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소식2015. 6. 25. 16:32

 

 

 

 

일을 추진한 지 대략 7~8개월 만에 <<한국문학개론>>(새문사)이 세상에 나왔다. 시대와 학생들이 바뀌었음에도 한국문학계 전반이 시름에 빠져 있기 때문일까. 좀처럼 새로운 한국문학개론이 나올 기미가 없었던 것이 저간의 사정이었다. 이런 갈급(渴急)의 상황에서 이 <<한국문학개론>>이 튀어나온 만큼 많은 독자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으리라 본다.

이 책의 출간 의도는 다음과 같은 머리말에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 글을 여기에 붙임으로써 이 책의 특징과 의미를 널리 공유하고자 한다.

 

 

머리말

 

학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국문학개론의 체제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되, 이름을 한국문학개론으로 바꾸고 새 얼굴의 필자들이 참여하여 논조와 방향의 참신함을 추구고자 한다.

 

세상이 급격히 변한다하여 한국문학개론도 그에 따라야 하는 건 아니다. 한국문학에 관한 관점을 바꾸는 일이 쉽지 않고, 바꾸는 것이 꼭 지혜로운 일도 아니다. 이 단계에서 체제와 내용 등 모든 것들을 바꾸는 모험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이 책이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혹은 앞 세대와 뒷 세대의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사실들의 부정확함이나 해석상의 오류들에 대한 수정과 함께 새로운 해석적 견해들을 덧붙임으로써 완성단계의 혁신적 한국문학개론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고 우리는 자부한다. 독자들은 각각의 장르에서 필자들이 말하는 패러다임 전환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리라 보는데, 그것이 바로 이 책 소임 중의 큰 부분이다.

 

한국문학 가운데 주로 고전문학을 해석설명해온 것이 한국문학개론의 대체적인 모습이다. 조만간 고전-현대의 시간적 통합이나 남북한-해외한인의 민족 통합을 지향하는 한민족문학개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 우리의 미래지향적 관점이다. 이 책은 그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과도기적 산물들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편의상 다음과 같이 16개 분야로 나누어 집필되었다.

 

총론: 조규익(숭실대학교 교수)

고대시가향가: 서철원(서울대학교 교수)

고려속악가사: 허남춘(제주대학교 교수)

경기체가: 최재남(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악장: 조규익(숭실대학교 교수)

시조: 신경숙(한성대학교 교수)

가사: 윤덕진(연세대학교 교수)

민요: 권오경(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무가: 표인주(전남대학교 교수)

신화전설민담: 송효섭(서강대학교 교수)

국문소설: 차충환(경희대학교 교수)

한문소설: 정출헌(부산대학교 교수)

판소리와 창극: 김기형(고려대학교 교수)

전통희곡: 전경욱(고려대학교 교수)

속담수수께끼: 최원오(광주교육대학교 교수)

고수필: 한길연(경북대학교 교수)

한문학: 이종묵(서울대학교 교수)

 

쉽지 않은 주문에도 최고의 글들을 주신 필자 여러분, 학술출판의 외길을 꼿꼿이 걸어가시는 새문사 이규 사장님, 프로의식으로 무장한 편집부원 여러분. 이 분들 덕에 멋진 책이 나왔음을 기뻐하며,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2015. 5. 20.

 

필자들을 대표하여 조규익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6. 2. 22:15

 

 




헤게모니를 장악한 미국 유학파와 학벌 공화국

-김종영의 <<지배받는 지배자>>를 읽고-

 

 

 

십칠 년 전쯤이었을까. 1년을 머물기 위해 처음으로 미국에 갔었다. 그 대학엔 한국인 유학생들이 아주 많았다. 어느 날, 박사과정에 재학하던 한 친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툴툴거렸다. 한국 K대학 출신인 그는 갓 입학한 후배를 유학생 모임에 데리고 가 소개를 한 모양이었다. 그 자리에 끼어 있던 S대 출신의 한 유학생이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어중이떠중이가 다 유학을 오는구나...”

 

아마 들릴락 말락 혼잣소리로 중얼거렸기에, 그는 대놓고 항변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명색이 K대학 출신에게 어중이떠중이란 표현을 쓴 데 대하여 자못 분개하고 있었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 있던 나로서는 ‘S대 출신이 K대 출신을 차별하는 곳이 한국임을 생생하게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당연히 S대 출신이라는 그가 궁금했고, 그가 수강한다는 강의를 몇 번 청강하면서 자연스레 그를 관찰하게 되었다. 미국인 학생들이 다수였고, 중국인 서너 명과 그를 포함한 한국인 학생들이 두어 명 섞여 있었다. 강의와 토론으로 이루어지는 수업의 열기가 대단했다. 미국인 학생들은 교수가 제지해야할 정도였고, 중국 학생들도 나름 열정적이었다. 심리학 관련 강의였던 만큼 나로서도 관심 가질만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는 시종일관 조용했다. 그의 영어 발언을 듣고자 몇 번 나갔으나,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지친 나머지 나는 그에 대한 관찰을 그만 두었다.

 

교수인 내 기준으로 말하면, 그는 그 클래스 룸의 열등생이었다. 그 뒤로부터 학벌 차별의 문제를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다. 남들 보기에 초라한지방대학 출신이지만, 서울에서의 대학원 유학으로 세탁된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이른바 보따리 장사단계를 건너 뛴 채 일찌감치 20대 후반에 대학 전임이 된 덕분이었을까. 나는 그 때까지 그들로부터 명시적으로 차별을 받는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직장에서 국내의 이른바 명문대학출신들[특히 미국 유학파]을 관찰해보았으나, 그들 역시 그냥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일 뿐이었다. 모를 일이다. 혹 어느 구석에 뛰어난 점이 숨어 있는지! 설혹 있다 해도 그건 한 끗 차이일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늘 수그러들지 않는 이슈는 바로 학벌의 문제다. 절대 출신학부를 차별의 근거로 들지 않는 미국과 달리, 우리는 1차적 차별[다른 말로 절대적 차별]의 잣대를 출신학부에 두고 있다. 스카이(SKY)[그 중에서도 서울대학]로 대변되는 출신학부의 기득권이야말로 대한민국 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미국 유학파에게 덤으로 주어지는 최고최대의 프리미엄일 것이다.

 

***

 

최근 바쁜 틈을 타서 모처럼 좋은 책을 읽었다. 김종영 교수의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이란 책. 서구 이론들의 틀을 원용하긴 했으나 삶의 현장에서 관련자들을 만나 관찰한 사실들을 설득력 있는 어조로생생하게 분석전달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다. 나를 포함, 고리타분한 책상물림들의 저작과 많이 다르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조선시대 중인계층에 비견되는중간적 소수자(middleman minority)로서의 미국 유학파가 갖는 다양한 얼굴들을 과감하게 보여 준 점이야말로 김 교수가 갖고 있는 엄정한 학자적 결기(決氣)의 발로일 것이다. ‘한국의 우등생들이 미국의 대학들로 유학을 간 뒤 열등생으로 전락했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는 것, ‘미국에서 열등생으로 전락하는 요인도, 한국에 돌아와서 헤게모니를 쥐게 되는 요인도 뛰어넘을 수 없는 영어의 힘에 있다는 것 등이 이 책에서 강조되는 핵심적 요지들 가운데 하나다.

 

책에는 이것들을 뒷받침하는 불편한 진실들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막대한 지원,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우수 연구중심대학들, 탈 중심적 구조등을 갖춘 수월(秀越)한 미국 대학들과 모든 면에서 초라한 우리나라 대학사회사이에는 뛰어 건널 수 없는 심연(深淵)이 가로놓여 있다는 진단은 누구나 수긍할만하다. 저자가 지적하듯이 미국 대학들의 우월성은 도덕적문화적 헤게모니로부터 나오는데, 그 헤게모니는 학문 활동의 깊이와 진지함, 열정 등과 직결되는 것이다.

 

김 교수가 막스 베버의 미들맨 마이너리티의 친족주의와 연줄에 의한 천민자본주의를 인용하여 우리나라의 대학을 천민 학문 공동체로 규정한 것은 대학사회가 지닌 합리성의 결여라는 현실적 근거를 바탕으로 했기에 더욱 설득력이 있다. 미국 유학파는 이렇게 낙후된 천민적 학문 공동체에 미국적 합리성을 전파하면서, 동시에 글로벌 문화자본의 상징폭력을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유학과 함께 경험하는 연구중심 대학들의 실상이나 학문 대가들과의 만남은 유학생들을 크게 고무시키지만, 그 공간에서 사회적 피라미드의 상층으로 올라갈 수 없는 근본적 한계 때문에 다시 낙후된 고국으로 돌아와야 하고, 결국은 천민공동체의 헤게모니의 장악이라는 비윤리성을 발휘하면서 매우 부정적인 존재로 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

 

우리는 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선비감언지사(敢言之士)’라 불러왔다. 왕조시대의 임금이나 임금 주변에 대하여 드물지만 바른 소리를 아끼지 않는선비들이 있었다. 정말로 무서울 것 없는, 요즘 같은 대명천지에 권력의 중심부를 향하여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감언지사가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이해하기 어렵다. 감언지사 없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학문권력 아니 학벌권력의 서슬이 지금처럼 세력을 부릴 때가 우리 역사상 그 언제였던가. 그 학벌권력이 낙인을 찍으면 꼼짝 없이 낙향할 수밖에 없는 게 오늘날 지식사회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김종영 교수는 ‘21세기 한국의 감언지사라 할 수 있으리라.

 

겉으로 보기에 미국 유학파는 매우 유능하고 미래지향적이며 합리적인 학문의 리더들이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공동체에 수시로 글로벌의 잣대를 들이대면서도 이기(利己)의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남들이 보기에 그들은 감추는 게 많은군상이다. 그들은 과연 무엇을 감추려 하는 것일까. 사실 그 점이 못내 궁금했는데, 김종영 교수의 이 책이 그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사실 이 책에는 차마 입으로 옮기기 부끄러운 미국 유학파들의 실상과, 헤게모니 쟁탈전의 전사로 변한 학벌들의 민낯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책 가운데 비교적 함축적이며 온건하게 표현된 두어 단락들을 결론 삼아 옮겨 놓는다.

 

 

한국연구자들이 시류에 민감한 이유는 또 다시 이들의 트랜스 내셔널(transnational) 위치와 깊이 연관된다. 트랜스 내셔널 미들맨 지식인들의 주요 전략은 미국의 연구 센터에서 생산되는 지식을 빨리 국내에 도입하여 선점하는 것이다. 자기만의 독창적인 분야가 없기 때문에 외국의 첨단 연구에 주목해야만 한다. 분야를 막론하고 미국 유학파 교수들은 미국에서 한 것을 가지고 와야 주목을 받을 수 있고, 연구비를 지원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시류를 타면 이런 장점이 있지만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서 답을 구하는 방식을 취해야 하는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하기는 어렵다. 석학은 유행을 타는 사람이 아니라 유행을 만드는 사람이다()학계에 진입한 신진 연구자들은 이전 세대보다 개방적이지만 이미 구조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학벌 중심의 네트워크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신진 연구자는 학계에서 파워가 없고 연구를 위해 네트워크를 만들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학벌 중심의 연구 관계는 다른 학벌을 가진 사람들을 소외시킨다. 이 교수는 모 대학 중심의 학회의 회식자리에서 서로 형, 동생 하는 모습에 아연실색했다고 말한다.

 

이 교수: 나만 이방인인 것 같고, 그렇지만 꾹 참았죠. 더럽더라고요. 회식 자리에서 느끼는 건 솔직히 말해서 남의 동창회에 괜히 껴서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있었지만 꾹 참고 앉아 있었던 거죠.

 

이 교수는 결국 이 연구 모임과 거리를 두었다. 이는 그 연구 집단에게는 손해가 된다. 왜냐하면 이 교수의 전문성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네트워크가 개방적일 때 연구의 전문성과 생산성이 높아진다. 연구는 지식의 교류인데, 이 교류가 폐쇄적일수록 독창적인 지식 생산은 어려워진다. [김영종 교수의 책, 190~192]

 

 

문제는 미국 유학파 한국 지식인의 학문적 열정이 트랜스 내셔널(transnational) 구조를 갖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연구중심 대학에서 고양된 열정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급격히 쇠락한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조인구 교수의 에피소드는 이를 잘 말해준다. 1986년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한 조 교수는 경제학 부문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을 배출한 시카고 대학 교수를 거쳐 서울대 교수로 부임했다. 하지만 한국에 온 지 1년 뒤인 1998년에 서울대를 그만 두고 돌연 미국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일은 한국 경제학계에서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2006년에 한국을 방문한 조 교수는 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갔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즉답을 피했다. 조 교수는 노벨상을 받은 제임스 헤크먼, 게리 베커, 로버트 포겔 교수 등 시카고 대학의 교수들을 언급하며, 이들은 나이가 70, 80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벽까지 공부한다는 간접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조 교수는 미국 대학 교수들의 학문적 열정에 항상 자극을 받는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수학자들과 연구해온 박 교수는 피부로 느낀, 한국 교수와 미국 교수의 차이점을 이렇게 말한다.

 

박 교수: 미국에서 교수하는 사람들은 교수 직책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연구하는 게 좋아서근데 한국은 교수라는 게 저거잖아요. 조금 기득권층, 대접 받는 게 좋아서, 그 맛에 교수를 하는 거거든요. 공부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교수를 하는 게 아니고.

 

박 교수는 한국 대학에서 공부를 열심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말한다. 또 연구에 대한 가치를 높이 평가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논문을 열심히 쓴다고 알아주는 사람도 많지 않다고 말한다. 사회학을 전공하는 남 교수도 비슷한 견해를 내놓는다. 열심히 공부하는 교수의 비율이 한국보다 미국이 훨씬 높고, 더 탁월한 연구를 하려는 욕심 역시 한국 교수들은 적다고 말한다. 한국 교수들은 다른 사람보다 나아지려는 경쟁의식도 없고 연구를 통해 블라섬하고(꽃을 피우고) 싶다는 욕망도 없다는 것이다.

학문적 열정은 지속적인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학문적 전념은 고도의 감정적 에너지를 요구하는데, 한국 학계에서 이것을 지속시키기는 너무나 어렵다. 학문에 대해 점점 냉담해지는 것은 트랜스 내셔널 미들맨 지식인들의 공통적으로 갖는 집단적 감정 상태다. 한국 지식인이 미들맨인 것은 이들의 열정이 최고가 아님을 뜻한다. 학문의 길만이 최고로 가치 있는 일이라는 기이한 최면과 환상 없이는 진정한 학자가 될 수 없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종교적 맹목성은 감정적으로 충만한 학문 공동체 속에서만 배양된다. 곧 한국 대학에서 미국 대학의 헤게모니는 이 둘 사이의 지식 격차, 윤리적 격차 뿐만 아니라 열정(또는 감정)의 격차속에서 발생한다. 로고스는 에토스와 파토스 없이 홀로 설 수 없다.[김종영 교수의 책, 196~19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4. 17. 11:45

촌놈들의 향연-성완종과 이완구-

 

 

 

 

성완종이 뿌리고 간 오물이 대한민국을 흔들고 있다. 누구의 험한 말대로 ‘달라고도 하지 않은 돈을 주어놓고 부린 지랄’이 온천지에 악취를 풍기는 나날이다. 녹음된 성완종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그의 어눌하면서도 약간 순박하기까지 한 듯한 톤에 동정이 갔는데, 두 번 세 번 들으면서 참으로 ‘가증스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슬쩍 돈을 받아 챙긴 인물들도 구린 건 사실이나, 성완종이 흘리고 다닌 엄청난 양의 오물들은 참으로 처치곤란이다. 설사 수백억의 돈을 받았다한들, 요즘 같은 세상에 죄인의 구명을 목적으로 누군들 검찰에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내 돈을 받고도’ 구명에 나서주지 않았다고 원망한다면, 그야말로 앞뒤 분간 못하는 멍청이다.  

나는 지금까지 ‘촌놈’을 자처하며 살아왔다. 충청도, 그것도 성완종의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출신이니, 내가 자처하지 않아도 남들 보기에 내 몸에서 촌티가 줄줄 흘렀을 것은 자명한 일. 그러나 촌놈인 덕에 남으로부터 지탄받을 죄 지은 적 없고, 황소처럼 그저 묵묵히 앞만 보고 걸어 올 수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은 ‘촌놈’이란 딱지가 그나마 내 자부심의 바탕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성완종의 출현으로 ‘촌놈’에 대한 내 철학은 근본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내가 보기에 성완종은 결코 ‘촌놈’이 아니다. 무늬만 촌놈으로 어수룩해 보일 뿐, 그의 야망이나 사기성은 여느 ‘도시 놈들’ 못지않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긁어모은 ‘남의 돈’으로 힘 있는 자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을 옭아맬 덫을 놓고 다닌 것이 그의 한평생이었다. 돈 봉투로 만든 덫에서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을까. 돈에 약한 인간의 심성을 그리도 교활하게 간파하고 이곳저곳에 덫을 놓고 다닌 그였다. 그러니 그를 결코 내 사전에 규정된 ‘촌놈’의 범주에 넣을 순 없는 일.  

엊그제 고향의 선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고향 사람들이 두 편으로 갈라섰다고 탄식했다. 한쪽은 성완종 편, 다른 한쪽은 이완구 편일 것이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헛똑똑이’라 할 만큼 순진한 이완구도 교활함에서 성완종 못지않은 인물이지만, 분명한 것은 두 사람 모두 내가 생각하는 ‘촌놈’들은 아니다. 어리석음과 교활함을 바탕으로 부나비처럼 야망의 불꽃에 몸을 던진 존재들일 뿐이다. 그들은 결코 촌놈들이 아니다.

참, 세상 살기 어렵다. 촌놈으로 사는 일은 더 어렵고, 제대로 된 촌놈으로 사는 일은 더더욱 어렵다. ‘무늬만 촌놈’인 촌놈들이 득실대는 세상에 나 혼자 ‘제대로 된 촌놈’임을 표방하기란 불가능하다. 초등학교 졸업 때까지 <애국가>의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를 ‘태안사람 태안으로 길이 보존하세!’로 알아 온 내 ‘촌놈성’은 성완종과 이완구로 인해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아니 그 두 ‘사기 혐의자들’을 둘러싸고 갈려 있는 고향 사람들의 딱한 모습으로 인해 내 ‘촌놈성’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래서 더욱 부끄러운 나날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4. 13. 15:33

 



 




오십의 깨달음

-성선경의 시집을 받고-

 

 

며칠 전, 학과 학술답사여행 중이었다.

학과장 이경재 교수의 생일을 용케도 알아낸 착한 학생들.

그들이 점심 상 앞으로 케익을 안고 왔다. 이 교수에게 나이를 물으니, ‘40’이란다.

그가 나의 40’에 대해 물었다. “세상 무서운 것 없던, 참 좋은 때였소.” 내 대답이었다.

나의 50’을 그가 또 물었다. “참으로 초조해집디다.” 내 대답이었다.

 

오늘 점심 후 찻집에서 독문과 김대권 교수와 나이에 대한 그 문답을 다시 반복했다.

그는 왜 초조했냐고 물었다. “50 되기 전 몸에 돋은 가시 털과 입에 붙은 칼날을 모두 갈아 없애려 했는데, 여전히 형형한 빛을 발하는 것 같아서 초조했었소.” 내 대답이었다.

 

연구실에 들어오니, 함께 늙어가는 제자 성선경 시인의 새 시집이 도착되어 있었다. 책장을 넘기니 <오십>이란 시편이 실려 있었다. 그가 내 마음을 훔쳐보았던 걸까. 다음과 같은 시였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둥글어진다는 것

늙음이 넓음으로 이어지지 않아도

온몸을 둥글게 둥글게 만다는 뜻

햇살이 잘 닦은 숟가락같이 빛나는 정오는

이제 절반을 지났다는 뜻도 되지만

아직 절반이 남았다는 말도 되지

나는 방금 전 오전이었고

나는 지금 금방 오후에 닿았지

어제의 꽃은 씨방을 키우는 중이고

어제의 나무는 막 붉게 물드는 중이지

천명(天命)을 안다는 지천명

아주 둥글어진 해

늙는다는 것은 둥글어진다는 뜻

오후가 나의 넉넉함과 이어지지 않아도

온몸을 둥글게 둥글게 만다는 뜻

햇살이 기울어 그림자가 동쪽으로 서는 시간

이제 절반을 지났다는 말도 되지

씨방 속에 또 싹이 나고

단풍 속에 물관이 선명하지

나는 방금 전 오전이었고

나는 지금 금방 오후에 닿았지

<66~67>

 

그렇다. 오십을 십년 가까이 넘기고 나서야 내겐 비로소 오십이 보였다.

그 점을 콕 집어 가르쳐준 시인은 나의 선생님이다.

그래서 지금 그가 고맙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3. 22. 23:22

 


앤드류를 다그치는 플렛처

 

 


악단원에게 악을 쓰는 플렛처

 

 

 


지휘 중인 플렛처

 

 

 

 

영혼을 저미는 자학의 망치질, 허무로 끝난 전율

-영화 위플래쉬(whiplash)’를 보고-

 

 

 

                                                                                                                                                조규익

 

아내의 손에 이끌려 나간 극장 한 구석. 수영을 마친 후의 노곤함을 어둠 속의 단잠으로나 풀어볼까 하고 푹신한 의자에 몸 전체를 맡긴 채 두 다리를 뻗었다. 그 순간, 귀를 찢는 드럼 소리. 그리고 반들거리는 머리통과 형형한 눈빛의 늙은 터프가이. 고약하게도 고것들이 내 잠의 싹을 싹둑 잘라 버렸다. 첫 장면에서 나는 드럼을 사이에 둔 두 미치광이, 음악교수 플렛처(Fletcher)[J.K.Simmons ]와 그의 제자 앤드류(Andrew)[Miles Teller ]를 만난 것이다. 닫으려는 눈과 마음을 사정없이 두드려대는 두 시간 동안 잔인한 긴장과 전율 속에 떨어야 했다.

 

TV를 통해서였는가. 언제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며칠 밤낮 가마에 구워낸 수십 개의 도자기를 깨버리는 장인의 엄숙한 낯빛을 본 적이 있다. ‘깨어져 나가는 도자기의 단말마 소리가 정신의 결을 저리도 시퍼렇게 벼리는구나!’라는 깨달음을 그 장인의 눈빛에서 얻은 적이 있다. 내려치는 도공의 망치 언저리엔 칼날보다 날카로운 서슬이 서릿발처럼 일어서고 있었다.

보아하니 한두 번 깬 망치질이 아니었다. 자신의 실수나 어리석음을 용납하지 못하는 수도자의 자세가 그 속엔 깃들어 있었다. 자신의 심장과 영혼을 한없이 저미는 자학의 망치질이었으나, 심장과 영혼이 한 점 한 점 저며져 날리는 듯 미세한 조각들은 눈빛에서 비쳐나는 광기를 더욱 날카롭고 엄숙하게 갈아대는 것이었다. 단 하나의 그릇을 남겨 놓더라도 제대로 된 것 아니면 모두 때려 부수리라! 아마 그는 그런 심산이었을 것이다.

내 평생 인간의 행위에서 비장함과 숭고함을 느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내 마음으로 해석된 그의 모습은 참 슬프게도 멋져 보였다. 슬프게 멋진 모습을 다시 한 번 해석한 결과는 프로정신이었다. 그 때부터 나는 소박한 꿈 하나를 마음속에 갖게 되었다. 무엇을 해서 밥을 먹고 살든 저 정도의 프로정신으로 살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적당한 이유를 붙여 깨지고 금가고 뭉그러진 도자기도 품에 안게 되었다. 내 자신과 타협한 뒤 그 원칙을 스스로 깨버린 채, ‘좋은 게 좋다는 편안함에 매몰되어 취한 듯 살아왔다. ‘그만 하면 잘 했어!라는 도취(陶醉)의 잣대로 나 자신을, 내 제자들을 대하며 살아오게 된 것이다. 

 

앤드류를 발견한 플렛처 교수. “세상에서 가장 쓸 데 없는 말이 그만 하면 잘했어야!라고 소리치는 그는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완벽 추구의 광기에 사로잡힌 악한이었다. 천재 드러머의 소질을 지닌 앤드류도 그에겐 사랑스런 제자이기 전에 그 광기로 다듬어 최고의 연주자로 만들어야 할 미완의 대상일 뿐이었다. 앤드류 역시 그의 광기에 전염되어 그를 제압하려는 욕망을 내 보인, 또 다른 광기의 소유자였다.

광기와 광기가 맞부딪쳐 좌절하는 듯하지만, 결국 앤드류는 최고의 물건이 되고 만다. 최고의 물건이 되는 데서 영화는 끝나지만, 관객들에게 남겨진 긴긴 여운. 감독이 노린 건 바로 그것이다. 관객들은 다들 저마다 두 광인(狂人)의 미래를 점치고 해석하는 데 당분간 몰두하리라. 해석의 짐을 관객들에게 넘긴 감독. 어쩌면 감독의 능력은 거기까지일 것이다.

 

***

 

영화가 끝나기 직전까지 전율에 떨었다. 영화 내내 울려 퍼지는 드럼소리와 심벌즈의 파찰음 때문만이 아니었다. 영화 내내 플렛처가 크레센도(crescendo)로 끌어올리는 광기는 내 피를 덥혀 주고 생기를 불어넣는 마약이었다. 내가 그에게서 경험한 전율은 행복한 흥분이었다. 그래서 내게 플렛처는 결코 악한이 아니었다. 악한 아닌 그가 저지르는 위악(僞惡). 내게 그는 최고를 위해 멀쩡한 도자기들을 망치로 때려 부수는 도공이었다. 비로소 나는 나를 떠나간 도공을 화면으로 재회한 것이다. 앤드류가 최고의 명성을 누리는 연주가로 살아갔는지, 플렛처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서 행복했는지, 나는 모른다. 알 필요도 없다. 다만 그 짧은 한 순간의 클라이막스가 필요했던 것이다. 도공이 최고의 한 작품만을 원했듯, 플렛처 역시 최고의 한 사람만을 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최고의 인간이라 할지라도 최고란 단 한순간의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허무하다.

 

 

 


단원들 앞에서 지시하는 플렛처

 

 

 


마지막 부분-피를 흘린 상태에서 연주하는 앤드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3. 8. 05:47

 


백규서옥에서 

 

 

 

 

한국의 친구들에게

 

 

                                                                                              게리 영거

 

 

누구나 한국에 와 보고 갖게 되는 첫 인상들 가운데 하나는 서두른다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거나,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거나, 음식을 먹는 등 무엇을 하든 한국인은 항상 급하다. 한국인들은 항상 서둔다. 그러나 밖에서 친구들과 만날 땐 서두르지 않는다. 예컨대, 한국인 친구들과 저녁을 먹을 때 어떤 이는 먹고 이야기하느라 두 시간까지도 소비하지만, 반면에 점심시간으로 20분을 길다고 여긴다. 버스들은 한국인의 빨리빨리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사례들 가운데 하나다. 버스 운전사가 지그재그로 차를 몰아대고, 승객이 교통카드를 스캔하자마자 차를 출발시킬 땐 무섭다. 그리고 때로 모퉁이들을 휭하고 돌 때, 그들은 흡사 버스를 충돌시키려는 것 같다. 항상 서두르는 행동양식은 외국인들이 급히 서두는 한국인 누구에게서나 목격하는 첫 모습이다. 그리고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약간 느긋해지는 한국인들을 목격하기 시작한다.

 

그 다음의 역설은 외국인들의 눈에 뚜렷이 보인다(특히 서양 사람들에게). 한국인들은 친절하기도 하고, 접촉을 꺼리기도 한다. 어떤 이는 내 말을 이상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에게 길을 가르쳐 줄 때, 헛갈리는 외국인 여행자들을 도와 줄 때 매우 친절하다. 그리고 그들이 음식을 주문할 때도 참을성이 있다. 그러나 이처럼 특수한 경우들 외에 한국인을 친구로 사귀는 일은 약간 어렵다. 백인으로서 나는 한국인들이 침범하려 하지 않는, 나를 두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과 함께 여행을 한다.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내 좌석엔 항상 나 혼자. 장을 보고, 관광을 하고, 혹은 캠퍼스에서 공부를 할 때, 한국인들은 우리들(외국인)로부터 의식적인 거리를 유지한다. 이것이 복잡한 군중 속에서 편히 돌아다닐 수 있게 하긴 하지만, 그것은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상호작용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때로 약간씩 짜증나는 일이기도 한데, 예컨대 엘리베이터를 탈 때 한국인들은 나를 보곤 그들 스스로 외국인인 나와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뒤로 물러선다. 최악의 경우 식당이나 상점에 들어갈 때 외국인들을 상대하게 되는 것을 피하려 달리기도 하고 숨기도 하는 한국인들을 보게 된다. 이것이 아마 한국 여행에서 가장 좌절감을 주는 일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외국인들은 한국인으로부터 배우고, 한국문화를 경험하고, 한국 역사를 공부하고, 한국인의 사고방식을 관찰할 목적으로 한국에 온다.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을 가까이 오게 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들을 하기는 어렵다.

 

그 다음은 절이나 역사 유적 근처에서 가장 잘 목격되는 일들이다. 한국은 갑자기 근대화 되고, 서구화 되고, 기술 대국이 되었지만,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한국이 겪어온 사건과 역사들을 떠올리게 하는, ‘고풍스런 나라이기도 하다. 예컨대, 한국을 여행할 때, 외국인들은 커피숍, 서양의 음악, 의상, 음식, 그리고 서양문화의 변종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한국인들은 당당하게 그들의 기술적 성취를 자부하고, 그들의 큰 기업들을 외국 관광객들에게 기꺼이 자랑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나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을 위해 박물관들을 짓기도 한다우리는 한국의 어느 곳에서나 많은 박물관들, 역사적 현장들, 고대의 건축물들, 그리고 문화유적들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대의 유적들을 둘러보는 순간, 거대한 건물들, 서구식 레스토랑들, 유럽풍의 커피점들이 그 지역을 둘러싸고 있음을 깨닫곤 놀라게 된다. 관광산업으로부터 얼마간의 득을 볼 수는 있겠지만, 고층빌딩과 스타벅스 커피점들이 이런 아름다운 유적들을 에워싸고 있다는 것은 실망스런 일이다. 이런 것들이 한국 경험의 한 부분이고, 그 독특함이다일상생활 속에 역사와 모더니티가 융합되어 있고최신의 고층빌딩으로부터 걸어 나와 고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경우는 한국이 유일한 듯 하다. 

 

현대와 고대의 융합은 오늘날의 한국을 정의하는 측면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한국에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은 박물관들과 고궁들에 접근할 때다. 거의 모든 박물관들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고, 고궁들의 경우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날들이 있다. 이것은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과 분명히 대비되는 점이다. 그 지역의 나라들에서 당신은 그 나라들의 과거를 배우기 위해 돈을 지불해야 한다. 과거를 이해하고 대중들이 역사를 친숙하게 만들기 위해, 서구의 국가들은 한국의 방식을 제대로 모방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주의하지 않는다면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 과거에 대한 지식이고, 과거의 보존이야말로 어떻게 현재에 대처해야할지를 알려주기에 중요하다. 그렇긴 하지만, 한국은 외국인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서양 국가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거품을 부수는 일은 한국인들이 국제적인 기업과 세계 공동체를 통합하기 위해 반드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 가운데 하나다. 외국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그들로 하여금 부담 없이 한국을 환영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외국인에게 다가가고 버스에서 그들 곁에 앉으며 날씨에 관해 묻는 것만으로도 한국에 대한 외국인의 인지도를 높이는 일이 될 것이다. 내가 만난 많은 연구자들과 외국 학생들은 자신들 가운데 소수만이 한국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만날 수 있었을 만큼 한국이 은자의 왕국[Hermit Kingdom]’이라는 점을 계속 강조했다. 이제 수년 동안 한국에 있어온 그들은 비즈니스 중심으로서의 한국에 대한 최신의 관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학생들마저 한국 사회의 거품 안에서 방황한다. 한국어와 영어로 기꺼이 묻고 대답하는 것은 한국의 이미지를 엄청나게 확장시킬 것이고, 그것은 한국의 낡은 이미지를 깨부수고 외국인들이 한국에 머무는 동안 환영받는다는 느낌을 주게 될 것이다.

 

그렇긴 하지만, 나는 몇몇 한국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리고 그들과 계속 접촉하면서, 다음 번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 만남이 다시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나는 조규익 교수님과 이완범 교수님께 감사드리고 싶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한국에 올 수 없었을 것이고 내 개인 연구에서 이만큼의 진전을 이룰 수도 없었을 것이다.

 

 

 

My Impression of Korea

 

Gary Younger

 

One of the first things that one notices in Korea is the speediness of everything. No matter what you are doing Korean are always in a hurry, whether drinking coffee, traveling on the bus, or eating food. Koreans are always in a hurry. However, Koreans also take their time when they are out with friends. For example, when having dinner with Korean friends one might spend up to two hours eating and talking, while Koreans consider a long lunch twenty minutes. The busses are one of the most dramatic demonstrations of the Korean balli balli. For the first month the buses are terrifying as the driver weaves in and out of traffic, takes off as soon as you scan your card, and at times seems as if they are going to crash the bus as they zoom around corners. This style of hurry up all the time is the first thing that foreigners notice about Korea everyone is in a hurry and as time passes you start to notice the people and groups that slow down a little when they are with friends.

 

The next paradox is apparent to foreigners(westerners especially). Koreans  are both friendly and closed off from contact.One mightwonderwhatImean. Koreans are very nice to foreigners, when it comes to giving directions, helping the confused foreigners travel around, and are patient when they order food. However, outside of these particular instances making Korean friends is a little difficult. As a Caucasian, I travel with an invisible boundary around me that Koreans will not cross. When taking the bus I always have a seat to myself, the same on the subway. When shopping, sightseeing, or working on campus Koreans maintain a conscious distance between us. While this makes traveling through a crowd easy, it does keep interactions to a minimum. It is also slightly annoying at times, for example when taking the elevator and Koreans step onto the elevator, see me, and step back off the elevator to avoid having to get closer to the foreigner. In the worst cases, one can see Koreans run and hide when you walk into a restaurant or store to avoid having to deal with the foreigners. This is probably one of the most frustrating things about traveling to Korea. Foreigners come to Korea to learn from Koreans, experience Korean culture, study Korean history, and observe the Korean mindset. This is difficult to do when Koreans will not allow you to approach.

 

The next point is noticeable mostly around the temples, and historical sites. Korea is at once a modern, western, technological powerhouse, and also an ancient country constantly reminding the people that visit of the events and history that Korea has lived through. For example, when traveling around Korea, one finds coffee shops, western music, clothing, food, and variations of western culture. Now, Koreans are justifiably proud of their technological accomplishments and love to show off their large firms to tourists. Some have even gone so far as to create museums dedicated to their history or their products. At the same time, one will find hundreds of museums, historical sites, ancient buildings, and cultural relics around every corner in Korea. However, when traveling around the ancient sites one will suddenly realize that tall buildings, western restaurants, and European style coffee shops surround the location. While in part this is to benefit from the tourist industry, it is disappointing that skyscrapers and Starbucks surround these beautiful areas. That said this is part of the experience and the uniqueness of Korea. Only in Korea is there such a fusion of history and modernity in everyday life, where one can walk out of a brand-new skyscraper into an ancient palace.

 

This fusion of modern and ancient is one of the defining aspects of modern Korea.  However, the best part of Korea is how accessible the museums, and ancient palaces are. Almost all of the museums are free and the palaces have days that one can enter for free. This is a stark contrast to America and the European countries where you have to pay to learn about the past of those countries. This desire to understand the past and to make history accessible to the populace is something that western countries would do well to copy from Korea. Knowledge of the past is something that can be easily lost when if you are not careful, and the preservation of said past is important as it shapes how one deals with the present. That said Korea could take a page from the western nations in dealing with foreigners.

 

Breaking the bubble is one of the first things that Koreans need to do to integrate into the international business and global community. Approach the foreigners, talk to them, and make them feel welcomed to the country. Just by approaching a foreigner, sitting by them on the bus asking about the weather will help to improve the foreigner’s perception of Korea. Many of the researchers and foreign students that I have meet continue to focus on Korea as the Hermit kingdom as few have found a group of Koreans that they can speak with or meet. Now those that have been in Korea for multiple years have a more up to date view of Korea as a business center, but even those students move about within a bubble in Korean society. A willingness to ask and answer questions in both Korean and English would benefit Korea’s image abroad tremendously as it would start to break down this old image of Korea and will also make the foreigners feel welcomed during their stay in Korea.

 

That said, I have made a few Korean friends and I hope to stay in touch with them and to meet them again when I return to Korea the next time. I would like to thank Dr. Cho, Ku Ick and Dr. Lee, Wan Bom as without their assistance I would have been unable to travel to Korea and progress so far in my own personal research.

 

 

 

 


게리와 함께 소주 한 잔!

 


 

 


올림픽 공원에서

 


 

 


함께 공부하던 외국인들과 야외파티를

 


 

 


외국인 동료들과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