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3. 12. 2. 06:06

 

 

 

체로키어 ‘오시요(Osiyo)’와 우리말 ‘(어서) 오세요!’의 정서적 거리

 

 

 

 

1128일 아침 스틸워터를 출발, 털사를 거쳐 오후 3시쯤 체로키 네이션(Cherokee Nation)의 수도 탈레콰(Tahlequah)에 도착했다. 도시로 진입하자 전체적으로 약간 이색적인 기풍이 느껴지는 점만 제외하면 미국의 여느 지역 도시들과 다를 바 없었다. 중국식 표현으로 말하면 미국 판 만족(蠻族) 이라고나 할까. 간판의 영문글자 위에 작은 글씨로 체로키 글자들이 병기되어 있는 것만 다를 뿐 교통체계, 건물 양식,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여타 지역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미국 땅이었다.

 


체로키 네이션의 깃발


체로키 네이션의 문장(紋章)


stop 사인 위쪽의 글자는 같은 뜻의 체로키 글자

 

미국 백인들의 최대 명절인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거나 말거나 이곳에서는 체로키인들 나름의 생활을 볼 수 있길 바랐으나, 그건 내 순진한 소망이었을 뿐. 호텔과 월마트, 주유소 및 맥도날드 몇 군데만 열려 있을 뿐 모든 곳이 꽁꽁 닫혀 있었다. 일단은 실망이었다.


 


체로키 네이션 안에서 유일하다는 체로키 고유 음식점. 명절날 점심에 잠깐 열었다가
닫은 모양이다.

 

***

 

인디언으로 보이는 호텔 프런트 아가씨들의 설명을 듣고 체로키 네이션 본부와 헤리티지 센터 및 뮤지엄을 찾아갔으나, 사람 없는 곳에 청설모들과 사슴들만 분주하게 그들의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체로키 네이션의 베테란 센터


체로키 네이션의 정부 청사


체로키 헤리티지 센터 입구


헤리티지 입구에서 만난 사슴(노루?)들

 

하릴없이 돌아오면서 월마트에 들렀다. 다른 곳과 달리 그곳엔 사람들이 미어질 정도로 모여들고 있었다. 상품 매대(賣臺)마다 금줄이 둘러져 사람들의 손을 막고 있었고, 그 앞과 옆으로 카트를 밀고 있는 손님들이 줄을 서 있었다. 점원들은 그들의 주위를 오가며 삼엄하게 경비를 서는 모습. 이제 6시만 되면 일제히 달려들어 자신들이 점찍어둔 물건들을 카트에 실을 태세들이었다. 이른바 몇 시간 앞당겨진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였다.

 


이 날 월마트(Walmart)는 블랙프라이데이 때문에 붐볐다.

 

미국 전역에서 Thanksgiving Day가 끝나자마자 모든 상점들은 엄청난 할인 가격으로 재고물량을 소진시키는 행사들을 갖곤 하는데, 여기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마 가전제품 등 고가의 물품들이 그 주된 대상일 텐데, 비디오 코너나 어린이 용품 코너에도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모든 품목이 다 해당되는 듯 했다. 인디언 문화를 보고자 여러 시간을 소비하며 찾아왔으나, 정작 인디언들은 보지 못한 채 멀미나게 목격해온 미국의 물질문화, 소비문화만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하릴없이 하룻밤을 호텔 방에서 묵고 다음 날 찾은 뮤지엄은 다행히 열려 있었다. 직원들은 모두 체로키 사람들이었고, 명절 연휴라서인지 관람객은 한 두 가족에 불과했다. 뮤지엄에서는 체로키 사회의 주요 인물들을 찍은 사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눈물의 여정(旅程)[Trail of Tears]’으로 불리는 강제 이동의 역사적 사건을 사진으로, 그림으로, 기록으로, 모형으로 세밀히 보여주고 있었다. 백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체로키 인들의 수난과 고통의 역사가 자그마한 집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관객들로 하여금 정복당한 민족의 운명을 생생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컬렉션을 설명해주던 큐레이터에게 한국과 체로키 문화의 동질성에 관한 내 의견을 말하며, 일례로 그들의 인사말인 ‘Osiyo[welcome의 뜻]’가 우리말의 오세요/어서 오세요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자[물론 이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며, 다만 나의 희망적인 추측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는 깜짝 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인사말보다 백인 지배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체로키 인들의 디아스포라와 일제에 의해 저질러진 한민족 디아스포라가 이 박물관의 핵심 테마인 눈물의 여정에 기막히게 오버랩 되어 있었고, 정작 나는 그것을 설명하고 싶었으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 사진 전시회의 포스터


'눈물의 여정' 설명판 


국립 체로키 뮤지엄


Andrew Hartley Payne의 달리는 모습. 그는 1928년 열린 '미 대륙횡단 도보 경연대회'
[1928년 3월 4일 LA를 출발하여 같은 해 5월 26일 뉴욕에 골인]의 우승자로서
체로키 인디언의 후예다.


체로키 레스토랑의 출입문에 쓰여진 'Osiyo'


체로키 네이션에서는 어딜 가나 'Osiyo'가 보인다.

 

건물 밖에도 그들의 역사가 전시되어 있었다. 정착 당시의 일반 가정들과 학교, 교회, 상점, 대장간, 마굿간, 닭장까지, ‘눈물의 여정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의 기증으로 그곳에 재현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체로키의 관습을 몸으로 보여주는 체로키 남성 가이드 세 사람을 만났다. 한 젊은 가이드는 체로키 의식(儀式)’에서 불리던 노래와 춤을 보여주며 그 의미를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체로키 인들은 유일신을 숭배해 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가, 그들은 일찍부터 기독교를 수용한 것으로 보였다. 그와 함께 그는 작은 돌들을 집어넣은 소형 거북이 껍질들을 여러 개 묶어 만든 그들만의 타악기를 보여 주었다. 발에 전대처럼 차고 처륵처륵소리를 내며 많은 사람들이 군무(群舞)를 추던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곳에는 지금도 봄철이면 많은 거북이들이 땅 위로 출몰한다고 했다.

 


정착 초기에 살던 집


집 앞에 서 있던 음식 저장고


새 희망 교회[New Hope Church]


가정집에서 부인이 사용하던 직물 기계. 우리의 베틀과 비슷한 원리를 갖고 있다.


농가


농가의 내부


집 바깥에 걸어둔 등


학교 건물


교실. 영어 알파벳과 체로키 문자가 함께 적힌 칠판이 보인다.


야외 마굿간에서 만난 '명상에 잠긴 말'

 


가이드 나탄의 노래를 직접 들으실 수 있습니다. 클릭하세요.

 


마른 거북에 돌들을 넣어 만든 악기를 들고 의식의 실제를 보여주는
젊은 가이드 나탄(Mr. Nathan Wolfe)


젊은 가이드의 또 다른 포즈

 

다른 두 명의 중년 가이드들은 각각 전통 사냥법과 활 전문가였다. 한 사람은 대나무에 침(針)을 넣고 입으로 불어 토끼 등 작은 동물들을 잡는 시범을 보여 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돌을 갈아 살촉을 만들고, 강하고 큰 활에 그 화살을 메겨 적에게 쏘거나 사냥하는 모습을 현장에서 보여주고 있었다. 두 사람의 설명을 통해 총으로 무장한 백인 침입자들의 출현에 속절없이 당하고 만 당시 체로키 인들의 비참한 상황과 역사의 아이러니가 눈앞에 떠올랐다.

 


대롱에 넣은 침을 입으로 불어 작은 동물을 잡는 시범을 보여주는 가이드


돌 화살촉 만드는 시범을 보여주는 가이드

 

헤리티지 뮤지엄을 떠난 우리는 탈레콰 다운타운으로 진출했다. 조용하고 널찍한 도로 양 옆으로 건물들이 평화롭게 앉아 있었다. 1자형 간선도로가 끝나는 곳, 도시의 핵심이자 다운타운을 내려다보는 위치 양지바른 곳에 북동부 주립대학[Northeastern State University]이 자리잡고 있었다. 2000명 규모의 작은 대학이지만, 아주 아름다운 캠퍼스였다. 학교 중앙에 세쿠오야(Sequoyah)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 대학은 이곳 체로키 네이션의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진 듯 했다.

 


탈레콰 다운타운


북동부 주립대학[Northeastern State University]의 멋진 캠퍼스

 

체로키어를 읽고 쓸 수 있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세쿠오야는 문화의 기록과 전승을 가능케 한 민족의 영웅이었다. 원래 그는 은 세공장이었는데, 1821년 독자적인 체로키어 음절표를 만들어냄으로써 체로키 사람들의 지적 활동에 큰 혁명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글자 없던 사람들에게 효율적인 쓰기 체계를 만들어 준 일보다 더 큰 공이 어디에 있을까. 그가 이 음절표를 만들어 내자마자 그것은 체로키 네이션에서 급속히 번지게 되었고, 1825년에는 네이션에서 공식 채택됨으로써 체로키 사람들의 문자 해독률은 주변의 백인 정착자들을 뛰어넘게 되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체로키인들에게 세쿠오야는 우리민족에게 세종대왕과 같은 존재인 셈이었다. 이곳 체로키 네이션 어딜 가나 세쿠오야의 사진이나 동상을 발견하기 어렵지 않은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대학 캠퍼스에 세워진 세쿠오야의 동상

 

NSU에서 나온 우리는 체로키 국립 대법원 박물관[The Cherokee National Supreme Court Museum]’체로키 국립 감옥 박물관[Cherokee National Prison Museum]’ 등에 들렀다. 탈레콰 타운 광장의 남동쪽에 위치한 대법원 박물관은 1844년 피어스(James S. Pierce)가 세웠으며, 체로키 네이션의 대법원 청사로 쓰이던 건물이다. 또한 체로키 네이션의 공식 간행물이자 오클라호마 주 최초의 신문인 체로키 애드버킷’[Cherokee Advocate, 1844년부터 1906년까지 간행]의 첫 인쇄 행사가 열린 곳도 바로 이 건물이다.

 


상공회의소 겸 관광안내소


탈레콰 시청


국립 체로키 대법원 뮤지엄 표지판


국립 체로키 감옥 박물관


1880년대 사용되던 수갑을 본떠 다시 만든 것


죄명에 따른 당시의 판결. 살인범은 교수형에 처했다. 계획살인에 단 3~5년형을 부과해놓고도
'중형'이라 너스레를 떠는 우리나라의 법관들은 반드시 배워야 할 법 정신이다.


당시 감옥의 주방


당시 감옥의 모습

 

체로키 애드버킷은 문화민족 체로키 인들의 자부심을 드러낸 간행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 1844926일 창간호에 실린 우리의 권리, 우리나라, 우리 민족이란 그들의 모토야말로 오늘날 우리도 수시로 외치는 구호가 아닌가? 당시 이 신문은 체로키 인들에게 미국과 미국인들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체로키어와 영어로 매주 발행되었다. 이 신문은 당시 미국 내의 유일한 민족 신문이었으며, 이 신문의 발간이 시작되자마자 다른 부족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1850년엔 촉토 인텔리젠서(Choctaw Intelligencer)’, 1854년엔 치카사 인텔리젠서(Chickasaw Intelligencer)’가 각각 발간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아메리칸 인디언에 대하여 잘못 된 고정관념을 갖고 있던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도 누구 못지않은 지능과 식견을 갖고 있음을 그들의 박물관들에서 확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Cherokee Advocate> Vol. 30, No. 3.[1906년 3월 3일자]

 

***

 

체로키 네이션을 방문한 것은 아직도 광활한 미국 땅에 온존하고 있는 식민주의의 잔재와 그 근원을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지금은 다수자들의 통치논리에 순응하며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듯하지만, 민족의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눈물의 여정(旅程)[Trail of Tears]’을 그들이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자신들의 말을 표기하기 위한 글자체계를 만들었고, 신문까지 발행했으며, 합리적인 사법 시스템까지 운영했던 그들의 지능과 문화를 과연 지배자로서의 백인들은 제대로 인식해온 것일까. 물론 과거의 역사를, 복수를 위한 근거자료 만으로 활용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 완전히 잊어버릴 경우, 삶의 바탕인 정체성마저 잃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깨닫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아주 아름답고 생생하게 유지하고 있는 박물관들에 그 증거물들은 시퍼렇게 눈을 뜬 채 살아 있었다.

 


체로키 헤리티지 센터 빌리지에서 가이드와 함께 한 백규


빌리지 가옥 앞에서 Melani


북동부 주립대학교 교정에서 만난 오세이지족 인디언 소년 Joshua군과 함께.
부자간으로 보이지요?^^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1. 2. 08:40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에 다녀와서

 

 

 

3일차-체로키 후예의 집을 찾아 패러다임 전환의 증거를 찾다

 

 

 

프로그램의 내용이나 성격으로 보아 사실상 마지막 날인 오늘. 여러 전문가들의 발표와 토론을 통해 어제 대초원[Tall Grass Prairie]과 오세이지 족 보호구역을 둘러보며 갖게 된 감흥을 구체적으로 내면화 시키는 날이다. 무엇보다 기대되는 일정이 바로 호스트 패밀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그들의 집을 방문하는 행사였다.

 

***

 

8시에 버스를 타고 길크리스 박물관 강당으로 이동하여 털사대학교 영화학과 제프[Jeff Van Hanken] 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과거의 그 때에 있던 일들이 아니다!-미국 서부 이미지들의 신뢰성과 정의에 관한 환상들[That ain’t how it was! Illusions of Authenticity and Justice in Images in the American West]”이라는, 약간은 난해하면서도 도발적인 제목의 강연이었다. 말하자면 영화에 들어 있는 서부의 이미지들이 인디언이나 서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여타 미국인들이나 세계인들에게 잘못된 인식의 기초로 작용했다는 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었다. 그가 제시하는 화면들을 보며 그간 접한 서부영화들이 인디언이나 미국의 서부에 대한 내 편견의 형성에 적잖이 기여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깨달음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만난 모든 것들과 결부되면서 새로운 인식으로 이어짐을 흐릿하게나마 알게 되었다.

 


제프 교수가 보여주던 기록영화의 화면


제프 교수가 보여주던 화면


인디언 출신 헐리웃 배우 Hattie McDaniel


서부영화의 한 장면


서부영화의 한 장면

 

제프 교수의 강연이 끝나고 같은 자리에서 감동적인 이벤트를 겸한 또 하나의 행사가 이어졌다. 오클라호마 대학교에서 원주민 연락관[Tribal Liaison]을 맡고 있는 마크씨[Mr. Mark Wilson]가 무대에서 다양한 종족의 이름을 부르자 초등학교 학생들이 큰 깃발을 하나씩 들고 무대 위로 오르는 것이었다. 그 학생들은 털사 지역 공립학교 인디언 교육프로그램의 참가자들이고, 그들이 들고 있던 깃발들은 오클라호마 주에 본부를 갖고 있는 39개 원주민들을 대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오클라호마 인디언 종족들은 1830년의 인디언 강제 이주법’[Indian Removal Act]에 근거, 미합중국 군대에 의해 강제로 혹은 자발적이거나 토지소유권을 받아 이 지역에 재배치되었다고 한다. 인디언 교육 프로그램은 털사지역 공립학교들에 출석하는 인디언의 후예들[대략 4600]에게 교육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과거 미국 인디언이 갖고 있던 풍부한 유산과 문화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깃발을 들고 입장한 초등학생들


초등학생들은 퇴장하고 남아 있는 학교의 깃발들

 

39명의 초등학생들이 무대 안쪽에 촘촘히 도열하자, 인디언 복장을 한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앞으로 나오더니 앰프를 통해 울려나오는 배경음악에 맞추어 가냘픈 목소리로 미국의 애국가를 부르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다보니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아이가 차라리 쨍쨍하게 높은 목소리로 불렀더라면 괜찮았을 것을. 흡사 식민지배로 정체성을 빼앗겨버린 소수민족의 가냘픈 아이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지배자의 애국가를 부르는 모습이란! 글쎄. “비록 우리들이 이주해온 백인들에게 땅도 빼앗기고 민족의 정체성도 빼앗겼지만, 지금은 우리 모두 충실한 미국인이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무력한 가냘픔으로 자신들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을 표현하려 했던 것일까. 내 마음에 전해져 오는 내 나름의 공감때문에 감동적이긴 했지만, 그 정확한 의미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대표로 미국 국가를 부르던 인디언 어린이

 

점심 후 미국 서부의 실제 역사라는 패널 토의에서는 다양한 연사들의 의미 있는 발표들이 이어졌다. 털사 대학교 역사학과 크리슨 박사[Dr. Kristen Oertel]의 사회로, 스테이튼 아일란드 대학[College of Staten Island] 지리학 교수인 드보라 박사[Dr. Deborah Popper]서부 지역 환경사: 바람 속에 쓸려간 옛 약속들[Western Environment History: Old Promises in the Wind]”, 아칸사 대학교[University of Arkansas] 역사학과 교수인 엘리엇 박사[Dr. Elliot West]휘청거리는 인디언들과 실제 인디언들[Reel Indians and Real Indians]”, 노쓰웨스턴 오클라호마 주립대학[Northwestern Oklahoma State University]의 역사학과 교수인 로저 박사[Dr. Roger Hardaway]서부지역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각각 발표했고, 박물관 전시물들을 관람한 뒤 각계의 저명한 패널들이 열띤 토론을 벌임으로써 주최 측이 애당초 내건 서부지역의 미래[The Future of the West]”라는 세미나의 마감 타이틀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패널리스트들 가운데 특별히 주목 받은 인물은 변호사, 인디언 부족 판사, 학자 등으로서 종교적 자유, 죄수들의 권리, 수자원 권, 조약의 권리 등을 포함한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30여년을 노력해온 포니족(Pawnee) 출신의 명사 월터 씨[Mr. Walter R. Echo-Hawk]였다. 인디언들이 받는 법의 보호와 한계에 대한 그의 설명을 통해 이 지역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그는 명쾌하게 설명했다.   

 


드보라 박사의 강연 제목


점심이 차려진 길크리스 박물관의 비스타 홀(Vista Hall)


식사를 마치고 발표를 듣는 각국의 학자들


패널리스트들의 클로징 토론을 듣고 있는 학자들


학자들로부터 인기와 관심을 받은 포니(Pawnee)족 출신의 Walter Echo-Hawk씨


토론 후 학자들과 함께 한 월터씨

 

마감 패널 토의가 끝난 뒤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로비에서 삼삼오오 저녁식사를 초대한 호스트와 만나 호스트의 차로 각자의 가정이나 레스토랑으로 흩어져 갔다. 대개 한 사람의 호스트에 2~4명이 배정되었는데, 나를 초청한 호스트는 바로 첫날 나를 픽업해준 자원 봉사자 클라크[Clark Frayser]씨였다. 첫날 그의 차를 타고 호텔로 오면서 그의 한국 방문 경험과 한국에 대한 호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사실 미국인으로서는 지나치다 싶게 소탈한 점이 처음엔 의문이었다.

 


패널 토론장에서의 클라크 씨[Mr. Clark Frayser]

 

다른 호스트들과 달리 나 혼자만을 초청한 이유를 묻자 한국에 대한 호감 때문이었다고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10년 전 한국에 초청 받아 갔을 때 서울에서의 즐거웠던 체험, 현대자동차와 포항제철 등에서의 놀라웠던 체험, 비무장 지대 땅굴에서의 긴박했던 체험 등등 한국에 대한 추억이 그의 입에서 술술 흘러 나왔다. 또 다른 미국인들과 그의 분위기가 다른 이유를 묻자,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혈통 때문일 것이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백인 할아버지와 체로키 인디언 할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자신의 아버지는 자연스럽게 50%의 체로키 족 피를 갖게 되었고, 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 자신이 태어났으므로 자신은 40%의 체로키 족 피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다른 순수 유럽계 백인들에 비해 분위기가 다를 것이라고 했다.

 

이혼 후 만나 함께 살고 있는 걸프렌드(girl friend)’가 저녁에 일을 하므로 집에서 식사대접을 할 수는 없으니, 일단 레스토랑에서 식사한 다음 자신의 집으로 가자고 했다. 집에서 꼭 보여줄 게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게 클래식한 분위기의 레스토랑, 대중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의 레스토랑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했다. 후자를 선택하자 지체 없이 출발하여 30여분 뒤 도착한 곳이 산타페(Santafe)’라는 레스토랑이었다. 호스트이든 게스트이든 대개 클래식한 분위기만을 경험해온 나로서는 산타페의 이색적인 분위기에 놀라게 되었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땅콩을 껍질째 볶아 한가득 넣어놓은 통이 놓여 있었고, 사람들은 그릇에 그득그득 담아갖고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예약된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자리에서 땅콩을 까먹으며 함부로 껍질들을 바닥에 버리곤 했다. 다른 식당들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던 술들이 진열장에 가득했고, 손님들 대부분이 음식과 술을 함께 마시고 있었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기준의 미국 레스토랑은 아니었고, 클라크씨는 그 점을 내게 보여주려 하는 것 같았다.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의 내부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의 천정 장식


클라크씨와 저녁식사를 한 레스토랑 산타페의 내부


산타페에서 돌아와 자신의 집 앞에 서 있는 클라크씨
 

 

다른 곳보다 비교적 맛있었던 스테이크와 몇 잔의 맥주를 마신 뒤, 우리는 거기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집에 도착하여 내가 미리 마련해간 하회탈 선물을 내밀자, 뛸 듯이 기뻐하며 놀라는 것이었다. 선물을 가져왔으리라는 예상을 전혀 하지 못했다가 불쑥 선물을 내미니 우선 놀란 것 같았고, 그 선물이 [mask]’이라는 점에 또 놀란 듯 했다. 주최 측으로부터 이메일로 미리 받아본 프로그램에 가정 초대 만찬[Home Hospitality Dinners]’이란 내용이 있음을 알고, 혹시 몰라서 미국에 올 때 준비한 선물들 가운데 하회탈을 갖고 온 것이었다.                                         

                                                                                      



클라크 집의 안쪽 출입문 유리에 새겨진 체로키 문장

"
거실 등 클라크 씨 집의 내부


거실


거실에서 백규


클라크 씨의 딸

 

내가 큼지막한 하회탈을 건네자 깜짝 놀라며 다짜고짜 자신의 서재로 나를 끌고 갔다. 그런데 한쪽 벽면이 각종 탈들로 가득한 게 아닌가. 말하자면 그는 탈 애호가였던 것이다. 체로키 탈, 중국 무희 탈, 일본 가부키 탈 등 다양한 탈들이 걸려 있는 사이에 아이들 조막만한 하회 각시탈도 걸려 있었다. 그곳에 대감탈만 빠져 있었는데, 바로 내가 그걸 갖고 온 것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절묘한 선물이었다. 말 그대로 뛸 듯이기뻐하는 그의 모습이란!

 


                                   내가 건넨 선물을 들고 서 있는 클라크 씨 

 

그의 안내로 집안을 두루두루 구경했는데, 온통 체로키 유물 일색이었다. 체로키 인디언들의 정신이 집안에서 묻어나온다고 할 정도로 좁은 집안에 그득한 그림, 공예품, 사냥도구 등 유별난 컬렉션이었다. 자신의 가계도[family tree]를 보여주며 체로키와의 인연을 설명하기도 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공개적으로 체로키 혈통에 대한 프라이드를 갖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 물음만은 아껴두기로 했다. 그는 이 지역에 자신을 포함, 체로키 등 인디언 혼혈 미국인들이 적지 않다고 강조하며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쩜 그는 우리가 지난 3일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온 인디언 문화의 표본으로 자신을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일부이긴 하지만, 주류의 미국인들이 감추며 살아왔을 혼혈의 사실을 흔들며 자랑하는 것은 다민족다문화의 공존과 융합의 시대를 맞이하여 의식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사례가 아닐까.

 


                                 체로키 화가의 그림


                                 체로키 화가의 그림


                      체로키 공예가의 목각(모기의 모습을 나무로 깎아 만든 작품)
 

 


                    자신의 거실에서 체로키 사냥법의 시범을 보이고 있는 클라크 씨
 

 

    ***

세미나 셋째 날. 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이 강당에서 설파한 미래의 서부는 배제나 차별 아닌 공존과 포용, 융합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었을 것이고, 클라크 씨는 그 사례로서의 자신을 내게 보여 주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시끌벅적한 산타페에서 체로키 식(?)을 가미한 식사를 대접했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일부분이나마 체로키 생활양식을 보여준 것이나 아닐까. 이런 분위기가 과연 공고한 레이시슴(racism)의 벽을 얼마나 허물 수 있을지, 역사의 진행이 항상 순조로운 방향만을 타게 되는 것인지 등등. 약간 불안하긴 하지만, 일단 작은 희망이나마 갖기로 한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0. 28. 23:55

 

아메리카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미래의 꿈을 찾다!

 

 

2013년 풀브라이트 방문 학자 발전 세미나[2013 Fulbright Visiting Scholar Enrichment Seminar]에 다녀와서

 

 

         제1일차-치밀한 미국인들

 

 

 

 

풀브라이트의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어 미국 내 대학을 비롯한 연구기관들에 체류하고 있는 학자들은 기간 중 최소 1회 이상 34일의 발전 세미나에 참석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최근 나는 미리 3회까지의 시기와 주제만을 알려 준 다음, 신청을 받아 배정하는 풀브라이트 측[CIES(Council for International Exchange of Scholars, 국제 학자 교류 위원회’) Enrichment Seminar Team]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혀를 내두르게 되었다. 광대한 미국 땅에서 미리 장소를 알려 준다면 대개 한쪽으로 몰릴 수 있기 때문에 고안해낸 지혜였을 것이다. 그들이 제시한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옛날의 서부에서 새로운 서부로: 미국 스토리의 형성에 기여하는 땅의 역할 [Old to New West: The Role of Land in shaping the American Story](10/23-26)

2. 법의 지배: 인권과 정의[Rule of Law: Human Rights and Justice](11/20-23)

3. 사회적 기업가 정신: 혁신하는 비영리 단체들과 발전하는 공동체들[Social Entrepreneurship: Innovating Nonprofits Developing Communities](2014 3/19-22)

 

모두 유익했으나, 그래도 나와 가까운 쪽은 1번이었다. 1번을 1순위, 2번을 2순위로 선택하여 신청했으나, 1번의 지원자가 많아 부득이 나를 대기표에 올렸다는 연락이 왔다. 어쩔 수 없이 2번으로 갈 각오를 하고 있던 차 928일에 털사 전 지구 연합[Tulsa Global Alliance, 약칭 TGA]’에서 이메일이 왔다. 국무성의 지원을 받아 1번을 주제로 자신들이 이번 세미나를 주관하게 되었으니, 신청할 사람은 하라는 연락이었다. 대기표에 올려놓았다던 나에게까지 연락한 것을 보면, 막상 뚜껑이 열려 멀리 떨어져 있는 오클라호마의 털사시티(Tulsa City)가 세미나 장소임을 알게 된 상당수의 사람들이 포기한 모양이었지만, 나로서는 사막 속의 단비인 셈이었다.

 

스틸워터에서 차를 몰고 달리면 1시간 남짓 걸리는 털사가 아닌가. 어차피 풀브라이트에서 비행기 표를 비롯한 모든 비용을 대 주는데 이왕이면 여행하는 셈 치고 먼 곳으로 가는 게 좋지 않으냐는 주변 사람들의 권유도 있었지만, 썩 좋지도 않은 미국 비행기들을 갈아타면서까지 여행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고, 무엇보다 1번 주제가 내겐 환상이었다. 1012TGA가 보내 준 Overview[행사개요]를 보고는 더더욱 가슴이 설렜다. 이 지역 인디언들의 삶과 문화에 대한 탐구가 세미나 내용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

 

모든 것이 결정되면서 주최 측의 주도면밀함이 감지되었다.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는 참석자들[이번에는 40개국 70명의 학자들]의 교통편과 숙박 및 식사 주선, 세미나 장소 마련, 강사 및 패널리스트 섭외, 자원 봉사자 동원, 이동 차편 마련, 현장 견학 등 행사 전반의 일정을 짜고 조정하는 일들일 텐데, 사실 가까이에 사는 내가 오히려 쉽지 않은 존재였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비행기 표를 사서 보내주고 공항에 픽업을 나가면 그만이지만, 내 경우는 나 스스로 차를 몰고 가거나 주최측이 누구를 보내서 라이드를 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내 스스로 차를 몰고 갈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규정상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모양이었다.

 

TGA의 행사 책임자 Bob Lieser씨와 이곳 역사학과 학과장 사이에 몇 번의 이메일이 오고 가는 것 같더니 최종적으로 내게 이메일이 왔다. 스틸워터에 있는 OSU 메인 캠퍼스와 OSU 털사 캠퍼스를 왕래하는 셔틀버스[Orange Big Bus]에 자리를 예약해 놓았고, 털사에 도착하는 대로 Mr. Clark Frayser가 픽업을 나갈 것이며, 세미나가 끝나고 돌아오는 날엔 Dr. Ron Bussert가 스틸워터의 집까지 나를 태워다 준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통보해 주는 것 아닌가. 참으로 한 치의 빈 틈도 보여주지 않는 그들이었다. 내가 만약 이런 행사를 주관했을 경우, 참가자가 스스로 차를 몰고 오겠다고 한다면 얼마나 반가웠을까. 규정과 원칙을 철저히 지키려는 이들의 자세가 첫판부터 범상치 않았다.

 

***

 

23일 오후 310. OSU 털사 캠퍼스에 도착하니 클라크 씨가 차를 대놓고 내가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 차로 호텔[Holiday Inn City Center]에 도착하여 등록 후 체크인을 한 것이 330. 방에서 쉬다가 5시 정각에 호텔 2층의 시마론 포이어(Cimarron Foyer)와 테라스 등에서 간단한 음식을 들며 참석자들끼리 환담을 나누다가, 버스를 타고 세미나 장소인 길크리스(Gilcrease) 뮤지엄[미국통신 12 참조]으로 이동했다.

 


TGA에서 만들어 참가자들에게 나누어 준 일정표


세미나 기간동안 패용한 명찰


참가자들의 숙소[Holiday Inn City Center, Tulsa]

 


호텔 방에서 내다 본 털사 다운타운의 모습[가운데 첨탑 건물은 성가족 성당]

 

뮤지엄 강당에서 열린 행사의 내용은 환영사와 기조연설이었는데, 털사 대학교 세계교육 담당 교무 부처장인 셰릴 박사(Dr. Cheryl Matherly), 미 국무성 교육문화국 성인 프로그램 매니저인 레빈(David Levin) , IIE[Institute of International Education, 국제 교육 연구소]의 캠벨(Kristin Campbell), 털사 대학교의 길크리스 박물관 담당 부총장인 듀안 킹 박사(Dr. Duane King) 등의 간단하면서도 인상적인 환영사에 이어 털사 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인 론다 박사(Dr. James Ronda)로부터 미국 서부의 발견[Finding the American West]’이란 주제의 기조연설을 들었다. 그는 미국 서부의 광범한 역사를 소개한 다음 서부를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한 핵심 장소로 오세이지(Osage) 카운티를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넓은 의미의 서부, 특히 오클라호마가 갖고 있는 무궁한 현실적 의미와 한계를 설파했고, 우리가 내일 보게 될 Tall Grass Prairie[대초원, 이하 TGP로 약칭]가 갖고 있는 인간적물질적 경관의 의미를 이해해 줄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우연이겠지만, 그는 강연 서두에 오클라호마 주를 소개하면서 "Oklahoma State is taller than South Korea."라고 '콕 집어' 말했는데, 미국의 1개 주보다 작은 나라에서 온 나로서는 '우리의 현실'에 대하여 착잡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작은 나라를 바라보는 그들의 관점이 궁금하기도 했다.]


기조발표를 하는 Dr. James Ro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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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0. 우리는 박물관의 비스타 룸(Vista Room)으로 이동,하여 Rick Morton, Nathan Eicher, Isaac Eicher 3인조 스윙밴드(swing band)의 서부 지역 컨트리 뮤직인 블루그라스를 감상하며 첫날의 만찬과 대화를 즐겼다. 그 자리에는 오클라호마 지역의 풀브라이트 동문들, 털사 커뮤니티의 지도자들, TGA 관리 이사들, 기업 회원 등 많은 지역 유지들이 초대되었는데, 그 가운데 이색적인 인사가 바로 인디언 출신의 이 지역 최고 기업가 메슈리 박사[Dr. Dayal T. Meshri]였다. ARC[Advance Research Chemicals, Inc.]CEO인 그는 나를 만나자마자 한국에 대한 좋은 인상을 반복하여 강조했다. 특히 현대자동차를 방문한 일과 부산에서 술을 마시던 추억을 크게 말하며 호탕하게 웃는 그에게 호감을 느낀 것은 그와 나 사이에 어떤 소통의 끈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만찬장에서 연주하고 있는 3인조 밴드


만찬장에서 스리랑카의 학자 Dr. Asanthra, 인디언 출신 CEO Dr. Dayal T. Meshri와 함께


만찬장에서  Dr. Dayal T. Meshri, Mr. Clark Frayser와 함께


만찬장에서 TGA 대표 Ms. Becky 및 Mr. Charles와 함께


만찬장에서 Mr. Clark Frayser와 함께


만찬장에서 Dr. Cheryl Matherly, 털사대학교 한국인 학생 김세연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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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시쯤 만찬이 끝났다. 첫날의 몇 시간을 보내며 나머지 일정도 빡빡하게 진행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세미나 기간에 무엇을 배워야 할지 뚜렷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40개국에서 몰려든 70명의 학자들이 영어라는 기호 하나로 훌륭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며 새삼 영어와 미국의 현실적인 힘을 느끼기 시작했고,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모든 일들을 꼼꼼하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미국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며 나와 우리의 쓸데없이 대범함에 일순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매 순간 톱니바퀴처럼 철저한 정확성을 중시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대충 해!”라는 상투어야말로 나와 우리의 진로를 막는 커다란 돌덩어리임을 깨닫게 된 것은 세미나 첫날에 얻은, 무엇보다 큰 수확이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22. 12:29

 

 


대닐로위츠 학장과 첫 대면을 하고

 

 

대닐로위츠 학장과의 만남

 

 

작년 126, 풀브라이트에서 연구 기간 동안 체류할 미국 내 기관의 지정을 요구해 왔다. 잠시 고심한 끝에 OSU의 역사학과로 결정했고, 그 학과가 속해있는 ‘College of Arts and Science’의 대닐로위츠[Danilowicz, Bret] 학장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연구 수혜자로 선정한다는 풀브라이트로부터의 편지와 함께 이력서, 연구활동 경력, 연구업적, 연구계획서 등이 포함된 커리큘럼 바이티(Curriculum Vitae)를 첨부하여 학장의 협조를 부탁드린다는 것이 그 메일의 내용이었다. 메일을 보낸 뒤 만 하루 만에 대닐로위츠 학장은 답장을 보내왔다.

 

우리는 풀브라이트 연구 활동을 위해 당신이 OSU로 오시고자 하는 일을 토의했다는 것, 수혜기간 동안 당신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라는 것, 당신을 공식적으로 초청하기 위해 역사과 학과장인 마이클 로간 박사가 초청장을 보내게 된다는 것, 나는 당신으로부터 받은 이메일을 로간 박사에게 포워딩했으므로 구체적인 초청장을 만들기 위해 그가 앞으로 당신과 접촉하게 된다는 것, 그의 초청장이 완성되면 당신에게 발송하기 전에 학장인 나와 대학의 교무처장으로부터 승인을 받게 된다는 것, 그리고 DS 2019를 받기 위해 국제 교육연구소(IIE)와 함께 일을 처리한다는 것등을 상세하게 적은 뒤, ‘당신이 풀브라이트 연구 활동을 위해 이곳에 온 뒤 뵙게 되기를 기대한다는 인사를 덧붙인 메일이었다. 그 뒤로 몇 번이나 이메일을 주고받았으나, 그 때마다 그의 메일 내용이나 표현은 참으로 정중하면서도 곡진했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안정될 즈음, 그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보내자마자 반가움을 가득 담아 답장을 보내왔고, 비서를 통해 날짜와 시간을 정한 다음, 우리는 그의 집무실에서 만났다.

 

수인사를 나누고 나서 그는 내 귀에 대고, ‘당신의 퍼스트 네임 Kyuick을 어떻게 발음하면 되는가고 물어보며 호탕하게 웃는 것이었다. 아마도 이메일을 받을 때마다 고심한 듯 했다. 내가 규익이라고 발음하는데, 아마 외국인들은 어려울 것이라고 대답하곤, 나도 학장님의 라스트 네임 Danilowicz는 그럼 어떻게 발음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나도 사실은 그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 역시 내 이름을 발음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며 직접 발음을 해 주는데, ‘wi’를 동유럽식인 로 발음하는 것 아닌가.

사실 이곳에 온 뒤 로간 교수에게 그 발음을 물었더니 내가 원래 추정한 대로 대닐로위츠라 알려 주길래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본인은 약간 다르게 발음하는 것이었다. 그 점을 지적하자 학장은 여긴 미국이니 미국식으로 발음해도 괜찮다며 또 한바탕 웃고, 나도 오랜만에 크게 입 벌려 웃고 말았다.

 

서로간의 이름을 두고 시작된 환담은 커피를 앞에 놓은 채 30여분이나 계속되었다. 주로 한국의 대학제도에 관한 물음, 내 연구계획에 관한 물음, 미국에서의 생활에 대한 물음 등이 핵심이었고, 내가 하기로 되어 있는 특강시간을 알려주면 꼭 참석하겠노라는 약속까지 덧붙이는 것이었다.

 

그의 전공은 동물학(zoology). 시라큐스 대학 학부에서 생물학을 전공[부전공은 컴퓨터 사이언스]했고, 듀크 대학에서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조지아남부대학에서 MBA, Open University에서 교육학 석사학위 등을 받음으로써 다양한 전공으로부터 많은 조예를 갖춘 폭넓은 학자였다. 캐나다 온타리오의 윈저 대학에서 연구생활을 했고, 아일랜드의 더블린 대학교에서 패컬티 멤버로서 부학장직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가장 최근에는 조지아 남부대학교 과학대학의 부학장과 학장직을 수행하기도 한 대학 학문행정의 달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1천만 불에 달하는 연구프로젝트로 아이슬란드에서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에 이르는 지역의 연구를 수행한 현장 연구자이기도 했다.


 

***

 

참 편안했다. 로간 교수보다는 빨랐지만, 정확하여 듣기에 부담 없는 영어를 구사했으며, 웃음이 많고 공감영역이 넓은 신사였다. 학문이나 행정, 연구프로젝트 등 모든 면에서 특출한 경력을 갖춘 대학행정의 책임자답게 인간적인 폭과 깊이를 갖추고 있었으며, 그러면서도 치밀하여 한 치의 허술함도 찾을 수 없었다. 미국 대학들의 경쟁력은 대닐로위츠 학장 같은 인물들을 통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좀 더 분발해야겠다는 자성(自省)을 새삼 하게 되는 요즈음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17. 08:59

 


장영배 교수 자택 앞에서


장영배 교수 댁 거실


장영배 교수의 빛나는 따님 혜나 양


장영배 교수 부녀와 함께 맛있는 점심을

 

 

미국에서 만난 고마운 사람들-2

 

Dr. Chang, Young-Bae

 

 

 

미국에 도착한 지 3주가 다 되어가는 오늘. 한국에서부터 읽기 시작한 박계영(Kye-Young Park)의 책 <<The Korean American Dream>>을 다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자 그가 만들어 사용한 어구 하나가 !’ 하고 떠올라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바로 ‘anjŏng ideology’란 말.

 

그는 그 말의 동의어로 ‘Establishment, Security, Stability’ 등을 제시했는데, ‘(생활기반의) 구축, 안전, (지속적) 안정성쯤으로 번역될 수 있으리라. 말하자면 미국으로 이민 온 한국인들이 추구하는 안정 이데올로기란 바로 먹고 사는 방도의 모색, 각종 위해(危害)나 병으로부터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일, 외부의 충격이나 환경의 변화에도 흔들림 없는 기득권의 지속성등이 아메리칸 드림의 핵심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이게 어찌 이민들에게서 비로소 시작된 정신이랴. 까마득한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거친 황야와 강줄기들을 넘어가며 해가 뜨는 동쪽으로 이동해 왔고, 드디어 한반도에 정착함으로써 정착민으로서의 안정 이데올로기를 추구해온 것 아닌가. 그러니 어딜 가나 한 곳에 뿌리박고 편안한 삶을 추구하는 생활 습관은 조상 때부터 시작되어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 일종의 이데올로기로 굳어졌다고 봐야 한다.

 

남의 땅에서 아예 뿌리박기로 작정하고 떠나 온 이민들 뿐 아니라 우리처럼 단 몇 개월 혹은 1년 동안 머물려고 이 땅에 온 사람들에게도 안정 이데올로기는 무엇보다 중요한 삶의 철학이다. 더구나 단 시간 내 안정 이데올로기를 구현해야 하는 단기 체류자들로서는 도착하자마자 시차 적응을 못 해 휘청거리면서도 안정을 추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

 

15년 전의 경험으로 미루어, 안정적인 주거, 이동 및 통신수단의 확보 등은 미국 생활에서 가장 긴요하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나마 한국인들이 많아서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들이 있는 LA와 달리 드넓은 평원 스틸워터에서 도움을 줄 한국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시차로 비몽사몽 하루 이틀 지내면서 우리는 점점 한계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가져 온 비상식량도 밑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40도에 육박하는 햇살 아래 걸어 다니면서 무언가를 해결하기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예전에 OSU의 학부생으로부터 한두 번 받은 이메일을 뒤지다가 몇몇 한인 교수의 이름을 발견했고,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그 가운데 한 분인 장영배 교수[OSU 기계공학과])’를 찍어 전화를 드렸다.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나자 그 분이 대뜸 내가 연락을 해야 하는데, 먼저 연락 주셔서 고맙다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재미한인들의 상위 1%안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하는 성공적인 직종이 전문직, 그 가운데서도 성공적인 직종이 미국 대학의 한인 교수들이다. 미국에 온 한국인들로부터 연락 받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이 대개 미국 대학의 한인 교수들이라는 어떤 선배의 귀띔을 기억하고 있던 터라, 내 스스로 그 분들에게 연락하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좀 어안이 벙벙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통화를 시작으로 장 교수님은 기꺼이 나서서 우리의 정착을 돕기 시작했다. 장 교수님은 사모님과 함께 우리를 멋진 호숫가의 레스토랑으로 초대하여 점심을 대접해 주셨을 뿐 아니라 수시로 차를 몰고 와서 우리의 시장보기를 도와주셨고, 소개해 주신 한국인 학생의 도움으로 전화를 개통했으며, 결국 몸소 우리를 차에 태우고 에드몬드 시에 가서 자동차를 사게 하심으로써 정착의 대미를 장식하게 되었다.

 

그 분의 도움으로 자동차를 사는 과정에서 우리는 참 많을 것을 배우게 되었다. 나 같으면 대충 후보차종을 고른 다음 이 차 사는 게 어때요?’라고 권할 법 한데, 그 분은 그러지 않으셨다. 우선 우리로 하여금 사이트를 통해 후보 차종을 몇 개 고르고 조건들을 모두 확인하도록 하신 다음, 다시 각종 사이트들을 알려 주시면서 여러 가지 지표들을 통해 그것들을 세밀히 비교하게 하셨다. 그런 다음 각 차종의 문제점들이 보고되어 있는 다른 사이트를 통해 해당 차종들을 또 한 번 스크린하게 하셨다.

 

그 과정에서 섣불리 결정하지 마세요라는 충고를 빈번히 건네시는 것이었다. 차를 사게 하신 것은 물론 보험사까지 꼼꼼하게 챙겨주신 장 교수님. 그 과정에서 성미 급한 나로서는 약간 답답하기도 했지만, 참으로 귀한 가르침이었음을 나중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 가르침이 단순히 차 사는 일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인생사 자체의 소중한 지표가 될 수도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실력 있고 열정적인 교수로서의 학교생활, 다정다감한 가장으로서의 가정생활, 실천적 목자이자 신도로서의 신앙생활을 성공적으로 해 나가시는 장 교수님 덕에 생면부지의 땅 스틸워터에서 이제 막 시작된 가을과 함께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

 

남을 돕는다는 것. 특히 해외에서 조건 없이 동포를 돕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평소 닦아 온 신앙의 힘과 사랑의 정신이 아니라면, 어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9. 10. 12:44

 


로간 교수 연구실 앞에서

 

 

 

 

미국통신 5[로간 교수와의 만남]

 

 

 

현재 OSU 역사학과 학과장으로 있는 로간[Dr. Michael F. Logan] 교수는 외견상 전형적인 카우보이 스타일의 노신사다. 그러나 직접 만나보고 나서야 황야를 주름잡던 카우보이의 활력보다는 아주 온화면서도 부드럽고 생각이 깊으며 카리스마 넘치는 서구 신사의 기풍을 느끼게 되었다. 무엇보다 맘에 든 것은 그가 구사하는 영어가 매우 느리면서도 정확하다는 것. 그래서 누구보다 대화하기 편하다.

 

미국으로 떠나오기 전 한국에서 만난 미국인 교수 크리스 선생이 말하기를 오클라호마는 미국 중남부의 시골이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릿한 그곳 방언을 쓸 것이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내가 만난 이곳 사람들[주로 대학에 근무하는 직원들이나 학생들]은 얼마나 빠른 속도로 말들을 뱉어내는지 그들의 말을 따라가기가 벅찬 나날이다. 그런 사람들만 만나다가 로간 교수를 만나면서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고, 상대방을 피곤하게 하거나 편안하게 하는 데 말하는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나는 크리스 선생에게 자주 제발 말 좀 천천히 하라고 다그치곤 했는데, 그는 그런 지적을 받을 때만 좀 천천히 하는 척 하다가 잠시 후에 보면 아스팔트길의 오토바이 달리듯 저 혼자 내빼곤 했다. 그런 성향은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서 자주 목격할 수 있다. 특히 여학생들이 모여 수다 떠는 현장을 보고 듣노라면 우리말도 영어 못지않게 요란스럽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말이든 영어든 자꾸만 빨라지게 된 것은 아마도 매사 빠름만을 숭상하는 시대의 산물일 것이다. 어쨌든 말하는 방식으로만 따져도 로간 교수는 매력적인 인물임에 틀림없다.

 

작년 겨울 초청장을 보내온 것을 기점으로 로간 교수와의 접촉은 시작되었다. 내가 보내는 이메일마다 따뜻한 답장을 보내주곤 하던 그의 도타운 자세와 마음이 내 마음을 훈훈하게 했다. 특히 초청장에 담긴 호의는 특별한 면이 있었다.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연구계획서만으로 생면부지의 다른 나라 학자에게 그런 호의를 보여주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사 전공인 로간 교수는 특히 근대 미국의 서부, 도회(都會)지역, 환경 분야 등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관심이 학문적으로 승화되어 <<사막 속의 도시들: 피닉스와 투싼의 환경사>>, <<줄어드는 물길: 산타크루즈강의 환경사>>, <<스프롤 현상 (도시 개발이 근접 미개발 지역으로 확산되는 현상)에 대한 투쟁과 시청: 남서부 지역 도시의 성장에 대한 저항>> 등의 주목할 만한 저서들과 <도시 비평으로서의 탐정소설: 변화하는 장르의 인지(認知)>을 비롯한 많은 논문들이 일관되게 도시개발, 환경파괴 등 현대의 문제적 현상들을 역사적 관점에서 다룬 노작들이다. 말하자면 세계 초강대국 미국의 도시화와 환경보존이란 이율배반적 어젠더를 역사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늘 좌우 이념적 대립를 유일한 화두로 안고 끙끙대는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표본일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첫 만남에서 우리는 우리 사이에 큰 공감영역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OSU 역사학과와 영문학과 교수들을 자주 만남으로써 그들로부터 다양한 비전을 얻고자 한다는 뜻을 강하게 피력했고, 그는 내가 그동안 추구해온 문학 연구 상의 역사적 관점을 알고자 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이곳 패컬티 멤버들과의 많은 대화를 통해 시대와 지역, 분야를 초월하는 보편지(普遍知)’의 탐구에 매진해 볼 것이다. 내가 굳이 영문과 아닌 역사학과를 선택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최근 로간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 바로 그런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