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7. 12. 12. 17:23
이탈리아 제2신
    
                          깊고 화려한 역사,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무질서
                              -나폴리의 환상과 현실


1월 3일 월요일. 오락가락하는 빗줄기를 헤아리며 폼페이를 떠났다. 하얀 눈을 이고 있는 베수비우스산은 여전히 말이 없고, 음산했던 폼페이는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스르르 묻혀져 갔다. 폼페이 시내에 있는 베수비우스 박물관은 끝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폐허 속에서 건져낸 삶의 편린들을 보고 싶었는데. 그들은 나폴리의 고고학박물관으로 가보라고 했다.
한 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나폴리. 도시를 따라 펼쳐진 해변의 한 부분으로 들어온 듯, 차창으로 바닷 내음이 울컥 밀려들었다. 궂은비는 사정없이 내려 가난한 나그네들을 안절부절 못하게 했다. 좁은 도로를 질주하는 차량들. 신경질적인 경적소리와 위협하는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난무했다. 도로 주변에 그득그득 쌓인 쓰레기는 비에 젖은 채 널브러져 있고, 가득 메운 차량들은 움푹움푹 파인 도로의 흙탕물을 사정없이 튀기며 질주했다.
주변에 호텔은 즐비했다. 그러나 어딜 가도 턱없이 비싸거나, 신뢰하기 어려운 ‘이탈리아식 흥정’을 벌여야 했다. 가장 큰 문제는 주차장. 주차장을 갖고 있는 호텔이 거의 없었다. 늘 차량의 안위(安危)를 먼저 고려해온 우리였다. 타고 다니는 게 아니라 모시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차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이 차가 없었다면 그 먼 길을 어떻게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그보단 없어질 경우 그 골치 아픈 일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으랴. 시종일관 호텔 선택의 첫 조건이 ‘차의 안전을 보장할만한’ 주차장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오후 세 시 가까운 시각에서야 그 유명하다는 ‘나폴리 핏자’로 점심을 때웠다. 계속되는 호텔 탐색전. 어둑어둑해지는 4시쯤 구시가의 중심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사람과 차의 엄청난 물결이 휩쓸고 다녔다. 일방통행 구간이 많아 한 번 길을 잘못 들면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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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핏자와 파스타


3, 4차선 도로에도 보행자 신호등이 없었다. 차들의 눈치를 보며 길을 건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잽싸게 앞질러 달리는 차량들. 길 건너는 사람들을 보며 속력을 늦추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짜증스런 경적 소리. 도로 좌우로 꽉 들어찬 우중충한 건물들. 너무 좁아 있으나마나한 인도. 그나마 도처에 펼쳐진 공사판. 차와 사람들이 엉겨 붙은 차도. 그 틈을 비집고 질주하는 오토바이들. 숨쉬기조차 어려운 매연. 비에 젖어 달라붙은 휴지조각들... 더러움과 무질서의 전시장이었다.
그 도로들을 오르락내리락 하길 여러 차례. 오후 6시가 넘어 깜깜해진 시각에야 항만에 인접한 호텔 하나를 잡을 수 있었다. ‘나폴리를 그냥 포기하고 떠나버릴까’ 망설이던 끝이었다. 호텔은 허름했으나, 창문을 여니 전망이 기가 막혔다. 바로 앞에 부두가 있고, 그 너머로 지중해의 파란 물이 그득했다. 부두엔 환하게 불을 밝힌 페리선 여러 척이 정박해 있고, 선착장 곳곳에 서 있는 지구 모양의 조명등은 우리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주었다. 주차장과 배들 사이로 분주히 오고가는 사람들. 비로소 이곳이 항구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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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발코니에서 내려다 본 나폴리 항


누가 나폴리를 미항(美港)이라 했을까. 우리는 비로소 아름다운 배들이 정박한 항구를 내려다보며 서운했던 마음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발만 시내로 들여놓으면 나폴리는 ‘지저분과 무질서’의 전시장이었다. 나폴리를 미항이라고 예찬한 누군가의 ‘턱없는 과장’, 우리는 그 실체를 확인해야 할 의무(?)까지 지게 된 셈이었다.
 1월 4일 아침, 창 밖으로부터 맑은 햇살이 비쳐왔다. 호텔방에서 내려다보는 에머럴드 빛깔의 바다와 그 위에 떠 있는 페리들의 하얀색이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시내로부턴 여전히 차량들의 소음이 퍼붓듯 몰려오고, 도로엔 날 선 병 조각들과 날리는 휴지조각들이 여전했다. 어젯밤의 그 모습에 햇살만 사알짝 내려앉았을 뿐.
햇살은 비에 젖은 쓰레기를 말리고, 마른 쓰레기는 다시 먼지를 피워 올릴 태세였다. 차량들과 사람들은 어제처럼 한데 엉겨 도로를 가득 메울 것이고, 그 위에 또 휴지를 버리고 담배꽁초들을 뱉어낼 것이다. 그렇게 ‘미항’이란 ‘미명(美名)’이 붙여진 나폴리를 우리는 날이 밝기가 무섭게 탐색하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깜빠냐Campania주의 주도 나폴리. 그러나 나폴리는 기원전 6세기부터 외세를 포함한 지배세력의 잦은 교체를 겪어왔다. 그리이스(기원전 6-5세기)를 시작으로 노르만족(12세기), 앙주Anjou·아라곤Aragon 가문(13세기), 스페인(16세기), 프랑스 부르봉 왕가(18세기) 등 다양한 세력들이 나폴리를 지배했다.
도시의 곳곳에 남아 있는 역사의 흔적들. 그래서 단순히 항만도시라는 이름으로 나폴리의 역사적 의미를 덮어버릴 수는 없다. 복잡다단한 거리만큼이나 의미 있는 역사유물 혹은 유적들이 다양했다. 나폴리의 역사 유적 혹은 관광 포인트는 구역에 따라 대충 10 개 정도로 나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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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서점가 골목


플레비스치토Plebiscito 광장과 왕궁, 성 프란체스코 교회, 성 페르디난도 교회, 제발로스Zevallos 궁전, 성 브리지다Brigida 교회, 누오보 성Castel Nuovo, 성 지아코모 데글리 스파뇰리San Giacomo Degli Spagnoli 교회, 성 마리아Santa Maria di Portosalvo 교회, 성 피에트로 순교자San Pietro Martire 교회, 피에트라르사Pietrarsa 철도박물관 등을 첫 구역으로, 단테Dante 광장, 삼위일체 교회, 성령교회, 성 니콜라스 교회, 그라비나Gravina 궁전, 기우소Giusso 궁전, 파파코다Pappacoda 성당 등을 둘째 구역으로, 성 테레사 교회, 성 뽀티또Potito 교회, 벨리니Bellini 극장, 성 지오반니 바티스타 델레 모나체 교회, 국립 고고학박물관, 성 겐나로 카타콤, 카포디몬테 박물관, 천문대 등을 셋째 구역으로, 프라마리노 궁전, 대주교 궁전, 아포스톨리 교회, 성 죠반니 교회, 포르타 카푸아나 광장 등을 넷째 구역으로, 벨리니 광장, 성 피에트로 아 마이엘라 교회, 폰타노 성당, 로마 수도관, 성 로렌쪼 마기오레 교회, 카푸아노 성 등을 다섯째 구역으로, 성 세베르토 성당, 파로라미타 궁전, 몬테 디 피에타, 성 죠르지오 마기오레 교회, 코모 궁전 등을 여섯째 구역으로, 몬텔레오네의 피그나텔리 광장, 성 치아라 단지, 성 도메니코 마기오레 교회, 코리글라노 광장 등을 일곱째 구역으로, 벨베데레 저택, 루치아 저택, 성 카를로 교회, 타르시아 궁전 등을 여덟째 구역으로, 예술과 산업 박물관, 성 크로체 교회, 델로보 성, 세싸 궁전, 시나고그, 루터란 교회, 비르길의 무덤, 앵글리컨 교회 등을 아홉째 구역으로, 델라 보르사 궁전, 성 펠리체 저택, 페이르체 저택, 보비노 궁전, 갈리 궁전, 스페라 저택 등을 열째 구역으로 각각 나눌 수 있으리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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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슬 누오보에서 내려다 본 나폴리 항


<계속>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12. 9. 18:02
이탈리아 제1신 :            삶은 축복인가 고통인가
                                   -폼페이의 비극을 보며


폼페이! <폼페이 최후의 날>이란 소설과 영화로 이미 우리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을 준 도시. 그러나 현장에서 보는 폼페이는 허구화된 상상의 공간이 아니라, 정겹고도 슬픈 현실의 공간이었다.
정겨움과 슬픔. 일견 모순적인 두 감정의 근원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의 모습들과 큰 차이 없는 데서 오는 것이 전자이고, 흔적만 남아 있을 뿐 그 속에 생명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 후자이리라. 그 날 뜨거운 열기를 내뿜었던 베수비우스 산정엔 하얀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조용하게, 흡사 경고라도 하려는 듯 침묵 속에 무언가를 피워 올리는 그 자태가 음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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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변한 폼페이 극장


지금으로부터 1926년 전인 A.D. 79년 8월 24일 이른 오후. 한창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던  시각. 대부분의 폼페이 사람들이 늘 그래왔듯 일상에 분주하던 바로 그 때, 엄청난 포효와 함께 베수비우스산은 폭발했다. 검은 화산재는 용암과 함께 분화구를 솟구쳐 나와 도시를 덮쳤고. 단숨에 모든 것을 가두어 버린 죽음과 파괴의 견고한 울타리로 변했다. 영광과 긍지의 폼페이는 일순 지표에서 6-7m 아래로 매장되고 말았다.
기원전 8세기 경, 티레니안 해변을 따라가며 정착하기 시작한 일단의 오스칸(Oscan) 사람들. 과거 언젠가 베수비우스산의 융기로 만들어진 높은 지역에 마을의 중심을 만들었다. 그것이 폼페이의 두드러진 전략적 위치였다. 그 때문에 속속 이 지역의 주역들은 바뀌게 된다. 에트루스족(Etruscans), 그리이스족(Greeks), 샘족(Samnites) 등. 결국 폼페이는 로마의 지배에 들어가고, 기원전 80년엔 로마의 식민지가 된다. ‘콜로니아 베네리아 코르넬리아 폼페이(Colonia Veneria Cornelia Pompeii)'란 이름도 갖게 되었고.
화산재에 덮인 지 1천 7백년 후 사르노(Sarno) 계곡에서 터널을 건설하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가 명문(銘文) 석판을 우연히 발견함으로써 파묻힌 도시를 발견하게 된다.
1748년 실질적인 첫 탐사가 챨스 부르봉(Charles Bourbon)의 지휘로 이루어졌고, 그로부터 1세기 가량 뒤인 1860년 쥬제뻬 피오렐리(Giuseppe Fiorelli)에 의해 ‘신화 속의 폼페이’는 기적적으로 우리들의 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80% 정도만 빛을 보았고, 나머지 20%는 아직도 암흑 속에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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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하게 죽은 일가족의 모습


3km의 긴 성벽에 여덟 개의 문을 가진 폼페이. 서쪽에는 신전들과 공공건물들이 있는 포럼(Forum)이, 앞쪽에는 대극장과 일반 주택들이, 성문 밖에는 네크로폴리스(Necropolis)가 각각 자리 잡고 있었다. 원래 바다로부터 500m 정도 떨어져 있던 폼페이. 그러나 화산 폭발 후 항만이 메워져 그 거리는 2km로 늘어났다. 물론 항만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도 알 수 없지만. 폼페이에서 가장 오랜 건물들은 기원전 6세기의 것들. 그 후 도시는 점진적으로 확장되었다. 2세기 후 로마의 지배에 대항하여 폼페이, 스타비아(Stabia), 헤르쿨라네움(Herculaneum) 등의 도시가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의 장군 실라(Silla)가 이들을 재 정벌했다. 원주민들은 새 이주자들에게 공간을 내주고 떠나야 했다. 폼페이 유적들의 건설 시기가 대부분 기원전 80년경인 것도 그 때문이다.
로마에 의해 정비된 폼페이에 적용된 것은 합리적인 도시 시스템. 특히 둥글고 넓은 돌로 포장된 도로와 물 공급 시스템이 인상적이었다. 도로포장엔 베수비우스 산의 암반으로부터 가져온 둥글 넙적한 돌들을 사용했고, 사르노 강과 샘에서 물을 받아 도시 전역에 파이프로 공급해주었다. 주 송수관은 포장도로 밑에 묻혀 있었으며, 그 송수관들을 통해 부유한 주민들의 집과 공중목욕탕, 가난한 서민들이 사용하던 공공 파운틴으로 물이 공급되었다.
폼페이의 인구는 8000에서 1만명. 약 6할이 자유민, 4할이 노예들이었다. 노예들은 대부분 동방 출신들로서 교육수준도 높았다. 그 가운데는 주인보다 훨씬 교육수준이 높은 노예들도 있었다. 잘 사는 집은 2, 3명의 노예를 거느릴 수 있었고, 그보다 나은 집에서는 더 많은 수의 노예를 거느릴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들 노예들 가운데는 박사도 교사도 있었다는 사실. 어떤 노예가 원한다면 주인의 은전(恩典)을 입거나 많은 금액의 돈을 지불함으로써 자유민이 될 수도 있었다.
우리는 오락가락하는 빗속에서 미로와 같은 폐허를 누비고 다녔다. 사통팔달된 도로를 경계로 나누어진 구획들에는 주택들과 공공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각각의 주택들도 사회적 지위나 신분의 차이 때문인 듯 규모나 구조에서 약간씩 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호화로운 흔적들이 역력했다. 특히 화덕이 설치된 부뚜막은 그림 같은 무늬가 화려한 대리석을 매끄럽게 갈아 쓴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 뿐 아니라 몇몇 집이나 건물들엔 아직도 생생한 그림들이 벽화로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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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판 '비너스의 탄생'


원형 경기장, 극장, 공공건물, 신전, 일반 주택 등을 비교적 자세히 돌아본 우리들의 뇌리에 사라지지 않는 것 세 가지가 있었다. 서쪽 메인 포럼의 아폴로와 다이애나 신전, 공중목욕탕, 그리고 그림들.
메인포럼은 폼페이의 아크로폴리스에 해당하는 장소였다. 이곳엔 아폴로와 다이애나 신전이 있었다. 그곳 정면에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활을 쏘는 아폴로. 근육질의 몸매가 매혹적이고, 아름다운 얼굴 또한 인상적이었다. 그들도 태양과 달을 숭배하여 가장 높은 곳에  둘의 신전을 세워 놓았던 것인가.
다음은 공중목욕탕. 기원전 수세기의 도시인들이 공중목욕탕을 사용한 흔적을 보는 일은 경이로웠다. 서울이나 지방에서 가끔씩 사우나엘 가보지만, 그 때마다 형편없는 시설과 서비스에 불만을 느껴오던 차였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천 3, 4백 년 전의 이들이 멋진 목욕탕에서 향유하던 삶의 질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우리는 건물 벽이나 바닥, 혹은 천장에 남아있는 상당수의 그림들도 만났다. 화려한 채색이, 멋진 선이 아직도 살아 생생했다. 그 뜨거웠을 화산재도 그들의 예술을 망가뜨리진 못했으니, 놀랍도다.
그림들의 오브제는 신화 속의 인물들이 대부분이고, 가끔 화조(花鳥)나 사자 등 동물들도 있었다. 두루미와 원앙이 연꽃을 희롱하는 그림은 흡사 동양화를 보는 듯 했고, 모자이크 화의 섬세함은 참으로 놀라웠다. 뛰어난 형상력과 색채감, 지금의 그림들 못지않거나 오히려 능가한다고 보면 좀 지나친가.
그런데 어찌 이것밖에 없는 것인가. 그곳 담당자에게 물었다. ‘여기서 출토된 것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라고. 그러자 그는 나폴리의 고고학박물관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폼페이 그림의 진수는 모두 그곳에 가 있다는 대답이었다. 내일 나폴리에 가면 우선적으로 고고학박물관을 찾아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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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너스의 탄생' 근처에서 발견한 그림('옥타비안의 최후'로 기억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음)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를 놀랍고 슬프게 한 것은 출토품들을 임시로 저장해놓은, 이른바 ‘뮤지엄’이었다. 그곳엔 대량의 그릇들(주로 포도주나 올리브기름을 담기 위해)이 있었고, 간간이 미이라처럼 굳어진 시신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말 그대로의 미이라가 아니었다. 화산재에 묻힌 시신들은 썩어 없어졌고, 굳어진 화산암 속에는 시신들이 사라진 공간이(사람들이 죽을 때의 모습으로) 생겨난 것이다. 훗날 발굴할 때 그 틈에 석고를 부어넣어 응고시켜 만들어낸 것들이 바로 그 시신들이었다.  
무릎 사이에 고개를 모으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엎드려 몸부림치는 모습, 옆으로 누워 새우처럼 꼬부린 모습 등. 삶과 죽음의 경계가 그 순간만은 모호했다. 그들은 살아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죽은 것인가. 그들은 죽음의 재가 덮이는 순간 과연 살기 위해 몸부림친 것일까. 알 수 없었지만, 가슴에 밀려드는 슬픔만은 어쩔 수 없었다. 나약한 인간의 무력함에서 오는 슬픔이었다.
 한낮이었으면 낮잠을 즐기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일터에서 땀을 흘리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길 하나 건너 이웃집에 마실 나간 아낙도 있었을 것이고, 동네 파운틴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등물을 하던 떠꺼머리총각들도 있었을 것이다. 한 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그들은 화산재에 묻혔다. 일가족이 얼어붙은 듯 죽어있는 모습. 어른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저 젖먹이는 어째서 이런 천재(天災)의 희생이 되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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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수비우스 산(이 산이 그토록 무서운 불을 뿜었답니다)


서유럽에서 우리는 매끈한 현재진행의 역사만 보았다. 과거가 고스란히 현재로 이어지는 역사, 잘 나가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우리는 정지된 시간과 공간을 보았다. 건물은 부서져 폐허로 남아 있었다. 대리석 기둥은 연필심처럼 부러져 나뒹굴고, 단단한 초석도 조각조각 난 채 쳐 박혀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그건 처참한 패배이자 소멸이고, 좌절이었다. 소생의 가망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역사에 대한 투철한 안목을 지니지 못한 우리에겐 일단 ‘허무’였다. 그리고 그 출발은 욕망이었다. 인간 욕망의 보편적인 귀결은 허무임을 그들은 깨어진 돌조각으로 웅변하고 있는 듯 했다.
우리는 잠시 혼란한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우리의 생각을 수정할 수 있었다. 과연 지금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며, 지금 죽은 듯이 보이는 그 역사가 과연 완전 소멸된 것일까.
아닐 것이다. 지금도 9·11테러, 이라크 전쟁 등 인간 문명에 관한 패러다임을 바꿀만한 사건들은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들은 물질의 폐허가 아닌 인간의 마음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지 않은가. 또한 ‘쯔나미’처럼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초토화시키는 자연재해 또한 빈발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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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변한 구시가지와 현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신시가지의 대비되는 모습


폼페이에서 인류문명이 봉착할 수도 있는 위기의 가능성을 발견한 우리. 약간은 초조한 마음으로 인근의 나폴리로 향했다. 그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폼페이 유물들을 통해 폼페이의 문명사적 의미를 좀더 살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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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12. 9. 11:50
*알립니다. 저는 올해(2007) 초에 '조규익 임미숙의 유럽 자동차 여행기 <<아, 유럽!>>(푸른사상)을 출간한 바 있습니다. 여기에 그 원고에 해당하는 기행문을 차례로 싣고자 합니다. 말하자면 여행기간의 역순(逆順)으로 싣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제1신 : 삶은 우리에게 축복인가 고통인가-
                            폼페이의 비극을 보며


우린 2006년도 첫날을 아드리아 해에서 맞이했다. 바리 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이탈리아 남부를 횡단하여 폼페이에 입성했다. 동에서 서로 달리는 길. 중간쯤부터 거센 바람이 구름을 몰고 다니더니 오락가락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나폴리를 지나 살레르노에 이르자 빗발은 굵어졌고, 폼페이에 들어오자 흙탕물이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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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바리 항에서 폼페이로 가는 도중 만난 아름다운 자연


도시는 썰렁했다. 1월 1일 휴일에 비까지 내리니 도심은 공동(空洞) 상태. 길 물어볼 사람조차 없었다. 빗발 속에 간신히 호텔 하나를 잡은 뒤 도시를 대충 살폈다. 티레니아 해로 연결되는 살레르노 만을 접한 폼페이. 중심에 옛 도시의 폐허가 있고, 그 바깥으로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어 있었다.
몇 안 되는 관광객들이 매표소 주변에서 서성대는 모습을 보았으나, 폼페이 폐허와의 만남을 다음날로 미루었다. 그 만남을 좀더 의미 깊도록 만들고픈 우리의 희망 때문이었다. 폼페이의 음울한 분위기를 살리려는 듯 줄기차게 비는 내리고, 나그네의 수심을 도와 밤은 더욱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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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시가지 일부


본의는 아니었으나 우연찮게 근래 우리는 폐허만을 찾아다녔다. 터키의 에페소, 그리이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와 에인션트 코린트, 그리고 이탈리아의 폼페이까지. 터키, 그리이스, 이탈리아는 바다로 접한 나라들.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서로 물고 물리는 길항(拮抗) 관계였던 이 나라들이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중간지대인 터키, 완전 서유럽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유럽도 아닌 그리이스와 이탈리아다. 에게해, 아드리아해, 지중해 등 서로 물길처럼 연결되는 바다를 공통의 무대로 하는 나라들이다.
일찍부터 꽃 피운 인류문명을 세계로 전파시키며 주름잡던 주역들.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 안에서 항만들을 기반으로 도시문명을 이룩했으나, 전쟁을 비롯한 인재(人災)와 지진이나 화산폭발 등의 천재(天災)로 멸망을 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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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폐허의 한 부분


영속하고자 한 그들의 욕망이 허무로 귀결된 현실을 보며, 명백한 신의 섭리를 깨닫기도 했다. 섭리의 현실화이든 단순한 허무이든, 폐허로 남은 ‘옛날의 영화’는 범부(凡夫)들의 마음에 참담함만 안겨 주었다. 역사의 이성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폐허의 돌조각에서 느끼는 온기가 예사롭지 않은 나날이다.
물론 시간은 매 순간 절대 동일할 수 없고, 최소한 ‘동질적’일 수도 없다. 그러나 언제든 새로운 코린트, 새로운 에페소, 새로운 폼페이가 생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크게 보아 반복되는 것이 인간의 역사라고 믿는 우리로선 그 두려움을 떨칠 수 없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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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폐허 유물 저장고에 있는 시신의 부조


폼페이의 폐허 속에 쭈그리고 앉은 채 미이라처럼 형상화 된 어느 남자의 입에서, 누운 채 죽어버린 일가족의 입에서 우리는 분명 그런 내용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폐허를 대하면서 우리는 ‘살아있음’에 환희해야 하는가, 아니면 역사의 반복 가능성에 몸서리를 쳐야 하는가.
<계속>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7. 11. 25. 16:07
 

一平선생님 팔순연에



선생님!

올 가을 단풍은 유난히도 붉고 곱습니다. 山野에 불타듯 깔린 단풍을 바라보며 불현듯 10년 전 선생님의 古稀宴을 떠올립니다. 안팎으로 나라가 어렵던 시절이었지요. 무책임한 정치인들이 내뿜던 狂氣가 온 나라를 짓누르던 그 때. 오래도록 隱居하시던 화곡동으로부터 명동 저잣거리의 한복판으로 나오신지 얼마 되지 않을 무렵이었지요. 선생님의 열정에 이끌려 하나 둘 모여든 문하생들은 그날 선생님의 파안대소를 뵈며 시절의 험난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도, ‘늘 처음처럼’ 변하지 않는 것들을 탐구하시며 문하생들을 이끌어 주시는 선생님의 의연하신 모습에 저희들은 크나큰 희망을 갈무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습니다. 많은 문하생들이 선생님의 가르침에 힘입어 사회적으론 각자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만, 아직도 선생님의 품을 떠나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배움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어디에도 선생님의 문하만한 곳이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고금을 無不通知하신 선생님께서 늘 연마에 여념 없으신 모습을 뵈며, 스스로들 부끄러움을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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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그간 참으로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문하생들을 가르치시는 틈틈이 고전을 번역하시어 等身大로 이루어 놓으신 업적들. 단순히 ‘浩澣하다’는 말로는 덮을 수 없을 만큼 洋洋한 학문의 바다를 이룩하셨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와중에 眼力은 크게 損傷되셨으며, 컴퓨터와 씨름하시느라 건강도 약간 쇠해지셨음을 저희들은 최근에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1995년 한서대학교 부설 동양고전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하신 이래 <<주역>>, <<심경>>, <<맹자>>, <<문장달덕록강령>>, <<유예지>>, <<한국고전비평론자료집>>, <<통감절요>>, <<농암집>>, <<마일부학 연구논문집>>, <<삼한시귀감>>, <<임원경제지>>, <<고문진보>>, <<근사록>>, <<동계서화론>>, <<논어>>, <<시경>>, <<개자원 화보>>, <<춘추좌전>>, <<중용>>, <<한사경>>, <<중국음악철학>>, <<악기>>, <<서경>>, <<고문진보>>, <<일본서기>>, <<녹문사서>>, <<악론>>, <<맹자>>, <<음청사>>, <<기재집>>, <<대학>>, <<통감절요>>, <<오언칠언당음>>, <<중국역대화론>>(1~5), <<오언당음>>, <<칠언당음>>, <<혜환 이용휴 산문전집>> 등 들기에도 숨찰 만큼 많은 고전들의 강독을 통해 후학들을 깨우치셨습니다.

 그 뿐인가요. 최근 12집까지 <<동방학>>을 발간하셨고, <<조용문선생집>>, <<한국고전비평론자료집>>(1~3), <<죽계일기>>, <<역주 악기>>, <<양심당집>>, <<김택영의 조선시대사>>, <<혜환 이용휴시전집>>, <<송구봉 시전집>>, <<중국 역대화론>>(1~5), <<국역 오언당음>>, <<국역 칠언당음>>, <<혜환 이용휴 산문전집>> 등 많은 역서들을 펴내셨습니다. 요즈음의 자잘한 학인들로서야 몇 생을 산다한들 언감생심 이룰 수 있는 양이겠으며, 제법 한다하는 선비들이라 할지라도 쉬 이룰 수 있는 업적이겠는지요? 참으로 놀랍고 두려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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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는 최근 ‘나이야말로 숫자에 불과하다’고 외치는 어떤 사람을 만났습니다. 같은 세월을 살아도 創出하는 가치에는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다는 말이겠지요. 단 몇 년을 살아도 남의 100년에 맞먹는 삶을 사는 사람이 분명 있습니다. 선생님 같으신 분이 바로 그런 예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갈수록 빛을 발하시는 선생님의 학문세계야말로 남들이 백년을 넘겨 닦아도 도달 못할 경지임을 문하생들은 지금 새삼 깨닫게 됩니다. 지난 10년 선생님을 뫼시고 학문의 近海를 빠져나온 저희 문하생들은 이제 드넓은 遠洋을 향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10년, 그리고 또 10년, 영원히 문하생들에게 이념의 푯대가 되어 주소서.


아, 海屋의 산가지에 萬歲를 더하시고, 다함없는 南山의 壽를 누리소서!


                             2007. 11. 24.


                             문하생들을 대표하여

                      사단법인 온지학회 회장 조규익은 삼가 절하고 올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11. 6.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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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碩學)이 돈 몇 푼으로 만들어지나

                                                               조규익(숭실대 교수)

우리나라 지식사회의 중심인 대학과 교수집단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린 신정아 사건. 한 계절이 다 가도록 그 본질이 명쾌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그 사건이야말로 지식인들의 무사안일과 허위의식, 그로 인한 지식사회의 부패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이런 와중에 교수 정년보장심사에서 신청자들을 대거 탈락시킨 KAIST의 사례가 이른바 ‘교수 철 밥통 깨기’의 전조(前兆)로 인구에 회자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임용되면 정년이 보장되는 기존의 관습을 깨야 한다’는 이구동성(異口同聲)의 사회적 구호가 당위로 인식되는 분위기 속에서 상식을 갖춘 교수들이라면 무슨 항변인들 보탤 수 있겠는가.

근래 들어 우리 사회에서 ‘석학’의 언급이 부쩍 늘어나는 것도 이런 현실에 대한 반작용일 수 있다. 말하자면 쭉정이들 틈에서 ‘제대로 된 알맹이들’ 몇몇이라도 키워 지식사회의 건전화를 선도해보자는 발상일 것이다. 학계의 저변을 튼실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상식적 처방을 잠시 외면한 채 이른바 소수의 ‘스타교수, 스타학자’들을 찾아내어 ‘석학’이란 명함을 부여해보자는 발상은 한정된 재원을 투자하여 ‘일시적이나마’ 한국 지식사회의 저급성을 모면해보자는 고육책일 것이다.

그렇다면 석학이란 무엇인가. 과문의 소치이겠으나, 동양권에서는 예로부터 십여 년 이상 저술에 몰두해 온 ‘대학자’를 석유(碩儒)라 했고, 석유는 석학과 동의어로 쓰인 말이다. 근대 이후 학문이 다양하게 분화되면서 어느 분야에서나 석학들은 나타나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석학이란 말 속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해당 분야의 전문적 식견과 사회적 책무의 인식이나 실천이라는 복합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탁월한 학문적 깊이와 함께 지도적 인격이 구비되어야 비로소 ‘석학’의 영예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석학이 많으면 많을수록 나라가 발전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며, 그런 이유에서라도 스스로가 석학이라고 나설 수 없는 것은 더더욱 당연한 일이다.

최근 우리나라의 학문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하는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는 ‘국가석학’이란 명목으로 ‘우수학자’를 ‘모집’하고 있다. 자격을 갖춘 학회의 추천을 받아야 한다는 단서를 달고 있긴 하나, 그 추천을 받기 위해서는 학자들 스스로가 자신이 석학임을 입증해야 한다. 몇몇 전공분야의 경우 수백명이 신청했다는 후문이고 보면 우리나라에는 ‘스스로 석학들’이 매우 많은 셈이다. 특정 연구계획으로 2~3년 간 매년 기천만원의 연구비를 지원받아 연구를 마무리한다고 석학이 된다면 조만간 이 나라는 석학으로 가득 차게 될 것 아닌가.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에게 스스로를 천거하여 일을 성사시킨 전국시대 ‘모수(毛遂)’의 예도 있긴 하지만, 긴 세월이 필요한 학문은 ‘단박의 술수’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차라리 권위 있는 학회들에 위탁하여 기존의 명망 있는 학자들이나 장래 ‘석학의 가능성을 지닌’ 학자들을 발굴·추천하는 일을 맡겨서 국가 예산을 효율적으로 쓰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 해마다 한 두 번씩 수백 명의 학자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석학이라 내세우며 어리석음을 범하게 하는 일이야말로 백년대계를 책임져야 할 국가가 범하는 최대의 잘못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공무원들이 탁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석학이란 단박에 돈 몇 푼으로 만들어지는 ‘물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7. 11. 5. 20:36
제43차 전국학술발표대회

시조문학의 변화와 지속
        

                 • 일시 : 2007. 11. 17.(토) - 11. 18.(일)
                     • 장소 : 중부대학교
                             경복관(제4강의동) B-110호
                     • 주최 : 한국시조학회
                     • 후원 : 중부대학교 대학원
                       

          
            한국시조학회    



모시는 글

  가을의 단풍잎이 아름다운 계절에 회원 선생님들의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한국시조학회에서는 금강 주변에 위치한 중부대학교에서 『시조문학의 변화와 지속』이라는 주제로 제43차 전국학술발표대회를 개최하고자 합니다. 우리 학회에서는 전국에서 저명한 학자들과 신진 학자들의 연구발표를 통하여 시조문학의 학술발전에 기여하고자 이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학술 주제를 선정하여 매년 2회에 걸쳐 전국학술발표대회를 개최해오고 있습니다.
  회원 선생님께서는 바쁘시더라도 꼭 참석하시어 전국학술 발표대회를 빛내주시기 바랍니다.

                              2007년 11월 1일

韓國時調學會長  林  鍾  贊

교통편 : 2007년 11월 17일(목), 오전 11시에 대전역에서 시내버스로 출발하여 대회장소인 중부대학교 경복관 B-110호 강의실로 이동하고자 합니다.
  연락처 : 이찬욱(부회장) : 017-295-2734(휴) 류해춘(총무이사) : 016-343-3292(휴)




시조문학의 변화와 지속
             
11월 17일(토)  
13:00 ~ 13:30   등      록              
13:30 ~ 14:00   개  회  사          임종찬(한국시조학회장)
                 축      사        배내윤(중부대 대학원장)
제1부   주제발표        사회 :  류해춘(성결대)
14:00 ~ 14:30   애정시조의 스토리텔링 방안        류수열(전주대)
                            토론 : 이태희(인천대)        한창훈(전북대)
14:30 ~ 15:00   정훈의 시조의 구조적 특질과 그 미학적 의미        박상영(경북대)
                            토론 : 남동걸(인하대)         신은경(우석대)
15:00 ~ 15:30   강호시조·전원시조의  지속·전환에 대한 지역사적 시각        김창원(경기대)
                            토론 : 강구율(동양대)        김상진(한양대)
15:30 ~ 16:00   황진이 시조의 이별양상과 대응양상        김성문(중앙대)
                            토론 : 신영명(상지대)        김종환(육군3사)
16:00 ~ 16:30   정완영 시조의 유가적 인본주의 연구        민병관(부산대)
                            토론 : 허만욱(남서울대)        박규홍(경일대)
16:30 ~ 17:00   현대시조 기점 논고        이완형(배재대)
                            토론 : 오선근(중부대)        박영준(중앙대)
17:00 ~ 17:30   시조영시고        신웅순(중부대)
                            토론 : 박미영(백석대)        이찬욱(중앙대)

제2부   시조창                    

17:30 ~ 17:50        사회 :  김신중(전남대)
              여창지름(청조야-----)        신웅순(중부대)
              우조시조(나비야-----)        안충자(대전무형문화재 14호)
              우조질음(석인이---- )        김재순(경남대)

11월 18일(일)
제3부   종합토론 (10:00 ~ 12:00)                                              좌장 : 조규익(숭실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