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0. 3. 30.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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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디아스포라 서정의 진수, 이 스따니슬라브 시집 출간!!!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카자흐스탄의 고려시인 이 스따니슬라브의 시집 <<모쁘르 마을에 대한 추억>>이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문예총서5로 발간되었다. 우리는 현지 김병학 시인의 유려한 필치로 번역된 이 시집을 통해 러시아어 권 고려인 서정의 높은 경지를 비로소 훔쳐볼 수 있게 되었다.

원작에는 시 제목대신 번호만 달려 있는 점이 특이한데, 번역자는 전체 67수의 시들을 4부로 나누었다. 제1부[되돌아가지는 못 하리 언젠가 두고 떠나온 해변으로], 제2부[초원에 피어난 진달래꽃], 제3부[안개 위의 영원한 꿈 마냥…], 제4부[바람에 흔들리는 이삭들] 등의 표제에서 보듯이 스따니슬라브의 시들에는 고려인 특유의 민족 정서가 디아스포라 의식과 어울려 차원 높은 서정으로 승화되어 있다. <시 23>을 보자.

 

조상들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라

시(詩)를 가지고서.

타향살이

힘들다 터져 나오는

흐느낌이나

울음이 아닌 시로써.

허나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땅이

어찌 타향이란 말인가?

또 어릴 적부터

어울려 함께 자란

사람들이

어이 타인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래도

여기 카자흐스탄 땅과

이 시구를 채우는

러시아 말에

용서를 구해야 하리.

조상들의 고향으로

나 돌아가고 싶어라

오직 시(詩)만 가지고서라도.

머나먼 고국에서

태어나 살아갈

그런 운명 나 받지 못했느니…

 

스따니슬라브는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 3세다. 러시아어를 모어(母語)로 받아 자라났지만, 고려 말도 제법 잘 한다. 고려인들 모두 “고려 말은 아무 쓸모도 없다”고 버렸지만, 그는 유독 고려 말에 집착을 갖고 있다. 이 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민족정신의 끈을 놓지 않은 그가 디아스포라의 시혼을 가꾸어 온 것은 당연하다. 그는 어쩌면 ‘고향 찾기’를 화두(話頭) 삼아 카자흐스탄의 광야에서 여전히 서사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고난의 삶, 사연 많은 디아스포라의 삶 자체를 주신 선조들께 그렇게 감격해 하는 것 같다”고 지적한 번역자 김병학 시인의 말이 정곡을 찔렀다고 할 수 있으리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유랑의 세월을 감내하고 있는 시인의 다음과 같은 말은 디아스포라의 초입에도 못 가 본 우리로서는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디아스포라는 누구나 고국과 연결되고 싶은 강한 열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디아스포라에게 고국이란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고국과 시를 통해 연결되는 기쁨은 다른 어떤 기쁨이나 행복과 비교할 수 없이 큰 것입니다. 무수한 역사적 비극과 비운을 이기고 살아온 재소 고려인의 후손으로서 저에게 고국은 무엇보다도 절실하고 뜨겁게 만나야 할 근원입니다.”<‘지은이의 머리말’에서>

 

스타니슬라브와 같은 해외의 피붙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강호제현의 일독을 권한다.

 

이 스따니슬라브, 김병학 역, <<모쁘르 마을에 대한 추억>>, 인터북스, 2010. 값 10,000원

Posted by kicho
출간소식2009. 9. 30.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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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학 디아스포라 에세이,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 사이에서』(서울, 인터북스, 2009) 가 한국문예연구소 문예총서 3으로 발간되었습니다!!!


  재소고려인들이 사는 나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에서 열여덟 해를 살아오고 있는 김병학 시인이 그동안 고려인들과 어울려 살면서 보고 느끼고 체험한 이야기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펴냈다. 9월 20일 도서출판 인터북스에서 발행한 김병학 디아스포라 에세이,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 사이에서』(서울, 인터북스, 2009)가 바로 그것이다.

  김 시인은 지난 1992년 카자흐스탄으로 건너가 우스또베광주한글학교 교사, 알마아타고려천산한글학교장, 알마틔대학교 한국어과 강사, 구소련 고려인들의 민족지 <고려일보> 기자 등을 역임했다. 이와 같은 독특한 경력이 말해주듯이 김 시인은 누구보다도 고려인들과 가까이 어울려 산 한국인이다. 그는 그렇게 고려인들 속에서 살면서 그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꾸준히 <고려일보>에 글로 남겼고 그 글들이 모여 오늘의 에세이가 되었다.

  책 머리말에서 저자는 “여기에 소개하고자 하는 글들은 필자가 중앙아시아에서 내디딘 조그만 발자취의 기록이다. 머나먼 중앙아시아에도 <고려일보>라는 모국어 신문이 있어 바람처럼 떠도는 삶의 노래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더욱이 필자는 그 신문사의 부름을 받아 두 번이나 기자로 일하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한데 모아놓고 보니 중앙아시아에 거주한 지 어느 덧 열여덟 해나 되는 필자의 개인사에서 가장 중요한 굽이 길을 <고려일보>라는 모국어신문사에서 편력했음을 깨닫는다.” 라고 고려일보에 대한 인연을 강조하고 있다.

  책은 크게 나누어 순수한 사념의 글, 고려인 ․ 고려일보 ․ 고려일보 기자에 대한 단상, 그림전시회나 음악공연 등을 감상하거나 취재한 글, 국제신문에 쓴 디아스포라 칼럼, 카자흐스탄 거주초기에 쓴 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든 글마다 고려인들과 맺은 저자의 깊은 고뇌와 끈끈한 애정이 배여 있어 이를 읽는 독자들은 가슴 시린 감동을 받을 것이다. 특히 강제이주세대 선배들을 기린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나 고려일보의 운명을 고민한 ‘과연 고려일보에 장래가 있는가?’, 그리고 사라져가는 세대들의 삶의 궤적을 하나하나 찾아 기록한 여러 글들에서 독자들은 저자의 고려인에 대한 애정과 사색의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고은 시인은 다음과 같이 이 에세이를 극찬하고 있다. “이곳의 여러 인연을 버리고 그곳에 가서 그곳의 사라져가는 삶의 자취들을 하나하나 지켜내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시인 김병학 형이 바로 그 사람이다. 이 김병학 디아스포라 에세이는 그래서 역사의 의미가 해체되어 가는 오늘 삶이 역사가 되고 역사가 삶이 된다는 진리를 번개쳐 보여주기에도 알맞다.

  나는 이 실기적(實記的) 에세이를 읽고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뿐 아니라 우리 한민족은 한반도 역내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저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에도 또 하나의 한민족으로 엄연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이 책 속에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연 이 김병학 디아스포라 에세이는 저자가 머리말에서 그렇게 썼듯이 “끊길 듯 끊기 지 않고 이어지는 그 시절의 고뇌와 보람의 흔적들이 자꾸만 넓은 세상과 소통시켜달라고 소리치는 것만 같다.”

  김 시인은 2005년에 시집 『천산에 올라』를, 2007년에 재소고려인 구전가요를 집대성한 『재소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 I ․ II』를 편찬해 국내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는 현재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문화와 언어를 보존하고 살리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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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9. 8. 23. 16:44
조선일보 기사보기


30년대 강제이주 이후 고려극장에서 공연한 한글대본 200여편 발굴 《춘향전》 《심청전》 《홍길동》…. 일제 강점기 중앙아시아에 끌려간 한인들이 고향 땅을 그리며 무대에 올린 우리 고전들이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국립 고려극장이 지난 80년간 우리 말로 무대에 올린 연극 대본 200여편과 공연 일정이 공개됐다. 한글로 쓰인 이 연극 대본 가운데는 우리 학계에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 많아 우리 문학·연극사 연구에 획기적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고려극장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한인들의 문화적 구심점 역할을 해온 곳이다. 조규익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장은 최근 알마티 고려극장을 방문, 극장 설립 이래 최근까지 공연된 연극 대본들을 정리·발간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고려극장은 알마티로 옮겨온 뒤, 한인과 러시아 극작가들의 창작 희곡·번역 희곡 등 200여편의 연극을 무대에 올려 왔다. 조 소장이 공개한 대본 목록에는 우리 고전과 역사 인물을 각색한 작품들이 가장 많았다. 《토끼전》(1959) 《장한몽》(1935) 《흥부와 놀부》(1946)와 김두칠의 《논개》(1962), 정동혁의 《온달전》(1972) 등이 대표적이다.


▲ 1956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올린 연극〈흥부와 놀부〉. 가운데 담뱃대를 들고선 이가 놀부 역을 맡은 인민배우 리 니꼴라이./최 아리따·김병학 제공

특히 1942년 태장춘(1911~1960)이 쓰고 공연한 《홍범도》는 1920년 봉오동전투의 주역이자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우상인 홍범도 장군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홍범도 장군은 만년에 카자흐스탄에서 극장 수위를 지내는 등 곤궁한 생활을 하다 1943년 세상을 떴다. 스탈린 치하인 1953년 셰익스피어의 고전 《오셀로》를 무대에 올린 것도 눈길을 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문학의 정수로 꼽히는 고리키의 《사람들》(1940)과 고골리의 《검찰관》(1952)과 함께 이념극으로 보이는 《동쪽의 빨치산》(1934) 《38선 이남》(1950) 《모란봉》(1962) 등도 무대에 올렸다.

고려극장은 한인 극작가·연출가들의 산실(産室)이었다. 그 가운데 태장춘은 《밭두렁》(1934), 《신 철산》(1935), 《노예들》(1937), 《행복한 사람들》(1938), 《생의 흐름》(1945), 《흥부와 놀부》, 《해방된 땅에서》(1948), 《노예들》(1948) 등 거의 해마다 신작을 발표한 고려극장의 주요 작가였다. 문세준·연선용·김기철·채영·이정림·김해운·이길수·최길춘·한진·최영근 등도 우리 말로 대본을 쓰고 공연한 예술가들이다. 조규익 소장은 "고려극장은 일제시대부터 현재까지 매년 우리 말로 연극 공연을 올려 온 유일한 해외단체"라면서 "이들이 올린 연극 대본은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던 지사들이나 고려인들의 삶을 다룬 역사적 기록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창고에 보관 중인 대본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7. 12. 20:53


까를라가쉬와 헤어진 우리는 한국식당 청기와에서 시장기를 지웠다. 더위에 지친 우리는 천산의 만년설이 잡힐 듯한 곳에 둥지를 틀고 있는 최석 시인을 만나기로 했다. 택시로 30분을 달려 도착한 곳에서 마중 나온 최 시인의 차를 만났고, 함께 하기로 연락된 리 스타니슬라브 시인, 문희권 선생 등을 만났다. 최 시인의 차로 20분 이상을 달려 올라간 산중턱에 빨간 지붕을 한 최 시인의 집이 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엔 과수원이, 저 멀리로 알마티 시가지가, 아득히 펼쳐져 있었다. 알마티 시가지 너머에는 보일락 말락 지평선이 그어져 있고, 발코니에서는 천산의 만년설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과연 신선이 깃들만한 곳. 아니 내 자신이 신선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매연에 절은 인세홍진(人世紅塵)의 추억이 먼 옛날의 일인 듯,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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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 시인 집 발코니에서 올려다 본 천산의 만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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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 시인 집 발코니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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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 시인 집 뜰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

그곳에서 만난 세 시인 모두 고려인 사회의 독특한 존재들이었다. 우선 최석 시인. 논산에서 태어난 그는 1987년부터 무크지『현실시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1989년 시집『작업일지』를 도서출판 청하에서 펴냈으며, 현재 카자흐스탄에서『고려문화』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중견시인이다.

 전남 신안 출생인 김병학 시인은 1992년 카자흐스탄으로 건너와 한글학교 교사, 대학 한국어과 강사, 고려일보 기자 등을 역임했고, 2005년 시집 『천산에 올라』를 도서출판 화남에서 펴냈으며, 2007년에는 『재소 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Ⅰ과 Ⅱ를 도서출판 화남에서 펴내는 등 카자흐스탄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자취를 발굴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1959년 우슈또베에서 고려인 3세로 출생한 리 스타니슬라브 시인. 그는 1985년 시집 『이랑』을 알마티에서 출판했고, 1997년 제2시집『별들은 재 속에서 간혹 노란색을 띤다』를 출간했으며, 1999년 카자흐스탄 공화국 11학년용 교과서에 그의 시가 수록되었고, 최근 러시아 문학잡지 『유노스찌/청춘』에 그의 시가 실리는 등 문학적 성가를 높이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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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석 시인 집 발코니에 선 세 시인-왼쪽부터 최 시인, 리 스타니슬라브 시인, 김병학 시인>

보드카의 주향 속에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화의 미래에 관한 이들의 담론들은 무르익어 갔다. 다민족 사회의 소수자인 고려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 한글로 문학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려인들끼리의 갈등을 어떻게 해소해나갈 것인가, 등등. 천산의 만년설은 말없이 굽어보고 있는데, 민족의 미래를 놓고 토론하는 이들의 가슴은 장작불마냥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불꽃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드는 어둠을 밝히고, 중앙아시아의 평원을 고독하게 걸어가는 고려인들의 앞길을 이끄는 향도가 될 것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9. 7. 12. 20:34
 

알마티 통신 1 : 알마티의 매연과 천산의 만년설


2009년 7월 11일. 알마티에서의 첫날. 어딜 가나 시내에는 푸른 숲이 가득 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수백 년의 연륜을 족히 드러내고 있었다. 울창한 숲을 보고 깨끗한 공기를 상상했으나, 시가지에 깔린 공기는 매연에 쩔어 있었다. 들숨 가득 탁한 공기가 폐부를 찔러댔다. 그나마 고개를 들 때마다 압도해오는 천산의 만년설 덕분에 숨 막히는 매연으로부터 겨우 놓여날 수 있었다. 뜨람바이를 타도, 버스를 타도, 택시를 타도, 모든 공간엔 여지없이 매연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스팔트에서 튀어오르는 열기와 매연이 어우러져 채워진 욕조를 유영하듯 힘겹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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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의 도로와 멀리 보이는 천산의 만년설>

김병학 시인의 안내로 햇살에 달구어진 시내를 책 읽듯 훑어나갔다. 카자흐스탄 첫 방문, 알마티 첫 방문. 모든 것들이 생소하면서도 신기했다. 구소련의 문화적 동질성에 갇혀 있었건만, 러시아에서와는 다른 느낌을 주는 게 신기했다. 걷는 동안 러시아 정교회 건물을 찾아 이곳 사람들의 경건한 신심을 확인했고, 시장을 찾아 삶의 박동도 느꼈다. 시내 한복판에 ‘푸른시장(질료녜 바자르)’이란 이름의 재래시장이 있었다. 그곳에서 81세의 고려인 서올랴 할머니를 만났다. 아직도 고운 자태를 잃지 않은 고려인 할망은 올망졸망 찬거리들과 각종 양념들을 늘어놓고 손님들의 눈치를 살피며 앉아 있었다. ‘장사가 안 된다’고 혀를 차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표정에 적이 안도가 되었다. 심심하던 차였는가 은근히 잡으려는 할망을 뒤로 하고 2․8공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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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시 러시아 정교회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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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정교회 제대 뒤의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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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 질료녜 바자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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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료녜 바자르의 서올랴 할머니>

그곳엔 거대한 조형물이 공간을 압도하고 있었다. 적진을 향해 무기를 들고 돌진하는 군인들이었다. 그 밑의 글자들이 걸작이었다. “위대한 러시아! 모스크바를 뒤로 물러설 곳이 없다”는 뜻의 문구였다. 모스크바를 죽음으로 지키겠다는 속뜻일 것이다. 그야말로 구소련의 살기 어린 구호였다. 그 옆쪽에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의 조형물들이 붙여져 있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용기 있게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영원한 영광 있으라!”는 구호가 보는 이의 내면을 압도해왔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흔히 사용하던 선동의 구호와 문구들을 알마티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의 전쟁기념관을 그득 채우고 있던 선동의 모티프가 이곳에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토요일이기 때문일까. 결혼하는 커플들이 많았다. 결혼식을 마친 커플들은 이곳 광장의 ‘꺼지지 않는 불꽃’에 헌화하는 것이 관례란다. 하얀색 예복을 입은 신부들이 그림처럼 아름다웠고, 그들이 들고 있는 백합 다발은 순결한 영혼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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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 2-8 공원의 조형물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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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의 전통악기 돈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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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마티 악기 박물관의 악사 까를라가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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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정교회 앞뜰의 아름다운 신부>
 
러시아 정교회 안에도 결혼식을 마친 커플, 결혼식을 올릴 커플, 그들의 가족 친지 친구들로 만원이었다. 밀려드는 인파를 피해 찾은 곳은 공원 한 켠의 악기 박물관. 그곳에서 카자흐스탄 민족의 음악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의 비파 비스름한 카자흐스탄 전통악기 돔브라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악기들을 본 다음 문을 나서려는데 우리를 잡는 손길이 있었다. 참하게 생긴 카자흐스탄 아가씨가 우리를 위해 직접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겠단다. 카자흐스탄 돈 200원을 투자하여 한동안 애상적인 분위기에 젖어들게 되었다. 노래를 끝낸 그녀는 ‘까를라가쉬’라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제비’라는 뜻을 갖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피곤하지만, 카자흐스탄과의  의미있는 첫 만남이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