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19. 10. 3. 17:54

<인재 최현의 조천일록 중에서>

 

                연행록이 급하다!

 

                                                                                                                                                                                       조규익

 

연초부터 중국의 한 젊은 학자가 이메일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하북대학(河北大學)의 량짜오(梁钊) 박사. 연행록에 관한 국제학술회의를 조직했으니, 꼭 참석하여 주제발표를 해달라는 요지였다. 처음 몇 번은 으레 던져오는 ‘낚시 성 이메일’이려니 시큰둥하게 여기고, 치지도외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거듭되는 연락을 받으면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연행록에 관한 내 글들을 읽으며 공부해온 입장에서 첫 국제학술대회의 주제발표자로 꼭 모시고 싶다’는 간절한 내용을 반복하여 보내왔다. 크게 내키지는 않았으나, 그의 말이 단순한 의례 차원의 ‘말 건넴’은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무엇보다 외국의 학자인 그가 내 글들을 읽었다는 점과, 악장에 밀려 한동안 책상 밑에 던져두었던 연행록을 재소환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내 마음을 움직였다. 악장에 매달려 정신은 없었지만, 그간 논문 두 편을 겨우 쓰고 팽개쳐 둔 최현의 <<조천일록>>을 이번 기회에 다른 관점으로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고, 그 덕으로 원고지 300매가 넘는 분량을 한 달에 걸쳐 탈고하게 되었다.

 

9월 27일~29일까지 하북대학 문학원 주최로 열린 “제1회 연행록과 연조문화(燕趙文化) 국제학술회의”는 내 경험상 내용에서도 의전(儀典)에서도 돋보이는 학술모임이었다. 그간 나도 국내에서 크고 작은 학술회의들을 조직하거나 참여해보기는 했지만, 궁핍함 속에서 무언가를 도모하고 이룬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피곤한 일이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 열리는 학술회의들에 가끔 참가해온 나로서는 중국인들의 치밀함과 대범함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기존의 학술대회들은 그 방면의 달인들이나 큰 기관에서 주관한 것들이니 으레 그러려니 해왔지만, 이번에는 30대 중반의 젊은 학자 량짜오가 동분서주하며 성사시킨 행사라는 점에서 놀라움이 더욱 컸다. 물론 학교 및 문학원의 전폭적인 지원이 결정적이었겠지만,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큰 배를 끌고 나가는 젊은 학자 량짜오의 활약은 인상적이었다. 한국 체류 10년 동안 갈고 닦은 한국어 실력도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그를 통해 중국 학계의 미래를 미리 훔쳐 본 것은 또 다른 소득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연행록에 그토록 관심을 갖고 있으며, 이제 막 자리를 잡은 대학의 핵심 과제로 만들고자 노력하는 것일까. 그에게 사연을 들었다. 중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한국의 전문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그였다. 그러나 전문대학 공부를 하던 중 그것이 자신의 길이 아님을 알게 된 그는 대구 소재 한 대학의 국어국문학과에 편입하여 즐거움 속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 대학을 졸업한 뒤 경북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에 진학하여 김문기 교수의 지도 아래 연행가사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게 되었고, 그 후 정우락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까지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연행록의 매력에 빠져든 그는 고향의 대학인 하북대학 문학원과 경북대학 인문대학 간 교류의 메신저 역할을 하면서 하북대학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연행록을 하북대학의 중점분야로 삼으려는 꿈까지 갖게 된 것이었다. 연행록연구소를 신설하고자 노력해온 1년여 사이에 그는 혼자서 한문 연행록 20여 권을 컴퓨터로 입력해내는 저력을 보이기도 했다.

 

연행사들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을 가로지른 다음 만나는 관문이 산해관이었다.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해관으로부터 북경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지역이 오늘날의 하북성인 계주(薊州) 영역이었다. 말하자면 하북성은 당시 연행사들이 반드시 거치던 노정의 핵심 부분인 셈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 중심에 서 있는 하북대학을 연행록 연구의 메카로 만들고자 하는 것은 매우 그럴 듯한 발상 아닌가. 그는 연행록 텍스트 모두를 컴퓨터에 입력하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여 연구자들에게 서비스하고, 연행노정을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꿈을 갖고 있었다.

 

사실 이런 일들은 오래 전부터 갖고 있던 내 꿈이기도 했다. 그런 꿈의 실현을 위해 이미 15년 전에 <<연행록연구총서>> 10권을 발간했고, 연행록 사전의 편찬을 기획하기도 했으며, 어떤 여행사 사장과 함께 연행노정들을 학생들의 ‘역사현장 답사 공간’으로 개발하는 문제를 논의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꿈으로 그치고 말 것이라는 위기감이 점점 현실화 되고 있던 차에 량짜오 선생으로부터 그런 계획을 듣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내 꿈은 좌절될 가능성이 많은 반면, 그의 꿈은 실현될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 방대한 한문 전적들의 컴퓨터 입력과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경험이 많고, 그런 작업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많으며, 그런 일을 수행할만한 인력이 풍부하다는 점은 중국이 갖고 있는 최고의 강점이었다.

하북대학이 갖고 있는 지정학적 이점에 량짜오 선생 같은 ‘한국통’이 주도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의 성사(盛事)일 것이다. 지금 중국 유수의 대학들이 연행록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무진 애들을 쓰고 있는데, 량짜오가 있는 하북대학 또한 그 그룹의 선두에 설 가능성이 없지 않아 보였다.

 

                                                     ***

 

당시 중국에 파견되던 사신들[정사-부사-서장관]과 자제군관들은 지체나 벼슬도 높았지만, 무엇보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리고 중국은 중세 이데올로기적 보편성의 본산이었고, 바깥세상으로 나 있던 유일한 통로였다. 중국의 현실이나 변화의 기미(幾微)는 우리 왕조의 안위나 존망에 절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글깨나 읽은 사람들은 그런 글들의 원산지인 중국을 선망한 것이 당연하고, 그 글의 내용을 현지에서 확인하고픈 욕망 또한 제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학식과 의식을 갖고 있는 지식인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행단에 합류하고 싶어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으리라. 정치와 외교, 안보 등 국사에 보탬을 주고자 하던 공적 사명감과 함께 중국의 생생한 속살을 견문하고자 하던 ‘앎의 욕구’가 기록으로 구현된 것이 바로 연행록이었다. 이처럼 최고의 지식인들이 현장에 가서 보고 듣는 것을 기록한 것이야말로 후대의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사료(史料)’가 아닌가.

 

반대로 중국 정부나 학자들이 연행록을 보면서 느낄만한 점들을 생각해보자. 조선의 문사들이 중국의 영토 안에서 옛 한자와 고문으로 적어놓은 ‘중국인들의 민낯’을 확인하며, 오늘날의 중국인들은 당연히 ‘호감[혹은 호기심]과 불쾌감[혹은 당혹감]’의 양가감정(兩價感情)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도 중국학자들의 입장에서야 좋든 싫든 그런 기록들이 지닌 의미와 가치를 무궁한 탐토[探討/탐구와 토론]의 대상으로 받아들였을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호감과 불쾌감의 정체를 좀 더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언필칭 ‘속방(屬邦)’의 한사(寒士)들이 ‘대국(大國)’의 규모 앞에서 스스로들을 ‘배신[陪臣: 제후의 신하가 천자의 나라에 와서 자신을 낮춰 부르던 일인칭 대명사]’이라 칭하며 머리 조아리는 모습에서 뿌듯함을 느꼈겠지만, 중국의 어두운 면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부분에서는 불쾌함과 부끄러움도 느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중국의 학자들이 자신들의 영역 밖에서 생산된 한적(漢籍)[이른바 역외한적(域外漢籍)]들에 큰 관심을 두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들의 존재 확인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수집∙분류∙분석∙가공하는 일에 힘을 쏟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이 생각하는 이른바 ‘중국 변방’의 나라들 가운데, ‘한적(漢籍)의 양으로나 질로 보아 한국을 능가할만한 나라는 없다. 우리는 연행록을 포함, 경(經)∙사(史)∙자(子)∙집(集)의 범주 안에 묶이는 한적들을 무수하게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중국의 지식사회가 우리나라의 이런 한적들을 보며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번에 만난 량짜오 박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학자들로부터 나는 순수하게 학구적인 이유로 연행록을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매우 정치적인 국가 수뇌부의 입장에 서면 이런 생각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변함없이 패권을 추구하는 중국의 지도부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대한 향수를 버릴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이란 폭력적인 명칭으로 과거사를 날조하고 있는 그들로서 연행록에 내포된 ‘지배-피지배’의 정치 논리적 도식을 간과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고구려나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에 편입시킴으로써 한국의 고대사를 훼손하고 미래 세대 패권전쟁의 무기로 삼으려는 그들에게 연행록은 역사날조에 유용한 근거 자료일 따름이다. 연행록의 바탕을 형성하는 ‘조공-책봉’의 도식이야말로 미국과 동맹관계로 존재하는 한국을 탈취하여 자기네 속국으로 만들려는 중국 지도부의 의도를 역사적∙논리적으로 뒷받침하는 완벽한 근거 아닌가.

이미 중국정부로부터 ‘국가프로젝트’의 지원을 받은 중국 유수의 몇 대학들에서는 연행록 본문의 입력을 끝내고 데이터베이스 구축 작업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만간 그들은 그 서비스를 웹상에서 전 세계인에게 제공할 것이다. 어쩌면 조만간 한국인들도 연행록의 모든 것을 알기 위해 ‘돈을 내고’ 중국의 웹에 접속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세계의 인문학도들이 세계 기행문학 사상 첫 손가락에 꼽히는 연행록을 ‘중국의 것’으로 오해하고, 그것을 배우거나 연구하기 위해 한국 아닌 중국으로 유학하는 일이 일반화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 쯤 되면, 중국의 지도부는 과감하게 연행록을 유네스코에 자기네가 보유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려 할 것이다. 텍스트가 한문으로 되어 있고, 중국의 ‘문화∙제도∙풍습∙자연’에 대한 견문이 주된 내용으로 되어 있는 기록이 연행록이다. 그것을 중국인들이 일일이 컴퓨터에 입력하고 데이터베이스로 가공하여 전 세계로 제공하는 마당에 ‘그것이 대한민국의 기록유산’이라고 우리가 아무리 항변한들 세계의 누가 받아들여주겠는가. 기록자가 ‘우리나라 사람들’이라고??? 분통 터지는 일이지만, 기록자인 사신들은 언필칭 자신들을 ‘중국 천자의 배신(陪臣)’이라 했다. 기록 문자도, 내용도, 기록자도, 기록의 가공 및 보유자도 모두 중국인들이라면, 어느 구석에서 우리의 연고권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연행록에 대해서만큼은 우리의 기존 태도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먼저 국가나 연구기관에서 집단 작업을 추진했어야 한다. 자료에 대한 완벽한 수습을 광범위하게 수행했어야 하고, ‘분류→분석→입력→번역→데이터베이스 구축→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일관작업으로 진행했어야 한다. 연행록에 관한한 지금이 비상시국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순서를 바꾼다면, 그나마 만회할 방도가 없지는 않다. 우선 정부의 담당 관청은 국내 연행록 분야의 학자들과 만나 각 분야에서 진행된 연행록 연구현황을 파악해야 한다. 그런 다음 연행록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지금 즉시 추진해야 한다. 세계기록유산 등재의 추진과 함께 연행록 텍스트의 ‘조사∙확보∙분류∙입력’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중국이 앞서 시도한다면, 우리는 소중한 우리의 유산을 눈뜨고 강탈당할 수도 있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제 것도 못 지키는 ‘세계의 바보국민’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인재 최현의 조천일록 중에서>

 

<중국 하북대학의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19. 9. 22. 19:42

                                                                                                                                                             조규익

 

 으레 ‘조씨’는 ‘趙氏’려니 했는데, 얼마 전에 ‘曺氏’임을 알고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조 장관 선친의 항렬이 ‘현(鉉)자이니, 장관이 내 손자뻘임도 알게 되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문중에서 고관하나 나왔구나!’했는데, 마냥 자랑스러워 할 상황이 아님을 깨달은 요즈음. 눈 뜨고 귀 열기가 부담스러워졌습니다. 더 이상 인내해서는 안되겠다 싶어 몇 마디 고언을 전하고자 합니다.

 

 최근 아파트 놀이터를 지나다가 초등학교 아이들이 재잘대는 말 속에서 언뜻 ‘조국’이란 단어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말끝에 깔깔대는 아이들의 모습으로 미루어 결코 좋은 말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꼬마들이 공부나 학교교육을 통해 ‘조국이 우스운 인물’임을 알게 되었을 리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집안에서 툭하면 내뱉는 어른들의 말을 들었거나, 연일 TV나 인터넷 포털 등에 도배되는 조 장관 관련 기사들을 접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어른들은 이미 조 장관의 이름에 식상해 있고, 이제 초딩들까지 입에 올릴 정도면, 장관은 이미 ‘전 국민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안주나 횟감이 되어 있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런데, 어느 담소 자리에 가도 장관을 쓴 소주의 안주로 삼거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욕설의 대상으로 삼을 뿐, 단 한 마디 칭송이나 방어의 말은 들을 수 없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일부 과격론자들의 술자리들에서 ‘조국 체포조 결성’ 농담도 심심찮게 나올 정도로 상황이 나빠지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해결 책 없이 조금 더 지날 경우, 상황이 극적으로 악화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사고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상황판단이 매우 안이하다는 점. 그게 조 장관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매일 터져 나오는 혐의들[그 중에는 혐의의 수준을 넘어 꼼짝없는 사실들로 보이는 것들이 대부분임]의 바다에서 용케 익사하지 않고 버텨 나가는 모습이 불가사의하게 느껴지는 나날입니다. 조 장관은 아주 강한 멘탈리티의 소유자이거나 ‘공감능력 제로의 칠푼이’, 둘 중 하나임에 틀림없습니다. 어느 경우라 해도 지금 저를 포함한 이 나라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은 미구에 도래할 비극을 예견할 수 있고, 조만간 목격하게 될 비극의 참상과 그로 인한 연민을 이겨내기 위한 ‘자기방어 메커니즘’을 슬슬 준비하고 있다는 점쯤은 알아주기 바랍니다.

 

 모든 비극의 근원은 ‘욕망’입니다. 저는 최근에 얻어 들은 가족사와 개인사를 통해 조 장관이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욕망의 본질을 나름대로 분석하게 되었습니다. 조 장관이 자식들을 키우고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부모가 저질러선 안되는 ‘반생태적・반인간적・반윤리적・반사회적’ 판단이나 행위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부와 권력의 추구 등은 결국 조 장관이 태어나고 자라온 과정에서 물려받은 생존본능의 발현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엊그제인가요? 조 장관과 함께 공부한 82학번 친구가 이렇게 술회했다지요? “조 장관은 운동권이면서도 그리 철저하게 운동하지 않은, 이른바 '반(半)운동권'인물”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현 대통령이 ‘얼치기 좌파’임은 '공인된' 한국 좌파운동의 대부 한 분이 이미 폭로한 바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이 ‘제대로 된 운동권’이었다면, 지금 그 정도의 권좌에 앉을 수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운동에 모든 걸 걸고 나섰다면, 역사의 ‘거름’으로 분해되어 전설이 되었거나 간신히 역사책의 한 줄 기록으로 남는 데 불과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수고와 보상이 정확하게 이루어지는 역사를 살아왔다면, 그 운동권의 대부가 권력과 부를 차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이 역사이고, 또 그런 점이 역사의 묘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치기들은 역사가 수여하는 전리품을 독식하기 위해서 운동권의 명찰만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진짜 운동가들’의 희생을 통해 남겨진 전리품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한 대통령이나 조 장관 등은 ‘얼치기 운동가’들에 불과합니다.

 

  ‘진짜 운동가들’의 내면은 진심이나 진실로 가득 차 있어, 더 이상 현실적인 욕망을 채울 공간이 없지만, ‘얼치기 운동가들’의 내면에는 빈 곳이 많습니다. 그들이 필사적으로 권력과 부를 거머쥐고 싶은 것도 그 내면의 공간이 허전하게 텅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채우기 위해서라면, 가족도, 부모형제도, 친구도, 민족도 안중에 있을 턱이 없습니다. 이런 얼치기들일수록 치밀한 이론으로 치장한 멋진 위장막을 만들어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늘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구사하기 마련인 미끈한 언변을 ‘최종병기’로 갖춘 그들입니다. ‘조 장관의 말 가운데 90% 이상이 거짓’이라거나 ‘대통령의 말을 들으면, 그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사람들의 평가도 그런 점을 뒷받침합니다.

 

이제 조 장관은 ‘얼치기 운동권’의 위장을 벗고 진정한 아버지와 남편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어떤 사법적 판단이 내려지든 더 이상 장관으로서 나라의 법무행정을 총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장관직을 억지로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하고 급한 것이 가족을 본래의 자리로 모으는 일입니다. 자신의 죄를 서둘러 고백한 뒤 사법적 판단을 기다리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의 방책입니다. 그러자면, 장관직을 던져 버려야 합니다. 누가 집어가든 장관직을 수행할만한 인재는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만약 지금도 장관직에 미련을 갖고 있다면, 그건 조 장관과 가족들을 속속들이 파괴하고, 종국에는 이 정권까지 산산조각 내게 될 것입니다.

 

자랑스런 선조 남명 조식(曺植) 선생은 <민암부(民巖賦)>에서 ‘백성은 물과 같아 임금을 받들기도 하지만, 나라를 엎어버리기도 한다’는 <<순자(荀子)>> 왕제(王制) 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백성을 두려워하는 정치를 하라’는 메시지를 남기셨습니다. 어쩌면 요즘의 시국을 미리 점쳤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조 장관이 권력에 미련을 둘수록 오점은 더욱 늘어날 것입니다. 지금 즉시 맞지 않는 옷을 벗어던지고, 부디 인간 본연의 양심을 회복하기 바랍니다.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19. 9. 2. 16:36

*고전과의 대화: 계간 <<정형시학>> 24(2019 가을호)

 

 

죽어 이별의 노래 <가시리>

 

 

 

 

 

 

                                                                                                             조규익(숭실대 교수)

 

 

 

하나/「가시리 평설」 정전화(正典化)의 문제

 

“소박미와 함축미, 그 절절한 애원, 그 면면한 정한(情恨), 아울러 그 구법(句法) 그 장법(章法)을 따를만한 노래가 어디 있느뇨. 후인(後人)은 부질없이 다변(多辯)과 기교와 췌사(贅辭)와 기어(綺語)로써 혹은 수천어(數千語) 혹은 기백행(幾百行)을 늘어놓아 각(各)히 자기의 일편(一片)의 정한을 서(叙)하려 하되, 하나도 이 일편(一篇)의 의취(意趣)에서 더함이 없고 오히려 이 수행(數行)의 충곡(衷曲)을 못 미침이 많으니, 본가(本歌)야말로 동서문학(東西文學)의 별장(別章)의 압권(壓卷)이 아니랴.”<「가시리 평설」, <<여요전주(麗謠箋注)>>, 을유문화사, 1947, 424쪽>

 

이 언술은 고려속가(高麗俗歌) <가시리>에 대한 양주동 선생의 명쾌하면서도 자못 도발적이기까지 한 평가인데, 오늘날까지 후학들은 ‘그 평가의 무오류성’을 변함없이 신봉해 왔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그 평가의 합리성을 입증하고 강화하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고전시가 연구의 열기가 식어가고 있는 시대 조류의 와중에서 반대논리나 통합적 극복의 논리는 등장하지 못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 평가 내용의 핵심적 정서는 ‘사랑하는 남녀 가운데 남겨진 자가 떠나는 자에게 건네는 원망과 재회의 소망’, 말하자면 ‘살아 이별을 당하는 자의 지극한 심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

 

필자는 어린 시절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이 글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무엇보다 현란한 문체와 수사가 인상적이었고, 그 후 대학원 과정 이수 중 <<여요전주(麗謠箋注)>>[1947년 판]에 실린 그 글을 정독하면서 그 분의 생각에 좀 더 깊이 매몰되고 말았다. 「가시리 평설」이 <가시리> 해석의 정전으로 굳어지면서 지금까지 누구도 쉽사리 그 정의나 평가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려 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필자의 이 글은 학술 논문이 아니고, 최소한 학술토론의 문건으로 제공될 가능성도 없는 소품이니, 이 글을 통해 <가시리>에 대한 기존 논의와 평가를 반박하거나 나만의 새롭고 참신한 견해를 제시하기에는 적잖이 조심스럽다. 최근 들어 필자는 우리 옛 노래[혹은 노래문학]들 가운데 상당수가 ‘살아 이별’ 특히 ‘사랑하는 당사자들의 헤어짐’보다는 ‘죽어 이별’의 넋두리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공무도하가>[혹은 <공후인>]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 오열하는 아내의 넋두리임이 분명하고, 현대문학 초기 김소월의 <진달래꽃>도 그 맥을 이은 ‘죽어 이별’의 노래임을 말한 바 있다. 그 맥락에서 <가시리>야말로 ‘살아 이별’의 노래가 아니라, 오히려 ‘죽어 이별’의 현장에서 내뱉던 넋두리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은가.

 

그런 넋두리가 아름다운 곡조에 실려 궁중악의 무대에까지 오르면서 뒷사람들에게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 노래’로 오해되었거나 살짝 바뀌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지만, 그 원천 텍스트를 넋두리로 본다고 무조건 지나치다 탓할 필요는 없다. 비록 인상비평에 머물고 말지라도, 시조 창작의 다양한 담론들의 장(場)인 <<정형시학>>에 이 문제를 공론화 하려는 것은 현 시점에서 우리 전통 정서의 본질에 대한 탐색이나 그런 정서가 근・현대에 들어와 어떤 양상으로 예술화되었는지에 대한 모색이 절실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 이별의 콘텍스트

 

<가시리>를 ‘살아 이별’로 보는 양주동 선생의 생각은 다음의 글에 결정적으로 나타난다.

 

“처음 가신단 말씀을 들었을 때엔 그것이 오히려 농담(弄談)인 양 혹시 나를 울려 보려는 짐짓으로만 생각하였더니, 급기야 그것이 참인 줄을 알자, 또 얼마나 임께 기나긴 말씀을 하소연하였던고. 그러나 그것도 지금엔 모두 다 쓸데없는 말, 정작 임이 떠나시는 마당에 다시 무슨 경황으로 어젯 날의 기나긴 사연을 되풀이할꼬. 일체의 장황한 사설(辭說)은 지금엔 모두 췌사(贅辭)가 아니랴! 급박한 감정과 얼크러진 심서(心緖)는, 그러매로 일체의 군소리와 일체의 잔 생각을 거부하고, 다짜고짜로 원사(怨辭)로 돌진할 밖에 없는 것이다.”<「가시리 평설」, 424~425쪽>

 

양주동 선생이 <가시리>를 ‘살아 이별’, 그것도 ‘사랑하는 남녀의 이별’로 단정하고 평설을 썼다는 점은 이 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어쩌면 선생이 평설을 쓸 당시에 <가시리>가 ‘살아 이별’이냐 ‘죽어 이별’이냐의 문제로 살짝 갈등하셨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상상으로 예측해 보건대, 잠시 동안 갈등하신 뒤 예의 그 유쾌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쾌재를 부르시면서 즉각 당신의 생각을 내놓으셨으리라.

 

“‘살아 이별’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일시 나로부터 멀리 떠나가긴 하나, 가는 자의 마음이 바뀌면 다시 만날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지. <가시리>의 뒷부분[“붙잡아 두고 싶지마는/서운하면 아니 올세라/서러운 임 보내드리니/가시는 것처럼 돌아오소서”]좀 보게나. 이 사람아, ‘죽어 영이별’하는 상황에 ‘가는 것처럼 돌아오라’고 말할 수 있겠나?”

 

이렇게 그 분은 희희낙락 큰 소리 치셨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자. 사람이 죽었을 때 요즘은 의사가 맥을 짚어보거나 검안한 뒤 사망 선고를 내린다. 그런 다음 염을 하고 빈소로 옮긴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향촌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내 어린 시절의 경험에 비추어 말해 보자. 그 시절 사람이 죽고 나면 즉시 초혼제(招魂祭)를 지냈다. 그러나 초혼제를 지내기까지 거쳐야 할 절차가 있었다.

 

일단 사람이 죽으면 마을 어른 한 분이 사자(死者)의 코앞에 솜털을 드리워 통기(通氣) 여부를 가늠하며 사망 여부를 판단했다. 설사 솜털이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즉각 ‘사망’이라 단정하지 않았다. 다음 절차는 사자의 옷가지를 들고 지붕으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휘두르며 큰 소리로 “고(皐) 아무개 복(復)! 복(復)! 복(復)!” 하면서 육신으로부터 빠져나간 혼을 길게 부르는, 슬프고 장엄한 의식을 행했다. 전통적으로 우리에게는 사람이 죽으면 콧구멍으로 영혼이 빠져나가 시신을 맴돌다가 북쪽 하늘로 날아간다는 믿음이 있었다. 왜 북쪽이었을까. 아마 사람이 죽은 뒤 묻힌다는 ‘북망산’에서 따온 방위개념의 반영이었을 것이다. ‘육신은 북망산으로, 영혼은 북쪽 하늘로’ 라는 생각 때문이었으리라.

 

육신을 빠져나간 혼이 되돌아오면, 육신은 다시 전처럼 살아나게 된다고 믿었다. 그것이 환혼(還魂)이다. 그렇게 육신을 빠져나가 하늘나라로 가는 혼을 되돌리기 위해 부르는 행위가 초혼이다. 그래서 초혼과 환혼은 우리 전통사회에서 가장 슬프면서도 장엄한 의식이었고, 사자의 지친(至親)들은 그 순간 가장 크고 서럽게 울어야 했다. 그 때의 울음소리가 클수록 떠나가던 혼이 쉽게 듣고 돌아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전통사회의 곡비(哭婢)도 실재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무작정 울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 말을 해야 했다. 떠나는 혼이 알아듣고 발길을 돌릴 만큼 간절하고 슬퍼야 했다. 그 순간의 말이 바로 넋두리다. 넋두리는 ‘넋[혼(魂)]+두리[환(還)]’, 즉 ‘떠나가는 혼을 되돌리는 말’이다. 남편이 죽는 순간 쪽진 머리를 풀어헤친 아낙네가 남편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자신의 가슴을 치며 “나 혼자 어찌 살라고 떠나십니까? 못 가십니다, 정녕 못 가십니다!”라고 울부짖는 그 말들이 바로 넋두리다.

 

<공무도하가>는 전형적인 ‘넋두리 문학’이고, 김소월의 <초혼>은 그야말로 초혼 행사를 시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김소월의 <초혼>과 긴밀하게 연관되는 노래가 <진달래꽃>이라는 사실이다. 지금 학자들은 <진달래꽃>이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시라 한다. 그 때의 이별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살아 이별’을 말하는 것임은 양주동 선생이 <가시리>를 ‘살아 이별’의 노래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 관점이다. 한국문학 연구가 한 세기 가까이 진행되고 있지만, 지금껏 그런 고정관념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다.

 

분명히 김소월의 <초혼>과 <진달래꽃>은 ‘죽어 이별’을 노래한 자매편들이고, <가시리>와 <진달래꽃>은 시대를 격하여 ‘죽어 이별’의 정서로 연결되는 노래 혹은 시문학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공무도하가>와 <초혼> 사이에 위치한 것이 <가시리>이고, <가시리>와 상통하는 ‘죽어 이별’의 노래가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다.[*<진달래꽃>에 관해서는 다음 고에서 시조와 결부시켜 상론할 예정임.]

 

그런데 ‘넋두리 문학’의 화자는 예외 없이 여성이다. 전통적으로 넋두리는 여성 화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상이 났을 때 초혼은 남성이 주관하나 넋두리는 여성 전담이었다. 지붕에 올라가 사자의 옷을 흔들며 구만리장천을 향해 외치는 ‘초혼’은 굵은 목청을 지닌 남성만이 행할 수 있었다. 남성화자가 등장하는 김소월의 <초혼>을 읽어보시라. 그러면 우리 전통사회의 초혼 행사를 역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셋/<가시리>의 텍스트와 넋두리의 미학적 의미

 

자, 이제 <가시리>가 ‘죽어 이별’의 노래임을 입증하기 위해 그 본문을 들어보기로 한다.

 

가시리 가시리잇고(①)

버리고 가시리잇고(②)

날러는 어찌 살라하고(③)

버리고 가시리잇고(④)

붙잡아 두고 싶지마는(⑤)

서운하면 아니 올세라(⑥)

서러운 임 보내드리니(⑦)

가시는 것처럼 돌아오소서(⑧)

 

<가시리>는 <<악장가사>>∙<<시용향악보>>∙<<악학편고>> 등 조선조 관찬(官撰) 악서(樂書)들에 실려 있다. 매 연 끝에는 “위 증즐가 태평성대”라는 후렴구가 붙어 있는데, 반복되는 그 부분을 제외하고 인용한 것이 바로 이 글의 텍스트이다. 내용상 이 후렴구는 <가시리>가 궁중악으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위’는 감탄사, ‘증즐가’는 현악기를 긁어내는 소리, ‘태평성대’는 ‘임금이 통치하는 지금의 시대가 태평하다’는 의례적 찬사로서 이 노래가 궁중정재(宮中呈才)에서 불리던 노래임을 보여주는 단서들이다. 고려조와 조선조 궁중에서는 왕을 비롯 지배층을 위한 가・무・악(歌舞樂) 융합의 궁중무대예술이 공연되었고, <가시리>는 무대예술인 속악정재(俗樂呈才)들 가운데 하나에서 불린 노래였다.

 

노래의 ①~④는 넋두리의 전형으로서 <공무도하가>의 그것과 일치한다. ⑤~⑧은 넋두리에 덧붙어 그 미학적 완성도를 높여주는 부가적 부분이다. 만약 ①~④가 전부라면, 이 노래는 단순한 넋두리를 넘어설 수 없다. 그럴 경우 이 노래는 시적 자아의 실존적 좌절이나 운명의 장벽에 대한 한탄으로 그치기 때문이다. 단순한 넋두리를 넘어 서고자 하는 시적 언술을 통해 상황을 합리화 하거나 죽음에 대한 자아의 초극의지를 피력하기 위해 덧붙인 것이 후반(⑤~⑧)이다. ‘죽어 떠나는 임’과 이별하며 맞이한 실존적 상황을 아름다운 노래로 승화시킨 힘은 창작 및 가창계층의 철학이나 미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따라서 ①~④의 단순 비극미는 ⑤~⑧의 부가적 미학으로 승화되었다.

 

넋두리 자체인 ①~④와 연결시키지 않을 경우, ⑤~⑧은 단순히 ‘살아 이별’의 현장에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당부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넋두리인 ①~④를 복합 심리적으로 세련화 시킨 것이 ⑤~⑧임을 즉시 알아차릴 수 있게 한 것도 ‘죽어 이별’을 ‘살아 이별’인 듯 위장함으로써 죽음의 절대성을 비켜 가고자 한 미학적 장치의 힘이었다.

 

⑤~⑧의 ‘붙잡아 두고 싶다’는 것은 보내는 사람 뿐 아니라 떠나는 사람도 갖고 있었을 현실적 삶에 대한 집착을 암시한다. 그러나 한 번 떠나면 그만인 죽음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화자로서는 그 절망감으로부터 자아를 지켜야 했고, 그 구체적 방어기제의 작용으로 나타난 표현이 바로 ‘서운하면 아니 올지 모른다’는 언술이다. 사실 이 경우의 ‘서운함’이란 ‘죽어 떠나는 자’가 갖고 있을 마음 상태다. 화자로서는 ‘죽어 떠나는 임’이 자신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떠나길 바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렇게 표현한 것은 돌아 올 수 없는 길을 떠나는 임이기에 그가 돌아오지 못할 명분 정도는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당치 않은 이유이겠지만, ‘죽어 떠나는 임’이 자신에게 서운함을 가지는 것처럼 그려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살아남은 자신’이 ‘죽어 떠나는 임’에게 전혀 마음의 짐을 느낄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이 노래의 화자는 ‘죽어 이별한’ 사람을 ‘나를 싫어해서 떠난’ 사람으로 치환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바꿔치기’란 ‘죽어 떠나는 자’에 대하여 ‘살아남은 자’가 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일 수 있으며, ‘죽어 떠나는 자’에 대한 ‘살아남은 자’의 심리적 부채의식을 줄일 수 있는 최고의 방책이기도 했다. 상대가 ‘서러운 임’이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실 ‘살아남은 자’와 ‘죽어 떠나는 자’ 가운데 누가 이 말의 주체가 되느냐에 따라 서러움의 의미는 달라진다. 전자가 주체일 경우 사랑하는 임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죽음의 절대성 때문에 서러움을 느낀 것이고, 후자가 주체일 경우 이승의 삶이나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단절되는 데서 서러움을 느낀 것이다. 그러한 내재적 의미의 모호성이나 분열적 자아는 ⑧에서 매끄럽게 통합된다.

 

‘가시는 것처럼 돌아오라’는 말 속에서 서로 다르게 표현된 두 주체[남겨진 나/떠나는 임]의 감정은 하나로 합쳐지고 그 이전 단계의 애매성 또한 사라진다. 그래서 ⑧ 또한 넋두리[환혼]이자 초혼이 되는 것이다. ‘이승의 미련을 훌훌 털고 떠나신 것처럼 나를 힘들게 하지 말고 다시 돌아오라’는 당부야말로 전통 시대 초혼의 모티프와 하등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넷/<가시리>는 ‘죽어 이별’의 노래다

 

<가시리>는 궁중의 속악정재에서 불린 노래, 즉 속악가사였다. 사실 궁중 무대예술인 정재는 임금을 대상으로 하던 예술이었다. 그런 만큼 여악(女樂)들은 춤과 노래로 임금을 송축하고, 예술적 한계 안에서 ‘연모의 정’을 암시하기도 했다. 텍스트와 콘텍스트, 상호텍스트의 측면에서 면밀히 관찰하지 않을 경우, <가시리>가 ‘살아 이별’의 노래인지 ‘죽어 이별’의 노래인지 알기 어려운 것도 그 때문이다.

 

노래에서 화자가 의도한 궁극적 결과는 ‘죽음의 초극’이다. 전통 넋두리 노래를 전반에 제시하면서 죽음의 비극성을 바탕에 깔았고, 후반의 분열적 언술을 통해 죽음을 초극하고자 한 것이다. 전반의 넋두리는 사랑의 종말이라는 비극을 초래했으나, 후반의 언술을 통해 죽음이 초극되면서, 그것은 사랑으로 전환되었고, 결국 그 사랑은 극대화 되었다. 따라서 사랑과 죽음은 모순적 관계이자 화합의 관계이고, 궁극적 화합의 불가피성을 내포하면서 다시 분열의 미로로 빠져들기도 하는 관계이다.

 

무대 위의 여악(女樂)들이 임금에게 수(壽)와 복(福)을 바치는 서왕모 등 신선의 퍼스나를 갖추는 것은 당시 당악(唐樂) 정재들에 흔한 장치였고, 당악정재와 상호 텍스트의 관계를 맺고 있던 속악정재들의 경우도 임금에 대한 송도(頌禱)나 축수(祝壽)는 공통된 모티프였다. 그러니 무대 위에 등장한 여악들은 임금에게 최고의 사랑을 바쳐야 했다. 평범하지 않은, 아니 오히려 극적인 사랑을 요구했다면, ‘죽음으로 패러프레이즈된 사랑’도 가능한 것이고, 넋두리의 외피(外皮)를 쓴 사랑담론 또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가시리>는 단순히 ‘살아 이별’의 노래가 아니라, ‘죽어 이별’의 노래,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죽음을 노래하는 넋두리를 바탕으로 죽음을 극복해낸’ 노래이다.

 

텍스트의 외면 만으로는 ‘살아 이별’인지 ‘죽어 이별’인지 애매모호하다. 이면까지 뒤집어 봐야 양자는 대립적이면서도 궁극적으로 통합되는 주제들임을 알 수 있다. 죽음을 노래한 이면에 궁극적인 사랑이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노래를 ‘죽어 이별’의 노래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해석처럼 이것을 ‘살아 이별’의 노래로 본다면, 그 속에 들어 있는 죽음과 죽음에 대한 초극의지를 간과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시리>를 좀 더 복합적으로 살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제 <가시리>의 이면을 들여다 볼 만큼 우리의 해석적 안목은 충분히 확장・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조규익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아너 펠로우 교수(Honor Soongsil Fellowship Professor). 인문대 학장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소장. 도남국문학상・성산학술상・한국시조학술상 등을 수상. LG 연암재단 해외연구교수로 UCLA에서 ‘재미한인 이민문학’을, 풀브라이트 학자(Fulbright Scholar)로 OSU에서 ‘해외한인문학과 비교문학’을 연구. <<조선조 악장 연구>>・<<북한문학사와 고전시가>>・<<동동: 궁중 융합무대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 외 다수의 저・편・역서와 논문들을 발표했음.

홈페이지(http://kicho.pe.kr) 및 블로그(http://kicho.tistory.com) 참조.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19. 7. 20. 08:33

 

 *이 글은 <<동동動動: 궁중 융합무대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민속원/<<한국문학과 예술>> 30집 게재)에 대한 서평으로, 필자의 허락을 받고 퍼왔습니다.

 

 

궁중 융합무대예술 ‘동동(動動)’의 본질에 대한 모색과 결실-<<동동動動: 궁중 융합무대예술, 그 본질과 아름다움>>(민속원)을 읽고-

 

 

                                                                                                     하경숙(선문대 교양학부 계약제 교수)

 

 

이 책은 고려조와 조선조의 궁중 연향에서 공연되던 가무악 융합 무대예술 ‘동동’에 관한 공동저술(저자: 조규익·문숙희·손선숙·성영애)이다. ‘동동’은 고려 속악정재들 가운데 하나로서 아박(牙拍)이란 이름으로 조선조에서도 연행되던 가무악(歌舞樂) 융합의 궁중무대예술이다. 최근까지 <동동>은 ‘문자 텍스트로서의 동동’일 뿐이었고, 그것은 ‘고려속요·고려가요·여요·려가’등의 명칭으로 부르던 시문학 텍스트일 뿐이었다. 초창기 연구자들이 명칭에 대하여 갖고 있던 편견과 그로부터 확립된 문제들을 타개(打開)하고자 문학·음악·무용을 연구하는 저자들이 ‘동동’ 정재(呈才)의 융합예술적 성격을 분석적으로 고찰하기 시작했다. 중세왕조의 임금이나 고귀한 존재를 대상으로 토로한 불멸의 사랑과 불변의 서정이 융합 무대예술로 응집되었다는 것이 ‘동동’ 논의의 출발점이다. 특히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시간이 흘러도 계절이 바뀌어도 바치는 자의 사랑은 변함없음을 가·무·악으로 표현”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가무악 융합의 미학적 본질을 점검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결국 ‘동동’은 전통무대예술의 진수로 꽃피어났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저자(조규익·문숙희·손선숙·성영애)들은 <<대악후보>> ‘동동’의 리듬을 해석하여 선율을 찾고, 그 선율에 <<악학궤범(樂學軌範)>> 소재 <동동>의 노랫말을 구체적으로 붙여, 그 노래와 무용의 관계를 밝힘으로써 속악정재 ‘동동’이 지닌 가무악 융합의 본질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각 장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저자들의 의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 책은 전체 7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는 「총서」, 2부는 「<동동>- 텍스트의 정체」, 3부는 「<동동>의 장르적 속성과 원형 모색」, 4부는 「조선전기 ‘동동’의 가무악 융합 양상」, 5부는 「조선전기 아박무 복원연구」, 6부는 「총결」, 7부는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노랫말 원문과 현대어 역, 복원음악 악보가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문헌과 재현 아박무(牙拍舞)를 비교·검토하여 상이점을 찾고, 조선전기 ‘동동’ 중기의 무용구조와 복원에 필요한 내용을 상세히 살피고 있다.

 

1부에서는 속악정재 ‘동동’의 성격을 살펴 그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세밀하게 분석하고 있다. 또한 장르적 속성이나 명칭 등과 함께 학계에서 미해결된 속가의 문화·예술적 측면을 면밀히 설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동동’이 그동안 하나의 공연물로 연구되지 못한 원인은 악보와 무보 해석의 불완전성에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동동’의 음악을 찾아야 하고, 그 음악에 노랫말을 융합해야 하며, 최종적으로 노래와 무용을 융합함으로써 가무악 융합의 속악정재 ‘동동’을 온전히 복원”(21쪽)하는 과정을 통해 기존의 담론을 뛰어넘어, 정재의 악곡과 노랫말 모두가 ‘동동’이라는 구체적인 융합예술작품으로 구현되는 핵심임을 밝히고 있다.

 

2부 「<동동>-텍스트의 정체」(조규익)에서는 ‘동동 텍스트가 지닌 문화·예술적 본질과 지향성’을 찾고 ‘송도지사(頌禱之詞)와 선어(仙語)’의 관계, ‘놀이와 선어의 상관성’등을 규명했다. 저자(조규익)가 “‘동동’은 생산 시점 이후 현재까지 노랫말과 음악·무용의 인접분야들이 하나로 융합된 텍스트로 존재해왔고, 그 예술·문화적 콘텍스트 양상 또한 적어도 근대 이전까지는 유지”(62쪽)되었다고 밝혀, 텍스트 하나만을 적출하여 해석하는 작업의 위험성을 강조한다. 이는 원천적 오류를 초래하는 일로서, 이를 방지하기 위해 콘텍스트(context) 의 현실을 살피는 작업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동동’에 송도의 말이 많고, 그것들은 ‘신선의 말’을 본뜬 것이라 한 <<고려사 악지>>의 언급이야말로 속악정재 ‘동동’이 당시의 당악정재들과 상호텍스트적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한다는 것이 저자(조규익)의 주장이다. 즉 당대 궁중악 중 당악과 속악은 ‘임금의 수와 복’을 송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행되던 예술장르였고, 그 범주에서 공연되던 정재들은 송도적 모티프의 구현을 지향하던 공연예술의 형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또한 ‘동동놀이[動動之戱]’라 지칭한 <<고려사 악지>> 속악조에 따르면 동동이 지닌 놀이적 성격이 상세히 나타나고 있으며, 동시에 융합예술체로서의 놀이적 면모를 보여준다. 놀이에 상정된 대상은 임금이며 원시 제천행사들에서 공연되던 놀이들이 후대의 정재들에 이르러 그것들의 의례화·질서화를 통하여 완성된 예술의 모습으로 구현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당악정재의 창작원리나 동기·구조 등과, ‘동동’을 비롯한 속악정재들이 상호텍스트적 연관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 등을 상세히 보여준다. 이는 속악정재 ‘동동’이 당악정재의 악장들을 본뜬 송도를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패러프레이즈함으로써 속악정재 나름의 독자성을 구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문화론적 측면으로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다.

 

제 3부 「동동의 장르적 속성과 원형 모색」(성영애)에서는 <동동>의 장르적 속성 및 그간 문제가 되어온 <동동>과 <장생포>와의 관련성 등을 살폈고, <동동>의 원형 모색과 함께 그동안 미해결된 문제들의 방향을 찾고자 했다. 저자(성영애)는 “<동동>은 궁중에서 공연된 국가음악으로 정재의 악곡과 노랫말 모두 <동동>이란 명칭 아래 역사서나 악서(樂書)에 존재해왔고 존재하고 있다”(77쪽)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장르 명칭을 ‘고려속악가사’로 부르고, 그 줄임말로 ‘고려속가’를 사용하는 것이 <동동>의 장르적 속성을 나타내는 정확한 용어임을 밝히고 있다. 저자(성영애)는 그간 논란이 많았던 <동동>과 장생포와의 관계를 다양한 문헌의 비교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고려사>> 악지와 열전의 기록을 중심으로 곡명과 창작자, 왜구 출몰지역으로 살펴본 내용을 통해 <동동>은 관찬서와 일반 문집에 기록된 <장생포>와 전혀 관련이 없었으며, <<동국문헌비고>>를 수보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상세히 밝혔다. 또한 <동동>은 궁중연례악으로서 회례연(會禮宴)·사신연使臣宴)·나례연(儺禮宴)에서 송축이나 송도의 의도로 연행되었으며, 특히 나례연 중 ‘처용지희(處容之戱)’ 안에서 ‘동동지희’가 연행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동동’은 악·가·무를 통해서 임금에게 송도의 뜻을 바치는 종합예술작품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울러 문해(文解) 위주로만 연구해온 상황이 그간 <동동>의 원형을 밝히는데 어려움을 주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제 4부 「조선전기 ‘동동’의 가무악 융합 양상」(문숙희)은 ‘동동’의 선율을 찾고, 그 선율에 노랫말을 융합하여 ‘동동’ 노래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여기에 노래와 무용을 융합하여 가·무·악으로 합쳐진 융합적 존재로서의 ‘동동’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저자(문숙희)는 “‘동동’은 장구점 단위가 소절에 해당되고 악보에 가사도 없고 음 또한 퍼져 있어서, 악보에서 기본박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113쪽)고 밝히면서 연구가 쉽지 않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기본박 찾기를 통한 방법’으로 해석된 리듬을 찾고, 그 중 ‘동동’과 같은 장단의 악곡을 통해 ‘동동’의 리듬과 정간시가를 찾는 노력을 기울여 결과를 도출하고 이에 ‘동동’의 특질을 찾아 보여주었다.

 

                                               

동동 복원공연 실황

 

“‘동동’은 정읍을 편곡하여 만든 노래로 보고 있다. 정읍과 같은 이름을 공유하기도 하고 또 많은 선율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두 악곡에는 가사가 다르듯이 다른 부분도 있다.”(138쪽)고 설명하면서 두 악보를 비교한 결과를 제시하기도 했다. 또한 ‘동동’ 선율은 ‘정읍’의 선율로 만들어졌다는 사실과 <<대악후보>> ‘동동’ 악보는 현악기 악보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동동’ 악보에 ‘강’이란 용어가 직접 사용되지 않았지만, 음악적인 내용으로 볼 때 ‘동동’은 진작류 형식에 해당한다고 밝히며 ‘동동’에서 강이란 가사의 구를 싣고 있는 선율, 하나의 악구에 해당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동동’의 정간시가는 일정한 길이로 되어있지 않고, 5정간과 3정간이 각각 같은 길이의 3분박 한 박으로 해석되며 노랫말 텍스트 <동동>은 선율이 가사에 비해 매우 길 뿐만 아니라, 가사를 천천히 진행하면서 음을 길게 늘여 부르는 노래라고 설명했다.

 

제 5부 「조선전기 아박무 복원연구」(손선숙)는 문헌 고증을 통해 전기 아박무를 복원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아박무는 고려시대에 ‘동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조선전기에 명칭이 아박으로 바뀐 뒤 조선후기를 거쳐 현재까지 이른다. 이에 <<악학궤범>>에 기록된 조선전기 아박무를 검토, 기존의 재현 아박무를 점검하고 문헌과 재현 아박무를 비교 검토하여 복원 관점으로 기록구조와 진행구조를 살펴 복원에 필요한 실제 수용범위와 근거에 대해 살피고 있다.

 

저자(손선숙)는 “기존에 재현된 아박무는 기존의 선행연구자들이 해석한 내용을 그대로 수용하여 매월 가사에 따라 춤에 변화를 주는 등 다양한 춤사위를 구성하여 추었는데, 2월사부터 8월사까지만 새로운 춤을 추고, 10월사부터 12월사까지는 <<악학궤범>>에 기록된 ‘북향-대무-배무’를 추었다.”(155쪽)고 밝혔다. 이는 재현 때 수용한 변무의 원칙에 위배되고, 문헌 기록대로 재현하였다는 원칙에도 위배되어, 결국 재현 아박무는 그 어느 원칙에도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저자가 <<악학궤범>>의 변무가 새로운 춤이 아니라 ‘북향-대무-배무’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북향·대무·배무’할 때 박을 치는 횟수와 무용 진행구조 관점으로 분석했기 때문임을 밝혔다. 또한 ‘기존 재현 아박무’는 가사 및 춤 진행에 따른 무구 사용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고, 유절형식에 따른 ‘변무’의 원칙성에 위배되었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아박무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구성인 대형 이동 위치와 방향, 춤사위가 필요한데, <<악학궤범>>에는 춤사위와 무용수들이 선 위치를 제외한 나머지 내용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166쪽)고 밝혔다. 특히 이 책에서는 아박무 복원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내용들과 보충되어야 함을 면밀히 살피고 있다. <<악학궤범>>에 기록된 ‘동동’ 중기의 아박무는 ‘무진-북향무-대무-북향-배무-환북향-무퇴’로 추어야 하고, 이와 같은 춤을 무려 11회 반복하며 추는 춤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악학궤범>>과 같은 고무보를 바탕으로 아박무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문헌 고증이 선행되어야 하고, 궁중정재의 재현 및 복원을 위해 춤의 기록이 문헌으로 전해지는 <<악학궤범>>의 내용을 단순히 이론상으로 이해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관점으로 접근하여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궁중왕실문예시스템’ 마련과 궁중 정재복원전문가의 배출을 위해서도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 6부 「총결」에서는 가무악 융합 예술체 ‘동동’의 본질을 분석하고 원래의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적용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고려조 궁중에서 시작된 속악정재 ‘동동’이 조선조에 들어와 ‘아박’으로 개명되면서 변화를 모색했고, 새롭게 추구된 변화가 그 뒷시대로 이어지면서 다양한 미학적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설명도 그래서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미학적 측면은 지속과 변이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하는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음악과 무용의 텍스트를 온전하게 복원하고자 하는 목표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노랫말 텍스트 ‘동동’을 정확히 구현하기 위해서는 인접분야인 음악 텍스트와 무용 텍스트를 이해해야 하고, 이들이 하나로 융합된 텍스트 전체를 이해·분석하기 위해서는 콘텍스트로서 당대의 예술적 상황을 이해해야 하는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융합 텍스트로서의 ‘동동’을 이해하기 위해 근대 이전까지 조선 왕조에서 공연된 재현 정재들을 통해 가무악 융합의 예술적·문화적 분위기를 이해·분석·수용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들은 ‘동동’이 단순히 문자 텍스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무악 융합 무대예술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동동’은 여성의 예술이다. 단순히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중세왕조의 임금이나 고귀한 존재를 대상으로 토로한 불멸의 사랑과 정서가 결합된 총체적인 종합예술임을 규명해낸 것이다. 저자(조규익·문숙희·손선숙·성영애)들은 동동의 예술미학을 구현하기 위해 그동안 기울여온 노력과, 그에 따른 다양한 결과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노랫말 텍스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라도 콘텍스트로서의 악곡과 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동안 연구자들은 간과해왔다. 고전시가가 어떤 양상으로 실연(實演)되어 왔는지에 대한 통합적 시각이나 시야를 충분히 갖출 필요가 있음을 저자들은 강조한다. 그것들 가운데 상당수 작품들의 생산이나 향유계층이 민중이라는 사실만을 강조함으로써, 그것들이 궁중에서 임금을 비롯한 지배계층의 연향에 쓰였다는 사실을 그동안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음악학계 및 무용학계와 협업의 필요성과 절실함을 느낀 저자들이 착수한 작업들의 결실이 바로 이 책이다.

 

그런 모색과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진 이 책이야말로 ‘고려속요 동동’에서 ‘속악정재 동동’으로 인식을 전환함으로써 그 원형과 위상을 새롭게 찾아낸 구체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저자들은 ‘텍스트 지평의 전환’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텍스트의 본질을 외면한 채 무조건 답습해 오던 기존의 오류들과 다양한 문제들에 주목하고, 텍스트의 ‘분리에서 융합’으로 전환한 다음 지속적인 모색과 반성을 통해 만들어낸 연구 결과들 덕에 우리는 ‘동동’의 융합예술적 본질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동동’은 단순한 그리움과 사랑의 노래가 아니라 융합적인 궁중무대예술작품이다. 그 본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차원 높은 예술적 경지를 경험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동동 저서

 

동동 해석(조규익)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