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08. 5. 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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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주의, 그 걸러지지 않는 역사의 노폐물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얼마 전 모 대학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 한 토막. 2005년 베이징에서 우리나라 국회의원 두 명이 탈북자 인권문제로 기자회견을 하려다 중국공안 당국으로부터 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함께 있던 우리나라 외교관들도 폭행을 당한 건 물론이다. 정당한 이유 없이 주재국 공권력에 의해 다른 나라 외교관이 폭행을 당한, 상식 이하의 사건이었다. 예상대로 당시 우리 정부는 묵묵부답,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피해자인 우리의 인사들을 질책하는 분위기였다. 분개한 어떤 인사가 그 사건을 들어 모 일간지에 칼럼을 썼고, 감명 받은 그 교수는 그 글을 당시 대학원에 재학하던 외국 학생들의 한국어 시험 지문으로 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끼어있던 중국 학생들이 그 내용에 반발하여 시험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듣게 된 그 교수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중국의 저의를 분석한 다음, 잘못 된 처사에 말 한 마디 못 건네고 있는 우리 정부의 처사를 꾸짖은 글이었다. 당사자인 중국의 국민이라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거나 반성의 빛이라도 보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학문을 배우러 이 나라를 찾아온 젊은이라면 더더욱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기는커녕 그들은 사무실로 찾아와 기세등등하게 항의를 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안하무인의 불량배로 만들었을까. 요즘 하기 좋은 말로 그들이 ‘자유분방한 인터넷 만능시대의 총아(寵兒)’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중국에 법제화 되어 있다던 ‘독생자녀제(獨生子女制 ; 1가구 1자녀 원칙) 출신의 이른바 ‘소황제(小皇帝)들’이라서 그렇게 된 것일까. 아니다. 바로 그들의 피에 흐르고 있는 ‘중화주의’의 DNA 때문이다.


 역사에도 대사작용(代謝作用)이 있는 법. 새로운 시대사조나 발전적 비전을 받아들여 과거의 노폐물을 걸러내는 작용은 역사에도 필수적이다. 대사작용이 멈춰버린 한-중 외교사의  흐름 속에서 중화주의라는 노폐물을 걸러내지 못한 중국인들은 21세기의 시대정신을 왜곡하며 ‘자민족 우월주의’의 망상에 빠져 있다. 그러니 시험지를 들고 대학원 사무실로 항의 차 몰려온 아이들이나 이번 성화 봉송에서 집단으로 행패를 부린 그들의 행동양식은 한 틀인 셈이다. 그것은 부모나 조상들로부터 대물림 받거나 교육된 의식이거나 행동양식일 뿐이니, 말하자면 '역사의 조건화(conditioning)'라고나 할까. 자극과 자극 또는 자극과 반응 간의 연합을 통해 특정 행동이 유발되거나 학습되어지는 과정이 ‘조건화’다. 한 번도 우리나라와 선린(善隣)의 관계 설정에 나서본 적이 없는 가해자로서의 중국은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의식’을 대대로 학습해 물려주고 있으니, 그게 바로 ‘역사의 조건화’다.

 자기 절제를 통해 착한 이웃 혹은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는 방법과 태도를 교육하는 것이 현대 국가의 금도(襟度)다. 그런데 이번 일로 그들은 양식 있는 교육을 받지 못한 국민임을 만천하에 드러낸 셈이다. 그간 한-중 관계사는 외교적 상식에 비추어 유쾌하지 못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다. 지정학적인 면에서 우리는 중국 내부의 정치적 변동에 늘 영향을 받아야 했고,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중국이 한동안 우리에게 세계를 향한 창문 노릇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왕조가 새로 들어설 때마다 그들은 ‘강-약’과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늘 확인하고자 했고, 우리는 언제나  ‘화(和)/전(戰)’의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했다. 땅이 넓어 물산이 풍부하고, 세계와 인접해 있어 각종 문물이 다양하니 대륙의 변방인 우리로서는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조 내내 사신들을 줄기차게 파견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저들과의 전쟁을 미연에 막아야 했고, 우리에게 부족한 물건이나 문화를 도입해야 했으며, 중국의 상징적인 힘을 국내 정치에 활용해야 했다. 우리가 저들의 속국이나 식민지라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비록 외교적 생존술이었다 해도, 그것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그릇된 인식을 갖게 한 단초였음이 분명하다. 현실적 이익은 차치하고라도 우리의 사신 파견이 굴욕적인 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명나라 때의 사신행차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는데, 하물며 우리가 오랑캐라고 질타해온 청나라 때 사신행차들의 굴욕이야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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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천 이덕형의 사행을 기록한 죽천행록>

 


 인조 2년(1624) 기울어져 가던 명나라에 파견한 주청사행(奏請使行)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서인들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했으나 명나라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능양군을 인조로 옹립하여 반정에 성공한 서인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을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명나라의 승인이라는 명분이 절실했다. 명나라로부터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받아오는 일이 무엇보다 다급하고 중요한 그들의 사명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주청사행은 국내정치용이었던 것이다. 정사 이덕형(李德泂)이 명나라의 관료들로부터 당한 농락과 시달림은 역사상 강대국인 중국이 약소국 조선에게 가해온 행패의 축소판이다. 예컨대 위대중이란 자는 주청사행을 괴롭힌 대표적 인물이었다. 조선이 후금의 누르하치와 같은 오랑캐 류라는 점, 인조반정은 명분이 전혀 없는 죄악임에도 ‘천자’의 조서를 받아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은 중국 조정에 대한 기망이라는 점, 누르하치에게 먹힌 요동만 회복하면 저절로 조선의 잘못된 일이 바로잡힐 수 있으므로 그 때까지 책봉의 조서를 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점 등을 주장하며 주청사행의 사명 수행을 극력 저지했다. 툭하면 시랑 정도의 관료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고, 출근하는 그들을 만나고자 추운 겨울날 새벽 길가에서 떨며 기다린 것은 물론 각로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내침을 당하자 섬돌을 붙들고 울며 사정하는 노구(老軀)의 정사는 우리 민족의 일그러진 자화상일 수밖에 없다. 가까스로 고명과 면복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정사를 상대로 마지막까지 농락하는 중국의 관료들이야말로 중화주의의 늪에 빠져 약소국을 능멸하는 불량배들의 전형이었다. 중국과 조선, 두 왕조의 외교를 담당한 것은 주로 우리 쪽에서 파견하던 사행단이었다. 연경까지 대개 비슷한 코스로 두 달 가량 걸리는, 왕복 6천리의 지겨운 길이었다. 500여명의 일행이 도보로 오가던 길. 교통편과 숙박시설이 변변할 리 없었다. 한둔하기 일쑤이던 아랫사람들보단 나았겠으나, 정사·부사·서장관 등 윗사람들이라고 크게 편안할 것도 없었다. 목욕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제때 옷 갈아입는 일 또한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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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행노정 답사 중 만난 하북성 노룡현의 고려포 역참에서>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천추(千秋) 등 정례 사행단만 가는 게 아니었다. 왕비나 세자의 책봉에도, 왕의 죽음에도, 왕위를 물려주거나 선왕을 추숭할 때도 사신들을 보냈으며, 사은(謝恩)·주청(奏請)·진하(進賀)·진위(陳慰)·진향(進香) 등 임시 사행단은 수시로 파견되었다. 그런 역사가 조선조 내내 이어진 것이다. 중국인들의 뇌리에 박힌 것은 반복되어온 사행 파견의 불평등한 외교관계였다. 그렇게 역사가 왜곡되는 과정에서 청 말 황준헌(黃遵憲)이란 자의 ‘조선책략(朝鮮策略)’같은 글도 나타나게 되었다. “오늘날 조선은 중국 섬기기를 마땅히 예전보다 더욱 힘써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선과 우리는 한 집안 같음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그의 언설이야말로 올림픽 성화 봉송에서 난동을 부린 중국 청년들의 ‘한국관(韓國觀)’을 정확히 적시한 내용이다. 멀쩡한 남의 나라 외교관이나 국회의원, 언론사의 특파원을 폭행하고도 정당한 법 집행이라 강변한 중국. 자국의 배가 서해상에서 골든로즈호를 침몰시키고 도주한 사건에 대하여 ‘피해 선박이 구난장비를 갖추지 않아 인명피해가 났다’고 억지 논리를 편 중국. 그것도 모자라 이제 그들은 남의 나라에 몰려와 자신들의 국기를 휘두르며 폭력까지 행사하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스포츠 경기장을 제외한 그들의 영토 안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여 우리의 국기를 흔들거나 애국가를 부르도록 내버려 둔 적이 없다. 그런 그들이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수백 명의 유학생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국기를 들고 수도 서울의 한복판을 누비게 만들었으니, 그 배짱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중국을 떠나 너희가 살 수 있느냐’고 큰 소리 치는 철없는 중국의 젊은이를 보며, 그들의 만용과 만행을 가능케 한, 비뚤어진 중화주의가 세계평화의 재앙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다시 묻건대, 이런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은 우리인가 아니면 그들인가? 

 

Posted by kicho
출간소식2008. 5. 7. 11:53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에서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전 13권) 발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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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대외교섭의 채널이자 수단이었던 사행(使行)은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을 대상으로 한 외교활동이다.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왜구문제 해결’을 중요한 목표로 삼았고, 이를 위하여 일본의 막부(幕府) 및 지방의 여러 세력들과 다원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대일사절은 외교의 대상과 목적에 따라 ‘통신사(通信使), 통신관(通信官),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보빙사(報聘使), 호송사(護送使), 수신사(修信使)’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다.

왜구문제가 해결된 15세기 중엽 이후에도 사행은 준비되었으나, 실행으로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조선초기의 일본사행이 왜구문제의 해결과 함께 잠정적으로 중단된 것이다. 이후 1590년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조선에 사신파견을 요청하면서 속행된 통신사행 마저 임진왜란으로 인해 지속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직후의 통신사행은 ‘피로인(被虜人) 쇄환(刷還)’과 ‘회답(回答)’을 목적으로 하는 임시사행이었기 때문에, ‘통신사(通信使)’가 아니라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 불리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1636년(仁祖 14)이후 1811년까지 조선에서 일본 막부로 파견된 사절단을 본격적인 통신사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고려 후기에서 조선 후기까지 약 500년 동안 일본막부가 있는 에도[江戶]로 가는 사신 행차를 통칭하여 '통신사(通信使)'라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으로 가는 사행 전체를 ‘통신사(通信使)’라 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래는 일본사행에 문화적 성격이 강해진 1636년 이후 1811년까지 막부를 대상으로 하던 사행을 ‘통신사(通信使)’라 할 수 있는데, 어쩌다보니 이 명칭은 일본 막부로 보내던 공식적인 사행들 모두를 의미하게 되었다.

통신사행에는 정사·부사·서장관을 포함하여 500여명의 인원이 참여하였고, 이들은 한양을 떠나 부산의 영가대, 일본의 오오사카[大阪] 등을 거쳐 막부가 있는 에도[江戶]까지 여행하였다. 6개월여의 오랜 통신사행에 참여한 구성원들이 다양했던 만큼 그들의 관심사항도 제각각 많았다. 이에 따라 얻어지는 견문도, 기록자들이 남긴 내용도 다양하였다. 통신사행이 거쳐 간 일본의 도시들은 화려함에 있어서 조선의 도시들과 달랐다. 더구나 도시에 몰려든 일본인들은 통신사들을 만날 때마다 글을 받고자 애를 썼다. 조선통신사 사행원과 일본인들 사이의 ‘글’과 ‘문화’를 매개로한 ‘상호소통’은 조선과 일본의 외교를 이루는 한 축이었다. 조규익 교수가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 머리말에서 “대부분의 연구들은 이 기록들에 대한 해석 혹은 그 체계화”라고 했을 만큼 사행록의 연구는 조선통신사 연구의 주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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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통신사행에 대한 연구는 문학ㆍ역사ㆍ정치ㆍ외교ㆍ경제ㆍ회화ㆍ사상ㆍ민속(풍속)ㆍ제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분야에 대한 연구들이 각기 독립적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이를 수탐(搜探)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점에 착안하여 숭실대학교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소장 조규익 교수)에서는 그간 발표된 국내·외 연구자들의 연구논문들을 두루 수집했고, 수집한 논문들 가운데 137편을 엄선하였다. 이 논문들을 내용 및 주제별로 분류한 것이 이 총서다. 이 연구총서는 총 10권의 ‘연행록 연구총서’에 뒤이어 나온 결과물이다. ‘연행록’과 ‘조선통신사 사행록’을 아울렀다는 점에서 본 연구소는 ‘조선조 사행록’에 대한 연구결과를 망라하는 쾌거를 이룬 셈이다.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전 13권)에는 60여명의 학자들이 연구한 논문 137편과 자료사진이 수록되었다. 문학(1-3권), 외교(4-6권), 역사(7-8권), 문화·회화(9-10권), 사상·인식·경제·무역·민속(11-12권) 등 다방면에 걸쳐 있고, 13권에 우리나라와 일본 지역의 조선통신사 노정과 유적들을 답사하여 얻은 생생한 사진들을 엮어 넣음으로써 사행 현장을 시각적으로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이번 연구총서의 발간으로 학자들은 기존 연구 자료의 수탐 및 정리에 들어가는 시간이나 노력을 절감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불필요한 연구의 중복 또한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 분야의 연구는 질적·양적인 측면에서 한 단계 높아질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관련기사 링크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5. 5. 19:22
 

소에 관한 단상


                                                                           조규익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자유화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광우병이 빈발했고, 미국산 소에 광우병의 인자가 들어있을 가능성이 크다니 미상불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급기야 어느 방송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서구인들에 비해 광우병 발병 가능성이 두 배 가량 높은 유전인자를 갖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까지 했다. 불난 집에 기름 부은 꼴이다. 한쪽에서는 문제없다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큰일 났다 하는데, 우리 같은 서민들은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알 도리가 없다.
 그 뿐 아니다. 광우병에 온통 신경을 쓰다 보니 우리나라 축산 농가들의 어려움은 뒷전이 되어 버렸다. 미국 쇠고기 들어오는데 광우병 논란만 해소되면 축산 농가들 줄 도산하는 건 큰 문제 아니라는 뜻일까. 국민 전체가 참으로 풀기 어려운 문제를 안고 끙끙대는 형국이다.
               
 미국 쇠고기에 관련된 ‘학술용어들의 복잡성’ 또한 도통 알기 어렵고, 마땅히 따져 물을 곳마저 없다. 검역주권이니 프리온 단백질이니 MM형이니, 나같이 무식한 사람들은 매우 곤혹스럽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귀동냥을 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은근히 걱정되는 일 하나가 있다. 한 10년 전쯤인가. 1년 남짓 미국에 체류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값싼 LA갈비를 배불리 먹은 우린데, 들어보니 광우병의 잠복 기간이 10년이란다. 그간 우리 몸속에서 숨죽이며 잠복해 있던 광우병의 바이러스(?)란 놈들이 발광할 시점인데, 그렇다면 이것 참 야단 아닌가.^-^ 배고픈 동족들 몰래 미국 땅에서 허리띠 풀어놓고 갈비 뜯은 죗값을 비로소 받는 게 아닌가 하여 은근히 켕기는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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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독일 여행 중 알펜 가도의 한 농가 목장에서 만난 독일 소들>
 ***

 우리 국민 전체가 광우병의 볼모가 될 판에 무슨 한가한 타령이냐고 핀잔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그래도 소 이야기를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다. 내 부모는 농사꾼이셨고, 나는 흙 속에서 자랐다. 그 시절 우리 가족에게 소는 반려(伴侶)로 대접받던, ‘동물 아닌 동물’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시어 소죽을 끓이시던 아버지의 기침소리와, 사방으로 번져가던 구수한 소죽 냄새에 우린 덜 깬 잠을 털고 일어나야 했다. 배부름에 만족스러운 누렁이의 고삐를 거머쥔 채, 나는 온몸에 차가운 이슬을 받으며 아침마다 백사장으로 달리곤 했다. 남들보다 먼저 무성한 풀밭의 성찬을 누렁이에게 맛보이기 위해서였다.
 길게 쇠 바(소고삐에 이어 묶은 밧줄)를 늘이고 쇠말뚝으로 고정한 다음 부리나케 달려 이십 리나 떨어진 학교로 달려가는 것이 오전 중의 내 일과였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와 책보를 집어던진 다음 백사장의 누렁이에게 달려간다. 하루 종일 시달렸을 누렁이의 갈증과 허기를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언덕 너머로 달랑거리며 내 작은 체구가 나타나면, 누렁이는 ‘음메~’소리를 길게 뿜으며 반가움을 표하곤 했다. 쇠말뚝을 뽑자마자 쇠 바를 서릴 사이도 없이 나와 누렁이는 언덕 너머 둠벙으로 내달렸다. 누렁이는 ‘쭈욱 쭉’ 소리를 내며 촘촘히 자라난 부들 풀 사이로 고개를 박은 채 한 배 가득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고 난 큰 체구의 누렁이가 초등학교 3학년 꼬마를 지긋이 바라보던, 그 촉촉한 눈망울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 땐 몰랐지만, 아마도 고마움의 표시였으리라.
  서해바다를 물들이던 황혼을 등지고 누렁이와 내가 다정한 친구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소죽 끓는 집으로 돌아오면, 내 일과는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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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소와 송아지>
***

그렇게 그 시절 소는 우리의 가족이었다. 그는 봄철이면 논갈이와 써레질을 해야 했고, 틈틈이 밭도 갈아야 했다. 그 뿐인가. 한 해에 한 번씩 발정기가 되면 아버지는 누렁이를 이웃 동네의 수소에게 데리고 가셨다. 농사일이 끝나는 겨울이면 누렁이는 어김없이 ‘이쁜’ 송아지 한 마리씩을 우리에게 안겨주곤 했다. 누렁이가 보여주던, 일에 대한 철저함과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어린 내 눈에도 경이로웠다. 세상만사를 달관한 고행의 수도자처럼 누렁이는 땡볕에도 싫은 내색 한 번 보이지 않고 묵묵히 쟁기를 끌었다. 그의 희생 덕에 우리는 한 섬지기가 넘는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어려웠지만 그럭저럭 삶을 이어나올 수 있었다.

***

그 옛날 우리네 부모들은 소를 상전으로 모셨다. 소와 함께 살아가는 한, 하루 이상의 출타는 불가능했다. 소에게 아침, 저녁으로 따뜻한 먹이를 만들어 먹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누렁이는 가고 없다. 그의 빈자리는 경운기와 트랙터의 굉음으로 채워지게 되었다. 시원한 목장에서 맛난 풀을 뜯으며 노역(勞役)의 신산함을 잊어버린 새로운 누렁이들. 그러나 그들의 눈망울엔 새로운 불안감이 가득하다. 주인을 위해 죽도록 일하고, 마지막엔 한 점 살코기로 변해 주인의 몸으로 스며들던 우리네 누렁이들. 그러나 그들도 이젠 사람들의 잔인한 탐욕과 무절제를 어떻게든 경고할 수밖에 없으리라.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수도자처럼 그저 묵묵한 태도와 덤덤한 표정으로... 

Posted by kicho
자료 - 전공자료2008. 4. 30. 12:57
 

러시아 기행 2


             스러진 고려인들의 꿈이여, 열사들의 넋이여!



2008년 4월 4일, 4월 참변 당일이다. 추모식은 오후 4시에 열린다. 아침 일찍 우리는 최재형 선생들이 처형되어 묻힌 곳을 찾아 제사를 올리기로 했다. 제정 러시아 시대 감방이 있던 곳. 지금도 교도소로 사용되고 있는 으스스한 곳이었다. 그 맥그라소바 거리에서 북쪽으로 10분 쯤 30m 정도 올라간 야산 둔덕 ‘왕바산 재’. 그 언저리가 바로 네 분(최재형崔在亨, 김이직金理直, 엄주필嚴柱弼, 황경섭黃景燮)의 고려인들이 참살되어 묻혀있는 곳이다. 일본군이 이들의 시신을 묻고 흔적을 없앴기 때문에 그 정확한 장소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전날 마련한 간소한 제수를 땅바닥에 진설하고 제사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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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사들의 영전에 헌작하는 반병률교수와 곽원석 박사>
 
최재형 선생의 영정과 다른 세 분의 이름을 모신 다음 순서에 맞게 추모의 정을 표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제문을 낭독했다.


2008년 4월 4일.

1920년 4월 참변을 당한 지 88년째인 오늘, 참변을 당하신 최재형․김이직․엄주필․황경섭 선생님을 비롯한 수많은 고려인 선열들의 영령 앞에 삼가 머리 숙여 고하나이다.


일제의 침탈과 만행으로 인해 나라와 고향을 잃어버린 채 이국땅에 떠돌이로 들어와 가까스로 뿌리를 내리고 살다가 다시 그들의 총칼 아래 무참히 스러져 간 민족 지도자들의 기구하신 운명을 생각하오며, 새삼 추모의 정을 금할 수 없나이다.


님들의 희생 덕택에 고국에서 혹은 이 땅에서 편안히 살아가고 있는 후손들은 님들이 뿌리신 피의 뜻을 잊지 않고 다시금 우뚝 일어서고자 노력하고 있나이다.


아, 오늘 만리 먼 고국에서 님들의 영전을 찾아 온 저희들 반병률․김보희․곽원석․조규익․엄경희 등과 이 땅에 살고 있는 발렌찐·발레리아 등은 보잘 것 없는 음식이나마 정성껏 님들 앞에 올리옵나니,

영령들이시여, 부디 이곳에 강림하시어 흠향하오소서!


          2008년 4월 4일


조규익·반병률·곽원석·김보희·엄경희 절하고 올림



우리의 제사는 간결·소박하나 엄숙했다. 땅바닥은 차갑고, 겨울 외투를 채 벗지 못한 북국의 공기는 싸늘했다. 그러나 혼령들이 감응하는 듯 왕바산 언덕의 두터운 땅거죽은 홀연 훈훈해져 왔다. 언덕 아래쪽 교도소에선 짙은 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오후 4시 정각에 추모비로 나갔다. 러시아 군인들과 경찰들이 두런거리며 식장을 준비하고 있는 가운데, 많은 고려인들과 러시아인들이 몰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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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 말미에 헌화하는 러시아 어린이들>
 
예쁜 초등학생들도 질서정연하게 어른들을 돕고 있었다. 우수리스크 부시장을 비롯한 러시아 관리들, 블라디보스톡 한국영사관의 김무영 총영사와 이우용 교육원장, 김니꼴라이 우수리스크시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장, 한국에서 온 반병률 교수와 내가 중앙에 도열하자 러시아 군악대의 주악을 신호로 식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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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에 도열한 러시아 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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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에서 조총을 쏘아 올리는 러시아 군인들>

사회는 당당하게 생긴 우수리스크 시정부의 여성 관리였고, 통역은 고려신문 편집장 엘레나였다. 추도사와 헌화가 진행되는 긴 시간, 잡담 한 마디 들려오지 않았다. 러시아인이나 고려인, 한국인들은 ‘숙연함’의 연대라도 이루어진 것일까. 숙연함은 러시아 무용단의 추모 무용에 이어 조총(弔銃)의 발사로 클라이막스에 올랐고, 사회자가 종료선언을 하자 사람들은 연기처럼 흩어져 갔다.  강렬한 햇살이 차가운 바람을 덥히는 오후였다. 언제부턴가 내 마음에 각인되어온 러시아인들은 ‘음습하고 냉랭한 이념의 노예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추모비 앞에 모여든 그들은 선량한 이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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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에 참여한 러시아인들과 고려인들>

 어쩌면 내가 던진 추모사가 그들에 대한 화해의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4월 참변에 희생되신 러시아와 고려인 유가족 여러분!


1920년 4월 참변 88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이 순간 저는 혁명과 반혁명, 침략과 굴욕의 역사적 격랑이 소용돌이치던 당시 이 땅에서 자행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무자비한 살육을 떠올립니다. 1920년 4월 4일 밤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만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일본군은 연해주 지역 러시아 혁명군과 정부, 관공서와 함께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 등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방화·가택수색·검거·학살을 저질렀습니다. 하늘과 땅이 노하고, 살아있는 모든 생령(生靈)들이 전율(戰慄)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미 역사에 밝혀져 있듯이, 이 땅에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되었고, 일본은 미국·영국·프랑스 등과 함께 이곳으로 출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볼셰비키 정권과 러시아 국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친 열강의 군대들이 철수하게 되자 국제적으로 고립된 일본군은 4월 참변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 스파스크, 이만(달리네레첸스크), 포시에트 등지의 주요 도시에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연해주 지역의 러시아 혁명 지도자들과 고려인 지도자들은 대거 검거되거나 학살되었습니다. 특히 우리의 분노를 자아내는 일은 그들이 정식 재판의 절차도 없이 살해되었다는 점입니다. 당시 우수리스크에서는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황경섭선생을 비롯한 한인 지도자들이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그 분들의 시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 땅에서 러시아 국민들과 고려인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으로부터 혹독하게 시련을 당한 공통의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런 시련을 우리가 미래로 힘차게 뛰어나갈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언제까지나 불쾌하고 불행한 과거의 일에 얽매여 있을 수는 없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당한 두 민족의 지도자들을 추모하는 지금 우리는 과거 항일투쟁 과정에서 연대와 협력을 지속해온 역사적 교훈을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러시아와 대한민국은 미래 지향적 파트너로,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새롭게 출발해야 합니다. 정치·경제·외교·문화계 인사들 간의 활발한 접촉과 교류를 통하여 러시아와 대한민국은 친선과 우의를 한층 단단히 다질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1920년 4월 참변에 희생되신 양국 지도자들의 명복을 빌어드리며, 유가족과 후손 여러분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 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가 더욱더 노력할 것을 다짐하면서 이상 추모의 말씀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008. 4. 4.


              대한민국 서울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규익은 절하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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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이 끝난 다음 추모비 앞에 선 한국인들>

***

5시 반. 추모식을 마친 우리는 고려인들과 러시아인들을 만찬장에서 만났다. 주석단에 자리 잡은 우리를 흘끔거리며 호기심을 보인 고려인들은 마이크를 잡으면 하나같이 유창한 러시아 말로 장강대하의 언설들을 쏟아냈다. 이미 그들은 고려 말을 깡그리 잊어버린 상태였다. 우리들의 귀에는 생소했으나 그들은 사회주의 러시아의 노래들을 쉼 없이 불러대는 것이었다. 러시아 군대에서 공을 많이 세운 듯 가슴에 훈장들을 주렁주렁 달고 나온 노인도 있었다. 어쩌다 한 번 몇몇 고려인 아줌마들은 우리를 의식한 듯 서툰 발음으로나마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불러 주었고, 북한의 대중가요 <반갑습네다>를 이어서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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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열창하는 고려인 할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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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갑습네다를 열창하는 고려인 할머니들>

모습은 우리네 이웃집의 자상한 아줌마들이고 아저씨들인데, 말소리를 들으면 천리만리 떨어져 사는 러시아인들이었다. 그게 현실이었다. 러시아 땅에 발을 붙이고 긴 세월 살아온 우리 동족들의 변한 모습이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흘러내린 모진 세월이 안쓰럽기도 하고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감정의 가교(架橋)’가 새롭게 놓여야 하는데, 지금은 시퍼런 강물만이 그득하게 우리들의 사이를 갈라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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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식 후 만찬장의 모습>

우리가 그 골을 메울 수 있을까? 우리와 그들 사이에 ‘정감의 다리’를 다시 놓을 수 있을까?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고려인들은 러시아인의 탈을 쓴 채 그들의 집으로 흩어져 가고, 우리는 이방인의 탈을 쓴 채 사회주의의 불친절을 훈장처럼 달고 있는 호텔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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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08. 4. 26. 13:54

조선일보 원문보기



빨치산스크에서 만난 고려인, 마리아 알렉상드로 김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연해주의 우수리스크시에서는 올해도 어김없이 한-러 양국 합동으로 ‘1920년 4월 참변’의 추모제가 열렸다. 러시아 군인들이 쏘아 올리는 조총(弔銃)의 굉음 속에서 러시아인들과 한국인들, 그리고 또 다른 한국인인 ‘고려인들(Soviet-Koreans)’이 함께 바치는 추모사와 조화들은 러시아 땅에서 진행되어온 역사의 기묘한 부조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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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식에 참여한 한-러 인사들. 좌로부터 블라디보스톡 국제교육원장, 반병률교수, 조규익, 블라디보스톡 총영사, 김니꼴라이 우수리스크 고려인 민족문화자치회 회장, 우수리스크 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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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식장에서 추모무용을 공연하는 러시아 무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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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사를 하고 있는 모습>
러시아 땅에서 제국주의 일본은 최재형·김이직·엄주필·황경섭 등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아직도 생소한 이름의 고려인 지도자들과 많은 러시아인들을 학살했다. 애당초 기아(飢餓)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유이민(流移民)’의 처지로 남의 땅 러시아에 들어갔다가 빠져나오지 못한 고려인들에게 민족해방이란 또 다른 의미를 지닌 ‘역사의 굴레’였다.
1937년 스탈린이 20만에 달하는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킨 역사적 비극을 기억한다면, 일제의 패망을 승리로 받아들이고 있는 러시아인들과 고려인들의 입장이 결코 같을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고려인들은 구소련 시절의 철저한 동화정책에 의해 민족의 정체성을 급속히 상실해가고 있는 70여 개 소수민족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빨치산스크에서 만난 58세의 고려인 여성 마리아 알렉상드로 김은 강제이주 이후 세대의 갈등과 문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녀는 강제이주 이후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에서 고려인 부모로부터 태어난 ‘유이민 3세’다. “고려 말을 아느냐”는 물음에 “고럼, 알지비!”하면서 함박웃음 짓던 그녀가 실제로 구사한 고려 말은 10%가 채 안되었다. 그것도 ‘뚜르르’ 굴러가는 러시아 말에 송두리째 잡아 먹혀, 흔적만 남은 상태였다. “손자에게 고려 말과 글자를 가르치고 싶어도 선생이 있어야지!” 통역이 전해주는 그녀의 안타까운 사정이었다. 학교에서 러시아어의 발음이 이상하면 사정없이 감점을 당하고, 대학에 진학할 수도 없었다는 지난날의 사정 또한 매우 참담했다. 왜 러시아의 고려인들이 송두리째 고려 말을 버리고 그토록 유창한 러시아어를 구사하게 되었는지, 그녀의 말속에 해답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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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왼쪽부터 곽원석박사, 마리아 알렉상드로 김의 여동생, 마리아 알렉상드로 김, 조규익, 마리아의 딸 악사나 김, 엄경희교수>

지난 시절에 비해 약간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지금, 비록 주류인 러시아인들의 눈치를 살피긴 하지만, 말만 들으면 ‘완벽한 러시아인’인 그들도 잃어버린 자신들의 뿌리와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서는 상당한 미련이나 애착을 갖고 있었다. ‘고려 말을 가르쳐 줄 선생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마리아 알렉상드로 김에게 ‘밥상 앞에서 당신의 손자에게 그 떠듬거리는 고려 말이라도 가르치라’고 열심히 권유했지만, ‘바이링구얼리즘(이중 언어 구사)’의 탁상공론에 사로잡힌 우리의 허상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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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노래의 학습에 참여한 마리아 알렉상드로 김과 고려인 여성들>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조상 나라 사람들과 같은 언어로 소통하고 싶어 하는 그들의 기본적 소망마저 외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계 11위에 올라있는 경제대국의 실상이라면, 매우 실망스런 일이다. 사실 가정 안에만 국한된 언어로는 아무런 미래도 없기 때문에 공적인 자리에서는 제국어(帝國語)를 쓰고 가정 내에서는 민족어를 쓰는 식의 이중 언어 구사가 무엇보다 기만적이라는 다나까 가쓰히코(田中克彦)의 생각은 그런 점에서 일종의 편견이다. 광대한 러시아에서 70여개 소수민족의 하나로 살아가고 있는 고려인들에게 좀 더 철저히 민족어를 가르치는 일이 그리도 어려운 일인지 우리 스스로 반문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띄엄띄엄 간신히 이어붙이는 우리말로 ‘선생이 필요하다’고 절규하는 고려인 여성을 상대하여 손자에게 그거라도 가르치면 취업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나 반복한다면, 결국 우리는 대책 없는 자기기만의 늪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4. 26. 12:38
*이 글은 "2008 국립국악원 정악단 정기연주회 - 노래와 선율이 함께 하는 여민락"(2008. 4. 17.)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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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민락 공연 팜플렛>

왜 지금 ‘여민락’을 말해야 하는가


                                                                조규익(숭실대 교수)


아부하는 사람들을 보며 ‘<용비어천가> 읊지 말라’고 핏대를 올리는 지식인들이 의외로 많다. 정도 이상으로 대통령을 추어올리는 언론의 논조에도 ‘노비어천가’를 부른다거나 ‘명비어천가’를 읊는다고 비난한다. <용비어천가>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일수록 그것을 ‘아부성 발언’으로 폄하하는 데 용감하다. 철학과 경륜을 갖추었던 한 시대의 지성들이 왕도정치와 이상국 건설의 꿈을 담아 만든 <용비어천가>가 500여년 후의 무식한 자손들로부터 이렇게 몹쓸 희롱을 당하는 현실이다.


세종대왕의 주도로 만들어진 향악정재 ‘봉래의’에서 전인자와 진구호 다음으로 나오는 것이 ‘여민락’이고, 그 음악에 올려 부른 가사가 바로 <용비어천가>(1·2·3·4·125장)다.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하겠다’는 것이 그 음악의 취지이고, 그것을 정재의 앞부분에 배치했으니, 임금의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 알만하다. ‘애민(愛民)’이야말로 치자가 명심해야 할 첫 덕목임을 세종대왕은 강조하려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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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장가사의 여민락 부분>

조선왕조의 근원이 깊고 멀다는 것, 왕 되는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해야 나라를 영원히 보전할 수 있다는 것 등이 <용비어천가>의 내용적 줄기다. 물론 6조(목조·익조·도조·환조·태조·태종)의 사적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지적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용비어천가>의 핵심인 ‘물망장(勿忘章)’(110~124장)과 ‘졸장(卒章)’(125장)의 의미를 부각시키기 위한 수사적 장치일 뿐이다. 초등학생일지라도 그런 내용을 가지고 ‘<용비어천가>=아부성 발언’이라는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주거를 호화롭게 하지 말라, 좋은 음식을 탐하지 말라, 형벌을 마음대로 하지 말라, 백성들의 고통을 잊지 말라, 아부하는 간신들을 멀리 하라, 백성들의 언로를 막지 말라, 세금을 공평하게 거두어 나라의 근본을 다져라, 바른말 하는 신하를 중시하라, 학자들을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 하라,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라...”


왕조 초반에 최고의 지성들을 모아 이런 금언(金言)을 만들고, 음악과 춤이 어우러진 종합예술의 무대에 올려 공연하게 함으로써 ‘군-신-민’이 함께 그 뜻을 새기도록 한 일을 동서고금의 어느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한 번이라도 마음의 눈을 크게 뜨고 읽어 보면 그것이 임금을 위한 수신 교과서나 지배계층을 겨냥한 정치학 교과서일지언정 아부의 언사가 결코 아니라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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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민락을 연주하는 모습>


         ***


정치인이나 공무원은 국민을 위한 공복(公僕)임에도 지금껏 그들은 국민 위에 군림해 왔다. 최근 대통령이 공석에서 ‘머슴론’을 통해 땅에 떨어진 이도(吏道)를 질타한 일도 <용비어천가>의 핵심적인 내용과 맥을 함께 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의 요체는 ‘국태민안’이다. 국가를 태평하게 유지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이상정치의 알파요 오메가다. 풍족한 의식주와 든든한 국방, 반듯한 사회기강 속에서 백성들은 편안함을 느낀다. 권력과 부를 얻고자 아부의 수단으로 만든 것이 <용비어천가>는 아니다.


고금의 역사로부터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을 얻은 지성인들. 그들은 <용비어천가>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왕조가 어떻게 흥망성쇠의 과정을 거쳐 왔는가를 되새겨보고자 했다. 힘겹게 창업한 조선왕조가 영속되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무엇인지 그들은 알고 있었다. 최고 통치자인 왕들이 나태를 벗어나 백성을 위하는 일에 매진해야 왕조는 망하지 않는다고 그들은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후대의 왕들을 대상으로 ‘잊지 말아야 할’ 금언들을 들어놓음으로써 모든 공직자들까지 깨우친, 이른바 1석2조의 효과를 얻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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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민락 가사의 짜임>

‘임금이 하늘인 시대’였음에도 그들은 국태민안의 요체가 ‘경천근민(敬天勤民)’ 즉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해야 하는 일임을 감히 왕에게 강조한 그들이었다. 대통령이든 관료이든 민심이 천심임을 망각하고 자신의 소리(小利)만 취할 때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국민의 공복임을 잊고 있는 관료집단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용비어천가>를 끊임없이 부르고 들어야 하는 시대다. 국립국악원이 ‘여민락’을 창조적으로 재현하고자 한 일이 참으로 시의적절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