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1. 8. 16:33

우리 시대 교수들의 자화상

 

 

 

#아침에 조교로부터 전화가 왔다. 몇 년 전 교수들에게 지급한 노트북 컴퓨터의 사진을 찍어내라는 학교 본부의 공문이 내려왔단다. 학교에서 컴퓨터를 지급받아 써온 세월이 오래지만, 사용하는 도중에 사진을 찍어 보내라는 건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 어쩌면 학교에서 지급받은 컴퓨터마저 사적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교수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난 해 모처럼 국가기관으로부터 연구비를 받게 되었다. 그 사이에 바뀐 규정들 때문일까. 연구비를 집행하기가 아주 까다로워졌고, 그에 따라 기분 또한 묘해졌다. 예컨대, 연구과제 관련 도서를 구입하려면 연구비 카드로 결제해야 하고, 영수증과 거래 명세서는 물론 책의 표지까지 일일이 복사하여 제출해야 한다. 사지 않았으면서도 샀다고 돈을 요구하는 교수들이 있는 걸까. 영수증만으로는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뜻이리라.

 

#병아리 교수 시절. 갓 부임했을 때 인상 좋게 나를 환대해주던 이공계의 호남형 시니어 교수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의 연구비를 수주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난 1년 뒤 검찰에 불려 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수군대는 연구비 횡령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당시 병아리 인문학 교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로부터 1년쯤 뒤 형사처벌과 교수직 파면의 소식이 들려왔고, 또 그로부터 얼마쯤 뒤 작고 소식이 들려왔다. 교수들이 구름 위의 존재들이 아님을 처음으로 깨달았고, 선배 교수들에게서 비로소 갖가지 사람냄새들을 맡기 시작했다.

 

#몇 년 전부터 연구비에 관련된 교수들의 추문이 매스컴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시작했다. 군 복무 중인 아들을 연구원으로 허위 등록하고 수천만 원을 용돈으로 지급한 일, 연구원의 인건비를 빼돌려 수억 원을 동생의 통장으로 입금해 편취한 일, 학생 십여 명을 허위 연구원으로 등록하고 수억 원을 빼돌린 일, 연구원들에게 입금되는 수당 중 상당액을 자신의 통장으로 돌려받아 생활비로 쓰다가 들통 난 일, 빼돌린 수억 원의 연구비로 주식 투자를 하다가 발각된 일, 연구비로 집에서 피자를 시켜 먹거나 해외에서 아이들 장난감을 샀다가 들통 난 일 ...그 수법과 사례가 부지기수였다.

 

#남의 논저를 표절하거나 부정하게 중복 게재하여 연구윤리를 위반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인데, 이들 중 상당수가 장관이나 국회의원으로 진출하려다가 청문회의 그물망에 걸려들기도 했다. 매스컴의 매서운 추적을 따돌리지 못하고 그런 비리가 발각되는 경우도 하나 둘이 아니었다. 그 뿐 아니라, 남의 책에 이름만 바꾸어 다시 출판하는 이른바 표지갈이에 참여한 파렴치 교수들 수백 명이 최근 법망에 걸려들기도 했다.

 

#“2015년 굵직한 현안마다 교수들이 안 보였다/부정·비리·불공정평가에도 침묵이대론 안 된다.()내년에도 올해처럼 교수들이 무기력에 빠져 월급봉투만 들여다보고 있다가는 더 큰 희생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교수신문>(20151228)의 아픈 지적이다. 교수 집단의 나태와 패배의식을 이처럼 매섭게 꼬집은 글을 근래 목격한 적이 없다. 그나마 교수들에 대한 애정이 눈꼽만큼이라도 남아 있기에 <교수신문>은 이런 고언을 실었을 것이다 

 

***

 

사실, 검찰에 소환되거나 매스컴의 추궁에 답해야 하는 교수들 모두 관행을 방패막이로 들고 나선다.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반성과 회개만으로도 벅찰 텐데, 이른바 물귀신 작전으로 남까지 옭아매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물 타기 해보려는 것일까.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선후배, 동료들을 모두 공범으로 모는, 또 한 번의 파렴치를 자행하는 뻔뻔함을 보라. 물론 교수도 인간, 무엇보다 생활인이다. 교수라는 직업을 통해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고 자식들을 가르쳐야 하는 속계(俗界)의 범부(凡夫)들임에 틀림없다. 이들을 데려다가 장관이나 국회의원으로 쓰고자 한 꺼풀 벗겨보곤 진동하는 구린내에 경악을 금치 못하는 세상 사람들의 무지와 편견을 접하면서, ‘내가 참 그동안 좋은 시절을 보냈구나!’라는 깨달음을 비로소 갖게 된다.

 

대학이 망해가고 있다. 대학을 졸업해도 밥벌이를 못하는 젊은이들이 그득그득 쌓이면서 국민들이 대학을 불신하게 되었고, 밥벌이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학문이나 교수들을 불신하게 되었다. 밥벌이도 못하는 대학이나 학문, 그리고 교수가 과연 필요한가. 대학을 졸업하는 젊은이들이 제 앞가림이라도 하게 만들려면 대학은 과연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 대학을 둘러싼 세상 사람들의 의심과 질타가 이제 정점에 이른 듯하다.

 

그 불신의 핵심적 대상이 인문학인데, 그러나 인문학만 도려낸다고 대학이 제 구실을 할 수 있을까. 이공학이나 경영학이 도려낸 인문학의 빈 자리까지 차지한다고 옛 대학의 영화가 회복될까. 사실 국민들이 대학 무용론을 깨달아가면서 등록금의 액수에 대한 저항이 높아져왔고, 설사 등록금이 더 낮아진다 해도 앞으로 대학은 텅텅 비어버릴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해당 학문 분야의 교수들은 스스로 변하기보다 혹시 지금까지 지탱해 온 밥그릇이 날아갈까 봐 전전긍긍한다고 정부의 교육당국자나 대학 본부는 이들에게 눈총을 쏘아댄다. 사정이 나은 분야의 교수들은 궁한 분야의 교수들을 우습게 여기고, 코너에 몰린 교수들은 잘 나가는 분야의 교수들을 경계한다. 그래서 지금 대학은 불신과 반목이 만연한 연옥이고, ‘큰 학자 하나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소시민이나 양산하는 공작소일 뿐이라고 누군가는 질타하는 것이리라. 제대로 된 학문적 업적을 이룰 수 없도록 세팅된 지금 대학의 시스템과 의식 아래 큰 학자가 출현하기를 기대하는 건 연목구어(緣木求魚)’의 어리석음일 것이다.

 

생활인 혹은 소시민! 참 좋은 말이다. 하루하루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착하게 살아가는 장삼이사들이 바로 생활인 아닌가. 공적인 돈을 주머니의 용돈처럼 꺼내 쓰려는 교수들, <교수신문>의 질타처럼 할말을 하지 못하고 월급봉투만 바라보는 요즘의 교수들이 존재하는 한, 21세기 한국의 대학교수들은 대부분의 착한 생활인들보다 몇 단계 아래쪽에 위치한 못난이들임을 결코 부정할 수 없으리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1. 3. 07:45

악마들과의 동거

 

 

어린이집 아가 폭행사건을 보며 악마의 이미지를 떠올린 것이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작은 천사들이 모여 꼬물대는 어린이집은 대한민국의 축소판이었다. 악마의 손에 나가떨어지는 아가를 보며, 지옥의 악마 하나가 운 좋게 사다리를 타고 천국에 올라가 악마 본연의 모습을 과시하는 광경을 상상했다.

 

얼마 전에 만난 ‘11세 소녀 감금학대 사건은 새삼 우리의 눈을 의심케 했다. 아버지가 방어능력 없는 어린 딸에게 가했다는 폭행과 학대는 엽기적이었다.

 

노인 학대와 살해의 주범은 자식들, 그것도 재산을 받을 만큼 받은 자식들이라는 것은 이미 천하공지의 사실이다. 죽인 애인의 시신을 토막 내어 호수에 버린 악마도, 남편을 플라스틱 통에 집어넣어 집안에 처박아 둔 악마도, 학생의 탈을 쓰고 떼로 몰려나가 교탁의 선생을 폭행하는 악마들도 보게 되었다.

언론의 눈에 잡힌 몇몇 사건들이 세상을 흔들어놓고 있던 와중에도 폭행과 살인을 일삼는 악마들은 곳곳에 넘쳐나고 있었다.

 

악마 바이러스는 이미 세상에 퍼져 쉼 없이 자기 복제를 반복하고 있다. 갈수록 수법과 결과가 참혹하고 참담하다. 악마 바이러스들 가운데 돌연변이의 사이클로 들어가 변종 악마들로 재생되는 비중이 상당하다. 준동하는 악마들의 행태들. 그 모습들을 그려내기에 우리는 상상력의 빈곤을 절감한다.

 

세상 법의 한계 때문일까. 아니면 법을 집행한다는 사람들의 자질 부족 때문일까. 사람을 죽이고도 3~5년 징역형을 받았는데, 언론에선 중형이라 떠든다. ‘5년 동안 공짜로 주는 밥 얻어먹어가며 조용히 살다 나오는 것살인의 죗값으로 충분하다는 걸까. 같은 시공간에 살면서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나 법조인들의 저울추와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의 상식이 그토록 다를 수 있을까. 사람의 목숨 값을 이토록 헐하게 만든 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

 

기원전 4~3세기에 측은지심(惻隱之心)과 불인지심(不仁之心)을 말한 맹자(孟子)가 오히려 측은하게 생각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어짊의 극치라 했고, ‘차마 끔찍하게 할 수 없는마음 때문에 인간은 본질적으로 착한 존재라 했다. 그가 살던 시절에도 악마가 들끓었음은 그의 말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어찌 그 때라고 지금과 달랐으랴. ‘차마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인간들도 넘쳐 났으리라. 공자와 맹자가 인류의 도덕선생으로 좌정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 이미 악마들이 준동하고 있었음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일이다.

 

과연 맹자는 인간에 대하여 푸진 꿈을 갖고 있던이상주의자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 그 시절 그나마 그런 희망이라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악마들과 함께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못 견뎌 했을 현실주의자였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본래 착한 존재임을 강조하여 천하가 예()로 돌아가기를 염원한 일이야말로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었다고 생각하는 나야말로 극도의 비관주의자, 혹은 염세주의자인가.

너도 나도 어느 순간 악마로 돌변할 수 있는 인자(因子)들을 본성으로 지니고 있는, ‘잠재적 악마가 바로 인간임을 인정하고 스스로 경계하도록 하는 게 차라리 현명한 방도가 아니겠는가.

 

 

 

 


<<맹자>>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1. 1. 00:39

 

 

 

새해인사

-우리 모두 신선에 도전합시다!-

 

 

유쾌하고 슬기로운 원숭이를 떠올리며 병신년 새해 아침을 맞았습니다.

백규서옥을 찾아주시는 여러분 댁내 두루 무고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지난해는 저 자신에게도, 나라에도, 제가 속해있는 공동체(가정학교)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저처럼 많은 일들을 겪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나이 또래에게는 즐거운 일과 궂은 일이 반반, 아니 궂은 일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자녀들이 좋은 직장을 잡거나 좋은 배필을 만나 행복한 출발을 하는 일도 있겠습니다만, 연로하신 부모 세대의 잦은 병고(病苦)와 하세(下世) 등 슬픈 일들이 훨씬 더 자주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슬픈 일들은 이제 우리 역시 그로부터 멀지 않은 지점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이정표이기도 하고, 우리로 하여금 지나온 길과 걸어갈 길을 되짚어보게 하는 반성과 통찰의 자료이기도 하지요.

 

옛날의 현자들이 익혔다는 신선술(神仙術)’이나 우화등선(羽化登仙)’이란 말들을 아시지요? 중국 진나라 갈홍(葛洪)이란 사람의 <<포박자(抱朴子)>>란 책에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만. 저는 왜 옛날의 현자들이 신선이 되고 싶어 했을까?/날개 돋친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르고 싶어 했을까?’ 등에 대하여 요즘 들어 가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처럼 옛날에도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늙고 아프기 마련이었겠지요. 변변한 약도 없던 시절, 자리보전하고 누워버리면 누가 돌봐줄 수 있었을까요? 그러니 그저 몸져누운 후를 대비하는 일이야말로 몸져눕기 전에 해야 할 일의 모두가 아니었을까요? 신선이 되는 일이야말로 최선의 길이었겠지요? 신선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렇게 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우선 먹는 것을 절제하고 종국에는 곡기(穀氣)를 끊어 마냥 가벼워진 육신을 공기 속에 흩어버림으로써 존엄하게 일생을 마치는 최고의 소망이 아니었을까요?

 

그래서 저는 새해에 욕심을 줄여 몸무게를 가벼이 하는 일의 실습을 해보려 합니다. 물질적 욕망, 세상 권세욕 등을 버리면 몸무게를 줄일 수 있겠지요. 그건 세상사에 미련을 버리는 일이고 세상사에 미련을 버리면 좀 더 신선의 경지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겠지요? 교회에서 운영하는 단식원에 가든, 절에 마련된 선방에 가든 먹는 것에서 해방되는 방법을 체험적으로 터득해보려는 것이지요. 그런 일을 자꾸 반복하다보면 종국엔 신선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지 않겠는지요?

 

, 할 일 없으니 별 궁리를 다 하는구나!’라고 혀들을 차시겠지만, 온몸에 주렁주렁 주사바늘을 꽂은 채 눈만 멀뚱멀뚱 뜨고 계시는 주변의 어른들을 한 번 보시면, 생각이 달라지실 겁니다.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는 것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길인지 적절한 해답을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문제를 화두(話頭)로 삼아 한 해를 보내볼까 합니다. 어쩜 올해 연말쯤엔 그 해답의 윤곽 정도는 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보기로 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병신년을 욕심을 버리는원년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함께 노력해보지 않으시려는지요?

 

제 생각에 동의하셔도 좋고 동의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만, 건강관리에 최선은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조물주의 허락 하에 부모님이 주신 육신과 정신을, 살아있는 한 잘 관리해야 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책임이라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올 한 해, 행복하게들 지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병신년 첫날 아침

 

백규 절하고 아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11. 16. 22:09

불효자 방지법으로 효도 많이 하겠습니다!

 

 

길을 건너려고 횡단보도 끝에 서 있는데, 건너편을 보니 기상천외한 현수막이 걸려 있는게 아닌가.

 

 

 

 

불효자 방지법으로 효도 많이 하겠습니다!

 

                                ○○○○○

 

 

갑자기 픽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떤 야당에서 내건 모양인데, 기가 막히는 현수막이었다.

패륜자식들의 소식이 하루가 멀다 않고 터져 나오는 요즈음. 얼마 전엔 참다못한 아버지가 40대 아들에게 양육비와 교육비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일도 있었다. 이런 저런 일들이 터져 나오니, 표가 급한 그 당에서는 그런 패륜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기상천외한 불효자 방지법을 내 걸었을 것이다.

 

대체 효도란 무엇일까. 법이 무서워서 하는 효도를 효도라 할 수 있을까. 내가 하는 효도가 남에게도 효도일 것이며, 내 부모가 생각하는 효도를 남의 부모도 효도로 생각할까. 법조문을 만들려면 효도의 개념이나 실행내용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할 터인데, 그걸 대체 무슨 수로 규정한단 말인가.

 

노부모 학대의 주범이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 세상이다. 학대를 받으면서도 자식에게 혹시 해가 갈까봐 다른 사람들에게는 쉬쉬하는 게 우리네 부모들의 마음이다. 아무리 엄한 법을 만들어 놓으면 뭣하랴. 우리나라에서 불효자식을 사법기관에 고소할 부모의 비율이 몇 %나 될 것이며, 불효를 저질러 고소될 정도의 인간으로 법조문 앞에 무릎 꿇을 자식 놈들은 또 몇 %나 되겠는가. 그러니 일 꺼리 모자라는 변호사들만 가뭄에 단비 만난 듯 부모-자식 송사를 찾거나 부추기며 돌아다닐 것 아닌가. 부모로부터 수임 받은 변호사가 다른 곳에선 불효자로부터 수임 받는 유능한 변호사도 나올 것 아닌가. 오전의 어떤 법정에서는 피해 입은 부모를 위해 변론하다가 오후의 다른 법정에서는 불효자를 위해 변론하는 일도 비일비재할 것 아닌가. 부모와 불효자의 싸움판에서 오락가락하며 변론을 벌이다 보면 불효문제에 관한 창과 방패가 변호사의 손에서 마련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부모와 자식은 단순히 사회적 계약 관계 혹은 그 이하의 우스운 관계로 전락될 것 아닌가.

 

, 할 일 없으면 모자라는 잠이나 잘 것이지. 세비만 받고 놀기가 계면쩍어서들 그러는 것일까. 아니면 변호사들로부터 로비라도 받은 것인가. 납득이 안 되는 법을 만들겠다고 대형 현수막까지 내건 그 당의 의도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표를 얻을 목적으로 내건 것이면, 지금 당장 내리는 것이 좋다고 본다. 표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자꾸만 그런 일을 벌이는 그들의 생각을 알 수가 없다. 이 법이 제정된다 해도 통과되기 쉽진 않겠지만, 통과된다면 그 순간부터 그나마 남아있던 우리의 미풍양속은 사그리 없어질 터. 불효자 방지법 제정이 불가능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첫째, 효도가 무엇인지 법리적으로 설명할 도리가 없다.

둘째, 부모가 자식을 양육하기 위해 들어간 돈과 정성을 산정할 방도가 없다.

셋째, 만일의 사태를 생각하여 애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치부책을 써야 할 텐데, 그 스트레스를 생각해 보았는가. 그리 하여 아이 낳지 않으려는 남녀가 양산될 것이니, 민족과 국가의 생명은 서서히 끊어져 갈 것이다.

 

, 살다 살다 별 해괴한 일을 다 보게 된다. 그래서 지금이 말세인 것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