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9. 7. 20. 07:37

 

 

                                                <<넓고 깊게 지식을 나누다>>-박이정 30년사

 

 

‘책 허기’를 채워 준 은인

 

                                                                                                                        조규익(숭실대 교수)

 

음식과 책에 굶주리며 자랐다는 내 말을 요즘 젊은 세대들은 믿지 않는다. 나를 포함한 이 땅의 베이비부머 세대는 어린 시절부터 음식과 책에 대한 굶주림의 트라우마를 공유한다. 사실 친구들 가운데 나는 유독 더했다. 너덜너덜한 교과서를 제외하면, 글자들이 인쇄된 비료 부대나 장에 가셨던 아버지가 간간이 들고 오시던 ‘농민의 벗’이 유일한 ‘읽을거리’였다. 책에 관한한 끔찍스런 암흑의 세월이었다. 간신히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서도 ‘책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긴 어려웠다. 근근이 아르바이트로 번 돈에서 하숙비를 제외하고 남는 돈은 전공 자료집의 할부대금으로 깨끗이 소진되곤 했다. 먹고, 입고, 잠자는 것을 수도승처럼 하면서도 책을 사 모으며 ‘골병 깊어지는’ 청춘을 보냈다. 그런 가난 속에서 해군사관학교와 경남대학교 교수를 거쳐 숭실대학교에 부임한 2년쯤 뒤부터 연구실로 찾아온 서광문화사의 박찬익 사장을 만나기 시작했고, 비로소 팔자로 생각되던 ‘책 허기’에서 약간 벗어날 수 있었다.

 

박 사장은 새로운 영인 자료집들이 나올 때마다 그것들의 묶음을 두 손에 무겁게 든 채로 내 방을 찾아왔다. 그는 내 표정에서 책 욕심, 자료 욕심을 어떻게 읽어냈을까. 만날 때마다 그는 나의 빈 곳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갓 우려낸 녹차처럼 따뜻하고 담담했다. 서울 유수의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박 사장은 유명한 은사들을 언급하며 자신의 전공에 자부심을 보여주곤 했다. 시골에서 간신히 학업을 마친 ‘촌놈’으로서는 그의 말을 열심히 경청하는 게 고작이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대부분 갖고 있던 ‘사제 간의 추억들’을 나는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득의 달인’으로 생각되던 그로부터 배우는 게 많았다. 박 사장의 방문 횟수가 늘어날수록 자료들은 내 빈 연구실을 차곡차곡 채우기 시작했다. 내 호주머니가 빈 듯싶으면, ‘사정 되는 대로 주시면 된다’고 안심시키는 그의 따뜻한 말들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단색 양장의 영인본들은 대부분 선학들의 논문 속에서나 구경하던 자료들이었다. 그런 자료들을 갖고 논문을 쓰면서 비로소 내 콤플렉스는 한 낱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사실 선학들이 신활자로 옮겨놓은 옛 자료들을 대하며 늘 ‘암죽’을 떠올리던 나였다. 곡식의 가루를 밥물에 타서 끓인 유아용 죽이 암죽이다. 내 어릴 적 시골에서는 모유가 나오지 않거나 갓 젖 뗀 아가에게 엄마가 우물우물 씹어 죽처럼 만들어 먹여주시던 ‘그것’을 암죽이라 했다. 당시에 간간이 선학들이 신활자로 바꾸어 출판하던 자료집들은 내게 일종의 암죽이었다. 빨리 암죽의 단계를 뛰어 건너 딱딱하고 거친 곡물 그 자체를 내 ‘이빨’로 씹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박 사장을 의지하게 된 것도 당시 내가 ‘학문적 이유기(離乳期)’에 접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제야 고백하건대, 박 사장이 놓고 간 자료들을 어루만지며 한 나절을 상념에 빠진 적도 있었다!

 

교수 생활 몇 십 년 해오면서 만용이라도 생겼던 것일까. 겁 없이 여러 권의 책들을 냈는데, 그 가운데 박이정이 만들어 주신 두 책은 잊을 수 없다. <<만횡청류의 미학>>(1996년 초판/2009년 제2차 수정증보판)과 <<17세기 국문 사행록 죽천행록>>(2002년)은 나름의 학문적 도정을 보여주는, 내 분신들이다. 고전시가를 공부하면서 갖게 된 모색과 돌파구를 함께 제시한 것이 전자이고, 사행록(使行錄)에 관심을 갖게 된 후 발굴한 새 자료를 야심차게^^ 학계에 제시한 것이 후자이다.

이른바 ‘시조’와 악장을 통해 학계에 진출한 입장이지만, 국문학계의 의식과 담론들에서 명목과 실질이 잘 들어맞지 않음을 느끼는 건 지금도 여전하다. 초창기 어른들이 잘못 끼우신 ‘첫 단추’의 관성 때문이리라. 학계에서는 굳건하게 ‘사설시조’로 호칭하지만, <<진본 청구영언>> 편찬자 김천택의 원래 의도가 ‘사설시조’ 아닌 ‘만횡청류’에 담겨 있다는 점을 필두로 그에 관한 모든 것을 그 한 권의 책에서 다루고자 했다. 지금도 누군가들은 음습한 곳에서 이 책의 내용을 무더기로 도용하면서도 그들의 참고문헌에는 이 책을 올리지 않는다. 깨끗지 못한 학계의 풍토 속에 ‘사설시조’ 아닌 ‘만횡청류’의 문예미학을 제시하여 고전시가의 이름을 바로잡겠노라는 나의 패기를 알아준 곳은 박이정 뿐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고서(古書)를 찾아다니는 습관이 생긴 것도 책에 대한 굶주림의 트라우마로부터 나온 것임은 물론이다. 탐서(探書)의 여정에서 만난 최고의 고서 수집가 이현조 박사를 만났고, 그의 도움으로 <<죽천행록>>을 입수했으며, 그것을 연구・분석한 것이 후자이다. 비록 ‘건・곤’ 두 편 중 곤 편만을 입수했으나, 자료를 어루만지며 며칠 간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생애 최고의 흥분을 경험했다. 그 덕이었을까. 국어국문학회에서의 논문 발표와 기고, 책 출간까지 나로서는 최단시간에 해치운(?) 작업이었다. 박이정 박 사장의 적극적인 호응과 도움이 결정적이었음은 물론이다. 최근 국립해양박물관에서 발견한 건 편을 김윤아 박사의 해제로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의 학술지 <<한국문학과 예술>> 28집에 실을 수 있었으니, 그 소중한 인연 덕분이리라.

 

***

 

학문적 도정을 마무리하고 있는 요즈음. 보잘 것 없는 나를 이룬 모든 것들을 가끔씩 떠올려 본다. 오늘의 나를 만든 9할은 선조들이 남겨주신 작품들과 선학들의 연구들, 그리고 그것들을 모으고 가공하여 눈앞에 디밀어 준 학술출판 사업자들의 덕이다. 그 중심에 박이정과 박찬익 사장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이날까지 나는 학자로 그는 출판문화 사업자로 동행해 왔음을 오늘 비로소 깨닫는다. 그 세월이 30년이다! 앞으로 30년도 우리는 함께 청청한 모습으로 그 길을 갈 것이다.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19. 7. 5. 16:15

단원 김홍도의 춘화

 

 

고전과의 대화

 

「만횡청류」 성 담론의 정체

 

 

                                                                                                                           조 규 익

 

 

 

 

하나. 왜 성을 노래했나

 

 

김천택은 <<진본 청구영언>> 말미에 「만횡청류」 116수를 실어 놓았다. 학계에서는 ‘만횡청류’라는 명칭을 도외시하고 ‘사설시조’로 호칭하지만, 정확한 명칭은 아니다. 편찬자 김천택의 원래 의도는 ‘사설시조’란 출처불명의 명칭에 있지 않았고, ‘만횡청류’라는 명칭에 담겨 있다. 가곡에서 초장을 곧은 목의 삼삭대엽, 2장 이하는 흥청거리는 농조로 부르는 것이 만횡이고, 만횡과 농・락・편을 두루 포괄하는 노래들의 부류가 ‘만횡청류’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노래들의 상당수가 여성의 ‘성적 개방’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의 주도자가 남성이었던 유교 사회에서 화자인 여성들의 입으로 노래한 개방적인 성을 오늘날의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혹자는 남성들이 지은 것들도 있기 때문에 ‘여성의 성 담론’과 거리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남성 작자들의 작품을 짚어내기도 어렵거니와, 설사 남성이 지은 것이라 해도 여성화자로 설정되어 있는 이상,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보는 것이 맞다.

「만횡청류」의 여성들은 성을 노래하며 전혀 쭈뼛거리지 않는다. 여성 화자들이 당당하게 성을 노래한 것은 당시의 여성들이나 「만횡청류」의 담당자들이 성적 자기 결정권이나 성적 주체성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만횡청류」의 야한 노래들 때문에 문제가 생길까봐 걱정하던 김천택은 <<청구영언>>의 원고를 싸들고 당시 지식사회에서 영향력이 있던 마악노초를 찾아간다. 임해군(선조의 장남)의 후손인 마악노초는 시조 창작과 가창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소론 계통의 지식인이었다. 「만횡청류」를 <<청구영언>>에 실어 가요계에 노출시키려던 김천택으로서는 사회적 제재를 막아줄 안전판이 필요했고, 마악노초는 그에 적합한 인사였으리라.

작자들을 익명으로 처리한 점은 또 하나의 안전판이었다. 「만횡청류」를 제외한 상당수의 노래들에 분명한 작자명이나 적어도 작자를 추정할만한 단서들이 제시되었으나, 「만횡청류」에 대해서만은 작자 혹은 최소한 그것을 짐작할만한 단서 하나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 노래들이 원래부터 익명의 상태로 전승되거나 창작되고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김천택 스스로 작자를 추정할만한 단서를 일부러 밝히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악노초는 「만횡청류」에 대하여, ‘곡조는 비록 아름답고 세련되지 못하나 기뻐 즐기며 원망하고 탄식하고, 미쳐 날뛰며 거칠게 구는 모습과 태도는 모두 자연의 진기(眞機)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설명한 다음, 걱정할 필요 없다고 김천택을 안심시켰다.

여성화자들이 성적 주체성을 노래한 논리적 근거를 ‘자연’의 발로에서 찾은 마악노초의 생각은 매우 열려 있었다. 그가 말한 ‘자연’은 인간과 사물의 존립근거인 ‘스스로 그러함/저절로 그러함’이고, ‘진기‘란 ’현묘한 이치나 비결‘이다. 반복하건대, 앞에서 제시한 「만횡청류」의 특징(곡조는 비록 아름답고 세련되지 못하나 기뻐 즐기며 원망하고 탄식하고 미쳐 날뛰며 거칠게 구는 모습과 태도)이 ‘자연의 진기’에서 나온 것이라면, 과연 ‘스스로 그러함의 현묘한 이치나 비결’이란 무엇일까. 바로 ‘꾸밈없음, 걸림이 없음, 현실적 이해나 이념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있음’ 등으로 설명될 수 있고, 그것들은 ‘자유분방’으로 요약될 수 있다.

‘자유분방’은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이고, 그 가장 극적인 형태가 ‘여성의 성적 일탈’이었다. 「만횡청류」를 통하여 남성이 향유하던 성적 희열을 관념적으로나마 공유 혹은 향유하게 되었고, 그로 인한 ‘사회적 불평등’을 ‘심리적 평등’으로 상쇄하는 효과를 얻게 되었을 것이다. 김천택의 그 말에서 생태여성주의 즉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의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남성 중심의 유교적 세계관이 자연을 억압하는 시대 분위기에서 여성들 스스로 ‘성의 자유’를 구가한 일이야말로 우리 문학사에서 드물게 보는 생태여성주의의 증거다. 「만횡청류」에서 성을 언급하는 노래들의 화자로 남성이 등장한다 해도 노래 밖으로 두드러지는 개방의 실질적인 주체는 여성이다. 따라서 이 노래들은 당시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꽤 도전적이다. 이처럼 조선조 이념사회의 차별 구조 속에 은폐되어 왔던 여성이 노래에 표현된 성적 사건의 분명한 당사자로 노출된 점은 큰 사건이었다. 남성들이 스스로의 목소리로 성을 노래하기도 쉽지 않았을 터인데, 여성의 목소리로 거리낌 없이 성을 노래하다니! 이 책이 나돌던 당시 조야(朝野)가 떠들썩하지 않았을까. 책을 만들어 배포한 김천택으로서는 무척 긴장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만횡청류」로 문제가 되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풍류방을 중심으로 유락적 분위기가 만연되고 있던 당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단서일 것이다.

과연 「만횡청류」가 반역하려 한 대상은 무엇이었을까. 남성 중심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만들어낸 ‘열녀담론’임은 물론이다. 「만횡청류」 담당계층은 ‘숨김과 드러냄’이란 노랫말의 표현적 기교를 통해 열녀담론의 틀을 깨려 했고, 그런 기교를 통해 억눌렸던 리비도의 해소는 가능했으며, 리비도의 해소야말로 몸의 자연 상태를 회복하는 지름길이었다. 그것은 여성들의 ‘인간선언’이기도 했다.

 

 

 

둘. 어떻게 성을 노래했나

 

 

노래 세 편만 들어보자. 먼저 <샛서방 노래 1>.

 

본서방은 광주 싸리비 장사, 샛서방은 삭녕 짚 비 장사, 눈짓으로 맺어놓은 임은 뚝딱 두드려 방망치 장사, 또르르 감아 홍두깨 장사, 빙빙 돌아 물레 장사, 우물 전에 치달아 간당거리다가 워렁충창 풍 빠져 물 담뿍 떠내는 두레박 장사

어디 가서 이 얼굴 가지고 조리 장사를 못 얻을까?<만횡청류-565>

 

이 노래의 여성화자는 자신의 상대역으로 ‘본서방, 샛서방, 눈짓으로 맺어놓은 임’ 등 여러 종류의 남성들을 들었다. 본서방을 ‘광주 싸리비 장사’라 했고, 샛서방을 ‘삭녕의 짚 비 장사’라 했다. 그리고 ‘눈짓으로 맺어놓은 임’을 ‘방망치 장사⋅홍두깨 장사⋅물레 장사⋅두레박 장사’라 했으며, ‘뚝딱 두드려⋅도르르 감아⋅빙빙 돌아⋅우물 전에 치달아 간댕간댕하다가 워렁충창 풍 빠져’ 등으로 각각의 모습이나 행위를 묘사하여 덧붙였다. 싸리비・짚 비・방망이⋅홍두깨⋅두레박 등은 남성의 성기를 은유한 말들이다. 싸리비는 강하나 거칠고, 짚 비는 부드럽고 곱다. 화자는 빗자루를 들어 남편의 성기와 샛서방의 성기를 대조적으로 그려냈다. ‘눈짓으로 맺어놓은 임’은 좀 더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눈짓으로 맺어놓은 임’이란 아직 본격적인 관계는 갖지 않은 채 눈짓으로만 걸어둔 대상이다. 방망이⋅홍두깨⋅두레박 등에 덧붙은 ‘뚝딱 두드려⋅또르르 감아⋅빙빙 돌아⋅우물 전에 치달아 간당거리다가 워렁충창 풍 빠져’ 등은 성행위의 기교나 모습을 묘사한 은유적 표현들이다. 그리고 ‘우물 전’은 여성 화자 자신의 성기를 은유한 말이다.

화자 자신은 스치는 뭇 남자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으며, 사랑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는 여성이다! 그러기에 끝부분에서 ‘어디 가서 이 얼굴 가지고 조리 장사를 못 얻을까?’ 라고 큰소리 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생각하는 최상의 남성은 조리 장사이다. 조리란 곡식을 이는 데 쓰는 도구다. 화자는 ‘곡식을 이는 행위’와 성행위의 기교를 병치적으로 은유했다. 이 노래의 화자는 현실이든 가상이든 자신이 최상으로 생각하는 어떤 남성과도 만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여성이다. 이처럼 남성들 앞에서 쭈뼛거리지 않고 자신의 욕망대로 짝을 찾아 성적 쾌락을 즐기는 여성상을 「만횡청류」에서 찾기란 어렵지 않다. 성적 쾌락에 대한 욕구를 억누르고 은폐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지 않으며, 스스로 그것을 찾아 나서는 일은 자연 혹은 자연스러움의 표준을 자신의 욕망에 맞추는 데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분명 이 여성은 남성 중심의 유교 이데올로기 사회에서 성적 본능을 억압하고 살아온 ‘그녀’는 아니다. 당당하게 자신의 성적 주체성을 주장하고 그 즐거움을 향유하려는, ‘새로운 시대’의 여인이다.

 

다음은 <샛서방 노래 2>.

 

어쩔 거나 어쩔 거나, 시어머님.

샛서방의 밥을 담다 놋 주걱 자루를 부러뜨렸으니

이를 어찌하여요? 시어머님!

저 아기야, 너무 걱정 마라

우리도 젊었을 적에

많이 꺾어 보았노라.<만횡청류-478>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화자로 등장하여 대화를 나눈다. ‘며느리가 샛서방의 밥을 푸다가 놋 주걱 자루를 부러뜨렸다’는 사건이 노래의 핵심이다. 밥을 너무 꾹꾹 눌러 담다 보니 놋 주걱 자루가 부러졌다는 것이다. 며느리의 입장에서야 이보다 더 큰 낭패가 어디 있겠는가.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 밥그릇에 밥을 꾹꾹 눌러 담은 것은 그 밥그릇 임자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다만 그 사랑의 대상이 남편 아닌 샛서방인 점이 문제였다. 며느리는 죽음에 가까운 불벼락을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벼락을 치는 대신 시어머니 자신도 그러한 과거가 있었다고 고백하는 게 아닌가. 그 덕에 숨 막히는 긴장은 극적으로 해소되었다. ‘놋 주걱 자루를 부러뜨린 사건’으로 ‘샛서방과의 사랑’을 절묘하게 노출시켰다. 기가 막히는 기지(機智)와 해학이다. 불륜이 자아내는 무겁고 탁한 분위기가 비교적 가벼운 느낌의 해학으로 바뀌는 반전의 메커니즘이야말로 탁월한 은유의 소산이었다.

노래 내용의 핵심은 불륜이다. ‘서방 있는 젊은 여인이 샛서방을 두고 있다’는 서사적 문맥이 이 노래에는 들어 있다. 그 문맥 속에는 다양한 상황이 내포되어 있다. 서방이 있음에도 샛서방을 갖게 된 이유가 바로 그 다양한 상황들의 출발점이다. 며느리의 본남편은 나이가 어리거나 반대로 아주 늙은 서방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젊지만 성적으로 무능력한 서방일 수도 있다. 어떤 유형의 서방이든 이 여성을 성적으로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였으리라. 그래서 며느리는 샛서방을 두게 되고,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샛서방에 대한 사랑은 ‘그의 밥을 꾹꾹 눌러 퍼 담는 행위’로 암시된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시어머니도 젊은 시절 그런 불륜을 저질렀다는 사실이다. 물론 노래 속의 내용을 당시의 세태로까지 확대시킬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노래는 노래일 뿐이고, 노래는 노래하는 자의 상상에서 만들어진 언어적 구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당시 사람들은 음으로 양으로 이 노래를 부르며 자신들의 현실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 노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이 성 문제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거나 쥐고자 했다는 점이다. 이 노래의 작자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지배층이 만들어낸 열녀담론을 통해 여성들의 성적 결정권을 억압해온 남성 위주의 반 생태적 인습과 제도에 반역을 꾀함으로써 성에 관한 자연적 질서를 회복하고자 한 시도의 결과로 보는 것이 옳다.

 

다음은 <비파노래>.

 

비파야, 너는 어찌 가는 곳마다 앙알거리느냐?

홀쭉한 목을 둘러 안고 움파 같은 손으로 배를 잡아 뜯는데

앙알거리지 않을 소냐!

아마도

크고 작은 구슬이 옥 소반에 떨어지는 소리는 너뿐일 거야.<만횡청류-536>

 

비파는 아름다운 여성을 닮은 악기이다. 비파의 모습, 아름다운 소리, 연주할 때 비파를 잡는 모습 등이 노래의 중심 소재다. 두 명의 화자가 등장하여 대화를 주고받는다. 비파를 불러낸 화자가 ‘왜 가는 곳마다 앙알거리느냐?’고 묻자 상대 화자인 비파는 ‘홀쭉한 목을 둘러 안고 움파 같은 손으로 배를 잡아 뜯는데 앙알거리지 않을쏘냐?’고 대답했다. 그러자 다시 처음의 화자는 ‘아마도 크고 작은 구슬이 옥 소반에 떨어지는 소리는 너뿐일 것’이라고 감탄한다. 노래의 핵심은 ‘앙알거리는 비파의 소리, 가는 목을 둘러 당겨 안은 채 희고 가냘픈 손으로 배를 잡아 뜯는 듯한 연주 태도 등에 내용 파악의 열쇠가 있다. ‘가는 목을 안고 배를 잡아 뜯으니 앙알거리지 않을 수 없다’는 요지의 언술은 외견상 비파 연주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묘사한 내용 같아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적 의미는 다르다. 우선 비파를 생명체로 설정한 점, 목이나 배 등 인간의 육체를 끌어온 점, 그 육체에 손을 대니 소리를 내는 것으로 묘사한 점 등은 작자의 실제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지막 부분 ‘크고 작은 구슬이 옥 소반에 떨어지는 소리’의 크고 작은 구슬은 여성을 상징한다. 따라서 이 노래의 주 화자는 남성, 상대 화자인 비파는 여성이다. 노래의 작자는 비파의 모습에서 여인을, 비파 연주 모습 혹은 그 소리를 통해 여인과 벌이는 사랑의 행위를 각각 떠올린 것이다. 비파와 비파 연주자는 사랑하는 남녀와 유사성을 가졌다고 보았음이 분명하다. 비파 연주자가 비파를 다루는 행위는 남자가 여자를 애무하는 행위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가. 비파를 연주할 때 울려 나오는 소리는 남자가 여자를 애무할 때 여자가 토해내는 기쁨의 소리와 유사하다는 생각이 비유 구조의 바탕이다. 그러나 노래의 문면에는 남자와 여자, 혹은 남녀 간의 애정에 관한 말은 한 마디도 노출되고 있지 않다. 세련된 악기 이야기를 펼쳐,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심하게 하면서도 이면적으로는 도에 넘치는 외설적 이야기를 펼치는 범상치 않은 표현기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사랑을 나눌 때 여성이 느끼는 쾌락의 실황을 내용으로 한다. 편의상 주 화자로 남성 화자를 등장시켰을 뿐, 노래의 실질적 주체는 여성이다. 이 시기에 쾌락 추구의 성 담론을 이처럼 과감하게 펼친 것은 사회의 이면에서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을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입장에서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남성주도의 이념사회에 대한 반역인 동시에 여성들의 ‘성적 주체성’에 대한 깨달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자는 왜 비파를 소도구로 사용했을까. 작자는 은유를 자기검열 혹은 자기보호의 효과적인 장치로 여겼음에 분명하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잠재된 꿈의 내용이 외현된 꿈의 내용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마음의 검열관’이 자리 잡고 있다 했다. 자기검열의 무의식적 결과를 도출하는 수단이 바로 은유다. 작자 자신 혹은 작자계층의 집단적 욕구[성욕과 쾌락의 자유로운 표출 및 향수를 통한 성적 주체성의 확인]를 드러내기 위해 끌어온 비파의 의미적 명징성에는 한계가 있다. 그 점에 작자의 의도가 숨어 있다. 수용자나 해석자의 능력에 맡겨둘 수밖에 없을 만큼 이 노래의 은유적 표현은 애매하다. 작자는 자기검열을 통해, 외설을 노래함으로써 당할 수 있는 사회적 제재로부터의 도피처를 마련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경우 은유가 훨씬 창조적이고 심층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다는 건 바로 이런 경우를 말한다. 사실 노래의 외설적 의도나 의미가 쉽게 간파될 수도 있었고, 단순한 ‘비파노래’로 이해되는 데 그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작자로서 손해 볼 이유가 없었던 것은 여성이든 남성이든 남성중심의 사회가 자행하던 성적 억압에 맞서 그들 스스로 시도한 첫 단계의 반역이 바로 이런 노래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 성을 노래한 결과는 어떠했나

 

 

조선조의 열녀담론은 반자연적⋅반생태주의적 산물이었다. 그 속에서 여성들은 고작 한숨을 내쉬거나 측은한 신세타령으로 가슴 속의 응어리들을 삭이며 인고의 세월을 견뎌낸 것으로 알고들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 생태적 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하는 방법을 고안해낸 것이 당시 여성들이었다. 노래를 통한 가슴 속 응어리의 해소가 바로 그 방법이었다. 남성중심의 성 담론이나 열녀담론에 대한 반역의 의지를 노랫말에 숨겨놓거나 과감히 드러냄으로써 억눌렸던 리비도의 해소는 가능했고, 몸도 얼마간 자연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었다. 노래를 통해서이긴 하나, 남녀가 성적 쾌락을 공유하는 수준을 넘어 여성이 관념 차원의 주도권이나마 쥐게 된 점이야말로 여성이 비로소 성의 향유를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남녀가 함께 성행위를 하면서도 쾌락을 표현할 경우 가차 없이 ‘음탕한 여자’로 매도되던 것이 당대의 불평등 구조였다. 그런 억압을 극복하고 성적 쾌락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몸으로 지각하는 자연의 질서에 부합하는 일임을 깨닫게 되었으니, 「만횡청류」를 통해 에코페미니즘적 성 담론은 제대로 구현된 셈이다.

「만횡청류」 에코페미니즘의 가장 큰 부분은 ‘은유를 통한 여성의 존재확인, 여성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통한 자연성의 회복, 여성의 성적 주체성과 자신감의 확립’ 등으로 구체화된다. 노래를 통해 반 생태주의적 열녀담론을 깨는 데서 남성중심 사회에 대한 반역은 시작된 셈이다. 사실 가장 높은 수준의 생태주의는 자연 혹은 자연스러움의 표준을 자신의 욕망에 맞춤으로써 스스로 성적 쾌락을 찾아 나서는 내용의 노래들이다. 남성 중심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순종하는 여성들과 달리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성적 쾌락을 탐닉하는 여성들의 노래는 반 생태주의적 억압에 대한 반항의 선언이다. 아울러 당당한 자신감의 표출이야말로 가장 수준 높은 에코페미니즘적 성 담론임을 「만횡청류」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억압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같은 일이라고 인식하는 데서 「만횡청류」식 에코페미니즘의 단서는 분명해진다. 자연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관점에 설 때 비로소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성적 쾌락을 느끼는 존재라는 점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 인간과 자연 사이에 균형과 조화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이런 노래들이야말로 생명 평등주의 성 담론의 구현일 수 있는 것이다.

 

신윤복의 <단오풍정>

 

조규익

숭실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아너 펠로우 교수(Honor Soongsil Fellowship Professor)’. 인문대 학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소장. 도남국문학상・성산학술상・한국시조학술상 등을 수상. LG 연암재단 해외연구교수로 UCLA에서 ‘재미한인 이민문학’을, 풀브라이트 학자(Fulbright Scholar)로 OSU에서 ‘해외한인문학과 비교문학’을 연구. <<조선조 악장 연구>>・<<북한문학사와 고전시가>>・<<고전시가의 변이와 지속>> 외 다수의 저・편・역서와 논문들을 발표했음.

 <<정형시학>> 23, 사단법인 열린시조학회, 2019. 6. 2019년 여름호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9. 6. 18. 12:53

내 공부를 어떻게 '땡처리'할 것인가

 

                                             

                                                                                조규익

 

 

연구실에 앉아 자료 해독 · 해석으로 부심(腐心)하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갓 20이나 되었을까. 앳된 여성의 목소리였다.

 

“혹시 ‘부녀자취업알선센터’인가요?”

 

약간 긴장한 탓일까. 가느다란 목소리는 더욱 기어들어가듯 가늘어지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전화 잘못 거셨어요!”라고 건조하게 응답한 뒤 끊었다.

한참동안 책장을 넘기는데, 문득 세 가지 의문들이 내 작업을 방해했다.

 

“전화를 잘 못 건 그녀는 누구일까?”

“그녀는 왜 ‘부녀자취업알선센터’에 전화를 걸었을까?”

“그런데 그녀의 음성은 어쩌면 그렇게 내 귀에 익숙할까?”

 

세 물음들이 오후 내내 나를 심란하게 만들었다.

‘내가 언제부터 잘못 걸려온 전화에 이렇게 민감하게 되었지?’ 라고 반문하며, 마음속으로는 부질없을지도 모르는 분석 작업을 계속했다.

오후 늦어서야 아래와 같은 추론하나를 완성하게 되었다.

 

「그녀는 전화기 자판을 잘못 눌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하필 내 전화번호였을까. 어쩌면 그녀의 잠재의식 속에 내 번호가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녀의 음성은 어쩌면 그렇게도 내 귀에 익숙할까. 흡사 학부 3학년이나 4학년 때 내가 지도교수로 있던 어떤 여학생의 음성 같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갓 졸업한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부녀자취업알선센터’에 연락하고자 했다면, 지금까지 직장을 얻지 못한 상태란 말인가. 옷도 사야하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 커피도 마셔야 하며, 화장품도 사야 할 텐데. 때마다 부모님께 손을 내밀기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돌아다니다 다니다 못해 이젠 (실제로 있는 기관인지는 모르나) ‘부녀자취업알선센터’의 문까지 두드린 건 아닐까.」

 

마음이 무거웠다. 호주머니에 돈이 없던 내 청춘시절이 떠오르면서 눈물도 찔끔 나오려 했다. 그래도 그 땐 ‘적빈(赤貧)’이었으나, ‘무일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길바닥에 나서는 순간부터 호주머니의 돈이 나가는 시대 아닌가. 이 시대에 ‘항산(恒産/살아갈 수 있는 일정한 재산이나 생업)’이 없다면, 아니 '능력은 있으나 일거리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한 발짝인들 운신(運身)할 수 있단 말인가.

 

학기 초 어느 날. 이메일에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떴다. 열어보니 신입생이었다. 자퇴를 하려는 면담 신청이었다. 다음 날 오후 그 여학생은 연구실로 나를 찾아왔다. 사유를 물었다.

 

「나: 왜 자퇴하려고?

학생: 광고 카피라이터가 되는 게 제 꿈인데요. 한두 달 국문과 공부를 해보니, 그것과 거리가 멀어서요. 더구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어려운 과목들뿐인데, 그런 걸 하다 보면 제 꿈과 더 멀어질 것 같아서 지금 단계에서 그만 두려고요.

나: 광고 카피라이터가 되려고 해도, 대학 시절 폭 넓은 공부를 해둬야 ‘더 멀리 더 높이’ 날 수 있지 않겠니? 카피 라이팅 기법만 배울 목적이라면, 굳이 대학 공부를 할 필요 없겠지? 기술만 배우려면, 학원이나 개인 교습을 받으면 몇 개월 만에도 가능하겠지. 부모님들께 말씀은 드려 보았니?

학생: 네. 부모님도 제 말씀에 동의하셨어요. 취업을 할 수 없는 공부라면 지금 당장 바꾸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셔요.

나: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나는 너와 생각이 다르지만, 너와 네 부모님께서 생각이 같다니, 내 생각이 잘못 되었을 수도 있겠네. 앞으로 무슨 공부를 하건 좀 폭 넓고 진중하며 끈기 있게 최선을 다해 주렴. 그리고 잠시라도 우리가 ‘국문인’으로 맺었던 인연을 잊지는 말아다오.」

 

1학년 초반에 자퇴하려는 학생은 처음 만나는 터여서, 내심 당황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무거워지려는 마음을 누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대는 바뀌고 톡톡 튀는 감성의 ‘새 세대’가 부모가 되고 사회의 중견그룹이 되어 있는데, 나는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새삼 책상 위에 무질서하게 쌓인 고전 텍스트들을 내려다보았다. 이것들을 읽고 분석하여 글로 써내고 말로 풀어내는 것이 젊은 영혼들의 삶에 무슨 도움을 준단 말인가. 이들이 이런 어려운 말이나 들으려고 답답한 강의실에 고문 받듯 앉아서 내 말을 경청하고 있단 말인가. 이들에게 한 그릇의 밥도 마련해주지 못하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참, 국문과 고전분야의 ‘교수질’이 어렵다는 걸 느끼기는 난생 처음이다. 첫 번 째 경우도 결국 그렇게 귀착되고, 두 번 째 학생은 더욱 그렇다. 국문학을 배워서, 아니 고전문학을 배워서 ‘밥 문제’가 해결되는가? 시대는 이제 이것만을 집요하게 묻는다.

 

내 공부를 과연 어떻게 '땡처리'할 것인가.ㅠㅠ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9. 5. 22. 11:41

 

 

학술답사 혹은 보물찾기

 

                                                                                                                           조규익

 

내 어린 시절 소풍날의 가장 가슴 뛰는 행사는 ‘보물찾기’였다. 파릇파릇 돋아난 나물더미 속이나, 하찮아 보이는 돌덩이 밑에 감쪽같이 숨겨진 쪽지를 찾아내곤 환호성을 지르던 친구들의 얼굴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쪽지 하나 찾아 봐야 연필 두어 자루, 공책 두어 권 주어지는 게 고작이었지만, 그 시절엔 보물을 찾아낸 아이들이 왜 그리도 부럽고 샘이 나던지. 쪽지 한 장 찾지 못한 채 소풍이 끝날 무렵이면, 늘 아쉽고 허전했다. 그 뒤부터 이날까지 내 삶은 대부분 ‘실패한 보물찾기’의 연속이다.

 

철이 들면서 국문학에 뜻을 두었고, 학부와 대학원 시절의 답사에서 얻는 설화나 민요, 귀한 자료들이 보물임을 저절로 깨닫게 되었다. 촌로들로부터 약간 이색적인 설화 한 편이라도 얻어 듣는 날엔 가슴이 뛰었다. 비슷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천하에 없는 이본(異本)이라도 얻은 듯 흡족함을 느꼈으니, 그게 보물 아니고 무엇이랴. 그 뿐인가. 가끔 ‘고서답사(古書踏査)’를 떠났다가 희귀본 소설 자료나 노래 자료라도 얻을라치면, 가슴이 설레어 여러 날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러니 그것들은 분명 보물이었다.

 

나이를 먹고 삶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현장에서 만나는 보물들은 보다 깊고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 채 내 앞에 나타나곤 했다. 14년 전 ‘기독교 확산과 중세문명의 자취’를 확인하기 위해 6개월 간 유럽의 20개국 120개 도시들을 자동차로 여행한 적이 있었다. 다양한 민족과 국가들이 모여 있으나 동유럽을 제외하곤 국경이 따로 없는 그 지역을 돌며, EU의 현존재가 갖는 역사적 필연성이 기독교로부터 나왔음을 덤으로 깨닫게 되었다. 전공 공부는 잠시 뒤로 미룬 채, 곰브리치의 <<세계사 이야기>>를 비롯한 각종 유럽 중심의 세계사 저술들을 샅샅이 뒤져 읽으며 ‘보물찾기’의 도구로 갖춘 것은 물론이었다. 그 덕분이었을까. 유럽에서 만난 보물들은 내 협소한 세계인식의 폭을 거의 무한대로 넓혀 주었다.

 

몇 년 전 미국의 오클라호마주립대학에 6개월 정도 머무를 때였다. 미국에 인디언들이 많다는 사실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오클라호마 주에 39개의 인디언 부족과 그들의 보호구역이 있다는 사실은 그곳에 가서야 알게 되었고, 틈 날 때마다 그들을 찾아 다녔다. ‘인디언 종족・역사・문화 답사’에 나섰던 것이다. 드넓은 대초원과 계곡 속에 숨은 듯 살아가고 있는 그들을 만나보면서 문득 옛날의 ‘보물찾기’가 떠올랐다. 현장에서 만나는 인디언들을 통해 미국 역사의 그늘을 발견했고, 세상살이의 한 단면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 답사여행이 대학시절 학술답사체험에서 길러진 내 습벽(習癖)의 발현이었음은 물론이다. ‘무언가를 추구하는’ 삶 자체야말로 답사로부터 체득한 결과라 할 수 있으리라.

 

강의실이나 연구실은 삶의 현장을 최소화시킨 공간이고, 교과서나 참고서는 삶의 현장에 널린 자료들을 모아 가공하거나 조리한 음식 같은 것이다. 강의실과 연구실에서 잘 만들어진 텍스트를 보며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공부에도 가끔은 야성(野性)이 필요하다. 엄마 젖을 뗀 뒤 얼마동안 이유식을 먹다가 이빨이 솟기 시작하면서 ‘날 것 그대로’를 씹어 먹고 싶어 하는 아가들을 보라. 학생들이 강의실 아닌 현장에서 ‘거칠지만 날 것 그대로의 자료’를 찾아 공부하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성장의 원리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전통 마을들을 찾아, 그 정신적 자료들을 수집하는 일은 잦을수록 좋다. 강의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표준화된 공부’는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언가를 찾아 현장에 나가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남들과 달리 ‘쉽지 않은 일’을 하는 것이 큰 공부다.

 

***

 

우리는 ‘백제’라는 이름으로 과거・현재・미래가 함께 숨 쉬는 ‘카오스의 시공’ 공주와 부여를 찾았다. 학생들로 하여금 그곳에 사는 백제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들의 언어와 문학, 역사를 분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분들의 어떤 것이 오늘날의 우리를 만들었는지 그들 스스로 느껴보았으면 하는 마음도 컸다.

 

부여에 도착하여 궁남지에서 서동(薯童)을 만나 건강한 생명력을, 부소산에 올라 백마강을 내려다보며 소름 끼치는 망국의 한을 확인했다. 그 뿐 아니다. 얼마 전까지 민중의 저항의식을 거침없이 시로 뱉어내던 신동엽(1930~1969)을 만났다. 지금도 그는 고즈넉한 부여의 한 모퉁이에 앉아 ‘껍데기는 가라!’고 쉼 없이 외치는 중이었다. 옛날의 껍데기를 밀어내고 등장한 새로운 껍데기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현실을 젊은이들이 깨달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보물이었다. 어둘 녘 동학군의 피비린내가 아직 가시지 않은 ‘우금치’를 넘어 공주의 숙소에 도착했다. ‘웅진 백제→사비 백제’를 역으로 밟아온 것이다. 계룡산 산록에 자리 잡은 숙소, 그 앞엔 작은 호수가 거울처럼 앉아 흘러가는 시간과 역사를 정화시키는 중이었다. 신동엽의 ‘금강’이 거세게 흐르는 민중의 삶을 그려내려 했다면, 이곳 호수는 조용조용 ‘껍데기들’을 갈앉히는 중이었다.

 

시간을 거스르느라 피곤한 몸을 맑은 공기와 바람으로 정화시킨 다음 날, 공주대학교를 찾았다. 잘 만들어진 국제회의장에서 국어교육과 송재일 교수로부터 ‘공주-부여의 문학과 역사’ 특강을 들었다. 조근조근 짚어가며 공주와 부여의 역사를 깔고 그 위에 문학으로 수를 놓는 송 교수의 말씀. 소문대로 명 강의였다. 강의 전 학생들에게 송 교수를 소개하며 나는 울컥하고 말았다. 자리에 앉아있는 19학번 새내기들 사이에서 45년 전 74학번으로 초라하게 앉아 있는 내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발그레한 19학번 새내기들과 당시의 내 모습이 오버랩되는 순간, ‘금강 물처럼 흘러간’ 45년 세월이 허무해서였을까. 갑자기 목이 메었던 것이다. 45년 전의 그곳은 논밭뿐이었고, 지금 이 학교의 한쪽 구석에 간신히 남아있는 돌 건물 한 채와 체육관, 연구동(지금은 박물관)이 전부였다. 지금은 종합대학이지만, 당시는 단설(單設) ‘공주사범대학’이었다. 읍내의 자취방에서 진창길을 걸어와 강의실에 자리를 잡으면, 한숨이 새어나오곤 했다. 점심 걱정, 강의 뒤 금강 백사장에서의 막걸리 파티 걱정, 과제 걱정, 저녁 걱정 등등. 지금 같았으면 목가적이었을 당시, 작은 몸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그런 추억의 찌꺼기들이 한 번에 몰려들어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으리라.

 

특강 후 그곳 교수들(송재일, 권대광, 송홍규, 정형근)과 학생들이 함께 단체 촬영을 했다. 두 학교 학생・교수의 멋진 만남의 자리였고, 공주대 국어교육과 교수들이 베풀어준 감동적인 호의의 현장이었다. 그곳 교수들과의 식사를 마친 뒤, 학생들은 분과별 답사의 현장으로 흩어졌다. 고전・민속분과는 곰나루 전설의 현장과 박동진판소리전수관으로, 현대분과는 나태주문학관 및 공산성으로, 언어학분과는 방언채록을 위해 정안면 월산2리 마을회관으로... 저녁 무렵, 숙소에 돌아온 학생들은 가벼운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배운 뒤에 경험한 흡족함이 그들의 표정에 역연했다. 그 뿐 아니었다. 이구동성으로 가는 곳마다 만난 공주 사람들의 ‘너그럽고 고운 심성’에 놀랐다고 했다. 그래서 공주라는 지역에 정이 간다고 했다. 사실 그건 덤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선물이었다. 가슴 속에 보이지 않는 선물을 듬뿍 안고 숙소로 돌아온 학생들은 모닥불 타오르는 광장에서 끝없이 울려 퍼지는 풍물소리로 피로를 풀었다. 아마도 그들은 꿈속에서 낮 동안 마을회관에서 만났던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을 다시 만났을 것이다. 미진했던 대화를 다시 이어가며 그 분들의 모습을 마음속에 다시 새겼을 것이다. 지워지지 않을 추억 속의 영상으로...

 

***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임을 갈파한 카아(E.H.Carr)처럼 부여와 공주에서 백제인들과 대화를 나누며 자신들만의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 분주한 학생들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학술답사를 통해 현재에 숨어있는 과거를 찾아내고,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복원하며, 미래를 창조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다시 강조하건대, 인생은 ‘보물찾기’의 역정이다. 그 보물들은 삶의 현장 구석구석에 ‘과거’라는 시간의 탈을 쓴 채 숨어있음을 그들은 깨달았으리라. 그래서 과거는 버려진 폐기물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창조하는 바탕 아니겠는가. 숭실동산에서 출발한 버스는 그들을 과거의 시공으로 이입시킨 타임머신이고, 그들은 과거∙현재∙미래를 통합하는 ‘시간여행’을 잘 마친 뒤 다시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 ‘시간 여행자들’인 것이다.

 

멋진 젊음들에게 내 사랑을 보내며...

 

2019. 5. 22.

 

백규서옥에서 45년 전의 공주사범대학 새내기 백규 씀

 

 

궁남지로 향하는 숭실 국문인들

 

궁남지와 포룡정

 

포룡정의 현액(<서동요>)

 

백제역사에 대한 설명을 듣는 학생들

 

고란사 극락보전 앞에서 대학원생들과 교수들

 

고란사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

 

고란사에서(왼쪽부터 임채훈 교수, 백규, 이경재 교수)

 

신동엽 시인 생가

 

신동엽 시인

 

신동엽 시인 생가(시인의 방 앞 현판의 시-부인 인병선 작)

 

신동엽 시인의 방

 

신동엽 시인의 육필

 

신동엽 시인 앞에서

 

숙소 사계절펜션의 뜰(커플상)

 

숙소 앞 호수

 

숙소 앞 호수

 

공주대학교 송재일 교수 특강

 

특강이 끝나고 학생들과 교수들(앞줄 왼쪽 다섯번째부터 공주대 권대광 교수, 정형근 교수, 송홍규 교수, 임채훈 교수, 송재일 교수, 백규, 이경재 교수)

 

고마나루 곰사당

 

고마나루 숲을 걷다가 만난 노송

 

박동진판소리전수관의 김양숙 관장

 

<사랑가> 학습을 마치고

 

국립공주박물관

 

월산2구 마을회관에서 방언채록 중

 

방언채록을 마치고

 

무령왕 부부가 잠들어 있던 목관(재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의 신발

 

공주 송정리 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

 

청양 본의리에서 출토된 백제 시대 사찰의 대좌

 

청춘의 열기마냥 타오르는 불꽃

 

그 옛날 학창시절의 강의동이자 본부건물이었던 돌건물. 50여년의 세월 속에 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궁남지에서 대학원생 이은란, 이다온

 

부여의 식당 앞에서 숭실 국문의 젊은 피(임선우, 이경재 교수,장현태, 이찬희, 라힘, 박일)

 

신동엽문학관의 김형수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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