 포함한 국가의 인재들을 세밀히 관리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매우 소망스러운 일이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학문진작'이란 명분으로 쏟아부은 천문학적 재원은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는가, 그런 정책들은 과연 그렇게 다급했으며 합목적적이었는지 등을 돌이켜 본다면, 그런 일들이 '강사들의 현안해결'보다 우선적인 것이었는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학문정책의 중요도나 시급성에서 선후관계를 먼저 고려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상처가 곪아 터져 모든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문제점을 지적하는 지금에서야 겨우 대책을 내놓는 관련부서의 무심함이 답답할 뿐이다. 현실로 닥친 생활고와 암담한 미래 때문에 목숨을 끊는 강사들이 속출하고, 3년이 넘도록 천막 속에서 농성하는 강사를 보고 나서야 이 땅의 교육 당국은 겨우 움직이는 시늉 정도를 보여 주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 대책 또한 '격화소양(隔靴搔양)'의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으니, 더욱 답답하다.

 

강사는 누구인가. 대학, 대학원을 거치면서 오랜 기간 학문을 연마해온 해당 분야의 누구 못지않은 전문가들이면서, 지금까지 그들은 전문성이나 실력보다는 '시간강사'라는 '품위 없는 용어'로 통칭되기 일쑤였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대부분의 전임교수들이 강사를 거친 사람들이며, 현재의 강사들은 전임교수로 대학에 입성할 가능성이 있는 지식인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현재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쉽게 외면해 왔는지도 모른다. '선배들이 그래 왔듯이 조금만 고생하면 전임의 대열에 합류할 것 아닌가'라는 속 편한 계산으로 우리 사회는 그들의 요구를 철저히 뒷전으로 미루어 온 것인지도 모른다. 40%에 육박하는 대학 강의를 이들이 맡고 있으며, 모든 학회들에 집행부 혹은 회원으로 참여하여 학회를 굴러가게 하는 엔진 역할을 이들이 맡고 있다. 강의와 연구라는 한국 지식사회의 두 축을 감당하고 있는 이들에게 기약도 없는 '교수사회에 진입할 날'을 무작정 기다리며 참고 있으라는 말만 건넬 수는 없지 않은가. 모두가 힘을 합쳐 더 늦기 전에 이들부터 구해야 한다.

조규익(숭실대 인문대 학장/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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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10. 25. 10:57
 

 교수들을 ‘구름 위의 신선’이나 ‘도덕군자’ 쯤으로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요즘 들어 교수가 관련된 파렴치 범죄들이 노출되면서 교수들에 대한 생각도 조금씩은 바뀌고 있지만, 그동안 그들에게 주어왔던 기본점수까지는 깎으려 하지 않는 것이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의 가상한 정서다. 전통시대에 형성된 스승관(觀)이 우리 사회에 온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정신적 거래행위’를 시장에서 사고파는 ‘물질적 거래행위’와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범주에 올려놓고 전자를 신성시하는 행태는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어렵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요즘의 ‘가르치고 배우는 행위’를 상행위(商行爲)와 일치시킴으로써 교육과 관련된 세태를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일반화된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상당수의 대학교수들이 국회의원 혹은 정부의 고위직으로 발탁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형성된 보통사람들의 교수관(觀)이야말로 교수직에 대한 일종의 ‘우스꽝스런 외경심(畏敬心)(?)’이라고나 할까.

 그 뿐 아니다. 교수로 임용되는 일의 지난(至難)함 아니 극난(極難)함이 교수직에 대한 환상이나 편견을 고조시키는 데 분명한 일조를 했다. 보라! 넘쳐나는 교수임용 대기자들, 예비 학자들, 그리고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한 채 구체제 속에서 양산되고 있는 대학원생들... 교수직을 아예 뽑지 않거나 뽑더라도 비정년직으로 대충 땜질하고 있는, 교수시장의 급격한 변모양상을 보면, 이런 문제는 갈수록 심화될 것이다. ‘교수직 진입의 어려움’은 ‘교수직에 대한 선망’을 더욱 촉진시킬 것이며, 교수직에 대한 선망은 다시 교수직에 대한 진입 욕구를 증진시킬 것이다. 이런 현실은 유능한 대기자들의 교수직 진입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일종의 ‘악순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교수직 혹은 교수들의 본질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은 더욱 왜곡되어 갈 것이다.

 교수도 사람이다. 아니 생활인이다. 뿔을 마주 대고 싸우는 벼랑 위의 산양(山羊)들처럼 공동체 안에서 작은 이해관계로 첨예하게 다투고, 한줌의 이익 때문에 상대방을 음해하기도 한다. 정론을 펴기보다는 하잘 것 없는 입방아로 공동체를 분열시키거나 국가와 사회에 해악을 끼치기도 한다. 말하자면 대학 바깥의 사람들보다 저급한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은 상아탑의 교수들을 ‘맹신’한다.  
    
  ***

 최근 고려대 정 아무개 교수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언론보도들은 공통적으로 그가 ‘왕따’ 때문에 자살했다고 한다. 그리고 ‘왕따’의 원인을 지방대학 출신이라는 데서 찾고 있다.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에 있고, 현직 대통령을 배출한 대표적인 메이저 대학들 가운데 하나가 고려대학이다. 한국 대학들의 저급한 관행으로 미루어 고려대학 교수진이라면 대부분 고려대학 출신 이상들만 모여 있을 것이니, 지방대학인 공주대학 출신의 정교수가 흡사 ‘붕어 떼 틈새의 피라미’ 정도로 여겨졌을까? 피라미 정도가 붕어 급인 자신들 사이에서 노니는 ‘꼬락서니’가 눈에 거슬렸을까? 그들은 왜 ‘가련한’ 그를 왕따시킨 걸까?

 사실 한 집단에서 왕따를 당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대다수 구성원들과 다른 행동양태를 갖는 경우, 다른 하나는 자신들의 평균보다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그것들이다. 양자 모두 사회적 병리현상들로서 ‘치유 불가능한 부정적 집단행동’이라는 점에서 사회의 저급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현상들이다. 실제 대부분의 경우 능력이 모자라서 왕따를 당하는 것은 아니다. 외부로부터 이입(移入)된 구성원의 능력이나 자질이 자신들의 평균보다 낮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당황스런 다수는 공격성을 보이게 된다. 까닭 없이 특정인을 배척하는 행태, 그것이 바로 ‘왕따’다.

 나는 정교수의 능력이나 인간관계를 잘 알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국 교수시장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하는 ‘카르텔’을 고려해볼 때, 그가 지방대학 출신으로서 고려대학 같은 메이저 대학에 입성했다는 그 사실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일이다. 그가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무슨 수로 그런 암초들을 피해 ‘교수임용’이라는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었으랴. 아마도 간신히[혹은 너끈히] 접안(接岸)에 성공한 그를 보며, 선배교수들이나 동료들은 ‘어라, 저 놈 봐라!’라고 경악했을 것이다. 그의 능력이나 장점을 인정하기보다는 자신들과 다른 학부 졸업장을 쥐고 있는 그가 자신들과 같은 반열에 오른 것을 참지 못했을 것이다. ‘노비문서’인 학부 졸업장의 원천적인 핸디캡을 시원스레 극복해낸 그에게 박수를 치는 대신, 도리어 새로운 양태의 공격을 가하게 되었으리라.
교수들이 뜻만 합친다면 동료교수 하나쯤 ‘왕따’시키는 일이야 무슨 대수이겠는가. 교수가 관여해야 할 온갖 일들이 ‘왕따 작전의 현장’일 것이니, 그 속에서 갓 40의 여린 그가 감내해야 할 부담은 오죽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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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지식사회를 대표하는 것이 대학이고 교수집단이다. 그러나 ‘실력을 제외한’ 온갖 기준들을 지뢰처럼 묻어놓고 차별을 자행하는 ‘무자비한 집단’이기도 하다. 서울과 지방, 서울과 수도권, 본교와 분교 등은 1차적 차별 기준이다. 서울에 있는 대학들이라고 모두 ‘서울대학’은 아니다. 그 속에도 1류, 2류, 3류가 있다. 서울의 1류라고 모두 같은 것도 아니다. 초일류와 범일류가 있고, 준일류도 있다. 2류와 3류도 같은 방식으로 세분되는 것은 물론이다. 최상의 대학 내에서도 음으로 양으로 차별을 자행하는 기준들이 엄존한다. 이런 차별구조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마음의 흐름은 단 두 갈래다. 가당찮은 우월감과 비참한 열등의식이 그것들이다. 일류대학 구성원들이라 하여 모두 같은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도 묘한 차별이 자행되고, 그에 따르는 ‘상대적 열등감’ 또한 엄연히 존재한다.

우월감과 열등의식을 갖게 하는 상황은 언제든 있을 수 있지만, 지식사회의 그것처럼 국가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것도 없다. 우월감도 열등감도 ‘실력에 의한 자부심’과 거리가 멀다는 점에서, 현재 한국의 지식사회는 나라의 발전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집단인 셈이다.

***

몇 년 전 미국에서의 일이다. 세칭 일류대학 출신의 유학생을 한 사람 만난 적이 있다. 학교에 갔다가 자신보다 먼저 유학 온 어떤 사람을 반갑게 만났더니, 대뜸 “어중이떠중이대학 출신들이 모두 유학이란 걸 오는구나!”라고 말하더란다. 자신이 나온 대학보다 세상에서 말하는 서열이 한 단계 높은 대학을 나왔다고 생각한 그가 자존심이 상했던 듯 무의식중에 내뱉은 말이었을 거라고 씁쓸하게 웃는 것이었다.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서 뿔나고,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새는 법이다. ‘글로벌 시대’를 고창(高唱)하며 지구촌 곳곳에 나가서도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누가 감히 우리를 넘보랴?’와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못난이들이 바로 우리 지식사회의 자화상이다.  

***

그래서 이 순간,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난 고려대학의 정교수가 아쉬운 것이다. 까짓것 못난이들이 왕따를 시키거나 말거나 굳세게 버티며 ‘노력과 실력’으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보여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잘한 참새들의 입방아를 넌지시 웃어주며 학문의 대로(大路)를 뚜벅뚜벅 걸어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2010. 10. 22.

      타쉬켄트의 호텔방에서  
      백규, 통곡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씀  
Posted by kicho
출간소식2009. 3. 31.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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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발표한 칼럼과 단상들 가운데 상당 부분을 추려 『어느 인문학도의 세상 읽기』(인터북스 간행)라는 제목의 책을 펴냈습니다. 저는 그간 한국 고전문학과 해외한인문예 등에 관한 다수의 논문과 저서들을 출간해오면서 틈틈이 세상사에 대한 짧은 글들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몇 편을 제외한 이 글들 대부분은 새 정부가 출범하기 이전 시기의 것들입니다.
 네 부분(1부 : 대학, 교수, 교육, 그리고 인문학/ 2부 : 굴곡진 세상의 맥락 읽기/ 3부 : 내가 읽은 내 마음/ 4부 : 훔쳐 읽은 남의 마음)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는 총 88편(1부 : 37편, 2부 : 20편, 3부 : 22편, 4부 : 9편)의 글들이 실려 있습니다. 1부는 주로 대학과 교육, 혹은 인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에 관한 내용을 주로 하는 글들이고, 2부는 주로 대학 안팎의 지식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글들이며, 3부는 생활주변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단상들입니다. 4부는 세계 각지로 여행을 하면서 얻은 글들 가운데 한 부분입니다.
 저는 대학의 현실에 대하여 날카로운 비판의 메스를 가하기도 하고, 생활 주변에서 부딪치는 갖가지 사상(事象)들을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는데, 어떻게들 보실지 약간 걱정입니다. 특히 대학이나 인문학에 대한 비판적 진단을 나름대로 내려보았는데요. 어쩌면 저 자신의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안목이 나름대로 융합되어 있다고나 할까요? 다음은 각 부분에 실려 있는 글들의 제목이다.

 1부 : 대학, 교수, 교육, 그리고 인문학
  대학의 꿈과 현실/대학교육은 상품이 아닙니다/대학평가와 메이저 대학들/외국인 교수 영입의 전제/대학의 양식, 대학인의 양심/병든 대학과 아마추어리즘/BK21과 대학사회/우리 지식사회의 천박성/학문적 담론의 시대를 지향하며/인문학의 현실과 지향/우리말과 글로 학문하기/논문대필과 교육개방/학술출판과 정보공유/지식사회의 한탕주의/표절에 흔들리는 지식사회/‘가짜박사’ 부추기는 사회/지식인들의 선진국 콤플렉스/대학교수와 국민의식/교수 임용비리와 우리 사회의 연줄문화/교수와 조교/대학교수와 선비정신/교수의 고통/메이저 대학들부터 스스로 문을 열라/대학사회와 혈통의식/죽은 선비의 사회/‘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전통사회의 파수꾼/영어강의와 학문의 자립성/기말고사 성적평가를 마치고/수능성적ㆍ석차 공개와 대학 신입생 선발 전환의 시대적 요구/국민수탈의 교육산업/부교재 리베이트와 착취 형 교육구조/석학(碩學)이 돈 몇 푼으로 만들어지나/‘인문한국’이나 로스쿨이나.../지방대학의 아픔/살짝 맛본 미국의 대학

2부 : 굴곡진 세상의 맥락 읽기
  <용비어천가>를 모독하기 말라/국정의 난맥과 이념의 부재/대토지 소유자들의 나라/대선 주자들, 담론의 격을 높여라/땅에 떨어진 이도(吏道)/제스처의 나라 대한민국/‘미네르바’가  가르쳐 준 것/빼앗긴 고문서, 우리의 부끄러움/중화주의, 그 걸러지지 않는 역사의 노폐물/민족적 자존심/민족자존의 정도를 고수하라/빨치산스크에서 만난 고려인/재미한인들과 문학/실미도/문화 제국주의/책 사랑, 나라 사랑/책 이야기/역사의 진화는 완성되었는가/죽음을 모르는 자, 삶을 논하지 말라/내 인생의 책 한 권

 3부 : 내가 읽은 내 마음
  스승의 날 유감/가을밤, 곰보 스크린, 그리고 가족/공공장소의 유실수들/공부하러 집 떠나는 아들을 보며/나이를 먹는다는 것/늙음의 미학/단옷날/육안(肉眼)을 넘어 심안(心眼)으로/말이 많아 탈도 많은 세상/망둥이의 추억/태안의 절망, 그리고 작은 희망/모정/부정(父情)/버리고 떠나기/소 이야기/원앙소리/영안실에서/촌놈/버려진 아가들, 거두어진 아가들/신화서점화장실에서 만난 중국소년/눈 내린 산길을 걸어서 출근하며/월드컵과 문화, 그리고 종로서적
 
 4부 : 훔쳐 읽은 남의 마음
 내 등짝에 죽비를 내려친 유럽/데쓰밸리(Death valley), 그 영원한 삶을 잉태한 죽음이여!/북경에서 만난 천주교/대만에서 만난 무덤들/못 말리는 한국인의 낙서벽(落書癖)/베트남에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경박호에 잠긴 발해 역사/조선 통신사와 함께 한 ‘사행 길 1만리’/마왕퇴(馬王堆)의 무덤 속에 잠자고 있는 여인이여!

                    2009. 3. 30. 도서출판 인터북스 출간. 값 15,000원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