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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24 축제가 사라진 캠퍼스
  2. 2007.04.10 모꼬지와 젊음, 그리고 간현의 추억
글 - 칼럼/단상2009. 5. 24.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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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봄을 맞은 휴일 한낮의 숭실대학교 캠퍼스>


축제가 사라진 캠퍼스

                                                                            조규익

봄꽃이 한 차례 훑고 지나갔으니 대학가에선 축제들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제대로 된 축제는 간 곳 없고 놀이판만 질펀하게 벌어진다. 대학 바깥의 놀이판에서 흔히 목격되는 꼴불견들이 언제부턴가 축제의 탈을 쓴 채 대학가에 뚫고 들어와 낭만을 질식시키는 요즈음이다. 물 좋고 공기 좋은 계곡에 평상을 깔고 앉아 흥겨운 ‘뽕짝’소리와 알코올 기운에 흔들거리는 바깥세상 놀이판과 흡사한 포맷의 난장들을 캠퍼스에서 목격하기가 어렵지 않다. 비싼 전파를 아낌없이 써버리는 연예인들의 오락프로가 축제라는 미명으로 대학가에 발을 붙인지도 오래다.

 학술제, 예술제, 문학제, 대동제 등등 대학가 축제의 빛나는 이벤트들은 언제부턴가 70년대 학번들의 기억 속에나 가물가물 남아 있을 뿐이다. 공동체의 단합을 추구하거나 종교를 유지하기 위해 구성원들에게 주기적으로 정보를 주입하고 환기시키던 행사가 축제(festival)의 원류다. 세월이 흘러 본질에 변화가 생긴 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축제가 갖는 상징성마저 사라지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본질이 사라질 경우 그것들은 그냥 ‘난장판’이거나 의미 없는 ‘시간 죽이기’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축제의 나라’라고 부를 만큼 우리나라엔 축제가 지천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보아도 본질을 생각하고 신중하게 만들어진 축제는 거의 없다. 오늘날 축제를 기획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축제가 끊임없이 후손들에게 이어져 역사성을 지닌 문화적 자산이 되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은 없는 듯하다. 축제의 본질보다는 효과적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수입이나 올려보려는 상업적 계산이 그들의 마음에 그득할 뿐이다. 축제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편했던 기억과 짜증만 잔뜩 남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때 우리에게도 대학들이 사회의 축제문화를 주도하던 시절은 있었다. 특색 있는 대학의 축제들이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회인들은 대학의 문화나 행사들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그 기회를 잘만 활용했다면, 대학인들은 오늘날까지 사회를 주도할 문화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이 자율성을 상실하면서부터 사회와의 바람직한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대학을 묶어 놓으니 대학인들의 창조적 역량은 질식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그렇게 대학이 죽어가는 동안 사회는 걷잡을 수 없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차분하게 앞 뒤 옆을 분간하며 스스로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 문화운동이며 정신운동이다. 뚜렷한 지향 없이 질주하는 사회를 차분하게 붙들어 앉힐 수 있는 효과적인 제동장치가 바로 문화운동이다. TV와 인터넷 등 대중매체들은 이들의 다급한 수요를 충족시키는데 급급하여 건전한 문화운동을 주도할 리더십을 상실하고 말았다. 대중매체들은 오히려 순간적인 향락과 소비를 부추겼고, 사회의 문화의식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밑바닥까지 끌어 내렸다. 그들이 쉬지 않고 쏟아내는 오락성 프로들은 자라나는 세대들을 일찍부터 오염시켰고, 대학에 들어온 그들은 그런 풍조를 즐기고 대물림하는 전사로 자임하게 되었다. 이처럼 세속적인 놀이문화가 대학에 역류된 것은 대학이 더 이상 문화 창조의 현장으로 기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축제도 학생들을 위한 교육의 소중한 기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들이나 대학 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올바른 방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축제에 대한 철학이나 기본인식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보고 배울 만한 대학축제의 모델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대학에서 배운 것을 건전한 놀이문화로 승화시켜야 대학축제의 이상은 실현된다. ‘대학축제’라는 대전제를 잊지 만 않는다면, 진지성⋅다양성⋅낭만성이 융합된 프로그램들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대학생들을 무한한 가능태로 키워내려면 올바른 축제를 부활시켜 한다. 캠퍼스에 건전한 축제문화가 살아야 공동체로서의 대학 정신이 살아날 수 있고, 대학의 정신이 살아나야 인재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키울 수 있다. 새로운 세대가 축제를 통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를 수 없다면, 대학의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7. 4. 10. 11:14
모꼬지와 젊음, 그리고 간현의 추억


                                                                           

언제부턴가 간현엘 가고 싶었다. 병풍 같은 돌벼랑으로 둘러싸인 계곡, 구석구석 간질이며 휘돌아 내빼는 섬강. 깔끔한 정밀(靜謐)을 시샘하며 가끔씩 계곡을 가로지르는 중앙선 열차의 굉음이 장난스러운 곳. 고라니와 산토끼가 우두두 뛰쳐나올 듯, 잡목 숲이 음흉스레 펼쳐진 곳. 80여명의 젊음들과 함께 한 간현의 하룻밤이 드디어 잠자던 내 감성을 깨우고야 말았다.

모꼬지! 그래 비로소 우린 엠티(MT) 대신 모꼬지의 추억을 사랑하게 되었다. 말끔한 제복과 구호가 각을 세우는 느낌. 그런 엠티보다야 자지러지는 꽹과리의 파열음 속에 막걸리 질펀히 흐르는 느낌의 모꼬지가 제격이지. 어차피 새내기들을 품에 받아들이는 입사의례(入社儀禮)가 축제 판이 아니라면 대체 무어란 말인가. 너와 나, 그들과 우리들의 ‘하나 되는’ 잔치판은 모꼬지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랬는가.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의 열기에 익어가며 우리의 삶을 몸으로 느낀 그 놀이판은 팔딱팔딱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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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현의 젊음들



젊음이 싱그럽게 요동치는 모꼬지 판. ‘몸이 얼마나 버텨낼지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는’ 존재가 젊음이라고, 이 시대의 감성 파울로 코엘료가 말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일찌감치 한계를 설정한다면, 그건 젊음이 아니다. 젊음은 ‘무한의 가능태’일 뿐이다. 그렇게 무모한(?) 젊음들 속에 묻혀 날뛰던 ‘나’는 참으로 낯선 존재였다. 시인 이재관도 그런 느낌을 가졌던 것일까.

          MT(멤버십 트레이닝)

         영원한 소년이 되고 싶은
         피터 팬 신드롬과
         영원한 고수가 되고 싶은
         사울 왕 신드롬이
         뒤섞이는 밤을 밝혀
         즐기고 호령한다.

         겨울도 봄도 아닌 2월
         엠티에서는
         노인도 소년도 아닌
         영원한 청년이어라.

         꾸라쥬(Courage)!!

그랬다. 노인도 소년도 아닌 어정쩡한 중늙은이 하나가 젊음의 열기 속에서 휘청거리고 있는 장면이 60년대 활동사진의 화면마냥 밤의 열기 속에 흔들렸다. 이제 갓 울타리를 벗어났다고, 노랑노랑한 병아리들이라고. 폐계(廢鷄)가 다 된 중늙은이는 제법 노파심을 발휘하려 애써 보지만, 거친 부리를 갈아 아무리 세게 쪼아도 이미 폐계에게 세계는 닫힌 대상일 뿐. 그러니 종국엔 여린 부리의 그대들이 열어 갈 것이다, 새 세계를!

발랄과 자유분방이 늘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며 새 역사를 꾸려나간다는 진실을 오늘 드디어 깨닫곤 침묵하기로 한다. 마른 잎사귀를 밀어내고 연록의 새 이파리가 눈을 트는 이른 봄의 간현을 느끼며 헛된 말이 필요 없음을 인정하기로 한다. 똬리를 틀고 앉은 마른 등걸의 탐욕으로 태양을 향해 뻗어 오르는 녹색의 생명을 규율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보라, 활활 펼쳐 보이는 그대들의 꿈이 바야흐로 익어가고 있지 않는가. 별이 반짝이고 바람 싱그러운 간현의 밤이다. 이 틈에 나도 한 번 외쳐보자, ‘꾸라쥬’!!!
                                                                          (2007.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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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