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09. 1. 1. 09:11
새해 인사

새해가 밝았습니다. 먼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행복과 평화가 깃드시길 빕니다. 우리는 지난 해 나라 안팎으로 많은 문제들을 겪었습니다. 희망 대신 불안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발전의 역사’였다고 보는 것이 제 관점입니다. 작게 보면 퇴보 같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진보나 발전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은 좀 더 큰 걸음을 내딛기 위한 시련, 혹은 신의 섭리(攝理) 쯤으로 해석하는 게 어떨까요? 우리의 자만과 과욕을 다스려 좀 더 겸허해지라는 절대자의 깊으신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크게 나쁘지는 않겠지요. 따라서 우리가 힘만 합친다면 그런 어려움들은 곧 극복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지난 해 저는 나름대로 동분서주, 바쁘게 지냈습니다. 강의와 연구는 교수의 일상이니 그렇다 치고, 한국문예연구소를 어떻게 하면 정상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을까 부심하며 지낸 한 해였습니다. 연구소 이름으로 두 건의 국제학술대회를 가졌고, 3건의 국내 학술대회를 열었으며, 두 권의 학술지와 4건의 학술총서를 펴냈습니다. 그리고 학술총서 1, 2, 3이 나란히 문화관광부와 대한민국 학술원으로부터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한국학술진흥재단, 동북아역사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고창오씨종친회, 한국어문회 등으로부터 2억에 가까운 수주액(受注額)을 확보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심양항공대학과 저희 연구소가 ‘중한문화연구소와 한국어교육원’을 설립하기로 합의하고 양해각서와 협정서를 교환한 것은 대외 활동의 중요한 개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10편의 논문과 평론을 발표했고, 정영문 박사, 신춘호 선생 등과 『조선통신사 사행록 연구총서』13권을 펴냈습니다. 학술목적으로 러시아, 중국, 일본 등을 다녀오면서 그간 넓히지 못한 안목의 협소함을 탄식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저의 1년은 ‘깨달음과 얻음’으로 집약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과 얻음은 앞으로의 발전을 위한 밑거름으로 쓰일 때만 의미를 가질 수 있으리라 봅니다. 올 한 해 제 개인적인 연구 활동의 기조를 계속 유지하면서, 대내외적으로 연구소의 위상을 안정시키기 위해 진력할 생각입니다. 2건의 국제학술대회와 2~3건의 국내학술대회, 4~5차례의 집담, 2차례의 학술지 발간, 4~5건의 학술총서 발간, 2~3억의 수주액 등은 새해에 반드시 달성해야 할 목표치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소의 신념이란 무엇일까요?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갈 길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 우직하게 가다보면 언젠가는 도달하게 된다는 믿음만이 캄캄한 밤길을 가는 우리의 유일한 등대가 아닐까요?
내 어린 시절 시골에서 함께 했던 암소 누렁이와의 추억을 1년 내내 화두(話頭)로 틀고 앉아 끝이 보이지 않는 먼 길을 떠나고자 합니다. 백규서옥을 찾아주시는 여러분도 고개 넘어 들판 건너 장에 가는 마음으로 저와 함께 먼 길을 떠나보십시다. 장에서 가서 볼 일이야 각자 다르겠지만, 가는 길에 길동무가 될 수는 있겠지요.
부디 올 한 해 건강하시고, 댁내 두루 행복하시길 빕니다.

    2008년 새해 첫날  

      백규 드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26. 12:32
 

눈 내린 산길을 걸어서 출근하며



                                                          조규익



출근길의 어려움에 고통 받는 분들은 ‘미친 놈!’이라 욕하시겠지만, 밤에 눈이 내리면 못 말릴 정도로 들뜬다. 아침 일찍 아이젠에 배낭차림으로 산길을 걸어 학교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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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끝에 누가 있을까

 대도시의 한 구석에 둥지를 틀고 세상의 잇속으로부터 초연하려 애써온 20년 세월. 누항(陋巷)에 살면서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한겨울에만 서너 번쯤 맛볼 수 있는 ‘눈길 출근’ 덕분이다. 노트북과 책을 잔뜩 우겨 넣은 배낭을 짊어지고, 등산화에 아이젠을 차고 나서면 좋게 보아 ‘산사나이’ 서운하게 보아 ‘군밤장수’다. ‘배낭 속의 물건을 많이 팔고 오라’는 아내의 농을 뒤로 하고 산길로 접어들면 별세계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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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무와 눈의 조화여!

 나보다 극성스런 사람들이 벌써 발자국들을 찍고 지나간 산길이지만, 봄맞이 집 단장에 열성인 까치들의 노래 소리 만큼은 내 독차지가 아닐 수 없다. 아, 4계절 지겹게도 사람들의 체취에 시달리던 나무들이 오늘은 참하게 순백의 화장을 한 채 ‘거울 앞에 선 순이’의 형상을 하고 있구나! 소담하고 정갈한 그 자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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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눈길

***

내 어릴 적엔 눈이 많았다. 논바닥에서 아지랑이 피어오를 때까지도 차가운 바람은 내 작은 몸 곳곳을 파고들어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눈과 얼음이 우리의 눈길을 벗어나는 적이 없었던 한겨울은 어떠했겠는가. 30리 들길과 산길을 걸어야 하는 등굣길의 고통이야 말하여 무엇 하리오. 얄팍한 고무신발의 밑창은 닳아 반들거리고, 가끔은 찢어져 너덜거리기도 했다. 얼음으로 판장 박힌 길에 나서자마자 앞·뒤·옆으로 곡예를 하거나 넘어지고 구르기 일쑤. 유도의 낙법(落法)은 그 시절 자연적으로 체득한 생존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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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들의 환성

 그러니 검은 때가 거북이 등처럼 더껑이 진 손등은 추위로 갈라져 늘 피가 비쳐 있고, 구멍 뚫린 장갑 밖으로 삐져나온 손가락들은 늘 쓰리고 아렸다. 자상하신 아버지는 발에 새끼를 둘둘 말아 ‘천연 아이젠’을 해주시곤 하셨지만, 성황당 재빽이[‘산등성이’의 충청도 사투리] 초입에서 다 벗겨지기 일쑤였다. 그러니 아이들은 구르고 자빠지며 시퍼렇게 질린 채로 요즘 아이들 ‘용평 스키장에서 미끄럼을 타듯’ 학교엘 오고 갔다. 땀과 눈에 절었다가 다시 추위에 얼어 서걱거리는 솜바지 저고리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 조개탄의 눈물 나는 열기 속에 두어 시간 수업이 지나서야 참새 같은 우리들의 몸은 녹기 시작했다. 마룻바닥은 얼음물로 흥건하고, 얼었다 녹은 손발은 간지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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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그 시절 누군들 추위와 배고픔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랴. 그래서 하얀 눈은 아련한 설렘과 궁핍의 이미지로 나를 들뜨게 만드는 건 아닐까. 밤에 눈이 내리면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스키장 갈 생각에 잠을 못 이루겠지만, 유년기의 상처로 남은 마음의 궁핍에서 자유롭지 않은 나는 연구실에 도달하기까지 그 30분 남짓의 호사 때문에 잠을 못 이룬다. 어쩌면 음력 그믐날 밤 설빔을 안고 잠 못 이루던 그 시절의 흥분이 이랬던가, 잠시 회상해본다.

                           2008. 2. 26. 눈 내린 산길을 걸으며 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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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16. 18:48
춤추는 무희여, 그대 새의 모습을 한 신선이여!
           -춘앵전을 보고-



                                                                                     조규익

당나라 고종때의 일이다. 무슨 근심이 있었던지 새벽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던 황제. 밖으로부터 꾀꼬리 울음소리를 들었다. 슬며시 창을 열고 내다본즉 노란 색 꾀꼬리 한 마리가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게 아닌가. 갑작스레 흥이 일어, 즉시 악공 백명달을 불렀다. ‘저 꾀꼬리의 자태를 춤과 노래로 만들어보라’는 황제의 명을 받은 그는 침식을 잊은 채 며칠을 고심했다. 마침내 ‘춘앵전(春鶯囀)’을 완성한 그는 아리따운 무희를 선정, 무복(舞服)으로 분장시킨 뒤 또 며칠을 연습시켰다. 자신이 붙은 악공은 드디어 황제 앞에 그 춤과 노래를 올렸다. 황제는 크게 만족했고, 그로부터 이 춤곡은 궁중에서 공연되었으며, 우리나라에까지 전승되었다.

***

이번 숭실대학교 한국전통문예연구소의 학술발표회에서는 조선조 후기 정재에 관한 5편의 논문이 발표되었고, 춘앵전 공연도 있었다. 발표된 논문들도 쉽게 들을 수 없는 것들이었으나, 춘앵전 공연은 그날 행사의 ‘화룡점정(畵龍點睛)’ 격이었다.
황금색 옷으로 갈아입은 무원 최서윤씨는 흡사 신선이라도 된 듯, 일렁이며 춤을 추었다. 객석에 앉은 학인(學人)들은 넋을 잃고 아름다운 춤사위에 취했다. 춤이 진행되는 10분 가까이 객석으로부턴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고, 가끔씩 탄성만 흘러나왔다. 그야말로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었다. ‘감동적인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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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지경에 몰입한 춤꾼 최서윤씨

 

***

춘앵전에는 두 가지 이미지, 즉 아름다운 꾀꼬리의 그것과 가볍고 자유로운 신선의 그것이 겹쳐 있었다. 옛날부터 사람의 몸에 날개가 돋으면 신선이 된다고 믿었는데, 그 상태로 날아오르는 것을 ‘우화등선(羽化登仙)’이라 했다. 하느님의 사자로 선향(仙鄕)인 곤륜산을 오르내리던 신조(神鳥)가 봉황이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신선이 봉황이나 학을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덕흥리 고분과 무용총에도 사람의 얼굴에 새의 몸을 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승천(昇天)하는 존재, 혹은 자유로운 존재라는 점에서 신선과 새는 유사한 것일까. 새의 동작을 모방하여 춤사위의 상당 부분을 만들어낸 것도 새가 날개를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날개는 ‘날아다니는 신선’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날개가 있어야 복잡한 인간세상을 초탈하는 신선이 되어 신적인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오늘날 기독교의 천사와 비슷한 존재일까.
꾀꼬리의 아름다움을 본떠 만든 춘앵전은 새의 이미지와 인간 및 선계를 성공적으로 연결시켰으니, 이 정재 30박 째의 동작인 ‘과교선(過橋仙)’은 그 핵심이다. 이것은 춘앵전 동작 가운데 압권인 이 용어를 번역하면 ‘다리를 건너는 신선’ 더 구체적으론 ‘신선이 다리를 건너듯 추는 춤사위’가 될 텐데, 무원이 좌와 우로 돌 때 마치 신선이 다리를 건너가듯 사뿐사뿐 춤을 추는 모양에서 유추된 용어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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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꾼 최서윤씨의 환상적인 춤사위



***

그러나 과연 이것뿐일까. 다음의 동작들은 내 눈을 어지럽게 했다.

 *새가 날개를 펴고 날듯이 빙글빙글 도는 ‘회란(廻鸞)’(8박)
 *날아오르듯 발을 가볍게 디디며 추는 ‘비리(飛履)’(11박)
 *한 층 한 층 탑에 올라가듯 세 걸음 나아가며 차츰 두 팔을 올려 드는 ‘탑탑고(塔塔高)’(15박)
 *원앙을 쳐서 날갯짓을 하도록 소매를 뿌려 내리는 ‘타원앙장(打鴛鴦場)’(16박)
 *기분 좋은 산들바람에 하늘하늘 걷는 듯 악절에 맞추어 추는 ‘사사보여의풍(傞傞步如意風)’(24박)
 *금모래가 날리는 것처럼 황금색 꾀꼬리가 나뭇가지를 분주하게 오락가락하듯 앞뒤로 나왔다 물러
   갔다 하는 ‘비금사(飛金沙)’(27박)
 *제비가 둥지로 돌아가듯 춤추며 물러가는 ‘연귀소(燕歸巢)’(32박)
 *새가 아름다운 꽃 앞에서 요염한 자태를 짓듯 교태를 부리는 ‘화전태(花前態)’(18박)
 *꾀꼬리가 날갯짓을 하듯 소매를 들어 휘두르는 ‘요수(搖袖)’(17박)
 *새가 바람에 하늘거리는 꽃잎을 물려다 그만 두듯 물러서는 ‘당퇴립(當退立)’(20박)
 *새가 날개를 펼치려다 내리는 것처럼 소매를 살짝 나부끼는 ‘소섬수(小閃袖)’(21박)
 *새가 번갈아 좌우로 몸을 기울여 걷듯 하는 ‘사예거(斜曳裾)’(7박)
 *새가 몸을 높였다 낮추는 동작을 이어 하듯 소매를 낮추었다 높였다 하는 ‘저앙수(低昻袖)’(9박)  
 *꾀꼬리가 날개를 펴고 뛰어 올라 흔들리는 꽃잎을 잡듯이 세 번 몸을 돌리는 ‘전화지(轉花持)’(19
   박)
 *꾀꼬리가 머리를 낮추었다가 들듯 허리를 꺾었다가 다시 펴는 ‘절요이요(折腰理腰)’(10박)
 *꾀꼬리가 두 날개를 한일자로 폈다가 반쯤 내리고 다시 올려 뿌리듯 하는 ‘수수쌍불(垂手雙拂)’(3
   박)
 *꾀꼬리가 살래살래 몸을 돌리듯 물결이 맴돌 듯 몸을 돌리며 춤을 추는 ‘회파신(廻波身)’(29박)

  등등.  거의 모든 춤동작이 새의 움직임이었고, 그 바탕엔 신선이 있었다.  

***

무대 위의 돗자리가 치워지고 무희가 사라진 다음에야 우리는 현실계로 돌아왔고,
그 시점으로부터 나는 황금색 꾀꼬리와 신선이 만들어낸 선계(仙界)의 환상공간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아, 우리를 잡답(雜沓)의 일상으로 되돌려 보낸 무희여!
   잔인하도록 아름다운 ‘춘앵전’의 무희여!

                                  2008. 2. 13.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2. 1. 10:02
호남성통신 4

      얼어붙은 장가계(張家界), 사라진 무릉도원(武陵桃源)
          -천문산(天門山)의 서리꽃 눈꽃과 끊어진 다리의 씁쓸한 추억-


혹시 이번 참에 무릉도원을 밟아보는 것이나 아닐까. 지도에서 무릉원(武陵源)을 목격하고는 그곳을 주책없이 대뜸 천하의 절경이라 일컫는 장가계와 연관 지어 생각하기로 했다. 복숭아꽃 만발한 무릉도원.
언제인가 외부인과 연락이 단절된 그곳에 어부 한 사람이 어쩌다가 들어가고 말았다. 그런데 그곳에 천하의 절대 선경(仙境)이 펼쳐져 있는 게 아닌가. 사람을 잡고 물으니, 자신들은 진시황의 폭정을 피해 이곳에 들어온 이래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생사를 초월한 절대 낙원이 바로 그곳이었던 것. 자신들의 존재와 공간을 누설치 말 것을 약속하고 빠져나온 어부가 그곳에 다시 갔으나, ‘다시는’ 그곳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바로 그 무릉도원엘 가고 있다는 설렘으로 잠시나마 가슴이 벅차올랐다. 꿈같이 선경에 들렀다가 다시 그곳을 찾아가는 어부의 심정으로. 우리는 험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상덕국제호텔에서 이른 아침을 먹은 다음 우리는 장가계를 향해 허위허위 너덧 시간을 달렸다. 상덕의 시계(市界)를 벗어나 무릉원으로 진입할수록 고도는 높아갔고, 주변의 봉우리들은 날이 서기 시작했다. 길 주변 산기슭에 띄엄띄엄 널려있는 민가들은 온기를 모조리 잃어버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한 결 같이 시멘트로 지은 단층 혹은 2층들이었는데, 짓다가 중단한 집들이 태반이었다. 어둠이 깔려도 따스한 불빛 한 줄기 새어나오지 않고, 텅 빈 공간을 채운 것은 적막과 추위뿐이었다.
다들 어디에 갔을까. 호남성 일대의 가옥들에는 난방장치가 아예 없다는 설명을 들었고, 지금까지 호텔들을 거치면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썰렁한 날씨 속에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울까. 거지가 남 잠자리 걱정해주듯, 나는 노랑노랑한 아이들과 구부정한 이 땅의 할매 할아배들이 눈에 밟혔다.
고도가 높아갈수록 기온은 낮아지고, 버스의 창문에 눌어붙는 입김과 성에로 창밖은 가려지고 있었다. 더구나 닥쳐오는 산간의 이른 어둑발은 우리를 하염없는 졸음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다. 한참 꿈속을 헤매는데 모두 내려야 한다는 가이드의 말이 들려 와 퍼뜩 잠이 깼다. 몇 년 전의 물난리로 없어진 황가 계곡의 다리가 아직 공사 중이라서 차가 갈 수 없으니 우리는 모두 내려 걸어서 계곡을 건너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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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원 황가계곡의 끊어진 다리, 중단된 공사현장


깜깜한 밤, 차에서 내리자 토가족 원주민들이 몰려왔다. 계곡 건너편으로 짐을 지고 갈 일꾼들과 사람들이 빙판 진 계곡 길을 미끄러짐 없이 건너 갈 수 있도록 발에 감을 짚신 등을 팔러 온 사람들로 붐볐다. 다리 공사에서 품을 팔아봤자 하루 종일 20원 벌이가 고작이었으나, 트렁크 두어 개만 계곡 건너편으로 옮겨주면 40원을 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 이곳 사람들이 다리의 완공을 원치 않는다는 것도 헛말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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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원을 떠나던 날 우리의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계곡을 건너는 토가족 남성들


어릴 적 눈 온 날 등굣길, 고무신발에 새끼를 동여 본 이후 처음으로 엉성한 짚신을 신고 계곡을 건넜다. 깊이가 30m 이상, 길이가 500여m가 넘는 끔찍한 계곡이었다. 빙판에 미끄럽기도 하고 질퍽거리기도 했다. 달빛도 없는 우중충하고 깜깜한 밤중. 인적 없는 타국의 계곡을 건너는 50여인의 나그네들은 참으로 고된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걸어서 길 공사가 시작되는 지점에 이르자 토가족 원주민들의 억지가 이어졌다. 계곡을 건너오는 도중 손을 잡아주었으니 20원을 더 내라고도 하고, 비용으로 가방 당 20원을 더 내라고도 하면서 짐을 내주지 않는 것이었다. 험악한 순간이었다. 원래 산적(山賊) 출신이니 어쩔 수 없다고 혀를 차면서 이들의 억지 대부분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가까스로 무릉원에 입성했고, 천자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

다음날 천문산을 케이블카로 올랐다. 공중에서 내려다보이는 무릉원 시가지의 집들 모두 추위에 떨고 있었다. 모두 얼어 있었다. 살아있는 것은 간혹 뿜어대는 열차의 경적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늘 진 주택들의 지붕 밑 빨랫줄에는 그들의 남루(襤樓)가 물에 젖은 채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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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보이는 구절양장의 도로

 그러나 케이블카에 달랑달랑 매달려 내려다보는 산과 계곡은 참으로 의연했다. 추위 속에 증발되는 겨울 안개가 중턱 이후로 자욱했고, 발 밑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는 꼬불탕 차도가 구절양장으로 장난감처럼 꼬부라져 있었다. 순간순간 아아(峨峨)한 산봉우리들이 케이블카의 창문을 통해 내 몸에 부닥칠 듯 다가왔다 물러가곤 했다. 중턱을 지나자 서리꽃 눈꽃 핀 나뭇가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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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서리에 얼어붙은 천문산의 나무들

 
장가계의 산들 중 역사 기록에 가장 먼저 나타나는 천문산. 운몽산이나 고량산 등의 이칭을 지닌 이 산은 해발 1518m나 된다. 해발 1300m 지점에 환하게 뚫린 구멍 즉 천문(天門)이 나타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천연 종유굴인 천문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곳에 가려면 케이블카에서 내려 다시 99개의 고개를 버스로 올라야 하고, 다시 가파른 999 계단을 걸어 올라야 한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도중 안개에 가려 어렴풋하긴 했으나, 천문동을 볼 수 있었다. 높이 131m에 너비 57m, 깊이 60m나 되는 큰 동굴이었다. 시내에서 시작되는 케이블카는 종착점까지 7.45km, 편도 35분의 엄청난 길이였다. 오금이 저려오는 1시간여의 체험. 그러나 손에 잡힐 듯한 설화목(雪花木)들 덕택에 그 공포는 찬탄과 쾌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

드디어 종착점. 모든 것이 얼어 있었고, 나무들은 무거운 눈을 이고 있었는데, 나무들을 감싸고 있는 눈은 부스러지고 흩어지는 게 아니라 아예 얼어붙어 있었다. 나무들 모두 마치 두꺼운 솜바지를 입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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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서리에 얼어붙은 천문산의 나무들

 사람들은 넋을 잃어버린 채 눈의 무게에 체념하고 있는 나무들 사이를 날뛰듯 돌아다녔다. 그 순간만큼은 복잡한 세사에서 떠나려는 모습들,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이었다. 그들을 보는 내 마음도 덩달아 들떴다. 그래, 가장 순수한 곳으로부터 자꾸만 멀어져 온 우리가 가끔씩 순수했던 지점으로 회귀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아니, 어쩌면 그런 기회를 찾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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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와 눈으로 얼어붙은 나무들 사이에서

 
오늘 무릉도원을 찾아 왔다가 추위에 얼고 삶에 찌든 사람들을 만나 우리의 마음마저 썰렁했지만, 이제 산정의 순수한 설화목들 속에서 그간 잃어버리고 있던 순수를 되찾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다리 끊어진 계곡을 천신만고 건너온 고생은 보상을 받지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가 이곳을 내려가면 언제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으랴! 그러고 보면 우연히 만난 무릉도원을 다시 찾지 못한 그 어부의 경우처럼, 이 천문산 케이블카의 종점이야말로 우리에겐 그 어부의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 아니랴? 그러니 무릉도원 밖에서 무릉도원을 찾을 일이 아니오, 세상 밖에서 세상을 찾을 일이 아님을 오늘 이 천문산은 내게 포효하듯 말해주었다. 그래, 이곳에 다시는 못 올지라도 이제 세상으로 내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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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산에 오른 기쁨을 만끽하며


2008. 1. 24.  백규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1. 23. 15:04
  호남성통신 2
-아, 악록의 정신이여!-


                                                                                                                    조규익

호남성은 궂은 겨울비에 젖어 있었다. 남방에 있다하여 내가 방심했던 것일까. 가이드의 표현대로 ‘뼛속을 파고드는 추위’가 매섭다. 차라리 ‘에이는 듯한’ 우리나라의 겨울날씨가 낫다. 이곳은 매우 습한 곳이라 우리보다 기온은 높되 더 춥게 느껴지는 듯하다. 무엇보다 괴로운 건 어느 곳을 가도 난방이 되지 않거나 시원치 않다는 사실이다. 4성급 호텔임에도 천정 밑에서 겨우 온풍기 하나가 돌아갈 뿐이었다.
우리나라야 밖에서 좀 추워도 집안으로 들어오면 등을 지질 수 있는 온돌이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온돌을 고안해 사용하기 시작한 우리 조상들의 지혜야말로 세계에서 으뜸이랄 수 있다. 이곳에서 움츠리고 길가를 걷다보면 퍼렇게 질린 얼굴로 바람 휑하니 통하는 가게를 지키는 사람들이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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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성은 중국 22개 성 가운데 면적으로 10위(21.18㎢), 인구로 7위(6천600만), 인구밀도로 13위(313/㎢)란다. 북쪽의 호북(湖北)성과 동쪽의 장시성, 남쪽의 광둥성, 남서쪽의 장족 자치구, 서쪽의 귀주성, 북서쪽의 중경과 접한 곳. 우리가 첫발을 내디딘 장사는 호남성의 성도(省都)다. 모택동, 유소기, 호요방, 주룽지, 화룡장군 등 걸출한 인물이 많이 나온 곳도 이곳 호남성이며, 김구선생이 잠시 피신했던 곳도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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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록서원 앞에 세워져 있는 모택동 상


이곳에도 소수민족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 토가족, 묘족, 백족, 뚱족 등 네 종족의 수가 많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옛날 이 지역에서 '산적' 노릇을 하던 토가족은 단연 으뜸. 왜 토가족(土家族 )일까. 가이드의 설명에 의하면 중국인이 섬기던 토지신은 키가 작다고 한다. 그런데 토가족은 대체로 키가 작은 종족이다. 그래서 ‘토가족’이라 하며, 야채를 위주로 하는 이곳의 식사를 ‘토채(土菜)’라 한다는 것. 물론 동정호(洞庭湖)의 남쪽인 데서 명칭을 얻은 호남성의 약칭은 ‘상강(湘江)’에서 온 ‘상(湘)’이오, 이 지역의 음식은 ‘상채(湘菜)’다. 남북으로 흐르는 상강은 장사 시가지를 동과 서로 나누고 있었다. 우리가 잠을 잔 시대제경호텔도, 호남사범대학도, 악록서원도 모두 서쪽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장사시에 있는 동안 주로 서쪽에서만 움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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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 상

22일 아침. 호남사범대학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고, 호남대학 구내에 있는 악록서원(岳麓書院)을 들렀다. 악록산 청풍협의 아래쪽에 있으며, 중국 4대 서원 가운데 하나인 악록서원. 이 서원이 지어진 것은 북송 때(976년)였다. 악록산의 고상한 산세와 눈발 흩날리는 궂은 날씨 때문인가. 서원의 분위기는 더없이 무거워 보였다. 원문(院門)에 들어선 다음 발길을 옮기자 혁희대(赫曦臺), 대문(大門), 이문(二門), 강당(講堂), 어서루(御書樓) 등이 차례로 나타났다. 통로 양측으로 교학재(敎學齋), 반학재, 상수교경당, 백천헌, 선산사, 숭도사, 육군자당, 염계사, 사잠정 등 즐비한 건물과 공간들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각종 부속 박물관과 연구소도 적지 않은 걸 보면, 동양학 아니 인문학의 근원이 이곳이었음을 알 수 있을 듯 하다.  
우리 역사를 파행으로 몰아간 중국.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들이 품고 있는 도학의 큰 맥까지 부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서원의 경내를 거닐며 산같이 위대한 지성들이 산 속에 파묻혀 진리를 궁구하고 토론하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이 서원에선 그 옛날 주희(朱熹)와 장식(張栻)이 토론을 벌였다. 지금보다 삶의 여건이 결코 좋을 리 없었을 터. 백발이 성성한 대학자들이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이곳에 틀어박혀 학문을 토론했을 것이니, 참으로 존경스럽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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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사범대학 문학원


학문을 한답시고 애꿎은 종이와 전기만 낭비하고 있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염량세태에 휘둘리며 일희일비하는 백규, 학문의 폭과 깊이를 획기적으로 확장시키려 하지도 못하고, 가르침을 줄만한 세상의 현인들을 찾아 나서지도 못하는 백규, 공부에 모든 것을 걸지도 못하는 겁한(怯漢) 백규...
호남성의 악록서원에서 위대한 선현들의 마음자리를 깨닫곤 헤어날 수 없는 부끄러움에 빠져드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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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록서원 어서루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1. 3. 17:44
학기 말 성적 평가를 마치고


                                                                                                                    조규익
지난 여름의 일. 국가 기관이 발주하는 대형 프로젝트의 2차 심사(평가)를 받기 위해 풍광 좋은 어느 지방엘 다녀왔다. 목에 힘이 들어간 평가위원들이 평가 받기 위해 ‘잔뜩 숙이고 들어온’ 우리를 맞았다. 그들의 물음들 마디마디 짜증이 배어 있었지만, 우리는 그들이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점에 짜증이 났었다. 그러나 결코 내색할 수는 없었다. 칼자루를 쥔 그들이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몰라서였다.

결과는 우려했던 대로 ‘꽝’이었지만, 그들이 나중에 보내온 1쪽짜리 심사평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몇 가지 지적들 가운데 단 한 가지만 그런대로 수긍할 수 있었을 뿐, 나머지는 연구 제안서의 기본 내용이나 프로젝트의 취지마저 오독(誤讀)한 결과로 나온 것들이었다.

우리 팀의 어떤 친구는 “프로젝트 신청을 아예 못한 대학이나 냈다가 떨어진 대학의 교수들이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을 것이니, 말하자면 이 분야의 열등생들이 우등생의 보고서를 평가한 셈 아니냐?” 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우리끼리만 분통을 터뜨릴 뿐 이렇다 할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은 우리에겐 앞으로도 ‘먹고 살아야 할 날들’이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그 국가기관을 자극해서는 앞으로 ‘국물도 없을 것’ 아닌가.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남들이 가하는 ‘평가’의 세례 속에 살아왔고, 나 또한 그 평가의 주체가 되어 남들을 괴롭혀 온 게 사실이다. ‘삶 자체가 평가’라 할 만큼 모든 것이 평가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내 모습은 그런 평가들을 거쳐 온 결과라고 할 수 있고, 지금도 끊임없는 평가 속에서 살고 있으니, 앞으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남아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학교나 사회에만 평가가 있는 게 아니다. 가정도 무서운 평가의 현장이다. 어제까지 모범 남편으로 칭송되다가 어느 한 순간 마나님의 눈으로부터 벗어나면 ‘몹쓸 인간’으로 추락된다. 어제까지 존경받는 아버지로 칭송되다가 무슨 문제로 자식들과 언쟁이라도 벌이게 되면 그 순간 여지없이 낙제생으로 급전직하하기 마련이다. 직장에서 지금까지 잘 나가다가 뜻 하지 않게 명퇴라도 당할라치면,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처치 곤란의 애물단지로 전락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이처럼 크게는 대통령 선거에서 작게는 학급의 일일 쪽지시험까지 시험과 평가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일희일비하며 인생을 불태워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평가자는 언제나 잔인하고 피평가자는 대부분 억울하다. 그러나 한 번 평가자라고 영원한 평가자일 수 없고 한 번 피평가자라고 영원한 피평가자는 아닐 것이니, 서로 간에 잔혹한(?) 새디스트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모두의 운명인 셈이다.

20년 넘게 교수생활을 해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것. 내겐 연구도, 강의도 아니다. 바로 학생들에 대한 ‘평가’다. 대학에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성적을 매겨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학사시스템’에 올리게 된다. 교수에 따라 성적을 매기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내 경우 대개 ‘중간고사 40%+기말고사 40%+과제 10%+출석 10%’의 기준을 적용한다.
평가 척도를 좀 더 다양하게 하고 싶지만, 생각만큼 관리가 쉽지 않다. 학기 초에는 ‘잘 가르치고 엄정하게 평가하겠다’는 초심으로 날이 시퍼렇다. 그러나 날이 가면서 학생들의 면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출석 잘 하고 성실하나 학과공부에는 그다지 두각을 보여주지 못하는 그룹(1), 가끔 결석·지각은 하지만 반짝이는 모습을 보이는 그룹(2), 성실하면서 공부도 잘 하는 그룹(3), 극소수의 이도저도 아닌 그룹(4)으로 나뉜다. 요즈음에는 졸업반 학생들도 아래 학년들의 강의에 많이 들어 와 후배들과 경쟁을 하는데, 대개 교수에게 졸업반으로서의 절박감을 각인시킴으로써 후배들보다 우월한 위치를 점하려는 의도도 없지 않은 듯하다.^^
학점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대부분 성실하려고 노력하기 마련이어서 4에 속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편이다. 따라서 1, 2가 대부분이고, 3은 소수다. 그런데 문제는 1, 2에 속하는 친구들도 자신들이 틀림없는 3이라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열심히들 하기도 하지만 이제 마지막 벼랑에 서 있음을 시위하는 4학년들까지 고려에 넣다보면 채점의 곤혹스러움이 여간 아니다. 생각 같아선 모두에게 A를 주고 싶다. 그러나 눈치가 빤한 학교당국이 그걸 모를까. 아예 상대평가로 바꾸어 몇 %이상은 A나 B를 줄 수도 없다. 제한된 %를 초과하면 아예 성적 입력을 할 수 없도록 막아 놓은 것이다.
우리 대학시절만 해도 ‘교수시여, 제발 펑크만 내지 말아 주소서!’ 기도하고 다녔는데, 요즘 학생들은 B를 주면 무척 서운해 하고 C를 주면 아예 원수처럼 대한다.^^ 교수들에게 엄정한 상대평가를 강요하는 학교 당국도 C학점 받은 학생들이 졸업 전에 ‘재수강’을 하여 A나 B를 받을 수 있도록 탈출구를 열어 주고 있으니, 참으로 ‘모순된 현실’이다. ‘학점 인플레’에 대한 대응에서 학교 당국과 교수들 간의 엇박자가 이렇게 심할 수 없다.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성적처리가 끝나면 몇몇 학생들로부터 ‘눈물의 하소연’이 답지한다. 단 1점 때문에 장학금이 날아갔다느니, 다음 학기부터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삭감 당하게 되었다느니, 기업체에 인턴으로 선발되었는데 정식 채용될 기회가 사라졌다느니, 대학원에 진학하려는데 교수님의 학점 때문에 어렵게 되었다느니, 한 번도 지각·결석 없이 그토록 열심히 했는데 설마 이런 학점을 받을지 몰랐다느니 등등  과거 몇년 간 내게 전달된 사연들을 요약하면, 단순하지만 절절하다. 이럴 땐 어딘가로 숨고 싶다.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게 이리도 가슴 아픈 일인지 매 학기 경험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다. 차라리 내가 피평가자의 입장에 설지언정, 다시는 남을 평가하는 자리에 앉고 싶지 않은 심정이기도 하다.

***

오늘도 주인을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번호가 핸드폰에 찍혀있다. 학점 때문에 억울한 어느 학생의 전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이여! 억울해하지 말라. 낮은 학점은 오히려 그대를 한 단계 성숙시킬 수 있는 ‘쓴 약’이 될 수도 있다. 먼 훗날 그 학점 덕분에 좀 더 성숙한 인간으로 남을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니. 대학의 학점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의미가 있는 법이다. 모두가 1등일 수는 없다. 그리고 대학의 학점 1등이 인생의 1등인 것도 아니다. ‘내가 1등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과 분발이 우리의 미래를 좀 더 발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진리 아닌 진리를 깨달아줄 지어다, 사랑하는 학생들이여!
   

                                                   2008. 1. 3.  


연구실에서
고민 많은 백규 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