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4. 7. 29. 00:41

 

 


공항에서 천진외대 국제교류센터에 도착하여

 

 


천진외대 국제교류센터

 

 


천진외대 국제교류센터 앞마당에 설치된 조각상

 

 


천진외대 국제교류처에 걸린 국제학술회의 보도처 표지판

 

 


천진외대 국제교류처 로비에서 안내하는 학생들

 

 


천진외대 국제교류처 호텔방에서 내다 본 천진시가지

 

 


천진외대 국제교류처 호텔방에서 내다 보이는 롯데백화점

 

 


천진시가지에서 흔히 보이는 높은 빌딩들

 

 

 

영욕이 퇴적된, 미래 지향의 역사 도시 천진(天津)을 찾아(1)

 

 

 

 

 

3월 초. 천진에서 국제학술회의가 있으니 발표를 원하는 사람은 신청하라는 연락이 왔다. ‘국제학술회의라 해봐야 중국에서 열리는 만큼 수준이 뻔할 뻔자임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천진이 탐났다. 뿐만 아니라 천진에서 학술회의를 마치는 다음 날 열하(熱河)로 이동하는 일정도 들어 있었다. 이미 열하를 다녀온 나로선 흥미가 반감되긴 했으나, 13년의 세월 동안 변했을 열하가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다. <<열하일기(熱河日記)>>를 읽으며 연암 박지원의 정신세계를 흠모해 온 게 대부분의 국문학도들일 것이니, 열하는 이번 여행에서 일종의 미끼상품’(?)인 셈이었다. 주최 측이 열하를 끼워 넣은 것도 그 점을 노렸기 때문이리라.

 

 

임오군란 이후 원세개(袁世凱) 일당에게 납치된 대원군이 3년 간 감금의 수모를 당한 곳.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한 강제 조차(租借)로 입은 상처가 도시의 핵심부분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 발해 만에서 북경으로 들어가는 관문, 등등. 천진은 적지 않은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도시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나라에서 가까운 곳이라 언제고 갈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지금껏 미답(未踏)으로 남겨둔 곳이었으므로, 나는 망설임 없이 참여하게 되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부도덕한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아편전쟁(1840~1842)이 일어난 곳이었다. 영국과의 두 차례 전쟁에서 모두 패하고, 중일전쟁에서도 패함으로써 완벽하게 주권을 상실하게 된 중국이었다. 오랜 세월 중화주의와 동아시아 중세보편주의의 핵심 공간으로 군림해오던 중국이 아차하는 순간에 역사의 진운(進運)을 놓침으로써 국제사회의 동네북으로 전락된 역사적 비운의 생생한 현장이 바로 천진이었다. 그러면서도 열강 침탈의 역사를 근대화의 역사로 바꾸는 데 성공했고, 어떤 나라처럼 치욕의 현장을 쓸어버리지 않고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대인배(大人輩)의 지혜와 금도를 보여 준 미래 지향의 공간이기도 했다.

 

 

우리가 머물게 될 이틀은 턱없이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이 도시를 일별이라도 해야겠다는 욕구를 억누를 수 없었다. 서울 출발 전날 냉방병에 걸려 골골하면서도 장도에 오르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1050분 출발 예정이던 아시아나 항공은 무슨 이유인지 30분 가까이 연발했고, 12시가 훨씬 넘어서야 천진 공항에 도착했다. 도시는 생각보다 크고 깨끗했다. 공항에서 버스에 오른 가이드는 천진이란 말의 유래부터 설명했다. 그 중 천자의 나루터란 설명이 가장 타당한 듯 했다. 즉 명 태조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인 영락(永樂)이 황제에 즉위하기 전 남경 홍무(洪武)제의 손자이자 태조의 후계자인 주윤문(朱允炆)에 대항하는 싸움을 시작했는데, 그가 떠난 곳이 바로 이곳의 고강(沽江)으로서 즉위에 성공한 다음 자신이 떠난 곳에 천진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발해로 흘러 들어가 양자강과 황하를 만나는 하이강[The Hai River; 海河]이 질펀하게 흐르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물이 많은 도시였다.

 

 

숙소인 천진외대 국제교류처 호텔에서 점심을 먹고 3시가 넘어서야 천진박물관에 들렀다. 하서구(河西區) 은하(銀河) 광장에 있는 천진박물관은 백조가 두 날개를 편 듯한 건축 양식도 일품이었지만, 소장품의 양과 질은 더욱 엄청났다. 50,000의 넓이. 우리 개념으로 15,151평이 넘는 규모에 방대한 중국 전역의 고대미술품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이었다. 서예, 그림, 청동기, 도자기, 옥 공예품, 인장, 벼루, 상나라 때의 갑골문, 동전, 고문서, 근대의 각종 유물 등 20만 점이 넘는 미술품들과 역사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외형이나 소장품의 규모로는 일개 시립박물관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수준이었다. 중국의 근대사에서 천진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 대단했던 만큼 서구 열강들과의 갈등, 전쟁, 식민화 등의 우여곡절과 그 산물인 조계(租界)에 관련된 각종 유물이나 문서, 인물들이 복잡하지만 잘 정리되어 있었다.

 

 

박물관은 매우 넓었다. 세계의 유명 박물관을 두루 돌아본 경험에 미루어, 천진박물관을 대강이라도 섭렵하려면 짧게 잡아도 꼬박 이틀은 필요하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고작 두어 시간으로 장강대하 같은 중국사의 유물들을 둘러보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5시가 땡 치자 복무원들은 가차 없이 우리를 쫓아내기 시작했다. 위층엔 올라가 보지도 못한 채 그러지 않아도 주마간산으로 시작한 박물관 투어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밖에 나오니 기념물 같은 주변의 고층건물들 사이로 어둠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천진에서의 귀하디귀한 하루를 보내고 말았다.

 

 

 

 


천진박물관 입구

 

 


천진박물관 내부

 

 


천진박물관 소장-부두의 노동자들

 

 


천진박물관 소장 생활사 자료-약방

 

 


천진박물관 소장-상나라 시대의 갑골문

 

 


천진박물관 소장품-신석기 시대 홍산문화에서 황옥으로 만든 pig-dragon

 

 


천진박물관 소장품-원나라 때 옥날개 용무늬의 두 귀를 가진 병

 

 


천진박물관 소장품-명나라 때 황남도인이 제작한 익번왕금

 

 


천진박물관 소장품-명나라 때 물고기와 연꽃 모양을 朱砂로 새긴 벼루

 

 


천진박물관 소장품-청나라 때 청동으로 만들어진 달라이라마 상

 

 


천진박물관 소장품-청나라 때, 에나멜로 서양인들이 그려진 비연호(鼻烟壺)

 

 


천진박물관 소장품-청나라 때 바위 모양의 壽山 돌도장
[남산지수(南山之壽: 남산처럼 장수하라)가 새겨져 있음]

 

 


천진박물관 소장품-19세기 초중반 아편을 탐닉하던 중국인들

 

 


천진박물관 소장-9개국 조계 분포도-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태리, 일본, 프랑스, 러시아, 미국, 영국, 독일, 벨기에

 

 


천진박물관 소장-북양대신 이홍장과 대화를 나누는
미국 18 대 대통령 그란트(Ulysses Simpson Grant)

 

 


천진박물관 소장-중국의 국부 손문상

 

 


이른 아침 공원에서 태극권을 수련하는 중국인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4. 5. 6. 20:45

 


두 교수 부부와 처음 만나던 날, 저녁식사 자리

 

 


자신의 연구실에서 두 교수

 

 


필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교수

 

 


초대 받아간 두 교수의 집에서

 

 


두 교수의 요리솜씨

 

 


스틸워터의 중국집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와서

 

 

 

미국의 중남부에서 아시아 역사를 가르치는 젊은 학자: 용타오 두[Yongtao Du/杜勇濤] 교수

 

 

작년 827. 미국에 도착한 우리를 오클라호마 시티 윌 라저스[Will Rogers] 공항으로 픽업 나온 사람이 용타오 교수였다. 한국인인 우리는 젊은 그를 아시아식으로 두 교수라 불렀지만, 미국의 교수들과 학생들은 용타오라 불렀다. 그의 중국 이름은 두용도(杜勇濤)’. 그의 출생지인 중국 화중(華中) 지역의 하남성(河南省)은 중원문화의 발상지로서 빛나는 인물들이 배출된 곳이다. 도가(道家)의 시조 노자(老子), 동한(東漢) 시절의 과학자 장형(張衡), 당송팔대가 중에서 첫 손가락으로 꼽히는 문장가 한유(韓愈),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저자인 승려 현장(玄獎), 남송의 영웅 악비(岳飛) 등등. 그러나 무엇보다 당나라의 큰 시인 두보(杜甫)를 빼놓을 수 없으니, 두 교수야말로 바로 그 두보의 후예 아닌가.

 

두 교수와의 인터뷰

 

 

OSU 역사학과의 유일한 동양인 전임교수인 그는 늘 통통통’ 연구실과 강의실을 오가며 분주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는 하남대학교(Henan Univ.)에서 학사학위를, 베이징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일리노이 대학교[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일리노이 대학교와 와쉬번 대학교(Washburn Univ.)에서 강의를 하다가 2009년부터 이곳 OSU의 역사학과로 옮겨 재직하는 중이었다.

 

부의 교훈: 명나라 말기 혜주(惠州)의 상업문화와 지방주의”, “초지방적(超地方的) 혈통과 고향 애착의 로만스”, “경쟁적 공간 질서: 명나라 말기의 상업지리학등 탁월성과 독창성을 보여주는 논문들을 발표했고, ‘하바드 옌칭의 논문 작성을 위한 현장 연구 지원’, ‘탁월한 지리학사(地理學史) 학자에게 수여하는 리스토우 상’, ‘리칭 학술상등 여러 번의 학술상과 연구지원의 수혜를 받고 있는, 촉망받는 신진학자가 바로 그였다. 미국의 여타 지역들과 중국을 오가며 부지런히 논문을 발표하는 그의 모습이 돋보였다. 중국 역사 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 역사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면서 동양에 관한 미국 학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점도 좋아보였다.

 

미국 도착 뒤 시차적응도 되지 않은 나에게 한국사에 대한 물음들을 끊임없이 던졌다. 신라의 왕통, 삼국 간 정치제도의 차이, 왕건의 출신, 문벌귀족, 양반, 본관 등등. 사실 나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즉석에서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쉼 없이 건네는 그였다. 자신의 전공인 중국사를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서라도 주변국의 역사를 알아야겠더라는 그의 말은 그간 한국인이나 일본인을 만나지 못함으로써 겪을 수밖에 없던 자신의 지적 갈증을 명증하게 드러냈다.

 

우리는 잠깐씩 수시로 만나면서 --의 역사적 접촉과 현실을 논하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중국말을 한 마디도 못하고 그 또한 한국말을 한 마디도 못했지만, 고맙게도 영어가 우리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었다. 그러다가 갈증이 도지면 서로가 가끔씩 알고 있는 한시들을 써 보여주며 정서적 공감대를 확인했을 뿐 아니라, 근대 이전 동아시아에 정착되어 있던 중세적 보편주의의 실체와 힘을 확인할 수도 있었으니, 제대로 쓰인 역사에 대하여 무한한 신뢰를 갖고 있던 나로서는 감동적인 체험이었다. 조선과 중국의 지식인들이 북경의 유리창이나 그들의 사저(私邸)에서 필담으로 교유하던 그 시절의 광경을 우리 또한 제3국 미국의 한 구석에서 제법 재현한 셈이니, 참으로 희귀한 일 아닌가.

 

중국인인 그에게 나는 중화주의(中華主義)’의 협소함에서 벗어나라는 주문을 누차 건넸고, 그 역시 마오쩌둥을 좋아하지만, 미래지향적 행동지표로서의 글로벌리즘을 잊지 않고 있다는 말로 화답하곤 했다. 학문의 바다 미국에서 조만간 그는 아시아사의 최고 전문가로 성장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는 분명 민족주의의 편협한 굴레에서 벗어나 완벽하게 균형 잡힌 미래의 지식인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으리라 믿어본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08. 5. 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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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주의, 그 걸러지지 않는 역사의 노폐물

 

                                                           조규익(숭실대 국문과 교수)

 

얼마 전 모 대학 교수로부터 들은 이야기 한 토막. 2005년 베이징에서 우리나라 국회의원 두 명이 탈북자 인권문제로 기자회견을 하려다 중국공안 당국으로부터 폭행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함께 있던 우리나라 외교관들도 폭행을 당한 건 물론이다. 정당한 이유 없이 주재국 공권력에 의해 다른 나라 외교관이 폭행을 당한, 상식 이하의 사건이었다. 예상대로 당시 우리 정부는 묵묵부답,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피해자인 우리의 인사들을 질책하는 분위기였다. 분개한 어떤 인사가 그 사건을 들어 모 일간지에 칼럼을 썼고, 감명 받은 그 교수는 그 글을 당시 대학원에 재학하던 외국 학생들의 한국어 시험 지문으로 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끼어있던 중국 학생들이 그 내용에 반발하여 시험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듣게 된 그 교수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중국의 저의를 분석한 다음, 잘못 된 처사에 말 한 마디 못 건네고 있는 우리 정부의 처사를 꾸짖은 글이었다. 당사자인 중국의 국민이라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거나 반성의 빛이라도 보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학문을 배우러 이 나라를 찾아온 젊은이라면 더더욱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그러기는커녕 그들은 사무실로 찾아와 기세등등하게 항의를 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안하무인의 불량배로 만들었을까. 요즘 하기 좋은 말로 그들이 ‘자유분방한 인터넷 만능시대의 총아(寵兒)’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중국에 법제화 되어 있다던 ‘독생자녀제(獨生子女制 ; 1가구 1자녀 원칙) 출신의 이른바 ‘소황제(小皇帝)들’이라서 그렇게 된 것일까. 아니다. 바로 그들의 피에 흐르고 있는 ‘중화주의’의 DNA 때문이다.


 역사에도 대사작용(代謝作用)이 있는 법. 새로운 시대사조나 발전적 비전을 받아들여 과거의 노폐물을 걸러내는 작용은 역사에도 필수적이다. 대사작용이 멈춰버린 한-중 외교사의  흐름 속에서 중화주의라는 노폐물을 걸러내지 못한 중국인들은 21세기의 시대정신을 왜곡하며 ‘자민족 우월주의’의 망상에 빠져 있다. 그러니 시험지를 들고 대학원 사무실로 항의 차 몰려온 아이들이나 이번 성화 봉송에서 집단으로 행패를 부린 그들의 행동양식은 한 틀인 셈이다. 그것은 부모나 조상들로부터 대물림 받거나 교육된 의식이거나 행동양식일 뿐이니, 말하자면 '역사의 조건화(conditioning)'라고나 할까. 자극과 자극 또는 자극과 반응 간의 연합을 통해 특정 행동이 유발되거나 학습되어지는 과정이 ‘조건화’다. 한 번도 우리나라와 선린(善隣)의 관계 설정에 나서본 적이 없는 가해자로서의 중국은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의식’을 대대로 학습해 물려주고 있으니, 그게 바로 ‘역사의 조건화’다.

 자기 절제를 통해 착한 이웃 혹은 세계시민으로 살아가는 방법과 태도를 교육하는 것이 현대 국가의 금도(襟度)다. 그런데 이번 일로 그들은 양식 있는 교육을 받지 못한 국민임을 만천하에 드러낸 셈이다. 그간 한-중 관계사는 외교적 상식에 비추어 유쾌하지 못한 양상으로 전개되어 왔다. 지정학적인 면에서 우리는 중국 내부의 정치적 변동에 늘 영향을 받아야 했고,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중국이 한동안 우리에게 세계를 향한 창문 노릇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왕조가 새로 들어설 때마다 그들은 ‘강-약’과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늘 확인하고자 했고, 우리는 언제나  ‘화(和)/전(戰)’의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했다. 땅이 넓어 물산이 풍부하고, 세계와 인접해 있어 각종 문물이 다양하니 대륙의 변방인 우리로서는 그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조 내내 사신들을 줄기차게 파견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저들과의 전쟁을 미연에 막아야 했고, 우리에게 부족한 물건이나 문화를 도입해야 했으며, 중국의 상징적인 힘을 국내 정치에 활용해야 했다. 우리가 저들의 속국이나 식민지라서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비록 외교적 생존술이었다 해도, 그것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그릇된 인식을 갖게 한 단초였음이 분명하다. 현실적 이익은 차치하고라도 우리의 사신 파견이 굴욕적인 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명나라 때의 사신행차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는데, 하물며 우리가 오랑캐라고 질타해온 청나라 때 사신행차들의 굴욕이야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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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천 이덕형의 사행을 기록한 죽천행록>

 


 인조 2년(1624) 기울어져 가던 명나라에 파견한 주청사행(奏請使行)은 그 대표적인 경우였다. 서인들은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에 성공했으나 명나라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능양군을 인조로 옹립하여 반정에 성공한 서인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을 반석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명나라의 승인이라는 명분이 절실했다. 명나라로부터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을 받아오는 일이 무엇보다 다급하고 중요한 그들의 사명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주청사행은 국내정치용이었던 것이다. 정사 이덕형(李德泂)이 명나라의 관료들로부터 당한 농락과 시달림은 역사상 강대국인 중국이 약소국 조선에게 가해온 행패의 축소판이다. 예컨대 위대중이란 자는 주청사행을 괴롭힌 대표적 인물이었다. 조선이 후금의 누르하치와 같은 오랑캐 류라는 점, 인조반정은 명분이 전혀 없는 죄악임에도 ‘천자’의 조서를 받아 그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은 중국 조정에 대한 기망이라는 점, 누르하치에게 먹힌 요동만 회복하면 저절로 조선의 잘못된 일이 바로잡힐 수 있으므로 그 때까지 책봉의 조서를 내리지 말아야 한다는 점 등을 주장하며 주청사행의 사명 수행을 극력 저지했다. 툭하면 시랑 정도의 관료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고, 출근하는 그들을 만나고자 추운 겨울날 새벽 길가에서 떨며 기다린 것은 물론 각로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내침을 당하자 섬돌을 붙들고 울며 사정하는 노구(老軀)의 정사는 우리 민족의 일그러진 자화상일 수밖에 없다. 가까스로 고명과 면복을 받아들고 기뻐하는 정사를 상대로 마지막까지 농락하는 중국의 관료들이야말로 중화주의의 늪에 빠져 약소국을 능멸하는 불량배들의 전형이었다. 중국과 조선, 두 왕조의 외교를 담당한 것은 주로 우리 쪽에서 파견하던 사행단이었다. 연경까지 대개 비슷한 코스로 두 달 가량 걸리는, 왕복 6천리의 지겨운 길이었다. 500여명의 일행이 도보로 오가던 길. 교통편과 숙박시설이 변변할 리 없었다. 한둔하기 일쑤이던 아랫사람들보단 나았겠으나, 정사·부사·서장관 등 윗사람들이라고 크게 편안할 것도 없었다. 목욕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으며, 제때 옷 갈아입는 일 또한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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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행노정 답사 중 만난 하북성 노룡현의 고려포 역참에서>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천추(千秋) 등 정례 사행단만 가는 게 아니었다. 왕비나 세자의 책봉에도, 왕의 죽음에도, 왕위를 물려주거나 선왕을 추숭할 때도 사신들을 보냈으며, 사은(謝恩)·주청(奏請)·진하(進賀)·진위(陳慰)·진향(進香) 등 임시 사행단은 수시로 파견되었다. 그런 역사가 조선조 내내 이어진 것이다. 중국인들의 뇌리에 박힌 것은 반복되어온 사행 파견의 불평등한 외교관계였다. 그렇게 역사가 왜곡되는 과정에서 청 말 황준헌(黃遵憲)이란 자의 ‘조선책략(朝鮮策略)’같은 글도 나타나게 되었다. “오늘날 조선은 중국 섬기기를 마땅히 예전보다 더욱 힘써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선과 우리는 한 집안 같음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라는 그의 언설이야말로 올림픽 성화 봉송에서 난동을 부린 중국 청년들의 ‘한국관(韓國觀)’을 정확히 적시한 내용이다. 멀쩡한 남의 나라 외교관이나 국회의원, 언론사의 특파원을 폭행하고도 정당한 법 집행이라 강변한 중국. 자국의 배가 서해상에서 골든로즈호를 침몰시키고 도주한 사건에 대하여 ‘피해 선박이 구난장비를 갖추지 않아 인명피해가 났다’고 억지 논리를 편 중국. 그것도 모자라 이제 그들은 남의 나라에 몰려와 자신들의 국기를 휘두르며 폭력까지 행사하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은 스포츠 경기장을 제외한 그들의 영토 안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여 우리의 국기를 흔들거나 애국가를 부르도록 내버려 둔 적이 없다. 그런 그들이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수백 명의 유학생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국기를 들고 수도 서울의 한복판을 누비게 만들었으니, 그 배짱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중국을 떠나 너희가 살 수 있느냐’고 큰 소리 치는 철없는 중국의 젊은이를 보며, 그들의 만용과 만행을 가능케 한, 비뚤어진 중화주의가 세계평화의 재앙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다시 묻건대, 이런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은 우리인가 아니면 그들인가?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7. 6. 3. 09:09
천하의 큼을 보고 나를 깨닫는 연행 길에 나서며
      -연행 길 사진전, 그 철학과 의미-              


                                                                 조규익(숭실대 교수)

한양에서 북경까지 넉 달 넘어 걸리던 왕복 6천리 길. 삼사(三使)와 군관, 시종 등 많은 사람들이 무리지어 도보로 오가던 공무여행 길이었다. 교통편이 없으니 숙소며 식사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을 리 만무했다. 아랫사람들은 당연히 ‘한둔’이라 불리던 ‘한뎃잠’을 자야했으며, 윗사람들이라고 따뜻한 방을 차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살을 에는 만주벌의 밤 추위에  가끔씩 맹수들이 출몰하기도 하던 험지의 고행 길이었다. 먹는 것 역시 변변치 않았고, 목욕을 한다거나 때에 따라 입성을 갈아입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까운 사치였다. 병들어 아파도 몸 보전하고 누울 자리조차 없었다. 어찌어찌 병이 나으면 행운이고, 죽는 일 또한 허다했다. 시신을 떠메고 가거나 고국으로 돌려보낼 수도 없으니, 중도에 그냥 묻고 가야 했다. 끔찍한 고행 길이었으나, 지엄한 왕명이니 ‘군말 없이’ 따라야 했다. 사직과 백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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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 행차가 조선조 말까지 수백 회에 이른다. 조·명, 조·청 간 외교적 현안 때문만은 아니었다. 경제나 문화 교류도 그런 행차들에 숨겨진 중요한 목적이었다. 당시 중국은 조선의 유일한 대외 창구였다. 극동에서 숨죽이고 살아가던 작은 나라 조선이 세상을 보려면 중국이란 창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의 큼과 세상의 넓음을 서책을 통해서나 알 뿐이던 당대의 상당수 지식인들은 고행 길인 줄 알면서도 이런 저런 연줄을 통해 사행에 참여하려 했다. 말로만 듣던 ‘대국’의 선진문물을 현지에서 확인하고픈 욕망이 지식인들을 설레게 했다. 특히 중화를 몰아내고 중원을 차지한 ‘오랑캐’들의 사는 모습이 무엇보다 궁금했을 것이다. ‘한 번 몸을 일으켜 천하의 큼을 보고 천하의 선비를 만나 천하의 일을 의논하겠노라’던 홍대용의 포부는 연행에 나서던 당대 지식인들에게 공통적이었다.
   그들을 연행에 나서게 한  보다 직접적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중화주의와 중국의 현실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가 조선조 교조적 성리학자들의 당면과제였다. ‘오랑캐 청국’의 존재는 그들에게 어찌 해 볼 수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온갖 고생을 감내하면서 오랑캐가 차지한 중원을 보고자 한 당대 지식인들의 깊은 속내엔 자존심을 현실에 대한 인정으로 맞바꾸어야 하는 절실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곳에 가고자 했다. 뻔한 일이긴 했으나 가보지도 않고서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더욱 더 자존심 상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참담함을 뼈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기술해나간 것이 연행록들이다. 번화한 도회와 풍족한 물화를 보면서 ‘고인 물’ 같던 조선 지식인들의 내면에도 파문이 일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자문하던 이들에게 중국의 모습은 해답 그 자체였다. 좋은 점은 좋은 점대로, 그른 점은 그른 점대로 중국은 자신들의 미래를 설계해나갈 모델이었다. 시시콜콜 적어놓은 견문들을 단순히 흥밋거리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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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한양을 출발하여 수많은 산과 물, 촌락과 도회들을 지나 연경에 도달했다. 사람 사는 모습이야 어디고 같다지만, 인정과 풍속이 현격한 이국의 그것들이 어찌 우리와 같을 수 있었으랴. 그래서 연행 떠난 지식인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신기했고 감동적이었다. 그들은 그런 신기와 감동을 바탕으로, 오랑캐들도 소중화의 조선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만난 중국의 산하와 문물이야말로 수백 년 간 배워온 성경현전(聖經賢傳)보다 그들에겐 더 큰 스승이었다. 조선조 지식사회에 북학(北學)의 기조가 정착된 것도 바로 그러한 연행 덕분이었다!
   그로부터 몇 백 년 후에 태어난 카메듀서 신춘호 선생. 그는 지난 수년간 동호인들을 인솔하고 스스로 연행사가 되어 그 길을 되짚어 훑었다. 연도(沿途)의 풍물들을 모두 기록한 그 옛날의 연행사들처럼 그도 렌즈 속에 그 모든 것들을 잡아넣었다. 지금도 틈만 나면 국내와 중국의 연행노정을 답사하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들을 영상으로 담기에 바쁜 그다. 사실성과 예술미가 조화를 이룬 그의 사진을 들여다보라. 이미지들의 배경엔 수 백 년 전 연행사들의 호기심 어린 눈초리가 깔려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지금의 모습만 찍고 있는 게 아니다. 지금 그곳의 모습을 찍는 순간, 그는 타임머신을 타고 수 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때의 분위기까지 포착해 내고 있지 않은가.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