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7. 4. 10. 11:19
우리시대의 위기와 인문학

                                                                            조규익

전통 왕조시대의 종말과 함께 식민 상황에 접어들었고, 식민 상황의 종말과 함께 분단 상황으로 접어들었다는 점에서 우리의 현대사는 크게 왜곡된 모습을 보여준다. 비정상적인 역사의 흐름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혼란의 요인들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한다. 어느 나라이든 역사적·사회적 변화에는 가치관이나 인식의 변화가 수반된다. 그러나 그  변화는 단계적으로 이루어져야 전통의 계승이 순조롭고, 지속적인 발전 또한 이루어질 수 있다. 대대로 같은 공간에서 삶을 이어온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지나치게 혁신적이거나 이질적인 규범을 받아들이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조선왕조에서 근대국민국가로 이행되었어야 할 시점에 식민 상황을 맞이했고, 식민 상황에 이어 분단 상황을 맞이함으로써 정상적인 가치관은 형성될 겨를이 없었다. 특히 6·25 전쟁 후 반세기 동안 농경에서 산업화의 단계로, 산업화에서 정보화의 단계로, 정보화에서 고도 정보화의 단계로 숨차게 달려온 우리 사회다. 한 사회의 가치관이 바람직하려면, 그것이 개인적 욕구를 자제하고 공동체의 이상 실현을 위해 구성원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어야 한다.
세대의 차이, 빈부의 차이, 사회적 지위의 차이, 남녀 간의 차이 등을 넘어 사회의 질서를 잡아주는 안전판 역할을 하는 것이 공동체의 이념이고, 바람직한 가치관 또한 그로부터 생겨난다. 전통 가치관을 고수하려는 기성세대와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신세대 간의 갈등, 부와 권력을 독점하면서도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않는 특권층과 박탈감에 고통 받는 서민층 간의 갈등, 가정과 사회의 억압구조를 중심으로 하는 남녀 간의 갈등 등, 현재 우리는 다양한 갈등 속에 살고 있고, 그것을 해소시킬 만한 이념이나 가치관 또한 갖고 있지 못하다. 우리 사회의 혼란과 위기는 여기서 빚어진다.
양과 질에서 남보다 우세한 정보만이 경제적·사회적 성공의 유일한 열쇠라고 믿는 시대정신은 고도 정보화 사회의 부정적 소산이다.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무한 경쟁이 벌어지고, 그런 경쟁이 가속화 될수록 인간의 정신은 황폐해지기 마련이다. 좋은 책을 읽고 저자의 생각을 곰곰이 생각하며 자신의 생각을 넓히고 깊게 하는 것이 인문학의 본질이라면, 이미 형성된 인터넷 만능의 현실은 인문학의 존립에 가히 재앙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성숙이나 완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던 대학교육은 이제 재화 창출만을 지향하는 직업교육으로 탈바꿈되고 말았다. 당장 돈벌이에 소용되지 않는 지식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직업교육에 가까운 각종 응용학문들이 대학의 핵심을 차지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전통적으로 중시되어오던 기초학문이나 인문학은 설 자리를 잃었다. 기성세대, 젊은 세대 모두 나름대로의 이유를 들어 인문학을 기피한다. 인문학이 ‘당장 재화를 안겨주지 않는다’는 근시안적 시각 때문에 우리 사회의 모든 계층에서 인문학은 홀대받고 무시된다. 인간의 정신이나 문화 등을 주 대상으로 연구·분석하기 때문에, 인문학은 정신과학이자 인간과학이다.
인간의 본질과 사상을 전반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쇠퇴야말로 ‘인간의 소외’를 초래하는 가장 큰 요인이다. 인간의 소외는 공동체를 물질 지상(至上)의 비인간적 공간으로 전락시킨다. 이구동성으로 인간의 소외나 인간성의 말살을 부르짖으면서도, 정작 인문학을 죽이는 일에 앞 장 서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행태다. 시대의 병리현상을 절감하긴 하지만 그에 대한 고민을 게을리 하기 때문이다. 그토록 대학에서 직업교육을 철저히 받았음에도 사오십 대만 되면 현장에서 축출되는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사오십 대를 상품가치가 없다고 축출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보여주는 비인간화의 대표적 사례다. 인문학을 홀대하는 사회 분위기가 빚어낸 부정적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인문학은 인간을 폭 넓은 가능태로 만드는 학문이다. 처음부터 직업교육만을 받을 경우, 그 효용가치가 다하는 날 인간도 폐기될 수 있다. 그러나 가능태의 인간은 창조적인 인간으로서, 자기 쇄신과 수련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자신의 몸값을 높여나갈 수 있다. 대학이 폭 넓은 인간을 길러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인문학의 고유 영역은 인정되어야 하고 제도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어느 분야의 학문이든 인문학을 바탕으로 할 때 비로소 제 빛을 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사회가 직면한 시대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바야흐로 죽어가는 인문학을 되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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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0. 11:14
모꼬지와 젊음, 그리고 간현의 추억


                                                                           

언제부턴가 간현엘 가고 싶었다. 병풍 같은 돌벼랑으로 둘러싸인 계곡, 구석구석 간질이며 휘돌아 내빼는 섬강. 깔끔한 정밀(靜謐)을 시샘하며 가끔씩 계곡을 가로지르는 중앙선 열차의 굉음이 장난스러운 곳. 고라니와 산토끼가 우두두 뛰쳐나올 듯, 잡목 숲이 음흉스레 펼쳐진 곳. 80여명의 젊음들과 함께 한 간현의 하룻밤이 드디어 잠자던 내 감성을 깨우고야 말았다.

모꼬지! 그래 비로소 우린 엠티(MT) 대신 모꼬지의 추억을 사랑하게 되었다. 말끔한 제복과 구호가 각을 세우는 느낌. 그런 엠티보다야 자지러지는 꽹과리의 파열음 속에 막걸리 질펀히 흐르는 느낌의 모꼬지가 제격이지. 어차피 새내기들을 품에 받아들이는 입사의례(入社儀禮)가 축제 판이 아니라면 대체 무어란 말인가. 너와 나, 그들과 우리들의 ‘하나 되는’ 잔치판은 모꼬지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랬는가.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의 열기에 익어가며 우리의 삶을 몸으로 느낀 그 놀이판은 팔딱팔딱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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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현의 젊음들



젊음이 싱그럽게 요동치는 모꼬지 판. ‘몸이 얼마나 버텨낼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는’ 존재가 젊음이라고, 이 시대의 감성 파울로 코엘료가 말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일찌감치 한계를 설정한다면, 그건 젊음이 아니다. 젊음은 ‘무한의 가능태’일 뿐이다. 그렇게 무모한(?) 젊음들 속에 묻혀 날뛰던 ‘나’는 참으로 낯선 존재였다. 시인 이재관도 그런 느낌을 가졌던 것일까.

          MT(멤버십 트레이닝)

         영원한 소년이 되고 싶은
         피터 팬 신드롬과
         영원한 고수가 되고 싶은
         사울 왕 신드롬이
         뒤섞이는 밤을 밝혀
         즐기고 호령한다.

         겨울도 봄도 아닌 2월
         엠티에서는
         노인도 소년도 아닌
         영원한 청년이어라.

         꾸라쥬(Courage)!!

그랬다. 노인도 소년도 아닌 어정쩡한 중늙은이 하나가 젊음의 열기 속에서 휘청거리고 있는 장면이 60년대 활동사진의 화면마냥 밤의 열기 속에 흔들렸다. 이제 갓 울타리를 벗어났다고, 노랑노랑한 병아리들이라고. 폐계(廢鷄)가 다 된 중늙은이는 제법 노파심을 발휘하려 애써 보지만, 거친 부리를 갈아 아무리 세게 쪼아도 이미 폐계에게 세계는 닫힌 대상일 뿐. 그러니 종국엔 여린 부리의 그대들이 열어 갈 것이다, 새 세계를!

발랄과 자유분방이 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며 새 역사를 꾸려나간다는 진실을 오늘 드디어 깨닫곤 침묵하기로 한다. 마른 잎사귀를 밀어내고 연록의 새 이파리가 눈을 트는 이른 봄의 간현을 느끼며 헛된 말이 필요 없음을 인정하기로 한다. 똬리를 틀고 앉은 마른 등걸의 탐욕으로 태양을 향해 뻗어 오르는 녹색의 생명을 규율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보라, 활활 펼쳐 보이는 그대들의 꿈이 바야흐로 익어가고 있지 않는가. 별이 반짝이고 바람 싱그러운 간현의 밤이다. 이 틈에 나도 한 번 외쳐보자, ‘꾸라쥬’!!!
                                                                          (2007.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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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0. 08:46
대학평가와 일부 메이저 대학들의 행태

           
언제부턴가 대교협의 평가에서 주요대학들이 빠지기 시작했다. '평가척도나 공정성에 대한 불신'을 표면적인 이유로 내세우고 있지만, 좀 떳떳치 못한 내면구조가 있는 듯 하다.

가장 큰 것이 '결과에 대한 부담'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세평(世評;세상의 평판)에 의지하여 그 대학들 나름의 레벨은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문 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던가? 막상 까발려 놓았을 때 기대 이하일 확률이 높은 게 사실이다. 말하자면 실상에 비해 지나치게 '고평가(高評價)'되어온 것이 그간의 실정이었다. 그런 점에 대하여 그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평가 대상이 되는 걸 꺼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예 평가를 받지 않음으로써 그런 위험부담을 지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 솔직한 내막일 것이다. "우린 아예 평가를 신청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런 평가의 결과를 신뢰하지 말아다오!" 대충 이런 것이 이른바 'SKY'로 대표되는 메이저 대학들의 공통적인 심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그들도 후발대학들이나 마이너 대학들이 하는 식으로 '필사적으로' 매달리면 반드시 좋은 평가를 받을 건 분명하다. 워낙 가진 것이 많고 조건이 좋은 대학들이니 조금만 힘을 들이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간의 행태로 미루어 학교 당국이나 학과교수들 사이에 그런 일을 밀고 나갈 리더십이 있을 턱이 없다. 표현이 좀 뭣하긴 하지만, 모두들 '대가연(大家然)'하고 있는 그들이, 최고의 학자로 자부하고 있는 그들이 '좀스럽게' 대교협의 점수기준이나 따지고 앉아있을 리가 없다. 평가를 잘 받아서 좋은 결과가 나와봐야 '본전치기'에 불과한 것도 그런 행태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우스운 건 후발대학들이 아무리 성실하게 열심히 준비하고 대비하여 좋은 점수를 따놓아도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1부리그 선수들이 모조리 불참한 가운데, 2, 3부 리그 선수들만 참여하여 1등 아니라 특등을 해도 어떤 반대급부가 주어진다거나 얼마간의 이득마저도 주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이 문제다. 그렇다고 교육부가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휘두르는 '지원금'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메이저 대학들이 다 빠진 평가결과인데 언론매체인들 중요하게 다루어줄 이유가 없다. 이런 사실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국민들이다. 대교협의 평가결과 1등을 했다고 해서 그들이 다른 대학 내팽개치고 그 학교로 자녀들을 보낼 이유가 없다.

따지고 보면 허망한 일이다. 후발대학이나 소규모 대학들이 아무리 노력한들 무슨 보람이 있을 리 없다. 고속도로변에서 심심치 않게 만나는 대학 홍보문구가 있다. "**대학, 무슨무슨 평가에서 최우수대학으로 선정!"이라는 대문짝만한 현수막들이 펄럭이고 있지만, 대부분은 지명도가 없는 대학들이다. 국민들이나 수험생들이 그런 정도의 현수막에 감동되어 자발적으로 그런 대학들에 지원할 이유가 없으니, 비극 아닌가.  

현재 상황에서 대교협의 평가 결과에 일희일비하거나 모든 것을 걸 필요나 이유가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더구나 그 결과를 학교 홍보에 이용한댔자 잘못하면 웃음꺼리가 될 공산만 크다. 그러니 그런 평가를 위해 오랜 기간 고생하는 요원들이나 많은 돈을 들이는 학교 당국으로서는 참으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물론 평가를 준비하면서 대학의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는 있고, 그것이 평가의 잇점이라면 잇점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얻는 것에 비해 잃는 것이 너무 많다는 점을 우리는 유념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교육부나 대교협, 그리고 각 대학들은 정체된 현상황을 타개할 만한 지혜를 새로 짜 내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FTA 상황 하에서 모두 공멸(共滅)의 길로 나갈 수밖에 없다.

2007.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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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9. 13:30
수능성적•석차 공개와 대학 신입생 선발 전환의 시대적 요구


논란의 가능성은 있지만, 수능성적과 석차를 공개하라는 법원의 판결은 이 시점에서 매우 타당하다. 수능성적•석차의 비공개가 대학의 서열화를 막을 수 있다고 보거나 심지어 운전면허시험에 비유하여 수능성적•석차의 공개가 무의미하다는 견해를 밝힌 논자도 있지만, 이번 판결이야말로 대학입시에 대한 열린 논의의 진정한 출발점이라고 본다.

과연 수능성적•석차의 비공개가 대학들의 서열화를 성공적으로 불식시킬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수십년전에 형성된 서열이 지금도 不動인 상태로 힘을 발휘하게 만든 주범이 바로 그것이다. 세칭 일류에 속하지 않는 대학들이 안간힘을 써서 근래 몇 분야에 성공했다해도, 잠시 사람들의 입에만 오르내릴 뿐 막상 대학을 선택할 시점에는 그 사실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사실 개별 대학이나 대학교육의 내실을 담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대학의 서열화를 혐오하는 것이지, ‘참된’ 대학의 서열화는 지향해야 할 대학의 이상이다. 능력과 무관하게, 졸업한 대학에 따라 사회적으로 이익과 손해가 첨예하게 갈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기득권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속성상, 비정상적인 대학 서열화를 깰 수 있는 묘책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수능성적•석차의 비공개는 대학 서열화를 완화시키거나 깨지도 못하면서, 국가의 이름으로 수험생과 국민들을 ‘오류와 요행 추구’의 함정에 빠뜨리는 잘못까지 범하는 꼴이다.

더구나 독점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일부 사설 입시기관들의 신뢰할 수 없는 자료와 수험생들의 자가판단에 의해 교육의 본질만 왜곡시킬 뿐이다.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없는 수험생이나 학부모들로 하여금 ‘도박하는 심정’으로 대학을 선택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실력이 인재 검증의 유일한 수단으로 통할 만큼 우리 사회가 충분히 투명해지고, 국민들의 의식이 안일한 기득권의 그늘로부터 자유로워질 때까지 얼마간 ‘왜곡된’ 대학의 서열화는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수능성적•석차의 비공개로 무작정 막는다고 문제가 해결될 만큼 우리 사회의 구조가 그리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문제들이 없지는 않겠으나, 신입생 선발을 대학 자율에 맡기는 방식이 正道이자 王道이다. 지금의 현상을 액면 그대로 표현하자면, ‘수십만의 수험생들을 한 날 한 시에 똑 같은 문항으로 서열화시키는 주범이 국가’인 셈이다.

지금처럼 국가가 대학의 행정을 통제하고 학생 모집까지 규제한다면, 사실상 이 나라에 대학은 없는 셈이다. 대학 나름의 이상과 목표에 걸 맞는 방법으로 학생들을 선발하게 한다면, 정작 정부가 전국의 수험생들을 똑 같은 문항으로 서열화시켜 놓고서 그 결과를 ‘공개합네 안 합네’하는 자기 모순적 논란에 빠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과 선발 과정에서의 부조리 추방 등이 대학들의 신입생 자율선발을 막아온 정부의 논리였다. 그러나 국가가 신입생 선발까지 도맡아오는 동안 이런 문제들이 없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증폭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간의 세월은 대학에 자율선발권을 주었을 때 빚어질 수 있는 과도기적 부조리들이 청산될만한 기간이었다. 그렇다면, 대학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국가는 그동안 귀한 시간만 낭비한 꼴이 아닌가. 정부가 미적거릴수록 대학의 신입생 자율선발에 따르는 과도기적 문제나 비용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수능성적•석차의 공개는 대학의 자율권 확보 논의의 첫 단추가 되어야 한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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