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1. 11. 5. 01:30

2011년 숭실⋅인하⋅중앙 대학원 연합심포지움 토론요지



연구부정에 무감각한 지식사회, 방황하는 학문후속세대



                                                                                                              조규익(숭실대)


몇 달 전 외국 유학 중인 20대 중반의 제자[이른바 ‘학문후속세대’라 할 수 있는]가 메일을 보내왔다. 공학 분야 어느 전공의 세계적인 학회 홈페이지에 ‘대한민국 교수 및 학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자행한 논문표절 사실들’이 대문짝만하게 실려 세계 지식인들의 웃음꺼리가 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메일에는 그들 가운데 한 교수가 얼마 전 그 표절논문들 가운데 하나로 한국의 국토해양부 장관으로부터 우수논문상까지 받았다는 사실까지 첨부되어 있었다. 더욱 황당한 것은 그 논문들이 외국 학자들의 논문에 들어 있는 아이디어를 ‘살짝 도용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송두리째 베낀 경우들이라 했다. 깜짝 놀라서 그 사이트를 방문한 결과 과연 그곳엔 복수의 대학 교수들을 포함한 한국학자들이 ‘여러 건의 논문들을 표절한 파렴치범들’로 낙인 찍혀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고, 우리나라의 신문기사를 검색하니 과연 그 교수는 장관상까지 받은 것으로 되어 있었으며, 해당 교수의 대학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그 교수는 ‘우수교수’로 대학 홈페이지의 첫 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같은 전공의 많은 학자들이 포진해 있는 해당 학계나 우리나라 정부에서는 잠잠했다. 그 사실을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알고도 그러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언제까지 국제적인 수모를 견뎌내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 시점으로부터 무려 석 달이 지나서야 그 사실은 우리나라 언론에 보도되었고[조선일보, 2011. 10. 5.],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언론에서 몇 마디 떠들다가 모두의 뇌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어제 그 대학의 사이트를 다시 방문해보니 그 교수는 아직도 해당학과의 ‘시니어 교수’로 당당하게 남아 있었다. ‘특정분야 극소수의 일’이라고 편한 마음을 먹을 수도 있겠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남의 지식을 훔쳐 재미 보는 일’을 아무런 죄의식이나 죄책감을 느낄 만한 사건으로 보지 않는 지식인이 존재한다면, 우리 지식사회엔 미래가 없다. 과연 우리나라 대학들은 이들을 교수로 인정해도 되는 것인가. 가능성과 실력을 갖춘 학문후속세대들이 존경과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우리의 교수집단이나 지식사회는 연구윤리의 정립자 혹은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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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을 비롯한 고위 공직에 발탁되는 교수들이 많아지면서, 청문회 등 검증의 기회가 정립되면서, 비로소 ‘연구부정’은 우리 지식사회의 치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상당수 고위 공직 후보자들이 연구부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은 지식사회에 대하여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게 되었다. 언론이나 네티즌들은 고위 공직의 물망에 오르는 학계인사들의 논저들을 검증하기에 바쁘고, 야당은 그런 정보를 빌미로 후보자 본인은 물론 집권세력을 흠집 내기에만 전념한다. 문제의 후보자들은 으레 ‘당시에는 관행이었다/제자가 모르고 한 일이다/기억에 나지 않는다/확인해 보겠다’ 등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지만, 매우 떳떳하지 못하다. 초창기에는 그런 문제로 공직의 입구에서 낙마한 사고들도 더러 있었으나, 지금은 연구부정 문제로 낙마하는 사례가 거의 없다. 그만큼 짧은 기간 연구윤리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문제의식이 무디어진 것이다. 처음 그런 문제들이 불거졌을 때 국회에서라도 연구부정의 문제를 논의해볼 법도 했건만, 그들이 연구나 연구윤리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턱이 없고 관심조차 없었으니 애당초 기대할 필요도 없었던 일이긴 하다. 사안의 심각성이 부각되면서 정부와 학계가 부랴부랴 ‘연구윤리 규정’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연구부정에 적극 대처한다고 해왔지만, 지금도 빈번하게 발생하는 연구부정의 사례들은 그런 노력들이 대체로 문제의 본질에 훨씬 못 미치는 ‘격화소양(隔靴搔癢)’격의 시늉에 불과했음을 입증할 뿐이다. 입만 열면 대학생들의 리포트부터 철저히 점검해야 한다고 떠들어온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데,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리포트를 작성한다고 하면서 인터넷 사이트에서 긁어다가 짜기워 내거나 돈 몇 푼으로 구매하여 제출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현실이다. 전담 교수들까지 채용하여 대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지만, 어린 새싹들까지 연구부정의 고전적 수법에 능숙해져 가는 현실을 보면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글쓰기란 다만 ‘글의 겉을 꾸미는 기술’에 불과하지나 않은가 불안해지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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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윤리의 문제, 즉 서구에서 이미 개념 정립이 끝난 날조[fabrication]⋅변조[falsification]⋅표절[plagiarism] 등 연구부정의 행위들에 대한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 또한 화려하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의 경우도 지식사회의 폭이 넓어지고 지식이 재화 창출의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지적 소유권 문제나 연구윤리의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에 따라 이 분야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결과들도 많이 보고되었고, 비록 형식에 그치는 감이 없지 않지만, 학회들의 논문집 말미에는 ‘연구윤리규정’이라는 것도 실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부정이 갈수록 교묘해지고 빈번해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학문적 아이디어를 얻고, 그것을 골격으로 저작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야말로 철저히 ‘양심’에 관련된 문제임에도, 우리가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는 일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부정의 사건이 일어날 경우 그냥 외면하거나, 기껏 ‘기술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실수’ 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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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고 글 쓰는 일의 윤리성’은 유치원 단계부터 교육하여 ‘심성(心性)으로 고착’시켜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문제는 너무 크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서 논할 수는 없고, 당면한 우리의 관심사는 3개 대학원[중앙⋅인하⋅숭실]의 학생[학문후속세대]들을 어떻게 제대로 교육시킬 것인가에 있다. 토론자로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자 한다. 우선 세 대학원만이라도 「정의롭게 사고하기와 연구윤리」(가칭)를 공통과목으로 개설했으면 한다. 인문계[예술계 포함], 경상계[사회계 포함], 이공계 등 대학원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전공에 해당하는 이 분야의 한 과목을 반드시 이수케 할 필요가 있다. 세 대학원이 ‘연구윤리 공동위원회’를 만들고, 그 위원회에서 매년 혹은 매 학기 세 대학의 교수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강의를 맡기고, 그 교수에게는 일정액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것이 좋다. 연구 윤리가 교수 개인의 전공분야는 아닐 것이며, 강의내용을 새롭게 개발하고 조직하는 일이 수월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한 학기 동안 전문적으로 동⋅서양의 연구풍토나 윤리 등을 공부하면서 학생들 스스로 연구부정의 폐해를 깨닫게 하는 것은 물론, 지식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된 이후에는 그들 스스로 연구윤리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로서는 그 길만이 그나마 우리의 학문후속세대가 연구부정의 탁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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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가 ‘연구부정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담하다. 학문후속세대로 하여금 지적 생산 작업에서 갖추어야 할 정직한 자세야말로 국가 간의 경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최종 병기’ 그 자체다. 후속세대에게 아무리 현란한 이론과 학설을 가르친들 이런 병기를 갖추지 못한다면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하다. 어설픈 미봉책이나 시늉만으로 문제의 본질을 덮을 수 있을 만큼 지금의 우리 처지가 한가롭지 못하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0. 26. 18:29


 <플라니에타 호텔>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고려인 김마리아>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고려인 박비탈리>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고려인 박아나똘리>

  <고려인 협회에서 만난 고려인들>

  <고려인 협회에서 만난 고려인들>

 <고려인 협회 이기미 회장과 김유리 교수>

 <벨라루스 고려인 협회 이기미 회장>

<벨라루스 대학 한국학과 학생들과 함께>

 <벨라루스 대학 한국학과 학생들과 함께>

 <벨라루스대학교 국제관계학과 빅또르 샤두르스키 학장과 함께>

  <벨라루스대학교 한국학센터>

 <민스크 시내의 한 전통교회>

 <민스크 독립광장의 시몬과 헬렌 성당>

  <민스크 독립가도(Independence Avenue)>

  <민스크 시내 전통시장>

  <민스크 시의 오페라 극장>

 <점심으로 먹은 샤쉴릭>

 <민스크 시내에서 점심을-아리안과 함께> 

 <뎨르쥔스크 극장>

 <뎨르쥔스크 극장>

  <뎨르쥔스크 극장에서- 승무>

  <뎨르쥔스크 극장에서 공연 중인 무용단>

<뎨르쥔스크 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뎨르쥔스크 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뎨르쥔스크 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이대 무용과  학생들과 관객들>

  <벨라루스 국립예술박물관>

 <벨라루스 국립예술박물관에서 사진을 찍는 신혼커플>

 <이반 비탈리 작 "푸쉬킨"-벨라루스 국립예술박물관>

  <작자미상의 "전쟁 후 돌아오는 사람들"-벨라루스 국립예술박물관>

  <미르성>

  <미르성 안에서>

  <미르성 조감도>

  <아름다운 벨라루스의 늪지대>

  <광야를 달리는 벨라루스의 들소들>

  <미르성에서 안톤, 올랴, 백규>

  <미르성의 우물 앞에서 안톤, 오교수, 올랴>

  <미르성의 식당에서 백규와 올랴>

  <미르성의 러시아 정교회 앞에서 오정혜 교수, 백규, 올랴>

  <미르성의 러시아 정교회>

  <민스크 시내 승리광장의 꺼지지 않는 불꽃>

 <민스크 시내 전통시장에서>

 

<벨라루스 대학 관계자들, 왼쪽부터 김유리교수, 백규, 알리악스 동방학과장, 길경숙 교수>




아름다운 벨라루스, 그리고 여덟 가지 만남들

 

조규익

 

먼 길이었다. 루프트한자에 몸을 싣고 인천공항을 떠난 시각이 19일 오후 1시 30분. 중간 경유지인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한 건 정확히 12시간 후인 한국시각 20일 오전 1시 30분. 두 시간 후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떠나 민스크에 도착하니 현지 시각 19일 밤 11시 45분이었다. 만 17시간을 날아온 셈. 호텔에 여장을 풀고 짐 정리를 마친 시각이 새벽 2시였다. 대충 자고 일어나 다음 날 오전 10시부터 이곳에서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샤갈의 고국, 제법 눈이라도 내릴 법한 쌀랑하고 음산한 날씨가 김춘수의 시를 떠오르게 했다.

 

샤갈의 마을에는 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에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1887년 7월 7일, 벨라루스 비텝스크 인근에서 유태인으로 태어난 샤갈. 대상의 내면세계에 초점을 맞춘 그의 화풍이 어쩌면 햇살의 세례를 마음껏 받지 못하는 듯한 벨라루스의 아름다운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나 아닐까. 그러나 그것도 부질없는 생각이리라. 이 쌀랑한 추위, 어찌 3월뿐이랴. 한 여름에 내리는 눈도 볼 수 있을 것이니. 시인 김춘수의 감성이 새롭게 빚어낸 페이소스가 폐부에 깊숙이 스며드는 나라를 나는 찾아온 것이다.

 

#1 낙후된 시설, 그러나 반짝이는 학생들

 

10월 21일. 벨라루스대학교 국제관계학부 한국학센터의 사람들을 만났다. 1학년부터 5학년까지,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과 교수들, 민스크 대학의 따찌아나 교수까지 참석했다. 특히 이 학과의 핵심 길경숙, 오정혜, 김유리 교수 등과 학생들은 똘똘 뭉쳐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강연제목은 ‘한국문화의 특성과 세계화의 실상’이었지만, 학생들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준비해간 교과서적 논의는 사라지고, ‘한-벨라루스’ 두 민족의 공통점이나 후진국에서 선진국의 문턱까지 경험한 내 생애와 꿈을 바탕으로 벨라루스의 젊은이들이 가꾸어야 할 미래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실용적인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온 것.

참으로 선량하고 순박하며 ‘똘똘한’ 젊은이들이었다. 특히 환상적인 것은 그들이 타고나다시피 한 어학 능력이었다. 구소련의 일부로서 동쪽으로는 러시아, 서쪽으로는 폴란드, 북쪽으로는 발트 3국, 남쪽으로는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공유하고 있는 벨라루스는 ‘대륙 속의 섬’이었다. 독립국가연합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이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민족이 그리 많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다양한 민족들과 교류해온 증거는 이 젊은이들의 말과 피부, 그리고 눈동자에 살아 있었다. 태어나서부터 벨라루스어와 함께 러시아어를 어머니의 젖과 함께 먹고 자란 그들이었다. 부모나 조부모가 속한 민족에 따라 다양한 언어들의 세례 속에서 이들은 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다. 영어나 불어 독일어 등을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하는 그들이 신기했다.

아버지가 이란인, 어머니가 벨라루스인이고, 지금 할머니가 테헤란에 살고 있는 다문화 출신의 청년 아리안. 러시아어, 벨라루스어, 영어, 이란어, 독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드디어 한국어까지 구사하게 된 수재였다. 이미 두 세 개의 언어를 막힘없이 구사하는 그들은 미지의 한국 교수에게 대단한 호기심을 표했다.

한국의 몇몇 대학들이나 국제교류재단 등에서 학비와 생활비의 지원을 받아 유학하게 된 상당수의 학생들은 장밋빛 코리안드림들을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않게 주어진 ‘한국행’을 그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마주 하고 있었다. 그들의 꿈이 얼마나 현실화 될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그런 꿈들이 환상에 그치지 않도록 도와줄 준비를 갖추고 있는가. 벨라루스 대학 국제관계학부 샤두르스키 학장도 동양언어학과 알리악사놀리 학과장도 학생들의 꿈이 실현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쉽진 않겠지만, 벨라루스대학이 현재의 정체(停滯)를 조만간 탈출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갖기로 했다.

대학의 건물은 낙후되어 성냥갑만한 엘리베이터에 오르기를 포기한 채 7층, 8층을 도보로 오르내리면서도 힘들어 하지 않고, 점심시간을 갖지 못할 만큼 강의실 부족에 시달리면서도 얼굴에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들이 바로 벨라루스의 미래였다.

 

#2 수줍고 조용한 고려인들

 

민스크 체류 둘째 날. 벨라루스 방문의 주목적인 고려인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고려인협회 이기미 회장의 주선으로 고려인 공동체를 대표하는 중년의 남녀들과 만날 수 있었다. 러시아어권의 고려인들을 만날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몇 마디 고려 말이나마 꺼내도록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이다. 몇 번이고 채근해야 겨우 입술을 달싹이며 몇 마디 고려 말들을 꺼내는 그들이었다.

왜 그럴까? 사실 오랜 세월 디아스포라의 그늘에 살아오면서 동족을 만나는 일과 조상들의 말을 함께 나눌 상대를 만나는 일이 그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일일까. 그런데 그들은 언제나 쭈뼛거렸다.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 말을 못하는 경우가 그 하나이고, 가혹한 동화정책으로 인해 고려 말을 잊어버린[아니, 잃어버린] 상처로부터 생겨나는 강박관념이 그 두 번 째 이유이리라. 가끔 반죽 좋은 고려인 아줌마들의 경우 고려 말을 하려고 애쓰는 수가 있긴 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으레 “고려 말이 틀릴까봐 겁이 납지비!” 하며 꽁무니를 빼곤 했다.

우리가 흔히 외국인 앞에서 제대로 입을 떼지 못하는 것은 혹시나 ‘말이 틀릴까봐서’이다. ‘문법적으로 틀린 표현을 쓰면 어쩌나, 단어가 생각나지 않으면 어쩌나’ 등 이런저런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사실 외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들은 늘 ‘틀려도 좋으니 과감하게 입을 벌려 말하라’ 고들 하지만, 인간의 자존심과 수치심은 그런 용기를 억누르기 일쑤다. 말하자면 고려인들이 동족을 만나면서도 이런 강박관념에 시달린다는 것은 그들이 나를 ‘외국인’으로 대한다는 뜻일 것이다. 사실 용기를 내어 입을 떼는 고려인들도 대부분 어미(語尾) 부분은 ‘뚜르르’ 굴러가는 러시아 억양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제 부모나 조부모가 당했던 강제이주의 트라우마로부터 약간은 자유로워진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지만, 아직도 이 땅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데서 느낄 수밖에 없을 긴장이나 조심성은 대단한 듯 했다.

벨라루스 고려인협회에서 만난 박비탈리, 박무사, 이기미, 김유리엔나, 김엘비라, 박아나똘리 등 고려인 어른들. 이 중 회장인 이기미 선생만 뺀 다른 사람들은 대개 고려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들임에도 고려 말 쓰는 것을 어려워했다. 부모 대에서 한 번의 혼혈이 이루어진 젊은 고려인 김유리가 어린 사람들에게 고려 말을 가르치는 일에 열정적인 것은 젊은 혈기와 자신감 덕분이리라. 대부분 구소련의 정책에 순응하여 살아남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었던 부모들의 처지에서 자식들에게 고려 말을 강요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고려 말을 빨리 버릴수록 그 사회에 대한 적응력을 높이는 길이었을 것이고, 그 방법만이 자신들의 살길이었음을 절감했음에 틀림없다. 내 눈 앞에 나타난 고려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 분명한 결과였다.

 

#3 오페라 극장에서 만난 벨라루스의 예술혼

 

10월 21일 밤. 벨라루스 대학교 국제관계학과의 몇몇 교수와 학생들 덕분에 오페라의 본고장에서 카르멘을 관람하는 호사를 누렸다. 멋지게 세운 하얀색의 오페라 극장에 도착하니 연인들끼리, 친구들끼리, 가족끼리 삼삼오오 밀려드는 인파가 인상적이었다.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늘상 해온 방식이라는 듯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급한 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표를 싼 값에 인수하기도 했다.

울려 퍼지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는 나 같은 문외한이 듣기에도 정상급임을 느낄 수 있었다. 벨라루스의 오페라나 발레 수준이 유럽에서 정상급이라고 자랑하는 인나 양의 말이 허언(虛言)은 아니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발레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엄청난 공부를 할 뿐 아니라, 인근의 국가들에서도 뜻을 가진 젊은이들이 몰려온다는 것이다.

한 주일의 일과가 끝나는 금요일 밤, 이곳에서 오페라를 관람하며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민스크 시민들의 삶의 단편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초등학생부터 허리 구부정한 노인들까지 좌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케스트라의 음악소리를 감상하는 데 방해된다는 노기(怒氣)의 표현인 듯, 소곤대는 뒷좌석의 초등학생을 돌아보며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하며 경고하는 한 노파의 거동, 막이 끝날 때마다 기립박수로 출연자들을 격려하는 관람객들의 적극적 참여 등이 이들의 문화적 수준을 말해주고 있었다. 밤이 깊어감에 따라 민스크 시민들의 예술적 안목이 빛을 발하는 현장이었다.

 

#4 깨끗하고 기품 있는 도시미학

 

건물과 도로, 그리고 사람들이 도시 구성의 3요소다.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건물이란 공간이 필요하며, 물류나 이동을 위해 도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사람들의 질서의식 혹은 매너다.

‘백색의 깨끗함’으로 빚어낸 도시미학의 정점이라는 것이 벨라루스 특히 민스크의 첫 인상이었다. 비록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이긴 하지만, 나는 지금껏 상당수의 나라들과 도시들을 구경했다. 구소련권의 국가들 대부분은 무겁고 침침하며 지저분하기까지 했다. 유럽의 도시들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칙칙함과 무거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에 비해 밝고 단정하면서도 역사성까지 갖춘 것이 민스크였다. 민스크는 2차 세계대전으로 거의 대부분 파괴된 터전 위에서 새롭게 계획된 도시다. 그래서인지 도시 전체에서 분명한 계획성이 느껴졌다.

우선 색깔이다. ‘벨라루스’란 말이 ‘하얀 루시[Белая Русь 벨라야 루시]’에서 유래된 것처럼 이 나라 사람들이 흰색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도시의 배색(配色)에서 알 수 있었다. 대부분 하얀 피부를 갖고 있는 이 나라 사람들[특히 여성들]은 흰옷을 좋아하고 주택의 벽도 희게 칠하는 듯 했다. 건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아도 대충 지은 경우가 없었다. 특이한 디자인과 채색으로 한껏 멋을 부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자기 집만 두드러지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두드러지면서도 다른 건물들과의 조화를 중시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시청과 벨라루스대학 본부, 민스크 호텔, 시몬과 헬렌 성당 등이 둘러싸고 만들어진 독립광장으로부터 독립가도[獨立街道 ; Independence Avenue]는 시작된다. 유럽을 통틀어 가장 긴 가도라 하는데, 길을 경계로 양 옆으로 늘어선 건물들은 베이지색을 바탕으로 한 흰색 위주의 배색이었다. 건물들은 높아야 3~4층. 주변 건물들과의 밸런스를 해칠 만큼 두드러지게 높은 건물들은 보이지 않았다. 철저하게 균형 잡힌, 이른바 절제의 미학이었다. 절제의 미학을 완결시키는 요소가 바로 기껏 베이지 톤을 넘지 않는 흰색의 바탕의 건물들이었다. 주황색의 시몬과 헬렌 성당이 오히려 이색적으로 보일 만큼 민스크 시내의 색채미학은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백색의 조화로부터 구현되고 있었다.

더욱 놀란 것은 도시의 야경(夜景). 높고 낮은 건물들에 일일이 조명등이 설치되어 도시 전체가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는 사실이었다. 흡사 어둡고 칙칙한 것을 혐오라도 한다는 듯, 백색과 은은하게 어울리는 음영(陰影)의 조화가 도시를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깨끗하고 기품 있는 도시의 미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나 아닐까.

 

#5 벨라루스의 미술을 훔쳐보고, 한국 전통예술의 전도사들과 만나다

 

10월 22일. 고려인협회의 이 회장과 벨라루스 대학 한국어과 오 교수의 권유로 오후 4시 뎨르쥔스크 시에서 열리는 고려 춤 공연을 참관하기로 하고, 비는 짬을 이용하여 오전 10시 벨라루스 대학 한국어과 학생 아리안의 안내로 벨라루스 국립 예술박물관을 찾았다. 큰 규모의 건물에 다양한 시기와 다양한 민족 및 국가들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었다. 회화를 비롯, 브론즈 상, 목각, 도자기, 이꼰 등 각 시대의 생활ㆍ종교미술부터 파인아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과 성향의 예술작품들이 하나의 공간에 배치됨으로써 드러나는 조화와 융합이 감동적이었다. 유럽 여러 나라들의 엄청난 미술관이나 박물관들을 두루 보아온 입장이지만, 벨라루스 역시 유럽 권 국가의 예외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술의 창조 못지않게 보존과 전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했다. 보아야 할 예술은 많고 그것을 향유할 시간은 턱 없이 짧음을 한탄하며 벨라루스 미학의 호수를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국립예술박물관의 관람을 중도에 포기하고, 이 회장의 차에 편승하여 1시간 남짓 달려간 곳이 작은 시골 도시 뎨르쥔스크였다. 그곳 공연장은 썰렁했으나, 곧바로 주민들이 들어차면서 온기가 돌았다. 앙증맞게 꾸민 무대 위로 우리의 전통무원들이 등장했다. 우리 전통문화 전파의 사명을 지고 이곳에 파견되어 온 5명의 이화여대 무용과 학생들[윤서희, 김아람, 김민지, 김수지, 최윤선]이었다. 태평무, 승무, 부채춤, 장고춤, 검무, 북춤, 사물놀이 등 기억하기에도 벅찬 레퍼토리들이 우리의 젊은 예술가들에 의해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그들은 정부의 지원으로 이곳에 파견되어 우리 전통예술의 보급 활동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들과 함께 등장한 고려인, 벨라루스인, 한인 소년ㆍ소녀 등이 하모니를 이루어 펼치는 춤사위는 썰렁하던 공연장의 냉기를 녹여주었다. 객석은 주로 벨라루스인들이 채웠고, 손님으로 초대 받은 우리들과, 우리말을 전혀 하지 못하는 고려인들 몇몇도 섞여 있었다. 프로급인 이화여대 학생들에 비해 나머지 요원들은 약간 어설펐으나, 감동으로 말을 잃은 채 주시하는 벨라루스 주민들[특히 어린이들]의 눈에는 그들 모두가 천상의 요정들로 비쳤을 것이다.

객석 앞자리에 앉아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벨라루스의 어린이들을 볼 수 있었다. 이들에게 뿌린 씨앗이 싹터 미래의 어느 시기엔 그들 스스로 한국의 전통예술에 빠져 들 날이 있을 거라는 믿음을 이들의 표정에서 읽었다. 우리의 젊은 예술가들이 이역만리 벨라루스로 날아와 그들에게 우리 전통예술의 진수를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우리와 마음이 통하는 이웃으로 만들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훌륭하도다, 이화여대 춤꾼들의 멋진 춤사위여!

 

#6 벨라루스 화폐와의 만남

 

외국에 나가는 경우 어려운 일들 가운데 하나가 현지 화폐에 적응하는 일이다. 특히 경제적으로 문제가 있는 나라들의 경우에는 어려움이 더하다. 그런 나라들일수록 화폐의 가치가 턱없이 낮아 기준 화폐보다 액면가는 엄청나게 높은 반면 실질 교환가치는 아주 낮다. 말하자면 물가가 엄청나게 높다는 것이다.

한 두 해 전 우즈베키스탄에 갔을 때 겪은 일이다. 미국 달러화를 갖고 있었으나, 가게에서 물 한 모금 살 수 없었다. 현지 화폐인 ‘숨’을 확보해야 하는데, 은행의 환율로는 큰 손해를 보게 되어 있었다. 당시 그곳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실질적인 환전상(換錢商)들인 셈이었다. 자신들의 화폐가치는 믿을 수가 없으니, 기회 닿는 대로 달러를 사 모으는 것이 그들의 자구책이었다. 당시 암달러상이나 환전상들이 쳐 주던 환율은 미화 1달러에 15만숨 정도였다. 가뜩이나 표면이 큰 지폐로 15만숨은 커다란 다발로 묶이는 것이었다. 호주머니에 넣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서책들처럼 옆구리에 끼고 다닐 수도 없었다. 참으로 처치곤란이었는데,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것은 내 스스로 부자가 된 착각에 빠져들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보고 나서야 그 돈이 얼마나 형편없는 가치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밥 한 끼 먹기 위해서 몇 만 숨을 써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런 기억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벨라루스의 현실이 피부로 전해져 왔다.

처음 호텔에 들어오던 날, 환전 코너에 적힌 환율은 미화 100달러에 800,000벨라루스 루블이었다. 하룻밤 자고 나니 그 환율은 820,000루블로 바뀌어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그들의 화폐가치가 그만큼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미화 100불을 바꾸면 82만 루블이란 현찰이 호주머니 속에 그득했다. 밥 한 끼 먹으러 식당에 들어가면 보통 10만, 20만 루블이 달아났다. 아무리 싼 음식을 먹어도 음료수나 맥주 한 컵을 곁들이면 그 액수는 천정부지로 뛰어 오르는 것이었다. 밥값을 치르고 나면 100원, 500원, 1000원 등의 잔돈이 수북하게 되돌아 왔다. 돈 머릿수 따질 줄 모르는 나는 두툼한 현찰들의 무게와 두께 덕에 며칠간 행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지인들이 내 호주머니 속의 현찰들을 바라보곤, “그 쓰레기들은 뭣 하러 넣고 다니우?” 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기도 했다. 경제가 어려운 나라의 화폐가 쓰레기 취급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고 말았다. IMF 통치의 터널에서 신음해 온 우리가 아니던가? 우리는 장롱 속의 금을 모조리 끄집어 내 재빨리 고통과 위기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다. 감동적이고 대단한 집단 체험이었다. 그런데 지금 유럽 아니 세계의 경제를 나락으로 몰아넣고 있는 일부 국가들, 금을 모으기는커녕 자신들의 탐욕을 지속시키기 위해 시위로 날밤을 지새우는 이 나라들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웃나라들에게 자신들의 자존심을 내세울 수 있을까?

 

#7 아름다운 벨라루스 여인들

 

‘여성은 아름다움을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잠재된 존재를 실현시키기 위해 태어난 생명체’라고 말하기도 한다. 전자는 역사가 긴 남성 중심의 언급일 것이고, 후자는 비교적 최근에 등장한 여성 혹은 페미니스트 입장에서의 언급일 것이다.

민스크에 들어서자 여성들의 생김생김이 범상치 않았다. 누구의 말대로 모두가 ‘미스 코리아 급’이오, 모두가 TV 탤런트이자 영화배우들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럴 만 했다. 연기만 된다면 즉시 드라마에 투입해도 좋을 만한 미모들이 길거리에 그득했다. 얼굴 뿐 아니라 늘씬늘씬한 몸매들이 ‘벨라루시 여인들이 최고의 미인’이라는 속설을 입증하는 듯 했다. 벨라루스의 ‘벨라’는 백색이란 뜻이며, 백색은 벨라루스의 대표색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흰 눈이 많이 내리고, 여인들은 순백의 피부색을 갖고 있다. 상대적으로 남자는 여자의 수준보다 못하다고들 하나, 사실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슷하거나 낫다고 할 만큼 벨라루스 남녀들의 미모는 특출 난 데가 있었다.

첫날 공항에 마중을 나와 주었고 셋째 날 미르성에서 가이드를 해 준 학생 안톤도 ‘벨라루스 남성들은 얼마나 행복한가?’ 라는 물음에 ‘얼마간은 사실’이라고 애교 있게 대답할 정도였다. ‘얼마간’이란 그 친구의 말 속에서 모종의 뼈가 느껴졌는데, 아름다운 여인들의 남자 노릇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암시한 것이나 아닐까. 안톤과 함께 미르성을 따라나온 학생 올랴 역시 범상치 않은 미모를 보여주었다. 사실 벨라루스의 빼어난 자연[숲, 강, 호수, 평원]은 생활미학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인체미학에도 얼마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말하자면 자연미학과 도시미학, 그리고 인체미학의 삼위일체를 벨라루스에서 발견한 셈이었다.

 

#8 벌판 위의 요새, 미르성

 

2011. 10. 23. 오전 11시. 벨라루스 대학 한국어과 학생 안톤의 차로 민스크에서 2시간 정도 걸리는 미르시의 미르성[벨라루스어 Мі́рскі за́мак/러시아어 Мирский замок]을 찾았다. 대개의 경우 성은 험고(險固)한 곳에 기대어 짓는 것이기 때문에, 가도 가도 산이 없는 평지의 벨라루스에서는 어떤 양식의 성이 세워져 있는가 궁금했던 것도 사실이다.

벨라루스 북서쪽 미르시에 위치한 고딕 양식으로 15세기 말에 건축되기 시작하여 16세기 초 일니크 공작이 완성한 이 성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1568년 리투아니아의 라드빌라 공작(Duke Radvila)에게 소유권이 넘어가면서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가미되었고, 3층으로 이루어진 동북 방향의 궁성, 석회석의 화려한 문 장식, 발코니와 복도 등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구도로 이루어지게 된 것이 바로 이 성이다.

상당 기간 버려져 있다가 나폴레옹 1세 때 큰 피해를 입었고, 19세기 말엽에 복원되었으며, 도미니크 라지빌로부터 그의 딸 스테파니아와 그녀의 딸 마리아에게 계속하여 소유권이 넘어간 이 성은 2차 세계대전에 나찌군으로부터 전쟁의 참화를 겪은 곳이기도 하다.

평원에 나무숲이 조성되어 있고, 평지의 한 복판에 도시를 건설한 벨라루스인들이었다. 넓은 구릉에 융단처럼 깔린 진녹색의 밀과 감자를 보며 벨라루스가 풍요로운 농경국가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감자가 주식으로서 500여 가지의 감자 요리가 있다고 하는 이 나라다. 감자가 자랄 만한 평원 위에 성채는 자리 잡고 있었다. 중세가 막 지난 16세기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성벽의 높이 13m, 둘레는 75m에 이르는 미르성은 전형적인 유럽 성채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유럽의 성들이 대부분 그렇듯 미르성 역시 ‘미학과 실용성’을 겸비한 건축물이었다. 그 옛날 이 성의 바깥에 백성들이 몰려 살았을 것이다. 성 안의 지배자와 성 밖의 백성들. 당연한 일이지만, 성 밖의 백성들은 외적의 침입을 1차적으로 막아내야 할 방패였다. 그 방패가 뚫리면 성 안에 웅거하고 있던 지배자들은 성을 의지하여 필사적인 저항을 하게 된다. 이른바 농성(籠城)이 바로 그것이다. 미르성은 밖에서 보는 아름다움 못지않게 내부도, 내부에서 내다보이는 바깥 경치 역시 특출했다.

성채 곁의 호수에서 수영을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몸을 던져 목숨을 끊은 젊은이들의 혼이 깃들어 있어, 누구든 수영을 하면 살아나올 수 없다는, 슬픈 전설이었다. 그런 전설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오리 떼는 여유롭게 유영을 하고 있었으며, 제방에 심어진 키 큰 소나무들은 길게 그림자들을 드리우고 있었다.

 

***

 

고려인 프로젝트 관련 자료 수집과 벨라루스 대학에서의 특강. 그것들이 벨라루스 방문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러나 번쩍 번쩍 눈에 띄는 것들이 많았다. 벨라루스는 사실 한국에서 잘 들어보지 못하던 나라였다. 연해주 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 그 가운데 일부가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하니, 대단한 역사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이 땅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은 세 번의 디아스포라를 겪어 온 셈이다. 한반도로부터 연해주로 건너 간 할아버지 세대의 1차 디아스포라,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옮겨 간 2차 디아스포라, 중앙아시아에서 벨라루스로 옮겨 온 3차 디아스포라가 그것들이다. 그곳에 고려인들이 아직도 살아 있었다. 이제 새롭게 우리의 문화영토 안으로 들어오려는 벨라루스 젊은이들도 있었다. 옛날의 고려인들을 우리 사람으로 되돌려놓고, 새롭게 들어오려는 고려인들을 우리 사람으로 껴안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진지하고 지혜롭게 그들에게 다가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돈만 퍼붓는다고 되는 건 아니다. 벨라루스대학 한국어학과의 오정혜 교수가 주장하고 실천하는 것처럼, 그들의 마음을 살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다문화 시대의 교육은 벨라루스 현지의 한국어 교육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길고 깊은 공부를 통해서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순간의 만남이 깨달음을 갖다 줄 수도 있다. 닷새 동안 벨라루스에 머물렀다. 물론 깨달음을 얻기엔 턱 없이 모자란 시간이다. 그러나 얼마가 되었든 그곳에서의 소득을 내 사업에 투자한 뒤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뒤 결산에 착수할 것이다. 그러니 이번 벨라루스 여행의 수확을 지금 따지는 일은 의미가 없다. 그저 열심히 내가 얻어온 작은 기억들과 체험들을 열심히 발효시킬 뿐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0. 16. 13:24

    
       일본에서 만난 한국학

-제 62회 조선학회(朝鮮學會) 학술발표회에 다녀와서-

                                                                                                                     조규익

지난 여름방학 중의 어느 날, 천리대학(天理大學)[일본 나라현 천리시]의 오카야마[岡山善一郞] 교수를 통해 조선학회로부터 ‘초빙발표’의 제의를 받았다. 일찍부터 조선학회의 명성을 들어왔고,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터라 망설임 없이 응했고, 발표논문 또한 기한보다 앞서 마무리해 보낼 수 있었다. 발표 청탁부터 원고 수납, 일정 통보, 의전(儀典) 등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치밀함은 과연 혀를 내두를 만 했다.

9월 30일 오후 3시 오사카 간사이[關西] 공항 도착. 출영 나온 두 명의 천리대 학생들과 함께 리무진 버스를 타고 천리시로 이동하는 내내 날씨는 흐려 있었다. 일본식 전통가옥들과 현대식 빌딩들이 조화를 이룬 오사카 외곽의 모습이 차분했다.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천리시. 천리교(天理敎)를 핵으로 이룩된 종교도시이기 때문일까, 일본의 중소규모 지방도시가 대부분 그러해서일까, 조용한 분위기가 약간은 이색적이었다. 간이 정류소에서 내린 우리는 다시 택시로 10여분을 이동하여 천리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깨끗하고 소박한 다다미방에는 녹차 응접세트가 놓인 다탁(茶卓)이 앉아있고, 작은 테라스에는 앙증스런 탁자 및 의자와 함께 양치질이 가능한 세면대가 달려 있었으며, 창밖으로는 파스텔톤의 일본 전통가옥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한 사람 정도 용납할 만한 화장실과 별도의 욕실이 참하고 청결한 자태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침실과 욕실 및 현관 사이에 마련된 작지만 넉넉한 공간에는 옷장도 있었다. 이런 점들 때문일까. 일본에서 숙박할 때마다 그들의 고집스런 주거(住居) 철학을 깨닫게 된다. 깔끔한 다다미방과 작은 공간의 앙증스런 활용.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침대보다 ‘일본적이어서’ 괜찮다는 느낌이다. 굳이 일본인의 집을 방문하지 않아도 그들의 주거방식을 일부나마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녹차로 갈증을 달래고 로비의 응접실로 내려가니 천리대학의 마츠오[松尾 勇] 교수가 우리를 반겼다. 참으로 우리말이 능숙한 젠틀맨이다. 그와 잠시 환담한 뒤 천리대학의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과 20여명의 학자들[일본 전역에서 모인 조선학회 임원들]이 모여 있는 식당으로 안내되어 저녁식사를 겸한 환영행사를 가졌다. 참석자 개개인 앞에 놓인 커다란 도시락 형태의 식판에 맥주를 곁들인 ‘조촐하면서도 깔끔한’ 식사였다. 늘 지글지글 끓는 전골이나 고기구이 혹은 생선[회/매운탕]에 익숙한 나로서는 참으로 이색적인 경험이었고, 마지막 날 밤 이자까야(いざかや)에서의 간친회(懇親會)를 빼곤 일본 체류 내내 ‘도시락 스타일’의 식사가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이튿날. 일찍 호텔을 나서 천리교에 봉직하는 젊은 직원 요코야마씨의 안내로 신전을 방문했다. 시가지에 넓게 자리 잡은 거대한 전통 일본식 건물이었다. 건물의 규모나 모습이 천리교의 중심임을 보여주는 ‘종교적 숭엄’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었다. 건물의 안쪽으로 넓은 광장이 있고, 큰 길에서 신전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에 청동색의 큰 도리이(とりい[鳥居]) 가 서 있었으며, 길 건너에 박물관[천리참고관(天理參考館)]과 천리대학이 있었다. 신전에는 많은 교인들이 나와 무릎을 꿇고 주문을 외우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되어 있는 신전의 내부는 운동장처럼 넓었다. 목조 건물인 신전은 어느 곳이나 반들반들 빛을 내고 있었다. 복도를 통해 걷고 있는데,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일군(一群)의 교인들이 손에 큰 벙어리장갑 같은 것을 끼고 바닥을 닦으며 무릎걸음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입으로 주문을 외우며 바닥을 닦아나가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의식으로 ‘근행(勤行?)’이라는 , 요코야마 씨의 설명이었다. 종교의 의식이야 원래 합리(合理)를 초월하는 것이지만, 이런 근행이야말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문을 외우며 ‘마음의 때를 닦아내듯’ 신전의 내부를 닦는 일. 따로 품을 들여 청소할 필요도 없고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으니, 그 아니 합리적인가.

요코야마 씨의 설명에 의하면 천리교는 1838년 10월 26일 교조 나카야마 미키에게 내린 ‘어버이 천리왕님’의 계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버이 신(神)’은 인간들이 서로 도우며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함께 즐기려는 마음에서 인간을 창조했으며, 그런 이유로 ‘즐거운 삶’이야말로 인간생활의 목표라는 것이다. 신전 중앙에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지점인 ‘터전[지바]’이 있는데, 이곳에서 세상의 구제를 위한 근행이 올려 진다고 했다. 그들은 그곳을 온 세상 사람들의 ‘으뜸 고향’이라 여기고 있었다.

신전을 포함하고 있는 천리교 본부는 정기적으로 각종 행사나 모임을 갖는 한편 ‘즐거운 삶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강습회 또한 수시로 열린다고 했다. 앞서 말한 ‘터전’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를 ‘본고장’이라 하며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각종 교육시설들이 완비되어 있었으며, 종합병원을 비롯한 사회복지시설, 도서관이나 박물관 등의 문화시설들도 갖추어져 있었다. 시내를 돌아보면 ‘○○詰所’나 ‘○○母屋’ 등의 간판이 붙은 건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들이 바로 신자들의 숙소라 했다. 누구든 원하면 싼값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란다.

신전을 관람한 후 들른 참고관 즉 박물관은 엄청난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정확한 명칭은 ‘세계 생활문화와 고고미술 박물관’이었다. 아이누, 한반도, 중국ㆍ대만, 발리, 보르네오, 인도, 아시아 전역의 강과 하천변, 멕시코와 과테말라, 파푸아 뉴기니, 일본인들의 아메리카 이민과 천리교 전도, 일본의 서민생활 등의 생활문화와 한국ㆍ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고고미술품들. 주마간산 식으로 훑어보기에도 벅찬 내용이었고, 참으로 부러운 컬렉션이었다. 수십만 점의 소장품 가운데 3천 여 점 만 전시되고 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했다. 마침 우리나라의 석조유물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상당수는 국내 박물관에서 볼 수 없었던 진귀(珍貴)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과연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

10월 1일 오후 1시에 시작된 학회는 다음 날 오후 5시에야 마무리되었다. 하루 반에 걸쳐 28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나를 비롯 한국에서 초청된 3명의 발표자와 일본에서 유학하거나 교수로 있는 한국인 등 12명을 빼고는 모두 일본의 학자들이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발표논문의 수가 아니었다. 그들의 진지한 태도와 토론의 열기가 조선학회에 대하여 그간 지녀오던 호기심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큰 깨달음으로 발효(醱酵)된 점이 나 자신에겐 큰 수확이었다. 사실 ‘일본인들이 한국학을 하면 얼마나 하랴?’라는 것이 평소의 ‘오만했던’ 내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 땅에서 그 땅의 사람들이 그 땅의 말로’ 한국학을 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한국말로 하는 한국학’과 다른 또 하나의 한국학이 일본에서 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또 하나의 자각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솔직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조선학이란 바로 ‘한국어문학과 역사’였다. 1일 저녁의 간친회 자리에서 일본의 학자들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지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조선학회에 참여하여 다까하시 도오루나 오구라 신뻬이 같은 1세대 한국학 연구자들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조선학회의 바탕이 된 그 분들의 후예들을 만나보며 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는 요지의 발언이었다. 그들의 ‘우리말과 문학, 역사에 대한 연구’가 식민지 경영의 일환으로 이 땅에서 행해진 것이며 분야에 따라 왜곡의 정치적 의도 또한 드러내긴 했으나, 그것들이 우리를 자극하여 우리 학자들로 하여금 어문학이나 역사의 연구에 매진토록 한 것도 사실이다. 이미 메이지 유신 때부터 서구로부터 근대학문의 방법을 익힌 그들. 최소한 반세기 이상 우리를 앞서 간 그들이었다. 우리의 일부 학자들을 발분망식(發憤忘食)하게 만든 그들의 공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억설(臆說)일까.

나는 일본 학자들의 학술발표를 들으며 영국이나 미국 등 서구의 학자들을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그들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영어영문학회’ 등 그들의 언어와 문학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학술대회를 참관할 것이다.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영문학을 연구하고 발표하는 내용을 보고 들으며 무슨 느낌을 가질까. ‘놀고 있네!’라고 할까?, 아니면 ‘어, 이 사람들 봐라. 제법인데?’라고 할까?, 아니면 ‘아, 놀랍구나!’라고 할까? 나는 딱딱 끊어지는 어투로 이어나가는 일본인들의 발표를 들으며 세 번 째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아, 그곳에서 그곳 사람들이 그곳의 말로 새로운 한국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학자이니 당신들이 하는 한국학의 정확성을 검증해보아야겠소!’라는 오만한 객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별개의 패러다임이 그곳에 살아서 통용되고 있었다. ‘한국이 한국어문학의 종주국이고 세계의 중심이며 으뜸’이라는 생각은 어쩜 오만한 편견일 수 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문학연구의 핵심은 작품의 해석 작업이다. 무슨 언어로 해석하든 그 언어 사용자들이 공감할만한 논리적 정합성(整合性)만 갖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애당초 정답이 없는 문제를 놓고 변방에 대한 중심부의 권위를 어떻게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그동안 한국학을 한다는 외국인들에 대하여 가당찮은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스스로 탈식민(脫植民)을 주장하면서 식민의 논리에 갇혀버린 셈이니, 이보다 더 우스운 꼴이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국의 학회, 특히 우리의 어문학을 대표하는 국어국문학회를 떠올려 보았다. 나는 최근 2년간 연속 그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2년 전 경희대에서 발표할 땐 드넓은 발표장에 10명의 청중[그나마 경희대 교수들이 동원한 학생들로 보였다!]이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허공에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놓고 발표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발표가 끝나고 어느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하거나 묻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발표를 끝내고 연단을 내려오며 ‘다시는 학회에 오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지만, 또 다시 때가 되자 습관적으로 역시나 그런 텅 빈 회의장에 가고 말았다. ‘혹시나’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공부를 시작하던 80년대의 국어국문학회 학술발표장엔 회원들이 바글바글 끓어 넘쳤다. 열기가 대단했다. 김동욱, 장덕순, 김석하, 황패강, 이기문 선생 등 원로들이 맨 앞자리에 좌정하여 분위기를 주도했다. 날카로운 지적과 질책이 이어지고, 발표자들은 적절한 대응으로 의기양양해 하거나 몸 둘 바를 모르기도 했다. 학문이 세대 간에 전승되어 내리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인터넷 덕분인가, 아니면 인터넷의 독성 때문인가. 이제 학술발표회장에서 후학들을 질책하는 원로들이 사라지고, 아예 학술발표회장에 발품 팔아가며 갈 필요조차 없다는 듯 후학들도 사라졌다. 발표회가 끝나자마자 즉각 인터넷으로 내용이 배포될 텐데, 무엇하러 시간 죽여 가며 차비 죽여 가며 발표회장을 찾을 것인가. 말인즉슨 그럴 듯하지만, 학문이 전승되는 세대 간의 통로가 막히고 생명이 끊어진 곳에 유령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문화의 사막화 현상’은 어찌 할 것인가.

물론 장르별로 분화된 학회들이 즐비하고, 그곳에서 열띤 토론들이 이루어진다고 항변할 수 있고, 또 얼마간 그것은 사실이다. 나 자신도 일본에 하나 뿐인 조선학회와 한국의 여러 학회들을 단순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이 지긋한 일본의 학자들이 어눌한 한국말로 한국학 관계 논문들을 진지하게 발표한 뒤 젊은 학자들이 따라붙어 묻고, 반대로 젊은 학자들이 일본어로 진지하게 발표한 뒤 고명한 교수들이 세세히 질문하고 충고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함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면 내 느낌이 지나친 것인가.

***

허름하지만 낭만이 배어있는 이자까야. 그곳에서 어울린 일본의 조선학자들은 어쨌든 친한파(親韓派)들이었다. 그들 스스로 한국에서의 추억과 한국 음식을 떠올리며, 힘주어 한국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일본에서 한국의 주가가 올라가고는 있으나, 어쨌든 마이너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세월을 합리화하는 심리적 기제(機制)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학을 대하는 그들의 진지하고 치밀한 태도야말로 무슨 대상을 연구하든 학자로서 지녀야 할 본령(本領)이라는 점에서 존중될 필요가 있다.

일본의 학자들과 현지에서 함께 한 3박4일이 내겐 깨달음의 기회였다.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죽이다가는 특출하던 일제시대 일본의 한국학자들이 그랬듯 그 후예들도 질적 양적인 면에서 조만간 우리를 추월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갖고 돌아왔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운 요즈음이다.



 <천리관광호텔의 모습>
 

 <호텔 테라스의 앙증스런 배치, 그리고 창밖 풍경>

 <호텔 방.외출했다 돌아오니 이불이 곱게 깔려 있었다!>

 <저녁식사 후 오카야마 교수,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 백규>

 <도착하여 저녁식사 후 들른 이자까야 논따로>

 <이자까야 논따로에 걸려 있는 오래 된 시계. 명치시대의 것으로 현재도 살아 있음>

 <천리교 신전>

 <천리교 신전에 걸린 상징문양>

 <도리이를 통해서 바라본 천리교 신전>

 <천리 참고관[박물관]>

 <호텔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주택가>

 <천리대학 건물>

 <천리대학 강의동 앞에서>

 <천리대학 구내식당에서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

 <천리대학 구내식당에서 마츠오 교수>

 <천리참고관[박물관]>

 <발표회가 열린 후루사토 회관>

 <간친회장>

 <간친회장에서 오카야마 교수, 오카야마 카이미, 백규>

 <간친회장에서 후지모토 유키오 교수 등 일본학자들>

 <첫날 발표를 끝내고 이자까야에서 일본의 학자들과>

 <이자까야에서 오카야마 교수와>

  <첫날 발표 후 들른 이자까야의 메뉴들>
 

 <학회 접수처>

 <발표회장>

 <이광수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하다노 교수>

 <첫날 발표 후 기념촬영을 준비하는 모습>

 <천리대학 강의동>

 <발표하는 동경대학원의 이현준 선생>

 <천리시청의 특이한 모양>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들>

  <뒷풀이 자리에서 천리대학의 교수들과>

  <뒷풀이자리에서 천리대학의 모리야마, 김선미 교수등>

 <뒷풀이 자리에서 마츠오 교수와 백규>

  <호텔의 아침식사>

 <천리관광호텔 근처의 고서점>

 <천리관광호텔 근처의 고서점에서, 백규>

  <이자까야의 벽에 붙은 가부끼 배우의 모습>

<학회 뒷풀이가 있었던 이자까야의 벽에 붙은 기린맥주 포스터와 술 메뉴들>
 

    <학회 뒷풀이가 있었던 이자까야의 벽에 달아맨 인형>

 <이자까야 내부의 벽에 붙은 각종 주류 및 음식 메뉴들>

<천리 시내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건물>

 <천리시 도처에서 볼 수 있는 母屋>

<천리시 도처에서 목격되는 신자 숙소인 쯔메쇼>

<오사카 외곽에서 간사이 공항으로 건너가는 다리>
 

<간사이 공항에서 인천으로 떠날 ANA 기가 이륙 준비를 하고 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9. 15. 15:24

‘욕’ 연구, ‘욕 댓글’

 

 

                                                                                                                                                       조규익

어제 우연히 인터넷으로 신문들을 뒤져보다가 재미있는 기사와 씁쓸한 댓글들을 발견하곤 조용한 연구실에서 몰래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지방의 모 대학 교수 한 분과 박사 한 분이 공동으로 ‘4가지 욕의 유형’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표한 모양이다. 국어국문학의 벌판에 고상한 연구주제들이야 널려 있지만, ‘결코 고상치 못한’^^이 땅의 언론매체들이 그런 연구들에 눈길을 줄 리 만무하다. 욕에 대한 연구가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러 매체들에서 대서특필하는 것을 보면 오늘날의 한국 교수들이 얼마나 ‘쓰잘 데기 없는’ 연구들에 매달려 사는지 알 만하다.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전체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기사에 따르면 연구자들은 욕을 네 범주로 나누었다고 한다.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인간본능이 그대로 표출되는 쌍욕’, ‘비아냥거림과 조소가 주를 이루는 방귀욕’, ‘애칭과 유희의 익살욕’, ‘꾸지람과 차별의 채찍욕’ 등이 그것들이다. 이 논문에서 어떤 내용이 전개되었는지 논문을 읽어보지 않아도 알 듯 했으며, 어려운 이론이나 사전의 도움 없이도 그 내용들을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괜히 유쾌해진 게 사실이었다.

 

‘욕’이란 말은 ‘욕설, 사람들의 잘못을 꾸짖음, 부끄럽고 무안한 사실’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 가운데 이 연구의 대상은 ‘욕설’일 것이다. 사실 욕은 사회언어학의 중요 연구 대상 가운데 하나다. 특정한 상황에서 쓰이는 언어, 그 상황의 중요한 요소들, 참여자들 간의 특별하고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나타내는 언어학적 특징 등은 사회 언어학 연구의 중요 내용들이다. 그런 점에서 분명 욕설은 피부에 와 닿는 연구주제다. 사실 인간이 사용하는 말 가운데 욕처럼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있을까. 과연 욕 한 마디 안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개중에 결코 욕을 입에 담지 않고 살아가노라고 자부하는 고상한 분들도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내뱉지만 않을 뿐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욕을 다시 씹어 삼키는 경험들이야 어찌 안 하고 살아 갈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욕은 배설이다. 음식을 먹은 다음 노폐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듯, 감정의 찌꺼기들을 욕으로 뭉쳐 몸 밖으로 내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감정이든 음식의 노폐물이든 배설을 못하면 병이 생기기 마련이다. ‘욕쟁이들이 오래 산다’는 것도 그 때문에 나온 속설이리라. 물론 아무데서나 똥을 싸면 안 되듯이 함부로 욕을 하면 안 되겠지만, 적절한 방법으로 감정의 노폐물을 배설하는 일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권리이자 능력’의 하나가 아닐까.

***

필자는 여기서 기사나 논문의 내용을 논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이 기사에 대한 네티즌의 댓글이 참으로 ‘재미가 있어’, 이런 것들이 ‘요즈음 식 욕일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1) “아이구.. 대학도 대학 같지도 않는게....별걸...이런게 학문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2) “학력과잉이 이런 데서 발현되는구나 싶다. 논총집에 실릴 논문이라니... 긍정적 기능도

있으니 교육인간학적으로 욕을 하라는 소리?”

(3) “요즘 기자들 참 편하게 먹고 사는 것 같아. 댓글이 조금만 맘에 안 맞아도 금방 삭제 되는데 이런 기사는 삭제도 안 되고 얼마나 오래 갈려나...내 댓글도 금방 주제와 무관 이라고 삭제되겠지...”

(4) “욕봤습니다.. 욕먹어가며 욕연구에 몰두하셧으니 이제는 욕에는 이력이 났겠구려...이

런 궂은 일하는 사람에게 욕하는 사람은 정말 욕먹어도 싸다는 소리 들을 겁니다..남 이 못하는 분야를 연구하는 것이 진정 학자의 길이라 봅니다.”

(5) “정말 저걸 논문이라고.. ‘쌍욕’이 나오려고 하네...”

 

모두 ‘욕 연구’를 형편없이 비하하는 댓글들이다. 얼핏 (4)의 경우는 약간 호의적인 듯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역시 비릿한 ‘비아냥거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연구자가 속한 대학까지 비하하면서 ‘욕 연구’의 의미를 혹평하는 (1), ‘학력과잉’[‘욕 연구’나 하라고 ‘교수⋅박사의 직함을 준 줄 아느냐?’는 호통이겠지?]을 한탄하는 (2), 이런 기사를 써 올리는 기자를 탓하는 (3), 댓바람에 ‘쌍욕’을 휘갈기는 (5) 등, 참으로 분별없는 반응 일색이다.

 

두 연구자는 이 논문을 쓰기 위해 학생들이나 일반인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살피느라 얼마나 고생했을 것이며, 문학작품들이나 동서고금의 욕설 책들은 얼마나 읽었을 것이며, 사회언어학 이론서들은 얼마나 섭렵했을 것인가. 연구자들은 욕설의 분석을 통해 사회의 병리현상들을 분석해보겠노라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을 터인데, 신문기사는 기상천외한 욕설들만 부각시키고 네티즌들은 대뜸 욕설이나 퍼붓고 있으니, 지금 그들은 얼마나 참담할까.

***

무엇을 연구해도 세상 사람들을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당장 세상을 변화시켜 주리라 믿는 사람들에게 인문학도들의 연구가 주는 당혹감은 대단할 것이다. ‘인문학 추방론’에 사로잡혀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을 설득할 방도가 마땅치 않은 게 현실이다. ‘욕 연구’라도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연구자들의 선의가 어쩌면 그렇게도 매몰스럽게 거부되는지, 참으로 세상인심이 야속해지는 순간이다. <2011. 9. 15.>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9. 10. 21:54

곽노현 교육감을 바라보며

 
얼마 전 서울시에서 있었던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정파 간 힘겨루기의 한 판 씨름장이었다. 오세훈 전 시장과 곽노현 교육감은 샅바를 마주 쥔 장사들, 아니 양 진영을 지휘하는 장수들이었다. 오 장군은 제발 투표 좀 해달라고 애걸했고, 곽 장군은 ‘나쁜 투표’이니 투표장에 가지도 말라고 사람들을 막았다. 대명천지 세계 굴지의 도시 서울에서 희한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투표율 미달로 개함조차 못한 채 오 장군의 패배가 선언되자, 오 장군은 지휘봉을 내려놓고 전장에서 스스로 물러섰다. 그 며칠 후 곽 장군의 비리가 터져 나왔고, 두 진영의 왁자지껄한 말싸움 끝에 급기야 오늘 새벽 구속⋅수감되었다. 곽 장군의 비리가 터져 나올 즈음 몇몇 식자들 사이에서는 ‘인생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란 속담들이 회자되었다. 목에 힘을 주고 느긋한 자세로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던 곽 장군이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시장 직을 내던진 오 장군이 오히려 승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들을 하게 되었고, 내일 그들의 입장이 다시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는 희망과 불안을 나누어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의 작은 승리에 자만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곱씹게 된 요즈음이다.

***

곽 교육감의 비리사실이 터져 나오고 돈을 건넨 사실을 스스로 털어 놓을 때 쾌재를 부른 사람들과 망연자실한 사람들이 반반인 듯 보였다. 쾌재를 부른 사람들은 정치적 견해와 이념이 다른 사람들이었을 것이고, 망연자실한 사람들은 그와 견해를 함께 하면서 그의 당선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오 시장이 전투에 져서 지휘봉을 내려놓을 때도 그랬을 것이다. ‘모든 아이들을 점심 한 끼 공짜로 먹게 하느냐, 어려운 아이들만 공짜로 먹게 하느냐’는 명분은 전쟁터의 이른바 ‘효시(嚆矢)’였다. 모든 학생들을 공짜로 다 먹게 하자는 주장의 이유는 학생들의 형편이 드러날 것이니 그게 차마 못할 짓이라는 것이오,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만 공짜로 먹게 하자는 주장의 이유는 이 일이 무분별한 복지의 단초가 되어 궁극적으로 나라를 어렵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두 나름대로 타당한 이유가 있지만, 어떻든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자’는 점은 공통되니, 그 얼마나 어질면서도 성스러운 명분의 투표인가. 그런데, 투표함은 열어보지도 못한 채 두 진영은 싸움판을 옮겨가며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학생들 모두에게 공짜 밥을 먹일 것인가? 어려운 학생들에게만 공짜 밥을 먹일 것인가?’라는 애당초의 거룩한 명분은 깡그리 잊어버린 채 끝이 보이지 않는 멱살잡이로 날을 지새우고 있는 것이다.

***

바로 앞에서 ‘효시’란 말을 들었다. <<(莊子)>> <재유(在宥)> 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지금 세상은 형을 당해 죽은 자들의 시신이 포개져 있고, 발에 차꼬를 찬 자들이 이곳저곳에 모여 웅성거리며, 치욕스런 낙인이 찍힌 자들이 줄을 서 있는 때이다. 그런데도 유가(儒家)나 묵가(墨家) 따위들이 칼과 수갑을 걸치고 있으면서 잰 체하고 있다. 아아, 너무도 심하여라!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도 없고, 부끄러움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저들의 한심스러움이여! 이러니 나로서는 ‘거룩함과 지식[聖知]’이란 사람들을 어지럽히고 욕되게 하는 형구(刑具)이거나 그에 박아 넣는 쐐기가 아니며, ‘어짐과 의리[仁義]’란 목에 씌우고 손에 채우는 형구이거나 그에 쓰이는 장부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가 없다. 하물며 증삼(曾參)이나 사추(史鰌)와 같이 인의를 귀하게 여긴 자들이 걸왕(桀王) 같은 포학한 임금이나 도척(盜跖) 같은 극악한 인물의 ‘효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지 없을지, 어찌 알겠는가! 그래서, ‘성(聖)을 끊고 지(知)를 버리면, 천하는 편안하게 다스려진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 ‘학생들에게 밥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라는 거룩한 명분으로 시작되었으나, 이제 그 명분은 사라지고 두 진영은 온갖 감언이설로 서로를 죽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밥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라는 ‘효시’ 즉 전쟁터에서 쏘아올린 ‘우는 살’은 상대편을 위협하거나 자기편의 주의를 환기하기 위해 내건 명분이었을 뿐. 이젠 총과 미사일, 핵무기까지 동원한 전쟁판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이념의 허상에 사로잡혀 ‘좌빨[좌익 빨갱이]’입네 ‘보수꼴통’입네 하며 험악하게 서로 편을 갈라 벌이는 전쟁은 조만간 도래할 보궐선거, 총선, 대선에서 클라이막스에 오를 것이다. 두 진영에서 내세운 장수들이 1차 싸움에 상처를 입어 모두 빠졌으니, 머지 않아 두 진영은 새로운 싸움꾼들로 빈 자리를 채울 것이다. 그 쌈장 후보들이 어제 오늘 사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칼춤들을 추고 있다. ‘민족, 선의(善意), 교류, 양보’ 등등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얼마나 그럴싸하고 고상하며 거룩하기까지 한가? 현실을 무시한 그런 말들의 향연이 결국 폭군 걸왕이나 악한 도척 등의 출현을 초래하여, 힘없는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을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언제쯤이나 깨달을까.

***

감방에 들어간 곽 교육감과 하야한 오 전 시장은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에 잠겨 있을지가 새삼 궁금해진다. 인생사 새옹지마이니 조만간 입장이 바뀔 그날만을 앙앙불락(怏怏不樂)하며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회한과 깨달음의 길로 접어들고 있을 것인가.

2011. 9. 10.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9. 2. 20:15

안철수가 아깝다!

 
                                                                조규익(숭실대 교수)

사람은 누구나 숨겨놓은 카드를 갖고 살아간다. 한 집안도 그렇고 사회나 국가도 그러하다. 집안이 망할 경우 털어서 가족들 목숨을 부지할만한 언턱거리 하나쯤은 갖고 있기 마련이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것이 보험이 되었든, 통장이 되었든, 조그만 땅뙈기가 되었든 최후의 순간까지 아껴가며 그걸 보호하려 안간힘을 써야 한다. 그걸 쓰지 않고 버티는 일은 고통이다. 그러나 그게 있다고 믿는 한 고통은 참을만하다.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인간은 절망하기 마련이다. 절망하는 자에게 내일은 없다.

***

며칠 사이에 서울시장이 물러났고, 교육감도 위태위태하다. 그러니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들을 탐낸다. 이념적 패거리에 따라 이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둥 저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둥, 속된 말로 ‘통밥 굴리기’에 여념들이 없다. 어제 오늘 사이에 안철수 교수가 거론되고 있고, 그 역시 흔들리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들로 어수선하다. 어중이 떠중이 가리지 않고 부나비처럼 정치에 뛰어들고 있는 지금, 안철수라고 언제까지나 ‘오불관언(吾不關焉)’할 수는 없을 게다. 그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여 지금은 때도 아닐뿐더러, 나설 자리도 아니다. 가난한 집 가족들이 최후의 순간에 자신들이 요긴하게 쓰려고 숨겨놓은 ‘보물’로 자리매김 되어 있는 존재임을 안 교수 스스로는 깨달아야 한다. 그것을 꺼내놓는 순간 공동체 구성원들은 더 이상 마음 붙일 희망의 끈을 잃어버리게 된다. 국민들의 상실감과 허무감을 안 교수는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는가. 아직은 그 동네의 꾼들 가운데 쓸 만한 존재를 골라 일을 맡겨도 되는 단계다.

***

<<장자(莊子)>>에 이런 비유가 나온다. 어떤 임금이 장자를 초빙하여 나랏일을 맡기고자 했다. 장자는 임금이 보낸 사자(使者)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여, 제사 때에 희생[제물]으로 쓰이는 저 소를 보게나. 아름답게 수를 놓은 비단옷을 입고, 늘 맛있는 콩과 여물을 먹으며 소중하게 다루어지네. 그러나, 조상의 사당 앞에 끌려가 희생으로 쓰일 때가 되어서는, 그저 평범한 여느 송아지처럼 되고 싶어도 그렇게 될 수가 없다네.” 


그렇다. 지금 도덕과 정의에 둔감해진 이 땅의 정치꾼들은 자신들을 대신하여 희생 제단에 피를 뿌려줄 제물을 찾고 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구덩이에 안철수같은 ‘깨끗한 영혼’을 집어넣고 ‘번제(燔祭)’를 드림으로써 자신들의 더러움을 일거에 씻어버리려는 앙큼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안철수의 깨끗한 이미지를 자신들의 헌옷 위에 걸치고 백성들의 눈을 호려보고자 하는 검은 속내를 갖고 있다. 보라, 시장이나 교육감의 경우 그에 걸맞은 재목들이 있다! 소 잡는 칼로 닭의 목을 치려다가는 자칫 자신의 발을 다칠 수 있다. 그러니 닭을 잡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칼을 벼려야 할 것이다.

***

안 교수는 지금 자신을 향한 국민들의 눈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국민들은 ‘아껴야 할 인재’들을 아끼고 싶어 한다. 지금 도살장으로 보내기에 안 교수는 너무 아까운 존재다. 그를 도살장으로 보낸 뒤 우리 모두 겪어야 할 상실감과 허무를 생각해 보았는가. 최후까지 아낄 건 아껴야 한다. 인재란 매일 나타나는 게 아니다. 그런 점에서 안 교수는 부디 자중하셔야 한다.

 

2011. 9. 2.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