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소식2015. 1. 7. 15:22

 

 

 

 

 

 

 

 

세종대왕이 만든 조선조 최고의 악무  봉래의를 복원ㆍ해석  

봉래의에 대한 음악ㆍ문학ㆍ무용의 융합 연구결과를

<<세종대왕의 봉래의, 그 복원과 해석>>으로 출간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저는 을미년 벽두에 문숙희 박사(전 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연구원)손선숙 박사(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연구원) 등과 함께 <<세종대왕의 봉래의(鳳來儀), 그 복원과 해석>>(민속원)숭실대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47’로 출간했습니다.

 

지난 3년간 3회에 걸쳐 봉래의 복원 공연을 국립국악원의 무대에 올렸고, 그 결과를 DVD로 담아 이 책에 붙여 놓기도 했습니다. 문학 분야인 악장의 연구를 제가 맡았고, 음악을 문숙희 박사가, 무용을 손선숙 박사가 각각 맡았습니다. 제 분야인 악장이야 그다지 보실 만한 건 없으나 음악이나 무용 분야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여 봉래의를 복원한 점은 무엇보다 내놓고 자랑할 만합니다. 이 책을 찬찬이 읽어 보시면 세종대왕이 그리던 새 왕조 조선의 미래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번 연구 작업을 통해 왕조의 미래에 대한 꿈을 엄청난 규모의 예술로 승화시켜 놓은 세종대왕의 능력과 통찰에 새삼 감동하게 되었습니다. 대강의 내용을 추려 아래에 붙여 놓습니다.

 

***

 

‘2014년 한국연구재단 우수 연구 성과로 선정된 바 있는 이 책은 문학음악무용 분야를 전공한 세 저자들이 융합적 시각에서 세종대왕이 지은 조선조 최대 악무(樂舞) 봉래의를 복원하고 해석한 결과물이다. 1443년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했고, 그 훈민정음으로 <용비어천가>를 제작하게 했으며, <용비어천가>를 노랫말로 올린 가악의 종합예술체인 봉래의를 몸소 만들었다. 1445(세종 27) 왕명으로 지어올린 <용비어천가>의 일부 가사를 악곡에 올리고 무악(舞樂)으로 구성하여 조선조 후기까지 연행(演行), 조선조 최대의 창작 악무가 바로 봉래의인 것이다.

 

봉래의는 여민락치화평취풍형으로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악무다. <<서경>> <익직(益稷)>으로부터 나온 봉래의란 말은 잘 다스려진 상황을 비유한 표현인데, 태평성대를 찬양하는 노래를 지어 봉황래의(鳳凰來儀)’라는 명칭을 붙인 후대의 관습에서 유래되었다.

여민락(與民樂)’여민동락(與民同樂)’ 혹은 여민해락(與民偕樂)’과 같은 뜻으로 <<맹자>> <양혜왕 장구 하>에 등장하는 여민동락에서 나온 말이다. 임금이 덕을 지닌 경우 징발하지 않아도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임금을 위해 정원을 만들고 그 정원에서 임금이 즐기는 모습을 기뻐한다는 말인데, 그것이 바로 여민동락의 모습이라는 설명이다. 봉래의 악무의 첫 정재를 여민락으로 잡은 세종의 뜻은 하늘의 뜻으로 세운 왕조에서 태평성대를 만들 수 있는 첫 조건이 백성과 함께 즐거움을 누리는 일이라는 점에 있다. <용비어천가>1~4장과 졸장 등 다섯 개의 장을 뽑아서 구성해 놓은 것이 바로 여민락이다.

 

치화평(致和平)’<<주역>> <하경> ‘택산함괘에 대한 정자(程子)의 설명에 등장하는 말로서 천지와 인심의 감통(感通)에 바탕을 둔 조화가 천하태평의 요체임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정자의 설명 가운데 핵심은 천지가 서로 감응하여 만물을 화생하는 이치와 성인이 인심을 감동시켜 화평을 이루는 도를 관찰하면 천지만물의 정을 가히 볼 수 있다는 부분이다. ‘인심을 감동시켜 화평을 이루는 도그것이 바로 치화평이다. 치화평에서는 <용비어천가> 1~16장과 125장의 국한문 가사들을 악장으로 끌어다 사용했다.

 

취풍형은 <<시경>> <주송> ‘집경13구인 기취기포(旣醉旣飽)’<<주역>> <하경> ‘뇌화풍(雷火豐)’괘에서 따온 개념이다. 취풍형이란 말 속에는 군신이 배불리 취해도 예에 어그러짐이 없음/풍형에도 절제가 있어야 함이란 두 가지의 뜻이 들어 있다. 즉 군신이 태평세월을 구가하고 즐기면서도 예에 어그러지지 않는 절도를 지켜야 하며, 아무리 풍요로워도 그에 지나치게 도취하여 절제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용비어천가> 1~9장 및 125장의 국한문 가사를 악장으로 끌어다 쓴 것이 취풍형의 악장이다.

 

이처럼 봉래의 악무에 들어 있는 세 정재[여민락, 취화평, 취풍형]들은 서로 독자적이면서도 <용비어천가>의 주제로 제시된 경천근민[敬天勤民: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을 위해 부지런해야 함]’의 행동강령을 공유한다. 말하자면 백성들과 함께 하거나 신하들과 함께 하며, 백성신하와 함께 해도 공통적으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후왕들이 경천근민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처럼 여민락치화평취풍형을 종합한 봉래의 악무에는 신하들과 백성들을 상대로 조선왕조 건국의 의의와 육조(六祖)의 시련을 깨우쳐 주고, 후왕들이 나라를 잘 보수(保守)함으로써 왕조가 영속될 수 있도록 하라는 세종의 뜻이 주제의식으로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봉래의 다섯 곡은 전인자 3소박 8박자여민락 2소박 8박자치화평 3소박 4박자취풍형 323 혼소박 6박자후인자 3소박 8박자의 리듬으로 진행된다. 음악의 템포는 노래와 무용 모두를 좌우하기 때문에 가악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궁중 정재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또 가사의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는 템포가 타당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봉래의를 구성하는 여민락치화평취풍형의 본체는 만()()()으로 구분되었고, 여민락과 치화평의 템포는 메트로놈 상으로 유사했고, 취풍형은 이 둘보다 훨씬 빠른 템포로 나타났다. 여민락은 2소박이고 치화평은 3소박이기 때문에 여민락이 치화평보다 조금 더 느리다고 할 수 있다. 여민락치화평취풍형은 각각 길고 복잡한 장단으로 되어 있으나, 이번 복원 공연에서는 긴 장단 속에 세분되어 있는 리듬 단위로 장단을 짧게 단순화하여 연주했다. 그 결과 장고가 음악과 무용을 이끌기에 용이했고 또 액센트가 짧은 주기로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에 음악과 무용에 생동감을 주었다.

 

무용의 경우 확실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난점이 있었다. 즉 문헌에는 무기(舞妓)들의 대형 형태, 이동과정, 춤사위 등만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 어느 시점에 어떤 발로 어떤 속도로 어떤 방향으로 돌아 어느 위치로 이동해야 하는지 등 실연(實演)에 필요한 내용들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봉래의의 무용을 복원함에 있어서 이런 부분들은 <<악학궤범>>에 수록된 여러 정재들과 정재의 무도(舞圖)들을 통합비교하여 음악과 노래, 무기들의 위치 및 이동 공간 등의 상호 관계를 통해 찾아냈다.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춤사위는 봉래의 춤 전체의 진행 구조를 통해 찾아냄으로써 봉래의 춤에 통일성을 부여했다. 음악이나 무용도 악장 내용의 전개와 함께 함을 확인했는데, 이렇게 가악으로 임금에게 교훈적인 말을 전달하고자 한 제작 의도는 가악의 융합정신이 봉래의라는 종합예술 속에서 충분히 구현되었음을 보여주는 실례였다.

 

이상과 같이 세 연구자는 음악이 기보되어 있는 <<세종실록악보>>, 춤 순서 및 노래 가사가 기록되어 있는 <<악학궤범>>을 통해 봉래의를 융합적으로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악에 관련된 여러 전제조건들을 바탕으로 텍스트를 분석하고 해석하여 봉래의의 종합예술체적 성격을 완벽에 가깝도록 복원한 점이 이 책의 최대 장점이고, 그것은 세 차례의 공연을 통해서도 입증된 바 있다.

 

 


공연 팸플릿

 

 


세종실록

 

 


세종대왕

 

 


공연에서 세종으로 분장한 배우 정훈씨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봉래의 공연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10. 17. 22:01

[서평] 조규익, 조선조 악장 연구(새문사, 2014)

 

 

 

본질 탐구로 길어낸 악장 연구의 새로운 이정표

 

 

 

 

 

                                                                             박수밀(한양대 국문학과)

 

 

1.

조규익 교수의 조선조 악장 연구(2014)는 저자가 수십 년간 줄기차게 매달려온 악장 연구의 3부작 완결판이다. 악장은 고전시가에서 자립적인 위상을 지닌 양식임에도 불구하고 연구하는 학자는 극히 적다. 연구 초기 장르상의 귀속이 애매했을 뿐더러 특정한 시기에만 나타났다 사라진 장르라는 점, 소수 계층의 욕망을 대변한 승리자의 노래라는 관점이 작용한 결과이다. 저자가 지적해 왔듯이 악장은 아부문학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진 결과 학자들의 외면을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3권의 악장 연구서를 간행해 왔다. 첫 연구서인 선초악장 문학 연구1990년도에 간행되었으니 최소한 족히 삼십년 이상을 악장 연구에 매달려온 셈이다. 하나의 주제에 대해 삼십 년 이상 지속적으로 꾸준한 성과를 보여주는 학자도 드물거니와 소외된 문학에 대해 지속적인 애정을 쏟는 일도 쉽지 않다. 기왕이면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영역에서 주목받는 글을 쓰고 싶은 것이 연구자들의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저자는 주위의 시선에는 아랑곳 않고 그다지 건질 것이 없어 보이는 악장 연구에 매달려왔다. 이 집념이 묘한 흥미를 끈다. 저자는 성산학술상, 도남국문학상, 한국시조학술상 등의 이력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고전시가에서 탁월한 연구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 학자가 아니던가. 저자는 이번 저술이 25년 악장 연구사에 대한 마무리라고 고백했다. 과연 오랫동안 악장 연구를 진행하면서 저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수십 년간 한 우물을 판 노고는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연구의 햇수와 연구의 질은 별개의 문제이므로 연구서가 얼마만큼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는지, 저자의 문제의식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꼼꼼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2.

악장에 대한 본격적인 저자의 첫 연구서라 할 선초악장 문학 연구(1990)은 선초 악장의 형성 및 장르적 성격을 밝히고 악장의 국문학 장르상의 위상에 대해 논한 저술이다. 악장에 대한 학계의 인식이 부정적인 상황에서 악장의 위상을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선초 악장 연구서의 바이블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로부터 9년 뒤엔 조선조 악장의 문예미학(2005)을 간행하여 악장의 가치와 전개 양상을 구체적으로 파고들었다. 이 책에서는 조선조 악장의 현상과 미적 본질, 조선조 악장과 왕조의 현실, 개인의식과 집단이념의 조화, 조선조 악장의 흐름 등을 밝혔다. 저자는 종합예술이라는 관점에서 악장의 독자적 미학을 치밀하게 탐구, 악장에 대한 편견과 오류를 해소하고 악장을 경세의 문학으로 끌어올렸다.

이번에 펴낸 조선조 악장 연구는 악장 연구사를 마무리 짓는 세 번째 연구서이다. 저자의 말대로라면 기존 연구에 새로운 보완의 시각을 제공하고자 한 것이다. 그 동안의 악장 연구에 대한 저자의 성과를 종합하고 아악악장과 향당악악장에 해당하는 개별 악장들의 성격과 주제의식에 대해 분석함으로써 악장의 연구 폭을 크게 확장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악장연구를 통해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고전시가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꿀 것을 제안하고 있다.

먼저는 연구서의 구성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책은 총 5부로 구성되었다. 5부가 총론에 해당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질적으로는 4부로 이루어진 셈이다. 1부에서는 조선조 악장의 성격을 밝혔는데, 저자는 조선조 악장이 지속과 변이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무엇이 지속인가? 고려조 악장의 음악적 측면을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무엇이 변이인가? 조선왕조라는 특정 집단의 이념을 강조한 새로운 내용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곧 조선조 악장은 고려조에서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아악이나 아악악장들과 함께 고려조에서 수용한 삼국 이래 속악의 악장들이 조선조에서 새롭게 제작된 노래들과 합쳐진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악장을 크게 아악악장과 향 당악 악장으로 나눈다. 각종 제향 악장이 전자라면 각종 연향 악장은 후자에 속한다. 2부와 3부는 아악 악장과 향 당악 악장의 성격을 다룬 것이다. 2부의 아악악장에 대해서는 악장의 중세적 문명론의 표준과 보편성의 확보라는 관점에서, 3부의 향, 당악 악장은 조선 왕조의 문화적 독자성과 정체성의 확보라는 관점에서 살폈다. 아악악장은 종묘제례, 문묘제례, 사직제례, 선농제례 등 제례에 쓰인 악장을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조선조는 문묘제례와 종묘제례를 통해 왕조의 정치적 이념적 정당성을 주장하고 왕조 존립의 보편적 가치와 당위성을 선양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중국의 <시경>, <주역> 등에서 악장의 주요 문구나 모티프를 직접 차용해 악장으로 쓰거나 혹은 선행 악장들의 구절이나 모티프 등을 차용해 선초 악장에 사용해 왔다. 곧 아악악장을 통해 동아시아적 중세적 문명론의 표준과 보편성을 확보하려 했다는 것이다. <문선왕 악장>, <사직악장>, <선농악장> <선잠악장>, <풍운뇌우 악장>을 분석하여 이러한 주장에 대한 논거를 확보한다.

이에 비해 3장의 향 당악 악장에서는 조선조 악장의 독자성을 살핀다. <문소전 악장>, <석전음복연 악장>, <창수지곡 악장>, <경근지곡 악장>, <오륜가>, <봉래의 악장> 등을 다루었다. 당악 악장에서는 우리의 고유한 노래 장르를 악장으로 수용함으로써 우리만의 독자적이고 특수한 미의식을 담아냈다고 주장했다. 이들 노래에서 발견되는 텍스트의 구성이나 주제의식의 실험성은 아악악장과 구별되는 지점이며 악장이 고전시가사 전개에 큰 기여를 한 점이라고 보았다.

4부는 다른 각도에서 본 조선조 악장의 본질적 속성이란 제목을 붙였는데, 정재 악장에 나타나는 송도 모티프와 선계 이미지의 연원을 밝힌 대목이 흥미롭다. 이 외에도 저자는 악장에 대한 북한문학사의 관점을 살펴본다. 북한의 연구자들은 악장을 아부문학이나 무조건적 송축문학으로 배척해온 남한 학자들과 입장을 같이 해오고 있는데 북한 역시 악장을 백성들의 문화생활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무가치하다고 폄하한다는 것이다. 경직된 이념이나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악장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연구서는 악장의 문학성을 다룬 것이 아니라 악장의 본질과 성격에 대한 탐구이다. 양식의 문학성을 파고든 것이 아니라 양식을 둘러싼 맥락에 주목했기에 문학 연구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저술의 가치는 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악장 연구를 둘러싼 저자의 궁극적인 문제의식, 주제에 접근하는 남다른 방식, 실사구시에 입각한 꼼꼼하고 치밀한 논증의 결과를 들여다보노라면 이 저술이 갖는 의미와 무게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어쩌면 이 연구서의 진정한 가치는 고전시가를 접근하는 시각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보여준데 있을지도 모른다.

 

 

3.

저자는, 텍스트와 콘텍스트 및 상호텍스트에 대한 면밀한 고찰 없이는 고전시가론이나 고전시가사 혹은 국문학사는 완벽을 기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연구서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텍스트 측면은 관찬문헌인 조선조의 악서들에 지금 고려속요로 불리는 고려의 악장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고 콘텍스트 측면은 악장은 조선과 고려의 궁중 무대예술이라는 점이다. 상호텍스트 측면은 악장은 당악을 비롯한 외래 음악이나 공연과의 연계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악장은 이와 같은 외적 맥락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그 본질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문학은 그 시대의 사회, 문화, 정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의식에서 나온 발언이라 본다. 지식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지식은 순수하고 객관적인 결과물이 아니라 그 시대의 사회 구조와 공동체 구성원에 따라 의미를 형성하고 바꾸어간다. 곧 지식은 맥락과 관계에 따라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학을 둘러싼 맥락에 주목하는 저자의 관점은 충분히 설득력 있으며 답보 상태에 빠진 고전시가 연구 방법론에 새로운 활로를 뚫어줄 것으로 기대가 된다.

다만, 말했듯이 작품의 문학성 자체에 대한 탐구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받을 수 있겠는데, 가만히 반추해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저자는 악장의 본질을 제대로 간파하고 악장 문학에 접근하는 가장 올바른 방향을 잡아낸 것이다.

조선조 악장은 국가의 공식 행사에서 사용되던 악사(창사)이다. 저자는 말하길, 악장은 정재라는 틀 안에서 음악과 춤이 결부될 때 비로소 그 생명성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다고 한다. ‘고려조에서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아악이나 아악악장들과 함께 고려조에서 수용한 삼국 이래 속악의 악장들이 조선조에서 새롭게 제작된 노래들고 합쳐진 것이 조선조의 음악이고 악장’(45)이라는 것이다. 악장이 가(), (), ()의 예술이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무대예술인 정재에서 가창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악장은 춤까지 관여되어 복잡한 내포를 지닌 언어예술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악장을 문학적으로만 재단해온 지금까지 연구는 악장의 본질을 왜곡시켰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악장이 상대적으로 문학성이 쳐진다는 평가를 받아왔다면 이는 악장을 악장답게 다루지 않은 데서 초래된 결과였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접근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악장에 대한 저자의 접근 방식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러므로 악장이란 장르를 문학성이라는 프레임으로 접근하는 것이, 저자에게는 오히려 왜곡의 위험성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악장의 본질은 텍스트를 둘러싼 외부 맥락과의 관련 아래 탐구해야 한다. 악장의 본질, 그것은 가무악이 어우러진 궁중의 정재이다. 노래로서의 악장이 실현되는 사회 문화적 맥락을 따져보아야만 악장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접근 방식이 얼마나 의미 있는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지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

저자의 관점이 정채를 발하는 장면은 정재 악장에서 확인되는 송도 모티프와 선계 이미지의 연원과 지속 양상을 밝힌 곳에 있다. 조선조 악장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왕에 대한 송축이나 송도를 통한 왕조 영속의 당위성 선양이다. 당악정재를 살펴보면 왕을 송축하기 위해서 신선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 당시 당악정재들에 등장하는 중심 배역은 선모나 신신들이었고 그들의 창사나 담화에는 송도 모티프가 담겨 있다. 신선으로 분장하여 왕에게 드리는 송도의 말이 바로 송도시자이자 선어였다는 것이다.

이 점을 논증하기 위해 저자는 동동정재를 살핀다. 고려사악지에는 동동에 대해 동동 놀이는 송도지사가 많은데 대개 선어(仙語)를 본떠 마든 것이다[動動之戱 多有頌禱之詞 盖效仙語而爲之]”라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나는 송도와 선어(仙語)는 동동의 성격을 이해하는 관건이 되는 까닭에 많은 학자들이 이 뜻을 밝히기 위해 다양한 주장을 펼쳐 왔다. 중국 전래의 도교 사상과 관련시키거나, 화랑, 풍류 등에 연원을 둔 무속과 같은 연장에서 이해하거나 팔관회 때 상연되는 백희가무에서 불린 노래로 보기도 했다. 신선 기녀와 연관 짓거나 무격(巫覡), 우인(優人)의 말로 보기도 했다. 그야말로 각자 입론에 따라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왔는데, 이에 대해 저자는 선학들이 동동을 둘러싸고 있는 콘텍스트로서의 속악정재나 속악정재의 표본으로 기능했을 당악 정재에 시선을 주지 못한 까닭에 송도지사와 선어의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364) 노래의 주제적 측면을 지칭한 송도지사와 표현적 측면을 지칭한 선어 모두 동 시대의 당악정재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그런 표현법이나 주제의식은 당대 궁중에서 성대하게 공연되던 당악 정재의 창사를 본뜬 것들이다. 선어는 바로 이들 정재에서 서왕모 등 신선으로 분장하여 송도의 노래를 가창하던 여기(女妓)들의 창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곧 헌선도(獻仙桃), 수연장(壽延長), 오양선(五羊仙) 등 당시에 성행하던 당악정재들 속의 선모(仙母)를 비롯한 신선(神仙)들이 잔치 자리의 좌상객인 임금에게 바치던 '송도(頌禱)의 말'이 바로 선어’, 즉 신선의 말이라는 것이다.

악장의 본질을 간파하고 상호 텍스트적 상황에 의거하여 송도지사와 선어의 의미를 밝힌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선어에 대한 제 학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저자의 글을 읽었음에도 이 주장을 비판하지 못한 채, 각자의 입론을 만들어 제각기 주장을 펼치고 있다. 고려가요를 악장의 한 형태로 보려는 저자의 생각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저자의 주장을 극복할 수 있는 논거를 대거나 저자의 주장을 수용하거나 하는 엄정한 학문 태도가 필요하리라 본다.

 

 

 

 

 

 

 

 

4.

본 저술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는 집요하고도 치밀하게 악장의 본질과 성격을 탐구함으로써 별 문학성이 없어 보였던 양식을 의미 있는 양식으로 끌어올린데 머물지 않는다. 저자의 궁극적 시선은 고전시가사와 고전문학사를 재편하는 데로 향한다. 저자는 조선조 악장의 존재나 본질을 도외시할 경우 아무리 현란한 고전시가 장르론을 펴더라도 공허할 뿐이며, 국문학사 기술의 합리성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과연 이러한 주장은 타당한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고려의 노래들은 대중가요로서의 속요이기 이전에 궁중악으로서의 속악가사이다. 곧 고려 노래의 1차적 분류 범주는 악장이 된다. 그러므로 고려가요는 1차적으로는 악장론을 거쳐야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조선조 악장의 콘텍스트 안에 엄연히 존재하는 고려가요의 텍스트를 고려의 시대적 속성에 맞추어 놓고 고려시대의 속요라는 이름으로 재단해본들 결과가 신통할 리 없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고려가요가 악장으로 수렴된다면 의당 고려가요는 악장이라는 틀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고려가요의 성격과 위치에 대한 재검토가 요청된다. 조선조의 시조와 악장을 다룬 시조와 궁중악장의 관계장을 읽노라면 악장과 시조 간의 새로운 관계 설정도 필요해 보인다.

또 악장의 본질이 문학이 아닌 정재로서의 성격에 있다면 악장과 관련되는 중세 고전시가 연구의 패러다임이 문화론이나 예술론 차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고전시가를 문학과의 연관 아래서만 기술하려는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음악 무용 등의 예술 및 당대 사회 문화와의 관련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고전시가의 문학성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시가 연구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고 장르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문학을 고립적으로 가두지 않고 여타 분야와 폭넓게 소통하면서 통섭하려는 오늘날의 시대적 흐름과도 궤를 같이한다.

악장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치열한 노력과 성과가 기성과 관행을 타파하고 새로운 변화의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준다는 점이 본 연구서의 진정한 미덕이자 가치라고 생각한다. 과연 저자의 바람대로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변화가 새롭게 추동될 수 있을 것인가? 본 연구서의 성과와 제안을 비판하든 극복하든 간에, 애써 외면하기보다는 저자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주고 활발한 토론과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저술에서 보여주는 꼼꼼한 논증과 묵직한 문제의식은 저자가 학계에서 보여준 성실함과 무게에 값한다고 본다. 삼십 여년에 걸쳐 남들이 관심두지 않은 길을 뚝심 있게 밀고나간 저자의 학식과 공력이 조선조 악장 연구에 오롯하게 담겨 있다.

 

  *이 글은 <<한국문학과 예술>> 14집(한국문예연구소, 2014)에 실려 있습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7. 31. 08:07

 


표지

 

 


내용

 

 


악장이 가창되던 무대예술로서의 정재들

 

 


우측이 첫 책(1990), 좌측이 두번째 책(2005)

 

 

새 책 <<조선조 악장 연구>>가 출간되었습니다!

 

 

 

오늘 새 책 <<조선조 악장 연구>>(새문사)가 나왔습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국문학에 뜻을 두었고,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고전문학으로 범위를 좁혔으며, 석사논문을 쓰면서 아예 고전시가 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20대 후반 경남대학교의 전임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같은 방향의 연구를 지속했으나, 숭실대학교로 옮긴 뒤부터는 조금씩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관심을 가져 온 여러 대상들 가운데 악장은 초기부터 꾸준히 천착하고 있는 분야입니다. 1990년에 이 분야의 첫 저서인 <<선초 악장문학 연구>>(숭실대학교 출판부), 2005년에 <<조선조 악장의 문예미학>>(민속원)을 각각 펴냈고, 이제 <<조선조 악장 연구>>를 펴냄으로써 저 개인의 25년 악장 연구사를 일단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물론 악장에 더 이상 파낼 만한 것이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내심으로는 해답을 찾지 못한 이 분야의 화두(話頭)’가 한 둘 더 남아 있습니다. 그 때문에라도 마음이 바뀌어 옛날의 우물터를 다시 찾을지 알 수는 없으나, 지금 갖고 있는 앞으로의 연구 스케줄로 보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출중한 후배들이 그들 나름의 통찰력으로 새로운 차원의 연구를 지속해 가리라 믿기 때문에 지금 제 관심의 물꼬를 다른 곳으로 돌려 보려는 것뿐입니다.

 

이 책의 몇 부분에서 강조했습니다만, 텍스트와 콘텍스트 및 상호텍스트에 대한 면밀한 고찰 없이는 고전시가론이나 고전시가사 혹은 국문학사는 완벽을 기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 특히 고려조선의 시가문학은 비생산적 동어반복의 쳇바퀴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봅니다. 관찬문헌인 조선조의 악서들에 고려의 악장[학계에서 말하는 이른바 고려속요’]들이 기록되어 있다는 텍스트의 측면, 조선과 고려의 궁중 무대예술이라는 콘텍스트 혹은 시대문화적 맥락의 측면, 당악을 비롯한 외래 음악이나 공연과의 연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텍스트적 측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비로소 그 본질은 분명히 드러날 것입니다. 악장에 관한 책은 다시 내지 않더라도 기회 있을 때마다 논문이나 발표문 등을 통해 이 문제만은 더 심도 있게 규명해볼 생각입니다.

 

악장의 존재를 인지하기 시작한 초기에 비해 지금은 좀 나아졌습니다만, 그래도 악장에 대한 폄하의 분위기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동동>이 조선조 <<악학궤범>> 아박정재의 창사[혹은 악장]로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고려의 시대정치문화적 맥락으로만 재단하려는 관성이 바뀌지 않고 있는 점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고려사 악지>>를 비롯한 몇 기록들에 간단히 기록된 동동관련 언급이 학자들의 생각을 아직도 지배하고 있는 점으로도 분명해지는 문제입니다. ‘동동이란 노래가 고려 궁중에 수용되어 속악정재라는 무대예술로 꾸며질 때 이미 존재하던 당악정재들의 양식이 그 표본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은 처음부터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動動之戱 多有頌禱之詞 盖效仙語而爲之 然詞俚不載라는 말에서 선어(仙語)’란 말을 엉뚱하게 해석해온 것을 그 분명한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헌선도(獻仙桃), 수연장(壽延長), 오양선(五羊仙) 등 당시에 성행하던 당악정재들 속의 선모(仙母)를 비롯한 신선(神仙)들이 잔치 자리의 좌상객인 임금에게 바치던 송도(頌禱)의 말이 바로 선어’[신선의 말’]이었음을 몰랐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당시 조성되어 있던 상호 텍스트적 상황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해프닝이었습니다. 원천적으로 고려노래의 정체는 대부분 궁중의 음악에 쓰이던 악장들이었다는 점과, 조선조 악장의 모범적 선례가 고려의 악장이었다는 점만 인지했다면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습니다. 이 경우는 악장 연구로 얻을 수 있는 단편적 소득에 불과합니다만, 연구하기에 따라서는 앞으로 이것 말고도 다른 많은 것들이 밝혀지리라 봅니다.

참고로 이번에 출간된 책의 목차를 이곳에 들어놓겠습니다.

 

1부 총서: 지속과 변이의 원리, 그 구현체로서의 조선조 악장을 바라보며

. 계승과 극복 대상으로서의 고려악장

. 조선조 악장에 나타나는 지속과 변이의 양상

. 전환의 양상: 포괄화추상화에서 구체화로

. 앞 시대 유산의 포용과 새로운 정체성의 추구

 

2부 아악악장: 텍스트 및 주제의식의 중세적 관습성

왕조와 통치이념의 정당성, 제례악장의 모범적 선례: <문선왕 악장>

. 석전과 <문선왕 악장>

. <문선왕 악장>의 원형과 수용과정

. <문선왕 악장>과 조선조 아악악장의 형성

. <문선왕 악장>의 악장사적 위상

. <문선왕 악장>과 제례악장의 중세적 보편성

 

왕조 존립과 영속의 당위성 및 자신감: <사직악장>

. 사직제의 위치

. <사직악장>의 텍스트 양상과 내용

. 악장제작의 관습과 <사직악장>의 위상

. <사직악장>의 중세적 보편성과 특수성

 

먹거리의 풍요에 대한 기원과 애민의식: <선농악장>

. 선농과 선농제

. <선농악장>의 텍스트와 주제의식

. <친경악장>의 텍스트와 주제의식

. 악장사적 위상

. <선농악장><친경악장>의 중세적 보편성

 

입을 것의 풍요에 대한 기원과 애민의식: <선잠악장>

. 선잠제와 <선잠악장>

. 선잠제 전통의 정착과 의미

. <선잠악장>의 텍스트 양상과 주제의식

. 악장사적 위상

. <선잠악장>의 중세적 보편성

 

우순풍조를 통한 백성들의 안녕과 풍요 기원: <풍운뇌우 악장>

. 풍운뇌우 제의와 <풍운뇌우 악장>

. 풍운뇌우 제의의 전통과 정착과정

. 풍운뇌우 악장의 텍스트 양상 및 내용

. 변계량 악장의 變改 문제

. <풍운뇌우 악장>과 중앙집권적 통치철학

 

3부 향당악악장: 텍스트 및 주제의식의 실험성과 조선조 악장의 독자성

 

천명에 의한 개국의 업적 찬양, 왕조의 무궁함 기원: <문소전 악장>

. 문소전 제례와 <문소전 악장>

. <문소전 악장>의 문헌적 양상 및 내용의 짜임

. 악장사적 위상

. <문소전 악장>과 정격 악장의 맥

 

왕조의 문화적 자부심과 독자적 미학의 발현: <석전음복연악장>

. 석전제와 음복연

. ‘신찬 등가악장의 내용적 짜임과 주제의식

. 악장 제작의 방법 및 시가문학사적 의의

. <석전음복연악장>의 독자성과 문화적 자부심

 

창업과 수성, 경천근민의 이상적 치도: <창수지곡><경근지곡>

. 제례 속의 음복연 절차와 두 노래

. 두 작품의 내용 및 악장사적 위상

. 제작상황

. <용비어천가>의 제작원리와 <창수지곡><경근지곡>

 

새 장르의 노래를 통한 합리적 생활윤리의 제시: <오륜가>

. 궁중악장 <오륜가>

. <오륜가>의 존재양상 및 의미

. <오륜가> 작자 및 창작 토양으로서의 시대 상황

. <오륜가), 지배이데올로기의 경기체가 식 표출

 

여민동락감응형통취포절제경천근민의 가르침: 봉래의 악장

. 조선조 최대의 창작악무 봉래의, 그리고 <용비어천가>

. 악무 명칭의 문헌적 근거와 악장 내용의 상관성

. 봉래의 악장에 아로새긴 세종의 철학, 왕조의 이상

 

제왕의 통치이념을 선양한 언어구조물: 봉래의 진퇴구호

. 퇴구호와 악장

. 봉래의 진퇴구호와 악장의 의미적 상동성

. 봉래의 진퇴구호의 텍스트 양상과 주제의식

. 봉래의 악장의 주제의식과 진퇴구호

 

4부 다른 각도에서 본 조선조 악장의 본질적 속성

 

정재 악장에서 확인되는 송도 모티프와 선계 이미지의 연원 및 지속양상

. 궁중악장과 콘텍스트로서의 송도 문화 및 선계 이미지

. 송도 모티프의 초기 양상

. 송도 모티프의 지속 및 확산과 문화적 의미

. 조선조 후기 창작 정재들과 선계 이미지의 변주

. 정재 및 정재 악장의 선계 이미지, 그 지속과 변이의 문화적 의미

 

시조와 궁중악장의 관계

. 악장과 시조가 공존하던 시공, 조선조

. 악장과 시조의 연계, 그 외연과 내포

. 악장과 시조, 새로운 관계 설정의 가능성

 

북한문학사와 악장

. 악장에 대한 일반적 관점과 북한문학사

. 북한문학사의 악장관

. 악장을 왜곡시킨 북한문학사의 이념적 경직성

 

고전시가교육과 조선조 고려속가 악장의 텍스트 및 콘텍스트: <동동> 지도론

. 고전시가와 고전교육, 그리고 악장

. 교육과정과 고전시가교육의 현실

. ‘동동의 속성 및 환경

. 고전시가 교육과 복합 텍스트로서의 궁중악장

 

5부 총결: 악장에 그려진 왕조의 이상과 현실, 그 거리를 음미하며

 

 

강호 고사(高士)들의 지도와 편달, 부탁드립니다.

 

2014. 7. 31.

 

백규

Posted by kicho
알림2013. 5. 15. 16:49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기 한국 춤의 전개양상>> 출간!

 

 

전통시대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이행기 혹은 과도기에 한국 춤이 어떤 전개 양상을 보였는지를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 연구서가 출간되었다. 대체로 순조대왕이 즉위한 이후 19세기 말을 거쳐 근대까지 한국 춤에 나타난 변화의 양상은 그 이전의 시기들에 비해 현격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글들이 실려 있다.

 

조규익, 악장과 정재의 미학적 상관성

조규익, 익종(翼宗) 악장 연구

송지원, 조선후기 음악의 문화담론 탐색

이의강, 19세기 초 궁중무용의 미학적 전환

송방송, 조선후기 선상기(選上妓)의 사회제도사적 접근

김은자, 조선후기 평양교방의 규모와 공연활동

조경아, 순조대 정재 창작양상

성기숙, 조선후기 정재의 극장공간성과 공연미학

손태도, 조선후기 탈춤의 주체

김예호, 전환기 한국 공연예술의 흐름과 근대화 지향성

송방송, 대한제국 시절 진연과 교방사의 공연활동

이병옥, 재인 한성준의 삶과 무용사적 의의

이 송, 신무용의 기점과 문화사적 의의

유민영, 한국근대공연예술사에서 조택원의 위치

성기숙, 근대 신여성의 표상, 최승희

 

보고사, 2013. 정가 30,000

Posted by kicho
알림2012. 7. 17. 16:26

 

문숙희 박사의 새 책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복원 악보집>>이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35로 발간!!!

 

한국문예연구소 문숙희 박사가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 복원 악보집>>(도서출판 학고방)을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총서 35로 출간했다. <<시용향악보>>는 조선조 명종 대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악보로서 고려 말~조선 전기의 민간과 궁중에서 애창되던 노래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이전부터 존재하던 <<세종실록악보>>와 <<세조실록악보>>에 조선의 건국을 칭송하는 악장들이 실려 있는 것과 달리, 이 악보에는 주로 그 시대에 유행하던 고려가요 및 궁중의 나례(儺禮)의식에 사용되던 무속음악들이 실려 있다. <<시용향악보>>의 ‘향악(鄕樂)’이란 삼국시대부터 불리던 우리의 음악이라는 뜻으로서 ‘당악(唐樂)’ 즉 중국에서 들어온 음악에 대칭되던 용어인데, 이것을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국악’의 뜻이 된다. 문 박사는 <<시용향악보>>에 실려 있는 26곡 전곡(全曲)을 복원하여 책으로 엮었는데, 이 가운데 <사모곡>⋅<서경별곡>⋅<청산별곡>⋅<가시리>⋅<이상곡>⋅<상저가>⋅<낙양춘>⋅<보허자>⋅<납씨가>⋅<대국>⋅<구천>⋅<별대왕> 등은 음반[<<노래박물관 특별전>>]으로 공개한 바 있다. 이 책의 발간을 계기로 우리의 옛 노래들의 악보 전모가 밝혀질 수 있게 되었다. 국악 및 국문학 연구자나 감상자들 모두 필수적으로 곁에 두어야 할 책이다.

Posted by kicho
글 - 학술문2007. 12. 12. 18:15
 

 안민(安民)의 불국토 건설, 그 이상과 현실

  -<안민가(安民歌)>의 내용미학-


                                                                            조규익


 Ⅰ. 정치, 백성, 그리고 질서와 무질서


국민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정치의 제1원칙이고, 국민이 편안하려면 국가의 질서가 잡혀야 한다. 무질서 속에 팽개쳐진 국민들이 부유할 수도, 편안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공자는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라 했다. 바르게 하는 것 즉 나라를 바로잡는 것은 왕의 책임이다. 왕이 솔선하여 바르다면 아무도 감히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노나라의 대부 계강자(季康子)에게 건네준 공자의 가르침이었다.

 서양에서 정치(politics)란 용어는 원래 도시국가의 뜻을 지닌 폴리스(polis)의 파생어 폴리티쿠스(politikus)에서 나왔다. 폴리스의 전역에 걸쳐 살아가던 시민들은 민회, 평의회, 행정관 등 다양한 방식으로 도시국가의 정치에 관여했다. 그런 시공에서 이루어지던 모든 정치행위는 공동체의 삶을 바르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중점이 놓여 있었다.

 <<관정경(灌頂經)>>에서는 바르게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정치라 했으니, 정치에 대한 불교의 관점도 유교나 서양과 다를 바 없다. 이보다 좀 더 나아간 것이 <<출요경(出曜經)>>‘척요품’의 관점이다. 즉 “견고한 것을 견고하다고 알고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교하지 않다고 알면 그는 곧 견고함을 구하는 것이니, ‘바른 다스림’으로 근본을 삼는다”고 했다. 말하자면 정치란 바른 생각에 입각한 ‘바른 사유(思惟)’라는 것이다. 만약 ‘견고하지 않은 것을 견고하다 생각하고 견고한 것을 견고하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 견고한 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삿된 소견 때문’이라 했다.

 그러니 사람으로 하여금 삿된 소견을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정치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면 당연히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삿된 소견을 갖지 않게 된다. 삿된 소견을 갖지 않아야 임금은 임금의 노릇을 신하는 신하의 노릇을 백성은 백성을 노릇을 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는 모든 질서가 바르고, 그렇지 못한 나라는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우리 역사상 어느 시기에나 있었던 정치적 안정과 혼란의 원인은 정파들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상충되거나 정치 행위 당사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직분을 망각한데서 찾을 수 있다. 그 결과 외세의 침탈을 불러오거나 모순의 극대화로 인해 내부 구조가 붕괴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상황에 처할 경우 대부분의 지배자는 통치기반의 강화를 위해 애쓰고자 하나, 대개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기 마련이었다.

 정치세력 간의 갈등이나 부침이 극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들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는 시대가 신라 경덕왕의 치세(742~765)였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시기와 달리 이 시기에 향가가 많이 등장했고, 그 가운데 ‘정치적 담론’으로 해석할만한 <안민가(安民歌)>가 제진(製進)되었다는 사실이다.

 경덕왕대의 향가로 기록된 <도솔가(兜率歌)>,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안민가> 등은 하나같이 시대 배경이나 내용의 면에서 의미심장한 노래들이다. 왕을 중심으로 한 정파의 다툼과 그 해결을 상징적·제의적으로 드러낸 <도솔가>, 신라시대 관음신앙의 실체를 엿볼 수 있는 <도천수관음가>, 영웅적 인간상에 대한 찬양으로서 개인 서정의 실체를 보여주는 <찬기파랑가>, 정치의 요체와 국가적 지향점을 노래한 <안민가> 등이 그것들인데, 관점에 따라 노래들의 정신이나 주제는 달리 파악될 수 있겠지만, 당대의 사회상을 추측할 만한 단서들은 공통적으로 들어 있다. 이 글에서는 <안민가>가 드러내고 있는 이상과 현실의 경계 혹은 착종(錯綜)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안민가>에서 노래된 치도(治道)의 요체


<<삼국유사>> 권2 <기이> 제2(하)의 ‘경덕왕·충담사·표훈대덕’ 조에 다음과 같은 설화와 노래가 실려 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에 오악과 삼산의 신 등이 가끔 현신하여 대궐 뜰에 모셨다.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 누상에 앉아 좌우에게 물었다. “누가 능히 도중에서 영복승 한 사람을 얻어 오겠는가?” 마침 위의가 선명하고 조촐한 한 대덕이 바람을 쏘이며 거닐고 있었다. 좌우가 바라보고 데려왔다. 왕은 말했다. “내가 말한 영승이 아니로다.” 왕은 그를 물리쳤다. 또 한 중이 가사를 입고, 앵통을 지고, 남으로부터 왔다. 왕이 기뻐하며 누상으로 맞이하여 그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담겨 있을 뿐이었다. 왕은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중은 대답했다. “충담이라 하옵니다.” “그럼, 어디로부터 돌아오시는가.” 충담은 여쭈었다. “승려들은 늘 중삼·중구일을 중시하여 차를 달여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드리는데, 오늘도 드리고 돌아오는 길이옵니다.” 왕은 말했다. “과인에게도 한 잔의 차를 마실 인연이 있을 수 있겠소?” 충담이 곧 차를 달여 드렸는데, 그 차의 기미(氣味)가 이상하고 다구 속에 이상한 향기가 강했다. 왕은 또 물었다. “짐이 일찍이 들으니 ‘선사가 지은 <찬기파랑가>가 그 뜻이 심히 높다’고 하니, 과연 그러하오?” 충담은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왕은 말했다. “그럼 짐을 위해 <안민가>를 지어 주시오.” 충담은 곧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아름답게 여겨 왕사로 봉했으나, 충담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 <안민가>는 다음과 같다.


 임금은 아비요

 신하는 따스한 어미요

 백성은 어리석은 아이라고 하신다면

 백성이 사랑을 알 겁니다

 꾸물꾸물 살아가는 중생들

 이들을 먹여 살리소서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하실진대

 나라 보전할 길 아시리다

 아으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시면

 나라가 태평하리이다


 이 노래는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금은~알 겁니다’, ‘꾸물꾸물~아시리다’, ‘아으~태평하리이다’ 등이 그것들이다. 1단은 대전제, 2단은 방법론, 3단은 1단을 좀 더 구체화시켜 도출해낸 주제단락이다. ‘백성을 사랑함’, ‘백성을 먹여살림/나라 보전함’, ‘나라가 태평함’ 등은 각 단의 내용적 핵심이다.

 임금과 신하, 혹은 부자(父子)의 직분을 엄수하는 것이 이상 정치의 요체임은 <<논어>>에서도 설명된 바 있다. 제나라 경공(景公)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아들은 아들다우면 된다”고 답했다. 그러자 경공은 “맞습니다. 만약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며 아비가 아비답지 못하고 아들이 아들답지 못하면 비록 식량이 넉넉하다 한들 내 어찌 밥을 얻어먹고 살 수 있으리오?”라고 공자의 현답(賢答)에 맞장구를 쳤다.

 이런 <<논어>>의 말 가운데 부자(父子)를 백성으로 대치한 것이 <안민가>의 담론이니, 선학들이 <안민가>의 배경사상을 유가(儒家)로 본 것도 응당 그럴 법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임금이 임금노릇을, 신하가 신하노릇을, 백성이 백성노릇을 제대로 한다면 나라가 태평할 것’이라는 말이 어찌 유가만의 논리일 것이며, 사상(思想)의 차원으로까지 격을 높여 따질 내용이겠는가. ‘누구나 제 할 일만 제대로 하면 세상일은 저절로 잘 돌아갈 것’이라는 평범한 시정(市井)의 담론에 불과한 것을 세상의 학인들은 지나치게 고답적으로 따져왔을 뿐이다.

 문제는 정치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현책(賢策)을 노래에 담아달라는 왕의 요청에 이와 같이 평범한 시정의 논리로 대꾸한 충담의 의도에 있을 것이다. 신라 중대에 속하는 경덕왕  대는 체제의 모순이 서서히 현실화 하던 시기였다. 지배세력 내부의 대립과 모순이 표면화 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정치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귀족세력이 부상하면서 위기를 느낀 경덕왕은 왕권의 강화를 위한 개혁조치들을 시행하지만, 그러한 개혁정책들이 쉽게 정착되지는 못했다. 왕 혼자의 힘으로 구조적인 모순을 혁파하고 귀족세력이 이미 권력의 축으로 대두된 현실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특히 왕 자신이 후사(後嗣)와 관련된 무리수를 범함으로써 추락된 왕권은 치명상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식으로 후사를 삼으려는 욕망’을 왕권강화책과 동일시한 것이 경덕왕이 범한 무리수였는데, 그 당연한 결과로서 후사인 혜공왕이 피살되고, 차후 신라의 정치는 혼란기에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경덕왕은 충담을 만났다. 그렇다고 왕이 충담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당대에 유행하던 <찬기파랑가>를 통해 그 작자인 충담을 왕도 소상히 알고 있었다.

 충담과의 대화에서 왕은 “짐이 일찍이 들으니 ‘선사가 지은 <찬기파랑사뇌가>가 그 뜻이 심히 높다’고 하니 과연 그러한가요?”라고 물었다. 그에 대해 충담사는 “그러하옵니다”라고 확신에 찬 대답을 건넸다. 그렇다면 일말의 망설임이나 겸양의 의도도 없었던 충담사의 대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왕이 작자인 충담에게 확인하고자 한 것은 ‘심히 높다’는 노래의 뜻인데, 그 경우 뜻이란 작자의 의도나 그로부터 구현된 주제의식일 것이다.

 그것은 ‘기파랑’이란 실존인물의 덕망이 왕을 비롯한 당대 권력층의 일반적인 성향과 현격하게 다르다는 점을 암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충담은 기파랑과 함께 권력에 발을 담그지 않으면서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던, 일종의 ‘재야 덕망가’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 권력을 잡지는 않았으나, 대중으로부터 권력 못지않은 사랑과 신뢰를 받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왕이 충담에게 ‘이안민(理安民)’의 현책을 <찬기파랑가>와 같은 노래의 형태로 요청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감동한 왕이 노래를 받은 다음 충담에게 왕사(王師)의 자리를 주었으나 그가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은 점도 충담의 정신이나 현실적인 위치를 암시하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왕사의 자리를 사양했던 것일까. 애당초 자신이 정치에 뜻이 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의 정치 현실이 힘없는 재야 명망가가 나선다고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보지 않은 점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고 해도 그런 생각의 실천을 뒷받침할만한 힘이 필요한 것이 정치의 현실이다. 실현시키지 못할 아이디어라면 꿈에 그칠 뿐이고, 그런 아이디어를 지닌 인물은 단순한 ‘이상가(理想家)’ 이상은 될 수 없음을 충담은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재야 명망가의 자리를 고수하고 임금에게 실천자적 역할의 짐을 떠넘겼을 가능성이 크다.

 노래 속의 핵심은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에 있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제대로 ‘안하는’, 당대의 현실이 문제라는 지적이었다. 말하자면 당대에 귀족세력이 부상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있는 점을 충담은 적절하게 지적했고, 왕은 노래를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달은 셈이었다.

 경덕왕이 왕권 강화에 나서서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들을 시행한 것도 <안민가>의 제진(製進)과 맥을 같이 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천문박사와 누각박사(漏刻博士) 등을 두어 기후의 변화를 살피고 백성들의 삶을 배려하려 한 것은 위민정치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도 경덕왕의 개혁정치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사실 충담이 눈을 주었던 대상은 백성이었다. 그의 눈에 밟힌 것은 고통 받는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이 잘 살면 나라는 태평해지는 것이고,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야말로 모든 정치의 대본(大本)이라고 본 것이다. 백성들이 잘 먹고 살아야 ‘이상적인 불국토’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 것이 충담의 철학이었다. 백성들이 제대로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지배계층은 권력 싸움들을 그만 하고 제 할 일들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 충담의 정치철학이기도 했다.

 이처럼 노래에 담긴 뜻은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일’, ‘모두 제 할 일들을 다 하는 일’ 등인데, 임금으로선 그 속뜻을 좀 더 다르게 해석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라는 두 조항에서 전자를 ‘임금다운 권력의 회복’으로, 후자를 ‘권신(權臣)들을 다잡아 신하다운 종속의 위치로 내리는 일’로 각각 해석했을 것이다.

 민심을 읽고 있던 충담으로서는 임금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민심을 얻는 지름길이며 궁극적으로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일임을 ‘넌지시’ 알려주려 했을 것이고, <안민가>는 그러한 정치적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경덕왕이 귀정문 누상에서 기다린 ‘영복승’이란 ‘민심의 향배를 읽을 줄 아는, 정치적 식견을 지닌 승려’였을 것이고, 그에게 요청한 ‘이안민의 노래’는 난국에 처한 임금이 당장 취해야 할 정치적 조치를 담은 담론이었던 것이다.


 Ⅲ. <안민가>의 정신, 그 지속과 변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상하로 묶여 국가가 지속되는 한, <안민가>의 정신은 정치의 대전제로 살아남기 마련이다. 다만 노래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주제의식이 달라질 수 있을 뿐이다. 정치의식을 담은 노래는 조선조의 악장이나 관각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변계량의 다음과 같은 노래는 변질된 <안민가>의 정신을 잘 보여준다.


서로 찾고 서로 응할 제

밝은 시절 용호(龍虎)가 만나 스스로 기약함이 있도다

신하의 절개 솔과 대라 추워도 변하지 않고

성은(聖恩)은 천지와 같아 가이 없도다

크시도다, 건원(乾元) 4덕의 온전하심이여!

황상(黃裳)의 곤도(坤道)는 하늘을 믿고 받드나이다

신하를 예로써 부리시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옵나니

밝은 임금 어진 신하 서로 만나 태평시절 이루셨도다

부모와 신명(神明)처럼

사람하고 공경함을 혹시라도 바꾸지 말아야 하니

임금과 신하는 오직 한 몸일 뿐이로소이다.


변계량이 세종에게 지어올린 <<자전지곡(紫殿之曲)>> 가운데 <군신지의(君臣之義)>다. 임금과 신하 간의 의리에 대한 담론인데, 내용의 핵심은 ‘신하를 예로써 부리시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옵나니’에 있다. 전제 왕조시절 임금에 대한 신하의 충성은 절대 불변의 명제였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는 임금이 신하를 예로써 부려야 신하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긴다고 했다. 말하자면 이 노래에서는 임금과 신하를 계약관계의 두 당사자로 규정한 셈이다. 그런 계약관계가 성립되어야 ‘임금과 신하는 한 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호족세력의 힘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움으로써 왕권과 신권인 호족세력의 상호 협조체제를 확립했던 고려 태조 왕건이나 혁명을 주도하여 건국의 주체세력으로 등장한 공신세력과 왕권의 제휴관계를 맺게 된 조선왕조의 초기는 비슷한 양상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분명 <안민가>에서 언술된 군신관계와는 다른 모습이 이 노래에는 그려져 있다.

 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먼저 요구하는 것이 전제 군주체제의 기본성격인데, 왕과 신하들 간의 상호 거래를 문면에 명시한 것은 <안민가> 정신의 크나큰 변질이라 할 만하다. 만약 이 노래의 주지를 산문으로 풀어 표현할 경우 ‘군신 간의 힘겨루기’라는 서사적 주제의식이 생성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만큼, 이 노래의 정치적 함의(含意)는 엄청나다. 이 노래의 주체가 변계량으로 대표되는 공신(功臣) 그룹이었다는 점은 이 노래를 <안민가>의 정신으로부터 이토록 현격하게 변질시킨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왕과 공신은 새로운 체제를 탄생·지속시키는 두 축이므로, <안민가>에 언급된 ‘군-신’과는 달리 이해(利害) 당사자일 뿐이었던 것이다.

 <안민가>와 <군신지의>에 언급된 ‘군-신’의 논리가 그 성격을 달리하고는 있지만, 근본적인 면에서 담론을 달리한다고 볼 수는 없다. 두 노래 모두 전제왕조라는 동일한 체제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변질된 모습을 보이긴 하나 <안민가>의 모티프가 이 노래에도 지속된다고 보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렇다면 <안민가>는 현대시인에게 어떤 모습으로 수용되고 있을까. 이향아의 <신곡조 향가- 안민가>를 들어보자.


하루 세끼,

끼니마다 거르지 않고 묵상하고 싶다

밥사발에 옹싯거리는 낱알의 변용

이것은 봄부터 가을

이것은 일년의 심판

일년의 울음과 고통

의심과 기다림에 내리는 응답

내가 감사하는 것은 세월이다

아랑곳없이 깊어지는 무심이다

끼니 때면 가끔 조상들을 생각한다

후덕한 임금님과

양순한 백성들을

끼니마다 나는 목숨을 의심한다

이름도 벼슬도 허울임을 생각한다


그러나 밥을 먹는 평화여, 이 안분이여

결국은 감사한다

감사한다

때때로의 분망과

때때로의 무료와

때때로의 모멸과

때때로의 노여움을

지나간 시절을 거슬러 씹으며 삭힌다


내 사지와 동체 핏줄과 뼈가

일년에 일년씩 앙금으로 보태어져

아, 그 누구에게도 죄가 되는

평안을 회복한다

미안해라, 미안해라

평안 속에 갇힌다



이향아의 <안민가>를 관통하는 모티프도 ‘먹는 문제’의 해결을 통한 평안의 확보에 있다. 충담의 <안민가>에서도 중심은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절박한 문제였다. 다른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조롱 속의 새’가 백성이 아닌가. 그래서 충담은 ‘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라고 절규했다. 그렇게 갇혀 사는 백성들이 평안함을 느끼며 살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나라를 태평하게 하는 길’이라 했다.

 이향아의 <안민가>도 세 개의 연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충담의 <안민가>와 같다. 첫 연의 핵심은 ‘밥에 대한 의심과 기다림’이고, 둘째 연의 핵심은 ‘감사’이며, 셋째 연의 핵심은 ‘평안’이다. ‘끼니마다 묵상하고 싶다’는 화자의 마음은 먹는 문제의 절박함을 절절하게 드러낸다.

 ‘양순한 백성들’에겐 ‘봄부터 가을까지’ 기다려서 얻게 되는 한 해의 수확이 ‘일 년의 심판’일 수밖에 없다. 초조하게 심판의 판정을 기다리듯 한 해 열심히 노력한 백성들은 ‘배고프지 않길’ 바라면서 수확의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후덕한 임금님’과 ‘양순한 백성’들을 싸잡아 ‘끼니 때면 가끔 생각하는’ 조상들이라 했다. 백성들의 배부름을 기원한 임금이나, 자신들의 배부름을 임금의 덕으로 생각한 백성들 모두 지금 끼니 때 굶지 않는 화자가 기꺼이 떠올리고 싶은 조상들인 것이다.

 ‘배불리 먹는’ 행복 앞에서 ‘이름이나 벼슬’은 허울일 뿐이라고 했다. 그만큼 시인은 먹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로 인식한 것이다. 둘째 연의 핵심은 감사다. ‘밥을 먹는 평화’, 아니 ‘밥을 먹음으로써 얻게 되는 평화’와 그에 대한 감사를 노래한 부분이다. 밥을 먹고 평화를 얻어 감사하는 마음에 ‘분망, 무료, 모멸, 노여움’ 등은 모두 삭아 없어지는 감정의 찌꺼기들일 뿐이다.

 누구나 충담의 <안민가>에서 ‘먹는 문제의 절박함’을 인식해낸다. 정치의 잘 되고 못 됨을 따지는데 다른 이론들이 있을 수 없다. 소박하고 양순한 백성들이 배를 곯지 않는 것만큼 ‘잘 되는 정치’가 어디 있겠는가. 백성들에게 밥 한 술 제대로 먹여주지 못하는, 형편없는 정치집단들이 지금도 세계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러니 그 옛날 경덕왕 시절의 ‘재야 명망가’ 충담으로서야 못 먹는 백성들을 둘러보며 그들을 먹여 살리는 것만이 ‘이안민(理安民)’의 첫 조건임을 뼈에 사무치게 느꼈을 것 아닌가. 그래서 왕이 물어왔을 때 임금이나 신하들이 제대로 자기들의 역할을 하라고 일갈했다. 그렇게 되어야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고, 궁극적으로 나라가 태평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충담의 그런 본심을 꿰뚫어 보았기에 오늘날의 시인 이향아는 자신만의 <안민가>를 읊어낼 수 있었다.


                      ***


 고래로 정치의 요체는 백성을 먹이고 편안케 하는 데 있다. 우리의 옛 노래들 가운데 충담의 <안민가>만큼 그 평범한 진리를 소박하면서도 진솔하게 읊어낸 노래가 없다. 오늘날에도 그의 노래가 빛을 발하는 건 아무리 해가 바뀌어도 사람들의 먹고 사는 일만큼 절박한 과제이기 때문이고, 정치인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