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1. 5. 22. 22:13

 

2021. 5. 20. 오후 2. ‘월곡고려인문화관의 감격스런 개관식이 열렸습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월곡동 주택가 한 복판에 숨듯이 자리한 문화관의 개관식에 다녀왔습니다. 광산구청에 소속된 문화관은 김병학 관장이 25년 간 중앙아시아에 체류하면서 모은, 고려인 관련 역사문화자료들을 모태로 이루어진 공간입니다. 냉전 종식 이후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을 포함한 해외 한인들은 그들의 조국 대한민국으로 밀려들고 있지만, 정부는 물론 우리의 지식사회는 그들의 역사와 문화를 소중히 여기고 보존하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김병학 관장 같은 선각자가 없었다면, 이곳에서도 이런 쾌거는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서 들은 바에 의하면, 광산구에는 현재 6000~7000명의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려인들 뿐 아니라 10여개 종족이 넘는 소수민족 출신들도 함께 섞여 있다는 것이니, 이 작은 지역은 다양한 인종의 전시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잠시 동안 거리를 걷다보면, 여러 나라의 글자들로 이루어진 간판들이 예사롭지 않고 식당이나 까페에 앉아 있는 손님들의 면면 또한 낯설고 신기하기만 합니다. 단순히 고려인들 뿐 아니라 그들 나라의 원주민들도 고려인들과 함께 들어와 이곳에 둥지를 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김병학 관장. 만나던 첫날부터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 생각했고, 교유를 지속해온 15년 간 그 생각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저는 고전문학을 연구강의해 오던 중 중국 조선족의 문학과 재미한인문학을 만났고, 그 연장선에서 구소련 고려인들의 존재와 문학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지답사의 필요에 의해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을 찾게 되었고, 그 초입에서 만난 인사가 바로 김병학 관장입니다. 2007년 그를 만난 뒤로 우리는 지금까지 15년간 담담한 관계로 우정을 나누어 오는 사이입니다. 그의 자산은 겸손과 집념입니다. 이야기를 나눠보면 지극히 겸손하고 소박합니다. 그러나 일단 마음을 먹으면 그만 두지 않는 투지와 집념이 누구 못지않게 강합니다. 사실 중앙아시아처럼 한국 사람이 마음 붙이고 살기에 척박한 지역은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5년을 그곳에서 지내왔습니다. 웬만하면 중간에 그만 두고 뛰쳐나올 수도 있었으련만, 왜 그는 투사처럼 그 긴 세월을 그곳에서 보냈을까요?

 

1992년 민간한글학교 교사로 카자흐스탄에 처음 들어갔고, 1995-1996, 2000-2003년 등 두 차례에 걸쳐 재소 고려인 한글신문 <고려일보>의 기자로 일했으며, 알마틔 국립대학교 한국어과 강사, 카자흐스탄 한국문화센터 소장 등으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냉전체제가 흔들리던 1980년대 말부터 구소련 고려인 동포들 사이에서 잃[]어버린 모국어를 부흥시키자는 운동이 크게 일어났고, 그에 부응하여 광주와 전남 지역의 유지들이 기금을 모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러시아에 각각 두 개씩의 민간한글학교를 세웠는데, 그것들이 그에게 중앙아시아 체류의 계기를 마련해주었던 것입니다. 그 때 그는 우리나라 바깥에서 우리의 전통과 언어를 지키고 있는 그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으로 민간한글학교 교사에 자원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김 관장의 중앙아시아 생활은 시작된 것입니다.

 

그가 첫발을 내디딘 곳은 카자흐스탄의 우쉬또베 마을이었습니다. 이곳은 1937년 강제이주 때 고려인들이 처음으로 짐짝처럼 실려와 부려진 곳이었습니다. 첫 도착자들의 공동묘지가 아직도 처절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곳에서 고려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면서 고려인 사회의 어른들로부터 가슴 아픈 역사적 사실들을 얻어 들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런 과정에서 김 관장은 고려인의 역사와 슬픔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그의 첫 관심사는 고려인들의 언어나 문화였으나, 점차 강제이주를 중심으로 고려인들이 당한 역사적 시련에 공감하게 되었고, 그와 함께 그곳에서 고려인과 공존하고 있는 많은 인종들의 삶 또한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역사문화종교가 다른 민족들이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모습을 보면서 김 관장은 새로운 삶의 양식과 공존의 원리를 배우게 되었다고 술회합니다.

 

그는 고려인들의 언어문화역사를 탐구해오는 한편 시와 산문을 쓰기 시작하면서 시인과 작가로 활동영역을 넓혔고, 러시아 말로 쓰인 시나 산문들을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기억나는 것들만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병학 지음, <<카자흐스탄의 고려인들 사이에서>>,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문예총서 3, 인터북스, 2009.

아바이, 김병학 역, <<황금천막에서 부르는 노래>>, 인터북스, 2010.

이 스따니슬라브, 김병학 역, <<모쁘르 마을에 대한 추억>>,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문예총서 5, 인터북스, 2010.

김병학 엮음, <<한진전집>>,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수고 문예총서 12, 인터북스, 2011.

조규익김병학,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작가 한진의 삶과 문학>>, 글누림, 2013.

김병학 편, <<김해운 희곡집>>,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학술자료총서 4, 학고방. 2017.

김경천, 김병학유가이 콘스탄틴 공역, <<경천아일록 읽기-김경천 장군의 전설적 민족해방 투쟁론(한글판러시아어판 합본>>, 숭실대학교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학술자료총서 5, 학고방 | 2019.

 

이제 막 개관된 월곡고려인문화관은 우리 동포가 해외로 나가 보존해오던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자료의 형태로 갖고 돌아와, 이 땅의 우리에게 보여주는 보물창고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다른 지역의 동포들을 포함한 해외 동포 문학관으로 확대될 단초 역할을 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월곡고려인문화관과 김병학 관장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021. 5. 20.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8. 28. 20:40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나무들의 바다, 타이가(taiga)를 보았네!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2 

                                                                                              

                                                                                                                조규익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블라디보스톡의 금각만


전망대에서 러시아 모델 아가씨와


역사에서 바라본 철길


열차 침대칸에서 조갑상, 블라디미르 김


차창으로 내다 본 시베리아 산하


열차 객실에서


객실에서의 첫 파티


달리는 차창으로 내다 본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


잠시 열차에서 내려


열차 식당 칸에서의 점심상

 

 

724일 저녁 7. 블라디보스톡 역에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실었다. 바리바리 채워 넣은 캐리어가 몸에 겨웠다. 때마침 퍼부어대는 소나기와, 바짝 닥쳐온 열차 출발시각에 온몸은 땀과 비로 흥건해졌다. 시간만 되면 무정하게 떠나버릴 것 같은 러시아 승무원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우리를 겁먹게 했다.

사람들의 아우성 속에 드높은 승차대를 올라서니 날씬한 아가씨 하나 조심조심 지날만한 통로가 몹시 비좁아 놀라웠고, 가까스로 찾아 들어간 4인용 객실의 협소함은 더욱 놀라웠다. 땀과 비에 흠뻑 젖은 옷이 온몸에 달라붙은 것도 모르고 가까스로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니, ‘~!’ 소리를 내며 열차가 움직였다. 출발 뒤 30분이나 지나야 에어컨이 가동된다는 말에 땀은 더 흘렀다.

비새고 바람 통하는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부려졌을 80년 전 고려인들의 고통을 맛보라는 하늘의 뜻이었을까. 때마침 퍼부은 소나기의 의미를 해석하기가 쉽지 않았다

 


과연 우린 뭘 회상했어야 하는 걸까?

 

비와 땀으로 축축해진 옷가지들을 대충 벗어 침상 밑 작은 공간에 숨기고 나니, 이 속에서 열흘을 견뎌야 할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누거(陋居)이긴 하나 자유자재로 몸을 펼 수 있고, 옷을 벗어 빨래 바구니에 함부로 내던질 수 있으며, 땀 흐를 새 없이 씻어낼 수 있는 공간 속에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고행의 공간을 함께 할 블라지미르 김(우즈베키스탄 거주/소설가레닌기치 전 편집국장), 조갑상(소설가/경성대학교 명예교수), 김병학(시인/전남대 연구원)’ 등 저마다 탁월한 스토리와 히스토리를 지닌 방원(房員)들의 얼굴에도 잠시 걱정이 흘렀다. 정말로 출발 후 30분이나 되어서야 에어컨이 가동되었고, 에어컨이 가동되고 십여 분이 지나서야 축축함이 가시기 시작했다.

사전 교육에서 누차 공지된 바와 같이 무엇보다 화장실과 씻을 물, 끼니 등에 관한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모든 걸 그러려니!’하고 넘기라는 블라디보스톡 가이드 담양 댁의 말이 잊어서는 안 될 금과옥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방원들이 정들기 시작했고, 오고 가는 보드카와 사마르칸트 꼬냑의 향기 속에 열차 안의 삶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 넓은 땅이다. ‘유럽과 극동두 대륙에 걸치는 광활한 땅덩어리가 부러운 러시아였다. 1860년 북경조약으로 러시아가 차지하게 된 대초원 연해주. 태평양에 연하여 동방의 진주로 불려 온 천혜의 미항 블라디보스톡이 그 주도(州都)였다. 연해주를 벗어나면서 펼쳐지는 타이가(taiga)의 자작나무와 편백의 수해(樹海)가 심안(心眼)에 낀 티끌을 청소해주고, 몇 시간 만에 한 번씩 볼까말까 한 인가(人家)와 작은 마을들이 마음 한 구석에 작은 모닥불을 피워 올렸다. 이토록 드넓은 땅에 인구는 적으니, 무궁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나라가 바로 러시아 아닌가.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9,288km! 우리가 카자흐스탄 열차로 갈아타야 하는 노보시비르스크까지 50개에 육박하는 수의 역들을 지나야 한다. 그 가운데 규모가 비교적 크거나 일정시간 정차하는 역들은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 우글로바야(Uglovaya), 우스리스크(Ussuriysk), 시비르쩨보(Sibirtsevo), 무치나야(Muchnaya), 스빠스크-다이니(Spassk-Dalny), 루지노(Ruzhino), 다이녜레젠스크(Dalnerechensk), 루쳬고르스크(Luchegorsk), 비낀(Bikin), 베아젬스카야(Vyazemskaya), 하바로프스크(Khabarovsk), 비레비잔(Birobidzhan), 오블루치에(Obluchye), 아르하라(Arkhara), 부레야(Bureya), 자빗따야(Zavitaya), 벨로고르스크(Belogorsk), 스바보드니(Svobodny), 레자나야(Ledyanaya), 슈마노브스까야(Shimanovskaya), 뜨그다(Tigda), 마다가치(Magdagachi), 스카보로지나(Skovorodino), 예로페이 파블로비치(Yerofei Pavlovich), 아마자르(Amazar), 모고차(Mogocha), 쳬르니셰브스키-자바이깔스키(Chernyshevsky-Zabaikalski), 까림스카야(Karaymskaya), 치따(Chita), 힐노크(Khilok), 페트로브스크 자바이칼스키(Petrovsk-Zabaykalsky), 울란우데(Ulan-Ude), 바이칼스크(Baykalsk), 슬루잔까(Slyudyanka), 이르쿠츠크(Irkutsk), 앙가르스크(Angarsk), 지마(Zima), 뚤른(Tulun), 니즈녜우진스크(Nizhneudinsk), 타이셰트(Tayshet), 레쇼티(Reshoti), 일란스카야(Ilanskaya), 깐스크-예니셰이스키(Kansk-Yeniseiski), 크라스노야르스크(Krasnoyarsk), 아친스크(Achinsk), 보고똘(Bogotol), 타이가(Taiga), 유르가(Yurga), 노보시비르스크(Novosibirsk) 등 일일이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무엇보다 끼릴 문자로 빽빽하게 적혀 있는 역명들의 생소함이 기를 질리게 했다.

 

10~20분씩 잠시 쉬어가는 역들의 앞마당엔 동네 아줌마들의 벼룩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루 두 끼씩이나 각자 해결해야 할 승객들에게 싱싱한 먹거리를 제공하는 아줌마들의 눈빛과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빵과 물고기, 야채와 과일, 꿀과 화분 등 다종 다량의 음식물들이 좌판에 제법 쌓여 있기도 하고 팔에 걸고 다니는 바구니에 그들먹하게 들어 있기도 했다. 아주 가끔씩은 잠시 정차되어 있는 열차 안으로 들어와 물건을 팔기도 하고, 중앙아시아로 넘어가는 길목에서는 환전상도 찾아와 돈을 바꾸라고 채근했다.

차창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나무숲이 지나고, 약간 험한 산세가 나타나는가 했더니 큰 바다 같은 호수가 눈앞에 닥친다. 바이칼(Baykal)이었다!<계속>


열차에서 내다 본 시베리아 산간의 소도시


시베리아의 산간 마을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


달리는 열차에서 내다 본 시베리아의 일몰


작은 역에서 내려 차장과 함께


하바로프스크 역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하바로프스크 역에서 백규


하바로프스크 역에 내린 일행들


끝없는 길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7. 8. 10. 16:33

  연해주에 찍힌 고려인들의 발자국

-고려인들의 한이 서린 산하를 지나며.../1

 

                                                                                         조규익                               

 


라즈돌노에 역사(정면)


라즈돌노에 역사(측면)


라즈돌노에 역사 내부(매표구)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 1년간 거주했던 집


표지판


고려인문화센터에서의 진혼문화제


고려인문화센터에서의 진혼문화제


아리랑가무단 단장 발레리아(오른쪽), 발렌찐


오딧세이 참가 명찰

 

 

고려인들 아니 고려인들의 문학을 학문적 대상으로 만난 지 10. 중국의 개방과 동시에 조선족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고, 미국에 체류하는 기회에 재미한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으며, 정말 우연한 기회에 구소련의 고려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났다. 세상사 대부분은 필연을 내포한 우연의 소산이라고 하는데, 내가 고려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만난 것도 어떤 필연적인 힘의 시킴이라 할 수 있을까.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이전까지를 주로 더듬는고전문학도로 살아오면서 잘못된 역사의 파생물이나 식민주의의 희생자들로만 생각하던 재외동포들을 만나면서 내 시야는 급격하게 넓어지기 시작했다. 왜 제 나라 땅에서 살지 못하고 뿌리 뽑힌 잡초 신세로 황량한 세상을 떠돌아 다녀야 했는지, 비록 황무지라 해도 뿌리 내리기가 어찌 그리도 어려웠으며, 이제 할아버지의 나라가 제법 먹고 살만하게 되었음에도 왜 그들의 디아스포라(diaspora)는 끝날 줄 모르는지 등등. 그간 품고 있던 여러 문제들을 풀어볼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19379월부터 12월까지 자행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고려인강제이주80주년기념사업회와 국제한민족재단이 마련한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 회상열차에 동승하게 된 것이다. 고려인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주축을 이루고, 현지 고려인들 몇 분도 합류하게 되었다.

 

***

 

2017723일 아침 7. 인천공항 출국장에는 푸른 색 유니폼을 입은 80여명의 각계각층 희망 대장정대원들이 상기된 얼굴로 모여 있었다. 대한항공 KE981편으로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경. 7월 하순의 뜨거운 태양이 러시아 동진의 상징적 공간인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톡을 달구고 있었다. ‘동방을 지배하라는 뜻을 지닌, 태평양 쪽 유일의 부동항(不凍港) 블라디보스톡은 식민시대 고려인들의 집거지 신한촌을 품고 있었다. 악랄한 식민통치를 피해 몰려든 공간. 그 분들이 이곳에서 독립의 의지를 불태운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자신들의 고국, 자신들의 고향에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비교적 안전한 이곳에서 일제와 싸울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이었다.

 

 블라디보스톡에 여장을 풀기 전 우리는 먼저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이자 고려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공간 우수리스크로 달렸다. 항일운동의 별 최재형 선생의 유택이 남아 있고, 고려인문화센터가 살아 움직이는 곳이 우수리스크였다. 가는 길에 강제이주 첫 출발역인 라즈돌노에(Razdol’noe)역을 잠시 보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톡역과 함께 수만의 고려인들이 짐짝처럼 열차에 실린 곳. 지금은 역사(驛舍)만 덩그러니 남은 그곳엔 겁에 질린 고려인들의 한숨과 비명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빙 둘러 수이푼(綏芬河, Suifun)강의 지류가 흐르고, 그 앞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철로가 놓여 있었으며, 그 철로를 짓누르며 엄청난 길이의 열차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驛舍)는 텅 비어 있었고, 매표소도 굳게 닫혀 그 날의 일을 말해주려 하지 않았다. 18694, 처음으로 이주민 10가구가 정착하면서 이룩한 육성촌(六城村). 이제 살만하게 되었다고 안도하던 이들이 날 벼락같은 명령서 한 장에 마을 앞의 역사로 끌려나온 것이다 1937년9월 하순에 시작되어 12월까지 계속된 고려인 강제이주.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떠올리게 하는 정치적 폭행이자 인류사의 기록적인 만행이었다. '고려인들이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여 간첩행위를 벌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그러한 만행의 명분이었지만, 이면적으로는 일본에 대한 스탈린의 공포감과 함께 자신들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외모의 고려인에 대한 복합심리가 작용한 정치적 편견의 소산이었다. 탈식민 시대에 지향해야 할 노선을 식민시대의 유적으로부터 확인하고자 한 것이 함께 대장정에 나선 지식인들의 일치된 인식이었다. 역사 근처에 김정일의 생가가 있다거나, 1928년 7월 소련으로 망명한 포석 조명희(趙明熙, 1894~1938)가 교사로 활동하던 학교가 남아 있다는 등의 말도 들려 왔지만, 이번엔 중앙아시아로 끌려간 무명의 고려인들만 생각하기로 했다.

 

 라즈돌노에 역으로부터 한참을 달려 우수리스크에 도착했고, 항일투사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4월까지 거주하던 주택에 들렀다. 몇 년 전 왔을 때와 달리, 리모델링 공사 중인 건물 자체는 물론 앞 뒤 진입로와 하수도 등 대대적인 토목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일제에 의해 원통하게 죽음을 당한 최재형 선생의 혼이 편안하게 머물 만큼 제대로 집을 다듬고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장대 같은 러시아 인부들의 손놀림이 미덥지 않았다. 무엇보다 최재형 선생의 뜻이 살아날 수 있을지 의문이어서 걱정스러웠다. 공사 중인 집안으로 들어서자 특이한 페치카를 비롯 넓지 않은 방들이 당시의 삶을 증언하듯 우리를 맞았다. 성공한 사업가로서 이 지역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선생의 유택은 거사 지역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 안중근 의사가 머물던 공간이기도 했다. 내년쯤이면 우선 선생의 유품과 자료들을 품은 의미있는 공간으로 재탄생될 것으로 보였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신경을 쓴 흔적은 외벽에 부착된 팻말("최재형의 집")이 유일했다. 과연 이 집이 외국인의 손에 넘어가지 않고 독립운동가의 혼을 보존하고 후세들에게 우리의 민족혼을 깨우치는 표본으로 오롯이 남을 것인가. 

  

서둘러 그곳을 떠난 우리가 도착한 곳은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최재형 선생의 유택을 떠나 문화센터에 도착하기까지 버스로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큰 공연장과 유물 전시실 등이 새로 생겨 전체적으로 짜임새와 규모를 갖춘 것은 몇 년 전과 달라진 점이었다. 그곳에 '고려인을 위한 진혼'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진혼제는 여러 예술장르들로 짜인 의식이었다. 김 발레리아 부부가 이끄는 아리랑가무단이 무대예술을 통해 러시아에 뿌리 내린 민족미학을 보여주었다. 꽃 같은 소녀들의 노래와 춤,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의 흘러간 노래들이 우리 시대 민족문화운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었다. 고려인들이 이 사회에서 식민시대 타자(他者)의 입장을 아직은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재현된 과거의 예술은 조만간 그런 굴레를 극복하게 하는 신비의 명약일 수도 있으리라. 고려인 남녀 노인들의 합창과 젊은 아리랑 가무단의 춤과 노래는 풍성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네 전통 춤사위가 북국의 빠른 율동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고 끈질기게 유지되는 모습이 눈물겨웠다. 아리랑 가무단의 발레리아 단장과 그 남편 발렌찐, 그리고 그들의 예쁜 딸이자 리드싱어인 악사나가 여전한 모습으로 고려인 공동체의 문화를 지탱해나가는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독립운동에 나선 의병들의 활동 공간이었고, 후에 임시정부로 변신한 대한국민회의 건물이 살아 있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대표로 파견되었던 독립운동가 이상설의 유허(遺墟)가 있는 곳, 우수리스크. 전통예술 같은 소프트 문화를 통해 민족 정체성의 유지가 가능할 수도 있음을 느끼게 해준 공간이었다. 

 

 

***

 

우수리스크로부터 2시간 가까이 걸려 블라디보스톡의 현대호텔에 도착했다. 갓 수인사를 끝낸 룸메이트 손진홍 선생과 함께 김병학 선생의 호출에 이끌려 두 분의 블라디미르 김 선생들을 만났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블라디미르 선생은 이미 10년 가까이 교분을 유지해오고 있으며, 광주의 고려인마을에서 오신 또 다른 블라디미르 선생은 초면이었으나, 모두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표본으로 삼을만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열차 여행 내내 한국인 참가자들에게 고려인들의 삶과 역사를 들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우즈벡 블라디미르 선생의 톤 높은 입담에는 자신의 부모가 겪은 강제이주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 흥분이 가득 배어 있었다. 이렇게 대장정의 첫날 밤, 원동의 중심 블라디보스톡에서 우리는 보드카 한 잔으로 결의를 다지게 되었던 것이다.

724,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기 전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의 자취를 찾는 일이 급했다. 최초의 재외동포 집거지이자 애국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던 신한촌은 우거진 나무숲과 잡초, 풍상에 낡아가는 러시아인들의 나지막한 아파트들로 휩싸여 물리적 자취가 묘연했다. 1920년 신한촌 사건과 4월 참변으로 대량학살을 당한 고려인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이었지만, 우뚝 솟은 세 개의 돌기둥과 작은 돌들로 구성된 기념비만이 그곳의 역사성을 간신히 보여주고 있었다. 누군가는 큰 돌기둥들이 하늘바람 혹은 남한북한해외동포를 상징한다 하나, 해석은 자유이리라. 무엇보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리지 않은 비석이 특이하고 의미심장했다. 졸지에 수만리 타국으로 쫓겨난 고려인들의 심정을 문장으로 쓴들 제대로 쓸 수 있을 것이며, 그림으로 그린들 제대로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차라리 흰 돌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나으리라. 그것만이 그 시절 고려인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일이 될 수 있으리라.

관리들의 착취로 농민반란이 빈발하고, 살기 어려워진 백성들이 유리걸식하며 떠돌던 조선 왕조 말기, 한반도의 지근 블라디보스톡에 한인들이 들어오면서 신한촌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인들의 이주가 시작된 1863년부터였다. 그로부터 삶을 이어가던 고려인들이 전대미문의 시련에 말려든 것이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이었다. 강제이주에 따라 이곳의 신한촌도 고려인들의 자취도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소련이 붕괴되고 난 19998,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이 기념비는 건립되었다.

 

기념비로부터 샛길을 따라 내려가니, 러시아인들의 아파트가 나타났고, 그로부터 바다 쪽으로 이어진 경사면에서는 옛 주택들이 막 철거되고 있었다. 때마침 고려인 거주 지역의 마지막 증거인 철제 도로 표지판이 젊은 인부의 손에 의해 떨어져 나가는 순간이었다. ‘서울 거리라는 선명한 글자들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했다. 모르는 척 기다리다가, 쓰레기로 버리거든 주어올 것을. 갈 길이 바쁜 우리가 그것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주인에게 요청하니,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우리가 갖고 싶어 하는 것으로 미루어 값나가는 물건으로 생각한 것이었을까. 젊디젊은 주인 녀석의 약삭빠른 계산속이 얄미웠다. 나동그라진 표지판과 함께 그 공간에서 이루어졌을 우리 민족의 역사는 이제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그 일로 인해 강제이주 고려인들의 고통을 추체험하겠노라 나선 우리의 노정 또한 알량한 역사지식이나 선입견을 모두 버린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 나름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계속>


신한촌 기념비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대원들


서울의 거리 철거 광경


'서울스카야(서울의 거리)' 표지판


신한촌 주변의 러시아인들의 아파트


블라디보스톡 혁명의 광장


고려인마을 기념물


블라디보스톡 전망대, 끼릴문자를 만든 선교사 상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금각만


현대호텔 근처의 러시아정교회 성당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0. 9. 11:32

 


고려극장 창고에 쌓인 연극대본들

 

 


고려극장 창고에 쌓인 연극대본들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심청전의 포스터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상속자들의 포스터

 

 

 

 

치원(致遠)의 성과

-조규익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 2013)을 읽고-

 

 

                                                                                                                            이경재(숭실대 국문과 교수)

 

 

 

1. 학문이 다다른 곳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읽으면서, 제갈공명이 쉰 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 여덟 살이었던 아들에게 남긴 계자서가 생각났다. 계자서의 핵심 내용은 주지하다시피 담박명지(淡泊明志), 영정치원(寧靜致遠)’라는 여덟 글자로 압축된다. 이 중에서도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치원이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만든다. ‘먼 곳에 도달한다는 뜻의 치원은 남들보다 크고 무겁고 많은 성취를 이룬다는 뜻이다. 평생 한 동네에 살면서 산 너머의 이웃 동네를 둘러보는 일도 어려웠을 옛사람의 관념을 드러내는 이 말은, 자신이 갈 방향을 뚜렷하게 정한 채 그 길을 꾸준하게 가면 마침내 먼 곳에 도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저서야말로 필자가 초인적 노력의 결과 다다른 학문적 먼 곳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조규익 교수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은 꼴호즈나 솝호스 등 CIS 지역 고려인들의 생산 및 생활 공동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자생적 소인예술단과 고려극장으로 대표되던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을 살펴보았다. 소인예술단은 꼴호즈 등 집단농장에서 운영하던 아마추어 단체이고, 전문예술단은 국가에서 설립 운영하던 예술인 집단으로 중앙아시아 고려인 사회에서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창립되어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고려극장이 유일하다. 구소련 체제의 대중예술은 전문예술과 소인예술의 분담과 협업으로 지탱되어 왔다. 인적 차원에서나 예술적 차원에서 전문예술단의 근원은 소인예술단에 있었으나, 상호 보완의 역할을 수행하는 단계에 이르자 양자는 구소련의 공연예술을 완성시키는 두 축으로 정립되었다.

 

원래 소인예술단의 경우 연극, 노래, 춤 등이 주된 장르였고, 전문예술단인 고려극장의 경우 연극 전문으로 출발했다가 공연예술로서의 노래와 춤이 추가되었다. 고된 생산의 현장에서 괴로움을 달래준 동시에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시켜 준 무명 예술인 집단이 소인예술단이었고,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민족의 애환을 대신 표출함으로써 고려인들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킨 예술인 집단이 전문예술단으로서의 고려극장인 것이다.

 

고려극장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당시 극작가들은 민족정신의 유지와 확인이라는 현실적 이유 때문에 고전작품들을 연극의 소재로 많이 다루었다. 창작극 외에 그들이 집착한 분야는 고전의 각색이었다. 고전의 각색은 민족정신이나 민족어의 보존과 전승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다. 결국 고려극장은 고려인들의 정체성을 함양시켜온, 일종의 민족 정체성 고양의 메카역할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수많은 극작가들을 등장시켜 활약하게 한 일은 고려극장의 가장 빛나는 공적이다. 그 가운데 극장의 초석을 놓은 인물은 연성용과 태장춘이었고, 최고의 연극미학을 보여준 인물은 한진이다. 한진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집요한 바가 있어,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 발간된 거의 동시기에 <<한진의 삶과 문학>>(글누림, 2013)이라는 책을 김병학 선생과 공저로 출판하였다.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

 

 

 

 

2. 지속과 변이

 

자료는 말한다. 이 명제는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다. 자료는 연구자의 문제의식과 만났을 때, 비로소 고유의 목소리를 내는 까닭이다. 이만한 두께의 단일저서가 그에 걸맞은 하나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는 힘들다. 이 작품이 고려인들의 문학을 바라보는 기본 관점은 지속과 변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인들은 원동지역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타율적 디아스포라들이었다. 현실적으로는 구소련 혹은 중앙아시아 국민의 일원이었고, 정서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이중적 존재들이었다. 구소련 시절에는 구소련의 다수민족에 의해, 공화국의 독립 이후에는 공화국의 주도 민족에 의해, 힘들게 찾아온 할아버지의 나라에서는 고국의 사람들에 의해 3중의 타자 체험을 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은 현실적으로는 구소련 혹은 중앙아시아 국민의 일원이었고, 정서적으로는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두 방향으로부터 상반되는 인력을 느끼는 존재들이었다. 노래나 춤을 통해 표출되는 이념 지향적 의식이나 디아스포라 의식은 상반되는 인력에 상응하는 주제의식이다.

 

스탈린은 러시아 중심의 언어 예술 정책을 폄으로써 고려인을 포함한 비 러시아인들은 예술의 창작과 향유에서 큰 난관에 봉착하였다. “스탈린의 폭압적인 동화정책에 어쩔 수 없이 그 무거운 민족의 표지를 내려놓”(5)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려인들은 자민족 중심의 전통 형식 고수라는 구심력과 소련의 사회주의 추구라는 원심력을 적절히 조정한 미학을 고안했다. 그로부터 나온 것들이 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노래들의 음곡에 사회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노랫말을 올려 부른, 새로운 스타일의 노래들이다. 이를 통해 집단주의라는 사회주의 통치이념의 폭력적 군림에 순응하는 방법으로 민족 정서의 실낱같은 생명만큼은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언어와 문화의 동화정책을 밀어붙인 스탈린 체제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이 우리 전통예술의 한 부분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규정 덕분이다.

 

고려인들의 노래는 우리나라 전통 민요의 운율과 사설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경우도 있고, 노랫말을 러시아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맞게 새로 만든 것들도 있다. 전자를 지속의 측면에서 후자를 변이의 측면에서 각각 설명할 수 있다. 지속의 측면은 고려인 혹은 한인이라는 민족의 정체성이 유지되는 한 변할 수 없는 불변의 정서적 형태적 전승소이며, 변이의 측면은 적응의 현실적 필요에 의해 조정될 수밖에 없는 가변적 요소다. 이처럼 고려인들이 갖고 있던 전통 노래의 관습적 레퍼터리는 새로운 정착지의 생경한 분위기와 충돌을 일으키며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조정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고려인들의 노래문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다문화 접변 현상이다. 고려인들이 접변을 통해 새로운 공연예술을 창출할 수 있었다면, ‘디아스포라의 현실과 새로운 이념에의 적응이라는 복잡한 원리가 그 근저에서 작동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3. 학문적 가치와 필자의 노력

 

이상으로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의 기본적인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 작품이 던져주고 있는 중요한 논점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제목에도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는 한글문학이라는 개념이다. 보통 국문학자는 국문학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으며, 이때의 국문학이 한국인이, 한국어로, 한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문학이라는 세 가지 조건을 갖춘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한글 창제 이전의 문학은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것은 아니지만,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국문학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해외동포들의 작품을 과연 국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는 실정이다. 조선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재일교포들의 일본어 작품이나,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작가가 쓴 영어 작품이나, 국적을 포기하지 않은 교포의 한국어 작품 등을 과연 국문학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 판별하는 것은 뜨거운 난제일 수밖에 없다.

 

사실 언어, 국적, 사상과 감정이란 세 가지 요소는 일종의 형식논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중요한 것은 공동운명체로서 느끼는 실감일 것이다. 이에 비추어 볼 때 오래 전에 한반도를 떠나 고려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창작한 문학을 과연 국문학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문제가 남을 수밖에 없다. 연구자는 이러한 난관을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들의 문학을 한글문학으로 칭하는 것이다. 조규익 교수는 이 저서에서 각지의 소인예술단들과 고려극장으로 대표되는 전문예술단이 지난 시절 만든 한국어 노랫말과 극본들을 중점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백여 년 전에 한반도를 떠나 멀고 먼 중앙아시아에서 우리와는 다른 삶을 산 사람들의 문학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서이다. 이것은 첫 번째 문제와도 관련된다. 이 고려인들을 우리와 똑같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오만일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이 고려인들을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말하는 것은 섣부른 편견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난 시절 고려인들의 문학을 우리 것이자 동시에 우리 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는 어찌 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섬세한 관점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능한 입장을 저자는 누구보다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다. 이 저서의 서론격인 1부의 마지막은 조속히 청산해야 할 중심부의 시각으로 우리 정서의 맥을 힘겹게 이어 온 변방의 정서적 산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려는 것이다.”(36)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이 문장은 고려인 문학을 접하는 한국인 연구자의 솔직하고도 곤혹스러운 관점을 잘 드러낸 고백으로 읽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그러나 필자는 아무래도 고려인 문학은 우리 것이라는 입장에 한층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의 전통노래를 발전적으로 지속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해외에 우리의 문화영토 혹은 정신적 영역을 화복해 나가야 한다는 관점에서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108)는 문장에서 고려인=대한민국인이라는 관점을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 저서의 마지막 문장인 “‘갈 짓 자행보 속에 마구 변해버린 또 다른 중심부 한반도. 그 중심부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주변부의 오늘과 내일을 바라보며, 우리 스스로 성찰적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그들을 위해 오늘 우리는 과연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356)라는 격정적인 문장에서도 중심부와의 행복한 합일을 꿈꾸는 주변부로서의 고려인들을 사유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저서에 담겨 있는 학문적 가치와 필자의 노력에 대해서이다. 이 저서에서 조규익 교수는 소인예술단 공연 때 불리던 국문노래의 존재양상과 이념, 고려인 민요의 전통노래 수용 양상, 고려인 한글노래에 나타난 디아스포라의 양상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소인예술단의 한글문학이 지닌 본질을 찾아보았고, 1932년 고려극장 창립 이래 최근까지 공연된 연극들(200여 편)을 개관한 다음 고려인 사회 연극의 초석을 놓은 연성용, 태장춘의 연극세계와 함께 구소련 고려인 문단에서 최고의 미학을 성취한 한진의 연극을 분석하였으며, 연극무대 혹은 그 바깥에서 가창된 노래들까지 살펴봄으로써 고려극장의 한글문학이 지닌 본질을 밝히고자 했다.

 

이상의 내용 중에서 어느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느 것 하나 책상머리에서 자판 몇 번 두드려 얻을 수 있는 자료에 바탕한 것이 없다. 거의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 직접 발로 뛰며 얻은 자료를, 별다른 선행 연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결해 나가며 이룩한 업적인 것이다. 후학으로서는 감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또한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저자가 기울인 공력은 후학들에게 많은 귀감이 된다. 발로 뛰며 쓴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각종 사진으로 책의 여러 부분이 채워진 것이 그러하고, 전 세계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 뒤에 15페이지에 이르는 영문 초록을 붙인 것이 또한 그러하다. 조규익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은 앞으로 고려인 문학을 연구하는 모든 연구자들이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우리 시대의 명저이다.

 

“<<한국문학과 예술>> 12,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2013. 9. 30.”에서 퍼옴

 

 

 

Posted by kicho
알림2013. 8. 2. 16:05

 


책 표지


1980년대의 한진


                                                        1988년에 펴낸 <<한진 희곡집>>


1965년작 <의부어머니>


1991년 작 <나무를 흔들지 마라>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최근 고려극장에서 상연된 <량반전>의 한 장면


2011년 8월 백규 연구실에 만난 한진 선생의 손녀 율리아(한양대 박사과정 재학)와 저자들

 

 

조규익 교수(숭실대 국어국문학과)와 카자흐스탄에서 활동 중인 김병학 선생이 <<카자흐스탄 고려인 극작가 한진의 삶과 문학>>[글누림, 2013. 7.]을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42로 펴냈다.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이 매우 고통스런 삶을 살아왔지만 그 가운데서도 극작가 한진 선생만큼 복잡다단하고 극적인 삶을 살아온 이는 드물다. 그는 북한에서 인텔리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나 단기간에 초⋅중등교육과정을 마치고 1948년에 북한 최고의 교육기관인 김일성종합대학 노문학부에 들어갔다. 공부에 취미가 남달랐던 그는 곧바로 학업성적에 두각을 나타내며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던 중 6⋅25동란이 일어나자 인민군으로 참전했고 전쟁의 와중에 국가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거기서도 변함없이 최우등의 학업성적을 보였다. 시쳇말로 그는 ‘최고의 스펙’을 쌓은 전도유망한 청년학도였다. 그의 앞에는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그랬던 그가 안정과 명성이 보장된 미래를 던져버리고 돌연 디아스포라의 가시밭길을 택한 것은 김일성 개인숭배가 격화되면서 자유가 억압되고 문화예술은 이념의 시녀로 추락하고 있던 조국이 더 이상 기쁘게 돌아가 양심에 따라 글을 쓸 수 있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진의 작품들은 그의 의식이 성숙해가는 과정을 따라 네 단계로 나뉜다. 망명과 정착 과정에서 갖게 된 콤플렉스를 ‘원 모성으로부터의 절리(切離)와 새로운 모성의 발견 및 정착’으로 형상화시켰다고 보는데, 이것을 1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새로운 조국과 이념의 발견]이라 할 수 있고, <의부어머니>, <고용병의 운명> 등이 이에 속한다. 정착지에서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 것은 지극한 사모(思母)의 정이었고, 어머니를 만날 수 없게 만든 조국 북조선의 현실이었다. 이것을 문학적으로 구현한 것이 2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모정에 대한 그리음과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이었고, <어머니의 머리는 왜 세였나>, <량반전>, <산부처> 등이 이에 속한다. 2-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르바초프에 의해 천명된 페레스트로이카나 글라스노스트 등은 소련의 분위기를 바뀌어 놓았고, 그에 따라 그로 하여금 다양한 주제의식과 미학을 추구할 수 있게 했다. 비록 풍자와 같은 간접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체제의 모순을 비판할 수도 있게 되었고, 보다 직접적인 어법으로 조국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드러낼 수도 있게 되었다. 3단계의 이면적 주제의식[주제의 다각화와 다양한 미학의 추구]이 가능했던 것도 그런 상황의 변화 덕분이었고, <토끼의 모험>, <나 먹고 너 먹고>, <폭발> 등이 이에 속한다. 4단계에 이르러 소련의 체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민족주의가 대두됨으로써 조국의 미래에 대한 통찰 또한 새롭게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한진으로서는 이념이나 힘의 우위가 아니라 동질성에 입각한 ‘분열된 민족의 통합’만이 가장 바람직한 조국의 미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나무를 흔들지 마라>를 통해 이 시기의 이면적 주제의식[민족통합의 당위성 추구]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 그가 망명지에서 표면상 극작가 혹은 소설가로 살아갔지만, 이면적으로는 일관되게 민족정신이나 정서를 추구한 민족주의자로 살아갔다고 본다. 그 결과 그는 민족의 미래에 대한 통찰을 제시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그의 극작품들은 독특한 미학을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밝혀진 것만 해도 12편의 희곡, 19편의 단편소설 및 소품, 5편의 단행본, 16편의 번역극, 수 미상의 평론 등 많은 작품들을 남겼으며, 창작 및 번역 희곡들 대부분은 최근까지 고려극장을 통해 상연되었다.

 

돌아갈 수 없는 조국과 영영 만날 수 없는 부모형제는 그가 일평생 벗어날 수 없는 트라우마의 근원이 되었지만, 그는 이 아픔을 자신이 창작한 희곡에 미학적으로 승화시켜 극장을 찾은 수많은 관객들의 심금을 울렸다. 특히 그가 말년에 쓴 희곡 「나무를 흔들지 마라」는 오직 한진 자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조국통일에 대한 독특하고도 통찰력 있는 비전을 담아낸 역작이다. 그는 이 작품에서 마치 예언자처럼 하나가 되기를 갈망하는 남과 북의 우리가 궁극적으로 찾아내야 할 해답을 선취해서 보여주고 있다. 이는 동족상잔의 전쟁에 직접 발을 담갔던 한진이 소련에 유학하던 첫해부터 자신을 되돌아보며 평생을 붙들고 다듬어온 구상으로, 그는 이것을 우리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남겼다.

이 책의 전반부에는 어릴 적부터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와 관련된 사진 및 원고사진들을, 후반부에는 그의 삶과 문학에 대한 저자들의 분석과 연구를 각각 실음으로써, 우리 민족이 배출한 구소련의 뛰어난 극작가 한진의 전모를 보여주게 되었다고 본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차례

머리말

 

제1부 사진 및 기록자료

1장. 사진

1. 평양 시절

2. 소련 모스크바 유학 시절

3. 러시아 바르나울 시절

4.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 시절

5. 카자흐스탄 알마틔 시절(전반기)

6. 카자흐스탄 알마틔 시절(후반기)

2장. 편지

3장. 육필 원고

4장. 신문 게재 원고

5장. 책․잡지 게재 작품 및 글

6장. 기타 자료

7장. 작품 목록

1. 희곡

2. 단편소설․소품

3. 직접 편찬했거나 편찬을 주도한 단행본

4. 번역 작품

   

 

제2부 한진의 생애와 문학

1장. 한진의 생애와 작품 세계

2장. 한진 희곡의 미학과 문학 세계

3장. 한진 희곡의 고전수용 양상

4장. 한진의 연보

5장. 참고문헌

 

Posted by kicho
알림2013. 5. 6. 16:25

 

 

<<사진으로 보는 CIS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사>>를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자료총서 3으로 발간!!!

 

조규익 교수[한국문예연구소 고문]는 김성조⋅김병학 선생과 함께 <<사진으로 보는 CIS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사>>를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자료총서 3으로 발간했다. 이미 <<우리 민족의 숨결, 그곳에 살아 있었네!>>를 학술자료총서 2로, <<경천아일록>>을 학술자료총서1로 펴낸 바 있는 조 교수는 이번의 학술자료총서 3의 귀한 사진자료들을 통해 사할린 동포들이 중앙아시아 등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강제징용 등으로 사할린에 있던 우리 동포들은 일본 패망 후 귀국하지 못한 채 억지로 소련 국민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이들은 각기 살길을 찾아 소련의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70여년 가까운 이산의 고통을 겪다가 1989년에 허용된 사할린 동포 고국방문과 영주귀국 사업으로 1, 2세대의 고령 동포들이 귀국하고는 있으나, 그들에 대한 예우가 흡족치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이들의 과거를 보여줄 만한 각종 자료들도 수집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현실을 감안하여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에서는 현지를 답사하며 이들의 사진자료들을 수집해왔고, 그것들을 연차 계획에 따라 발간하고 있다. 이런 일은 사실 국가에서 나서서 해야 할 작업이지만, 아무도 사진자료의 중요성은 물론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향후 학계가 나서야 할 일이라고 보며, 강호제현의 관심과 도움을 간절히 청한다.

 

 

<<사진으로 보는 CIS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사>>, 지식과 교양, 2013, 15,000원.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