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6. 7. 22. 01:41

불통의 시대를 살며

 

 

 

개인정보 보호의식이 웬만큼 정착되었을 법도 하지만, 가끔 나 스스로 생소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없지 않다. 두어 학기 전의 일. 자꾸만 나로부터 탈출하려는 영어를 붙잡아 앉힐 겸 매주 한 번씩 몇몇 교수들과 함께 만나는 외국인 교수가 있었다. 한 교수와 여러 학기를 지속적으로 만날 때도, 한 학기만으로 끝날 때도 있었으나, 매 학기가 끝날 무렵이면 그에게 고마운 마음으로 식사 한 끼 대접해온 것이 내 원칙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없었던 건 아니나, 사실은 너무 무미건조한 그들에게 끈끈한 인간관계의 전통을 보여주고픈 욕망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때마침 학기 내내 부득이한 일들로 시간을 빼먹곤 하다가 그 교수와의 마지막 시간마저 놓쳐버렸다. 더구나 학기 중 그의 개인 연락처를 알아놓지도 못한 나는 하는 수 없이 외국인 교수들을 관리하는 사무실로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내가 국문과 조 아무개 교수인데, 아무개 교수와 통화 좀 할 수 있을까요?”

지금 안 계시는데요.”

당연히 그 분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진 않겠지요?”

.”

그럼 내 전화번호를 남길 테니, 전화 좀 해 달라고 알려드리시오.”

알겠습니다. 그런데, 용건이 뭐죠?”

그러지 말았어야 하는데, 그 조교가 용건을 묻는 순간 화가 터졌다. 교수가 자신의 신분과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같은 대학 교수에게 전화 좀 해달라고 부탁하는데, 무슨 용건으로 그와 통화하려는지 묻는 그 조교 녀석이 멍청하고 야속해보였기 때문이다.

 

, 학생! 용건은 왜 묻는 거야? 교수가 같은 대학 교수에게 연락처까지 남기고 전화를 부탁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할 이야기까지 자네에게 알려줘야 하는 거야? 외국인 교수에게 왜 그리도 저자세인 거야?”

 

그는 깜짝 놀라는 듯 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화가 갈아 앉지 않았다. ‘짜식들, 한국에 왔으면 한국의 방식을 따라야지!’ 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정보 관리에 철저한 서양 사람들과 그들에게 과공(過恭)하는 듯한 조교를 괜히 비난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

 

학진(한국학술진흥재단의 약칭. 현재는 한국연구재단)’ 사이트에 교수들의 연락처가 상세히 올라 있던 때가 있었다. 연구소 일, 학회 일, 논문 심사, 강사 섭외, 자료 문의 등등. 일면식도 없는 타 대학 교수들에게 연락할 일들이 수시로 생겼고, 그 때마다 학진 사이트가 내 수첩 역할을 톡톡히 해내곤 하던 시절이었다. 학진 사이트가 있어 참 편리했고, 행복하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학진 사이트에서 개인 연락처가 싸악 사라졌다. 어둔 산길을 가던 중 등불이 꺼진 것처럼 답답했다. 일이 생길 때마다 접촉할 교수의 재직 대학 해당학과 사무실로 연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앳된 목소리의 대학원생 조교는 알려드릴 수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럴 때마다 내 연락처를 남기지만, 원하는 시간 안에 연결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참 답답한 시절이 도래한 것이었다. 은행, 보험사, 통신사, 신문사, 캐피탈, 장애인 협회, 기획부동산 회사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불청객들이 전화를 해대고, 온갖 스팸메일들을 보내오는데, ‘놈들은 과연 어떻게 내 연락처를 알아냈단 말인가.

몇 년 전 몇몇 일본의 교수들을 급히 접촉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러나 도통 연락처를 알 도리가 없었다. 대학 홈피의 어느 구석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해당 대학 사무실로 전화를 했다. 그 대학 직원 가운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간신히 찾아 내 뜻을 전했으나, ‘그 교수의 이메일 주소를 알려드릴 수 없다/본 대학으로 공문을 보내 이메일 주소 알려주기를 신청하면, 그 교수에게 연락하여 허락을 받은 다음 이메일 주소를 알려줄 수 있다/개인 전화번호도 마찬가지다는 것이 알아듣기 힘든 그의 영어 가운데 겨우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참 대단한 놈들이다!’라고 혀를 차면서도 끝내 어쩔 수 없었다.

 

***

 

이런 답답함을 참지 못하는 나는 보란 듯이 내 정보를 홈피와 블로그에 대문짝처럼 게시해놓고 있는 중이다. 누구의 연락도 사절해야 할 만큼 바쁜 내가 아니며, 빼앗길 것이 두려울 만큼 돈이 많은 내가 아니며, 남들에게 위해를 당할 만큼 나쁜 짓을 하고 사는 내가 아니며, 그나마 빼꼼히 뚫린 이메일 주소를 막아놓아야 할 만큼 주변에 친구들이 득실대는 나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내는 지금도 내게 연락을 주는 사람들은 가뭄에 콩 나듯 할 뿐인데, 그나마 막아놓을 경우의 적막함을 어떻게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심심치 않게 답지하는 스팸메일들이야 약간의 손가락 운동만으로도 쓰레기통에 던져넣을 수 있으니, 운동량이 모자라는 요즘 세상에 얼마나 좋은 일인가. 정신만 온전히 차리고 산다면, 이메일을 타고 숨어드는 좀도둑들 쯤이야 간단히 제압하고도 남을 터. 그러니 제발 열어놓으라고 만든문들을 꼭꼭 닫아 건 채 소통(疏通)’의 구두선(口頭禪)만 외쳐대는 위선자들은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9. 28. 03:29

일본의 질서, 우리의 질서

 

 

 

지난여름

며칠 간 교토에 머물 기회가 있었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도처에 널린 유물과 유적이 아니었다.

크든 작든 도로에서 자동차 경적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사실,

대로에서든 후미진 골목에서든 사람들이 교통법규를 엄수한다는 사실,

길바닥에 꽁초 하나, 휴지조각 하나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무수한 자전거들.

자전거를 통해 익히는 질서의식이 놀라웠다.

 

어둘 녘이면 주택가를 걸으며

고즈넉하다 못해 괴기스럽기까지 한 분위기를 맛보는 게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오후 6시쯤 되었을까.

길을 걷다가 주택가에서 대로로 나오는 3~4m 폭의 자동차 통로를 만났고,

그곳에도 어김없이 건널목 표시와 신호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오가는 자동차는 없었고, 마침 중학생 정도의 남자 아이 하나가 걸어가고 있었다.

빨간 불이 들어오자 그는 망설임 없이 서는 것이었다.

한참동안 관찰해보니

회사원으로 보이는 중년 신사도, 할아버지도, 아주머니도

모두 신호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까짓것 두어 걸음이면 뛰어 건널만한 넓이에, 오가는 차도 없는데

그러나 그들은 그 신호를 철저히 따르고 있었다!

 

교토에 머무는 동안

이동 수단은 주로 택시였다.

모든 운전기사들은 제복을 입고 있었고,

정확한 매뉴얼대로 승객 응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택시 안은 철퍼덕 앉기가 미안할 정도로 청결했고,

신호나 법규를 위반하는 택시기사를 본 적이 없다.

기사는 뒷좌석을 권했지만, 나는 주로 앞자리에 앉아 도로 위의 차들을 살폈다.

슬쩍 유리를 내리고 담배꽁초를 길거리에 버리는 운전자를,

아무데서나 경적을 울려대는 운전자를,

툭하면 욕설을 퍼붓는 운전자를,

잽싸게 앞차를 추월하는 운전자를,

횡단보도에서 슬금슬금 앞으로 나아가는 운전자를,

신호가 바뀌기도 전에 튀어나가는 운전자를,

속도위반하는 운전자를,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다.

 

어느 날 오후

젊은 엄마가 아이 둘을 데리고 마트에서 나왔다.

마트 밖에는 자전거 주차장이 참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큰 아이는 다섯 살 정도, 작은 아이는 세 살 정도 되어 보였다.

주차장으로 나온 세 사람 모두 노란색 헬멧을 쓰고 있었다.

엄마의 자전거 앞 바구니엔 세 살짜리 아이가 담기고,

작은 자전거를 탄 큰 아이는 엄마 자전거를 뒤따라

건널목을 건너는 것이었다.

신호 시간이 충분하기도 했지만,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 내빼는 자동차들은 아예 없었다.

모두들 다섯 살 어린애가 굴리는 페달을 대견스레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참여한 어린이 교육의 현장이었다.

 

얼마 전 어느 날 어스름 녘

차를 몰고 경주에 들어섰다.

어쩌면 교토와 분위기가 비슷해서 놀라웠다.

보문단지로 가는 길엔 차도 많지 않았다.

여름철 막바지의 석양이 비낀 고도(古都)가 아름다웠다.

, 우리도 이제 선진국으로 들어선 것일까?

그러나 착각도 잠시.

갑자기 고급 승용차 한 대가 !’하며 중앙선을 넘으며

내 차를 추월했다.

차도 없는데, 고지식하게 제한속력을 지키는 내 차가 너무 답답했으리라.

교차하는 차들이 없는 신호등 앞에서

불이 바뀌기만 기다리다가 깜빡 1~2초 출발이 늦었는데,

택시인지 자가용인지 !’하고 어김없이 경적을 울렸다.

도로에는 여기저기 꽁초와 휴지들도 굴렀다.

운전자들이 유리를 내리고 버린 것들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앞쪽 차량의 문이 열리더니

담배를 꼬나 문 손이 나오고, 꽁초와 담뱃재가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혹시나역시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적지 않은 교육과 세뇌를 받았을

경주가 그럴진대,

나머지 지역들이야 불문가지 아닌가.

 

왠지 맘에 들지 않는 나라가 일본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보여주는 선진의 모습이 부럽고,

사실 늘 마음에 걸린다.

우리가 그들을 추월하는 것은

그들의 장점을 모두 배운 다음에야 가능할 것인데,

그렇게 되기까지엔 매우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이 무겁고 슬프다.

 

 


교토 타워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교토 시내의 횡단보도

 

 

 


교토의 주택가 이면도로

 

 

 


교토의 큰 거리

 

 

 


경주 관광안내 지도

 

 

 


경주 신호등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9. 12. 11:42

 


호산방의 박대헌 사장

 

 

 

고서점 호산방(壺山房).

그 호산방이 문 닫았다는 소식을

어제 날짜 신문에서 접했습니다.

바닷물에 모래성 무너지듯

수많은 점포들이 어제도 오늘도 사라지는 세상.

서점이 어디 일반 가게와 같은가?’라는

제 믿음도 이제 접을 때가 된 것일까요?

십 수 년 쯤 되었나요? 종로서적이 닫을 때

며칠 동안 마음이 허전했었는데,

그 때보다 더 한 허탈감입니다.

 

사실 책에 굶주려 지내던 대학원 재학시절엔 고서점들을 뻔질나게 찾았지요.

호주머니엔 구겨진 지전 몇 장과 동전 몇 낱이 전부였는데,

무슨 호기로 그런 책들을 탐내곤 했는지...

뒤통수에 꽂히는 주인장의 눈총을 느끼면서도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며 마냥 시간이나 끌기 일쑤였지요.

미련을 남겨 둔 채 서점 문을 나서는 마음은 왜 그리도 허전했을까요?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박대헌 사장님을 제 연구실에서 뵈었지요.

박 사장께서 ‘150만원 정가의 책을 저술출판하여

한국 지식사회를 경동(驚動)시킨 시점.

그 책을 앞에 두고

궁핍했던 시절 고서점들에서 입은 상처를 차마 거론할 순 없었지요.

 

그 후로 세월은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렀고,

고서점들 또한 많은 시련과 변신을 시도했겠지요.

결국 그 험한 물결을 되돌리지 못한 채

호산방은 장렬히 문을 닫은 것 아니겠는지요?

지금 제 나이 또래의 우국지사(憂國之士)’라면

누군들 이 세월의 변화를 반길 수 있을까요?

얄팍한 매명(賣名)의 상술(商術)들을 보시나요?

인문학의 두겁을 뒤집어 쓴 채 세상을 호리는 사람들을 말이지요.

세상을 뒤덮은 인터넷의 그늘 아래

자리 깔고 펼치는 개그를 학문이라 착각하고 있는 세태를 말이지요.

 

일본,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

아직도 멋진 고서점들이 즐비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동네 도서관을 출입하고,

시장을 다녀오는 아주머니들의 장바구니 속에 도서관의 책이 한 두 권씩 들어 있는 모습.

그들의 멋진 건물이나 번쩍이는 거리의 모습보다 훨씬 부러운 광경이지요.

 

책을 찢어 벽지로 쓰고, 절구에 빻아 지공예의 재료로 쓰던 시절이 엊그젠데,

이삿짐센터의 제1 기피 대상이 책 박스라는 사실을 아시지요?

그래서 노마드의 임시 공동체인 우리네 아파트 쓰레기장,

그 공간의 단골손님이 멋진 장정의 책들이라는 사실도 잘 아시지요?

 

역사의 공간으로 사라진 호산방.

그 호산방을 다시 태어나게 할 순 없을까요?

발효되는 고서의 향기 그득한 옛날의 서점으로,

힘들 때면 찾아가 고서들과 대화하며

위안을 받을 수 있는 휴식의 공간으로 말이지요.

 

우린 자손들에게 무얼 남겨야 할까요?

날카롭게 벼린 이데올로기?

번쩍이는 빌딩?

엄청난 파괴력의 ()무기?

국내외의 페이퍼 컴퍼니들에 숨겨둔 천문학적 재산?

 

동네마다

멋진 고서점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건사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을까요?

문화나 전통, 역사란 말이 매우 추상적으로 들리신다면

선진국의 멋진 고서점에 한 번 들러 보세요!

나이 먹은 책들의 숲에서 아이들과 함께

그 책들의 나지막한 음성을 들어보세요.

그 음성에 녹아있는 것이 바로 문화, 전통, 역사이지요.

그리고 그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것이 미래에 대한 통찰이지요.

 

 

 


박대헌 사장의 저서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호산방, 1996)

 

 

 


<<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의 내용

 

 

 


박대헌 사장의 헌사(<<Korea: 서양인이 본 조선 조선관계 서양서지>>)

 

 

 


일본 천리시내의 한 고서점

 

 

 


일본 천리시내의 고서점에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8. 21. 22:10

 


교토시립예술대학 일본전통음악연구센터

 

 


교토시립예술대학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Pendulum

 

 


기다유 샤미센

 

 


헤이케 비와

 

 

열강 중인 토키타 선생

 

 

칸사이 공항에 내린 것이 817일 오전 1045, 외국인 입국자들의 장사진에 끼어 입국수속과 짐 찾기를 마친 뒤 로비로 나오자 12시쯤이었다. 공항과 연결되는 JR 열차 매표소도 북적이긴 마찬가지. 간신히 1316분 발 열차로 신오사카 역에 닿으니 145. 다시 JR 선으로 갈아타고 가츠라가와 역에 도착하니 1445분이었다. 역 근처 작은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한 뒤 택시로 에미넌스 호텔(Hotel Kyoto Eminence)에 당도한 시간이 1540. 김포에서 칸사이까지는 1시간 반밖에 안 걸렸으나, 칸사이에서 교토의 호텔까지는 2시간 반이나 걸렸다. 그만큼 일본은 가깝고도 멀었다.

 

나는 진행 중인 연구 테마의 콘텍스트를 찾아 여기로 온 것이다. 우리 음악과 함께 일본음악, 중국음악은 그 핵심이었다. 그간 해오던 공부를 마무리하려니 그런 것들에 대한 무지가 나를 씁쓸하게 했다. 아무리 현란한 분석의 칼날을 들이댄들 콘텍스트를 고려하지 않은 텍스트가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대충 덮어 둘까 고민하던 중 국악학회에서 이메일이 날아왔다. 교토시립예술대학 일본전통음악연구센타의 일본음악 집중강좌소식이었다. 매력적인 내용의 강의 소식이 그 연구소의 홈피에 일목요연하게 올라 있었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즉시 신청하고 센터의 디렉터이자 강의자인 앨리슨 토키타(Alison Tokita) 박사와 이메일을 주고받기 시작했다.[그는 토키타란 일본인과 결혼하여 토키타란 성을 사용하고 있었다. ‘토키타 센세이혹은 토키타 박사란 명칭으로 불러주길 원했다. 이하 토키타 선생이라 부른다.] 별 반응을 기대하지 않던 한국에서 누군가가 온다 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여러 가지의 내 물음들에서 다소간의 어떤 진지함이 느껴져서 그랬을까. 득달같은 답신 메일들로부터 갈수록 끈끈한 정이 묻어나왔다. 귀찮은 숙소 문제까지 슬쩍 떠넘기자, 학교 가까운 곳의 호텔을 찾아 예약과 확인까지 해주는 게 아닌가. ‘동양인으로 바뀐 서양인이다!’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만나보니 예상대로, 인자하면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여장부였다. 시종일관 변함없이 조용한 음조로 강의를 이어갔다. 까딱 졸음에 넘어갈 뻔도 했으나, 그럴 때마다 용케도 나를 불러 조 센세이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강의의 표제어를 펜듈럼(Pendulum)’으로 달고 있는 점이었다. 펜듈럼이란 좌우로 흔들거리는 진자(振子)’를 뜻하는데, 그렇게 명명한 이유를 묻자, 그는 특허 신청이라도 하려는 듯 그 말을 고안한 점에 대하여 강한 자부심을 보였다. 들어보니 그것은 바로 강의의 요지를 함축한 말이었다.

원래 진자란 하나의 기둥과 또 하나의 기둥 사이를 오가는 물건인데, ‘일본의 전통음악과 서양음악’, ‘중국음악과 일본의 토착음악’, ‘일본의 토착종교인 신도(神道)와 불교등이 그러하고, 서양음악이 우월한 현대 일본에서 학교의 음악교육이 전통음악으로 회귀하거나 서양음악과 일본음악을 결합하려는 젊은 예술가들의 실험을 확인할 수 있는 점도 그러하다는 것이었다.

토키타 선생이 외국출생이긴 하지만 엄연한 일본인인 이상, 그들 음악의 뿌리나 영향의 근원을 우리에게 두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펜듈럼의 설명을 듣는 순간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 우리 음악에서 찾을 수 있는 사실도 토키타 선생은 시종일관 중국에서 근원을 찾아 대곤 했다.[마지막 날 이자카야(居酒屋)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앞에 자리 한 토키타 선생에게 그 점을 물었다. “‘중국한국일본으로 문화나 예술의 전달과정을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시종일관 중국일본으로 직행했다고 한다면, 너무 불합리하지 않은가요? 한국에 증거들이 꽤 많이 남아있는데요?” 하고 묻자, “일본에서는 그 점에 관하여 자유롭게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있지요. 앞으로 언젠가는 자유로이 말할 수 있겠지요.”라고 매우 간단하면서도 함축적인 답변으로 빠져 나갔다. 시끄러운 이자카야의 분위기에서 주변의 누구도 그 말들을 듣지는 못했다. 나는 그 말을 통해 강의 내내 서양의 지식인답지 않았던 그의 진심을 알고 얼마간 안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강의실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일본인들과, 일본에서 일생을 보내며 일본식 사고로 학문을 해온 그의 생각을 단번에 바꿀 수는 없는 일. 가끔 한국에도 유사한 성향이 있음을 지적해두는 정도로 그치면서 경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래와 같이 강의는 강행군이었다. 하기야 몇 천 년의 일본음악사를 단 3일에 해치우는 것처럼 무모한 일도 없을 것이다.

 

화요일(8/18)

10:00~11:30 일본음악 개관/가가쿠(雅樂)

11:30~13:00 가가쿠와 쇼묘(聲明)

13:00~14:00 점심

14:00~15:30 지우타(地歌), 고토(), 샤쿠하치(尺八)

15:30~17:00 악기 연주 실습(고토 혹은 샤쿠하치)

 

수요일(8/19)

10:00~11:30 비파에 맞추어 노래하는 이야기: 헤이케(平家), 사츠마(薩摩)와 치쿠젠비와(筑前琵琶)

11:30~13:00 노우()

13:30~14:00 점심

14:00~15:30 어릿광대 극장에서의 죠우루리(淨瑠璃): 기다유부시(義太夫節)

15:30~17:00 악기 연주 실습

 

목요일(8/20)

10:00~11:30 가부키(歌舞伎) 극장에서의 죠우루리: 토키와즈부시(常磐津夫節)

11:30~13:00 악기 연주 실습

13:00~14:00 점심

14:00~15:30 나가우타(長歌/長唄<江戶長唄>)

15:30~17:00 나니와부시(浪花節)

18:00 연주회

 

샤미센(三味線)이 주 전공인 토키타 선생의 입장에서는 답답한 설명 위주의 음악사보다 실연(實演)을 바탕으로 전승되는 음악정신이나 기교를 보여주려 한 듯하다. 주로 무대에서 이루어지는 가무악(歌舞樂)의 실현태를 중심으로 일본음악의 바탕이나 줄기를 설명해 나간 것으로도 그런 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강생 중 노우와 가부키의 전문 배우를 직접 나오게 하여 연기를 보여주며 기교나 의미를 설명하게 하는 등 전통 음악이 현대로 이어지는 지속의 측면을 실감나게 보여주기도 했다.

마지막 날의 연주회는 강의를 종합하는 자리이자 지금도 살아 움직이는 전통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색다른 경험의 현장이었다. 각 분야의 전문배우들이 등장하여 2시간 30분 동안 이어나간 무대는 일본 음악의 힘과 음악사적 추동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몇 명만 빼곤 모두 젊은 연주자들이나 배우들이었다는 점은 일본에서 전통음악이 아직도 힘을 바탕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들이 서양음악에 젖어 전통음악을 잃어버리는 젊은이들의 짧은 생각을 개탄하고 있었지만, 그나마 우리보다 훨씬 잘 보존지속되고 있음은 분명했다. 샤미센을 연주하면서 괴성을 지르거나 도구를 집어던지는 등 관객들의 웃음과 호응을 유발하는 연주자가 있었다. 뒤풀이 자리에서 그 퍼포먼스가 당신의 즉흥적 창안이냐?’고 물으니, ‘언젠가부터 물려오는 대본에 적힌 대로 하는 것이란 대답이 나왔다. 짐작컨대, 문서화 된 대본들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을 터인데, 그렇다면 구전심수(口傳心授)되던 연기나 대사 혹은 노랫말들이 글자로 기록되면서 크게 정비되었을 것이고, 시대를 내려오면서 조금씩 달라졌을 것인데, 분명 그가 내지르던 괴성이나 함부로 지어낸 듯한 몸짓 또한 요즘의 성향에 맞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여 시대에 맞추어 변이시켜 오고 있는 일본예술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

 

그간 지속해온 연구를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콘텍스트의 확충이 필요했고, 그 목적으로 낯선 이곳까지 찾아왔지만, 몇 천 년의 음악사를 뭉뚱그려 3일 만에 주파하고 나니 타임머신을 타고 먼 길을 달려 온 듯 멀미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 음악제도의 면에서 일본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다른 면이 많았다. 그러나 노래나 춤을 보면서 또 사이사이의 재담들을 듣고 표정이나 몸짓을 보면서 많이 유사하다는 사실을 분명 깨닫게 되었다. 중국과 한국에 비해 아악은 크게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며, 쇼묘(聲明) 같은 불교음악은 이미 우리에게도 익숙한 범패(梵唄)의 일종인데, 자신들의 민속음악으로 분류해 넣고 있었다.

이어받은 것과 그것을 바탕으로 바꾸어 나온 것, 달리 말하면 지속과 변이의 원리는 다른 모든 지역들과 같은 양상을 보였겠지만, 그 중 어떤 것들을 자신들의 역사적문화적예술적 소산으로 내세우느냐는 연구자들의 엄정한 분석과 고찰에 달린 문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자신들만의 예술이라 주장해도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납득할 수 없다면, 그런 주장의 의미는 없어진다. 역사를 날조하거나 공작(工作) 차원으로 분석해명하려는 시도가 언젠가는 바로잡힐 수밖에 없는 것도 역사정신은 인간의 얄팍한 지식으로 훼손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삼국 간 비교 연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아시아 3국이 교차로 이런 강의를 마련하고 상대국 학자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조만간 역사의 왜곡문제는 자연스레 정리되어 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도 큰 수확 아닌가.

 

 

 
                                         샤쿠하치

 



                                   일본전통음악연구센터에서 토키타 소장과 함께

 

 



                           일본전통음악연구센터에서 다케노우치 교수와 함께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5. 2. 15:11

 


야스꾸니 신사 참배에 나선 아베

 

 

 

 

딱하다 아베!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내각의 상공 대신을 맡았다가 A급 전범으로 복역했고, 1957년 총리가 되어 정계의 전면에 등장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패전국의 총리임에도 승전 미국의 반공논리를 충실히 따르다가 결국 1960년 미·일 안전보장조약을 개정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그의 외손자가 바로 아시아인들의 밉상 아베신조(安倍晋三). 최근 그는 자신의 외할아버지 결정이 옳았음을 확인했다고 했다. 말하자면 기시가 미일 안전보장조약을 개정했듯이, 자신도 미일 안전보장을 개정하여 집단자위권을 확보함으로써 자위대의 해외파병이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동맹인 미국에 편승하여 일본을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탈바꿈시키겠다는 야욕의 표출이다. 조손(祖孫)이 대를 이어 아시아 위기의 핵으로 떠올랐고, 그것이 이웃나라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데 끝나지 않고 아시아와 세계평화의 잠재적 위협 요인으로 대두되고 있는 요즈음이다.

 

그 아베가 지금 가증스런 혓바닥을 놀리며 어벙벙한 미국인들을 호리고 있다. ‘오바마의 푸들이란 별명을 뒤집어씀직한 그가 미 대륙을 동서로 누비며 미국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진 애를 쓰는 모습이 역하긴 하지만, 역사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전혀 무익한 일은 아니리라.

 

일본은 애당초 우리를 한 수 아래로 멸시해왔고, 일본을 중시해온 미국 역시 우리를 그렇게 대해 왔다. 표리부동한 미국인들의 행태는 이미 다른 글[본 블로그의 정신 차립시다!-웬디 셔먼의 말을 듣고참조]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정말로 우리의 국격이나 외교역량이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에 대하여 심각하게 자문(自問)하지 않을 수 없는 나날이다. 해방 70년이 지나도록 이 두 나라의 정치구조에 대한 분석이나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역대 행정부들 또한 주먹구구식으로 대응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의 나태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국의 정치인들과 아베의 짝짜꿍을 바라보면서 역사와 국제 현실정치의 언밸런스를 절감하게 된다. 분명 일본은 미국의 적국이었고 음으로 양으로 많은 것들을 빼앗고 빼앗겨 온 상대방임에도, 중국과 대치하고 있는 현 상황에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있는 현실이 우리에겐 매우 불합리하고 부당한 장벽으로 다가 선 것이다.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과거사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잘못을 사과하라는 요구가 한국과 중국에서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 아베다. 사과를 하게 되면 지금 그들이 추구하는 현상의 변화에 분명 지장이 초래될 것이고, 군국주의의 부활이라는 철 지난 꿈이 도로아미타불로 돌아갈 것을 우려하는 소아병적 사고 때문일 것이다.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의 뜻이 옳았다는, 개인 아베의 판단에 대하여 왈가왈부할 이유는 없다. 미국과 동맹을 맺어 집단자위권을 행사하겠다고 해서 과거의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과거의 역사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해서 그런 일을 해서 안 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사과나 재발 방지의 약속 한 마디 없이 불리한 역사의 수정을 망나니 긴 칼 휘두르듯 하는 총리 아베의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 없다. 지금의 아베는 이웃집 꼬마로부터 빼앗아 손에 넣은 사탕 한 알을 돌려주지 않으려 온갖 거짓말과 얄팍한 꾀로 모면하고자 애쓰는 유치원 아동의 모습 그대로다.

 

미국 상하양원 합동회의장에서 떠듬거리는 일본 영어로 미국인들에게 아부를 떨었다 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베가 작은 것을 넘어서서 좀 더 큰 것을 지향하는 대인의 정치를 담을만한 그릇이 아님은 세계인들이 이미 깨달은 바이지만, 우리 입장에서 볼수록 안타까운 것도 사실이다. 비록 입에 발린 수사(修辭)라 할지라도 사과의 말 한 마디가 분명 이 지역 외교의 난맥을 풀어낼 단초가 될 수 있음을 삼척동자도 알거늘, 어찌하여 아베는 총리대신이란 자의 직을 내세워 일본인들의 속 좁음을 만방에 선포하는 것인가. 지금 일본을 망치고 있는 극우세력이야말로 타일러 선도해야 할 동네 불량배들일 뿐인데, 설마 아베가 이들과 한 패란 말인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아베의 궁색하고 가련한 몸부림. 그리고 이에 부화뇌동하는 일본인들. 과연 일본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3. 5. 17:19

 

 

정신 차립시다!-웬디 셔먼의 말을 듣고

 

 

#1 유럽 여행 중, 독일의 본(Bonn)에 들른 적이 있다. 여행 정보가 필요하여 시내의 관광안내소를 찾았다. 직원이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더니 대뜸 일본에서 오셨지요?”라고 물었다. 내가 아니오. 한국인이오!” 하고 대답했더니, 순간 표정과 응대가 사뭇 사무적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2 정확한 장소는 잊었지만, 유럽 또 다른 도시에서의 일이다. 민박을 하게 되었는데, 주인이 우리에게 야뽕이냐고 물었다. 우리를 일본 사람으로 확신하고 물었을 것이다. 내가 대뜸 아니오!” 라고 대답하자, ‘그럼 시이나인가?’ 라며 또 물었다. ‘일본 사람 아니면 중국 사람이겠지!’라는 판단에서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니오. 한국인이오!”라고 약간 목소리를 높여 대답하자 머쓱해하며 물러났다. 다음 날 아침 식당에서 주인이 서빙을 하다가 지도 한 장을 펴 보였다. 우리나라를 가리키며 여기서 당신네 나라를 찾았소. 그럼 남이냐 북이냐?’를 물었다. 그래서 나는 남쪽에 사는 한국인이오!” 라고 대답하자, 그 때서야 미소를 보였다. 그는 한국 사람을 처음 만난 듯 했다.

 

#3 재작년 미국 오클라호마 주. 지역 박물관들 몇 군데를 도는 동안 625 참전용사를 만났고, 다른 곳에서는 이미 작고한 참전용사의 아들을 만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1950~53년 어름의 한국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사람들이었다. 말을 나누다 보니, 그들 마음속의 한국은 아직 ‘1950년대 초반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그런가.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연민과 경이의 상반된 정서가 착종되어 있었다. 폐허 속에서 코를 찔찔 흘리며 초콜릿을 구걸하던 그 모습과, 그나마 외국여행이랍시고 나선 우리에게서 일종의 심각한 언밸런스를 발견했을 것이다.

 

#4 최근 다녀 본 미국과 유럽, 중앙아시아나 러시아 등의 도로들엔 일본차들이 부지기수로 달리고 있었으며, 새 차는 물론 중고차도 일본차들은 인기 만점이었다. 미국에서 차를 사려고 하니 대부분 이왕 사려면 일본차를 사야 한다는 충고를 해주었다. 품질도 믿을만하고 중고로 팔 때 제값을 다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떤 한국인은 삼성 폰을 만지작거리던 미국사람에게 그게 어디서 만든 것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대뜸 일본 제품이라고 답하더라며 탄식을 했다. 그 정도로 서양에서 일본 브랜드의 위력은 대단했다.

 

#5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원어민 영어 교수와 가끔 만난다. 서로 간에 흉허물이 없어졌다싶을 즈음 싱거운 질문 하나를 던졌다. “왜 당신을 포함한 서양인들은 일본이나 일본인을 좋아하는가? 2차 세계대전에서 맞붙어 싸운 적국 아닌가?” ‘이 친구도 일본을 좋아하겠지?’라는 내 추정을 확신으로 깔고 던진 물음이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일본인을 좋아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분명히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만들어 온 물건들과 그들이 지속해온 문화와 깔끔한 성품 땜에 일본이 좋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과거에 전쟁을 일으켰고, 함부로 역사를 수정하려 하며, 약삭빠른 그들을 꼭 좋아해야 하는가?”고 다시 물었더니, “지난 일은 내가 알 바 아니고, 지금 좋으면 된다.”고 답했다.

 

과거사는 한··3국 모두가 책임이 있으니까 빨리 정리하고, 북핵 같은 당면 현안에 치중해야’/‘민족 감정은 악용될 수 있고, 정치인들이 과거의 적을 비난해 값싼 박수를 받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등은 최근 웬디 셔먼(Wendy Sherman) 미 국무차관이 공식석상에서 했다는 말의 요지다. 일본 편을 들어 우리를 비난하고 있음은 불문가지다. 누구는 뭐 한갓 아녀자의 말이니 그냥 모른 척 하자고 하는 모양이지만, ‘세계의 조정자를 자처하는 미국의 외교 수뇌부가 공식석상에서 뱉은 말에 우리가 대범할 수는 없게 되었다.

미국인들을 몇 번 만나 보면 개인이든 공인이든 마음과 달리 외교적 언사가 매우 매끄럽고, 이른바 포커 페이스’(poker face)에 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구한말의 일본 놈 일어난다. 소련 놈에게 속지 말고, 미국 놈 믿지 말자는 항어(巷語)도 나왔으리라. 미국 고위관료의 말과 표정만 믿고 돌아와 걱정 말라고 큰소리치다가 된통 당하기만 하던 과거 우리나라 관료들의 순진함도 이런 외교적 언사와 포커 페이스에 당한 결과들이리라.

 

유럽이나 미국인들이 일본과 일본인들을 좋아하는 이유를 사실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없다. ‘625 때 자국의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주었으니, 당연히 우리 편을 들어주겠지’, ‘세계대전에서 악랄한 일본군으로부터 몹쓸 시련을 받았으니 당연히 우리 편을 들어주겠지등등. 우리는 너무 순진해서 탈이다. 미국에 가보면 주류사회에 많은 일본인들이 진출해 있고, 일본 여자와 결혼한 미국의 고급관료들이나 오피니언 리더들을 꽤 보게 된다. 그 뿐인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린 시절엔 소니의 게임기에 빠져 살았고, 자라면서 워크맨이나 모바일, PC 등에 조종당하며, 토요타 등이 생산하는 일본차를 타고 일생을 보내던 사람들이 잘 나가는 미국인들이었다. 1998년 미국에서 만난 어떤 아이에게 나중에 자라면 어디를 젤로 가고 싶냐?’고 물었더니, ‘일본이라고 서슴없이 대답했다.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이렇게 재밌는 게임기를 만들어낸 나라에 꼭 가보고 싶다는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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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마찬가지로 미국 역시 일본 편일 수밖에 없다. 간혹 오바마 대통령이 짐짓 일본을 꾸중하는 듯한 표정을 짓기는 하지만, 경험칙으로 보아 포커 페이스임이 분명하다. 이쯤 우리는 집단적 착각에 빠져 있는 우리의 모습을 깨달아야 한다. 세계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언론들은 우리 전화기, 자동차, K-POP이 세계를 제패한 듯 떠들고, 흡사 세계인들이 모두 우리를 주목하는 듯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망한다 해도 더이상 군대를 보내주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민족적 자존심이나 생존의 문제를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일로 생각해 주지 않는다는 점을 이 순간 아프게 깨달아야 한다. 국제사회의 냉혹함에 언제까지 둔감할 것인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