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12. 22. 16:32

 

문학과 환경학회 국제학술 심포지엄[ ‘동요하는 경계들: 자연, 기술, 예술’]-오키나와 나고 시

메이오 대학교/2014년 11월 22-23일 

 

 


문학과 환경학회 국제 심포지엄 표지


 


다큐멘타리의 내레이터로 등장하여 끝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이시무레 미치코 선생

 

 


다큐멘터리 <꽃의 정토로> 타이틀 화면

 

 


이시무레 미치코의 <<고해정토>>의 영문 번역판

 

 


한국의 전통 생태학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있는 필자

 

 


이시무레 미치코의 「꽃의 정토로(花の億土へ)」에 나타난 '문학이론의 척도'를 발표하고 있는
미네소타 대학교의 크리스틴(Marran, Christine L.) 교수

 

 


발표를 마치고 같은 세션의 발표자들과 함께

 

 


점심식사 후 대만 담강대학교(Tamkang University)의 황(Huang, Peter) 교수와 함께 

 

 

 

 

*교수신문 760호(2014. 12. 22)에 실린 글을 이곳에 퍼다 놓습니다.

 

 

 

'환경과 문학' 담론, 그 세련화를 지향하며

   학술대회 참관기-문학과 환경학회 국제심포지엄을 다녀와서
2014년 12월 22일 (월) 10:16:58 교수신문 editor@kyosu.net

   
 

 

▲ 해상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헤노코 해변에 설치한 텐트. 문학과 환경학회 국제심포지엄이 열린 오키나와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규익 교수는 바로 이곳에서 일본의 환경론이 보다 심도있게 융합 양상을 띄며 발전하고 있음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사진제공= 조규익

 

 

 
 
이 글은 조규익 숭실대 교수(국어국문학과)가 지난 11월 22일부터 이틀간 일본 오키나와 나고 시의 메이오대에서 열린 2014년 동아시아 문학과 환경학회 국제 심포지엄[2014 The International Symposium on Literature and Environment in East Asia[ISLE-EA]/Unsettling Boundaries: Nature, Technology, Art]을 다녀와서 학회 참관기로 보내온 글이다.

 

 


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오키나와 나고(名護) 시의 메이오(名櫻) 대학에서 열린 ‘2014년 동아시아 문학과 환경학회 국제 심포지엄’은 한국·일본·미국·타이완·중국·오스트레일리아·홍콩·캐나다 등 세계 각국에서 모여 든 100여명의 학자들과 수십 명의 대학원생들이 모여 벌인 학술의 난장이었다. ‘동요하는 경계들: 자연, 기술, 예술’이란 주제가 암시하듯 현격하게 다른 분야의 학문들이 환경이란 범주로 융합돼야 하는 당위를 모토로 내건 심포지엄이었다.

 

‘전날 밤의 다큐멘타리 상영/이틀에 걸친 논문 발표/환경 분쟁지역 헤노코(へのこ) 답사’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진행된 심포지엄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환경파괴가 단순히 물리적인 문제이거나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한시적인 문제가 아니며, 세대를 넘어 영원히 지속될 뿐 아니라 인문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의 지혜를 융합해 미연에 방지하거나 해결해야 할 ‘절박한 삶의 문제’임을 천명하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심포지엄 전날 밤 참여자들을 위해 상영한 다큐멘타리「꽃의 정토로(花の億土へ)」는 이 심포지엄이 지향하는 결론을 미리 암시한 일종의 가설이자 화두(話頭)였다. 자신의 고향 구마모토 현(熊本縣)의 미나마타(水俣)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환경문제를 문학으로 고발해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환경 공해의 고발과 해결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이시무레 미치코(石牟괋道子). 그녀가 주연으로 출연해 미나마타병의 현상과 의미를 심도 있게 설파하고, 시라누이(不知火) 바다의 아름다운 사계를 통해 그 공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시간대의 희망을 그려낸, ‘한 편의 시’와 같은 기록 영화였다.

그 바다가 갖고 있던 본래의 환상적인 아름다움과 공해로 일그러진 현실의 참상이 대비되면서 자연환경의 파괴가 인류의 삶에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보여주고자 한 듯, 전편에 걸친 ‘환상과 리얼리즘’의 융합적 미학이 두드러진 작품이었다.

 

이시무레 미치코의 삼부작(<<고해정토(苦海淨土)>>, <<신들의 마을>>, <<하늘의 물고기>>)은 이미 환경 문제를 예술로 승화시킨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었으며, 일본 학자들은 물론 서양 학자들도 이시무레 미치코와 그녀의 문학을 ‘환경 혹은 환경문학’의 중심에 올려놓고 그들의 담론을 생산하거나 정제시키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아름다운 헤노코 해변을 누구로부터 지켜야 하는지,
난해한 의문이 떠올랐다. 누구의 말대로 ‘세계전략 차원의 폭거를 자행하고
있다’는 미국인가, 아니면 그 미국을 편드는 일본 정부인가, 아니면 일본의
가상적 적대국인 중국이나 북한인가. 그런 것들이 아니라면 개발이란 미명
아래 자연환경을 운명적으로 파괴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들인가.

 

 

서구 사회나 일본이 일찍부터 산업화의 길을 걸어온 만큼 환경 파괴의 문제나 삶의 피폐화 등 인간 소외의 문제를 인식하고 자각해온 역사가 길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만하다. 그런 비극적 현상들을 각종 예술의 소재로 그려내고자 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철학이나 종교학을 포함한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 그런 것들을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활성화되면서 환경론이 보다 심도 있는 융합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한 점은 충격이었고, 그것은 적어도 우리가 갖고 있는 환경인식의 낙후성이나 단편성과 대비되는 그들의 학문적 선진성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의 경우 이미 담론화된 철학 혹은 인문과학을 환경과 억지로 융합시키려 한다는 혐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환경이 물적인 객체라 해도 그것이 담론화의 대상으로 이미 편입돼 인식의 한 자리를 점하고 있는 한 그들과 대비되는 우리의 후진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 날 답사한 헤노코(へのこ) 해변을 바라보며, 군사기지 건설의 현실적 필요성과 자연보호의 명분은 양자택일의 문항이 아니라 그 역시 지혜로운 타협과 융합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나름의 판단을 내리게 됐다. 미 해군기지의 증설을 극력 저지하며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의 텐트 바깥엔 ‘투쟁 3871일째’라는 팻말이 작지만 완강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아름다운 헤노코 해변을 누구로부터 지켜야 하는지, 난해한 의문이 떠올랐다. 누구의 말대로 ‘세계전략 차원의 폭거를 자행하고 있다’는 미국인가, 아니면 그 미국을 편드는 일본정부인가, 아니면 일본의 가상적 적대국인 중국이나 북한인가. 그런 것들이 아니라면 개발이란 미명 아래 자연환경을 운명적으로 파괴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들인가.

 

환경론의 인문학적·미학적 승화는 단발적 캠페인이나 저항운동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환경문제를 ‘대를 이어’ 지속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원리로 격상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우리가 환경 문제를 문학이나 예술로 고발하고 형상화 할 뿐 아니라 초기 단계부터 교육과 연계시킨다면 ‘미래의 개연적 환경파괴 문제’는 근원적으로 예방될 수 있을 것이며, 예기치 않은 환경문제들도 체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고의 틀을 수월히 마련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역사 발전 원리의 두 축인 당위와 현실은 환경에도 적용돼야 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갖춰야 할때임을 깨달은 기회였다.

 

                                                                                     조규익(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오키나와 전도

 

 


오키나와 나하 시 시가지

 

 


나고 시 도착 후 저녁식사를 한 식당

 

 


마을 식당의 소박하고 정갈한 상차림

 

 


저녁 무렵 나고 만에서

 

 


호텔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저녁 무렵의 나고 만

 

 


학술 심포지엄이 열린 메이오 대학 정문

 

 


나고 시 시가지

 

 


호텔 근처에서 만난 교회[종교법인 궁리(宮里) 그리스도 교회]

 

 


교회의 내부

 

 


헤노코 해변으로 가는 길에 만난 미군기지[Camp Shwab]

 

 


투쟁단의 텐트에 부착된 구호[새 지사와 함께 열심히 합시다!!]

 

 


헤노코 해변 해상기지 건설 저지 투쟁 3871일째를 알리는 표지판

 

 


헤노코 해변에서 바라본 캠프 슈와브

 

 


헤노코 해변에서 만난 용궁신사

 

 


헤노코 해변의 아름다운 바위

 

 


헤노코 해변의 방파제

 

 


헤노코 해변 방파제 안쪽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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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2. 9. 29. 16:29

 

 

 

<조선학회 간친회(懇親會)장에서, 앞 줄 왼쪽이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교수)  발표 후 이자카야(居酒屋)에서 만난 일본 학자들일본 천리시의 정갈한 호텔방

일본을 어찌 할 것인가?

 

 

                                                                                                                                                               백규 

작년 늦가을, 일본 천리대학에서 열린 조선학회에 발표자로 참석했다. 첫날 저녁 이자카야의 선술집에서 몇몇 일본학자들과 어울렸다. 술잔이 오고 가던 중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한국학을 하는 일본인들은 모두 친한파(親韓派)’라고 하자 다른 학자들이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좌중의 유일한 한국인인 나를 의식한 ‘외교적 언사’임을 모르진 않았지만, 그 후에도 ‘친한파’란 말의 여운은 오랫동안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가끔 ‘친한파’와 ‘지한파(知韓派)’란 용어의 같고 다름을 혼자 헤아려 보며 고개를 갸웃하곤 한다.

 

 그간 우리 언론들은 일본 정치인들에 대하여 툭하면 ‘지한파’란 용어를 갖다 붙이곤 했다. 요즈음 등장하는 정치인들이야 대개 전후(戰後) 세대로서 일본 우익(右翼)의 입맛에 맞게 ‘맞춤식으로 사육(飼育)된 전사(戰士)들’이 대부분이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나름대로 ‘선이 굵은’ 정치인들이 일본을 이끌어 왔다. 그래서 그랬던가. 그들이 정권을 잡을 때마다 우리 언론들은 그들의 이름 앞에 ‘지한파’란 용어를 붙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한-일 양국이 충돌하는 경우 그들이 예외 없이 보여주는 ‘몰역사적(沒歷史的) 파렴치’를 목격하며, 나는 ‘지한파’란 용어의 불순한 함축성을 깨닫게 되었다. 말하자면 ‘친한(親韓)’과 ‘지한(知韓)’은 현격하게 다른 의미를 갖고 있으며, ‘친한’이든 ‘지한’이든 적어도 일본인들과 우리 사이에는 운명적으로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사실 또한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총독부의 철권통치를 통해 ‘악랄하다’ 할 정도로 철저하게 우리를 집어삼키고자 한 일본. 우리의 국토나 해양을 이 잡듯 뒤진 일이야 만인 공지의 사실이니 그 극악함은 재삼 반복할 필요 없을 것이다. 최고로 명민한 자국 학자들을 동원하여 우리의 정신문화를 철저히 연구⋅분석해온 저들의 자취를 찾아가다 보면 정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 일본 어용학자들은 이 땅의 젊은 학자들을 자신들의 도구로 끌어들여 이른바 ‘식민사관’을 공고히 했고, 지금까지 우리의 정신문화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길러낸 어용학자들이나 그들의 후예를 ‘지한파’로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적어도 다른 나라나 민족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신까지 속속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우리의 내면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지한파’ 일본인들을 어떻게 우리의 친구로, 선린(善隣)으로 가까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하여 제대로 항변할 줄 아는 강단의 사학자들을 목격하기 어려운 것도 그 원초적인 씨앗이 이제 큰 나무로 자라나 우리의 땅을 뒤덮고 있다는 무서운 증거일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독도를 갖고 ‘장난을 친다’고 여긴다. 말도 안 되는 일에 억지를 부리는 그들의 꼴이 우리의 눈에는 우습게 보이기 때문일까.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역사 기록들이 꽤 많으니 걱정할 일 없다는 것일까. 그들에게 내 땅을 통째로 빼앗긴 채 40년 가까운 세월을 허송한 바로 직전의 역사는 앞 세대의 일일 뿐, 지금의 나[우리]와는 상관없다고 보기 때문일까.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라. 그들은 수시로 독도에 잽을 날리는 일을 ‘목숨을 건 도박’으로 생각한다. ‘장난을 치는 일’에 목숨을 거는 바보는 없다. ‘목숨을 건 도박’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일본이 독도를 거론할 때마다 한심하고 딱하다는 듯 ‘저 새끼들 또 지랄한다’는 반응을 보이기 일쑤다. 그냥 대꾸하지 않고 넘기다 보면 장난꾼이 제풀에 지쳐 그만 두듯 포기하리라 믿는 것이다. 순진한 한국인들은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일부 극우주의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필요 때문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짓들을 벌인다’고 말하며, 사태를 아주 낙관적으로 보기 일쑤다. 이 이상 더 ‘대책 없이 순진한 낙관주의’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이 언젠가 있을지 모르는 ‘독도대첩(獨島大捷)’을 위해 해⋅공군력을 무한 증강하고 그 칼날을 벼려 온 역사가 얼마인데, 우리들 가운데 일부 불순한 무리들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드는 일조차 필사적으로 막으려 한다. ‘평화’를 위해 해군기지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우리 스스로 무장해제를 해가면서 어떻게 이웃의 강도들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방어한단 말인가.

 

 최근 일본총리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란 자가 앞장서서 ‘독도 분란’와 댜오위다오(釣魚島) 분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그 덕분에 그는 꺼져가던 그의 정치생명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황당하기로 노다에 비해 한 술 더 뜨는 아베신조(安倍晋三)란 자는 최근 자민당의 총재로 선임되었다. 나이를 갖고 따지는 일이야말로 젊은이들이 흔히 비칭으로 사용하는 이른바 ‘꼰대’들의 잘못된 관행이겠지만, 노다는 나와 같은 1957년생(56세), 아베는 약간 위인 1954년생(59세)이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겪은 일제시대, 대동아 전쟁, 6⋅25 동란 등을 한 번도 겪지 않고 등장하여 나라의 경영을 맡게 된 첫 세대가 바로 내 또래의 정치인들이다. 말하자면 일본이나 우리나 ‘철따구니 더럽게 없는’ 세대가 바로 우리 또래들이다. 전후에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역사의 노폐물들을 접하며 현실적 이해관계의 잣대나 들이대며 ‘불뚝거리는’ 세대가 바로 지금 나라를 경영한다는 내 또래의 정치인들이다. 제대로 된 철학도 경륜도 갖추지 못하고 감정과 투쟁의 혈기만 넘치는, 바로 그 세대다.

 

그런데, 노다의 정치생명 연장이나 아베의 총재 취임은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가. 바로 일본 국민들에 의해서다. 그간 순진한 우리나라 언론들은 독도 분란이나 댜오위다오 분란이 일부 일본의 극우세력에 의해 야기된 일이라고 떠들어 댔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 언론들의 무책임한 선정성이나 과도한 낙관주의는 참 기네스북에 올려도 될 정도다. 지금도 노다나 아베의 재등장을 일부 극우주의자들의 작품이라고 떠들 자신이 있는가? 아니다. ‘독도도 댜오위다오도 자신들의 것이었으면’ 하는 것이 일본 국민 전체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 깨달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최근 일본의 일부 지성인들이 자국의 위험한 움직임에 대하여 경고의 멘트를 날린 것은 다소 위안이 되는 일이다. 핏발 선 눈으로 미쳐 날뛰는 극우주의자들,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겉으로 말은 못하면서 ‘우리 것이었으면’ 하는 욕심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대다수 일본 국민들과 달리, 그들이 잘못 된 길을 가고 있음을 지적한 소수 지식인들은 세계 지성사에 아로새겨야 할 ‘보석 같은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소수가 무슨 힘이 있는가. 과연 그들의 양심이나 양식이 거대한 집단의 흐름을 막는 보(洑)가 될 수 있다고 보는지?

 

***

 

 우리의 무책임한 낙관주의는 재빨리 청산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창을 들고 나서면 우리는 두꺼운 방패로 막은 다음 더 강한 창을 마련해야 한다. 제주에도 두어 군데 해군기지를 만들어 두 방향에서 밀려오는 적[일본과 중국]을 막아야 한다. 우리가 도서관 서고에서 찾아낸 옛 문서를 들고 아무리 흔들어도 일본의 독도 침탈은 막을 수 없다. 댜오위다오를 두고 일본과 싸움을 벌이는 중국이 싸움을 걸어올 다음 차례는 우리의 이어도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경험칙만 바라보며 넋을 잃고 앉아 있을 틈이 없다. 오나라의 부차와 월나라의 구천이 남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교훈을 우리 스스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중국와 일본에 의해 당한 구한말의 치욕은 바로 오늘의 일로 재현될 수도 있다. <2012. 9.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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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2011. 11. 15. 20:28


한국문예연구소, 이 가을에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누리다!!!

 

이 가을 들어 한국문예연구소의 뛰어난 학자들이 좋은 책들을 발간했습니다.

정영문 박사가 <<조선시대 통신사문학 연구>>(지식과교양/학술총서 30)과 <<조선시대 사행록의 텍스트와 콘텍스트>>(학고방/학술총서 32)를, 김성훈 박사가 <<바늘(箴)로 마음을 치료하다!>>(학고방/*학술총서 33)를, 박선영 박사가 <<박목월과 김현승 시의 은유미학>>(지식과 교양/학술총서 34)를, 민충환 교수가 <<변영태가 쓴 영시집 Songs From Korea>>(지식과교양/문예총서 13)을 각각 펴냈습니다.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디자인도 깔끔하고 멋집니다. 축하의 말씀들을 전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각 저서들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정영문

 

<<조선시대 통신사문학 연구>>,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30으로 출간!!!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로 발간된 <<朝鮮時代 通信使文學硏究>>(정영문, 지식과교양)는 조선시대에 일본을 여행했던 통신사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연구서이다. 한국과 일본은 고대국가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교류가 있었지만, 이러한 교류는 자발적이고 개인적인 교류라기보다는 국가적인 필요에 의해 진행된 정책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한ㆍ일간의 교류를 기록한 자료가 많지 않은 현재의 상황에서, 그나마 풍부한 자료를 수록하고 있는 <<해행총재>>는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해행총재>>를 텍스트로 삼아 조선시대의 한ㆍ일 교류사를 연구하고 있는 저자는 박사학위논문을 다듬어 <<朝鮮時代 通信使文學硏究>>로 출판하였다. 이 책은 8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Ⅱ장에는 통신사의 사행노정과 그 노정이 지니는 성격, 조선시대 통신사행의 시기별 분류와 각각의 성격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임진왜란, 1636년, 1682년 전ㆍ후로 통신사의 사행을 4분류하면서 각 시기를 대표하는 사행록을 제시하였는데, 건국직후에서부터 임진왜란 직전까지 사행했던 통신사의 대표적인 기록으로는 송희경의 <<일본행록>>과 김성일의 <<해사록>>을 제시하였다. 이들 사행록을 Ⅲ장에서 분석하고 있다. 1592(선조 25)년부터 1635(인조 13)년까지 사행한 통신사의 사행록은 Ⅳ장에서 분석 제시하였다. 1636(인조 14)년부터 1655(효종 6)년까지 사행한 통신사의 대표적인 기록으로는 김세렴의 <<해사록>>과 남용익의 <<부상록>>을 제시하고, 이들 사행록을 Ⅴ장에서 분석하였다. 1682(숙종 8)년부터 1811(순조 11)년까지 일본을 사행한 통신사의 대표적인 기록으로는 신유한의 <<해유록>>과 조엄의 <<해사일기>>을 제시하고, 이를 Ⅵ장에서 분석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저자는 통신사가 비록 시기마다 다른 특징을 보이지만, 왜구문제해결이라는 현실적인 필요성에서 점차 문화교류라는 형식적인 교류로 성격이 변모되어 갔다고 보았다.

조선시대에 외국을 여행하는 기회는 사행에 참여하는 방법이 거의 유일할 정도였다. 이런 까닭에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기록을 발견하기도 쉽지 않다. 조선시대에 주변국가와 그 나라 사람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사행록은 여행하면서 실제로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서술한 기록문학인 동시에 보고문학이다. 체험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기록이기 때문에 비록 한시형식으로 기록했다고 할지라도 문학적 상상력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일본을 선험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체험을 바탕으로 일본과 일본인을 기록하였기 때문에 대상을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도 사행록을 읽음으로써 조선지식인들의 일본관과 일본의 풍속, 생활상 등을 이해할 수 있다. 사행록에 대한 연구서이기에 <<朝鮮時代 通信使文學硏究>>도 한ㆍ일 관계를 이해하는데 약간이나마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도서춢판 지식과교양, 2011. 값 22,000원

 

2. 정영문

 

<<조선시대 사행록의 텍스트와 콘텍스트>>,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32로 발간!!!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32으로 발간된 <<조선시대 사행록의 텍스트와 콘텍스트>>(정영문, 학고방)는 사행체험과 인식, 사행을 계기로 발전하였던 지방의 관변공연물에 관한 연구논문을 정리한 것이다.

조선에서는 중국과 일본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외교를 진행하였는데, 이들 나라를 사행하고 돌아온 사신들은 자신의 견문과 감상을 기록하였다. 그 속에는 사행당시의 상황과 사행에 참여한 인물들의 인식만 아니라 사회, 문화, 외교, 경제 등의 다양하고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 중에는 조선시대에 한양과 지방에서 다양한 공연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러한 관변공연물에 대한 관심이 책으로 나온 것이다.

저자는 사행록을 텍스트로 하여 연구한 9편의 논문을 1부 연행사와 통신사의 기록과 인식과 2부 사행록과 문화적 배경에 나누어 수록하고, 사행록과 관련한 연구논저의 목록을 부록으로 첨부하였다.

사신행차는 정해진 노정을 따라 이동하였는데, 몇몇 지역에서는 사신을 위로하는 전별연이 있었다. 전별연은 숙소와 가까운 누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 자리에서 주된 관심거리는 공연이었다. 이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도 사람들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공연무대 주변은 커다란 축제의 장이 되었다. 여기에서 공연되는 양상은 지역마다 차이가 있는데, 경상도 지역에서는 각 고을을 대표하는 기생과 악공이 모여들어 기량을 드러낸 반면에 평안도 지역에서는 경제력을 갖춘 일부 지역에서 독자적인 공연을 기획하였다. 그러므로 공연된 춤과 음악을 통해서 지역의 문화적 우열을 확인할 수 있었고, 공연물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부 공연물은 선상기를 통해 궁중에 소개되어 궁중정재로 정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확산을 가능하게 한 것은 사신을 위로하는 전별연 등에서 공연된 관변공연물이 여러 해 동안 반복되면서 높은 수준의 형식미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당시의 관변공연물이 전하지 않기 때문에 공연의 정확한 면모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오늘날의 지방축제처럼 조선시대에도 축제가 있었고, 지방민들도 이러한 축제를 통해 문화를 향유하였음을 이 책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도서출판 학고방, 2011. 값 22,000원

 

3. 김성훈

 

『‘箴’문학의 세계, 바늘(箴)로 마음을 치료하다!』,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33으로 출간!!!

 

잠(箴)은 침(鍼)과 통용되는 字義를 가지고 있는데, 오래 전부터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할 때 鍼을 놓았다. 이러한 의학적 효용성이 타인이나 자신을 규계(規戒)하는 목적을 지닌 문학 장르로 발전한 것이 바로 ‘箴’이다.

이에 의거하여 과거의 학자들 역시 마음속의 티끌을 미리 제거하고 예방하기 위해 ‘箴’이라는 장르의 글을 많이 창작했다. ‘箴’은 옛 성현들의 훌륭한 문구들을 가져다가 일상의 경계로 삼기에 매우 적합한 장르였으며, 그 글에는 교훈적인 내용을 오롯이 담아냈지만 문학이라는 유연한 문체를 그릇으로 했기에 수양의 도구로도 적합하다. 즉, 교훈과 경계가 될 만한 내용을 효용성의 원리에 입각해서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장르라 할 수 있다.

본고는 역대작가들의 箴작품을 대상으로 그 양식적 특성을 살피기 위해 사상적, 표현적 특질을 두루 연구한 것이다. 이를 통해 그간에 철학적인 성격이 짙은 글로만 여겨왔던 箴의 문학성도 추출해내는 계기가 되었다.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2장에서는 箴의 발생 연원을 문헌적 측면과 개념적 측면으로 나누어 고찰했다. 문헌적 측면에서는 여러 문헌의 글을 살핀 결과, 箴이 三代에 발생하였으나 周代 이후에 더욱 뚜렷한 발전양상을 보인 것으로 판단했다. 개념적 측면에서는 허신의『설문해자(說文解字)』를 비롯한 몇몇 문헌을 통해서 箴이 효용성을 목적으로 하게 된 유래를 살폈다.

3장에서는, 箴의 종류가 관잠(官箴)과 사잠(私箴)으로 나뉘는 근거를 구체적으로 살폈고, 서로 주고받는 효용성을 다분히 가진 문학임을 확인했다. 또 경전류(經典類)의 전고(典故)를 활용하기에 적합한 장르임을 확인했으며, 心性 의인문학의 대표작품인「천군전(天君傳)」과 心性을 의인화한 箴을 비교하여 그 영향관계를 고찰했다. 더불어 五倫歌類의 교훈시가와의 비교를 통해 내용적 상관성을 살폈다.

4장에서는, 箴의 주제표현 양상을 직설적 경계와 비유적 경계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직설적 경계에서는 유학사상의 실천덕목과 유학적 정치관을 경계한 작품들을 주제별로 세분해보았다. 비유적 경계에서는 心性 의인화 표현이 보이는 箴을 고찰하여, 내용 전달의 효율성을 확인했다. 또 몇몇 사물 및 동물을 소재로 하여 비유적 표현을 구사한 작품들을 살폈다. 예를 들어, 거울의 속성을 비유해서 심성을 수양하는 箴의 내용을 확인했고, 사물 및 동물을 빗댄 풍유의 수사를 통해서도 箴의 문학성을 고찰했다.

5장에서는, 구약성서 ‘잠언’과의 비교를 통해 한문학 ‘箴’과의 공통적 요소를 살펴보았다. 잠언은 이야기 형식이 아니면서,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는 속담ㆍ격언ㆍ옛말ㆍ금언 등의 형식적 특성이 있는데, 이 잠언은 고립된 사건에서 끌어낸 관찰들이 아니며, 고립된 사건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것들도 아니다. 이러한 점은 箴도 마찬가지인데, 箴에 담긴 교훈적 의미는 시대를 초월해서 적용될 수 있는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일상의 윤리적인 교훈을 주로 담아냈다는 점도 잠언과 箴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또 형식ㆍ표현적 측면에서는 잠언과 箴 모두 암송에 적합한 對句형식을 활용했음을 확인했고, 잠언의 ‘지혜’ 의인화와 箴의 ‘마음’ 의인화도 서로 비슷한 이념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6장에서는, 箴의 통시적 양상을 알아보았다. 우선 역대작가의 작품 일람을 통해 箴의 존재 양상을 살폈고, 箴이 역사적으로 어떤 전개 양상을 보였는지 역사 사료 및 문집의 기록을 통해 고찰했다.

연구 초기의 열정에 비해서는 많이 모자란 결과물이지만, 이 글이 ‘箴’ 장르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어 조금이나마 학계에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더불어 ‘箴’은 올바른 삶을 살도록 권계하는 처세법을 담은 글이기에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내용으로 다가갈 수 있으리라 본다.

 

도서출판 학고방, 2011. 값 18,000원

 

4. 박선영

 

<<박목월과 김현승 시의 은유미학>>,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34로 출간!!!

 

 

숭실대학교의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34)로 박선영의 <<박목월과 김현승 시의 은유 미학>>(지식과교양)이 발간되었다. 이 책에서 연구 대상으로 삼은 박목월 시인(1916~1978)과 김현승 시인(1913~1975)은 동시대에 살았으며 우리 현대시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이들은 기독교 정신에 뿌리를 두고 있는 대표적인 시인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는 지금까지 박목월과 김현승의 시에 관한 논의가 상당한 연구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두 시인의 시세계 전반에 걸쳐서 연구가 활성화되지는 못하였다는 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저자는 박목월과 김현승에 관한 선행연구에서 초기시와 중기시에 비해 후기시에 관한 연구가 매우 부족한 실정임을 지적하였다. 그는 박목월과 김현승의 후기시는 이들의 시적 역정을 마감하는 시점으로서 여기에는 이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기독교적 초월성이 수렴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으며, 특히 두 시인의 유고시집은 기독교의식이 본격적으로 구현된다는 점에서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 책의 저자는 박목월과 김현승 시의 핵심이 초월성에 놓여 있다는 점에 천착하여 이를 고찰하였다. 초월성은 기독교 시인에게 있어 아주 보편적이면서도 본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두 시인의 경우에는 후기시로 오면서 초월성이 본격화되기에 이른다. 이에 저자는 두 시인의 시세계 가운데서도 기독교적 초월성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후기시, 즉 박목월의 <<경상도의 가랑잎>>(1968), <<어머니>>(1968), <<무순>>(1976), 유고시집 <<크고 부드러운 손>>(1979)과 김현승의 <<김현승시전집>>(1974)에 수록된 <<날개>>, 유고시집 <<마지막 지상에서>>(1975)를 연구 범주로 삼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주목한 것은 박목월과 김현승 시인이 지향하는 초월성이 정교한 은유적 의미망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박목월과 김현승은 격변기였던 근대적 시간을 살았던 시인들로서 동일성이 상실된 근대를 지나면서도 동일성의 시학을 고수하였다. 그래서 이들의 시에는 자아와 세계의 합일을 추구하는 은유적 세계관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주지하다시피 은유는 단순히 표현 기법의 문제가 아닌 인식의 문제에 관련된 것으로 창조적인 의미생성에 관여하는 시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저자는 이러한 은유가 박목월과 김현승 시의 핵심적인 시적 원리이자 미학적 원리로 작용하고 있음에도 이에 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연구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이 책에서 저자는 두 시인의 시에 나타난 은유적 상상력을 총체화하기 위해 언술의 차원에서 은유를 파악하는 흐루쇼브스키의 은유 이론을 시분석의 방법론으로 활용하였다.

이 책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서론에 해당하는 Ⅰ부에서는 문제제기와 더불어 방법론을 간략하게 정리하였다. 그리고 Ⅱ부에 수록된 「<<경상도의 가랑잎>>의 사물화 양상」, 「<<사력질>>, <<무순>>에 나타난 죽음과 초월의 은유체계」, 「‘어머니’ 시에 나타난 은유 양상」, 「<<크고 부드러운 손>>에 나타난 초월성의 은유 미학」은 박목월 후기시에 나타난 은유 양상을 분석한 것이며, Ⅲ부에 수록된 「후기시의 사물화 양상 -광물에 토대 한 사물을 중심으로」, 「후기시에 나타난 ‘동물’의 은유화 양상」, 「<<마지막 지상에서>>에 나타난 은유 미학」은 김현승 후기시에 나타난 은유 양상을 분석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하여 Ⅳ부에서는 박목월과 김현승 시인의 시에 나타난 은유적 인식의 차이를 고찰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은유가 박목월과 김현승 시의 주된 미학적 원리임을 밝히고, 이들의 인식의 확장 및 갱신을 조명해내었다.

이 책은 지금까지 단어나 문장의 차원에서 논의되어 온 은유의 지평을 확대하여 언술의 차원에서 고찰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박목월과 김현승 시의 은유적 상상력을 총체화함으로써 기존의 논의들과 뚜렷한 변별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도서출판 지식과 교양, 2011. 값 24,000원

 

 

5. 민충환

 

<<변영태가 쓴 영시집 Songs From Korea>>, 한국문예연구소 문예총서 13으로 출간!!!

 

 

<<변영태가 쓴 영시집 Songs From Korea>>가 한국문예연구소 문예총서 13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의 1부에는 영어로 번역한 옛 시조 102수를 실었고, 2부에는 자작 영시 33수를 우형숙 선생의 번역으로 실었으며, 책 전체는 민충환 교수가 편집했다. 변영태(1892~1969)는 큰 형 변영만[법조인이자 한학자], 동생 변영로[시인이자 교육자]와 함께 ‘삼변(三卞)’으로 불리던 정치가⋅학자⋅시인이었다. 그는 이승만 정권에서 외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지내면서 큰 공을 세웠고, 고려대학교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그의 저술로 <<나의 조국>>(1956), <<외교어록>>(1959), <Songs From Korea>>(1948) 등이 있다.

이 책의 특징은 시조 영역의 선례(先例)들이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시조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영역(英譯)을 시도함으로써 후대 인사들에게 시조 영역의 모범을 보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창작 영시 또한 당시로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희귀한 작업이었다. 한국인으로서 쉽지 않은 영시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시를 창작하고 옛 시조를 번역했다는 점은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지향하는 요즈음에도 무시할 수 없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도서출판 지식과교양, 2011. 값 22,000원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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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1. 10. 16. 13:24

    
       일본에서 만난 한국학

-제 62회 조선학회(朝鮮學會) 학술발표회에 다녀와서-

                                                                                                                     조규익

지난 여름방학 중의 어느 날, 천리대학(天理大學)[일본 나라현 천리시]의 오카야마[岡山善一郞] 교수를 통해 조선학회로부터 ‘초빙발표’의 제의를 받았다. 일찍부터 조선학회의 명성을 들어왔고,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터라 망설임 없이 응했고, 발표논문 또한 기한보다 앞서 마무리해 보낼 수 있었다. 발표 청탁부터 원고 수납, 일정 통보, 의전(儀典) 등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치밀함은 과연 혀를 내두를 만 했다.

9월 30일 오후 3시 오사카 간사이[關西] 공항 도착. 출영 나온 두 명의 천리대 학생들과 함께 리무진 버스를 타고 천리시로 이동하는 내내 날씨는 흐려 있었다. 일본식 전통가옥들과 현대식 빌딩들이 조화를 이룬 오사카 외곽의 모습이 차분했다.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천리시. 천리교(天理敎)를 핵으로 이룩된 종교도시이기 때문일까, 일본의 중소규모 지방도시가 대부분 그러해서일까, 조용한 분위기가 약간은 이색적이었다. 간이 정류소에서 내린 우리는 다시 택시로 10여분을 이동하여 천리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깨끗하고 소박한 다다미방에는 녹차 응접세트가 놓인 다탁(茶卓)이 앉아있고, 작은 테라스에는 앙증스런 탁자 및 의자와 함께 양치질이 가능한 세면대가 달려 있었으며, 창밖으로는 파스텔톤의 일본 전통가옥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한 사람 정도 용납할 만한 화장실과 별도의 욕실이 참하고 청결한 자태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침실과 욕실 및 현관 사이에 마련된 작지만 넉넉한 공간에는 옷장도 있었다. 이런 점들 때문일까. 일본에서 숙박할 때마다 그들의 고집스런 주거(住居) 철학을 깨닫게 된다. 깔끔한 다다미방과 작은 공간의 앙증스런 활용.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침대보다 ‘일본적이어서’ 괜찮다는 느낌이다. 굳이 일본인의 집을 방문하지 않아도 그들의 주거방식을 일부나마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녹차로 갈증을 달래고 로비의 응접실로 내려가니 천리대학의 마츠오[松尾 勇] 교수가 우리를 반겼다. 참으로 우리말이 능숙한 젠틀맨이다. 그와 잠시 환담한 뒤 천리대학의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과 20여명의 학자들[일본 전역에서 모인 조선학회 임원들]이 모여 있는 식당으로 안내되어 저녁식사를 겸한 환영행사를 가졌다. 참석자 개개인 앞에 놓인 커다란 도시락 형태의 식판에 맥주를 곁들인 ‘조촐하면서도 깔끔한’ 식사였다. 늘 지글지글 끓는 전골이나 고기구이 혹은 생선[회/매운탕]에 익숙한 나로서는 참으로 이색적인 경험이었고, 마지막 날 밤 이자까야(いざかや)에서의 간친회(懇親會)를 빼곤 일본 체류 내내 ‘도시락 스타일’의 식사가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이튿날. 일찍 호텔을 나서 천리교에 봉직하는 젊은 직원 요코야마씨의 안내로 신전을 방문했다. 시가지에 넓게 자리 잡은 거대한 전통 일본식 건물이었다. 건물의 규모나 모습이 천리교의 중심임을 보여주는 ‘종교적 숭엄’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었다. 건물의 안쪽으로 넓은 광장이 있고, 큰 길에서 신전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에 청동색의 큰 도리이(とりい[鳥居]) 가 서 있었으며, 길 건너에 박물관[천리참고관(天理參考館)]과 천리대학이 있었다. 신전에는 많은 교인들이 나와 무릎을 꿇고 주문을 외우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되어 있는 신전의 내부는 운동장처럼 넓었다. 목조 건물인 신전은 어느 곳이나 반들반들 빛을 내고 있었다. 복도를 통해 걷고 있는데,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일군(一群)의 교인들이 손에 큰 벙어리장갑 같은 것을 끼고 바닥을 닦으며 무릎걸음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입으로 주문을 외우며 바닥을 닦아나가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의식으로 ‘근행(勤行?)’이라는 , 요코야마 씨의 설명이었다. 종교의 의식이야 원래 합리(合理)를 초월하는 것이지만, 이런 근행이야말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문을 외우며 ‘마음의 때를 닦아내듯’ 신전의 내부를 닦는 일. 따로 품을 들여 청소할 필요도 없고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으니, 그 아니 합리적인가.

요코야마 씨의 설명에 의하면 천리교는 1838년 10월 26일 교조 나카야마 미키에게 내린 ‘어버이 천리왕님’의 계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버이 신(神)’은 인간들이 서로 도우며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함께 즐기려는 마음에서 인간을 창조했으며, 그런 이유로 ‘즐거운 삶’이야말로 인간생활의 목표라는 것이다. 신전 중앙에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지점인 ‘터전[지바]’이 있는데, 이곳에서 세상의 구제를 위한 근행이 올려 진다고 했다. 그들은 그곳을 온 세상 사람들의 ‘으뜸 고향’이라 여기고 있었다.

신전을 포함하고 있는 천리교 본부는 정기적으로 각종 행사나 모임을 갖는 한편 ‘즐거운 삶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강습회 또한 수시로 열린다고 했다. 앞서 말한 ‘터전’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를 ‘본고장’이라 하며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각종 교육시설들이 완비되어 있었으며, 종합병원을 비롯한 사회복지시설, 도서관이나 박물관 등의 문화시설들도 갖추어져 있었다. 시내를 돌아보면 ‘○○詰所’나 ‘○○母屋’ 등의 간판이 붙은 건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들이 바로 신자들의 숙소라 했다. 누구든 원하면 싼값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란다.

신전을 관람한 후 들른 참고관 즉 박물관은 엄청난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정확한 명칭은 ‘세계 생활문화와 고고미술 박물관’이었다. 아이누, 한반도, 중국ㆍ대만, 발리, 보르네오, 인도, 아시아 전역의 강과 하천변, 멕시코와 과테말라, 파푸아 뉴기니, 일본인들의 아메리카 이민과 천리교 전도, 일본의 서민생활 등의 생활문화와 한국ㆍ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고고미술품들. 주마간산 식으로 훑어보기에도 벅찬 내용이었고, 참으로 부러운 컬렉션이었다. 수십만 점의 소장품 가운데 3천 여 점 만 전시되고 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했다. 마침 우리나라의 석조유물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상당수는 국내 박물관에서 볼 수 없었던 진귀(珍貴)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과연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

10월 1일 오후 1시에 시작된 학회는 다음 날 오후 5시에야 마무리되었다. 하루 반에 걸쳐 28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나를 비롯 한국에서 초청된 3명의 발표자와 일본에서 유학하거나 교수로 있는 한국인 등 12명을 빼고는 모두 일본의 학자들이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발표논문의 수가 아니었다. 그들의 진지한 태도와 토론의 열기가 조선학회에 대하여 그간 지녀오던 호기심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큰 깨달음으로 발효(醱酵)된 점이 나 자신에겐 큰 수확이었다. 사실 ‘일본인들이 한국학을 하면 얼마나 하랴?’라는 것이 평소의 ‘오만했던’ 내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 땅에서 그 땅의 사람들이 그 땅의 말로’ 한국학을 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한국말로 하는 한국학’과 다른 또 하나의 한국학이 일본에서 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또 하나의 자각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솔직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조선학이란 바로 ‘한국어문학과 역사’였다. 1일 저녁의 간친회 자리에서 일본의 학자들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지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조선학회에 참여하여 다까하시 도오루나 오구라 신뻬이 같은 1세대 한국학 연구자들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조선학회의 바탕이 된 그 분들의 후예들을 만나보며 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는 요지의 발언이었다. 그들의 ‘우리말과 문학, 역사에 대한 연구’가 식민지 경영의 일환으로 이 땅에서 행해진 것이며 분야에 따라 왜곡의 정치적 의도 또한 드러내긴 했으나, 그것들이 우리를 자극하여 우리 학자들로 하여금 어문학이나 역사의 연구에 매진토록 한 것도 사실이다. 이미 메이지 유신 때부터 서구로부터 근대학문의 방법을 익힌 그들. 최소한 반세기 이상 우리를 앞서 간 그들이었다. 우리의 일부 학자들을 발분망식(發憤忘食)하게 만든 그들의 공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억설(臆說)일까.

나는 일본 학자들의 학술발표를 들으며 영국이나 미국 등 서구의 학자들을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그들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영어영문학회’ 등 그들의 언어와 문학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학술대회를 참관할 것이다.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영문학을 연구하고 발표하는 내용을 보고 들으며 무슨 느낌을 가질까. ‘놀고 있네!’라고 할까?, 아니면 ‘어, 이 사람들 봐라. 제법인데?’라고 할까?, 아니면 ‘아, 놀랍구나!’라고 할까? 나는 딱딱 끊어지는 어투로 이어나가는 일본인들의 발표를 들으며 세 번 째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아, 그곳에서 그곳 사람들이 그곳의 말로 새로운 한국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학자이니 당신들이 하는 한국학의 정확성을 검증해보아야겠소!’라는 오만한 객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별개의 패러다임이 그곳에 살아서 통용되고 있었다. ‘한국이 한국어문학의 종주국이고 세계의 중심이며 으뜸’이라는 생각은 어쩜 오만한 편견일 수 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문학연구의 핵심은 작품의 해석 작업이다. 무슨 언어로 해석하든 그 언어 사용자들이 공감할만한 논리적 정합성(整合性)만 갖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애당초 정답이 없는 문제를 놓고 변방에 대한 중심부의 권위를 어떻게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그동안 한국학을 한다는 외국인들에 대하여 가당찮은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스스로 탈식민(脫植民)을 주장하면서 식민의 논리에 갇혀버린 셈이니, 이보다 더 우스운 꼴이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국의 학회, 특히 우리의 어문학을 대표하는 국어국문학회를 떠올려 보았다. 나는 최근 2년간 연속 그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2년 전 경희대에서 발표할 땐 드넓은 발표장에 10명의 청중[그나마 경희대 교수들이 동원한 학생들로 보였다!]이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허공에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놓고 발표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발표가 끝나고 어느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하거나 묻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발표를 끝내고 연단을 내려오며 ‘다시는 학회에 오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지만, 또 다시 때가 되자 습관적으로 역시나 그런 텅 빈 회의장에 가고 말았다. ‘혹시나’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공부를 시작하던 80년대의 국어국문학회 학술발표장엔 회원들이 바글바글 끓어 넘쳤다. 열기가 대단했다. 김동욱, 장덕순, 김석하, 황패강, 이기문 선생 등 원로들이 맨 앞자리에 좌정하여 분위기를 주도했다. 날카로운 지적과 질책이 이어지고, 발표자들은 적절한 대응으로 의기양양해 하거나 몸 둘 바를 모르기도 했다. 학문이 세대 간에 전승되어 내리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인터넷 덕분인가, 아니면 인터넷의 독성 때문인가. 이제 학술발표회장에서 후학들을 질책하는 원로들이 사라지고, 아예 학술발표회장에 발품 팔아가며 갈 필요조차 없다는 듯 후학들도 사라졌다. 발표회가 끝나자마자 즉각 인터넷으로 내용이 배포될 텐데, 무엇하러 시간 죽여 가며 차비 죽여 가며 발표회장을 찾을 것인가. 말인즉슨 그럴 듯하지만, 학문이 전승되는 세대 간의 통로가 막히고 생명이 끊어진 곳에 유령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문화의 사막화 현상’은 어찌 할 것인가.

물론 장르별로 분화된 학회들이 즐비하고, 그곳에서 열띤 토론들이 이루어진다고 항변할 수 있고, 또 얼마간 그것은 사실이다. 나 자신도 일본에 하나 뿐인 조선학회와 한국의 여러 학회들을 단순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이 지긋한 일본의 학자들이 어눌한 한국말로 한국학 관계 논문들을 진지하게 발표한 뒤 젊은 학자들이 따라붙어 묻고, 반대로 젊은 학자들이 일본어로 진지하게 발표한 뒤 고명한 교수들이 세세히 질문하고 충고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함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면 내 느낌이 지나친 것인가.

***

허름하지만 낭만이 배어있는 이자까야. 그곳에서 어울린 일본의 조선학자들은 어쨌든 친한파(親韓派)들이었다. 그들 스스로 한국에서의 추억과 한국 음식을 떠올리며, 힘주어 한국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일본에서 한국의 주가가 올라가고는 있으나, 어쨌든 마이너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세월을 합리화하는 심리적 기제(機制)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학을 대하는 그들의 진지하고 치밀한 태도야말로 무슨 대상을 연구하든 학자로서 지녀야 할 본령(本領)이라는 점에서 존중될 필요가 있다.

일본의 학자들과 현지에서 함께 한 3박4일이 내겐 깨달음의 기회였다.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죽이다가는 특출하던 일제시대 일본의 한국학자들이 그랬듯 그 후예들도 질적 양적인 면에서 조만간 우리를 추월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갖고 돌아왔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운 요즈음이다.



 <천리관광호텔의 모습>
 

 <호텔 테라스의 앙증스런 배치, 그리고 창밖 풍경>

 <호텔 방.외출했다 돌아오니 이불이 곱게 깔려 있었다!>

 <저녁식사 후 오카야마 교수,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 백규>

 <도착하여 저녁식사 후 들른 이자까야 논따로>

 <이자까야 논따로에 걸려 있는 오래 된 시계. 명치시대의 것으로 현재도 살아 있음>

 <천리교 신전>

 <천리교 신전에 걸린 상징문양>

 <도리이를 통해서 바라본 천리교 신전>

 <천리 참고관[박물관]>

 <호텔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주택가>

 <천리대학 건물>

 <천리대학 강의동 앞에서>

 <천리대학 구내식당에서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

 <천리대학 구내식당에서 마츠오 교수>

 <천리참고관[박물관]>

 <발표회가 열린 후루사토 회관>

 <간친회장>

 <간친회장에서 오카야마 교수, 오카야마 카이미, 백규>

 <간친회장에서 후지모토 유키오 교수 등 일본학자들>

 <첫날 발표를 끝내고 이자까야에서 일본의 학자들과>

 <이자까야에서 오카야마 교수와>

  <첫날 발표 후 들른 이자까야의 메뉴들>
 

 <학회 접수처>

 <발표회장>

 <이광수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하다노 교수>

 <첫날 발표 후 기념촬영을 준비하는 모습>

 <천리대학 강의동>

 <발표하는 동경대학원의 이현준 선생>

 <천리시청의 특이한 모양>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들>

  <뒷풀이 자리에서 천리대학의 교수들과>

  <뒷풀이자리에서 천리대학의 모리야마, 김선미 교수등>

 <뒷풀이 자리에서 마츠오 교수와 백규>

  <호텔의 아침식사>

 <천리관광호텔 근처의 고서점>

 <천리관광호텔 근처의 고서점에서, 백규>

  <이자까야의 벽에 붙은 가부끼 배우의 모습>

<학회 뒷풀이가 있었던 이자까야의 벽에 붙은 기린맥주 포스터와 술 메뉴들>
 

    <학회 뒷풀이가 있었던 이자까야의 벽에 달아맨 인형>

 <이자까야 내부의 벽에 붙은 각종 주류 및 음식 메뉴들>

<천리 시내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건물>

 <천리시 도처에서 볼 수 있는 母屋>

<천리시 도처에서 목격되는 신자 숙소인 쯔메쇼>

<오사카 외곽에서 간사이 공항으로 건너가는 다리>
 

<간사이 공항에서 인천으로 떠날 ANA 기가 이륙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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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10. 11. 08:35

‘노벨상’ 강박증

 

2010년 10월 7일 오후 8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시각이었다. 며칠 전부터 언론 매체들이 고은(高銀) 시인의 수상 가능성을 확신하는 듯 떠들썩하게 기대치를 높여 왔던 만큼, 사람들은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흡사 고 시인의 노벨상 수상이 민족적 ‘비원(悲願)’이라도 된다는 듯, 사람들은 그 시각이 가까워지자 입을 모아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올해 역시 그 예측은 빗나갔고, 기원은 허사로 돌아갔다. 다시 기다려야 할 1년을 지루하게 느끼며 사람들은 노벨상에 대한 관심을 접어 둔 채 조용해졌다.

 

이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일본이 화학 분야에서 공동 수상자를 배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누구의 표현대로 ‘민족적 모욕’에 견줄만한 일이 벌어졌으므로, 우리는 쓰라린 가슴을 접어 눌러야 했다. 21세기에 접어든 이후만 해도 일본은 10명의 노벨 수상자를 배출했는데, 그들 모두 기초과학 분야의 연구자들이다. 우리가 물리학이나 화학, 생리학, 의학, 경제학 등은 꿈도 꾸지 못한 채 겨우 문학 분야 하나에만 목을 매다시피 하고 있는데, 그들은 이미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와 오에겐자브로(1994) 등 두 명이 문학상을 받은 바 있고, 기초과학과 평화상까지 합하면 총 1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그간 해온 방식대로 올해도 몇몇 언론매체들은 일본과 한국의 교육을 비교하는 데서 원인을 찾아 제시하는 것으로 전 국민적 실망감을 누그러뜨리고자 하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라는 점이다. 언론의 분석은 이유가 궁금한 대중들의 갈증을 우선 풀어줄 ‘한 컵의 물’일 뿐이다. 좀 더 근본적인 요구는 국가차원의 정책과 실천일 텐데, 국가나 국민 모두 아마추어리즘의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우리의 한계다.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고, 노벨상 보기를 집중적으로 대표선수 몇 명 길러 금메달을 따내는 올림픽 대하듯 한다. 사실 ‘올림픽의 금메달’이 스포츠의 최종적인 목적은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생활 속에서 즐기게 함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도록 하는 것이 스포츠의 본질이다. 지난 시절 사회주의권 국가들이나 저개발 국가들에서 특정 분야의 뛰어난 선수들만을 돈 들여 키우는, 이른바 ‘엘리트 체육’이 성행했는데, 그것은 체육인구의 저변확대를 통한 선수육성이라는 본질과 거리가 멀다. 당분간 금메달은 따오겠지만, 그것으로 그 나라의 총체적인 수준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근본적인 문제의 분석과 처방을 거치지 않고, 특정 분야 특정 선수 한 두 사람에게 노벨상을 받아올 것을 기대하는 우리의 ‘대책 없는 노벨상 기대심리’는 오히려 ‘엘리트 체육’보다도 못한 셈이다. 설사 내년에 고 시인이 노벨 문학상을 탄다 해도, 후속 수상자의 배출은 다시 ‘요행’이나 ‘기적’에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고 시인 급(級)의 ‘잠재적 노벨상 수상 후보자들’ 수십 혹은 수백 명이 우글거리도록 만들자면 길게 보고 투자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문학교육을 제대로 시키고, 다양한 외국의 인재들을 불러다 제대로 된 우리 문학의 번역자로 키워야 한다. 기초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하려면 지금과 같은 교육과 학문의 토양을 완벽하게 바꾸는 투자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자면 많은 시일과 돈이 필요할 것이니, 상당 기간 우리는 노벨상의 존재를 잊어야 한다. 투자와 노력도 안 하면서 노벨상에 모든 것을 거는 듯한 행위는 국가적 차원의 ‘파렴치’일 뿐이다.

 

노벨상은 목표가 아니라 우리 노력의 부산물이어야 한다. ‘문학과 학문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다 보니 노벨상 수상자도 나오더라’는 말이 정답이다. 문학이든 기초과학이든 노벨상이 전부는 아니다. 1964년 프랑스의 문호 장폴 사르트르는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 ‘노벨문학상이 아니라도 자신의 문학이 최고’라는 자부심을 그는 견지했을 것이고, 또 사실이 그렇다. 수준 높은 문학과 학문을 가꾸어 나가고, 그에 대한 스스로의 자부심을 높여 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노벨상 강박증’을 극복할 수 있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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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8. 15. 23:42
역사, 이젠 제대로 가르치자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CIS(독립국가연합) 등에서 만나는 해외동포 3~4세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우리말을 모르고, 우리의 역사를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말을 모르니 우리의 역사를 알 수 없고, 우리의 역사를 모르니 그들과 함께 민족 정체성을 공유할 수가 없다. 다민족 국가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그들이 고국의 말과 역사조차 모르는 처지에 고국에서 온 동포를 ‘동포 아닌 제3국인’ 혹은 그들과 공존하는 ‘타민족’ 정도로 인식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원래 이민지와 고국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경계인’으로 머물러 온 그들이 이제는 그런 중간자적 인식마저 상실하고 대책 없는 미아(迷兒)로 떠돌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을 해외의 동포들에게서만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 태어나고 자란 신세대들이 겪는 ‘민족 정체성의 위기’는 더욱 우려스럽게 심화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바로 철학 없는 기성세대나 나라를 경영한다는 지도층이 무사려(無思慮)하게 지향해온 ‘세계화’의 비극적 소산이다. 든든한 경제나 국방만이 세계의 복판에서 한 나라를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발판은 아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을 경우 한갓 ‘경제동물’에 불과한 인간이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기인식’을 갖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의 우리처럼 어려서부터 영어에만 몰입하게 하고 역사나 민족문화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새로운 세대들은 스스로 ‘세계시민’의 착각 속에 빠져들고 만다. 각자의 개별성과 독자성을 투철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바람직한 세계시민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때 늦은 감은 있으나,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독도 교육을 강화하는 내용의 교육과정’을 발표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독도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면서도 자라나는 세대에게 그 이유나 역사적 당위성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면, 조만간 우리는 제 땅마저 지키지 못하는 한심한 민족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억지를 역사 교과서에 반영하여 가르쳐 오고 있으며, 중국 또한 ‘동북공정’이라는 해괴한 명칭으로 역사의 날조에 동참했다. ‘날조된 역사’를 당당하게 교육시키는 그들의 심리 저변에는 그것이 자라나는 세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경우 미래는 그 방향으로 되어갈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들어 있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긴 시간이 지나 날조된 역사가 역사의 한 부분으로 정착되었으면’ 하는 헛된 소망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날조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분명한 죄악이지만, 제대로 된 역사마저 가르치지 않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명한 직무유기이니 그것 또한 죄악이다.

우리의 편견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바로 지금’만이 가장 중요하며, 그것은 과거나 미래와 무관하다는 생각이다. 거기서 역사나 민족문화에 대한 몰각(沒覺)은 비롯되기 때문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쳐졌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으며, 현재는 과거의 조명 속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고 역사 철학자 E.H.카아는 역설했다. 과거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현대사회를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재의 원인은 과거에 있으며, 미래의 원인은 현재에 있다. 주변의 타민족, 타 국가들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적 관계를 정확히 분석하고 우리의 이익을 수호하려면 원인으로서의 과거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러려면 역사에 대한 연구와 교육은 무엇보다 긴요하다. 사실 우리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않고 있는 것이 독도만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에 걸쳐 지속되고 있는 문학, 역사, 철학 등 전통인문학의 핵심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신세대를 국제 미아로 만들고 있는 점은 기성세대들이 직시해야 할 문제적 현실이다. 경제와 군사, 문화면으로 세계 최강을 자부하는 일본이나 중국이 이 시점에 왜 ‘역사의 날조’와 ‘날조된 역사의 교육’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지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이들에 비해 한참 늦었지만, 우리도 ‘제대로 된’ 역사교육에 나서야 한다. 그것만이 민족의 미래를 담보할, ‘멀지만 확실한’ 길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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