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8. 2. 26. 12:32
 

눈 내린 산길을 걸어서 출근하며



                                                          조규익



출근길의 어려움에 고통 받는 분들은 ‘미친 놈!’이라 욕하시겠지만, 밤에 눈이 내리면 못 말릴 정도로 들뜬다. 아침 일찍 아이젠에 배낭차림으로 산길을 걸어 학교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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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끝에 누가 있을까

 대도시의 한 구석에 둥지를 틀고 세상의 잇속으로부터 초연하려 애써온 20년 세월. 누항(陋巷)에 살면서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한겨울에만 서너 번쯤 맛볼 수 있는 ‘눈길 출근’ 덕분이다. 노트북과 책을 잔뜩 우겨 넣은 배낭을 짊어지고, 등산화에 아이젠을 차고 나서면 좋게 보아 ‘산사나이’ 서운하게 보아 ‘군밤장수’다. ‘배낭 속의 물건을 많이 팔고 오라’는 아내의 농을 뒤로 하고 산길로 접어들면 별세계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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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무와 눈의 조화여!

 나보다 극성스런 사람들이 벌써 발자국들을 찍고 지나간 산길이지만, 봄맞이 집 단장에 열성인 까치들의 노래 소리 만큼은 내 독차지가 아닐 수 없다. 아, 4계절 지겹게도 사람들의 체취에 시달리던 나무들이 오늘은 참하게 순백의 화장을 한 채 ‘거울 앞에 선 순이’의 형상을 하고 있구나! 소담하고 정갈한 그 자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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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눈길

***

내 어릴 적엔 눈이 많았다. 논바닥에서 아지랑이 피어오를 때까지도 차가운 바람은 내 작은 몸 곳곳을 파고들어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눈과 얼음이 우리의 눈길을 벗어나는 적이 없었던 한겨울은 어떠했겠는가. 30리 들길과 산길을 걸어야 하는 등굣길의 고통이야 말하여 무엇 하리오. 얄팍한 고무신발의 밑창은 닳아 반들거리고, 가끔은 찢어져 너덜거리기도 했다. 얼음으로 판장 박힌 길에 나서자마자 앞·뒤·옆으로 곡예를 하거나 넘어지고 구르기 일쑤. 유도의 낙법(落法)은 그 시절 자연적으로 체득한 생존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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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들의 환성

 그러니 검은 때가 거북이 등처럼 더껑이 진 손등은 추위로 갈라져 늘 피가 비쳐 있고, 구멍 뚫린 장갑 밖으로 삐져나온 손가락들은 늘 쓰리고 아렸다. 자상하신 아버지는 발에 새끼를 둘둘 말아 ‘천연 아이젠’을 해주시곤 하셨지만, 성황당 재빽이[‘산등성이’의 충청도 사투리] 초입에서 다 벗겨지기 일쑤였다. 그러니 아이들은 구르고 자빠지며 시퍼렇게 질린 채로 요즘 아이들 ‘용평 스키장에서 미끄럼을 타듯’ 학교엘 오고 갔다. 땀과 눈에 절었다가 다시 추위에 얼어 서걱거리는 솜바지 저고리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조개탄의 눈물 나는 열기 속에 두어 시간 수업이 지나서야 참새 같은 우리들의 몸은 녹기 시작했다. 마룻바닥은 얼음물로 흥건하고, 얼었다 녹은 손발은 간지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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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그 시절 누군들 추위와 배고픔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랴. 그래서 하얀 눈은 아련한 설렘과 궁핍의 이미지로 나를 들뜨게 만드는 건 아닐까. 밤에 눈이 내리면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스키장 갈 생각에 잠을 못 이루겠지만, 유년기의 상처로 남은 마음의 궁핍에서 자유롭지 않은 나는 연구실에 도달하기까지 그 30분 남짓의 호사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 어쩌면 음력 그믐날 밤 설빔을 안고 잠 못 이루던 그 시절의 흥분이 이랬던가, 잠시 회상해본다.

                           2008. 2. 26. 눈 내린 산길을 걸으며 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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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23. 21:18
아, 교수들의 꼬락서니여!
-새 정부에 참여한 문제교수들을 보며-

                                                                           조규익

장관을 비롯한 정부 고위직에 취임하려면 국회의 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언론과 인터넷 매체의 ‘무자비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얼핏 국회의 청문회가 무서운 것 같지만, 사실 후보자들에게 더 무서운 것은 후자다. 검푸른 물 넘실대는 바다에 무슨 괴물이 숨어 있는지 모르듯, 넓고 깊은 언론이나 인터넷의 바다엔 어떤 ‘저승차사들’^^이 칼을 갈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약간의 문제를 안고 있다 해도 공직에 임명받은 사람들이 도덕성으로나 지적 수준으로나 도토리 키 재기로 뻔한 국회의원들을 청문회장에서 대면한다 해도 그리 겁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어차피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일 테니 잘 닦인 언변으로 둘러대면 별 문제없으리라 믿고 있을 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과 인터넷을 통해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는 재야 지식인들이나 익명의 투사들은 참으로 가공할만한 위력을 지닌 존재들이다. 과연 자신들의 생업은 어떻게 꾸려나가는지 의문일 정도로 표적이 나타나기만 하면 시시콜콜 뿌리까지 캐내고야 말지 않는가. ‘설마 누가 기억하랴!’ 싶은 옛날 옛날 한 옛날의 주례사나 연설문, 작은 칼럼까지 챙기는 그들이니 말이다. 그러니 중년 무렵에 그럴 듯한 자리 하나쯤 꿰차고 싶으면 입이나 손끝을 함부로 놀리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 자식 놈들 좀 나은 학교에 보내고자 슬쩍 옆 동네 친구 집에 주민등록을 옮겨놓는 등 ‘얄미운 짓’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학교, 동사무소, 세무서, 등기소, 출입국 관리소, 이발소, 수퍼마켓 등 ‘얄미운 대상’의 정보를 캐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는 것이 인터넷 바다의 투사들이다. 이제 이들에게 적당히 둘러대는 변명은 더 이상 통할 수가 없게 된 세상이다.
이번의 경우 누가 교수출신 장관들의 표절문제를 들춰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인터넷의 바다에서 그들의 범죄행위가 속속 업데이트 되거나 베일을 벗어가는 모습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두 가지의 모순된 감정을 갖는다. 하나같이 표절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른바 ‘잘 나가는’ 교수들의 행태에 대한 탄식이 그 하나요, 비록 법적 절차에 의한 것은 아니나 비리에 대한 사회적 응징을 목격하면서 갖게 되는 일종의 도덕적 우월감과 안도감이 그 둘이다.

***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로 임명된 E여대의 김 아무개 교수, 청와대 수석으로 임명된 S여대의 박 아무개 교수 등은 그들 가운데 압권이다. 제한적으로나마 공개된 사이트를 통해 확인해보니 두 사람 모두 해당 전공분야에서는 대단한 명망을 지닌 학자들임을 알 수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우러름의 대상이었을 것이요, 동학이나 선·후배들로부터는 부러움과 시샘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학교의 명예를 드높인다는 이유로 대학당국은 그들을 얼마나  우대했을 것인가. 그런 게 쌓이고 쌓이다 보니, ‘낭중지추(囊中之錐 ; 주머니 속의 송곳, 즉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저절로 사람들에게 알려짐을 이르는 말)’격으로 그의 덕망은 더 이상 숨겨둘 수 없어 새 대통령에게까지 발탁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뛰어난 분들이 학계를 욕 먹이고, 한국 지식사회의 추악한 단면을 대변할 수 있단 말인가. 보도에 따르면 김 교수는 자신의 논문을 십여 편이 넘는 저널들에 중복 투고했고, 박 교수는 제자의 논문을 표절했다 한다. 중복 투고는 이미 노무현 정권의 김 아무개 장관 때 문제가 불거져 그를 사임으로 몰고 간 사건이기도 한데, 이번 사건은 그보다 훨씬 ‘죄질’이 무겁다. 특히 중복투고를 통해 ‘연구비’를 꼬박꼬박 받았거나 그 논문들이 승진·재임용에 이용되었다면, 그것은 표절 이상의 비리일 수밖에 없다.
박 교수의 행위는 더 참담하다. 표절의 경우 대개 같은 반열에 있는 학자들의 글을 대상으로 하기 마련인데, 제자의 글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경우야말로 가히 해외토픽 감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2002년과 2006년 두 건이나 제자의 논문을 표절했다니, 다시 무슨 변명을 덧붙일 수 있을까. 앞으로 더 튀어나올 것들은 없을까 우려하는 것이 과연 나만의 걱정일까.   박 교수는 “‘의혹을 받은 논문은 2006년 4월 제자보다 먼저 학회에 투고했고 게재가 8월에야 되었으며, 내 논문이 제자보다 먼저 나왔고, 이후에 제자에게 데이터를 쓰도록 허가해줬다”는 요지의 해명을 했다 한다. 데이터를 공유하면 분석의 문장까지 같아지는지 수십 년 간 논문을 써온 나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변명 치고는 참으로 궁색하다.
논문의 선·후란 저널의 발행일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며, 논문을 읽는 사람들로서는 논문 작성 과정의 일들은 알아야 할 이유도 알 필요도 없는 사항이다. 두 논문의 문장들이 상당 부분 일치하고 발행일자가 다르다면 뒤의 것이 앞의 것을 표절했다고 판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기본 상식을 모르지 않을 박 교수가 어째서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한 조치를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예컨대, 제자와 데이터를 공유함으로써 내용이 동일하게 되었다면 그런 사실을 각주로 밝혀 놓든가, 기자들의 추정대로 공동논문이라면 공저자로 제자의 이름을 넣든가, 무슨 조치를 취했어야 마땅한 일이다. 진짜로 박 교수의 해명이 맞다면 그 제자가 박 교수의 논문을 표절한 것이 분명하니, 제자를 추궁해야 마땅한 일 아닌가.
정신이 돌지 않은 이상, 어찌 감히 제자가 학위논문 지도교수의 논문을 표절할 수 있겠는가. 제자가 지도교수의 논문을 ‘슬쩍 했다’기보다는 논문의 마감 시한에 쫓긴 교수가 제자의 논문을 대충 ‘짜깁기’했다고 보는 게 정황 상 맞을 것이다. 어쩌면 그 분은 제자들에게 아마도 ‘절대적인 힘’을 지닌 존재였을 것이다. 어쩌면 교수님의 말씀에 토를 단다거나 반론을 제기하는 것조차 허용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석사논문 쯤이야 대부분 학자들이 무시하는 현실이니, 들킬 염려도 없을 테고. 어차피 학계에 존재가 알려질 논문도 아니라면, 지도교수인 내가 좀 실례 하는 것도 그대에게 그다지 손해나는 일은 아니겠지?” 라는 일방적 선언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써본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

이제 한국의 지식사회는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다. 한 편의 논문을 써서 이 저널, 저 저널에 싣는 행태는 그래도 남의 글을 도둑질하는 건 아니니 좀 덜하다고 치자. 학자금과 생활비의 조달에 잠 잘 시간도 없는 요즈음의 학인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책과 씨름하고 지문이 닳도록 컴퓨터의 키보드를 두드리는 요즈음의 학인들. 그런 그들이 고심참담 속에 써 놓은 글을 누군가가 빼앗아가는 현실 앞에서, 같은 지식사회의 구성원이라 자처하는 우리가 과연 무슨 말을 보탤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그런 사람들이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권부의 핵심 구성원으로 발탁되고 있는 이 잘못 된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과연 누가 나서서 이런 모순과 역리(逆理)를 바로잡을 것인가.
                                                                       2008. 2. 23.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16. 18:48
춤추는 무희여, 그대 새의 모습을 한 신선이여!
           -춘앵전을 보고-



                                                                                     조규익

당나라 고종때의 일이다. 무슨 근심이 있었던지 새벽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던 황제. 밖으로부터 꾀꼬리 울음소리를 들었다. 슬며시 창을 열고 내다본즉 노란 색 꾀꼬리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갑작스레 흥이 일어, 즉시 악공 백명달을 불렀다. ‘저 꾀꼬리의 자태를 춤과 노래로 만들어보라’는 황제의 명을 받은 그는 침식을 잊은 채 며칠을 고심했다. 마침내 ‘춘앵전(春鶯囀)’을 완성한 그는 아리따운 무희를 선정, 무복(舞服)으로 분장시킨 뒤 또 며칠을 연습시켰다. 자신이 붙은 악공은 드디어 황제 앞에 그 춤과 노래를 올렸다. 황제는 크게 만족했고, 그로부터 이 춤곡은 궁중에서 공연되었으며, 우리나라에까지 전승되었다.

***

이번 숭실대학교 한국전통문예연구소의 학술발표회에서는 조선조 후기 정재에 관한 5편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춘앵전 공연도 있었다. 발표된 논문들도 쉽게 들을 수 없는 것들이었으나, 춘앵전 공연은 그날 행사의 ‘화룡점정(畵龍點睛)’ 격이었다.
황금색 옷으로 갈아입은 무원 최서윤씨는 흡사 신선이라도 된 듯, 일렁이며 춤을 추었다. 객석에 앉은 학인(學人)들은 넋을 잃고 아름다운 춤사위에 취했다. 춤이 진행되는 10분 가까이 객석으로부턴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고, 가끔씩 탄성만 흘러나왔다. 그야말로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었다. ‘감동적인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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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지경에 몰입한 춤꾼 최서윤씨

 

***

춘앵전에는 두 가지 이미지, 즉 아름다운 꾀꼬리의 그것과 가볍고 자유로운 신선의 그것이 겹쳐 있었다. 옛날부터 사람의 몸에 날개가 돋으면 신선이 된다고 믿었는데, 그 상태로 날아오르는 것을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 했다. 하느님의 사자로 선향(仙鄕)인 곤륜산을 오르내리던 신조(神鳥)가 봉황이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신선이 봉황이나 학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덕흥리 고분과 무용총에도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을 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승천(昇天)하는 존재, 혹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점에서 신선과 새는 유사한 것일까. 새의 동작을 모방하여 춤사위의 상당 부분을 만들어낸 것도 새가 날개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날개는 ‘날아다니는 신선’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날개가 있어야 복잡한 인간세상을 초탈하는 신선이 되어 신적인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 기독교의 천사와 비슷한 존재일까.
꾀꼬리의 아름다움을 본떠 만든 춘앵전은 새의 이미지와 인간 및 선계를 성공적으로 연결시켰으니, 이 정재 30박 째의 동작인 ‘과교선(過橋仙)’은 그 핵심이다. 이것은 춘앵전 동작 가운데 압권인 이 용어를 번역하면 ‘다리를 건너는 신선’ 더 구체적으론 ‘신선이 다리를 건너듯 추는 춤사위’가 될 텐데, 무원이 좌와 우로 돌 때 마치 신선이 다리를 건너가듯 사뿐사뿐 춤을 추는 모양에서 유추된 용어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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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꾼 최서윤씨의 환상적인 춤사위



***

그러나 과연 이것뿐일까. 다음의 동작들은 내 눈을 어지럽게 했다.

 *새가 날개를 펴고 날듯이 빙글빙글 도는 ‘회란(廻鸞)’(8박)
 *날아오르듯 발을 가볍게 디디며 추는 ‘비리(飛履)’(11박)
 *한 층 한 층 탑에 올라가듯 세 걸음 나아가며 차츰 두 팔을 올려 드는 ‘탑탑고(塔塔高)’(15박)
 *원앙을 쳐서 날갯짓을 하도록 소매를 뿌려 내리는 ‘타원앙장(打鴛鴦場)’(16박)
 *기분 좋은 산들바람에 하늘하늘 걷는 듯 악절에 맞추어 추는 ‘사사보여의풍(傞傞步如意風)’(24박)
 *금모래가 날리는 것처럼 황금색 꾀꼬리가 나뭇가지를 분주하게 오락가락하듯 앞뒤로 나왔다 물러
   갔다 하는 ‘비금사(飛金沙)’(27박)
 *제비가 둥지로 돌아가듯 춤추며 물러가는 ‘연귀소(燕歸巢)’(32박)
 *새가 아름다운 꽃 앞에서 요염한 자태를 짓듯 교태를 부리는 ‘화전태(花前態)’(18박)
 *꾀꼬리가 날갯짓을 하듯 소매를 들어 휘두르는 ‘요수(搖袖)’(17박)
 *새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꽃잎을 물려다 그만 두듯 물러서는 ‘당퇴립(當退立)’(20박)
 *새가 날개를 펼치려다 내리는 것처럼 소매를 살짝 나부끼는 ‘소섬수(小閃袖)’(21박)
 *새가 번갈아 좌우로 몸을 기울여 걷듯 하는 ‘사예거(斜曳裾)’(7박)
 *새가 몸을 높였다 낮추는 동작을 이어 하듯 소매를 낮추었다 높였다 하는 ‘저앙수(低昻袖)’(9박)  
 *꾀꼬리가 날개를 펴고 뛰어 올라 흔들리는 꽃잎을 잡듯이 세 번 몸을 돌리는 ‘전화지(轉花持)’(19
   박)
 *꾀꼬리가 머리를 낮추었다가 들듯 허리를 꺾었다가 다시 펴는 ‘절요이요(折腰理腰)’(10박)
 *꾀꼬리가 두 날개를 한일자로 폈다가 반쯤 내리고 다시 올려 뿌리듯 하는 ‘수수쌍불(垂手雙拂)’(3
   박)
 *꾀꼬리가 살래살래 몸을 돌리듯 물결이 맴돌 듯 몸을 돌리며 춤을 추는 ‘회파신(廻波身)’(29박)

  등등.  거의 모든 춤동작이 새의 움직임이었고, 그 바탕엔 신선이 있었다.  

***

무대 위의 돗자리가 치워지고 무희가 사라진 다음에야 우리는 현실계로 돌아왔고,
그 시점으로부터 나는 황금색 꾀꼬리와 신선이 만들어낸 선계(仙界)의 환상공간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아, 우리를 잡답(雜沓)의 일상으로 되돌려 보낸 무희여!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춘앵전’의 무희여!

                                  2008. 2. 13.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14. 21:00
 

      잿더미로 변한 숭례문을 조상(弔喪)함


                                                                            조규익


그간 근대화 과정을 거쳐 오면서 문화의식을 깡그리 잃어버린 우리가 드디어 일을 내고 말았다! 이건 단순히 편집증에 사로잡힌 ‘늙은 미치광이’의 소행이 아니다. 바로 우리 모두의 천박한 문화의식이 일을 저지른 것이다. 게걸스레 눈앞의 먹을 것만 탐하고, 민족의 찬란한 과거와 미래는 남의 것인 양 날뛰던 우리가 결국 일을 저지르고야 만 것이다.


***


숭례문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 역사의 문이요, 문화의 문이요, 마음의 문이었다. 문을 없애버렸으니, 과연 우리가 들어갈 곳이 어디며, 나갈 곳이 어디란 말인가. 들고 날 수 없으니, 우리는 꼼짝없이 무덤 속에 갇힌 송장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들이다. 자존심도 자부심도 역사에 대한 책무도 모두 방기(放棄)한 채 남이 먹다 버린 음식물 찌꺼기나 주워 먹는 우리 속의 거먹 돼지들이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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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숙, 단정, 의연했던 우리의 숭례문


숭례문은 어떻게 세워졌는가. 개경에서 혁명에 성공한 태조 이성계는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했다는 풍수론을 근거로 즉시 천도하려 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수도를 옮기는 게 그리 쉬운 일인가. 우여곡절 끝에 태조 3년 9월 혁명세력의 실권자 정도전의 의견을 수용하여 한양을 신도로 정했으며, 그 한 달 후 천도는 단행되었다. 마음이 급한 태조는 우선 천도를 감행한 다음 신도를 건설했다. 천도 이후 태조 5년 9월 사이에 종묘·사직·궁궐 등 기본 건축물과 북악·낙산·남산·인왕산을 연결하는 전장(全長) 19km의 도성이 완공되었고, 동시에 그 출입문인 흥인문(동)·돈의문(서)·숙정문(북)과 함께 숭례문(남)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숭례문은 남방에서 나랏님이 계신 서울을 바라보고 몰려오는 백성들 누구나 몸을 굽히고 통과해야 하는 ‘나라의 문’이었다. 백성들에게 나라 법도의 엄숙함을 보여 온 위풍당당함, 외적으로부터 이 나라 최후의 보루를 지켜온 의연함과 강함, 역사의 갈피갈피 우여곡절을 극복해 나온 이 민족에게 자부심을 안겨 준 굳건함과 불변하는 아름다움 등. 숭례문은 모진 세월을 견디며 우리 민족의 가슴에 ‘불사조(不死鳥)의 이미지’로 살아남은 생명체였다.


그런데, 그걸 태우다니! 나라 땅을 침범한 외적과의 싸움에서 불탄 게 아니요, 우연한 사고로 불탄 것도 아니다. 70을 바라보는, 한 미친 노인의 소행이라니! 인생 70이 청춘으로 예찬되는 요즈음이며, 죽을 때까지도 철 못 드는 인간들로 가득 찬 세상이라 하나, 그래도 70이 적은 나이인가. 아무리 가슴에 맺힌 억울함이 병으로 돌았다 하나, 몹쓸 해코지의 대상으로 하필 숭례문을 택했단 말인가.


***


유럽을 가보라. 선진국이든 후진국이든 기원전의 유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위용을 뽐내는 그 문화의 꽃밭을 가보라. 과연 그들 중에 성벽의 돌을 빼내다가 구들을 놓는다거나 책장을 찢어 벽지로 바르거나 종이공예의 재료로 삼는 망나니들이 있는가. 지금도 몇 푼의 돈에 팔린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알게 모르게 ‘나까마’들의 품에 실려 일본으로 넘어가는, 비통한 현실을 우리 중의 몇 %나 알고들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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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트리어 시의 북쪽 문인 포르타 니그라. 기원전 2~3세기 로마지배 시절의 유적임


오호 통재라, 국보 1호를 통째로 구워먹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활보하는 ‘너와 나’의 무감각이여! 내려앉은 가슴 저 깊이에 미래의 탑은 산산이 부서진 채 널브러져 있는데, 그 불쌍한 잔해들 앞에 무력하게 주저앉아 숭례문의 최후를 슬퍼하노라.  

 


      숭례문이 불타던 다음날 아침


                        백규 통곡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5.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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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문한국’이나 로스쿨이나...

                                        
                                                                 조규익

작년 하반기에 출범한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사업과 지금도 논란중인 법학전문대학원(이하 로스쿨) 선정 과정은 지식사회의 철학 부재와 민족의 미래에 대한 국가적 아젠다 실종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다.

 전자의 경우 탈락의 이유나 명분을 상당수의 대학들이나 학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아카데미의 권위를 상징하는 총장과 교수들까지 교육부에 몰려가 시위를 벌일 만큼 후자의 경우 또한 결과 자체가 석연치 못하다.

 두 사업이 갖는 표면적 의미는 단순하다. 인문학 진흥을 위해 ‘가능성이 보이는’ 몇 개의 대학들을 선정하여 국가의 재정을 듬뿍 풀겠다는 것이 전자이고, ‘가능성이 보이는’ 몇 개 대학들을 선정하여 국가 권부의 한 축인 법조계 인맥의 공급처로 삼겠다는 것이 후자이다. 

 이제 로스쿨은 단순히 ‘법학 교육’만의 문제는 아니다. 교육수요자들이 이것을 학교전체에 대한 평가의 잣대로 원용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대학인들은 로스쿨의 유무가 대학 생존을 결정하는 날이 조만간 도래할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인문한국이든 로스쿨이든 주관 부서에서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았다고 하는 그 ‘가능성’이 미래지향적 의미를 크게 지녔다고 볼 수 없으며, 그런 기준에 대하여 우리의 지식사회가 제대로 공감하거나 수긍하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다.

 인문학을 새롭게 진흥시킨다거나 새로운 패러다임의 법학 교육을 시키자고 하는 마당에 그에 입각한 아젠다나 철학 혹은 참신한 아이디어 등을 따지지 않고, 예컨대 과거의 업적이나 인프라에 무게중심을 두거나 기존의 사법시험 합격자 수를 중요한 기준으로 적용시키는 등의 일이 지식사회의 미래지향적 구도에 그다지 합목적성을 지닌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런 점 때문에 선정결과의 발표를 서너 차례 연기했을 만큼 인문한국 사업은 시작부터 갈팡질팡했으며, 로스쿨 역시 ‘정치적인 고려’ 등 본질적인 철학 부재의 함정에 빠져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양자 모두 권력의 향배와 무관하지 않은 대학의 현실을 그 결정적인 요인으로 거론하는 인사들도 많다.

 국가나 대학의 조직은 매니지먼트의 측면에서 공통되며, 그 자연스런 결과로 평가에 관한 기준이 물적 인프라의 규모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이해는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 자칫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과거부터 누적되어오는 물적 인프라의 기준에 밀려 평가의 후순위로 밀리기 쉽다는 점은 큰 문제다. 큰 대학들은 늘 국가적 혜택을 받는 반면, 작은 대학들의 경우 제대로 도약의 계기를 얻을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잘 하는 쪽을 밀어주는 것은 잘 나가는 집단의 지혜일 수 있다. 그러나 ‘잘 하고 못함’을 가르는 기준이 미래 지향적 의지를 담아내지 못할 경우, 그것은 ‘힘 있는 세력’의 떳떳하지 못한 자기 합리화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철학 없는 기준에 바탕을 둔 ‘승자독식(勝者獨食)’이야말로 ‘만년 우등/만년 열등’의 구조를 고착시키게 되고, 그것이 국가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할 것은 당연하다.

 잘못된 학문정책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대신 구태의연한 기준에 따라 공동체의 미래가 걸린 일을 단 한 번의 망설임 없이 감행하면서도 ‘할일을 했다’고 자부하는 우리나라 지식사회. 현실에 대한 진단과 반성이 결여된 지식사회의 행태가 우리 시대 최고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8. 2. 4. 20:37
안녕하십니까?
금번 숭실대학교 한국전통문예연구소에서는 조선조 후기 궁중 정재의 문화적 의미와 미학을 담론하는 학술발표와 공연(춘앵전)의 자리를 아래와 같이 마련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고려와 조선왕조는 음악, 춤, 노래가 어우러진 종합무대예술을 향유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재입니다. 부디 오셔서 정재의 아름다움을 함께 느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주 제 : 조선조 후기 궁중정재의 문화적 의미와 미학
때 : 2008. 2. 13.(수), 오전 10시~오후 5시
곳 : 숭실대학교 형남공학관 115호실

순서
1부 : 개회사 및 인사, 축사

2부 : 발표
1. 조선조 후기 정재의 예악 실현 양상--이종숙(한양대)/토론 김영희(성균관대)
2. 조선조 후기 정재의 음악미학--임미선(전북대)/토론 권도희(서울대)
3. 조선조 후기 정재창사와 선계 이미지--조규익(숭실대/토론 강명혜(강원대)
4. 조선조 후기 정재의 무적 구조변화와 수용--손선숙(단국대)/토론 유미희(경인교대)
5. 조선조 후기 정재와 민속무용의 상호교섭 양상--박은영(한예종)/토론 이미영(국민대)

3부 : 정재 공연 및 출판기념
1. 춘앵전 공연--최서윤(성균관대, 석전 이수자)
2. 한국전통문예연구소 학술총서 출판기념

문의처 : 820-0830, 820-0326, 820-0846

2008. 2. 4.

숭실대학교 한국전통문예연구소 소장 조 규 익 아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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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