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10. 9. 19:51

책 단상

 

 

 

초년병 시절. 책을 한 권 내면 세상의 한 모퉁이라도 정복한 듯 설렘으로 붕 뜬 채 며칠을 지내곤 했다. ‘사람들이 아마 요건 모르고 있었을 거야!’ 초등학교 소풍 날 보물찾기 시간, 후미진 곳에서 하얀 쪽지를 찾아낸 뒤 콩닥거리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던 아이가 그러했으리라. 책도, 책을 내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 내로라하는 학계의 거물들이 존재감을 드러내시던 유일한 지표가 저서였다. 잘 나가는 일간지들의 신간안내에는 무게 있는 학술서들이 가끔 소개되었고, 나는 그 기사를 오려갖고 다니다가 서울 가는 기회에 그것들을 사서 소중하게 모셔오곤 했다. 요즘과 달리 방방곡곡의 제제다사들이 총집합하는 학회에 갈 때는 혹시 이 거물들을 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소한 그 분들이 출판한 책 제목과 목차라도 몇 번씩 훑어보고 가는 것이 내 습관이었다.

 

 

저자의 급에 따라 달랐겠으나, 책을 내면 초판 1,000권이 기본이었고, 초짜인 내게는 인세조로 100부가 들어오는 것이 다였다. 평소 손꼽아 두었던 학계의 어른들과 동학들에게 정성스레 헌사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드리는 것도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누구 말대로 출신이 한미하여’^^ 대면할 기회는 없었지만, 책과 논문 혹은 입소문을 통하여 익히 알고 있는 그 분들에게 내 목소리를 보낸다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었다. 이 분들로부터 무슨 반응이 오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없었고, 다만 비웃음이나 사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뿐이었다. 몇 차례 그런 일 들이 반복되는 중에도 가뭄에 콩 나듯몇 분들로부터 반응이 있었는데, 잊히지 않는 몇몇 분들이 있다. 소재영, 김대행, 이규호, 성호주, 박노준, 이상보, 조재훈 선생님 등이 그런 분들이었다. 어떤 분은 전화로, 어떤 분은 편지 혹은 엽서로 감사의 마음을 보내주셨는데, 의례의 수준을 넘는 곡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돌아가신 성호주 선생님은 내게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이었다. 책을 보내드리고 나서 한 주쯤 되었을까. 소포가 하나 배달되어 왔다. 뜯어보니 속옷과 양말 한 세트, 그리고 정성스런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의 내용도 물건도 감동이었다. 그로부터 책을 받으면 최소한 답장만이라도 정성스럽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매우 혼잡한 어떤 인사의 서재

 

 

그 뒤로 세상은 마구 변했다. 누구 말대로 아무나 책을 내는시절이 되었다. 학술서의 원고를 들이밀면 출판사에서도 외면을 한다. 거짓말이나 허접한 거라도 좋으니,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원고를 가져 오란다. 돈이 될 만한 원고를 말하는 것이리라. 마음만 먹으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학술서를 낼만한 모모 인사들도 이젠 가벼운 대중서를 통한 매명(賣名)의 덫에 걸린 것 같아 안타까운 요즈음이다. 재미있는 책도 안 읽는 세상이니 고리타분한 학술서를 읽을 턱이 없다. 학술서는 초판 500부 혹은 300부가 고작이다. 그나마 정부에서 우수학술도서제도를 통해 돈을 주니 찍어내는 것이겠지만, 우수학술도서라는 것도 로또일 수밖에 없다. 선정되는 우수학술도서 저자들의 분포를 보며 심사위원들을 점쳐보기도 하는데, 나중에 공개되는 것을 보면 대개 맞는다. 누군가는 그것도 권력이라고, ‘짬짜미가 있다는 말도 하지만, 대체 한 두 번 책을 만지작거린 뒤 수천수백 권의 책 더미 속에서 어떻게 우수학술도서를 골라낸단 말인가.

 

 

이제 책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책을 놓아둘 자리가 없는 아파트는 현대판 노마드의 텐트일 뿐이다. 어느 곳에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는 소문에 서둘러 텐트를 걷는 노마드처럼, 춤추는 아파트 시세에 따라 수시로 짐을 싸는 존재들이 오늘날의 우리다. 그런 와중에 책만한 천덕꾸러기도 없다. 무겁지, 돈도 안 되지, 놓을 자리도 없지... 이삿짐 센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책짐이다. 그래서 이사철 아파트의 쓰레기장에는 책들이 수북수북 쌓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배운 도둑질이라고, 책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책을 내면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볼 이유는 없으니, 내 돈을 들여서라도 사서 보내주어야 한다. 요즘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저 물어본다. “내가 이러이러한 책을 냈는데, 한 부 주어도 되겠나?”라고. 인사치레겠지만, 그럴 경우 대부분 주세요!”라고 하지만, 속내는 믿을 수 없다. 아마도 50~60%는 쓰레기장으로 가거나,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이리라 생각하면서도 배냇짓처럼헌사를 써서 건네곤 한다. 문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요즘엔 우편으로 책을 부치는 일이 힘도 들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더 힘 빠지는 경우는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다. 나보다 연상으로부터 반응 없음은 늙어 귀찮으니 그렇겠지하고 이해할 수 있으나, 동년배나 연하의 동업자들에게 반응이 없는 일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그럴 지도 모른다. ‘누가 그깟 책 보내라 했나?’ 그렇다. 그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책을 보내놓고 서운해 하는 내가 바보인지 모른다. 어쩜 가뜩이나 연구실도 좁고 집도 좁은데 책까지 보내왔으니, 투덜거리며 뜯지도 않은 채 던져 놓고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더 심한 추정을 해보자면, 발송인을 확인도 아니 한 채 아예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내온 책이 어떻든 상대방이 고심참담 끝에 만들어, 정성스런 헌사와 함께 우편으로 보내온 선물이다. 학자가 자신의 저술을 보내는 행위는 적어도 당신은 내 공부를 이해하고 조언해줄만한 분으로 생각하기에 이 책을 보낸다는 영광스런 믿음을 전제로 한다. 한 손으로 밥을 떠 넣으며, 다른 한 손으론 SNS를 희롱하는 시절이다. 설사 방금 전 그 책을 쓰레기통에 쳐 박았다 해도, “선배, 좋은 책 잘 받았어요. 언제 그렇게 좋은 책을 내셨어요? 참 놀랍네요. 잘 읽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잠시 엄지 손가락 몇 번 움직여 무성의한 문구 하나 스마트폰으로 날리는 게 그리도 어려울까. 하기야 책을 받은 뒤 전화 통화를 해도, 직접 대면하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요즘 세태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제부터라도 어쭙잖은 책 내려 하지 말고, 잘 있는 산의 나무들이나 건사할 일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0. 9. 11:32

 


고려극장 창고에 쌓인 연극대본들

 

 


고려극장 창고에 쌓인 연극대본들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심청전의 포스터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상속자들의 포스터

 

 

 

 

치원(致遠)의 성과

-조규익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2013)을 읽고-

 

 

                                                                                                                            이경재(숭실대 국문과 교수)

 

 

 

1. 학문이 다다른 곳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읽으면서, 제갈공명이 쉰 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여덟 살이었던 아들에게 남긴 계자서가 생각났다. 계자서의 핵심 내용은 주지하다시피 담박명지(淡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라는 여덟 글자로 압축된다. 이 중에서도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치원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만든다. ‘먼 곳에 도달한다는 뜻의 치원은 남들보다 크고 무겁고 많은 성취를 이룬다는 뜻이다. 평생 한 동네에 살면서 산 너머의 이웃 동네를 둘러보는 일도 어려웠을 옛사람의 관념을 드러내는 이 말은, 자신이 갈 방향을 뚜렷하게 정한 채 그 길을 꾸준하게 가면 마침내 먼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저서야말로 필자가 초인적 노력의 결과 다다른 학문적 먼 곳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은 꼴호즈나 솝호스 등 CIS 지역 고려인들의 생산 및 생활 공동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자생적 소인예술단과 고려극장으로 대표되던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살펴보았다. 소인예술단은 꼴호즈 등 집단농장에서 운영하던 아마추어 단체이고, 전문예술단은 국가에서 설립 운영하던 예술인 집단으로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에서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창립되어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고려극장이 유일하다. 구소련 체제의 대중예술은 전문예술과 소인예술의 분담과 협업으로 지탱되어 왔다. 인적 차원에서나 예술적 차원에서 전문예술단의 근원은 소인예술단에 있었으나, 상호 보완의 역할을 수행하는 단계에 이르자 양자는 구소련의 공연예술을 완성시키는 두 축으로 정립되었다.

 

원래 소인예술단의 경우 연극, 노래, 춤 등이 주된 장르였고, 전문예술단인 고려극장의 경우 연극 전문으로 출발했다가 공연예술로서의 노래와 춤이 추가되었다. 고된 생산의 현장에서 괴로움을 달래준 동시에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시켜 준 무명 예술인 집단이 소인예술단이었고,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민족의 애환을 대신 표출함으로써 고려인들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킨 예술인 집단이 전문예술단으로서의 고려극장인 것이다.

 

고려극장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당시 극작가들은 민족정신의 유지와 확인이라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고전작품들을 연극의 소재로 많이 다루었다. 창작극 외에 그들이 집착한 분야는 고전의 각색이었다. 고전의 각색은 민족정신이나 민족어의 보존과 전승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다. 결국 고려극장은 고려인들의 정체성을 함양시켜온, 일종의 민족 정체성 고양의 메카역할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수많은 극작가들을 등장시켜 활약하게 한 일은 고려극장의 가장 빛나는 공적이다. 그 가운데 극장의 초석을 놓은 인물은 연성용과 태장춘이었고, 최고의 연극미학을 보여준 인물은 한진이다. 한진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집요한 바가 있어,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 발간된 거의 동시기에 <<한진의 삶과 문학>>(글누림, 2013)이라는 책을 김병학 선생과 공저로 출판하였다.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

 

 

 

 

2. 지속과 변이

 

자료는 말한다. 이 명제는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자료는 연구자의 문제의식과 만났을 때, 비로소 고유의 목소리를 내는 까닭이다. 이만한 두께의 단일저서가 그에 걸맞은 하나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는 힘들다. 이 작품이 고려인들의 문학을 바라보는 기본 관점은 지속과 변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인들은 원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타율적 디아스포라들이었다. 현실적으로는 구소련 혹은 중앙아시아 국민의 일원이었고, 정서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이중적 존재들이었다. 구소련 시절에는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공화국의 독립 이후에는 공화국의 주도 민족에 의해, 힘들게 찾아온 할아버지의 나라에서는 고국의 사람들에 의해 3중의 타자 체험을 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현실적으로는 구소련 혹은 중앙아시아 국민의 일원이었고, 정서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두 방향으로부터 상반되는 인력을 느끼는 존재들이었다. 노래나 춤을 통해 표출되는 이념 지향적 의식이나 디아스포라 의식은 상반되는 인력에 상응하는 주제의식이다.

 

스탈린은 러시아 중심의 언어 예술 정책을 폄으로써 고려인을 포함한 비 러시아인들은 예술의 창작과 향유에서 큰 난관에 봉착하였다. “스탈린의 폭압적인 동화정책에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민족의 표지를 내려놓”(5)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려인들은 자민족 중심의 전통 형식 고수라는 구심력과 소련의 사회주의 추구라는 원심력을 적절히 조정한 미학을 고안했다. 그로부터 나온 것들이 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노래들의 음곡에 사회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노랫말을 올려 부른,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들이다. 이를 통해 집단주의라는 사회주의 통치이념의 폭력적 군림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민족 정서의 실낱같은 생명만큼은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언어와 문화의 동화정책을 밀어붙인 스탈린 체제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이 우리 전통예술의 한 부분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규정 덕분이다.

 

고려인들의 노래는 우리나라 전통 민요의 운율과 사설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경우도 있고, 노랫말을 러시아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맞게 새로 만든 것들도 있다. 전자를 지속의 측면에서 후자를 변이의 측면에서 각각 설명할 수 있다. 지속의 측면은 고려인 혹은 한인이라는 민족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한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정서적 형태적 전승소이며, 변이의 측면은 적응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조정될 수밖에 없는 가변적 요소다. 이처럼 고려인들이 갖고 있던 전통 노래의 관습적 레퍼터리는 새로운 정착지의 생경한 분위기와 충돌을 일으키며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조정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고려인들의 노래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문화 접변 현상이다. 고려인들이 접변을 통해 새로운 공연예술을 창출할 수 있었다면, ‘디아스포라의 현실과 새로운 이념에의 적응이라는 복잡한 원리가 그 근저에서 작동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3. 학문적 가치와 필자의 노력

 

이상으로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의 기본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 작품이 던져주고 있는 중요한 논점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제목에도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는 한글문학이라는 개념이다. 보통 국문학자는 국문학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며, 이때의 국문학이 한국인이, 한국어로,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문학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한글 창제 이전의 문학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것은 아니지만,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국문학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해외동포들의 작품을 과연 국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 실정이다. 조선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재일교포들의 일본어 작품이나,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작가가 쓴 영어 작품이나,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교포의 한국어 작품 등을 과연 국문학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 판별하는 것은 뜨거운 난제일 수밖에 없다.

 

사실 언어, 국적, 사상과 감정이란 세 가지 요소는 일종의 형식논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중요한 것은 공동운명체로서 느끼는 실감일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오래 전에 한반도를 떠나 고려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창작한 문학을 과연 국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을 수밖에 없다. 연구자는 이러한 난관을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문학을 한글문학으로 칭하는 것이다. 조규익 교수는 이 저서에서 각지의 소인예술단들과 고려극장으로 대표되는 전문예술단이 지난 시절 만든 한국어 노랫말과 극본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백여 년 전에 한반도를 떠나 멀고 먼 중앙아시아에서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산 사람들의 문학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이다. 이것은 첫 번째 문제와도 관련된다. 이 고려인들을 우리와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오만일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고려인들을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말하는 것은 섣부른 편견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난 시절 고려인들의 문학을 우리 것이자 동시에 우리 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는 어찌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섬세한 관점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능한 입장을 저자는 누구보다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다. 이 저서의 서론격인 1부의 마지막은 조속히 청산해야 할 중심부의 시각으로 우리 정서의 맥을 힘겹게 이어 온 변방의 정서적 산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려는 것이다.”(36)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이 문장은 고려인 문학을 접하는 한국인 연구자의 솔직하고도 곤혹스러운 관점을 잘 드러낸 고백으로 읽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무래도 고려인 문학은 우리 것이라는 입장에 한층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의 전통노래를 발전적으로 지속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해외에 우리의 문화영토 혹은 정신적 영역을 화복해 나가야 한다는 관점에서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108)는 문장에서 고려인=대한민국인이라는 관점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저서의 마지막 문장인 “‘갈 짓 자행보 속에 마구 변해버린 또 다른 중심부 한반도. 그 중심부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주변부의 오늘과 내일을 바라보며, 우리 스스로 성찰적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그들을 위해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356)라는 격정적인 문장에서도 중심부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주변부로서의 고려인들을 사유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저서에 담겨 있는 학문적 가치와 필자의 노력에 대해서이다. 이 저서에서 조규익 교수는 소인예술단 공연 때 불리던 국문노래의 존재양상과 이념, 고려인 민요의 전통노래 수용 양상, 고려인 한글노래에 나타난 디아스포라의 양상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소인예술단의 한글문학이 지닌 본질을 찾아보았고, 1932년 고려극장 창립 이래 최근까지 공연된 연극들(200여 편)을 개관한 다음 고려인 사회 연극의 초석을 놓은 연성용, 태장춘의 연극세계와 함께 구소련 고려인 문단에서 최고의 미학을 성취한 한진의 연극을 분석하였으며, 연극무대 혹은 그 바깥에서 가창된 노래들까지 살펴봄으로써 고려극장의 한글문학이 지닌 본질을 밝히고자 했다.

 

이상의 내용 중에서 어느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느 것 하나 책상머리에서 자판 몇 번 두드려 얻을 수 있는 자료에 바탕한 것이 없다. 거의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 직접 발로 뛰며 얻은 자료를, 별다른 선행 연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해 나가며 이룩한 업적인 것이다. 후학으로서는 감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또한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저자가 기울인 공력은 후학들에게 많은 귀감이 된다. 발로 뛰며 쓴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각종 사진으로 책의 여러 부분이 채워진 것이 그러하고, 전 세계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 뒤에 15페이지에 이르는 영문 초록을 붙인 것이 또한 그러하다. 조규익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은 앞으로 고려인 문학을 연구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명저이다.

 

“<<한국문학과 예술>> 12,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2013. 9. 30.”에서 퍼옴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8. 26. 23:58

 


크로스 컨트리 경기장이 있는 캠퍼스 리크리에이션 노쓰 필드 표지판

 

 

 


누굴 응원하러 온 것일까. 행복한 가족의 모습

 

 

 


출전 팀이 단합을 도모하는 모습

 

 

 


출발의 포를 쏘기 위한 차량

 

 

 


막 출발선을 뛰어나가는 선수들

 

 

 


필드 위의 건강한 청춘들

 

 

 


눈 내린 산책길

 

 

 


산책길의 나무들

 

 

 

 

낙원 속의 산책로: OSU 크로스 컨트리 코스의 안식과 힐링

 

 

 

 

미국에 머문 지 한 달이나 되었을까. 어느 토요일 아침 늦잠으로 뒤척이고 있는데, 갑자기 문밖이 시끄러워졌다. 절간 같은 곳이라 좀처럼 없는 일이었다. 후다닥 일어나서 문을 열어보니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뒤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호기심에 대충 아침을 챙겨먹은 우리도 덩달아 따라 나섰다. 날씨는 우중충하고 간간이 빗방울도 떨어졌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로를 따라 철조망이 쳐 있는 곳이라서 어느 개인 소유의 땅인가 보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겼는데, 알고 보니 그곳이 바로 OSU의 크로스 컨트리(cross country) 경기장이었다. 더구나 이곳이 미국에서 가장 오래 된 크로스 컨트리 경기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경기하는 날만 제외하곤 언제나 공개되는 시민들의 산책로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전국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선수단은 물론 그 가족들, 스틸워터 시민들까지 몰려와 북적거리고 있었다. 경기를 앞두고 선수들이 몸을 풀거나 이마를 맞대고 파이팅을 외치는 열기에 가을비의 찬 기운도 잊을 만 했다. 숲속 잔디와 나무들 사이를 꽉 채우고 있던 깨끗한 정밀(靜謐)이 참으로 오랜만에 젊은 열기로 인해 흩어지는 순간이었다. 숲을 뚫고 지나가는 이곳 경기 코스의 길이는 대략 5km 정도라 하는데, 느낌으로 7km는 족히 되어 보였다. 스타트 지점과 골인 지점이 같은 곳에 있는 점으로 미루어 마라톤과 비슷한 방식인 듯했다. 구경하기에는 크게 재미없는 게임이었지만, 특별히 뒤에 쳐지는 선수들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열기가 대단했다. 게임 방식도 의미도 잘 모르는 우리로서는 이 코스가 바로 환상적인 산책로라는 점에만 관심을 갖기로 했다. 경기가 끝난 다음날 우리는 이 코스로 산책을 나갔다.

 

맑은 햇볕이 내려 쪼이는 잔디밭 길과 나무껍질을 두껍게 덮은 숲속 길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몇 번이나 열린 공간과 숲속을 들락거리며 작은 언덕들을 오르내리다가 갑자기 뻥 뚫린 목초지와 목장을 만났고, 멀리에 묵묵히 서 있는 말들도 보았다. 햇볕에 반사된 저 멀리의 지역 발전소가 은빛으로 반짝이고 숲속과 넓은 들판 길로 미니어처 같은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었다. 무리무리 온갖 새들은 신비스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관목과 교목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속에는 동물들의 발자국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시민들에게 개방된 산책로라 하나, 하루 산책 두 시간 남짓에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숲속의 적막을 깨는 것은 크고 작은 새소리 뿐. 간혹 마음이 평안한 날에는 나무들의 숨소리까지 들리는 듯 했다. 목초지를 빙 돌아 목책이 둘려 있고, 목책을 따라 나무껍질이나 부스러기들이 깔려 있는 길을 밟아 가노라면 염소오리사슴 등을 기르는 농가가 나무들 속에 숨듯이 앉아 있었다. 언젠가는 철망 너머로 어미 염소를 애타게 찾는 새끼염소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내가 염소 엄마의 소리를 내자, 그 녀석이 바로 내 앞으로 쫓아오는 것이었다. 배고픈 녀석이 보이지 않는 엄마를 찾아 헤매던 중이었을까. 젖떼기 전의 어린 자식이 엄마에게 매달려 사는 건 사람이나 짐승이나 일반임을 배우는 깨달음의 공간이기도 했다. 거기서 몇 발짝만 더 옮기면 캐나다 기러기들이 밤에 날아와 자고 가는 공간도 훔쳐 볼 수 있었다. 저녁 무렵 돌아 왔다가 해 뜨면 수백 마리가 함께 날아올라 부머 호수로 가는 모양이었다.

       ***

우리의 산책로는 그런 곳. 말없이 생명이 자라고 세대가 바뀌는 곳이었다. 각자 제 목소리와 모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흡사 누군가 휘두르는 지휘봉에 맞추기라도 하듯 아름다운 화음을 이루는 곳이었다. 숲속 길을 빠져 나오면 비스듬히 올라가는 풀밭 언덕에 언제나 변함없이 한 그루 활엽수가 묵상하듯 서 있었다. 그 나무를 보는 순간이면 늘 지친 가슴에서 밀려나오던 가쁜 숨이 멎고, 거짓말처럼 마음이 고요해졌다. 마치 산책로를 빠져 나온 모든 사람들이 그러리라고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나무는 늘 빙그레 미소 지으며 서 있었다. 나도 그렇게 서 있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그 나무는 의연하고 평화로웠다. 다시는 만나기 어려울 듯한 10릿길 남짓의 크로스 컨트리 코스가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목초지에서 베어 말린 다음 말아놓은 건초더미들

 

 

 


세찬 바람에 비스듬히 누운 산책길의 풀밭

 

 

 


목초지에 둘러친 목책

 

 

 


뭔가를 맛있게 먹고 있는 산책길의 청설모

 

 

 


이곳에도 어김없이 캐나다 기러기들이 있었다!

 

 

 


누가 모아 놓았을까?

 

 

 


산책길의 풍경

 

 

 


고요, 평안, 그리고 힐링...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8. 26. 10:53

 


부머 호수 조성 기념비

 

 

 


모진 바람을 견뎌내는 부머의 서정

 

 

 

 


늦가을과 초겨울의 어름에서

 

 

 

 


부머의 새들은 어디로 날아가는가?

 

 

 

 


부머의 나무들은 물에서도 뿌리를 내리는구나

 

 

 

 

 

 

부머(Boomer) 호수에서 찾은 마음의 고요

 

 

잠시 머물다 떠나온 스틸워터는 말 그대로 낙원 같은 곳이었다. 앞의 글 어디에선가 스틸워터의 어원을 밝힌 바 있지만, 말 그대로 고요한 물그 자체였다. 맑은 공기, 녹색 풀과 나무, 알록달록한 꽃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갖가지 새들, 기분 좋은 촉감으로 끊임없이 스쳐가는 바람, 그리 많지 않은 사람들, 차량 대수에 비해 아주 넓은 도로, 나지막하고 예쁜 집들... 집의 출입문을 닫으면 심심산골의 절간이요, 문을 열고나서면 한적한 시골 마을의 확대판이었다.

 

특히 우리를 매료시킨 두 가지가 이곳에 있었다. 첫째는 숙소를 나와 도보로 500m만 걸어가면 5km 남짓의 크로스 컨트리 코스(cross country course)가 있는데, OSU가 소유한 공인 경기장이자 주민들의 산책코스였다. 울창한 숲과 목초지, 목장을 뚫고 구불구불 이어진 낭만의 오솔길이었다. 둘째는 자동차로 10분 거리의 부머 호수. 스틸워터의 북쪽 면을 접한 아름다운 호수였다. 여러 나라에서 호수들을 구경했지만, 스위스 베른의 시가지에 거울같이 고여 있던 호수를 제외하곤 아직 부머 만한 곳을 기억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그것은 인공 호수였다!

 

그런데, 부머(Boomer)’일까. 오클라호마 사람들은 이주해 온 시기에 따라 수너(Sooners)’부머(Boomers)’로 불린다. 그로버 클리블랜드(Grover Cleveland) 대통령이 1889인디언 세출법안에 서명함으로써 지금 오클라호마 지역인 ‘(인디언들에게)할당되지 않은 땅들[Unassigned Lands]’을 (백인)정착민들에게 개방하려 했는데, 대통령의 서명 직전 그 지역들에 들어가고자 시도한 미합중국 남부 정착민들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부머들이었고, 그들보다 10년 정도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수너들이었다. 먼저 자리를 잡은 인디언들과 함께 그 두 종류의 백인들이 오클라호마 주민을 형성한 것이었다.

스틸워터에 인공 호수를 조성하고 부머 레이크라 호칭한 것은 그들이 아끼는 이 지역의 보물에 자신들의 역사성을 새겨 놓으려는 욕망 때문이었으리라. 어쨌든 스틸워터 사람들은 부머 호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틈나는 대로 호숫가를 걷거나 달리고 자전거 페달도 열심히 밟았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시간을 낚는 태공들도 심심찮게 보이고, 물 위를 새까맣게 덮은 새떼를 관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OSU의 아름다운 연못 쎄타 폰드(Theta Pond)에는 캐나다 기러기들(Canadian Geese)과 오리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캐나다 기러기는 철새인데, 쎄타폰드의 녀석들은 계절이 바뀌어도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낙원 같은 그곳을 떠날 생각들을 아예 접어버린 듯 했다. 오후쯤엔 가끔씩 휘익 날아올라 대열을 유지한 채 어디론가 날아가곤 했다. 그러나 다음날 쎄타폰드에 나가보면 그 녀석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여전히 풀밭을 뒤지고 있었다. 부머 호수에 가보고 나서야 우리는 녀석들이 어디를 다녀오는지 알게 되었다. 쎄타폰드에서 보던 녀석들을 부머 호수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머 호수는 녀석들의 임시 고향 혹은 새로운 정착지인 셈이었다. 유럽의 백인들이 밀고 들어와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이 땅에 정착했듯이. 그곳에는 호수 인근의 여러 지역에서 날아온 캐나다 기러기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었다. 몸집도 크고 생김새도 화려한데, 퍼런 색 똥은 문제였다. 아무데나 갈겨대는 까닭에 포장도로는 퍼렇게 도색되어 있었다. 하루 종일 각자의 영역에 나가 먹이활동을 한 다음, 저녁 무렵이면 부머 호수로 돌아와 가족 친지들과 대화를 나누고 밤을 지내는 모양이었다.

 

1925년에 완공된 부머 호수는 지역 발전소에 냉각수를 공급하기도 하고 시민들에게 오락과 휴식 공간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표면적 251 에이커[307,224 ], 유역면적 8,954 에이커[10,959,696 ], 호숫가의 길이 8.6 마일[13.76 km], 평균 수심 9.7 피트[2.96 m]로 꽤 큰 규모였다. 부머 호수에 살고 있는 주된 어종은 큰 입 배스[largemouth bass]로서 현재 우리나라 내수면에서 토종물고기들을 멸종시키고 있는 몹쓸 존재들이다. 이외에도 얼룩메기, 넓적머리 메기, 크래피 등이 많이 살고 있었다.

 

***

 

물론 흐르는 물도 좋고, 필요하다. 그러나 거울처럼 잔잔하여 마음까지 비춰볼 만한 호수는 더 좋다.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새들을 바라보는 노인들, 땅으로 올라온 오리와 기러기들을 아장거리며 쫓아다니는 아가들, 수면에 비친 버드나무를 바라보며 고향을 떠올리는 나그네 백규, 희한하게 생긴 탈 것에 몸을 누인 채 호숫가를 질주하는 장애인 남성, 열심히 달리면서 살을 빼고 있는 젊은 여성들... 모두들 자연의 한 부분이 되어 부머 호수에 안겨 있는 모습. 스틸워터가 낙원인 이유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차가운 겨울날 부머 호수에서

 

 

 


시린 물에서 피할 수 없는 일상을 즐기며

 

 

 


부머 호숫가에서 만난 이름 모를 열매들

 

 

 


부머 호숫가에서 만난 캐나다 기러기

 

 

 


부머 호숫가에서 만난 일군의 캐나다 기러기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