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칼럼/단상2012. 9. 29. 16:29

 

 

 

<조선학회 간친회(懇親會)장에서, 앞 줄 왼쪽이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교수)  발표 후 이자카야(居酒屋)에서 만난 일본 학자들일본 천리시의 정갈한 호텔방

일본을 어찌 할 것인가?

 

 

                                                                                                                                                               백규 

작년 늦가을, 일본 천리대학에서 열린 조선학회에 발표자로 참석했다. 첫날 저녁 이자카야의 선술집에서 몇몇 일본학자들과 어울렸다. 술잔이 오고 가던 중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한국학을 하는 일본인들은 모두 친한파(親韓派)’라고 하자 다른 학자들이 맞장구를 치는 것이었다. 좌중의 유일한 한국인인 나를 의식한 ‘외교적 언사’임을 모르진 않았지만, 그 후에도 ‘친한파’란 말의 여운은 오랫동안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가끔 ‘친한파’와 ‘지한파(知韓派)’란 용어의 같고 다름을 혼자 헤아려 보며 고개를 갸웃하곤 한다.

 

 그간 우리 언론들은 일본 정치인들에 대하여 툭하면 ‘지한파’란 용어를 갖다 붙이곤 했다. 요즈음 등장하는 정치인들이야 대개 전후(戰後) 세대로서 일본 우익(右翼)의 입맛에 맞게 ‘맞춤식으로 사육(飼育)된 전사(戰士)들’이 대부분이지만, 내가 자랄 때만 해도 나름대로 ‘선이 굵은’ 정치인들이 일본을 이끌어 왔다. 그래서 그랬던가. 그들이 정권을 잡을 때마다 우리 언론들은 그들의 이름 앞에 ‘지한파’란 용어를 붙이기 일쑤였다. 그러나 한-일 양국이 충돌하는 경우 그들이 예외 없이 보여주는 ‘몰역사적(沒歷史的) 파렴치’를 목격하며, 나는 ‘지한파’란 용어의 불순한 함축성을 깨닫게 되었다. 말하자면 ‘친한(親韓)’과 ‘지한(知韓)’은 현격하게 다른 의미를 갖고 있으며, ‘친한’이든 ‘지한’이든 적어도 일본인들과 우리 사이에는 운명적으로 넘을 수 없는 선이 있다는 사실 또한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총독부의 철권통치를 통해 ‘악랄하다’ 할 정도로 철저하게 우리를 집어삼키고자 한 일본. 우리의 국토나 해양을 이 잡듯 뒤진 일이야 만인 공지의 사실이니 그 극악함은 재삼 반복할 필요 없을 것이다. 최고로 명민한 자국 학자들을 동원하여 우리의 정신문화를 철저히 연구⋅분석해온 저들의 자취를 찾아가다 보면 정말로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 일본 어용학자들은 이 땅의 젊은 학자들을 자신들의 도구로 끌어들여 이른바 ‘식민사관’을 공고히 했고, 지금까지 우리의 정신문화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길러낸 어용학자들이나 그들의 후예를 ‘지한파’로 보는 것이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적어도 다른 나라나 민족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신까지 속속들이 알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 우리의 내면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는 ‘지한파’ 일본인들을 어떻게 우리의 친구로, 선린(善隣)으로 가까이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중국의 동북공정이나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하여 제대로 항변할 줄 아는 강단의 사학자들을 목격하기 어려운 것도 그 원초적인 씨앗이 이제 큰 나무로 자라나 우리의 땅을 뒤덮고 있다는 무서운 증거일 것이다.

 

 우리는 일본이 독도를 갖고 ‘장난을 친다’고 여긴다. 말도 안 되는 일에 억지를 부리는 그들의 꼴이 우리의 눈에는 우습게 보이기 때문일까.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역사 기록들이 꽤 많으니 걱정할 일 없다는 것일까. 그들에게 내 땅을 통째로 빼앗긴 채 40년 가까운 세월을 허송한 바로 직전의 역사는 앞 세대의 일일 뿐, 지금의 나[우리]와는 상관없다고 보기 때문일까.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살펴보라. 그들은 수시로 독도에 잽을 날리는 일을 ‘목숨을 건 도박’으로 생각한다. ‘장난을 치는 일’에 목숨을 거는 바보는 없다. ‘목숨을 건 도박’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일본이 독도를 거론할 때마다 한심하고 딱하다는 듯 ‘저 새끼들 또 지랄한다’는 반응을 보이기 일쑤다. 그냥 대꾸하지 않고 넘기다 보면 장난꾼이 제풀에 지쳐 그만 두듯 포기하리라 믿는 것이다. 순진한 한국인들은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일부 극우주의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필요 때문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짓들을 벌인다’고 말하며, 사태를 아주 낙관적으로 보기 일쑤다. 이 이상 더 ‘대책 없이 순진한 낙관주의’가 있을 수 없다. 그들이 언젠가 있을지 모르는 ‘독도대첩(獨島大捷)’을 위해 해⋅공군력을 무한 증강하고 그 칼날을 벼려 온 역사가 얼마인데, 우리들 가운데 일부 불순한 무리들은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만드는 일조차 필사적으로 막으려 한다. ‘평화’를 위해 해군기지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우리 스스로 무장해제를 해가면서 어떻게 이웃의 강도들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방어한단 말인가.

 

 최근 일본총리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란 자가 앞장서서 ‘독도 분란’와 댜오위다오(釣魚島) 분란을 야기시키고 있다. 그 덕분에 그는 꺼져가던 그의 정치생명을 되살리는 데 성공했다. 황당하기로 노다에 비해 한 술 더 뜨는 아베신조(安倍晋三)란 자는 최근 자민당의 총재로 선임되었다. 나이를 갖고 따지는 일이야말로 젊은이들이 흔히 비칭으로 사용하는 이른바 ‘꼰대’들의 잘못된 관행이겠지만, 노다는 나와 같은 1957년생(56세), 아베는 약간 위인 1954년생(59세)이다. 우리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겪은 일제시대, 대동아 전쟁, 6⋅25 동란 등을 한 번도 겪지 않고 등장하여 나라의 경영을 맡게 된 첫 세대가 바로 내 또래의 정치인들이다. 말하자면 일본이나 우리나 ‘철따구니 더럽게 없는’ 세대가 바로 우리 또래들이다. 전후에 제대로 처리되지 못한 역사의 노폐물들을 접하며 현실적 이해관계의 잣대나 들이대며 ‘불뚝거리는’ 세대가 바로 지금 나라를 경영한다는 내 또래의 정치인들이다. 제대로 된 철학도 경륜도 갖추지 못하고 감정과 투쟁의 혈기만 넘치는, 바로 그 세대다.

 

그런데, 노다의 정치생명 연장이나 아베의 총재 취임은 누구에 의해 이루어졌는가. 바로 일본 국민들에 의해서다. 그간 순진한 우리나라 언론들은 독도 분란이나 댜오위다오 분란이 일부 일본의 극우세력에 의해 야기된 일이라고 떠들어 댔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 언론들의 무책임한 선정성이나 과도한 낙관주의는 참 기네스북에 올려도 될 정도다. 지금도 노다나 아베의 재등장을 일부 극우주의자들의 작품이라고 떠들 자신이 있는가? 아니다. ‘독도도 댜오위다오도 자신들의 것이었으면’ 하는 것이 일본 국민 전체의 마음이라는 것을 이제 깨달아야 한다.

 

그런 가운데 최근 일본의 일부 지성인들이 자국의 위험한 움직임에 대하여 경고의 멘트를 날린 것은 다소 위안이 되는 일이다. 핏발 선 눈으로 미쳐 날뛰는 극우주의자들, 인간의 탈을 쓰고 차마 겉으로 말은 못하면서 ‘우리 것이었으면’ 하는 욕심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대다수 일본 국민들과 달리, 그들이 잘못 된 길을 가고 있음을 지적한 소수 지식인들은 세계 지성사에 아로새겨야 할 ‘보석 같은 존재들’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런 소수가 무슨 힘이 있는가. 과연 그들의 양심이나 양식이 거대한 집단의 흐름을 막는 보(洑)가 될 수 있다고 보는지?

 

***

 

 우리의 무책임한 낙관주의는 재빨리 청산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창을 들고 나서면 우리는 두꺼운 방패로 막은 다음 더 강한 창을 마련해야 한다. 제주에도 두어 군데 해군기지를 만들어 두 방향에서 밀려오는 적[일본과 중국]을 막아야 한다. 우리가 도서관 서고에서 찾아낸 옛 문서를 들고 아무리 흔들어도 일본의 독도 침탈은 막을 수 없다. 댜오위다오를 두고 일본과 싸움을 벌이는 중국이 싸움을 걸어올 다음 차례는 우리의 이어도다. ‘역사가 반복된다’는 경험칙만 바라보며 넋을 잃고 앉아 있을 틈이 없다. 오나라의 부차와 월나라의 구천이 남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교훈을 우리 스스로 실천하지 못한다면, 중국와 일본에 의해 당한 구한말의 치욕은 바로 오늘의 일로 재현될 수도 있다. <2012. 9. 27.>

Posted by kicho
글 - 칼럼/단상2011. 10. 16. 13:24

    
       일본에서 만난 한국학

-제 62회 조선학회(朝鮮學會) 학술발표회에 다녀와서-

                                                                                                                     조규익

지난 여름방학 중의 어느 날, 천리대학(天理大學)[일본 나라현 천리시]의 오카야마[岡山善一郞] 교수를 통해 조선학회로부터 ‘초빙발표’의 제의를 받았다. 일찍부터 조선학회의 명성을 들어왔고, 언젠가 가보고 싶었던 터라 망설임 없이 응했고, 발표논문 또한 기한보다 앞서 마무리해 보낼 수 있었다. 발표 청탁부터 원고 수납, 일정 통보, 의전(儀典) 등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치밀함은 과연 혀를 내두를 만 했다.

9월 30일 오후 3시 오사카 간사이[關西] 공항 도착. 출영 나온 두 명의 천리대 학생들과 함께 리무진 버스를 타고 천리시로 이동하는 내내 날씨는 흐려 있었다. 일본식 전통가옥들과 현대식 빌딩들이 조화를 이룬 오사카 외곽의 모습이 차분했다.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천리시. 천리교(天理敎)를 핵으로 이룩된 종교도시이기 때문일까, 일본의 중소규모 지방도시가 대부분 그러해서일까, 조용한 분위기가 약간은 이색적이었다. 간이 정류소에서 내린 우리는 다시 택시로 10여분을 이동하여 천리관광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깨끗하고 소박한 다다미방에는 녹차 응접세트가 놓인 다탁(茶卓)이 앉아있고, 작은 테라스에는 앙증스런 탁자 및 의자와 함께 양치질이 가능한 세면대가 달려 있었으며, 창밖으로는 파스텔톤의 일본 전통가옥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한 사람 정도 용납할 만한 화장실과 별도의 욕실이 참하고 청결한 자태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침실과 욕실 및 현관 사이에 마련된 작지만 넉넉한 공간에는 옷장도 있었다. 이런 점들 때문일까. 일본에서 숙박할 때마다 그들의 고집스런 주거(住居) 철학을 깨닫게 된다. 깔끔한 다다미방과 작은 공간의 앙증스런 활용.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침대보다 ‘일본적이어서’ 괜찮다는 느낌이다. 굳이 일본인의 집을 방문하지 않아도 그들의 주거방식을 일부나마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녹차로 갈증을 달래고 로비의 응접실로 내려가니 천리대학의 마츠오[松尾 勇] 교수가 우리를 반겼다. 참으로 우리말이 능숙한 젠틀맨이다. 그와 잠시 환담한 뒤 천리대학의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과 20여명의 학자들[일본 전역에서 모인 조선학회 임원들]이 모여 있는 식당으로 안내되어 저녁식사를 겸한 환영행사를 가졌다. 참석자 개개인 앞에 놓인 커다란 도시락 형태의 식판에 맥주를 곁들인 ‘조촐하면서도 깔끔한’ 식사였다. 늘 지글지글 끓는 전골이나 고기구이 혹은 생선[회/매운탕]에 익숙한 나로서는 참으로 이색적인 경험이었고, 마지막 날 밤 이자까야(いざかや)에서의 간친회(懇親會)를 빼곤 일본 체류 내내 ‘도시락 스타일’의 식사가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이튿날. 일찍 호텔을 나서 천리교에 봉직하는 젊은 직원 요코야마씨의 안내로 신전을 방문했다. 시가지에 넓게 자리 잡은 거대한 전통 일본식 건물이었다. 건물의 규모나 모습이 천리교의 중심임을 보여주는 ‘종교적 숭엄’의 미학을 구현하고 있었다. 건물의 안쪽으로 넓은 광장이 있고, 큰 길에서 신전으로 들어오는 입구 쪽에 청동색의 큰 도리이(とりい[鳥居]) 가 서 있었으며, 길 건너에 박물관[천리참고관(天理參考館)]과 천리대학이 있었다. 신전에는 많은 교인들이 나와 무릎을 꿇고 주문을 외우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사통팔달되어 있는 신전의 내부는 운동장처럼 넓었다. 목조 건물인 신전은 어느 곳이나 반들반들 빛을 내고 있었다. 복도를 통해 걷고 있는데, 어린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일군(一群)의 교인들이 손에 큰 벙어리장갑 같은 것을 끼고 바닥을 닦으며 무릎걸음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입으로 주문을 외우며 바닥을 닦아나가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의식으로 ‘근행(勤行?)’이라는 , 요코야마 씨의 설명이었다. 종교의 의식이야 원래 합리(合理)를 초월하는 것이지만, 이런 근행이야말로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문을 외우며 ‘마음의 때를 닦아내듯’ 신전의 내부를 닦는 일. 따로 품을 들여 청소할 필요도 없고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동시에 도모할 수 있으니, 그 아니 합리적인가.

요코야마 씨의 설명에 의하면 천리교는 1838년 10월 26일 교조 나카야마 미키에게 내린 ‘어버이 천리왕님’의 계시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버이 신(神)’은 인간들이 서로 도우며 즐겁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함께 즐기려는 마음에서 인간을 창조했으며, 그런 이유로 ‘즐거운 삶’이야말로 인간생활의 목표라는 것이다. 신전 중앙에는 신이 인간을 창조한 지점인 ‘터전[지바]’이 있는데, 이곳에서 세상의 구제를 위한 근행이 올려 진다고 했다. 그들은 그곳을 온 세상 사람들의 ‘으뜸 고향’이라 여기고 있었다.

신전을 포함하고 있는 천리교 본부는 정기적으로 각종 행사나 모임을 갖는 한편 ‘즐거운 삶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강습회 또한 수시로 열린다고 했다. 앞서 말한 ‘터전’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를 ‘본고장’이라 하며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각종 교육시설들이 완비되어 있었으며, 종합병원을 비롯한 사회복지시설, 도서관이나 박물관 등의 문화시설들도 갖추어져 있었다. 시내를 돌아보면 ‘○○詰所’나 ‘○○母屋’ 등의 간판이 붙은 건물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들이 바로 신자들의 숙소라 했다. 누구든 원하면 싼값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란다.

신전을 관람한 후 들른 참고관 즉 박물관은 엄청난 보물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박물관의 정확한 명칭은 ‘세계 생활문화와 고고미술 박물관’이었다. 아이누, 한반도, 중국ㆍ대만, 발리, 보르네오, 인도, 아시아 전역의 강과 하천변, 멕시코와 과테말라, 파푸아 뉴기니, 일본인들의 아메리카 이민과 천리교 전도, 일본의 서민생활 등의 생활문화와 한국ㆍ중국을 비롯한 세계의 고고미술품들. 주마간산 식으로 훑어보기에도 벅찬 내용이었고, 참으로 부러운 컬렉션이었다. 수십만 점의 소장품 가운데 3천 여 점 만 전시되고 있다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 했다. 마침 우리나라의 석조유물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다. 상당수는 국내 박물관에서 볼 수 없었던 진귀(珍貴)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과연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되었을까.

***

10월 1일 오후 1시에 시작된 학회는 다음 날 오후 5시에야 마무리되었다. 하루 반에 걸쳐 28편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나를 비롯 한국에서 초청된 3명의 발표자와 일본에서 유학하거나 교수로 있는 한국인 등 12명을 빼고는 모두 일본의 학자들이었다. 내가 주목한 것은 발표논문의 수가 아니었다. 그들의 진지한 태도와 토론의 열기가 조선학회에 대하여 그간 지녀오던 호기심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큰 깨달음으로 발효(醱酵)된 점이 나 자신에겐 큰 수확이었다. 사실 ‘일본인들이 한국학을 하면 얼마나 하랴?’라는 것이 평소의 ‘오만했던’ 내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 땅에서 그 땅의 사람들이 그 땅의 말로’ 한국학을 하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한국말로 하는 한국학’과 다른 또 하나의 한국학이 일본에서 피어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그 깨달음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는 또 하나의 자각으로 이어졌다. 우리가 ‘솔직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조선학이란 바로 ‘한국어문학과 역사’였다. 1일 저녁의 간친회 자리에서 일본의 학자들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지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조선학회에 참여하여 다까하시 도오루나 오구라 신뻬이 같은 1세대 한국학 연구자들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조선학회의 바탕이 된 그 분들의 후예들을 만나보며 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는 요지의 발언이었다. 그들의 ‘우리말과 문학, 역사에 대한 연구’가 식민지 경영의 일환으로 이 땅에서 행해진 것이며 분야에 따라 왜곡의 정치적 의도 또한 드러내긴 했으나, 그것들이 우리를 자극하여 우리 학자들로 하여금 어문학이나 역사의 연구에 매진토록 한 것도 사실이다. 이미 메이지 유신 때부터 서구로부터 근대학문의 방법을 익힌 그들. 최소한 반세기 이상 우리를 앞서 간 그들이었다. 우리의 일부 학자들을 발분망식(發憤忘食)하게 만든 그들의 공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억설(臆說)일까.

나는 일본 학자들의 학술발표를 들으며 영국이나 미국 등 서구의 학자들을 생각해보았다. 어쩌면 그들도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영어영문학회’ 등 그들의 언어와 문학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토론하는 학술대회를 참관할 것이다. 한국인들이 한국어로 영문학을 연구하고 발표하는 내용을 보고 들으며 무슨 느낌을 가질까. ‘놀고 있네!’라고 할까?, 아니면 ‘어, 이 사람들 봐라. 제법인데?’라고 할까?, 아니면 ‘아, 놀랍구나!’라고 할까? 나는 딱딱 끊어지는 어투로 이어나가는 일본인들의 발표를 들으며 세 번 째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아, 그곳에서 그곳 사람들이 그곳의 말로 새로운 한국학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학자이니 당신들이 하는 한국학의 정확성을 검증해보아야겠소!’라는 오만한 객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별개의 패러다임이 그곳에 살아서 통용되고 있었다. ‘한국이 한국어문학의 종주국이고 세계의 중심이며 으뜸’이라는 생각은 어쩜 오만한 편견일 수 있음을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문학연구의 핵심은 작품의 해석 작업이다. 무슨 언어로 해석하든 그 언어 사용자들이 공감할만한 논리적 정합성(整合性)만 갖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애당초 정답이 없는 문제를 놓고 변방에 대한 중심부의 권위를 어떻게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점에서 나는 그동안 한국학을 한다는 외국인들에 대하여 가당찮은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스스로 탈식민(脫植民)을 주장하면서 식민의 논리에 갇혀버린 셈이니, 이보다 더 우스운 꼴이 어디에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국의 학회, 특히 우리의 어문학을 대표하는 국어국문학회를 떠올려 보았다. 나는 최근 2년간 연속 그 학회에서 논문을 발표했다. 2년 전 경희대에서 발표할 땐 드넓은 발표장에 10명의 청중[그나마 경희대 교수들이 동원한 학생들로 보였다!]이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허공에 누군가의 얼굴을 그려놓고 발표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발표가 끝나고 어느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하거나 묻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발표를 끝내고 연단을 내려오며 ‘다시는 학회에 오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지만, 또 다시 때가 되자 습관적으로 역시나 그런 텅 빈 회의장에 가고 말았다. ‘혹시나’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공부를 시작하던 80년대의 국어국문학회 학술발표장엔 회원들이 바글바글 끓어 넘쳤다. 열기가 대단했다. 김동욱, 장덕순, 김석하, 황패강, 이기문 선생 등 원로들이 맨 앞자리에 좌정하여 분위기를 주도했다. 날카로운 지적과 질책이 이어지고, 발표자들은 적절한 대응으로 의기양양해 하거나 몸 둘 바를 모르기도 했다. 학문이 세대 간에 전승되어 내리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인터넷 덕분인가, 아니면 인터넷의 독성 때문인가. 이제 학술발표회장에서 후학들을 질책하는 원로들이 사라지고, 아예 학술발표회장에 발품 팔아가며 갈 필요조차 없다는 듯 후학들도 사라졌다. 발표회가 끝나자마자 즉각 인터넷으로 내용이 배포될 텐데, 무엇하러 시간 죽여 가며 차비 죽여 가며 발표회장을 찾을 것인가. 말인즉슨 그럴 듯하지만, 학문이 전승되는 세대 간의 통로가 막히고 생명이 끊어진 곳에 유령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문화의 사막화 현상’은 어찌 할 것인가.

물론 장르별로 분화된 학회들이 즐비하고, 그곳에서 열띤 토론들이 이루어진다고 항변할 수 있고, 또 얼마간 그것은 사실이다. 나 자신도 일본에 하나 뿐인 조선학회와 한국의 여러 학회들을 단순 비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이 지긋한 일본의 학자들이 어눌한 한국말로 한국학 관계 논문들을 진지하게 발표한 뒤 젊은 학자들이 따라붙어 묻고, 반대로 젊은 학자들이 일본어로 진지하게 발표한 뒤 고명한 교수들이 세세히 질문하고 충고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함보다는 두려움을 느꼈다면 내 느낌이 지나친 것인가.

***

허름하지만 낭만이 배어있는 이자까야. 그곳에서 어울린 일본의 조선학자들은 어쨌든 친한파(親韓派)들이었다. 그들 스스로 한국에서의 추억과 한국 음식을 떠올리며, 힘주어 한국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일본에서 한국의 주가가 올라가고는 있으나, 어쨌든 마이너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세월을 합리화하는 심리적 기제(機制)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학을 대하는 그들의 진지하고 치밀한 태도야말로 무슨 대상을 연구하든 학자로서 지녀야 할 본령(本領)이라는 점에서 존중될 필요가 있다.

일본의 학자들과 현지에서 함께 한 3박4일이 내겐 깨달음의 기회였다.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만 죽이다가는 특출하던 일제시대 일본의 한국학자들이 그랬듯 그 후예들도 질적 양적인 면에서 조만간 우리를 추월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을 갖고 돌아왔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운 요즈음이다.



 <천리관광호텔의 모습>
 

 <호텔 테라스의 앙증스런 배치, 그리고 창밖 풍경>

 <호텔 방.외출했다 돌아오니 이불이 곱게 깔려 있었다!>

 <저녁식사 후 오카야마 교수,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 백규>

 <도착하여 저녁식사 후 들른 이자까야 논따로>

 <이자까야 논따로에 걸려 있는 오래 된 시계. 명치시대의 것으로 현재도 살아 있음>

 <천리교 신전>

 <천리교 신전에 걸린 상징문양>

 <도리이를 통해서 바라본 천리교 신전>

 <천리 참고관[박물관]>

 <호텔 창 밖으로 내다 보이는 주택가>

 <천리대학 건물>

 <천리대학 강의동 앞에서>

 <천리대학 구내식당에서 마사히코 이부리 총장>

 <천리대학 구내식당에서 마츠오 교수>

 <천리참고관[박물관]>

 <발표회가 열린 후루사토 회관>

 <간친회장>

 <간친회장에서 오카야마 교수, 오카야마 카이미, 백규>

 <간친회장에서 후지모토 유키오 교수 등 일본학자들>

 <첫날 발표를 끝내고 이자까야에서 일본의 학자들과>

 <이자까야에서 오카야마 교수와>

  <첫날 발표 후 들른 이자까야의 메뉴들>
 

 <학회 접수처>

 <발표회장>

 <이광수 관련 논문을 발표하는 하다노 교수>

 <첫날 발표 후 기념촬영을 준비하는 모습>

 <천리대학 강의동>

 <발표하는 동경대학원의 이현준 선생>

 <천리시청의 특이한 모양>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

  <이자까야의 안주들>

  <뒷풀이 자리에서 천리대학의 교수들과>

  <뒷풀이자리에서 천리대학의 모리야마, 김선미 교수등>

 <뒷풀이 자리에서 마츠오 교수와 백규>

  <호텔의 아침식사>

 <천리관광호텔 근처의 고서점>

 <천리관광호텔 근처의 고서점에서, 백규>

  <이자까야의 벽에 붙은 가부끼 배우의 모습>

<학회 뒷풀이가 있었던 이자까야의 벽에 붙은 기린맥주 포스터와 술 메뉴들>
 

    <학회 뒷풀이가 있었던 이자까야의 벽에 달아맨 인형>

 <이자까야 내부의 벽에 붙은 각종 주류 및 음식 메뉴들>

<천리 시내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건물>

 <천리시 도처에서 볼 수 있는 母屋>

<천리시 도처에서 목격되는 신자 숙소인 쯔메쇼>

<오사카 외곽에서 간사이 공항으로 건너가는 다리>
 

<간사이 공항에서 인천으로 떠날 ANA 기가 이륙 준비를 하고 있다>

 

Posted by kicho
카테고리 없음2007. 6. 24. 19:36
 퍼옴)국어국문학회 대표이사 선출장면을 보며...


                                                                      김사량(가명)


 집안의 일을 밖에 밖에 나와 이러쿵저러쿵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고금동서의 양식(良識)에 속하는 일이긴 하지만, 공동체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한 마디 안할 수 없다.

                    ***

 어떤 분들이 찍어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우편투표에 의해 지역이사에 선임되었다는 통보와 함께 전공이사 12명을 대상으로 평의원들과 이사들의 합동회의에서 대표이사를 선출하니 ‘뜻 있는 이들’은 ‘학회 운영 소견문’(이른바 출마의 뜻)을 학회에 보내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 시점부터 나는 누가 출마하는가, 누가 대표이사에 선임되는가를 예의주시해왔다.


 회원 수 2,000명이 넘는 거대학회 국어국문학회. 그러나 총회 등의 행사에는 고작 20명 남짓의 회원만 참석할 뿐이다. 지금껏 특정대학 출신들이 모든 직책을 도맡다시피 해왔고, 누구 말대로 ‘무슨 수’를 부렸는지는 모르지만 이사들의 대다수를 그 쪽 동네에서 독점하다시피 해온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걱정되는 건 학회의 존망이었다. 특정 동네에 독점된 ‘학문권력’. ‘학자로서의 걱정과 자존심’이 뜻 있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는 요즈음이다. 합동회의 한 주일 전 당도한 공문을 보니 조 아무개 교수 혼자 출마한 게 아닌가. 혹시 ‘저들에게 무슨 꼼수가 있나?’ 좀 의아스러웠다. 출마하겠다고 소문이 돌고 있던 ‘그 쪽 동네의 어떤 분’은 왜 안 나온 것일까.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그 쪽 동네 사람’이 아닌 조 아무개 교수가 출마한 일은 잘 된 일로 보였다. 그가 보내온 공약 사항들이 이행하기 쉽지 않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무언가 새로운 바람이 불어올 조짐으로 생각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대표이사를 선임하는 이사회 날. 현장에 가보니 과연 ‘그 쪽 동네 사람들’이 방 안 그득 포진하고 있었다. 평의원회 의장이 일어서더니 2명 이상 출마해야 출마자를 대상으로 투표를 하는데, 1명만 출마했으므로 모든 전공이사를 대상으로 투표한다고 했다. 더구나 그 자리 참석 여부에 상관없이 모든 전공이사들은 피선거권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참으로 해괴한 규정이었다. 투표함의 뚜껑이 열린 다음, 정작 ‘학회운영 소견문’을 제출하고 출마를 천명한 조 아무개 교수를 제치고 출마의 소문만 나돌던 사람이 몇 표 차이로 당선된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 쪽 동네 사람들’의 전략(?)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조 아무개 교수가 출마한 사실을 안 다음 아예 출마를 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아예 ‘나가리’시켜 버렸고, 합동회의의 현장에서 표로 승부를 가려버린 것이었다. 정작 당선자는 현장에 나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말이다. 당선자가 현장에 나오지 않은 것도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과를 미리 예측한 그들이 ‘당당하게 출마한’ 조 아무개 교수와 마주치지 않게 하려고 배려한 결과였을까. ‘악법도 법’이니 따라야 한다지만, 상식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이사들은 학회 운영에 관한 그의 소견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심지어 그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표를 던져 그를 대표로 뽑은 셈이었다. 이른바 한국의 '국어국문학'을 대표한다는 분들의 의식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결과를 납득할 수는 없었지만, 오히려 나는 버거운 공약을 수행하느라 고생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조 아무개 교수의 마음이 어쩌면 홀가분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구나 누가 대표이사가 되던 학회는 ‘이렇게 변신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조 아무개 교수는 제시한 셈이니, 그 일만으로도 그의 임무는 다 한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깨달은, 가장 중요한 점 하나는 조 아무개 교수가 ‘당당하게 졌다’는 사실이다. 비록 소수파에서 필마단기(?)로 전장에 나섰지만, ‘그 쪽 동네 사람들’ 가운데 단 몇 분이라도 그에게 표를 던져주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했다. 투표의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그 쪽 동네’의 한 원로학자는 ‘짰구먼!’이라고 탄식의 말씀을 내뱉으셨다. 그의 ‘떳떳함’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

 다음은 조 아무개 교수가 제시한 공약 전문이다. 학회에서 이메일로 전송해준 내용이다. 학회원 모두 함께 새겨들어야 할 내용인 듯 하여 이곳에 붙인다.



학회의 운영에 관한 소견

                                                                         

 존경하는 평의원님들과 이사 및 감사님들께 학회의 운영에 관한 소견 몇 가지를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간 평의원님들과 역대 집행부의 노력으로 학회의 규모가 현재와 같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재 대부분의 회원들은 학회를 외면하고 있으며, 그 결과 학회는 적막강산으로 변했습니다. 급격히 바뀌어가는 시절 탓만을 하고 있기에는 우리의 현실이 너무도 절박합니다. 발 빠르게 움직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 이런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민첩하게 대응해야 학회는 되살아날 수 있습니다. 구성원들의 합의와 단결을 바탕으로 학회의 발전적 미래를 가꾸어 나가는 것이 새 대표의 사명이라고 봅니다. 이를 위한 몇 가지 방안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것을 ‘국어국문학회 중흥 프로젝트’로 부르고자 합니다.  


 첫째, 학회의 재무구조를 건실하게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자세한 것은 셋째 항 참조) 회원들의 참여 부진과 회비 미납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문제로서 학회의 존립에 큰 장애요인입니다. 또한 이사(혹은 대표이사) 선출 방식과 연계시켜 생각할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합니다. 현실적으로 학술진흥재단 등재(후보) 논문집들이 많이 늘어난 지금 굳이 <<국어국문학>>에 ‘힘들여’ 논문을 실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우선 <<국어국문학>>의 위상을 높여서 회원들이 ‘가중점수’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게재 논문이 가중점수만 받게 된다면, 학회 및 학회지에 관한 회원들의 관심도 자연스레 높아지리라 봅니다.(자세한 것은 둘째 항 참조) 그와 함께 홈페이지를 대대적으로 개편·보수해야 합니다. 일단 모든 회원들을 등록하게 하고 기존의 서비스 외에 ‘논문 투고, 심사업무, 이사선출’ 등을 홈페이지에서 일괄 처리할 수 있도록 그 기능을 대폭 확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회비 납부를 홈페이지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고치는 것도 적극 고려되어야 할 사항입니다. 평생회비를 약간 낮추어서라도 많은 회원들을 평생회원으로 전환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아울러 총회에 참석한 모든 회원들의 직접 투표에 의해 대표이사가 선출되는 방향으로 평의원회 및 이사회와 긴밀히 협의해 나가겠습니다. 대표이사 선출에 많은 회원들이 참여하여 총회를 대통합의 ‘잔치판’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회비 미납의 문제도 어느 정도 해소되리라 보기 때문입니다.


 둘째, <<국어국문학>>은 ‘세계 최고·최대’의 한국어문학 종합 학술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이것을 세계 학술 시장에 상장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대학들은 예컨대 ‘朝鮮學會’나 그 학술지인 <<朝鮮學報>>, 혹은 ‘Association For Asian Studies(AAS ; 아시아 학회)’나 그 학술지인 ‘The Journal of Asian Studies(JAS)’ 등을 국제학회 혹은 국제학술지로 선정하여 높은 가중 점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질적인 면에서 이들보다 못할 이유가 결코 없음에도, <<국어국문학>>은 아직 한국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단번에 국제학회의 반열로 올라서기가 어렵다면 이런 학회들과의 제휴를 통해서라도 국어국문학회를 국제 학문시장에 상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안을 실천해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는 이들 학회와 연합하여 국제학술대회를 여는 일이고, 두 번째는 단계적으로 <<국어국문학>>을 국문학술지와 영문학술지로 이원화 하여 발행하고[예컨대 1년에 한 번은 국문, 한 번은 영문 식으로], 해외의 저명 한국어문학자들을 편집위원으로 영입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국제화 시키는 방법입니다. 특히 후자가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기존의 ‘국어국문학회’를 가칭 ‘국제한국어문학회(Association For Korean Language & Literature ; AKLL)’로 확대·전환하고, 그 안에서 국내 파트(국문 학술지)와 국제 파트(영어 학술지)로 병행·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국제학회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충실한 영어학술지를 만드는 일, 기존의 국제학회들과 제휴하는 일 등이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빠른 길입니다. 과도기적인 조치로 ‘한국AAS'와 협력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한국을 잘 아는 로버트 버스웰(R. E. Buswell) UCLA 교수가 올해 AAS의 회장으로 추대된 만큼 국어국문학의 국제화에 호기를 맞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새 대표의 임기 안에 충분히 성사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셋째, 평의원회 및 이사회와의 협의를 거쳐 현재 임의단체인 국어국문학회를 비영리 사단법인으로 만드는 일에 착수하겠습니다. 저는 이미 온지학회를 사단법인으로 만든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사단법인으로 만들어야 학회 자체의 사업을 벌일 수 있고, 회원들 또한 주인의식을 갖고 갖가지 사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회원 혹은 외부인사들 가운데 매년 일정한 돈을 출연할 수 있는 분들을 위촉하여 별도의 재정지원이사회를 결성하는 한편, 학회 차원에서 인재들을 결집·배분·지원하여 각종 학술 진흥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도록 주선·관리하겠습니다. 사단법인으로 만들어야 정부에 기탁되는 기업체들의 후원금을 지속적으로 지원받을 수 있고, 각종 사업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현재 100% 회비만으로 운영되는 학회의 재정에 결정적인 전기가 마련되리라 봅니다. 학회를 사단법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정한 넓이의 공간이 필요한데, 현재 비어있는 학회의 사무실 정도면 충분합니다. 저는 그곳을 회원들을 위한 ‘국어국문학자료센터’로 가꾸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넷째, 지방화 시대가 뿌리를 내리고 있음에도 학회는 오히려 서울이나 일부 대학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는 문제를 고쳐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지방이나 여타 대학의 학자들이 학회에 참여하지 않는 것도 상당 부분 학회가 안고 있는 시대 역행의 폐쇄성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런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이사를 임명할 때 학교와 지역이 골고루 안배되어야 할 것입니다. 현재 상당수의 회원들이 갖고 있는 소외감과 냉소주의를 불식할 수만 있다면, 회원들의 참여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리라 봅니다. 이와 함께 장기적으로는 지역별 분회를 두고자 합니다. 지역단위로 실질적인 활동을 벌이게 하고, 중앙의 학회는 그런 활동들을 통합하는 체제로 개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대 영남지회, 호남지회, 기호지회 등으로 나누어 각 지회의 운영진(지회장·총무이사·연구이사·사업이사 등)이 거점 대학(들)을 중심으로 활동을 벌인 다음, 연 1회 정도 중앙에서 만나 전체 학회를 갖는 방식으로 운영상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잘만 하면 각 지역에 맞는 정서들이 지회에서 수렴될 수 있고, 그것들은 중앙의 총회에서 상승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국어국문학회는 회원 수 2000명이 넘는 매머드 학회로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학회 창립 이후 반세기가 넘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회원들의 의식변화를 본격적으로 조사하여 학회 발전의 핵심 지표로 활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만약 대표가 된다면, 새 집행부 주도로 치밀하고 유용한 설문조사와 분석을 실시하도록 하겠습니다. ‘국어국문학회 회원들의 의식변화와 학회발전방향’(가제)이란 조사 보고서를 작성, 6개월 이내에 학회지와 언론매체를 통해 발표하고 학회의 정책 수립에 반영하겠습니다. 이와 함께 전국 순회에 나서서 회원들과 의견을 나누고, 그 결과를 3개월 이내에 평의원회와 이사회에 보고토록 하겠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몇 가지 사실들은 결코 간단한 문제들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미루어 둘 수 있는 일들도 아닙니다. 우리가 지혜와 힘만 모은다면 의외로 쉽게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조속히 추진하여 국어국문학회를 새로운 궤도에 올려놓고 싶은 것이 제 포부입니다. 존경하는 평의원님들과 이사님들의 많은 지도와 편달을 부탁드리오며 현명하신 판단을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2007. 6. 9.



                    국어국문학회  전공이사  조 아무개 드림


Posted by kicho