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소식2013.07.18 15:10

 

 
<2007년 카자흐스탄 고려극장 창립 75주년 기념공연 <춘향전>-연합뉴스 2013. 7. 18.>>


<최근 카자흐스탄 고려극장에서 공연된 <춘향전>의 한 장면>


<고려극장의 <심청전> 포스터>
     <소련군 장교 구락부 무대에 출연한 돌린스크시 조선 소인예술단 단원 신동식, 김진화, 노태석, 김해인, 윤상순 등 (1952년 10월 17일 돌린스크시)>


<한인-러시아인 합동예술단> 


<고려극장 창고에 가득 쌓인 연극대본들>

 

 

 

 

조규익 교수,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 출간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 내년이면 이주 150년을 맞는 고려인의 역사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조선 후기 빈곤과 기아를 피해 연해주 등지로 내몰렸고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다시 중앙아시아로 쫓겨갔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며 끊임없이 먹고 살기의 고단함과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이들의 애환을 조금이나마 달래주고 실낱같은 민족정신의 명맥을 이어가게 한 것은 바로 예술이었다.

조규익 숭실대 교수가 펴낸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사)은 독립국가연합(CIS) 지역에 사는 고려인들이 향유했던 공연예술의 텍스트를 통해 이들의 문예미학을 살펴본 책이다.

고려인 사회 대중 공연예술의 두 축은 집단농장과 같은 생산현장이나 일반 대중들 사이에서 활동하던 '소인예술단'과 정부가 관장하던 '전문예술단'이었다.

아마추어 예술집단인 소인예술단은 주로 집단농장에서 증산(增産)을 독려하기 위해 활용됐다. 후렴구는 대부분 공산주의 체제 선전구호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소인예술단에서 활동하던 고려인들은 사회주의 사상을 내용으로 하는 노랫말에 민요를 비롯한 우리 전통노래들의 음곡을 붙여 부르는 방식 등으로 민족 정서의 끈을 놓지 않았다.

대표적인 전문예술단인 고려극장은 193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된 후 카자흐스탄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까지 200편이 넘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구소련의 폭력적인 동화정책 속에 잊혀가는 모국어를 무력하게 바라봐야 했던 지식인과 예술인들은 고려극장의 연극을 통해 박탈감을 보상받으려 했다.

조 교수는 "고된 생산의 현장에서 괴로움을 달래준 동시에 민족적 동질감을 확인시켜준 무명 예술인 집단이 소인예술단이었고 탁월한 예술적 재능으로 민족의 애환을 대신 표출함으로써 고려인들을 정서적으로 결집시킨 것이 전문예술단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중심부, 즉 고국에 다가갈 날만 기다리면 변방, 즉 구소련 지역에서 열심히 자신들의 민족예술을 가꾸어오던 고려인 예술인들은 진정한 민족주의자"라고 평가했다.

 

mihye@yna.co.kr

 

<저작권자(c)연합뉴스>2013/07/18 10:43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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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2013.07.13 15:21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태학총서 42/태학사]이 출간되었다.

 

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독립국가연합) 즉 구소련 지역에 거주해 오는 고려인들의 한글문학을 종합적으로 연구 분석하여 출간한 것이 <<CIS 지역 고려인 사회 소인예술단과 전문예술단의 한글문학>>이다. 구소련 고려인 사회 대중 공연예술의 생산 및 소비 체제는 정부에서 관장하던 전문예술단(혹은 기관)과 함께 각 지역의 꼴호즈나 솝호스 등 생산단위 별 소인예술단들이 담당하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즉 카자흐스탄 극성 꼴호즈의 ‘가야금 가무단’이나 뽈리뜨옫젤 꼴호즈의 ‘청춘 가무단’ 등 꼴호즈를 비롯한 생산현장이나 고려인 일반대중 사이에서 활동하던 비직업적 예술집단이 소인예술단이며, 1932년 원동의 블라디보스톡에 처음으로 세워진 ‘원동변강 조선극장’을 모태로 여러 지역으로의 이전과 개명(改名)의 과정들을 거쳐 1968년 카자흐 공화국 내각 결정에 의해 알마틔로 옮겨져 ‘카자흐스탄 공화국 국립 음악극 고려극장’으로 최종 정착된, 이른바 고려극장이 전문예술단(혹은 기관)이다. 이들 예술단에서 창작⋅공연한 한글 노래들과 드라마 등을 분석하여 주제의식과 문예미학 등을 찾아낸 것이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부 총서: 고려인의 문예미학, 그 정맥을 찾아

 

제2부 소인예술단과 한글문학

 

제1장 소인예술단 국문노래의 존재양상과 이념적 지향

Ⅰ. 생산현장과 소인예술단

Ⅱ. 소인예술단 국문노래의 생산 및 향유방식

Ⅲ. 구소련의 미학과 국문노래들의 주제의식

Ⅳ. 민족적 형식과 대중미학

 

제2장 고려인 노래의 전통노래 수용

Ⅰ. 전통노래와 변이의 당위

Ⅱ. 고려인들의 전통 민요와 변이의 단서

Ⅲ. 지속과 변이, 그리고 문화접변 현상

Ⅳ. 문화접변과 보편정서

 

제3장 고려인의 한글노래와 디아스포라의 정서

Ⅰ. 디아스포라의 존재와 당위

Ⅱ. 디아스포라의 경험과 문학적 형상화

Ⅲ. 디아스포라 의식의 관습성

 

제3부 전문예술단[고려극장]의 한글문학

제1장 고려극장의 존재의미와 가치

Ⅰ. 고려극장과 고려인

Ⅱ. 고려극장의 발자취

Ⅲ. 공연된 연극의 내용과 흐름

Ⅳ. 민족의식, 연극, 고려극장

제2장 고려극장에서 불린 한국어 노래들의 의미

Ⅰ. 전문예술집단으로서의 고려극장

Ⅱ. 가창된 노래들의 텍스트 양상 및 갈래

Ⅲ. 주제의식의 양상

Ⅳ. 고려인 민족예술미학의 메카, 고려극장

 

제3장 고려극장 1세대 극작가 연성용의 희곡과 고전 수용 양상

Ⅰ. 고려극장의 개척자, 연성용

Ⅱ. 예술적 성과에 관한 평가

Ⅲ. 고전의 발견과 재해석 향상

Ⅳ. 고전의 재해석과 변용

 

제4장 극작가 태장춘의 희곡과 역사 수용양상

Ⅰ. 고려극장과 태장춘

Ⅱ. 작품에 대한 당대의 인식과 평가

Ⅲ. 텍스트의 성립과 내용적 짜임

Ⅳ. 작가의식 및 주제

Ⅴ. 연극 미학적 해석의 모범적 선례

 

제5장 한진 희곡의 미학과 문학세계

Ⅰ. ‘새 고려인’으로서의 한진

Ⅱ. 언어와 민족문학, 고려인 문단에 대한 관점

Ⅲ. 주제적 관심과 미학적 성취

Ⅳ. 새로운 연극미학의 수립

 

제6장 한진 희곡의 미학과 문학세계

Ⅰ. 고전을 통한 현실의 해석

Ⅱ. 새로운 인물형의 창조를 통한 봉건체제 비판

Ⅲ. 봉건 착취에 대한 비판과 디아스포라의 정서

Ⅳ. 두 작품의 공시적⋅통시적 위상

Ⅴ. 고전의 해석과 연극미학의 수립

 

제4부 총결: 민족 문예미학으로 피어난 디아스포라의 역정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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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2013.05.06 16:25

 

 

<<사진으로 보는 CIS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사>>를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자료총서 3으로 발간!!!

 

조규익 교수[한국문예연구소 고문]는 김성조⋅김병학 선생과 함께 <<사진으로 보는 CIS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사>>를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자료총서 3으로 발간했다. 이미 <<우리 민족의 숨결, 그곳에 살아 있었네!>>를 학술자료총서 2로, <<경천아일록>>을 학술자료총서1로 펴낸 바 있는 조 교수는 이번의 학술자료총서 3의 귀한 사진자료들을 통해 사할린 동포들이 중앙아시아 등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강제징용 등으로 사할린에 있던 우리 동포들은 일본 패망 후 귀국하지 못한 채 억지로 소련 국민이 되었으며, 그로부터 이들은 각기 살길을 찾아 소련의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70여년 가까운 이산의 고통을 겪다가 1989년에 허용된 사할린 동포 고국방문과 영주귀국 사업으로 1, 2세대의 고령 동포들이 귀국하고는 있으나, 그들에 대한 예우가 흡족치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이들의 과거를 보여줄 만한 각종 자료들도 수집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현실을 감안하여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에서는 현지를 답사하며 이들의 사진자료들을 수집해왔고, 그것들을 연차 계획에 따라 발간하고 있다. 이런 일은 사실 국가에서 나서서 해야 할 작업이지만, 아무도 사진자료의 중요성은 물론 존재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향후 학계가 나서야 할 일이라고 보며, 강호제현의 관심과 도움을 간절히 청한다.

 

 

<<사진으로 보는 CIS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사>>, 지식과 교양, 2013,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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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2.06.07 16:33

 

 

 <1980년대 한진의 모습, 사진제공:김병학> 

                                           <한 율리아와 김병학 선생, 백규 연구실에서>

 

율리아와의 만남

                                                                                                    백규

몇 년 간 중앙아시아 이곳저곳을 헤매던 중, 고려인 극작가 한진을 알게 되었다. 그가 이승을 뜬 지 올해로 19년째. 말년까지 카자흐스탄의 국립고려극장 문예부장을 지낸 그였다. 10여 편의 희곡작품, 19편의 단편소설,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글 등을 오롯이 모아 카자흐스탄에 거주하는 김병학 시인이 정리했고, 내가 꾸려나가는 연구소에서 문예총서의 하나로 펴냈다.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인가. 책을 펴낸 지 얼마 후 국제한인문학회에서 연락이 왔다.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 연구’라는 테마의 국제학술회의에서 기조발제<관련 글 보기>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고려극장에서 활약한 극작가를 중심으로 한다는 부연설명과 함께. 이미 한진의 작품들을 확보해 놓은 터에 마다 할 이유는 없었다. 그 소식을 들은 김병학 선생이 또 하나의 낭보를 보내왔다. 한양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진 선생의 손녀 율리아에게 연락해 두었다는 것. 발표회장에서 그녀를 소개하는 것 자체가 한국의 학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일 수 있지 않겠는가. 그 자체가 멋진 퍼포먼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부지런히 텍스트를 읽었다. 작품을 읽는데, 모르는 사이에 간간 눈물이 흘렀다. 작품들의 행간에서 그의 외로움과 슬픔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갈등과 방황, 현실과의 밀고 당김을 통해 결국 민족을 발견하게 된 그의 집념이 감동적이었다.

한진은 누구인가. 북한의 극작가 한태천과 모친 박성수 사이에서 1931년 태어난 그는 천재였다. 역사와 전통의 광성중학을 2년만에 마치고 평양제일고급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으며, 1948년 김일성 종합대학 노문학부에 입학했다. 거기서 만난 사람이 그의 지도교수이며 훗날 카자흐스탄에서 그의 후견인 역할을 한 정상진이었다. 정상진은 김일성종합대학 노문학부장(1948~1950)과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1952~1955)을 지낸, 당대 굴지의 재사였다. 정상진으로부터 문학원론과 세계문학을 배운 한진과 그의 친구 이진[이경진]은 당시 최고의 수재로 인정을 받던 북한의 꿈나무들이었다. 그러나 6⋅25가 일어나면서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전쟁에 참여했고, 1952년 여름 대학으로 돌아와 외국유학시험을 치르고 유학생 강습소에서 교육을 받은 뒤인 10월 모스크바 영화대학 시나리오 학과에 입학했다. 모스크바에 유학한 조선 최고의 수재들은 그들의 조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로운 그곳의 분위기에 취하면서 비로소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때마침 흐루시쵸프가 등장하여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그런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전쟁 후 김일성은 자신의 개인지배를 강화해 나갈 요량으로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등을 속속 숙청하고 있었다. 마침 당시 연안파로 몰려 파직 당한 모스크바의 북한대사 이상조의 망명 소식은 소련의 심장부에서 자유의 맛을 본 지성인들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고, 한진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몇 고비의 우여곡절을 거쳐  1958년 8월에 망명을 결행했고, 시베리아 바르나울시 TV 방송국 책임편집위원으로 파견되었으며, 그곳에서 러시아 여인 지나이다 이바노브나를 만나 결혼했다. 그 후 카자흐스탄의 크즐오르다로 옮긴 그는 영화사진연구소, 레닌기치 등을 거쳐 고려극장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소설과 희곡창작을 지속한 것은 물론이었다. 고려극장의 극작가로 활동하다가 말년인 1993년 7월 13일 「서울손님」이란 희곡을 미완성으로 남긴 채 그는 잠들었다. [*이상 한진의 전기적인 사실은 김병학의 '한진의 생애와 작품세계', <<한진전집>>(인터북스, 2011) 참조.]

소련 고려인 문단의 최고 비평가 정상진도 인정한 바 있지만, 그는 고려인 문단의 군계일학(群鷄一鶴)이었다. 작품 형상화의 수준에서 여타 작가들은 그를 따라 잡을 수 없었고,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이처럼 소련의 고려인 문단을 통틀어 미학적 차원에서 우리가 건져 올릴만한 작가로 그가 유일하다는 사실이 새삼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진과 러시아 여인 지나이다 이브노브나 사이에 안드레이와 드미트리가 태어났고, 율리아는 안드레이와 러시아 여인 마리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 한진의 손녀 율리아가 러시안의 외모를 갖고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북한 지식층의 자녀로 북한에서 태어나 북한 최고의 교육을 받았고, 전쟁에서 우리를 적으로 삼아 총부리를 들었던 한진. 그러나 넓은 세상에 나와 이념의 허망함과 남녘 동포의 존재를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을 체제 경쟁에서 남쪽의 승리를 입증하는 결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언제나 현실이 이상을 압도한다는 인간세상의 자명한 진리를 보여 준 생생한 사례로 보아야 하는가?

어쨌든, 우리의 품으로 돌아와 자신이 걸어야 할 미래의 길을 진지하게 묻고 있는 그의 손녀 율리아를 바라보며 흐뭇하고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 건, 나 혼자만의 행복한 ‘오버센스’인가? <2012. 6. 7.>

*사진 위는 1980년대 한진의 모습
*사진 아래는 한 율리아와 김병학 선생(백규 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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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2.02.24 17:18

 <1945년 김병화 농장의 김남견과 레 베라 드미트로브나의 결혼식에서 연주하는 소인예술단(취주악단)>

  <2002년 아리랑 극장의 가수 김 막달레나>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내기
                                                                

고려인들의 자취를 찾아 제법 부지런히 돌아다닌 몇 년이었다.
러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키즈스탄⋅벨라루스 등 쉽게 갈 수 없는 나라들의 여러 도시와 마을들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이제 고려인들은 없다!’는 것이 오랜 방랑 끝에 얻은 깨달음이었다. 대체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빛바랜 사진 몇 장과 실실 부서지는 몇 권의 책자들에서나 그들의 모습을 훔쳐 볼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상상 속에서 그려 온 고려인들의 모습은 더 이상 우리 곁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사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마주 앉아 보아도 모습만 같을 뿐, ‘소통할 수 없는’ 타자(他者)로 남아 있을 따름이다.  
엄혹했던 구소련 체제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야 했던 그들이었다. 절망에 갇힌 민족의 탈출구를 공산주의에서 찾고자 그 이념의 고향 소련으로 갔다가 불의의 죽음을 당한 조명희. 그를 추앙하여 문학에 빠져들었다가 22년 간 북극 유형 및 강제노동의 쓰라림과 후유증으로 인생을 마감한 강태수. 그들은 원동으로부터 가축이나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쓰레기처럼 부려진 고려인들의 황당한 집단체험을 극적으로 대변한다.  

오직 내가 원하는 바는
네가 속히 귀여운 아기들의
어머니가 되며
남편의 던지는 웃음에
두터운 정으로 대답하며
또 우리에게만 부족되지 않던
그 무엇으로 보태면서
무한히 행복하기를!
그리고 또 하나는!
너는 나를 “죄인”이라고
절대 부르지 말기를!
이곳은 모두다 시대의
불측한 장난일 줄 알어라
하늘이 아무리 흐린들
네철 내내 비가 내리겠는가.
사납던 징기스한의 무덤은
오늘도 나지지 않으며
로마에 불지르고도
“오, 나의 사랑하는 로마여!” 하고
웨치던 네로의 혼은
이날도 저주의 무쇠 탈 쓰고
아마 지옥에서 헤매리라
악은 백 년 후에도 발각되며
선은 민중의 부르는 노래에
오래오래 담겨진다.

-강태수 <마음 속에 넣어 두었던 글> 중에서


고려시인 강태수는 북극유형이란 마지막 길을 떠나며 자신의 연인에게 다른 사람과 결혼하여 여인으로서의 행복한 삶을 누려 달라고 부탁한다. 동시에 자신의 상황이 ‘시대의 불측한 장난’일 뿐, 자신은 죄인이 아님을 절규한다. ‘하늘이 아무리 흐린들 사계절 내내 비는 내리지 않을 것’이란 확신과 함께 징기스칸 및 네로의 악행을 예로 들었지만, 그가 여기서 언급하고자 한 인물은 징기스칸이나 네로가 결코 아니다. 그가 이들을 통해 암시하고 싶었던 인물은 스탈린이었다. 스탈린 치하에서 강제이주와 북극 유형을 통해 젊음과 사랑을 잃은 그였다. 그러니 그에게 스탈린보다 더 극악한 군주는 없었을 터. ‘저주의 무쇠탈을 쓰고 지옥에서 헤매리라’는 그 저주의 대상은 네로가 아니라 스탈린이었다. 인생의 막바지에서야 시인은 자신이 몸담아 온 공간, 그간 생존을 위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환멸과 증오를 이런 저주로 표출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어찌 조명희나 강태수만 그러했을까.
***
1세대 고려인 한 분을 만나기로 약속하고 날아간 키르기즈스탄. 비쉬켁 국제공항에 도착해 연락하니 그 분은 병원 중환자실에서 오늘 내일 하시는 중이었다. 이처럼 어딜 가도 1세대 고려인을 만나기란 불가능했다. 만날 수 있는 대상은 기껏 2~3세대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은 우리말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우리말을 잃으니 우리 역사를 잃게 되고, 우리 역사를 잃으니 민족의 정체성을 잃게 되며,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니 피차 민족적 동질감을 공유할 수 없었다. 찻집이나 식당에 마주 앉아도 그저 이민족을 만나듯 서로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었다. 절망이었다.
그러다가 산업연수생으로 국내에 들어온 고려인 3~4세들을 만나게 되었다. 작업 현장에서 우리말을 배우며 급속히 민족적 동질감을 회복해가는 그들이 신기했다. 나라 밖에 흩어져 살며 정체성을 상실한 한민족 후손들에게 우리는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가. 그들을 보며 2천년의 지독한 디아스포라를 극복하고 민족 공동체의 강고한 모습을 과시하는 이스라엘 민족이 떠올랐다. 겨우 1~2세기의 디아스포라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체면은 말이 아닐 것이다. 이제 이산(離散)과 유랑(流浪)의 세월을 청산하고 민족 공동체로 거듭 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실수로 포맷 된 컴퓨터 디스크를 복원하듯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DNA에 잠재되어 있는 말과 정신의 씨앗을 움틔우기 위해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해야 한다. 뒤통수에 와 닿는 의심의 눈초리를 무릅쓰면서 이들 나라들을 뒤지고 다니는 것도 혹시 우리 모두의 기억을 되살려 줄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 때문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희미한 의식의 끄나풀이라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 단계에서 당장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민족의 미래를 개척하는 일이다. 개개인의 수명엔 한계가 있지만, 민족의 수명은 영원하다!
***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 내기.
이처럼 화급하면서도 멋진 프로젝트가 또 있을까. 외세의 침탈과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헤맨 디아스포라의 세월을 담담하게 객관화시킬 만큼 우리의 마음과 체력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모두의 관심이다. 나라들 사이에 이념의 장벽은 희미해지고 있지만, 정작 개인들은 이해관계의 장벽을 나날이 공고하게 쌓아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공동체보다 개인의 행복과 이익을 우선하는 개인주의[혹은 이기주의]의 물결은 민족주의를 능가할 정도다. 우리의 과제는 소아(小我)를 넘어 민족의 어제와 오늘을 발판으로 바람직한 내일을 건설하는 일이다. 우리의 기획은 그런 소망으로부터 시작된다. 중앙아시아의 각처에서 고려인들을 만나고 그들로부터 귀한 사진자료들을 구했으며, 그것들을 일일이 디지털 자료로 만들었다. 그것들 가운데 1차적으로 묶은 결과가 바로 이 책이다. 남아있는 자료들을 정리⋅발간함으로써 민족공동체의 기억을 되살려 내는 작업을 계속하기로 한다.
강호 제현의 뜨거운 사랑과 관심을 고대한다.

                               2012. 1. 1.

                                                  한국문예연구소 소장  조규익  

*이 글은 최근에 펴낸 <<사진으로 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사 : 우리 민족의 숨결, 그곳에 살아있었네!>>의 머리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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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소식2012.02.23 17:30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삶에 관한 사진자료집 출간!!!

 

  <발간된 책>

  <우즈벡 지진허 마을의 백산옥 할머니(1909년생)>

  <우즈벡의 프라우다 농장 학교 교사들(1960년대)>

<평양에서.  오른쪽 첫번째가 최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오른쪽 네번째 인물이 김일성(1946년)>



사진으로 보는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이주 및 정착사


     우리 민족의 숨결,
    그곳에 살아 있었네!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자료총서 2
김 이그나트, 김 블라지미르, 조규익 엮음
도서출판 지식과교양, 2012. 3./ 15,000원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지나온 세월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자료집이 ‘숭실대학교 한국문예연구소 학술자료총서 2’로 출간되었다. 숭실대 조규익 교수(한국문예연구소장/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지식인 김 이그나트 및 김 블라지미르 등과 함께 중앙아시아 고려인들[보통사람들로부터 유명인들까지]의 사진들을 수집하여 자료집으로 엮었다. 그동안 이 지역 고려인들에 관한 문서자료들은 꽤 출간되었지만, 두어 건의 작품사진집 이외의 사진자료집이 학술자료총서의 형태로 출간된 것은 처음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머리말 :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내기-조규익
  1부 : 고려인들의 삶
  2부 : 가르침과 배움
  3부 : 일과 일터
  4부 : 고려인 가족
  5부 : 풍속[돌⋅결혼⋅회갑⋅장례]
  6부 : 나라 밖의 북한인들, 북한의 고려인들
  발문 : 우리는 돌아간다-김 블라지미르 씀/오두영 역


 1937년 강제이주 시기[몇몇 경우는 그보다 훨씬 이전의 자료도 있다]부터 최근까지 고려인들의 삶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들을 선별했다는 점에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삶에 관한 어떤 연구서보다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이 책에 실린 사진자료들을 통해 고려인 연구자들이나 그간 고려인들의 삶에 대하여 말로만 들어왔던 일반인들은 고려인들의 생활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편자들은 그간 몇 년 동안 현지의 고려인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그간에 겪은 고초를 들었고, 그들의 선조와 자신들이 남긴 기록들을 수집했으며, 미래의 소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책은 편자인 조규익 교수가 그간 진행해 왔고 앞으로도 계속 진행할 자료정리 작업과 연구 작업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미 확보한 사진자료만 1천 건이 넘기 때문에 기회 닿는 대로 나머지 사진들을 계속 출간하겠다는 것이 조 교수의 생각이다.


 구소련 체제 아래 우리와 단절의 역사를 지속해온 고려인이 우리 품으로 들어오기 시작한지도 벌써 20년이나 되었다. 그러나 그간 우리는 그들을 우리 민족의 일원이 아닌 ‘고려인’으로 타자화(他者化)하는, 잘못을 범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제 우리는 그들을 우리와 동등한 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 들여야 하며, 그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 그들과 우리가 정신적으로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 학술적 차원의 해석이나 연구보다 사진이나 기록물들을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을 우선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조 교수는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워진 ‘민족의 기억’ 살려내기!
이처럼 화급하면서도 멋진 프로젝트가 또 있을까. 외세의 침탈과 거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헤맨 디아스포라의 세월을 담담하게 객관화시킬 만큼 우리의 마음과 체력이 커진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모두의 관심이다. 이산(離散)과 유랑(流浪)의 세월을 청산하고 민족 공동체로 거듭 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실수로 포맷된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복원하듯 ‘지워진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조 교수가 머리말에서 강조한 것처럼 ‘지워진 민족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이런 작업은 계속되어야 하며, 국민적 관심 속에 이런 작업들의 의미와 가치가 강조되어야 하리라 본다. 강호제현의 일독을 기대한다.    

 

Posted by ki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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