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2. 23. 14:15

 

 

 

                         6개월간 몸을 담고 있던 South Murray 홀

 

 

 



                              OSU Student Union

 

 

 



                                        머레이 홀 1층에 있던 연구실 팻말

 

 

 



                                       연구실 내부

 

 

 

 

스틸워터를 떠나며

 

 

 

 

예정 체류기간 6개월을 모두 써버리고, 오늘 드디어 스틸워터를 떠난다. 그동안의 추억에 쩐 짐들이 자동차 트렁크와 뒷좌석에 그득하건만 마음은 대체로 허하다. 그 옛날 유목민들이 이랬을까. 천막을 대충 걷어 말 등에 올려 메우고 정처 없이 또 다른 풀밭을 따라 길을 떠나던 그들의 기분이 아마도 이러했을 것이다. 농경 정착민의 후예인 내가 노마드라니? 스스로의 몸에서 노마드의 애환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나를 감싸고 있는 시대의 변화 때문이리라. 풀이 자라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맹세를, 떠나는 아침이면 그 옛날의 유목민들은 무수히 되뇌었을 것이다. 삶터 앞을 졸졸거리며 흐르는 시냇물을, 천막 주변에서 재잘거리던 작은 새들을, 가끔씩 찾아와 기웃거리던 사슴이나 토끼들을, 환하게 미소 짓던 꽃들을, 귓가에 스쳐가던 바람결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천 년의 세월을 격()한 노마드의 서정이 이 순간 내 마음을 치고 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24일 아침, 오클라호마시티의 윌 라저스 공항[Will Rogers World Airport]’ 출발 예정. 그러나 아직도 이 땅에 미련이 남았는가. 기다리는 사람은 없지만, 둘러 볼 곳들이 남아있어 스틸워터 출발 날짜를 며칠 당기기로 한 것이다. 무스코기(Muscogee)와 오크멀기(Okmulgee)에 모여 산다는 크릭(Creek) 인디언들을 만나기 위해 동쪽의 우회로를 택하기로 한 것.

 

스틸워터를 떠나는 이 순간의 기분은 9년 전 중남부 유럽의 20개 나라들을 자동차로 돈 뒤,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귀국 비행기에 오르던 그 기분과 동일하다. 사실 아무런 경험이나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구석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으면서도 타고 난 낙천성과 조심성 하나로 무사히 그 길을 주파(走破)해낸 것처럼, 달력에 하루하루 금을 그어가며 체류해온 오클라호마 주와 스틸워터 역시 까맣게 모르던 공간들이면서도 그다지 숨차 하지 않고 골인 지점에 도착한 것이다. 처음으로 마주친 중남부 미국인들의 보수성이 우리가 기대하고 있던 미국인들의 일반적 성향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에 머리를 갸웃거렸지만, 그들의 보수성이란 자기표현의 미숙함이외의 아무것도 아님을, 나는 그들을 만나는 순간 간파할 수 있었다. 사실 나로선 그게 가장 큰 행운이었다.

 

풀브라이터(Fulbrighter)로서의 가볍지 않은 사명을 짊어지고 오긴 했지만, 연구 외에 이곳에서 발견한 또 다른 것들이 나를 달뜨게 했다. 이곳 사람들과의 만남, 인디언의 역사나 문화와의 만남, 길과의 만남, 이상적인 환경과의 만남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했던 스틸워터는 문만 닫으면 절간처럼 조용해지는 공간이었다. 맑은 공기 속에 한 발만 나서면 온갖 새와 나무들이 그들먹한 낙원이었다. 기대 이상의 힐링을 체험하며 마음속의 온갖 찌꺼기들을 날려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이라고 어찌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그로부터 일어나는 불행들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러나 유목민들이 아름다운 꽃향기와 산토끼의 해맑은 눈빛, 그 지순(至純)한 추억으로 광풍 몰아치던 수많은 밤들의 괴로움을 지우듯, 아름답지 못한 것들을 걸러내는 능력이야말로 지혜로운 인간의 전유물 아닌가. 사실 짧지 않은 6개월 동안 걸러내야 할 단 하나의 씁쓸함도 만나지 못한 나였다. 스틸워터에서 화려한 행복 보다는 작고 따스하며 담백한 즐거움 속에 거의 완벽한 힐링의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제 맛있고 영양가 풍부한 풀들이 많이 자라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옛 고향으로 소떼를 몰고 재입사(再入社)하기로 한다.

 

 

 

 


산책로의 한 부분

 

 

 

 


가끔 산책하던 부머 호수의 오리들

 

 

 

 


부머 호수의 서정

 

 

 

 


아파트 뒤켠 풀밭에서 식사하고 있는 기러기들[Canadian Goose]

 

 

 

 

 
아파트 주차장까지 진출한 기러기들

 

 

 

 


산책로의 전선을 점령한 새들

 

 

 

 


산책로에서

 

 

 

 


산책로에서

 

 

 

 


눈 내린 산책로의 한 부분

 

 

 

 


산책로에서 만난 이름 모를 열매

 

 

 

 


산책로에서 만난 다람쥐

 

 

 

 


추운 날 산책길에 만난 이름 모를 새

 

 

 

 


OSU 스포츠의 대명사 풋볼 팀 광고사진

 

 

 

 


'2013년도 풀브라이트 강화 세미나[2013 Fulbright Enrichment Seminar]'에 참석한
 각국의 학자들 중 몇몇과 함께

 

 

 

 


스틸워터 입구에 세워진 표지석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2. 16. 04:52

 

 

 


숲속 길-1

 

 

 

 


숲속 길-2

 

 

 

 


숲속 길-3

 

 

 

 


숲속 길-4

 

 

 

 


숲속 길-5

 

 

 

 

 

 

아찔했던 순간, 엔젤 파이어 마운틴의 환상

 

 

 

 

타오(Taos)로부터 빠져나왔을 땐 오후 4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뉴멕시코를 벗어나는 길은 두 갈래였다. 다시 산타페 쪽으로 돌아가 I-40을 타는 코스, 그 반대로 북쪽에 가로막힌 산맥을 넘는 지름길 코스 등 두 개의 옵션이었다. 하늘에는 무거운 구름이 잔뜩 몰려들어 타오 산의 절반 이상을 덮었고, 저녁이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지름길이든 우회로이든 I-40에 접어들어야 뉴멕시코를 벗어난 뒤 애당초 계획대로 텍사스 주의 아마리요(Amarillo)에서 1박을 할 수가 있었다. 지도상으로 지름길은 긴 코스에 비해 절반가량의 거리였다. 순간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좋다. 지름길로 간다. 1,800년 이태리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이 지름길인 알프스를 넘던 기백을 상상하며 산길을 타기로 한 것이다.

 

꼬불꼬불, 오르락내리락, 산길은 예상보다 험했다. 깊이 들어갈수록 오고가는 차량들도 뜸했고, 말 두 마리와 검정 소 10여 마리가 서 있던 목장을 끝으로 인가도 사라졌다. 석양은 저 멀리 산 끝에 간신히 걸려 있었다. 다시 울창한 삼림으로 들어서면서 사위(四圍)는 어둑해지고, 하늘의 구름은 더 두꺼워졌다. 눈발이 날렸고, 설상가상으로 아스팔트가 끊기면서 비포장도로가 시작되었다. 흙과 자갈이 적당히 섞인 길바닥엔 1~2인치 정도의 눈이 쌓여 있었다. 산속의 기후가 평지와 다르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지도상에 점선으로 표시된 길이가 매우 짧았음을 생각하고 애당초 가졌던 나폴레옹의 기개를 견지하기로 했다.

 

그러나 가도 가도 눈 덮인 산길은 끝을 보이지 않았다. 가슴 저 밑에서 작지 않은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지만, 사령관이 흔들리면 전투력은 와해되는 법. 그냥 밀고 나갔다. 이미 인적(人跡)이고 차적(車跡)이고 끝난 지 오래되어 적막한 산길임에도 주변의 경치는 끝내주게좋았다. 쭉쭉 뻗어 올라간 나무들에는 하얀 눈이 덮여 어딜 보나 한 폭의 겨울풍경화였다. 군데군데 손바닥만하게 펼쳐진 풀밭들에는 눈과 수정모양의 얼음이 어울려 하늘이 조화를 부린 듯 했다.

 

몇 구비 산을 넘은 뒤 우리는 진짜로 동화의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분지 형으로 생긴 계곡 한쪽의 산록에 수많은 사슴들이 눈밭을 헤집으며 먹이를 찾고 있는 것 아닌가. , 전 세계 산타 할아버지들이 타고 다니는 사슴들이 여기서 사육되는 것이로구나! ‘인영(人影)이 불견(不見)’인 이 산중에 도대체 이 많은 사슴들은 어떻게 모여 있단 말인가. 길 가에 차를 세우고 차창을 내렸다. 몇 녀석은 풀을 찾다 말고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서 있고, 다른 녀석들은 오불관언(吾不關焉)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이게 바로 동화의 세계가 아닌가.

 

 

 

 

 


선경에 노니는 사슴들-1

 

 

 


선경에 노니는 사슴들-2

 

 

 


선경에 노니는 사슴들-3

 

 

 


선경에 노니는 사슴들-4

 

 

 

 

온통 눈에 덮여 순백으로 변한 무대에 사슴의 무리가 연출해내는 환상의 순간을 우리는 어쩔 줄 모르고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자연의 위대한 아름다움에 흠뻑 취한 것이다. ‘어떻게 이 산을 벗어날 것이며, 우리에게 닥친 위험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라는 걱정과 불안은 이미 우리의 뇌리를 떠난 지 오래였다. ‘저 아름다운 사슴들이 살아가는 이 공간에 무슨 위험이 있을 것이며, 설사 차가 전진하지 못한다 한들 저 녀석들과 하룻밤 지새지 못할 이유가 뭔가?’라는 오기가 발동한 것이었을까. 그 녀석들에게 눈길을 주는 동안은 단 한 점의 걱정도 없었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저들은 환상 속의 존재들이고, 우리는 현실의 존재들 아닌가. 어떻게든 벗어나야 했다. 그로부터 자동차를 살살 달래가며 액셀러레이터에 힘을 가했다. 묘하게도 사슴을 만난 곳으로부터 30분쯤 지나자 숲이 끝나고 다시 광대한 대지가 나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20여 분을 달리자 하나 둘 민가가 나타나고, 10여 분을 더 달리자 아스팔트 도로가 나타났다. 까맣게 밤이 내린 드넓은 대지를 쾌속으로 달려 밤 8시나 되어서야 겨우 모텔 하나가 있는, 주 경계선 지역의 작은 도시 로건(Logan)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텔에 도착한 뒤 하루 행적을 복기(復碁)해 보았다. 모텔에 도착하고 나서야 겨울 동안 미국 각지의 산악지역에서 조난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도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조난당했을 때 얼마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장비들은 갖추고 다니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행을 당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우리는 어땠나? 우리의 트렁크엔 간단한 캐리어 하나만 달랑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 흔한 담요도, 랜턴도, 간식거리도, 여분의 옷도 없었다. 스모커 아닌 내게 라이터나 성냥이 있을 턱도 없었다. 그 산중에서 터지지도 않는 전화기는 무용지물이었다. 인가가 있다 해도 미국의 관습상 찾아들어가 구조를 요청할 수 없는 것이 상식이지만, 아예 그런 인가마저 없었다.

 

그 눈 내리는 산 속에서 자동차가 덜컹하고 서거나 미끄러지기라도 했다면, 작은 눈이 폭설로 변해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면, 그래서 꼼짝 없이 그곳에 갇혔다면, 자동차의 연료가 소진되는 순간, 우리는 딱딱하게 굳은 채 세상을 하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이 세상에 많은 인연을 남겨 둔 우리가 미국 뉴멕시코의 산길에서 속절없이 세상을 하직하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허무한 일 아닌가.

 

미국에서 장거리 자동차 여행을 하시는 분들은 명심해야 할 일이 있다. 자동차 트렁크에 각종 구난 장비들을 철저히 챙겨두시라. 차를 구입하자마자 어디서나 터지는 스마트 폰, 성능 좋은 랜턴, 라이터나 성냥, 담요, , 여분의 옷가지, 충분한 간식, 작은 톱[조난 시 불 지필 나무를 자를 때 필요함], [혹시 간단한 요리나, 사냥 혹은 위급할 때 필요함] 등을 챙기시라. 6개월 동안 유럽을 자동차로 돌아다니면서도, 한국의 그 험한 산길들을 종횡무진 다니면서도, 아무 문제없었다는 자만과 안이함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엄청난 위험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자만은 금물이다.

 

다만, 그 순간에 만난 사슴 떼는 우리의 불안을 잊게 만든 하늘의 배려였다. 그래서 그 순간을 생각하며 하나님과 그 사슴들에게 감사하고 있는 요즈음이다.

 

 

 

 

 


산 속의 작은 공간-1

 

 

 


산속의 작은 공간-2

 

 

 


눈 내리는 산길

 

 

 


눈 맞은 자작나무 숲

 

 

 


눈 내린 고갯길

 

 

 


다시 찾은 대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 1. 13:19

 

 

 

 

 

 

 

새해인사

 

 

 

계사년이 저물고, 대망의 갑오년이 밝았습니다.

미국의 이 지역은 한국에 비해 14시간이 늦은 관계로 이제야 새해인사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우선 사건도 많고 말도 많았던 지난해를 무탈하게 넘기시고 새해를 맞이하신 백규서옥 손님 여러분께 진심으로 큰 복을 빌어드리고 싶습니다.

 

요즘 들어 우리나라는 여러 면으로 복잡해지고, 그에 따라 개인들도 살아가기가 수월치 않은 게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제가 체류하고 있는 오클라호마 주의 반 밖에 안 되는 면적에 5천만의 인구가 살고 있으니, 많은 갈등과 다툼이 생겨날 것은 당연하겠습니다만. ‘원칙과 법치’, ‘양보와 신뢰만이 그나마 우리의 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묘책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한 해 제게도 좋은 일, 궂은 일 등 곡절이 적지 않았습니다. 재직하는 학교에서 그 학교의 첫 아너 펠로우 교수(Honor Fellowship Professor)’로 선정된 일과 풀브라이트(Fulbright) 지원 학자로 선정되어 미국에서 연구와 재충전의 기회를 제공받은 일은 제 일생을 통해 가장 과분한 영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덕에 도전과 힐링(healing)’이란 목표를 갖고 미국으로 건너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정 기간의 반 이상을 보낸 지금 그 목표가 얼마나 달성되었는지 반성하며 스스로 자책하고 있습니다. 그 반면에 약간 서운한 일도 물론 있었습니다. 인간 사이에서 오고가는 거짓이나 술수만큼 사악한 행위도 없을 것입니다. 뻔히 알면서도 겪은 경우는 올해가 처음입니다만. 그 모든 것들이 제 모자람에서 기인한 것이라 치부하고, 오히려 자신을 닦달하며 사랑으로 감싸 안으려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결국 참회의 눈물을 보이며 돌아올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국가든 직장이든 개인이든, 새해엔 많은 시련과 도전에 직면하리라 생각합니다. 주변의 여건들이 결코 만만해 보이지 않는 요즈음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중심을 잡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국가도, 직장도, 개인도, 중심이 없으면 허물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학자로서의 중심을 다잡으려는 것이 올 한 해 견지하고자 하는 목표이자 과제입니다. 여러분께 많은 지도와 편달, 부탁드립니다.

 

모쪼록 여러분 모두 건강하시고, 가정에 평화와 행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2014년 새해 아침에

 

백규 올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23. 02:57

 

 

 

고마운 미국인들, 그리고 인디언 전사들

 

 

 

 

얼마 전 이곳 OSU 역사학과의 강사 Gary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미국에서도 이제 세계를 상대로 한 경찰국가의 노릇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여론이 커지고 있으며, 그도 그 여론에 찬성한다고 했다. 나는 그의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거나 짧은지 말해 주었다. 미국이 경찰국가를 자청하는 의도의 이면에 엄청난 국가이익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 미국이 만약 경찰국가를 포기할 경우 다른 어느 나라[예컨대 중국, 일본, 러시아 등]가 경찰국가를 자임하고 나서거나 다양한 세력들의 춘추전국 시대가 전개되어 결국 미국은 자국마저 방어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는 것등을 들어 미국은 결코 그 역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포기할 수도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결국 그는 내 말을 수긍했다.

 

***

 

길 가다가 한쪽 편을 들어 싸움판에 끼어들기란 쉽지 않다. 더구나 한쪽 편을 대신하여 맞거나 때려야 하는 입장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물며 다른 나라의 전쟁에 내 나라의 젊은이들을 파견하여 피를 흘리게 하는 일의 어려움이야 오죽하랴. 사실 미국이 관여해온 전쟁은 많았고, 지금도 어디에선가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미국이 취해왔거나 취하고 있는 대외정책의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문외한인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Yukon City에서 베테란들을 만나 한국을 구해줘서 고맙다는 진심어린 인사를 건넨 것처럼, 나는 미국이 625 때 우리를 구해줘서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나라라는 점은 뼈에 새길 정도로 갖고 있다. 625의 원인이나 동기를 따질 필요도 없이 만약 미국 등 UN 기치 하의 16개국이 자국의 젊은이들을 파견하지 않았다면, 죽었다 깨나도 백두혈통이 아닌 이 나이의 내가 갓 30의 애송이 김정은에게 마구 짓밟히고 있거나 분명 어느 수용소에라도 들어가 있을 것 아닌가. 그 끔찍함을 상상할 때마다 미국이 고맙기만 하다.

 

***

 

미국은 사실 베테란의 나라다. 역대 대통령들을 비롯한 정치인들 대부분이 베테란들이다. 그래서인지 어느 도시를 가든 베테란을 위한 뮤지엄이 있고, 추모기념관이나 공원들이 중심부에 마련되어 있다. 나는 유콘 시티의 베테란 뮤지엄에서 625 당시의 귀한 자료들을 얻었고, 그로부터 멀지 않은 엘 르노시티의 다운타운에서 625 전몰용사들의 추모비를 발견했다. 그리고 최근 치카샤 인디언 네이션을 답사하던 중 듀랭(Durant)이란 자그마한 도시에서 625 전몰용사 추모비를 또 발견했고, 잘 알려지지 않았던 촉토(Choctaw) 인디언 네이션 뮤지엄과 세미뇰(Seminole) 인디언 네이션 뮤지엄에서 625 관련 자료들을 여러 점 목격하고 감동을 받은 바 있다.


투스카호마(Tuskahoma)에 있는 촉토 네이션 뮤지엄(Choctaw Nation Museum)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자국의 용사들을 명예롭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나라가 미국임을 이런 사례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625가 끝난 지 60여년이 지난 지금도 병사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자국으로 모셔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라. 살아있는 참전용사들마저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우리와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베테란들을, 전몰용사들을 그딴 식으로대접해 놓고 어떻게 젊은이들보고 전쟁터에 나가라고 할 수 있을까.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해외의 전쟁터에 기꺼이 나가는 젊은이들을 보며, 미국의 시대가 쉽게 저물지 않을 것임을 감지하게 된다.

 

 


유콘 시티 베테란 뮤지엄의 한국전 코너

 


6 25 당시 한국전에 참여했던 카치니[당시 상사]가 표창을 받는 모습

 


엘 르노 시티 다운타운에 있는 전몰용사 추모 공원

 

***

 

엘 르노 시티 다운타운의 전몰용사 추모공원 한 복판. ‘Korea’라는 글자들이 선명한 비석 중심에 ‘Dobbs, Johnny F./Johnson, Melvin J./Reed, Amzie O./Rogers, Glenn R./Rother, Robert L./Stanphill, Verlyn L./Wiewel, James M./Williams, Johnny/Wosika, Paul J./Ruser, Charles H./Morse, Robert L./Hollman, Paul H.’ 등 한국에서 전사한 미국의 젊은이들의 빛나는 이름들이 올라 있었다.

 

 


엘 르노시티 전몰용사 추모공원의 한국전 전사자 추모비

 

 

치카샤 인디언 네이션에서 촉토 네이션으로 넘어가는 어름에서 듀랭(Durant) 시티를 만났고, 그 시청 앞의 ‘Korean War’라는 추모비에서 ‘Donnie J. Airington/Troy W. Bailey/J. C. Burr/James H. Cross/George H. Dillard/Carl Dill/Ernest H. Haddock/George O. Hiser/Arnett Lamb/Dewey E. McGehee/Charles L. Minyard/Loy A. Philpot/Ben D. Trout’ 등 젊은 전사자들을 발견했으며, 그들의 명복을 빌었다.

 

 


듀랭(Durant) 시티의 한국전 전몰용사 추모비

 

 

촉토 네이션 뮤지엄의 한복판에도 각종 전쟁에서 활약한 촉토족 전사들의 활약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12차 세계대전에서 암호 해독병으로 활약한 그들의 공적이 크게 부각되어 있었다. 촉토족 언어가 전선에서 연합군 측 암호로 쓰인 점을 이 뮤지엄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어쩌면 그것은 한국전에서도 활용되었을 것이다. 미국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뮤지엄의 뜰에도 전몰용사를 추모하는 비석이 서 있었고, 한국전에서 사망한 용사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Amos, Morris/Bryant Jr., William/Burris, Tony *winner of Medal of Honor/Cole, William/Dill, Carl/Green, Joe/Franklin, Preston/Frazier, Elam/Kaniatobe, Charles/Killingsworth, Leo/Mcclure, Jim/Mccurtain, Buster/Mccurtain, Isaac/Ontayabbi, Timothy/Rasha, Willie/Watson, Leonard’ 16명의 혈기방장했을 젊은이들이 전사자 추모비에 자랑스럽게 올라 있었다. 이 가운데 명예훈장을 받았을 정도로 전공이 혁혁했던 인물 Burris, 형제가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BusterIsaac 등은 한동안 내 눈길을 끌었다. 추모비 뒤쪽에 촉토족의 용맹을 대표하는 붉은 전사[Red Warrior]’가 적의 가슴을 향해 활을 힘껏 당기는 모습의 동상이 서 있는데이들 전몰용사들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후예들이 아니겠는가.

 

 


촉토 네이션 뮤지엄 뜰에 서 있는 한국전 전몰용사 추모비


2차세계대전에서 암호병으로 활약하여 큰 공을 세우고 훈장을 받은 촉토족 전사들

 


촉토 네이션 뮤지엄 앞에 서 있는 '붉은 전사[Red Warrior]' 상

 

최근 만난 한 미국인은 자신의 할아버지가 열아홉 나던 해 한국전쟁에 참여했다고 했다. 다행히 그는 살아 돌아왔지만, 그 점으로 미루어 이곳에서 만나는 전몰용사들 역시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걸치는 젊은이들이었을 것이다.

 

더 감격스런 일은 위워카(Wewoka) 시티의 세미뇰 네이션(Seminole Nation)에서 있었다. 세미뇰 네이션 뮤지엄에는 군사박물관[military museum]’이란 별도의 방을 마련하고, 제12차 세계대전, 한국전, 베트남전 등 미국인들이 참여한 세계 각처의 전쟁 코너들을 별도로 마련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전 코너에서 참으로 인상적인 자료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해병중위 팩터(Kenneth J. Factor)가 정찰임무 수행 중 전선에서 실종되었다는 사실과 그의 사진이 전시되었을 뿐 전몰용사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에 관한 귀한 자료들이 여러 점 전시되어 있었다. 그 때의 한국인들에 관한 캐리커츄어(caricature) 석 점인데, 그림도 그림이려니와 그 밑에 달아둔 멘트가 감동적이었다. 약간 서양식으로 변이된 복장의 노인 둘, 여인네 둘, 꼬마 셋, 장승 하나를 그린 다음, ‘한국인들은 우아하고 자부심 강한 민족[The Koreans are a graceful and proud race]’이라는 멘트를 달아놓은 것이 그 하나이고, 소달구지를 몰고 가던 중 넘어진 소에게 화를 내는 주인과 깔깔대며 재미있어 하는 구경꾼들을 그린 다음 한국인들은 가끔 화를 내면서도 예리한 유머감각을 지녔다[They have a keen sense of humor despite their occastional bursts of temper]’는 멘트를 달아 놓은 것이 두 번째 것이며, 장대비가 쏟아지는 속에 우산을 쓰고 가는 사람들을 그린 다음 한국에서는 7월과 8월에 장마철이 시작된다[The rainy season occurs in July and August]’는 사실 관계 멘트를 달아놓은 것이 세 번째 것이었다. 이들이 얼마나 따스하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한국인들을 관찰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사례들이었다.

 

 


위오카(Wewoka) 시티에 있는 세미뇰 네이션 뮤지엄

 


세미뇰 네이션 뮤지엄의 한국전 코너

 


한국전 코너의 '6 25 전쟁 종군 기장'

 


한국전에서 실종된 팩터(Kenneth J. Factor) 중위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들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한국 가이드북)

 


한국전 코너에 전시된 자료(한국 가이드 북)

 


한국전에 관한 저널의 보도

 

 

그러나 무엇보다 내 가슴을 찡하게 만든 것은 이들이 전선에 나가는 자민족 군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만들었음직한 한국어 교재였다. ‘추가적인 표현[Additional Expression]’이란 표제가 붙은 것으로 보아 주 교재는 별도로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실린 총 18개의 표현들은 한국에 가면 꼭 알아야 하는 것들이라고 그들 나름대로 판단했던 것 같은데, 그 내용이 참으로 흥미롭다.

 

I’m hungry                                   SEE-jahng HAHM-nee-dah

I’m thirsty                                    MAWG mah-ROOM-nee dah

I’m lost                                         NAH-noon KEE-rool eer-huss-SOOM-nee-dah

I’m tired                                      NAH-noon CHAWM KAW-dahn HAHM-nee-dah

I’m wounded                              NAH-noon CHAWM tahch-huss-SOOM-nee-dah

Stop!(to someone running away)           KUG-ee sut-suh

Hold still!                                                     KAH-mah-nee ISS-suh

Wait a minute!                                           CHAHNG-gahn kee-dah-REE-see-yaw

Come here!                                                 EE-ree AW-see-yaw

Quickly!                                                       BAHL-lee

Right away!                                                 KAWT

Come quickly!                                            BAHL-lee AW-see-yaw

Go quickly                                                   BAHL-lee KAH-see-yaw

Help! SAH-rahm                                       SAHL-liyaw

Help me                                                      CHAWM TAW-wah choo-SIP-see-yaw

Bring help                                                  SAH-rahmool CHAWM TAHR-yudah CHIOO-see-yaw

I will pay you                                            TAWN too-ree-gess-SOOM-nee-dah

 

 


당시 한국전에 참가할 세미뇰 병사들에게 교육하던 한국어 추가 교재

 

 

 

자기 민족의 젊은이들을 아무런 정보도 없는 한국의 전쟁터에 내보낸다고 생각해보라. ‘이 녀석들이 배고프면 어쩌나, 목이 마르면 어쩌나, 낯설고 물 선 타국 땅에서 길을 잃으면 어쩌나!’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까. 미국 연방정부의 명령이니 네이션에서도 파병을 거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교육을 시킨 것 아닐까. 도망가는 적군에게 ‘stop!’ 대신 거기 섰어![KUG-ee sut-suh!]’라고 외쳐야 알아듣는다는 걸 대체 누가 알려 주었단 말인가. 이 추가적 표현들이야말로 생존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사항들인데, 영문자로 간신히적어놓은 이 발음대로 말했다 한들 알아먹었을 한국인들이나 인민군들이 몇이나 되었을까.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 채 보내는 것보다는 이 정도라도 알려서 보내는 것이 그나마 부모 형제, 동족으로서는 마음 놓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길 떠나는 자식에게 불안한 마음에서 쓸데없이이것저것 잔소리하는 우리네 부모의 심정이 이랬을까.

 

그렇게 이역만리 전쟁터로 사랑하는 아들들을 보낸 미국인들, 혹은 인디언들이었다. 그들의 희생 덕에 우리는 기사회생(起死回生)했고, 세계 10위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지금 등 따습고 배부른우리는 당시 거지 몰골로 우리네 사립문을 흔들며 나는 시장합니다!’라고 외쳤을 인디언 전사들, 아니 이름 모를 험한 계곡에서 피 흘리며 죽어갔을 그들의 모습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기억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오히려 당시 우리를 죽이려 했던 적들에게 공공연히 부역(附逆)하려는 무리가 백주대낮에 활개를 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21. 11:54

 

 

 

 

길 이야기

 

 

 

 

 

그대는 우울한 시절 햇살과 같아

그 시절 지나고 나와 지금도 나의 곁에서

자그만 아이처럼 행복을 주었어

 

~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고

아픈 시간들 속에서 어떻게든 가야만해

 

혼자서 걸어간다면 너무나 힘들 것 같아

가끔이라도 내 곁에서 얘기해 줄래

그 많은 시간 흐르도록 내 맘속에 살았던 것처럼

 

사랑도 사람도 나를 외면했다고 하지만

첫 새벽 공기처럼 희망을 주었어

 

오랫동안 소리 없이 내게 살아왔던

너를 사랑해

너를 사랑해

 

 

 

모처럼 접해 본 윤도현의 노래 <>이다. 행복한 사람도 상처를 입은 사람도 살아있는 이상 걸어가야 하는 것이 길이다. 길을 말하다가 너에 대한 사랑으로 끝맺는 윤도현의 노래가 좀 낯선가. 작사자는 누군가 먼 길을 가다가 문득 내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길동무로서의 를 발견했을 것이다. 혹은 를 통해 함께 걸어가야 할길을 예감했거나 함께 해야 할운명을 깨달은 건 아닐까. 그래서 윤도현의 와 함께 함으로써 운명적 사랑이 구현되는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길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가. 아니다.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것이 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시작도 없다. 길에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면, 그건 길이 아니다. 언젠가 시작되었겠지만, 그저 까마득한 옛날부터 이어져 오는 것이 길이고, 끝 간 데 없이 뻗어가는 것이 길이다. 잘 찾아간 것으로 여겼지만, 곰곰 생각하면 잘 찾아간 길이 아닌 경우가 전부다. 그래서 다시 출발점을 찾지만, 그 찾으려는 출발점도 마치 끝인 양 잘 찾아지지 않는 것이 길이다.

 

어떤 사람들은 길이 길다의 형용사와 관계가 깊은 명사라 한다. 옛 사람들은 마장으로 그 길이를 가늠해왔고 현대인들은 kmmile로 그 길이를 재고 있지만, 그건 그냥 인간의 짧은 인식이 만들어놓은 편리한 단위일 뿐이다. 끝인 것 같은 곳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이 길인데, 그 길을 누가 어떻게 잴 수 있단 말인가. 길을 찾다 보면 시작과 끝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누구나 경험하지 않는가.

 

누군가 인생을 나그네 길이라 했다. 시작도 끝도 없이, 한시도 쉼 없이 걸어야 하는 길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휴게소에 들러 잠시 웃으며 쉬면서도 갈 길을 걱정해야 하고, 다 왔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도 다시 돌아갈 길을 걱정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갈 길과 돌아오는 길은 한 치도 끊어지지 않는 연속일 뿐이다. 사람들은 그걸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닌다. 인생의 험한 길을 걸어가면서도, 그 사이에 부지런히 올레길을 찾고 둘레길을 찾으며 골목길을 헤맨다.

 

길 아니면 가지 말라고 했지만, 사람이 가면 길이 되고 길을 내면 사람이 다닌다. 그래서 인간세상에 길 없는 곳이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은 옳은 길그른 길을 구분하지만, 옳고 그름의 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또 어떤 길이 옳았는지는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판단할 수 있다고 하지만, 그 많은 시간의 기준도 명확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사람들은 길을 찾아왔으나 제대로 찾은 사람은 많지 않고, ‘올바른 길을 통해 삶이 완성된다고 믿고 있지만, 올바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도 별로 없다. 길을 찾으러 길을 나서기가 두려워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고, 발로 밟을 수 있는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길이나 찾아다니며 맛볼 따름이다.

 

***

 

미국에 체류하면서 휴일이나 휴가에는 반드시 길을 나선다. 남한 면적의 두 배가 넘는 오클라호마 주는 미국 역사의 양지와 음지를 모두 갖고 있다. 그 가운데 내가 크게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은 음지에 속하는 아메리카 인디언의 역사와 문화다'식민주의'가 백인들의 원죄라면, 그 원죄의 역사적 표본을 이곳에 만들어 놓은 그들의 진의는 무엇이었을까. 자신들의 새로운 삶터를 건설하기 위해 인디언들을 고향에서 쫓아낸 백인들.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쫓겨나 눈물의 장정[Trails of Tears]’이란 쓰라림을 맛보며 대부분 오클라호마의 한 구석에 강제로 정착당한 인디언들. 그들 두 부류의 인간들은 오늘날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오클라호마주 전역 교통도

 


이번에 여행을 하고 있는 치카샤 및 촉토 인디언 지역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이른바 '눈물의 여정(Trail of Tears)'

 

그런데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 쉽지 않다. 그 그늘을 확인하기 위해 토요일과 일요일은 물론 각종 휴가나 방학 등을 활용하지만, 길이 너무 멀어서 쉽지 않다. 그래도 쉬지 않고 다니는 편이다.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길의 매력에 있다. 내가 지금 사는 곳과 가려는 곳이 엄청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지만, 그 연결고리로서의 길은 또 다른 가치와 의미를 지닌 공간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느 나라보다 미국의 길들은 넓고 곧다. 특히 가도 가도 산이 보이지 않는 오클라호마의 길은 약간의 과장을 보탠다면 솜씨 좋은 장인이 대지에 그은 미학적 직선처럼 보인다. 그저 자를 대고 종이 위에 쭉 긋는 선이 미학이나 철학을 갖기란 어렵다. 그러나 최소한 대지의 핏줄을 타고 심장을 직격(直擊)하는 선은 생명이나 미학, 혹은 철학과 직결된다. 그 생명성을 느끼게 하는 직선의 미학이 이곳 길들에는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한동안 내가 천착해온 ‘66번 도로와는 다른 차원의 의미가 직선으로 쭉 뻗은 오클라호마 주의 길들에는 들어 있다는 것이다.

 

 


Route 66 표지판

 


클린턴에서 스틸워터 오는 도중

 

땅이 넓으니 그런 것 아닌가라고 항변할 수 있겠는데, 사실은 그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다만 나는 이미 나 있는 길들의 해석적 의미, 혹은 내 나름의 생각이나 느낌을 강조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 길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가장 큰 요소는 인공과 자연의 자연스러운 어울림이다. 길을 따라 형성된 도시나 주택 등 인공의 구조물들은 철저히 자연의 질서와 호흡을 함께 하는데, 그 점이 그 자연스러움을 해치지 않는 요인이다. 땅 넓이에 비해 사람 숫자가 턱 없이 적으니, 굳이 자연의 질서를 거스를 필요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미국 아니라 어떤 나라라도 이런 도로들을 갖고 있다면, 나는 그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엘크에서 클린턴 가는 도중

 

6개월 가까운 기간 유럽을 자동차로 여행하면서 길의 아름다움에 반한 적이 있다. 자동차를 몰아 스위스의 산하를 건너고 오르내릴 때의 짜릿한 흥분을 잊을 수 없다. 하늘로 솟구쳤다가 바다 밑으로 잠기는 듯한 충격을 스위스에서 운전하는 동안 느꼈기 때문이다. 동쪽의 바리항에서 서쪽의 나폴리까지 이태리를 횡단할 때 느낀 평화로움과, 프랑스 남부로 가기 위해 몽블랑 산맥의 터널을 넘을 때 느꼈던 혼돈과 재생의 희열을 그 후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했다. 프랑스 중남부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하이웨이와 독일 로만틱 가도를 달릴 때의 편안함과 드라이버로서의 자긍심을 그 후 다시 느껴본 적이 없다. 동유럽 루마니아를 종단하면서 열악한 도로사정과 그들의 험한 운전 관습 때문에 흘린 땀과 긴장감을 그 후 어디에서도 다시 체험하지 못했다.

 

 


엘크 시 초입


치카샤에서 촉토로 넘어가는 길 어디쯤

 


OSU 중심을 가로지르는 먼로 길[Monroe Street]

 

***

 

15년 전 LA에 머물 때 간헐적으로 미국 안에서의 장거리 운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아직도 그 때 달리던 캘리포니아 서쪽의 1번이나 101번 해안도로를 잊지 못한다.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주를 거쳐 캐나다 로키산맥을 종단할 때의 그 천상에 오른 듯하던기분도 잊지 못한다. 미국 서부지역 사막지대의 가물가물한 지평선을 바라보며 달리다가 난데없는 폭우를 만나 흔들거리던 차 안에서의 말 못할 두려움 또한 잊지 못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시도 잊을 수 없고 피할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의 길과 운전자들이다. 땅은 좁은데, 사람도, 차도 많아 참으로 운전하기 어렵다. 시간은 없는데 도로가 막히면 짜증이 난다. 교통신호나 법규를 지키려다간 바보 취급당하기 일쑤다. 규정 속도를 지키려다간 뒤차 운전자에게 모진 욕설이나 듣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운전자들은 집단 스트레스에 걸려 있다고들 말한다. 그래서 평소에 점잖고 존경받는 사람도 일단 핸들만 잡으면 매우 거칠어지는 것이 우리나라라고들 말한다.

 

우리나라 운전자들은 누구나 세계 어딜 가도 최고의 운전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끼어들기 천재, 앞지르기 천재, 신호위반 천재, 차선 안 지키기 천재, 경적 심하게 울리고 라이트 번쩍거리기 천재, 창유리 내리고 욕설 퍼붓기 천재 등등. 우리나라 사람들은 목숨을 건 곡예운전의 달인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내가 운전을 그만 두어야 그나마 제 명대로 살지!’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

 

미국에서는 길, 특히 오클라호마 주와 같은 전원지역의 길들 덕분에 행복해진다. 야산 하나 보이지 않는 드넓은 들판 사이를 달리다 보면, 가슴이 뻥 뚫리고 휘파람이 저절로 불어진다. 길 좌우에는 목장이 이어지고, 한가로이 풀을 뜯는 검정 소들이 가끔 고개를 들어 달려가는 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한다. 목초지에서 베어낸 풀들을 말아놓은 건초뭉치들도 흡사 십대 남자 아이 얼굴의 여드름처럼 아름답게 돋아 있다.

 

 


킹피셔 인근 지역도로

 


킹피셔 인근지역에서 포착한 지평선 위의 소들

 


치카샤에서 촉토로 가는 도중, 산중의 한 목장을 지나면서 만난 소들. 이들을 가까이 보려고
길가에 차를 세우고 밖으로 나왔더니 글쎄 이 녀석들이 웅얼거리며 걸어와 우리를 유심히
쳐다 보더군요. 우리가 그들을 구경한 게 아니고, 그들이 우리를 구경하는  형국이었지요.
      사람 보기 어려운 산 속의 목장에서,동양인을 보기란 더더욱 어려웠을 겁니다. 
    신기한 눈초리로 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들의 모양을 보며
내심 얼마나 멋쩍던지요.

 


촉토 인디언 지역[이곳은 오클라호마 주에서 유일한 산악지역임]에서 만난 길

 


치카샤 지역의 길을 달리다가 만난, 어떤 목장 입구

 


토우손(Towson) 포트(Fort) 근처 길가에서 만난 농장입구[아마 주인 부부의 이름이겠지요?]

 

그 뿐 아니다. 땅 속에서 원유를 퍼내는 검은 색 채굴기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그것들은 흡사 사마귀처럼 끄덕거리며 원유를 길어 올린다. 흡사 까치집처럼 생긴 겨우살이들이 다닥다닥 붙은 교목들이 길 좌우에 즐비하고, 다운타운을 벗어난 도시 외곽의 나무숲에는 멋지게 지은 집들이 간간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마을마다 하얀색의 교회들이 하늘 높이 첨탑을 높이 올린 채 서서 마을의 역사를 대변한다. 그리고 이것들이 합쳐져 흥미로운 서사구조들을 만들어내고 끊임없이 이야기들을 이어간다. 그래서 길은 단순히 지나가는 통로가 아니고, 각종 사건을 재료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발효의 공간이다. 그래서 나는 길을 사랑하고 길 위에서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애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역마살을 부정적으로 보지만, 글로벌 시대에 누군들 역마살을 피해갈 수 있으랴. 그리고 어쩌면 역마살이 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길의 매력에 심취한사람들일 것이다. 역마살이 끼었대도 좋으니, 의미를 찾아 방황할만한 좋은 길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스틸워터로 돌아오는 길에 잡은 한 컷[주택 옆에 목장이 있고,
그 곁에서 원유채굴기가 작업을 하고 있음].


아무 보는 사람 없어도 끄덕거리며 혼자서 열심히 원유를 길어 올리는 장한 채굴기

 


177번 도로를 달리다가 발견한 소규모 인디언[Iowa Tribe] 집단 거주지의 표지판

 


오클라호마주 길 위에는 늘 태양이 빛난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3. 12. 9. 01:09

 

 

도올 선생과 홍준표 지사를 보며

-신문기사를 읽고-

 

 

 

 

 
          도올 선생이 홍준표 지사에게 증정했다는 책[사진은 중앙일보 2013. 12. 7.]

 

 

10 몇 년 전의 일이다.

평소의 습관대로 인터넷 경매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가까이에 모시고 있던 선배 교수 한 분이 평론가 모씨에게 증정한 책이 경매 물건으로 나온 것이었다. “○○○ 교수님께, △△△ 삼가 드림이란 헌사가 대문짝만한 사진으로 만천하에 공개되어 있었다. 저자가 유명인사에게 증정한 책일 경우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는 것이 경매업계의 상식이다. 그 책을 내놓은 사람은 그런 관습을 이용한 것일 테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충격이었다. 실망으로 일그러지실 선배 교수의 표정이 떠올라 몹시 불안했다. 그래서 잽싸게 비교적 높은 가격으로 내가 찜했고, 결국 그 책은 지금도 내 서재 속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다. 인터넷 경매에 참여하는 경우 언제나 혹시 그런 헌사가 붙은 책이 없는가를 먼저 보게 된 것도 그 일을 경험한 뒤부터다.

 

 

어제 인터넷을 열었다가 우연히 중앙일보에 접속하게 되었는데,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떠 있었다. 읽어본즉 도올 선생이 홍준표 지사에게 증정한 책이 고서방에 나왔고, 누군가 그것을 구입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책을 구입했으면 조용히 가지고 있을 것이지, 만천하에 공개한 그가 일단은 서운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헌사까지 사진으로 대문짝만하게 공개되었으니, 분명 도올 선생은 발분(發憤)했을 것이고, 홍 지사는 적지 않게 당황했을 것이다. 기사 말미에 홍 지사는 국회의원 등 공직들을 그만 둘 때 사무실을 정리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했다는 식으로 해명을 했지만, 궁색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인터넷이 하도 발달하여 카메라에 찍히기만 하면 순식간에 지구를 몇 바퀴나 도는 세상이다. 지금 내가 미국 오클라호마의 오지에 틀어박혀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조국에 있는 친구들의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그렇게 밝혀진 증거물 앞에서 무슨 둔사(遁辭)’가 필요할까.

 

 

그간 고서에 관심을 갖고 종종 온라인, 오프라인 경매에 참여해왔다. 심심치 않게 확인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생전에 책들을 열심히 사 모아도 세상을 뜬 뒤 그 책들의 가치를 알 리 없는 자식들이 그것들을 쓰레기 취급하여 고물상에 넘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는 오프라인 경매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어떤 학자의 책을 여러 권 입수한 적이 있다. 어째서 이런 책들이 경매시장에 나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책 주인 죽은 뒤 두 달 만에 그의 소장서적들 모두가 시중에 깔렸다는 대답이었다. 무식한 자식 놈들의 소행일 것이다.

 

 

그간 저서들을 몇 권 내놓은 입장으로 고서 경매에 참여하면서 혹시 내 책을 경매장에서 만날까 불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제발 그러지 않길 바라지만, 최근 들면서 내 책도 경매 사이트에 뜨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 출판사에서 재고도서를 고서점에 돌렸을 수도 있겠으나, 독자들이나 학생들이 내놓은 것들이 대부분이리라. 그 책들이 그저 내가 누구에겐가 정성스럽게 헌사를 써서증정한 것들만 아니길 기원할 뿐, 이제 그런 것들을 거둬들일 방법도 의지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

 

 

얼마 전의 일이다. 가까이 지내는 다른 학과의 모 교수가 내게 책 한 권을 보내왔다. 봉투를 열어 꺼내 본 즉 그 몇 년 전 그에게 증정한 내 책이었다. 서운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여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교수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연구실을 정리하려는데 몇 년 전에 받은 당신의 책이 나왔다. 보관할 여력도 없고 차마 쓰레기통에 버릴 수는 없어서 다시 되돌려 드린다.’는 요지의 말이었다. 일단은 야속했지만, 곰곰 생각하니 고맙고 솔직한 말이었다. 만약 자신의 전공과 무관하다하여 쓰레기통에 버렸다면, 그것이 어느 경로로 중고서점에 들어갔다면, 그러다가 어느 기회에 경매장에 나왔다가 내 눈에 띄게 되었다면... 아마도 나는 그와 대판 싸웠거나 심하면 원수가 될 수도 있었겠지? 그런데, 그는 내 분신을 그렇게 처리하지 않고 내게 돌림으로써, 일어날 수도 있었던 참화(?)를 미연에 막는 지혜를 발휘했던 것이다. 일시적인 서운함으로 더 큰 비극을 막은 셈이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사실, 이사하다 보면 가장 큰 문제가 책이다. 이삿짐센터에서도 책 짐을 반기지 않는다. 부피에 비해 무게가 너무 나가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거문화가 아파트로 획일화 되면서 책을 보관할 공간이 없다. 그래서 이사철만 되면 아파트 쓰레기장이 버려진 책들로 넘쳐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책을 내도 전공자 이외에는 무턱대고 증정하지 않는다. 책을 주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경우 먼저 그에게 묻는다. 내가 이러이러한 책을 냈는데, 한 권 증정해도 되겠냐고. 대부분은 기꺼이 받겠다고 대답하지만, 과연 마음속도 그러한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도 무턱대고 증정했다가 뒷날 고서 경매장에서 만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

 

 

도올 선생이 홍준표 지사에게 책을 건넨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도올 선생이 보기에 홍 지사가 정치인으로서 괜찮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동학사상의 결정체인 동경대전을 해석한 자신의 책을 건넨 것 아닐까. 백성들 편에서 정치를 해달라는 기원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실수이었든 자발적인 행동이었든 홍 지사는 그 책을 버렸다. 그가 아마 한 줄이라도 읽어봤다면 그 책을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 여당이든 야당이든 대한민국을 이끈다고 자부하는 인물들 가운데 책을 가까이 한다거나 책의 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안다. 선거철에 매문가들을 동원, 자신의 일생을 미끈하게 윤색하여 선거용 책자를 내는 인사들은 여의도에 깔려 있지만, 제대로 책을 접하거나 쓰는 인사들은 아예 없는 것으로 안다. 사실 그런 인사들에게 힘 들여 쓴 저서를 증정하는 행위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홍 지사를 정치권에서 그 중 나은 인물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해 왔고, 이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믿음을 쉽게 버리지는 않을 생각이다. 이번 일은 아마도 그의 말대로 측근들의 실수였을 것이다.

 

 

그러니, 도올 선생께서는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고, 가가대소(呵呵大笑)하시라. 그리고 그 가가대소에 난해한 주석을 달지 마시라. 홍 지사께서도 더 이상 둔사를 내 놓지 마시고, 화끈한 전화 한 통화로 도올 선생의 마음을 풀어 주시라. “우리 자갈치에서 만나 산성막걸리로 회포 한 번 풉시데이!”하고 말이다.

 

 

미국 스틸워터(Stillwater)에서

백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