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9. 8. 07:32

 

 

 

역사의 고비들을 지나며 많은 차별을 겪어 온 것이 우리 민족이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일본, 서구세계 등이 차별을 자행했거나 하고 있고, 대내적으로는 왜곡된 권력의 지형에 의한 지역과 계층적 차별의 구도가 지속되고 있다. ‘식민 : 피 식민은 식민주의 시대의 도식화된 차별구도였고, 그로 인한 민족적 자존심의 끔찍한 손상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탈 식민의 조류가 거세게 소용돌이치고 있지만, 차별구조는 보다 예리하게 내면화하고 있는 작금의 상황이다. 일본인들에게서, 백인들에게서, 그토록 차별과 멸시를 받고 살아 왔으면서도 일자리를 찾아 온 동남아 사람들과 흑인들을 잔인하게 차별하는 우리 아닌가. 오랜 기간의 학습을 통한 만큼 내면에 들어앉은 차별구조의 똬리를 집어던질 법도 하건만, 우리는 차별구조의 예각화라는 폐습의 대물림을 반복하고 있다.

 

엊그제, 어떤 신문에 서울대생들의 인터넷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의 이야기가 보도되었다. 스누라이프란 15만여 명의 서울대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펴는 인터넷 사이트인데, 최근 다른 대학 학부 출신 서울대 대학원생들을 커뮤니티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주장이 이 사이트의 게시판에 빈번히 올라오고 있는 것이 문제의 핵심인 모양이다.

 

 


대학신문(大學新聞)(2010. 09. 05.) 기사에서

 

9만 평방킬로미터 남짓의 작은 나라에 올망졸망 200개가 넘는 4년제 대학들이 모여 서열화와 차별의 향연을 펼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그 중 서울대 사람들이 떠는 위세는 참으로 가관이다. 이른바 순혈주의로 미화되는 배제의 논리, 그 연원이야말로 지독하게도 식민주의적 차별의식으로부터 나온 것일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학자 하나, 사상가 하나, 정치인 하나, 기업인 하나 키워내지 못하면서, 이른바 최고 학문의 전당임을 자랑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천박성은 극명하게 확인된다. 가까스로 식민주의의 터널을 빠져나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우리의 자화상이 바로 이 대학이고, 휘청대는 한국 지식사회의 민낯 또한 이 대학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우리가 이 대학만 나무란다면, 너무 불공평한 일일 것이다.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정권과 교육정책 당국, 아니 무엇보다 이 대학에 대하여 무조건적 신뢰를 보내는 국민 전체의 맹목을 질타해야 함에도 대학만 나무라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망각하는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맹목이 이 대학을 망치고, 지식사회를 망치며, 궁극적으로 나라까지 망치게 될 거라는 전망이 그리 어렵지 않음에도, 우리는 날만 새면 줄 세우기와 차별의 무익한 수작으로 날밤을 지새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누라이프에 횡행한다는서울대생들의 언동은 새삼 근원을 찾아 뿌리를 뽑을 여유가 없을 정도로 다급한 발등의 불이다.

 

어찌 학생들만 나무랄 일인가.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고, 학생은 선생의 거울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선생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잘 하는가 못하는가를 알려면 자식이나 학생을 보면 안다. 순혈주의란 지금의 학생들이 만들어낸 문화가 아니다. 식민 시대부터 서울대에 온존해 있던 독점적 배타주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대학 특히 서울대학의 교수자리는 으레 서울대 출신이 맡아야 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용되어온 그간의 세월이었다. 아무리 학문적으로 특출한 업적들을 갖고 있어도, ‘서울대학도 못 나온 주제에 서울대생들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느냐는 논리가 바탕에 깔려 있는 한, 순혈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대학 경쟁력으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미국의 대학들에 가보라. 자교 출신들은 아예 그 학교에 서류를 낼 엄두도 못 내도록 되어 있다. 기껏 5% 내외의 자교 출신 교수진을 갖고 있는 것이 세계 유수의 대학들이다. 어느 대학을 나왔든 해당 분야에서 이룩해온 업적이나 앞으로의 가능성이 인재를 뽑는 기준일 뿐, ‘서울대를 나온 사람만 서울대 교수가 될 수 있다는 서울대 식(혹은 한국식)의 배타적 기준은 그들 마음속에 아예 없다. 여기서 생겨나는 대학의 경쟁력은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서울대나 그 언저리 대학들이 형성하는 공고한 카르텔에 지체되는 것은 나라와 민족의 발전이다. 열린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포용하고 경쟁해야 할 새싹들이 배타적 순혈주의로 무장하게 된 것도 이들 폐쇄된 공간에서 대물림해온 못난 카르텔의 논리탓이다. ‘그다지 합리적이지 못한 입시제도와 그 제도에 의한 순간적 간택(揀擇)’을 일생 지속되는 배타적 권리의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그리고 그런 것을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젊은이들의 행동지표로 삼게 해서도 안 된다. 학생들로 하여금 겸허한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좋은 업적을 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는 인물이 되도록 인도하는 것이 그나마 지금의 서울대가 국가와 민족에게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런 생각만이 서울대 스스로의 경쟁력을 갖추게 하고, 지식사회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나라를 건전하게 바꾸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스누라이프 게시판 논란은 서울대 혹은 한국 대학사회의 민낯을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적 사건일 뿐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8. 29. 21:28

 


한국을 떠나기 전 백규서옥을 방문한 세바스티안

 

 


한여름날의 백규서옥에서 게리(Gary Younger), 백규, 세바스티안

 

 


백규서옥을 방문한 세바스티안의 지도교수 키이스 하워드(Keith Howard) 교수와 함께

 

 


한 겨울의 숭실 교정에서 세바스티안과 키이스 교수

 

 


 한국의 전통악기들과 탈들이 진열된 키이스 교수 자택 거실 모습

 

 


키이스 교수의 한국음악 관련 디지털 자료들

 

 

 

며칠 전 일본의 교토에서 세바스티안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내가 국내에 있는 줄 알고 전화했다가 해외로밍으로 연결되자 다급하게 문자를 보낸 것. ‘연수기간이 끝나 831일 런던으로 돌아가는데, 한 번 뵙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점심약속으로 간신히 잡아놓은 2712시 정각에 독일 술 한 병을 든 그가 찾아왔다. 그간 머물렀던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다시 돌아가 짐 싸는 일을 마무리해야 하므로 점심 식사의 여유가 없다는 그를 잡아놓고, 겨우 30여 분 간 석별의 대화를 나누었다.

 

1986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의 약관이었다. 함부르크 출생의 독일인. 이른 나이임에도 많은 학교들과 많은 나라들을 거쳐 온 점이 놀라웠다. 1997~2006년까지 미션계 김나지움에서 공부했고, 그 사이의 1(2003~2004) 동안은 교환학생으로 남미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을 다녀오기도 했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뒤  2007~2012년 함부르크 대학에서 조직음악학[혹은 과학음악학: systematic musicology]을 전공하여 우수한 성적(Excellent grade)’으로 학사학위를 받았고, 그 기간 중 터키 이스탄불의 빌기대학교(Bilgi University)에서 1년간(2008~2009), 서울대학교에서 1년간(2010~2011) 교환학생으로 머물기도 했다. 2012~2013년에는 런던대학교의 동양아프리카학 대학(SOAS: The 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에서 민족음악학(ethnomusicology) 석사학위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쳤고, 2013년부터 같은 대학에서 민족음악학의 권위자 키이스 교수(Dr. Keith Howard)의 지도로 박사과정을 이수하는 중인데, 작년부터 지금까지 1년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 시조에 관한 현장연구를 수행하다가 이번에 체류기간 만료로 떠나게 된 것이다.

 

그는 독일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철이 들면서 파라과이터키한국영국 등 세계를 무대로 자신의 꿈을 키워가는 수재였다. 그 과정에서 모국어인 독일어 외에 영어스페인어터키어프랑스어라틴어 등을 유창하거나 능숙하게 구사했고, 한국어 실력 또한 어떤 외국인들보다 월등했다. 기필코 최단기간인 내년에 박사학위를 받겠노라는 그의 결심이야말로 모험에 가까운 그동안의 해외 편력으로부터 길러진 용기의 소산이리라.

 

그는 우리의 시조에 관해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가 쓰려고 하는 박사논문 또한 시조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시조의 음악적 본질이나 텍스트와 콘텍스트에 관하여 한국의 누구보다도 폭 넓고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한국에서 전통가곡이나 시조의 명창들을 만나 창법과 이론을 익히려고 애쓰면서 얻게 된 개인적 자산이기도 했다. 그의 지도교수인 키이스 교수 역시 우리 음악에 관한 몇 안 되는 외국인 전문가였다. 사실 세바스티안이 오래 전부터 나를 알게 된 데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경희대 영어영문학부 교수로 정년을 한 케빈 오록(Kevin O’Rouke) 교수는 탁월한 감성으로 한국문학을 꾸준히 서양에 소개해 왔는데, 키이스 교수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그런데 케빈 오록 교수가 13년 전 펴낸 자신의 저서 The Book of Korean Shijo(Harvard-Ewha Series on Korea,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2002)의 첫머리에 내 견해를 인용함으로써 키이스 교수도 나를 알게 되었고, 다시 그가 세바스티안에게 이 책을 사서 읽어볼 것을 권함으로써 세바스티안 또한 나를 알게 된 것이었다. 그가 한국 오는 기회에 나를 찾아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케빈 오록 교수의 시조 관련 저서

 

 


케빈 오록 교수 저서의 서론 부분

 

 

***

 

최근 나는 일본에서 호주 출신의 토키타 박사(Dr. Alison Tokita)로부터 일본음악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강의내용도 중요했지만, 일본음악이나 일본문화에 대하여 영어권 전문가로서의 토키타 박사가 갖는 사회적 위치나 의미가 각별함을 깨닫게 되었다. 토키타 박사 같은 자발적 외국 학자들 아니면 누가 세계에 일본음악이나 문화를 선전하고 유포시킬 것인가. 서양인이 영어로 외국의 수요자들을 상대로 한국음악이나 문화를 강의한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내가 세바스티안을 보며 무릎을 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앞으로 더 노력한다면 한국어도 발전할 것이고, 한국음악이나 문화에 대한 조예 또한 깊어질 것이니, 그는 우리에게 일본의 토키타 박사 못지않은 소중한 존재다.

 

민족문화를 세계에 선양한답시고 엉뚱한 사람들을 수억원씩 주며 불러다가 1회성 돈 잔치나 벌이는 우리나라 문화 담당부서는 참으로 한심할 따름이다. 앞으로 세바스티안 같은 외국의 젊은 인재를 발굴하여 우리 음악과 문화의 전도사 역할을 하게 한다면큰 돈 들이지 않고도 엄청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민족음악학 전공자들을 불러모아 한국음악과 문화의 우수성을 외국어로 설명하게 함으로써 우리 문화의 세계화를 앞당기도록 하는 것도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꽉 막힌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왜 외국인에게 귀한 교수자리를 안겨주며, 왜 한국어를 놔두고 영어로 외국인들에게 강의를 해야 하느냐고. 그런 류의 답답한 사고방식 때문에 지금 우리의 전통문화나 예술은 비좁은 이 나라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시들어가고 있다. 세계인들이 배우고 익히며 재창조재생산을 해야 그나마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한 지금의 상황이 암담하다. 우리 스스로가 민족의 전통문화이나 예술을 외면하는 현실이니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이제라도 우리 전통음악이나 문화의 외국인 전문가를 양성하는 데 깜짝 놀랄 만큼 과감한 투자를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세바스티안 같은 젊은 인재를 한국 전통음악과 문화의 전문가로 키운다면, 우리 전통음악과 문화의 세계화는 그 시점부터 가속화될 것이다. 우리의 정신문화를 국가와 민족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둠으로써 시들게 할 수는 없다. 문호를 개방하고 보편적 지식과 교양에 목마른 세계인들에게 들려주고 보여줄 때 우리 문화는 세계인들의 공유물이 되고, 꾸준히 발전할 수 있다. 세바스티안은 그런 점에서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우리의 보배로운 인재다.

 

 


문현 선생의 노래 발표회가 끝나고. 국립국악원에서

 

 


선무 치료의 대가 이선옥 박사 자택에서의 파티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8. 24. 20:59

 


헤이안 신궁의 웅장한 도리이

 

 


헤이안 신궁의 응천문

 

 


헤이안 신궁의 본전

 

 


헤이안 신궁의 봉물인 각종 술

 

 


헤이안 신궁의 뜰에 세워진 기원 팻말들

 

 


헤이안 신궁의 본전 앞에 세워진 기원 나무들

 

 

나는 어려서부터 일본인들은 귀신들과 함께 산다는 말을 들어 왔고, 일본에 올 때마다 그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일제 강점기 내내 우리는 그들의 신을 모신 집(즉 신사)에 참배할 것을 강요당했고, 지금도 일본 총리 아베의 신사참배가 세계적인 이슈로 지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한사코 일본 총리가 신사를 참배하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가 참배하려는 야스쿠니 신사라는 곳이 바로 우리를 괴롭힌 일본 전범들의 영혼을 모아놓은 곳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쟁의 책임을 자각하고 반성해야 할 일본 정치의 책임자가 오히려 전범들을 참배하다니,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양국에서 하도 성토를 해대니 그도 어쩔 수 없는 듯 가끔 봉납(奉納)’으로 대신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봉납 즉 사찰(寺刹)이나 신사(神社) 등에 금품을 기부하는 행위야말로 오히려 더 지극한 정성의 표시일 수 있다. 큰 신사들의 앞마당엔 술통들을 몇 단으로 쌓아올려 진열하고 특정 주류회사의 봉납물임을 표시해 놓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저 술이나 만들어 떼돈을 버는 그런 회사들이 고약하게도 일본에서는 애국의 결사체임을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의 공적(公敵)이 되어 있는 아베도 아마 그런 효과를 노렸으리라. ‘주변의 국가들이 하도 성토해대는 바람에 직접 참배는 못하니, 공물로나마 지극한 마음을 표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여기엔 두 가지 노림수가 있을 것이다. 중국과 한국을 적으로 돌림으로써 자기네 국민을 단합시키겠다는 대외 정치적 노림수가 그 하나요, 일본인들이 신처럼 떠받드는재물을 아낌없이 봉납함으로써 자신도 신사의 귀신들에게 보통 국민들 이상의 정성을 표했다는, 대내 정치적 노림수가 다른 하나다. 그러니 그로서는 신사참배 문제로 외국에서 일어나는 논란이 하나도 손해 날 일이 없는 셈이다. 나는 오히려 그가 두 나라의 그런 반응들을 은근히 즐기고 있다고 보는데, 나만의 느낌일까.

 

일본에 와서 놀라는 일이 있다. 개인들의 집에는 개인의 신사가, 공동체에는 공동체의 신사가, 국가에는 국가 규모의 신사가 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개인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결사체가 바로 신사임을 확인하게 된다. 몇 번 되지는 않으나, 일본에 오면 주택가를 돌며 개인 신사들을 구경하거나 마을 단위 혹은 국가 단위의 신사들을 구경하며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취미의 하나가 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 큰맘 먹고 헤이안 신궁(平安神宮), 야사카 신사(八坂神社), 요시다 신사(吉田神社) 등을 가 보았고, 동네를 걸으며 개인 집의 신사들을 곁눈질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다. 심지어 절에도 신사가 있었으니, 키요미즈 데라(淸水寺)에서 확인한 지슈신사(地主神社)가 그런 예였다. 어쩜 교회에도 있을지 모르는 일인데, 거기까진 확인하지 못했다.

 

 


야사카 신사 입구의 도리이

 

 


야사카 신사의 본전

 

 


키요미즈 데라(淸水寺) 안에 세워진 지슈신사

 

 


요시다 신사

 

 


요시다 신사의 본전에서 기원하는 사람들

 

 


요시다 신사에 딸린 산음신사(요리와 음식의 신을 모셨음)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귀신들을 모시고 사는 것일까. 마을이나 거리를 걷다 보면 작고 큰 도리이(とりい: 鳥居)들이 있고, 그것들을 통과한 안 쪽에 신전이 있었다. ‘鳥居鷄居(にわとりい)’로서 진언종을 설립한 구카이가 신성한 의식공간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했다고도 하고, 신도에서 닭을 신의 전령으로 생각하기에 닭이 머무는 자리라는 뜻으로 그런 말을 썼다고도 한다. 그 외에도 여러 설이 있으나, 아직 정설은 없다. 다만, 내 보기에 도리이가 성()의 세계와 속()의 세계를 구분하는 경계로 사용된 것만은 분명하다. 인간의 세계에서 도리이를 통과하면 신의 세계라는 것이다. 개인의 집들에 설치된 개인 신사들에는 도리이를 세울 수 없으니, 어쩌면 그 신사 자체가 외부로부터의 액()을 막아주는 방책 역할을 해온 듯했다. 집안이 산 사람들의 공간이긴 하나 귀신들과 공존하면서 외부로부터의 삿된 기운을 막아 주는 신성한 공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리이를 통과한, 이른바 성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도 속의 세계를 상징하는 돈으로 철저히 계산되고 있었다. 기복(祈福)이나 제액(除厄), 결혼 등 모든 행위에 돈이 따르고, 돈의 액수에 따라 복의 크기가 계량되는 속의 원리가 충실히 재현되는 곳이었다. 일본인들의 자기모순의 이기적인 행태는 속의 원리로 성의 세계를 재단하려는 데서 나타나고 있었다. 이른바 카오스의 재현, 바로 그것이었다. 아니, 내 관점에서 아직 일본은 본태적 카오스를 벗어나지 못한 공간이었다.

 

사실상 어릴 적부터 신도에 충실한 인간상으로 길러지는 것이 일본인들이었다. 아이들은 수시로 큰 신사에서 복전을 내고 줄을 흔들어 방울소리를 내며 복을 기원하는 부모를 보았을 것이고, 성장한 뒤 그들도 그런 부모가 되었을 것이다. 그 뿐이랴. 어려서부터 집 앞에 설치한 신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열심히 기원하는 할머니나 어머니의 모습은 일상의 큰 부분으로 마음속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장성한 뒤 짝을 만나 신사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아베를 비롯한 일본의 정치가들이 신사를 찾아 참배하는 것은 자신들이 살아온 삶의 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다만 한사코 전범들을 모아놓은 야스쿠니에서, 그것도 패전일에 참배함으로써 무언가를 노리는, 그 정치적 야욕이 미울 뿐이다. 자신들의 순수한 종교의식을 지키는 일에만 충실하다면야 누가 딴죽을 걸 수 있겠는가. 피해자들의 속마음을 긁어놓으려는 못된 심보가 고약한 것이다.

 

며칠 전 길 가는 도중, 구부정한 할머니를 보았다. 골목 모서리의 빈틈에 세워진 작고 초라한 신사 앞에 꽃바구니를 든 채, 신이 좌정한 곳을 올려다보며 쉼 없이 중얼거렸다. 말뜻은 모르겠으나,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구하고 있었다. 굽은 허리와 주름 진 얼굴이 많은 사연을 숨기고 있었다. 그 할머니가 기구하는 것은 궂은일의 해결일 수도, ‘좋은 일에 대한 감사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경건한 그 할머니의 모습에서 신도 신앙의 긍정적인 면을 엿볼 수 있었다. 어엿한 종교이든, 개인 차원의 소박한 믿음이든, 순수하기만 하다면야 굳이 탓할 이유가 없다. 그것들이 국가주의와 결합되어 집단적 야욕 충족의 수단으로 이용될 때, 가공할 정도의 부정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저 할머니야 야스쿠니에 합사된 전범들의 존재나 그걸 이용하려는 정치인 아베의 욕망을 어찌 알겠는가. 필시 자신이나 가족의 문제를 신에게 간구한 데 불과했으리라.


 

 


큰 길가 가게집의 신사


 

 


가게집 신사 내부의 모습

 

 

 

 


동네의 신사


 

 


동네집 신사 내부에 모신 신의 모습

 

 

 

 


개인 집 신사

 

 

 


키요미즈 데라 아랫 동네 개인 집의 신사

 

 

 


길가 신사에 꽃을 바치러 와서 기원을 하고 있는 할머니

 

 

 


호텔 옆에 있던 동네의 신사 '주길신사'

 

 

 

 

 

귀신은 일본 도처에 있었다. 야사카 신사에도 본전을 둘러싸고 많은 잡신들이 별도로 모셔져 있었으며, 요시다 신사에도 본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저곳에 작은 신사들이 흩어져 있었다. 아마 개인들의 신사에는 그들의 조상신이 모셔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들에게도 조상신이 전부는 아닌 듯했다. 여러 잡신들이 어우러진 공간이 바로 일본의 신사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의 신사는 로마의 판테온(Pantheon) 같은 곳이 아닌가 싶다. 사실 그들이 모신 존재들이 악한 신령들이 아닌 이상, 그 신들의 이름으로 악한 짓을 저질러선 안 된다. 온갖 귀신들에 사로잡힌 일본이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아집과 편견, 이기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집과 편견, 이기를 보호해주는 것이 귀신들의 임무가 아니라는 점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어릴 적부터 집 앞의 신사, 동네의 신사, 지방과 국가의 신사를 출입하며 꿈을 키웠을 정치인 아베도 이젠 가슴을 열어야 한다. 나 혼자만 사는 게 세상은 아니라는 점, 일본인들을 귀신들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계시민이 되도록 하는 게 미래지향적 정치인의 의무라는 점 등을 빨리 깨달아야 미구에 닥칠 또 하나의 비극을 면하게 될 것이다.

 

***

 

이번의 일본 행차에서 나는 신사가 일본인들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읽을 수 있는 교과서임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8. 21. 22:10

 


교토시립예술대학 일본전통음악연구센터

 

 


교토시립예술대학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Pendulum

 

 


기다유 샤미센

 

 


헤이케 비와

 

 

열강 중인 토키타 선생

 

 

칸사이 공항에 내린 것이 817일 오전 1045, 외국인 입국자들의 장사진에 끼어 입국수속과 짐 찾기를 마친 뒤 로비로 나오자 12시쯤이었다. 공항과 연결되는 JR 열차 매표소도 북적이긴 마찬가지. 간신히 1316분 발 열차로 신오사카 역에 닿으니 145. 다시 JR 선으로 갈아타고 가츠라가와 역에 도착하니 1445분이었다. 역 근처 작은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한 뒤 택시로 에미넌스 호텔(Hotel Kyoto Eminence)에 당도한 시간이 1540. 김포에서 칸사이까지는 1시간 반밖에 안 걸렸으나, 칸사이에서 교토의 호텔까지는 2시간 반이나 걸렸다. 그만큼 일본은 가깝고도 멀었다.

 

나는 진행 중인 연구 테마의 콘텍스트를 찾아 여기로 온 것이다. 우리 음악과 함께 일본음악, 중국음악은 그 핵심이었다. 그간 해오던 공부를 마무리하려니 그런 것들에 대한 무지가 나를 씁쓸하게 했다. 아무리 현란한 분석의 칼날을 들이댄들 콘텍스트를 고려하지 않은 텍스트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대충 덮어 둘까 고민하던 중 국악학회에서 이메일이 날아왔다. 교토시립예술대학 일본전통음악연구센타의 일본음악 집중강좌소식이었다. 매력적인 내용의 강의 소식이 그 연구소의 홈피에 일목요연하게 올라 있었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즉시 신청하고 센터의 디렉터이자 강의자인 앨리슨 토키타(Alison Tokita) 박사와 이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했다.[그는 토키타란 일본인과 결혼하여 토키타란 성을 사용하고 있었다. ‘토키타 센세이혹은 토키타 박사란 명칭으로 불러주길 원했다. 이하 토키타 선생이라 부른다.] 별 반응을 기대하지 않던 한국에서 누군가가 온다 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여러 가지의 내 물음들에서 다소간의 어떤 진지함이 느껴져서 그랬을까. 득달같은 답신 메일들로부터 갈수록 끈끈한 정이 묻어나왔다. 귀찮은 숙소 문제까지 슬쩍 떠넘기자, 학교 가까운 곳의 호텔을 찾아 예약과 확인까지 해주는 게 아닌가. ‘동양인으로 바뀐 서양인이다!’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만나보니 예상대로, 인자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여장부였다. 시종일관 변함없이 조용한 음조로 강의를 이어갔다. 까딱 졸음에 넘어갈 뻔도 했으나, 그럴 때마다 용케도 나를 불러 조 센세이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강의의 표제어를 펜듈럼(Pendulum)’으로 달고 있는 점이었다. 펜듈럼이란 좌우로 흔들거리는 진자(振子)’를 뜻하는데, 그렇게 명명한 이유를 묻자, 그는 특허 신청이라도 하려는 듯 그 말을 고안한 점에 대하여 강한 자부심을 보였다. 들어보니 그것은 바로 강의의 요지를 함축한 말이었다.

원래 진자란 하나의 기둥과 또 하나의 기둥 사이를 오가는 물건인데, ‘일본의 전통음악과 서양음악’, ‘중국음악과 일본의 토착음악’, ‘일본의 토착종교인 신도(神道)와 불교등이 그러하고, 서양음악이 우월한 현대 일본에서 학교의 음악교육이 전통음악으로 회귀하거나 서양음악과 일본음악을 결합하려는 젊은 예술가들의 실험을 확인할 수 있는 점도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토키타 선생이 외국출생이긴 하지만 엄연한 일본인인 이상, 그들 음악의 뿌리나 영향의 근원을 우리에게 두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펜듈럼의 설명을 듣는 순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 우리 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 사실도 토키타 선생은 시종일관 중국에서 근원을 찾아 대곤 했다.[마지막 날 이자카야(居酒屋)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앞에 자리 한 토키타 선생에게 그 점을 물었다. “‘중국한국일본으로 문화나 예술의 전달과정을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시종일관 중국일본으로 직행했다고 한다면, 너무 불합리하지 않은가요? 한국에 증거들이 꽤 많이 남아있는데요?” 하고 묻자, “일본에서는 그 점에 관하여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지요. 앞으로 언젠가는 자유로이 말할 수 있겠지요.”라고 매우 간단하면서도 함축적인 답변으로 빠져 나갔다. 시끄러운 이자카야의 분위기에서 주변의 누구도 그 말들을 듣지는 못했다. 나는 그 말을 통해 강의 내내 서양의 지식인답지 않았던 그의 진심을 알고 얼마간 안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의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일본인들과, 일본에서 일생을 보내며 일본식 사고로 학문을 해온 그의 생각을 단번에 바꿀 수는 없는 일. 가끔 한국에도 유사한 성향이 있음을 지적해두는 정도로 그치면서 경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래와 같이 강의는 강행군이었다. 하기야 몇 천 년의 일본음악사를 단 3일에 해치우는 것처럼 무모한 일도 없을 것이다.

 

화요일(8/18)

10:00~11:30 일본음악 개관/가가쿠(雅樂)

11:30~13:00 가가쿠와 쇼묘(聲明)

13:00~14:00 점심

14:00~15:30 지우타(地歌), 고토(), 샤쿠하치(尺八)

15:30~17:00 악기 연주 실습(고토 혹은 샤쿠하치)

 

수요일(8/19)

10:00~11:30 비파에 맞추어 노래하는 이야기: 헤이케(平家), 사츠마(薩摩)와 치쿠젠비와(筑前琵琶)

11:30~13:00 노우()

13:30~14:00 점심

14:00~15:30 어릿광대 극장에서의 죠우루리(淨瑠璃): 기다유부시(義太夫節)

15:30~17:00 악기 연주 실습

 

목요일(8/20)

10:00~11:30 가부키(歌舞伎) 극장에서의 죠우루리: 토키와즈부시(常磐津夫節)

11:30~13:00 악기 연주 실습

13:00~14:00 점심

14:00~15:30 나가우타(長歌/長唄<江戶長唄>)

15:30~17:00 나니와부시(浪花節)

18:00 연주회

 

샤미센(三味線)이 주 전공인 토키타 선생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설명 위주의 음악사보다 실연(實演)을 바탕으로 전승되는 음악정신이나 기교를 보여주려 한 듯하다. 주로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가무악(歌舞樂)의 실현태를 중심으로 일본음악의 바탕이나 줄기를 설명해 나간 것으로도 그런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강생 중 노우와 가부키의 전문 배우를 직접 나오게 하여 연기를 보여주며 기교나 의미를 설명하게 하는 등 전통 음악이 현대로 이어지는 지속의 측면을 실감나게 보여주기도 했다.

마지막 날의 연주회는 강의를 종합하는 자리이자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전통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색다른 경험의 현장이었다. 각 분야의 전문배우들이 등장하여 2시간 30분 동안 이어나간 무대는 일본 음악의 힘과 음악사적 추동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몇 명만 빼곤 모두 젊은 연주자들이나 배우들이었다는 점은 일본에서 전통음악이 아직도 힘을 바탕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들이 서양음악에 젖어 전통음악을 잃어버리는 젊은이들의 짧은 생각을 개탄하고 있었지만, 그나마 우리보다 훨씬 잘 보존지속되고 있음은 분명했다. 샤미센을 연주하면서 괴성을 지르거나 도구를 집어던지는 등 관객들의 웃음과 호응을 유발하는 연주자가 있었다. 뒤풀이 자리에서 그 퍼포먼스가 당신의 즉흥적 창안이냐?’고 물으니, ‘언젠가부터 물려오는 대본에 적힌 대로 하는 것이란 대답이 나왔다. 짐작컨대, 문서화 된 대본들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터인데, 그렇다면 구전심수(口傳心授)되던 연기나 대사 혹은 노랫말들이 글자로 기록되면서 크게 정비되었을 것이고, 시대를 내려오면서 조금씩 달라졌을 것인데, 분명 그가 내지르던 괴성이나 함부로 지어낸 듯한 몸짓 또한 요즘의 성향에 맞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여 시대에 맞추어 변이시켜 오고 있는 일본예술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그간 지속해온 연구를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콘텍스트의 확충이 필요했고, 그 목적으로 낯선 이곳까지 찾아왔지만, 몇 천 년의 음악사를 뭉뚱그려 3일 만에 주파하고 나니 타임머신을 타고 먼 길을 달려 온 듯 멀미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 음악제도의 면에서 일본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다른 면이 많았다. 그러나 노래나 춤을 보면서 또 사이사이의 재담들을 듣고 표정이나 몸짓을 보면서 많이 유사하다는 사실을 분명 깨닫게 되었다. 중국과 한국에 비해 아악은 크게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며, 쇼묘(聲明) 같은 불교음악은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한 범패(梵唄)의 일종인데, 자신들의 민속음악으로 분류해 넣고 있었다.

이어받은 것과 그것을 바탕으로 바꾸어 나온 것, 달리 말하면 지속과 변이의 원리는 다른 모든 지역들과 같은 양상을 보였겠지만, 그 중 어떤 것들을 자신들의 역사적문화적예술적 소산으로 내세우느냐는 연구자들의 엄정한 분석과 고찰에 달린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자신들만의 예술이라 주장해도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납득할 수 없다면, 그런 주장의 의미는 없어진다. 역사를 날조하거나 공작(工作) 차원으로 분석해명하려는 시도가 언젠가는 바로잡힐 수밖에 없는 것도 역사정신은 인간의 얄팍한 지식으로 훼손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삼국 간 비교 연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아시아 3국이 교차로 이런 강의를 마련하고 상대국 학자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조만간 역사의 왜곡문제는 자연스레 정리되어 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도 큰 수확 아닌가.

 

 

 
                                         샤쿠하치

 



                                   일본전통음악연구센터에서 토키타 소장과 함께

 

 



                           일본전통음악연구센터에서 다케노우치 교수와 함께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