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6. 2. 22:15

 

 




헤게모니를 장악한 미국 유학파와 학벌 공화국

-김종영의 <<지배받는 지배자>>를 읽고-

 

 

 

십칠 년 전쯤이었을까. 1년을 머물기 위해 처음으로 미국에 갔었다. 그 대학엔 한국인 유학생들이 아주 많았다. 어느 날, 박사과정에 재학하던 한 친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툴툴거렸다. 한국 K대학 출신인 그는 갓 입학한 후배를 유학생 모임에 데리고 가 소개를 한 모양이었다. 그 자리에 끼어 있던 S대 출신의 한 유학생이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어중이떠중이가 다 유학을 오는구나...”

 

아마 들릴락 말락 혼잣소리로 중얼거렸기에, 그는 대놓고 항변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명색이 K대학 출신에게 어중이떠중이란 표현을 쓴 데 대하여 자못 분개하고 있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 있던 나로서는 ‘S대 출신이 K대 출신을 차별하는 곳이 한국임을 생생하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S대 출신이라는 그가 궁금했고, 그가 수강한다는 강의를 몇 번 청강하면서 자연스레 그를 관찰하게 되었다. 미국인 학생들이 다수였고, 중국인 서너 명과 그를 포함한 한국인 학생들이 두어 명 섞여 있었다. 강의와 토론으로 이루어지는 수업의 열기가 대단했다. 미국인 학생들은 교수가 제지해야할 정도였고, 중국 학생들도 나름 열정적이었다. 심리학 관련 강의였던 만큼 나로서도 관심 가질만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는 시종일관 조용했다. 그의 영어 발언을 듣고자 몇 번 나갔으나,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지친 나머지 나는 그에 대한 관찰을 그만 두었다.

 

교수인 내 기준으로 말하면, 그는 그 클래스 룸의 열등생이었다. 그 뒤로부터 학벌 차별의 문제를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남들 보기에 초라한지방대학 출신이지만, 서울에서의 대학원 유학으로 세탁된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이른바 보따리 장사단계를 건너 뛴 채 일찌감치 20대 후반에 대학 전임이 된 덕분이었을까. 나는 그 때까지 그들로부터 명시적으로 차별을 받는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직장에서 국내의 이른바 명문대학출신들[특히 미국 유학파]을 관찰해보았으나, 그들 역시 그냥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일 뿐이었다. 모를 일이다. 혹 어느 구석에 뛰어난 점이 숨어 있는지! 설혹 있다 해도 그건 한 끗 차이일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늘 수그러들지 않는 이슈는 바로 학벌의 문제다. 절대 출신학부를 차별의 근거로 들지 않는 미국과 달리, 우리는 1차적 차별[다른 말로 절대적 차별]의 잣대를 출신학부에 두고 있다. 스카이(SKY)[그 중에서도 서울대학]로 대변되는 출신학부의 기득권이야말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미국 유학파에게 덤으로 주어지는 최고최대의 프리미엄일 것이다.

 

***

 

최근 바쁜 틈을 타서 모처럼 좋은 책을 읽었다. 김종영 교수의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이란 책. 서구 이론들의 틀을 원용하긴 했으나 삶의 현장에서 관련자들을 만나 관찰한 사실들을 설득력 있는 어조로생생하게 분석전달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나를 포함, 고리타분한 책상물림들의 저작과 많이 다르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조선시대 중인계층에 비견되는중간적 소수자(middleman minority)로서의 미국 유학파가 갖는 다양한 얼굴들을 과감하게 보여 준 점이야말로 김 교수가 갖고 있는 엄정한 학자적 결기(決氣)의 발로일 것이다. ‘한국의 우등생들이 미국의 대학들로 유학을 간 뒤 열등생으로 전락했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는 것, ‘미국에서 열등생으로 전락하는 요인도, 한국에 돌아와서 헤게모니를 쥐게 되는 요인도 뛰어넘을 수 없는 영어의 힘에 있다는 것 등이 이 책에서 강조되는 핵심적 요지들 가운데 하나다.

 

책에는 이것들을 뒷받침하는 불편한 진실들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막대한 지원,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우수 연구중심대학들, 탈 중심적 구조등을 갖춘 수월(秀越)한 미국 대학들과 모든 면에서 초라한 우리나라 대학사회사이에는 뛰어 건널 수 없는 심연(深淵)이 가로놓여 있다는 진단은 누구나 수긍할만하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미국 대학들의 우월성은 도덕적문화적 헤게모니로부터 나오는데, 그 헤게모니는 학문 활동의 깊이와 진지함, 열정 등과 직결되는 것이다.

 

김 교수가 막스 베버의 미들맨 마이너리티의 친족주의와 연줄에 의한 천민자본주의를 인용하여 우리나라의 대학을 천민 학문 공동체로 규정한 것은 대학사회가 지닌 합리성의 결여라는 현실적 근거를 바탕으로 했기에 더욱 설득력이 있다. 미국 유학파는 이렇게 낙후된 천민적 학문 공동체에 미국적 합리성을 전파하면서, 동시에 글로벌 문화자본의 상징폭력을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유학과 함께 경험하는 연구중심 대학들의 실상이나 학문 대가들과의 만남은 유학생들을 크게 고무시키지만, 그 공간에서 사회적 피라미드의 상층으로 올라갈 수 없는 근본적 한계 때문에 다시 낙후된 고국으로 돌아와야 하고, 결국은 천민공동체의 헤게모니의 장악이라는 비윤리성을 발휘하면서 매우 부정적인 존재로 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

 

우리는 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선비감언지사(敢言之士)’라 불러왔다. 왕조시대의 임금이나 임금 주변에 대하여 드물지만 바른 소리를 아끼지 않는선비들이 있었다. 정말로 무서울 것 없는, 요즘 같은 대명천지에 권력의 중심부를 향하여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감언지사가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이해하기 어렵다. 감언지사 없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학문권력 아니 학벌권력의 서슬이 지금처럼 세력을 부릴 때가 우리 역사상 그 언제였던가. 그 학벌권력이 낙인을 찍으면 꼼짝 없이 낙향할 수밖에 없는 게 오늘날 지식사회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김종영 교수는 ‘21세기 한국의 감언지사라 할 수 있으리라.

 

겉으로 보기에 미국 유학파는 매우 유능하고 미래지향적이며 합리적인 학문의 리더들이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공동체에 수시로 글로벌의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이기(利己)의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남들이 보기에 그들은 감추는 게 많은군상이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감추려 하는 것일까. 사실 그 점이 못내 궁금했는데, 김종영 교수의 이 책이 그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사실 이 책에는 차마 입으로 옮기기 부끄러운 미국 유학파들의 실상과, 헤게모니 쟁탈전의 전사로 변한 학벌들의 민낯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책 가운데 비교적 함축적이며 온건하게 표현된 두어 단락들을 결론 삼아 옮겨 놓는다.

 

 

한국연구자들이 시류에 민감한 이유는 또 다시 이들의 트랜스 내셔널(transnational) 위치와 깊이 연관된다. 트랜스 내셔널 미들맨 지식인들의 주요 전략은 미국의 연구 센터에서 생산되는 지식을 빨리 국내에 도입하여 선점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분야가 없기 때문에 외국의 첨단 연구에 주목해야만 한다. 분야를 막론하고 미국 유학파 교수들은 미국에서 한 것을 가지고 와야 주목을 받을 수 있고, 연구비를 지원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시류를 타면 이런 장점이 있지만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서 답을 구하는 방식을 취해야 하는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하기는 어렵다. 석학은 유행을 타는 사람이 아니라 유행을 만드는 사람이다()학계에 진입한 신진 연구자들은 이전 세대보다 개방적이지만 이미 구조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학벌 중심의 네트워크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신진 연구자는 학계에서 파워가 없고 연구를 위해 네트워크를 만들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학벌 중심의 연구 관계는 다른 학벌을 가진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이 교수는 모 대학 중심의 학회의 회식자리에서 서로 형, 동생 하는 모습에 아연실색했다고 말한다.

 

이 교수: 나만 이방인인 것 같고, 그렇지만 꾹 참았죠. 더럽더라고요. 회식 자리에서 느끼는 건 솔직히 말해서 남의 동창회에 괜히 껴서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있었지만 꾹 참고 앉아 있었던 거죠.

 

이 교수는 결국 이 연구 모임과 거리를 두었다. 이는 그 연구 집단에게는 손해가 된다. 왜냐하면 이 교수의 전문성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네트워크가 개방적일 때 연구의 전문성과 생산성이 높아진다. 연구는 지식의 교류인데, 이 교류가 폐쇄적일수록 독창적인 지식 생산은 어려워진다. [김영종 교수의 책, 190~192]

 

 

문제는 미국 유학파 한국 지식인의 학문적 열정이 트랜스 내셔널(transnational)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연구중심 대학에서 고양된 열정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급격히 쇠락한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조인구 교수의 에피소드는 이를 잘 말해준다. 1986년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한 조 교수는 경제학 부문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을 배출한 시카고 대학 교수를 거쳐 서울대 교수로 부임했다. 하지만 한국에 온 지 1년 뒤인 1998년에 서울대를 그만 두고 돌연 미국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일은 한국 경제학계에서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2006년에 한국을 방문한 조 교수는 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 조 교수는 노벨상을 받은 제임스 헤크먼, 게리 베커, 로버트 포겔 교수 등 시카고 대학의 교수들을 언급하며, 이들은 나이가 70, 80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까지 공부한다는 간접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조 교수는 미국 대학 교수들의 학문적 열정에 항상 자극을 받는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수학자들과 연구해온 박 교수는 피부로 느낀, 한국 교수와 미국 교수의 차이점을 이렇게 말한다.

 

박 교수: 미국에서 교수하는 사람들은 교수 직책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연구하는 게 좋아서근데 한국은 교수라는 게 저거잖아요. 조금 기득권층, 대접 받는 게 좋아서, 그 맛에 교수를 하는 거거든요. 공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교수를 하는 게 아니고.

 

박 교수는 한국 대학에서 공부를 열심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말한다. 또 연구에 대한 가치를 높이 평가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논문을 열심히 쓴다고 알아주는 사람도 많지 않다고 말한다. 사회학을 전공하는 남 교수도 비슷한 견해를 내놓는다. 열심히 공부하는 교수의 비율이 한국보다 미국이 훨씬 높고, 더 탁월한 연구를 하려는 욕심 역시 한국 교수들은 적다고 말한다. 한국 교수들은 다른 사람보다 나아지려는 경쟁의식도 없고 연구를 통해 블라섬하고(꽃을 피우고) 싶다는 욕망도 없다는 것이다.

학문적 열정은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학문적 전념은 고도의 감정적 에너지를 요구하는데, 한국 학계에서 이것을 지속시키기는 너무나 어렵다. 학문에 대해 점점 냉담해지는 것은 트랜스 내셔널 미들맨 지식인들의 공통적으로 갖는 집단적 감정 상태다. 한국 지식인이 미들맨인 것은 이들의 열정이 최고가 아님을 뜻한다. 학문의 길만이 최고로 가치 있는 일이라는 기이한 최면과 환상 없이는 진정한 학자가 될 수 없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종교적 맹목성은 감정적으로 충만한 학문 공동체 속에서만 배양된다. 곧 한국 대학에서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는 이 둘 사이의 지식 격차, 윤리적 격차 뿐만 아니라 열정(또는 감정)의 격차속에서 발생한다. 로고스는 에토스와 파토스 없이 홀로 설 수 없다.[김종영 교수의 책, 196~19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5. 2. 15:11

 


야스꾸니 신사 참배에 나선 아베

 

 

 

 

딱하다 아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의 상공 대신을 맡았다가 A급 전범으로 복역했고, 1957년 총리가 되어 정계의 전면에 등장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패전국의 총리임에도 승전 미국의 반공논리를 충실히 따르다가 결국 1960년 미·일 안전보장조약을 개정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그의 외손자가 바로 아시아인들의 밉상 아베신조(安倍晋三). 최근 그는 자신의 외할아버지 결정이 옳았음을 확인했다고 했다. 말하자면 기시가 미일 안전보장조약을 개정했듯이, 자신도 미일 안전보장을 개정하여 집단자위권을 확보함으로써 자위대의 해외파병이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동맹인 미국에 편승하여 일본을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탈바꿈시키겠다는 야욕의 표출이다. 조손(祖孫)이 대를 이어 아시아 위기의 핵으로 떠올랐고, 그것이 이웃나라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데 끝나지 않고 아시아와 세계평화의 잠재적 위협 요인으로 대두되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 아베가 지금 가증스런 혓바닥을 놀리며 어벙벙한 미국인들을 호리고 있다. ‘오바마의 푸들이란 별명을 뒤집어씀직한 그가 미 대륙을 동서로 누비며 미국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모습이 역하긴 하지만, 역사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전혀 무익한 일은 아니리라.

 

일본은 애당초 우리를 한 수 아래로 멸시해왔고, 일본을 중시해온 미국 역시 우리를 그렇게 대해 왔다. 표리부동한 미국인들의 행태는 이미 다른 글[본 블로그의 정신 차립시다!-웬디 셔먼의 말을 듣고참조]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정말로 우리의 국격이나 외교역량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에 대하여 심각하게 자문(自問)하지 않을 수 없는 나날이다. 해방 70년이 지나도록 이 두 나라의 정치구조에 대한 분석이나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역대 행정부들 또한 주먹구구식으로 대응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의 나태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국의 정치인들과 아베의 짝짜꿍을 바라보면서 역사와 국제 현실정치의 언밸런스를 절감하게 된다. 분명 일본은 미국의 적국이었고 음으로 양으로 많은 것들을 빼앗고 빼앗겨 온 상대방임에도, 중국과 대치하고 있는 현 상황에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있는 현실이 우리에겐 매우 불합리하고 부당한 장벽으로 다가 선 것이다.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과거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잘못을 사과하라는 요구가 한국과 중국에서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 아베다. 사과를 하게 되면 지금 그들이 추구하는 현상의 변화에 분명 지장이 초래될 것이고, 군국주의의 부활이라는 철 지난 꿈이 도로아미타불로 돌아갈 것을 우려하는 소아병적 사고 때문일 것이다.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뜻이 옳았다는, 개인 아베의 판단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이유는 없다. 미국과 동맹을 맺어 집단자위권을 행사하겠다고 해서 과거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과거의 역사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해서 그런 일을 해서 안 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과나 재발 방지의 약속 한 마디 없이 불리한 역사의 수정을 망나니 긴 칼 휘두르듯 하는 총리 아베의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지금의 아베는 이웃집 꼬마로부터 빼앗아 손에 넣은 사탕 한 알을 돌려주지 않으려 온갖 거짓말과 얄팍한 꾀로 모면하고자 애쓰는 유치원 아동의 모습 그대로다.

 

미국 상하양원 합동회의장에서 떠듬거리는 일본 영어로 미국인들에게 아부를 떨었다 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베가 작은 것을 넘어서서 좀 더 큰 것을 지향하는 대인의 정치를 담을만한 그릇이 아님은 세계인들이 이미 깨달은 바이지만, 우리 입장에서 볼수록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다. 비록 입에 발린 수사(修辭)라 할지라도 사과의 말 한 마디가 분명 이 지역 외교의 난맥을 풀어낼 단초가 될 수 있음을 삼척동자도 알거늘, 어찌하여 아베는 총리대신이란 자의 직을 내세워 일본인들의 속 좁음을 만방에 선포하는 것인가. 지금 일본을 망치고 있는 극우세력이야말로 타일러 선도해야 할 동네 불량배들일 뿐인데, 설마 아베가 이들과 한 패란 말인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아베의 궁색하고 가련한 몸부림. 그리고 이에 부화뇌동하는 일본인들. 과연 일본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4. 17. 11:45

촌놈들의 향연-성완종과 이완구-

 

 

 

 

성완종이 뿌리고 간 오물이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다. 누구의 험한 말대로 ‘달라고도 하지 않은 돈을 주어놓고 부린 지랄’이 온천지에 악취를 풍기는 나날이다. 녹음된 성완종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그의 어눌하면서도 약간 순박하기까지 한 듯한 톤에 동정이 갔는데, 두 번 세 번 들으면서 참으로 ‘가증스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슬쩍 돈을 받아 챙긴 인물들도 구린 건 사실이나, 성완종이 흘리고 다닌 엄청난 양의 오물들은 참으로 처치곤란이다. 설사 수백억의 돈을 받았다한들, 요즘 같은 세상에 죄인의 구명을 목적으로 누군들 검찰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돈을 받고도’ 구명에 나서주지 않았다고 원망한다면, 그야말로 앞뒤 분간 못하는 멍청이다.  

나는 지금까지 ‘촌놈’을 자처하며 살아왔다. 충청도, 그것도 성완종의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출신이니, 내가 자처하지 않아도 남들 보기에 내 몸에서 촌티가 줄줄 흘렀을 것은 자명한 일. 그러나 촌놈인 덕에 남으로부터 지탄받을 죄 지은 적 없고, 황소처럼 그저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 올 수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은 ‘촌놈’이란 딱지가 그나마 내 자부심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성완종의 출현으로 ‘촌놈’에 대한 내 철학은 근본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성완종은 결코 ‘촌놈’이 아니다. 무늬만 촌놈으로 어수룩해 보일 뿐, 그의 야망이나 사기성은 여느 ‘도시 놈들’ 못지않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긁어모은 ‘남의 돈’으로 힘 있는 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옭아맬 덫을 놓고 다닌 것이 그의 한평생이었다. 돈 봉투로 만든 덫에서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돈에 약한 인간의 심성을 그리도 교활하게 간파하고 이곳저곳에 덫을 놓고 다닌 그였다. 그러니 그를 결코 내 사전에 규정된 ‘촌놈’의 범주에 넣을 순 없는 일.  

엊그제 고향의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고향 사람들이 두 편으로 갈라섰다고 탄식했다. 한쪽은 성완종 편, 다른 한쪽은 이완구 편일 것이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헛똑똑이’라 할 만큼 순진한 이완구도 교활함에서 성완종 못지않은 인물이지만, 분명한 것은 두 사람 모두 내가 생각하는 ‘촌놈’들은 아니다. 어리석음과 교활함을 바탕으로 부나비처럼 야망의 불꽃에 몸을 던진 존재들일 뿐이다. 그들은 결코 촌놈들이 아니다.

참, 세상 살기 어렵다. 촌놈으로 사는 일은 더 어렵고, 제대로 된 촌놈으로 사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무늬만 촌놈’인 촌놈들이 득실대는 세상에 나 혼자 ‘제대로 된 촌놈’임을 표방하기란 불가능하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애국가>의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를 ‘태안사람 태안으로 길이 보존하세!’로 알아 온 내 ‘촌놈성’은 성완종과 이완구로 인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아니 그 두 ‘사기 혐의자들’을 둘러싸고 갈려 있는 고향 사람들의 딱한 모습으로 인해 내 ‘촌놈성’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래서 더욱 부끄러운 나날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4. 14. 14:49

성완종 사건을 보며

 

 

 

참 가관이다.

산다는 게 무언지, 우리가 뭘 위해 사는지 참으로 많이 헛갈리는 나날이다.

돈 썩는 냄새가 천지에 진동할수록 국가를 경영하는 인간들이 죄를 짓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가소롭고 딱하다. 매에 쫓긴 꿩이 머리를 논바닥에 쳐 박고 몸부림치는 모습 같아 애잔하기까지 한 요즈음이다. 사방팔방 돈을 퍼주다가 법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게 되자, 동네사람들에게 일러바치고 목숨을 끊은 그 또한 가소로운 건 마찬가지다.

 

돈을 아끼고 불려가며 기업이나 잘 운영할 것이지. 정치에 뛰어들어 기업을 망치고 자신마저 비명에 간 일을 어떻게 변명할 수 있을까. 물론 정치인이 처음부터 정치인으로 태어나는 건 아닐 테고, 기업을 키우기 위해서라도 정치에 한 발을 들여 놓아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정치판과 거리를 두고도 세계적인 기업을 이룩한 주변의 인물들이 어디 한 둘인가. 모름지기 기업을 운영하는 자라면, 기업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그 기업을 성실하게 키워가야 하는 것이 본연의 의무일 터. 만에 하나 정치 모리배들에게 돈을 퍼부어야 겨우 기업을 운영할 수 있다면, 만사 밀어두고 그 문제부터 고발하거나 바로잡았어야 옳다. 그런 일이 불가능하여 자살이란 극단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그러지 않고 그럴 듯한 감투 하나를 얻기 위해 온 나라를 휘저어 놓은 것이라면, 죽음으로도 그 죄과를 씻을 순 없다.

 

나이 먹을수록 먹는 양이 줄어든다. 잘 차린 밥상을 보면 회가 동하기 전에 걱정부터 앞선다. ‘저걸 다 어떻게 먹는단 말인가’, ‘반도 못 먹고 남기면 그냥 쓰레기로 버려질 텐데...’, ‘엊그제 보도에 한 두 끼로 하루를 지내는 아이들을 보았는데...’ 등등  ‘먹는 것’의 육체적 부담과 사회적 함축의 복잡성 때문에 편치 않은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사실 고량진미의 확보에서 삶의 행복을 느끼는 단계를 넘어서야 비로소 사회적 자아가 제대로 작동되는 법이다. 열심히 먹어도 1년 동안 쌀 한 가마를 못 먹는 게 인간이다. 정치하는 게 ‘돈 쓰는 일’이라면, 돈 없는 자는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한다. 돈 받은 사람들이 모두 ‘꿀꺽했다’고 돈 준 사람은 항변했다. 정당한 정치자금으로 처리하지 않고, 사복(私腹)을 채우더라는 것이다. 참, 그 큰 뱃구레들이 부럽고, 그악스런 욕심보가 놀랍다. 하나같이 돈 받은 일 없다고 발뺌들을 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논바닥에 주둥이를 쳐 박은 꿩’의 형상이다. 애시당초 달라고 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돈 주어놓곤 어려울 때 도와주지 않는다고 앙앙불락하며 '다 까버리는' 행위도 시쳇말로 '껄쩍지근하기'는 마찬가지다.  

 

나라는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돈 받지 않은 놈 없는 정치판'은 ‘개판’으로 전락했다. 정신 제대로 박힌 인재들은 산야로 숨고, 사기꾼들만 ‘살판났다’ 활개 치는 세상이다. 정신 나간 기업인은 제가 먹여 살려야 할 종업원과 그 가족들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다. 월급날이 오기만 고대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종업원 아내들의 표정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했다면, 월급날 아빠가 통닭이라도 몇 마리 사오기를 기다리는 종업원 자식들의 눈빛을 단 한 번이라도 떠올렸다면, 성완종 씨는 ‘천금 같은’ 기업을 그런 식으로 ‘아작 내지는’ 않았으리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과연 그 죄가 사해질 것 같은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