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07. 11. 3. 16:34
안녕하십니까?
올해는 가산 이효석 선생이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숭실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출세작 대부분을 쓰시어 숭실문학의 맥을 일구신
이효석 선생의 삶과 문학세계를 아래의 내용으로 조명하고자 합니다.
부디 참석하시어 좋은 담론 나누시기 바랍니다.




숭실대학교 개교 110주년 기념
전국 학술발표대회
“탄생 100주년, 가산 이효석의 삶과 문학세계”

때 : 2007년 11월 9일(금), 오전 10시~오후 5시
곳 : 숭실대학교 벤처관 311호
주최 : 한국전통문예연구소


모시는 말씀



무르익은 캠퍼스의 지성과 낭만이
문학의 향내로 피어오르는
이 가을.

한국현대소설과 숭실문학의
큰 봉우리를 이룬
가산 이효석 선생을 생각합니다.

푹신한 낙엽을 밟으며,
가산의 문학과 서정을 담론하는 자리에
여러분을 모시고자 합니다.


2007년 10월 일


숭실대학교 한국전통문예연구소장 조규익



<진행 순서>

● 제1부
10:00-10:30 사회 : 정영문(한국전통문예연구소 학술연구팀장)
인사 : 조규익(숭실대 한국전통문예연구소장)
축사 : 이효계(숭실대 총장)

● 제2부
10:30-12:00 사회 : 이정석(숭실대)
10:30-11:00 이효석 문학연구의 현황과 전망----- 이금란(숭실대)
토론 ----------------------------- 김형규(아주대)
11:00-11:30 이효석의 삶과 문학세계의 변천----- 허명숙(숭실대)
토론 ----------------------------- 이용군(숭실대)
11:30-12:00 이효석 소설과 생태학적 상상력 ---- 임은희(한양대)
토론 ----------------------------- 김학균(서울대)
12:00-13:00 점 심

● 제3부 사회 : 방민화(한국전통문예연구소 연구원)
13:00-13:30 이효석 소설에 나타난 엑조티시즘과 향토적 서정의 긴장
--------------------------------------김해옥(연세대)
토론 ------------------------- 김미영(한양대)
13:30-14:00 이효석의 시와 수필 연구 --------- 김미영(숭실대)
토론 ------------------------- 노승욱(인하대)
14:00-14:30 이효석 소설과 신체담론 ---------- 김주리(상명대)
토론 ------------------------- 최익현(중앙대)
14:30-15:00 이효석과 아일랜드 문학 --------- 장원재(숭실대)
토론 ------------------------ 백로라(고려대)
15:00-15:20 휴식

● 제4부 15:20 종합토론 ----- 좌장 곽원석(숭실대)
Posted by kicho
자료 - 사진자료2007. 10. 13. 09:10

조선 통신사와 함께 한 '사행 길 1만리'


                                                      조규익(숭실대 교수)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상 처음으로 일본 땅을 밟아보았다. 미국, 유럽, 중국을 누비고(?) 다니면서도 까짓것 ‘일의대수(一衣帶水)’ 현해탄만 건너면 일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불쑥불쑥 터져 나오는 저들의 역사왜곡과 설쳐대는 우익들의 철없는 망동(妄動)이 지겹기 때문이었을까. 그보다는 어쩌면 그 옛날 지식 사회에 팽배해 있던 ‘조선중화주의’가 내 마음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심심풀이 땅콩’처럼 온천하러, 쇼핑하러 비행기에 몸을 싣는 이웃들의 일본행을 시큰둥하게 여겨오던 차였다. 그러나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 변하는 게 세상이라지만, 고전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찾아내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내 입장에서야 ‘변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했다. 동북공정이란 불순한 명분으로 우리네 영광의 역사를  왜곡하기에 바쁜 중국의 행태를 보라. 우리가 바야흐로 몰두하고 있는 연행록의 문명사적 의미에 대한 탐구가 그들의 미개한 역사인식을 바꾸어 놓을지 여부도 불투명한 지금이 아닌가. 그 옛날 조일(朝日) 간의 외교관계에서 혹시 유사한 구조로 전개되던 조중(朝中) 외교 관계의 본질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꽤 오래 전부터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현해탄을 건너는 행차에 끼어들었던 것이다.

격군들이 ‘어영차’ 노를 젓거나 바람의 힘을 이용하던 통신사 일행의 범선 대신 우람한 여객선 팬스타호에 몸을 의지하여 현해탄을 건넜다. 한여름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저기압성 강풍으로 거대한 선체조차 요람처럼 흔들리는데, 나뭇잎 같았을 당시의 배들이야 오죽했을까. 오리엔테이션에 이은 저녁식사와 여흥의 마술에 잠시 홀린 순간 배는 이미 일본의 내해로 들어와 있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감문교의 난간과 시모노세키의 야경이 넋을 잃게 한다. 아스라한 길이로 섬과 섬을 이은 아카시바시(明石橋)를 뒤로 하고 한참 만에 도달한 오사카 항. 30일 오전 10시. 부산항을 출발한 지 18시간 만이었다.

오사카 항구 인근 식당에서 점심으로 손수 튀겨 먹은 일본식 꼬지의 맛이 일품이었다. 드디어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건너오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발을 디뎠다는 그 옛날 일본의 국제항구 ‘나니와(難波)’에 도착한 것이었다. 건축미학을 자랑하는 오사카 역사박물관과 검푸른 물이 넘실대는 해자(垓字)의 오사카성은 인접해 있었으나, 일정에 쫓긴 나머지 오사카성은 고사하고 박물관 내부조차 제대로 돌아볼 수 없었다. 박물관을 나서자 쓰무라 별원의 통신사 숙박지인 니시혼간지(西本願寺)와 1711년 통신사가 상륙했다던 나니와바시(難波橋), 1764년 스즈끼 덴조에게 피살된 최천종의 위패와 김한중의 묘가 있는 치쿠린지(竹林寺), 조선통신사의 비가 세워진 마쓰시마 공원 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에게 말해줄 것이 많은 듯 치쿠린지의 주지스님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갈 길은 멀고 볼 것도 생각할 것도 많은데 시간이 짧았다. 과연 오사카에서 복잡다단했던 역사의 한 자락이라도 부여잡으려 했던 내 꿈이 푸졌던 것일까. 그저 일본답게 깨끗한 거리의 질서정연한 모습이나 까만 기모노 차림의 아가씨가 파라솔을 붙여 세운 자전거의 페달을 참하게 밟는 모습만이 추억으로 남을 뿐이었다.

저녁 무렵 도착한 교토. 말 그대로 ‘뚜껑 없는 박물관’인 이곳이 에도에서 메이지시대까지의 수도였다지만, 어찌 그리도 옛 모습이 알뜰하게 남았단 말인가. 드넓은 시가지 전체에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 고풍이 흘러 넘쳤다. 아쉬운 대로 숙소 근처 이자카야 거리의 선술집에서, 대를 이어내린 일본 서민들의 차분한 낭만을 만날 수 있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우리는 숨차게 통신사의 발자취와 일본의 역사를 훑어 나갔다.  세계문화유산인 빨간색조의 키요미즈테라(淸水寺), 일본인들의 악랄함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귀무덤(耳塚), 우리의 얼이 숨 쉬고 있는 고려미술관, 쇼코쿠지(相國寺), 하치만 별원으로 통신사가 숙박했던 니시혼간지, 조선인 가도, 히코네(彦根)성과 박물관, 소안지(宗安寺), 아메노모리호슈암(雨森芳洲庵), 오가키시 향토관, 오가키성, 젠쇼지(禪昌寺) 등. 모두 조선 통신사들이 스쳐간 역사 유적들이었다.
 
그 옛날 통신사들의 자취를 찾아보려 떠나온 장도(壯途)라지만, 그러나 내게 보이는 것은 역사의 호수에 비친 오늘날의 모습뿐이었다. 어쩌면 그 시절의 통신사들도 그랬으리라. 지엄한 왕명으로 양국의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공무의 사행 길이었지만, 그들이 진짜로 보고 싶었던 것은 ‘사람 사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다 같은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웠겠는가.
 
1763년(영조 39) 계미통신사의 삼방 서기로 따라갔던 김인겸. 그 역시 처음엔 일본을 오랑캐로 생각하여 업신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오사카를 보고 묘사하기를 “우리나라 도성 안은/동에서 서에 오기/십리라 하지마는/부귀한 재상들도/백간 집이 금법이오/다 몰속 흙기와를/이었어도 장타는데/장할손 왜놈들은/천간이나 지었으며/그 중에  호부한 놈/구리기와 이어 놓고/황금으로 집을 꾸며/사치키 이상하고/남에서 북에 오기/백리나 거의 하되/여염이 빈 틈 없어/담뿍이 들었으며/한 가운데 낭화강이/남북으로 흘러가니/천하에 이러한 경/또 어디 있단 말고”라 했으며, 나고야(名古屋)를 보고나서는 “육십 리 명호옥을/초경 말에 들어오니/번화하고 장려하기/대판성과 일반일다/밤빛이 어두워서/비록 자세 못 보아도/생치가 번성하여/전답이 고유하고/가사의 사치하기/일로에 제일일다/중원에도 흔치 않으리/우리나라 삼경을/예 비하여 보게 되면/매몰하기 가이없네”라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뿐인가. 숙소인 본원사에 들어가면서는 “삼사상을 뫼시고서/본원사로 들어갈새/길을 낀 여염들이/번화 부려하여/아국 종로에서/만 배나 더하도다/발도 걷고 문도 열고/난간도 의지하며/…/그리 많은 사람들이/한 소리를 아니 하고/어린 아이 혹 울면/손으로 입을 막아/못 울게 하는 거동/법령도 엄하도다”라고 그들의 질서의식에 대해서까지 칭찬했다.

왜인들을 ‘금수 같은’ 오랑캐로 생각한 김인겸도 일본을 지나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실제로 그들이 사는 마을의 제도나 형편이 썩 훌륭했던 것이다. 소중화의 자존의식에 충일해 있던 김인겸 스스로 쉽게 할 수 없는 말을 아끼지 않으면서 ‘오랑캐 일본’을 추켜세웠다. 화이(華夷) 구분의 대일 의식이 관념에 불과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들을 멸시해야 할 근거가 없음을 그는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아메노모리호슈가 주장한 ‘성신지교린론(誠信之交隣論)’의 단서를 조선적 버전으로 바꾼 것이라고나 할까.

외교는 나와 남의 상호 소통행위다. 남을 통해 나를 아는 데까지 나가야 비로소 소통은 이루어지는 것. 통신사행에 참여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일본은 남이면서 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었다. 통신사행이 거쳐 간 지역들과 우리네 도시들 사이엔 같고 다름이 분명했다. 사람들도 모습은 같았으나, 말이 다르고 드러나는 성격 또한 달랐다. 번화한 도시들에는 한 결 같이 깨끗한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역사의 어느 시기에 그들이 우리를 못 살게 굴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들은 대체 어디에 숨어 있단 말인가.

그 옛날 일본인들은 통신사들을 만날 때마다 글을 받고자 애썼다. 글을 받으려는 일본인들 때문에 통신사행이 괴로움을 겪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는 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손이 곱도록 붓을 휘갈기며 글을 써 주었다. 상호 소통의 취지를 몸소 실천한 그들이었다.

     *  *  *

5박 6일의 여정을 뒤로 하고 다시 발을 디딘 부산항 부두. 비로소 그 옛날 통신사 일행의 고통을 실감할 수 있었다. 건너갈 땐 현해탄이 잠잠했으나, 돌아오는 뱃길을 위협한 태풍 ‘우사기’의 횡포는 대단했다. 주로 격군들의 팔 힘에 의존했을 당시의 배들을 떠올리며 그 시절에 태어나지 않았음을, 더욱이 통신사 행렬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할까. 어쨌든 우리가 돌아본 일본 땅은 통신사 공부를 위한, ‘살아있는 텍스트’였다. 놀라운 건 그들의 노력으로 그 텍스트의 분량이 자꾸만 불어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글은  <<조선통신사>>(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2007. 9.) 18호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10. 12. 17:46

교수개혁이 대학의 개혁이다

개교 110주년. 개교 이래 한 세기를 넘기고 10년이란 세월이 더 흐른 시점이다. 어느 공동체이든 한 세기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대략 ‘조(祖)-부(父)-손(孫)’ 3대의 계보가 완성되는 기간이며, 처음에 표방한 이념을 완성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하다. 거기에 ‘강산도 바뀔 만한’ 10년이 더 흘렀다.

제대로라면 새 세기의 도약을 위한 새로운 방향 지표에 구성원들의 총의가 결집되어 벌써 출발선으로부터 훨씬 멀리 떠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과연 숭실의 구성원들은 그런 지향점을 공유하고 있는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최근 KAIST와 서울대 등 앞서 가는 몇몇 대학들은 교수들에 대한 평가를 엄정하게 함으로써 대학의 분위기를 일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학문과 지식사회를 선도하는 이들 몇몇 대학들은 대학의 수월성을 교수집단에 대한 엄격한 관리에서 추구하려고 한 것 같다. 만시지탄의 느낌은 없지 않으나, 맞는 방향이다.

사실 대학은 개혁되어야 하고, 대학개혁의 핵심은 교수개혁이다. 교육의 핵심은 교수에 달려 있고, 교수는 엄격한 평가에 의해 관리되어야 한다. 적게는 수십 명에서 많게는 기백명의 학생들, 적게는 10명 이내에서 많게는 십 수 명의 교수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 대학의 학과들이다. 매년 많은 수의 학생들이 사회로 배출되고, 그들은 각계로 흩어져 대학에서 자신들이 배운 대로 행동할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회의 핵심적 위치에 서게 되고 그가 이끄는 공동체 역시 그들의 생각대로 굴러가게 된다.

교수들이 잘못 된 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경우 학생과 학교, 사회와 국가의 피해가 말할 수 없이 크리라는 점은 묻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다. 그간 온정주의나 연공서열 중시의 분위기에서 ‘편안하게 지내온’ 일부 교수들이 만에 하나 동료나 후배교수들을 ‘패거리’로 묶어 지배하려고까지 한다면, 학문은 실종되고 술수나 음모가 판치는 ‘조폭사회’로 변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것도 바로 교수사회다.

학문적 담론의 질과 양, 강의를 비롯한 학생들에 대한 서비스의 질과 양으로 교수 자질의 적격 여부가 결정되어야 하고, 그것이 교수들에 대한 우대와 퇴출의 절대적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교수들에 대한 평가가 엄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몇 년 동안 제대로 된 논문 한 편 없어도 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었고, 한 번 교수가 되면 ‘어영부영’ 정년보장이나 받는 교수들이 적지 않은 집단이라면, 대학의 간판을 내려야 할 것이다. (국문과 조규익 교수)

*이 글은 숭대시보 No.955, 2007년 10월 8일자 사설입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10. 12.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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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0월 10일 숭실대학교 조만식 기념관 앞 잔디밭에서 기념식수를 마치고


숭실 재직 20년만에 한 그루의 나무를 심으며


2007년 10월 10일. 숭실대학교 110주년 기념식장에서 ‘근속 20년’의 포상을 받았다. 하루 종일 식장안팎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격려와 박수를 받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 겸연쩍음을 금할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나이 이제 50이니 어느 곳으로든 뻗어나갈 수 없음을 위로라도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그간 내가 진짜로 남들이 할 수 없는 일을 이곳에서 해왔다는 말일까.

숭실에서의 삶을 시작한 1987년은 무척 혼란스런 시기였다. 폭력적인 5공 정권이 종말을 고할 즈음이었고, 88 서울 올림픽의 열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하던 때였다. 사람들은 정의와 불의의 경계선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으며, 약아빠진 자들과 미련한 자들의 세속적 득실(得失)이 하늘 땅 만큼 벌어지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독재정권을 종식시킨다는 대의명분으로 강의보다 무단휴강일수가 훨씬 많았고, 교수들의 나약한 목청이 강의실 앞에서 고성능 마이크로 선동하는 목소리들을 어쩌지 못하던 좌절의 계절이었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것이 학문의 세계이자 대학의 본질이라면, 한 대학에서 20년을 근속했다는 것이 크게 자랑스러울 것은 없다. 어쩌면 새로운 세계를 추구하지 못하고 한 곳에 ‘처박혀’(?) 온 사실이 학자나 교수로서는 일종의 수치일 수도 있으리라. 수치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안일과 타성의 덫에 가위눌려 있으면서도 늘 무언가를 찾아 몸부림치고 있다는 착각 때문일 것이다.

그간 20년, 30년 근속하신 선배들을 뵈며 한편으로 연민의 정을 느껴왔다. 철없던 시절의 내 치기어린 안목이 빚어낸 실수였다. 아니, 그 분들의 주름 진 얼굴에서 아무런 가치도 읽어내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나의 오만함 때문이었음을 지금 비로소 깨닫는다. 나도 이제 그 때 그 분들의 연세에 도달했다. 그 분들이 서서 축하의 인사를 받던 그 자리에 올라 겸연쩍은 표정으로 다시 옛날 내 또래의 후배들로부터 축하의 인사를 받으면서 비로소 나를 응시하게 된다. 나는 과연 누구였으며, 앞으로 누구의 얼굴로 살아갈 것인가.

전공 강의실. 얼굴에 제법 어른 티가 오르기 시작한 학생들에게 ‘1987년’을 물었다. 모두 한 목소리로 ‘한살 때’였단다. 그래, 내가 이곳에 부임하던 1987년이 그대들은 세상에 갓 태어나 첫돌을 맞이하던 때였구나! 끔찍한 세월이 흘러 그 때의 한 살 박이들과 마주 한 지금. 왜 나는 내 내면의 나이테를 헤아릴 자신이 없는 걸까. 잘 못 돌린 카메라의 하얗게 바랜 필름처럼 그간의 궤적이 깡그리 사라졌단 말인가.

그래서 오늘 다시 한 그루의 나무를 심는다. 오늘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가치 있는 삶의 궤적’이 또렷한 나이테로 내 마음에 각인되길 간절히 바라며, 내 사랑하는 학생들과 소망의 흙을 삽질한다.

2007. 10. 10.

조만식기념관 옆 잔디밭에서

백규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7. 9. 17. 17:57

'얼음을 함께 논할 수 없는 여름 버러지' 틈을 벗어나고자 한
 홍대용의 연행길 육천리-『을병연행록』


                                           조규익(숭실대 교수)

               연행 길, 고행 길

1765년(영조 41년) 동지사행의 서장관 홍억을 따라나선 그의 조카 담헌 홍대용. 자제군관의 자격이었다. 실학을 발흥시킨 조선 후기의 대표적 지식인이었던 그는 당대 유학자 김원행에게 배웠고, 북학파의 대표 박지원과 교제가 깊었다. 그러나 화이관과 대명의리론(大明義理論)이 지배하던 그 시절. 명분과 현실은 크게 괴리되어 있었다. 담헌 스스로 벼슬을 추구하지 않았던 것도 그 괴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이러한 괴리감을 청산하고 세계를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연행'의 기회를 고대하다가 드디어 그 기회를 잡았던 것. 거기서 나온 것이 "을병연행록"이다.
 그가 두 달 걸려 도착한 연경까지는 편도 3천리, 왕복 6천리의 장도였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무리 지어 도보로 오가던 '공무 여행길'. 교통편이 마땅치 않으니 숙박시설인들 변변할 리 없었다. 윗사람들이라고 으레 '한둔'하기 일쑤이던 아랫사람들에 비해 특별히 나을 것도 없었다. 목욕은커녕 제때 옷을 갈아입는 일마저 분에 넘치는 사치였을 만큼 행차의 고단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위·아래 할 것 없이 군말을 보탤 수 없었다. 지엄한 왕명으로 나선 길이기 때문이었다.
 중국과 조선, 두 왕조의 외교적 연결은 주로 우리 쪽에서 파견하던 사행단이 담당했다. 조선은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천추(千秋) 등에 정례적인 사행단을 파견했다. 왕비나 세자의 책봉, 왕의 죽음에도 사행단을 보냈으며, 왕위를 물려줄 때도 선왕을 추숭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은(謝恩)·주청(奏請)·진하(進賀)·진위(陳慰)·진향(進香) 등은 수시로 파견되던  임시 사행단이었다. 정사·부사·서장관 각 1인, 대통관 3인(수역 당상관 1인·상통사 2인), 호공관(護貢官) 혹은 압물관(押物官) 24인 등 30명 내외가 공식 인원이었으나, 의원·서자관·화원 및 기타 수행원과 노자(奴子)들을 합하면 총인원 기백에 달하는 큰 규모였다. 그렇게 다녀 온 사행이 조선조 말까지 수백 회. 경제와 문화의 교류도 사행단이 수행하던 실질적 사명의 큰 부분이었다.

              서양문물과의 만남과 깨달음
                  
 "여름 버러지와는 족히 더불어 얼음을 이르지 못하고, 오곡한 선비와는 족히 더불어 큰 도를 의논치 못한다"는 『장자』의 말을 끌어와 담헌은 조선의 답답한 선비들을 비웃고 '길 떠나는' 자신의 결의를 다졌다. 그는 또 "간밤에 꿈을 꾸니/요야(遼野)를 날아 건너/산해관 잠긴 문을/한 손으로 밀치도다"라고 도도한 패기를 자신의 노래에 표현하기도 했다. 그 뿐 아니다. 평소 역관을 만날 때마다 한어를 부지런히 익혀둘 만큼 연행의 기회를 노리며 준비를 철저히 해온 그였다. 그 덕분으로 연경에 가서도 웬만한 대화는 한어로 통할 수 있었다. 오직 간정동의 세 벗(엄성·육비·반정균)과 나눈 대화들만은 필담으로 주고받았다. 정확성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연행 길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기록했으나,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간정동 세 벗과의 만남, 서양문물과의 만남이었다. 담헌은 연경에 도착한지 두어 달 째인 1766년 1월 7일·8일·9일·13일·19일과 2월 2일에 천주당을 방문하여 서양인 사제 유송령·포우관 등과 만났다. 그는 이들과 만나 대화를 나눔으로써 비로소 서양세계와 우리의 같고 다름을 깨닫고 개안을 하게 되었다. 정월 7일 천주당에 사람을 보내 유송령·포우관을 만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9일에서야 결국 두 사람을 만난다. 천주화상을 보며 그 화격(畵格)이나 천주교리에 대하여 비판하기도 하고 오르간의 구조와 음계를 자세히 관찰한 다음 즉석에서 연주 실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19일에도 천주당을 찾은 담헌은 그들과 장시간 만나 종교와 교리, 역서(曆書), 혼천의, 관상대, 망원경, 흑점(黑點), 안경 등 과학과 문물에 관한 문답을 교환했고, 2월 2일에는 자명종, 서양과 중국의 문자 언어 및 방위(方位) 등에 관한 문답도 나누었다. 처음으로 접한 천주화상을 담헌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북편 벽 위에 당중하여 한 사람의 화상을 그렸으니 계집의 의상이오, 머리를 풀어 좌우로 드리우고 눈을 찡그려 먼데를 바라보니 무한한 색과 근심하는 기색이라. 이것이 천주라 하는 사람이니 형체와 의복이 다 공중에 서있는 모양이오, 선 곳은 깊은 감실(龕室) 같으니, 첫 번 볼 제는 소상(塑像)인 줄만 여겼더니 가까이 간 후에 그림인 줄 깨달았으나, 안정(眼睛)이 사람을 보는 듯하니 천하에 이상한 화격이오.

 처음 보는 예수상에 놀랐던 것일까, 묘사의 세밀함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다. 사실 담헌은 그림 뿐 아니라 거문고를 능숙하게 탈 정도로 악기를 좋아했고 음률에도 조예가 깊었다. 처음 보는 오르간으로 우리나라의 음악을 연주해보이기도 했고, 악기를 접할 때마다 구조와 연주법을 묻거나 조선의 악기와 비교하기도 했으며, 거문고 연주를 들려주어 반정균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도 했다. 거문고 연주로 연경의 역관 서종맹의 탄성을 자아낸 담헌. 그는 악기상 유씨의 <평사낙안> 연주를 악사들로 하여금 익히게 한 다음 밤마다 그들을 불러 그것을 배웠다. 그처럼 그는 악기 연주의 매니아이기도 했다.

              간정동에서 만난 세 벗, 그리고 천고의 우정

 『을병연행록』 권 6에서 권 9까지 26일간은 담헌이 중국의 세 선비를 만난 간정동 이야기다. 이 부분은 전체 기록의 삼분지일을 넘을 만큼 양으로나 내용으로나 중국 체험의 핵심이다. 간정동을 처음 방문했을 때 왕어양의 『감구집(感舊集)』에 실린 김상헌의 시가 화제로 올랐으며, 2차 방문 때는 허난설헌의 시가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담헌은 도학과 절의로 저명한 김상헌을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려 했고, 시율에 비해 덕행이 미치지 못함을 들어 난설헌을 비판하기도 했다.
 다섯 번째로 간정동을 방문했을 때, 담헌은 육비·평중 등과 형제의 의를 맺고 '오늘의 모꼬지가 천고의 기특한 연분'이라 말하며 기뻐했다. 국경을 넘는, 지극한 우정이었다. 『담헌서』 외집의 <항전척독(杭傳尺牘)>은 연행에서 돌아온 담헌이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 33통이 실려 있는 글이다. 육비에게 주는 편지 4통, 엄성에게 주는 편지 3통, 반정균에게 주는 편지 5통, 손유의에게 주는 편지 4통 등이 그 중심이다. 이들 중 담헌과 특히 각별한 관계를 유지한 것은 엄성이었다. 엄성의 죽음을 슬퍼하며 그의 아버지·형·동생·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7통이나 될 정도였다. 엄성이 죽은 뒤 반정균에게 보낸 편지의 다음 구절엔 감동적인 우정이 흘러넘친다.

 철교(엄성의 호 ; 인용자 주)의 무덤에 풀이 이미 두 달을 묵었구료. 매양 깊었던 우정을 생각하면 벽을 돌며 기가 꺾이고 마음이 슬퍼집니다. 그 초상을 꼭 한 번 보고 싶건만 부쳐 주기가 쉽지 않겠지요.

 엄성은 담헌의 초상을 그려준 적이 있었는데, 정작 담헌은 그의 초상을 갖고 있지 못했으니, 엄성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었으리라. 그토록 그들은 우정으로 맺어진 큰 선비들이었다. 담헌이 보기에 단순히 '오랑캐 나라의 시시한 선비'들은 아니었다. '우물 안 개구리 같던' 조선의 선비들이 얕잡아 봄직한 인물들은 더더욱 아니었다. 담헌은 연행 길에 나서면서 "대개 사람이 작은 일을 즐기고 큰일을 모르는 자는 그 가슴에 호준한 뜻이 적음이요, 좁은 곳을 평안히 여겨 너른 곳을 생각지 아니하는 자는 그 도량에 원대한 계교가 없음이라"고 일갈했다. 어쩌면 그는 중국에 가서 이런 선비들과 교제하고 좀 더 큰 문제들을 담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담헌은 당시 조선의 꽉 막힌 선비들을 비판하고 매도했다. 담헌 자신 연행을 통해 '얼음을 함께 논할 수 없는 여름 버러지들' 틈에서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을까. 그는 우리나라의 예악문물을 소중화로 부르긴 하지만, 100리 되는 들판이 없고 천리를 흐르는 강이 없으며 땅덩어리가 좁고 좁아 중국의 한 고을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그 가운데 도사리고 앉아 부릅뜬 눈으로 소소한 영리를 추구하고 악착한 언론을 구사하니 그들이 가련하다고 했다.
 오랑캐가 웅거하여 중국의 문물이 비록 변했다 하나 사람만은 고금이 없으니, 천하의 큼을 보고 천하의 선비를 만나 천하의 일을 의논하며 저들의 규모와 기상을 한 번 볼 필요가 있다고도 했다. 그런 포부를 지닌 담헌이었기에 국경을 초월하는, 아름다운 교우관계의 모범적 선례를 남길 수 있었다. 반년 동안의 연행길이 그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7. 14. 11:57
*신정아 사기사건을 보며 참담함을 금할 수 없군요. 제가 옛날에 쓴 칼럼이 있어서 다시 이곳에 올려 봅니다. 우리가 학벌의 환상을 좇는 한 우리 사회에 '가짜박사' 사건은 앞으로도 상당기간 끊이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 함께 반성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이 글은 조선일보 2006. 3. 27. 시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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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가짜박사' 부추기는 사회


허술한 검증에 간판 중시 ‘지식범죄의 온상’ 돼버려


▲ 조규익 숭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최근 며칠째 가짜박사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건은 곪을 대로 곪은 우리 지식사회의 아름답지 못한 이면을 만천하에 노출시킨, 일종의 ‘테러’다. 피터 드러커의 설명처럼 지식 노동자가 권력을 갖는 사회가 지식사회라면 이 땅의 총체적 부패는 지식인들로부터 연유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추악한 테러의 무대가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을 넘어 러시아와 필리핀까지 번졌으니 다시 어느 나라가 이 행각의 새로운 현장으로 연루될지 자못 불안하기만 하다. 한국판 지식 범죄의 국제화라고나 할까. 얼마 전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했던 우리 학자들의 표절사건, 온 국민을 망연자실하게 만든 ‘황우석 사건’ 등과 함께 이번의 가짜박사 사건으로 우리의 지식사회는 결정적인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우리나라의 국제 경쟁력이 하락 국면으로 접어든 것도 국가 발전을 선도해야 할 지식사회의 휘청거림과 무관치 않다.
지금 우리는 가짜박사 학위를 남발한 외국의 대학들을 나무랄 처지가 아니다. 그런 대학들에서 사온 가짜 학위로 학술진흥재단에 학위등록을 하고, 어엿한 대학의 교수직에까지 올랐으니 문제의 근원을 우리에게서 찾는 것이 옳다. 가짜박사를 교수로 채용할 정도로 진짜와 가짜도 걸러내지 못한 수준이 우리 대학들의 한심한 실태다. 이런 현상은 지식사회의 마비된 양식, 국가의 학문정책 부재, 대학개혁의 실패 등이 어우러진 결과다. 지금 우리나라 대학들은 개혁의 열풍에 휩싸여 있다. 그러나 하드웨어의 치장에만 주력할 뿐 정작 개혁해야 할 본질적 대상은 초점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것이 현실이다. 개혁의 목적은 대학정신의 정립에 두어야 하고, 그에 걸맞은 제도의 신설이나 보완이 그 구체적인 방향이어야 한다.

세계에서 우리나라는 박사학위 보유자 비율로 선두권에 서 있다. 그럼에도 제대로 된 검증 시스템이 없거나 부실한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우리나라 대학들이 필연적으로 저질박사들의 온상 혹은 가짜박사들의 은신처가 되기에 딱 알맞은 곳임을 보여주는 점이다. 인터넷의 발달로 손쉽게 입수할 수 있는 지식정보가 널려 있고 표절행위 또한 여전한데, 오히려 논문의 심사단계는 전보다 간소화되고 있다. 적으면 한두 번, 많아야 서너 번의 심사가 박사논문 검증의 전부다. 박사 학위의 양산체제에 온정주의까지 가세하여, 저질논문을 걸러내기란 더욱 어렵다.

지금 기업들은 대학의 박사학위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학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관들은 반드시 박사학위를 요구한다. 아무리 실력이 출중하고 연구업적이 뛰어나도 박사학위가 없으면 아예 서류조차 낼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채용 과정에서는 가짜박사를 걸러내지 못한다.

구태의연한 검증 시스템과 지식사회의 낮은 윤리의식, 실력보다 학위를 중시하는 인력 수요자들의 무감각이 지속되는 한 가짜박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짜박사들은 죽은 지식사회에 기생하기 마련이다. 지식사회의 핵심인 교수들에게 보다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과 성실한 노력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 발표된 서울대의 교수윤리헌장은 늦었지만 적절하다. 지식사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진리다.


(조규익 숭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