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0. 2. 6. 17:26

 

 

 

 

                                                                                                                                조규익

 

제가 꾸려가고 있는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의 학술지 <<한국문학과 예술>> 32집이 2019년 12월 31일자로 발간되었습니다. 이번 호는 작년 11월 8일에 소천하신 소재영 교수님 추모호로 꾸며 보았습니다. 그간 국문학계의 어른으로 존경 받아오신 소 교수님은 주지하다시피 숭실대 국어국문학과를 창설하셨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연구소 고문으로 저희들을 이끌어 주셨습니다. 뜻하지 않게 소천하신 점을 너무 슬프게 생각하며, 이번 호에 실은 밝은 표정의 선생님을 사진으로나마 곁에 모시고 선생님께 늘 샘솟는 힘과 지혜를 간구하고자 합니다.

 

 

***

 

 

성오 소재영 선생님을 추모하며

 

 

성오 선생님 !

 

저는 2019년 11월 8일의 날벼락 같은 비보를 잊지 못합니다. 인사동에서 선생님을 모시고 점심을 나눈 6월 6일의 기억이 바로 어제인데, 그토록 참담한 비보를 어떻게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선생님을 보내드리고 나서도 지금껏 꿈인 듯 현실인 듯 종잡을 수 없는 것은 그날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말씀과 보여주신 미소가 너무 청청하셨기 때문입니다. 찻집에서 “우리 아버지는 101세에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며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오신 비결이 선생님의 철저한 자기관리였고,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효심어린 약속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를 자처하며’ 오랜 세월 가까이에서 선생님을 모시던 제가 배운 것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학문적 근면성, 둘째는 대인관계에서의 모나지 않은 인품입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한 곳에서 공부를 마치지 못한 저는 이곳저곳으로 선생님들을 찾아다니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운 좋게도 저는 선생님의 간택을 받아 숭실대학에 자리를 잡았고, 숭실에 오면서 비로소 학문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한 시도 쉬지 않고 책을 읽고 글을 쓰시는 선생님을 뵈며, 겨우 논문 한 편 써놓고는 ‘다 이루었다는 듯’ 드러눕기 일쑤였던 저 스스로를 통렬히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자료를 찾아 전국을 누비시는 모습을 뵈며, 저도 ‘자료 찾아 삼천리’의 모토를 갖게 되었고, 지금도 가끔 전국을 누비곤 합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은 참으로 따뜻하고 원만한 인격을 소유하셨습니다. 열심히만 한다면 누구든 맞아들여 제자로 키워주셨고, 만나는 상대가 누구이든 그의 근기(根機)에 맞추어 도움을 주셨습니다. 국내에는 물론 해외에도 선생님의 학문과 덕망을 존경하고 따르는 학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내심 부러워해 온 세월이 길었습니다. 이렇게 선생님을 흉내 내며, 선생님의 덕으로 지탱해온 지난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효빈(東施效顰)’이란 말처럼 제 미련함으로 선생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저 역시 인생의 석양에 접어들고 말았습니다.

 

성오 선생님 !

이제 논문이나 책을 쓴들 누구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선생님이 안 계신 이곳에서 다시 누구를 표준으로 스스로를 다잡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선생님의 넓으신 가슴이 없는 이곳에서 과연 저희들의 좁은 가슴을 넓혀가며 많은 사람들을 품을 수 있을까요?

 

나침반을 잃고 등대도 없는 거친 바다를 표류하는 저희에게 무언의 힘을 주시고 안식의 항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선생님 계실 때 제대로 배우지 못한 저희들의 게으름과 어리석음을 크게 꾸짖어 주시되, 긍휼히 여기시어 이제라도 바른 길로 인도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세상의 고통을 모두 잊으셨을 그곳에서 편안한 청복 누리시길 가련한 후생들은 빌어드립니다.

 

2019. 12. 31.

 

후학 조규익은 크게 울며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20. 1. 19. 13:02

 

한국문학과예술32집(추모호) 해당부분 발췌.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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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과 예술>> 1집~31집

 

 

벌써 새해의 첫 달도 반이 넘게 지났습니다.

그간 건강들 하셨는지요?

 

바로 어제 <<한국문학과 예술>> 32집이 발간되었다는 보고의 말씀과 함께 논문집 파일을 이메일로 보내 드렸는데, 받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이번 32집은 조촐하게나마 숭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로서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고문을 맡고 계시던 고 소재영 선생님의 추모호로 만들었습니다. 고 소재영 선생님의 학덕이야 여러분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저희는 아직도 선생님께서 불의에 떠나신 일이 사실 같지 않습니다. 거듭 여러분과 함께 고 소재영 선생님의 명복을 빌어드립니다. 소재영 선생님께서는 1998년 정년을 하신 이후에도 계속 저를 성원해 주시다가 2006년 연구소가 설립되면서 고문의 역할까지 맡아 주셨습니다. 틈틈이 학술발표회에서 논문도 발표해주시고 어려움이 생길 경우 지혜도 주시는 등 늘 제 뒤에서 도와 주셨습니다.

 

비록 사무실 한 칸 없는 우리 연구소이지만, 다른 어느 연구소 못지않은 활동들을 펼쳐 왔습니다. 1년에 네 차례 전국 규모의 학술회의를 열어왔고, 1년에 네 번 학술지[<<한국문학과 예술>>]를 발간해 왔습니다. 그리고 틈틈이 소규모 발표∙토론회와 강독 모임 등도 가져 왔습니다. 지금까지 발간한 60여권이 넘는 학술총서∙자료총서∙문예총서 등은 우리 연구소가 기여한 업적들 가운데 가장 빛나는 부분이라 할 것입니다. 이번에 32집으로 발간한 학술지는 몇 해 전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등재지’로 지정되었고, 작년에는 우수한 점수로 ‘등재 자격 유지’의 판정을 받은 바도 있습니다. 학술지를 만드는 일, 만든 학술지를 한국연구재단의 등재지로 승격시키는 일 등이 요즘 학회들이나 연구소들의 최대 난제라는 점은 모두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하나의 학술지가 등재지로 되기 위해서는 ‘일반학술지’로 출발하여 ‘등재후보’의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모두 쉽지 않은 과정들입니다. 학술지를 내는 데 가장 어려운 일은 ‘자격을 갖춘’ 논문들의 조달(調達)입니다. 연구자들의 입장에서 힘들게 쓴 논문을 점수 한 점 받지 못하는 일반학술지에 투고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이젠 등재후보 학술지조차 인정해 주지 않는 학교나 기관들도 많아졌습니다. 등재학술지와 국제학술지에 실린 논문만 인정해주는 것이 새로운 추세로 바뀌면서 등재학술지까지 가는 길은 더욱 험난해진 것입니다. 지인들로부터 서운하다는 불평을 적지 않게 듣는 등 어려움도 많았습니다만, 우리 연구소가 비교적 ‘깐깐하게’ 투고논문들의 질을 관리해 온 덕에 ‘등재 학술지’로서의 권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머지 않아 국제학술지로 도약해야 하는 큰 과제를 안고 있긴 합니다만. 지금까지 걸어 온 노선을 이탈하지 않고 미래 지향적 비전을 놓아버리지만 않는다면, 언젠간 그 과제도 달성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문학 분야의 좋은 연구소 하나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이 제 꿈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만들기는 쉬워도, 그것을 정상(正常) 궤도에 올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을 지난 몇 년 사이에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돈과 주변의 관심입니다. 제 느낌으로 ‘대학 부설 연구소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인 것이 오늘날 대학 운영자들의 인식인 듯합니다. 연구소가 대학 발전을 견인하는 선진국 대학들의 사례는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점입니다. 우리나라의 앞서가는 몇 대학들도 연구소를 훌륭하게 키워 왔고, 그것들이 대학이나 학문 발전의 동력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을 후발 대학들은 반드시 유념해야 하리라 봅니다.

 

***

 

이번에도 우리 연구소 학술지에는 기라성 같은 학자들의 좋은 논문들이 실렸습니다. 그 제목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특집논문: 고전문예의 본질과 미학

 

1. 김동건, 「감동의 전통적 이해를 위한 서설」

 

2. 강기화, 「『중용』의 치중화 사상을 통해 본 동래학춤 비약태의 생명미」

 

3. 유순영, 「사군자화훼수목병풍을 통해 본 석정 이정직의 회화」

 

4. 이상욱, 「K-pop을 활용한 외국인 유학생 전용 고전문학 전공 수업사례 연구-황진이 시조 <동짓달 기나긴 밤을>을 중심으로」

 

일반논문

 

5. Jin, Yongzhen, 「朝鮮時期登科試券及科文硏究動態考述」

 

6. 김성훈, 「최현 문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

 

7. 김지현, 「최현의 『조천일록』 속 유산기(遊山記) 연구」

 

8. 윤세형, 「17세기 초 최현의 사행기록으로 본 요동 정세」

 

9. 이은선, 「한-베 수교 이후 한국 소설에 나타난 베트남 심상지리와 전쟁-관광 연구」

 

10. 주춘홍, 「한국 전쟁기에 중국어로 번역된 이기영의 작품 연구」

 

11. 엄경희, 「백석ㆍ이용악 시에 나타난 노스탤지어의 양상과 ‘고향’의 헤테로토피아」

 

서평

 

1. 박은미, 「백석(白石)으로 읽는 백석(白石)」

 

2. 김지현, 「사치로 바라본 명말 사대부의 문화사」

 

자료해제

 

1. 정영문, 「하회지역 여성들의 놀이현장을 기록한 <화류가>」

 

 

 

앞으로도 우리 연구소와 학술지에 많은 조언과 격려 보내 주시고, 좋은 논문들 많이 투고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2020. 1. 18.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소장 조규익 드림

 

 

Posted by kicho
알림2016. 8. 3. 21:34


 

 

 

 

<<한국문학과 예술>>을 사랑하시는 학문동지 여러분께


그간 댁내 두루 무고하셨는지요?
근래 경험하지 못했던 더위와 싸우시며 연구에 몰두하시느라 고생들이 많으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말복만 지나면 시원해지겠지요?
저는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구 한국문예연구소)의 소장을 맡고 있는 조규익입니다. 늘 논문투고를 간청하는 메일만 드렸으나, 오늘은 좀 가벼운 마음으로 기분 좋은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한국문학과 예술>>이 이번에 ‘등재학술지’로 승격되었습니다. 등재후보학술지로 1년을 지낸 뒤에 받아든 ‘계속평가’의 결과라서 좀 얼떨떨하긴 합니다만. 제대로 하라는 채찍으로 알고, 무겁게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무엇보다 학문동지 여러분께서 좋은 논문도 주시고 기꺼이 심사도 맡아주시는 등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신 덕택이라 생각하고,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희 연구소는 ‘문학과 예술의 융합’을 모토로 2006년 4월에 출범했고, 2008년 3월에 학술지를 창간하여 올해 7월말로 18집이 나왔습니다. 현재는 매년 3회(3월말/7월말/11월말) 발간하고 있으며, 조만간 4회로 늘려볼까 계획 중입니다. 모두 짐작들 하시겠지만, 연구소 10년 세월이 평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돈 벌어오는 연구소에게만 공간과 예산을 지원해주는 것이 대학의 연구소 정책이니, 현재는 한 뼘의 공간도 한 푼의 예산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만간 좋아지리라는 희망으로 ‘고난의 행군’을 이어나가는 중입니다.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겠습니다.

학문동지 여러분께 맨 처음으로 이 소식을 알려드리는 것은 저희 연구소를 더욱 사랑해 주시기를 간청하기 위해서입니다. 저희를 믿고 여러분의 좋은 논문을 기꺼이 맡겨 주시는 일, 저희들의 심사요청이나 토론요청을 기꺼이 수락해 주시는 일, 정기 학술대회에 좋은 발표를 해주시고 참석하시어 경청 해주시는 일, 저희 학술지에 실린 논문들을 많이 거론해주시고 인용해 주시는 일 등입니다. 무리한 부탁을 드리는 것 같습니다만, 여러분께서 적극 도와주셔야 저희 연구소와 학술지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인문학의 쇠락을 절감하면서, ‘솟아날 구멍’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 원래 제가 연구소를 만든 목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힘만 합친다면, 괜찮은 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함께 노력해 보십시다.

여러분의 도움 덕택에 좋은 소식 전해드릴 수 있게 된 점, 거듭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내 연구소려니’ 생각하시며 많은 도움 주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잘못 하는 점이 발견되면, 가차 없이 꾸짖어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조만간 나가게 될 논문공모에 많이 응해 주시고, 올해 안에 갖게 될 하반기 학술대회장에서 여러분을 많이 뵈올 수 있길 기대하며 부실한 인사의 말씀을 줄이고자 합니다. 고맙습니다.

2016. 8. 3.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소장   조규익 드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2. 1. 7. 20:28

길 잃은 교육부, 휘청대는 지식사회

 

                                                                                                                                                     조규익

 

상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우리나라에 피터 드러커가 말한 바와 같은 ‘지식사회’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식이 기술의 혁신이나 정책 결정의 기초가 되는 사회, 지식의 생산이나 응용에 종사하는 이른바 ‘지식노동자’가 힘을 갖고 있는 사회를 지식사회라 하는데, 그 경우의 지식사회는 건전한 양식과 합리성을 대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존재가 지식인들인가? 권력을 잡은 계층이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과연 그 ‘지식’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식이 무한경쟁과 무질서로 혼란한 세상을 살아가는 ‘도구’ 혹은 ‘약삭빠른 처세술’에 지나지 않는다면, 굳이 지식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사실 ‘건전한 양식과 합리성’이란 시민사회의 구성원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인데, 최소한 그것을 바탕으로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연마한 사람들의 집단이어야 지식사회일 수 있다. 그 경우에도 한 사회가 지식사회이려면, 그 지식은 ‘건전한 양식이나 합리성’과 연동(連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우리 사회가 지식사회냐 아니냐를 논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최근 우리의 자화상을 목격한 뒤 하도 어이가 없어 한 마디 하려다 보니 ‘지식사회’라는 단어가 튀어나왔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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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교육부는 98년부터 시작한 ‘학술지 등재’제도를 폐지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제도가 도입될 당시 다양한 학문분야에 많은 학회들이 있었는데, 누구의 발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학회들만 다잡아서 획일화 시키면 학문의 질이 저절로 올라갈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아마도 관변에서 단물을 즐기던 일군의 학자들이 ‘통치적 발상’의 부림을 받아 그런 묘안을 만들어 올렸을 것이다. 사실 학문의 질을 높인다는 취지로 정부가 나서서 학술지의 등급을 매기는 나라는 지금 세상 어디에도 없고, 과거 어느 시대에도 없었을 것이다. 노벨상에 이 분야가 있었다면, 단연 우리나라의 교육부가 단독수상의 영예를 누렸으리라. 오죽 답답했으면 나라가 학문의 질을 높이겠다고 나섰을까 생각하면 지식사회의 한 구석을 차지한다고 착각하는 필자로서 부끄러움을 금할 길 없었고, 지금도 그런 생각에 변함이 없다. 하물며 존경하는 선배 학자들이야 오죽했으랴! 머리 성성한 노학자들이 서류뭉치를 들고 학진의 사무원들 앞에 굽신거리며 ‘등재’의 재가를 받아오면서 희희낙락해온 것이 그동안의 희화(戱畵)였다. 모든 학회의 이름을 ‘○○학회’로 통일해야 한다면서 ‘연구회, 세미나, 포럼’ 등 모임의 다양한 명칭들을 없애버렸고, 참고문헌의 형태, 요약문의 길이, 주제어의 개수 등에까지 일일이 간섭하며 점수를 매기는 ‘웃지 못 할’ 일들이 백주에 벌어지는 것이 이 나라의 지식사회다. 단 몇 년 사이에 수백 수천 개의 학회들이 국군의 날 의장대 정열하듯 정연해졌고, 그 형식요건에 따라 점수가 매겨졌으며, 편의성을 좋아하는 대학들은 얼씨구나 하고 그걸로 업적평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키보드에 교수 이름만 쳐 넣으면 학진의 홈페이지에 연동되어 1년간 발표한 논문이 주르르 흘러나오니 행정적으로 얼마나 편한 일이며, 시비 또한 일어날 일이 없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학진의 규정만 잘 따르면 일반 학회는 등재후보 학회가 되고, 등재후보 학회는 등재학회가 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 규정이라는 것이 형식요건에 그치는 것이라서 사실 심사할 필요도 없는 것을 굳이 심사라는 절차를 만들어 학회 운영진을 애태우는 일들도 허다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어떤 사회인가. 온정으로 똘똘 뭉친 사회다. 서로 품앗이하듯 서로의 학회들을 웬만하면 올려주는 것이 우리네 미풍양속인 것을! 등재(후보) 학회가 되고자 신청한 학회들을 무슨 근거로 탈락시킬 것인가. 자연스레 기본 요건만 갖추면 모두 등재후보, 등재학회로 등극하게 된 것이 그간의 사정이었다. 등재(후보)학회의 경우 웬만하면 학술지 발간비에 학술회의 비용까지 지원해주고 있으니, 그간 한국의 학회들은 학진의 품속에서 꿀맛 같은 세월을 보낸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그 덕에 한국의 학계가 많은 논문을 얻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대학에 입성하려는 학인들 가운데 분야에 따라 한 해에 열편도 넘는 논문들을 발표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고 지금도 학진 등재논문으로 학문적 역량을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학자들이 많으니, 그 점만큼은 놀라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제 한국의 학자들 특히 젊은 학자들이 논문 쓰는 맛을 비로소 보기 시작했다고 힘주어 말하는 분이 있을 정도다. 분명 이 점은 등재 제도가 갖고 있는 기능들 가운데 긍정적인 측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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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그 제도의 문을 닫겠다고 한다. 별 뚜렷한 대안도 없이 13년 동안 한국의 지식사회를 순치(馴致)시켜 온 제도의 막을 아예 내려버리겠다는 것이다. 사실 심사를 엄격하게 하여 등재 학술지로 승격하는 학회의 수를 제한하겠다는 것이 교육부의 초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형식요건이 갖추어져 있는 이상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할 학회들도 없고, 형식요건에 맞는 것들을 내용상의 문제로 퇴짜를 놓을 강심장의 학자들도 없다. 그러니 너무 많은 학회들이 등재의 범주에 들어와 버렸고, 국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교육부와 학계의 일부는 그 탓을 이젠 학자들에게 돌린다. 제도를 만들고 제대로 엄정하게 관리하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은 덮어둔 채 일부 드러나는 문제들만 거론하며 학자들의 ‘양식 없음’ 만 탓한다. 바람직하지 못한 제도를 도입한 것이 원래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분명한 대안도 없이 송두리째 없애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가장 자유로워야 할 학자들의 학문적 생산과 평가, 혹은 학회라는 학문 공동체를 정부의 획일적인 잣대나 틀에 의해 재단하려 한 것은 상식 이하의 처사였다. 그렇다고 이제 겨우 13년 된 제도를 보완해볼 생각은 하지 않고 송두리째 없애겠다는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자행되는 ‘아파트 재건축’만도 못한 하책(下策)이다.

정부에서 내 놓은 안은 올해 10개, 내년에 15개, 내후년에 20개 내외의 학회를 선정하여 매년 1억 5천만원씩 최장 5년간 지원해 ‘세계적인 학술지’로 키우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항상 ‘세계적인~’이란 관형어를 좋아 할까. 학회나 학술지들이 어찌 돈을 퍼붓는다고 단숨에 ‘세계적인 반열’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세계 수준의 대학’을 육성하겠다는 야심으로 천문학적 돈을 퍼부으면서도 거의 실패로 판명되고 있는 ‘WCU(World Class University ; 세계수준의 연구중심대학 육성사업 )’ 제도를 보면서도 다시 ‘세계적인~’이란 관형어를 사용하는 배짱은 과연 어디서 연유된 것인가. 우리 민족의 DNA 때문일까. 1억 5천만 원씩 5년간 특정 학회에 퍼붓는다고 ‘세계적인 학회’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은 과연 누구로부터 나왔을까. 따져 보자. 아무리 큰 학회라 할지라도 1년에 네 번 정도의 학술지를 간행할 것이다. 1회 간행비를 5백만 원으로 잡는다면 학술지 간행에 2천만 원이면 넉넉하고도 남는다. 학술회의를 두 번 한다고 쳐도[매번 국제학술회의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니 매년 한 번씩만 국제학술회의를 한다면] 2천만 원이면 넘칠 정도다. 그렇다면 남는 돈은 회원들의 연구비로 지급할 것인가? 아니면 학회 통장에 적립할 것인가?

10개나 15개의 학회를 선정하는 문제는 그보다 더 심각하다. 학문분야만 따져도 수십에 이를 것인데, 그 정도로 전 분야를 커버할 수 없을 것이다. 잘 나가는 분야가 독점하거나, 상당수의 분야는 한두 개를 배정받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예컨대 필자가 속해 있는 국어국문학[혹은 그것을 포함한 인문학 분야]에 수백의 학회가 있고, 대부분의 회원들은 몇 개의 학회들에 걸쳐 있는데, ‘어떻게 무슨 기준으로’ 한 두 개의 학회를 선정할 것인가. 여기서도 특정 부류의 소수 인사들에 의해 학문 외적인 ‘힘’이 구사될 것은 뻔한 일이다. 온정주의나 연고주의가 정치권 못지않게 판을 치는 곳이 학계인 줄 모르는 것도 아닐 것이고, 기존 정책들의 실패 또한 근원적으로 여기서 연유되었음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다시 그런 부조리와 말썽을 반복하겠다는 발상을 이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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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온당한 일일까.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어떤 제도이든 부작용 없이 안착시키는 것이 현재로서는 가장 바람직하다. 학문의 본질이나 학자들의 자존심에 비추어 볼 때 지금의 ‘등재’ 제도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 그러나 일단 출범하여 10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부작용도 있지만, 긍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다. 부작용을 줄이면서 원래의 취지를 살려가는 쪽으로 보완해가는 것이 나라 전체를 위해 최선이다. 13년을 끌고 가다가 ‘이게 아닌가봐!’ 하고 내팽개칠 일이 아니란 것이다.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다면 보완해 써야 한다. 맘에 안 든다고 내팽개치는 것은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다. 지금 한국의 모든 대학들이 등재 제도에 기대 교수들의 업적을 평가해오고 있는데, 하루아침에 제도 자체를 버린다면 대학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여 또 미래의 결과가 불투명한 시험에 돌입해보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앞으로 한국의 대학사회는 영원히 모르모트의 신세를 벗어날 수 없고, 똑 같은 착오의 고리 또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우선 2014년까지 등재심사를 유예하겠다고 했으니, 그 사이에 제도의 보완책을 마련하면 된다. 현 제도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논문의 질에 대한 평가가 소홀하다는 점일 것이다. 현재도 학회지 별로 개별 논문의 심사를 시행함으로써 질의 평가는 어느 정도 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논문의 인용지수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니, 그 점을 추가하면 된다. 유예기간 4년 동안 학술지의 인용도를 조사하여 통계를 내보는 것이다. 인용도에 따른 순위나 점수를 학술지들에 적용하여 등재[후보] 학술지들을 다시 스크린할 경우 우열이 판명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학술지 전체를 ‘일반학술지-등재후보학술지-등재학술지-선도학술지[가칭]’의 4단계 시스템으로 재편성할 수 있으리라 본다. 선도학술지에 선정된 학회들에는 상당액의 지원금[1억 5천만 원까지 줄 필요는 없다!]을 지원함으로써 국제무대로 발돋움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게 해야 한다. 다만 각 단계마다 ‘진짜로 엄정한 기준’을 마련하여 쉽게 승급할 수 없도록 관리한다면 학회의 질서는 저절로 잡혀 갈 것이다. 이렇게 해야 지금의 제도를 부수지 않고도 보완할 수 있다. 물론 문제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인용도를 새로운 잣대로 채용한다지만, 한국적인 상황에서 그 인용도를 신뢰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젊은 학인들이 논문의 우열과 상관없이 자신의 지도교수나 선후배들의 논문만 인용하는 경우가 많고, 자신이 속한 학회의 학회지만을 인용하게 되는 폐단 또한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폐단은 우리 지식사회가 좀 더 성숙해지면 저절로 사라질 문제일 것이니, 시간적인 여유를 두고 계몽해 나가야 한다. 기득권을 쥐고 있는 메이저 대학 교수들의 의식 개혁이 중요한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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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성숙해지는 만큼 지식사회 또한 휘청대지 말아야 한다. 정권은 바뀔 수 있으나, 정책이나 제도는 쉽게 바뀌지 않아야 한다. 교육제도나 학문정책이 쉽게 바뀌어서는 안 되며, 바뀌더라도 구성원들이 그 변화를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도 연구실에서 밤을 밝혀가며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들과 대학에 채용되기 위해 논문 집필에 매진하는 ‘교수 지망생들’이 있다. ‘진정한 학자라면 학술 평가제도가 어떻게 바뀌든 그게 무슨 문제냐?’라고 질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학자든 그렇지 않은 학자든 모두 ‘제도 속의 구성원들’임을 인정해야 한다. 제도에 의해 유불리(有不利)가 결정되는 생활인들이자 세속적 존재들이란 말이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이참에 제도를 한 번 확 바꿔버릴까?’라는 유혹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럴 경우 떠올려야 할 덕목은 ‘신중함’과 ‘사려 깊음’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정권은 바뀌어도 정책이나 제도는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 지식사회의 구성원들로 하여금 항심(恒心)을 갖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2012. 1. 7.>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