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0. 8. 15. 23:42
역사, 이젠 제대로 가르치자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CIS(독립국가연합) 등에서 만나는 해외동포 3~4세들의 공통점은 대부분 우리말을 모르고, 우리의 역사를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말을 모르니 우리의 역사를 알 수 없고, 우리의 역사를 모르니 그들과 함께 민족 정체성을 공유할 수가 없다. 다민족 국가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그들이 고국의 말과 역사조차 모르는 처지에 고국에서 온 동포를 ‘동포 아닌 제3국인’ 혹은 그들과 공존하는 ‘타민족’ 정도로 인식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원래 이민지와 고국의 사이에서 방황하는 ‘경계인’으로 머물러 온 그들이 이제는 그런 중간자적 인식마저 상실하고 대책 없는 미아(迷兒)로 떠돌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그런 현상을 해외의 동포들에게서만 발견하는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 태어나고 자란 신세대들이 겪는 ‘민족 정체성의 위기’는 더욱 우려스럽게 심화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바로 철학 없는 기성세대나 나라를 경영한다는 지도층이 무사려(無思慮)하게 지향해온 ‘세계화’의 비극적 소산이다. 든든한 경제나 국방만이 세계의 복판에서 한 나라를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어주는 유일한 발판은 아니다.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을 경우 한갓 ‘경제동물’에 불과한 인간이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기인식’을 갖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의 우리처럼 어려서부터 영어에만 몰입하게 하고 역사나 민족문화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새로운 세대들은 스스로 ‘세계시민’의 착각 속에 빠져들고 만다. 각자의 개별성과 독자성을 투철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바람직한 세계시민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때 늦은 감은 있으나, 최근 교육과학기술부가 ‘독도 교육을 강화하는 내용의 교육과정’을 발표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독도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면서도 자라나는 세대에게 그 이유나 역사적 당위성을 설명해주지 못한다면, 조만간 우리는 제 땅마저 지키지 못하는 한심한 민족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일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억지를 역사 교과서에 반영하여 가르쳐 오고 있으며, 중국 또한 ‘동북공정’이라는 해괴한 명칭으로 역사의 날조에 동참했다. ‘날조된 역사’를 당당하게 교육시키는 그들의 심리 저변에는 그것이 자라나는 세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경우 미래는 그 방향으로 되어갈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들어 있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긴 시간이 지나 날조된 역사가 역사의 한 부분으로 정착되었으면’ 하는 헛된 소망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날조된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분명한 죄악이지만, 제대로 된 역사마저 가르치지 않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분명한 직무유기이니 그것 또한 죄악이다.

우리의 편견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바로 지금’만이 가장 중요하며, 그것은 과거나 미래와 무관하다는 생각이다. 거기서 역사나 민족문화에 대한 몰각(沒覺)은 비롯되기 때문이다. 과거는 현재의 빛에 비쳐졌을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으며, 현재는 과거의 조명 속에서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고 역사 철학자 E.H.카아는 역설했다. 과거사회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현대사회를 잘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재의 원인은 과거에 있으며, 미래의 원인은 현재에 있다. 주변의 타민족, 타 국가들과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적 관계를 정확히 분석하고 우리의 이익을 수호하려면 원인으로서의 과거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러려면 역사에 대한 연구와 교육은 무엇보다 긴요하다. 사실 우리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않고 있는 것이 독도만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에 걸쳐 지속되고 있는 문학, 역사, 철학 등 전통인문학의 핵심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서 신세대를 국제 미아로 만들고 있는 점은 기성세대들이 직시해야 할 문제적 현실이다. 경제와 군사, 문화면으로 세계 최강을 자부하는 일본이나 중국이 이 시점에 왜 ‘역사의 날조’와 ‘날조된 역사의 교육’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지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이들에 비해 한참 늦었지만, 우리도 ‘제대로 된’ 역사교육에 나서야 한다. 그것만이 민족의 미래를 담보할, ‘멀지만 확실한’ 길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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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7. 19. 10:28

소부⋅허유, 그리고 태공망


허유(許由)는 천하나 구주(九州)를 맡아달라는 요임금의 제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생각하여 흐르는 영수(潁水)에 자신의 귀를 씻었다. 그 모습을 본 소부(巢父)는 허유가 은자(隱者)라는 소문을 냄으로써 명성을 얻게 된 점을 비판하고, 자신의 망아지에게 허유가 귀 씻은 물을 먹일 수 없다하여 망아지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 버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한 사람이 태공망(太公望)이다. 주나라 문왕이 위수(渭水)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던 여상(呂尙)을 발탁했으니, 그가 바로 태공망이다. 그는 문왕의 초빙을 받아 왕의 스승이 되었고, 무왕을 도와 상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한 인물이다.


 최근 대통령은 지방선거의 결과로 나타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청와대 안의 인물들을 바꾸었고, 조만간 내각도 개편할 것이다. 어느 나라나 비슷하겠으나, 특별히 연줄의 문화가 강한 곳이 우리나라다. 연줄 즉 혈연, 지연, 학연은 지금도 인사철만 되면 힘을 발휘한다. 연줄이 닿는 범위 안에 출중한 인사들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연줄은 본질적으로 제한적이기 때문에 그 범위를 벗어나는 곳에 방치된 인사들은 더 많다.

 
 이왕이면 ‘내 부류의 사람을 써야 한다’는 고질적인 인습 탓에, 인사철을 앞두고 ‘이런 저런 면에서 촉망 받는 인사들’은 임명권자와 연결되는 줄을 찾아 헤맨다. 인사철만 되면 임명권자로부터 부름이 올까 전화통 앞에 붙어 앉아 있는 캐리커츄어(caricature)들이 약방의 감초 격으로 언론에 등장하곤 하던 것이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의 일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청와대 고위직의 제의를 거절한 유진룡 전 차관의 경우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현 정권에서 제의하는 고위직을 마다하는 모습을 보며, 지난 정권에서 자신의 자리를 걸고 윗선의 청탁을 막아 낸 결기가 가식이 아니었음을 국민들은 깨닫게 되었다. 자리의 성격이나 자신의 능력을 따지지도 않고 덤벼드는 사람들과 달리 ‘그 자리가 자신에게 맞지 않다’거나 ‘정치할 생각은 없다’고 간략하게 잘라내는 어조에서 사람들은 일종의 ‘멋스러움’을 읽어낸 것이다. 허유나 소부의 현대적 버전이라고나 할까.

 
 현재 ‘세종시’ 건으로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정운찬 총리 또한 임명 당시 여러 차례 고사(固辭)하는 바람에 임명권자의 애를 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중한 능력과 비전으로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그의 입장에서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직에 나아가 최선을 다했다. 제의를 거절한 사람이나 제의에 응하여 직에 나아간 사람이나 이런 경우들은 인재 발탁과 등용의 좋은 사례로 기록될 수 있다.

 
 사실 특정한 직에 쓰일 만한 세상의 현자들은 대체로 허유나 소부, 혹은 태공망에 속하고, 현자를 자처하는 나머지 부류는 직책의 명예만을 탐한다고 보면 정확하다. 그러나 능력과 비전을 갖고 있음에도 모두 소부나 허유의 입장만을 고수한다면, 책임 있는 태도라고 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나서서 세상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데, 무조건 거부하는 것은 세상을 향한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태공망은 요즈음의 상황에 걸맞은 인재다.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지만, 탁월한 재능과 비전에 도덕성까지 갖춘다면 세상을 다스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재다.

 
 연줄을 동원하여 등용되기를 도모하는 것보다 실력을 갖추고 조용히 기회를 기다리는 일이야말로 도덕적 행위 그 자체다. 사실 연줄을 동원하는 것은 재능이나 비전이 남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임명권자가 연줄을 통해 사람을 발탁하려 한다면, 그 역시 인물의 능력이나 비전보다 끼리끼리 무리 짓고자 하는 현실적 욕망 때문이다. 연줄로 인재를 등용했을 경우 일을 그르친 후에 책임을 물을 데가 없다. ‘인재가 없다’고 한탄하는 임명권자는 대부분 자신의 시야가 연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함을 스스로 드러낸다. 세상은 좁아도 연줄의 구속을 벗어나기만 하면 한 나라의 살림이나 한 부서의 책임을 맡길 만한 인재들이 제법 많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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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5. 24. 08:50

유세(遊說) 유감 

 

6월 2일의 지방선거 투표일이 한 주일 남짓 남았다. 전국적으로 유세가 시작되어 온갖 말들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선거판에서 후보들이 내뱉는 대부분의 말들은 공수표(空手票)였다. 뻔히 거짓인줄 알면서도 들어주는 것이 순박한 민심이다. 상당수 유권자들은 후보들의 말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를 굳이 따지는 일이야말로 부질없다고 생각한다. 일단 사람의 입을 통해서 빠져나온 말은 들어줄 사람의 귀를 선택하지 않는다. 감언이든 진실이든, 그들은 자신들의 말을 퍼부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행위를 ‘유세’라고 착각한다. 

유세란 후보자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정당의 주장을 선전하며 돌아다니는 행위다. ‘유(遊)’는 각처를 돌아다닌다는 뜻이고, ‘세(說)’는 상대방을 설득한다는 뜻인데, 원래 중국에서 나온 말이다. 과거제도가 생기기 전 각지의 현인(賢人)들은 등용되어 자신의 생각을 정치에 반영시킬 목적으로 제후들을 찾아다녔다. 지금은 어떤 문제에 대하여 현책(賢策)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각종 연줄들을 동원하거나 언론매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국정의 책임자로부터 발탁될 기회를 노리기도 하지만, 그 옛날에는 직접 제후들을 만나 자신의 생각을 설득하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공자는 56세부터 14년간 제자들과 함께 천하를 주유(周遊)하며 각국의 제후들을 만나 유세를 펼쳤으나, 끝내 뜻을 관철하지 못한 채 고향에 돌아가 후진들의 교육에 전념했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허둥대며 돌아다니는가? 말재주를 부리고 있지는 않는가?”라고, 유세 도중 만난 미생묘(微生畝)는 공자에게 모욕에 가까운 언사를 던졌다. 그러자 공자는 “감히 말재주를 부리는 것은 아니고, 완고함을 미워하는 것입니다.”[논어- 헌문편]라고 대답했다. 미생묘는 공자의 유세에 혐의의 눈길을 보냈고, 그에 대해 공자는 ‘세상이 바뀌고 있는데, 완고한 제후들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고 비판한 것이다. 공자는 “법률과 형벌로 백성을 다스리면, 백성들은 법망을 피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예로써 다스리면 부끄러워하여 바로잡힐 것”[위정편]이라 설파했으며, 계강자(季康子)란 대부가 도둑을 근심하자 “그대가 도둑질을 하지 않는다면 설사 국민들에게 상을 준다 해도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안연편]이라고 일갈했다. 말하자면 공자의 유세는 감언이설의 말재주가 아니라 좋은 정치에 관한 강의였던 셈이다. 공자가 보기에 제후들이 세상의 변화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아집에 사로잡혀 백성들을 올바로 이끌지 못하는 것이 광정(匡正)해야 할 당시의 문제적 현실이었다. 그래서 노구를 이끌고 천하를 주유하며 유세에 나선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유세하고 다닌 목적은 벼슬자리나 녹봉(祿俸)에 있지 않았다. 부와 권력을 탐해서가 아니라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할 목적으로 제후들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 나선 길이었다. 그러나 그런 포부가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고향에 돌아가 후진들의 교육에 남은 생을 바침으로써 유세의 참뜻을 후세에 남겨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설득의 대상이 제후 한 사람에서 다수의 주민들로 바뀌었을 뿐 지금도 유세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제후가 정치의 주체였으나, 지금은 주민들이 정치의 주체이자 대상이다. 그 당시 공자가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만 내뱉었다면, 어디서든 벼슬 한 자리 정도는 쉽게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누구를 만나든 진심을 말하고자 했다. 진심으로 상대방을 설득하여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참된 의미의 유세다. 잔뜩 화장한 얼굴로 선거판에 등장하여 실현시킬 수 없는 약속들이나 남발하며 한 표를 호소하는 감언이설에 넘어갈 유권자는 이제 거의 없다. 지방정치는 나라 전체의 정치를 든든히 세워주는 바탕이다. 지방정치를 식물의 생태계에 비유하여 풀뿌리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바야흐로 유세장의 소음이 나라 전체를 들썩거리게 하지만, 유세의 참뜻이 진심과 겸손에 있음을 아는 후보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게 유권자 대부분의 생각이다.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인문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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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4. 26. 10:43

장관의 탄식 

 

최근 기획재정부 윤증현 장관은 ‘지식의 빈곤을 절감한다’, ‘세계의 중심이 되기에 우리의 지식수준은 어림없고, 너무나 모자라다’는 요지의 한탄을 기자들에게 털어놓았다. 자존심을 생각한다면, 한 나라의 경제수장으로서 쉽게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래서 그의 말은 그간 세계의 중심으로 떠올랐다고 목에 힘을 주던 국민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폭탄선언’이기도 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제회의에 자주 참석, 선진국의 경제계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던 그였다. 그들의 대화에는 예술이나 문화 등 폭 넓은 교양에서 전문적인 경제정책까지 두루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객관적인 면에서 윤장관의 소양을 의심할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해외 유수의 대학에서 공부를 했고, 재무부와 재정경제원의 요직들을 두루 역임했으며 금융감독원장을 거쳐 이 정부에서 기획재정부 장관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는 그 스스로가 ‘무식함’을 토로했다면, 그 고백 속에는 우리의 문제적 현실을 아프게 지적하려는 복합심리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아는 게 없는 것이 ‘무식’이고, 지혜롭지 못한 것이 ‘무지’다.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도 지혜롭지 못할 수 있고, 배운 게 없어도 지혜로울 수 있다. 따라서 그의 말은 우리의 교육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강하게 요구한다.

  우리나라 학생들은 하루 중 밥 먹고 쉬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를 깡그리 배움에 쏟아 붓는다. 그런 지옥 같은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 중 일부가 엔진역할을 하며 이끌어가는 게 우리나라다. 그런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윤장관이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고 일갈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자녀교육에 열성인 나라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우리나라만큼 공교육, 사교육에 많은 재원을 투입하는 나라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국격(國格)의 향상’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모두가 무식하다면 무언가 잘못되었음에 틀림없다. 육체적, 심리적으로 심한 압박을 받을 정도로 아이들이 공부에 몰두해온 것이 우리의 현실임에도 그 결과가 ‘무식’이라면, 우리는 대체 공교육과 사교육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고 배웠단 말인가.

  현재 유치원부터 중등학교까지의 교육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준비 단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듯 ‘중등학교는 대학에 골인하기 위한 관문’에 불과하다. 따라서 ‘좋은 인간’을 만드는 것보다 좋은 대학을 가는 것이 학교 당국이나 학부모 모두의 유일한 목표일 수밖에 없다. ‘폭 넓은 교양과 훌륭한 인성의 바탕 위에 지식을 쌓는 것’이 교육의 보편적인 목표라면, 바탕을 도외시한 채 도구로서의 지식 획득에만 주력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일단 대학만 들어가면 그런 바탕은 저절로 마련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필수 영양소처럼 인간 성장의 단계마다 필요한 것이 교양교육과 인성교육인데, 우리는 대학에 들어가서 한꺼번에 그런 영양소들을 공급해도 되는 것처럼 착각한다. 아이들의 교육실조(失調)가 대학에 들어왔다고 치유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스스로 찾아서 공부할 수 있는 훈련을 받지 못한 아이들, 입시에만 초점을 맞추어 요령껏 자라온 아이들이 대학에 적응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국가나 사회가 아닌 학생들이 수요자라고 착각하는 대학들은 그들 나름의 생존법을 강구하고 애를 쓴다. 학생들의 마음이 떠나가면 대학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수들로 하여금 거친 지식을 ‘말랑말랑하게 씹어서’ 학생들의 입속에 넣어 주길 요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걸 대학들은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라고 강변한다. 그런 대학들이 학생들에게 어린 시절 받지 못한 예술이나 교양교육을 제대로 시켜 줄 리 없고, 학생들 또한 부족한 영양소를 스스로 찾아서 보충할 리는 더더욱 없다. 지금처럼 교수들이 입으로 잘근잘근 씹어준 전공지식을 간신히 받아먹고 자란 학생들이 졸업 후 사회의 중추를 이룰 때, 우리들의 입에서 ‘우리는 무식하다’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무식함에 대한 자성을 많이 할수록 상황이 개선될 가능성은 크겠지만, 국민들 스스로가 무식하다는 사실 조차도 알지 못하는 것이 지금 우리나라의 심각한 문제다.

  조규익(숭실대 교수/인문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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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4. 2. 11:27

한국 대학들의 ‘냄비근성’

 

 

최근 교육부는 업적평가에서 논문의 수보다 질을 중시하고 융복합 연구에 가산점을 주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얼마 전에는 ‘강의 잘 하는 대학들’에 많은 돈을 지원하겠다는 정책도 내놓았다. 그에 따라 대학들은 학생들의 교수평가 점수를 공개한다거나 좋은 점수를 받은 교수들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하기도 한다. 이제 대학도 ‘논문보다는 강의’를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는 느낌을 줄 정도다. ‘강의 잘 하기 경쟁’을 통해 교수들에게 돈을 지급하겠다는 것인데, 얼핏 그럴 듯해 보이지만 곰곰 따지고 보면 대학에 대한 곱지 않은 편견이 그 속에는 들어있다.

  인센티브를 주건 안 주건 대학의 목표는 ‘잘 가르치는 일’이었고, 그 점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더구나 대학 존립근거의 두 축은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어느 한 쪽을 헐어서 다른 한 쪽을 보충할 수 있는 행위들도 결코 아니다. ‘교수의 연구업적과 강의평가점수가 반비례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도 아닌데, 연구에 들이는 품을 강의준비에 돌리는 게 좋다는 암시를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열심히 하는 연구가 좋은 강의로 연결된다’는 사고에 익숙한 교수들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다.

  최근 대학사회를 둘러싼 움직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학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가고 있다. 대학의 개혁이 교수개혁이며, 교수개혁을 위해서는 교수들을 엄정한 잣대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은 지당한 논리다. 그런데 한국의 대학들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기결정권’을 가져본 적이 없는 점은 비극이다. 정치적 자유가 크게 신장되었다고 하는 참여정부를 거쳐 현 정부에 접어들었어도 대학들은 타율과 통제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도한 교육열 등 사회적 현실을 이유로 대학들을 타율의 터널에 가두어두고자 하면서도 대학정신의 발현을 요구하는 것이 우리 사회다. 학문의 균형 발전을 고창(高唱)하다가 새삼 ‘경쟁’을 들고 나선 일, 논문쓰기 경쟁을 시키다가 교육부가 돈을 제시하자 ‘논문보다는 강의’라는 팻말을 들고 나선 일, 논문의 수를 중시하다가 제대로 계량할 잣대의 마련도 없이 질을 중시하겠다고 나선 일 등은 외부적 여건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우리 대학사회의 ‘냄비근성’일 뿐이다.

  독일의 철학자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가 대학의 원리로 제시한 ‘자유와 고독’을 우리도 한때는 신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대학을 ‘실용적인 목적을 초월한 자기 도야의 공간’이라거나 ‘자유로운 학문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지는 이상 공간’으로 인식하는 사람은 이제 대학 안에도 없다. 시장주의나 효율성이 만능의 잣대로 활용되는 현실이 신자유주의라는 탈을 쓰고 대학의 공간을 장악하게 된 오늘날이다.

  그러나 시장이란 늘 바뀌는 곳이다. 같은 물건이라도 어제의 값과 오늘의 값이 다르고, 사람들의 이목은 보다 높은 값의 물건에 쏠릴 수밖에 없다. 사실 경조부박(輕佻浮薄)한 세상의 논리일 뿐, 더 이상 사람들이 믿고 따를 만한 이정표가 될 수 없는 것이 시장의 논리다. 이에 비해 인간의 삶터는 잠시 흔들림이 있다 해도 변함없이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는 공간이다. 세상의 일부인 시장의 원리를 흡사 삶의 원리인 듯 내세운다면, 사람들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공동체는 표류하게 된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대학의 줏대만큼은 바꾸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조규익(숭실대 교수/인문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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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칼럼/단상2010. 3. 29. 08:57

지도층의 막말, 떨어지는 국격(國格)

 

전 방송문화진흥원 이사장이 ‘막말’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 데 이어,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도 여성과 관련된 ‘사려 깊지 못한 말’로 공개사과를 해야 했고, 집권당 대표는 특정 종교에 대한 압력의 말을 했느냐 안 했느냐의 여부로 구설에 휩싸여 있다. 이들 뿐 아니라 최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말실수가 잊을 만하면 한 번 씩 언론에 등장하곤 한다. 방송이나 통신, 혹은 입법으로 국민들의 일상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지도층 인사들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말은 우리나라 국격(國格)의 현주소에 시사하는 점이 크다.

  이 사건들이 공통적으로 야기시킨 문제는 지도층의 말이 갖추어야 하는 품격과 진실성에 대한 회의(懷疑), 그리고 국가 행정이나 정책에 대한 불신이다. 거짓이나 가식에서 결코 품격이 나타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품격의 바탕은 진실성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통용되고 있는 품격의 뜻은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품위’ 등으로 요약된다. 그 설명들의 핵심은 ‘바탕과 품위’다.

 예컨대, 금속공업 분야에서 쓰이는 품위란 말은 지금(地金)의 순도를 나타내는 용어다. 완벽한 상태인 100에서 불순물의 수치를 뺀 것이 그 금속의 품위라는 것이다. 인간도 태어날 당시엔 가장 순수하고 깨끗하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각종 불순물이 인간의 내면에 끼게 되는데, 부단한 수양을 통해 그런 불순물이 제거되지 않을 경우 인간도 하등(下等)의 품위를 벗어날 수 없다. 신이 아닌 이상 완벽할 수는 없지만, 수양의 정도나 양에 따라 다른 사람들에 비해 높은 품위를 갖출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는 가장 직접적인 수단이 말이고 보면 말에 품위를 갖추는 일이야말로 인간 수양의 정도를 나타내는 표지이자 지도적 인격의 필수요건이다.

 공자(孔子)는 정치의 첫 단계가 정명(正名) 즉 ‘명분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했다. 명분을 정하게 되면 그에 맞는 말이 있게 되고 무엇을 말하면 반드시 그에 맞는 실행이 있게 되니, 그래야 군자의 말에서 구차스러움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상한 말이라도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교언(巧言)이나 거짓말일 뿐이다. 절제되지 못한 막말이나 책임 지지 못할 ‘구차스러운 말’로 국민들에게 결코 모범을 보일 수 없고, 직책을 공명정대하게 수행할 수도 없다.

  집권층이 방송계의 개편이나 국가의 종교 정책 등을 법적⋅제도적 원칙과 원리에 따라 수행한다고 믿어온 것이 대다수 국민들의 정서다. 그러나 나라의 법령을 제정하거나 집행하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통해 유추되는 실상은 결코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국민들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고, 겸허하게 최선을 다 하는 자세로 그 뜻을 받들어 법을 만들거나 집행해야 하는 것이 관련 인사들의 책무다. 그러나 그들의 말만으로 미루어 본다면, 소리(小利)와 사욕(私慾)의 도구로 공적인 책무를 악용하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어느 시대나 지도층이 가질 수 있는 오만은 여러 형태로 표출된다.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사려 깊지 못한 말인데, 그 중의 압권은 막말이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홉스(T. Hobbes)는 ‘인간에게 말이 있다는 것이 축복이자 저주’라고 단언했다.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있고 과학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말은 축복이지만, 일시적 욕망에 따라 무절제하게 사용함으로써 재앙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말은 인간과 세상에게 저주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남을 해치는 말은 먼저 스스로를 해치고, 피를 머금어 남에게 뿜으면 먼저 자신의 입이 더러워진다’는 태공망(太公望)의 말처럼, 툭하면 터져 나오는 지도층의 막말이나 무책임한 발언들이 자신을 망치는 것은 물론 나라까지 혼탁하게 만들고 있다. 아름다운 말, 문채(文采) 있는 말은 하루아침에 터득되지 않는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제대로 말 교육을 받았을 리 없는 그런 인사들이 지도층으로 활보하는 건 이 땅의 비극이다. 지도층의 막말들을 보며 뜻 있는 국민들은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한다. ‘말 못하는 사기꾼 없다’는 경험칙에 익숙한 국민들이 사회 지도층의 허울 좋은 말이나 막말로 국격이 떨어지는 광경을 속절없이 바라보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