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2020. 11. 2. 09:14

 

<<한국문학과 예술>> 제35집을 발간했습니다. 하나의 학술지가 확고히 자리를 잡으려면 70~80호는 발간해야 한다고 보는데, 35집은 이른바 '꺾어지는 홋수'로서 안정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 비로소 진입했음을 의미합니다. 초심(初心)을 유지하며 100호[집]를 훌쩍 넘긴 다수의 학술지들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우리가 그런 학술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라도 매 순간 기본을 다질 필요가 있음을 절감합니다.

 '문학과 예술의 융합적 연구가 저희들이 지향하는 목표입니다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과제임을 항상 느낍니다. 무엇보다 제도적·재정적 지원이 지속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지금 학계에서 각종 연구소와 학술단체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는 있지만, 열악한 현실 때문에 내실을 기할 수 없는 것이 큰 문제이고, 우리 연구소 또한 거기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연구소에 '볕드는 날'이 도래하리라는 희망 아래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2006년 한국전통문예연구소로 출범했고, 그 후 한국문예연구소로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로 개명해 오면서 우리의 지향점은 예술작품에서 문학과 예술의 행복한 결합 양상을 분석하여 논리화 시키는 일이었고, 앞으로도 그 지향점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근대 이전의 작품들 가운데는 문학과 예술의 융합체가 비일비재였고, 그런 작품들의 본질을 분석하기 위해서라도 잘 만들어진 도구가 절실한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아직 효율적인 분석도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앞으로 이런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라도 우리 모두 협업(協業)의 정신 아래 활발한 대화의 장을 마련해야 하리라 봅니다. <<한국문학과 예술>>은 그런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드문 학술지입니다.  

 앞으로 더 잘해 보겠습니다. 우리 학술지에 많은 관심 가져 주시고, 적극적인 지도와 편달 또한 아끼지 말아 주시기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20. 11. 2.

                  한국문학과예술연구소   조규익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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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문학과 예술>> 제35집

[‘풍자・오락・죽음: 소설적 담론의 세 양상’ 특집호]

 

 

목차

 

특집논문 : 풍자・오락・죽음: 소설적 담론의 세 양상

 

1. 윤준섭, 조선 후기 화훼류 우언 <리국각매문답(籬菊閣梅問答)> 연구

2. 배정상, 일인칭 시점 딱지본 대중소설 연구

3. 서신혜, 유영모의 죽음철학 시작점으로서의 소설 「귀남과 수남」

4. 박선애, 노년의 고독과 좋은 죽음에 관한 두 시선 - 김기창의 <모나코>와 한승원의 <피플붓다>를 중심으로

 

일반논문

 

5. 한경자, 최승희의 러시아 공연 작품 분석 : 1956~1957 공연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6. 김은혜, 문화예술교육의 맥락에서 인문정신문화와 무용교육의 융합적 접근 모색

7. 성영애, 연산군대(燕山君代) 여악(女樂) 확대정책의 전개양상

8. 임재욱, 새로 발견한 금보 <<南薰舊譜>>의 특징과 자료적 가치

9. 장경우, 강령탈춤 대본의 통시적 변이양상 연구

10. 정영문, <한양가>에 나타난 한양의 놀이문화 연구

11. 강정화, 이광수의 미술비평문 연구

12. 안용희, 자본의 광학과 루저 혁명가 이상

13. 이주미, 조선족 서신을 통해 본 조선족의 경계인 의식과 민족 정체 성 –문화대혁명 이후 한중 수교 전까지의 서신에 나타난 '아리랑'을 중심으로

14. 최미정, <<신대륙>> 여성수필의 공간과 젠더지리

15. 반재유, 경남일보의 삼강의일사 연구

16. 조규익, 고려 말 「신찬태묘악장(新撰太廟樂章)」 연구-텍스트 구성양상과 그 정치・문화적 의미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20. 9. 30. 20:59

터 파기 공사 중 나온 돌에 옥호(屋號)를 새기고...

 

 

  잡답(雜沓)의 메트로폴리스 서울에서 정밀(靜謐)의 공간 에코팜으로!

  드디어 삶의 터전을 옮겼다. 2020년 9월 2일엔 당진의 막내 동생 병원에 10년 가까이 보관해 두었던 책 짐을, 5일엔 서울 아파트의 책들과 살림살이들을, 12일엔 학교 연구실의 책 짐을 각각 실어 나름으로써 세 차례에 걸친 이사의 대장정을 마쳤다. 이제 내 생애 노마드의 천막을 걷어 나귀 등에 싣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에코팜에 뿌리를 내려 살다가 때가 되면 그 옛날의 은자(隱者)들처럼 자취 없이 땅 속으로 스며들 것이다. 올해로 서울 살이 장장 33년째. 서울 안에서 두 번째 이사 후 정착한 1992년으로부터는 28년 만에 서울을 뒤로 하게 된 것이다.

 

   가슴이 후련했고 발걸음은 날 듯이 가벼웠다. 30년을 넘게 살아도 서울은 ‘늘 타향’이었다. 내 집에 살면서도 잠시 세 들어 사는 것처럼 낯설고 불편했다. 문만 열면 가게들과 병원들, 교통수단들이 손에 잡힐 만한 거리에 늘어서 있으니, ‘서울 생활이 불편하다’는 것은 어폐(語弊)가 있는 표현이리라. 그런 차원의 불편이 아니다. 먼 길을 가던 중 잠시 쉬어가려 짐을 내려놓았다가 인파에 휩쓸려 어정세월 30년을 넘긴 지금, 정신을 차려보니 가야 할 길이 까마득하지 않은가. 사람들에 부대끼며 익힌 처세술이나 생존방식 자체의 바탕이 바로 불편 아닌가. 내겐 자성(自性)을 관조(觀照)하지 못한 채 희희낙락 유물론적 편안함에 안주하는, 그 자체가 불편이었다. 그래서 20여 년 전부터 내 나름의 ‘가거지(可居地)’를 물색해 왔다. 그러던 중 8년 전 에코팜을 발견했고, 그간 농사를 지어오다가 드디어 올해 집을 짓게 된 것이다.

   정년 전 한 차례 ‘1년의 연구년’이 남아 있었는데, 그 기회가 바로 올해 주어졌다. 사실은 연구년의 호기(好機)에 일본의 모 대학으로 건너가 그간 진행해 오던 연구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려 했으나, 코로나로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착수한 것이 바로 ‘에코팜에 집짓기’였고, 불안과 초조 속에 6개월 만인 지난 7월 말 완공했으며, 50여일의 장마와 태풍이 휩쓸고 간 이달 초・중순에 이사를 단행하게 된 것이다.

 

   지난 8년간은 이곳의 풍토와 문화에 적응해온 기간이었다. 주민들과의 심리적 거리를 좁혀야 했고, 농촌 친화적인 사고방식도 갖추어야 했다. 잡초를 뽑거나 작은 나무들을 심고 큰 나무들의 가지치기를 하면서 생산의 의미를 체득하게 된 것은 물론, 내가 익혀 온 도회적 사고방식을 송두리째 버릴 수도 있게 되었다.

   땅이 전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이 공간에서 통용되는 삶의 양식도 이해할 수 있었으니, 동 트기 전 잠자리에서 일어나 정안천변을 산책하며 온갖 새들과 고라니들을 만나고, 갈대들 사이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나의 내면을 정비하기 위한 필수적인 일과였다. 동네 어른들을 만나 농사일을 묻는 것은 이 지역의 풍토를 호흡하여 내 육신의 자양분으로 삼기 위한 수양이자 공부였다. 농사일에 관한 대화는 토착민들과의 소통에 절대적인 의미를 갖는다. 땅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체온이 전달되고,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

 

   언젠가 연못을 만들었다. 습기가 많아 늘 물이 질척이는 곳을 파고, 그 곁으로 우회도로를 뚫었으며, 연못 맞은편에 채소밭을 만들었다. 관성지(觀性池)라 명명한 연못을 틈틈이 돌며 내면을 관조하노라면, 복잡하던 마음은 한결 차분해진다. 만들고 보니, ‘화룡점정(畵龍點睛)’이 따로 없다! 미꾸라지 1kg과 손바닥 크기의 보리붕어 다섯 마리를 풀어 놓으니 관성지에 아연 생기가 돌고, 맹꽁이도 개구리들도 덩달아 몰려들어 자리를 잡았다. 잠자리는 알을 뿌리느라 꼬리를 물에 내리기 일쑤이고, 이 동네 길냥이들도 목을 축이며 제 그림자를 내려다보곤 한다. 조만간 이 고을의 진객 백로도 날아 올 것이다. 관성지를 한 바퀴 돌면 채소밭이라, 배추와 무를 바라보며 농부로서의 내 정체성을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채소밭 옆으로 펼쳐진 풀밭에는 3년 전에 심은 30 그루의 소나무가 제법 꼴을 갖추어 가는 중이다. 소나무의 거침없는 기상을 바라보며 에코팜에 들어온 것이 내 생애의 ‘첫 성공사례’임을 실감한다.

 

***

   이해관계의 메커니즘 속에서 늘 불편하던 공간이 서울이었다. 사람 사는 곳이니, 에코팜이라고 어찌 이해관계와 무관하랴. 다만 자연에 몸을 의탁한 이상, 인위(人爲)의 이악스러움을 훨씬 자주 순화시켜갈 수는 있을 것이다.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변해가는 내 모습을 관성지에 비춰보며 자꾸만 흠을 닦아내다 보면, 저 후덕한 무성산의 능선을 닮아가지 않겠는가.

  30년 묵은 짐들의 정리를 가까스로 마무리한 오늘. 조만간 ‘에코팜 찬가’가 나오길 기대하며, 나 자신과 강호의 벗님들께 ‘무성산 에코팜의 약속’을 조용히 상기시키고자 할 따름이다.

 

 

2020. 9. 30.

 

백규

 

 

 

 

관성지(觀性池)
잠시 쉬는 틈에 영빈이와 대화를...

                                                        

서재 안의 연구실
서재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20. 9. 4. 17:31

 

내일은 에코팜으로 이사 가는 날이다.

조금 전 서재를 정리하던 중 미색 봉투 하나가 눈앞에 툭 떨어졌다.

급히 내용물을 꺼내 펼쳤다.

, 깨알 같은 글씨의 정성을 다한 편지였다.

겨우 한 주 남짓 전 블로그에 소개한 제자 홍정현 박사가 학부 시절에 보내 준 편지. 읽다가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따스한 행복감이 전신에 번졌다. 편지라기보다는 다정한 음성이 뚝뚝 떨어지는 녹음테이프같은 것이었다. 스승의 날을 며칠 앞두고 보낸, 정감 넘치는 편지였다.

 

2000년이면 그녀가 학부 3학년 때였으리라. 매사에 허점이 많은 내가 어찌 그녀의 편지를 이렇게 고이 간직하고 있었을까. 어쩌면 이 편지를 받고 고마운 마음에 무엇으로라도 그녀를 상찬(賞讚)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의 내 장기(長技)대로 깜빡 잊어버린 채 오늘날까지 밀려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않은가. 825일에 나는 그녀로부터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소식을 이메일로 받고, 감동의 마음을 블로그에 올린 바 있었다. 그로부터 겨우 열흘이 지난 오늘. 30여년이나 묵은 서재의 종이뭉치와 책 더미들을 간신히 정리하던 중이었는데, 흡사 교수님 저 여기 있어요!’하는 외침이라도 내뱉듯 생생하게 내 눈 앞에 현신한 그녀의 편지였다.

 

세월의 여울에 떠밀려 오는 동안, 편지를 받은 사실도 그 내용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다시 읽어보니 그녀의 나직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가 오롯이 살아 있었다. 그동안 답답한 종이더미 속에서 용케도 살아 있었구나! 수많은 제자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내는 일을 반복하며 긴 시간을 살아온 나는 졸업축사를 하게 되는 경우 빼놓지 않는 말이 있다.

 

앞으로 10년 후 여러분은 이 사회의 어느 분야에선가 나름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치열한 10년을 보낸 후 나를 찾아와 여러분의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기 바랍니다. 지금 나와 함께 ‘10년 후 재회의 약속을 합시다!”

 

그녀가 내게 보낸 편지를 20년 만에 다시 찾았고, 박사학위를 받은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것은 18년 만이지만. 그게 무슨 문제이랴. 18년 만에 교육학박사가 된 그녀를 만났고, 20년 만에 학부 3학년의 그녀를 재회했으니,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으랴. 내일 이사가 매우 순조로울 것이고 에코팜에서의 삶이 행복할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멋진 조짐'이 아니면, 그 무엇이란 말인가.^^

 

***

 

 

홍정현이 2000512일에 보내준 스승의 날축하 편지

 

 

조규익 교수님께

 

교수님! 안녕하셨어요?

저 홍정현입니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해 죄송해요.

한동안은 시험 때문에 좀 바빴습니다.

교수님께선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몇 번인가 홈페이지에 들렀었는데, 글은 남기지 못했습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홈페이지 제작자가 아드님이더군요.

정말 놀랐어요.

아직 어린 학생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컴퓨터를 잘 다루는 모양이에요.

전 홈페이지 제작의 경지에 오르려면 아직~ 멀었는데 말이에요.

전에 편찮으시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완쾌하셨죠?

항상 건강하셔야 해요.

그러셔야지 지금과 같이 참 학자의 모습으로 연구하실 수 있으시잖아요.

스승의 날을 맞아서, 교수님께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언제나 제게 아버지의 이미지가 되어 주시는 교수님의 배려에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리고요.

든든한 제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교수님 가정에 평화와 사랑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2000512일 금요일

-제자 홍정현 올립니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20. 8. 25. 14:09

 

 

에코팜 농막의 마무리 작업, 풀과의 전쟁, 한없이 밀리고 있는 집필 작업 등으로 심신이 피로한 나날이다. 그것뿐인가. 코로나가 잦아들기는 고사하고 근래 들어 부쩍 치성(熾盛)해지는 양상을 보여주니, 안팎으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게으름 부릴 수는 없는 일.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일어나 신착 이메일을 검색하려니 낯익은 이름 하나가 뜨는 게 아닌가. 홍정현! 아, 오래 전에 졸업한 제자가 보내 온 소식이었다. 잽싸게 메일을 열고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옆에 있는 아내에게 큰 소리로 읽어주니, 그녀도 감동한 듯 울먹거린다.

 

98학번이라? 우리가 미국에 있던 해에 국어국문학과의 새내기로 들어온 그녀였다. 2002년도에 졸업, 올해로 벌써 18년 세월의 강이 흘러내린 것이다. 졸업 후 편입한 춘천교대를 졸업,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40 가까운 나이에 한국교원대에서 석사・박사과정을 마치고, 바로 어제 교육학박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내어머니교사로서의 현실적인 삶을 꾸려 나가며 절치부심 공부에 매진해온 그녀의 쉽지 않았을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내 눈앞에 펼쳐졌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공부하면서 ‘힘들고 외로웠다’는 말의 의미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리라. 아직도 이 땅의 젊은이들 대부분은 세상 사람들의 후진적 편견과 싸워야 한다. 프리미엄 없는 자들이 유형무형의 유산을 갖고 있는 자들과 적어도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엄청나게 고통스런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홍정현 박사. 이제 어엿한 국어교육학박사로서 새로운 출발선에 섰다. ‘한 사람의 삶에서 매 순간은 늘 새로운 출발선’이라는 점. 그건 내 스스로 삶의 경험에서 깨달은 진리다. 다만 어떻게 출발할 것이며 다시 어떤 출발선에 서게 될 것인지는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인간승리의 모범적 사례를 내 제자에게서 확인한 오늘. 그간의 피로가 말끔히 사라졌으니, ‘제자만 못한 선생’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매어야 할 것이다. 홍 박사 만세!^^

 

*첨부: 홍정현이 보내온 메일

 

 

교수님,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인사 드립니다.

저 98학번 홍정현입니다.

너무 오래전이라 교수님께서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2002년에 졸업했으니 벌써 1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졸업 후에 제가 춘천교대로 편입하여 졸업하고,

춘천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세은이와 함께 찾아 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에 처음으로 연락을 드립니다.

뵙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면서도 그 흔한 전화 한 번을 못 드리고

백규서옥에서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그리워하기만 하며 지냈습니다.

 

잘 지내셨지요?

 

저는 춘천에서 3년을 근무하고,

천안에 직장이 있는 사람을 만나 결혼 하면서 천안으로 근무지와 주거지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연년생 남매를 낳아 키우다가

40이 가까운 나이에 청주에 있는 한국교원대학교에서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8월 24일자로 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고 졸업을 하였습니다.

 

논문을 쓰는 인고의 과정 내내

논문이 완성되면 꼭 교수님께 논문 들고 찾아뵙고 싶다는 생각으로 힘든 시간을 버텼습니다.

비록 상황이 좋지 않아 당장 찾아뵙지는 못하겠지만, 졸업하는 날 교수님께 메일로라도 꼭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언젠가 제게,

공부란 할 수 있을 때 다부지게 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멋지게 해냈어야 했는데.... 다부지게 공부할 수 있는 시기를 모두 지나 보내고

부끄럽지만 아이들을 노모께 전적으로 부탁드리고 뒤늦은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어떤 분야를 공부했는지 말씀을 안 드렸네요.

비록 초등교사이지만 문법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교원대 사범대 국어교육학과에서 문법을 전공했습니다.

 

사범대에 속한 대학원이다보니 중등교사들이 많고,

초등교사라는 제 직업이 주는 편견의 굴레가 제게 늘 씌워져있어 서러움도 있었습니다.

저의 열등감인지는 모르겠으나

초등교사이니 국어의 제반 분야를 제대로 알지 못할 거라는 편견이

함께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에게도, 또 일부 교수님들께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시선들에 부딪혀 아플 때마다

"나는 숭실대 국문학과 출신이야."를 마음 속으로 새기며,

또 한편으로는 교수님께서 학문에 쏟으셨던 열정적인 모습과 학문을 대하시던 진지한 자세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교수님,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도록 저의 사표(師表)가 되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 뵙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힘든 시기가 좀 지나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전화를 먼저 드려야 하나 고민을 했는데,

연구실로 불쑥 전화를 드리기가 겸연쩍어 메일을 먼저 올립니다.

 

뵙는 날까지 부디 평안하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20년 8월 24일

 

제자 홍정현 올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20. 7. 7. 15:23

 

                                                                                                                                                                                                                                                                                         조규익

나는 대부분 연구실에서 점심을 혼자 빵으로 때운다. 요즘 시중에는 맛난 빵들을 구워 파는 집들이 제법 많아졌다. 누구네 빵집이 맛있다고 매스미디어에라도 뜰라치면 빵집 주인들은 달려가 냉큼 배워온다고 한다. 그 뿐 아닐 것이다. 젊은이들 중에는 제빵의 달인이 되고자 세계 ‘빵의 나라들’에 유학을 하며 배워오는 모양이다. 10여 년 전 프랑스를 여행할 때 그곳 제빵 학원에 유학 나온 한 젊은이를 만난 적이 있었다. 고생하면서도 빵의 달인이 되려는 의지로 충만한 그가 참으로 경이롭고 존경스러웠다. ‘할 일 없으면 잠이나 처잘 것이지, 그 비싼 돈 들이며 빵 배우러 프랑스에 간단 말이여~?’ 라고 일언지하에 꾸중을 듣던 시대에 태어나 자란 나로서는 참으로 놀라운 만남이었다. 그런 젊은이들이 나이가 들고 자리를 잡으면서 우리네 빵 산업도 세계와 어깨를 겨룰 정도가 된 것 아닐까. 후배 세대가 만드는 그런 빵의 덕을 나는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빵은 두 쪽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여기에 따라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버터, 치즈, 잼, 커피 등이 대중적인 것들이지만, 내 점심상에는 ‘꿀에 잰 마늘’과 ‘매실조림’이 더 오른다. 그리고 즉석에서 쪄낸 계란 한 알로 모자라는 단백질을 보충하곤 한다. 다 먹은 뒤 아무래도 서운하여 나만의 레시피로 제조한 디저트를 꺼낸다. 얇게 썬 완숙 토마토에 올리고당과 매실청을 부어 밀봉한 다음 냉장고에 넣고 1주일간 숙성시킨 음식이다. 점심식사 후 그 중 일부를 덜어 직접 만든 요플레와 아몬드 몇 개를 섞으면 어디 내 놓아도 꿀릴 것 없는 최고의 디저트가 된다.

 

내가 지금 점심을 호화판(?)으로 먹고 지내노라는 자랑을 하기 위해 이 글을 적는 건 결코 아니다. 핵심은 설거지에 있다. 원래 띄엄띄엄 먹던 ‘연구실 혼밥’이 코로나가 창궐하면서는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다양한 음식 용기들을 수용하려면, 가뜩이나 좁은 책상이나 응접탁자가 터질 지경이다. 설거지 거리들이 많은 것도 ‘당근’이다. 밥상이 작든 크든 먹고 나면 설거지는 피할 수 없는 고역이다. 사람들이 내 말을 믿을지 의문이긴 하나, 나는 처음부터 설거지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설거지를 즐긴 지가 꽤 오래 되었다.

사실 혼자 점심을 먹다 보면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이 떠오른다. 주로 당장 해야 할 일들, 누군가가 나에게 던진 실언이나 의도치 않은 실수, 잘 나가던 논문이 봉착한 난관 등등. 많은 것들이 음식과 함께 씹혀 내 안으로 들어온다. 식사가 끝날 무렵 이것들이 뒤엉키면 모색해야 할 방향은 오리무중이 되고 만다. 그 상태에서 주섬주섬 그릇들을 챙겨들고, 각 연구실의 조교나 근로학생들이 설거지하러 오기 전 잽싸게 탕비실로 달려가 설거지에 몰입한다. 내가 경험한 설거지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맛난 음식들에서 이렇게 지저분한 찌꺼기가 나온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만남이나 모임의 끝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둘째, 지저분한 찌꺼기와 때가 시원하게 씻겨나가는 모습을 보면, 식사 도중 떠올랐던 복잡한 상념들이 한꺼번에 정리되면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셋째, 궁극적으로 남들에 대하여 가졌던 서운한 감정이 대부분 물과 함께 씻겨 나가고 그 원인이 나 스스로에게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설거지를 하고 나서 몸과 마음이 가뿐해지는 이유를 요 근래 ‘가만히’ 생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러다가 최근 깨달은 것이 바로 앞에 제시한 세 가지 이유들이다. 물론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이 생각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이 세 가지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나는 왜 이러한 깨달음에 이른 것일까. ‘그릇을 닦는다’는 행위와 ‘마음을 닦는다[수신(修身)]’는 행위 간에는 긴밀한 유사성이 있다.  원래 마음은 객관화될 수  없기 때문에 은유로만 표현될  수  있을  뿐이고, 그 경우 '마음을 닦는다'는 취의(趣意)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릇을 닦는 것’을 유의(喩意)로 끌어왔을 뿐이다. '그릇을 닦는 것'은 행주로 그릇의 때를 빼는 행위이지만,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좋은 말이나 글 혹은 깨달음을 통해 마음 속의 사악함을 정화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둘 사이에는 거리가 있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의미의 탐색작용과 결합작용을 통해 인간은 ‘그릇을 닦는다’는 것과 ‘마음을 닦는다’는 것 사이에 이중적 상상을 통한 은유 관계가 성립됨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유산을 물려받은 나도 그릇을 닦으며 ‘내 마음의 때를 닦아내고 있다’는 ‘수신(修身)’의 본질을 결국 떠올리게 된 것이나 아닐까.

 

어쨌든 ‘혼밥 점심’을 통해 영양소를 섭취하고 세상사를 사색할 뿐 아니라, 그 설거지를 통해 ‘수신’이라는 망외(望外)의 소득까지 올리고 있는 나로서는 이 두 행위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아니 오히려 ‘혼밥 점심시간’이 은근히 기다려지기도 한다.  ‘접시 닦이 알바’를 하던 초창기 미국 유학생들[혹은 그 부인들]이 혹시 이런 생각을 하며 그 고역을 견딘 건 아니었을까 하는 객쩍은 생각까지 하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어쨌든 나는 ‘혼밥 점심과 설거지’가 좋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20. 7. 5. 23:01

백규서옥의 옥호[은사 연민 이가원 선생님의 유작/연민체]

 

 

                                                                                                                     조규익

2020. 6. 30. 무성산 끝자락 조용한 곳에 그동안 내 환상 속에만 존재해 오던 백규서옥을 드디어 실물로 완공했다. 만 5개월 동안의 큰 역사(役事)였다.^^ 50여 년 전 대여섯 살 무렵, 당시 젊은 부모님께서 나무와 흙으로 지으시던 고향집의 추억이 아련히 남아 있는데, 마음속의 그 그림 위에 '내 집'을 덧 지은 것이다.

 

무성산의 용맥(龍脈)이 흘러내려 혈(穴)을 맺은 곳. 그 안온한 곳을 내 최후의 은거처(隱居處)로 삼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간 제법 많은 곳들을 떠돌아다녔고, 정처 없이 그려온 노마드(nomad)의 궤적 속에 내 알량한 내면은 무거운 피로감으로 절어 온 게 사실이다. 마무리해야 할 공부들은 아직도 수두룩한데 세상은 내 뜻처럼 움직여 주지 않고, 내 사고방식이나 삶의 양식은 더 이상 세상의 추이(推移)와 맞지도 않음을 절감한다. 그럴 경우 굴원(屈原)이 그려낸 <어부사(漁父辭)> 속의 어부처럼 방향을 틀어 세상에 맞추거나 조화를 가장한 아부라도 떨어야 마땅한 일이나, 그렇게 하고서야 내 성격에 어찌 단하루인들 맘 편히 살 수 있겠는가. 내가 핍박했고 나를 핍박해온 사회에서 내 불만과 불행의 원인을 찾으려는 게 아니라, 안으로 돌이켜 나를 반성하는 데서 내 자아와 본래 면목을 찾으려는 것이니, 저 석문(釋門)의 이른바 ‘회광반조(廻光返照)’ 정신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내 자아를 다시 찾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허둥대지 않고, 이미 어긋난 세상과 나를 일치시키기 위해 궤변과 아부를 농하려 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애당초의 출발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런 생각으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올해 그 거사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것은 학교로부터 받은 마지막 연구년 덕이었다. 그러나 일을 시작한지 몇 발짝 만에 코로나 바이러스가 세계를 강타했다.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집을 짓는 일’이 난감했고 남 보기에도 미안했지만, 내친걸음을 돌이킬 수 없었던 것은 ‘원래의 나로 돌아가는 일’은 대안 없는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나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가족들을 태운 채 달리던 내 차의 핸들을 급히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고, 어려운 시기 잠시라도 내게 와서 자신의 기술을 제공하겠다고 나선 장인(匠人)들의 모습이 너무 안타깝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공사 기간 동안 참으로 성실하고 실력 출중하며 성격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담건축사사무소 남궁 담 대표, 임전수 감리사, 김병호 대목장(大木匠), 천명선・이종식・양승만・김수남・김창례 목장(木匠), 이재필 전기장(電氣匠), 고현용 조적장(組積匠), 상량문을 써 주신 서예가 우공(愚工) 이일권 선생, 나를 대신하여 모든 관리업무를 총괄해주신 유수근 사장 등 각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들과, 레미콘・타일・벽돌・기와・철근・창호・각종 장식 돌・각종 건재・중장비・미장・설비・용접・난방・목공・페인트 등을 제공한 거래처와 도움을 아끼지 않으신 전문가들의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단계마다 노역을 제공해주신 분들의 이름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그 뿐인가. 안정적인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전봇대를 세우고 전선을 이어주신 전력회사 직원들과 엔지니어들, 인력들의 맛있는 점심을 늘 시간에 맞게 제공함으로써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해주신 부흥식당 정연희 사장도 잊을 수 없다.

 

백규서옥의 기념 동판

 

백규서옥을 지으며, ‘집을 짓는 일’이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영혼을 일깨우는 종합예술임을 알게 되었다. 건축주와 장인들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재료들에 숨결을 불어넣고, 그 숨결이 음표로 바뀌어 생명을 노래하고 춤추는 마술임을 알게 되었다. ‘집을 짓는다’는 건 자기만의 세계와 자아의 존립근거를 마련하는 일이다. 집이 없으면 정주(定住)할 수 없고, 정주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과 공존할 수 없으며, 자신의 변함없는 존재를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동안 백규서옥은 내 환상 속에만 존재해 왔다. 은사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선생님께서 내려주신 이 옥호(屋號)의 이면에는 이상을 품고 노력하여 그것을 현실 속에서 구현해보라는 지엄한 명령이 들어있다. 시류(時流)에 영합하여 세상 사람들과 이해를 다투지 말고, 자신의 흠결을 갈아내기 위해 수양할 것이며, 항상 근원을 추탐(推探)하여 내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보라는 것이 그 명령의 핵심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조용한 곳에서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통해 자아의 본래면목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세상의 극심한 혼란 속에서 건축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것이 ‘무성산 백규서옥 건축’의 정신적 바탕이다. 바야흐로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되었다.

 

정면에서 바라본 백규서옥

 

백규서옥 문앞에서 백규

 

 

백규서옥 기념동판 앞에서 포즈를 취한 관계자들[왼쪽부터 임미숙・임효수・대목장 김병호・백규・총관리 유수근・목장 이종식・전기장 이재필・목장 김창례. 중앙에 유 사장의 상추도 함께 했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