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7. 4. 12. 00:55
 

폐광 위에 꽃 핀 세계문화유산-쿠트나호라의 은광과 바르보라 성당


                                                                                                                         조규익

체코 프라하 근교의 작은 도시 쿠트나호라. 이곳에 예수회 소속의 바르보라 성당이 있다. 이 성당은 이 지역 경제의 기반인 은 광산과 직결된다. 쿠트나호라 광산주들과 인근 세들렉 수도원 간의 수 세기에 걸친 종교적 주도권 다툼을 비롯한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공사를 시작한지 5백년 이상이나 지난 1905년에야 완성되었다. 

◀체코 쿠트나호라의 바르보라성당


<쿠트나호라의 은 광산 갱도>
숙소로부터 예수회 대학 옆길을 따라 2km쯤 걸어간 곳에 성당은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숙연하고 아름다웠다. 그 옛날엔 영화를 누렸다지만, 음산하기까지 한 시골의 이 작은 도시에 ‘어쩌자고’ 이토록 멋진 성당을 세웠단 말인가. ‘같고 다름’이야 분명하겠지만, 유럽에서 만나는 모든 성당이나 교회들은 하나같이 휘황찬란하여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바르보라 성당은 위용과 기품 면에서 탁월했다. 프라하의 성 비투스 성당보다도 한 수 위였다. 보헤미아 고딕양식의 정수(精髓)가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 성당의 특징은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와 프레스코 벽화. 예수님을 어깨에 메고 물을 건너는 성 크리스토퍼의 그림, 쿠트나호라 귀족 가족의 그림 등 15세기 말 후기 고딕 프레스코화의 화려한 모습이 눈부셨다. 그림 가운데 무엇보다 특이한 것은 은 광산 노동자들과 동전 주조자들의 모습들. 그것들은 ‘광부의 채플’ 벽에 그려져 있었다. 동전을 주조하는 모습, 하얀 작업복을 입고 한 손에는 등불을 다른 손에는 채굴도구를 든 광부들의 모습. 이들은 일주일에 6일, 하루에 10-14시간의 중노동에 시달렸다.

         

우리는 젊은 여성 가이드를 따라 은 광산 투어에 나섰다. 헬멧과 흰 작업복으로 중무장을 하고 묵직한 랜턴을 든 채, 끝없이 땅속으로 내려갔다. 초등학생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만한 갱도 틈 사이로 ‘비대한’ 몸체들을 우겨 넣어가며 지나온 우리들. 가끔씩 발밑에는 수십 길 깊이의 물이 차 있는 웅덩이도 도사리고 있었다.

이렇게 살면서도 그들은 꿈을 가꾸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두려움을 바르보라 성당에서 위로받았을 것이다. 자신들이 번 돈으로 가족들을 먹여 살리고 삶을 즐겼으리라. 그들의 노력으로 이처럼 쿠트나호라 번영의 역사는 이룩된 게 아닌가.

<쿠트나호라 시가지 중심부의 페스트 탑>
 광산의 출구는 바르보라 성당과 예수회 대학 쪽에 있었다. 들어간 곳과 나온 곳이 멀었다. 설명에 의하면 도시 전역에 걸쳐 갱도가 뚫려 있다는 것. 그러니 은 광산의 규모가 얼마나 컸겠는가. 사실 어느 곳 할 것 없이 폐광지역은 대부분 썰렁하다. 살과 기름이 빠지고 남은 해골. 폐광의 이미지는 바로 해골이다. 그러나 쿠트나호라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름다운 성당과 함께 은광의 갱도에 세계인들의 이목이 몰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막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던 광부들. 그들이 벌어들인 돈으로 지은 바르보라 성당. 땅 속에 남은 갱도는 그들의 혈관이고, 바르보라 성당은 그들의 가슴이자 머리다. 갱도 위, 탄탄한 땅에는 수백 년 동안 그들의 후손들이 집을 짓고 살아왔다. 그래서 쿠트나호라는 폐광 지대가 아니라 아직도 광부들의 혼이 살아 움직이는 ‘삶의 터전’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2. 00:49
 

내 등짝에 죽비를 내려친 유럽

-그곳에 가서야 나는 내 키가 작음을 알았네-


                                                                                                                         조규익

5개월간 유럽을 돌면서 ‘내 키가 작음’을 깨달았다. 우리가 세계의 중심에 서 있지 않음도 비로소 알았다. 늘 ‘나’와 ‘우리’, 그 존재의 절대성에 매몰되어 객관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던 우리였다. 유럽인들은 우리를 잘 몰랐고, 우리가 그들에게 그리 중요한 존재도 아니었다. 그간 우리는 ‘나’와 ‘우리’에게 지나치게 갇혀 있었다. 그러니 객관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볼 기회란 없었다. 지금도 우리네 학교들은 ‘5천년의 찬란한 역사’를 강조하기에 여념이 없다. 외국사람 몇이 김치 맛을 칭찬이라도 할라치면, 우리의 언론들은 ‘한국의 먹거리가 세계 식탁의 한 구석을 당당히 차지했다’는 식으로 과장보도하기 일쑤다. 자긍심 아닌 헛된 자만에 빠져버린 영혼을 구제할 길은 없다.

 <터키 에페소의 원형극장>
대학 강단에서의 20년 세월. 그동안 젊은 친구들에게 나는 무엇을 가르쳐 왔는가. 그들이 정신적으로 ‘홀로서기’를 할 만한 언턱거리 하나라도 제공했단 말인가. 5척이 갓 넘는 단구(短軀)로 내 키가 작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이 인식의 무사려(無思慮)한 원시성. ‘5천년 역사를 그 누가 넘볼 수 있겠는가’라는 오만한 무지 속에 안주해온 그간의 세월은 일종 ‘어릿광대의 한 세월’ 쯤이나 아니었을까.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기원전 수백 년의 유물·유적들을 만져보며, 그것들의 온기를 느껴보며, 상상과 신화의 탈을 벗지 못한 우리 역사의 실체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긴 세월 쌓여 내린 정신사의 적층(積層)을 목격하며, 맹목으로 살아온 그간의 세월을 새삼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있어 ‘줏대 없는 언설(言說)’이라 꾸짖어도 좋다. 그러나 허구한 날 협소한 자아에 갇혀 세상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만은 벗어나 보자. 이것이 귀중한 시간과 돈을 투자하여 유럽을 다녀온 우리의 솔직한 심정이다.

강단에 서서 이미 한 세월을 보냈고, 앞으로도 한 세월을 더 보내야 하는 내 입장이다. 그래서 ‘인식 상의 전환적 계기’가 절실했다. 할 수만 있다면, 우주선이라도 타고 달나라를 가든 화성을 가든 우리의 지구를 ‘객관적 위치’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우리가 그간 자라면서 배워온 서구세계. 경우에 따라서는 편향적 세계인식의 근원이자 주범이라 할 유럽. 내 인식의 큰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유럽의 정신적 질량을 현지에서 느껴보리라는 야심이 우리의 내면엔 그득 차 있었다.

우리가 주로 찾아다닌 곳은 크고 작은 도시들의 알트슈타트altstadt. 옛날이 아직도 살아 숨 쉬는 공간들이었다. 그곳엔 그들이 가꾸어온 어제와 오늘, 그리고 이룩하고자 하는 미래가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그들은 알트슈타트의 껍질을 잘 유지하면서 그 속에 들어있는 알맹이들을 하나하나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바로 그 지혜와 통찰이었다.

 <프랑스 루아르강 가의 쉬농소 성>
빽빽한 돌집들 사이엔 햇볕 한 줄기 들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 ‘남아있는 역사’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도처에 널려있는 큰 규모의 박물관과 유적들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자부심의 근거였다. 크고 작은 각종 공동체의 중심에는 늘 교회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틀릭이든 개신교이든 굳이 가릴 필요 없었다. 그런 성소(聖所)들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모든 예술이나 사상, 심지어 형이하학적 물질문명까지 종교나 신앙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토록 거대한 유럽문명, 아니 세계 문명권들이 근원적으로 신앙 공동체로부터 출발한 것은 아니었을까 착각할 정도였다.

            <로마의 콜로세움>
유럽의 제대로 된 나라들은 ‘관광 진흥’을 자신들의 국가적 어젠더agenda로 채택,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말로만 떠드는 관광이 아니라, 피부에 와 닿는 정책을 세우고 실천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책들은 예외 없이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무’를 철학적 바탕으로 삼고 있었다. ‘역사와 문화의 산업 자원화’는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대전제로 한다. 또 그것은 자신들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인류 공통의 자산이라는 인식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인류는 크게 보아 ‘하나의 역사’만을 공유해 왔을 뿐, 서로 다른 독자적 문화를 내세우며 아집과 독선으로 치달아야 할 이유가 없음을, 거대한 유럽 문화의 현장은 말해주고 있었다. 어느 시대에나 아집과 편견은 있었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세계질서의 파행이나 질곡 역시 그런 독선과 아집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은 분명하다. 로마제국이 거대하게 전개되고, 그것이 지금 지배적인 서양문명의 근간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타 문명이나 타 지역의 정신적 소산을 충실히 수용한 덕분이었다. 독선과 아집, 배타와 갈등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유럽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고대문명의 폐허들. 주로 로마문명의 흔적이었다. 그러나 그 폐허는 말 그대로 멸망의 흔적이 아니었다. 탈피에 성공한 매미는 애벌레의 껍질을 남기지만, 그 껍질은 죽음의 흔적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 탄생의 증거물이다. 계속되는 허물벗기를 통해 지금의 모습을 보인 유럽문명. 바로 그 근저에 로마문명이 있었다. 그들은 ‘역사청산’ 혹은 ‘역사 바로 세우기’의 미명 아래 엄연히 존재하는 역사적 증거물들을 때려 부수지 않았다. 그 덕에 역사의 자취들은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일제의 문화유산이 부끄러운가. 일제에 부역한 조상들의 행적이 부끄러운가. 그렇다면 그 자취나 흔적을 때려 부수기보다는 잘 보존하라. 그것도 소중한 역사다. 그 흔적들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보여 줌으로써 파행의 반복을 피해가는 것. 그것이 ‘역사 바로 세우기’의 본질이어야 한다. 서울 한 복판에 선 일제의 건물유적이 부끄럽다고 쇠톱으로 싹둑 잘라 버리는 문화적 야만성. 과거의 독재자가 밉다고 그가 쓴 현판들을 모조리 철거하고 수백 년 전의 임금 글씨로 바꾸려는, 그런 행위보다 더 한 ‘역사 파괴’는 없다.

▲터키 카파도키아 괴레메 시가지 전경


우리가 유럽 역사의 현장에서 읽어낸 이면적 코드는 ‘지배와 굴종’이었다. 그리고 그런 코드가 구체화된 물증들은 도처에 남아 있었다. 물론 어느 시기 지금 우리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레반 식 만행’이 저질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역사의 증거물들을 잘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었다. 물건만 없앤다고 역사가 사라지거나 바뀌는 것은 아니다. 총독부 건물보다 더 좋은 관광자원과 교육 자료가 어디에 있는가. 박정희 글씨의 현판보다 더 생생한 역사적 증거물들이 어디에 있는가. 반복되는 것이 역사라지만, 역사의 파행을 막는 방법으로 잘못된 역사의 증거물을 보여주는 일 외에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객관적 근거를 바탕으로 남들에 의해 인정받는 만큼이 진정한 내 모습일 수 있다. 이 점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와야 했다. ‘나는 내 키가 이렇게 작은 줄을 몰랐다.’ 이것은 깨닫기 이전에 갖고 있던 내 인식의 본질적 한계였다. 그래서 인식의 전환을 경험한 일이야말로 유럽과 유럽문명이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프로젝트는 이 지점에서 새롭게 시작된다.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던져 줄 삶의 지표 또한 이 점으로부터 모색될 것이다. 그래서 유럽은 지금까지 만난 어떤 선생님보다 훨씬 위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던져 준 셈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1. 09:00

못 말리는 한국인의 낙서벽(落書癖)
                 
                                                       
                                                                                                                        조규익

유럽여행 중 들른 하이델베르크. 그곳 대학가에서 낙서와 관련하여 기가 막히는 장면을 만났다. 그곳 학생감옥의 벽은 수감되어 있던 학생들의 낙서와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두가 예술이었고, 멋진 관광거리였으며, 소중히 관리되고 있는 그곳의 재산이기도 했다. 휘갈겨 쓴 낙서들과 제멋대로의 그림들에는 학생들의 패기와 울분, 낭만과 치기(稚氣)가 듬뿍 배어있었다.

그런데 거기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되었다. 몹시 부끄러운 체험이었다. 낙서예술의 원판에서 한글 낙서들을 다수 발견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일본글자도 중국글자도 영어도 없었다. 오직 한글만이 당당하게 위용(偉容)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 뿐인가. 한 층 위로 올라가자 벽엔 다음과 같은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Please do not write on the wall
▪Bitte nicht auf die wände schreiben
▪감시카메라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낚서를 하면 처벌됩니다!!!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우리가 열심히 돈을 벌어 세계 굴지(屈指)의 경제 대국이 되더니 드디어 우리의 글자까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도다. 저것 보라! 저들이 드디어 우리 한글의 우수성까지 깨닫게 되었구나. 비록 ‘낙서’를 ‘낚서’로 잘못 쓰긴 했으나, 그게 무슨 상관이랴.

우리는 그 경고문 앞에서 한동안 망연자실(茫然自失)해 있었다. 그 경고문 속엔 그렇게 많이들 다녀간다는 일본인들의 글자도, 직전에 이곳을 휩쓸 듯이 떼거지로 빠져나간 중국인들의 글자도 없었다. 하이델베르크이니 독일어 경고문이야 당연하고, 세계 공용어인 영어 경고문이 붙은 것 또한 당연하지 않은가. 독일어와 영어를 빼곤 한국어만 남는다. 그렇다면 한글이나 한국어가 이곳 독일에서 제 2의 세계 공용어로 격상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유독 한국인들만 툭하면 그곳에 낙서를 해대는 모양이었다. 그곳의 당국자들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한국어 경고문을 써 붙인 것이었다. 우리들의 못 말리는 낙서벽(落書癖). 제대로 된 기록들은 남기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어딜 가나 그릴 데 못 그릴 데 가리지 않고 괴발개발 낙서들을 휘갈겨댄다. 당당하게 제 이름 석자를 걸고 말이다. 그래 그곳에 왔다 간 것이 그리도 자랑스럽더냐? 제 이름 곁에 애인 이름까지 써놓곤 큼지막하게 하트를 그려놓은 녀석까지 있었다. 성당이나 교회의 벽에도, 성벽에도 우리의 한글은 멋진 자태로 국위(?)를 선양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낙서를 좋아하는 민족인가. 심지어 가만히 있는 산 위의 바윗돌까지 쫓아다니며 낙서를 하는 민족 아닌가. 금강산 관광이 본격화 되면서 직접 가서 보거나 텔레비전의 화면으로 똑똑히 확인하는 사실이 있다. 우리 민족의 낙서벽은 북쪽 사람들이라고 예외가 아님을 말이다. 경치 좋은 산 위의 거대한 바위에 무슨 놈의 낙서들은 그리도 많이 휘갈겨 대는지, 통탄스러울 정도다.  ‘경애하는 김정일 장군님 만세!’ 매일 방송이나 신문들을 통해서 밥 먹듯, 아니 숨 쉬듯 뱉어내는 문구들 아닌가. 구역질나도록 유치찬란(幼稚燦爛)한 어구들을 고결(高潔)한 자연 속에 대문짝만한 글자로 파놓을 건 무언가. 금강산의 그 아름다운 바위에 새긴 낙서들. 그것 역시 못 말리는 ‘낙서벽의 소산’ 아니고 무엇이랴.


글자나 글은 꼭 써야 할 곳에 써야 한다. 써서는 안 될 곳에 쓰면, 아무리 고결하고 심오한 문구라 해도 그건 낙서에 불과하다. 우리의 조상들은 함부로 낙서를 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학생들과 학술답사를 다니다 보면 명승지의 바위에 새겨진 시구들을 간혹 보게 된다. 그러나 그건 그 경치에 합당한 문구, 그 자리에 꼭 있어야 할 문구들이다. 쓰는 사람 자신의 헛된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매한 후손들이 이 경치를 보고 떠올려 주었으면 하는 생각, 그것을 기록하려 한 것이다. ‘경애하는 민족의 태양’ 운운하는 유치찬란한 수준의 낙서가 아니란 말이다.


우리의 대통령들을 생각한다. 지금까지 이 사람들은 임기가 끝날 무렵이면 자기가 만들었거나 자기에 관한 기록들을 모조리 파기해 왔다. 뒤가 구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좋든 싫든 대통령의 통치기록은 한 나라 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그러니 소중하게 남겨두어야 한다. 정작 그런 것들은 파기하면서 각처에 개발 새발 남겨둔 친필 휘호들은 자랑스레 남겨두려 한다. 그럴 경우 그것들 역시 낙서의 수준으로 격하될 수밖에 없다.


사실은 나도 기록을 좋아한다. 어딜 가도 항상 ‘기록하는 일’ 때문에 몸과 마음이 고달프다. 허무함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이나 여행의 감동은 하루 이틀 만에 슬금슬금 기억의 창고로부터 빠져 달아나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기억이 사라지고 남은 자리엔 삶의 피곤함이나 여행 중의 괴로움, 혹은 험한 기억들만 괴물처럼 남는다. 나는 그게 싫어서 꼬박꼬박 적어두곤 한다.

도망치는 일상의 기억이나 여행의 추억들을 붙잡아매는 방법들 중의 하나가 기록이다. 사진도 있지만, 기록이 없는 사진은 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잠시의 여행이라면 그림만 보고도 기억해낼 수 있겠지만, 길고 복잡한 여행에서 단편적인 정지화면(停止畵面)만으로 추억을 되살릴 순 없다. 그래서 나는 한사코 기록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사코 기록하려는 일 또한 부질없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척도를 갖고 있다. 모든 행위들 역시 그로부터 나온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닐 터. 그렇다면 내가 휘갈겨 대는 책이나 논문, 단상들 모두가 한갓 낙서벽의 소산이 아니겠는가. 인생이 나그네길이라면, 그 여행 중에 지니고 다니며 유념해야할 하나의 화두(話頭)가 있다. 쓰고 싶을 때마다 반드시 떠올려야 할 경구(警句)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쓰는 글들은 과연 낙서인가 아닌가?’  

2007. 2. 25.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7. 4. 10. 18:11
하나. 인간과 삶, 그리고 죽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죽음만큼 무섭고 신비한 현상도 없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따스한 햇볕 아래 오순도순 즐기다가 한 순간 숨이 끊어져 깜깜하고 차가운 땅 속에 묻히는 이웃들의 모습을 보며 인간은 죽음의 불가항력에 당황한다. 불치의 병으로 신음하다 결국 추하게 탈진한 상태로 고통 속에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죽음의 무자비함에 몸을 떤다. 인간이 종교에 귀의하는 것도 살아있는 동안 가차 없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이다. 종교를 성립시키는 것은 절대적인 힘을 지닌 신이다. 신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통해 죽음의 공포는 얼마간 해소될 수 있다. 그 신의 위력을 빌어 이야기되는 종교적 담론의 핵심은 죽음 혹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관한 것이다. 사실 인간이 죽음에 대하여 공포를 느끼는 것은 죽는 순간의 통증보다 죽음 이후의 시공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살과 뼈가 원소로 해체되어 스며들거나 흩어지면 그 뿐인가. 아니면 육체에서 이탈된 영혼이 또 다른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영위하는가. 어느 쪽에 서느냐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는 판이해진다. 엘리자베스 큐블러로스는 인간이 죽음을 맞는 마지막 단계로 ‘사후 생명에 대한 희망’을 들었다. 사후 세계에 대한 희망을 가진 사람만이 죽음을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생각하여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독배를 마시고 죽어가던 소크라테스는 주변의 지인들에게 ‘나는 이제 떠날 때가 되었네. 나는 죽기 위해서, 그리고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그러나 우리들 가운데 누가 더 좋은 일을 만나게 될 것인가, 신밖에는 아무도 모른다네.’ 라고 말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긴 했지만, 소크라테스 자신도 사후 세계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사후 세계를 믿는 것이 정신위생상 좋다는, 정신분석학자 융의 생각은 종교적 담론의 틀 안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려는 현대인의 본능적 욕구를 적절히 지적한 경우다. 키엘케골은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 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사후 세계의 존재를 믿고 그에 대한 희망을 갖는 일이야말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니, 죽음의 두려움을 뛰어넘기 위해 만들어낸 종교의 관념체계는 빛나는 인간 지혜의 소산이라 할 것이다.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이 피할 수 없는 죽음.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우주적 그물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다.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일 것이며, 조만간 직면해야 할 죽음으로부터 생겨하는 우울함이나 비애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오랜 세월 인간이 만들어온 문화적 집적(集積)의 대표 항은 ‘삶과 죽음’이다. 시간의 물결에 떼밀려가는 생명체들. 그래서 생명체에게 ‘살아가는 것’은 곧 ‘죽어가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외연으로는 상반되는 개념들이지만, 이면적으로는 동의어인 것도 그 때문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죽음에 대한 무수한 담론들을 만들어 왔다. 죽음의 미덕을 찬양하는 경지가 바로 그런 담론들의 극단이다. 그것들은 말하자면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효과적으로 벗어나기 위한, 이른바 자기방어(自己防禦)의 기제(機制)라 할 수 있다. 거추장스런 육신을 벗어버리고 홀가분한 상태로 신들의 세계에 들어가 새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은 현세적 삶이 괴로운 민초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이승에서의 삶을 더 연장하고자 하는 것이 모든 이의 본능적 욕구였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속담은 죽음을 거부하는 그들의 본능을 표현한 말이다. 그런 욕구의 한 편에 죽음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고, 심지어 찬양하는 표현까지 생겨나는 것이다.
죽음은 문학이나 예술적 표현물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제재들 중의 하나였다. <제망매가>는 기록으로 남겨진 것들 가운데 꽤나 이른 시기의 노래다. 작자가 비교적 소상히 설명되어 있고, 표현기법이 세련되어 있으며, 그 사상적 배경 또한 분명하다. 그 뿐 아니라 노래를 둘러싼 정황이 신비화 되어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우리의 흥미를 끈다. 말하자면 가장 흔한 주제를 노래함으로써 보고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되, 그 정황이나 배경은 가장 신비스러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게 하는 점에 이 노래의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누이동생의 죽음’이라는 개인적 소재를 노래했으면서도 죽음 자체가 자아내는 미학이나 분위기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다는 점이 특이하다.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서 이루어지는 서정은 과연 어떤 과정을 거쳐 불심(佛心)으로 윤색되거나 가공되었으며, 어떻게 지속되어 왔을까.

둘. <제망매가>에 내재된 두 얼굴의 사생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