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0. 2. 6. 17:26

 

 

 

 

                                                                                                                                조규익

 

제가 꾸려가고 있는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의 학술지 <<한국문학과 예술>> 32집이 2019년 12월 31일자로 발간되었습니다. 이번 호는 작년 11월 8일에 소천하신 소재영 교수님 추모호로 꾸며 보았습니다. 그간 국문학계의 어른으로 존경 받아오신 소 교수님은 주지하다시피 숭실대 국어국문학과를 창설하셨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연구소 고문으로 저희들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뜻하지 않게 소천하신 점을 너무 슬프게 생각하며, 이번 호에 실은 밝은 표정의 선생님을 사진으로나마 곁에 모시고 선생님께 늘 샘솟는 힘과 지혜를 간구하고자 합니다.

 

 

***

 

 

성오 소재영 선생님을 추모하며

 

 

성오 선생님 !

 

저는 2019년 11월 8일의 날벼락 같은 비보를 잊지 못합니다. 인사동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점심을 나눈 6월 6일의 기억이 바로 어제인데, 그토록 참담한 비보를 어떻게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선생님을 보내드리고 나서도 지금껏 꿈인 듯 현실인 듯 종잡을 수 없는 것은 그날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말씀과 보여주신 미소가 너무 청청하셨기 때문입니다. 찻집에서 “우리 아버지는 101세에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며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오신 비결이 선생님의 철저한 자기관리였고,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어린 약속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를 자처하며’ 오랜 세월 가까이에서 선생님을 모시던 제가 배운 것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학문적 근면성, 둘째는 대인관계에서의 모나지 않은 인품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한 곳에서 공부를 마치지 못한 저는 이곳저곳으로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운 좋게도 저는 선생님의 간택을 받아 숭실대학에 자리를 잡았고, 숭실에 오면서 비로소 학문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한 시도 쉬지 않고 책을 읽고 글을 쓰시는 선생님을 뵈며, 겨우 논문 한 편 써놓고는 ‘다 이루었다는 듯’ 드러눕기 일쑤였던 저 스스로를 통렬히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자료를 찾아 전국을 누비시는 모습을 뵈며, 저도 ‘자료 찾아 삼천리’의 모토를 갖게 되었고, 지금도 가끔 전국을 누비곤 합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은 참으로 따뜻하고 원만한 인격을 소유하셨습니다. 열심히만 한다면 누구든 맞아들여 제자로 키워주셨고, 만나는 상대가 누구이든 그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도움을 주셨습니다. 국내에는 물론 해외에도 선생님의 학문과 덕망을 존경하고 따르는 학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내심 부러워해 온 세월이 길었습니다. 이렇게 선생님을 흉내 내며, 선생님의 덕으로 지탱해온 지난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효빈(東施效顰)’이란 말처럼 제 미련함으로 선생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저 역시 인생의 석양에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성오 선생님 !

이제 논문이나 책을 쓴들 누구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선생님이 안 계신 이곳에서 다시 누구를 표준으로 스스로를 다잡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선생님의 넓으신 가슴이 없는 이곳에서 과연 저희들의 좁은 가슴을 넓혀가며 많은 사람들을 품을 수 있을까요?

 

나침반을 잃고 등대도 없는 거친 바다를 표류하는 저희에게 무언의 힘을 주시고 안식의 항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선생님 계실 때 제대로 배우지 못한 저희들의 게으름과 어리석음을 크게 꾸짖어 주시되, 긍휼히 여기시어 이제라도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세상의 고통을 모두 잊으셨을 그곳에서 편안한 청복 누리시길 가련한 후생들은 빌어드립니다.

 

2019. 12. 31.

 

후학 조규익은 크게 울며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19. 11. 17. 05:51

, 성오 선생님!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비보입니까?

엊그제까지도 청청하시던 선생님께서 이렇게 홀홀히 떠나시다니요!!!

2019년 11월 8일의 이 비보는 부모님 소천 이후 최대의 충격으로 저를 후려쳤습니다.

 

인사동에서 선생님을 뵌 지난 6월 6일을 잊지 못합니다.

청년처럼 당당하신 모습으로 인사동 한 복판에서 저희 부부를 기다리시던 선생님을 잊지 못합니다. 반년만 지나면 ‘미수(米壽)’라고 말씀하시며 쓸쓸하게 웃으시던 선생님의 표정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569516350122180&id=100011914603684&sfnsn=mo

 

이제 저는 논문을 써서, 책을 써서, 누구에게 보여드려야 하나요?

제 일거수일투족을 응시하시리라 믿어온 선생님이 안 계신 이곳.

다시 저는 누구를 표준으로 스스로를 다잡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정신적으로 의지해온 선생님을 보내 드릴 수밖에 없는 지금.

저는 적지 않은 나이 육십 대를 질주하고 있습니다.

이제 날짜만 헤아릴 뿐 제게는 저를 지탱할 힘도 거친 바다를 항해해 나갈 등대도 없습니다.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2019년 11월 11일, 선생님의 발인 날 아침

중국 절강대학 빈관의 객실에서

크게 울며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9. 5. 12. 14:21

 

, 소재영 선생님!

 

 

 

                                                                                                               조규익

 

 

 

책 표지

 

 

소재영 선생님께서 새로 내신 책(<<성오수록(省吾隨錄)>>)을 보내 오셨다. 성오(省吾)는 선생님의 아호(雅號)로서 <<논어>> 「학이」편의 “일일삼성오신(一日三省吾身/나는 하루에 세 번씩 내 몸을 반성한다)”에서 따오신 호칭이다. 선생님의 설명(“내년이면 미수를 맞는다. 그간 내가 지나온 삶을 어떤 형식으로든 한번 정리하고 뒤돌아보아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 글을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이번에 출간하는 <<성오수록(省吾隨錄)>>은 일단 내 삶의 모습들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 편집된 것이며, 여기에 그간 써온 글들을 모아 세상에 내놓게 된 것이다.”)에 따르면, 이 책은 선생님의 일생을 조감한 책이다. 즉 ‘만남과 체험’을 중심으로 일생을 서술하신 셈이니, 자서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소재영 선생님

 

 

나는 책 앞에서 30분 정도 묵상을 했다. 선생님과 함께 한 숭실에서의 10년 세월, 그 후 현재까지 마음으로 교유해온 20여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선생님은 1999년 정년퇴임하셨으니, 학교를 떠나신지 올해로 21년째. 내년에 미수(米壽)를 맞으신다. 갑자기 가슴 속으로 자책과 회한이 밀려들었다. 그동안 늘 곁에 계신 것으로 착각한 채 무심히 지나버린 세월이었다. 그 사이 사모님을 사별하셨고, 혼자 지내오시다가 새로운 친구를 만나시어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신다는 소식까지 들었는데, 그 분마저 사별하셨음을 지금서야 알게 되었다. 지금 느끼는 회한은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돌아가실 때의 감정과는 또 다른 그것이었다. 제자는 아니지만 스승으로 존경하며 사숙(私淑)해온 지난 세월. 행복했고 철없었다. 그 세월이 영속되리라는 착각 속에 빠져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허무하다. 그동안 나는 쓸데없는 일들에 매여 살아왔다는 증거일까.

 

추억 속 선생님의 모습은 ‘반듯함과 따뜻함’으로 요약된다. 가깝고 먼 사람을 불문하고 늘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그러면서도 지켜야할 거리는 늘 지키셨다. 선생님의 곁에 끊이지 않고 사람들이 모이는, 가장 큰 요인일 것이다. 무엇보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지키고자 하신 철학은 선생님의 최대 장점이셨다. 세대의 차이를 넘어 일본과 중국의 대단한 학자들은 대부분 선생님의 팬들이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만나는 학자들은 모두 선생님의 안부를 여쭙고, 선생님과의 인연을 자랑한다.

 

사실 외국 학자들과의 인연을 지속시키기가 어려운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는 나다. 성격이나 취향의 종족적 차이가 현격하고, 각자가 속한 문화의 차이가 두드러지며, 각자의 학문적 지향 또한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차이들을 갈아 없앨 만큼 자주 만날 수도 없지 않은가. 학문적 실력은 물론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의 투자에 큰 인내와 끈기 또한 겸해야 해외 학자들과 만날 수 있고, 설혹 그런 것들을 갖추고 있다 해도 온유한 마음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그들을 친구로 만드는 일이다. 해외의 유수 학자들을 보시는 눈이 범상치 않고, 한 번 연을 맺은 사람들과는 끝까지 좋은 관계로 지내시는 온유함과 끈기를 갖추셨기에 유수 해외 학자들이 선생님을 지기(知己)로 생각하고 따르는 것이리라. 술을 입에 대지도 못하시면서 중국의 학자들과 그런 관계를 유지해 오신 것은 대단한 일이다.

 

숭실에 오면서 나는 선생님의 학문적 자세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대학, 대학원 시절 누구로부터도 배우지 못한 학자적 자세를 선생님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선 근학(勤學)의 자세다. 선생님은 늘 자료를 모으시고, 논문을 쓰셨으며, 학회 활동에 열중하셨다. 그 때까지 나는 논문 한 편 간신히 쓰거나 발표해놓곤 ‘이제 한동안 쉬어도 된다’고 드러눕기 일쑤였다. 그런데, 선생님을 엿보면서 나는 깜짝 놀라 기준을 바꾸게 되었다. 논문은 쉼 없이 쓰는 것, 논문 쓰기 위해서는 자료를 열심히 모으고 읽어야 한다는 것, 남의 글과 말을 열심히 읽고 들어야 한다는 것 등등, 나름대로의 수칙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선생님을 추월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유일한 방안이 ‘논문 쓰는 작업장을 두 군데로 늘이는 일’이었다. 연구실과 집에서 각각 다른 논문들을 동시에 진행해보자는 것이었다. 아이디어는 적지 않게 있으니, 작업을 두 곳에서 진행하면 생산성이 훨씬 높아지리라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실행해보았으나, 내 스스로 지쳐서 결국 선생님을 따르지 못하고 말았다. 그래서 겸허한 마음으로 선생님의 발걸음 흉내나 내보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이젠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나보나 훌륭한 사람을 따라가거나 추월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그게 안 되면, 무조건 존경하라!”고.

 

***

 

선생님의 의연하신 학자적 자세와 후학에 대한 사랑 덕분에 나는 이때까지 나를 다잡아 올 수 있었다. 학문을 어떻게 해야 하며, 학자의 행동거지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선생님으로부터 ‘확실히’ 배웠는데, 감사의 말씀을 드릴 기회가 없었다. 고백의 타이밍을 놓친 다음 복잡한 세상사에 휘말려 여기까지 밀려오게 되었다.

 

‘무엇이 소중헌디?’라고 묻는다면, 나는 정말로 대답이 궁해진다. 그 때는 ‘중하다’고, ‘내 자존심을 손상시킬 수 없다’고 강변하며 고집을 세웠지만, 지나고 보니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될 뿐이다. 학자로서의 걸음마와 옹알이를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셈인데, 그 은혜를 깡그리 잊고 지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내 인생도 석양으로 접어들고 있지 않은가.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성오수록>>이 매서운 회초리로 다가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선생님을 본받아 나도 <<백규수록(白圭隨錄)>>을 쓸 수 있을까. 얼얼한 종아리를 매만지며, 새삼 부끄러운 내 지나간 시간대를 반추해본다.

 

성오 선생님,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오.ㅠㅠ

 

2019. 5. 12.

 

선생님을 사숙(私淑)해온 후학

 

조규익 절하고 올림

 

 

추기(追記)

 

선생님의 글귀 가운데 눈물을 훔치며 읽은 부분을 아래에 적어본다.

 

“언젠가 전도서에서 보았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한 세상이 지나고 다른 세상이 오도다.’ 사랑하는 내 아내 김숙희, 다시 사랑했던 김미혜자 약사, 부디 천국에서 평안하고 행복한 삶 누리기 바랍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8. 30. 12:01

네가 쓴 논문들을 찢어 버려라!”

 

 

                                                                                                            조규익

 

 

 

 

 

 

학자란 누구인가. 넓은 의미로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 좁은 의미로 대학교나 연구소 등 연구기관에서 전문적으로 학문을 다루는 사람이다. 학문을 연구하거나 다룬 결과는 논문이나 책으로 나오기 마련이니, 교수나 학자는 논문 쓰는 사람, 혹은 논문으로 말하는사람이다. 그래서 학자가 제 아무리 언변이 뛰어나고 생각이 기발해도 그것이 논문으로 엮여져 나오지 않으면 그냥 달변가 혹은 재주꾼일 뿐이다.

 

공부도 잘하고 말까지 잘하는 재주꾼을 최고로 치는 시대가 되었지만, 동양 사회에서 말 잘하는 사람을 경원(敬遠)해 온 역사는 길다. 특히 학자들의 말이 뻔지르르하면 일단 의심을 하고 보는 것이 전통사회의 통념이었다. 오죽하면 공자는 말에 있어서 더듬거리고 실행에 있어서는 민첩하고자 하는 것이 군자(欲訥於言而敏於行/󰡔논어(論語)󰡕 「이인(里仁))’라고 했을까.

 

옛날의 군자는 완성된 도덕을 갖춘 인격자로서 남의 사표(師表)가 되는 사람, 그래서 전통사회의 학자를 겸한 인간상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말을 더듬어야 했을까. 자신의 내뱉는 말이 과연 얼마나 진실한지, 누가 보아도 확실한 근거를 갖고 있을지 아무도 자신 못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누군들 자신의 말을 100% 자신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군자란 단 한 마디 말이라도 내뱉기 전에 수십 수백 번을 되씹어 보고 숙고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게 하고 나서도 막상 말을 내뱉는 순간 걱정이 앞서는 것이다. ‘과연 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내 말에 분명한 근거가 있는가.’ 거침없이 나가야 하는 말 줄기를 이 두 가지 물음이 막아서면 더듬거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한 마디 말이라도 내뱉기 전에 심사숙고하라는 것이고,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학자의 자세다.

 

그러나 지금은 말() 잘하는 학자들이 너무나 많다. 매스 미디어가 지배하는 이 시대엔 말 잘하는 것이 모든 조건들을 압도한다. 방송에 나와 사자후를 토하는 학자들치고 제대로 된 논문이나 저서를 갖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고들 한다. 언제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공부를 다져 논문이나 저서로 만들어내겠는가. 그리고 그렇게 쉽게 내뱉는 말들이라면 심사숙고의 과정을 거쳤을 리 없을 터. 당장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고 그들의 찬탄을 이끌어내기에 급급할 것이니, 언제 책상머리에 앉아 자신의 가설을 논증하고 강호 현인들의 생각을 참고할 겨를이 있단 말인가. 대중의 눈과 귀를 솔깃하게 하는 달변가들 가운데 의외로 좋은 학자가 드물다는 건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제대로 학자 노릇을 하기란 어렵다. 선현들이 남긴 생각을 토대로 자신의 뜻을 세우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저 앞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건 그런대로 가능할 수도 있으리라. ‘전술(傳述)할 뿐 짓지 않으며, 옛것을 믿고 좋아한다(述而不作 信而好古)’󰡔논어󰡕 「술이편에서 공자는 말했다. 정말로 그가 술이부작으로만 일관했을까. 사실은 앎에 대한 겸양의 태도를 강조한 말이었을 것이다. 학자는 도덕가를 겸해야 한다는 차원 높은 인식의 노출로 보는 것이 옳다. 공자가 극구 사양한 것은 없던 것을 만들어낸다는 창조자의 타이틀. 외람하다 보았기 때문이리라. 외람하지만 않다면, 그 역시 인간에게 좋은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좋다는 판정을 내리지 않았을까. 공자가 얼마나 창조적인 생활을 했는가를 생각해보면, ‘술이부작속에는 자칫 교만해지기 쉬운 인간을 다잡는 의미가 들어 있을 뿐, ‘새로운 것을 고안하거나 만들어내는 일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

 

한여름 더위를 먹어서 그런가. 쓸데없이 서론이 길어졌다.

내 본업은 교수다. 교수는 당연히 학자이고, 학자가 대부분 교수인 것은 우리의 상식이다. 그래서 교수는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을 겸하는 존재다. 대학원 시절, 존경하던 은사들은 늘 좋은 논문 많이 쓰라고 말씀하셨고, 당신들께서 몸소 모범을 보이셨다. 상당 기간 대가들의 곁을 배회하며 논문 쓰는 일의 중요함을 마음에 새겨온 나다. 언제나 되어야 저 분들처럼 멋진 논문들을 맘껏 써서 후학들을 위해 지남(指南)할 것인가. 뜻은 높되 손과 아이디어가 따라주지 않아, 일종의 비원이 마음속에 똬리처럼 들어앉게 된 내 '학자로서의 한평생'이다.

 

비교적 이른 나이인 스물일곱 여덟에 대학 교수로 자리를 잡았으면서도 마음은 편치 못했다. 초년 시절 내내 논문을 써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왔으면서도, 진짜로 쓰지 않고 못 배기는 테마나 문제의식 혹은 가설 하나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나날이 꽤 오래 지속되기도 했다. 어느 순간 공부가 설어서 그렇다는 것을 스스로 깨치긴 했으나, 그에 대한 처방을 얻지 못한 채 이날까지 삽질을 하며학자의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밤늦도록 연구실에서 고민하며 책장을 넘기고, 휴일을 잊은 적도 적지 않았지만, 내 곳간은 늘 적막하다. 지금도 물색 모르는 고향 친구들은 교수는 그저 놀고먹으며 땡하는 직업 아니야?’ 라고들 놀리기 일쑤다. 수시로 전해오는 친구들의 번개 자리에 불참하는 나를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적막한 연구실에 틀어박혀 글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끙끙대는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눈총을 줄 때마다 빙그레 웃음으로나 화답할 뿐이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한결 한가로워진다.

 

여섯 평 연구실에서의 삼십여 성상(星霜)! 엊그제 존경하는 소재영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내게 늘 사표(師表)가 되어주신 학자의 표본. 문득 생각해보니 그 분이 지금의 내 나이셨을 때 나는 40을 바라보는 애송이였다. 당시 그 분은 참으로 까마득하게 올려다 보였다. ‘나도 저 연세, 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라는 멍청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나이만큼은 어느덧 그 고개에 올라서고 말았다. 논문 쓰는 일도, 강의도, 세상사도 모두 달관의 경지에서 유유자적 해결하시던 내 나이 때의 선생님이셨는데. 지금의 나는 어찌 그 경지를 상상도 못한단 말인가. 늘 뇌리를 훑고 지나는 아이디어나 가설을 잡아 매어놓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무진 애를 쓰지만, 손에 잡히는 결론은 늘 텅 빈 괄호( )’ 뿐이다!

 

누가 있어 무엇이 중헌디?’라고 물으면, 정말로 할 말이 없다. 쉽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논문들을 써 보았지만, 결론이 하나같이 공백으로 남아 있다면, 그간 줄창 헛공부만 해왔다는 말이다. ‘교수니까 논문을 쓴다는 구조화된 아비투스(habitus) 속에서 가치 있게 살아야 했던 삶을 내 스스로 몰각(沒却)해온 건 아닐까. 그러면서도 교단생활을 쓸쓸하게 마무리하지 않으려는습관적 욕망에 사로잡혀 논문의 화두(話頭)를 꼭 틀어쥐고 의자를 당겨 앉는 내 모습은 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인문학이 밥을 해결해주지 않는 시대에 (고맙게도) 우리를 찾아준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며, 고담준론(高談峻論)^^을 펴는 내 모습은 또 얼마나 가련하고 처량한가.

한 주에 단 하루, 육체의 괴로움을 통해 내 실존을 아프게 자각하는 에코팜의 은혜로운 시간이라도 없었다면, 허물어져가는 내 자존심의 성벽을 무슨 용기로 대면할 수 있을까.

 

네가 쓴 논문들을 찢어 버려라!” 등짝을 후려치는 죽비와 함께 귀를 찢는 노() 선승(禪僧)의 할()이 텅 빈 내 마음을 울린 뒤 메아리가 되어 여섯 평 연구실을 휘감다가 사라지곤 한다. 깨달음은 내게 미래의 시간을 부여할 것인가. 갈가리 찢긴 논문들을 주섬주섬 이어 붙이면 천사의 날개옷으로 부활할 것인가. 그 옷 걸치고 구만리장천을 훨훨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인가.

 

 

 

 

 

 

 

졸우(拙愚)-우공 이일권 작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0. 9. 19:51

책 단상

 

 

 

초년병 시절. 책을 한 권 내면 세상의 한 모퉁이라도 정복한 듯 설렘으로 붕 뜬 채 며칠을 지내곤 했다. ‘사람들이 아마 요건 모르고 있었을 거야!’ 초등학교 소풍 날 보물찾기 시간, 후미진 곳에서 하얀 쪽지를 찾아낸 뒤 콩닥거리는 가슴을 어쩌지 못하던 아이가 그러했으리라. 책도, 책을 내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 내로라하는 학계의 거물들이 존재감을 드러내시던 유일한 지표가 저서였다. 잘 나가는 일간지들의 신간안내에는 무게 있는 학술서들이 가끔 소개되었고, 나는 그 기사를 오려갖고 다니다가 서울 가는 기회에 그것들을 사서 소중하게 모셔오곤 했다. 요즘과 달리 방방곡곡의 제제다사들이 총집합하는 학회에 갈 때는 혹시 이 거물들을 뵐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소한 그 분들이 출판한 책 제목과 목차라도 몇 번씩 훑어보고 가는 것이 내 습관이었다.

 

 

저자의 급에 따라 달랐겠으나, 책을 내면 초판 1,000권이 기본이었고, 초짜인 내게는 인세조로 100부가 들어오는 것이 다였다. 평소 손꼽아 두었던 학계의 어른들과 동학들에게 정성스레 헌사를 써서 우편으로 보내드리는 것도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누구 말대로 출신이 한미하여’^^ 대면할 기회는 없었지만, 책과 논문 혹은 입소문을 통하여 익히 알고 있는 그 분들에게 내 목소리를 보낸다는 것은 영광스런 일이었다. 이 분들로부터 무슨 반응이 오리라는 기대는 애당초 없었고, 다만 비웃음이나 사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뿐이었다. 몇 차례 그런 일 들이 반복되는 중에도 가뭄에 콩 나듯몇 분들로부터 반응이 있었는데, 잊히지 않는 몇몇 분들이 있다. 소재영, 김대행, 이규호, 성호주, 박노준, 이상보, 조재훈 선생님 등이 그런 분들이었다. 어떤 분은 전화로, 어떤 분은 편지 혹은 엽서로 감사의 마음을 보내주셨는데, 의례의 수준을 넘는 곡진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돌아가신 성호주 선생님은 내게 큰 가르침을 주신 분이었다. 책을 보내드리고 나서 한 주쯤 되었을까. 소포가 하나 배달되어 왔다. 뜯어보니 속옷과 양말 한 세트, 그리고 정성스런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의 내용도 물건도 감동이었다. 그로부터 책을 받으면 최소한 답장만이라도 정성스럽게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

 

 

 


매우 혼잡한 어떤 인사의 서재

 

 

그 뒤로 세상은 마구 변했다. 누구 말대로 아무나 책을 내는시절이 되었다. 학술서의 원고를 들이밀면 출판사에서도 외면을 한다. 거짓말이나 허접한 거라도 좋으니,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원고를 가져 오란다. 돈이 될 만한 원고를 말하는 것이리라. 마음만 먹으면 경천동지(驚天動地)할 학술서를 낼만한 모모 인사들도 이젠 가벼운 대중서를 통한 매명(賣名)의 덫에 걸린 것 같아 안타까운 요즈음이다. 재미있는 책도 안 읽는 세상이니 고리타분한 학술서를 읽을 턱이 없다. 학술서는 초판 500부 혹은 300부가 고작이다. 그나마 정부에서 우수학술도서제도를 통해 돈을 주니 찍어내는 것이겠지만, 우수학술도서라는 것도 로또일 수밖에 없다. 선정되는 우수학술도서 저자들의 분포를 보며 심사위원들을 점쳐보기도 하는데, 나중에 공개되는 것을 보면 대개 맞는다. 누군가는 그것도 권력이라고, ‘짬짜미가 있다는 말도 하지만, 대체 한 두 번 책을 만지작거린 뒤 수천수백 권의 책 더미 속에서 어떻게 우수학술도서를 골라낸단 말인가.

 

 

이제 책은 천덕꾸러기로 전락했다. 책을 놓아둘 자리가 없는 아파트는 현대판 노마드의 텐트일 뿐이다. 어느 곳에 풀이 무성하게 자랐다는 소문에 서둘러 텐트를 걷는 노마드처럼, 춤추는 아파트 시세에 따라 수시로 짐을 싸는 존재들이 오늘날의 우리다. 그런 와중에 책만한 천덕꾸러기도 없다. 무겁지, 돈도 안 되지, 놓을 자리도 없지... 이삿짐 센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책짐이다. 그래서 이사철 아파트의 쓰레기장에는 책들이 수북수북 쌓이는 것이다.

 

 

그런데도 배운 도둑질이라고, 책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책을 내면 누군가에게 보여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사볼 이유는 없으니, 내 돈을 들여서라도 사서 보내주어야 한다. 요즘엔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먼저 물어본다. “내가 이러이러한 책을 냈는데, 한 부 주어도 되겠나?”라고. 인사치레겠지만, 그럴 경우 대부분 주세요!”라고 하지만, 속내는 믿을 수 없다. 아마도 50~60%는 쓰레기장으로 가거나, 라면 냄비 받침으로 쓰이리라 생각하면서도 배냇짓처럼헌사를 써서 건네곤 한다. 문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다. 요즘엔 우편으로 책을 부치는 일이 힘도 들지만,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더 힘 빠지는 경우는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다. 나보다 연상으로부터 반응 없음은 늙어 귀찮으니 그렇겠지하고 이해할 수 있으나, 동년배나 연하의 동업자들에게 반응이 없는 일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은 그럴 지도 모른다. ‘누가 그깟 책 보내라 했나?’ 그렇다. 그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책을 보내놓고 서운해 하는 내가 바보인지 모른다. 어쩜 가뜩이나 연구실도 좁고 집도 좁은데 책까지 보내왔으니, 투덜거리며 뜯지도 않은 채 던져 놓고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더 심한 추정을 해보자면, 발송인을 확인도 아니 한 채 아예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보내온 책이 어떻든 상대방이 고심참담 끝에 만들어, 정성스런 헌사와 함께 우편으로 보내온 선물이다. 학자가 자신의 저술을 보내는 행위는 적어도 당신은 내 공부를 이해하고 조언해줄만한 분으로 생각하기에 이 책을 보낸다는 영광스런 믿음을 전제로 한다. 한 손으로 밥을 떠 넣으며, 다른 한 손으론 SNS를 희롱하는 시절이다. 설사 방금 전 그 책을 쓰레기통에 쳐 박았다 해도, “선배, 좋은 책 잘 받았어요. 언제 그렇게 좋은 책을 내셨어요? 참 놀랍네요. 잘 읽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잠시 엄지 손가락 몇 번 움직여 무성의한 문구 하나 스마트폰으로 날리는 게 그리도 어려울까. 하기야 책을 받은 뒤 전화 통화를 해도, 직접 대면하고도, 모르는 척 하는 것이 요즘 세태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이제부터라도 어쭙잖은 책 내려 하지 말고, 잘 있는 산의 나무들이나 건사할 일이다.

Posted by kicho
알림2012. 11. 11. 16:22

 

 

---------내  용--------- 

1. 행사명 : 2012년 한국문예연구소 국제학술발표대회

 2. 주   제 : 영웅, 그 문학 속의 모습들

 3. 일   시 : 2012. 11. 23. (금)  10:00~18:00

 4. 장   소 : 숭실대학교 벤처중소기업센터 311호

 5. 주   최 :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6. 연락처 : 02)820-0326, 0846

 7. 발표내용

 

        *제1부               사회  허명숙(숭실대)

         1)  기조강연 : 영웅의 형상과 영웅대망의 사회--발표 소재영(숭실대)

         2)  한국 여신들의 영웅적 특성--발표 김나영(성신여대)/토론 양훈식(숭실대)

         3) 고전문학에 투영된 한국 여성영웅의 담론적 특성--발표 강명혜(강원대)/토론 윤세형(숭실대)

        4) 개화기문학에 나타난 영웅들--발표 홍순애(동덕여대)/토론 정영문(숭실대)

 

      *제2부                사회  허명숙(숭실대)

       1)  김훈 소설에 나타난 영웅 형상--발표 이경재(숭실대)/토론 이재홍(서강대)

       2)  論路翎小說中的英雄--발표 翟業軍(中國 南京大)/토론 김종성(숭실대)

       3)  일본문학에 나타난 영웅들--발표 니시오카 겐지(일본 후쿠오카 현립대)/토론 이시준(숭실대)

   

      *제3부   종합토론                    좌장  엄경희(숭실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