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7. 4. 19. 14:41
모정

군 복무 중인 작은 녀석. 부대에 배치받자마자 거의 하루에 한두 번씩 전화를 걸어온다. 아침저녁으로 모자가 통화하는 모습은 최근 생겨난 우리 집의 풍경이다. ‘요즘 군대 참 좋아졌구나!’라는 느낌 이외의 다른 생각은 할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작은 모임에서 활동하던 아내는 최근 구성원들과 함께 실크로드로 답사를 떠났다. 답사 떠난 날로부터 아들 녀석의 전화가 ‘딱!’ 끊어지고 말았다. 비로소 아내의 부재를 실감하게 되었다. 왜 아들 녀석은 전화를 하지 않는 것일까. 답은 하나. 바로 그의 엄마가 집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약간 서운하다.

               ***

나도 그랬다. 도시에서 공부하다가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갔을 때,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으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 대신 맞아 주시는 아버지가 그토록 어색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집에 계시면 방 안에 발갛게 불이 담겨진 화로가 놓여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반대로 어머니가 안 계시면 전체적으로 썰렁했다.

              ***

최근 어떤 잡지로부터 청탁 받은 글을 탈고했다. 어쩌다 보니 향가 <도천수관음가>를 지극한 모정의 측면에서 바라보는 글을 쓰게 되었다. 쓰는 과정에서 고려노래 <사모곡>을 다시 보게 되었고, 신달자 시인의 <사모곡>과 가수 태진아의 <사모곡>도 살펴보게 되었다. 어쩜 그리도 모두 살뜰하게 어머니를 그리는 절창들인지!
물론 <도천수관음가>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아들을 위해 관음보살에게 빌고 있는 어머니(희명)의 심정을 표현한 노래다. 희명의 아들도 당시는 몰랐겠지만, 어른이 되어 어머니의 은혜를 깨닫곤 태진아처럼 절규하듯 ‘사모곡’을 불렀으리라.

              ***

아버지의 사랑을 호미로, 어머니의 사랑을 낫으로 각각 비유하고, ‘호미보다 낫이 훨씬 잘 든다’는 말로 어머니 사랑이 훨씬 ‘거시기함’을 말하고자 한 것이 고려노래 <사모곡>이다. 그렇다. 옛날부터 어머니의 사랑에 비해 아버지의 사랑은 그토록 ‘별 볼 일 없었던’ 것이다. 가끔 TV의 화면에 비쳐지는 장면이 있다. 불치의 병에 걸려 신음하는 아들의 병상에 붙어 있는 어머니의 모습. 아버지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하지 않는 ‘군바리’ 아들을 내심 ‘원망하며’ 새삼 어찌 해 볼 수 없는 ‘모정’의 위대함을 되씹어 본다. 그도 내 나이가 되면 이 심정 알게 될까?
                                                                    2007. 4. 19. 숭실 캠퍼스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9. 10:29
지식인의 한탕주의, 그리고 금단의 열매

                                                                                                               조규익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없는 정신적 자산, 그 가운데 핵심은 지식이다. 인터넷 만능시대인 요즈음은 흔히 지식 대신 정보라는 말을 즐겨 쓴다. 그러나 도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지식과 정보는 다르다. 이 둘을 혼동하는, 무늬만의 지식인들이 대명천지를 활보하는 현실은 비극이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해체나 몰락을 가속화 시키는 원인일 수 있다. 그래서 ‘앎’의 윤리성에 대한 몰각만큼 심각한 문제도 없다.

孔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라고 했다. 진실과 양심만이 앎의 본질임을 깨우치고자 한 것이 공자의 본의였다. 이 선언이야말로 허위의식 속에 매몰되어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오늘날의 지식인들이 뼈아프게 새겨야 할 금언이다. 지식인의 정직성에 중점을 둔 공자의 생각으로부터 오늘날 자행되는 표절의 비윤리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고 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지식의 양 또한 폭발적으로 늘었고, 그것은 사회를 다원화•세분화시켰다. 그에 따라 전문가를 자처하는 지식인 그룹이 화려하게 등장하는 요즈음이다. 인쇄나 방송 등 각종 매체가 범람하고, 그런 매체들을 기반으로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대중의 기호나 매체의 활용 여하에 따라 지식인의 시장가치가 결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시장가치의 고하에 따라 사회적 대우가 달라지고, 그것이 금전으로 직결되는 현실이다. 상품의 질보다는 광고술이 판매량을 좌우하는 시대에 지식인들 또한 자신을 실물보다 더 낫게 치장하여 시장에 내보이려는 욕구의 포로가 되고 있다.

대중은 지식인의 내면적 가치나 덕성을 찬찬히 살피는 수고를 더 이상 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 좀더 그럴 듯하게 포장된 지식인을 찾아 자신의 ‘코드를 맞추고’, 그의 말과 글을 아낌없이 사들인다. 대중의 코드에 영합하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앎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지식인은 고민한다. ‘안 걸리게 잘 치고 빠짐으로써’ 자신의 시장가치를 높이거나 최소한 유지시킬 수 있는 길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 지점에서 손쉽게 빠져드는 것이 표절의 유혹이다. 이른바 지식인의 ‘한탕주의’가 표절이란 행위로 구체화되는 순간이다.

한 두 번의 표절이 쉽사리 발각되지 않는 것은 자신들이 사들이는 지식의 원산지나 생산자를 꼼꼼히 챙겨보지 않는 대중의 문제적 성향 탓이다. 이런 이유로 표절은 반복되고, 반복되다보면 결국 발각될 수밖에 없다. 구멍가게에서 담배 한 갑을 훔쳐도 ‘절도죄’라는 살벌한 죄명으로 벌을 받는 현실이다. 단순히 돈으로만 따져도 표절은 일반 절도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질 나쁜 절도행위인데, 표절범들이 거리낌 없이 이 사회를 활보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사실 우리 모두 표절에 관한한 공범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표절범이나 우리가 ‘오십 보 백 보’의 공범들이라면, 새삼 누가 누굴 징치할 수 있겠는가.

작년 언젠가 일본 후지TV가 프로그램 표절 의혹 건으로 국내의 어느 방송사에게 항의한 사실과 국제적으로 문제가 된 우리나라 젊은 과학도의 논문 표절사건을 상기해 보라. 지난 시절 국내 방송사들이 일본 방송 프로그램들을 베껴온 사실은 왕왕 거론되어 왔지만, 대명천지 21세기에 이르도록 그런 ‘못된 관행’을 청산하지 못했다니! 사실이든 아니든 과거 ‘베껴먹기의 원조’ 일본으로부터 받은 항의이고 보면 참으로 낯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세계 유수의 학술지에 80여편의 논문을 실은 젊은 과학도의 표절행위 또한 우리 학계의 후진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국제적 범죄다.

자고나면 불거지는 가수들의 표절, 이름 있는 학자들의 표절, 공모전 입상자의 표절 등 우리는 표절들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사실 표절 아닌 것을 찾아내는 일이 쉬울 정도로 표절이 일상화 되고, 그것이 관행처럼 여겨지는 세상이다. 인터넷을 뒤져 남의 글을 듬뿍듬뿍 퍼다가 ‘짜깁기’한 것을 논문이나 리포트로 제출하고 좋은 학점을 요구하는 세상이다. 강의 시간중에 제출하는 리포트의 표절의혹을 가리는 일은 포기한 지 이미 오래고, 이젠 각종 학위논문의 표절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참고문헌들과 논문의 본문을 일일이 대조해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주제나 논지의 타당성, 문장의 정확성 등은 이제 더 이상 1차적 심사의 대상이 아니다. 문장이 눈에 띄게 미끈하면 ‘이거 어디서 베껴온 것이나 아닌가’를 의심해야 하는 실정이다. 서툰 문장, 어설픈 논지가 오히려 반갑게 생각되는 것은 그것들과 참고문헌들을 일일이 대조해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표절의 원본으로 삼고 있는 인터넷 속의 텍스트는 과연 온전한가. 그것들 역시 상당 부분은 표절의 수법으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러니, 어느 텍스트를 원본으로 인정해야할지 난감한 시대가 바로 지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렇게 우리를 ‘표절 불감증’으로 몰아 넣었을까. 바로 사회에 만연한 ‘결과 지상주의’ 때문이다. 과정의 정당성 여부보다는 결과물의 수량만이 유일한 평가의 척도로 적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논문의 편수가 금전적 보상이나 승진의 절대적 조건인 상황에서 문장을 따오든 아이디어를 베끼든 표절의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청률만으로 성패를 가름하는 상황에서 일본의 TV라도 표절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끈한 문장과 번지르르한 장정만을 보고 학점을 주는 상황에서 인터넷 속의 글을 짜깁기하여 리포트로 제출하려는 유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러나 무엇보다도 심한 것은 표절행위가 입증된 경우에도 그 뒤처리가 유야무야된다는 점이다. ‘그저 운이 나빠 걸렸을 뿐’이라는 판단은 우리 사회에 표절행위가 만연되어 있음을 반증하는 생각이다. 모두 표절의 혐의를 나누어 갖고 있다는, 공범의식의 결과가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비록 표절을 당한 사람이라 한들 그 사실을 선뜻 공개할 수 없다. 모두 베껴먹고 사는 사회에서 그런 사실을 공개하는 일이야말로 좀스럽고 치사하지 않으냐는 비아냥이 돌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단계에서 주저앉느냐 한 단계 도약하느냐는 국민들의 창조적 역량에 달려 있다. 국민들의 창조적 역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들의 창조적 작업이나 결실이 철저히 보호되어야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상품을 내놓기가 무섭게 표절된다면, 누가 영혼을 불사르는 창조적 작업에 나설 것인가. 국민들의 창조적 열기가 식어버리면 산업이나 과학의 발전은 그 순간에 멈추어 버린다. 정부가 2만불 시대를 고창하고 있지만, 표절문제에 미온적인 한 1만 불의 현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표절을 중죄로 다스리기 위해 법을 보완하고, 감시 기구의 기능을 강화시켜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범국민적인 양심 회복 운동이다. 법이나 제도가 아무리 완벽하다해도 국민 각자가 마음을 바로 먹지 않는 한 표절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한 번 빠져버린 표절의 함정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절은 금단의 열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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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7. 4. 18. 00:31
 선입견과 감동의 착종(錯綜)(프랑스1신)

             [1]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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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일. 이곳 시각 오후 3시50분에 도착, 5시 넘어 빠져나온 샤를 드골 공항은 비교적 한산했다. 밖엔 따가운 늦여름 혹은 초가을의 햇살이 우리를 반겼고. 파리 근교 끄레뗄(Creteil)의 숙소로 가는 길, 멀지 않은 길을 한 시간 넘게 달렸다. 그리 낯설지 않은 ‘교통체증’ 때문이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소형차들, 그리고 그들의 사이를 요리조리 뚫고 달리는 오토바이족들이 우리를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달리는 자동차들의 차창을 통해 프랑스인들의 다혈질이 뿜어져 나왔다.
파리의 전주곡(前奏曲)이라고나 할까. 끄레뗄은 아름다운 도시였다. 16층 아파트 발코니에서 바라다 보이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평원. 그 위로 아름답게 디자인된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그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아파트 아래쪽엔 호수가 펼쳐져 있고, 형형색색의 꽃밭과 무성한 나무숲이 그 호수를 두르고 있었다. 그 사이로 달리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 풀밭에 누워 책을 읽거나 담소하는 사람들. 자연과 조화를 이룬 인공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2005. 9. 2. 밤

백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의 사진은 우리가 지금 묵고 있는 숙소와 주변의 호수 사진입니다. 어두운 색깔 건물 바로 왼쪽이 제가 묵고 있는 숙소이지요. 그리고 아래 사진은 그 숙소 창밖으로 내다 보이는 끄레뗄 시내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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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학술문2007. 4. 17. 08:21


사계의 순환과 디지털 유토피아, 그리고 달관의 미학
        -두메솔 시인의 시세계-



                                                                                                                           조규익


하나. 계절의 순환, 그리고 디지털 이미지

계절은 순환의 엄숙한 고리를 반복하지만, 그 순환이 모든 인간에게 똑 같은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경험하는 계절적 순환의 물리적 횟수도 다 다르지만, 그 질적인 차이 또한 간단치 않다. 아름다운 계절을 만끽하는 사람도 있으나, 씁쓸하게 일생을 마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경험한 계절들이 아름다웠건 씁쓸했건, 계절이 바뀌는 어름에 이르면 누구나 아쉬움과 회한을 피할 수 없다. 계절로 인식되는 시간의 흐름이 인간 자신의 변화와 구조적으로 부합하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삶이나 공동체의 변화 과정에 계절과 맞먹는 순환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우리가 경험으로 아는 사실이다.
컴퓨터를 통해 음악과 시, 그리고 이미지를 배웠다는 경영학자 두메솔 시인. 그는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무능함을 줄여주고 예술·문화·정서의 영역을 보충하며 인간들 사이의 참다운 대화를 가능하게 해준다고 믿는다. 디지털의 단점을 부각시키는 사람들을 꾸짖으며 무한대의 ‘따스한 디지털 공동체’를 꿈꾸기도 한다. 그런 만큼 육안(肉眼)과 심안(心眼)만으로 잡아낼 수 없는 세상사의 예각들을 디지털의 보안경(保眼鏡)으로 잡아내려는 야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정확하면서도 빠짐없이, 사람들이 이리저리 흘리고 다니는 세상살이의 파편들을 주워 올려 그 속에서 무한대의 우주를 찾아내려는 그의 의도는 얼마나 놀라운가!
<디지털 2>에서 시인은 디지털 혁명을 노래한다. 차가운 금속성의 디지털이 아니라, “개인주의의 그늘을 없애고/영적으로 연결된 네트워크/공동체 영혼과 시인의 영역/꿈의 세계에까지 나아가는” 디지털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아날로그 시절의 어두움→디지털 시대의 밝음→디지털 혁명의 이상세계’로 그 시의 의미는 상승된다. ‘전달의 느림, 대화 없음’이 아날로그 시절의 어두움을 형성했으나, 디지털의 '신속·무한한 리치reach와 풍부한 리치rich'가 그 어두움을 밝힌다고 했다. ‘함께 만들고 쌓아가는’ 공동체가 바로 디지털의 혁명이 이룩한 미래라는 것이다. 디지털 세계에 대한 믿음을 시적으로 형상화 시켜가는 시인의 통찰이 빛난다.  
쉬지 않고 순환하는 계절 속에서 인생은 늙어가고 세상 또한 변해간다.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 사랑과 이별 등 모든 곡절과 사연들도 그 순환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현실과 이상의 거리가 순환의 체계 속에서 늘 가변적인 것도 그 때문이다.

둘. 봄/생명의 역설과 소망의 힘

봄은 소생과 희망의 계절이다. 겨울의 잔인한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만물은 자유와 흥취를 구가한다. 그래서 봄은 생명력·자유·평화를 상징한다. 산들산들 봄바람이 불면 춘흥에 겨운 만물은 어쩔 줄 모르고 날뛴다. <봄봄>·<동백꽃> 등 김유정의 소설들에는 봄을 맞아 몸살 앓는 청춘의 아름다움이 그려져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이상화는 자연에 내재하는 순환적 질서의 어김없음과 절망 속의 희망을 노래했고, <봄은 고양이로다>에서 이장희는 봄의 향기로움과 고양이털의 부드러움을 비교했다. 이처럼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봄을 예찬하고, 봄에 기대어 청춘을 노래했다. 봄과 관련되는 전통 미의식에 디지털의 의상을 입혀 내세운 것이 21세기 초입을 살고 있는 두메솔 시인이다. 표면적으론 단정하고 일견 냉정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봄노래들. 그러나 그 이면에 끈끈한 정이 흐르는 것은 이미지화된 디지털 세계의 조화다.

사 랑 해 요
해피 버스 데이
안 ㄴ ㅕ ㅇ…

예쁜 글자들이
때마다 나를 위해
반딧불처럼 떼 지어 날아와
창에 잠시 머물고
나는 늘 바빴다.

글자들은 창을 떠나
낡은 책과 노트가 쌓인
음산한 지하창고로 간다.
창 위를 날던 모습
작은 몸들을 떨며
웅크리고 있다.

나는 무엇을 찾아
산과 들을 헤매었던가.

얼어버린 창문
조작된 상상과 추억을
씩씩한 행진곡으로 바꾸고
글자들이 좋아할 만큼
예쁘게 단장했어야 할 것을.

반갑게 봄비처럼 돌아와
작은 물방울 튕기며
내 창을 적셔줄
0과 1의 비트 수백만 개가
날 위해 태어나 곁에 있었음을
정녕 몰랐다.
       <봄비 오는 창(窓)>

봄비 내리는 날 시인은 창 앞에 앉아 컴퓨터의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으리라. 예리한 시인의 촉수가 모니터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수많은 글자들과 창문에 ‘다다닥’ 붙었다 사라지는 빗방울 사이의 어낼러지를 놓칠 리 없다. 수많은 말들이 ‘때마다 나를 위해’ ‘반딧불처럼 떼 지어 날아와’ ‘창에 잠시 머문다’고 했다. 그래서 시인 자신은 ‘늘 바쁘다’는 것이다. 모니터에 명멸하는 장면들이야 얼마나 정확하면서도 쉬운 말들의 향연인가.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 끌어온 것이 ‘반딧불의 떼’였다. 반딧불이 덧없는 생명체이긴 하나 까만 밤을 수놓는 그 아름다움만큼은 다른 무엇에 비할 수 없으리라. 어둠을 촘촘히 수놓는 반딧불이 시인에겐 일종의 희망이다.
모니터에 올라왔다간 ‘덧없이’ 사라지는 글자들과 함께 해온 ‘다망했던 세상살이’가 바로 자신의 과거였음을 시인은 깨닫게 된다. 그것이 둘째 연의 내용적 핵심이다. 모니터를 떠난 글자들이 틀어박힌 ‘음산한 지하창고’는 시인이 경원해 마지않는 아날로그의 세계, 투박한 물질의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는 책들 아닌가. 어쩌면 시인이 일생 쓰고 만들어온 책들이야말로 생동감 넘치는 글자들을 가둬두기 위한 음산한 감옥 이상의 공간은 아니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리라. 부지런히 글자들로 채운 노트와 책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지내왔을 시인의 과거가 얼마나 부질없는 시간대였는가를 스스로 알아버린 것이리라.
‘따스한 디지털’의 세계를 떠난 글자들이 투박하고 ‘음산한’ 아날로그의 세계로 들어와 떨고 있음을 시인은 크게 외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무엇을 찾아/산과 들을 헤매었던가.” 산처럼 쌓인 책들, 생동감 넘치는 글자들을 떨게 만드는 그 공간을 보며 시인은 비로소 깨닫게 된다. 봄비 방울져 내리는 창의 소묘(素描)를 마감하는 5연과 6연의 ‘후회’는 과거 삶에 대한 반성적 인식의 소산이다. 버려야 할 것은 ‘얼어버린 창문’, ‘조작된 상상과 추억’이고, 찾아야 할 것은 ‘씩씩한 행진곡’이었다. ‘마음의 창을 적셔줄’ 수백만 비트로 이루어지는 ‘따스한’ 디지털의 세계가 시인의 곁에 있었음을 비로소 이해하게 된 것이다.
시인이 따스하고 생동감 넘치는 봄의 이미지로 디지털의 세계를 받아들이긴 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자기 존재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 한다. 그 예가 바로 <나의 봄>이다.


봄의 여신,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좋은 말은 다 있는데
나의 봄은 어디 있는가.

<중   략>

나의 봄아
향긋한 입김일랑
꿈도 꾸지 않겠네
내게는 기별 없이 와도 좋으니
밤이슬처럼
남 남 처럼
내 곁을 지나쳐도 좋으니

편한 마음으로
어서 어서
이 땅에도 오시게.

이 작품에 표면화 되는 것은 시인의 절규다. ‘나의 봄’은 이미 가버린 청춘이다. 사정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뜯겨지는’ 캘린더는 허상일 뿐이다. 세상 모든 곳에 봄은 다시 오지만, 한 번 가버린 청춘은 돌아올 기미조차 없다. 계절은 순환하건만 인생의 봄은 1회적이라는 깨달음. 그로부터 생겨나는 절망감의 표출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절망이나 이면적으로는 달관한 자의 소망이기 때문이다. 짐짓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는 시인의 몸짓은 흘러간 청춘에 대한 아쉬움이나 예찬일 뿐, 절망은 아니다. ‘늙어가는’ 인생과 순환하는 계절의 논리를 대비시켜 ‘가난한’ 소망(素望)을 성공적으로 부조해낸 것, 시인의 탁월함이 드러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청춘에 대한 시인의 소망 혹은 예찬은 <MT(멤버십 트레이닝)>에서 더욱 아름답게 분출된다.

영원한 소년이 되고 싶은
피터 팬 신드롬과
영원한 고수가 되고 싶은
사울 왕 신드롬이
뒤섞이는 밤을 밝혀
즐기고 호령한다.

겨울도 봄도 아닌 2월
엠티에서는
노인도 소년도 아닌
영원한 청년이어라.

꾸라쥬(Courage)!!

2월은 환절기다. 다독다독 겨울을 보내고, 슬금슬금 눈치 보며 봄을 맞는 어정쩡한 시기다. 대학가 엠티들의 상당 부분은 이 시기에 이루어진다. 교수의 신분으로 그 자리에 참여했을 시인. 시인은 절묘하게 구성원들과 계절 사이의 상동성(相同性)을 읽어낸다. 피터팬 신드롬과 사울왕 신드롬을 동시에 지닌 시인은 모순적 존재이지만, 그게 바로 생명의 역설이기도 하다. 소년티를 벗지 못한 학생들과 함께 하고픈 마음과 영원한 고수가 되고픈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경계인적 존재’가 엠티 자리의 교수 아닌가. 2월이 겨울인 1월도 아니고 봄인 3월도 아니듯이 노교수는 소년도 노인도 아닌 영원한 청년으로 남고자 한다는 소망을 쏟아놓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영원한 청년’을 환절기의 존재로 묘사할 수 있는 것도 시인 스스로 자신을 객관화·대상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순과 역설을 통해 자신을 관조할 수 있게 된 시인의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의 결과가 아닐까.

셋. 여름/열정과 자기응시, 달관으로 승화되는 깨달음의 심연

여름의 뜨거운 햇볕은 만물을 키워내는 열정이다. 담금질의 시련을 통해 쇠는 강철로 바뀐다. 만물을 새로 태어나게 하는 뜨거움. 시련을 통해 성숙해가는 섭리의 시간대가 바로 여름이다. 봄이 그랬듯이 여름도 시인에게 또 다른 차원의 깨달음을 준다. 겨울의 속박에서 벗어난 반발과 반역의 파토스가 봄의 열정이라면, 순응과 수용의 파토스는 여름의 열정이다. 견딜 수 없는 시련을 수용하고 순응하는 일은 그에 내재된 의미를 읽어내고 이해하는 자만이 가능하다. 내재된 의미의 이해가 바로 깨달음이다. 그래서 시인이 살고 있는 ‘디지털 사계’는 ‘깨닫는 순간들의 집합’인 셈이다.
자연의 변화, 생활주변의 일들 모두는 여름의 의미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다. 시인은 작품 <연(蓮)>에서 여름에 피는 연꽃을 통해 달관의 심상을 보여주었다.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밤에 피든 낮에 피든/아무러면 어떠하랴/사는 곳, 흙탕물,/아무러면 어떠하랴”고 했다. 꽃은 열림과 포용, 용서의 세계를 표상한다. 더러운 진흙에 뿌리를 박고 있으되 아름답고 깨끗한 모습을 보여주는 연꽃, 제 열매의 숭숭 뚫린 상처들을 대범하게 보여주는 연꽃에 시인은 감동을 받는다. 주렴계가 지은 <애련설(愛蓮說)>의 21세기 식 버전이라 할까.
이에 비해 <등대>는 예리한 관찰을 토대로 시인 자신의 모습을 애절하게 투사한 독백이다. ‘바닷가 절벽 위에 서 있는’ 등대, 무슨 말 못할 사연이라도 품고 있는 듯한 등대, 험한 폭풍우에도 한 마디 불평 없이 ‘보람을 찾으려는 듯한’ 자세로 서 있는 등대... 등대는 곡절 많은 인생을 살아 넘긴, ‘욕망을 초월한 사내’의 모습으로 서 있다. 마지막 연(“더 잘 할 수 있었는데.../후회하며 곱씹다가/자리를/영/못 뜨는 것인가”)에서야 시인은 등대가 자신임을 밝힌다. 그건 자기 응시를 통한 깨달음과 달관의 서정이다.
여름의 깨달음은 <하계 농촌봉사>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아담과 이브는
갑자기 노동자가 되었다.

가시덤불 헤치며 지새운
공포의 밤들,
얼굴에 땀이 흘러야
하늘을 볼 수 있고
흙이 되어야
쉴 수 있으리니

어설픈 곡괭이 삽질 몇 번에
하늘 한 번 쳐다보고
김매기 반나절에
열 번 넘게 하늘을 본다

땅거미 지면
물집 난 손바닥 감추고
안식하는 연습을 한다.

밀짚모자도 사치스러운 산촌에
왜 별은 빛나는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땀 흘려 하늘을 보고
흙이 된다.

시인은 도시 대학생들의 하계 ‘농활’ 현장을 격려차 방문했던 것일까. 농부들의 동작과 함께 그들의 시간과 공간을 흉내 내는 ‘청춘의 어설픔’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노동의 어려움을 경험해보지 못한 그들이 뛰어든 농촌봉사 현장. 여름이 익어가는 현장에서 어설픈 노동을 통해 내면이 성숙해가는 젊음의 모습과 삶의 진실을 그려내고 있다. ‘나’와 흙이 하나가 되는 경지는 변함없이 빛나는 별처럼 소중한 깨달음이다. 열정뿐인 젊음들이 차분한 자기응시를 통해 대상의 본질과 진실을 깨우쳐가며 달관의 종착에 이르는 과정. 시인은 지금 어설픈 모습의 그들과 열정으로 살아오면서 삶의 진실을 터득하고 달관의 경지에 이른 자신을 오버랩 시키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조용하면서도 집요하고 겸손한 담쟁이의 정신미학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담쟁이>도 시인 자신의 투사 대상임은 물론이다. 담쟁이가 시인 자신의 모습이거나 최소한 시인이 이상으로 여기는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진다. 그것은 여우와 사람의 상동성을 바탕으로 ‘세상엔 사람답지 않은 사람들이 많고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을 ‘꾸짖음 아닌 꾸짖음으로’ 담담하게 말하고 있는 <납량특집 전설>의 깨달음과 차원을 달리하는 서정이기도 하다.
깨달음의 서정은 <여름 밤하늘>에 와서 아름다움의 정점에 이른다. 시인은 ‘딩 안 지히(Ding an sich)’를 두 번이나 반복적으로 썼다. “세월이란 그런 건가”와 “세월 때문인가” 뒤에 한 번씩 쓴 것은 의미와 리듬을 배려한 시인의 절묘한 아이디어다. 물 자체, 본체, 혹은 선험적 객관이란 철학적 의미는 고사하고, 흡사 거문고 가락을 튕기는 듯한 그 말의 음성학적 쾌감은 얼마나 환상적인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함없이 깊고 나직한 거문고 가락처럼 사물은 ‘본질 그대로’ 그곳에 있는 것을. 인간은 자신의 변화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이 변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존재다. 소년시절에 보았던 여름 밤하늘,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은가루 별빛만 찬란한’ 그 본질이야 변할 리 있는가. 여름 밤하늘의 아름답던 옛 추억은 전설처럼 아스라해지다가 나이 따라 사라지고 그냥 은가루 별빛 찬란한 공간으로 남아있을 뿐이라는 깨달음이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된 지점에서 얻는 것이 바로 인생에 대한 달관임을 이 시는 보여준다.

넷. 가을/향수와 회귀, 실향(失鄕)의 아릿한 추억

가을은 대개 풍요의 이미지로 나타나지만, 시인에겐 고향과 코이노니아를 떠올리게 하는 시간대다. 바다, 벌판, 시골, 연어가 돌아오는 여울목, 배추밭, 가벼운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 등. 그 시간과 공간에는 무수한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비록 마음속에 갈무리된, 상상 속의 고향이지만, 그곳은 시인이 돌아갈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가을이면 실향민이 된다. 그 압권이 <연어의 회귀>다.

담수에 비해 바다는
짜고 험하고 거칠었지만
내게 광활한 자유와 풍요와
환상을 주었다.

어려서 떠날 때는
스틸헤드 치어(稚魚)처럼
머뭇거렸으나
금방 대양에 익숙해지고

생의 희로애락을
바닷물에 듬뿍 적셔
돌아올 날이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다.
그러나 떠남이 운명이었다면
회귀(回歸)는 더 끈질긴 본능.

잉태와 부활을 위한,
변치 않는 DNA 안테나가
내게도 있었다.

돌아갈 고향은
좁고 가파르고 위험한 시내
아무 교통표지판도 없는 계곡.

그래도 회귀는
바다보다 더 자유롭고
더 크게 거칠게 다가오는
전율의 은총이었다.

‘짜고 험하고 거친’ 바다는 세상이다. 연어가 바다에서 얻은 것은 자유, 풍요, 그리고 환상이었다. 그가 바다에서 얻은 것이 자유와 풍요뿐이었다면, 다시는 모천(母川)으로 회귀하지 않았을 것이다. 환상이 모천회귀의 중요한 모티브가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환상이란 현실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형상이나 생각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환상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체험이 필수적이다. 누구나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나름의 환상이 필요하다. 환상을 현실로 바꾸어 나가는 과정이 바로 세상살이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 보아도 환상만으로 남는 게 있다. 삶은 유한하고 꿈은 원대하니 이루어질 수 없는 부분 또한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남는 환상 때문에 좌절한 실존이 기댈 언덕은 모천 혹은 고향으로 회귀하는 일 뿐이다.
“돌아올 날이 있는 줄은/까맣게 몰랐다”고 한 것도 떠날 때의 환상에 눈이 가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떠남은 운명이고, 돌아옴은 더 끈질긴 본능’이라 했다. 고향이 비록 교통 표지판 하나 없는 좁고 가파르고 험한 곳일지라도 크고 넓으며 자유로운 바다(혹은 세상)보다 훨씬 크고도 거칠게 다가오는 ‘전율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누군들 나이 들어 그동안 잊고 지내던 자신의 고향을 떠올리지 않겠으며, 돌아가려 애쓰지 않겠는가. 연어가 그 험한 모천으로 회귀하듯 낙후된 고향이나마 돌아가려 애쓰는 것을 ‘DNA 안테나’ 즉 본능이라 했다. 근원과 고향으로의 운명적 회귀는 세상에 대한 선망이 환상이었음을 깨달은 다음에나 가능한 일이다. 연어라고 모두 모천회귀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사람이라고 모두 귀향하는 것은 아니다. 험한 바다에서 길을 잃기도, 죽음을 당하기도 하는 연어들. 넓은 세상을 방황하는 인간도 그러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간에게도 연어처럼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이 깨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가을은 향수와 회귀의 계절인 것이다.
이 작품과 연결되는 작품이 <서울내기>다. 서울내기인 시인에 별다른 고향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마음의 발만 고향 길을 걷는다”고 했다. 고향에 살면서 실향의 아픔을 체험하며 그 옛날의 아련한 추억을 반추하는 화자를 시인은 절묘하게 그려냈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고향에 돌아가고자 하는가. 바로 사람들 사이의 정과 대화가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바로 <코스모스>에 그 해답이 숨어있다. 가을날 고향의 둑방 길에 지천으로 피어있던 코스모스. 카오스에 대한 코스모스는 시인의 말대로 ‘계절의 질서’다. 그러나 그건 멀리 볼 때이고, 가까이 보면 ‘가지각색 자유로운 코이노니아’, 즉 자유로운 공동체의 대화라고 했다. 꽃 색깔도, 키도 각각인 코스모스들이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모습이 대화를 나누는 고향 사람들의 얼굴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코스모스 필 때는/기다리는 사람 없어도/종일 창문을 열어놓는다/무작정 길을 떠난다”고 했다. 누군가가 올 것만 같은 분위기는 가을이 향수의 계절임을 말하고,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가슴앓이를 하는 시간대임을 말한다. 훌쩍 큰 키로 고개를 숙이고 서 있는 코스모스의 모습이야말로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찾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고독한 실존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시인을 가히 이미지의 마술사라 할 수 있으리라.
코스모스에서 유발된 향수는 <연시(軟柿)>에서 무르익는다. 도시 한 복판의 카페. 시인은 그 벽에 걸려 정감을 피워내는 (고향의) 연시를 발견한다. “촌스러움을/예쁘게 봐주는/촌스러움이/허공에 남아 있는” 그 카페의 연시들. 그것들과 공존하는 “축하, 정담(情談), 약속/메모 쪽지들”은 연시로 이미지화된 고향이야말로 따스한 정이 흐르는 공간임을 웅변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나는 것이 <오항리(烏項里)>다. “연시 한 소쿠리/곡주 한 사발/그냥 쥐어주는 인심에 취하”기도 하고, “곡마단 나팔소리/아이들 웃음소리/품어 안아주는/노을에 취하는” 넉넉한 공간이기도 하다. 시인이 비록 그곳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으나 그런 공간을 ‘고향’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태어난 곳에서 자라나 실향해본 적이 없는 시인에게 ‘오항리’는 비록 타향이나 고향 이상의 정감을 주는 곳, 돌아가고 싶은 곳이다. 그래서 가을은 향수와 회귀의 시간대다.
가을의 이미지에 향수나 회귀만 있는 것은 아니다. 봄날 창문에 흩뿌리는 봄비를 보며 시인은 글자가 난무하는 컴퓨터의 모니터를 연상한 바 있다. 시인은 고적한 가을 날 하늘을 나는 새들에게서 디지털 이미지를 읽어낸다. 가볍게 하늘을 날아오르는 새를 ‘압축 파일’로 대치(代置)할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시인의 센스였다. 더 나아가 그는 “새는/나뭇잎의 이슬방울을/달게 마실 줄 알고/영혼의 날개로/우주와 입 맞추는/아름다운 시집”(<새(鳥)>)이라 정의했다. <새 2>에서 시인은 한 발 더 나아가 “그대에게 남은 것은/옷 한 벌/가냘픈 노래/GIS 네비게이션/날개를 펴고 접는/압축 실행 파일”이라고 노래했다. 그러면서 결국 “그래서 땅 딛고 사는 나에게/모든 중생에게/훌쩍 인사도 없이/아무 때나 떠나는 것인가”라고 새와 관련한 가을의 상념을 털어놓았다.
‘떠남’은 상실이나 버림이고, 그것은 시인이 발견한 가을의 이미지인 회귀와 정반대의 개념이다. 고향에 돌아오는 계절도 가을이고, 고향을 떠나는 계절도 가을이다. 마치 ‘압축실행파일’처럼 가벼이 고향을 뜨는 새들과 고향을 뜨는 사람들을 병치시키는 데 성공하는 시인의 손끝을 보라. 그의 손과 마음을 통과하면서 가을은 ‘떠남과 돌아옴의 계절’이 된다. 떠나면서도 돌아오는 것 못지않게 포근한 정을 느끼게 만든 것이 바로 시인의 짭잘한 ‘손맛’이다.  

다섯. 겨울/만남과 설렘, 그리고 방황의 끝

시인에게 봄·여름·가을은 이산(離散)과 방황의 계절들이다. 열기와 열정의 시간대들이다. 그러나 겨울은 그런 열정들을 안으로 여미고, 방황을 끝내는 계절이다. 방황이 끝나는 곳에는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는 기쁨이 있다. 그들을 만나기 위한 설렘이 있다. 기쁨과 설렘을 배가해주는 대화의 장(場)이 있다. 그곳에선 세상을 방황하며 겪은 온갖 신산(辛酸)한 체험들은 웃음에 곁들인 안줏거리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겨울 序詩>는 겨울 이미지들의 모든 것을 포함한 ‘압축파일’이다.

가을을 쓸쓸히 보낸 사람일수록
겨울이 더 따듯할 수 있습니다.

봄, 가을 온도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겨울은
느낌을 하나로 만듭니다.

온 하늘이 눈송이로 가득 차면
우리 시선은
방황을 끝내고
화로 가에 모입니다.

가슴 설레던 봄 아지랑이
여름의 태양과 태풍,
가을의 수확,
모든 것을 초연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가을 감사절뿐만 아니라
서로의 거칠어진
피부를 볼 수 있는
이 겨울도
감사의 제목입니다.

온 하늘이
눈송이로 가득 차듯
남은 시간이
가득 차고 깊어집니다.

‘겨울은 정감 넘치는 감사와 회동(會同)의 계절’이라는 것이 이 시의 주지(主旨)다. 경건할 만큼 따스하다는 점에서 ‘겨울 기도’라는 부제를 붙일 수도 있으리라. 봄에서 가을까지 천지 사방으로 흩어져 지내던 붙이들이 화롯가에 둘러앉아 지난 계절들의 시간과 공간을 응시하고 관조하며 감사하는 모습은 침잠의 계절, 겨울만이 선사할 수 있는 풍경이다. 그래서 시인은 사람들이 겨울에 “모든 것을 초연하게/바라볼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마지막 연의 “가득 차고 깊어지는” 남은 시간은 신의 은총이 지배하는, 거룩한 그것이다. 지난 계절들의 열정과 풍요, 그리고 무사함을 담론하며 신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경건한 시간대로 겨울을 묘사하는 시인의 심상이 그래서 돋보인다.
겨울은 차갑다. 그래서 모든 것을 얼리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안으로 뜨거운 정을 품는다. 그래서 겨울은 춥지만 따뜻한 계절이다. 그 ‘춥고 따뜻한’ 겨울을 가장 멋지게 노래한 작품이 <겨울비>다. 겨울비 추적추적 뿌려대는 어느 날. 시인은 좌판 위의 사과들을 닦는 과일 노점상을 만난다. 반짝거리도록 닦아내는 동작에서 ‘군대 간 아들의 비 맞은 얼굴’을 ‘지극정성으로 닦아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읽어낸다. 그것이 첫 연이다. 둘째 연에서는 군대 간 아들 녀석이 등장한다. “기상나팔에 눈 비빌 새 없이/달력에 줄 하나 긋고/싱긋 웃는 아들,/구두약 듬뿍 찍어/반짝반짝 닦는” 군대 간 아들을 시인은 끌어왔다. 휴가 나갈 생각에 흐뭇한 마음으로 구두에 ‘광내고 있는’ 그 녀석. 시인의 아들일 수도 노점상의 아들일 수도, 아니 우리 모두의 아들일 수 있다.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다. 겨울비 맞아가며 사과에 광을 내는 노점상. ‘돌아가는 국방부 시계’만 믿으며 구두에 광내며 돌아갈 날만 기다리는 아들 덕에 부모는 꿋꿋이 어려움을 삭이고 있으리라.
이 시에서 우리는 세상 부모들의 마음을 축축하게 만들어주는 감동을 만난다. 그러나 시인의 재치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겨울비야/뿌리다 말겠지”라고 흡사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눙치고 만다. 앞에서 울적한 마음이었던 우리를 쑥스럽게 만드는 한 마디다. 노점상을 우울하게 만든 겨울비였다. 그러나 ‘까짓 겨울비 기껏 얼마나 내릴까?’라는 자기 위안의 말은 희망 그 자체다. 마지막 연에서야 우리는 안심을 하게 된다. 슬픔이나 울적함으로 끝내지 않으려는 시인의 재치와 따스한 마음을 비로소 확인하게 된다. 차가운 계절에 만나는 따뜻한 정감. 그것은 머지않아 군대 간 아들을 만나게 되는 것처럼 방황하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 지난 계절의 이산과 방황을 관조하는 시간대가 바로 겨울임을 보여준다.  

여섯. 제5의 계절, 환절기/가열 찬 생명의 이어짐

순환하는 계절의 주기는 네 개의 단위다. 이른바 사계절이다. 그러나 계절들 사이의 시간대를 어찌 무시할 수 있으랴. 디지털 감각을 지니고 있었기에 시인은 환절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환절기를 제5의 계절이라 부를 수 있을까. 4계절보다 환절기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은 시인의 정감 덕분이다. 시인은 <MT>에서 ‘영원한 청년’을 환절기의 존재로 묘사한 바 있다. 즉 2월이 겨울인 1월도 아니고 봄인 3월도 아니듯 노교수는 소년도 노인도 아닌 영원한 청년으로 남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계절의 생명성은 환절기에 오히려 치열하게 준비된다. 그것은 단순한 ‘이어짐’이 아니다. 서로 다름의 융섭(融攝)이다. 그래서 그 부분은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니,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시간대라고 할 수 있다. 시행착오와 미래지향의 발전 가능성을 함께 지닌 독특한 시기가 바로 인생의 환절기인 것도 그 때문이다.

계절의 순환은 맺힌 데 없는
완전한 순간들의 점철,
심지어 환절기에도
완전한 의상으로
생명의 합창을 한다.

나무들이 낙엽을 뿌릴 때나
앙상한 가지만 남았을 때도
병들어 그런 것이 아니다.
순간순간이 제 모습이다.

변하기는 하되
변하지 않는 듯
오가는 계절의 속도처럼
철새들은 여유롭고
대륙을 순환하고
천리만리 힘차다.

산은 움직임 없이 노래하고
강물은 움직여 장단을 맞춘다.
변하지 않는 듯 천천히
의상과 곡목이 바뀌고

늘 완전한 모습으로
세상이 달라진다.

자연은 계절의 순환을 통해 생명의 합창을 구체화 시킨다. 사이사이에 마련한 것이 환절기라는 고비다. 그러니 그 고비만큼 오묘한 생명의 정수(精髓)란 있을 수 없다. “순간순간이 제 모습”이란 말은 순환을 형성하는 모든 순간들이 그 나름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계절의 순환 속도가 우리의 의식을 어지럽힐 만큼 빠르지 않은 것은 환절기라는 완충장치를 두었기 때문이다. ‘변하되 변하지 않는 듯’ 느낄 수 있는 것도 순환의 마디와 마디를 이어주는 환절기 덕분이다. “산이 움직임 없이 노래하고/강물이 움직여 장단을 맞추듯” 천천히 계절은 바뀌다가 새로운 계절의 한 복판으로 들어가 버린다. 완벽하게 바뀐 계절의 한 복판에서 ‘늘 완전하게 달라진’ 세상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변화를 포착하여 세상에 적용시킨 시인의 통찰력, 디지털적 시각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환절기>가 자연과 세상 변화의 이치를 원론적 측면에서 노래한 것이라면, <환절기 2>는 ‘80년대의 젊음이 겪어온 모순과 역리의 소용돌이’를 환절기에 기대어 구체화시킨 작품이다. ‘1980년대를 돌이켜 보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이 시에서 시인은 회오리처럼 휩쓸고 간 80년대 캠퍼스의 열풍을 노래했다. 부모나 선생으로 대변되는 기성세대보다 선배나 친구로 대변되는 신세대가 소중하고 진실하게 여겨지던 ‘부조리와 반항’의 시대정신을 모두(冒頭)에서 강조했다. 시인은 그 시절을 ‘젊음의 길고 긴 환절기’라 했다. 그런데 ‘다음 계절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이전 계절과 다음 계절을 함께 아우를 수 있어야 환절기일 수 있는데, 이 반항의 계절, 모순의 환절기에 처한 젊은이들에겐 다가올 계절에 대한 준비가 없다고 했다. ‘여름 옷, 겨울 옷’ 중 무엇을, ‘옛 노래, 새 노래’ 중 무엇을 택해야 할지 망설인다고 했다. 그저 뿜어대는 최루가스를 뒤집어쓰고 ‘역사의 의미’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구원의 신호등 찾아/달리고 달린다”고 했다. 기나긴 독재정치의 터널에서 민주화로 넘어가는 과도기가 바로 80년대였다. 지금 이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활약해야 할 세대가 바로 그 과도기를 아프게 살아온 젊음들이다. 민주화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80년대, 그 부조리로 점철되어 있던 모순과 반항의 환절기를 시인은 아프게 회상한다. ‘준비 없이’ 지내온 환절기의 젊음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
환절기란 단순한 과도기가 아니다. 그 나름의 온전한 의미를 지닌 순환의 마디다. 그렇게 완벽한 환절기가 있는 반면, 80년대 같은 불완전한 환절기도 있음을 시인은 숨 가쁜 템포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환절기이든 그것은 ‘계절의 순환에서 가열 찬 생명의 이음매’이어야 한다.

일곱. 마무리 : 시인의 이상, 그리고 디지털 유토피아

시인은 사물의 예각을, 계절의 순환을, 아니 인간의 삶을 디지털의 눈으로 포착해왔다. 단순히 미세한 부분을 잘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숨어있는 진심을 드러내어 네트워크를 형성하려는 것. “진심이 진심을 만나/커뮤니티를 이루”(<네트워크>)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목적은 ‘(모든 것을)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심지어 신화도 옛날이야기나 헐어빠진 책 속에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열린 가슴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제자에게 배우면 행복한 선생이지/강자가 약자 되고 약자가 강자 되고/유식자도 하루아침에 무식자 되고/돌고 도는 것이 세상이치거늘/오천년 배달민족 자부심은 좋다만/언제 진심으로 배웠는가./뇌물공여지수 제3그룹/그런 것 말고 꾸준한 것이 있는가”(<신화>)라고 울분을 터뜨리는 시인의 한탄은 통렬한 자아반성과 깨달음의 소산이다.
여기서 비로소 우리는 시인이 지향해온 문학세계가 ‘열린 마음의 시학’임을 알게 된다. 시인이 역설하는 ‘신화 재창조의 당위성’도 바로 열린 가슴에서 비롯됨을 알게 된다. 그런 바탕 위에서 시인은 자신의 인식을 문명비평, 시대 비평으로 확대한다. 그가 시도한 <색상반전>은 단순한 컴퓨터 이미지의 놀음이 아니다. 그 경우의 이미지는 세상과 만나고 대화하는 창이다. “낙엽 지니 봄이요/눈 내리니 삼복이라/색상반전 재미있네.”라는 가사체의 요설(饒舌)이 ‘거꾸로 가는 세상’에 대한 비판으로는 제격임을 보여준다. 시인은 <악몽(惡夢)>을 통해 ‘아름다운 강토 도시마다 비린내 나는 비늘을 뿌려대는 이무기 한 놈’을 적시했다. 그 이무기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단 그는 시인으로부터 ‘개처럼’ 두들겨 맞은 셈이다. 살아가고 있는 지금을 악몽으로 본 것은 시인의 현실인식이다.
그러나 시인이 남의 탓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의 시각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비판한 다음, 최종적인 메스는 자신에게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네 죄를 알렷다>는 통렬한 자기반성의 호령이다. 단순한 호령이기보다 자신의 평생 결산서인 셈이다. 이미 <색상반전>을 통해 ‘거꾸로 가는 세상에 대한 비판’을 수행한 시인이다. ‘뒤집어 보기’로 자신의 일생을 평가하고 있는데, 모두 ‘죄’라고 결산했다. 그 죄라고 한 것을 다시 ‘뒤집어 보면’ 참으로 ‘열심히 살아온’ 일생임이 드러난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을 ‘죄’라고 판정했다.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잘 살아도, 못 살아도 후회는 남기 마련이라는 깨달음일 것이다. ‘살아가는 방향’이 단일할 수 없음에도 자신이 살아온 길이 잘못되었다는 후회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고백이다. 마지막의 단행련(單行聯)(“처음부터 다시!”)이 함축한 의미가 바로 그런 것이다. 지금까지와 다른 방향으로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가능치 않은 소망을 드러내고 있는 그 외마디 말 속에 이 시의 주제는 담겨 있다.
시인은 곧 정년을 맞는다. 그래서 지금 그는 ‘환절기’를 살고 있는 셈이다. 환절기에 흔히 걸리는 감기 몸살도 용케 피해가며 새로운 계절을 마련하고 있는 그다. 환절기를 맞아 지나온 계절들의 영광과 상처를 들여다보고 싶었던 걸까. 그것도 디지털의 미세한 촉수를 통해 지금껏 아무도 들여다보지 못했던 심연(深淵)을 더듬어 보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디지털 사계’는 차이코프스키나 비발디의 ‘사계’보다 훨씬 따스하고 감미롭다. 모든 사람들이 찾아 헤맸으나 결국 찾아내지 못한 정감들이기에 더욱 따스하고, 디지털의 눈으로 확대한 것이기에 그 이미지는 더욱 깔끔하다. 시인은 ‘디지털이 차가운 기술이므로 아날로그의 따스함으로 데워야 한다’는 이른바 ‘디지로그’ 논자의 편견을 일축한다. 디지털은 태생부터 따스한 세계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네트워크라는 새로운 공동체와 대화문화는 디지털이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보기 때문이리라. 그런 이유로 시인은 공동체 의식과 대화에 스며있는 삶의 따스함을 찾아 나선 것이나 아닐까.
아름다운 봄이 가면 뜨거운 여름이 오고, 수확의 계절이 가면 죽음 같은 침묵의 겨울이 오듯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으로 교직(交織)되는 인간의 삶 역시 순환의 객체일 뿐이다. 그래서 시인은 4계절을 노래한다. 그것도 디지털의 섬세한 시각과 필치로.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