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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13 '말씀의 힘' 1
  2. 2011.02.03 대통령의 말
  3. 2011.02.02 세밑에 홀로 앉아
  4. 2011.02.02 이스라엘 제1신 : 올리브산, 그 초월과 극복의 공간
  5. 2011.01.31 국사교육, 하려면 제대로 하라
  6. 2011.01.25 놔道
글 - 칼럼/단상2011. 2. 13. 12:34

‘말씀의 힘’

 

‘작년에 왔던 각설이’ 올해 또 왔다고 낙산 비치호텔 앞 소나무는 꿍얼거릴 것이다. 작년처럼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낙산 비치호텔의 신앙수양회. 기독교 대학에 20년 넘게 봉직하며 매년 겨울 한 차례 ‘성령’의 폭포수에 몸을 담그곤 한다. 그러나 대부분 그 때 뿐이었다. 솔잎 사이로 맑은 바람 빠져 지나듯, 의미 없는 만남의 반복이었다. 습관처럼 차려지는 행사장에 돌덩어리처럼 앉아 있다 빠져 나오곤 하던 지난날들이었다. 정열이 활화산처럼 끓어올라 물불을 가리지 못할 때는 그나마 몰랐다. 쥐꼬리만한 지식과 팽팽해진 자의식이 오만의 근원임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것으로 세상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으려니 믿고 지내던 무명(無明)의 시간대였다. 그러나 화살처럼 달려 나가는 시간의 가차 없이 차가운 결을 비로소 느끼게 된 지금. 내게 밀물처럼 찾아왔다가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 채 내년을 기약하며 밀려가는 바닷물처럼 ‘말씀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깨달음이 생긴 것이다. 그간 독실한 신앙인들을 내심 ‘도그마에 붙들려 자의식을 잃은 한심한 영혼’으로 여겨오지는 않았는가. 옳건 그르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부귀영화와 목숨까지 바치는 사람들을 ‘융통성 없고 못 말리는 꼴통들’로 슬그머니 비하하며, 나 자신의 ‘중심 없음’을 ‘이념의 굴레에서 벗어난 지식인의 자유혼’ 쯤으로 합리화해온 것이나 아닌가.

 

***

 

예수님의 말씀과 생각을 자신의 말로 쉽게 풀어 우매한 내게 전해주려 애쓴 김지철 목사[소망교회 담임]의 ‘말씀’과 만났다. 그 ‘말씀’을 들으며, 어린 영혼들에게 무수한 말을 들려주며 살아 온 내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돌아갔다. 김 목사는 이스라엘인들이 신봉하던 ‘말의 힘’이 바로 ‘하나님 말씀의 힘’이라 했다. 그 분이 지적한 말은 바로 생명을 담은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동안 말에 대하여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온 것은 아닌가. 말로 밥을 먹고 살면서도 ‘묵언(黙言)’을 숭상해온 내 진심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말을 많이 한 날들은 밤새 잠들지 못했다. 허공에 날려버린 ‘한없이 가벼운’ 말들의 펄럭임 때문에 헤아릴 수 없는 불면(不眠)의 밤들을 보내야 했다.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어떻게 하면 말 안 하고’ 살 수 있을까를 화두로 몇 날을 보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습관처럼 아침밥을 먹으며 준비운동을 시작하고 강의실에 들어가서 준비된 입으로 무언가를 지껄이는 일상이 바로 내 생활이었다.

 

***

 

문제는 진실성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그 분의 말과 행위가 일치되었기 때문이라고 김 목사는 강조했다. ‘말씀 없는 신비주의’나 ‘말씀 없는 도덕적 행동주의’는 신앙의 겸손을 앗아갈 수도 있다는 것, 바리새인들처럼 문자에 얽매여 지낸다면 말씀이 갖고 있는 생명력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 하나님 말씀의 능력을 회복받기 위해서 사람들은 주일마다 교회에 간다는 것 등등. 마치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듯이 김 목사는 그간 말에 대하여 갖고 있던 내 콤플렉스를 체험적으로 풀어주시는 게 아닌가. 그 뿐 아니다. ‘말의 힘을 가장 크게 신뢰하는 사람들이 교수’라는 그 분의 말씀은 유일한 수단이면서도 말의 권능을 부인해오던 내게 충격이었다. ‘교수의 필수적인 능력은 요약하는 능력과 부연하는 능력’이라는 그 분의 말씀은 내게 큰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는데, 그 말 속에는 ‘교수들 능력이라 해봤자 요약하는 능력과 부연하는 능력 뿐’이라는 속뜻이 숨겨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십계명은 크게 보아 요약인데, 그것을 또 요약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김 목사의 설명이 자신의 말을 듣고 가졌을지도 모르는 교수들의 부끄러움을 약간 덜어준 효과가 있긴 했으나, 그래도 부끄러움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 그간 내가 해온 일이라야 텍스트의 요약이나 이론의 부연 혹은 생명 없는 말의 전달밖에 더 있었겠는가. 그걸 반복하면서 지식사회의 일원이랍시고 오만에 젖어온 존재가 바로 나 아닌가. 남들이 토해 내는 ‘생명의 말씀들’을 귓전으로 들으며 ‘생명 없는 말의 허위’를 진실로 강변해온 것이나 아닌가.

 

***

 

그동안 나는 말의 겉만을 보았지, 말 속에 살아 움직이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언어는 존재의 집으로서, 인간은 언어의 주택 속에 산다’는 하이데거(M. Heidegger)의 말조차도 그다지 절실하게 여겨오지 않던 나인지라, 목사님들이나 선생들이 목청껏 외쳐대는 ‘생명의 말씀들’을 그저 귓가에 스치는 바람결로 들어온 것이나 아니겠는가.

오늘 풍광 좋은 낙산의 해변에서 김목사님의 절절하신 말씀을 들으며 바람처럼 흘려보낸 내 풋풋했던 날들을 반추한다. 내 젊은 날의 오만을 조상(弔喪)하며... <2011. 2. 10.>

조규익(숭실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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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1. 2. 3. 16:15

대통령의 말

 

최근 대통령이 만찬 회동에서 집권당 대표에게 “당신, 이제 거물 됐던데”라고 한 말은 곱씹을수록 우리나라의 국격(國格)을 떨어뜨리는 것 같아 찜찜하고 불쾌하다. 신문의 보도대로라면, 당시 대통령이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었다니 비아냥대는 말투였을 것이고, 속마음 역시 편치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대통령은 누구인가. 나이로 쳐도 이순(耳順)을 훨씬 넘겨 곧 고희(古稀)에 이를 분이고, 항간의 곱지 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집권당 대표는 이 나라 정치의 한 축을 담당하는 대표적인 인사일 뿐 아니라 나이 또한 이순을 넘긴지 오래다. 그러니 두 사람 모두 이 나라 정계의 거물들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대표에게 ‘당신, 이제 거물 됐던데’라고 했다면, 그동안 대통령은 대표를 우습게보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얼마 전 대통령이 추천한 감사원장 후보에게 자진사퇴를 권유한 것이 한나라당이고, 그 일의 주동이 안 대표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번 해프닝이 그로부터 연유되었다는 것 또한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집권 여당으로서도 감사원장 후보에게 많은 문제가 있었기에 대통령의 뜻과 다른 말을 하게 된 것이고, 그 때문에 당이 겪었을 곤혹스러움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과 대표 단 둘이 만난 사석에서라면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안가(安家) 회동’이라고는 하지만, 다수의 인사들이 참여한 자리였던 만큼 공적인 성격을 배제할 수 없는 모임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이런 말을 내뱉듯이 던졌다면, 대통령의 인격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조가 망한 뒤 식민 상황과 분단 상황을 거치면서 심화된 이념적 갈등은 우리의 집단정서를 험한 방향으로 몰아 왔으며, 그 위에 더해진 산업화와 비인간화는 다양한 사회문제를 표출시켰다. 집단 정서의 조악성(粗惡性)은 개인들의 언어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인터넷의 발달로 그런 부정적 성향은 갈수록 심화되는 양상을 보여준다. 최근 문제되는 ‘악플[악성 댓글]’들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간 우리 사회의 음지에서 활약해 오던 조직폭력배 문화[조폭문화]의 1차적 징표는 거친 언어다. 말하자면 대통령이 입에 올렸다던 ‘당신, 이제 거물 됐던데’ 식 어법은 얼마 전까지 조폭세계에서나 통용되던 것인데, 이번 일로 그 어법이 이제 이 사회의 하이클래스에도 수용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표면상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대중사회다. 그러나 언어를 통해 한 인간이 속한 이면적인 계층을 점칠 수 있는 것은 언어가 교양의 정도나 인격을 나타내는 1차적인 잣대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라고 감정이 없을 수 없겠으나, 시시각각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언론에 노출되어 전 국민에게 알려진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면, 아무 말이나 함부로 내뱉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대통령의 말은 무거워야 하고, 전략적이어야 하며, 충분히 모범적이어야 한다.

말을 절제하지 못하는 대통령에게 나라를 맡겨도 괜찮을지 불안함을 느끼는 국민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 한, 대통령의 리더쉽은 힘을 발휘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2011. 2. 3.)
 
                                                                                                               조규익(숭실대 교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2. 2. 17:03

세밑에 홀로 앉아

 

창밖의 나목(裸木)들에 모처럼 햇살 비치는 오늘, 섣달 그믐날이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홀로 창가에서 이 날을 지켰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넘어가는 시간의 질(質)에 변화가 없음을 느낀다. ‘그저께보다 나은 어제,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란 입에 발린 구호(口號)일 뿐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이제 발갛게 물들어오는 인생의 황혼을 향해 한 고비 넘고 있다는 뜻일까. 몸의 동력이 마음 같지 않은 나날이다. 당나라 때 천재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세모(歲暮)>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已任時命去 이미 시운에 맡겨 따라가는 몸

亦從歲月除 그저 세월 가는대로 따라갈 뿐

中心一調服 속마음을 하나로 고르게 가져

外累盡空虛 세상사 얽힘 모두 비워버리네

名宦意已矣 명예로운 벼슬자리에 뜻 이미 버렸으니

林泉計何如 자연으로 돌아갈 계책은 어떠한가

擬近東林寺 동림사 가까운 곳 어디쯤

溪邊結一廬 개울가에 한 채 오두막이나 지어볼까나

 

이제 50중반. 세상사 마음먹는 대로 흐르지 않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사람도 물결 속의 작은 입자(粒子)일 뿐 흐르는 물의 방향을 돌리는 키나 노가 아님을 이제 겸허한 마음으로 수긍한다. 흐르는 물결은 더 큰 물결에 합쳐지고, 합쳐진 물은 더 큰 물에 합쳐져 강을 이루거나 호수를 이룰 뿐, 입자가 마음먹는 대로 모습을 바꿀 수 없음을 아프게 깨닫는다. 애면글면 도모한다 하여 세상의 명리(名利)가 손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며, 간절히 바란다 하여 애욕(愛慾) 또한 성취할 수 없음을 터득하곤, 이제 옛 어른들이 말씀한 ‘작비금시(昨非今是)’의 탄식을 금치 못한다.

중병에 신음하다 북망산으로 실려 가는 이웃들을 보며, 탐욕의 끄나풀을 한사코 놓지 않으려다 정년(停年)으로 쫓겨 가며 앙앙불락(怏怏不樂)하는 주변의 존재들을 보며, 이제 하산(下山)의 신들메를 고쳐 맬 때임을 깨닫는다. 그렇다. 만각(晩覺), 아니 지각(遲覺)이다. 왜 나는 늘 남들보다 한 발 늦게 깨닫는 것일까. ‘깨달은 그 순간이 가장 이르다’는 억설(臆說)을 늘어놓는 사람도 있지만, 그저 위안을 주려는 것일 뿐 사실은 아니지 않은가. 어차피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 세상일진대, 세상의 가치관이란 대부분 개개인들을 비교하여 도출해내는 ‘상대적인 개념’ 아니겠는가. 말도 안 되는 주변의 왕따에 죽음으로 항변하는 후배를 보며, 대학이나 교수집단이라는 지식사회도 시궁창 그 자체임을 진저리치도록 절감한다. 그러니 남은 시간에 무얼 더 도모하고 바라겠는가. 백거이의 말처럼 물 좋고 산 좋은 곳을 골라 오척단구(五尺短軀) 누일만한 누옥(陋屋) 하나 얽어놓으면, 그것으로 만족한 것 아니겠는가.

***

조선조 후기의 천재 시인 신위(申緯)는 “佳人莫問郞年幾(아가씨, 이 사람의 나이 묻지 마오)/五十年前二十三(오십년전엔 스물셋이었다오)”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신위만한 그릇으로도 ‘칠십이 되어서야 마음먹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그러지지 않은’ 공자 나이에 이르러서야 겨우 나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신위의 그릇을 훔쳐 볼 수조차 없는 국량이면서도 그보다 이십여 년 앞서 나이의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나는 망발지한(妄發之漢)쯤 된다고 할 수 있으리라.

어쨌든 매미 껍질 벗듯 차분한 마음으로 욕망의 허울을 벗어 던지고, 내일 아침 새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리라.

 

경인년 묵은 해를 보내며

고요한 숭실동산에서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2. 2. 14:37


  <올리브산 예수승천교회 표지판>

  <예수승천교회 모습>

  <예수님이 밟고 승천하셨다는 돌>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순례객들>

 <승천교회 문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순례객들>

  <교회 앞 길가에 서 있는 올리브 고목>
  

  <승천교회에서 주기도문 교회 가는 도중에 만나는 계곡의 민가들>

  <올리브산 쪽에서 예루살렘 성 방향으로 내려가며>

  <올리브산에서 건너다 본 예루살렘 성 안과 밖의 풍경> 
 
  <승천교회 입구>


이스라엘 제1신 : 올리브산, 그 초월과 극복의 공간 

 

2011년 1월 9일, 이스라엘에서의 첫날. 쌀쌀한 날씨 속에 올리브산을 찾았다. 전망산, 시온산[성전산]과 함께 기독교 상징의 극치를 보여주는 올리브산. 그 정상에 자그마한 성전[예수 승천교회]이 아랫마을들을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뒤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증거의 자리를 드디어 만나는 순간이었다.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시어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그들이 예수님께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누가복음』(24장 50~53절)>는 기록으로 나타난 곳. 바로 승천교회였다. 올리브 이파리들은 쌀랑한 바람에 흔들리고, 밀려드는 순례자들은 비좁은 교회 내부 한 복판의 돌에 연신 친구(親口)의 예를 행하고 있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발을 디디셨다는 바위. 위쪽엔 이슬람 세력이 씌웠다는 둥근 돔이 하늘을 막았고, 돌 벽의 창틈으론 비둘기들이 들락거렸다. 문밖에는 아랍 청년으로 보이는 노점상이 순례자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고, 주변은 돌투성이의 황무지였다. 대체 예수님의 말씀이 저 척박한 돌들 사이에서 어떻게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세상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지, 경이로운 일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정교회 사제가 순례에 나선 한 무리의 아이들을 이끌고 들어와 예배를 집전한다. 그의 무겁고 둔탁한 표정이 사방의 돌들에 햇살로 부서지는 성령을 받아들인 것인지, 자못 빛을 발하고 있었다.

 

교회 밖으로 나오니 늙은 올리브 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그 아래쪽과 건너편 예루살렘 성 밖은 온통 석관들이 할 말 많은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듯 열 지어 누워있었다. 지금까지 양지 바른 언덕에 누운 저 석관들의 수를 과연 헤아려본 자가 있었을까. 건네다 보이는 예루살렘의 성채는 말없이 세상을 안과 밖으로 나누고 서 있는데, 그 안과 밖은 말하자면 삶과 죽음의 공간이었다. 성 안은 산 사람들의 세계, 성 밖은 죽은 자들의 세계라고나 할까.

 

유독 황금사원이 두드러져 보였다. 지금은 이슬람 세력이 차지하여 무슬림 외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그곳이 그들에겐 3대 성지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 황금빛이 너무 강렬하여 눈에 거슬리기는 하나, 어쨌든 성 안은 살아있는 생명의 공간이었다. 이승의 삶을 마감하면 분문(糞門)을 통해 양지 바른 성 밖의 공동묘지로 나아가 누운 채 부활과 영생을 기원하는 또 다른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네 서민들이 술 한 잔 거나해지면 부르는 노래 <성주풀이>의 또 다른 버전이었다. 고금을 통해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에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 번 가면 저기 저 모양 될 것이니 엘화 만수 엘화 대신이야!”라는 노래만큼 인생의 허무함에 대한 절절한 아우성이 또 있을까. 중국의 북망산(北邙山)은 낙양성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던가. 그러나 예루살렘의 경우는 성문을 열자마자 그곳이 바로 북망산이었다. 이곳 사람들도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하며 불가지(不可知)의 세계인 저승을 꺼렸으리라. 이왕이면 여럿이 함께 누워 두려움들을 덜어보려 했을까. 베이지색에 가까운 석관들은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제자들과 마지막 밤을 보내신 이곳 올리브산에서 그 모습을 건너다 보시고 예수님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으리라. 곧 무너질 예루살렘 성을 생각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는 하지만, 그보다 먼저 욕망의 삶에서 허우적대는, 어리석은 인간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올리브산 정상에서 5~6분 걸어내려 간 자리에 눈물교회가 조용한 자태로 서 있었다. 제자들이 잠든 모습을 보시며 잠시 후 로마군에 체포될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며 안타깝게 기도하던 바위. 그 위에 세워진 만국교회도 있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타하신 유적들이 나그네의 마음을 처연하게 만들고 말았다.


세속의 권력에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승천하신 공간에 그득하게 남아있는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증거의 한 끝이나마 잡을세라 줄줄이 누운 시신들이었다는 것. 인간의 어리석음이 만발한 욕망과 허무, 그러나 끝내 초월과 극복의 기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승리의 현장이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 31. 01:18

최근 정부와 한나라당은 고위당정협의를 통해 내년부터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모처럼 듣게 되는 반가운 소식이나 우려되는 점도 적지 않다.

우선 논의의 과정이나 결정 자체가 너무 즉흥적이어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해야 할 교육부서나 일선학교들이 과연 당장 내년부터 국사교육을 시킬 만한 준비가 되어 있는지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그동안 교육당국은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준다는 이유로 국사를 선택으로 돌렸으며, 그에 따라 국사를 선택하는 학생들은 소수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국사를 홀대하는 데 대하여 뜻 있는 국민들이 우려의 목소리를 높여 왔음에도 정책 당국의 국사에 대한 생각은 단호했다. 그런 마당에 갑작스레 필수로 전환하겠다고 하니 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대다수 국민들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사능력 검정시험을 통과한 사람만 교원임용시험에 응시할 수 있게 한다거나 대학수학능력 시험에서 국사를 필수과목으로 지정하겠다는 방안도 나온 모양이니, 국사에 대한 대우가 '굶어 죽어가던 흥부네 안방에 황금을 쏟아 부은' 격이다. 그런데 우리 학계나 교육당국 혹은 일선학교에 지금 당장 국사교육을 시킬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는 점은 무엇보다 심각하다.

과거 시행해 왔던 국사교육을 상기해보면 왜 우리가 앞으로 부활할 국사교육에 큰 기대를 걸 수 없는지 분명해진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식민사관(植民史觀) 같은 잘못된 바탕 위에서 역사적 사건들의 암기만을 강요함으로써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시키지 못했다는 점이다. 학생들이 암기 위주의 국사교육에 환멸만을 느끼게 되었다거나 역사에서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교훈을 얻기보다는 자기비하의 모멸감을 갖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시련과 극복'은 세계 모든 민족들의 역사에 공통된 주제다. 그러나 우리만큼 그 정도가 심한 민족이나 나라는 그다지 많지 않다. 지금도 동북아의 한ㆍ중ㆍ일 3국은 '역사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은 꽤 오래 전부터 역사를 날조하고 날조된 역사를 그대로 교육시켜 왔으며, 중국도 역사 날조에 동참하고 있음은 최근에 불거진 '동북공정'의 실태를 통해 밝혀진 바 있다. 일본과 중국은 역사의 무기화를 통해 이 지역의 패권을 쥐어보려는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는데, 우리는 그나마 국사를 선택으로 돌리거나 아예 폐지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온 것이다. 그들이 역사를 날조한다고 우리까지 그에 동참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역사를 무기화 하는 그들의 행위에 대한 대응전략 정도는 세워두었어야 한다. 최근 중국이 동북공정의 칼날을 드러냈을 때 우리의 사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고, 일본이 오랫동안 역사에 대한 해석으로 도발을 해올 때도 시원한 논리로 대응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뜻 있는 재야 사학자들로부터 비판의 화살을 맞으면서도 실증사학의 울타리나 식민사관의 틀을 과감히 탈피하지 못하는 우리의 사학계는 큰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고등학생들에게 제왕의 이름, 연대 혹은 사건의 개요나 외우게 하는 것은 국사 교육이 아니다. 역사교사는 국사책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역사가의 명쾌하고 공정하며 미래지향적인 해석을 가르쳐야 한다. 영광의 역사는 그것대로 불운의 역사는 그것대로 정당한 사관에 입각한 해석적 의미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제대로 된 국사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 카(E.H.Carr)가 말했듯이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가 역사라면, 제대로 된 국사교육을 통해서만 우리는 현재와 미래에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나라가 망해도 정신만 있으면 살아날 수 있다'는 나철의 말은 역사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드러낸 금언이다.

나라 사이의 벽을 허무는 글로벌 시대일수록 국사나 민족사를 교육시켜야 하는 것은 '드넓은 벌판에 홀로 설만한 줏대' 즉 자아 정체성이 긴요하기 때문이다. 자아 정체성은 조상들이 헤쳐 나온 역경의 체험을 들려주고 극복의 지혜를 잘 다듬어 가르치는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다. 국사교육이 졸속으로 재개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왕 국사교육을 재개하려면 제대로 준비한 다음에 하는 게 옳다.  
                                                               조규익(숭실대 교수/인문대 학장)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 25. 19:32


늘 그랬던 것처럼 이번 세밑에도 고향의 서예가 동포선생으로부터 신춘휘호가 도착했다.

두 글자로 되어 있는데, 첫 글자는 아무리 뜯어보아도 알 수가 없다. 한글이라면 ‘놔’로 읽을 수 있겠는데, 설마 신춘휘호 두 글자 가운데 첫 글자를 한글로 썼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한자(漢字)의 간체자(簡體字)로 볼 수도 없었다. ‘처(處)’나 ‘부(赴)’의 약자 혹은 간체자 비슷도 한데, 정확한 건 아니었다. 궁금함을 견디지 못한 나는 급기야 전화기를 들었다. “첫 글자를 뭐라고 읽어야 합니까?” 대답인즉슨 “한글로 ‘놔’요!” 하는 것 아닌가. “‘놔道’라니요?” 대답인즉슨 “놔두라는 말이지. 귀찮게 하지 말고 내 멋대로 살게 놔두라는 말이오, 하하!”

아하, 그렇구나. 동포선생은 ‘놔둬!’를 경상도식으로 ‘놔도!’로 표현했고, 뒷글자 ‘도’를 ‘도(道)’로 써서 ‘내 멋대로 살겠음’의 의지를 도의 차원으로 승격시키고자 한 것이 아닌가.

참으로 절묘하고, 때에 맞추어 잘도 고안해낸 용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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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요즘처럼 개인의 자유의지가 완벽하게 보장되는 듯 하면서도 철저하게 통제되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젊은이들은 제멋대로 옷을 입고 다니는 것 같지만, 가만히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연예인들이나 패션모델들의 스타일을 모방하는데, 그런 패션이야말로 개인으로서의 젊은이를 가만 놔두지 않는 족쇄인 셈이다. 옷은 물론 머리 모양도, 신발도, 아니 심지어는 사고방식까지도 시대를 풍미하는 패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요즘의 세태다. 그 뿐인가. 어딜 가도 감시와 통제를 당한다. 핸드폰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는 요즘 사람들. 자동적으로 위치가 추적되니 마음 놓고 일탈의 즐거움을 누릴 수도 없다. 해외여행 중 어느 지역엘 들어가니, 갑자기 로밍해온 핸드폰에 문자가 찍힌다. “그 곳은 여행 위험지역이니 즉시 그곳을 벗어나시오!”라는 명령이 대한민국 외교부로부터 날아오는 게 아닌가. 대체 그들은 내가 이곳에 들어온 지를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국민을 보호하고자 하는 배려가 느껴지기 전에 ‘참, 귀찮게 따라다니며 감시하고 통제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내가 누군가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구속감이 나로 하여금 힘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요즘 사람들의 입에서 ‘날 좀 제발 내버려둬!’라는 절규가 시도 때도 없이 터져 나오는 거나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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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이스에 디오게네스(Diogenes)란 철학자가 살고 있었다. 퀴닉학파(犬儒學派)에 속하던 그는 금욕적 자족을 강조하고 향락을 거부하며 일체의 세속적인 습관이나 형식 등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긴 인물이다. 그에 관한 전설은 많지만, 알렉산더 대왕과의 일화는 ‘놔道’와 관련이 깊다.

그는 평소 통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당시 그리이스 땅 전체를 정복하여 위세를 떨치던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왕에게 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알렉산더 대왕은 몸소 그를 찾아갔다. 그 때 그는 통 속에 앉아 볕을 쬐고 있었다. "나는 알렉산더 대왕이오. 뭐 원하는 일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그는 대왕의 말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쪽으로 비켜 서 주시겠습니까? 해가 가려 그늘이 지는군요."

하릴없이 발길을 돌린 알렉산더는 왕궁으로 돌아오며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만약 내가 알렉산더가 아니었더라면, 저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이다.

디오게네스는 왕은 물론 천하의 누구로부터도 통 속에 들어앉아 볕을 쬐고 있는 자기의 자유를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세속의 권력보다 더 중한 것이 자신의 자유라는 점을 그는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놔道’ 정신의 본질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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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5월 'Get Back'이란 이름으로 출시되었던 비틀즈(Beatles)의 마지막 음반 'Let It Be'의 Side2에 실린 노래들 가운데 하나인 <Let It Be>. 당시 이 노래 한 소절 못 부르면 간첩이란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세계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을 매료시켰다. 특히 내 학부시절이었던 70년대 중반에는 왠지 모르게 이 노래의 음울하면서도 저항적인 멜로디가 그러잖아도 억눌려 있던 우리의 감성을 콕콕 쑤셔대곤 했다. 사실 비틀즈의 로큰롤은 60년대에 전염병처럼 퍼지기 시작한 히피문화에 노래라는 날개를 달아준 셈이다. 히피의 성향을 한 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것들 가운데 내가 주목하는 것은 ‘(소극적) 저항, 탈권위주의, 산업사회로부터의 일탈’ 등이다. 그렇다면 ‘let it be'의 뜻을 어떻게 해석할까.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해석들이 있을 수 있겠으나, ’그냥 내버려둬!‘→’내비둬‘ 쯤으로 푸는 게 어떨까?

 

전체 42행의 리릭(lyric) 가운데 21행이 ‘let it be'라면 그들이 전하고자 한 핵심은 그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니 권위주의로부터 자신들의 영혼이 자유로워지길 바란 것이나 아닐까. 아니 소극적이지만 기존의 권위나 물신(物神)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한 ’인간의 선언‘ 쯤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내가 고통의 시간 속에 있을 때

Mother Mary comes to me               성모는 내게 다가와

Speaking words of wisdom              지혜의 말씀을 전해주시네

Let it be                                        ‘내비 둬’ 라고

 

비틀즈의 입장에서 연약한 인간을 보듬어 주는 성모는 권위의 존재 아닌 ‘탈권위’의 기호로 인식했음직하다. 누구의 간섭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영혼의 외침. 그래서 'let it be' 즉 ‘내비 둬’는 동양으로 올 경우 ‘놔道’로도 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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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도 올 한 해 ‘놔道’를 실천해보려 한다. 비록 몇 발 못 가 공동체로부터 추방될 위험이 농후하긴 하지만...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