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학술문2014. 12. 15. 13:23

<<아리랑연구총서 ②>>가 출판되었습니다!

 

 

 

 

 

 

 

아리랑 연구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아리랑 논고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어떠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아리랑 연구를 시작해야 하는가?’

아리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한다거나, 좀 더 심도 있는 연구를 원하는 학자들은 흔히 이러한 의문과 곤란에 부딪치게 됩니다.

 

이번에 출판된 <<아리랑 연구총서 2>>2010~2013년 사이에 발표된 논문들을 모은 것으로, 최근에 이루어진 아리랑 논고의 정화(精華)라 할 수 있습니다. 아리랑을 왜곡한 당대의 역사관에 대한 학술적 비평 및 기록을 바탕으로 한 원형적 모습에 대한 역사적 고찰(숭실대 조용호 교수), 북한(한양대 김영운 교수강원(민족사관고 박관수 박사경상(부산대 서정매 교수전라(전남대 이용식 교수) 등 지역별로 존재하는 아리랑에 대해 심화된 연구, 기호학(서강대 송효섭 교수) 및 정신분석(서강대 김승희 교수) 측면에서 시도하는 새로운 분석 기법, 음악학적 논의(경인교대 김혜정 교수), 호머 헐버트에 대한 분석적 고찰(전주대 김승우 교수), 지금까지 존재하는 아리랑의 주요 담론에 대한 정밀한 비평(숭실대 조규익 교수) 등 축적된 연구물의 결정판이라는 것이 보신 분들의 평입니다. 나아가 향후의 연구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아리랑 연구 총서 작업은 전10집을 목표로 진행 중입니다. 1집은 초창기 연구자들의 주요 담론들을 수록함으로써 원문 탐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국내외 연구자들에게 질 높은 자료를 제공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2집은 초기의 상황과 대비하여 어떠한 발전 도상에 있는지 반성하는 측면에서 최근의 논의들을 담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나오게 될 제3집에는 192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제기되어 온 일본관련 학자들의 아리랑 논고들을 모아 실을 예정입니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기획된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의 아리랑 연구총서를 아리랑 연구의 길잡이로 보는 이유도 이 점에 있습니다.

 

*********

 

 

 

 

 

 

참고로 <<아리랑 연구총서 2>>의 머리말을 들겠습니다.

 

 

 

머리말

 

201212,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아리랑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아리랑의 연고권에 관한 특정 국가와의 갈등을 극복하고 이룩한 쾌거라서 더욱 값진 일이긴 하나, 새롭게 지게 된 부담 또한 만만치 않다. 현재 아리랑이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정신적예술적 유산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유관국은 자국 내 조선족의 존재를 내세워 자신들이 아리랑을 선점하려는 욕을 내보였다. 그 뿐 아니다. 그들이 그런 욕을 내보인 데는 아리랑이 우리 것이라는 사실만 믿고 그것을 갈고 다듬는 일에 소홀한 우리의 게으름도 한몫을 했다는 점이 섬뜩하다. ‘아리랑에 대한 내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여타 외국인들로서야 제대로 된 논리나 근거를 먼저 들고 나오는 쪽의 손을 들어줄 것 아닌가?’라고 생각한 것이 그 나라계산이었을 것이다. 그간 아리랑에 대하여 태평하게 세월만 까먹으며 살아온 우리가 화들짝 놀란 건 당연한 일이다.

 

과연 아리랑에 대하여 우리가 해놓은 건 무엇인가? 어느 날 이웃나라가 아리랑을 내놓으라고 달려들 때 그들에게 내세울 수 있는 논리적사실적 근거를 얼마나 확보하고 있으며, 현재와 미래를 위해 아리랑을 얼마나 활용하고 있는가? 아리랑의 학술적 담론들은 얼마나 창출되었으며, 그것들을 통해 아리랑의 본질은 얼마나 밝혀졌는가? 등등 가장 현실적인 질문들에 딱히 내 놓을 게 별로 없다. 이 물음들 대부분이 학계에 던져지는 것들일 텐데, 속 시원하게 보여 줄만한 답지가 없어 안타깝다. 지금 아리랑 연구가 꽉 막혔다고들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리랑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대답을 못하니, 연구 활동들 역시 변죽만 울릴 따름이다.

 

이런 상황인식을 전제로, 아리랑 연구의 주된 결실들을 한 군데로 모으는 것이 난국 타개의 첫 단계라는 판단이 들었다. ‘아리랑 담론들은 어떻게 생겨났고, 후대 연구자들에게 어떻게 수용되었으며, 향후 연구의 진로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를 알기 위해서라도 아리랑 연구의 업적들을 모으는 일이 중요했다. 아리랑이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기 전에 발간한 것이 <<아리랑 연구총서 1>>인데, 여기에 실린 글들은 다음과 같다.

 

1. 이광수, <民謠 小考()>

2. 김지연, <조선민요 아리랑朝鮮民謠硏究()>

3. 김지연, <조선민요 아리랑()朝鮮民謠硏究()>

4. 고권삼, <‘아이롱主義>

5. 이병도, <‘아리랑곡의 유래>

6. 양주동, <<도령><아리랑>>古歌硏究 二題

7. 심재덕, <아리랑 小考>

8. 정익섭, 珍島의 민요>

9. 임동권, <아리랑의 기원에 대하여>

10. 최재억, <한국민요연구아리랑 민요고>

11. 원훈의, <아리랑 系語造語論的 考察>

 

이 글들이 바로 초기 학자들의 아리랑 담론들이다. 과연 현재우리들 이들과 비교하여 어떤 진보 혹은 발전을 이룩했는가. 우리 모두 함께 고민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

 

이번에 펴내는 2집에는 반성적 시각을 제공하려는 뜻에서 최근의 논의들을 담았고, 이어 나오게 될 3집에는 일제 강점기 일본학자들의 아리랑 관련 글들을 싣고자 한다. 아리랑이 인류무형문화재로 등재되었다하여, 우리의 할 일이 끝난 건 아니다. 치열한  논쟁과  연구를  통한  학자들의  뒷받침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리랑의  문헌들과  현장에  대한  재 탐사를  바탕으로 그간  선진국에서  배워  온  발전된  학문 방법론들을 총동원해서라도 아리랑의 본질 모색에 착수해야 한다. 그  디딤돌  혹은  마중물의  역할을  하 려는  뜻에서 아리랑 연구총서를  기획했고, 앞으로  계속  발간할  예정이다. 아리랑과  민족  전통예술에  뜻을  갖고  있는  학자들의  서재에  이  책이  연구의  길잡이로  꽂히게  될  것을  고대하며, 강호제현의 질정을  기다린다.

 

갑오년 겨울

 

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규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2. 12. 17:19

*<교수신문> 758호(2014. 12. 1.)에 실린 글을 퍼다 놓습니다.

 

 

‘메모리얼 뮤지엄’, 그리고 어떤 기억들의 보존 방식

어느 국문학자의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 답사기
2014년 12월 10일 (수) 15:53:56 조규익 숭실대·국어국문학과 editor@kyosu.net

조규익 숭실대 교수(국어국문학과)는 2013년도 풀브라이트 지원의 방문학자로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에서 연구하는 기회를 잡았다. 그는 “이곳에서 틈틈이 아내 임미숙과 함께 주변지역을 두루 답사하며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말한다. 오클라호마 곳곳에서 그는 삶의 어떤 순간들을 새롭게 읽어낼 수 있었다. 서울에 돌아온 뒤 그는 이런 경험을 묶어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푸른사상 刊, 이하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를 내놨다. ‘조규익·임미숙의 해외문화 답사기 2’라고 작은 타이틀도 붙인 책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국문학도로서의 외길을 걸어오며 내 지적 능력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자유로운 사유와 모색을 끊임없이 반복해왔고, 그것들이 바로 ‘도전과 좌절’이라는 최대공약수로 수렴된다는 사실을 최근 깨달았다.” 그가 말하는 도전과 좌절은, 그의 시선을 일찍이 ‘해외 한인문학’으로 돌리게 했고, 몇 년간의 여행을 거친 후 『CIS지역 고려인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란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번 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 역시 그런 경험이 녹아든, 그러나 조 교수가 말한 것처럼, 지적 방랑을 거듭해오던 연구도전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는 작은 쉼표 다. 오클라호마라는 낯선 세계에서 그는 마주치는 삶의 현장마다 얽혀있는 사건과 역사의 깊이를 측량하고, 그것을 다시 우리의 삶 속으로 소환해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읽어나갔다.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 에는 비극 속에 단련된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고 있는 미국인들의 노력을 엿본 장면 하나가 인상적이다. 역사와 예술, 인디언의 문화, 대학 등 폭넓게 조망하고 있는 가운데, ‘오클라호마 시 메모리얼 뮤지엄’을 두고 그가 읽어낸 시선은 타자를 통해 다시 우리 안으로 돌아오는, 뚜렷한 성찰적 旅路의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관련 대목을 소개한다.

 

   
 

▲ 오클라호마 시 메모리얼 뮤지엄 건너편 추모공원의 ‘눈물 흘리는 예수님’ 상

 
 


인간은 착한 존재인가, 아니면 악한 존재인가.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오랜 세월 궁리해왔지만, 앞으로도 쉽게 결론 날 문제는 아니다. 성선설을 주장한 학자나 성악설을 주장한 학자나 아무리 복잡한 논리들을 늘어놓았어도 모두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경우 공자의 말씀(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 공자 말씀하시되 본성은 서로 비슷하나 익혀 얻게 되는 성품은 서로 멀어지게 된다, 『논어』, 「양화」 제2장)에서나 어떤 해결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그렇다. 인간의 본성이 악한지 선한지 구분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일 것이다. 다만, 태어나 살아가면서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에 따라 다른 길을 가는 것 뿐 아니겠는가. 다만 착한 쪽으로 방향을 틀 경우는 대개 그 정도에 한계가 있으나, 악한 쪽으로 방향을 틀 경우 그 끝을 헤아릴 수 없고, 진행 양상 또한 극적이다. 그래서 고금의 많은 문학가들이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인간의 악마성을 그려내고자 노력해온 것이리라.


얼마 전부터 “오클라호마에 왔으니 메모리얼 뮤지엄은 봐야 할 것”이라고 어느 지인이 권유했다. 18년 전에 뉴스를 보며 ‘끔찍한 사건’이란 생각은 했으면서도 실감이 안 나 그냥 들어 넘기고 만 셈인데, 이제 그 현장에 온 만큼 안 볼 수는 없는 일. 더구나 훨씬 규모가 크고 끔찍했던 2001년의 ‘9·11 테러’로 치를 떨었던 만큼, 인간 악마성의 한계를 현장에서 느껴보고 싶었다.
이런 사건이 터지면 흔히 용의선상에 오르곤 하던 이슬람 테러단체 아닌 미국인들이 자국민들을 상대로 테러를 벌였다는 점을 누군들 쉽게 이해하겠는가. 1995년 4월 19일 오전 9시 5분, 트럭에 실려 온 2천kg 이상의 폭발물이 터져 오클라호마의 연방청사는 처참하게 망가졌고, 보육원 어린이 상당수를 포함 168명 사망에 600여명의 부상자가 생겨났다.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연방청사의 공무원들, 어린이들, 일반인들 모두 테러범들과는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평소 일면식도 없었을 이들에게 엄청난 규모의 폭탄 테러를 가한 이유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주범인 중산층 출신의 걸프전 참전용사 티모시 맥베이(1968~2001)와 종범인 테리 니콜스(1955~)는 둘 다 미시간에 근거를 둔 급진 우익 서바이벌 그룹의 멤버들이었다. 서바이벌 그룹이란 자신이나 자신의 그룹(혹은 국가)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무슨 짓이든’ 저지르는 미치광이 집단이다. 이들의 광기 앞에는 망상을 바탕으로 한 테러나 무차별의 증오만이 있을 뿐, 상식이나 이성은 있을 수 없었다. 18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건의 전말은 석연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미국사회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테러의 무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암울한 전망을 갖게 한 사건이었다.


사실 우리 같으면 빨리 그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순식간에 잔해들을 치우고, 그 자리에 보란 듯이 번쩍번쩍 빛나는 새 건물을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잠깐 뒤면 새 건물에서 일을 보는 사람들이나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났었냐는 듯 태평해져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모조리 사라진 건물터엔 희생자들의 공동묘지와 기념을 만들어 놓았고, 위에서 아래로 1/2가량 파손된 건물을 세심하게 수습한 뒤 박물관으로 재생시켜 놓은 것이었다. 사건 직전부터 발발, 수습에 이르기까지의 시간대별 전 과정과 내용, 범인의 체포와 형 집행 등 사건 처리 과정, 희생자들의 신원 및 제반 관련 정보들, 시민들과 전 세계인들의 반응, 국가의 대응 등 사건과 관련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돼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폭발의 위력에 깨지고 부서진 시멘트 벽, 엿가락처럼 구부러진 각종 철 구조물들, 소방관들의 희생적인 구조 활동, 구조견의 대견한 활약상, 상태가 심한 부상자들을 구조하다가 정작 자신은 숨을 거둔 민간인 부상자들의 영웅적 활동, 시민들의 자발적 구조 활동 참여 등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교육의 현장’이었다.


미국인들, 아니 이곳을 방문한 세계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죽은 이들을, 살아남은 이들을, 그리고 삶이 영원히 변해버린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이곳을 보고 떠나는 모든 이들은 폭력의 충격을 잘 알게 됐다. 부디 이 기념관이 평안을, 강건함을, 평화를, 희망을, 그리고 평온함을 주기를……”

 

이라고.

 

 


부끄러운 테러, 혹은 비극적 참상을 ‘교육의 현장’으로 바꿔놓을 줄 안다는 점에서 참으로 위대한 미국인들이었다. 이곳을 끊임없이 찾아와 그 때의 충격을 느끼며 자손들에게 테러의 죄악을 교육하고 있는 미국인들의 모습은 지금도 여전했다. 그 뿐 아니다. 보존된 현장을 바탕으로 밝혀지지 않은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 중이라는 그들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우리가 만약 무너진 삼풍 백화점을, 다리의 상판이 떨어져 내려앉은 성수대교를 그대로 보존해 반성과 경각의 자료로 삼을 수 있었다면, 그토록 비통한 세월호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지금쯤 우리는 선진국 대열의 앞자리에 앉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잘못의 현장을 액면 그대로 보여주며 깨우쳐야 한다. 잘못을 반복하는 것은 역사의 부조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무지와 짧은 생각으로부터 생겨나는 비극이다. 이제 우리도 큰 사건의 현장은 오래 보존해 후세를 위한 교육의 자료로 삼아야 할 때다.

조규익 (숭실대·국어국문학과)

Posted by kicho
알림2014. 11. 5. 13:59

 

 

 

 

 

저는 2013년 2학기 풀브라이트 방문학자(Visiting Fulbright Scholar)로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 역사학과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현지를 틈틈이 답사하고 체험한 기록들을 정리하여, 최근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푸른사상)라는 제목의 문화 답사기를 펴냈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토네이도의 본고장으로만 알려졌을 뿐인 오클라호마를 보물찾기라는 테마를 통해 새롭게 읽어내고자 했지요. 책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물 1: 스틸워터와 OSU, 그 안식과 탐구의 낙원

평온과 정밀(靜謐)의 오클라호마에 안착

역사학과를 찾아

학과 비서들과의 만남

카우보이 풍의 노신사, 학과장 로간 교수와의 만남

브렛 학장과의 만남

평원 속 지성의 오아시스, OSU에서

역사학과 학생들을 위한 특강을 마치고: 한국의 이미지를 새것으로!

카우보이들, 풋볼의 진수를 보여주다!

미국 대학의 졸업식과 감동: 왜 우리는 이렇게 하지 못하는가?

안식과 힐링의 낙원 스틸워터에서

 

보물 2: 인디언, 인디언 역사, 인디언 문화

오클라호마와 인디언 부족들

대초원에서 만난 오세이지 인디언들

체로키 후예의 집을 찾아 패러다임 전환의 증거를 찾다

오클라호마 동쪽에서 체로키 인디언들을 만나다!

체로키어오시요(Osiyo)’와 우리말‘ (어서) 오세요!’의 정서적 거리

스틸워터의 이웃동네에서 만난 판카 인디언들

길 가다 우연히 만난 아이오와 인디언 족

지혜로운 치카샤 족, 인디언 사회의 자존심

촉토 족의 뿌리와 투쟁, 그리고 예술

촉토 족의 탁월한 교육열, 풍부한 역사 자취

놀라운 세미놀 인디언들의 역사와 문화의식

카이오와, 아파치, 코만치, 그리고 대평원의 서사시

카이오와 족의 삶과 예술

무서운 코만치에서 상식의 미국인으로!

크릭 족의 꿈과 현실을 찾아

오클라호마 밖의 인디언: 뉴멕시코의 앨버커키와 스카이 시티, 그리고 푸에블로족

암굴 속에 서린 생존 의지‘, 반델리어 국립 유적지와 푸에블로 족의 말 없는

외침

부드러운 어도비, 완강한타오 푸에블로인디언들

 

보물 3: 미국의 길, 66번 도로(Route 66)의 낭만

미국에서 길을 찾으며: 우리도 스토리가 있는 길을 한 번 만들어 봅시다!

작은 일탈을 꿈꾸는 66번 도로, 그 낭만과 허구

엘크 시티와 국립 66번 도로 박물관 단지

클린턴 시티와 ‘66번 도로 박물관

엘 르노 시티와 캐나디언 카운티 뮤지엄

66번 도로에 살아 있는 역사의 공간, 유콘 시티

누구 혹시 이 소녀를 아시나요?: 유콘에서 만난 우리들의 누이

한국전 참전용사의 아들 리차드 카치니와 유콘 참전용사 박물관

오클라호마의 숨은 별: 거쓰리 시티/ 66번 길의 경이로운 옛 건축물: 아카디아 라운드

 

 

 

 

 

 

보물 4: 박물관과 미국 역사

서부 개척시대 미국의 소리: 국립 카우보이와 서부유산 박물관

예술로서의 역사, 역사로서의 예술: 털사의 길크리스 박물관에서 길을 잃다!

인간의 악마성을 깨우쳐 준 공간: 오클라호마 시 메모리얼 뮤지엄
오클라호마 밖의 박물관: 예술과 역사의 도시 산타페와 박물관들

 

보물 5: 열정과 도전의 대학인들

미국의 중남부에서 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는 젊은 학자: 용타오 두 교수

학자와 목자의 삶: 한인 교수 장영배 박사

빛나는 한국학생 브라이언

한반도에 관심이 큰 소련 역사 전문가 림멜 교수

탁월한 젊은 영어 교육자 제이슨 컬프

역사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온 프레너 교수

 

보물 6: 아름다운 자연, 안식의 낙원

부머 호수에서 찾은 마음의 고요

리틀 사하라에서 되찾은 고향의 꿈

대초원에서 멋진울음 터를 발견하고

낙원 속의 산책로: OSU 크로스 컨트리 코스의 안식과 힐링

 

 

 

 

 

***

일반적으로 미국은 역사가 짧고, 넓은 땅에 비해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역사 문화유적의 답사라는 여행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공간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백인들의 이주 후 200여년, 인디언으로부터 따지면 그보다 훨씬 더 긴 역사가 이어져 온 땅이고, 그에 따르는 문화유산들이 적지 않은 곳입니다. 더구나 경쟁력으로 세계에서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 미국의 대학들이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도시문화를 생각하면, 미국은 유럽과 또 다른 차원의 매력을 지닌 지역입니다. 무엇보다 39개에 달하는 인디언 부족의 보호구역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오클라호마는 대초원(Tall Grass Prairie)과 대평원(The Great Plains)등 풍부한 목초지와 함께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원유 등으로 오랜 동안 풍요를 구가해온 지역이기도 합니다. 풀브라이트(Fulbright) 재단의 지원을 받아 이곳의 대표적인 교육기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Oklahoma State University)’에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만. 이곳에 오자마자 연구 과제 외에 이 지역의 역사적문화적 의미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제가 관심을 가졌던 대상은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였습니다. 저는 사람, 자연, 도시, 제도, 역사, 문화 등 감고 있던 마음의 눈을 뜨게 한 모든 것들이 보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간 모르고 지내온 것들이 그의 편견을 바로잡아 주었기에 보배로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디언들과의 만남은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인종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백인들에 의해 고통을 받아온 인디언이야말로 역사의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이라는 점에서 가치 있는 보물이었던 것입니다. 서부영화나 백인들에 의해 저술된 책들을 통해 제 마음에 뿌리 내린 왜곡된 인디언의 이미지가 비로소 바로잡혀지게 된 점을 가장 곰지게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배자들이 펼쳐 온 자기 합리화의 억설(臆說)에 의해 일그러진 인디언들의 실체를 삶의 현장에서 바로잡음으로써 내면에 고착된 편견을 해소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 입장에서 인디언에 대한 발견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오클라호마 주립대학을 통해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이 바로 미국의 경쟁력임을 깨닫게 된 점입니다. 대학의 역사와 현실을 통해 학생들이 마음껏 공부하고 체력을 단련하며 단합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치밀하게 운영되는 미국 대학의 장점을 읽어낸 것은 제 글 내용의 핵심적인 축입니다.

인디언이나 대학의 힘에 대한 발견과 함께 오클라호마나 스틸워터의 깨끗한 자연으로부터 얻게 된 힐링의 감동은 이 책 내용의 또 다른 축입니다. 부머 호수, 리틀 사하라, 산책로로 쓰이고 있는 크로스 컨트리 코스 등 잘 보존된 자연이 인간의 내면적 평정이나 행복을 위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체험적으로 진술하고자 했습니다. 제 글의 에필로그 가운데 마무리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풀브라이트 학자로서의 가볍지 않은 사명을 짊어지고 오긴 했지만, 연구 외

에 이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달뜨게 했다. 오클라호마 사람들과의

만남, 인디언의 역사나 문화와의 만남, (특히 Route 66)과의 만남, 아름답고

깨끗한 환경과의 만남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했던 스틸워터는 문만 닫으

면 절간처럼 조용해지는 공간이었다. 맑은 공기 속에 한 발만 나서면 온갖 새

와 나무들이 그들먹한 낙원이었다. 그래서 기대 이상의 힐링을 체험하며 마음

속의 온갖 찌꺼기들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이라고 어찌 사람들 사

이의 갈등과, 그로부터 일어나는 불행들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유목민들이

아름다운 꽃향기와 산토끼의 해맑은 눈빛, 그 지순(至純)한 추억으로 광풍 몰

아 치던 수많은 밤들의 괴로움을 지우듯,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걸러내는 능력

이야말로 지혜로운 인간의 전유물 아닌가. 사실 짧지 않은 6개월 동안 걸러내

야 할 단 하나의씁쓸함도 만나지 못한 나였다.

                                                          ***

스틸워터에서 화려한 행복보다는 작고 따스하며 담백한 즐거움 속에 거의

완벽한 힐링의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제 맛있고 영양가 풍부한 풀들이

많이 자라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옛 고향으로 노마드의 소떼를 몰고 재입사(

入社)하기로 한다.”

 

그곳에 가보지 않은 사람도 책을 펼치기만 하면 오클라호마와 스틸워터의 감동과 아름다움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느껴지리라 생각합니다. 강호제현의 질정(叱正)을 고대합니다.

 

<<인디언과 바람의 땅 오클라호마에서 보물찾기>>, 푸른사상, 2014.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0. 17. 22:01

[서평] 조규익, 조선조 악장 연구(새문사, 2014)

 

 

 

본질 탐구로 길어낸 악장 연구의 새로운 이정표

 

 

 

 

 

                                                                             박수밀(한양대 국문학과)

 

 

1.

조규익 교수의 조선조 악장 연구(2014)는 저자가 수십 년간 줄기차게 매달려온 악장 연구의 3부작 완결판이다. 악장은 고전시가에서 자립적인 위상을 지닌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연구하는 학자는 극히 적다. 연구 초기 장르상의 귀속이 애매했을 뿐더러 특정한 시기에만 나타났다 사라진 장르라는 점, 소수 계층의 욕망을 대변한 승리자의 노래라는 관점이 작용한 결과이다. 저자가 지적해 왔듯이 악장은 아부문학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진 결과 학자들의 외면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3권의 악장 연구서를 간행해 왔다. 첫 연구서인 선초악장 문학 연구1990년도에 간행되었으니 최소한 족히 삼십년 이상을 악장 연구에 매달려온 셈이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삼십 년 이상 지속적으로 꾸준한 성과를 보여주는 학자도 드물거니와 소외된 문학에 대해 지속적인 애정을 쏟는 일도 쉽지 않다. 기왕이면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영역에서 주목받는 글을 쓰고 싶은 것이 연구자들의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저자는 주위의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그다지 건질 것이 없어 보이는 악장 연구에 매달려왔다. 이 집념이 묘한 흥미를 끈다. 저자는 성산학술상, 도남국문학상, 한국시조학술상 등의 이력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고전시가에서 탁월한 연구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 학자가 아니던가. 저자는 이번 저술이 25년 악장 연구사에 대한 마무리라고 고백했다. 과연 오랫동안 악장 연구를 진행하면서 저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수십 년간 한 우물을 판 노고는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연구의 햇수와 연구의 질은 별개의 문제이므로 연구서가 얼마만큼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지, 저자의 문제의식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꼼꼼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2.

악장에 대한 본격적인 저자의 첫 연구서라 할 선초악장 문학 연구(1990)은 선초 악장의 형성 및 장르적 성격을 밝히고 악장의 국문학 장르상의 위상에 대해 논한 저술이다. 악장에 대한 학계의 인식이 부정적인 상황에서 악장의 위상을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선초 악장 연구서의 바이블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로부터 9년 뒤엔 조선조 악장의 문예미학(2005)을 간행하여 악장의 가치와 전개 양상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었다. 이 책에서는 조선조 악장의 현상과 미적 본질, 조선조 악장과 왕조의 현실, 개인의식과 집단이념의 조화, 조선조 악장의 흐름 등을 밝혔다. 저자는 종합예술이라는 관점에서 악장의 독자적 미학을 치밀하게 탐구, 악장에 대한 편견과 오류를 해소하고 악장을 경세의 문학으로 끌어올렸다.

이번에 펴낸 조선조 악장 연구는 악장 연구사를 마무리 짓는 세 번째 연구서이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기존 연구에 새로운 보완의 시각을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 그 동안의 악장 연구에 대한 저자의 성과를 종합하고 아악악장과 향당악악장에 해당하는 개별 악장들의 성격과 주제의식에 대해 분석함으로써 악장의 연구 폭을 크게 확장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악장연구를 통해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고전시가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을 제안하고 있다.

먼저는 연구서의 구성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었다. 5부가 총론에 해당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는 4부로 이루어진 셈이다. 1부에서는 조선조 악장의 성격을 밝혔는데, 저자는 조선조 악장이 지속과 변이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이 지속인가? 고려조 악장의 음악적 측면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무엇이 변이인가? 조선왕조라는 특정 집단의 이념을 강조한 새로운 내용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곧 조선조 악장은 고려조에서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아악이나 아악악장들과 함께 고려조에서 수용한 삼국 이래 속악의 악장들이 조선조에서 새롭게 제작된 노래들과 합쳐진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악장을 크게 아악악장과 향 당악 악장으로 나눈다. 각종 제향 악장이 전자라면 각종 연향 악장은 후자에 속한다. 2부와 3부는 아악 악장과 향 당악 악장의 성격을 다룬 것이다. 2부의 아악악장에 대해서는 악장의 중세적 문명론의 표준과 보편성의 확보라는 관점에서, 3부의 향, 당악 악장은 조선 왕조의 문화적 독자성과 정체성의 확보라는 관점에서 살폈다. 아악악장은 종묘제례, 문묘제례, 사직제례, 선농제례 등 제례에 쓰인 악장을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조선조는 문묘제례와 종묘제례를 통해 왕조의 정치적 이념적 정당성을 주장하고 왕조 존립의 보편적 가치와 당위성을 선양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시경>, <주역> 등에서 악장의 주요 문구나 모티프를 직접 차용해 악장으로 쓰거나 혹은 선행 악장들의 구절이나 모티프 등을 차용해 선초 악장에 사용해 왔다. 곧 아악악장을 통해 동아시아적 중세적 문명론의 표준과 보편성을 확보하려 했다는 것이다. <문선왕 악장>, <사직악장>, <선농악장> <선잠악장>, <풍운뇌우 악장>을 분석하여 이러한 주장에 대한 논거를 확보한다.

이에 비해 3장의 향 당악 악장에서는 조선조 악장의 독자성을 살핀다. <문소전 악장>, <석전음복연 악장>, <창수지곡 악장>, <경근지곡 악장>, <오륜가>, <봉래의 악장> 등을 다루었다. 당악 악장에서는 우리의 고유한 노래 장르를 악장으로 수용함으로써 우리만의 독자적이고 특수한 미의식을 담아냈다고 주장했다. 이들 노래에서 발견되는 텍스트의 구성이나 주제의식의 실험성은 아악악장과 구별되는 지점이며 악장이 고전시가사 전개에 큰 기여를 한 점이라고 보았다.

4부는 다른 각도에서 본 조선조 악장의 본질적 속성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정재 악장에 나타나는 송도 모티프와 선계 이미지의 연원을 밝힌 대목이 흥미롭다. 이 외에도 저자는 악장에 대한 북한문학사의 관점을 살펴본다. 북한의 연구자들은 악장을 아부문학이나 무조건적 송축문학으로 배척해온 남한 학자들과 입장을 같이 해오고 있는데 북한 역시 악장을 백성들의 문화생활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무가치하다고 폄하한다는 것이다. 경직된 이념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악장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연구서는 악장의 문학성을 다룬 것이 아니라 악장의 본질과 성격에 대한 탐구이다. 양식의 문학성을 파고든 것이 아니라 양식을 둘러싼 맥락에 주목했기에 문학 연구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저술의 가치는 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악장 연구를 둘러싼 저자의 궁극적인 문제의식, 주제에 접근하는 남다른 방식, 실사구시에 입각한 꼼꼼하고 치밀한 논증의 결과를 들여다보노라면 이 저술이 갖는 의미와 무게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어쩌면 이 연구서의 진정한 가치는 고전시가를 접근하는 시각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보여준데 있을지도 모른다.

 

 

3.

저자는, 텍스트와 콘텍스트 및 상호텍스트에 대한 면밀한 고찰 없이는 고전시가론이나 고전시가사 혹은 국문학사는 완벽을 기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연구서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텍스트 측면은 관찬문헌인 조선조의 악서들에 지금 고려속요로 불리는 고려의 악장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고 콘텍스트 측면은 악장은 조선과 고려의 궁중 무대예술이라는 점이다. 상호텍스트 측면은 악장은 당악을 비롯한 외래 음악이나 공연과의 연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악장은 이와 같은 외적 맥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그 본질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문학은 그 시대의 사회, 문화, 정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에서 나온 발언이라 본다. 지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지식은 순수하고 객관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 구조와 공동체 구성원에 따라 의미를 형성하고 바꾸어간다. 곧 지식은 맥락과 관계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을 둘러싼 맥락에 주목하는 저자의 관점은 충분히 설득력 있으며 답보 상태에 빠진 고전시가 연구 방법론에 새로운 활로를 뚫어줄 것으로 기대가 된다.

다만, 말했듯이 작품의 문학성 자체에 대한 탐구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받을 수 있겠는데, 가만히 반추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저자는 악장의 본질을 제대로 간파하고 악장 문학에 접근하는 가장 올바른 방향을 잡아낸 것이다.

조선조 악장은 국가의 공식 행사에서 사용되던 악사(창사)이다. 저자는 말하길, 악장은 정재라는 틀 안에서 음악과 춤이 결부될 때 비로소 그 생명성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다고 한다. ‘고려조에서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아악이나 아악악장들과 함께 고려조에서 수용한 삼국 이래 속악의 악장들이 조선조에서 새롭게 제작된 노래들고 합쳐진 것이 조선조의 음악이고 악장’(45)이라는 것이다. 악장이 가(), (), ()의 예술이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무대예술인 정재에서 가창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악장은 춤까지 관여되어 복잡한 내포를 지닌 언어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악장을 문학적으로만 재단해온 지금까지 연구는 악장의 본질을 왜곡시켰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악장이 상대적으로 문학성이 쳐진다는 평가를 받아왔다면 이는 악장을 악장답게 다루지 않은 데서 초래된 결과였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접근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악장에 대한 저자의 접근 방식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악장이란 장르를 문학성이라는 프레임으로 접근하는 것이, 저자에게는 오히려 왜곡의 위험성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악장의 본질은 텍스트를 둘러싼 외부 맥락과의 관련 아래 탐구해야 한다. 악장의 본질, 그것은 가무악이 어우러진 궁중의 정재이다. 노래로서의 악장이 실현되는 사회 문화적 맥락을 따져보아야만 악장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접근 방식이 얼마나 의미 있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의 관점이 정채를 발하는 장면은 정재 악장에서 확인되는 송도 모티프와 선계 이미지의 연원과 지속 양상을 밝힌 곳에 있다. 조선조 악장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왕에 대한 송축이나 송도를 통한 왕조 영속의 당위성 선양이다. 당악정재를 살펴보면 왕을 송축하기 위해서 신선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 당시 당악정재들에 등장하는 중심 배역은 선모나 신신들이었고 그들의 창사나 담화에는 송도 모티프가 담겨 있다. 신선으로 분장하여 왕에게 드리는 송도의 말이 바로 송도시자이자 선어였다는 것이다.

이 점을 논증하기 위해 저자는 동동정재를 살핀다. 고려사악지에는 동동에 대해 동동 놀이는 송도지사가 많은데 대개 선어(仙語)를 본떠 마든 것이다[動動之戱 多有頌禱之詞 盖效仙語而爲之]”라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송도와 선어(仙語)는 동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관건이 되는 까닭에 많은 학자들이 이 뜻을 밝히기 위해 다양한 주장을 펼쳐 왔다. 중국 전래의 도교 사상과 관련시키거나, 화랑, 풍류 등에 연원을 둔 무속과 같은 연장에서 이해하거나 팔관회 때 상연되는 백희가무에서 불린 노래로 보기도 했다. 신선 기녀와 연관 짓거나 무격(巫覡), 우인(優人)의 말로 보기도 했다. 그야말로 각자 입론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는데, 이에 대해 저자는 선학들이 동동을 둘러싸고 있는 콘텍스트로서의 속악정재나 속악정재의 표본으로 기능했을 당악 정재에 시선을 주지 못한 까닭에 송도지사와 선어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364) 노래의 주제적 측면을 지칭한 송도지사와 표현적 측면을 지칭한 선어 모두 동 시대의 당악정재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그런 표현법이나 주제의식은 당대 궁중에서 성대하게 공연되던 당악 정재의 창사를 본뜬 것들이다. 선어는 바로 이들 정재에서 서왕모 등 신선으로 분장하여 송도의 노래를 가창하던 여기(女妓)들의 창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곧 헌선도(獻仙桃), 수연장(壽延長), 오양선(五羊仙) 등 당시에 성행하던 당악정재들 속의 선모(仙母)를 비롯한 신선(神仙)들이 잔치 자리의 좌상객인 임금에게 바치던 '송도(頌禱)의 말'이 바로 선어’, 즉 신선의 말이라는 것이다.

악장의 본질을 간파하고 상호 텍스트적 상황에 의거하여 송도지사와 선어의 의미를 밝힌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선어에 대한 제 학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저자의 글을 읽었음에도 이 주장을 비판하지 못한 채, 각자의 입론을 만들어 제각기 주장을 펼치고 있다. 고려가요를 악장의 한 형태로 보려는 저자의 생각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저자의 주장을 극복할 수 있는 논거를 대거나 저자의 주장을 수용하거나 하는 엄정한 학문 태도가 필요하리라 본다.

 

 

 

 

 

 

 

 

4.

본 저술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집요하고도 치밀하게 악장의 본질과 성격을 탐구함으로써 별 문학성이 없어 보였던 양식을 의미 있는 양식으로 끌어올린데 머물지 않는다. 저자의 궁극적 시선은 고전시가사와 고전문학사를 재편하는 데로 향한다. 저자는 조선조 악장의 존재나 본질을 도외시할 경우 아무리 현란한 고전시가 장르론을 펴더라도 공허할 뿐이며, 국문학사 기술의 합리성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과연 이러한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고려의 노래들은 대중가요로서의 속요이기 이전에 궁중악으로서의 속악가사이다. 곧 고려 노래의 1차적 분류 범주는 악장이 된다. 그러므로 고려가요는 1차적으로는 악장론을 거쳐야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조선조 악장의 콘텍스트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고려가요의 텍스트를 고려의 시대적 속성에 맞추어 놓고 고려시대의 속요라는 이름으로 재단해본들 결과가 신통할 리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고려가요가 악장으로 수렴된다면 의당 고려가요는 악장이라는 틀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고려가요의 성격과 위치에 대한 재검토가 요청된다. 조선조의 시조와 악장을 다룬 시조와 궁중악장의 관계장을 읽노라면 악장과 시조 간의 새로운 관계 설정도 필요해 보인다.

또 악장의 본질이 문학이 아닌 정재로서의 성격에 있다면 악장과 관련되는 중세 고전시가 연구의 패러다임이 문화론이나 예술론 차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고전시가를 문학과의 연관 아래서만 기술하려는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음악 무용 등의 예술 및 당대 사회 문화와의 관련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고전시가의 문학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시가 연구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고 장르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문학을 고립적으로 가두지 않고 여타 분야와 폭넓게 소통하면서 통섭하려는 오늘날의 시대적 흐름과도 궤를 같이한다.

악장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치열한 노력과 성과가 기성과 관행을 타파하고 새로운 변화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준다는 점이 본 연구서의 진정한 미덕이자 가치라고 생각한다. 과연 저자의 바람대로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새롭게 추동될 수 있을 것인가? 본 연구서의 성과와 제안을 비판하든 극복하든 간에, 애써 외면하기보다는 저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주고 활발한 토론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저술에서 보여주는 꼼꼼한 논증과 묵직한 문제의식은 저자가 학계에서 보여준 성실함과 무게에 값한다고 본다. 삼십 여년에 걸쳐 남들이 관심두지 않은 길을 뚝심 있게 밀고나간 저자의 학식과 공력이 조선조 악장 연구에 오롯하게 담겨 있다.

 

  *이 글은 <<한국문학과 예술>> 14집(한국문예연구소, 2014)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0. 9. 11:32

 


고려극장 창고에 쌓인 연극대본들

 

 


고려극장 창고에 쌓인 연극대본들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심청전의 포스터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상속자들의 포스터

 

 

 

 

치원(致遠)의 성과

-조규익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2013)을 읽고-

 

 

                                                                                                                            이경재(숭실대 국문과 교수)

 

 

 

1. 학문이 다다른 곳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읽으면서, 제갈공명이 쉰 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여덟 살이었던 아들에게 남긴 계자서가 생각났다. 계자서의 핵심 내용은 주지하다시피 담박명지(淡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라는 여덟 글자로 압축된다. 이 중에서도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치원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만든다. ‘먼 곳에 도달한다는 뜻의 치원은 남들보다 크고 무겁고 많은 성취를 이룬다는 뜻이다. 평생 한 동네에 살면서 산 너머의 이웃 동네를 둘러보는 일도 어려웠을 옛사람의 관념을 드러내는 이 말은, 자신이 갈 방향을 뚜렷하게 정한 채 그 길을 꾸준하게 가면 마침내 먼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저서야말로 필자가 초인적 노력의 결과 다다른 학문적 먼 곳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은 꼴호즈나 솝호스 등 CIS 지역 고려인들의 생산 및 생활 공동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자생적 소인예술단과 고려극장으로 대표되던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살펴보았다. 소인예술단은 꼴호즈 등 집단농장에서 운영하던 아마추어 단체이고, 전문예술단은 국가에서 설립 운영하던 예술인 집단으로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에서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창립되어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고려극장이 유일하다. 구소련 체제의 대중예술은 전문예술과 소인예술의 분담과 협업으로 지탱되어 왔다. 인적 차원에서나 예술적 차원에서 전문예술단의 근원은 소인예술단에 있었으나, 상호 보완의 역할을 수행하는 단계에 이르자 양자는 구소련의 공연예술을 완성시키는 두 축으로 정립되었다.

 

원래 소인예술단의 경우 연극, 노래, 춤 등이 주된 장르였고, 전문예술단인 고려극장의 경우 연극 전문으로 출발했다가 공연예술로서의 노래와 춤이 추가되었다. 고된 생산의 현장에서 괴로움을 달래준 동시에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시켜 준 무명 예술인 집단이 소인예술단이었고,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민족의 애환을 대신 표출함으로써 고려인들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킨 예술인 집단이 전문예술단으로서의 고려극장인 것이다.

 

고려극장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당시 극작가들은 민족정신의 유지와 확인이라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고전작품들을 연극의 소재로 많이 다루었다. 창작극 외에 그들이 집착한 분야는 고전의 각색이었다. 고전의 각색은 민족정신이나 민족어의 보존과 전승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다. 결국 고려극장은 고려인들의 정체성을 함양시켜온, 일종의 민족 정체성 고양의 메카역할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수많은 극작가들을 등장시켜 활약하게 한 일은 고려극장의 가장 빛나는 공적이다. 그 가운데 극장의 초석을 놓은 인물은 연성용과 태장춘이었고, 최고의 연극미학을 보여준 인물은 한진이다. 한진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집요한 바가 있어,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 발간된 거의 동시기에 <<한진의 삶과 문학>>(글누림, 2013)이라는 책을 김병학 선생과 공저로 출판하였다.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

 

 

 

 

2. 지속과 변이

 

자료는 말한다. 이 명제는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자료는 연구자의 문제의식과 만났을 때, 비로소 고유의 목소리를 내는 까닭이다. 이만한 두께의 단일저서가 그에 걸맞은 하나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는 힘들다. 이 작품이 고려인들의 문학을 바라보는 기본 관점은 지속과 변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인들은 원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타율적 디아스포라들이었다. 현실적으로는 구소련 혹은 중앙아시아 국민의 일원이었고, 정서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이중적 존재들이었다. 구소련 시절에는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공화국의 독립 이후에는 공화국의 주도 민족에 의해, 힘들게 찾아온 할아버지의 나라에서는 고국의 사람들에 의해 3중의 타자 체험을 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현실적으로는 구소련 혹은 중앙아시아 국민의 일원이었고, 정서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두 방향으로부터 상반되는 인력을 느끼는 존재들이었다. 노래나 춤을 통해 표출되는 이념 지향적 의식이나 디아스포라 의식은 상반되는 인력에 상응하는 주제의식이다.

 

스탈린은 러시아 중심의 언어 예술 정책을 폄으로써 고려인을 포함한 비 러시아인들은 예술의 창작과 향유에서 큰 난관에 봉착하였다. “스탈린의 폭압적인 동화정책에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민족의 표지를 내려놓”(5)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려인들은 자민족 중심의 전통 형식 고수라는 구심력과 소련의 사회주의 추구라는 원심력을 적절히 조정한 미학을 고안했다. 그로부터 나온 것들이 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노래들의 음곡에 사회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노랫말을 올려 부른,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들이다. 이를 통해 집단주의라는 사회주의 통치이념의 폭력적 군림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민족 정서의 실낱같은 생명만큼은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언어와 문화의 동화정책을 밀어붙인 스탈린 체제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이 우리 전통예술의 한 부분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규정 덕분이다.

 

고려인들의 노래는 우리나라 전통 민요의 운율과 사설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경우도 있고, 노랫말을 러시아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맞게 새로 만든 것들도 있다. 전자를 지속의 측면에서 후자를 변이의 측면에서 각각 설명할 수 있다. 지속의 측면은 고려인 혹은 한인이라는 민족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한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정서적 형태적 전승소이며, 변이의 측면은 적응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조정될 수밖에 없는 가변적 요소다. 이처럼 고려인들이 갖고 있던 전통 노래의 관습적 레퍼터리는 새로운 정착지의 생경한 분위기와 충돌을 일으키며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조정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고려인들의 노래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문화 접변 현상이다. 고려인들이 접변을 통해 새로운 공연예술을 창출할 수 있었다면, ‘디아스포라의 현실과 새로운 이념에의 적응이라는 복잡한 원리가 그 근저에서 작동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3. 학문적 가치와 필자의 노력

 

이상으로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의 기본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 작품이 던져주고 있는 중요한 논점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제목에도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는 한글문학이라는 개념이다. 보통 국문학자는 국문학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며, 이때의 국문학이 한국인이, 한국어로,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문학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한글 창제 이전의 문학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것은 아니지만,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국문학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해외동포들의 작품을 과연 국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 실정이다. 조선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재일교포들의 일본어 작품이나,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작가가 쓴 영어 작품이나,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교포의 한국어 작품 등을 과연 국문학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 판별하는 것은 뜨거운 난제일 수밖에 없다.

 

사실 언어, 국적, 사상과 감정이란 세 가지 요소는 일종의 형식논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중요한 것은 공동운명체로서 느끼는 실감일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오래 전에 한반도를 떠나 고려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창작한 문학을 과연 국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을 수밖에 없다. 연구자는 이러한 난관을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문학을 한글문학으로 칭하는 것이다. 조규익 교수는 이 저서에서 각지의 소인예술단들과 고려극장으로 대표되는 전문예술단이 지난 시절 만든 한국어 노랫말과 극본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백여 년 전에 한반도를 떠나 멀고 먼 중앙아시아에서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산 사람들의 문학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이다. 이것은 첫 번째 문제와도 관련된다. 이 고려인들을 우리와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오만일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고려인들을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말하는 것은 섣부른 편견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난 시절 고려인들의 문학을 우리 것이자 동시에 우리 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는 어찌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섬세한 관점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능한 입장을 저자는 누구보다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다. 이 저서의 서론격인 1부의 마지막은 조속히 청산해야 할 중심부의 시각으로 우리 정서의 맥을 힘겹게 이어 온 변방의 정서적 산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려는 것이다.”(36)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이 문장은 고려인 문학을 접하는 한국인 연구자의 솔직하고도 곤혹스러운 관점을 잘 드러낸 고백으로 읽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무래도 고려인 문학은 우리 것이라는 입장에 한층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의 전통노래를 발전적으로 지속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해외에 우리의 문화영토 혹은 정신적 영역을 화복해 나가야 한다는 관점에서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108)는 문장에서 고려인=대한민국인이라는 관점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저서의 마지막 문장인 “‘갈 짓 자행보 속에 마구 변해버린 또 다른 중심부 한반도. 그 중심부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주변부의 오늘과 내일을 바라보며, 우리 스스로 성찰적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그들을 위해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356)라는 격정적인 문장에서도 중심부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주변부로서의 고려인들을 사유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저서에 담겨 있는 학문적 가치와 필자의 노력에 대해서이다. 이 저서에서 조규익 교수는 소인예술단 공연 때 불리던 국문노래의 존재양상과 이념, 고려인 민요의 전통노래 수용 양상, 고려인 한글노래에 나타난 디아스포라의 양상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소인예술단의 한글문학이 지닌 본질을 찾아보았고, 1932년 고려극장 창립 이래 최근까지 공연된 연극들(200여 편)을 개관한 다음 고려인 사회 연극의 초석을 놓은 연성용, 태장춘의 연극세계와 함께 구소련 고려인 문단에서 최고의 미학을 성취한 한진의 연극을 분석하였으며, 연극무대 혹은 그 바깥에서 가창된 노래들까지 살펴봄으로써 고려극장의 한글문학이 지닌 본질을 밝히고자 했다.

 

이상의 내용 중에서 어느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느 것 하나 책상머리에서 자판 몇 번 두드려 얻을 수 있는 자료에 바탕한 것이 없다. 거의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 직접 발로 뛰며 얻은 자료를, 별다른 선행 연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해 나가며 이룩한 업적인 것이다. 후학으로서는 감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또한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저자가 기울인 공력은 후학들에게 많은 귀감이 된다. 발로 뛰며 쓴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각종 사진으로 책의 여러 부분이 채워진 것이 그러하고, 전 세계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 뒤에 15페이지에 이르는 영문 초록을 붙인 것이 또한 그러하다. 조규익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은 앞으로 고려인 문학을 연구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명저이다.

 

“<<한국문학과 예술>> 12,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2013. 9. 30.”에서 퍼옴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8. 4. 20:08

 


무스코기 초입의 이정표

 

 


무스코기 초입에서 만난 인포메이션 센터

 

 


아미쉬 레스토랑의 표지판

 

 


아미쉬 레스토랑의 정갈하고 소박한 음식

 

 


아미쉬 레스토랑의 내부

 

 


아미쉬 버터 및 치즈 광고판

 

 


무스코기 네이션의 문장(紋章)

 

 


연합 인디언 네이션의 문장

 


무스코기 네이션의 국기 

 

 


삼강박물관(The Three Rivers Museum)에서 큐레이터들 및 보안관과 함께

 

 


보안관의 현란한 '권총 돌리기'

 

 


삼강박물관의 생활사 자료

 

 

 

 

크릭(Creek) 족의 꿈과 현실을 찾아

 

 

 

2014224일 아침 8시 오클라호마시티 윌 라저스 공항[Will Rogers World Airport]’ 발 유나이티드 아메리카 항공편으로 시카고 오헤어 공항으로 이동, 한국행 아시아나에 몸을 실으면 미국 생활은 끝이었다. 그래서 이 땅에 남은 미련을 남김없이 태우고자 21-22일 크릭 인디언들의 집거지를 거쳐 출발 전날 오클라호마 시티에 입성하기로 했다. 무스코기(Muscogee)와 오크멀기(Okmulgee)에 모여 산다는 크릭 인디언들을 만나기 위해 털사(Tulsa) 방향의 동쪽 우회로를 택하기로 한 것이다.

 

체류하는 동안 오클라호마에 거주하는 39개 인디언들 가운데 겨우 10여개 부족들을 접한 우리였다. 10여개 부족들 가운데는 이른바 문명화된 다섯 부족들[The Five Civilized Tribes: 체로키(Cherokee), 치카샤(Chickasaw), 촉토(Choctaw), 크릭(Creek/Muscogee), 세미놀(Seminole)]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오클라호마 동쪽의 크릭은 마지막 코스로 남겨 두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인들은 이 다섯 부족들을 ‘Civilized Tribes’로 부르고 있었으나, 그동안 우리는 그 말에 대해서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civilized’문명화된으로 번역할 경우, 그동안 우리가 만난 여타의 인디언들은 뭐란 말인가. 우리가 보기에 그들 역시 이미 문명화된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훌륭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를 전공하고 있는 OSU 역사과의 모제스(Dr. L. G. Moses) 교수에게 물었더니, 이 다섯 부족들이 식민시대나 초기 미 연방시대에 앵글로 색슨 계열 정착자들의 생활방식이나 관습을 수용, 그들과 선린관계를 맺어오면서 문명화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라고 했다. 내가 그 말을 미국화로 바꾸어 이해해도 무방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221. 겨울날씨치곤 쨍쨍하게 맑고 온화했다. 이 땅을 떠나기로 되어 있는 24일까지 만 3. 하룻밤은 인디언 구역에서, 나머지 이틀 밤은 오클라호마시티에서 보내기로 했다. 짐가방들을 트렁크에 때려 실은 우리는 렌터카를 몰고 학교를 한 바퀴 돈 뒤 177, 412, 44번 하이웨이 등을 번갈아 타면서 무스코기로 달렸다. 털사로부터 한 시간쯤이나 달렸을까. 무스코기 초입의 길가에 자그마한 관광안내소[Muskogee Tourist Information Center]가 나타났고, 그 건너편에 참한 식당 하나가 숨듯 서 있었다. 이곳에서 아미쉬 레스토랑[Amish Restaurant]’을 만나다니! 행운이었다. 전통 기독교 교회공동체 아미쉬. 메노파(Mennonite) 교회들과 비슷하지만 다른 집단이다. 그들은 스위스 아나뱁티스트(Anabaptist)  ‘재세례파(再洗禮派)’[16세기 종교개혁의 급진적 좌파 운동 집단으로서 유아세례를 부정, 죄와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성인세례를 받는 것만이 타당한 세례라고 보았음]와 근원을 공유한다. 단순한 생활, 검소한 복장, 문명과 기술의 이기(利器) 등을 기피하는 그들이었다. ‘목마른데 옹달샘 만난 격으로 여기서 그들이 운영하는 식당을 만나게 된 것. 앤틱 풍의 인테리어가 약간은 생소했으나, 벽면 가득 옛날 장식품들이 편안해 보였고 이들만의 풍미(風味) 또한 일품이었다.

 

다시 관광안내소로 돌아와 체구 좋은 중년 여성 자원봉사자의 친절한 설명을 들었다. 무스코기라 지칭하기도 하는 크릭 족은 오클라호마 주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현재 이곳 외에 앨라배마조지아플로리다 등에도 분포되어 있었다. 우리가 이미 만나 본 세미놀 족 역시 이들처럼 무스코기 어[크릭 어]를 사용하는, 가까운 부족이었다. 원래 무스코기 족은 오늘날 테네시조지아앨라배마 주에 걸쳐 흐르는 테네시 강을 따라 건축물을 쌓았던 미시시피 문명의 후예로 추측된다. 미시시피 문명을 이룬 사람들 가운데 최대의 공동체는 카호키아 토성터[Cahokia Mounds]’로부터 나왔으리라 추정되는데, 이미 그 시대에 계급화된 사회나 상속이 이루어지던 종교적정치적 집단이 생겨나 미국의 중서부와 동부를 800년부터 8세기 가까이 지배하고 있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무스코기 족이 바로 그 후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초기에 개척자로 등장한 스페인 사람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고, 그 가운데 탐험대를 이끌고 나타난 스페인 사람 데소토와 마빌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데소토의 탐험대가 퍼뜨린 전염병으로 많은 인디언들이 죽어 인구가 급격히 감소되었고, 결국 미시시피 문명도 붕괴되기에 이르렀으나, 살아남은 인디언들 가운데 무스코기 어를 쓰는 사람들이 무스코기 부족 혹은 무스코기 부족 연합으로 다시 뭉치게 된 것이다.

 

1866년 새 정부를 세운 크릭 족은 오크멀기를 수도로 정했고, 1867년에 세운 의사당을 1878년엔 더 크게 확장했다. 우리가 돌아본 크릭 네이션 의사당은 국가의 역사적 랜드마크로서 크릭 족 의사당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크릭 족은 번영기였던 19세기 마지막 10년 동안 학교교회공공건물 등을 지었는데, 이 시기 이 종족은 자치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 연방정부로부터는 최소한의 간섭만 받고 있는 상태였다.

1898커티스 법[Curtis Act]’에 의해 부족 정부가 해체되었고, ‘도스 할당법[Dawes Allotment Act]’에 의해 부족의 임대 토지는 사라지게 되었다. 도스 위원회는 부족원들을 혈통에 의한 크릭 족자유민으로서의 크릭 족으로 나누어 등록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부족원들이 갖고 있는 크릭 혈통의 비율에 상관없이 아프리카 혈통만 인정되면 누구나 그 범주에 분류해 넣었던 것이다. 1906426, 미합중국 의회는 1907년에 오클라호마가 주의 자격을 인정받을 것으로 예상, ‘1906년 문명화된 다섯 부족 법안을 통과시키게 되었다. 이런 일들이 진행되는 동안 크릭 족은 8,100의 땅을 비원주민 정착자들과 정부에 빼앗기고, 그 후에야 ‘1936년 오클라호마 인디언 복지법아래 일부 무스코기 족 도시들은 연방의 승인을 받게 된 것이다. 크릭 네이션은 1970년까지 재조직되거나 연방의 인정을 다시 얻지 못하다가 1979년에야 1866년의 헌법을 대체하는 새 헌법을 만들어 비준하게 되었다. 1976년 하르호(Harjo)와 클레피(Kleppe) 간의 법정 소송사건으로 미합중국의 가부장주의는 종식되고, 민족자결권이 고양되었다. 크릭 네이션은 후손들의 구성원 자격을 결정하기 위한 기초로 도스 법의 명단을 이용, 58,000명이 넘는 할당자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등록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현재 크릭 족의 인구는 69,162, 주요 거주지는 미국의 오클라호마 주이며, 종교생활은 기독교[특히 침례교와 감리교], 종교적정치적전통주의적 조직인 네 엄마들의 결사(結社)[Four Mothers Society]’를 중심으로 영위되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특히 크릭, 체로키, 촉토, 치카샤 등 네 종족이 주로 그들의 땅을 비원주민 이주자들에게 할양하도록 한 도스 법이나 미 의회의 법안 활동 등에 반발하여 결성한 복합적 조직이 바로 이것이었다.

인포메이션 센터의 직원으로부터 무스코기와 오크멀기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얻은 다음 본격적인 탐사에 나섰다. 먼저 언덕 위의 ‘Five Civilized Tribes Museum’에 들렀는데, 1850526일에 세워진 무스코기 네이션의 옛 건물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들어가 보니 소장품은 별스럽지 않았다. 1층에는 다섯 부족의 휘장[seal]들과 사진 몇 장이 걸려 있었는데, 사진조차 찍지 못하게 했다. 1층에서 올려다보니 2층에도 식탁이나 의자 등 생활사 자료들이 몇 가지 진열되어 있을 뿐이어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다른 네 부족들을 찾아 그들 문화와 역사유물들의 진수를 맛보고 온 우리였다. 그러한 유물들의 일부를 복제하여 모아 놓고 ‘Five Civilized Tribes Museum’의 간판을 붙인 뜻은 좋았으나, ‘통합문화를 보여주기엔 턱 없이 모자라는 컬렉션이었다.

 

약간의 실망감을 안고 무스코기 시내로 달려 들어갔으나, 이곳 역시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경기가 안 좋아서인지 기름기가 빠져 있었다. 간판마저 흐릿하게 퇴색되고 있는 옛 건물들만 경기가 좋았던 그 시절의 분위기를 암시하고 있을 뿐 널찍한 시내 도로들에는 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우리는 옛날의 역사(驛舍)를 재활용하여 만든 삼강박물관[Three Rivers Museum]’을 방문했다. 잘 나가던 시절 카우보이들이 텍사스나 오클라호마의 중남부로부터 몰고 온 소떼들을 열차에 싣고 동부로 나아가던 오클라호마 주의 출구가 바로 이곳이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여성 자원봉사자 한 분이 오랜만에 만나는 외국 손님에 당황했는지 허둥거리며 친절을 베풀었다. 큰 역사를 박물관으로 개조한 만큼 세련되지는 않았으나, 오클라호마 주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현장감이 이곳에서도 물씬 풍겨났다. 잠시 후 그 여성이 전화로 호출한 정식 큐레이터가 달려왔고, 그녀로부터 박물관을 꽉 채운 각종 생활사 자료들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설명이 다 끝나갈 무렵 크릭 인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보안관이 들어왔다. 홀을 꽉 채울 듯 거대한 몸집의 그는 꽤나 붙임성이 좋았다. 대대로 이 도시에서 살아온다는 그는 보안관이라는 자신의 직책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 했다. 무엇보다 한국에 대한 호감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의 가계와 이 도시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바빴다. 급기야는 우리를 환영하려는 의도였는지 자신의 권총을 빼내 현란한 손놀림을 보여주기도 했다. 밖에 놓인 열차 유물까지 둘러 본 다음, 친절한 사람들로부터 간신히 빠져 나온 우리는 즉시 차를 몰아 1시간 거리의 오크멀기에 도착, 1박을 하게 되었다.

토요일인 다음날 오크멀기의 탐사에 나섰다. 공공기관이나 박물관 등은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 하는 수 없이 도심 주요부분들을 걸어 다니며 느껴보기로 했다. 윤기가 빠진 점은 다른 도시들과 같았으나, 규모가 제법 컸다. 오클라호마 주 오크멀기 카운티의 도시이자 남북전쟁 이래 크릭 네이션의 수도였던 곳이다. 그 명칭 ‘Okmulgee’는 영어로 끓는 물(boiling water)’를 뜻하는 크릭 단어 ‘oki mulgee’에서 나왔다는데, ‘졸졸 흐르는 시내[babbling brook]’ 혹은 증발악취[effluvium]’ 등으로도 번역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곳은 분명 노천온천 지역이었을 것이다. ‘악취 나는 끓는 물이라면 아마도 유황온천이었으리라. 인근의 체로키 네이션에서 발견한 그들의 환영사 ‘Osiyo[오시오]’를 내가 우리말 ‘(어서) 오시오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했듯이, ‘oki mulgee’ 아쿠 (뜨거운) !’로부터 나온 것이나 아닐까 상상해 보았으나, 근거를 대지 못하는 한 부질없는 생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남북전쟁 이후 내내 크릭 네이션의 수도였던 만큼 시내 곳곳에 고풍스런 자취가 많이 남아 있었다. 33.2의 넓은 땅에 2010년 기준 12,321명의 인구가 분산되어 살고 있으므로 한산할 수밖에 없지만, 전체적으로 기름기는 빠져 있었다. 우리가 찾으려 한 오크멀기 다문화 역사 박물관[Okmulgee Multicultural Historical Museum]’을 길가에서 발견하고 차를 멈추었으나, 이미 문을 닫은 채 이전했다는 메모만 문 앞에 걸려 있었다. 주변에 물었으나,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고, 찾아간들 토요일에 문을 열었을 리 없어, 하릴없이 무스코기 네이션 본부가 위치한 곳을 찾았다이미 130여년이나 지난 시기의 건물들이 넓은 땅에 여유롭게 늘어서 있었다. ‘무스코기 네이션 크릭 의사당[Muscogee Nation Creek Council House]’, ‘크릭 의회[Creek Capitol]’, ‘크릭 네이션 수도 청사[Creek Nation Capital]’ 등 단순 소박한 건물들이 주변의 상가들과 행복한 어울림을 이루고 있었다. 1867년 조직된 크릭 네이션의 수반 코우치먼[Ward Coachman] 시대에 오크멀기는 수도로 지정되었고, 1870년에는 오크멀기 헌법도 제정되었다. 수도 청사 의사당 건물 뒤편의 잔디밭에는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인디언 관련 유물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 가운데 눈물의 행진[Trail of Tears]’ 표지가 버티고 서 있었다. 미국이 인디언 특히 크릭 족에 대하여 자행한 횡포를 고발하는 내용임은 물론이다. 어느 인디언 네이션에 가도 ‘Trail of Tears’ 표지가 서 있는 곳은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이다. 인디언들에게 가한 미국의 원죄는 인디언이 살아 있는 한 업보가 되어 그들을 괴롭힐 것임을 이 표지판은 말해주고 있었다.

 

 


삼강박물관의 생활사 자료[MKT 라인, 즉 '미주리-캔자스-텍사스' 간 철도 노선에서 사용되던 각종 물건들] 

 

 


삼강박물관에 소장된 인디언 관련 그림[승천하는 전사의 영혼?]

 

 


삼강박물관에 소장된 인디언 관련 그림[크릭 족 전사?]

 

 


삼강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기관차

 

 


박물관에 전시된 기차의 기관실


 


지금은 박물관과 음악 홀로 쓰이는 당시의 화물열차 역

 

 

 
무스코기 초입의 환영 표지판

 

 


오크멀기에서 저녁을 먹은 집[값싼 등심이 맛있는 집]

 

 


한산한 오크멀기 시가지

 

 


크릭 네이션 의사당

 

 


크릭 네이션 의사당

 

 


'눈물의 여정' 설명판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

 

 

의사당을 떠난 우리는 널찍널찍한 주택가를 배회하다가 크고 멋진 교회들을 만났다. 그 가운데는 미국에서 보기 드문 천주교 성당도 있었다. 이름은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St. Anthony of Padua Catholic Church]’. 천주교 신자인 아내의 말대로 그곳을 방문하게 되었다. 성당 뒤편 주차장에 차를 대는데, 작은 차 한 대가 또르르 달려왔고, 문이 열리면서 로만칼라 복장의 연세 지긋하신 신부 한 분이 의상을 손에 들고 급히 나와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곳에 들어오면서 미사가 있다고 공지되어 있는 것을 본 터라 우리도 부랴부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미사 예정 시각이 지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당 안은 텅 비어 있는데, 아까 들어온 신부가 촛불을 붙이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물으니 오늘 특별 미사가 있는데, 아직 수녀가 당도하지 않아서 당신이 직접 미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 온 관광객이라 하자 반색을 하며 우리를 위해 포즈를 취해 주었다. 휑하니 넓은 성전에는 우리 둘 만 앉아 있었고, 신부 혼자 미사 준비에 분주한 모습이었다. 참 겸연쩍었다. 최소한 한 시간 가까이 걸릴 미사에 우리 둘만, 그것도 천주교 신자로는 아내 한 사람만 참여하는 셈이니, ‘참으로 기이하고 멋쩍은 경험아닌가.

 

우린 갈 길이 바쁘니 어여 나갑시다!’ 신부가 옷을 입으러 들어간 틈에 나는 아내의 옆구리를 찔렀다. 나의 표정이 완강해 보였던지 아내도 마지못해 따라나선다. 밖으로 나오며 생각하니 참으로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특별미사에 신도는 하나도 없고, 그나마 찾아온 한국인 관광객 두 명마저 종적이 묘연하게 사라지고 말았으니, 미사복을 입고 나온 신부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7~8년 전 유럽 자동차 여행에 나섰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상당수의 성당이나 교회들은 주일날에도 문이 닫혀 있었다. 주일 예배에 참여하고자 하이델베르그의 한 교회에 갔더니 교회 문은 열려 있었으나 목사 한 분이 앉아서 무료하게 책을 읽고 있을 뿐이었다. 서구사회에서 교회가 망하고 있음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그래서인가. 이 성당 정면엔 미국정신과 함께 가톨릭 정신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며[Keeping Catholicism Alive With American Spirit]’라고 쓰인 걸개가 늘어져 있었다. 그에 비해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아직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교회에 모여 활동을 벌이는 젊은이들은 미국 사회에 뿌리내린 신교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도시 외곽에 자리 잡은 OSU 무스코기 캠퍼스를 거쳐 무스코기 참전용사 비’, ‘무스코기 크릭 네이션 지방법원등을 일별한 다음 마지막 행선지 오클라호마시티를 향해 40번 하이웨이에 접어들면서 우리의 크릭 탐사는 끝이 났다.

 

***

 

크릭 족을 대면하기 위해 무스코기와 오크멀기를 찾았으나, 박물관의 유물이나 건축물로 남아 있는 삶의 흔적만 보았을 뿐, 그들의 종적은 없었다. 그렇다. 아직도 검붉은 얼굴에 검은 머릿결을 날리는 그들의 모습이 유지될 리는 없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도 아닐 것이다. 나와 다른 모습의 이웃들과 섞이고 사랑함으로써 나를 변모시키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었을 터. 그러나 신화 속에 살아 숨 쉬는 인디언들의 문화나 의식도 언젠간 새로운 시대 삶의 원리로 부활될 수 있으리라. 돌고 도는 것이 세상 이치라면, 지금 위세를 떨치는 서구문화의 끝판 어디쯤에서 그 옛날 인디언들이 영위하던 생활양식이나 정신이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린 채 새로운 삶의 원리로 사람들을 고양(高揚)시키게 되리라. 그 때를 기다리며 은인자중하며 살아가는 크릭 인들을 우리는 여기서 만난 것이다.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의 사제

 

 


빠두아의 성 안토니 가톨릭 교회 100주년[2008] 기념 표지

 

 


빠두아의 성 안토니 교회 내부

 

 


오크멀기 제일 장로교회

 

 


오크멀기 제일 장로교회 내부

 

 


오크멀기 연합 감리교회

 

 

 


무스코기 전몰용사 추모비[한국전에서 전사하거나 실종된 병사들 포함]

 

 


오클라호마시티의 '윌 라저스 공항' 인근에서 만난 석유채굴기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