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8. 1. 23. 14:57

호남성통신 1

마왕퇴의 무덤 속에 잠자고 있는 여인이여!
         

                                                                                                                     조규익

2008년 1월 21일. 내리는 눈발 속에 인천공항 활주로는 허둥대는 비행기들로 북적거렸다. 눈발에 얼어붙은 비행기의 날개를 녹이기 위해선가, 금쪽 같은 두 시간을 공항 대합실에서 하릴없이 기다렸다. 혹시 호남성 박물관 관람의 일정이 날아가는 건 아닌가 하여 속이 바작바작 타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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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진눈깨비 속의 호남성 박물관



중국 호남성 장사시 호남사범대학에서 열린다는 고소설학회의 국제학술회. 그 행렬에 뒤늦게 합류한 까닭이 내겐 있었다. 사실 이곳엔 보고 싶은 게 많았다. 심히 억울했던 굴원이 몸을 던진 멱라수, 두보가 올라가 <등악양루(登岳陽樓)>를 지었다는 악양의 악양루, 천하의 시인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은 동정호(洞庭湖)와 무릉도원으로 일컬어지는 상덕,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그곳엘 가보지 않는다면 100세가 되어도 늙었다고 할 수 없다’는 장가계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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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성 박물관 유물 진열실 입구

그러나 무엇보다 내 마음을 끈 것은 호남성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마왕퇴의 유물들이었다. 그 유물들과 함께 발굴되었다는 여인 한 사람도 내 호기심을 심히 자극했다.
2100년 이상의 세월에도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그녀, 대후부인 신추(辛追)는 1호 묘의 내관(內棺)에서 발굴되었다. 어쩌면 그 주변에서 발굴된 각종 생활용품을 통해 당시의 생활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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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된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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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된 술동이. 주석 도금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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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된 구름무늬의 채색칠 둥근병



이곳 시각으로 오후 3시가 넘어서야 장사 공항의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밖엔 차가운 겨울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한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일이 없다는 이곳이지만, 올해는 벌써 여러 날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단다. 진짜로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였다.

기내식으로 점심을 때운 채 우리는 고픈 배를 안고 호남성 박물관으로 달렸다. 다급하게 관람시간 연장을 요청해놓은 터였다. 간신히 찾아들어간 우리는 드디어 마왕퇴의 유물들과 만났다.
마왕퇴는 지역명, 그곳의 한묘는 서한시대 대후 가족의 묘지다. 마왕퇴의 한묘는 장사시 중심에서 4km 떨어진 곳으로 현재 호남성 박물관 관내다. 1972년에서 74년 사이에 류양하 옆의 마왕퇴에서 1호분, 2호분, 3호분 등 3개의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모두 장방형의 전형적 서한시대 분묘형식이다. 마왕퇴의 여인은 바로 그 1호분에서 나왔다.




2천 여 년 전의 생활이 어쩌면 그토록 생생하게 내 눈 앞에 다가선단 말인가.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친구들 사이에 놓여 있었을 아름다운 술동이도, 진수성찬을 담아냈을 반상들도, 적의 가슴에 날려 보냈을 증오의 화살들도, 밤 새워 고뇌하며 써내려갔을 죽간과 목간들도, 여인네의 가발도, 배를 비롯한 각종 과일들도 모두 생생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그 한 가운데 그 여인이 있었고, 그녀의 관을 보관했던 거대한 목곽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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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된 대후부인 신추의 생생한 모습. 죽은 지 2100년이 넘었음

아직도 피부는 탄력을 잃지 않고 있었으며, 그녀의 머리털 또한 숯처럼 새까맣고 건강했다. 1m 54cm의 신장, 34.3kg의 체중. 위장 속에서 다수의 머스크 멜론 씨앗들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멜론 하나를 먹은 잠시 후 죽은 것으로 보이는데, 사인(死因)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추정된다고 한다. 

상상들 해보시라. 올해가 2008년이니 그녀는 기원전 100년 전의 인물 아닌가. 누군가의 아름답고 젊은 부인이었거나 ‘이쁜’ 딸이었을 그녀. 가족들은 억울한 그녀의 죽음 앞에서 부활에의 소망을 가졌으리라. 그러나 그로부터 2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녀는 아직 부활하지 못한 채 유리관 안에 갇혀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마왕퇴와 만난 날은 허겁지겁 저물고, 잠시 숨을 고른 후 해가 뜨면 우리는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삶의 현장을 다시 만나러 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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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정된 대후부인 신추의 생전 모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1. 19. 17:13
 

 빽빽이도 늘어섰구나, 무덤들이여!

            -대만 인상기(印象記)·1-


                                                                            조규익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간은 책을 한 권만 읽은 사람’이란 말이 있다. 또 ‘군대 안 갔다 온 아무개가 군대 갔다 온 아무개를 이긴다’거나 ‘서울 안 갔다 온 아무개가 서울에서 살다 온 아무개를 이긴다’는 등의 가시 박힌 농담들도 지금껏 우리 사회에는 통용되고 있다. 어느 모임에 나가 보아도 크게 영양가 없는 말로 언성을 높이는 사람이 있기 마련. 그 지식의 근원을 캐 보면 제대로 된 책 대신 인터넷이나 신문 등일 경우가 대부분이다.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요즈음. 여행기들이 범람한다. 제대로 발품을 팔아 얻은 글부터 점만 찍고 돌아오는 패키지 여행에서 얻은 인상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짧은 생각들이 범하는 어리석음일 뿐이지만, 모조리 무익하지만은 않을 터. 그러니 나도 이 자리에서 그런 어리석음이나 한 번 범해 볼까나?


   ***


 지난 연말 3박4일의 일정으로 대만을 다녀왔다. 지척에 두고도 ‘언젠가 마음만 먹으면 다녀올 수 있으리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미루어두고 있던 곳이었다. 대만 행에 며칠간의 여유를 활용하기로 했다. 기대와 실망이 교차하는 것은 세계 어딜 가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들 득실거리는 관광지만 찾아 다녀야 하는 것이 여행객의 신세일 터. 어디 한 곳 차분하게 앉아 생각에 잠길 여유가 있으랴. 그저 ‘절에 간 새댁’ 마냥 능란한 가이드의 손에 이끌려 이곳저곳 숨차게 돌아다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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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고궁박물원

 여기서 둘째 날 들른 지우펀(九份)을 먼저 언급하려는 것은 그만큼 그곳에서 받은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가파른 고갯마루를 넘어 도달한 곳이었다. ‘九份’이란 이정표를 보고 나서야 가이드가 말끝마다 ‘구인분, 구인분’ 하는 말의 뜻을 헤아릴 수 있었다. 지우펀은 금광지대였다. 그 옛날 금광에서 일하던 그 마을의 광부 9명이 매몰되어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로부터 9명 광부의 아내들 즉 살아남은 9명의 과부(寡婦)들은 산 넘어 시장에서 늘 ‘9인분’의 식량을 사가지고 고개를 넘어야 했단다. 그래서 이곳이 ‘九份’으로 명명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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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 동네 모습-앞쪽이 산 자들의 집, 뒤쪽이 무덤들이다

 지우펀의 금광박물관을 거쳐 들른 곳이 바로 도교사원으로 화려함의 극치를 달리는 성명궁이었다. 그곳에선 관우를 주신(主神)으로 모시고 있었다. 황금색 바탕에 온갖 화려한 장식들을 붙여 놓은 전각 안에서 관우신을 옹위하고 있는 많은 신들이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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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성명궁-관우(관성제)를 모셨음

 그러나 정작 우리를 놀래킨 건 성명궁이 아니었다. 성명궁을 나서서 둘러본 사방의 산중턱에 이르기까지 아파트처럼 보이는 주택들이 그득 깔려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본 순간 경악하고 말았다. 그것들은 아파트가 아니라, 모두 유택(幽宅) 즉 무덤들이었다. 충격이었다. 그 무덤들은 흡사 시멘트로 잘 지어놓은 양옥집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거대한 아파트촌이 들어설만한 양지바른 산록. 그들은 그곳에 ‘죽은 자들을 위한 집들’을 그득하게 지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경우엔 경계가 모호할 정도로 산 자들의 집과 붙어있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산 자와 죽은 자들’이 동거하는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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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무덤들

 조부모, 선조들의 유택 아래쪽에 사는 후손들. 참으로 기이한 구도였다. 일찍이 베트남 메콩강 델타 지역 마을에서 뜰 안에 무덤을 만들고 조석으로 향불을 피우는 그들을 본 적도 있었다. 대개 남방 풍속의 공통점일 수도 있겠으나, 대만의 공동묘지는 좀 색다른 점이 있었다.

 딱딱거리는(?) 가이드에게 사정하여 간신히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무덤 탐색을 생략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략 두어 시간을 헤매고 다니며 무덤 속의 주인공들과 만난 셈이었다. 무덤들을 대충 둘러보고 났을 때 뱃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구역질 같은 것이 치밀어 올랐다. 양지 바른 산자락을 점령한 채 늘어서 있는 무덤들. 어느 무덤에나 ‘욕망의 기괴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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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무덤들

 형형색색 단장한, 아무도 없는 텅 빈 시멘트 구조물들을 가득 채우고 있는 냉기와 회한이 내 가슴에 사무쳐 왔다. 무덤들의 실체를 확인한 다음 우리는 빗방울 떨어지는 지우펀의 언덕길을 서둘러 내려왔다. 더껑이 진 가난과 오욕의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겁게 살아가는 무덤 속 주인공들의 ‘살아있는’ 후손들과 함께 하고픈 욕망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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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화려한 무덤


묘원(墓苑)이나 유택으로 표현될 만한 그곳의 무덤들은 자세히 보니 여러 층이었다. 호화로운 것은 치장도 그러려니와 규모 또한 웬만큼 잘 사는 집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였다. 그러나 길 가 언덕 아래 쪽 구멍에 조막손만한 검은 오지그릇 하나로 남아있는, 초라한 무덤도 많았다. 살아생전 고대광실에서 부귀영화를 누린 자나 노숙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나 죽은 다음에 심심산중 한 덩어리 봉분으로 남는다면, 그 얼마나 공평한 일인가.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묘제야말로 얼마나 철학적이고 인간적인가. 물론 호화분묘는 제외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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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펀의 초라한 무덤


   ***


 온갖 석물(石物)로 치장한 채 산 자들이 머물러야 할 양지바른 곳을 점령한 대만의 무덤들은 그 자체가 폭력이었다. 물론 조상을 잘 모시려는 자손들의 정성을 어찌 폄하할 수 있으랴. 그러나 내 한 몸 죽여서라도 자식들 살리고자 하는 것이 세상의 부모 마음일진대, ‘산 자들’이 차지해야 할 양지바른 곳에 자신들의 거대한 유택을 마련해준 자손들을 어찌 가상하게 생각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우펀의 무덤 군(群)을 만나면서 대만에 대한 기대의 반 이상을 접기로 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1. 3. 17:44
학기 말 성적 평가를 마치고


                                                                                                                    조규익
지난 여름의 일. 국가 기관이 발주하는 대형 프로젝트의 2차 심사(평가)를 받기 위해 풍광 좋은 어느 지방엘 다녀왔다. 목에 힘이 들어간 평가위원들이 평가 받기 위해 ‘잔뜩 숙이고 들어온’ 우리를 맞았다. 그들의 물음들 마디마디 짜증이 배어 있었지만, 우리는 그들이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 짜증이 났었다. 그러나 결코 내색할 수는 없었다. 칼자루를 쥔 그들이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라서였다.

결과는 우려했던 대로 ‘꽝’이었지만, 그들이 나중에 보내온 1쪽짜리 심사평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몇 가지 지적들 가운데 단 한 가지만 그런대로 수긍할 수 있었을 뿐, 나머지는 연구 제안서의 기본 내용이나 프로젝트의 취지마저 오독(誤讀)한 결과로 나온 것들이었다.

우리 팀의 어떤 친구는 “프로젝트 신청을 아예 못한 대학이나 냈다가 떨어진 대학의 교수들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을 것이니, 말하자면 이 분야의 열등생들이 우등생의 보고서를 평가한 셈 아니냐?” 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우리끼리만 분통을 터뜨릴 뿐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은 우리에겐 앞으로도 ‘먹고 살아야 할 날들’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 국가기관을 자극해서는 앞으로 ‘국물도 없을 것’ 아닌가.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남들이 가하는 ‘평가’의 세례 속에 살아왔고, 나 또한 그 평가의 주체가 되어 남들을 괴롭혀 온 게 사실이다. ‘삶 자체가 평가’라 할 만큼 모든 것이 평가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내 모습은 그런 평가들을 거쳐 온 결과라고 할 수 있고, 지금도 끊임없는 평가 속에서 살고 있으니, 앞으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학교나 사회에만 평가가 있는 게 아니다. 가정도 무서운 평가의 현장이다. 어제까지 모범 남편으로 칭송되다가 어느 한 순간 마나님의 눈으로부터 벗어나면 ‘몹쓸 인간’으로 추락된다. 어제까지 존경받는 아버지로 칭송되다가 무슨 문제로 자식들과 언쟁이라도 벌이게 되면 그 순간 여지없이 낙제생으로 급전직하하기 마련이다. 직장에서 지금까지 잘 나가다가 뜻 하지 않게 명퇴라도 당할라치면,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처치 곤란의 애물단지로 전락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이처럼 크게는 대통령 선거에서 작게는 학급의 일일 쪽지시험까지 시험과 평가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일희일비하며 인생을 불태워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평가자는 언제나 잔인하고 피평가자는 대부분 억울하다. 그러나 한 번 평가자라고 영원한 평가자일 수 없고 한 번 피평가자라고 영원한 피평가자는 아닐 것이니, 서로 간에 잔혹한(?) 새디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인 셈이다.

20년 넘게 교수생활을 해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 내겐 연구도, 강의도 아니다. 바로 학생들에 대한 ‘평가’다. 대학에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성적을 매겨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학사시스템’에 올리게 된다. 교수에 따라 성적을 매기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내 경우 대개 ‘중간고사 40%+기말고사 40%+과제 10%+출석 10%’의 기준을 적용한다.
평가 척도를 좀 더 다양하게 하고 싶지만, 생각만큼 관리가 쉽지 않다. 학기 초에는 ‘잘 가르치고 엄정하게 평가하겠다’는 초심으로 날이 시퍼렇다. 그러나 날이 가면서 학생들의 면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출석 잘 하고 성실하나 학과공부에는 그다지 두각을 보여주지 못하는 그룹(1), 가끔 결석·지각은 하지만 반짝이는 모습을 보이는 그룹(2), 성실하면서 공부도 잘 하는 그룹(3), 극소수의 이도저도 아닌 그룹(4)으로 나뉜다. 요즈음에는 졸업반 학생들도 아래 학년들의 강의에 많이 들어 와 후배들과 경쟁을 하는데, 대개 교수에게 졸업반으로서의 절박감을 각인시킴으로써 후배들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하려는 의도도 없지 않은 듯하다.^^
학점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대부분 성실하려고 노력하기 마련이어서 4에 속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편이다. 따라서 1, 2가 대부분이고, 3은 소수다. 그런데 문제는 1, 2에 속하는 친구들도 자신들이 틀림없는 3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열심히들 하기도 하지만 이제 마지막 벼랑에 서 있음을 시위하는 4학년들까지 고려에 넣다보면 채점의 곤혹스러움이 여간 아니다. 생각 같아선 모두에게 A를 주고 싶다. 그러나 눈치가 빤한 학교당국이 그걸 모를까. 아예 상대평가로 바꾸어 몇 %이상은 A나 B를 줄 수도 없다. 제한된 %를 초과하면 아예 성적 입력을 할 수 없도록 막아 놓은 것이다.
우리 대학시절만 해도 ‘교수시여, 제발 펑크만 내지 말아 주소서!’ 기도하고 다녔는데, 요즘 학생들은 B를 주면 무척 서운해 하고 C를 주면 아예 원수처럼 대한다.^^ 교수들에게 엄정한 상대평가를 강요하는 학교 당국도 C학점 받은 학생들이 졸업 전에 ‘재수강’을 하여 A나 B를 받을 수 있도록 탈출구를 열어 주고 있으니, 참으로 ‘모순된 현실’이다. ‘학점 인플레’에 대한 대응에서 학교 당국과 교수들 간의 엇박자가 이렇게 심할 수 없다.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성적처리가 끝나면 몇몇 학생들로부터 ‘눈물의 하소연’이 답지한다. 단 1점 때문에 장학금이 날아갔다느니, 다음 학기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삭감 당하게 되었다느니, 기업체에 인턴으로 선발되었는데 정식 채용될 기회가 사라졌다느니, 대학원에 진학하려는데 교수님의 학점 때문에 어렵게 되었다느니, 한 번도 지각·결석 없이 그토록 열심히 했는데 설마 이런 학점을 받을지 몰랐다느니 등등  과거 몇년 간 내게 전달된 사연들을 요약하면, 단순하지만 절절하다. 이럴 땐 어딘가로 숨고 싶다.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게 이리도 가슴 아픈 일인지 매 학기 경험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 차라리 내가 피평가자의 입장에 설지언정, 다시는 남을 평가하는 자리에 앉고 싶지 않은 심정이기도 하다.

***

오늘도 주인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번호가 핸드폰에 찍혀있다. 학점 때문에 억울한 어느 학생의 전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이여! 억울해하지 말라. 낮은 학점은 오히려 그대를 한 단계 성숙시킬 수 있는 ‘쓴 약’이 될 수도 있다. 먼 훗날 그 학점 덕분에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 남을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니. 대학의 학점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의미가 있는 법이다. 모두가 1등일 수는 없다. 그리고 대학의 학점 1등이 인생의 1등인 것도 아니다. ‘내가 1등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과 분발이 우리의 미래를 좀 더 발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깨달아줄 지어다, 사랑하는 학생들이여!
   

                                                   2008. 1. 3.  


연구실에서
고민 많은 백규 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1. 1. 00:43
여러분!

바로 10분 전에 정해년의 신년인사를 드린 것 같은데,
다시 무자년의 신년인사를 올리는 자리에 섰습니다.
어쩌면 내년 기축년을 맞이하는 순간엔 ‘바로 5분 전에 무자년의 신년인사를 올린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의 흐름이 빨라진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실감하는 요즈음입니다. 흐르는 세월에 떠밀려가며 아프게 허무를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인 것 같습니다.

대부분 그러시겠지만, 저로서는 특히 지난 한 해 동안 기쁨과 좌절을 골고루 경험했습니다. 계획대로 연구논문들도 저서들도 냈고, 훌륭한 후배교수를 선발했으며, 연구소 일도 제법 한다고 했습니다. 오랫동안 벼르던 ‘일본지역 조선통신사 노정답사’의 꿈을 이룰 수 있었고, 미답의 지역이던 대만에도 다녀왔습니다.

지난 가을엔 봉직하는 대학에서 20년 근속 표창을 받았습니다.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 대학에서 20년까지 근속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찌어찌 세월이 흐르다 보니 20년이 훌렁 지나가 버렸군요. 학교에서 표창까지 하는 걸 보니 20년 근속이 그리 나쁜 건 아니라는 깨달음을 비로소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무를 키우는 심정으로 이제부터라도 남은 기간 학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제 연구실 건물 옆 공터에 멋진 반송 한 그루를 심었습니다. 제가 정년을 맞을 무렵이면 아마 제법 근사한 그늘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아, 그리고 재직 20년 만에 연구실을 새 건물로 옮겼습니다. 조만식 기념관이라고, 사실은 제가 발의하여 이름을 지은 새 건물입니다. 새 연구실은 남향인데, 볕이 어찌나 좋은지 별도의 난방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무엇보다도 창가의 난초들이 행복해하는 것 같고, 제 연구의 능률 또한 오르는 것 같아 새삼 새 연구실로 이사한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 좋은 일만 있었겠습니까?

한 해가 끝나가는 시점의 ‘태안 기름유출 사고’로 저는 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타향살이 수십 년을 지탱해준 유일한 의지처가 ‘깨끗하고 아름다운 고향’이었는데, 정말 어처구니없이 당하고 말았습니다. 기름범벅이 된 고향의 해변, 모든 것이 죽어버린 해안의 갯벌을 망연자실 바라보며 하마터면 의욕의 끈마저 놓쳐버릴 뻔 했습니다. 고향 어른들의 절규를 들으며 인간의 무력감을 비로소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자, 이제 대망의 2008년이 밝았습니다. 올해도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논문도 책도 ‘눈 건강’이 허락되는 한 써야겠고, 후배들과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지난 해 결과가 좋지 않았던 프로젝트는 기필코 따내렵니다. 학생들과의 대화에도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생각입니다. 해외의 미답지역들을 몇 군데 돌아보는 일, 일본 지역 조선통신사 노정의 나머지 부분을 답사하는 일도 과제입니다. 한국전통문예연구소 주관의 ‘연행록 관계 국제학술대회’ 또한 반드시 실현시켜야지요. 거의 매일 1시간씩 투자해온 달리기에 30분쯤 더 투자할 생각입니다. 올해부터는 누구 말대로 ‘아까운 인생 하루 24시간을 48시간으로’ 늘여 써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가끔은 고향바다의 건강 상태도 체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자연으로부터 받기만 하던 시절은 지났습니다. 이제부턴 우리가 상처받은 자연을 보듬고 치료하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태안의 기름유출 사건은 우리에게 크나큰 반성의 기회가 되었다고 봅니다.

여러분께서도 새해의 계획들을 이미 세우셨겠지요. 무엇보다도 건강이 중요합니다. 개인의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가정과 사회, 국가가 건강해진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상식이지요. 건강관리가 모든 계획의 첫머리에 와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저와 함께 매일 달려보십시다.

무자년 새해 아침입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만복이 깃드시길 두 손 모아 빌어드리며 세배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새해 아침에

  백규 드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12. 24. 09:02
무지갯빛 기름띠 두른 바닷물이 바락바락 밀려드는 신두리 갯벌.
오늘도 그곳엔 검게 착색된 돌들을 닦고 훔쳐내는 손길들이 분주합니다. 이마에 솟는 땀방울마냥 표면에 기름방울 송글송글 달고 있는 돌들이 안타깝습니다. 흡사 식은땀 흘리며 병상에 누운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이라 할까요? 지금껏 고향 바닷가의 돌들을 이렇게 조심조심 어루만지며 그들의 몸을 소중하게 닦아본 경험이 없습니다. 지금껏 바닷물은, 바닷가 모래사장과 돌들은, 드넓은 갯벌은, 그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소품으로만 여겨왔습니다. 몹쓸 것들을 함부로 버려도 금세 정화시켜 우리에게 뛰어난 아름다움과 맛으로 되돌려 주는 ‘무한 희생의 어머니’로만 여겨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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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태안의 바다(최경자 촬영)


함부로 집어 던지고, 깨고, 침 뱉고, 툭하면 찾아와 욕설을 퍼부어도 그 바닷가의 돌들은 말 없는 고요함으로 우리를 맞아준 ‘묵언(黙言)의 성자’였음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식놈들 얼굴 닦아주는 일도 귀찮아하던 제가 바닷가의 돌들을 정성스레 닦아 주면서 터져 오르는 회한의 오열을 삼키고 또 삼킨 것도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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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에 절은, 자원봉사자의 고무장갑


울컥 치밀어 오르게 하는 기름 냄새와 끊임없이 들려오는 물소리. 그것들을 빼면 그곳엔 살아있는 게 없었습니다.

             ***

낮이면 늘 그곳엔 새까맣게 몰려나와 해바라기를 즐기던 능정이, 쇠발이, 황발이, 송장망둥이 등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저 멀리서 다가서는 시늉만 해도 그들은 잽싸게 저들의 구멍으로 몸을 숨기곤 했지요. 그러나 기름 벼락을 맞은 이후 그곳엔 아무런 움직임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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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업보(최경자 촬영)

 아마 모두들 제 집 속에서 죽어있을 겁니다. 제 어린 시절의 삶터이자 놀이터였던 그 바닷가는 그렇게 숨을 놓아버리는 중입니다. 어린 시절 저는 그 바닷가 모랫벌에서 달랑게와 경주를 하며 몸과 마음을 키워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역시 깡그리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

저를 아시는 분은 ‘저 촌놈이 또 고향타령을 시작했구나!’ 하시겠지요. 그러나 아무리 오일펜스를 쳐도, 아무리 흡착포를 갖다 붙여도 물길이 이어져 있는 한, 네 바다와 내 바다의 경계는 없습니다. 기름 덩어리는 거침없는 해류를 타고 남으로 북으로 동으로 서로 마구 번져가, 결국은 우리 모두의 마음까지 황폐화 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터에 ‘독약’을 쏟아 붓고도, 달랑 흡착포 한 장 들고 걸레질이나 하라고 하는 우리의 ‘대책 없는 원시성’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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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인간(최경자 촬영)

 

             ***

기름 절은 자갈밭을 걸레질하며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연은 선택이 아닌 삶의 필수조건’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너무나도 자명한 진리를, 아니 상식을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저만의 깨달음은 아닐 겁니다. 그런 깨달음을 얻었기에 이미 다녀간 자원 봉사자들이 또 찾아오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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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힘이다(최경자 촬영)


물론 한 뼘씩 걸레질을 해본들 우리가 바다에 가한 폭력의 상흔을 다 씻어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서 기름이 절어있는 바다엔 절망만 그득한 듯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소중한 자식들의 낯을 닦아주듯 바다와 자연을 소중히 다루는 마음만 갖게 된다면, 머지않아 바다는 다시 숨을 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자연과 환경이 우선이라는 인식만 갖게 된다면, 앞으론 많이 달라질 수 있겠지요.
오늘 걸레질을 하던 중 바위틈에서 살곰살곰 움직이는 아가 능정이를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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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능정이

분명 그건 희망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체구는 몹시 연약했지만, 조만간 그는 숨 쉴 만한 갯벌의 공간을 찾아낼 것입니다. 저는 실낱같은 희망일지라도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믿기로 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죽어가는 태안의 바다가 여러분의 아낌없는 응원과 기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2007. 12. 23.

백규 드림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7. 12. 12. 18:15
 

 안민(安民)의 불국토 건설, 그 이상과 현실

  -<안민가(安民歌)>의 내용미학-


                                                                            조규익


 Ⅰ. 정치, 백성, 그리고 질서와 무질서


국민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정치의 제1원칙이고, 국민이 편안하려면 국가의 질서가 잡혀야 한다. 무질서 속에 팽개쳐진 국민들이 부유할 수도, 편안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라 했다. 바르게 하는 것 즉 나라를 바로잡는 것은 왕의 책임이다. 왕이 솔선하여 바르다면 아무도 감히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노나라의 대부 계강자(季康子)에게 건네준 공자의 가르침이었다.

 서양에서 정치(politics)란 용어는 원래 도시국가의 뜻을 지닌 폴리스(polis)의 파생어 폴리티쿠스(politikus)에서 나왔다. 폴리스의 전역에 걸쳐 살아가던 시민들은 민회, 평의회, 행정관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도시국가의 정치에 관여했다. 그런 시공에서 이루어지던 모든 정치행위는 공동체의 삶을 바르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중점이 놓여 있었다.

 <<관정경(灌頂經)>>에서는 바르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정치라 했으니, 정치에 대한 불교의 관점도 유교나 서양과 다를 바 없다. 이보다 좀 더 나아간 것이 <<출요경(出曜經)>>‘척요품’의 관점이다. 즉 “견고한 것을 견고하다고 알고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교하지 않다고 알면 그는 곧 견고함을 구하는 것이니, ‘바른 다스림’으로 근본을 삼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정치란 바른 생각에 입각한 ‘바른 사유(思惟)’라는 것이다. 만약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 생각하고 견고한 것을 견고하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 견고한 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삿된 소견 때문’이라 했다.

 그러니 사람으로 하여금 삿된 소견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치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면 당연히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삿된 소견을 갖지 않게 된다. 삿된 소견을 갖지 않아야 임금은 임금의 노릇을 신하는 신하의 노릇을 백성은 백성을 노릇을 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는 모든 질서가 바르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우리 역사상 어느 시기에나 있었던 정치적 안정과 혼란의 원인은 정파들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상충되거나 정치 행위 당사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직분을 망각한데서 찾을 수 있다. 그 결과 외세의 침탈을 불러오거나 모순의 극대화로 인해 내부 구조가 붕괴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상황에 처할 경우 대부분의 지배자는 통치기반의 강화를 위해 애쓰고자 하나, 대개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정치세력 간의 갈등이나 부침이 극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들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시대가 신라 경덕왕의 치세(742~765)였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시기와 달리 이 시기에 향가가 많이 등장했고, 그 가운데 ‘정치적 담론’으로 해석할만한 <안민가(安民歌)>가 제진(製進)되었다는 사실이다.

 경덕왕대의 향가로 기록된 <도솔가(兜率歌)>,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안민가> 등은 하나같이 시대 배경이나 내용의 면에서 의미심장한 노래들이다. 왕을 중심으로 한 정파의 다툼과 그 해결을 상징적·제의적으로 드러낸 <도솔가>, 신라시대 관음신앙의 실체를 엿볼 수 있는 <도천수관음가>, 영웅적 인간상에 대한 찬양으로서 개인 서정의 실체를 보여주는 <찬기파랑가>, 정치의 요체와 국가적 지향점을 노래한 <안민가> 등이 그것들인데, 관점에 따라 노래들의 정신이나 주제는 달리 파악될 수 있겠지만, 당대의 사회상을 추측할 만한 단서들은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 이 글에서는 <안민가>가 드러내고 있는 이상과 현실의 경계 혹은 착종(錯綜)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안민가>에서 노래된 치도(治道)의 요체


<<삼국유사>> 권2 <기이> 제2(하)의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조에 다음과 같은 설화와 노래가 실려 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과 삼산의 신 등이 가끔 현신하여 대궐 뜰에 모셨다.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 누상에 앉아 좌우에게 물었다. “누가 능히 도중에서 영복승 한 사람을 얻어 오겠는가?” 마침 위의가 선명하고 조촐한 한 대덕이 바람을 쏘이며 거닐고 있었다. 좌우가 바라보고 데려왔다. 왕은 말했다. “내가 말한 영승이 아니로다.” 왕은 그를 물리쳤다. 또 한 중이 가사를 입고, 앵통을 지고, 남으로부터 왔다. 왕이 기뻐하며 누상으로 맞이하여 그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담겨 있을 뿐이었다. 왕은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중은 대답했다. “충담이라 하옵니다.” “그럼, 어디로부터 돌아오시는가.” 충담은 여쭈었다. “승려들은 늘 중삼·중구일을 중시하여 차를 달여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리는데, 오늘도 드리고 돌아오는 길이옵니다.” 왕은 말했다. “과인에게도 한 잔의 차를 마실 인연이 있을 수 있겠소?” 충담이 곧 차를 달여 드렸는데, 그 차의 기미(氣味)가 이상하고 다구 속에 이상한 향기가 강했다. 왕은 또 물었다. “짐이 일찍이 들으니 ‘선사가 지은 <찬기파랑가>가 그 뜻이 심히 높다’고 하니, 과연 그러하오?” 충담은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왕은 말했다. “그럼 짐을 위해 <안민가>를 지어 주시오.” 충담은 곧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아름답게 여겨 왕사로 봉했으나, 충담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 <안민가>는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비요

 신하는 따스한 어미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신다면

 백성이 사랑을 알 겁니다

 꾸물꾸물 살아가는 중생들

 이들을 먹여 살리소서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실진대

 나라 보전할 길 아시리다

 아으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시면

 나라가 태평하리이다


 이 노래는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금은~알 겁니다’, ‘꾸물꾸물~아시리다’, ‘아으~태평하리이다’ 등이 그것들이다. 1단은 대전제, 2단은 방법론, 3단은 1단을 좀 더 구체화시켜 도출해낸 주제단락이다. ‘백성을 사랑함’, ‘백성을 먹여살림/나라 보전함’, ‘나라가 태평함’ 등은 각 단의 내용적 핵심이다.

 임금과 신하, 혹은 부자(父子)의 직분을 엄수하는 것이 이상 정치의 요체임은 <<논어>>에서도 설명된 바 있다. 제나라 경공(景公)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다우면 된다”고 답했다. 그러자 경공은 “맞습니다. 만약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면 비록 식량이 넉넉하다 한들 내 어찌 밥을 얻어먹고 살 수 있으리오?”라고 공자의 현답(賢答)에 맞장구를 쳤다.

 이런 <<논어>>의 말 가운데 부자(父子)를 백성으로 대치한 것이 <안민가>의 담론이니, 선학들이 <안민가>의 배경사상을 유가(儒家)로 본 것도 응당 그럴 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임금이 임금노릇을, 신하가 신하노릇을, 백성이 백성노릇을 제대로 한다면 나라가 태평할 것’이라는 말이 어찌 유가만의 논리일 것이며, 사상(思想)의 차원으로까지 격을 높여 따질 내용이겠는가. ‘누구나 제 할 일만 제대로 하면 세상일은 저절로 잘 돌아갈 것’이라는 평범한 시정(市井)의 담론에 불과한 것을 세상의 학인들은 지나치게 고답적으로 따져왔을 뿐이다.

 문제는 정치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현책(賢策)을 노래에 담아달라는 왕의 요청에 이와 같이 평범한 시정의 논리로 대꾸한 충담의 의도에 있을 것이다. 신라 중대에 속하는 경덕왕  대는 체제의 모순이 서서히 현실화 하던 시기였다. 지배세력 내부의 대립과 모순이 표면화 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정치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귀족세력이 부상하면서 위기를 느낀 경덕왕은 왕권의 강화를 위한 개혁조치들을 시행하지만, 그러한 개혁정책들이 쉽게 정착되지는 못했다. 왕 혼자의 힘으로 구조적인 모순을 혁파하고 귀족세력이 이미 권력의 축으로 대두된 현실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특히 왕 자신이 후사(後嗣)와 관련된 무리수를 범함으로써 추락된 왕권은 치명상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식으로 후사를 삼으려는 욕망’을 왕권강화책과 동일시한 것이 경덕왕이 범한 무리수였는데, 그 당연한 결과로서 후사인 혜공왕이 피살되고, 차후 신라의 정치는 혼란기에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경덕왕은 충담을 만났다. 그렇다고 왕이 충담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당대에 유행하던 <찬기파랑가>를 통해 그 작자인 충담을 왕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충담과의 대화에서 왕은 “짐이 일찍이 들으니 ‘선사가 지은 <찬기파랑사뇌가>가 그 뜻이 심히 높다’고 하니 과연 그러한가요?”라고 물었다. 그에 대해 충담사는 “그러하옵니다”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건넸다. 그렇다면 일말의 망설임이나 겸양의 의도도 없었던 충담사의 대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왕이 작자인 충담에게 확인하고자 한 것은 ‘심히 높다’는 노래의 뜻인데, 그 경우 뜻이란 작자의 의도나 그로부터 구현된 주제의식일 것이다.

 그것은 ‘기파랑’이란 실존인물의 덕망이 왕을 비롯한 당대 권력층의 일반적인 성향과 현격하게 다르다는 점을 암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충담은 기파랑과 함께 권력에 발을 담그지 않으면서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던, 일종의 ‘재야 덕망가’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권력을 잡지는 않았으나, 대중으로부터 권력 못지않은 사랑과 신뢰를 받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왕이 충담에게 ‘이안민(理安民)’의 현책을 <찬기파랑가>와 같은 노래의 형태로 요청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감동한 왕이 노래를 받은 다음 충담에게 왕사(王師)의 자리를 주었으나 그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은 점도 충담의 정신이나 현실적인 위치를 암시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왕사의 자리를 사양했던 것일까. 애당초 자신이 정치에 뜻이 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정치 현실이 힘없는 재야 명망가가 나선다고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보지 않은 점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그런 생각의 실천을 뒷받침할만한 힘이 필요한 것이 정치의 현실이다. 실현시키지 못할 아이디어라면 꿈에 그칠 뿐이고, 그런 아이디어를 지닌 인물은 단순한 ‘이상가(理想家)’ 이상은 될 수 없음을 충담은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재야 명망가의 자리를 고수하고 임금에게 실천자적 역할의 짐을 떠넘겼을 가능성이 크다.

 노래 속의 핵심은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에 있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제대로 ‘안하는’, 당대의 현실이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말하자면 당대에 귀족세력이 부상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있는 점을 충담은 적절하게 지적했고, 왕은 노래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셈이었다.

 경덕왕이 왕권 강화에 나서서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들을 시행한 것도 <안민가>의 제진(製進)과 맥을 같이 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문박사와 누각박사(漏刻博士) 등을 두어 기후의 변화를 살피고 백성들의 삶을 배려하려 한 것은 위민정치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도 경덕왕의 개혁정치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사실 충담이 눈을 주었던 대상은 백성이었다. 그의 눈에 밟힌 것은 고통 받는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이 잘 살면 나라는 태평해지는 것이고,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야말로 모든 정치의 대본(大本)이라고 본 것이다. 백성들이 잘 먹고 살아야 ‘이상적인 불국토’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 것이 충담의 철학이었다. 백성들이 제대로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지배계층은 권력 싸움들을 그만 하고 제 할 일들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 충담의 정치철학이기도 했다.

 이처럼 노래에 담긴 뜻은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일’, ‘모두 제 할 일들을 다 하는 일’ 등인데, 임금으로선 그 속뜻을 좀 더 다르게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라는 두 조항에서 전자를 ‘임금다운 권력의 회복’으로, 후자를 ‘권신(權臣)들을 다잡아 신하다운 종속의 위치로 내리는 일’로 각각 해석했을 것이다.

 민심을 읽고 있던 충담으로서는 임금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민심을 얻는 지름길이며 궁극적으로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일임을 ‘넌지시’ 알려주려 했을 것이고, <안민가>는 그러한 정치적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경덕왕이 귀정문 누상에서 기다린 ‘영복승’이란 ‘민심의 향배를 읽을 줄 아는, 정치적 식견을 지닌 승려’였을 것이고, 그에게 요청한 ‘이안민의 노래’는 난국에 처한 임금이 당장 취해야 할 정치적 조치를 담은 담론이었던 것이다.


 Ⅲ. <안민가>의 정신, 그 지속과 변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상하로 묶여 국가가 지속되는 한, <안민가>의 정신은 정치의 대전제로 살아남기 마련이다. 다만 노래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주제의식이 달라질 수 있을 뿐이다. 정치의식을 담은 노래는 조선조의 악장이나 관각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변계량의 다음과 같은 노래는 변질된 <안민가>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서로 찾고 서로 응할 제

밝은 시절 용호(龍虎)가 만나 스스로 기약함이 있도다

신하의 절개 솔과 대라 추워도 변하지 않고

성은(聖恩)은 천지와 같아 가이 없도다

크시도다, 건원(乾元) 4덕의 온전하심이여!

황상(黃裳)의 곤도(坤道)는 하늘을 믿고 받드나이다

신하를 예로써 부리시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옵나니

밝은 임금 어진 신하 서로 만나 태평시절 이루셨도다

부모와 신명(神明)처럼

사람하고 공경함을 혹시라도 바꾸지 말아야 하니

임금과 신하는 오직 한 몸일 뿐이로소이다.


변계량이 세종에게 지어올린 <<자전지곡(紫殿之曲)>> 가운데 <군신지의(君臣之義)>다. 임금과 신하 간의 의리에 대한 담론인데, 내용의 핵심은 ‘신하를 예로써 부리시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옵나니’에 있다. 전제 왕조시절 임금에 대한 신하의 충성은 절대 불변의 명제였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는 임금이 신하를 예로써 부려야 신하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긴다고 했다. 말하자면 이 노래에서는 임금과 신하를 계약관계의 두 당사자로 규정한 셈이다. 그런 계약관계가 성립되어야 ‘임금과 신하는 한 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호족세력의 힘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움으로써 왕권과 신권인 호족세력의 상호 협조체제를 확립했던 고려 태조 왕건이나 혁명을 주도하여 건국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한 공신세력과 왕권의 제휴관계를 맺게 된 조선왕조의 초기는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안민가>에서 언술된 군신관계와는 다른 모습이 이 노래에는 그려져 있다.

 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먼저 요구하는 것이 전제 군주체제의 기본성격인데, 왕과 신하들 간의 상호 거래를 문면에 명시한 것은 <안민가> 정신의 크나큰 변질이라 할 만하다. 만약 이 노래의 주지를 산문으로 풀어 표현할 경우 ‘군신 간의 힘겨루기’라는 서사적 주제의식이 생성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만큼, 이 노래의 정치적 함의(含意)는 엄청나다. 이 노래의 주체가 변계량으로 대표되는 공신(功臣) 그룹이었다는 점은 이 노래를 <안민가>의 정신으로부터 이토록 현격하게 변질시킨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왕과 공신은 새로운 체제를 탄생·지속시키는 두 축이므로, <안민가>에 언급된 ‘군-신’과는 달리 이해(利害) 당사자일 뿐이었던 것이다.

 <안민가>와 <군신지의>에 언급된 ‘군-신’의 논리가 그 성격을 달리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인 면에서 담론을 달리한다고 볼 수는 없다. 두 노래 모두 전제왕조라는 동일한 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질된 모습을 보이긴 하나 <안민가>의 모티프가 이 노래에도 지속된다고 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렇다면 <안민가>는 현대시인에게 어떤 모습으로 수용되고 있을까. 이향아의 <신곡조 향가- 안민가>를 들어보자.


하루 세끼,

끼니마다 거르지 않고 묵상하고 싶다

밥사발에 옹싯거리는 낱알의 변용

이것은 봄부터 가을

이것은 일년의 심판

일년의 울음과 고통

의심과 기다림에 내리는 응답

내가 감사하는 것은 세월이다

아랑곳없이 깊어지는 무심이다

끼니 때면 가끔 조상들을 생각한다

후덕한 임금님과

양순한 백성들을

끼니마다 나는 목숨을 의심한다

이름도 벼슬도 허울임을 생각한다


그러나 밥을 먹는 평화여, 이 안분이여

결국은 감사한다

감사한다

때때로의 분망과

때때로의 무료와

때때로의 모멸과

때때로의 노여움을

지나간 시절을 거슬러 씹으며 삭힌다


내 사지와 동체 핏줄과 뼈가

일년에 일년씩 앙금으로 보태어져

아, 그 누구에게도 죄가 되는

평안을 회복한다

미안해라, 미안해라

평안 속에 갇힌다



이향아의 <안민가>를 관통하는 모티프도 ‘먹는 문제’의 해결을 통한 평안의 확보에 있다. 충담의 <안민가>에서도 중심은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절박한 문제였다. 다른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조롱 속의 새’가 백성이 아닌가. 그래서 충담은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절규했다. 그렇게 갇혀 사는 백성들이 평안함을 느끼며 살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길’이라 했다.

 이향아의 <안민가>도 세 개의 연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충담의 <안민가>와 같다. 첫 연의 핵심은 ‘밥에 대한 의심과 기다림’이고, 둘째 연의 핵심은 ‘감사’이며, 셋째 연의 핵심은 ‘평안’이다. ‘끼니마다 묵상하고 싶다’는 화자의 마음은 먹는 문제의 절박함을 절절하게 드러낸다.

 ‘양순한 백성들’에겐 ‘봄부터 가을까지’ 기다려서 얻게 되는 한 해의 수확이 ‘일 년의 심판’일 수밖에 없다. 초조하게 심판의 판정을 기다리듯 한 해 열심히 노력한 백성들은 ‘배고프지 않길’ 바라면서 수확의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후덕한 임금님’과 ‘양순한 백성’들을 싸잡아 ‘끼니 때면 가끔 생각하는’ 조상들이라 했다. 백성들의 배부름을 기원한 임금이나, 자신들의 배부름을 임금의 덕으로 생각한 백성들 모두 지금 끼니 때 굶지 않는 화자가 기꺼이 떠올리고 싶은 조상들인 것이다.

 ‘배불리 먹는’ 행복 앞에서 ‘이름이나 벼슬’은 허울일 뿐이라고 했다. 그만큼 시인은 먹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로 인식한 것이다. 둘째 연의 핵심은 감사다. ‘밥을 먹는 평화’, 아니 ‘밥을 먹음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와 그에 대한 감사를 노래한 부분이다. 밥을 먹고 평화를 얻어 감사하는 마음에 ‘분망, 무료, 모멸, 노여움’ 등은 모두 삭아 없어지는 감정의 찌꺼기들일 뿐이다.

 누구나 충담의 <안민가>에서 ‘먹는 문제의 절박함’을 인식해낸다. 정치의 잘 되고 못 됨을 따지는데 다른 이론들이 있을 수 없다. 소박하고 양순한 백성들이 배를 곯지 않는 것만큼 ‘잘 되는 정치’가 어디 있겠는가. 백성들에게 밥 한 술 제대로 먹여주지 못하는, 형편없는 정치집단들이 지금도 세계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러니 그 옛날 경덕왕 시절의 ‘재야 명망가’ 충담으로서야 못 먹는 백성들을 둘러보며 그들을 먹여 살리는 것만이 ‘이안민(理安民)’의 첫 조건임을 뼈에 사무치게 느꼈을 것 아닌가. 그래서 왕이 물어왔을 때 임금이나 신하들이 제대로 자기들의 역할을 하라고 일갈했다. 그렇게 되어야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고, 궁극적으로 나라가 태평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충담의 그런 본심을 꿰뚫어 보았기에 오늘날의 시인 이향아는 자신만의 <안민가>를 읊어낼 수 있었다.


                      ***


 고래로 정치의 요체는 백성을 먹이고 편안케 하는 데 있다. 우리의 옛 노래들 가운데 충담의 <안민가>만큼 그 평범한 진리를 소박하면서도 진솔하게 읊어낸 노래가 없다. 오늘날에도 그의 노래가 빛을 발하는 건 아무리 해가 바뀌어도 사람들의 먹고 사는 일만큼 절박한 과제이기 때문이고, 정치인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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