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9. 2. 1. 15:41

 

 

 

연명의료 거부를 신청하며

 

 

                                                                                                                   조규익

 

 

작년, 존경하고 따르던 박정신 교수의 빈소에 갔었다. 예를 차린 뒤 이곳엔 교수님의 유체가 안 계세요. 장기 기증을 위해 의료실에 계십니다.”라는 사모님의 말씀을 듣고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고, 교회사를 전공으로 택하였으며, 기독교학과의 교수로 종신한 분이었다.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신 것일까. 마지막 순간 자신의 육신까지 아직 살아 있는 생명들에게 나누어주고 떠나는 그 분의 모습이 숭고했다. 빈소를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며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 삶이란 무엇이며 육신이란 무엇일까? 무엇보다 삶과 죽음의 교체 과정에서 육신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의미를 만들기 위한 도구일까. 아니면 종국에 한갓 먼지나 쓰레기로 사라질 허망한 물질에 불과한 것일까. 많은 욕망을 만들어내고 투쟁을 추동하는 악의 실체일까. 갖가지 상념들이 내 마음에 난무했다.

 

집에 돌아와 아버지 어머니의 영정을 마주하고 한참 서 있었다. 영정 속엔 쭈그러진 육신 아닌 해맑은 웃음과 정신이 어려 있었다. 두어 해 전 병원에서 신음하시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회상했다. 눈을 감으시던 순간은 슬프도록 짧았고, 그 다음의 모습은 평화롭고 잔잔하셨다. 육신의 괴로움을 벗어난 편안함이었다. ‘격정에서 고요로의 넘어감, 바로 그것이 죽음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니 나는 왜 한사코 죽음을 거부하고 육신만 고집하는 것일까. 육신은 고통이고 구속인데, 왜 그것을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는 것일까.

 

세상의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육신이 절대적이다. 그 세상의 의미란 무엇인가.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세상에는 쓰임새가 있다. 잘난 사람만 있는 세상, 못난 사람만 있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 플라톤은 철인(哲人)들이 통치하는 나라를 이상국가라 했다. 그러나 그건 그냥 이상일 뿐이다. 그렇다고 바보들만 통치하는 나라도 있을 수 없다. 정치인들 중 정상적인 인간이 별로 없는 우리나라가 아직 망하지 않는 것은, 정치인들 모두가 바보는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공존과 조화가 우주의 원리이고, 그 원리가 구현되는 곳이 인간 세상이다. 육신을 지닌 인간들이 이끌어가는 공간이 세상이고, 그 세상을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동안 육신의 아픔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기한이 다한 기계가 고장 나고 망가지듯 인간의 육신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죽어가면서 쓸 만한 부속품이 있다면, 젊은 영혼에게 물려주고 가는 것도 스스로의 정신적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 아니겠는가.

 

옛날 어떤 현인은 다음과 같은 시구를 남겼다.

 

집에 천만금이 있어  家有千萬貫

평생 남에게 바라는 게 없었도다 一世不求人

죽기 전엔 未歸三尺土

일생 몸 보존하기 어렵고 難保一生身

죽은 후엔 旣歸三尺土

백년 무덤 보존 어렵다네 難保百年墳

 

그렇다. 인간이 세상에서 말짱한 제 정신으로살아갈 수 있는 시한이 그 몇 년이랴? ‘삼척토(三尺土/무덤)’로 돌아가기 전 입에 풀칠하며 자존심 유지하기 쉽지 않고, 죽은 뒤 100년 보존되는 무덤이 흔치 않다. ‘인생 백년은 예나 지금이나 꿈일 뿐이고, 그나마 반백년이라도 맑은 정신 속에 살아갈 수 있길 바라는 존재가 바로 가련한 인생인 것이다.

 

***

 

오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장기기증신청을 등록하기 위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들렀다. 그런데, ‘연명의료거부신청서는 적어냈으나 장기기증신청은 관할이 달라서 못하고 말았다. 평소 연명의료 거부와 장기기증은 함께 따르는 문제라고 생각해온 내겐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연명의료를 거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장기 기증의 의향을 가진 경우가 꽤 많을 것이다. 연명의료를 거부한다는 건 곧 숨을 거둔다는 뜻인데, 관할이 다를 경우 적시에 장기를 적출하여 필요한 사람들에게 이식할 여유시간이 있겠는가. 연명의료거부와 장기기증신청을 한 기관에서 신속하게 처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이 문제 역시 기관 간의 이해가 달라서 생겼을 것이다이 자리에서까지 더 이상 무책임하고 미련한 정치인들이나 정부를 힘들여 욕하고 싶지 않다. 더 큰 욕 먹지 않으려면, 빨리 정신 좀 차리고 두 사안을 하나로 연계시켜 함께 처리해 주기 바란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8. 3. 29. 18:40

 


 


흘러가는 물을 보며

 

 


부모님 묘소에서

 

 

많은 죽음들을 기억하며

 

 

                                                                                                                                조규익

 

 

두 해 전에 어머니를 보내드렸다. 올해 가까운 친구 김성원이 떠났고, 며칠 전엔 대학원 시절 함께 공부하던 정명기도 떠났으며, 최근 들어 이런 저런 이유로 비명(非命)’에 떠나는 멀고 가까운 이웃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그간 죽음에 대한 고민이나 사색을 통해 나름대로 의미부여의 방법을 터득했다고 자신하기 때문일까. 이젠 어떤 죽음도 비교적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자연사(自然死), 병사(病死), 사고사(事故死) 모두 항거할 수 없는 상황의 산물이다. 또한 개인적사회적 이유로 인한 최근의 자살들 역시 따지고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의 산물일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반듯하게챙겨 갖고 있지 않다면, 견디기 어려운 광경들을 주변에서 자주 목격하는 요즈음이다. 사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자살이다. 어쩌면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없고, 그동안 지탱해오던 사회적 자아를 유지할 수 없는 절망적 상황에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자살일 것이기 때문이다. ‘절망이야말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키엘케골의 말도 바로 그런 점을 지적했으리라.

 

가차 없는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본능 때문에 인간은 종교에 귀의한다고 한다. 사실 죽음이 매우 두려운 것은 죽음 이후의 세상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의 삶을 예비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지금도 사람들을 교회로, 성당으로, 사찰로 이끄는지 모른다. 돈독한 논리체계로 사후 세계를 치밀하게 설계해 온 종교들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믿으라고 권유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그 세계의 주재자인 신을 받들고 있을 것이다. 그 믿음이 강할수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경감되리라고 믿으면서 말이다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인간의 내면에 남아 있는 한 종교는 계속 번창할 것이라고 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자연물로서의 인간의 삶은 참으로 짧고, 그 가운데 가치 창조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더욱 덧없다. 하기야 한갓 미물로서 무슨 가치를 창조하겠노라뜻을 세우는 것 자체가 오만하고 가당찮은 일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저 하나의 던져진 존재라는 점을 깨닫기만 한다면, 겸손한 자세로 생명의 장()’인 세상에 폐를 끼치지 않고, 조용히 살다 사라지련만. 대부분은 주어진 생애 동안 기고만장하여 같은 공간의 동지들과 멱살잡이로 날밤을 지새우기 마련이다. 소수는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자신을 돌아보고 깨달음을 얻지만, 대부분은 삶에 대한 헛된 집착으로 그런 깨달음조차 얻지 못하는 것 아닌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그대는)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경구(警句). 아침저녁 열심히 가꾸어 오던, 꽃 같은 얼굴이 한 줌 재로 바뀌어 풀밭에 뿌려질 때, 풍채 좋던 친구가 주검 옷에 둘둘 말려 석자 깊이의 무덤으로 내려 갈 때, 그들을 바라보며 비로소 내 모습을 깨달아야 한다. 그들을 보며, ‘생자필멸(生者必滅)’의 자연법칙에서 나만은 예외일 것이라는 착각으로부터 빠져 나와야 한다. 그 자리에서 시신으로 바뀐 그들과 나의 자리바꿈을 통해 비로소 삶과 죽음의 우주적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며, 그 순간부터 죽음은 두렵지 않게 될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죽어야 할까? 하나, 둘 떠나는 이웃들을 보며, 그 순번이 내게 돌아올 때까지 나는 어떤 자세로 살아갈 것이며 어떻게 그 순간을 맞아야 할지, 이제 결정할 때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메멘토 모리!!!

 

 


등걸에서 새싹이...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3. 16. 21:14

죽음

 

 

나는 살아오면서 적지 않은 죽음들을 보았다. 어렸을 적 툭하면 생겨나곤 하던 동네 상가(喪家)엔 내 또래 아이들과 달리 나는 가장 먼저 달려갔다. 어른들의 눈총을 받으면서도 열린 대문 한켠에 서서 시신이 놓인 안방을 훔쳐보곤 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있던 것은 사람의 죽은 모습보다 살아남은 여인들(할머니/어머니/아주머니들)이 흘리는 눈물과 곡성(哭聲), 그리고 그것들이 어울려 만들어지던 슬픔이 내 가슴을 저미기 때문이었다. 왠지 그것들은 한동안 비틀거릴 정도로 내 마음을 적시곤 했다. 초등학교 학동에 불과한 나였지만, 우리나라 여인들이 참으로 잘도 운다는 깨달음을 갖게 된 것은 그런 고향동네의 상가들에서였다. 그런 울음들을 통해 나는 어려서부터 죽음의 비극성을 체득하게 되었다.

 

20년 전의 아버지에 이어 최근 어머니까지 세상을 뜨셨다. 황망 중에 맞은 아버지의 마지막은 참으로 순식간이었다. 아무런 말씀도 표정도 남기지 못하셨고, 나는 두려움에 아버지의 표정을 확인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마지막은 달랐다. 동생의 연락을 받고 전력질주하여 도착해 보니 아직 의식의 끝을 잡고 계셨다. ‘어머니, 제가 왔어요!’ 하고 부르자, 잠시 눈을 뜨시더니 가녀린 미소를 보여주시곤 다시 감으셨다. 그로부터 잠시 후 가슴 위쪽으로 그륵그륵 숨이 차 오르는가 싶었는데, 어느 순간 조용해지셨다. ‘어머닌 이제 가셨어!’라고 의사인 동생이 약간 건조한 목소리로 진단을 내렸다. 이마를 만졌는데, 아직 온기가 느껴졌다. 그 온기가 계속 남아 있었으면 했으나, 볼에서 느껴진 냉기가 순식간에 이마로 올라왔다. 몇 년 만에 참으로 편안한 어머니의 표정을 뵐 수 있었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란 스티브 잡스의 말이 옳았음을 비로소 확인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떠나시면서 얘야, 죽음을 두려워 마라. 삶의 괴로움을 일순간에 없애주는 죽음이 얼마나 고마우냐!’라는 말씀을 표정으로 보여주셨다.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편안한 표정으로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고단했던 삶과 병고(病苦)의 마지막 구간이 마무리되는 곳에 편안하고 행복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어머니의 마지막으로부터 깨닫게 되었다. 죽음은 비극적인 게 아니라 편안해지는 것이었다.

 

자연의 이법에 따라 앓다가 세상을 하직하는 죽음 말고, 요즘은 TV나 인터넷으로 중계되는 죽음들이 너무 많다. 전장이나 테러의 현장에서 수십, 수백 명이 한꺼번에 몰살되는 죽음들은 너무 엄청나니 아예 거론을 말기로 하자. 길 가다가 째려본다고 멀쩡한 사람을 패 죽이는 사건, 돈을 빼앗기 위해 모르는 사람을 죽이는 사건, 말을 안 듣는다고 아가들을 패 죽이는 사건, 원치 않는 출산이라고 돌도 안 된 아가를 떨어뜨리거나 입을 막아 죽이는 사건, 의붓자식이 밉다는 이유로 추운 날 발가벗겨 화장실에 가두고 고문하여 죽이는 사건, 친자식을 굶기고 때려 죽여 암매장하는 사건, 잔소리한다고 노부모를 때려죽이는 사건, 작은 일들로 감정이 상해 음료수에 독극물을 넣어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죽이는 사건, 맘에 안 든다고 왕따시켜온 친구를 결국 패 죽이는 사건, 꾼 돈을 갚으라는 성화에 빚쟁이를 유인하여 죽이는 사건, 고분고분하지 않거나 결별을 선언하는 애인을 잔인하게 죽이는 사건. 이런 말도 안되는 죽음은 그야말로 재앙이다. 그러나 자연의 원리에 따라 삶을 마치고 맞이하는 죽음은 인간이 거쳐야 할 또 하나의 관문일 뿐이다. 그 관문을 통과하면서 겪는 실존적 고통을 어떻게 극복하게 할 수 있으며, 그게 불가능하다면 경감이라도 시켜줄 것인가. 그거야말로 실존적 인간의 마지막을 위해 현대과학이 베풀어야 할 최고의 자비일 수 있지 않을까.  

 

새 삶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죽음들이 매일매일 우리네 주변을 배회한다. 우리 모두 지금 살아가지만사실은 죽어갈뿐이다. 먼저 가고 늦게 갈 뿐 종착역은 죽음이다. 가수 이애란은 <백세인생>을 통해 죽기 싫은 인간의 본능을 노래했지만, 누군들 죽음을 피할 수 있으랴. 피할 수 없으면, 삶의 괴로움을 직시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하리라. 그래서 이제 매일매일 열심히 죽어갈일이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3. 15. 09:40

 


영화의 포스터

 

 


글래스의 아들을 죽이는 피츠제랄드

 

 


글래스를 덮친 갈색곰

 

 

 

죽음을 초극하게 하는 것은 뭘까?

-영화 <레버넌트Revenant>를 보고-

 

 

스티브 잡스가 그랬던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 죽음이라고! 처음엔 그저 천재적인 괴짜의 무책임한 발언 정도로 치부했다. 그러나 몇몇 친구들의 죽음, 사랑하는 제자들의 죽음, 집안 어른들의 죽음, 친구 부모들의 죽음, 직장 선배들의 죽음, 사회 저명인사들의 죽음 등을 거쳐, 최근 저세상으로 어머니를 보내드리면서 나는 드디어 어렴풋하나마 나름의 사생관(死生觀)’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의 그 말이 허언(虛言)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죽음의 엄혹한 관문을 통과하신 어머니의 표정이 그토록 평화롭고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대답을 듣지 못할 줄 뻔히 아시면서도 어머니는 늘 아프지 않게 죽을 순 없을까?’라고 내게 묻곤 하셨다. 저승의 관문을 통과하신 어머니의 얼굴을 뵈며 스티브 잡스의 말을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다.

 

***

 

어머니 소천 며칠 후 영화 <레버넌트>를 보았다. 사실 이 영화는 어머니 소천 훨씬 전부터 우리 사회에 화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주연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오스카상 수상 소식이 매스미디어들을 도배하다시피하고 있는데,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기 어려웠다. 내 호기심을 자극하려고 그랬는가. 광고화면의 영화제목엔 죽음에서 돌아온 자라는 단어의 뜻까지 부기되어 있었다. 그래, 주인공 그는 어떤 표정으로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을까. 과연 그는 죽음을 초극했을까.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죽음은 어떤 표정으로 삶과 대치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휴 글래스의 가면을 쓴 디카프리오와 피츠 제랄드의 가면을 쓴 토머스 하디가 죽음을 놓고 벌이는 설원의 결투. 처절하게 아름답고 야만적인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서사시의 처음과 끝을, 인생의 의미를 찾다가 실마리를 잃어버린 이쯤에서 잘근잘근 씹어보고 싶었다.

 

19세기 개척시대 미국의 맥박이 은막 가득 출렁였다.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대자연은 갈피갈피 시퍼런 산소를 내뿜고, 그 속을 누비며 욕망의 껍질들을 벗겨내는 모피 사냥꾼들은 일렁이는 물풀 속의 송사리들처럼 가냘펐다. 사랑하는 인디언 여인은 글래스에게 혼혈의 아들을 남겨주었고, 그 세 사람을 엮는 접착제는 가슴 저릿한 사랑과 부성애였다. 더운 침을 질질 흘리며 덮어 누르는 갈색곰(grizzly bear)과의 사투에서 살아나오게 한 힘도 바로 그 부성애였을 것이고, 죽음보다 더 깊은 상처에서 벌떡 일어나게 한 복수심도 그 근원은 부성애였을 것이다. 현존하는 사랑을 삭제해버린 불구대천의 피츠 제랄드. 그를 죽여야 아들에 대한 사랑의 부채를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더운 김을 눈 쌓인 대지에 불어내는 그의 야성(野性), 인디언들의 추적을 피해 칼날처럼 저미는 급류의 한기에 몸을 맡기고 떠내려가는 초월적 강인함도 아들에 대한 사랑과 의무감으로부터 나온 것이었으리라.

 

사랑과 복수. 무엇이 되었건 그 끝은 죽음이다. 레마르크 원작의 소설이자 영화인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서는 사랑에 대한 대립어로서의 죽음을 훌륭하게 보여준다. 죽음이 없다면 사랑의 찬란함을 부각시킬 방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복수는 더 극적이고 원시적인 죽음의 근원이다. 복수는 더 큰 복수를 부르고, 그 악순환은 대개 죽음에 의해 마무리된다.

 

눈 쌓인 광야에 선혈을 뿌리며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두 사나이. 두 사람이 안고 뒹구는 모습에서 풍겨나는 분위기야 말로 그 갈색곰의 무자비한 폭력성과 등가적인 그 무엇이다. ‘사랑하는 내 아들을 죽였으니, 너는 반드시 내 손에 죽어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한 논리를 그는 몸으로 실천했을 뿐이다. 피츠 제랄드가 몇 마디 변명으로 응수해보지만, 이미 대자연의 한 부분으로 동화된 그들에게 무슨 꼼수나 변명이 필요할까. 피츠 제랄드를 죽이고 눈밭에 뻗어버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다 이루었다!’였으리라. 굳이 십자가에 매달려 수난을 받은 예수님의 말씀이었음을 확인할 필요까지도 없을 것이다. 악한 원수를 징치하여 (아들에 대한) 사랑을 이룬 행위와, ‘원수를 사랑하라시며 자신의 몸을 죽임으로써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이룬 행위는 분명 정반대이나,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하지 않던가. 하늘을 찌르는 침엽수림을 드나들며 복수를 통한 사랑의 구현’,  그 서사를 완성해간 영화 속의 주연과 조연. 그들은 정녕 대자연의 존재원리를 완성시킨 두 마리의 짐승들이었다. 산 자도 죽은 자도 그 순간만큼은 죽음을 초극한 대자연의 소품들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 얼마간 세월이 흐른 뒤 한 번 더 보고 곱씹어볼 가치가 있다고들 하는 것이리라.

 

 


복수에 나선 글래스

 

 


눈밭에 누워 복수를 꿈꾸는 글래스

 

 


복수의 화신, 글래스

 

 


피츠 제랄드 역의 톰 하디

 

 


주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6. 2. 29. 18:55

어머니를 가슴에 묻고

 

 

 


 

 

야금야금 육신을 갉아먹는 병마(病魔)

끝내 어머니는 아픔을 호소할 기력마저 상실하셨습니다. 

한동안 의연히 싸워오신 어머니도

언젠가부터 병마의 서슬에 풀이 꺾이신 듯.  

잦아드는 어머니를 뵈며 저는

병마의 무자비함에 대한 한탄이나 내뱉을 뿐이었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시고 난 뒤에야

편안해지신 어머니의 표정을 발견했습니다.

드디어 병마와의 투쟁이 끝났음을 알게 되었지요. 

 

그렇습니다. 육신의 굴레!

그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겪어야 하는 고통의 극적인 종말이 죽음인 것을,

어머니 또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그토록 애쓰고 계셨음을,

나 혼자만 몰랐던 것일까요.

그런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통해, 저는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어머니는 죽음을 두려워하신 게 아니라

정말로 '뭣 같은 고통'을 뛰어넘고 싶어 하셨을 뿐이라는 사실을.

 

넝마 같은 육신을 벗기 위해 거쳐야 했던 통과의례가

바로 고통과의 투쟁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죽음이야말로 최고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 아닌가요. 

찌질한 증오들, 숱한 이해타산들, 다양한 꼼수들을

일거에 무력화 시키는 전설의 마검(魔劒)이 바로 죽음 아닌가요.

모든 것들이 걸어가야 할 공도(公道)가 바로 죽음인 것을...

 

***

 

어머니(文姬)19281217() 충청남도 원북면 방갈리 학암포에서 외조부(문채문)와 외조모(창녕 조씨) 사이의 5남매 중 외동딸로 태어나셨습니다. 외조모는 역병(疫病)에 신음하던 동네 사람들을 구완하시다가 이른 연세에 돌아가셨고, 그 일로 어머니는 10대 초반 소학교를 중도에 폐하고 가사를 돌보게 되셨습니다. 열여섯 나던 해 10여리 떨어진 이웃 마을의 창녕 조씨 집안으로 출가, 모진 고생 끝에 자수성가하여 적지 않은 전장(田莊)을 마련하고 슬하에 41녀를 두셨습니다. 손끝으로 땅을 파셨고, 흘리는 피땀으로 그 땅을 걸게 하셨습니다. 새벽에 기상하여 다시 새벽 가까운 시각에 몸을 누이시는 고행을 통해 한 뼘 두 뼘 땅을 늘리셨고, 그 사이사이 적지 않은 자식들을 낳아 건사하셨습니다.

 

세상 이치에 밝으시고 지혜로우시어 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음 약하고 눈물 많은 남편과 어린 자녀들 때문이었을까요? 시종일관 곧은 아내이자 엄한 어머니이셨습니다. 누구보다 자기 확신이 강하셨고, 자식들의 어리석음이나 주변 사람들의 불의를 용납지 않으셨습니다. 자식들로 하여금 일생 화툿장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셨고, 담배를 입에 대지도 못하게 하시는 등 어머니의 엄한 훈육이 몇 수레의 황금보다 얼마나 더 보배로운 유산이었는지, 지금 비로소 깨닫습니다.

 

명망 있는 의사로 키워 놓으신 막내아들의 보살핌 속에 만년을 보내시고, 그의 따스한 손길 아래 눈을 감으신 어머니먼저 가신 아버지 곁으로 따라가셨으니, 이제부턴 젊은 시절의 추상같으시던원칙과 자기 확신을 내려놓으시고, 두 분이서 오순도순 옛 이야기 나누시며 명계(冥界)의 청복(淸福)을 마음껏 누리소서.

 

 

 

2016. 2. 25. 030.

 

 

불효자 백규 울면서 올림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5. 8. 5. 17:01

 


아, 옛날이여!

 

 


아, 옛날이여!

 

 

 

또 한 분이 우리 곁을 떠나셨다.
‘삶과 죽음이 한 끗 차이’라고 말들 하지만,
다리를 건너는 입장에서야 어찌 한 끗에 불과했으랴?

 

유쾌함보다는 불쾌함이
개운함보다는 찝찝함이
더 많은 세월이었으리라.
지지고 볶으며 짜오던
한 자락 삶을
베틀 째 팽개치고
이리도 홀홀히 떠나는 게
인생인 것을.

 

“90 평생이 한 나절의 꿈같았노라!”고
깨달음의 말씀을 남기시며 돌아가신
어느 어른의 마지막 순간을
지금 막 떠올려본다.

 

한 발 한 발
가벼운 걸음으로
떠나야 하리.
모질게 움켜 쥔
영욕의 짐 보따리들
하나하나 떨구며
상쾌한 맘으로 가야 하리.

 

하직인사도 없이
떠난 그 분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니...

 

 

2015. 8. 5.

백규, 한 잔 술로 그 분의 명복을 빌며

Posted by ki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