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5. 10. 8. 22:21

화내는 사람들은 불쌍하다

 

 

젊은 시절엔 자주 화를 냈다.

늘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곤 했다.

헛발질을 해대는 국가는 국가대로, 무질서한 사회는 사회대로, 탐욕스런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화를 돋우는 존재들이었다.

운전대를 잡으면 다른 운전자들 대부분이 불만의 대상이었다.

술에 취한 듯 교통신호를 위반하는 차도, 잽싸게 추월하는 차도, 속 터지게 느린 차도 모두 화를 돋우는 경우들이었다. 어쩔 수 없는 주변상황 때문에 교통신호를 위반하게 되는 경우도, 약속시간이 지났거나 용변이 급하여 추월해 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초보운전이라 달달 떨면서 운전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었을 것임을, 그 시절엔 몰랐거나 알려고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대개 '자기 자신만이 우월하고 남들은 열등하다'는 '굴원(屈原)식 아집과 착각'*에 빠져 지내는 게 화 잘 내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임을, 그리고 화내는 것만큼 인생을 망치는 일도 없음을 나이 들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어떤 친구의 개탄처럼, 작게는 늘 적의를 갖고 대하는 직장의 철딱서니 주니어들이나, 묘한 열패감(劣敗感)에 일생 동안 각을 세우고 대들기만 하는 집안의 손아래 등 주변 인물들이 내뿜는 화의 사기(邪氣)도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화를 내는 일은 심장과 대뇌 속에 수백만 마리의 기생충을 기르는 일과 같음을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다. 나이가 준 선물일 것이다. 

 

오늘 인터넷 신문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건보도를 읽었다. 도로 위에서 두 차량 운전자가 다투게 되었단다. 경험으로 추정컨대, 발단은 별일 아니었을 것이다. 자기위주의 협량(狹量)이나 착각 혹은 오해로부터 비롯된 일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화가 치민 운전자가 상대 차를 가로 막고 차에서 내려 위협적인 자세로 걸어오자, 상대 운전자가 그를 자신의 차로 치어 중상을 입혔다는 것이 사건의 내용이었다. 그 기사를 읽은 네티즌의 댓글 중 두 개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1 가장 중요한 것은 운전 중 상대 운전자의 화를 돋우지 말아야한다. 이 사건의 피해자가 조금의 말조심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확대되지 않았을 것이다. 가해자가 살인죄로 교도소에 가서 몇 년을 산다 해도, 그것이 피해자에게 도움 되는 일은 아니다. 피해자는 이 사고로 큰 고통을 받았고, 앞으로도 그 고통은 계속될 것이다. 상대방을 화나게 하지 말고 화난 사람 근처에 얼씬거릴 필요도 없다. 잘못하면 그로부터 유탄을 맞을 수 있다.

 

#2 세상 무서운 줄 알고 겸허하게 지금 이나마도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화를 조금이나마 피하는 현명한 처세다. 괜히 일본 사람들이 무조건 친절하고 남 피해 안 주고, 서양 사람들이 처음 보는 상대에게 먼저 인사하고 그러한 문화가 왜 생겼는지 아는가. 험한 세상을 겪어본 데서 나온 자기방어의 처세술이다. 우리는 X도 믿을 게 없는 군상들이 집에서 처자한테처럼 허세가 통하는 줄 알고 세상에 나와서도 그런 식으로 어리석게 군다.

 

참, 현자들의 말이다. 그렇다. 남의 화를 돋울 필요 없다. 그 화가 어디로 가겠는가. 남의 화를 돋우어 싸움이 붙었고, 불같은 화를 참지 못해 달려들다가 상대방의 차에 치여 결국은 하반신이 부러지는 중상을 당한 것 아닌가. 검찰이 판단했다는 대로 가해자가 살인미수죄로 감옥에 갇힌다 해도, 요즘 우리나라 판사들의 정신으론 불과 몇 년의 선고에 그칠 터. 가해자가 감옥에 잡혀 들어갔다고 고소해 할 일인가. 심한 중상으로부터 회복되었다 해도, 후유증에 시달리며 ‘100세 장수시대’에 일평생 불편하게 살아갈 일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손해인가. 한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일생을 그르친 것 아닌가. 그래서 스스로 화를 참는 것이 궁극적으로 자기를 보호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몇 년 전에 읽은 틱낫한 스님의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화는 평상시 우리 마음속에 숨겨져 있다.

그러다가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으면 갑작스레 마음 한가득 퍼진다.

잔뜩 화가 나 있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의 말은 아주 신랄하며 상대방을 공격하는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가 쏟아내는 악담은 듣는 이를 거북하게 만든다.

그와 같은 행동은 그가 매우 고통 받고 있다는 증거다.

마음 한가득 독이 퍼져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이해하면 그에 대한 연민이 생기고, 그의 공격적인 말에 동요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화란 우리 마음속의 일이므로 그것을 다스리는 것도 우리 마음속의 일이다.”

 

참 대단하지 않은가. 화내는 상대에게 ‘맞 화’를 내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이토록 명확하게 제시한 말이나 글을 틱낫한 스님 이전에 접한 적이 없다. 그래서 그 분이 부럽고 무섭기도 하다. 백 살을 먹은들 화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하철에서 좀 젊어 보이는 사람이 경로석에 앉아 있다고 욕설을 해대는 노인을 본 적이 있다. 삭정이 같은 몸에 활활 타오르는 화만 남은 듯했다. 불현듯 그 노인이 불쌍했다. 오죽하면 그 나이에 화를 다 낸단 말인가.

 

어쨌든 스스로 화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이가 준 축복이다. 그래서 스스로 화를 제어할 수 있는 노인들은 ‘현자’로 불려도 가하다. 물론 이 말에는 그렇지 못한 노인들이 많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으리라. 이제라도 화내는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길 일이다.

 

*초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의 한 구절 "擧世皆濁我獨淸(거세개탁아독청/온세상이 모두 흐려 있는데 나 홀로 맑고) 衆人皆醉我獨醒(중인개취아독성/뭇 사람들 모두 취해 있는데 나 홀로 깨어 있네)  是以見放(시이견방/이로써 추방을 당했노라)" 참조.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9. 28. 03:29

일본의 질서, 우리의 질서

 

 

 

지난여름

며칠 간 교토에 머물 기회가 있었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도처에 널린 유물과 유적이 아니었다.

크든 작든 도로에서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

대로에서든 후미진 골목에서든 사람들이 교통법규를 엄수한다는 사실,

길바닥에 꽁초 하나, 휴지조각 하나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수한 자전거들.

자전거를 통해 익히는 질서의식이 놀라웠다.

 

어둘 녘이면 주택가를 걸으며

고즈넉하다 못해 괴기스럽기까지 한 분위기를 맛보는 게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오후 6시쯤 되었을까.

길을 걷다가 주택가에서 대로로 나오는 3~4m 폭의 자동차 통로를 만났고,

그곳에도 어김없이 건널목 표시와 신호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오가는 자동차는 없었고, 마침 중학생 정도의 남자 아이 하나가 걸어가고 있었다.

빨간 불이 들어오자 그는 망설임 없이 서는 것이었다.

한참동안 관찰해보니

회사원으로 보이는 중년 신사도, 할아버지도, 아주머니도

모두 신호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까짓것 두어 걸음이면 뛰어 건널만한 넓이에, 오가는 차도 없는데

그러나 그들은 그 신호를 철저히 따르고 있었다!

 

교토에 머무는 동안

이동 수단은 주로 택시였다.

모든 운전기사들은 제복을 입고 있었고,

정확한 매뉴얼대로 승객 응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택시 안은 철퍼덕 앉기가 미안할 정도로 청결했고,

신호나 법규를 위반하는 택시기사를 본 적이 없다.

기사는 뒷좌석을 권했지만, 나는 주로 앞자리에 앉아 도로 위의 차들을 살폈다.

슬쩍 유리를 내리고 담배꽁초를 길거리에 버리는 운전자를,

아무데서나 경적을 울려대는 운전자를,

툭하면 욕설을 퍼붓는 운전자를,

잽싸게 앞차를 추월하는 운전자를,

횡단보도에서 슬금슬금 앞으로 나아가는 운전자를,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튀어나가는 운전자를,

속도위반하는 운전자를,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다.

 

어느 날 오후

젊은 엄마가 아이 둘을 데리고 마트에서 나왔다.

마트 밖에는 자전거 주차장이 참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큰 아이는 다섯 살 정도, 작은 아이는 세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주차장으로 나온 세 사람 모두 노란색 헬멧을 쓰고 있었다.

엄마의 자전거 앞 바구니엔 세 살짜리 아이가 담기고,

작은 자전거를 탄 큰 아이는 엄마 자전거를 뒤따라

건널목을 건너는 것이었다.

신호 시간이 충분하기도 했지만,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 내빼는 자동차들은 아예 없었다.

모두들 다섯 살 어린애가 굴리는 페달을 대견스레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참여한 어린이 교육의 현장이었다.

 

얼마 전 어느 날 어스름 녘

차를 몰고 경주에 들어섰다.

어쩌면 교토와 분위기가 비슷해서 놀라웠다.

보문단지로 가는 길엔 차도 많지 않았다.

여름철 막바지의 석양이 비낀 고도(古都)가 아름다웠다.

, 우리도 이제 선진국으로 들어선 것일까?

그러나 착각도 잠시.

갑자기 고급 승용차 한 대가 !’하며 중앙선을 넘으며

내 차를 추월했다.

차도 없는데, 고지식하게 제한속력을 지키는 내 차가 너무 답답했으리라.

교차하는 차들이 없는 신호등 앞에서

불이 바뀌기만 기다리다가 깜빡 1~2초 출발이 늦었는데,

택시인지 자가용인지 !’하고 어김없이 경적을 울렸다.

도로에는 여기저기 꽁초와 휴지들도 굴렀다.

운전자들이 유리를 내리고 버린 것들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앞쪽 차량의 문이 열리더니

담배를 꼬나 문 손이 나오고, 꽁초와 담뱃재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혹시나역시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적지 않은 교육과 세뇌를 받았을

경주가 그럴진대,

나머지 지역들이야 불문가지 아닌가.

 

왠지 맘에 들지 않는 나라가 일본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보여주는 선진의 모습이 부럽고,

사실 늘 마음에 걸린다.

우리가 그들을 추월하는 것은

그들의 장점을 모두 배운 다음에야 가능할 것인데,

그렇게 되기까지엔 매우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이 무겁고 슬프다.

 

 


교토 타워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교토 시내의 횡단보도

 

 

 


교토의 주택가 이면도로

 

 

 


교토의 큰 거리

 

 

 


경주 관광안내 지도

 

 

 


경주 신호등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9. 19. 21:09

 


행사가 열린 컨벤션 센터

 

 

 


컨벤션 센터 로비

 

세계 한글작가대회에 다녀와서

 

 

해외 한인문학에 대한 작은 발표를 해달라는 이명재 교수의 부탁을 받고, 첨엔 망설였다. 창작문인들의 모임에 애당초 별 흥미도 없었을 뿐 아니라, 고도(古都)를 제대로 가꾸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던 터라 경주라는 지역도 별로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회식과 환영만찬이 열린 경주화백컨벤션센터. 약간 늦게 도착한 개회식엔 사람들이 그득했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아 둘러보니, 황우여 부총리나 김관용 지사 등 헤드테이블에 자리 한 몇몇 인사들을 빼곤 모두 문인들이어서 낯설었다. 한글 영상[위대한 한글, 위대한 한국문학]이 상영되었고, 쾌팀의 대북 공연 <직지심경의 노래>가 분위기를 돋우었으며, JL싱어즈의 한글날 노래 <내나라 내겨레, 석굴암>이 우렁차게 대회장을 울렸다. 국제 PEN 한국본부 이상문 이사장의 인사, 황우여 부총리김관용 경북 지사최양식 경주 시장의 축사, 김후란 대회 조직위원장의 환영사, 문정희정현종 시인의 시낭송, 한국문화재 공연 팀의 뮤지컬 <용비어천가 하늘이 열리다’>의 공연이 있었고, 환영만찬이 이어졌다.

 

다음 날인 16일부터 17일까지 숨 막히는 강연들과 주제발표들이 이어졌다. 각 발표의 주제와 발표자 및 토론자는 다음과 같다.

 

특별강연: 모국어와 문학, 한글과 문학

발표1: The Sound of Languages/르 클레지오(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2: 모국어와 문학, 한글과 문학/김주연(숙명여대 석좌교수)

발표3: 훈민정음=한글의 탄생과 발전을 언어의 원리론에서 보다/노마 히데키(메이지가쿠인

대학 객원교수)

 

주제발표1: 한글, 한국문학의 세계화

첫째 마당: 세계 속의 한글문단, 한국문학(해외 한글문단의 역사와 현재에 대한 한국문학

전공자와 현지 활동가들의 논의)

 

좌장: 최동호(고려대 명예교수)

발표1: 고려인의 디아스포라 한글문학/장사선(홍익대 명예교수) 발표, 최석 시인 토론

발표2: 이념과 탈이념, 식민과 탈식민의 단절 혹은 지속/조규익(숭실대 교수) 발표,

홍규 시인 토론

발표3: 재미동포문단의 형성과 특징/장영우(동국대 교수) 발표, 명계웅 문학평론가

허대통 시인 토론

발표4: 남미 한글문학의 현황과 전망-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양왕용(부산대

명예교수) 발표, 최태진 작가정재민(한국외대 교수) 토론

발표5: 호주 한인문학의 현황과 전망/윤정헌(경일대 교수) 발표, 이효정 작가 토론

발표6: 유럽지역의 한글문단/이명재(중앙대 명예교수) 발표, 쾨펠 연숙 시인 토론

발표7: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꿈꾸다!/예은목 시인 발표

둘째 마당: 세계화 시대의 글쓰기(이중언어, 소수언어)(소수 언어가 소멸되는 시대에 한글

처럼 비주류 언어의 문학적 쓰임에 대한 현재와 미래를 진단)

 

좌장: 박양근(부경대 교수)

발표1: 재미교포 문학에 나타난 한국문화와 한국어의 정체성/최정자 시인(미동부지역

위원회) 발표, 한글은 나의 버팀목/박은주 작가 발표, 벽을 허무는 0.7% 문학/

타냐고 시인 발표

발표2: 독일에 있어서의 한국문학/서정희 시인 발표

발표3: 러시아 문화권에서의 한국어 글쓰기의 현재와 미래/니나 끄레스뜨(Nina Krest)

시인시극배우피아니스트

발표4: 일본 내의 한글과 한글문학의 현실과 전망/왕수영 시인

발표5: 이민 1세대 동포작가와 2세들의 한국어에 대한 인식/이정순 시인(국제PEN한국

본부 캐나다지역위원회 회장)

 

셋째 마당: 국내외 한국어와 한글교육 현황(한국어 사용실태와 한글교육현황에 대한 국내

외 학자, 현지 전문가들의 논의)

 

좌장: 이영숙(한양대 교수)

발표1: 국외 한국어 사용실태와 한글교육 현황/강현화(연세대 교수)

발표2: 한국어와 한글 교육 현황-아시아와 남미지역을 중심으로/김선정(계명대 교수)

발표3: 유럽과 미국에서의 한국어 교육/김정숙(고려대 교수)

발표4: 재외 한글학교의 한국어와 한글교육/이미혜(이화여대 교수)

발표5: 세종학당재단 사업 소개/이교택(세종학당재단 사무총장)

발표6: 베트남에서의 한국어 교육현황/도프엉투이(하노이국립외국어대학교 한국어한국

문화학과)

발표7: 중국에서의 한국어 교육현황/김성란(중국 중앙민족대학교 외국어대학 한국어학

과 교수)

발표8: Expectation and Challenge on Using Cia Cia Script Adapted From

Hanguel in Cia Cia Laporo Sorawolio Community Baubau City/아비딘(

우바우 지역 교사)

 

 

주제발표2:

1) 세계 속의 한글문단(재외동포 한글문단)

좌장: 박덕규(단국대 교수)

발표1: 해외 한글문단과 한글문학 세계화의 길/김종회(경희대 교수)

발표2: 해외 한글문단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이승하(중앙대 교수)

 

2) 재외동포 한글문단

 

발표1: 러시아의 지역 문단 활동 및 매체/니나 끄레스뜨

발표2: 중국 조선족 문학 현황/우광훈(중국 연변작가협회, 작가)

발표3: 미국 서부지역 동포들의 현지 한글문단에 대한 보고/김영중(국제PEN한국본부

서부지역위원회 회장)

발표4: 미국 동부지역 동포들의 현지 한글문단에 대한 보고/정재옥 작가

발표5: 브라질 한글문단에 대한 보고-브라질 한인 문학의 50년 모습/안경자 작가

 

3) 모국어 문학 활약상

 

좌장: 곽효환(대산문화재단 상무이사)

발표1: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과제/민용태(고려대 명예교수)

발표2: 영어권에서의 한글문학 번역 문제/정정호(중앙대 명예교수)

발표3: (미국서부)이민생활에서의 한글문학/이승희 시인

발표4: 캐나다의 한글문단/이정순 시인(국제PEN한국본부 캐나다 지역위원회 회장)

 

 

문학강연

 

1. The Music of Words/르 클레지오

2. 한글의 모습과 한글소설/윤후명(국민대 문창과 겸임교수)

3. Angst, Weltschmerz & Gemütlichkeit: German Krimii. How a booming genre

mirrors German National Identity-or the Lack of it/레굴라 벤스케

4. My Story: The Story of an Egyptian Woman Write/에크발 바라카(국제PEN여성위

원회회장)

한글문학축제: 편지낭송 및 시낭송(김홍신, 김일연, 김종상, 도종환, 문태준, 유안진, 윤제

, 정호승, 최금녀, 최양식, 허영자

 

국내외의 많은 인사들이 참여한, 참으로 성대한 행사였다. ‘세계 한글작가 대회라는 인상적인 타이틀에 걸맞게 한글문학의 존재와 당위가 찬연하게 진면목을 드러낸 자리였다. 지금까지 해외 한인 1세대는 그럭저럭 한글문학을 영위해 올 수 있었으나, 2세부터는 쉽지 않은 일임을 보여준 자리이기도 했다. 문학창작을 가능케 하는 것은 모어(母語). 아기가 어머니의 젖을 빨 듯 어머니의 입놀림을 보며 배우는 게 모어(mother tongue)라면, 해외 한인 2세 이후 세대에게 한글문학 창작을 기대할 수는 없다. 중국 조선족을 제외하고 발표에 참여한 대부분의 해외 문인들은 1세들이고, 그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한글문학을 창작하고 있었으나, 힘에 부친 모습이 역력했다. 따라서 이번 행사는 한글문학 창작에 대한 욕구와 현실이 극명하게 교차한 내적 갈등의 현장이기도 했다.

 

***

 

이번 행사의 초점은 몇 명의 외국인들이고, 그 가운데 프랑스의 작가 르 클레지오와 일본의 언어학자 노마 히데키 교수는 그 중심이었다. 이미 지난 세기 말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로 선정된 르 클레지오 선생의 감동적인 강연은 발표의 서막을 장식했다. 2008년도 노벨상 수상자인 그가 어떤 연유로 서구 지성들 가운데 드물게도 지한파가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말과 글자, 문화에 대한 애정은 강연 내내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강연은 엄청난 재능과 체험으로 계발된 인간의 영혼을 시현하는 이벤트였다. 강연의 말미에 그는 작가들은 사회학자, 정치학자, 철학자, 경제학자 등을 뛰어넘는 식견을 갖추어야 한다. 공부해야 한다!’는 요지의 일갈을 던졌는데, 멕시코 고대사 분야의 박사로서 지적 탐구여행을 지속하는 자신의 현재 모습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멘트이기도 했다. 값싼 감성에만 기대려는 일부 한국 작가들을 부끄럽게 만든, 선사(禪師)의 할()과 같은 것이었다.

분야는 다르지만, 노마 히데키 교수 또한 우리에게 긴장과 부끄러움을 안겨 준 석학이었다. 일본 최고의 한글 전문가인 그는 시종 여유 있고 담담하게 언어 원리론의 입장에서 한글의 창제와 발전을 설명했다. 우리나라 언어학자나 한글학자들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지금껏 들어온 한글 관련 강의 중 으뜸이라는 것이 좌중의 평가였고, 나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언어학 이론의 탄탄한 바탕, 성실하고 근면한 학구, 뛰어난 상상력의 소산임을 짐작하게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말과 글자에 대한 흥미나 사랑이 밑바탕임을 그의 말에서 느껴 알 수 있었다. ‘한글이란 유라시아 동방의 극점에 나타난 에끄리뛰르의 기적이란 말을 일본인 학자로부터 듣는 기분이 묘했지만, 한편 신나는 일이기도 했다. 학문적 논리에 근거를 둔 점에서 그 타당성을 반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기적 같은한글의 장점을 잘 모르고 살아온 그간의 내 삶에 부끄러움을 느낀 건 당연한 일 아닌가.

 

***

 

이번 행사야말로 앞으로도 쉽게 꾸릴 수 없는 문화적 성사(盛事)이리라. 엄청난 돈과 인력을 들여 외국의 한인들을 불러들이고, 국내의 유관인사들을 모으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일까. 이런 행사의 결실을 광범하게 유포하고 알려야 한다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야 우리나라의 문화인들을 우물 안 개구리신세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개막행사장

 

 

 


축사중인 황우여 부총리

 

 


개막 축하 공연 <용비어천가-하늘이 열리다>

 

 


개막 축하 공연 <용비어천가-하늘이 열리다>

 

 


강연하는 르 클레지오 선생

 

 


강연을 하는 노마 히데키 교수

 

 


주제발표회장에서

 

 

 


토론을 맡은 흑룡강성 TV 방송국 부국장 리홍규 시인

 

 

 


토론을 하는 알마티의 최석 시인

 

 


대회장 인근의 풍경

 

 

 


포근함을 안겨주는 경주의 대능원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9. 12. 11:42

 


호산방의 박대헌 사장

 

 

 

고서점 호산방(壺山房).

그 호산방이 문 닫았다는 소식을

어제 날짜 신문에서 접했습니다.

바닷물에 모래성 무너지듯

수많은 점포들이 어제도 오늘도 사라지는 세상.

서점이 어디 일반 가게와 같은가?’라는

제 믿음도 이제 접을 때가 된 것일까요?

십 수 년 쯤 되었나요? 종로서적이 닫을 때

며칠 동안 마음이 허전했었는데,

그 때보다 더 한 허탈감입니다.

 

사실 책에 굶주려 지내던 대학원 재학시절엔 고서점들을 뻔질나게 찾았지요.

호주머니엔 구겨진 지전 몇 장과 동전 몇 낱이 전부였는데,

무슨 호기로 그런 책들을 탐내곤 했는지...

뒤통수에 꽂히는 주인장의 눈총을 느끼면서도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마냥 시간이나 끌기 일쑤였지요.

미련을 남겨 둔 채 서점 문을 나서는 마음은 왜 그리도 허전했을까요?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박대헌 사장님을 제 연구실에서 뵈었지요.

박 사장께서 ‘150만원 정가의 책을 저술출판하여

한국 지식사회를 경동(驚動)시킨 시점.

그 책을 앞에 두고

궁핍했던 시절 고서점들에서 입은 상처를 차마 거론할 순 없었지요.

 

그 후로 세월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고,

고서점들 또한 많은 시련과 변신을 시도했겠지요.

결국 그 험한 물결을 되돌리지 못한 채

호산방은 장렬히 문을 닫은 것 아니겠는지요?

지금 제 나이 또래의 우국지사(憂國之士)’라면

누군들 이 세월의 변화를 반길 수 있을까요?

얄팍한 매명(賣名)의 상술(商術)들을 보시나요?

인문학의 두겁을 뒤집어 쓴 채 세상을 호리는 사람들을 말이지요.

세상을 뒤덮은 인터넷의 그늘 아래

자리 깔고 펼치는 개그를 학문이라 착각하고 있는 세태를 말이지요.

 

일본,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

아직도 멋진 고서점들이 즐비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동네 도서관을 출입하고,

시장을 다녀오는 아주머니들의 장바구니 속에 도서관의 책이 한 두 권씩 들어 있는 모습.

그들의 멋진 건물이나 번쩍이는 거리의 모습보다 훨씬 부러운 광경이지요.

 

책을 찢어 벽지로 쓰고, 절구에 빻아 지공예의 재료로 쓰던 시절이 엊그젠데,

이삿짐센터의 제1 기피 대상이 책 박스라는 사실을 아시지요?

그래서 노마드의 임시 공동체인 우리네 아파트 쓰레기장,

그 공간의 단골손님이 멋진 장정의 책들이라는 사실도 잘 아시지요?

 

역사의 공간으로 사라진 호산방.

그 호산방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순 없을까요?

발효되는 고서의 향기 그득한 옛날의 서점으로,

힘들 때면 찾아가 고서들과 대화하며

위안을 받을 수 있는 휴식의 공간으로 말이지요.

 

우린 자손들에게 무얼 남겨야 할까요?

날카롭게 벼린 이데올로기?

번쩍이는 빌딩?

엄청난 파괴력의 ()무기?

국내외의 페이퍼 컴퍼니들에 숨겨둔 천문학적 재산?

 

동네마다

멋진 고서점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건사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문화나 전통, 역사란 말이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신다면

선진국의 멋진 고서점에 한 번 들러 보세요!

나이 먹은 책들의 숲에서 아이들과 함께

그 책들의 나지막한 음성을 들어보세요.

그 음성에 녹아있는 것이 바로 문화, 전통, 역사이지요.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미래에 대한 통찰이지요.

 

 

 


박대헌 사장의 저서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호산방, 1996)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의 내용

 

 

 


박대헌 사장의 헌사(<<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

 

 

 


일본 천리시내의 한 고서점

 

 

 


일본 천리시내의 고서점에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